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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공세력 개별출마로 갈듯

    5공 인사의 정치참여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영남지방을 나들이중인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5공 신당’ 창당 가능성을 부인했다.하지만 개별 출마를 통한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은 있다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전 전대통령을 수행중인 정호용(鄭鎬溶)전의원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도와야 하며 이 점에서 전 전대통령도 생각이 같다”고 말해 5공이 국민회의에 우호적임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영남권의 지역정서를 감안할 때 5공세력의 국민회의 입당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선거를 앞두고 정치상황을 보아가며 이들은 특정정당 입당이나 무소속 출마 등의 가능성을 타진할것으로 보인다.장세동(張世東)전안기부장도 “5공이 역사의 방관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그러나 5공에 절대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간접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16대 총선을 준비중인 인사로는 포항북갑 출마를 선언한 허화평(許和平)전의원 등 10여명에 이르는 것을 알려졌다.가운데 7∼8명은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 전대통령 측근의주장이다. 장 전안기부장은 “서울 송파갑 재선 출마는 내가 나서면 마치 5공 세력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비쳐 포기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16대 불출마 단언은 유보했다.지역구로는 대구 중구 등이 지목되고 있다.정호용 전의원도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그는 10일 “장세동,허삼수(許三守)씨와 뜻이 맞는 정당이 생긴다면 출마하겠다”고 말했다.허삼수 전의원도 “나간다는 이야기도,나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않겠다”며 여운을 남겼다.지역구는 정 전의원의경우 대구 서구갑,허 전의원은 부산 중·동이 거론된다.전 전대통령의 동생인 경환(敬煥)씨도 고향인 합천·거창에서 총선 출마를 위해 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이종구(李鍾九)전국방장관(대구 동구갑),최열곤(崔烈坤)전서울시교육감(성주·고령),이치호(李致浩)전의원(대구 수성을),오일랑(吳一郞)전청와대경호실안전처장(고창),오한구(吳漢九)전의원(영주),김길홍(金吉弘)전의원(안동갑),김길부(金吉夫)전병무청장(대구 북갑) 등도 출사표를 던질 움직임이다. 추승호기자 chu@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통일문제연구소장’백기완’

    사자의 갈귀를 연상케 하는 삐죽 솟은 머리칼에 검은 두루마기.지난 87,92년 대통령선거에서 서릿발같은 유세로 강한 인상을 풍겼던 ‘민중운동가’백기완의 모습은 한결같다.마치 통일의 한 우물을 파온 그의 일관된 삶을 보는 것 같다. 수많은 집회장에서 때론 포효하며 때론 할머니같은 구수한 얘기로 ‘성난눈동자’의 용기를 북돋워 주던 그가 정작 우리 문화운동의 선구자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농민·빈민운동 등 재야운동을 통해 ‘외국어 내몰기’ ‘우리 춤사위 연구’ ‘전래 민담 발굴’등에 앞장섰고 시집 3권을 비롯 다양한 저술활동을 펴왔다. 그가 펴낸 책중 지난 79년 나온 수상록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시인사)는 희한한 기록을 갖고 있다.출판사의 인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발간 24시간만에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던 것이다.물론 저자도 끌려갔다. “지레 겁을 먹은 인쇄소에서 신고를 한 겁니다.중앙정보부에서 ‘왜 이런책을 냈냐’고 묻길래 ‘평소 내 생각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대답했죠. 신문에 신간안내나 서평은 커녕 광고조차 못내고 중앙정보부에서 전량을 회수했습니다”. ‘자옥휘’(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이 줄여서 부르던 책이름)에 어떤 내용이 담겼길래 이런 소동이 벌어졌을까. 이 책은 72년∼79년 ‘씨알의 소리’에 연재한 것을 묶은 것으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다.글마다 나오는 “담아…”는 백씨의 딸인 원담·록담·현담을 일컫는 말이다.딸에게 ‘참된 여인상’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모순을 깨뜨리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담아,내 딸 삼형제부터 나서거라! 시애비의 재산이나 늘려줄 맏며느리의 우상부터 때려부숴라.일하는 일꾼의 알통의 미학이 아니라 돈의 조화물인 고른 영양상태의 퇴폐적 아름다움 따위엔 관상볼 것 없이 먹칠을 해 버려라!…” 부잣집 맏며느리에 집약된 허위의식과 가진 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꼬집는 대목이다.비슷한 시대에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이영희,창작과 비평사)나 ‘우상과 이성’(〃)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했다면 ‘자옥휘’는 쉽고명료한 문장과 살갗에 다가오는 내용으로 감동을 주었다.주입식 교육에 길러져온 대학 ‘새내기’(백기완소장이 만든 말)들이 껍데기를 벗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건전한 세계관,노동자·농민에 대한 사랑,분단을 넘어선 자주통일의 문제 등이 담겨져 있다.그리고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발에서 뿜어내는 소리였기에 더욱 호소력이 컸다. 책이 아니더라도 ‘반골 기질’로 일관된 백기완소장의 삶 자체는 가진 자의 눈에는 가시였다.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민중·통일운동의 전선을 누볐다.수많은 시위현장을 뛰어다니며 선동성 강한 연설로 젊은이들의 혈기를지피던 걸음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덮쳤다. 12.12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 군부에 끌려간 80년,참혹한 고문을 받았다.82kg이나 나가던 몸무게가 43kg으로 준 것도 이 무렵.고문 후유증으로 똥오줌을 싸며 물 한모금 마셔도 토해내던 때 ‘감옥 천장을 보며 입으로 쓴’ 시를모아 낸 시집이 ‘젊은 날’(80년 비매품으로 냈다가 90년 도서출판 민족통일에서 간행)이다. “모이면/논의하고 뽑아대고/바람처럼번개처럼/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좋았다…그렇다/백번을 세월에 깎여도 기완아/너는 늙을 수가 없구나/군사독재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들/나는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구르는 마루바닥에/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표제시 ‘젊은 날’ 일부) 고문에 몸은 허물어졌지만 기개는 꿋꿋했다.망가진 몸을 추스르고 달구질하며 15촉 전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외로운 독방에서 창너머 별을 보며 남몰래 외워둔 시들이다. “강원도 덕소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찾아온 전채린교수(충북대 불문학)가사비를 털어 병수발하는데 보태라고 주면서 ‘옥중에서 쓴 시들을 시집으로모아 아는 사람들만 돌려보게 출판하자’고 해서 비매품으로 낸 시집이 ‘젊은 날’입니다.나중에 시집을 강매(?)한 돈을 또 주더군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도 이 시집에 들어있었다. 이후 민주·노동운동가들도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등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대학가의 베스트셀러’이자 ‘서점의 금서’였던 ‘자옥휘’도 92년 한울사에서 증보판으로 당당히 얼굴을 내밀었다.그리고 ‘자옥휘’의 진솔한 목소리는 문화·노동운동판을 거친 딸 원담씨가 95년 ‘색동저고리 입고 꼬까신 신고’(한울)라는 책으로 자신의 딸에게 대물림하였다. 하지만 백기완소장의 ‘외딴 생활’은 여전하다.비록 “살인적 고문보다는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이 더 무섭다”고 쓸쓸한 심정을 밝혔지만 그의 초심(初心)은 변하지 않았다. '백기완' 그의 길●33년 황해도 은율 출생●46년 월남●53년 자진녹화대운동을 시작으로 농민·빈민·통일·민중운동 전념●71년 백범사상연구소 건립.‘항일민족론’(사상계)●84년 통일문제연구소 건립●86년 첫 시집 ‘이제 때는 왔다’(풀빛)●87년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 출마.‘통일이냐 반통일이냐’(형성사)●89년 시집 ‘백두산 천지’(민족통일)●90년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민족통일).시집 ‘젊은 날’(민족통일)●91년 ‘이심이 이야기’(민족통일)●92년 대선 출마.‘나도 한때 사랑해본 놈 아니요’(아침)●94년 ‘장산곶매 이야기’(우등불)李鍾壽
  • 기고-’국민과의 대화’를 보고/이호철 소설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1년 만에,그리고 지난해 5월 이후 꼭 9개월 만에세번째로 진행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짧았다.대강 그렇게 되리라고 짐작했지만,지난 1년간의 시정(施政) 전반을골고루 짚어내자니 망라적(網羅的)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일부 여론의 지적대로 ‘대화’인지 ‘홍보’인지 알쏭달쏭했다.하지만 대국적으로는 여전히 신선했다.국정의 책임자가 정확히 1시간 45분 동안 방송 3사를 통해 국민 앞에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저렇게 직접 나와 앉아서,지난 1년간의‘이 나라 살림살이’를 이 나라 가장(家長)으로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속속들이 밝힌다! 물론 속속들이라는 것은 어느 한도껏의 이야기지만,아아 좋고 말고다.세상은 과연 이만큼 좋아졌구나,이것이 솔직하고도 단적인 느낌이었다.대통령과마주 앉은 방청석을 꽉 메운 남녀노소뿐 아니라,지방 곳곳에서 질문하는 한사람 한 사람의 표정들도 필자는 유심히 화면 안으로 들여다 보았는데,거의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요,즐거운,그리고 그지없이 자연스러운 평상인들의 분위기였다.추호나마 겁 먹거나 억눌린 얼굴들이 아니었다. 필자는 1시간 45분 동안 눈길은 그대로 텔레비전 화면에다 꼬나박은 채,51년 임시 수도 부산의 충무동 로터리인가에서 李承晩 초대 대통령이 느릿느릿한 꺾쉰 목소리로 연설하던 것을 성능 안 좋은 라디오로 듣던 일과,그뒤 정부 당국의 홍보물 같은 데 실려 있던 그 현장의 흐릿한 흑백사진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뿐인가,강직한 군복에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로 공식 행사장에서 공식적으로 연설을 하거나,무슨무슨 선포를 일삼던 제3대박정희 대통령,그때마다 늘 무시무시했던 일도 연달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 다음,전두환,노태우,김영삼씨로 이어오면서,구중궁궐 속 같은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의 ‘키 높이’가 차츰차츰 세월 따라 알게 모르게 보통사람 ‘키 높이’로 작아져 오더니,아아,이제는 얼씨구나! 나라 살림을 통틀어서 맡은 대통령이라는 사람과,여염집 가장이거나 한창 배우는 학생 아이들까지도,그리고 농민 기업인 근로자 누구라도,저렇게 무릎을맞대듯이 마주앉아지난 1년간의 나라 살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기탄없이 의견을 털어놓을 만큼 되었구나.불과 두 시간이니 그 나누는 이야기 알맹이라는 것이야 뻔할 뻔자,겉 핥기가 되기가 십상이겠지만,이만만 해도 이게 어디인가.지나간 50년간을 거슬러 돌아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필자 자신도 이미 정부 홍보차원으로 어느 한 가닥 가세하고 있는 꼴은 아닌지,스스로 일말의 쑥스러움섞어 자신을 돌아보게 되거니와,일언이폐지하여 바로 이만큼 세월은 흘렀고세상은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거듭 이야기거니와 두 시간은 너무 짧았다.모든 문제가 망라되어제기되었다는 데에 뜻이 있을까,어느 하나,진짜로 궁금한 문제들에 대해 아주아주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 한 것 같았다.대강 그런 정도 수준의‘국민과의 대화’였다. 다만,필자도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어서 더 그런 쪽이겠지만,거의 모든 문제가 망라되어 나온 데 비해서는 정작 새 정부 들어서서 지난 1년간에 가장활기 찼던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북한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미국,일본,중국 등 금년 상반기까지 원체 미묘하게 걸려있는 때인지라,그 ‘국민과의 대화’ 수준으로 함부로 다루기는 나름대로 자제했음직도 하였겠다고 짐작도 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 (25)

    ◆친일 미술가 金仁承·景承형제 작년 11월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있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 “해방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면서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서울 종묘공원의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등을 들었다. 김경승(金景承,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유명한 조각가이다.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해방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 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중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난 김인승·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이 학교는 일본인 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다. 이들 형제 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재학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봉축기념전’에 출품,입선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 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부문의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따라서 선전에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1940년 선전의추천작가가 되었다.이 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사람 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1939년 ‘S씨상’(흉상),40년 ‘목동’(전신상)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관변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의 반원인 조선여성이 전시하 후방에서근로봉사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다섯 점 모두가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두 사람은 또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활동하였다.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다.두 사람은 각각서양화부(김인승),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참조)를제작하였다.이 그림은 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지원병훈련소장,총력연맹 사무국 총장,경기도지사,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해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병사들의 행진모습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출전의 분위기를 조장하고있다.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그는 또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Kin’으로 표기하였다.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할 수 있다. 해방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선전’ 추천작가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다.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주도,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냈다.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나란히 수상하였다.남산의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것이다.
  • 사극 ‘왕과 비’ 역사왜곡 논란

    역사드라마는 역사인가,드라마인가. “역사를 왜곡해선 안된다”는 역사가들의 지적과 “작가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작가들의 견해는 늘 첨예하게 맞서왔다. KBS1TV 대하드라마 ‘왕과 비’의 역사왜곡 여부가 논란이 되고있다.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월간지 ‘신동아’에 2회에 걸쳐 이 드라마의 역사왜곡을신랄하게 비판했다.거듭된 비판에 작가 정하연씨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를 신청하는 한편 20여억원의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상황이 불거지면서 시청자와 여론의 논란도 점점 더 뜨거워 지고 있다. ‘왕과 비’는 조선 초기,단종부터 세조시대를 담고있는 정치드라마이다.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일어난계유정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드라마는 수양대군을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인물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臣權) 사이에서 흔들리는 권력의 구심점을 왕권으로 지켜 내기 위해 고뇌를 한 왕족으로 그리고 있다.수양대군을 권력욕에 불타 단종을 폐위시킨 매몰찬 권력지향형 인물로 그리기 보다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수양을 미화한다’는 비판과 함께 계유정난을 옹호하고 있다는 지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 김종서와 황보인이 안평대군과 역모를 꾸몄다는 ‘왕과 비’의 묘사에대해서도 이의가 뒤따르고 있다.만고의 충신으로 알려진 김종서가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음에도 수양대군에게 ‘당위성을 주기위해’ 충신을 억지로 역적으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왕과 비’의 비판은 지난해 8월,‘신동아’에 역사평론가 이덕일씨가 ‘수양대군·전두환 그 닮은꼴 쿠데타’란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 제기됐다.이씨는 올 2월호엔 비판 강도를 더욱 높여 ‘왕과 비,걷어치워라’는 글로 ‘사관과 사료해석에 문제있다’는 지적을 되풀이했다.그는 ‘단종실록’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만큼 당연히 세조의 입장에서 전개될 수 밖에 없지만 “잘못된 사료의 문제점을 밝힐 줄 모르는 작가와 제작진의 한계가보인다”고 꼬집었다.또 “사육신을 권력욕의 화신으로 난도질했다”고 비판했다.이에대해 작가 정하연씨는 “아직 드라마에 등장하지도 않은 사육신을잘못 그렸다고 비난하는 것은 개인적인 인신공격이자 명예훼손임에 분명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하연씨는 “현재로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해석에 기초해 드라마를 쓸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며 “역사드라마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비난은 이번 기회에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TV드라마의 빗나간 역사관이 시청자에게 그릇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인 경희대 김태영교수는 “계유정난에 대해선 복합적인 평가가 있지만 수양의 집권은 쿠데타이며,이는 미화되어선 안된다”고 드라마의 객관적이고,중립적인 역사관을 강조했다. 정사와 야사의 균형을 맞춰 오늘의 정치에 하나의 교훈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용의 눈물’도 한편에서는 태종의 공신숙청을 개인적인 배신으로 그려 역사적인 의미를 훼손했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왕과 비’가 받고있는 비판역시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다.그러나 법적대응으로 맞선 최초의 역사드라마 ‘왕과 비’로 인해 역사와 드라마의 분명한 기준이 서게될 지 두고볼 일이다.許南周yukyung@.
  • 全斗煥전대통령 셔틀콕경기장 나들이 ‘감회’

    전두환 전대통령이 15일 오후 99삼성코리아오픈배드민턴대회가 열리고 있는 장충체육관을 찾아 배드민턴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본부석에 자리한 전두환 전대통령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배드민턴대표팀 코치들과 함께 ’옛날‘을 회고하면서 선수들의 묘기가 나올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는 지난 93년1월부터 매년 코리아오픈때마다 체육관을 찾았으나 지난 96년대회에는 구속 수감되는 바람에 ‘결근’했었다. 체육계에서 ‘5공은 곧 스포츠’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듯 대통령 재직중체육에 큰 관심을 나타냈던 전 전대통령은 특히 배드민턴에 남다른 애정을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퇴임후에도 박주봉(영국대표팀 코치),방수현(대교)등 국가대표들을 자택으로 초청,한 수 지도를 받았는가 하면 지금도 선수 및 코치들의 애경사를 빠짐없이 챙겨 배드민턴인들사이에 인기가 높다. 전씨가 구속중이던 지난 96년10월 방수현의 부모가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연희동을 찾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 민주열사 열전:16/연세대생 李韓烈(정직한 역사 되찾기)

    ◎‘최루탄 희생’ 6월항쟁 시민참여 계기로/대학입학후 사회의식 눈떠 시위 적극 동참/‘뇌사상태’ 알려지자 시민·학생 공감대 확산 1987년 6월9일은 80년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시민 승리의 한 분수령이 됐던 날이다.그날 일어난 연세대생 李韓烈(경영학과 2년)의 최루탄 피격 사건이 민주화 열망이 폭발한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시민들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그는 피를 흘리며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힘없이 동료에게 안겨 있었다.외국기자가 찍은 그 한장의 사진은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에 충분했다.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그 분노의 폭발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신문사진 보고 시민들 분노 이한열은 그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6·10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그리고 오후 5시 쯤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달리다 SY44 최루탄에 ‘직격’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그가 쓰러진 교문 안 3m 지점과 최루탄을발사한 경찰과의 거리는 20m에 지나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쫓겨 들어가던 한 학생에 부축돼 경찰의 손을 피한 그는 동료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申廷淳 세브란스 병원장이 발표한 이한열의 용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입원해 있던 그는 두개골 골절 및 뇌좌상,뇌출혈,뇌이물질 등으로 의식불명이고 수술은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러나 그의 절망은 민주화의 희망으로 승화됐다.그는 입원한지 27일만에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입원기간 동안 밖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도도한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고 있었다. 그 물결은 87년 1월 서울대생 朴鍾哲 물고문 사망사건으로 비롯된 물줄기가 불어난 것이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점화된 국민의 분노는 정권의 고문사건 축소조작 음모가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뜨겁게 타올랐다.4월 5공정권의 직선제 개헌 유보 발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다.‘호헌철폐’‘독재타도’로 압축된 외침은 서서히 학교를 빠져나와 도심 곳곳에 울려 퍼졌다.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독재정권에 결정타가 됐다.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회사원들이 빌딩 위에서 꽃다발과 휴지다발을 던지는 현상을 보고 외국언론은 ‘충격적’이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형태의 민중의 힘’이라고 보도했다.‘넥타이부대’를 비롯한 중산층이 시위에 적극 가세하면서 부터는 6월항쟁을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중산층의 민주화 욕구 분출로 결론짓기도 했다.6월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6월항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인파인 25만여명이 참여했고,결국 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넥타이부대’ 대거 시위 참여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禹相虎씨(36)는 “한열이의 최루탄 피격은 학생과 시민의 결집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6월9일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투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지만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학생·시민들에 확산됐다는 것.그것은 도심 가두시위에 겁을 내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은 당시 학생운동권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와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학년 2학기 이후 시위에 적극 참여했는데,이는 운동권 조직원으로서가 아닌,개인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대학에 들어와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고 분노한 수많은 학생 중 한명이었으며 고문 추방을 외치며 명동과 을지로 골목을 누비던 ‘보통학생’ 중 하나였다. ‘…그대 왜 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끼고 갔는가’라며 박종철의 죽음을 목놓아 서러워 했던 여린 마음의 젊은이였다. 특별히 과격하지도 않은 우리의 착한 아들 딸도 정권폭력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때문이었을까.이한열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시민들은 6월29일 당일보다도 오히려 이한열의 장례일인 7월9일 6·29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했다. ○시청앞 1백만 장례 행렬 연세대에서 10만여명으로시작된 추도행렬은 신촌네거리 노제를 지내며 30만,시청 앞에선 100만여명으로 불어났다.대형 태극기와 영정,‘한열이는 부활한다’‘한열아,너의 가슴에 민주를’ 등이 적힌 300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운구행렬을 수십만의 시민·학생이 따랐다.참으로 장엄했다.그것은 이한열을 애도하는 인파였고,민주사회를 갈망하는 국민 염원의 물결이었다.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의 발전이었다. □양력 ·1966년 8월 전남 곡성 출생 ·82년 2월 광주 동성중 졸업 ·85년 2월 광주 진흥고 졸업 ·86년 3월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87년 6월9일 연세대 교문 안쪽에서 시위 중 최루탄 피격 ·87년 7월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 ◎이한열 어머니 裵恩心 여사/아들 소망 풀려고 민주화 운동/의문사 진상규명 법 제정해야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어두웠던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머니들.이들의 가슴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자식이 죽기전 이루고자 했던 소망도 고스란히 묻혀 있다.이한열의 어머니 裵恩心(58) 여사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관심과 100만 추도 인파 속에 ‘성대히’ 아들의 장례를 치뤄 ‘속없는’ 사람들의 ‘부러움’까지 샀던 배여사.하지만 배여사는 오늘도 여의도 국회 앞 차가운 천막속에 있다.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벌써 24일 째다. “민주를 달라고 싸우다 숨진 사람들이 아직도 범법자의 굴레를 쓰고 있어요.암울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숱한 의혹을 남긴 죽음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이것을 그대로 묻어둔 채 진정한 새출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장례식에서 “이제 다 풀고 가라.엄마가 갚을란다.한열아… 한아 가자,우리 광주로”라고 피끓는 통곡을 토해냈다.그 이후 아들의 소망을 풀기 위해 민주화와 노동운동 현장에 항상 있었고,지금도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배여사는 “대통령도 특별법 제정 검토를 지시했고,국회의원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협조하겠다는데 법안은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며 답답해 했다. ◎피격현장 동료 이종창씨/한열이 모습 아직도 생생/항쟁의 정신 잊지 말아야 6월항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이한열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힘없이 늘어져 있고,한 학생이 그를 껴안은 채 분노의 눈빛으로 앞을 쏘아보고 있는 사진이다.로이터통신 기자가 극적으로 잡은 이 장면은 세계 곳곳으로 한국 민주화투쟁을 알리는 생생한 기록으로 알려졌다. 그 분노한 눈빛의 주인공인 이종창씨(32·연세대 상경대도서관 사서)는 “‘내일 시청 앞에 가야 하는데’라고 힘없이 말하던 한열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도서관학과 2학년이던 그는 그날 학교 앞 택시정류장 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경찰에 쫓겨 최루가스로 거의 앞이 안보이는 상태에서 뛰어 들어가다 왼쪽에 검은 물체를 느꼈지요. 한열이었습니다. 20여m 앞에 전경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를 껴안고 무조건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는 이한열을 20m 이상 끌고 가다 먼저 쫓겨갔던 학생들이 달려왔을 때에 야 기진맥진해 주저앉았다.“쓰러진 한열이가 경찰 손에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씨도 6월항쟁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다.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은 며칠뒤 그 또한 학교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았다.2회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한 가운데 있던 그는 항쟁의 정신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 했다.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는 학생들에게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진을 보이자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라는 것.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던 그때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의 참뜻은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꼭 살아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사죄’ 단어 공식문서에 명기/진일보된 과거사 사과

    ◎일 망언 예방효과 기대/교과서 개정돼야 완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담긴 과거사 사과 표현은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의 담화에서 ‘아시아 제국’을 ‘한국민’으로 바꾼 것이다.공동선언에 쓰인 ‘오와비’란 일본어도 무라야마와 하시모토 총리의 과거사 사과 때는 ‘사과’와 ‘사죄’로 병행 해석돼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사죄로만 명기한 것도 진일보한 점이다. 그러나 일본어 사용 강요와 창씨개명,군대위안부 문제를 적시했던 지난 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발언과 비교할 때는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특히 과거사 사과가 말이 아닌 공식문서에 담겼다는 점만은 큰 진전이란 평가다.그동안 여러차례 일황과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가 있었지만 보수우익 각료와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그 의미가 희석돼왔다.이제 공식문서화된 만큼 최소한 일본 정부차원의 망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양국이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선언적 행위보다도 일본의 성실한 자세가 관건이다.과거사 사과는 역사교과서의 개정으로 완수된 다는게 우리의 입장.이번 공동선언에도 젊은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언급됐지만 양국의 입장은 아직 다르다.우리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 교과서 개정에 큰 관심이 없다.얼마전 ‘한·일 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설치 때도 일본측이 강력히 주장해 ‘촉진’이란 용어를 넣어야만 했다.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예비작업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하느냐”는 일본의 비아냥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진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종료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과거사 사과 발언 ▲히로히토 일황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84.9.6 전두환 대통령 방일 만찬사 ▲아키히토 일황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痛惜의 念을 금할수 없다. ­90.5.24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사 ▲미야자와 총리 ­과거 한시기 귀국국민들께서 일본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셨던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잊지않도록 해야할 것이며 저는 총리로서 다시한번 귀국국민께 반성과 사과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92.1.16 방한 만찬답사 ▲호소카와 총리 ­과거 우리의 식민지 지배시절엔 한반도의 여러분들은, 예를 들어 모국어의 기회를 빼앗기고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이 강제되고, 군대위안부,노동자의 강제연행 등 각종 문제가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하며 이번기회에 다시한번 陳謝드리는 바이다. ­93.11.16 경주 정상회담 ▲무라야마 총리 ­일본은 멀지않은 과거의 한시기에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에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역사의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한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95.8.10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오부치 총리 ­일본이 과거 한 시기에 한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인식,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 ­98.10.8 김대중 대통령 방일 공동선언
  • 역사의 계승/한충목 열사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정부는 오는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해 국가인권기구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그 기구는 인권에 관한 교육과 홍보,연구와 조사, 정부에의 조언과 자문,인권침해 고발접수와 조사처리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갖는다.또 과거 국가기관이 저지른 인권침해 사례를 고발받고 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여 처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민간단체들은 환영하면서도 왠일인지 상당한 정도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이를 정부는 열린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인권문제는 정부의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만들어가는 국민행동이 조직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신이래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숨져간 수많은 열사들의 명예회복과,공안기관에 의해 살해된 뒤 자살이나 사고사로 은폐된 죽음에 관한 진상규명이 그러하다.우리는 유신이래 민주회운동과 통일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이철규 열사를 기억해야 한다.이러한 죽음을 당한 분이 조사된 사례만 해도 331명이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고자 대표적인 30여 시민·사회·종교단체 들이 모여 범국민대책기구를 구성하였다.법조인 교수 국회의원 등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5차례의 학술회의와 국민토톤회도 진행하였다.토론 결과 그런 범죄를 자행한 공안기관에 대한 수사권을 포함한 특별검사제 채택과 특별위원회 설치,이에 대한 법적 근거로서의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9월15일 국회의원 58명을 소개의원으로 해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 상태다.진상 규명이 수사권조차 없는 기구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청산되어서는 안된다.열사들의 조국사랑을 국민적으로 계승할 때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국가발전이 가능한 것이다.역사는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이다.
  • 野 등원거부 정당한가(대치정국 이대로는 안된다:1)

    ◎‘司正꼬투리’ 거리정치 명분없다/비리소환­처벌 회피의도 농후/과거 야당은 개헌저지 등 큰 뜻/장외투쟁보다 원내해결 힘써야 대치정국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일단 국회에 들어가 따질 것은 따지라’는 것이다. 시리즈를 통해 정국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살펴본다. ‘정기국회 파행’ 19일째인 29일,한나라당은 서울역에서 장외집회를 다시 강행했다. 대치정국의 끝은 어디인가. 재계는 정국불안이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IMF시련 기에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28일 시작된 여당 단독국회운영은 야당의 등원거부에서 비롯됐다. 한나라당은 ‘사정(司正)=야당파괴’라며 등원을 거부하고 있다. 이같은 논리는 명분도,정당성도 갖기 힘들다는 것이 원로정치인이나 학자들의 지적이다. 이른바 ‘세도(稅盜)사건’은 우리 정치사에 남을 치욕적인 일이라는게 일반인들의 공통인식이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담당할 당시 국세청을 동원,기업체마다 세금을 줄여주는 대신 정치자금을 얻어쓴 ‘엄청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비리사건 연루자의 검찰소환을 야당탄압으로 규정,당차원에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전 임시국회를 여러번 소집했다. 대부분 李信行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야당의 장외투쟁은 과거의 것과 비교해서도 명분이 약하다. 90년 정기국회가 70일동안 공전됐을 때다. 야당 등원거부 명분은 3당통합의 인위적인 정계개편,여당의 법안날치기·지자제의 연기등 굵직한 사안이었다. 야당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던진 뒤 의원회관에서 철수했으며 세비수령도 거부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상당수의 국민이 그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정국의 실마리를 푼 쪽도 야당이었다. 단식중이던 金大中 평민당총재는 ‘국회내에서의 투쟁’을 내세워 정국돌파구를 열었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여당의 책임도 크다. 여권이 야당의 장외투쟁에 일말의 명분을 주었다는 책임론도 나온다. “사정대상에 누가누가 거론된다”는 여권 수뇌부의 발언들은 야당에 ‘기획사정’ 비난 근거를 제공했다.‘타협과 설득 기술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80년대 이후 정기국회 공전사례 ▲12대(85년 129회 정기국회) ­정기국회는 정상적으로 개회. 직선제 개헌 요구와 관련,야당측이 고대앞 시위 강경대응을 이유로 20일동안 등원거부 ­10월28일에는 국회부의장 후보경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지명한 조연하 국회부의장 후보가 낙선하고,김영록 의원이 당선된 이른바 김역록 부의장 파동으로 7일간 공전 ▲13대(90년 151회 정기국회) ­3당 통합에 반발하고,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며 야당 정기국회등원 거부,의원직사퇴 및 세비수령거부 등 강력반발,11월18일까지 70일동안 여당 단독국회. 9차까지 본회의 진행 ▲14대(93년 165회 정기국회) ­국정조사 기간 연장과 국정조사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증인 출석문제를 놓고 5일동안 공전 ▲14대(94년 170회 정기국회) ­성수대교 붕괴에 따른 야당인 민주당의 내각 총사퇴와 대국민사과 요구. 10월24일부터 3일간 공전 ­11월5일부터는 20일동안 검찰의 12·12사건 관련자 공소권 없음 결정에 야당 반발. 또 다시 표류 ▲15대(98년 198회 정기국회) ­검찰의 국세청을 동원한 한나라당 불법 대선선거자금 모금과 비리정치인 수사,야당의원의 여당행에 반발. 한나라당 등원거부,의원직사퇴,장외투쟁. 자민련 2여 단독국회, 2차 본회의 진행. 9월10일 개회식부터 20일동안 공전중
  • 왜곡보도 50건 선정

    언론개혁시민연대는 한국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 보도사례 50건을 선정,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새달 2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는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용공조작·인권유린 등에 앞장섰던 허위 왜곡기사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언개련이 선정한 허위 왜곡보도 사례 50건을 소개한다. □왜곡보도 50건 내용 ▲권력의 정당화­민주화 외면 ­자유당 4사 5입 개헌 정당화(서울 56년 3월) ­이승만 우상 숭배(서울 56년 3월) ­박정희 군부쿠데타 지지(경향,조선 61년 5월) ­10월 유신 지지(조선,중앙,서울,한국 72년 10월18일) ­부마사태 왜곡(경향,서울,중앙,한국 80년 10월) ­전두환의 권력 장악 정당화(서울 80년 4월) ­광주민주화 운동 포고로 매도(조선 80년 5월) ­전두환 미화­‘인간 전두환’(81년 8월) ­4·13 호헌 조치 옹호 ­김대중 친서설(연합 89년 7월) ▲냉전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이승복군 허위보도(조선 68년 12월) ­경향신문 기자 6명 용공혐의 구속(80년 5월)­김근태 용공조작 사건(경향,중앙 85년 10월) ­‘대학가의 음영’ 시리즈(경향 85년 10월) ­건국대 사태(86년 10월) ­평화의 댐(86년 10월) ­문익환 목사 기자회견(조선 89년 5월) ­북한 핵실험 보도(92년 6월) ­김평일 망명설 보도(94년 8월) ­성혜림 망명 사건(96년 2월) ­북한 공군 이철수 대위 귀순 사건 컬러 조작(96년 5월) ­북한정치범 수용소 보도(97년 7월) ­이석현 의원 명함 파문(97년 8월) ▲민중생존권 외면 인권 유린 ­광주대단지 사건(71년)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요구(76년) ­삼청교육대 왜곡(80년 8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79년 8월) ­권인숙양 성폭행 왜곡(86년 8월) ­노동자 대투쟁(87년) ­김기설 유서대필 논쟁(91년 7월) ­여의도 농민시위(94년 6월) ▲선정주의에 의한 오보 ­김구,이승만 동석 사진 조작 ­중공군 인해전술 사진 ­압록강변 병사 사진 ­일본군 독립군 작두 처형 사진 ­호랑이 출몰 사진(동아 80년 1월) ­김일성 주석 사망설(조선 86년 11월) ­사노맹 백태웅씨 옥중 결혼(중앙 92년 6월) ­서해 훼리호 백두운 선장 생존(한겨레 등 93년 10월) ­육영수 여사 파격 의혹(국민 90년 5월) ­뉴스위크 이대생 ‘돈의 노예들’ 사진보도(91년 11월) ▲언론사의 이기주의에 의한 왜곡 ­신문제작 거부 사태에 대한 견해(조선 75년 3월) ­동아투위에 대한 왜곡(동아 75년 3월) ­류근일 칼럼 ‘정주영 변수’(92년 7월) ­선거유세장 인파 조작(제주신문 92년 6월) ­지역민방 케이블TV 경영 수지 과장(95년 5월) ­중앙일보 대선 편파보도(97년 12월) ­월 펀슨 세계은행 총재 발언(97년 9월) ­재경원 발표(97년 11월)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97년 4월)
  • 방송/고성장 뒤안 정권통제 그늘(한국문화 50년:5)

    ◎라디오 한개채널서 TV만 40여개로 늘어/공영 단일체제서 90년대들어 민영화 맞아/IMF로 민방들 한파… 방송법 통과 과제로 건국후 첫 방송을 시작할때는 라디오채널 하나뿐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지상파 채널만 TV 5개,라디오 15개,케이블TV와 지역민방 등을 합치면 TV채널만도 40개 안팎이다.61년 TV개국과 80년 컬러TV 시작,95년 케이블TV와 지역민방 출범 및 위성TV 개시 등을 거치며 제작·송출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의 질도 높아졌다.특히 88서울올림픽은 한국방송의 도약을 과시한 쾌거였다. 그러나 이같은 화려한 발걸음 뒤에는 정부의 끊임없는 견제가 따랐다.건국후 대한방송협회가 정부로 흡수되고,방송사업 국유화로 KBS의 국영방송 시대가 열렸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61년 MBC,64년 TBC를 비롯, 많은 민영방송을 허가함으로써,자유경쟁체제를 마련하는 듯했다.그러나 75년 월남 패망을 기점으로 방송통제가 시작됐다. 70년대는 일일극시대였다.TBC ‘아씨’,KBS ‘여로’,MBC ‘신부일기’등이 현실의 고난을 잊으려는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무기력함과 소비적이라는 여론의 거센 비난으로 84년 일일극시대는 막을 내린다.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정권은 TBC,DBS를 KBS에 통합시키고 MBC주식의 70%를 국가에 헌납하게 함으로써 방송구조는 공영체제로 일원화됐다.‘땡전뉴스’로 비하되던 왜곡보도의 시대가 열렸다.한편 컬러방송은 상업화를 가속화,호화 쇼등 오락프로가 판을 치고 ‘백분쇼’등 대형쇼가 등장했다. 굴욕의 역사를 넘어 90년대 방송계는 구조적 대변혁을 이루는 전환점을 마련했다.평화·불교·교통방송과 91년 SBS 개국으로 10년간의 공영 단일체제에서 다원체제로 바뀌었다.또 케이블TV,위성방송 등 뉴미디어의 실용화와 지역민방 개국으로 다채널 다매체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 성장의 뒤안으로 찾아온 ‘IMF 한파’는 지역민방과 케이블TV를 존망의 기로로 몰아가고 있다.이 모든 문제의 해결과 맞물린 새 방송법은 아직 통과되지 않고 있다.우리 방송의 현주소이다.
  • 국난 극복을 위하여/金承均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서울광장)

    K형. 담시 오적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형의 근무처인 민주전선을 찾은 것이 어제 같소 그려. 그때 민주전선 편집국장도 함께 구속되었기에,아니 김세영 선생이 특별히 사상계와 민주전선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인사차 방문했었고,그때 K형은 감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불려가서 심하게 조사받고 오적시가 게재되어 있던 민주전선이 몽땅 압수되었다고 비분강개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오. 나는 그 후 천관우·함석헌·김재준·이병린 선생님을 모시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일을 했지 않았소. 독재를 물리치려면 선거나마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면서 선거참관단을 조직,전국에 파견하던 그 기개와 그 장엄함,살벌하던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호령하던 노지사들의 모습이 아련한데 그 분들은 모두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구려.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 그 분들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인품,해박한 지식,불굴의 기백,절절한 국가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는 후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의 어른들인데 소홀히 대접받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서울신문이 친일매국노를 단죄하고 민주열사들의 자서전을 연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 하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수백만에 이르는 실업자들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명망 높은 성직자들과 시민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는 보도는 “우리는 아직도 희망이 있구나”라고 자위를 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성취해야 할 두 마리의 토끼,즉 개혁과 통합이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우려가 못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개혁을 전제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국가부도의 원인이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관치금융,기업의 버블과 불투명성,이로 인한 국제투기꾼들의 외화 인출에 의한 유동성 부족이었다고 볼때 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명제입니다. 통합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통합을 지역적 안배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온국민의 지지 속에 처단했던 최규하·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통합의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낡은 권위주의,부정부패 등 전도된 가치관을 과감히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함은 물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권위주의시대 방식의 명망가 운동은 이제 약효가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 국민이 숭앙하던 지조 높은 어른이 나서야 국민이 용기를 내어 감히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던 시절의 한 모습니다. 이제는 지역단위 중심의 실업자 구호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실업자 구호운동 펴자 K형. 우리는 4·19혁명을 일궈낸 세대입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반공청년연맹이 불탔습니다. 만약 혁명정부가 반공청년연맹을 부활시키려 했다면 국민정서가 받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새마을운동본부를 개조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국민운동이 필요하면 새 운동을 일으키고 새마을운동 하던 사람들도 실사를 거쳐 구제하여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새마을운동 하면 우선 전 아무개의 이미지와 독선·억압·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민정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면밀히 고려해야 합니다. 단체의 정체성을 무시하면 게도 구럭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의식의 구조조정이 절실할 때입니다.
  • ‘창작과 비평’ 지령 100호 기록

    ◎66년 창간… 32년간 지식층 대변 계간지로/80년대 5共 정권서 8년간 폐간 곡절 겪어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이 여름호로 지령(誌齡) 100호를 기록했다.월간 문학잡지로 ‘현대문학’이 지령 500호를 넘긴 예가 있긴 하지만 ‘창작과비평’의 100호 돌파는 한국문예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지난 66년 1월 겨울호로 창간된 ‘창작과비평’은 56호까지 내고 80년 7월 전두환정권 아래서 출판사 등록 취소와 함께 폐간됐다가 88년 봄호부터 다시 내게 됐다.계간지가 100호를 돌파하려면 25년이면 되는 것을 ‘창작과비평’의 경우 32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28세의 젊은 문학평론가 백낙청씨가 창간한 ‘창작과비평’은 60년대 우리 지식인사회에 ‘계간지시대’를 연잡지로 평가된다. ‘창작과비평’은 50년대 지식인층 및 학생층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월간 문예지 ‘사상계’(70년 폐간)의 빈 자리를 메운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창작과비평’은 민족문학론·민족경제론 등의 담론을 낳으면서 새로운 계간지문화를 일구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특히 ‘창작과비평’의 뒤를이어 70년 ‘문학과지성’이 창간돼 두 계간지는 ‘창비계열’과 ‘문지계열’의 문인과 논객들을 배출하면서 70년대 한국 지성계를 이끌었다. 이번 ‘창작과비평’ 기념호에는 고은·신경림시인의 축시를 비롯,특집 ‘IMF시대 우리의 과제와 세기말의 문명전환’,칠레 망명작가 아리엘 도르프만과의 대담기 ‘지구화시대의 대안적 서사를 찾아서’ 등의 글이 실렸다.
  • 5·18을 어떻게 볼 것인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특별기고)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1980년 5·18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항쟁이 광주폭동이라는 누명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뒤 ‘5·18사태’라고 했다가 ‘5·18광주항쟁’을 거쳐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평가와 함께 용어가 정립되었고,관련인사가 범죄자에서 민주투사로 그 본연의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더우기 그들은 엄청난 ‘폭동’‘반란’‘변란’‘내란음모죄’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사면복권과 함께 그 처절함,고통,수모,학대,인고의 세례로부터 축복받는 광명 영광 환희의 광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경과하였다.이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이의 실마리는 군사정권의 군사독재와 특정지역 때리기 및 낙후방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현역 소장 출신의 박정권이 18년만인 79년 10·26사태로 종말을 고하면서 또 현역 육군소장 전두환이 그 시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신군부의 정치세력이 싹트게 됐다.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취된 것이다.12·12 하극상 사건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동지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관망하며 혼란 소요를 키워오다가 이를 수습한다는 명분속에 느닷없이 5·17비상계엄을 선포,혼란을 수습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봄을 만끽한 3김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로써 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러나 12·12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의 ‘은밀히 계획된 정치일정’은 자신들이 일선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그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국 휴교령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일부와 빛고을 광주의 대학생들이 섞인 민주인사들이 그 다음날인 5월18일 무장 군인과 결전을 전개하면서 5·18은 터졌다.처절한 살육 전시회가 낭자한 피로 얼룩진 가운데 전개됐다.대치국면은 광주와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무고한 시민만 죽임을 당한 역사상 매우 잔혹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게된 것이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군의 결전은 곧 광주의 민주화투쟁 이었으며 이는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이었다.마치 동학혁명(1894­5)이 이곳에서 일어나 북상,반봉건 반제국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과 같다.또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농민,노동자의 투쟁(소작쟁의,노동쟁의)도 광주 나주 완도 하의도 등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타도의 애국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5·18 역시 서울의 5·17 민주화 투쟁이 광주에서 성숙되어 전국으로 물결져 간 것이다.따라서 5·18은 광주 전남만의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것이다.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곧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민간 억압 책동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높였고 동참의식을 도출해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그러나 당시 광주는 폭동 소요 탈취 암흑의 광장으로 신군부와 권력지향적 철새 정객들에 의해 선동되었고 그에따라 그 지역에 대한 혐오감,증오심을 증폭케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떨어져도 매점매석하지 않았고 자체조직으로 질서를 잡았다.식량이 떨어진 이웃에 온정을 베풀었으며 부녀자들은 따뜻한 음료수와 끼니로 시위대의 사기를 돋구어 민주화 의지,신념을 달성케 하였다.의사,간호사가 구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금융,정부기관을 지켰으며 헌혈에 온시민이 동참하였다.비록 신망의 정치인인 金大中이 ‘내란음모사건’이란 누명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불타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인을 위하기보다 민주화는 필연적 과제였기 때문이다.이제 그 분은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되어 바웬사 사하로프 만델라와 함께 민주의 투사요 지구 인권의 파수꾼으로 손꼽히는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불의,부정을 배격한 동학정신이 팽배한 이 지역의 5·18은 곧 우리 모두의 민주화운동이다.6·10항쟁,6·29선언(1987)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영원히 저주받을 지역감정,지방색의 차별화 등은 망각의 저 여울속으로 보내야 한다.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정부,신명나는 국민으로 거듭나서 화합의 대열로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또 복받은 대한민국이 달성되어 통일조국 대한민국 건국의 50주년을 환희와 벅찬 희망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아시아 인권헌장’ 선포

    ◎아시아 인권委,5·18 18주년 맞아 光州서 【광주=南基昌 기자】 지난 15일부터 광주에서 열린 아시아 인권헌장선언대회가 17일 ‘아시아 인권헌장’과 ‘광주 선언문’ 채택을 끝으로 폐막됐다. 아시아 인권위원회 바실 페르난도 위원장은 “5·18 18주년을 맞아 서방 선진국과는 다른 아시아의 인권상황을 토대로 인권헌장과 광주선언문을 채택했다”며 “앞으로 아시아 각국 인권단체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갖고 아시아 민중들의 인권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헌장을 아시아 지역 모든 언어로 번역해 배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인권위는 특히 평화·민주·인권을 3대 이념으로 하는 ‘광주 선언문’의 채택은 아시아 인권상황 개선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광주선언문/“광주학살 핵심적 역할 두 前 대통령 기소/“인권옹호 특별한 성과… 값진 교훈 남겨” 광주시민뿐만 이나라 한국인들이 광주 대학살사건에 대해 보인 반응은 아시아에서의 인권발전에 하나의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다.그 학살의 핵심적 역할을 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기소한 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확인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아시아적 맥락에서 가장 특별한 성과 중의 하나이다.나아가 그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 역시 정말 특히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시아 인권운동에 많은 값진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아시아 인권위원회의 이 선언은 최근까지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는 아시아에 엄청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통화위기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크나 큰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아시아 위기가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의 극빈층과 여성 및 아동들의 인권문제이다. 우리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뿐만 아니라 정치적· 시민적 권리영역에서 인권의 희생자들에대한 우리의 연대를 확인한다.아시아 전 지역에서 인권을 침해받은 사람들이 모여 한국인과 만나 함께 할 것이다. 대회기간의 토론들은 아시아지역의 인권 보호 및 증진을 위해 앞으로 중요한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기 자기 나라에서의 억압권력과 싸우기 위해 연대가 필요함을 확인한다. 우리들 중의 상당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하고 있다.그들 역시 더 큰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우리에게 연대는 단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불굴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한 정신에서 상호의사소통의 시대에 우리가 서로 좀더 접촉하고 좀더 알고 좀더 가까이 서로록 노력하자.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 북풍 수사 새국면­권씨 자해 각계 반응

    ◎“진실규명 외면… 떳떳치 못한 행동”/“안기부 위상 바로잡게 잘못 승복을”/PC통신에도 동정보다 비판 우세 권영해 전 안기부장 자해 사건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진실규명을 외면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입을 모았다.권씨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안기부와 군에서도 동정론보다는 비판론이 우세했다. 22일 안기부의 관계자는 “북풍공작 사건은 안기부가 권력에 종속돼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으므로 권 전 부장이 안기부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게 수사에 임해야 했다”면서 “특히 군 출신으로서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간부는 “명예를 중시한 분이니…”라면서도 “북풍공작 사건 파문으로 가뜩이나 동요하고 있는 안기부 조직이 이번 사건으로 더욱 위축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중요한 직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범죄자로 전락한 사실에 치욕을 느껴 자해한 것 같다”면서 “하지만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군 출신으로 당당하게 진상을 밝히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 고위 장성은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느껴 극단적인 행동이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검찰의 조사를 받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실련의 유종성 사무총장은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있는 중대사건에 대해 진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자해로 이를 은폐하려 한 것은 한때 국가 정보기관의 총책임자였던 사람으로서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PC통신에도 권씨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이 잇따랐다. ‘나우누리’ 이용자 박모씨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사법처리를 받아들였는데 권씨만 유독 ‘튀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수장 출신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승복하는 자세가 아쉽다”고 주장했다. 또 양모씨는 “자해하면서 변기뚜껑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검찰수사에 대한 항의성 쇼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유니텔’ 이용자 김모씨는 “자신의 배를 4㎝ 깊이로 20㎝나 벤 것을 보면 단순한 소동은 아닌 것 같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 전체가 연루돼있는 상황에서 ‘너 하나만 책임져라’는 식의 마녀사냥을 했으니 권씨가 할복을 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는 의견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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