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전두환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계약서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물의 나라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키이우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본회의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718
  •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대한민국을 건국한 제헌헌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59주년이다. 그 세월, 헌법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는 간난을 겪으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7월17일 제헌절을 기리는 이유가, 거기에 우리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리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입법부·행정부 그리고 사법부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 공직자들이 단상을 빛낸다. 하지만 헌법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국가 기능을 이끌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준 이 헌법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이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었다는 점이다. 제헌이후 9차례의 헌법개정사를 보면, 헌법의 가슴과 팔과 다리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들이 바로 권력의 자리에 있거나 그 과정에 참여한 일부이었기 때문이다. 건국과 부국(富國)의 공은 인정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 및 초대 대통령에 한한 3선연임제 개헌이나 박정희 정부의 대통령 3선연임제 개헌이 그 범주에 속한다. 심지어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 인사들이 뽑은 유신 대통령, 대통령선거인단이 선출토록 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전두환 정권도 있었다. 그 곡절 끝에,19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제정된 현행 헌법에 의하여 국민 직선으로 뽑힌 단임 대통령인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정부에 이어 지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있다. 이를 보면 우리 헌정사는 헌법을 무시한 권력자들의 공적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징벌한 도덕적 국민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월 대통령 4년연임제 개헌 의사를 밝히면서 헌법을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까지 말한 노 대통령이 반년도 되지 않아 ‘이놈의 헌법’이라고 한 말은, 그래서 의외였다. 헌법이 곧 시대정신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이 표출하는 시대정신은,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헌법 정신을 재단 또는 훼손하는 일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 의지임을 노 대통령은 정녕 몰랐던 것인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만들고 형성하는 규범이지 권력자가 재단하고 자르는 옷감이 아니다. 그래서 그 국민을 노동자·농민 등에 한정하고 그들을 민중 내지 프롤레타리아로 부르면서, 그들에게만 주권이 있으며 나머지 국민에게는 주권자가 아닌 현대판 농노 내지 신민으로 남게 하는 인민독재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국헌법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북한의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조차도 무시하고 아버지의 피로 권력을 승계 받아 북한 인민들을 아사시킨 김정일 체제를 우리 헌법 제3조는 명확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 헌법 원칙을 지키면서 북한 인민을 위한 대북정책을 펴는 일이야말로 국민을 위하는 위민(爲民)의 헌법정신이다. 제헌절은 권력자들이 새삼 옷깃을 여미고 가슴에 손을 얹어 이를 살피도록 하여 헌법 제정일이 대한민국을 억만년의 터로 만든 날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명박·박근혜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한 당내경선 레이스가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관련 발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국가정보원은 대선 주자의 부동산 관련 정보를 불법으로 열람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예상되는 대선주자들의 부동산 점유, 사생활 소문, 정당 바꿔치기 등의 헌법부적합 행태, 김정일의 노골적 헌정 개입이 우려된다. 우리는 5년에 한번 찾아오는 이 대통령선거가 한국사회를 위헌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하면서 헌법을 블랙홀로 몰고 가는 일만은 절대 헌법의 정신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제헌절 기념식이 그 노래가 말하듯, 헌법이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임을 확인하여 내년 헌법 제정 60주년을 맞이하게 하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 이재오 “국정원 ‘이명박 X파일’ 작성 의혹”

    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은 8일 “국가정보원이 지난 2005년 3월부터 9월까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관련한 ‘X-파일’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이 예상된다. 이명박 대선 경선 후보의 좌장격인 이 최고위원은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20일 전쯤 이 같은 내용의 제보를 받았다.”며 김만복 국정원장에게 ‘이명박 X-파일’의 존재 여부와 작성 경위 등을 명확히 밝혀줄 것을 촉구했다.●“2005년 3∼9월 조사보고서 3부 작성” 제보 이에 대해 국정원은 “이 최고위원이 국정원을 검찰에 고발하면 검찰 수사에 최대한 협조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면서 “그러나 이 최고위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면, 엄중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최고위원의 의혹 제기는 그동안 당 대선경선 후보와 관련한 의혹 제기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으며, 이는 권력기관일 것이라고 막연히 주장해 온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명박 X-파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고서는 어떤 형태로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시중에 흘러나오게 됐는지 등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적시했기 때문이다. 국정원 인사의 이니셜(성명의 첫 영문자)까지 거론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 시기(2005년 3월부터 9월까지)는 지난 2005년 5월 청계천 관련 비리의혹 조사가 이뤄지면서 (수사기관이)이 전 시장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시점과 일치한다.”면서 “당시 조사가 국정원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는지도 김 원장이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국정원)국내 정치담당 팀장 P씨가 대구 출신 K씨에게 지시해 팀을 3,4명으로 구성해 조사하게 했다는 제보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를 밝혀야 한다.”며 구체적 정황까지 제시했다. 또 “당시 특정지역 책임자였던 L씨가 후임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MB(이명박) 관련 보고서가 누구에게 가 있으니 잘 관리하라고 했다는데 사실인지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보고서 3부가 작성돼 상부 권력 실세에게 보고됐다는 의혹도 있다.”고 주장했다.●‘박근혜 X-파일’존재 가능성도 경고 이 최고위원은 이어 “전두환 정권 당시 미국 록히드마틴의 전투기 도입과 관련해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했으며 당시 모 기업 대표인 S씨와 가수 Y씨 등이 조사를 받았고 (한나라당)유력 후보가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제보가 있다.”고 말했다.박근혜 후보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익명을 요구한 이 후보측 관계자는 “박 후보 X-파일도 존재한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박 후보측은 “의혹을 제기하면 당당히 대응하지 이 후보처럼 실체적 진실을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전광삼 한상우기자 hisam@seoul.co.kr
  • ‘골프파문’ 부산에 간 이해찬, 李·朴 맹비난

    친노 대표주자를 자임하는 이해찬(얼굴) 전 국무총리가 5일 1년 전 ‘골프 파문’으로 그에게 총리 낙마를 안겨 준 곳이자 범여권의 ‘불모지’인 부산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나라당 대선경선 후보들을 맹비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이 전 총리는 ‘희망부산 21’ 초청강연 등을 통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위장전입과 부동산 관련 의혹 등을 거론하며 “사찰대상도 못되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같은당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정수장학회 문제를 언급하며 “상식 이하의 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 전 총리는 “(이 후보는)서초동에 자기 건물이 있는데 고도제한을 풀었다.”며 “전두환 시대에도 못하는 일인데 정말 용감하기 이를데 없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어 그는 박 후보를 겨낭해 “정수장학회를 빼앗아갔으면 돌려줘야 한다. 상식이하의 일”이라며 “옛날 같으면 붙잡아 갔다. 우리 정부니까 안 붙잡아 가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산에 대한 애정은 물론, 이번 대선서 부산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했다. 처가인데다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곳, 지역주의가 없어져 부산의 선택이 자유로워진 점을 예로 들었다.범여권이 후보 중심으로 세력재편에 돌입한 직후임을 감안한 듯 자신의 경쟁력을 두드러지게 언급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장관으로 추천했고 민주화운동 동지”라면서 “이젠 성숙한 정치인으로서 서로 존중한다. 정치철학과 정책에 큰 차이가 없다.”며 정치적 우정을 강조했다.부산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진실화해위 재심권고 ‘아람회 사건’ 피해자 김난수씨

    “딸 아람이가 벌써 스물일곱 살입니다. 지금 수의사로 일하고 있어요. 아람이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는 5일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아람회’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 김난수(54)씨는 이날 소식을 전해듣고 “취업이 안 돼 고통받은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면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고 손해배상까지 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단순 친목모임이 반국가단체로 ‘아람회’ 사건은 1981년 대전경찰서가 김난수씨와 박해전씨 등 12명을 불법감금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뒤 법원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등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미국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피해자들은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아람’은 김씨의 딸 이름이다. 경찰은 81년 7월 아람씨의 백일잔치를 계기로 김씨 집에 모인 사람들이 단순 친목모임 명칭으로 거론한 ‘아람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았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김씨는 당시 육군 대위로서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김씨는 “장교 선배들과 친구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딸아이 백일을 축하했을 뿐”이라면서 “사건 이후 집안은 거의 파탄이 났다.”고 안타까워했다. ●보안부대 지하실서 한달간 고문 김씨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81년 8월 혼자 제507보안부대로 이첩돼 조사를 받고 군 검찰에 송치됐다. 김씨는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운 채 군홧발에 밟히는가 하면 발가벗긴 상태로 구타당하는 등 보안부대 지하실에서 한 달간 고문을 받았다.”고 밝혔다.83년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출소 직후 3개 회사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불합격처리됐고, 노태우 정권 때까지도 보안관찰 대상이라 취업이 안 됐습니다. 사면복권된 후엔 나이가 너무 들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김씨는 식당과 독서실 등을 운영해 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10여년째 무직상태다. 김씨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아람이도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에 대한 불신이 컸을 것”이라며 가슴아파했다. 태어나자마자 반국가단체의 이름이 돼버린 딸 아람씨는 지금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5·18광주민주항쟁 유공자이기도 한 김씨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에 따라 2004년 4월 재심을 청구했고 현재 대전지법에 계류 중이다. 박해전씨 등 다른 피해자들의 재심청구는 작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개시됐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이덕화, 이명박에 “각하 힘내십시오”

    이덕화, 이명박에 “각하 힘내십시오”

    MBC TV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 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탤런트 이덕화씨가 27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에게 “각하, 힘내십시오.”라고 말해 눈총을 받았다. 이 후보측의 문화·예술지원단 위촉식에 참석, 상임고문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다. 이씨는 “어젯밤 이 전 시장을 위해 글을 썼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최근 이 후보를 겨냥한 검증 공세를 겨냥한 듯 “그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다.‘잘 맞아달라.’고. 당신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챔피언”이라고 말한 뒤, 문제의 ‘각하 발언’을 했다. ‘뽀빠이’ 이상용(고문),‘임꺽정’ 정홍채(수석특보) 등도 이날 위촉됐다. 산악인 엄홍길씨도 상임고문 임명장을 받았으나 이후 “이 전 시장을 조용히 후원하려 했으나 본의 아니게 언론에 공개돼 당혹스럽다.”면서 “상임고문직을 맡지 않겠다.”고 고사했다. 엄씨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의 지지모임인 ‘창사랑’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문화마당] ‘6월 항쟁’ 이후/김태성 호서대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

    6월10일을 전후하여 모든 매체들이 일제히 6월 항쟁에 관한 보도를 쏟아냈다, 올해로 벌써 20주년이 된 데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터라 그 의미는 훨씬 더 새로웠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불과 이틀이 지나면서 모든 매체에서 ‘6월 항쟁’ 관련 기사는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민주운동의 열기는 이내 사라져 갔다.6월 항쟁의 본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규명과 사후처리는 올해도 변함없이 유보되었다. 사실,6월 항쟁뿐만 아니라 보다 철저한 규명과 정리가 필요한 대부분의 중요한 역사사건에 관한 기억이 일회성 연중행사로 그쳐버리면서 역사의 박제가 되고 있다. 일제 청산이 그랬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의 군부독재에 대한 처리가 그랬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 제자리 찾기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불의한 역사사건에 대한 평가에 사뭇 이상한 잣대를 사용해 왔다. 정치인들은 ‘화해’라는 이름으로 부도덕한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민중은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현실의 부분적인 개량에 너무 쉽게 분노를 잠재웠다. 조선시대였다면 구족(九族)을 멸해야 했을 대역죄가 ‘화해’의 이름으로 대충 처리되었고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무수히 살상하고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말 그대로 ‘극악무도한’ 정권모리배들이 ‘성공한 쿠데타’라는 이상한 논리로 정당화되면서 면죄부를 얻었다. 이들에 대한 단죄는 이른바 정치 ‘보복’이라는 허구적 논리에 밀려 차단되고 말았다. 법치국가에서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한 살상을 통해 정권을 잡은 자들에 대한 단죄는 응당한 사법행위이다. 정당한 사법행위가 정치적 보복으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고 해서 이를 포기한다면, 사법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의한 권력과 야합하면서 이를 ‘화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이 위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것이 위선이란 말인가? 이러한 정치적 왜곡의 결과 항상 정의와 평등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에는 이미 도덕이란 것이 사라졌고 국민들은 가치관을 상실했다.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 없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한 탕 잘해서 큰 돈을 버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하나의 타성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증권투자나 부동산투기, 복권 등으로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적은 수입에도 성실하게 일터를 지키는 사람들은 오히려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어떤 사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 사회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인내와 투쟁을 통해 이제야 비로소 이 네 가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형식 민주주의의 실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형식으로 살아질 수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정의와 평등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독재권력 대신 자본이라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권력에 의해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고, 놀랍게도 이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된 항일 투사들과 민주 인사들의 후손 및 가족들이 이 왜곡된 경제현실에 또다시 희생양이 되고 있다. 광주학살의 원흉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부정한 돈으로 부족함 없이 잘살고 있는 이 땅에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사람들과 그 가족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적절한 평가와 보상은커녕 지독한 가난과 상실감으로 분노하고 있다면 현실적 민주화, 진정한 역사정의의 실현은 언제나 가능할 것인가? 김태성 호서대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
  • 美 단거리 여왕 존스 ‘쪽박 신세’

    전성기 때 패션잡지 ‘보그’의 표지에 2000달러(약 188만원)짜리 드레스를 걸치고 나섰던 미국의 육상 스타 매리언 존스(31)가 쓸 돈이 2000달러밖에 남지 않았다고 털어놔 화제가 되고 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3관왕에 오른 ‘단거리 여왕’ 존스는 25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삶이 약물복용 추문과 소송 패배로 얼룩졌음을 시인했다. 존스는 지난해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 있는 250만달러(약 23억원)짜리 프랑스 샤토식 저택을 은행에 저당잡혔는데 결국 이를 처분하게 됐다고 말했다. 존스는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도 유동자산이 2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녀가 궁지에 몰린 것은 전임 코치였던 댄 파프와 소송에서 지면서 일련의 법정공방에 휘말렸기 때문. 파프에게 24만달러를 배상한 그녀는 지난해까지 자신을 괴롭혀온 베이에이리어연구소(BALCO) 약물 추문이 연방대배심까지 진행돼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물어야 했다. 존스는 도핑 테스트 결과,B샘플에서 음성반응이 나와 재기를 모색해 왔다. 이 같은 고백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그녀의 재산 상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고 전했다.‘전두환식 엄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전재용·박상아 8월 서울서 결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43)씨와 탤런트 출신 박상아(35)씨가 오는 8월 서울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 스포츠월드는 20일 두 사람이 8월 중순쯤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준비중이며 이미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도 이날 “두 사람이 결혼을 하지만 결혼식 날짜, 장소 등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15개월 된 딸을 비롯해 전씨 가족은 5월 중순쯤 한국에 들어왔으며 현재 서울 삼성동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사회플러스] ‘조세포탈’ 전재용씨 집유 확정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씨가 파기환송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7부는 15일 외조부로부터 액면가 167억원 상당의 국민주택채권을 받고도 증여재산을 은닉해 71억여원 상당의 조세를 포탈, 특가법상 조세포탈혐의로 구속기소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재용씨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28억원을 선고했다.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킹 메이커가 된다는 것은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킹 메이커가 된다는 것은

    “킹 메이커라는 게 다 허망하데이.” 지금은 고인이 된 허주(虛舟·김윤환 전 의원의 아호)는 2002년 9월쯤인가 필자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순간 표정도 어두워진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허주는 “내가 이회창이를 용서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김영일(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오라 했다.”고 털어 놓았다.2000년 16대 총선 당시 거물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면서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킨 이회창 후보를 그래도 용서하겠다고 했다. 허주는 천하가 다 아는 킹 메이커였다. 첫번째는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다. 전두환 대통령 아래서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지낸 허주는 전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대통령후보에 지명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985년 문공부 차관 시절 미국 LA특파원 간담회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홍보를 같은 비중으로 해야 한다고 밝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던 허주는 이미 그 때부터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 작업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6공 시절 정무장관을 세번이나 지내고 원내총무 두번, 사무총장 한번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것은 킹 메이커로서의 전리품이다. 허주는 김영삼(YS) 대통령 만들기로 두번째 킹 메이커에 도전한다.YS의 마산 파동을 겪으면서 이를 결심한다.“YS를 대통령 시키지 않고는 나라가 절단날 지경”이라며 YS 지지 이유를 댔다. 허주는 YS 지지자들을 규합해 신민주계를 조직하고 리더역을 자임한다. 수적 우위에 있는 민정계가 미는 이종찬과 YS의 경선은 초반 한때 박빙으로 흘렀다. 민정계 vs 민주계·신민주계의 싸움이었다. 이 때 또 한 명의 킹 메이커가 등장한다. 김종필(JP) 최고위원이다. 공화계의 수장인 JP는 경선이 시작됐음에도 누굴 지지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아 양측의 애를 태운다. 그런 JP가 YS와 전격적으로 ‘하얏트 회동’을 갖고 YS 지지를 선언, 균형 추가 급격히 YS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하지만 허주와 JP는 YS 치하에서 킹 메이커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홀대받는다.JP의 민자당 탈당도 그 결과다. 허주는 이회창 후보를 통해 세번째 킹 메이커를 노렸지만 이 후보의 대선 패배로 실패하고 만다. 공천 탈락이라는 비운까지 겪은 그는 “권력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반면 JP는 김대중 후보와의 DJP연합을 통해 약간 변형된 형태의 킹 메이커로 성공을 거둔다. 하나 공동정권이란 허약한 틀이 오래 지속되기는 힘든 일. 국민의 정부 중반쯤 DJP연합은 결국 붕괴되고 만다. 대권 도전을 포기하고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그도 킹 메이커가 될 수 있을까. 요즘 그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범여권 대선주자 연석회의를 성사시키는 게 우선적 목표 같다. 그런 뒤에 이른바 ‘베팅’을 할 것이다. 계보를 갖고 있는 만큼 지분이 확실히 보장되는 쪽과 손잡지 않겠나 싶다. 범여권 후보군 지지율 1위이면서도 현역 의원이 없어 애를 태우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김 전 의장 입장에선 매력을 느낄 만하다. 하지만 김근태의 역할론을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십수명의 대권 예비주자들이 흔쾌히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넓은 의미의 킹 메이커가 되려는 DJ와 노무현 대통령의 견제를 헤쳐 나가는 것도 과제다. 참 힘든 게 킹 메이커다. 허주의 말은 그래서 무게감 있게 들려 온다. jthan@seoul.co.kr
  • [서울광장] 끝이 좋은 대통령, 꿈인가/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끝이 좋은 대통령, 꿈인가/이목희 논설위원

    대통령 4명의 임기말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정당 취재기자, 청와대 출입기자, 정치부장으로 권력의 부침을 긴밀하게 접할 기회가 있었다. 임기말 대통령 주변은 분노와 체념이 엇갈리는, 묘한 상태가 된다. 이를 ‘2A 딜레마’라고 지칭한 이가 있었다. 우선 깨지는 것은 ‘Almighty(전능함)’. 독재시절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진 권한은 막강했다. 초·중반 잘나갈 때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세가 넘쳤다. 임기가 막바지로 치달으며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관료부터 통제가 안 되고, 청와대 비서관조차 차기 주자에 줄서기에 급급했다. 잘 써주던 언론도 등을 돌리니 섭섭하기 그지없다.“레임덕이 그렇지 뭐.”라며 자신을 달래보지만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울컥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더 기분 나쁜 것은 ‘All right(무오류, 정당성)’의 훼손. 밤잠을 설쳐가며 국정을 돌봤는데 알아주질 않는다. 야당, 언론은 물론 여당 대선주자까지 ‘나라를 망친 주범’ 비슷하게 몰아가는 데 팔짝 뛸 일이다. 기자생활 다섯번째 집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이 달랐다. 언론과 야당이 허니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탄핵소추를 당할 만큼 전능과 무오류는 일찌감치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초반 고난이 막판 역전의 여지를 만들어줬다. 노 대통령이 기본으로 돌아오면 다수 국민들은 박수칠 자세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미 FTA 타결 직후 분위기가 좋았고, 바닥을 친 인기가 올봄 반짝 올랐다. 친인척·측근 비리가 두드러지지 않은 점은 임기말 대통령의 새 패러다임에 희망을 걸게 했다. 온갖 험담과 손가락질을 당한 노 대통령의 반전 드라마를 그려봤다. 정치판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나 국정 마무리에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도 정상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후계자를 자처하는 유력 대선후보가 나타나 책임정치라는 정치원론이 실현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무엇보다 후반이 아름다운 대통령의 전통을 만들어 주길 바랐다. 그런데 왜 싸움판을 진두지휘하나. 노 대통령을 만나면 스스로 복을 차는 이유를 정중하게 묻고 싶다. 일탈의 원인은 둘 중 하나로 짐작한다. 첫째, 과중한 스트레스가 투쟁 성향을 부추겼을 수 있다. 천하의 양김씨도 임기말에는 진이 빠질 정도로 대통령은 힘든 자리다. 대립전선이 훨씬 많았던 노 대통령이 받았을 압박이 이해가 간다. 대통령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청와대 측근들의 의무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그대로 받아주는 대신 밖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성질나는 대로 국정을 운영하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합리적 성향의 측근들이 따로 모여 노 대통령을 진정시키는 방안을 논의해 보는 게 어떨지. 문재인 비서실장부터 각성해야 한다. 전임 대통령들 역시 임기말 노기(怒氣)가 간단찮았지만 나름대로 절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끝까지 ‘김영삼 후보’를 거부했다면 헌정사가 엄청나게 소용돌이쳤을 게 틀림없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정후보 죽이기’란 일각의 건의를 받아들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번째로 노 대통령이 대선과 총선을 겨냥한 전략을 정교하게 짜고 편가르기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참으로 말리기 어렵다. 성공하기 힘들다는 충언도 약발이 먹힐 리 없다. 국가와 노 대통령의 앞날에 큰 불행이 비켜가기를 신(神)에게 간구할 뿐….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사건이 발생하기 1년여 전, 그러니까 1982년 봄 어느날이다. 한 전직 장관(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인이 지인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을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의 남편은 다름아닌 외무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라 있었다. 무당은 부인에게 “염려말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요즘 들어 국상(國喪)이 자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뱉었다. 며칠 후 무당의 말대로 전직 장관 부인 등을 포함, 몇몇 지인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고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조용히 치렀다.(이때 지난해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무당옷을 빌려 입고 유일하게 외부인으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무당은 전직 장관 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관 지명에서 자신의 남편은 탈락되고 대신 이범석씨가 신임 외무장관이 됐다는 것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무당은 “변명 같지만 전화위복이 될 테니 두고 보라.”고 위로했다. 해가 바뀌어 1983년 9월. 무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일날(음력 8월18일)에 주위 친한 사람들을 일부 초청, 점을 봤다. 그런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무당은 “버마(미얀마) 가면 안 되는데, 버마 가면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달 뒤인 10월7일 밤, 무당은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건 개꿈이야, 개꿈!”하면서 남쪽을 향해 침을 퉤퉤 내뱉었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아침 아웅산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위기일발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범석 외무장관을 포함,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운명을 ‘재천’이라고 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상황이 떠올려진다. 첫째, 당초 전직 장관 부인의 뜻대로 남편이 외무장관에 발탁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당의 말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둘째, 무당이 ‘버마’를 운운한 점, 또 ‘대통령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미얀마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어쨌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운 좋게도 살아 돌아왔다. 운명의 조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을 앞두고 신(神)의 전주곡 같은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이 피범벅이 된 끔찍한 사건일수록 그 뒷얘기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살아온 60년 이 시대의 큰무당,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金錦花·77)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뿌린다. 작두 타며 신을 만나는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에 처음 신과 만났으니 올해가 꼭 60년째가 된다. 한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한국인’이 됐다.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갈 때마다 단연 ‘인기캡’으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내에서 서해안풍어제(무형문화재82-2호) 굿판을 벌일 때도 많은 외국팬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그는 2년 전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30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해 무속체험장인 ‘금화당’ 간판(글씨는 ‘도올’이 썼다.)을 내걸었다. 서해안풍어제 굿판을 벌이기에도 좋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땅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울 이문동의 서해안풍어제연구소와 금화당을 오가며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신과 가까이에서 ‘경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이문동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소박한 한복차림에 활짝 웃으면서 반긴다.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금화당’ 얘기를 먼저 꺼냈더니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워싱턴·LA 공연을 비롯, 유럽 각지의 해외공연을 수십차례 다니면서 무속 체험장 같은 공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으로도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세계 연극평론가 70여명, 외국 신문사 기자, 천주교 수녀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무속박물관이 내 꿈 아울러 여력이 되면 무속박물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200여년된 탱화 등 우리 무속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다수 소장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을 가졌다. 나이 다섯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금화’라 했다. 그의 신기는 어릴 적부터 신통방통했다. 열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췄다.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혔다. 열일곱살되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시름시름 무병을 앓던 그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내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신의 딸’이 됐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돼 금화의 허주굿(온갖 잡신을 몰아주는 굿)을 해주었다. 금화는 이어 내림굿을 하면서 작두를 탔다. 열아홉살되던, 즉 6·25직전 어느날었다. 금화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물론 신의 계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던 터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안 금화는 숨어다녔으나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리자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요.” ●올해 일어날 일은 비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에는 굿을 할 수가 없어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석, 우수상·공로상·개인상·단체상 등을 싹쓸이하면서 당당한 민속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의 초청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때 작두 타는 모습 등을 비롯,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선보여 많은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후 매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해외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올해 큰 사건은 없느냐고 하자 “그건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너무 빠르다. 순리대로 가야 하며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9월 금화당에서 무녀인생 60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을 벌일 예정이니 그때 구경 오라고 당부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황해도 연백 출생. ▲46년 외할머니에게 허침굿(허주굿), 내림굿, 솟을굿을 받음. 방수덕·권만신에게 대덕굿, 철물이굿, 배연신굿, 대동굿 등 전수. ▲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으로 방미. ▲84년 미국 하와이주 인간학연구위원회 및 하와이대재단 초청공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대동굿 기능보유자 지정. ▲95년 김금화대동굿(연강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9)국가기록원 포털 검색결과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9)국가기록원 포털 검색결과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정부가 6월 항쟁을 기리는 첫 기념식을 개최할 예정이지만 정작 6월 항쟁과 관련한 정부 기록물은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8일 서울신문이 정부의 모든 기록물을 관리하는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국가기록포털(contents.archives.go.kr)’을 검색해 본 결과 ‘6월 항쟁’과 관련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국가기록연구 관련 전문가들은 ‘기록이 없으면 정부도 없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정부의 대안 마련을 촉구했다. 국가기록포털에는 역대 대통령 재가 문건과 기관별 간행물 등 총 982만 4810건의 국가기록물이 있지만 1987년 6월 항쟁 당시 기록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4·13호헌’과 ‘6·29선언’의 전문조차 없었다. 국가기록포털은 국가기록원에 이관된 모든 준영구보존 이상 국가기록물을 대상으로 국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찾아볼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사이트로 조선시대와 일제시대, 정부수립 후 각종 문서와 도면, 시청각자료 등을 검색해 볼 수 있다. ●박종철열사 정부간행물 고작 10건 검색 결과에 따르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에 대한 기록은 시청각기록물 1건과 정부간행물 10건에 불과했다. 시청각기록물은 공보처(현 국정홍보처)가 촬영한 ‘이한기 국무총리 박종철사건 수사결과 관련 담화문발표’ 자료였다. 정부 간행물 중 87년 1월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진 사건에 대한 정부 기록은 없었다.6월 항쟁의 상징인 이한열 열사에 대한 기록도 1건에 불과했다. 이 기록도 2005년 울산시교육청에서 발행한 계간지인 ‘울산교육’의 간단한 언급에 불과했다. ‘4·13호헌조치’도 ‘정관용 총무처장관이 총무처 4급 이상 공무원 부부에 대한 4·13호헌조치에 대한 특강’과 관련한 시청각기록물 8건이 전부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87년 4월13일 발표한 특별담화 전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87년 당시 전 전 대통령의 기록물도 연설문집 1건이었다. 그나마 시청각기록물은 9048건을 찾을 수 있었다.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선언’과 관련된 기록물은 단 한건도 없었다.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원 관련 기록물도 시청각기록물 90건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나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이 시위진압을 위해 사용한 최루탄에 대한 기록이나 6월 항쟁 지도부 구실을 했던 국민운동본부(국본)에 관한 기록물도 없었다. ●“관련 자료 이관받지 못했다” 해명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각 기관에서 이관받은 6월 항쟁 관련 자료는 숫자도 워낙 적고 내용도 빈약해서 국가기록포털 특집으로 공개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면서 “국가기록포털 ‘이달의 기록’이라는 코너에서 오는 29일쯤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4·13 호헌 담화는 전문을 이관받지 못했고 시국사건 재판기록은 30년이 안 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개할 수 없는 상태”라면서 “또 6·29선언 전문은 발표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표 신분이기 때문에 정당 기록은 이관받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민간연구소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전진한 선임연구원은 “국가기록원은 각 부처에 흩어져 있는 민주화 관련 기록들을 적극적으로 이관·수집 받아 국민들에게 공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국민들이 알고자 하는 기록물을 국가기록포털에서 찾을 수 없다면 국가기록포털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 교수는 “현재 국가기록포털은 일반인이 손쉽게 접근하기 힘든 구조로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나마 중앙기관은 국가기록원이 있지만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시조차 그런 기관이 없다.”면서 “기록관리전문기구가 모든 공공기관에 그물처럼 연결돼 있는 중국처럼 국가기록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정비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10일 정부차원 첫 기념식 ‘6월 민주항쟁’을 기리는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린다. 정부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10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민주인사 및 정부, 각계 주요 인사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정부 기념식을 갖는다고 8일 행정자치부가 밝혔다. 정부는 지난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 매년 6월10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국민이 꽃피울 희망의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에는 1987년 6월10일 태어난 ‘87둥이’ 등이 특별 초청되고, 식전 행사인 ‘다시 부르는 6월의 노래’ 순서에서는 6·10 민주항쟁 당시 대학생이었던 386세대와 그들의 자녀, 경찰관이 함께 나와 노래를 부른다.9일에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전야제가 열리며, 전국 시민축구 축전 등 전국적으로 38개 지역에서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정부 기념식과 별도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한국진보연대(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10일 낮 12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범국민 대행진’을 벌인다. 범국민대행진은 6월 항쟁 참가자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자유 발언과 문화 행사를 마친 뒤 서울 광장을 출발해 명동성당까지 행진해 20년전 그날의 감동을 되살릴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던 상황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전투경찰 전투모에 꽃을 꽂아주던 여성 등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장면들도 재현할 계획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세번의 독재 광풍 6월항쟁으로 종식”

    “우리는 3번의 독재를 겪었습니다.6월 항쟁으로 독재를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연세대김대중도서관에서 외신 기자 간담회를 갖고 6월 항쟁과 6·15남북공동선언, 정치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참석한 외신기자단 30여명은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취재한 기자들로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방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와 3번 싸워 결국 민주주의를 확립했다.”면서 “한국이 고난의 세월을 지날 때 세계 각국으로 기사를 타전해줘 고맙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6월이면 남북한을 대화와 타협의 길로 들어서게 한 6·15 남북공동선언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 “2·13합의 이후 6자 회담은 성공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향후 한국·중국·미국·북한의 4국 평화협정도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일본 등 일부에서 북에 쌀이나 비료를 지원하거나 개성공단을 만든 것 등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러나 북한을 도움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의 북한 영향력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북한 생필품의 80%를 생산할 정도로 경제적 영향력이 큰데 우리가 경제적으로 북한에 진출해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북한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올해 대선에서 여권후보 단일화가 가능하냐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는 “단일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현재 국민이 여권의 후보 누구에게도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서도 단일화된 후보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에 의해 결국 단일화될 것이며 그러한 조짐이 지금 서서히 보이고 있다.”면서 “선거 전망은 지금 예측하긴 어렵지만 여권이 단일 후보를 내 정책 대결을 한다면 결국 시소게임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9일 성공회대 성당 앞뜰에서 열리는 6·10민주화항쟁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할 예정이다.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87년생들 ‘87년 6월항쟁’ 만나다

    6월만 되면 어디선가 피끓는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부르짖던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방송가는 다양한 ‘6·10항쟁 특집’기획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KBS가 가장 다채롭고 풍성하다. 주말인 9∼10일 오후 8시에는 ‘KBS스페셜’로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을 가른 스무날의 의미를 되새겨본다.1987년 6월10일부터 29일까지 과연 무엇이 수십만명의 시민을 매일같이 바리케이드 앞에 서게 했던 것일까. 또 그 열망들은 20년이 지난 오늘 얼마나 성숙하게 자리잡았을까. ‘미디어 포커스’도 9일과 16일 오후 10시30분 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데 동원된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을 되돌아보는 ‘제1편:각하, 만수무강하십시오!’ 와 ‘제2편:하늘이 내린 대통령’을 차례로 방송한다. 또 9일 밤 10시50분 ‘특집 콘서트 7080’과 10일 오후 5시50분 ‘특집 열린 음악회’도 1980년대를 기억하는 문화인들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밖에 10일 오후 11시10분 ‘6월 항쟁 20주년 대토론’에서는 함세웅, 신영복, 최장집, 조희연, 김호기 등 당시 항거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학자들로부터 의미와 과제 등을 들어본다.SBS는 10일 오전 6시50분부터 ‘6·10민주항쟁 20주년특집-나의 6월 이야기’를 1,2부에 걸쳐서 방송한다. EBS는 기성세대의 중심이 된 386세대와 갓 성년이 된 1987년생들로부터 민주항쟁의 의미를 들어보고, 그들의 인식 차이를 엿보는 시간을 마련했다.‘시사, 세상에 말 걸다’는 8일 오후 10시50분에 6월 항쟁 당시 역사의 현장에서 선봉 노래패 역할을 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어 대한민국 민주화와 동갑내기이지만 ‘운동권’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노찾사’ 노래에 공감하지 못하는 1987년생 대학생들도 만난다. 케이블 히스토리채널의 ‘역사 특강, 숨은 그림 찾기’는 9일 오후 6시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 이후 민주화 열망이 본격적으로 타오르는 과정을 들여다본다.MBC ‘100분 토론’은 7일 오후 11시5분 서울광장에서 ‘1987년 6월 그리고 오늘’이라는 주제로 특집 생방송을 진행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8) 당시 외신기자가 본 6월 항쟁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8) 당시 외신기자가 본 6월 항쟁

    시위대와 전투 경찰의 벼랑끝 대치, 호헌철폐 구호와 최루탄으로 뒤덮였던 1987년 6월의 거리에는 언제나 푸른 눈의 기록자들이 있었다. 독재 정권에 재갈이 물렸던 국내 언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현장을 누비며 민주화에 대한 한국 민중의 목마름을 전세계로 타전했던 외신 기자들이 그들이다.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한국을 다시 찾은 스펜서 애덤 셔먼(51) 전 UPI통신 한국지국장과 로렌스 슈크 맥도널드(53) 전 AFP통신 기자를 7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만나 87년의 뜨거웠던 여름에 대해 들어봤다. 두 전직 저널리스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8∼9일 개최하는 ‘국제언론인 세미나’의 토론자로 초대됐다.87년 봄 나란히 종로구 안국동 사무실에 부임하면서 20년 지기의 정을 이어온 이들은 “인터뷰는 많이 해봤지만 인터뷰 당하기는 처음이라 떨린다.”며 말문을 열었다. ●“87년 6월은 내 생애 가장 극적인 기억” 87년 6월은 이방인들의 뇌리 속에 어떤 잔상으로 남아 있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셔먼은 “6월23일쯤부터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2의 광주 사태가 될 것이라는 등 갖가지 소문에 뒤숭숭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하지만 29일 노태우씨가 6·29선언을 했고 군사 독재는 종식됐다. 한국인의 바람이 실현되고 자유를 얻은 그날이, 한국인뿐 아니라 내 인생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맥도널드는 울산 등에서 파업 현장을 취재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며 각종 진압 장비로 압박하면 노동자들도 중장비를 동원해 맞섰다. 마치 전투를 앞두고 두 나라의 군대가 대치한 것 같았다. 중간에서 숨가쁘게 취재를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끼곤 했다.”고 회상했다. 군부독재가 막바지로 치닫던 당시 한국의 상황은 외신기자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셔먼과 맥도널드는 “정보요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이 한 달에 한 번씩 사무실에 들러 동정을 살피곤 했다. 그들은 늘 우리를 의심했고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소속사의 한국인 동료들과 기자들이 시위 현장으로 안내하곤 했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학생·가정주부 등 민중의 힘 크게 작용” 6월 항쟁의 성과에 대해 두 사람은 의견을 같이했다.“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피플파워로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본다. 학생들은 물론 회사원, 가정주부, 상인 등 민중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아시아의 독재정권들이 꿋꿋하게 버틴 것과 달리 한국에서 어느 정도 민주화 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 88서울올림픽을 꼽았다. 맥도널드는 “전두환(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유치가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줄 거라고 생각했다(장기 집권의 든든한 견인차가 될 것이라는 의미). 하지만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올림픽을 앞두고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군사 정권이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측면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출지상주의 경제정책도 본의 아니게(?) 민주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왔다. 셔먼은 “내수 위주의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유지한 필리핀 등과 달리 수출에 목숨을 건 한국의 독재자들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美 언론의 잘못된 길을 답습하지 않길…” 두 사람이 90년대초 항공편 환승을 위해 하루 정도 머물렀던 것을 제외하면 20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4일밤 입국해 서울 곳곳을 누비며 옛 기억을 더듬었던 셔먼과 맥도널드가 가장 놀란 점은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인 건축물들이 철거되고 도심이 ‘리빌딩’됐다는 점이다. 반면 80년대 후반 허허벌판에 가까웠던 강남이 역설적으로 일본 도쿄의 긴자처럼 변한 것 같다고 이들은 밝혔다. 기자실 통폐합 논란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셔먼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기자실 시스템이 비슷하다고 알고 있다. 일본의 기자단은 경쟁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며 정부와 유착돼 있는 끔찍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맥도널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해 말하기 곤란하다.”면서도 “인터넷 매체의 발달 등에 따라 변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와 언론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은 “미국의 미디어는 거대 자본에 잠식되면서 독립성을 잃어가고 있다. 자본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면서 “역동적인 민주 사회인 한국은 미국 언론이 저지른 과오를 답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맥도널드도 “저널리스트는 일체의 외부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영혼을 가져야 하며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글 사진 임일영 류지영기자 argus@seoul.co.kr ■‘6·10항쟁’ 통한 언론 반성과 역할 “6월 항쟁은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내용의 6·29선언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제 언론은 6월 항쟁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 부채를 갚아야 할 시점입니다.” 김창룡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교수는 7일 언론재단·기자협회·언론정보학회 주최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6·10항쟁 20주년, 언론의 반성과 역할’ 토론회에서 한국 언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김 교수는 ‘6·10항쟁의 정신과 한국언론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글에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언론이 진실을 찾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5공 보도지침에 대한 작은 반란이 시작됐다.”면서 “앞으로 언론은 정의 구현과 진실 추구, 인권 수호, 민주주의로 요약되는 6월 항쟁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기자협회가 지난해 8월 전국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신뢰하는 언론사가 없다.’는 답변이 무려 45%에 달하는 등 일선 기자들조차 언론을 불신한다면 누가 언론을 신뢰하겠느냐.”면서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로 언론인을 위한 윤리강령과 보도강령 준수를 고용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6·10항쟁 정신 계승을 위한 5가지 제언’을 통해 언론의 자기 반성과 다짐을 요구했다. 그는 “세월이 바뀌었지만 권력 기관이나 출입처 보도자료에만 충실하며 영웅 만들기와 신화 창조에 앞장서는 관행은 여전하다.”면서 “그런 보도 태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육사의 혼이 빚은 지도자’로 홍보했던 5공 시대 언론이 떠올라 참담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진실 추구는 게을리하면서 호들갑만 떠는 것은 한순간 눈길을 잡을 수는 있지만 6월 항쟁 정신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난해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장민호씨나 2003년 송두율 교수 구속 사건에 대해 일부 언론들은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간첩’이라고 단정짓는 보도를 내보냈다고 지적하면서 “정치적 편향이나 이념 문제로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혀 여론 재판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언론은 어떤 경우에도 인권 수호의 보루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영방송이 상업주의에 물드는 것 아니냐는 뼈아픈 충고도 있었다. 그는 “5공화국 당시 공영방송은 ‘땡전뉴스’로 시청자를 기만했고 이런 권언유착의 폐해는 국민이 떠안아야 했다.”면서 “이제는 권언유착 문제가 해소된 대신 일부 상업주의 폐해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내부감시 시스템 구축과 조직내 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 교수는 “언론사는 홍보기관이 아니고 진실 추구를 생명으로 한다.”면서 “6월 항쟁의 이면에는 언론으로부터 진실에 목말라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만큼 진정한 민의의 대변자, 주장보다 사실에 충실하고 과장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말을 맺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7) 한국민주주의 운동 토론회-지상중계 (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4∼5일 이틀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서는 외국 학자들이 본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발표회가 참석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에드워드 베이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자문위원과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 교수 등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의미와 과제 등에 대해 발표했다. ●6월 항쟁은 민주주의 운동이자 근대화 운동 하이데 교수는 5일 ‘한국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개인적 단상’이라는 기조 발제에서 “1986∼87년 민주화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 운동인 동시에 근대화 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데 교수는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발전의 양면성’을 통해 민주화 20년을 조망했다. 그는 “6월 항쟁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력과 더 근대화된 사회를 원하는 세력이 힘을 합쳐 전두환 정권에 대항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진단하고 “이런 맥락에서 6·29선언은 민주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권력 엘리트들의 전술적 후퇴였으며 동시에 근대화론자들의 부분적인 승리였다.”고 평가했다. 권력 엘리트 가운데 근대화론자들과 형식적 민주화를 요구하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6·29선언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는 것이다. 반면 6·29선언 이후 실질적인 민주화를 위한 첫 단계로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노동자들은 즉각 극심한 탄압에 부딪쳤다고 꼬집었다. ●외환위기 민주주의 운동 취약점 드러나 하이데 교수는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근대화의 범위를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취약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그가 지적하는 취약점은 노동계급운동 진영이 ‘민족주주의-보수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 사이에서 적절히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민족주의-보수주의자들은 한국 국가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노동조건을 제한하려 했고, 신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노동조건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내세우며 세계시장을 개방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신세대 사이에서는 신기술로 가능해진 기회를 활용해 전혀 새로운 운동이 싹텄다.”면서 “그 징후는 노무현 후보 당선과 탄핵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한국 민주주의 도전 과제 많다’ 베이커 자문위원은 지난 4일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고찰과 결론’에 대한 기조발제에서 “한국 국민들은 유신반대운동, 광주항쟁,6월 항쟁 등을 자체적으로 잘 풀어왔고,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며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하루키 교수는 ‘한국의 민주혁명 30년과 일본’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에서 “광주 항쟁은 운동의 비폭력적 성격과 모순되지 않는 비폭력 운동의 혁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서 “6월 항쟁은 유신체제의 폐지를 얻어냈다.”고 평가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손호철교수 ‘민주화 진영’ 비판 “민주화운동 출신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최소한 겸손한 자세만 보였어도 지금과 같은 위기는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5일 발표한 ‘한국 민주주의 20년, 성과와 한계 그리고 위기’를 통해 민주화 운동세력과 노무현 정권을 거세게 비판했다. 손 교수는 “민주화 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 어쩌면 최대 위기에 처해 있다.”며 도덕성 추락과 무능을 지목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에게 정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오만과 독선’일 것”이라고 개탄했다. 손 교수는 “정통성을 과신한 김영삼 정권의 오만과 독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오히려 증폭됐다.”면서 “이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청개구리마냥 자신의 노선을 고집하는 한편 오히려 국민을 비판하고 원망하는 노 대통령과 측근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내용은 별로 없고 정책은 보수적이면서도 스타일만 급진적이어서 빈 수레만 요란한 개혁으로 잡음을 일으키고 기득권 세력의 불안감을 조성해 사회 갈등을 불필요하게 증폭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화운동 진영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누려왔던 도덕적 우위가 무너졌다.”면서 “대표적인 것이 각종 비리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권뿐 아니라 민주노총도 현장 지회는 말할 것도 없이 중앙지도부까지 비리에 연루될 정도니 할 말이 없다.”고 꼬집었다. 손 교수는 민주화운동 진영이 위기를 겪게 된 구조적인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꼽았다. 그는 “자유주의정권인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서민과 중산층의 정부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다.”면서 “군사독재정권들보다 더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 가장 반서민적인 정권이 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화운동 진영이 그동안 북한 인권문제와 민주주의에 침묵하는 이중성을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북한 문제도 대중들이 민주화운동 진영의 진실성과 헌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작은 정부론/정정길 등 지음

    지난달 정부가 올해부터 2011년까지 공무원 정원을 5만 1223명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전문가들은 일제히 우려를 표시했다. 정부가 지나치게 ‘몸집 불리기’에 치중하는 것은 ‘작은정부’라는 시대적 요청에 역행한다는 지적이었다. 과연 그럴까. 공직 규모를 늘린다고 해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꾀하는 행정개혁에 역행하는 것일까. ‘작은 정부론’(정정길 등 지음, 부키 펴냄)은 ‘작은 정부’의 진정한 의미, 행정 개혁의 올바른 방향 등을 역사적·학술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정정길 울산대 총장 등 저자 5명은 모두 행정학 전문가들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개혁이 공직의 축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중앙정부 권력의 분권화, 정책 결정에 시민사회 참여 정도, 규제개혁 등을 포괄하면서 사회적 조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경제적 접근, 관리론적 접근, 권력적 접근, 지방분권적 접근 등 네 가지 다른 시각으로 작은 정부를 정리했다. 1부 ‘작은 정부의 이론적 배경’에서는 네 가지 시각의 이론적 배경과 함께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국가의 행정개혁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2부 ‘역대 정부의 행정개혁 방향 및 평가’에서는 작은 정부의 개념이 도입된 전두환 정부를 시작으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까지의 각종 개혁 노력을 평가하고, 작은 정부 지향의지가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현 노무현 정부의 각종 개혁 실태도 분석했다. 역대 정부에 대한 평가 역시 네 가지 시각에서 접근법을 달리했다. 저자들은 3부 ‘작은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향후의 정책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세계화, 공공부문 재정악화, 민주화, 정보화, 지방화라는 환경변화 속에서 ▲공공기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축소 ▲핵심 규제의 완화 ▲재정지출의 우선순위 개선 ▲조직축소 및 인력감축 ▲성과관리 제도·인사분권화 확립 ▲대통령 중심의 행정권 약화·국회에 의한 통제의 확보 ▲주민과 행정의 파트너십 강화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규모축소 만이 작은 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강했다.”면서 “하지만 정부의 규모와 권력의 크기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에서 진정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작은 정부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정권의 이해에 따라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흐지부지됐던 역대 행정 개혁 정책들의 내실을 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충고했다.2만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데스크시각] 기자실 폐지에 항거하는 이유/박정현 기획탐사부장

    주변의 지인들에게 ‘기자실 폐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대략 세 종류다. 어떤 이는 “정부의 발표기사만 쓰게 하겠다는 것은 공산주의식 발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고,“언론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꺼내는 이도 있었다. 잘 모르겠다는 무덤덤한 대답도 돌아왔다. 언론계가 기자실 폐지에 일제히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혹시 기자들이 오갈 데 없고 불편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지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이들은 아니나 다를까,“기자들이 불편해질 것”이라는 말꼬리를 달았다. 8월에 브리핑 룸이 통폐합되고 기자들의 직접 취재가 원천봉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민의 알 권리라는 거창한 헌법상 권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예로 들자. 경찰은 보복폭행 사건을 한달 넘게 쉬쉬하고 은폐했다. 재벌그룹 회장이 폭력배를 동원했고, 주먹질을 했다는 사실을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보도했고, 온 국민이 알게 됐다. 기자실이 폐쇄되고 직접 취재가 불가능해지면 기자들은 경찰 발표만 써야 한다. 경찰이 감추려 들면 확인할 길이 없다.8월 이후에는 보복폭행 같은 일이 일어나도 국민들은 알기 어려워진다. 지난 연말에 인천의 한 백화점에 불이 났을 때 백화점 측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암구호 방송을 통해 고객들이 놀라지 않고 안전하게 대피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하지만 다음날 백화점의 거짓말, 언론의 오보로 판명났다. 백화점 측의 일방적인 설명에 언론과 국민이 놀아났다. 오보 소동은 언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보여준다. 언론이 오보를 하고 과잉보도를 하는 역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언론이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백화점 설명에 의문을 갖고 추적해 백화점 설명을 뒤엎고 진실을 보도하는 것도 언론이다. 정부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기 일쑤다. 예산 확보 방안도 세워놓지 않고 이런저런 큰 정책을 펴겠다고 일단 발표하고 본다. 언론이 따지고 들면 금방 현실성 없는 정책으로 드러난다. 잘못된 일이 있다면 감추려 한다. 그게 정부의 속성이다. 기자실이 없어지면 정부 발표가 거짓인지, 과대포장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잘못된 일을 밝혀내고 고치는 일도 쉽지 않다. 비서동 출입을 제한당한 참여정부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춘추관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참여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이런 행태가 한해에 160조원 이상을 쓰는 정부기관으로 확대된다. 자칫하면 공기업으로 확대될지 모를 판이다. 한양대 안동근 교수는 “밀실행정을 하겠다는 것”이라면서 “공무원이 기자와 만나고 나서 언제 누구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보고서를 쓰게 하는 것은 기자와 만나지 말라고 겁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방침이 시행되면 취재가 위축되는 냉각효과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내놓은 논리가 ‘언론사 난립’이었다. 통신·신문·방송을 통폐합했고, 저녁 9시 뉴스가 시작되면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이 방송되는 ‘땡전 뉴스’가 나왔다. 참여정부는 언론의 취재방식을 합리화, 정상화해서 언론자유를 확장한다는 논리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내놓았다. 안동근 교수는 “권력은 언제나 언론을 통제하려 든다.”고 말했다. 언론계가 기자실 폐쇄와 직접취재 봉쇄에 항거하는 이유는 ‘땡전 뉴스’ 같은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홍보 보도를 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그래서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언론계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정현 기획탐사부장 jhpark@seoul.co.kr
  • “목이 멜 만큼 감개무량” YS 5·18묘지 첫 참배

    김영삼 전 대통령이 5·18 단체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22일 오전 김무성·정의화·이경재·김기현 의원 등 전·현직 의원 일행 20여명과 묘지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재판에 회부하고, 현재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3당합당’을 이유로 방문을 저지하는 남총련 학생들에 의해 참배가 무산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방명록에 ‘自由(자유)·正義(정의)·眞實(진실)’이라고 적은 뒤 5·18단체 회원 100여명의 환영을 받으며 추모탑 앞에서 헌화·분향하고 묘역 마당에 금목서 나무를 심었다. 그는 이어 박경순 5·18묘지 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고 홍남순 변호사의 묘 등 묘역 곳곳을 둘러봤다. 또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유영 봉안소를 둘러본 뒤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며 “잘 꾸며진 묘역을 보니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찬장으로 이동, 재임 당시 5·18 특별법 제정, 국회청문회, 국립묘지 승격 등이 이뤄진 점에 대해 5·18단체가 만든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1997년 묘지 성역화사업이 마무리된 이후 처음으로 참배하게 돼 목이 멜 만큼 감개무량하다.”면서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살아온 만큼 5·18 희생자와 동지들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그 뜻을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