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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12·12때 민간정부 지지

    美, 12·12때 민간정부 지지

    1979년 신군부에 의한 12·12사태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정치적으로 민간 정부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힌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신군부가 작전통제권에 관한 한·미 합의를 위반한 점을 집요하게 지적하는 한편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통상부는 이같은 내용이 담긴 18만여쪽의 외교문서를 22일 공개했다. 연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정부의 외교문서 공개는 올해로 17번째다. ●北 남침 가능성 심각히 우려 12·12 쿠데타 발생 다음날인 13일 오후 5시30분(현지시간)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DC에서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를 초치, “너무 급격한 군 체제 변동으로 군 지휘 체계가 동요되면서 김일성이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김일성이 모험하는 경우 미 행정부로서는 대한(對韓) 방위 공약을 이행할 것이나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서는 미국 내에서 한국에 불리한 여론이 크게 대두될 것이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신군부 작통권 위반에 불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13일 최규하 대통령을, 14일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각각 만난 데 이어 19일 박동진 외무장관을 면담해 불만을 표출했다. 글라이스틴은 “한국군이 미국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으며,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위반 및 위계질서의 문란은 놀라울 정도에 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해 미 군부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이런 불만은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미 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민간 정부와 상대할 것이며 민간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부고] 한국전 참전 헤이그 전 美국무장관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일 새벽(현지시간) 사망했다. 85세.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소재 존스홉킨스 병원 측은 이날 입원 치료를 받아 오던 헤이그 전 국무장관이 감염에 따른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4성 장군 출신인 헤이그는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등 3개 공화당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과 국무장관 등 고위직을 지냈다. 헤이그는 특히 레이건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서 1980년대 초반 한·미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기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첫 외국정상으로 미국에 초청했을 때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정치적 지지 문안을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포함시키려다 헤이그의 거부로 무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헤이그는 레이건 대통령 핵심참모들과의 갈등으로 17개월 만에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47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 생활을 시작한 헤이그는 6·25전쟁 때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참모로 직접 참전해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이후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969년 당시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군참모로 발탁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69~1974년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대령에서 4성 장군으로 고속 진급하며 승승장구했다. 국무장관 재직 시절 발생한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 직후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부통령의 귀환을 기다리면서 지금은 내가 백악관을 통제하고 있다.”고 선언한 일화는 과도한 권력집착 성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헤이그는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려다 포기하고, 1988년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중도하차하며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다. kmkim@seoul.co.kr
  • [도시와 길] 진골목의 명품·명물

    [도시와 길] 진골목의 명품·명물

    진골목 최고의 명품은 미도다방이다. 정인숙(왼쪽·58)사장이 1982년 문을 열어 28년째 진골목을 지키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하루 2000~3000명의 손님들이 찾았다. 줄을 서서 들어오고 나갔을 정도였다. 일하는 아가씨만 11명이었다. 손님 대부분 60대 이상 노년층이다. 이들 중에는 대구경북 지역의 유림·문인·예술인들은 물론 전직 대학총장과 교수들까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 수두룩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대구에 오면 꼭 이곳에 들른다고 한다. 퇴임 후 온 것만 5번이나 된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미도다방을 들렀고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는 대통령선거 출마 당시 선거운동차 대구에 왔을 때 이곳을 찾았다. 이밖에 박준규 전 국회의장, 김종필 전 총리도 손님 명단에 포함돼 있다. 많이 줄었지만 요즘도 300~400명의 단골이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인터넷 등에서 검색하고 찾아오는 젊은이와 타지 사람들도 있을 정도. 이러다 보니 진골목 식당의 평판은 이 다방에서 판가름난다고 한다. 단골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당의 맛이나 서비스 등이 금세 소문난다는 것. 정인숙 사장은 “찾아오는 손님을 가족이라 생각하고 맞는다. 이런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 많은 어르신들이 찾는 것 같다.”고 했다. 정소아과(오른쪽)는 진골목 중간쯤에 있다. 1937년에 지어진 벽돌조 2층 양옥이다. 근대 건축물 가운데 양옥 주택은 거의 남지 않아 당시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34㎡의 대지에 히말라야시더가 심어진 정원, 별채가 2층 양옥과 잘 어울려 있다. 1947년 정필수(91) 원장이 정소아과를 열었다. 정소아과는 60년 넘게 진골목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건강과 새로운 삶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정소아과는 지난해 2월 문을 닫았다. 고령인 정 원장의 건강상태가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 창신동 시장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 창신동 시장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뉴욕의 소호, 파리의 생투앙 벼룩시장, 도쿄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세계적인 도시를 대표하는 쇼핑 골목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 관광객들을 모으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서울 동대문 지하철역 근처에 자리잡은 창신동에는 결코 이들 거리에 뒤지지 않는 특색이 있다. 이제는 찾기조차 힘든 도장집이 가득한 인장거리와 물고기가 숨쉬는 수족관 상가, 학용품이라면 무엇이든 다 있는 문구·완구 상가, 동대문 신발 도매상가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을 이어온 허름한 상점 하나하나마다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힘이 느껴진다. ‘인장거리’에는 한평 남짓한 공간의 인장집들이 40개에 달한다. 1950년대 부흥사 등 점포 2개와 노점상으로 시작돼 1990년대 초에는 80여개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2008년 인장공예부문 명장으로 선정된 거인당의 유태흥(70)옹의 손에서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인감도장이 태어났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정부가 대통령 부인 바버라 여사와 딸 제나에게 기념 선물로 준 도장 역시 유 명장의 손을 거쳤다. 인장거리는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관광기념품을 마련하기 위해 찾으며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인장거리와 맞닿은 수족관 상가는 우리나라 수족관 시장의 효시로 꼽힌다. 수입이 금지된 어종을 제외하면 60여개 상가 중 어느 한 곳에서는 원하는 물고기를 만날 수 있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에 비해 20~40% 싸기 때문에 수족관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대문역 4번 출구를 나와 신설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창신동 문구·완구 골목은 봄 방학을 맞은 지금이 최고의 성수기다. 무려 110여개의 크고 작은 상점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문방구들의 문방구다. 시장을 제대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오후 6시까지는 방문해야 한다. 길이 좁고 주차시설이 부족해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가족들에게 신발을 선물하고 싶다면 동대문상가 가, 나, 다동과 동문시장으로 이뤄진 신발 도매상가를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한국 신발도매의 1번지’답게 1800여개 업체가 시중보다 30~50% 싼 가격에 모든 종류의 신발을 갖추고 있다. 유명브랜드에서부터 중저가 브랜드, 고무신, 등산화 등이 마치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입을 다물기 힘들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전두환차남 증여세 77억 내야” 부과취소 소송 항소심도 패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씨가 증여세 80억여원을 취소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했다. 서울고법 행정6부(부장 황찬현)는 10일 재용씨가 서울 서대문세무서를 상대로 낸 증여세 부과처분 취소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2000년도 귀속분 증여세 80억여원 가운데 3억여원을 제외한 77억여원을 납부하라.”는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앞서 서대문세무서는 재용씨가 2000년 증여받은 액면가 167억원의 국민채권 중 73억 5000만원은 외조부에게서, 나머지 93억 5000만원은 아버지 전 전 대통령에게서 증여받은 것으로 보고 증여세 80억원을 부과했다. 이에 대해 재용씨는 “해당 채권은 1988년 결혼축의금으로 들어온 20억원을 외조부께 관리를 맡겨 놓은 돈으로 외조부가 이 돈을 관리하면서 증식돼 2000년 말 채권형태로 돌려받은 것”이라며 세무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전두환, 1981년 한·미정상회담서 정치적 지지 요청”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2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첫 한·미정상회담 당시 공동성명에 미 행정부의 정치적 지지를 명시적으로 포함시키려 했으나 미국 측의 거절로 무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측의 거절로 무산 8일(현지시간) 미국 조지 워싱턴대 부설 민간연구기관인 국립안보문서보관소(NS A)가 이달 초 기밀해제로 공개한 미 국무부 공문서에 따르면 2월1일 노신영 외무장관과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 간 양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 측은 공동성명 초안에 정치적 지지 문구를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국무부 문서는 “한국이 가지고 온 공동성명 초안에는 한국의 정치적 안정을 복원하기 위해 취한 전 대통령의 다양한 조치들을 지지하는 ‘정치적’ 문장들이 포함돼 있었다.”며 이에 헤이그 장관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헤이그 장관은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초청한 것 자체가 말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미 행정부는 한국의 국내 문제에 대해서 공식적인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 측 요구를 거절했다고 국무부 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공개된 국무부 문서에는 레이건 행정부의 집권 초 전 대통령에 대한 인물평이 자세히 나와 있어 관심을 끈다. 리처드 알렌 국가안보보좌관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한 그해 1월29일 문건에는 “전 대통령은 지난 12일 김일성 북한 주석을 한국으로 조건 없이 초청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한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식 많이 부족하지만 습득속도 빨라” 국무부 내부 브리핑 자료에서는 “유교적이고 독재적 스타일의 전 대통령은 신속한 해법을 추구하는 충동적 성향이 있으며, 지식은 많이 부족하다.”면서 하지만 “지식습득 속도가 빠르며 젊은 측근 참모들에 비해 독선적이지 않고 융통성도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충고에 대해서는 “전 대통령은 미국의 충고가 (공개적이지 않고) 사적으로 전달되고, 미국과의 상호협력이 전제될 때 충고를 귀담아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kmkim@seoul.co.kr
  • [열린세상]뺄셈의 사회, 덧셈의 사회/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열린세상]뺄셈의 사회, 덧셈의 사회/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돌이켜 보면 우리 현대사는 뺄셈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뺄셈의 사회가 상대에 대한 배제와 소통 부재로 난장(場)의 형태를 보여준다면, 덧셈의 사회에서는 중재와 합의 도출 그리고 공론 영역이 확대된다. 해방 이후 김구와 여운형의 암살은 뺄셈의 논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였던 김구와 여운형은 극우와 극좌가 지배하는 해방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배제의 논리는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지배적 코드로 굳어져 왔다. 이승만의 국가만들기 프로젝트는 극우, 친미, 정권유지 외에 어떤 가치판단도 수용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제건설 프로젝트에는 경제와 성장 외에 다른 생각과 이념이 들어갈 공간이 거의 없었다. 뺄셈의 논리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은 뺄셈의 공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정치목표가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갈등은 더욱 더 표면화되었고, 진영과 진영 사이 논쟁은 논쟁으로 끝났으며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 뺄셈의 논리는 소통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다. 뺄셈의 사회는 강퍅해질 수밖에 없다. 뺄셈의 논리가 지배하면 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주체들 사이에 소통의 단절이 오고 공론 영역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대의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하되 본질은 사라지는 것이다. 소통되지 않는 사회, 소통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이념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들은 다양한 사회제도들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논란이 되었던 것은 소통의 문제였다. 촛불집회는 소통의 부재가 낳은 산물이었다. 촛불집회는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에 계속되는 정치 상황을 보면 변화된 것은 거의 없다. 용산참사, 미디어 관계법, 세종시를 둘러싼 갈등관계가 대표적인 예다. 철거민과 경찰관 등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가 부분적으로나마 타협점을 찾은 것은 345일 만이었다. 국회에서 미디어 법은 통과되었지만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논리는 없었다. 세종시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세종시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함으로써 세종시 수정절차에 착수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세종시법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논리 사이에 접점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 보인다. 세종시와 관련해서 어떤 절차가 합의되고 논의될지 알 수 없다.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합리적인 절차와 합의의 과정은 난망해 보인다. 사회적으로 긴요한 쟁점들과 관련된 논의와 주장이 생산되고 부딪치면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배수의 진을 치고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덧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다. 합리적 소통과 공론의 영역이 넓어지고 활성화되는 열린 사회다. 지양은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과정과 상대에 대한 관용으로부터 나온다. 지양은 기계적 중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나 지양은 둘 사이 산술적 통합이 아니라 의미와 관점의 공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양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중도가 되는 일조차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힘겨워 보인다. 서로에 대해서 관용하지 않고, 극단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때로 중도나 지양은 비굴하게 보여지기도 한다. 나의 관점을 따르면 우리 편이고 아니면 상대 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당대의 현실 앞에서 합리적인 소통과 공론 영역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회의마저 든다. 지금 우리 사회 열차의 목적지는 ‘열린’ 종착역이 아니라 ‘닫힌’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희생을 초래할 것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 열차는 질주하고 있다.
  • [가시화되는 남북정상회담] 역대 정상회담 막후 인물은

    그동안 역대 남북정상회담은 막후(幕後)에서 어떻게 추진돼 왔을까. 남북정상회담은 비밀유지가 필수조건이다. 때문에 국가정보원장은 빠지지 않고 관여해 왔다. 눈에 보이지 않게 회담 전체 과정을 조율하는 역할이다. 회담성사가 가시화되기 전에는 남북한 실무자들의 물밑접촉이 주로 이뤄진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쯤엔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할 핵심 측근이 ‘밀사’로 움직인다. 북측 카운터파트를 만나서 최종 방안을 결정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2000년 DJ 핵심 박지원씨 전권 2000년 6월 남북한이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사실은 4월10일 남북 동시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발표 한달 전인 3월9일 양측 정상의 특사인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측 송호경 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지난해 말 남북 고위관계자가 싱가포르에서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 것처럼 싱가포르가 비밀스러운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셈이다. 싱가포르의 인프라가 좋은 데다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장점 때문이라고 한다. 국정원 대북담당 차장 등 국정원 실무자가 박 전 장관을 수행했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도 몇 차례 극비리에 방북했지만 협상은 주로 박 전 장관을 통해 이뤄졌다. 박 전 장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데다, 문화부 장관은 남북접촉 창구가 아니라 북측인사 접촉 때 노출될 가능성이 적다는 점도 고려됐다. ●2007년 안희정·김만복 투톱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2차 정상회담도 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6년 10월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가 베이징에서 이호남 북한 참사와 만났다. 이어 2007년 7월초 김만복 국정원장의 대북접촉 제의를 같은 달 29일 북한이 수용하고 김 원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이후 김 원장이 전권을 위임받아 평양을 두 차례 비밀리에 방문했고, 8월8일 정상회담 개최 사실이 발표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될 뻔했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됐다. 정상회담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는 각각 장세동·서동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곽태헌 정치부장

    [데스크 시각]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곽태헌 정치부장

    1만개가 넘는 직업 중 국회의원에 관한 우스갯말이 유난히 많다. 대부분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긴 얘기들이다. ‘정치인(국회의원)과 거지의 공통점’은 대표적인 사례다. 국회의원에 관해 우스개가 많은 것은 그만큼 좋은 직업이라는 뜻이다. 국회의원은 권한은 막강하지만 책임질 일은 거의 없다. 수당과 상여금, 특별활동비를 포함하면 국회의원의 연봉은 1억 2000만원쯤 된다. 국회의원 1명당 6명의 공식 보좌진이 있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6급 비서 1명, 7급 비서 1명, 9급 비서 1명의 연봉을 합하면 2억 8000만원이다. 의원 차량 유지비, 의원 KTX 이용 등 각종 지원까지 포함하면 국회의원 1명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5억원 이상의 세금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에게는 헌법상 보장된 특권이 있다. 헌법 45조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 소위 면책특권이다. 헌법 44조 1항은 ‘국회의원은 현행 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다. 불체포 특권이다. 국회의원에게 특권을 주는 것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그 직책을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전반적으로 특권만 누릴 뿐 국민 대표자로서의 일은 하고 있지 않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18대 국회인) 2008년 6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의원 외교활동 42건을 분석한 결과 공식일정이나 연수목적에 맞는 방문이 아닌 외유성을 의미하는 비목적성 일정이 전체 방문 시간의 47%”라는 자료를 내놓았다. 18대 국회의원들의 본회의 투표율은 69.8%로 미국 상원(97.6%)에 비해 매우 낮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헌법을 위반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헌법 54조 2항에는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새해) 예산안을 의결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사문화(死文化)한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지난해까지만 보더라도 이 조항대로 12월2일 전에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2002년뿐이다. 2002년에는 접전이 예상됐던 대통령선거 때문에 여야 모두 예산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한나라당이 야당(2000~2007년)이었을 때나 민주당이 야당(2008년 이후)일 때나 예산안이 제때 통과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또 헌법 46조 2항에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런 국가이익 우선의 의무는 청렴의 의무, 이권 불개입의 의무, 겸직금지 의무와 함께 헌법상 국회의원의 의무다. 현 정국의 최대 뇌관으로 불리는 세종시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이 헌법 조항도 있으나 마나 하다. 야당은 숙명적으로 정부의 주요정책 중 상당부분을 반대하게 돼 있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 ‘사쿠라’라는 말은 야당과 야당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시대가 변하기는 했지만 야당은 그래도 야당이다. 문제는 여당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친이(친이명박)냐, 친박(친박근혜)이냐에 따라 세종시에 대한 의견이 나눠져 있다. 친이 의원은 수정안 찬성, 친박 의원은 원안 찬성이다. 지역구에 따라, 생각에 따라 소신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의원들이 조폭 두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대원과 다를 게 없다. 실망스러운 국회의원들을 볼 때마다 세금 생각이 절로 난다. 현재 법률상 국회의원은 299명이다. 국회의원들이 할 일을 제대로 한다면 500명, 1000명으로 늘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헌법 41조 2항에는 ‘국회의원 수는 200인 이상이어야 한다.’고 돼 있다. 국회의원 90여명을 줄여 남는 예산으로 결식 아동들에게 보다 많은 지원을 해주는 게 훨씬 보람 있는 일이다. 지난해에는 24만명의 결식아동을 위해 541억원의 예산이 사용됐다. tiger@seoul.co.kr
  • “한국 민주화에 기여” 워싱턴서 릴리 전 美대사 추모식

    한국의 6월 민주 항쟁과 중국 톈안먼 사태 등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에 한국과 중국에서 대사를 지낸 고(故) 제임스 릴리 전 대사 추모식이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존스 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열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린 파스코에 정무담당 사무차장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릴리 전 대사는 동아시아의 평생 친구였고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면서 “그는 국익과 원칙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주저함이 없었지만 실용주의의 중요성을 이해했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현홍주 전 주미 대사, 외교통상부는 추모식장에 화환을 보내 고인과 한국의 특별한 인연을 되새겼다. 릴리 전 대사는 2004년 발간한 자서전 ‘차이나 핸즈(China Hands)’에서 주한대사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당시 한국의 계엄령에 반대하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해 계엄령 선포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가까스로 막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중국 칭다오 태생인 릴리 전 대사는 지난해 11월12일 워싱턴에서 지병인 전립선암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81세. 워싱턴 연합뉴스
  •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지난해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일파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특히 기존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됐던 장지연 등 20여명의 이름이 이 사전에 올랐지만, 국가보훈처가 이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19일 “친일인명사전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공적 자료 등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보훈처는 보훈대상 후보의 공적 사항만을 검토하는 곳이어서 친일행위를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강점기역사 체계적 극복 실패 친일파 처벌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친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한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36년간의 암흑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해내는 데 실패했다. 일제는 한·일병탄 후 한국인의 동화를 표방하며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내지(일본)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면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국민적 일체감을 강조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률이 급등하면서 동화도 가속화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사, 보통문관시험을 거친 하급행정관료·경찰의 비율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지원병·징병 형태로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만도 20만명이었다. 참전을 독려해 친일파로 지목된 춘원 이광수도 “조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행위였다.”라고 했다. 이런 현실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인적 청산에 장애가 됐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반민족행위자 등을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개념화했지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친일청산 문제는 미군정 지배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성장에 떠밀려 제대로 된 논의나 통합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간간이 학계를 중심으로 친일청산 문제가 거론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적청산 과정은 “역사학적 영역에 속한 부분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부닥쳤다. 최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문제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광복 직후 객관적 사실에 따라 어떤 수준까지를 친일로 할 것인지 하는 잣대를 마련하지 못한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엄격한 잣대가 민족을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청산 정치논리로 재단 안돼” 친일청산의 한계는 정권마다 출렁인 한·일 관계에도 원인이 있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를 최초의 특별검사로 불리는 반민특위 조직으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 주류층을 형성해온 친일파를 흡수한 이승만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민특위는 출범 1년만에 공소시효 단축과 특위 폐지의 외압에 시달렸다.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김구 선생 암살 등으로 특위는 사실상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대상 7000여건 중 221건만 기소하고 12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그나마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5·16을 통해 장기집권에 돌입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인 반일 감정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이끌어내며, 한·일병탄의 무효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조약 문구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미국의 지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지목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역시 과거사 청산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각각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사 청산, 한·일 관계 개선보다는 경제 개발 자금 조달 창구인 일본을 압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방일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에게서 각각 “진심으로 유감”, “통석의 염(念)”이라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한·일 미래지향적 신뢰구축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한·일 간 최대 이슈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서 처음으로 식민지배 인정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받아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시민 중심의 과거사 청산 운동에 불을 댕겼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군사정권을 거치며 정치·경제 논리에 파묻혔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54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내각의 전향적인 과거사 인식 전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문제가 보·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양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과거사에 결부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진실을 왜곡한 채 이뤄지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양국 모두 대내외적으로 진실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 김정은기자 cool@seoul.co.kr
  • 김현중 “전두환 前대통령 팔순잔치 참석은 우연”

    김현중 “전두환 前대통령 팔순잔치 참석은 우연”

    그룹 SS501의 김현중이 18일 오후 강남의 한 예식장에서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팔순 잔치에 참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이와 관련 김현중 소속사 DSP미디어 측은 18일 “간적 없다.”고 말했다가 19일 “갔다.”고 말을 바꿨다.소속사에 따르면 김현중은 18일 오후 소속사 이호연 대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기 전, 이 대표와 함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팔순 축하연에 잠깐 들렀다.DSP미디어 관계자는 19일 서울신문 NTN과 통화에서 “김현중은 어떠한 의도나 계획 없이 우연찮게 참석한 것이기 때문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과 이 대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 측근의 전화를 받고 간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한편 김현중은 19일 SS501 공식사이트에 “참석은 했다. 하지만 사장님 생일을 축하를 하러 간 것이었다.”는 글을 남겼지만 악성댓글이 끊이질 않자 “알지도 못하면서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웃으면서 상처주지 말고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18일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팔순잔치에는 정치권 주요 인사 등 3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채현주 기자 chj@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청남대 가면 역대대통령 만난다

    청남대 가면 역대대통령 만난다

    옛 대통령 전용별장인 충북 청원군 문의면의 청남대에 역대 대통령들의 동상이 설치됐다. 청남대관리사업소는 14일 3000㎡ 규모로 조성된 대통령광장에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 9명의 동상 제막식을 한다고 13일 밝혔다. 청동을 소재로 제작한 이 동상은 실재 인물과 크기가 같다. 대통령광장에선 타일로 그려진 청와대, 백악관 등 세계 9개국의 대통령궁과 왕궁을 감상할 수 있다. 관리사업소는 또한 청남대 별장 본관에서 대통령광장으로 가는 사이 길에는 산책 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 골프 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조깅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독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자전거 타는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청남대를 이용한 전직 대통령 5명이 평소 즐겼던 운동이나 취미를 소재로 한 유리강화섬유 조형물을 배치했다. 도 관계자는 “대통령광장과 동상을 제작하는 데 총 8억원이 투입됐다.”며 “대통령 동상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원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전두환 정권장악 위해 언론통폐합”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언론통폐합 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언론통폐합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1980년 11월 ‘언론창달계획’ 아래 언론 통폐합을 단행해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언론인 1000명 이상이 강제 해직을 당했다. 조사 결과 언론인 해직·정기간행물 폐간,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한 신군부의 조치는 법적 근거도 없고 법절차와 요건에 따라 처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신군부가 체제에 순응하는 언론구조를 만들기 위해 정보기관·보안사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계 저항세력을 30%로 규정하고 이들을 해직시키도록 언론사에 강요했다.”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또한 “이 사건의 신청인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부터 언론인 해직사건과 국제신문 강제 폐간 등 언론통폐합과 관련한 6건을 직권조사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이대통령 신년연설] ‘남북 상시대화기구’ 마련 제안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한층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국정연설에서는 “북한은 더 이상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구태를 벗고 협력의 자세로 나와야 한다.”면서 대북 경계심을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데 그쳤다. 반면 올해는 1982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처음 거론된 이후 현재까지 표류 상태인 ‘남북 상시 대화 기구 창설’, 2007년 2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합의한 뒤 남북관계 악화로 이행되지 못한 ‘국군 유해 발굴 사업 추진’ 의사 등 남북 간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 대통령이 올해 예년과 달리 남북관계 부분에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한 데에는 올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경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올해 북핵 문제 흐름이 긍정적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고, 북측도 이미 신년공동사설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조건이자 회담의 의제로 북핵 문제와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꼽고 있기 때문에 향후 국군유해 발굴 사업 추진에 북한이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할 경우 정상회담 개최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방부도 이날 이 대통령의 연설 이후 남북관계 진전 등 여건이 조성되는 대로 국군 유해발굴 사업을 우선적으로 북측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는데, 이는 6자회담 재개가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조건’ 중 하나임을 북측을 향해 분명히 밝힌 것이란 분석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부고] ‘YS 분신’ 서석재 전 의원 별세

    11~15대 국회의원과 총무처 장관을 지낸 서석재 전 의원이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74세. 서 전 의원은 1961년 부산 동아대를 졸업, 동아고 교사로 재직하다 1968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과 정치 인생을 같이하며 ‘분신’, ‘작은 거인’으로 불렸다. 한 시대를 풍미한 상도동계의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고인이 통일민주당 사무총장 시절인 1989년, 강원 동해시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 매수사건으로 구속기소되자 당시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 혼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고인은 1992년 대선 때 전국 불교조직과 ‘나라사랑실천본부’라는 사조직을 관리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일등 공신이 됐다. 1995년 총무처 장관 시절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4000억원대 비자금 보유설을 처음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고, 그 책임을 지고 8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고인은 1997년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 최고위원, 국민회의 부총재, 국민통합21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고인의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총리, 김형오 국회의장,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 등이 화환을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28일 오후 문상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순발 여사와 아들 장원·상원, 딸 기정·미숙·희전씨 등 2남3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30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도 양평공원 묘원. (02)3410-6915.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故 김 전대통령 사모곡 포함 남진 음반 500세트 기증

    故 김 전대통령 사모곡 포함 남진 음반 500세트 기증

    가수 남진(63)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을 맞아 김 전 대통령을 사모하는 노래 ‘님오신 목포항’이 담긴 음반을 김대중평화센터에 기증한다고 7일 밝혔다. 남진은 9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9주년 기념행사에서 2장의 CD로 구성된 이 음반 500세트를 전달한다. ‘님오신 목포항’은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 임기 말에 만들어진 노래이지만 음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재심의를 거쳐 1989년 3월 남진의 스페셜 음반 타이틀곡으로 수록됐다. 남진은 지난 10월 이희호 여사를 만나 김 전 대통령의 초상권 사용을 허락받았고 8일 이 음반을 다시 발매한다. 남진은 일본 일정이 있어 전달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음반 제작자인 김성일 가넷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대신 전달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정책진단] 2014년 차기대통령 어떤 전용기로 해외순방 갈까

    [정책진단] 2014년 차기대통령 어떤 전용기로 해외순방 갈까

    앞으로 5년쯤 뒤에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순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대통령이 기업 최고경영자(CEO)처럼 치열하게 동분서주하는 ‘외교전쟁’의 시대에 한국 대통령은 아직도 전세기에 의존하고 있어 경제규모 세계 13위권 국가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휘기라고도 불리는 전용기 도입 사업은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의지로 추진되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국회 예산 심의에서 발목을 잡혔다. 그러다가 지난달 23일 국회 국방위 소속 여야 의원들의 합의로 예산안이 통과되면서 4수(修) 끝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전용기 예산안은 앞으로 예산결산심의특별위와 본회의 심사를 남겨놓고 있으나, 여야가 공히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어 통과가 유력한 상황이다. 세종시와 4대강 사업으로 교착된 국회 상황으로 볼 때 정부안에도 없던 예산이 추가된 건 극히 이례적이다. 경제 위기 때문에 발목이 잡혔던 사업이지만, 이번엔 도입하는 게 빌리는 것보다 경제적이라는 이유가 국회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사업의 연착륙까지는 고비가 남아 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요불급한 예산’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 국회에서 통과되더라도 한동안은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새로 도입되는 전용기는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차기 대통령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내년 말쯤 기종 선정을 마치더라도 항공기 제작, 내부 개조, 조종사 교육 등에 최소한 3년이 필요해 2014년쯤이나 운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통령 전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너무 노후해 해외순방에는 이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같은 민간 항공사의 비행기를 전세 내서 타고 다니는 실정이다. ‘공군 1호기’로 불리는 대통령 전용기는 1985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도입한 41인승 보잉 737-300기종이다. 25년이나 된 이 비행기는 시설이 노후할 뿐 아니라 항속거리가 3700㎞밖에 안 된다. 대통령 탑승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출발지로 회항할 수 있는 연료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 정도 거리는 ‘동남아용(用)’에도 못미치는 ‘국내용’에 그친다. 현재의 대통령 전용기로는 일본, 중국 등 가까운 곳만 갈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내린 결심의 출발선도 이런 지적에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2006년 12월 국회 예산 심의에서 관련 예산 299억 9100만원이 전액 삭감되면서 사업은 표류하기 시작한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가 주효했다. 2007년 정부가 신청한 140억원도 같은 이유로 삭감됐다. 한나라당이 집권당이 된 2008년 다시 한 번 전용기 도입 사업이 추진됐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발목이 잡히면서 예산으로 편성됐던 142억원이 전액 삭감됐다. 지난 3월 방위사업청은 네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이상희 국방장관은 34차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전용기 도입 사업 재추진을 의결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명박 대통령의 결심이 사업을 가로막는 듯 했다. 이 대통령이 경제사정을 감안해 예산안에 포함시키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여야의 뜻하지 않은 합의가 전용기 도입 사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새 전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국회 국방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하나같이 공감하면서, 정부안에도 없던 새 항목을 끼워넣어 예산에 140억원을 추가한 것이다. 국제적인 위상과 함께 경제성, 보안 문제도 여야 의원들의 승인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전용기 예산 주무부처는 정상회의 참가와 총리 순방 사업 명목으로 한 해 120여억원의 예산을 사용해왔다. 이 돈이라면 전용기의 수명을 20년 이상이라고 볼 때 새로 도입하는 게 차라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또 매번 상용기를 개조해서 사용해야 하는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6일 “현 전용기는 노후 항공기로 고장 빈도가 증가하고 정비용 수리부속의 확보에 애로를 겪고 있어 안전을 위해 교체가 필요하다.”면서 “전세기 운영에 따른 순방계획 사전노출과 미사일 등의 대공위협에 대한 자체보호 수단이 미흡해 경호보안상의 취약점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전단체인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오혜란 평화군축팀장은 “민생 분야가 여전히 어렵고 이에 따라 복지비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 전용기 도입사업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 불요불급한 데 혈세를 쓰기보다는 학교 급식비에 투입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들은 예산안을 면밀히 검토한 뒤 여론 호소는 물론 정부에 대한 청원 제기, 국민권익위에 대한 민원 제기, 예산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 등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 9명 청남대에 동상건립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역대 대통령 9명의 청동조형물이 들어선다.청남대관리사업소는 오는 12월 말에 완공될 예정인 대통령광장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전 대통령의 청동상을 제작해 설치할 계획이라고 20일 밝혔다. 실물 크기로 만들어지는 청동상의 제작비는 총 2억원 정도다.청남대 측은 또 청남대를 직접 이용했던 대통령 5명의 특징을 살린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 조형물도 포토존 형태로 배치할 계획이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산책,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골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깅,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전거 타는 모습이다.청남대는 이 광장에 청와대, 미국 백악관, 영국 버킹엄궁 등 세계 8개국 대통령궁 또는 왕궁의 사진이 들어간 타일벽화도 설치할 예정이다. 청남대 관계자는 “유족, 비서진 등과의 초상권 문제 협의가 끝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전체 사업비 8억원이 들어가는 대통령광장은 연말 완공과 함께 개방될 것”이라고 말했다.청원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부고]6월항쟁 계엄반대 릴리 前미국대사 별세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시블리메모리얼병원에서 별세했다. 81세. 가족 측은 릴리 전 대사가 전립선 암 합병증을 앓아왔다고 밝혔다.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중앙정보국(CI A) 요원으로 활동했던 릴리 전 대사는 한국과 중국의 민주화 격동기인 1986~91년 한국과 중국주재 대사를 각각 역임한 아시아통이다. 릴리 전 대사가 주한미국 대사를 지내던 1986~89년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로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등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릴리 전 대사가 지난 2004년 발간한 자서전 ‘차이나 핸즈(China Ha nds)’에 따르면 1987년 6월 항쟁 당시 한국의 계엄령을 반대하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직접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전달해 계엄령 선포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가까스로 막았다고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미 정부 내 중국통인 그는 주중대사(1989~91)에 부임하자마자 발생한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당시 중국의 인권탄압을 강하게 비난하며 사태 해결을 위해 물밑 조율작업을 벌였다. 릴리 전 대사는 석유관련 사업을 하던 부친이 중국에서 머물던 1928년 칭다오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미 예일대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1951년 CIA에 투신했다. 이후 1978년까지 27년간 도쿄와 베이징, 타이완, 홍콩,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릴리 전 대사는 이후 국무부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으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뒤 주한·주중대사를 잇달아 역임했다. 릴리 전 대사는 지난해 여름 캐서린 스티븐스 현 주한미국대사의 미 상원 외교위 인준 청문회에 참석, 스티븐스 대사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고 한국 관련 싱크탱크 행사들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k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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