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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웬 말? 황태순 발언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위수령 웬 말? 황태순 발언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발언, 위수령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발언 위수령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두환家 은닉 美재산 13억 국내 환수

    미국에 있던 전두환(84)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우리 정부로 돌아왔다. 이번 재산 환수는 부패한 고위 공직자 일가의 국외 은닉 재산을 국내로 환수한 첫 사례인 동시에 첫 한·미 형사사법공조 범죄수익 환수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2200억여원의 재산 추징이 확정된 지 18년 만에 추징금 환수율이 50%를 넘어서게 됐다. 법무부는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로레타 린치 미 법무부 장관이 만나 미국 정부가 몰수한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 112만 6951달러(약 13억원)를 한국으로 즉시 반환하기로 최종 합의했다고 10일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97년 4월 2205억원 추징이 확정됐지만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집행시효 만료를 앞둔 2013년 6월까지 전체 추징금의 24%에 불과한 532억원만 환수됐다. 이에 법무부는 집행 시효를 연장했고, 미 법무부에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미국 내 은닉 재산을 동결해 달라고 형사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이후 미 법무부는 이듬해 차남 재용(51)씨 소유의 LA 뉴포트비치 주택 매각대금과 투자이민채권 등 120여만 달러의 재산을 동결했다. 서울중앙지검은 10일 기준으로 전 전 대통령의 전체 추징금 가운데 50.9%인 1121억원을 환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남은 재산의 환수 전망은 밝지 않다. 환수한 것 외에 검찰이 확보한 전 전 대통령 일가 재산은 930억여원에 이르지만 대부분 부동산이라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전두환 일가 미국 재산 13억원 환수됐다

    전두환 일가 미국 재산 13억원 환수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국 내 재산이 한국 정부로 환수됐다.  법무부는 9일(현지시간) 워싱턴DC 소재 미국 법무부 본부에서 김현웅 장관과 로레타 린치 미 법무부 장관이 만나 미국 정부가 몰수한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 112만 6951달러(약 13억원)를 한국으로 즉시 반환하기로 최종 합의했다고 10일 밝혔다. 미 법무부는 합의 직후 몰수 금액을 서울중앙지검 추징금 집행 계좌로 송금했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96년 12월 2205억원 추징이 확정됐지만 추징금 집행 시효 만료가 임박해도 환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법무부는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개정을 계기로 2013년 8월 미 법무부에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미국 내 은닉 재산을 동결해 달라고 형사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이후 미 법무부는 연방수사국(FBI)과 함께 2014년 2월 차남 재용씨 소유의 LA 뉴포트비치 주택 매각대금 72만 달러 상당을 동결했고, 그해 8월 국토안보수사국(HSI)과 추적 끝에 재용씨 부인 박상아씨의 투자이민채권 50만 달러 상당을 동결했다.  법무부는 이번 환수 조치가 1997년 5월 양국 간 형사사법공조조약 체결 이래 범죄수익을 상대방 국가에 반환하게 된 첫 사례라고 강조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현장 블로그] ‘형제복지원 특별법’ 또 물 건너가나

    형제복지원 사건을 아십니까. 1975년 7월부터 1987년 6월까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된 사건을 말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훈령 410호’를 근거로 떠돌이와 앵벌이, 거지,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을 이 복지원에 감금했고 폭행과 강제노역이 일상이 됐습니다. 그 결과 500여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국가적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1987년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28년이 지났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횡령죄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 6월의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을 뿐, 피해자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해 진상 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은 지난해 7월 23일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별법)을 발의했습니다. 진상 규명을 통해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실질적인 보상을 하는 게 핵심입니다. 지난 7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고, 법안이 필요하다는 것까진 공감대가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이 법안은 현재 안행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된 채 다음달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내년 2월에 임시 국회가 예정돼 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법안 통과에 적극적일지는 미지수입니다. 1984년 당시 9살 때 감금돼 4년간 고초를 겪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39) 대표는 9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강기윤 새누리당 안행위 간사를 50여분 동안 면담했습니다. 법안 통과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면 단식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한씨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법의 취지만 설명하고 나온 것 같아 아쉽다”고 했습니다. 오는 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는 한씨가 수능이 끝나고도 단식 농성이 아닌 입시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김무성, 연희동行 이사 준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이사를 위해 10여년째 살고 있는 서울 여의도 아파트를 매물로 내놨다. 김 대표는 3일 기자들에게 “집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고 있다”면서 “단독주택에 살고 싶은데 여의도에서 제일 가까운 곳 중 저렴한 데가 연희동이라고 해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대선 주자인 김 대표가 2017년 대선을 의식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김 대표가 알아본다는 연희동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때 살던 곳이어서 ‘정치적 명당’이라는 시각도 있다. 또 역대 대통령 당선인 가운데 아파트에 거주했던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점이 김 대표의 이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측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6년 6월 서울시장 퇴임 후 원래 살던 강남구 논현동 저택 대신 종로구 가회동의 전통 한옥 주택에 전세로 들어간 뒤 이듬해 12월 대권을 거머쥔 바 있다. 이에 김 대표 측은 “아직 이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거나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이사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이 있는데 이는 굉장한 오해와 억측”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지난 8월 결혼식을 올린 김 대표의 둘째 딸은 남편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김무성 대표, ‘전직’들의 터 연희동으로 이사가나

    김무성 대표, ‘전직’들의 터 연희동으로 이사가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이사를 위해 10여년째 살고 있는 여의도 아파트를 매물로 내놨다. 김 대표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집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고 있다”면서 “단독 주택에 살고 싶은데 여의도에서 제일 가까운 곳 중 저렴한 데가 연희동이라고 해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지난해 말부터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김 대표가 2017년 대선을 의식한 행보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김 대표가 지난 2002년부터 거주중인 여의도의 대형 아파트는 서민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강북에 둥지를 새롭게 틀고 차기 대선행보를 준비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김 대표가 알아본다는 연희동은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주택가이지만 치안 상태를 포함한 지역 환경이 유력 정치인이 살기에 괜찮은 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지난 2006년 6월 서울시장 퇴임 후 원래 살던 강남구 논현동 저택 대신 종로 가회동에 전통 한옥 주택에 전세로 들어간 뒤 이듬해 12월 대권까지 거머쥔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연희동 옆동네인 동교동을 정치적 본거지로 삼고 대통령에 당선됐었다.  이에 대해 김 대표 측 관계자는 “아직 이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거나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이사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이 있는데 이는 굉장한 오해와 억측”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남편의 마약투약으로 논란을 빚었던 김 대표의 둘째 딸의 임신소식도 이날 전해졌다. 이를 놓고 부친 친일행적 논란·마약사위 사건·처남 총선 출마 등 가족문제로 수세를 몰렸던 김 대표가 모처럼 한시름 놓고 본격적으로 정치 현안에 몰두하지 않겠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지자체 복지 예산 4배 ‘껑충’… 중앙·지방 세원 불균형 심화

    1987년 10월 29일 제9차 헌법 전부개정은 대한민국 역사의 물꼬를 바꾼 계기였다. 전두환 정권이 거센 국민 요구에 밀려 대통령 직선제에 못잖게 위협으로 여겨지던 지방자치제 실시의 제도 보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방자치제 유보를 천명했던 제5공화국 헌법 부칙 10조(지방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동시에 자치단체장은 임명제로 운영한다)를 삭제했다. 이후 1995년 지방의원과 단체장을 주민 손으로 선출한다. 그래서 정부는 해마다 10월 29일을 법정기념일인 지방자치의 날로 정해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올해 지방자치의 날을 앞두고 제도 20년을 평가하는 자료를 25일 내놨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지방 4대 협의체(시도지사협의회·시도의회의장협의회·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와 함께 사무·조직·인사·재정 등 24개 자치요소별 현황을 파악한 뒤 185개 통계수치를 분석하고 사례·문헌을 연구했다. 발표에 따르면 자치단체의 복지예산 비중은 1996년 결산 기준 7.5%에서 2013년 27.6%로 늘었다. 인구 10만명당 사회복지 시설은 2003년 3.3개에서 2012년 15.6개로,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은 2006년 1만 8512명에서 지난해 말 3만 448명으로 증가했다. 또 공공도서관 수는 1998년 290개에서 2013년 865개로, 체육시설 수는 1995년 3만 4437개에서 2013년 5만 6124개, 정보공개 청구는 1998년 2만 5475건에서 2013년 36만 5806건으로 늘었다. 지방의 입법활동을 말하는 조례 수도 1995년 3만 358개에서 지난해 6만 3476개로 불었다. 1995년 175명으로 출발한 여성 지방의원은 지난해 839명으로 4.8배를 기록했다. 반면 주민 체감도는 47점에 그쳤다. 특히 중앙-지방 세원이 8대2로 극심한 불균형을 보였으며 중앙에 대한 재정 의존으로 책임성과 자율성 확보엔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자치제도에 대해 주문이 쏟아져 다양한 행정수요를 반영하는 대응력 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행자부는 농촌 생산 가능 인구가 2060년 49.7%로 절반을 밑돌게 되고, 현재 농촌인구 고령화율이 39.1%로 전체인구 고령화율 12.7%를 이미 뛰어넘은 점을 고려해 복지 중심의 정책 추진과 도농 격차에 따른 차별적 서비스 제공, 지자체 역량 제고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적과 싸우다…일과 싸우다…시대 변해도 계속되는 ‘숭고한 희생’

    적과 싸우다…일과 싸우다…시대 변해도 계속되는 ‘숭고한 희생’

    2013년 3월 1일 밤 11시 24분. 인천 강화경찰서 내가파출소 소속 정옥성 경위는 외포선착장에서 바다 쪽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를 전력을 다해 뒤쫓았다. 그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었다. 정 경위는 물가에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거친 물살에 발이 묶여 앞으로 넘어지며 풍덩 빠졌지만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남자에게 손을 뻗으며 한 발, 한 발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밤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커멓게 출렁였다. 정 경위는 그렇게 밤바다의 별이 됐다.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다 목숨을 잃는 경찰관이 매년 수십명씩 나온다. 서울신문은 경찰 창설 70주년을 맞아 경찰청으로부터 순직 경찰관 1만 3542명의 사망 경위가 담겨 있는 명단을 23일 입수, 분석했다. 70년간 순직한 경찰관들의 이야기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의 굴곡을 보여 준다. ●광복 후 극심한 좌우 대립… 1562명 잠들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경찰 순직자는 1562명이었다. 이들 중 90% 이상이 ‘폭도’, ‘반도’, ‘좌익 불순세력’, ‘공비’와의 교전이나 작전 중 사고로 숨졌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나눠 점령했던 시기, 북쪽에서 들어온 무장공비와의 잦은 교전 탓이었다. 1946년 10월 1~3일 대구, 경북 영천시, 칠곡군 등에서 44명이 순직한 것으로 기록됐다. 당시 대구에서는 10·1사건이 일어났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0·1사건은 미 군정의 친일관리 임용과 강압적인 식량 공출 정책에 반발한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 행정 당국과 충돌한 사건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는 4월 3일 5명, 4월 12일 1명, 5월 13일 8명, 5월 22일 4명, 6월 16일 2명의 경찰관이 공비와 교전하다 사망했다. 이들은 ‘제주 4·3사건’의 초기 경찰 사망자들이다. 제주 3·1절 기념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민심이 들끓자 남로당은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경찰을 공격했다. 미 군정은 제주도민 토벌 작전에 나섰고, 이로 인해 2만 5000~3만명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4·3사건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일부 부사관이 거부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났다. 20~24일 전남 여수, 순천, 고흥, 장흥 등지에서 270명의 경찰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반란은 10여일 만에 진압됐지만 이후에도 계속된 교전으로 이 지역에서 수백명의 순직자가 더 나왔다.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8823명 순직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8823명의 순직자가 명단에 올랐다. 경찰은 이들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일 전투로 가장 많은 경찰 희생자를 낸 것은 1950년 7월 19일부터 치러진 강경 전투였다. 83명의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협정 뒤에도 전사자는 속출했다. 휴전 직후부터 1955년까지 469명 중 60.3%에 해당하는 283명이 크고 작은 교전 중에 숨졌다. ●1962년 간첩 수색하던 25명 한꺼번에 숨져 1960년 4월 19~20일에는 6명의 경찰관이 4·19혁명 현장에서 진압 중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간첩을 체포하거나 수색하는 과정에서 습격을 받거나 폭발물이 터져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62년 4월 1일에는 울산에서 간첩 수색을 위해 출동하던 경찰관 25명이 자동차 사고로 한꺼번에 사망했다. 1963년 6월 25일엔 장승포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주민 61명이 사망했다. 이때 18명의 경찰관이 주민 대피를 돕다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3명의 목숨 앗아 간 김신조·실미도 사건 1966년부터 1975년 사이 순직자 중 주목되는 사람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검거 작전 중 적탄에 전사’라고 기록된 최규식 서울 종로경찰서장과 1971년 8월 23, 24일에 인천에서 각각 순직한 두 명의 순경이다. 1968년 1월 21일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김신조 등 북한 124군부대 무장간첩 31명이 당시 서울 세검동 자하문초소까지 진입해 경찰과 교전을 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최 서장이 전사하고 경찰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뒤 우리 군은 124군부대와 똑같은 규모로 북파 부대를 창설했다. 인천 중구의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실전과 똑같은 훈련을 받은 북파 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향했다. 인천의 경찰관 두 명이 이 과정에서 희생됐다. ●광주민주화운동 진압하다 스러진 순경 4명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민주화운동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1980년 5월 18일 시작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1명이 숨지고 852명이 부상한 것으로 발표됐다. 이 기간 중 전남 함평경찰서 소속 순경 4명이 사망했다. 순직자 명단엔 ‘80년 5월 20일 데모 진압 중 자동차에 밀려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1989년 5월 3일에는 ‘동의대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경찰 5명이 학생들에게 발각돼 도서관에 감금됐다. 경찰은 도서관에 진입했고 학생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 4명이 사망했다. 공식 서류에는 ‘동의대 학생들에게 납치된 전경 5명의 구출 작전을 벌이던 중 학생들이 석유 등을 뿌리고 화염병을 투척, 화재로 인한 화상 및 질식하여 사망’이라고 나와 있다. ●시간 지날수록 경찰 ‘과로사’ 점점 늘어 전쟁과 휴전 직후엔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많았지만 이후 과로로 순직하는 경찰이 크게 늘었다. 시기별 순직자의 사망 경위 중 과로·졸도 사망은 전쟁 직후에는 1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6~1965년엔 전체 사망자의 28.9%로 급증했다. 1966~1975년에는 42.3%로 껑충 뛰었다. 1976~1985년 37.1%, 1986~1995년 40.1%에 이어 1996~2005년에는 과로 순직이 58.4%로 급등했다. 최근 10년간은 경찰 149명이 순직한 가운데 53.7%인 80명이 과로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과로로 숨진 경찰관들의 사망 경위를 살펴보면 밤새 당직을 서거나 잠복근무를 한 뒤 충분히 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근무에 투입된 경우가 많았다. 1998년 말엔 탈옥수 신창원 검거를 위한 특별근무 등으로 업무가 과중돼 간경변이 재발한 순직자가 있었다. 2000년엔 전년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뒤 유해업소 특별단속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철야 근무를 계속한 경찰관이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숨지기도 했다. 2010년엔 천안함 사건으로 인한 을호 비상근무 등으로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이송범 광주지방경찰청장 등 2명의 경찰관이 쓰러져 숨졌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반세기 만에… 정부 훈장 크기 남녀 차이 없앤다

    반세기 만에… 정부 훈장 크기 남녀 차이 없앤다

    정부에서 준 훈장이나 포장을 수상자 말고 다른 사람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목에 걸거나 옷에 달면 처벌 대상이 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절대 금지다. 어기면 6개월 이하 징역을 살거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상훈법 제8조엔 ‘공적이 허위로 판명되거나 형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해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 서훈(敍勳·나라를 위해 일한 데 따라 포상을 내림)을 취소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상훈법에서 말하는 서훈에는 훈장은 물론 포장과 대통령 및 국무총리 명의로 수여되는 표창까지 총망라된다. 지금까지 228명에게 수여된 서훈 406점이 취소됐다. 예컨대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각각 9개와 11개의 훈장이 취소됐다. 2006년 5·18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에 따른 조치다. 하지만 두 대통령에게 취임 때 수여된 무궁화대훈장의 경우 취소하면 대통령 재임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빚게 돼 제외했다. 친일 행적이 드러난 독립유공자의 훈장 19점도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상훈법은 아주 엄격하다. 무엇보다 영예를 앞세우는 훈·포장이나 표창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법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시행령은 반세기 가까이 그대로여서 시대 변화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이따금씩 받았다. 8일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1967년 제정된 시행령에는 꽤 흥미로운 대목이 숱하다. 알고 보면 단순하지만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훈장의 크기를 남녀에 따라 달리했던 점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여성에게 수여하는 훈장의 크기에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다고 한마디로 말할 순 없다”며 “1960년대만 해도 체격 차이를 감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무궁화대훈장과 1등급 훈장의 경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비스듬하게 띠처럼 두르도록 돼 있어 체구에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법률엔 상훈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친수’(親授)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영전(榮典·국가에 공헌한 사람을 치하하기 위해 인정되는 영예)의 수여를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규정한 헌법 제80조에 따라 직접 수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 위임받은 사람에게 맡기는 ‘전수’(傳授)도 허용한다. 또 상훈의 영예성을 지키도록 동일한 공적에 대해 거듭 수여하지 않으며 전투에 참가하거나 간첩 수사로 뚜렷한 공적을 세운 경우를 빼고는 이미 받은 상훈과 같은 등급 또는 아래 등급을 수여하지 않는다. 훈장과 포장, 표창에 대한 혜택은 법률적으로 금지돼 있다. 다만 징계 때 수위를 낮추거나 같은 서열일 경우 우선순위에서 배려하는 정도다. 특히 가장 명예롭게 여겨지는 훈장의 가격은 20만~100만원 사이다. 주재료는 은(銀)이다. 훈장증서는 재발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휨 현상을 보이지 않고 통풍이 뛰어난 전통 한지를 사용한다. 행자부는 이런저런 부작용을 안은 상훈법 시행령에 대한 개정안을 이날 입법 예고했다. 처음 제정된 이후 반세기 만이다. 남녀 훈장의 크기와 도형을 통일하고 전수권자에 시장, 군수, 구청장 등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시켰다. 공적심사위원회를 강화하고 지침으로 된 서훈 추천 절차를 명문화하며 보통 국민에게 가장 많이 수여되는 국민훈장과 국민포장의 도형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바꾼다는 내용도 들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반세기 만에… 정부 훈장 크기 남녀 차이 없앤다

    반세기 만에… 정부 훈장 크기 남녀 차이 없앤다

    정부에서 준 훈장이나 포장을 수상자 말고 다른 사람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목에 걸거나 옷에 달면 처벌 대상이 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절대 금지다. 어기면 6개월 이하 징역을 살거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상훈법 제8조엔 ‘공적이 허위로 판명되거나 형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해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 서훈(敍勳·나라를 위해 일한 데 따라 포상을 내림)을 취소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상훈법에서 말하는 서훈에는 훈장은 물론 포장과 대통령 및 국무총리 명의로 수여되는 표창까지 총망라된다. 지금까지 228명에게 수여된 서훈 406점이 취소됐다. 예컨대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각각 9개와 11개의 훈장이 취소됐다. 2006년 5·18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에 따른 조치다. 하지만 두 대통령에게 취임 때 수여된 무궁화대훈장의 경우 취소하면 대통령 재임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빚게 돼 제외했다. 친일 행적이 드러난 독립유공자의 훈장 19점도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상훈법은 아주 엄격하다. 무엇보다 영예를 앞세우는 훈·포장이나 표창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법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시행령은 반세기 가까이 그대로여서 시대 변화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이따금씩 받았다. 8일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1967년 제정된 시행령에는 꽤 흥미로운 대목이 숱하다. 알고 보면 단순하지만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훈장의 크기를 남녀에 따라 달리했던 점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여성에게 수여하는 훈장의 크기에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다고 한마디로 말할 순 없다”며 “1960년대만 해도 체격 차이를 감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무궁화대훈장과 1등급 훈장의 경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비스듬하게 띠처럼 두르도록 돼 있어 체구에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법률엔 상훈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친수’(親授)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영전(榮典·국가에 공헌한 사람을 치하하기 위해 인정되는 영예)의 수여를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규정한 헌법 제80조에 따라 직접 수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 위임받은 사람에게 맡기는 ‘전수’(傳授)도 허용한다. 또 상훈의 영예성을 지키도록 동일한 공적에 대해 거듭 수여하지 않으며 전투에 참가하거나 간첩 수사로 뚜렷한 공적을 세운 경우를 빼고는 이미 받은 상훈과 같은 등급 또는 아래 등급을 수여하지 않는다. 훈장과 포장, 표창에 대한 혜택은 법률적으로 금지돼 있다. 다만 징계 때 수위를 낮추거나 같은 서열일 경우 우선순위에서 배려하는 정도다. 특히 가장 명예롭게 여겨지는 훈장의 가격은 20만~100만원 사이다. 주재료는 은(銀)이다. 훈장증서는 재발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휨 현상을 보이지 않고 통풍이 뛰어난 전통 한지를 사용한다. 행자부는 이런저런 부작용을 안은 상훈법 시행령에 대한 개정안을 이날 입법 예고했다. 처음 제정된 이후 반세기 만이다. 남녀 훈장의 크기와 도형을 통일하고 전수권자에 시장, 군수, 구청장 등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시켰다. 공적심사위원회를 강화하고 지침으로 된 서훈 추천 절차를 명문화하며 보통 국민에게 가장 많이 수여되는 국민훈장과 국민포장의 도형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바꾼다는 내용도 들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내일 제569돌 한글날…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 “교과서 한자 병기, 아버지 보셨으면 펄쩍 뛸 일”

    [내일 제569돌 한글날…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 “교과서 한자 병기, 아버지 보셨으면 펄쩍 뛸 일”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보셨으면 펄쩍 뛸 일이에요. 교과서 한자 병기는 시대를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569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아버지를 꼭 닮은 노년의 아들은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광화문의 터줏대감인 안과 병원 ‘공안과’를 운영하는 공영태(67) 원장은 고 공병우(1906~1995) 선생의 아들이다. 공 선생은 세벌식 한글 타자기와 컴퓨터 자판을 개발해 ‘한글 타자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 올해는 공 선생의 20주기다. 공 원장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정부가 아버지의 노력과 자판의 우수성을 인정해 세벌식이 ‘제2의 자판 표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초성과 중성, 종성을 나눠 배치한 세벌식 자판은 지금 흔히 쓰이는 두벌식과는 다른 형태다. 전두환 정권에서 두벌식 자판이 표준으로 채택된 이래 세벌식은 밀려났지만 초·중·종성을 결합한 한글의 창제 원리에 맞고 익숙해지면 두벌식보다 더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8년 광화문에 공안과를 개원한 공 선생은 한글학자 이극로(1893∼1978) 선생을 만나 한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공 선생은 일본 말로 된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1949년에는 ‘공병우 타자기’를 개발했다. 공 원장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문도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됐다”며 “아버지가 워드프로세서 개발에도 이바지해 지금까지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한글’과 ‘MS워드’에 공병우식 세벌식 자판이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아들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공 원장은 컴퓨터 자판을 세벌식으로 바꾸는 방법을 담은 마우스패드를 만드는 등 세벌식 자판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檢, 한명숙 前총리 추징금 환수 전담팀 꾸려

    서울중앙지검은 최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유죄가 확정된 한명숙(71) 전 국무총리의 추징금 집행팀을 꾸려 환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5일 밝혔다. 한 전 총리는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서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지난 8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8억 8000만원이 확정됐다. 특정인을 겨냥한 추징금 집행팀이 구성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앞서 검찰은 2013년 5월 1672억여원에 달하는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을 집행하기 위해 전담팀을 꾸린 바 있다. 검찰은 형 확정 이후 한 전 총리 측에 추징금 납부 명령서와 1·2차 납부 독촉서 등을 보냈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이에 한 전 총리 측의 재산 사항을 파악하고 임대차 보증금 반환 채권 등을 압류조치했다. 검찰 관계자는 “정치자금법 위반은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일명 전두환추징법)에 해당되지 않아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압류 조치의 근거 법령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올 3월 관보에 게재된 한 전 총리의 자산은 예금 2억 2371만원, 아파트 전세 임차권 1억 5000만원 등이지만 개인 채무도 3억 9000여만원에 이른다. 야권에서는 “이 정도 금액의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해 전담팀까지 구성한 것은 지나친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전두환 전 대통령 딸 전효선 교수, 학생들 내쫓은 뒤 결석 처리…무슨 일?

    전두환 전 대통령 딸 전효선 교수, 학생들 내쫓은 뒤 결석 처리…무슨 일?

    전두환 전 대통령 딸 전효선 교수, 학생들 내쫓은 뒤 결석 처리…무슨 일? 전효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딸 전효선 서경대 교수가 학생들이 예습을 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의실에서 내쫓은 뒤 결석처리를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있다. 이 사실은 서경대 익명 게시판에 학생들이 제보하면서 알려졌다. 지난달 19일 ‘서경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전 교수는 전날 교양영어 수업에서 학생 20여명을 결석 처리하고 내쫓았다. 예습을 제대로 해 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정원 40여명 가운데 약 절반이 이날 수업을 듣지 못했다. 이 제보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퍼졌다. 이와 관련해 서경대 측은 “예습을 제대로 해 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화가 난 전 교수가 학생들을 결석 처리한 게 맞다”면서 “그러나 이후 교수를 교체해달라는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 교수와 협의해 전효선 교수가 교양영어 2반 수업에서 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한광옥 국민대통합 위원장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한광옥 국민대통합 위원장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에겐 잊지 못할 날짜 두 개가 있다. 1982년 10월 7일과 2012년 10월 5일이다. 33년 전 10월 7일은 그가 11대 국회 초선의원으로 첫 국회 대정부질문을 한 날이다. 안기부 눈을 피해 일주일간 잠적했다가 전격적으로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선 그는 ‘광주사태’ 진상조사와 김대중 선생 석방,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7개항을 정부에 촉구했다. 서울의 봄을 다시 얼어붙게 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엄혹했던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누구도 꺼내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2년 10월 5일은 그가 18대 대선을 코앞에 두고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입당한 날이다. ‘김대중의 비서’가 ‘박정희의 딸’ 곁에 선 날이고, 호남의 원로정치인이 영남의 미래권력과 손을 잡은 날이다. 1982년 10월 7일이 그의 40년 정치인생의 좌표를 설정한 날이라면 30년 뒤인 2012년 10월 5일은 그 좌표를 향해 헤쳐온 40년 정치항로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날인 셈이다. 평생을 ‘김대중 사람’으로 살다 정치적 월경(越境)을 단행한 그의 지난 2년은 어떠했을까. 그의 소망대로 역사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화해와 통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현 정부가 그에게 부여한 국민 대통합의 소명은 지금 어떻게,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수장에 오른 지 두 해를 조금 넘긴(그는 2013년 7월 통합위원장에 임명됐다) 그를 지난 15일 만났다. 인터뷰는 통합위가 입주한 서울 신문로 S타워 19층의 위원장실에서 1시간 30분 남짓 이뤄졌다. →국민대통합위원장직을 맡으신 지 2년을 넘겼습니다. 소회부터 여쭙겠습니다. -온돌을 예로 들고 싶어요. 온돌은 불을 땐다고 금세 덥혀지는 게 아니잖아요. 천천히, 그렇지만 한번 덥혀지면 오래가죠. 국민 통합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돌아보면 지난 2년은 국민통합이라는 온돌을 덮이는 시기였고, 이제 그 온기를 구석구석까지 확산시키는 시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통합위 차원에서 2018년까지 추진할 국민대통합 종합계획안을 만들어 놓고 있어요.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이나 국민대토론회 같은 크고 작은 실천과제들을 차근차근 추진해 나갈 생각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통합위가 뭐 하는 데냐’고 묻습니다. 그만큼 통합위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위원장으로서 뭐라 항변하시겠습니까. -통합이라는 게 마치 공기와 같아서 아주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체감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 듯해요. 통합이 잘됐다 못됐다 이렇게 평가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구요. 광복 이후 지난 70년 우리 사회가 고도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쌓여온 압축갈등을 하루아침에 해소하고 통합을 이룬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통합위가 2년 활동해서 없앨 수 있는 갈등이라면 압축갈등이라 할 수도 없는 거지요. 현 단계에서 통합위를 평가하는 건 성급하다고 봅니다. 통합은 비록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인 만큼 인내심을 갖고 한 발씩 나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지역·이념·계층·세대 갈등 가운데 어떤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보시는지요. -계층갈등이에요. 한때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지역갈등이 부각되기도 했는데,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계층갈등이 가장 심각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의 갈등이 가장 심하고 그 파장 또한 대단히 큰 상황입니다. 경제적 격차가 교육 격차, 문화 격차, 복지 격차 등을 낳고 있는 거죠.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났다고 했지만 지금은 이게 어렵습니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사회 전체가 동맥경화에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모두가 계층 갈등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누리당 정부가 8년째 집권 중인데 계층갈등이 심각하다면 지금의 여당정권이 그만큼 이 문제에 소홀했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런 지적은 온당치 않다고 봐요. 70년 동안 쌓인 압축갈등을 어떻게 이제 막 임기 절반을 넘어선 박근혜 정부가 다 해결할 수 있겠어요. 그건 너무나 성급한 기대죠. 그나마 지금 노동 개혁과 공무원연금 개혁, 교육 개혁 등을 통해 갈등을 해소해 나갈 주춧돌을 쌓아 나가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봅니다.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 아닙니까. 대통령의 원칙과 소신이 없으면 해내기 어려운 일들이라고 봅니다. 제가 1기 노사정위원장을 맡았던 1998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정리해고처럼 당시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사 간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과제가 많지만 이번 노사정 대타협은 정부의 설득과 한국노총의 결단이 어우러진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렇게 큰 사회협약을 불과 1년 만에 타결지은 건 대단히 평가할 일입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올해 메르스 사태 등을 겪으면서 박근혜 정부의 소통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역대 대통령과 비교해 박 대통령의 소통, 어떻게 보십니까. -이게 소통이라는 게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나도 대통령 비서실장 해봤지만 대통령들마다 다 자기의 소통 스타일이 있어요. 그저 한 측면만 보고 소통이 된다 안 된다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많은 분들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듣기 싫어도 소통하게 돼 있습니다. 단지 대화를 어떤 형태로 하느냐에 있어서 대통령마다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난 박 대통령도 나름의 다양한 경로와 형태로 조용히 소통을 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 →많은 얘기를 듣는다면 위원장께서는 대통령과 어느 정도로 대화하고 소통하십니까. -(허허허) 청와대 정무수석이 통합위원회 당연직 간사입니다. 통합위가 대통령 자문기구이니만큼 구두든 뭐든 형식 따질 것 없이 소통하게 돼 있습니다. →정무수석을 통해 대화한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대면소통이 중요하지 않나요. -꼭 얼굴을 보고 독대를 해야만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도 두 분의 정치적 뿌리가 다른 만큼 이심전심을 말하기는 어려운 사이 아닌가요. -아이고 자꾸 날카롭게 파고드는데, 그건 그렇게 볼 일이 아니에요. 생각해봐요. 대통령 선거 때 이심전심이 아니었으면 내가 도울 수 있었겠어요. 난 1982년 10월 7일 초선의원으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광주사태 진상 조사하자고 했고, 김대중 선생 석방하라 했고, 대통령 직선제 하자 했고, 전두환씨 민정당 총재직 내려놓으라 했고, 언론 자유 보장하라고 했고, 지방자치 실시하자고 했어요. 하나같이 당시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을 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당시 나를 다 ‘한투사’라고들 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딱 30년 만에, 그러니까 2012년 10월 5일에 내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겁니다. 나중에 보니 그게 딱 30년 만이더라고요. 그럼 새천년민주당 대표까지 한 내가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느냐. 난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허락할 때 김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입니다. 또 박 대통령이 2004년 6월엔가 김 대통령, 당시엔 대통령에서 물러나셨을 때인데 아무튼 찾아오셔서 ‘아버지 때 고통받으신 것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했어요.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어요. 김 대통령도 박 대표가 가고 나서 그러더라고요. 돌아가신 분에게 사과를 받은 느낌이라고…. 김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하지 못해 한스러움을 갖고 있는 게 있다. 동서화합이다. 그런데 이걸 할 수 있는 적합자가 박 대표다’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내가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이나 역사적인 화해를 생각하면서 대통령 후보 세 분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는 박 후보더라고…. 그분의 진지함이나 확고한 신념, 원칙 이런 걸 볼 때 가장 믿음직했던 거죠. 그래서 박 후보 지지라는 결단을 내린 겁니다. (그런 관계이니만큼 박 대통령과의) 소통은 여러 형태가 있는 겁니다. →화제를 바꿔보죠. 최근 야당의 내부갈등이 심각합니다. 한데 이 내분도 큰 틀에서 보면 영남권 친노 진영과 호남권 비노 진영으로 나뉘는 듯한데 제 스스로 동서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정치권이 지역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국민대통합이 중요한 이유는 민족 과제인 남북통일의 가장 핵심적인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남갈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어떻게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통합위원장이 되고 포항 땅끝마을에서부터 해남 땅끝마을까지 동서 가릴 것 없이 전국 곳곳을 다녔는데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지역감정이 많이 옅어졌다는 사실을 체감합니다. 문제는 바로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을 이용한다는 점이에요. 후배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국민의 뜻이 뭔지를 깨닫고 국민들이 원하는 걸로 싸우라는 겁니다. 노동 개혁만 해도 국회가 법을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실천하고 경제난을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다시 돌아올 환경을 만들어 주고 노동자들이 근로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기업도 보다 투명하게 운영하는 풍토를 만들어야죠. 여야가 이런 문제를 놓고 국회에서 밤을 새워야 합니다. 강한 야당에 강한 여당이 있는 겁니다. 나라가 있고, 자기 집단이 있고, 내가 있는 겁니다. 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야권에서 여권으로 활동영역 옮기셨으니 양쪽 분위기를 다 접하신 셈인데, 지금의 여야 어떤 색깔 차이가 있습니까. -이 당이 어떻고 저 당이 어떻고 하기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인 의식보다 공동체 의식이라고 봅니다. 1968년 개럿 하딘 교수가 설파한 ‘공유지의 비극’이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말해줍니다. 주인 없는 목초지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소를 키우도록 했더니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서로 더 많은 소를 풀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다 결국 목초지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가 됐고, 그 많던 소는 다 사라졌습니다. 저마다 눈앞의 자기 이익만 좇다 전체를 잃고 말게 된 겁니다. 통합위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상생이고, 그다음이 공정, 그다음이 신뢰였습니다. 상생과 공정, 신뢰가 통합의 기초인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자기가 먼저 실천하는 공동체 의식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권 등 사회지도층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합니다. →선배 정치인으로서 볼 때 지금 정치권이 주인 의식만 있고 공동체 의식은 부족하다고 정리할 수 있겠군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게 있습니다.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있죠. 정치는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겸손하게 낮추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되 짠물 같은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 권노갑 새정치연합 고문 등 30년 정치역정을 함께 해 온 동교동계 인사들과 연락하고 지내는지를 물었다. 쓸쓸한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 “권 고문 요새 활동하고 계신가?” “전화한 지 오래돼…. 그분 연세가 많잖아. 김대중 대통령을 끝까지 곁에서 모신 분이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입은 열려 있었지만 말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온 말보다 맴도는 말이 몇 곱은 더 돼 보였다. 국민 통합의 현주소와 통합으로 가야 할 이유가 어쩌면 그의 끊긴 말에 담겨 있는 듯도 싶다. 진경호 부국장 jade@seoul.co.kr ■한광옥 대통합 위원장은 숱한 직함 가운데 ‘김대중 비서실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이다. 한·일 수교 반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6·3세대의 핵심으로 신도환 신민당 최고위원 밑에서 정치를 시작, 1982년 11대 국회 민한당 국회의원(서울 관악구)으로 등원한 뒤로 30년 가까이 ‘김대중 사람’의 한길을 걸었다. 13대와 14대, 15대(보궐선거) 국회까지 4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 대통령 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권노갑·김옥두 전 의원처럼 1960년대부터 김 전 대통령을 따른 동교동계 1세대와 달리 1980년대 중반 김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해 범동교동계로 분류되지만 권 전 의원 다음으로 늘 그의 이름이 불릴 정도로 동교동계의 둘째 형 역할을 맡아왔다. 생불(生佛)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화해‘나 ’협상‘ 같은 단어를 곁에 두고 살아온 정치인이기도 하다. 국회노동위원장, 범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DJP) 추진위원장, 제1기 노사정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초대 상임의장 등을 맡으면서 여야 모두로부터 ‘대화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12년 초 민주통합당 공천 과정에서 탈당한 뒤 정통민주당을 창당했다가 18대 대선을 두 달여 앞둔 10월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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