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전도사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검열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가짜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회수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미국 내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75
  • ‘올해 정치인’ 1위 金대통령·2위 李총재…주간 뉴스피플

    ‘99년의 정치인 99명’에는 누가 오를까.맨 윗자리는 金大中대통령이 차지 했다.‘가장 기대되거나 호감가는 정치인’에서 52.9%를 얻었다.한나라당 李 會昌총재(20.6%)와 金鍾泌국무총리(16.3%)가 뒤를 이었다.여야 3당 ‘오너’ 들의 정치적 비중을 반영한다.복수응답이 가능토록 한 질문이었다. 대한매일 주간 자매지 뉴스피플이 5일 올해 정치인 99명을 뽑았다.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했다.국민 1,000 명과 정치부 기자 100명이 대상이다. 4위는 35살의 국민회의 金民錫의원이 차지했다.다소 의외로 평가된다.이어 9위까지 모두 국민회의 인사들이다.盧武鉉부총재,李仁濟고문,李海瓚교육장관 ,金槿泰부총재,趙世衡총재권한대행 등 순이다. 한나라당에서는 姜在涉의원이 10위로 혼자 턱걸이했다.趙대행을 빼고는 평균 나이가 48세1개월이다.국민들의 세대교체 여망을 입증한다. 일반 국민들과 정치부 기자들간에는 다소 시각차가 있다.기자들은 국민회의 金槿泰부총재(35.3%)를 가장 개혁적인 인사로 뽑았다.金대통령(34.1%)보다 근소한 차이로 앞선다.국민회의 權魯甲전의원도 국민 24위,기자 14위로 차이 가 난다. 金重權대통령비서실장은 국민조사에서 42위에 그쳤다.기자들 조사에서도 30 위에 머물렀다.여권 신주류를 대표하는 실세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다.한나 라당의 ‘토니 블레어군(群)’은 姜在涉의원을 빼고는 다소 뒤에 처져 있다. 姜三載의원은 기자들로부터 13위를 차지했다.徐淸源의원은 22위로 나왔다. 상위 50위권 정치인들은 올해 최우선 정치이슈로 ‘내각제’를 꼽았다.2순 위는 각당 처지에 따라 다르다.국민회의측은 정치개혁을,한나라당측은 인위 적 정계개편을 2위에 올렸다. 국민회의 의원들은 金대통령 개혁노선에 입을 맞췄다.李海瓚교육장관과 薛 勳의원은 ‘16대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을 제시했다.그러나 한나라당과 자 민련은 다소 이중적이다. 자민련 朴泰俊총재는 ‘경제위기 해소와 정치개혁 완성’이라고 지적했다. 朴哲彦부총재도 ‘여권 통합문제,선거제도 문제’를 들었다.‘내각제 전도사 ’인 金龍煥수석부총재는 서면질의를 거부,말을 극도로 아꼈다. 한나라당 李會昌총재는 ‘여권의 정략적 정계개편 의도’를 꼽았다.金德龍 부총재도 ‘여권의 정략적 정계개편 기도’라고 말했다.비주류측은 다르다. 徐淸源의원은 ‘정치혁신’을 제시했다.李漢東전대표도 ‘정치개혁’이라고 했다. [朴大出 dcpark@]
  • 金대통령과 밀월1년-‘개혁 부축’ 숨가빴던 朴泰俊총재

    “최선을 다했다.후회는 없다” 자민련 朴泰俊총재의 송년(送年)소감이다.누구보다 바쁜 한해를 보냈다는 얘 기다.그는 28일에도 金大中대통령과 머리를 맞댔다.올 마지막 주례회동이다. ‘밀월의 한해’를 결산하는 자리였다. 朴총재는 金대통령과 일주일에 한번 ‘회동’을 갖는다.공동여당 총재자격 으로 만난다.국정현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자리가 된다.주고받은 얘기들은 당연히 국정운영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이 점만은 金鍾泌총리보다 격상된 외형이다.金총리는 ‘보고’에 머물고 있다. 朴총재는 金대통령과의 한해를 ‘밀월’로 보냈다.서로의 인식에 한치 오차 를 드러내지 않았다.金대통령의 개혁에 누구보다 앞장섰다.특히 경제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쉴새없이 재벌을 질타하며 金대통령을 지원했다.‘철강왕’ 으로서의 자존심과 경험이 뒷받침됐다. 그가 자민련 내부에 늘 강조한 화두(話頭)는 ‘공조’였다.사실 공동여당은 올 한해 삐걱거리는 일도 적지않았다.각종 정책을 놓고
  • 경제개혁 야전사령관 李憲宰 금감위장(올해의 인물:5)

    ◎타협 거부… 부실은행­재벌 구조조정 ‘채찍’ 우리 사회의 올해 화두(話頭)는 단연 구조조정이었다. 바로 李憲宰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이 구조조정의 ‘전도사’이자 ‘조련사’로서 늘 그 한복판에 있었다.어눌하지만 툭 던지는 한마디에 구조조정의 메시지가 그대로 담겼다.타협보다 원칙을 지키는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5개 은행을 퇴출시키고 55개 부실기업을 선정할 때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다.20년간의 낭인생활을 끝내고 자민련 추천으로 ‘권좌’에 앉았지만 대전에 있는 충청은행을 정리했고,金大中 대통령의 아성인 광주 한남투신을 현대의 국민투신으로 넘겼다.李위원장은 어줍잖은 ‘말’로써 재벌개혁을 이끌었다는 냉소적인 평을 듣기도 한다.하지만 지인들은 그가 위원장 취임때부터 그려진 구조조정의 시나리오에 충실했다고 말한다.재벌에 충분한 시간을 줬고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숨은 그림을 찾듯 하나하나 매듭을 풀었을 뿐이라고 옹호한다. 그는 재무부 시절 ‘장관급 과장’으로 불릴 만큼 명성을 떨쳤다.그러나 ‘관료 출신’이란 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출발만 관료였을 뿐 금융과 기업쪽에 몸담았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시장경제주의자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한계기업과 부실기업에는 으스스한 ‘저승사자’처럼 보이지만 사석에서는 폭탄주를 3잔씩이나 마시며 걸쭉한 농담을 즐기기도 한다. 여전히 실직자들에게는 ‘공적 1호’이며 재벌과 경쟁적 관계에 있는 관료들에게는 ‘이단자’ 취급을 받는다. 李위원장은 취임하면서부터 ‘욕’먹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실제 올해에 그만큼 ‘원성’을 산 사람도 드물다.금감위가 들어선 서울 여의도 증권감독원 주변은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가 계속된다.그래도 요즘은 자신감이 더 붙은 듯하다.금융구조조정을 조율할 때 서툴렀던 점이 빅딜 등 재벌개혁을 주도하면서 노련함으로 바뀌었다. 작고한 陳懿鍾 전 총리의 사위인 李위원장은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사고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젊은층을 비롯해 학자 기업인 금융인 언론인 등을 가리지 않는다. 역사소설을 즐기며 풍수지리에 밝아 집무실 배치를 바꾸었을 정도다.골프는 싱글 수준.
  • 趙 대행 모처럼 지역구 나들이

    ◎성탄절 맞아 교회 방문… 주민들과 담소/산적한 정국현안 잠시 잊고 머리 식혀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이 25일 모처럼 지역구(광명을)를 찾았다.성탄절을 빌미로 지역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그는 광명 철산2동 중앙교회를 방문,지역 주민들을 만났다.잠시나마 골치아픈 정국현안을 잊었다. 趙대행의 어깨는 그러나 연말 들어 더욱 무겁다.정국이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규제개혁 법안의 연내 처리와 경제청문회,정치인 사정문제 등 풀어야 할 현안이 켜켜이 쌓여 있다.내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趙대행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정국해법’ 능력의 시험대다.그런 만큼 부담이 크다. 趙대행은 그동안 ‘당권’을 향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해왔다는 지적이다.대학 강연을 통해 ‘개혁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했고 휴일에는 연극무대 등을 찾아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공을 들여왔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지역행사에 참석할 경우 따로 그 지역 인사 등을 만나며 기반을 다져왔다.측근들도 “내년에는 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권 도전의사를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최근 趙대행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동교동계 좌장격인 權魯甲 전 부총재가 곧 일본에서 귀국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호사가들의 온갖 추측성 발언 및 분석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趙대행이나 權전부총재 등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주위에서 ‘마음고생’을 시킨다는 얘기도 들린다.趙대행은 權전부총재의 귀국이 갖는 ‘미묘함’ 때문에 애써 말을 아낀다. 權전부총재의 역할 등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정치인이니까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원칙론적 반응이 고작이다.
  • 극단 말죽거리 ‘헌집 줄게 새집다오’

    ◎판자촌 앞뜰에 심은 희망의 메시지 극단 말죽거리가 30일부터 내년 1월말까지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공연한다. 창단7돌을 기념하는 8번째 정기공연이자 연극협회 가입후 처음 갖는 무대다. 배경은 상류층 부인들의 단골 산부인과와 그 뒤에 있는 무허가 판자촌이다. 좀 넓혀 보면 가난함과 부유함이 공존하는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다. 말죽거리 정기공연의 대본을 도맡아온 손현미 작가는 “언젠가 강남 부유층이 다니는 산부인과에 차를 대려고 뒤로 돌아갔다가 판자촌을 목격하고 작품을 구상했다”면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를,판자촌 집앞 저마다 가꾸어 놓은 화단에 품은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담고 싶었다”고 전한다. 판자촌 3 가구와 병원 경비원 달봉(김동영)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가진 자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달봉이 판자촌 삶의 방식에 일일이 간섭과 구박을 하기 때문이다. 자린고비 생활로 모은 돈으로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꿈에 부풀어 있는 대룡(차순배)은 사기꾼 전도사 동광(정선일)의 꼬임에 빠져 돈을 다 날린다. 이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이 각박한 현실에 필요하다’는 사실을,연출을 맡은 문고현 교수(서울 신학대학원)는 보여준다. 대학로 정보소극장. 오후 3시30분·7시30분.1월 30∼31일만 오후 3시·6시·8시.(02)529­4769
  • 화제를 몰고 다니는 신임 南宮晳 장관/‘네티즌 장관님’의 일성

    ◎“빛의 속도로 일합시다”/인터넷 홈페이지엔 전국서 축하메일 쇄도/소설가 지망 독서과에 업계선 “情通대부”/“대변혁의 시대”… 강도높은 빅딜 예고 “장관님의 입각을 축하드립니다. 큰 뜻으로 우리 한국의 정보산업이 더 한층 발전되기를 소망하겠습니다. 대구에서…” 21일 취임한 南宮晳 신임 정보통신부 장관(61)의 홈페이지(http://arira.com.)에는 취임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로부터의 이같은 취임축하 메일이 가득 쌓였다. 南宮장관은 삼성SDS사장 재임시절인 지난 97년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네티즌들과 전자우편을 주고 받으며 인터넷 항해를 시작했다. 직접 컴퓨터프로그램을 짜는 실력의 대표적인 컴퓨터전문가 경영인이다. 업계에서는 그를 ‘정보화의 전도사’ ‘정보통신의 대부’라고 부른다. 그만틈 정보 마인드 확산과 정보통신업계의 발전에 기여해 왔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방법론은 지금까지 숱한 화제를 낳았다. 삼성데이타시스템 재직 초기인 지난 94년 그는 사내 통신망에 ‘사장에게 바란다’라는 코너를 마련했다. 사원들은 이 코너를 이용해 자신의 불만사항이나 회상 경영에 대한 의견을 여과없이 바로 최고 경영자에게 얘기할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애로사항은 직접 나서서 풀어줬다. 그는 이 전자우편을 묶어 경영철학서인 동시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에세이집 ‘신바람은 땀에서 나온다­사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펴냈다. 이 에세이집은 내용이 보완돼 지난 9월 ‘질라래비 훨훨’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의 이런 태도는 “경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서 시작된다”는 그의 지론에서 비롯됐다. 문학소년으로 신춘문예에도 수차례 도전했던 소설가 지망생인 그는 이름 난 독서광이다. 동서양 고전은 물론 외국 석학들이 쓴 철학 및 경영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지난 96년 여름 불의의 사고로 외아들 훈(당시 고려대 경영학과 3년)을 잃었을 때 숨진 아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컴퓨터 통신 ‘유니텔’에 띄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겨울 사재와 보험금 등을 모아 1억원을 고려대에 ‘남궁훈 봉사장학금’으로 희사하기도 했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수평적으로 연결되면서 자유스럽게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킹 정보화사회”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을 ‘네티즌’이라고 소개한다. 하루의 일과를 컴퓨터를 켜고 자신에게 온 전자메일을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저녁에는 PC통신의 ‘온라인 바둑게임’으로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풀 정도로 PC통신,인터넷과 가깝게 지낸다. 그래서 “앞으로도 국민 누구든지 빛의 속도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정보인프라를 확충하는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선린상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南宮장관은 68년 삼성그룹에 입사,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현대전자 부사장,한국PC통신 초대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93년 9월부터 시스템통합 전문업체인 삼성 데이터시스템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했다. 취미는 바둑(아마 5단)이며,골프는 싱글의 실력. 부인 李貞子씨(57)와의 사이에 2녀.
  • 金元吉 정책의장­朴相千 법무/인권법 제정 놓고 의견 대립

    국민회의 金元吉 정책위의장과 朴相千 법무부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여권의 실세다.대선을 전후해 정책위의장­원내총무로 호흡을 맞췄고 양쪽 다 ‘후퇴보다 정면돌파’를 택하는 저돌적 추진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고 있다.집권후 金의장은 정책개혁을,朴장관은 법조개혁을 총지휘하는 ‘개혁전도사’로서 金大中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벌써 몇달째 인권법 제정을 둘러싸고 한치의 양보 없는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진원지는 인권위원회의 위상문제.金의장은 국가기구를 통한 독립성 확보를,朴장관은 특수법인을 통한 인권보호를 주장하며 ‘양보불가’를 외치고 있다. 합의도출이 예상 외로 어렵게 되자 金대통령은 지난 9일 이들을 청와대로 불러 의견조율을 시도했다.하지만 “유엔권고안 수준으로 하라”는 金대통령의 지침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서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金의장은 “인권단체가 반대하는 인권법을 뭐하러 만드냐”고 시민·재야단체의 여론을 앞세워 압박전에 돌입했고,朴장관은 “인권보호 차원과 작은정부 구현을 위해서 국가기구는 안된다”는 논리로 ‘여론몰이’에 나서는 형국이다.
  • 친일의 군상:17/선우순­선우갑 형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직업밀정­고등계 형사/상해 臨政의 ‘처단대상 1호’/‘인텔리밀정’의 전형/구한말 한때 민족진영서 활동/日 유학후 日帝침략 선전 앞장/附日 대가로 중추원참의 지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는 한국 관련 자료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외무성사료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해 학습원대학의 동양문화센터와 도쿄(東京)·와세다대학의 도서관과 기타 역사적 인물들의 개인기념관에 산재한 자료 등. 여기에는 공문서를 비롯해 일제 당시 실력자들간에 주고받은 문건,편지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한국에서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자료들도 상당수 있다. 친일파에 관한 자료 역시 상당수 포함돼 있다. 수 년전 기자는 자료수집차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기자는 ‘사이토(齋藤實)문서’(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시절에 수집한 문서)를 검색하다가 3·1만세의거 직후 조선인 밀정이 작성한 정세보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朝鮮ノ最近ト對應策(조선의 최근과 대응책)’. 작성자는 ‘조선평양(朝鮮平壤)’출신의 ‘선우순(鮮于순)’이었다. 총 40쪽 규모의 이 정세보고서는 3·1의거 직후 조선내 각 지역·종교세력간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임시·영구대책을 상세히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총독부 당국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밀정 중에서도 ‘먹물’을 먹은 고급밀정의 ‘작품’인 셈이다. 선우순(鮮于순,1891∼1933).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하 몇 안되는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시말해 그는 직업이 ‘친일’이고 그걸로 일생을 먹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동생도 그와 마찬가지로 친일 밀정노릇을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두 형제가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으니 ‘형제는 용감했다’고나 할까. 선우순은 평양 태생이다. 1930년 당시 그가 중추원참의 시절에는 경성(京城,현 서울)에 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해당주소의 호적을 확인한 결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선독립불능론 강연 그의 인생의 말로는 친일파로 막을 내렸지만 초창기에는 그도 한 때 민족진영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서북학회월보’에 그가 쓴 글이 실려있기도 하고 1931년에 출간된 ‘조선신사록(朝鮮紳士錄)’에는 그가 1907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자로 입사해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다른 자료들에서 크로스체크 된 바는 없지만 크게 의심할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가 친일대열로 전향한 것은 ‘대한매일신보’를 퇴사한 직후 일본인이 평양에서 발행하던 ‘평양신문(平壤新聞)’에 입사한 것이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10년 11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12월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대학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신인 일본기독전도회사의 의장인 니지마죠(新島襄)가 설립한 학교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조선에 진출하여 종교침략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일본당국과 재벌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얻어 조선에서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11년 7월 평양에 평양기성(箕城)교회를 세웠다. 선우순은 바로 이 교회를 다니면서 일본인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을 통해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한편 1915년 도지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양기성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일본인들과 함께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면서 조선인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이 단체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해 9월 19일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유력자 모임에 참석해서는 ‘조선독립 불능론’을 강연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그는 평안남도 지사 시노다(條田治策)의 사주·후원으로 1920년 10월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설,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평안도 일대의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단체로써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기관지로 ‘대동신보(대동신보)’를 창간,사장에 취임하였으며 평양에서는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매체들은 일선융화(日鮮融和)·공존공영(共存共榮)을 내걸고 선전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마음속에 품고있던 식민정책을 그가 나서서 대신 나팔을 불어준 셈이다. ○日帝의 대변자 자임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들(조선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공통(共通)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일본인과 한국인)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웅비하는 방법…”(‘조선및 조선민족’)이라며 일제의 충실한 대변자역을 자임하였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1920년 11월 평양부 협의회원(현 시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중추원 참의(주임관대우)에 임명되었는데 1933년까지 13년간 5회 연속 중임하였다. 일개 전도사로 출발해 이 정도 대열에 오른 경우로는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의 친일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가 조선총독을 면담한 횟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1919년 8월부터 1926년 사이에 그가 사이토 총독을 면담한 횟수는 무려 119회나 된다(姜東鎭,‘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평균해서 22일마다 1회꼴인데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매국노 宋秉畯이 사이토를 면담한 횟수(58회)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다. 당시 그는 고급관료나 친일귀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중추원 참의 70명 가운데서도 66번째 차순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않고 총독의 집무실과 관저를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의 친일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의 명성(?)은 상해 임시정부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당시 임정에서는 일본인 고위관료·매국적(賊)·고등밀정·친일부호·총독부관리·독립군 사칭 불량배·모반자 등을 ‘칠가살’(七可殺,처단해야할 일곱 부류의 집단)로 규정,처단대상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매국적’의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와 함께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였던 閔元植이 일본 도쿄에서 민족청년 梁槿煥에게 처단된 것은 임정의 이같은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생도 악질형사의 표본 선우순의 동생은 선우갑(鮮于甲,생몰미상) 역시 그 형에 못지않은 악질적인 친일분자였다. 그는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유학생 감시역을 하였는데 2·8독립선언 당시 현장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중심인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체포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기자직함을 가지고 미국에 파견돼 일본을 선전하였으며 재미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의 충견(忠犬)으로 활동한 셈이다. 같은 선우(鮮于) 성(姓)을 가진 사람중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을 한 사례도 있다. 선우혁(鮮于赫)­선우훈(鮮于燻) 형제가 그들로 모두 임정에 관여하였다. 이들 두 형제는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동시대를 살다가 갔다. 민족의 수난기에 어느 형제가 올바른 삶을 살았는지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천년이 가도 퇴색되지 않을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흑(黑)과 백(白)으로. ◎사이토 조선총독 누가 몇번 만났나/밀정­왕족­친일관료順 면담 많아/선우순 7년간 119회로 최다/정보제공 대가로 거액 받아 일제시대에 조선인 중에서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료나 군 수뇌부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더러 위무(慰撫)나 회유 차원에서 총독이 조선인 유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조선인과 자주 면회를 가진 사람은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사이토는 3·1만세 의거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총독에 부임한 이래 1919년 8월부터 1926년말까지 총 839명의 조선인을 만난 것으로 나와있다.(姜東鎭,‘일제의 한국 침략정책사’) 이들 가운데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사 10명을 꼽아보면, 鮮于순(119회),李軫鎬(86회),李堈公(85회),李王(순종,75회),韓相龍(73회),閔興植(59회),宋秉畯(58회),申錫麟(53회),方台榮(51회),朴泳孝(47회) 등이다. 왕족인 이강공이나 이왕(순종)의 경우 총독의 문안인사나 공식행사장에서의 접견 등이 감안된 것이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들은 모두 친일관료(이진호,총독부 학무국장)나 조선귀족(송병준·박영효)·친일자본가(한상룡)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우순·민흥식·방태영은 ‘직업적 친일분자’에 속한다. 이들은 사회적 직위에 관계없이 총독을 수시로 만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댓가로 기밀비조로 금전을 받곤 했다.
  • 학력 낮아도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나의 선택,나의 길’·‘나는 나답게 산다’ 출간/임권택·박준·조태훈씨 등 성공과정 담아 도서출판 산하에서 펴낸 ‘나의 선택,나의 길’,‘나는 나답게 산다’는 학력 장애를 딛고 정상에 올랐거나 적성이나 소질을 찾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른바 신지식인들의 이야기이다. 교육부가 실시한 ‘능력중심 사회 구현을 위한 실천 수기’ 현상공모에서 뽑힌 32편의 원고와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이 된 사회 저명인사 13명의 글을 모아 엮었다. ‘씨받이’‘서편제’를 만든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 임권택.중학3년 중퇴에 빨갱이 자식인 그는 영화판에서 잡초처럼 살아오다 어느날 헐값으로 만들어낸 자신의 싸구려영화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양 영화의 아류로 부터 벗어 나기로 마음을 먹는다.이후 뼈와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수반하면서 작품마다 엄청나게 땀과 정성을 쏟은 그는 ‘한국만이 갖고 있는 문화적 개성을 듬푹 담아 세계라는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는데’한몫을 한다.그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지금도 할 수 있고 앞으로도 할 수있다는 것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박준씨는 미용가위로 정상이 된 인물.초등학교 졸업이 고작인 그는 60여개 지점이 있는 미용 프랜차이즈 사업체 대표에다 숙명여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남이 하지 않는 일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그는 70년대 초반 YMCA 미용실을 보는 순간 “내가 할 일은 바로 저거다”라며 미용기술에 빨려 들어간다.“남자가 뭐 할일이 없어서…”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용기술을 습득,국제대회에서 당당히 입상한다.박씨 역시 가위를 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치는 것이 성공의 비법”이라고 강조한다. 신속한 자장면 배달로 유명해지면서 기업체에 마케팅전도사로 불려 다니는 고려대앞 번개외식 연구소장 조태훈씨도 소개되고 있다.그 역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며 “자기 앞에 직면한 모든 일을 즐겁고 보람되게 그 무엇보다도 열심히 하려 했던 것이 성공비결”이라고 말한다.
  • 朴泰俊 총재 또 재벌 성토

    ◎구조조정 늑장… 1년동안 빚 17조 늘어/일부그룹 겨냥 직격탄도 서슴지 않아 자민련 朴泰俊 총재가 또다시 재벌을 성토하고 나섰다. ‘경제전도사’답게 재벌 구조개혁을 강도 높게 촉구했다. 7일 정·재계간담회에 앞서 지원사격용이다. 지난 4일 청와대 경제대책조정회의 참석에 이어 ‘경제행보’의 일환이다. 같은날 6개 경제부처 장관 오찬간담회도 주재했다. 朴총재는 이날 李完九 대변인을 통해 “5대 기업 중심의 구조개혁이 대단히 미진하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지난 1년 동안 빚이 17조원 늘어났다”면서 “도대체 어떤 구조조정을 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고 개탄했다. 개별 기업에 대한 직격탄도 서슴지 않았다.먼저 “빚이 늘었다는 것은 안갚았거나 구조개혁과 반대로 사세 확장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모재벌은 백화점 중심으로 오히려 사세를 확장,부채비율이 500∼600%나 되는 등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현대그룹을 직접 겨냥한 언급이다. 그는 이어 “재벌이 제출한 계획서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이런점을 대오각성하면서 연초 약속한 5대 원칙의 실질적인 구조개혁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미흡한 구조조정을 놓고 정부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문했다.
  • 재벌과 예술품/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는 최근 ‘경제·금융위기 속에서도 한국 재벌들이 예술품 수집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예술품은 상대 가문에 대한 우위를 과시하고 국민들에게 위세를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면서 ‘기업은 극단적인 재정상황에서도 예술품을 사들이고 전시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때가 때인 만큼 빈정거림이 섞인 것같아 개운치가 않다. 우리 화랑가에는 언제부턴가 재벌2세나 부인 또는 며느리들이 미술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직접 선대에서 미술품 수집수업을 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 등에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경영 수업을 받고온 사람도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에서도 대기업들이 미술품 수집에 발벗고 나선지 오래다. 단지 기업의 미술품 수집 배경이 무엇이냐는 것이 문제다. 즉 ‘완상’에 목적을 둔다면 기업과 문화의 접목이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일 수 있지만 ‘소유’에 목적을 둔다면 투자가치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갑부들도 돈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이 슈퍼파워의 시대를 열었다면 이 나라의 부자들은 기가­에고(giga­ego·超巨物)의 시대를 맞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세계적인 투기꾼 조지 소로스,컴퓨터의 빌 게이츠. CNN의 테드 터너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다. 이들이 ‘초거물’인 까닭은 그들은 돈을 벌어서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처하거나 문명사가 등 인류평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선대의 취미를 물려받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그 예술품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한번쯤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가문의 우위과시나 국민들에게 위세를 뽐내기 위한 것이라면 예술품 수집과는 맞지 않는 모순이다. 그들의 선대들은 조상들이 남기고 간 국보급 예술품들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수준에서 문화재를 수집했고 이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미술품 수집은 돈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때만이 수집의 자격이 주어진다. 정신적으로단단하게 무장된 모습으로 비쳐져야 할 시기에 한가하게 예술품 수집 경쟁으로 치열하게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수집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 친일의 군상:1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배족행위에 면죄부 주는 각종 기념상의 실체/친일인사 기념상 난무… 뭘 기리자는 것인가/대상인물의 친일행각 도외시… 업적만 부각/일부 수상결정자 “친일파 기념상 못받는다” 거부/“공만 앞세워 기념상 제정하는건 역사의식의 결여” 비판 ‘단재상(丹齋賞)’이라는 상이 있다.단재 申采浩 선생의 정신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86년 제정된 상이다.지난 96년 이 상의 수상자 심사를 놓고 작은 사건(?)이 있었다.수상자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 두 명이 돌연 사퇴한 것이다.사퇴이유는 수상자로 내정된 廉武雄 교수(영남대·독문학)가 수상자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들은 廉교수가 그 해에 ‘팔봉(八峰)비평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문제삼았다.일제하의 경력으로 볼 때 단재 申采浩와 친일적인 팔봉 金基鎭은 서로 어우를 수 없는 인물인만큼 이들을 기념한 상을 한 사람이 동시에 수상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린 ‘심산상(沁山賞)’을 수상한 문학평론가 白樂晴(60·‘창작과 비평’ 편집인)씨는‘팔봉비평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보인다.‘팔봉비평문학상’이 왜 문제인가?요지는 간단하다.팔봉 김기진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최근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金活蘭씨의 이름을 딴 ‘우월(又月)김활란상(金活蘭賞)’제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이화여대측은 金씨가 교육·여성계에 끼친 업적을 들어 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국제적 규모의 상을 만들면서 왜 하필 대표적인 여류 친일인사의 이름을 붙이느냐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각종 상(賞) 가운데는 일제하 친일인사들의 업적을 기념한 상도 상당수 있다.이 상들은 대개 기념대상 인물들의 친일행각은 도외시한 채 그들이 해당 분야에서 남긴 업적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상당수는 당사자의 후배나 지인·유족들이 주축이 돼 기념사업회(혹은 기념재단)를 만들어 거기서 상을 주는 곳도 있고 더러는 제3의 기관·단체에서 상을 주기도 한다.주종을 이루는 분야는 문학 등 예술분야이나 학술·언론분야 등도 있다.구체적인 실태와 문제인물들의 친일행적을 알아보자. ○후배·지인·유족들이 주축 국내에서 시상되는 문학상은 그 종류가 무려 200개 가까이 된다.이 가운데서 친일인사(문인)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상은 10여개 정도.이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은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제정한 ‘동인(東仁)문학상’이다.이 상은 79년 이래 동서문화사에서 운영해 오다가 87년 이후부터는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해 오고 있다. 시(詩)분야에서는 공초 吳相淳을 기념한 ‘공초(空超)문학상’과 월탄 朴鍾和를 기념한 ‘월탄(月灘)문학상’이 있다.공초문학상은 91년 공초오상순선생숭모회(회장 具常)가 서울갤러리에서 기금마련 행사를 가진 후 그의 30주기인 93년부터 서울신문사와 공동으로 시상해 오고 있다.첫 수상자는 시인 李炯基씨. 월탄문학상은 월탄 朴鍾和가 66년 5·16민족상 부상으로 받은 상금 100만원을 기금으로 하여 시작됐다.이 상은 주로 시인을 대상으로 시상하지만 더러 소설가나 평론가에게 시상한 경우도 있다. 시조분야에도 상이 몇 있다.대표적으로는 ‘노산(鷺山)문학상’과 ‘육당(六堂)시조문학상’.육당시조문학상은 육당 崔南善이 ‘소년(少年)’지를 창간한 11월1일을 기해 창작·학술 2개 부문을 윤년제로 해마다 1명씩 시상하고 있다.노산문학상은 국학연구·시조 등 2개 부문을 시상해오고 있다. ○다수의 친일문장 남겨 평론부문에서는 ‘팔봉(八峰)비평문학상’과 ‘소천(宵泉)비평문학상’ 두 종류로 팔봉은 金基鎭,소천은 문학평론가 李軒求의 아호다.팔봉비평문학상은 90년 유족이 낸 기금으로 제정돼 매년 한국일보사에서 시상해 오고 있다.아동문학부문에서는 ‘李周洪 아동문학상’이 있다. 문학 전반에 걸쳐 시상하는 ‘조연현문학상’은 한국문인협회 회장과 ‘현대문학’ 주간을 지낸 조연현씨의 문학업적을 기리기 위해 82년 한국문인협회에서 제정,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위에서 거명된 인사들의 친일전력을 간단히 살펴보면,김동인은 중일전쟁 기간중 ‘성전(聖戰)종군작가’로 황군(일본군)위문을 다녀왔고 일제말기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다.오상순의 경우는 좀 색다르다.그는 문인이지만 친일문장을 남긴 것은 없다.그러나 일본의 동지사(同志社)대학 졸업후 일본조합(組合)기독교회의 전도사를 활동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이 단체는 3·1만세의거 당시 ‘배미(背迷)유세단’을 조직,조선전역을 다니며 만세를 부르지 못하도록 막고 다닌 반민족·침략교단(敎團)이었다. 박종화는 일제말기 학병권유 글과 시국담화를 발표한 적이 있고,이은상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에 근무한 사실이 있다.최남선은 만주 건국대 교수,중추원참의를 역임하였다.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친일잡지에 수 편의 친일문장을 썼고 김기진은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와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지내면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다수의 친일문장을 썼다.아동문학가 이주홍과 조연현은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에 수 편의 친일문장을 남겼다. ○학술·예술관련 상도 많아 문제 작가들의 친일행위는 대부분 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씨가 66년에 출간한 ‘친일문학론’ 등에 소상히 나와 있다.이미 30년전에 이들의 친일행적은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나 관계자들은 이들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단지 문학적 업적만을 강조한 채 어떤 문학상은 이미 수 십년째 시상해 오고 있다. 친일인사 중에서 학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기념한 학술상도 몇 있다.‘용재(庸齋)상’‘두계(斗溪)학술상’‘하성(霞城)학술상’ 등이 그것이다. 용재상은 연세대 초대총장을 지낸 용재 白樂濬 박사의 탄생100주년을 기념하여 95년에 제정됐다.제1회 수상자로는 워싱턴 주립대에서 한국학연구소를 개설,운영해오고 있는 제임스 팰레이 교수가 선정됐다.이 상은 ‘용재석좌교수’도 동시에 선발하고 있다. 두계학술상은 사학자 두계 李丙燾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진단학회에서 80년에 제정한 상이며,하성학술상은 문교장관과 영남대 총장 등을 지낸 하성 李瑄根 박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85년에 제정됐다. ○상 제정·동상건립 신중해야 백낙준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병도는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경력이있다.또 이선근은 30년대 후반 만주로 건너가 일제의 괴뢰정부 만주국 협화회의 간부를 지냈다. 이밖에 친일인사를 기념한 상으로는 작곡가 洪蘭坡를 기념한 ‘난파(蘭坡) 음악상’,‘동랑(東郞)연극상’ 등이 있다. ‘봉선화’의 작곡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홍난파는 ‘동우회(同友會)사건’에 연루돼 검거된 후 친일로 전향,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희망의 아침’ 등 다수의 친일가요를 작곡하였다. 우리 근대연극사에서 제일의 희곡작가로 불리는 유치진은 일진회(一進會)의 선봉장 李容九를 찬양한 ‘북진대(北進隊)’를 비롯해 다수의 친일희곡을 썼다.특히 그는 총독부가 주도하여 만든 현대극장의 대표로 있으면서 일제말기 각종 친일매체에 다수의 친일문장을 남겼다. 친일전력자들을 기념한 상과 관련,한 역사학자는 “역사적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을 기념하는 상이나 동상건립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지적하고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죄 한마디 없이 생을 마친 친일인사들에 대해 그들의 해방후 업적만을 강조해 기념하는 것은역사의식의 결여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목사·신도 등 7명 자살/양양서 승합차 불질러

    ◎서울 묵동 영생교회 소속/“순교하러 간다” 집 떠나 극단적인 염세주의에 빠진 특정종교의 신도들이 집단으로 불에 타 숨지는 사건이 발생,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발생 및 수사=지난 5일 오전 6시쯤 강원도 양양군 포월리 낙산대교 건설현장 인근 남대천 둑에 세워져 있던 서울 6코 1784호 12인승 베스타승합차(소유주 禹제홍)에서 불이 나 차에 있던 남녀 7명이 불에 타 숨졌다.사망자는 영생교회 목사인 禹鐘振씨(53·서울 중랑구 묵2동 235의 91)와 禹씨의 부인 崔순자씨(54),둘째 아들 제홍씨(27) 등 일가족 3명과 신도인 李영희(52·여·성북구 석관동 215)·崔계자(37·여·평택시 세교동 463)·崔수웅(27·성동구 행당동 168)·朴혜숙씨(25세 가량) 등 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이들이 영생교회 신도이며 지난 8월부터 순교할 장소를 찾으러 강원도로 떠났다는 진술을 확보,순교를 위해 집단자살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경찰은 이들이 종류를 알 수 없는 약을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집단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생교회와 禹씨=禹鐘振씨는 지난 82년 서울 은평구 S신학대학을 졸업했다.태백시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다 87년 면목동에 영생교회라는 개척교회를 설립,목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서울시내를 전전하며 선교활동을 해왔다.89년 교회를 구의동으로 옮기면서 신도수는 100여명으로 늘어났으나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신도들이 줄기 시작해 사건발생 이전까지 신도는 집단 자살한 7명이 전부였다. 禹씨는 교회를 면목동,상봉동 등으로 옮긴 데 이어 90년대 초 현재의 묵2동으로 근거지를 옮겨 전세방을 얻어놓고 폐쇄적인 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이들은 공사장 인부나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교회운영 경비 등을 조달해 왔다는 것이다. 禹씨는 또 3년전부터 순교은사(죽어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를 받았다고 주위사람들에게 말한 후 순교장소를 찾아 다녔고 평소 가족들에게도 “날짜만 잡히면 순교하러 간다”는 말을 자주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禹씨 일행이 93년 8월부터 세들어 살았던 서울 중랑구 묵2동 2층 집은 30여평 공간에 방 3개와 화장실 1개가 딸려 있으며 베란다에 대나무 발을 쳐 놓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돼 있었다.
  • 입장바꾼 IMF/세계 경제 ‘빙하기’ 경고

    ◎“내년 성장률 1% 이하로 추락 가능성 서방선진국 금리인하로 파국 막아야” 【워싱턴=崔哲昊 특파원】 국제통화기금(IMF)은 30일(현지시간) 내년부터 전세계가 경기침체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이는 지금의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IMF는 세계적인 경기침체 상황이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전면 수정한 것이다. 마이클 무사 IMF 수석 경제분석관은 이날 연례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세계 경제가 침체상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무사 분석관은 세계적인 경기침체는 세계경제 성장률이 1% 이하로 떨어진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80년대 초반 세계경제 성장률이 0.5%를 기록한 적은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적은 최근 30년동안 한번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IMF 보고서는 올해의 세계경제 성장률이 당초의 3.1%보다 1.1%포인트가 낮은 2.0%로 예상되고 내년의 성장률도 올해보다는 높지만 당초 예상치보다는 1.2%포인트가 낮은 2.5%일 것으로 내다봤다.보고서는 끝으로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서 각국이 금리인하에 나설 채비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또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고금리정책을 지속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IMF·컨퍼런스보드 전망/“美 경제는 건실”… 경기진작 전도사役 기대 미국경제는 적지않은 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건실하다.낮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고용률,탄탄한 제조업을 기반으로한 착실한 성장으로 아시아와 러시아의 경제침체의 연쇄반응을 막아주고 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연초 예상보다 0.6% 나 높은 3.5%로 전망돼 대미(對美) 수출 수요증가 등 아시아국가들의 경기 활성화에도 한 몫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경제의 한 축인 일본경제의 침체속에서도 개도국들의 수출을 흡수,세계경기의 숨통을 터주고 자금의 물꼬를 열어주는 ‘경기진작의 전도사’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다. IMF가 전망한 내년 성장률도 2.2%.최근 경제지표도 흔들림없는 경제 상황을 보여준다.8월중 통화공급,주(週)평균실업률,제조업체 신규주문 등 5개 지표는 상승세를 보였다. 민간조사회사인 ‘컨퍼런스 보드’도 경제활동을 6∼9개월 앞서 예측하는 경기 선행지수가 예전 수준을 유지하는 등 건전한 성장을 전망했다. 그러나 주가하락과 소비자 신뢰지수등 향후 경기를 예측하는 지표에서 어두운 전망도 있는 만큼 금리인하 등 지속적인 경기부양책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아시아와 러시아,남미 등의 통화가치하락으로 인한 미국의 수출감소와 수입증가,이에 따른 경기침체를 경기부양책을 통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日銀 기업대상 조사 결과/日은 “비틀”… 체감경기지수 4년만에 최저 【도쿄=黃性淇 특파원】 일본 기업들의 체감 경기지수가 갈수록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은행이 1일 발표한 기업 단기경제 관측조사(短觀)에 따른 것으로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디플레로 접어드는 기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여서 관심을 끈다. 체감 경기지수가 주요 제조업의 경우 -51로 지난 6월보다 13포인트가 악화됐다.또 주요 제조업의 이같은 지수는 94년 2월의 -56을 보인 이후 최저 수준이다.건설 등 개별 업종의 체감지수도 89년 11월 이후 처음으로 전업종에 걸쳐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기업의 설비투자와 고용, 자금조달,수익전망 등도 모두 저하 또는 악화됨에 따라 올 12월까지 기업의 예감 경기지수도 주요 제조업이 -46으로 크게 떨어졌다. 중소기업의 체감지수는 제조업이 -57,비제조업이 -44로 각각 지난 6월보다 악화됐음은 물론 주요 기업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금조달에 관해서도 주요기업이 4포인트 악화된 -5,중소기업도 3포인트 떨어진 -25로 나타났으며,금융기관의 융자태도에 대한 부정적인 응답비율도 주요,중소기업 관계없이 늘어났다. 일본 기업들의 이같은 경기인식 악화는 개인소비와 설비투자 등 실물경제 침체에다 금융불안과 세계적인 금융혼란에 따른 것이다.
  • 통일소/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현대그룹 鄭周永 명예회장이 지난 6월 판문점을 통해 500마리의 소떼를 북측에 기증했을때 우리는 이 소떼가 통일을 가져올 것이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통일소’로 이름붙였다. 소가 우직하게 힘든 농사일을 도우면서 우리민족과 애환을 함께하며 살아온 가축이었기 때문에 북으로 가는 소떼에게 통일의 염원을 담아 통일소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들이 소떼가 지나가는 통일로까지 나와 듣지도 못하는 쇠귀에 대고 “꼭 통일을 이룩해 달라”고 눈물어린 기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북으로 간 통일소떼 가운데 4월개도 못돼 몇십마리가 죽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그것도 남쪽의 통일부와 안기부가 의도적으로 소에게 먹여서는 안될 비닐쓰레기와 불순물을 먹였기 때문에 죽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북한의 생떼는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정성들여 먹이고 기른 소를 북한에 보낸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을 조금이나마 도와준다는 인도주의적 동포애의 발로에서였다.굶주리는 북녘동포들을 돕는다는 순수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인도적 남북교류가 분단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함께 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소에게 고의적으로 불순물을 먹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떼다. 더구나 현대그룹측이 지정기탁한 통일소 500마리가 엉뚱한 곳으로 분배됐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보니 솔직히 괘씸한 생각도 없지 않다. 우리 국민들의 한결같은 통일 염원을 가득 싣고 판문점을 넘어간 소떼들의 운명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북한당국자들이 말못하는 짐승까지 정치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통일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가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아무쪼록 통일의 여망을 싣고 북으로 간 통일소떼가 더 이상 별탈없이 남북의 화해를 이어주는 전도사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통일을 하루속히 이어주는 아름다운 연(緣)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개혁 전도사’ 金龍煥 부총재/국민의 정부 성과 대학 특강

    ◎“구조개혁은 그 자체가 희망”/빅딜 미흡 등엔 비판과 자성 자민련 金龍煥 수석부총재가 강연정치를 재개했다.22일 국민대에서 특강을 갖고 개혁 전도사로 나섰다.‘국민의 정부 성과와 향후 발전 과제’가 특강 제목이다.자민련 입장에서 공동정권 출범 7개월을 평가했다.홍보성 짙은 가운데 비판과 자성(自省)이 혼재한다. 먼저 총체적 국정개혁에 대해 “뚜렷하게 성과가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구조조정만 하더라도 질적인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했다.5대 그룹의 빅딜(대규모 업종교환)만 하더라도 당초 예상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라고 잘라 말했다.정부개혁을 등한시한 채 민간부문 개혁만 강요하는 듯한 태도에도 문제를 삼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개혁은 그 자체가 희망”이라고 못박았다. 성과도 인정했다.국가 부도 위기를 벗어난 것을 제1성과로 규정했다.가장 호전된 경제지표로 금리안정을 들었다.금융개혁 역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부문으로 꼽았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사태와 관련,“중심을 잡지 못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덧붙였다.향후 구조개혁 방향도 제시했다.기업하기 좋은 시장 여건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노동시장에서의 유연성 확보,기업의 투명성 제고,행정규제 완화 및 철폐,인프라의 강화 등을 실천사항으로 내걸었다. 내각제 전도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그는 “한국은 절대권력의 오만과 독선이 국가 위기를 자초했다”고 진단했다.견제와 비판만 가능했다면 위기를 맞고 불행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그리고는 “내각제로 바꿔야 할 시점”이라는 결론으로 이어갔다.
  • 보폭 넓어진 金龍煥 부총재

    ◎TJ와 껄끄러운 관계 정리/소속의원들과 회동 등 분주/“내각제 전도사 되겠다” 의욕 자민련 金龍煥 수석부총재는 지난주 金鍾泌 총리(JP)를 네차례 만났다.세차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같이했다.총리 집무실에서 독대도 한차례 했다.핵심 측근답게 늘 가까이 있다. 그는 지난 10일 소속의원 전원에게 저녁을 샀다.부부 동반으로 했다.金총리도 명예총재 자격으로 초청했다.처음 있는 일이다.지난 일요일에는 영입 인사들과 골프모임을 가졌다.金學元 의원,朴泰權 전 의원 등이 함께했다. 이처럼 동선(動線)이 눈에 띈다.보폭이 그전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다.朴泰俊 총재(TJ)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가 정리된 데 따른 변화다.金수석부총재는 TJ로부터 행보에 제동을 걸린 적이 있다.金復東 고문으로부터 수석부총재를 넘겨받을 때 그랬다.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金고문이 반발한 탓도 있다.하지만 그 뒤로 TJ의 ‘길들이기’흔적이 엿보였다.金수석부총재가 한마디 하면 JP의 흉중(胸中)으로 해석된다.金수석부총재도 이를 의식해 조심스럽게 처신해 왔다.국정협의회가 지난 12일 발족했다.金총리는 의장,朴총재는 당 대표로 참석한다.대신 ‘8인협의회’는 폐지됐다.金수석부총재가 당 대표로 참석하던 기구다.국민회의측과 마주앉아 신경전을 펴는 부담을 떨쳐냈다는 얘기다. 金수석부총재는 당 정치개혁특위 위원장도 내놓았다.“수석부총재가 이런 저런 자리를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자유로운 위치에서 내각제 전도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그는 최근 한나라당 영입 대상 의원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있다.
  • 鄭基鈺 駐싱가포르 대사(인터뷰)

    ◎“통상외교 하루 24시 짧아요”/투자유치설명회 145개 업체 참여/대성황 이뤄 보람 【싱가포르=朴建昇 특파원】 “한국은 불과 2∼3년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투자 적격국으로 꼽혔습니다.현지 기업인들은 한국대사가 보자고 하면 황공해할 정도였지요.그러나 지금은 대사가 사정하러 다닐 처지가 됐습니다.” 지난 5월 싱가포르 대사로 부임한 鄭基鈺씨(56).鄭대사는 우리나라의 5대 수출시장인 싱가포르가 IMF 이후 한국을 더이상 투자 적격국으로 생각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이 때문에 부임 이후 통상진흥과 투자유치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다.매일 3∼4명의 주재국 인사를 만나 한국의 시장 개방정책을 설명했다.지난 4개월 동안 싱가포르 정부기관,국영기업체,대기업체를 찾지 않은 곳이 없다.다국적기업과 외국기업인협회,언론 등 투자유치와 연관된 곳은 모두 찾아 다녔다.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만 맨 채 ‘발로 뛰는 통상외교의 전도사’로 나선 것이다.그 결과 지난달 26일 열린 투자유치 설명회에는 무려 145개의 현지 업체를 끌어들이는 대성황을 일궈냈다. ­싱가포르 경제에 대한 평가는. ▲인구는 적지만 경제는 대국이다.지난해 외환보유고가 800억달러를 넘어섰다.국영투자공사 재원이 1,000억달러에 달할 만큼 투자여력도 대단하다.경제력면에서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다.한국 투자가 미진한 것은 인식부족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탁월한 금융위기 대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국민들의 저변에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면적이 좁고 모든 자원을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탓이다.실제로 말레이시아가 용수 공급을 중단하면 싱가포르인은 살 수 없다.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인데도 늘 비상사태에 대비하며 살아 가고 있다.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지도력이 오늘날 싱가포르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국가 위기관리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는가. ▲정부와 국민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공정하고 투명하기 때문이다.이 나라 국민은 규모를 따지지 않는다.오로지 조직의 능력과 전문성만을 중시할 뿐이다.정치적 고려나 불공정 행위는 있을 수 없다. ­한국 투자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곳에서는 노조가 정부를 조언한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이 나라도 60년대에는 엄청난 노사분규를 겪었지만 지금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한국 사람은 의사결정을 왜 그처럼 거칠게 하느냐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노사관계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국내 기업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미국과 유럽 일변도의 투자유치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처녀지’를 개척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얼마전에는 30대 그룹 총수에게 편지를 보내 싱가포르 기업중에는 자금이 풍부하고 해외투자에 활발한 기업이 많으므로 관심을 가져 달라고 요청했다.우리가 세일즈에 적극 나서야지 팔짱만 끼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 발레리나 金民嬉(이세기의 인물탐구:181)

    ◎마음의 향기 뿜어내는 ‘춤 전도사’/자기혁신 끝없는 시도 ‘20세기 파격’ 베자르 설립 벨지움무드라에서 수업/舊習에 갇힌 우리 무용계 안타까움을 작품에 溶解 “무대는 내영혼의 피난처”/윤동주 그린 ‘또다른 고향’ “번뜩이는 무용언어” 好評 추상회화 절제美 배운다 ‘베자르는 나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 이는 발레리나 金民嬉의 신조다. 김민희는 대학교수이자 무용이론가이며 무용콩쿠르 심사위원, 국제세미나 질의자로서 탁월한 행정력을 지닌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그가 신처럼 여긴다는 20세기의 대표적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베자르는 지난 66년 도쿄 스포츠경기장에서 거대한 군중을 상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는가 하면 ‘가부키’에서는 47인의 사무라이를 할복자살케 함으로써 섬뜩한 피날레로 세계를 경악시킨 장본인이다. 바로 김민희는 베자르가 설립한 국제예술원 벨지움무드라(MUDRA) 출신으로 한국 무용가로서는 베자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무용가이기도 하다. 형식과 틀에 머무르기 보다 자기속에서 끝없는 혁신을 시도하는 그의 안무는 마치 자신이 베자르인듯이 언제나 신선하고 이채로운 무대를 꾀한다. 공연장에 대한 개념도 개방적이다. 극장무대만을 고집하기보다 선상(船上)이나 해변, 야외 성당 등 공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공연하여 그의 ‘춤의 창작성’이 어떤 제약이나 규격에서 탈피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침묵속에서 춤추거나 혹은 북의 리듬만으로 춤추고 토슈와 맨발을 뒤섞어 놓거나 튀튀나 발레드레스가 아닌 종이옷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만년 현역으로 뛰는 다른 무용수들과는 달리 새털같은 가벼움과 냉엄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새파란 젊은이들을 무대에 세워 춤의 완성도를 향한 감연한 정열을 불태운다. 내가 만든 춤이 과연 어떤형태의 퍼포먼스로 관객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관객의 심장의 과녁에 확실한 메시지를 꽂아야만 비로소 ‘해냈다’는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아무리 창조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안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자세로 에너지가 분출하고 감동이 우러나오는 살아있는 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안무가도 무용수도 작곡가도 아니면서 발레 뤼스를 통해 미하일 포킨과 니진스키를 길러낸 디아길레프처럼 거대한 화면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 역시 무용을 총체적 예술로서 관장하는 위치다. 초기에 선보인 ‘나의 일기’와 ‘파우스트’‘파키타’가 전통발레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92년 춤의 해에 선보인 ‘헨델을 위한 무브먼트’는 모던발레의 힘찬 도약과 현란한 파드되의 직조가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시인 윤동주의 삶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또다른 고향’은 대서사시적 무용극으로 긴 침묵과 물방울 소리, 감옥의 창살 사이로 맹렬한 뜀뛰기와 휘어지는 도약, 교묘한 리프트를 실행하는 날아다니는 육체의 행렬로써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작품은 95년 서울국제무용제에서 대상·안무상·연기상·무대미술상을 휩쓸었고 평자들은 ‘번뜩이는 무용언어와 강한 캐릭터가 꿈틀거리는 수작중의 수작’으로 평한바 있다. 무용계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김민희는 묵화와 꽃꽂이연구가로 유명한 여류원로 田聖淑씨(83)의 2남4녀중 막내. 어머니의 ‘정성의 결정체’라 할만큼 아버지를 일찍 여읜 막내딸을 위해 어머니는 아직 6살이 채 못됐을 때부터 중구 회현동에 있던 동네 무용학원에 데리고 다녔고 금란여고를 거쳐 이대무용과에 입학할 때까지 간곡한 격려와 채찍으로 딸의 성장을 지켜왔다. 대학에 입학하던 67년부터 홍정희 육완순 교수의 작품에 출연,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면서 대학재학중이던 70년에 벨지움무드라에 유학하여 요가나 명상, 파드되 클래스에서 타악기 리듬을 집중적으로 몸에 익히는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 그때 그는 ‘발레란 육체를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속과 마음속의 향기를 뿜어내는것’임을 깨달았고 베자르가 말한 ‘춤이란 댄스의 개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학에서 돌아오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허탈감과 무기력증을 극복하지 못한채 한동안 무용계에서 잠적해버렸다. 만약 그때 무드라에서 배운대로 춤추었다면 당시의 한국의 발레풍토에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우려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춤에 미치고 싶다’는 욕망과 ‘너무 늦었다’는 압박감에 시달릴때도 어머니의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충고에 따라 긴 공백을 깨고 분연히 일어나 무용계에 컴백했다. 매끄럽고 반복적이며 소박하고 학구적인 춤의 본능이 몸속에서 다시 되살아나자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안무가로서의 자신의 방향을 정하고 우리의 발레가 지나치게 구태의연하고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자신의 작품에 용해시킬 수 있었다. 그가 클래식 발레에 바탕을 둔 창작발레를 고집하는 까닭은 춤을 댄스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며 제자들에게 ‘진실한 예술가의 자세’와 ‘왜 무용을 해야하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무가로서 세계적인 이르지 키리얀과 윌리엄 포사이드의 창작세계를 분석하면서 ‘무용을 통해서 지상에서 가장 최상의 아름다움과 만나게 되는것’에 충실하게 되었다. 프랑스 신세대의 명망있는 안무가인 마기 마렝이 벨지움무드라의 동기생이고 김복희 김화숙은 이대동창이다. 가족은 사업을 하는 부군 崔勝雄씨와의 사이에 아들만 형제, 성격은 윤동주의 시처럼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편이며 구상이 끝나면 한곳에 집착하지 않고 의외성이 분출될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심이 대단하다. 무대는 ‘사람이 자기 영혼의 정확한 크기를 발견할 수 있는 이세상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신념에 따라 그의 최근의 안무는 하나의 장르에 예속되기 보다 근육의 움직임을 활용하는 이미지쪽에 치중하는 경향이다. 발레안무의 낡은 부대에 폭발적인 포도주를 쏟아붓기보다 흐르는 듯한 이미지와 태초의 빛,묵도(默禱)의 종착역에 다다를 때까지 그의 움직임은 추상회화의 생략과 절제처럼 여백의 미를 창출하는 시기다. □그의 길 ▲1967년 이화여대 무용과입학, 홍정희 발레공연출연 ▲1970­71년 국제예술원 벨지움무드라(MUDRA)장학생 수학 ▲1972년 이대졸업(발레전공) ▲1977·78년 독일 요한크랑코발레스쿨및 모나코 댄스아카데미연수 1981년 이화여대대학원 졸업 ▲1984년 하버드대 댄스센터연수 ▲1987년 창작발레 ‘나의 일기’ 공연 1988­현재 대한무용학회이사 ▲1989­현재 한양대 교수 ▲1989년 김민희발레공연 ▲1989­97년 한국발레협회이사 ▲1990년부터 해마다 ADF(아메리칸 댄스페스티발)연수 ▲1991년 한양대대학원(박사과정) ▲1991­현재 한국미래춤학회 상임이사, 전국발레콩쿠르 심사위원 ▲1993년부터 서울국제무용제참가 ▲1994­현재 한국스포츠무용철학회 부회장·한국무용협회 이사. ▲1996년 전국무용제심사위원,한국발레협회공연및 한국발레연구회 정기공연외 한국발레협회부회장, 서울국제무용제운영위원 ‘죽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사람,사람들’‘숲에서’‘우리 안에는…’외 다수 서울국제무용제연기상(93년)·대상·안무상·연기상(95년) 역서 ‘클래식 발레(기초법과 용어)’(84년)‘세계발레작품 해설집’(87년)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