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전경련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금메달리스트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아르헨티나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고속도로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트론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897
  • “하반기 景氣도 지루한 회복세”

    “하반기 景氣도 지루한 회복세”

    “어제 통계청이 발표한 실물지표가 썩 좋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다. 올해 우리 경제는 답답하고 지루한 회복세를 보일 것이며, 지난해 말 발표했던 올 경제성장률 4%를 넘는 반등은 기대하기 어렵다.”(김재천 한국은행 조사국장) 한국경제의 ‘더블딥(반짝 회복 기미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 침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올 하반기에도 ‘토끼’와 같은 빠른 걸음이 아니라 ‘거북이’ 스타일의 느린 경제성장이 전망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1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2005년 하반기 경제전망 세미나’를 열고 올 한 해 3.7∼4% 가량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내수·수출은 소폭 동반 성장 한국은행 김재천 조사국장은 “올 하반기 민간소비는 심리 개선과 가계연체율 하락 등으로 회복세가 이어지겠지만 회복 속도는 매우 완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민간부문의 과소비가 60% 정도 조정된 만큼 내년부터 소비가 나아진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국장은 “이에 따라 우리 경제의 전체적인 모습이 수출에만 매달리던 지난해와 달리 수출과 내수가 절반씩 성장에 기여하는 균형잡힌 모양새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가계부채 문제 개선 등으로 올 4·4분기부터 소비가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면서 “4·4분기 경제성장률은 4.2%로 높아져 올해 연간 3.7%의 성장률을 달성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수출 지난해보다 10∼15% 증가 한준우 KOTRA 정보조사본부장은 “올해 수출은 지난해보다 12∼15% 증가한 2840억∼292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최근 원화 강세, 고유가 등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한국 상품에 대한 해외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품목별로는 자동차부품(증가율 21.8%)과 무선통신기기(28.5%), 가전(21.6%) 등이 지난해에 이어 20% 이상의 높은 수출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보이지만 반도체(3%)와 자동차(6%) 등은 지난해보다 수출 증가세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진병화 국제금융센터 소장은 환율과 관련,“하반기에 원화는 북핵 및 국내 경기회복 지연에도 불구하고 경상·자본수지 흑자 지속과 중국 위안화 절상 가능성으로 강세를 지속할 전망”이라며 “그러나 원화 강세 폭이 과다하고 경기회복이 미진하다는 심리적 요인으로 원화의 추가적 강세는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자동차·TV 등 수출 최고 226% 증가 농가 일회성 지원보다 경쟁력 강화를

    한국과 칠레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 1년만에 적지 않은 효과를 냈지만 FTA 피해분야에 대한 보상에서 ‘도덕적 해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9일 ‘한·칠레 FTA 발효 1년의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를 내고 자동차, 휴대전화, 컬러TV, 캠코더 등 수출 주력품목이자 관세가 즉시 철폐된 품목의 수출이 59∼226%까지 크게 증가했고 당초 우려했던 포도 등 농수산물 수입급증에 따른 산업피해는 일단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FTA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우리 기업이 동, 몰리브덴광 등 칠레의 광산개발에 참여하는 등 직접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FTA 발효 이후 칠레 투자는 3건,220만달러로 이 기간 총 해외투자의 0.04%에 불과했다. 또 중국과 일본이 칠레와 FTA를 추진하고 있어 우리 상품의 칠레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등 적극적으로 시장을 확대하지 못하면 FTA 체결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경련은 한·칠레 FTA의 농업피해 대책으로 조성된 ‘FTA 이행지원기금’의 집행과정에서 피해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데도 일회성으로 금전적 지원을 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농업현대화 등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지원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칠레산 농산물 수입액이 크게 늘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만 1만 2000여 과수농가에서 폐업지원금으로 1800억원 이상을 신청하는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전경련은 설명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데스크시각] 잃어버린 ‘김우중 신화’/홍성추 산업부장

    지난 1997년 10월 기자는 동유럽의 경제현장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첫 기착지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에서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대형 아치의 환영 문구였다.‘웰 컴 투 부다페스트’라는 영문 글자 밑에 ‘DAEWOO’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헝가리 관문에 한국 기업이 환영하는 글귀를 내건 것이다. 당시의 대우 브랜드는 동유럽에서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 지난해 8월에 들렀을 때 대우의 심벌은 보이지 않고 간간이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로고가 보일 뿐이었다. 경제학자들은 동유럽과 제3세계에서의 잃어버린 대우브랜드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하기 힘든 엄청난 손실이라고 주장한다. 대우 브랜드가 쓰러져갈 때 회심의 미소를 지은 곳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과 일본이나 서구의 대기업들이었다. 국내의 위정자들은 그 손실이 가져다 주는 의미도 모르고 “망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99년 초부터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우가 망해야 경제가 살 것 같은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마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기자회견에서 토해냈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8·15경축사에서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고 단언하고 나섰다. 김우중 회장도 그 상황에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몇달 뒤 김 회장은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 뒤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후 지금껏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김우중 회장은 70·80년대 학교를 다닌 사람에게는 하나의 우상이었다. 맨손으로 회사를 창업, 재계 순위 3위까지 끌어올린 저력은 신화나 다름없었다.‘세계는 넒고 할 일은 많다’라는 저서는 단숨에 10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수교가 안 된 공산권 국가나 아프리카로 날아가 대우의 물품을 팔고 한국의 이름을 알렸던 그였다. 수출형 자립경제 주창자였던 그는 IMF 직후인 98년 초에 무역수지 500억달러 흑자를 달성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처음에는 전경련 회장으로서 그냥 하는 얘기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국민들에겐 다시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줬다. 그러나 그 이듬해 위정자들은 대우와 김우중 회장 죽이기에 너도나도 나섰다. 마치 김 회장의 문어발식 기업확장과 과도한 부채가 한국경제를 병들게 했다는 식이었다. 시민 사회단체들도 ‘대우죽이기’에 동참했다. 이때 외국 언론들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타룬 커너 교수는 ‘하버드 리뷰’ 99년 8월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개도국의 구조조정은 성급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금융·노동·재화·용역 등 시장시스템이 원활하게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의 재벌 해체가 시기상조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해 10월6일자 영국의 ‘더 타임스’의 기사도 “한국 정부와 재벌의 갈등이나 대립구도 속에서 추진되는 개혁의 최대 수혜자는 외국업체들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5년여가 지난 현재 당시의 정책 부작용이 심각한 현실로 다가서고 있다. 투기성 외국계 자본들이 알토란 같은 기업이나 부동산들을 매입, 현재 막대한 차익을 거두고 있다. 세금 한푼 없이 몇 배의 차익을 남기자 정신을 차린 당국이 뒤늦게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아우성이다. 각료들이 제 모습을 찾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특히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지난 23일 시민단체 대표들에게 “대안없이 정책 비판에 나서면 경제에 치명타를 안겨줄 수 있다.”면서 비판에 앞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을 주문했다. 현재 국내외의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경제계 거목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이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훌륭한 CEO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이제 국가 경제를 위해서도 김우중 회장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시점이다. 그의 과는 분명 물어야 하지만 ‘세계경영’을 21세기 생존 전략으로 내세웠던 혜안 등은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한사람의 지혜라도 들어야 한다. 실물 경제는 정치논리와 여론으로 풀 수 없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홍성추 산업부장 sch8@seoul.co.kr
  • 정·재계인사 발길

    22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은 차분한 가운데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난 21일에는 빈소가 마련되기 전부터 정몽준 국회의원이 황급히 도착, 침통한 표정으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등 상주들을 위로했다. 둘째형인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빈소를 찾았고, 동생 정상영 KCC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이 날도 빈소를 찾아 장례식을 준비했다. 미국 출장 중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먼저 조화를 보낸 뒤 23일 귀국해 빈소를 찾을 예정이다. 조카들도 일찌감치 빈소를 찾았고 , 특히 18명의 조카들은 나란히 작은 난을 올리는 예를 갖췄다. 외부 조문객으로는 전날 한승주 전 주미대사와 이웅열 코오롱 회장, 차범근 축구감독 등이 일찌감치 다녀갔다. 이튿날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 김선홍 전 기아자동차 회장 등이 찾아왔다. 이건희 회장은 “조금 더 사셔서 재계와 사회 선배로서 더 지도를 많이 하셔야 했는데 너무 빨리 가셨다.”며 유족들을 위로하고 정 명예회장의 명복을 빌었다. 정·재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시했다. 김원기 국회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한화갑 민주당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노태우 전 대통령, 김진표 교육부총리, 리빈 주한 중국대사 등의 조화도 들어왔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도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대림 이준용 회장, 전경련 강신호 회장,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등도 조화를 보냈다. 언론계에서는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과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등이 일찍 조화를 보내왔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지난달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출장길에 오른 구본무(60) LG 회장을 수행한 사람은 차장급 직원 한명뿐이었다. 계열사 사장들과 같이 가는 출장이 아니면 수행은 늘 직원 한명이 담당한다. 공항으로 임원들이 배웅이나 마중을 나오는 것도 금지한다. 구 회장은 지난 12일 LG 계열사 사장단 20여명과 함께 국내사업장 ‘혁신투어’를 나서면서 자신의 차량인 ‘벤츠S600’을 놔 두고 대형 관광버스 2대를 빌렸다. 사업장간 이동중에도 사장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지난 2003년에도 구 회장은 버스로 2박3일간 전국의 사업장을 누볐다. 이처럼 ‘격식’을 따지기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구 회장을 두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사람좋아 보이는 눈웃음 등 구 회장의 외모도 이같은 이미지 구축에 한몫했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 구 회장의 소탈한 모습은 아버지 구자경(80) 명예회장이나 할아버지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인회 회장은 창업초기인 40년대 후반 부산 서대신동 시절 활동하기 편하다며 미군 파카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공장내에서 늘 입고다녀 소매가 닳고 기름때가 반지르르 묻은 옷이었다. 구 회장은 또 비싼 담배와 싼 담배를 같이 갖고 다니면서 손님에게는 좋은 담배를 권하고 자신은 값싼 담배를 피웠다.“돈이란 벌 때 아껴야 하는 법”이라는 지론이다. 사돈이자 동업자인 고 허준구 회장도 당시 판매와 구매일을 맡으면서 수금하러 거래처를 다닐 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찰떡궁합’인 셈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사업장이나 계열사 사무실을 즐겨 찾았는데 어떤 때는 사전통보없이 불쑥 고객서비스센터 등 현장을 방문해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럭키증권(현 우리투자증권) 객장을 방문했을 때는 고객들이 좁은 객장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데 반해 임원실이 한 부서보다 큰 것을 보고 “무슨 임원방이 내 방보다 커요?”라며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소탈한 이미지 때문인지 LG의 회장들은 삼성이나 현대에 비해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시사저널’이 지난해 발표한 가장 영향력있는 기업인 순위에서도 구본무 회장은 삼성 이건희 회장은 물론 현대차 정몽구 회장보다 순위가 낮았다. 재계에서 LG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대차그룹보다 낮지 않은데도 그룹총수의 영향력은 현대차가 높게 나온 것이다. LG관계자는 구 회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는 허씨와의 동거기간이었고 2년전까지만 해도 삼촌뻘 되는 집안어른들이 계열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또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직격탄을 맞았고 99년에는 반도체 빅딜로 주력사업을 빼앗기는 고초를 겪었다. 사실 구 회장의 총수로서의 경영능력은 올해부터 검증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LG의 상징, 인화(人和) 구인회 창업회장은 포목상, 청과·어물전, 운수업 등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 47년 럭키크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인생을 걸었다.6형제의 장남(4명의 여자형제도 있었으나 일찍 사망함)이자 6남4녀의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돕기 위해 초기 가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영도 대부분 가족이나 사돈(허씨)들이 도맡아 했다.47년 락희화학 설립당시 생산담당이었던 김준환씨를 제외하면 구 회장, 부사장 고 구정회(둘째 동생)씨, 영업담당 허준구(첫째 동생 철회씨 사위)씨 등으로 사실상 ‘가족기업’이었다. 이후에도 아래로 다섯 동생과 여섯 아들, 조카, 허씨들이 대거 경영에 참여했는데 LG의 ‘인화정신’은 이같은 독특한 가족사와 무관치 않다. 친인척들을 잘 다독여 가며 경영을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경영이념으로 발전시킨 것이 인화다. 창업회장부터 내려온 인화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과 함께 했던 방송사업. 구인회 회장은 60년대 초반 사돈인 고 이병철 삼성회장으로부터 방송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50대 50 합작으로 64년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다. 하지만 방송사 경영이 시원치 않은 와중에 두 그룹에서 파견된 임직원간 알력이 심해졌고 결국 TV는 LG가 라디오는 삼성이 맡아서 하기로 잠정 합의를 봤다. 이후에도 TV와 라디오 사업의 정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구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 회장을 만나 TV사업까지 삼성에 넘기기로 결정한다.LG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구 회장은 사돈간의 ‘불화’가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80년대에는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가 사돈과의 정리를 생각해 포기했다. 당시 기획조정실에서는 21세기 물류산업의 꽃이라고 불리는 택배사업을 유망한 신규 사업으로 선정, 일본의 택배사업을 벤치마킹하고 계획을 수립했지만 사돈인 한진그룹에서 택배(한진택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구자경 회장이 사업중단을 지시했다.LG와 한진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75) 아워홈 회장의 2녀 명진(41)씨가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의 4남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하면서 사돈으로 맺어졌다. ●창업주의 사람들 구인회 창업회장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다 열네살때인 1921년에야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24년에는 서울로 상경,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19세때인 26년 처가에서 보내주던 학비가 끊기고 본인의 뜻도 있어 낙향, 사업의 꿈을 키운다. 구 회장은 사업을 키워가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고 동생들은 좋은 학교를 졸업한 뒤 형의 사업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한때 구씨, 허씨 일가가 너무 많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구씨, 허씨들 가운데는 경영능력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창업회장의 동생들은 초창기 외국원서를 번역해 기계 작동법을 알아내고 수출, 기술도입 등 형이 할 수 없는 해외업무를 도맡아 했다. 첫째 동생 고 구철회씨는 형과 함께 첫 사업인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세웠고 둘째 고 구정회씨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잠시 근무하다 형의 사업을 도왔다. 구태회(82) LS전선 명예회장은 일본 후쿠오카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쳤다. 그는 경영보다는 정치권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4대 민의원과 6,7,8,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구평회(79) E1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51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구두회(77)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고려대 상대,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일은행에서 잠시 일하다 63년 금성사 상무로 입사했다. ‘골프멤버’였던 사돈인 이보형 제일은행장·홍재선 전경련 회장·경방 김용완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 등도 구인회 회장과 교우가 깊었다. ●제2의 창업주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경 LG명예회장은 삼촌인 구평회 명예회장과 진주고보에 같이 입학한 뒤 진주사범을 마치고 고향인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50년까지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제자들 중에는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부인인 한인옥씨 등이 있다. 구 명예회장은 한씨에 대해 “얼굴도 예쁜데다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신 전 부의장은 모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구 명예회장에게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구 명예회장은 50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지만 공장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구인회 회장은 생전에 왜 장남을 그토록 고생시키느냐는 질문에 “대장장이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데도 담금질을 되풀이해 무쇠를 단련한다.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그는 현장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69년 12월31일 구인회 회장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직후인 1970년 1월6일 열린 럭키그룹 시무식에서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본인의 경영 퇴진과 구자경 당시 금성사 부사장의 회장 추대를 제안했고 이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통과됐다. 구 회장 취임 이후 1년간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준 사람은 삼촌인 고 구정회 사장이었다. 조카를 ‘보필’하는 삼촌은 LG가의 저력을 잘 말해준다. 구자경 신임회장은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인화단결과 상호협조를 통해 그룹의 부드러운 기업풍토를 조성하는데 힘쓰고 급속한 확대보다는 내실있는 안정적인 성장에 주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락희화학, 금성사 등 11개 계열사를 갖고 시작한 구자경 회장은 95년 2월 이임할 때까지 LG를 한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취임 첫 해인 70년 520억원에 불과하던 그룹매출은 94년 30조원을 넘어섰고 수출은 3100만달러에서 147억달러로 474배나 늘어났다. ●늘 꿈이었던 농사일에 매진 구 명예회장은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겨주면서 “앞으로 여의도 본사에는 일주일에 한번만 출근할 것이다. 모든 경영은 신임 회장에게 맡긴다.”고 약속했다. 구태회·평회·두회씨 등 창업주 형제들과 허준구·허신구 회장도 고문으로 물러났다. 충남 천안의 ‘천안연암대학’으로 내려간 구 명예회장은 버섯재배 등에 심혈을 기울이며 10년전 약속을 지키고 있다. 주중에는 천안에 머물다 주말에는 서울 성북동 집으로 올라오는데 매주 월요일에만 트윈타워로 출근한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 집무실인 30층 대신 32층으로 직행, 본인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복지재단·문화재단 업무만 보고 오후에는 천안으로 내려간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구 회장 얼굴을 보지 않고 그냥 가는 경우가 많다. 분재, 장미재배를 거쳐 버섯재배로 이어진 구 명예회장의 왕성한 취미활동은 요즘 된장, 생면, 만두 등 유기농 먹을거리로 확대되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선친이 두산, 경방그룹 회장과 함께 1956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발족한 ‘단오회’와 진주중 15회 동창회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있으며 능성구씨 대종회장을 맡고 있다. 단오회에는 김각중 경방 회장, 김상홍 삼양사 명예회장, 선친을 치료했던 이동렬 박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진주중 동창인 고 이규호 전 문교부 장관도 생전에 절친한 사이였다. 고 정주영 회장도 전경련 회장단 활동 등을 통해 남다른 친분을 쌓았다. ●20년 경영수업 받은 ‘구병장’ 구본무 회장은 연세대 상학과에 다니다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재벌 총수 가운데 현역 출신은 쉽게 보기 어렵다. 보병으로 만기 제대후에는 미국 애슐랜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구 회장은 30세때인 75년 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사업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부서로 사업전반을 이해할 수 있음) 과장으로 입사했다. 당시 심사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구 회장의 ‘핵심참모’인 강유식(57) ㈜LG 부회장이다. 강 부회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2년 럭키에 입사했다.97년 회장실(구조조정본부)로 소속을 옮겼고 99년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으면서 그룹 구조조정과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했다. 구 회장은 아버지처럼 ‘험한’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81년에야 금성사 이사로 승진할 정도로 차곡차곡 경영수업을 받았다. 럭키 심사과장, 수출관리부장, 유지사업본부장을 거쳐 80년 금성사(현 LG전자)로 옮겨 기획심사본부장을 맡았고 83∼84년에는 도쿄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입사 10년만인 85년에야 기획조정실 전무로 그룹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95년 회장 취임사에서 ‘초우량 LG’를 약속했던 구 회장은 인터넷, 홈쇼핑, 이동통신, 통신 등에 잇따라 진출하며 사세를 넓혀갔고 필립스와 합작으로 LCD사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빅딜’과 ‘LG카드 사태’로 반도체, 금융사업에서 손을 떼는 등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1등LG를 이끄는 사람들 지금까지 LG그룹을 상징해 온 ‘인화’는 구본무 회장 대에 이르러 사실상 ‘일등주의’로 바뀌었다.LG는 그동안 ‘인화정신’이 결코 ‘온정주의’가 아니라고 항변해 왔지만 삼성그룹에 비해 LG그룹의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요즘 LG가 거의 매일 쏟아내는 ‘강한 승부욕’,‘독종정신’,‘다이내믹’ 등은 LG가 온건하고 점잖은 반면 보수적이고 느린 조직에서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구 회장이 주력 계열사인 LG전자를 김쌍수(60)부회장에게 맡긴 것도 생활가전사업을 1등으로 만든 그의 ‘뚝심’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부진을 면치 못하던 휴대전화 사업을 ‘비전문가’인 박문화(55) 사장에게 맡겨 새로운 도약을 주문했다. 오디오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박 사장은 LG의 ‘광스토리지’ 사업을 7년 연속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LG에서 독립한 다른 친척이나 형제와 달리 주력사인 LG필립스LCD 부회장을 맡고 있는 둘째동생 구본준(54) 부회장 역시 1등에 대한 집념이 남다르다. 경복고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구 부회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미국 AT&T를 거쳐 86년 금성반도체에 입사했다. 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빼앗기다시피 넘겨주는 것을 눈으로 지켜본 뒤 99년부터 LG필립스LCD 대표를 맡아 세계적인 LCD업체로 키워왔다. ●숨어있던 승부사기질 발휘되나 소탈하고 인자해 보이는 구 회장의 이면에는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평이다. 구 회장의 집념은 그가 하늘을 나는 모습만 보고도 무려 150여종의 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조류학’에 조예가 깊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중학교때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다친 새 한 마리를 발견, 집에 데려와 치료해 준 인연으로 새에 관심을 갖게 된 구 회장은 2000년에는 ‘조류도감’을 낼 정도로 새에 관해서는 전문가다. 여의도 LG트윈빌딩에 둥지를 튼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구 회장의 각별한 보살핌덕에 무사히 새끼를 낳은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동생 구본능(56) 희성그룹 회장도 최근 ‘사진으로 보는 한국야구 100년’을 발간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좋아 보이는 구 회장이 거의 ‘경멸’할 정도로 싫어하는 부류가 있는데 준비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다. 구 회장은 연습장에서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무작정 골프장에 나타나는 초보자를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더 싫어하는 부류는 ‘트리플보기(이븐파보다 3타를 더 치는 것)’를 하고도 ‘히죽히죽’ 웃는 사람이다. 다시는 트리플보기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열사 사장들을 평가할 때도 이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구 회장은 특별히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끈질기게 연습에 매달려 한때 핸디캡 5∼6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고 한다. 환갑을 맞은 지금도 핸디 8∼9 정도를 친다. 구 회장은 지난 3월 구 명예회장 시절 선포한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에 ‘1등LG’를 더한 ‘LG Way’를 새로운 기업문화로 천명했다.10여년에 걸친 계열분리를 마무리지은 구 회장은 ▲고객이 신뢰하는 LG▲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LG▲인재들이 선망하는 LG▲경쟁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LG를 목표로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의 집념과 승부사기질이 앞으로 어떻게 발휘될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해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이례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장세주 회장과는 친분이 깊은 편이다. 장 회장의 숙부인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딸 인영(37)씨가 구 회장의 당숙인 구자은(41) LS전선 상무와 결혼해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만화가 허영만씨와도 교류가 있는데 허씨는 인기작 ‘식객’에서 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맛있는 삼계탕을 사주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단출한 네식구 구 회장은 72년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의 딸인 김영식(53)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재원’으로 서구적인 외모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시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은 “보수적인 며느리를 원했는데 맞고보니 맏며느리는 개방적이고 아래 며느리들이 보수적이었다. 뒤바뀐 감도 없지 않지만 그만하면 잘 맞는 편”이라며 만족하는 분위기다. 구 회장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내외’가 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이 주말에 곤지암에서 골프를 치다 부인이 일행들과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나무랐다는 일화도 있다.LG 소유인 곤지암은 주말에 주로 계열사 임원들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애용하는데 ‘회장 부인’이 나오면 임원들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다. 김씨가 다른 그룹 회장 부인과 달리 미술관을 맡지 않은 것이나 여의도 트윈타워에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도 LG가의 엄격한 ‘단속’ 때문이다. 구 회장은 지난해 양자로 들인 구광모(27)씨와 연경(27)·연수(9) 두딸을 두고 있다. 광모씨는 병역특례인 산업기능요원으로 국내의 한 IT솔루션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올해 병역을 마치면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인스티튜트공대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양자로 입적된 뒤 ㈜LG와 LG상사 지분을 대폭 늘려 ‘경영승계’가 가시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LG측은 “광모씨의 양자입적은 ‘제사 지낼 장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4세 경영’과는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마치고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경(27)씨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26)씨와 함께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붓감’이다. ukelvin@seoul.co.kr ■3공화국서 “소총 만들어보라” 권유 구인회 “유망해도 무기는 싫다” 거절 LG화학은 한때 자회사를 통해 ‘비데’사업을 하다 그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타일, 욕조 등 욕실 인테리어사업에 비데를 함께 취급하면 고객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했지만 구본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첨단기술로 해외시장을 노리는 제품도 아닌데 돈이 된다고 해서 ‘품위’에 맞지 않는 제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LG에서 계열분리된 지 1년이 지난 지난해 말에도 LG카드의 부실이 해결되지 않자 채권단은 또 한번 LG그룹의 지원을 요청했다.LG측은 “이미 1조원이 넘게 지원을 한데다 그룹에서 분리된 회사를 무슨 근거로 지원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구 회장의 ‘결단’으로 출자전환을 결정했다. 구 회장은 LG카드 기업어음(CP)을 갖고 있던 친척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해가며 출자를 부탁했다고 한다. 삼성과 공동으로 시작했던 방송사업을 넘겨준 것이나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 직전에 포기한 것도 ‘사돈간의 불화’로 세인들의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LG가 이처럼 ‘세간의 평판’을 신경쓰는 것은 엄격한 유교가문의 장손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회장은 도박이나 술 등 사행산업은 물론 이른바 ‘먹고 마시는’일과 연관된 소비성 사업, 부동산 투자도 금지할 정도로 엄격했다. 나중에야 필요에 의해 인터컨티넨탈호텔을 설립했지만 한때는 호텔사업도 LG의 ‘금지리스트’에 올라 있을 정도였다.3공화국 당시 정부로부터 “소총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도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라도 무기는 만들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을 정도다. 하지만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같은 ‘체면 경영(정도경영)’은 자칫 수익성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공격적인 확장에도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LG관계자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일등할 생각은 없다.”면서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갖추면 무리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고객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 구 회장의 지론”이라고 말했다. ukelvin@seoul.co.kr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돼 설립된 하이닉스반도체의 ‘새 주인’이 누가될 것인지를 놓고 재계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매각대금이 3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이 대형 매물의 유력한 새 주인으로 전 주인인 LG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LG는 하이닉스 인수설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검토할 일도 없다.”며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이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LG는 구인회 창업회장 생전인 69년 미국 NSC의 기술제공으로 반도체 회사인 금성전자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은 구자두 현 LG벤처투자 회장이었다. 금성전자는 1차 오일쇼크 등으로 73년 금성사에 흡수합병되면서 주춤했지만 74년 삼성 이건희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 등에 ‘자극’받아 75년 반도체팀을 만들고 미국 AMI와 합작 공장을 설립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79년에는 대한전선의 대한반도체를 인수, 금성반도체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구자경 현 명예회장, 사장은 이헌조 현 LG그룹 고문이었다. 금성반도체는 이후 85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1메가롬(ROM)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금성일렉트론으로 이름을 바꾼 뒤 90년 1메가 D램,91년 4메가 D램을 잇따라 내놓으며 삼성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LG는 98년 정부의 ‘빅딜정책’의 ‘희생양’이 되면서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양보하게 된다.99년 1월6일 청와대를 방문한 구본무 회장은 전자사업이 주력인 LG에 반도체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지만 이미 현대측과 ‘얘기’가 끝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귀에 구 회장의 ‘절규’가 들릴 리 만무했다. 이날 밤 이헌조, 변규칠, 성재갑 등 LG의 원로들이 마련한 위로자리에서 구 회장은 모처럼 통음을 했다. 일부에서는 구 회장이 ‘통곡’을 했다고 하지만 ‘통한의 눈물’을 보인 정도였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서울 한남동 구 회장의 집앞에 진을 친 기자들은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구 회장을 붙들고 ‘소감’을 물었고 구 회장은 “다 버렸습니다.”는 말로 3대를 내려오며 30년간 이어진 반도체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국산차 신화’ 남긴 포니鄭

    ‘포니 정’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지난 21일 낮 12시3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77세. 남아 있는 가족으로는 부인 박영자(69) 여사와 아들 정몽규(43) 현대산업개발 회장, 큰딸 숙영씨, 작은딸 유경씨, 며느리 김나영씨가 있다. 사위는 노경수(노신영 전 총리 장남) 서울대 교수와 김종엽(김석성 전 전방 회장 외아들)씨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34호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 아산병원 잔디광장에서 회사장으로 치러지며 성북동 자택을 거쳐 장지인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선영으로 떠날 예정이다. ●5년전부터 폐렴 치료 고인은 2000년 폐렴 치료를 받은 이후 1주일에 한번씩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으나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다가 지난 10일 갑작스러운 증세 악화로 입원, 치료 중에 별세했다. 고인은 32년간 현대자동차를 이끌면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신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99년 아들 정몽규 회장과 함께 현대산업개발로 배를 갈아탄 뒤 건강이 악화하자 지난 18일 보유하고 있던 현대산업개발 지분을 모두 정 회장 등 가족들과 계열사에 물려주면서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했다. 고인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57년 현대건설에 입사,67년 현대자동차로 자리를 옮겨 초대 사장직에 오르면서 99년까지 32년 동안 자동차 인생을 걸어왔다.74년 국민차 포니 승용차를 탄생시켜 76년 본격 수출하는 등 자동차 ‘신화’를 창조한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96년 조카인 정몽구(현 현대자동차 회장)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을 때까지 9년 동안 ‘왕 회장’을 대신해 현대호(號)를 이끌기도 했다. 현대가의 2세 경영 체제가 이뤄질 때 자동차 회장직을 아들인 정몽규 현 현대산업개발 회장에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99년 장조카인 정몽구 회장에게 99년 32년간 몸담았던 현대자동차를 내준 뒤 현대산업개발에 새 둥지를 틀었다. 정 명예회장은 배를 갈아탄 뒤 경영 바통은 정몽규 회장에게 물려줬지만 덩치가 큰 프로젝트나 신규 진출 사업은 일일이 챙길 정도로 경영에 관여했었다.77년 한·영 경제협력위원장,87년 전경련 부회장,88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93년 고려대 교우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98년 한·미협회 회장을 맡은 바 있다.83년 영국 왕실로부터 명예 대영제국 훈장 ‘커맨더 장’을 수상했으며,85년 금탑 산업훈장과 87년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포드와 합작, 현대자동차 초대 회장에 고인은 1928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으로 67년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32년 동안 자동차 인생을 시작했다. 고인은 57년 12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왕 회장’의 권유로 현대건설에 입사했다.10년 동안 현대가 1세들과 함께 해외건설 시장 개척과 현대시멘트 공장 설립 산파역을 맡는 등 현대건설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매진했다. 67년 미국 출장 중 ‘왕 회장’으로부터 미국 포드사와 접촉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둘째 형(인영·한라건설 명예회장)과 함께 포드자동차와 합작을 이끌어낸 뒤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에 올랐다. 자동차 진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드와 조립 계약을 맺은 뒤 68년 3월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자동차 공장 구경도 못해 본 경험으로 공장을 지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갔다. 그 해 5월 자동차 공장을 짓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68년 11월 제1호 ‘코티나’를 출시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대차의 질주를 시기하는 경쟁사와 정치권의 압박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0년 초에는 1차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판매도 급감했다. 할부 판매한 자동차의 돈이 들어오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위기에 몰린 현대가는 왕 회장의 지시로 금강슬레이트를 경영하던 막내 동생(상영·KCC명예회장)을 현대자동차 부사장으로 불러들여 급한 불을 끄는 등 형제간 우애를 확인해 줬다. ●포드와의 합작 깨져 ‘포니’ 탄생 고인은 언제까지 단순 조립생산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포드와 50대 50 합작회사를 만들어 엔진 공장을 짓고 기술을 이전받아 자립의 길을 찾고자 했지만 포드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마이웨이’를 외쳤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자동차가 국산 1호차 조랑말 ‘포니’였고,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모터쇼에서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뒤 76년 2월 본격적인 생산과 중남미 수출까지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는 국내 기업이 아닌 세계 자동차 회사로 커갔고 ‘포니 정’의 자동차 인생도 쾌속 질주했다.87년부터 9년 동안 현대그룹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즈음 현대가의 2세 경영체제가 이뤄지면서 96년 자동차 회장을 아들 몽규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다른 현대가 1세들이 일찌감치 분가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자신의 회사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98년 현대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그룹 경영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왕 회장의 지시로 평생 바쳐온 자동차를 MK에게 넘기면서 서운함도 많았지만 가슴에 묻은 채 현대산업개발로 독립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盧대통령 “권력, 시장에 넘어갔다”

    “대기업 제조업만 세계 일류가 아니라 중소기업도 경쟁해서 당당히 앞서가면 좋겠고, 그래서 경제가 튼튼하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16일 청와대에서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기업도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강조했다. 회의에는 삼성 이건희·현대자동차 정몽구·LG 구본무·SK 최태원 회장 등 대기업에서 8명, 중소·벤처기업에선 김철현 대동중공업 회장 등 7명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이 4대 재벌 총수를 한 자리에서 만난 것은 지난해 5월 간담회 이후 1년만이고, 재벌 총수와 중소기업인 합동 회의를 가진 것은 참여정부 들어 처음이다. 노 대통령은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면서 “기업간에 서로 여러가지 협력이 잘 이뤄져야 비로소 상생협력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상생 협력의 이미지가 구축되면 재벌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바뀌게 될 것이고, 정부도 이런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면서 “사실의 전환이 먼저 나가면 인식의 전환도 빨리 따라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의는 당초 예정된 시간을 1시간 넘겨 2시간30분 동안 진행됐으며, 예정에도 없던 티타임을 갖는 등 “서로 잘해보자고 해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배석했던 김영주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이 전했다. 이건희 회장은 “오늘 같은 자리는 우리 경제계에서 먼저 만들어서 대통령께 보고드려야 하는데 정부가 먼저 제시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는 글로벌화의 진행정도에 따라 국가간·기업간·협력업체간 상생협력의 필요성이 아주 크다.”고 거들었다. 중소기업측에서는 원자재 값과 납품가 문제 등 현실적인 애로사항을 구체적으로 토로했다. 이날 삼성, 현대차,SK,LG 등 4대 그룹과 포스코 등은 전경련을 중심으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확대 차원에서 ‘대·중소기업 협력기금’을 조성키로 했다. 박정현 장세훈기자 jhpark@seoul.co.kr
  • [뉴스플러스] 盧대통령·재계 16일 회동

    노무현 대통령은 16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대책 회의에 참석, 경쟁력있는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실질적 상생협력 방안을 경제계 인사들과 논의한다. 회의에는 대기업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구본무 LG회장, 최태원 SK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들과 함께 이구택 포스코 회장, 한준호 한전 사장, 이용경 KT 사장 등이 참석한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김용구 중소기업중앙회장 등 경제단체장도 참석한다. 중소기업에서는 김철현 대동중공업 사장, 조봉현 대현산업 사장, 정명화 델코전자 사장, 신달석 동명통산 사장, 이성민 엠텍비전 사장, 유시영 유성기업 사장, 장흥순 터보테크 회장 등이 자리를 함께한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①-창업주 구인회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①-창업주 구인회 일가

    지난 3월3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강남타워(옛 LG강남타워)에서 열린 GS그룹 ‘CI 및 경영이념 선포식’. “지난 반세기 동안 LG와 GS는 한 가족으로 지내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GS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보니 남다른 감회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차분히 축사를 읽어가는 구본무(60) LG 회장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조부(고 구인회 창업주)때부터 계속돼 온 허씨와의 57년간(47년 락희화학 설립 기준)의 ‘동거’를 당대에서 마무리짓는 순간이었다. 사돈이자 ‘동반자’였던 GS그룹 허창수(57) 회장과 임직원 300여명은 축사를 마치고 행사장을 빠져 나가는 구 회장을 기립 박수로 환송했다. 행사장에 울려퍼진 ‘사랑해요 LG’는 앞으로도 두 그룹이 여전히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구 회장은 이에 앞서 3월14일 ‘당숙’인 구자홍(59) 회장·구자열(52) 부회장이 이끄는 LS그룹 출범식에도 참석, 새로운 길을 떠나는 집안 어른들을 축하했다. 연이어 열린 GS·LS그룹의 출범은 LG의 역사상 가장 큰 행사로 기록될 것이다.‘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LG의 사사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새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GS의 분리로 자산이 지난해 61조 6000억원에서 50조 8800억원으로 줄어든 LG는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산기준 재계순위에서 현대자동차그룹(56조 400억원)에 2위(한전 제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1974년과 1980년에는 삼성과 현대를 제치고 재계 1위까지 올랐던 LG그룹으로서는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대목이다. 조부때부터 늘 확장일로를 걷던 사업을 ‘정리’한 구 회장은 LG의 비전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졌던 종합그룹에서 전자·화학중심의 ‘글로벌 리딩그룹’으로 재확립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올해 경영목표를 매출 94조원, 경상이익 4조 30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각각 15%,26%나 높게 잡은데서 ‘제3의 창업’을 향한 LG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부친이 준 자금으로 사업 시작 재계3위 LG그룹의 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현 LG화학)의 설립에서 시작되지만 그 기원은 1931년 7월 경남 진주시 진주식산은행 건너편 2층 건물에서 시작한 ‘구인회 상점’이 출발이다. 구인회 회장은 1907년 8월28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홍문관 교리를 지낸 할아버지 만회 구연호 공의 외아들 춘강 재서 공과 진양 하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해 잠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같이 수업을 듣기도 했다.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과는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축구로 교유관계를 쌓았다고 한다. 구 회장은 20세때 서울 중앙고보 2년을 마치고 귀향, 사업에 뜻을 보였는데 엄격한 유교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조부와 부친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결국 장손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24세에 이미 3남 1녀와 아래로 다섯 동생을 둔 집안의 가장이었던 구 회장은 아버지가 건네 준 2000원과 첫째 동생 철회씨의 사업자금 1800원을 더해 자본금 3800원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7년 뒤인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시작한 것에 비하면 출발은 일렀지만 규모는 작았던 셈이다. 구 회장의 첫 사업은 ‘실패’였다. 사업 첫 해 무려 500원의 손실을 본 것이다. 이듬해 고향마을의 땅을 담보로 8000원을 빌린 구 회장은 새로운 각오로 사업을 재개했지만 그 해 장마로 포목이 물에 잠기고 만다. 이후 사업이 제 자리를 잡아 가는 듯했지만 또다시 1936년 대홍수로 가게가 떠내려 가고 말았다. 첫 시련은 가혹했지만 구 회장은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장마가 든 해에는 풍년이 들어 살기가 좋아질 것이다.”는 신념을 갖고 주변 사람에게 다시 돈을 빌려 포목사업을 벌였다. 구 회장의 예측대로 그해 풍년이 들어 결혼수요가 폭증하자 포목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했고 구 회장의 사업인생도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허씨와의 인연 LG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구씨-허씨 동업을 빼놓을 수 없다. 두 가문의 인연은 구인회 회장의 8대조인 구반공 시절부터 시작됐다. 구반공의 부친이 현풍현감으로 재임할 때 진주의 만석꾼인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왔고 이후 승산마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구인회 회장 역시 열네살 나던 해인 1921년 담 하나 사이 이웃인 허만식씨의 장녀 을수씨와 혼례를 올렸다. 조부 만회공의 셋째 딸이 허만식씨의 둘째아들 인구씨에게 출가했지만 신랑이 요절하는 바람에 이어지지 못했던 두 집안이 다시 한번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후 구씨와 허씨는 무려 8건의 겹사돈으로 맺어지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왔다. 구씨와 허씨는 1946년 1월 구 회장 장인(허만식씨)의 재종인 허만정씨가 셋째 아들 준구(당시 24세)를 데리고 당시 구회장이 살던 부산으로 찾아오면서 사돈에서 동업자 관계로 발전한다. 허만정씨는 사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의 경영수업을 부탁했고 구 회장은 동경 유학생 출신의 준구씨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준구씨는 첫째 동생 철회씨의 맏사위였으므로 이미 남도 아니었다. 잘 알려진 대로 고 허준구씨는 LG건설·LG전선 회장 및 그룹 부회장을 지내며 LG의 역사와 함께했고 허창수 현 GS그룹 회장, 허정수(55) GS네오텍(전 LG기공) 사장, 허진수(52) GS칼텍스 부사장, 허명수(50) GS건설 부사장, 허태수(48) GS홈쇼핑 부사장 등 그의 아들들도 LG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LG의 초기 역사에는 허준구씨말고도 다른 허씨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준구씨의 친형인 고 허학구씨는 락희화학 전무로 일하면서 구자경 당시 상무와 함께 부산 범일동 공장에서 먹고 자며 밤낮으로 일했다고 한다. 구 회장은 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를 지원하기 위해 허준구씨의 동생으로 당시 ‘조선통운’에 다니던 허신구씨를 끌어들였다. 허신구씨는 락희유지 상무시절인 62년 동남아출장에서 ‘합성세제’를 처음보고 구인회 회장에게 세제 사업 진출을 건의,66년 ‘하이타이’가 출범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허신구씨는 금성사 사장, 그룹 부회장, 럭키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했고 장남 허경수씨는 87년 코스모그룹을 창립하며 독자경영의 길을 걷고 있다. 허만정씨는 8형제를 뒀는데 학구-준구-신구씨는 LG에 발을 담은 반면 장남 고 허정구씨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창업동지’로 다른 길을 걸었다. 허정구씨의 2남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다. 허신구씨의 차남 허연수씨도 GS리테일(전 LG유통) 상무로 일하고 있고 허만정씨의 막내인 허승조씨는 GS리테일 사장을 맡고 있다. ●가족들의 맹활약 LG는 그동안 숱한 계열분리를 통해 친족간 재산분배를 마무리지었다. 현재 LG에 남아있는 ‘오너일가’는 구본준(54) LG필립스LCD 부회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몇년전만 해도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 상당수가 구씨, 허씨일 정도로 가족경영이 활발했다. 오너일가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만큼 부작용도 적지 않았지만 LG의 창업과정에서 이들의 공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이 구인회 회장은 첫째 동생 철회씨와 동업으로 ‘구인회상점’을 창업했다. 철회씨는 형과 함께 사업을 일구며 락희화학, 금성사 등의 사장을 맡았다. 둘째 아우 정회씨도 경성전기학교를 마치고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정회씨는 45년 구인회 회장이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 화장품 기술자 김준환씨를 영입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 만든 화장품 이름을 ‘럭키(LUCKY)’라고 지어 ‘럭키그룹’의 기반을 닦은 것도 정회씨였다. 셋째 아우 태회씨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면서 창신동 집에서 ‘화장품연구’에 몰입,‘투명크림’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50년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락희화학의 전무로 입사,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같은 해 장조카 구자경 명예회장도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태회씨는 이후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에 목말라하던 구인회 회장을 도와 LG가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53년 락희화학이 서울에 사무소를 낼 때 기반을 닦은 것도 태회씨였다. 태회씨는 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후보로 고향인 진양에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역시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넷째 아우 평회씨는 락희화학 지배인 시절인 1954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청년상공인회의(JCI)에 참석한 뒤 곧바로 뉴욕으로 날아가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는 공을 세웠다. 공전의 히트를 친 ‘훌라후프’도 평회씨의 제안으로 들여왔다.5·16 쿠데타 직후인 61년 ‘부정축재 기업인’ 처벌때는 형을 대신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씨가 아버지와 형(맹희씨)을 대신해 처벌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5년 연속 세계판매 1위를 달리고 있는 LG전자의 에어컨 사업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락희화학 전무시절 “고층빌딩이 계속 늘고 있어 에어컨이 앞으로 필요해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 시작했다.67년 9월 미국 GE사와 제휴를 통해 국내 첫 에어컨 생산에 들어갔다. 미국 워시본대와 뉴욕시립대 대학원을 나온 구자두씨는 금성사 관리부장 시절인 62년 동남아 통상사절단을 수행하며 홍콩의 바노사로부터 라디오 200대를 주문 받아오는 등 LG의 첫 수출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 럭키치약 광고판을 부산 연지동 공장에 세우는 등 본격적인 광고개념을 도입한 것도 자두씨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6남4녀의 ‘방대한 혼맥’ 구인회 회장은 허을수씨와 사이에 6남4녀를 뒀다. 자손이 워낙 많다 보니 LG가를 ‘재벌 혼맥의 핵’이라고 부르지만 권력 핵심이나 정계쪽과는 인연이 없어 세칭 ‘정략결혼’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이다.LG가는 특히 아들이 많은데 회(會)자 돌림만 6명, 자(滋)자 돌림은 23명에 달한다. 본(本)자 돌림은 구인회 회장 직계로만 11명이다. 장녀 양세(83)씨는 15세때 경남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씨의 아들로 진주고보 학생이던 박진동씨에게 출가했다. 박씨는 광복후 좌우익투쟁으로 학병동맹본부 피습사건으로 사망했다. 장남 구자경(80) 명예회장은 17세때인 42년 5월 고향인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과 가까운 대곡면 단목리의 대지주 하순봉씨의 장녀 정임(81)씨와 혼례를 올렸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진주공립중 4학년이었고 한살 위인 신부는 한문에 뛰어난 소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구 명예회장 부부는 올해로 63년째 해로하고 있다. 2남 자승(74년 작고)씨는 56년 부산에서 금성방직 전무로 있던 고 홍재선씨의 딸 승해(71)씨와 선을 본 뒤 4개월만에 결혼했다. 홍씨는 훗날 전경련 회장과 쌍용양회 회장을 지냈다. 구 회장과 홍재선씨와의 우애는 유명한데 홍씨는 훗날 구 회장이 한때 자신을 ‘바람둥이’로 오해해 혼사가 어려울 뻔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홍씨가 평소 안면이 있던 다방 마담과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고지식한’ 구 회장이 오해를 한 것이다. 3남 구자학(75) 아워홈 회장은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녀 숙희(70)씨와 57년 결혼했다. 구 회장은 64년 제일제당(현 CJ) 기획부장으로 삼성에 입사한 뒤 동양TV방송 이사, 호텔신라 대표이사,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등을 거쳐 본가로 돌아왔다. 4남 구자두(72) LG벤처투자 회장은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관과 국방부 차관을 지낸 고 이흥배씨의 딸 의숙(67)씨와 결혼했다. 이 혼사는 이미 사돈을 맺었던 홍재선씨의 중매로 이뤄졌다. 이씨는 64년 동양TV 사장으로 일하다 삼성과의 동업파기로 물러났고 이후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삼성과 LG는 동양TV사장에 이병철 회장의 사돈인 홍진기씨와 구인회 회장의 사돈인 이흥배씨를 나란히 앉혀 ‘공동경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흥배씨의 장남인 이희종(72)씨도 LG산전(현 LS산전) 사장과 부회장을 지낼 정도로 LG와 인연이 깊었다. 5남 구자일(70) 일양화학 회장은 일찌감치 독립했는데 부인 고김청자(66)씨는 사업가인 김진수씨의 딸이다. 차녀 자혜(68)씨는 대림산업 이규덕 창업주의 장남 고 이재준 대림그룹 회장의 막내 아우인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에게 시집갔다. 이재연씨는 럭키화학 상무로 LG에 입사한 뒤 희성산업 사장, 금성통신 사장, 금성사 사장을 거쳐 LG카드 부회장을 지냈다. 장남에게 외식업을 해보라고 권유, 국내에 패밀리 레스토랑 ‘TGIF’를 처음 들여왔다. 3녀 자영(66)씨는 제일은행장을 지낸 이보형씨의 아들 재원(68)씨와 결혼했다. 구 회장 막내 처남 허윤구씨의 아들인 허남목씨 소개로 만난 뒤 20일만에 ‘초스피드’로 결혼했다. 이씨는 자신 소유의 일성제지 회장을 지냈지만 일성제지는 98년 신호제지에 합병됐다.4녀 순자(62)씨는 류헌열 전 대전지법원장 아들이자 서울지검 검사였던 류지민씨에게 시집갔다. 이 혼례도 사돈인 이흥배씨가 주선했는데 구씨의 혼사는 이처럼 사돈이 연결해 준 경우가 많다. 구 회장은 막내 사위를 무척 아껴 골프장에 자주 데리고 다니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류씨는 43세때 요절했다. 유일하게 구 회장 타계후 결혼한 6남 자극(59)씨는 이화여대 교수인 조필대 교수의 딸 아란(54)씨와 결혼했다. ●창업주 형제들의 화려한 혼맥 LG가문의 혼맥이 늘 주목받는 것은 구인회 회장 형제들의 혼사가 본가 못지 않게 화려하기 때문이다. 첫째 동생 철회(75년 작고)씨는 부인 안남이(작고)씨와 4남 4녀를 뒀는데 딸들의 결혼이 눈에 띈다. 장녀 위숙(77)씨는 허만정씨의 3남인 고 허준구 LG건설 회장에게 출가했다.2녀 영희(74)씨는 의학박사인 고 이호덕씨에게,3녀 자애(66)씨 역시 의사인 정승화(71·전 현대피부과원장)씨에게 시집갔다.4녀 선희(61)씨는 박우병 전 두산산업 회장의 장남 박용훈(63)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에게 시집갔다. 박우병씨는 박두병 전 두산 회장의 동생이다. 장남인 구자원(70) 넥스원퓨처 회장은 류영희(63)씨와, 차남인 고 구자성 전 LG건설 사장은 이갑희(62)씨 등 평범한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3남인 구자훈(58) LG화재 회장,4남인 자준(55) LG화재 부회장의 부인인 임방인(61), 이영희(53)씨도 재계나 정·관계 집안은 아니다. 다만 구자훈 회장의 3녀 문정(31)씨가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성용 명예회장의 장남 재영(35)씨에게 시집가 재계 명문가의 위상을 이어갔다. 둘째 동생 정회(78년 작고)씨는 부인 김증문(작고)씨 사이에 5남 2녀를 뒀다. LG유통 사장을 지낸 장남 자윤(작고)씨는 정정자(62)씨와 결혼했다.2남 형우(62) 전 부민상호저축은행 사장은 전 대한석탄공사 전무였던 이길주씨의 딸 화숙(57)씨와 결혼했고 장녀 숙희(59)씨는 이구종 전 대한교과서 대표의 아들 규영(62)씨와,3남 자헌(작고)씨는 조종렬 한일수산 회장의 딸 금숙(55)씨와 결혼했다.LG MMA 사장을 지낸 4남 자섭(55)씨는 최근 LCD 회로부품업체인 한국SMT를 갖고 LG에서 독립했다. 부인은 심영숙(51)씨. 박정화(50)씨와 결혼한 5남 자민(50)씨는 지난해 말 LG전자 부사장으로 승진한 뒤 3개월도 안돼 회사를 그만두고 형 회사인 한국SMT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2녀 명희(52)씨의 남편은 하영준(56) 전 세원기업 사장이다. 셋째 동생으로 국회예결위원장·부의장을 지낸 태회(82)씨는 최무(83)씨와 사이에 4남 2녀를 뒀다. 장녀 근희(62)씨는 이계순 전 농림장관의 아들 준범(64)씨와 혼인했다. 장남 구자홍(59) LS그룹 회장은 지순혜(60)씨와 결혼했는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애결혼에 성공한 ‘러브스토리’를 갖고 있다. 차남 구자엽(55) 가온전선 부회장은 김태향(55)씨와 결혼했다. 구 부회장의 사위가 정몽우 전 현대알미늄 회장의 장남인 정일선(35) BNG스틸 사장이다.3남인 구자명(53) LS니꼬동제련 부회장의 부인은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의 딸 미연(53)씨다.4남 구자철(50) 한성 회장의 외동딸 원희(25)씨는 ㈜두산 박용만(50) 부회장의 장남 서원(26)씨와 결혼이 예정돼 있다. 구씨가문으로서는 두산가로 출가한 자혜씨에 이은 두번째 두산과의 혼사다.2녀 혜정(57)씨는 이인정(60) 태인 회장과 결혼했다. 넷째 평회(79)씨는 부산 피란시절인 52년 금릉원예조합 문흥린 이사장의 딸 문남(75)씨와 결혼해 3남 1녀를 뒀다. 장남인 구자열(52) LS전선 부회장은 육군 중장으로 청와대 경호실차장과 성업공사 사장, 전쟁기념관장을 역임한 고 이재전씨의 딸 현주(48)씨와 결혼했다. 차남인 구자용(50) E1사장은 이상돈 전 중앙대 의대 학장 딸 현주(46)씨와 결혼했다.3남 구자균(48) LS산전 부사장은 독고진(46)씨와, 막내 혜원(46)씨는 주진규(49)씨와 결혼했다. 막내동생 두회(77)씨는 유한선(72)씨와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장녀 은정(44)씨는 김택수 전 공화당 원내총무의 아들 중민(48) 전 국민생명보험 부회장과 결혼했다. 김택수씨는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주의 동생이다. 장남인 구자은(41) LS전선 상무는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 딸인 인영(37)씨와, 막내 재희(38)씨는 김세택 전 덴마크 대사 아들 동범(37)씨와 결혼했다. ●점점 ‘소박’해지는 혼맥 구자경 명예회장은 선대 회장 못지않은 4남 2녀를 낳아 ‘다산’의 전통을 이었다. 장남인 구본무(60) 회장은 미국 애슐랜드대 유학을 마친 72년 김영식(53)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충북 괴산의 ‘수재’로 불린 김태동 전 보사부장관의 딸. 장녀 연경(27)씨는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마치고 미국에서 유학중이고 막내 연수(9)양은 아직 초등학생이다. 딸만 둘인 구 회장은 지난해 바로 아랫동생인 구본능(56)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 광모(27)씨를 양자로 영입해 ‘대’를 잇고 있다. 장녀 훤미(58)씨는 구 회장 작고 직후인 70년 4월 김용관 전 대한보증보험 사장의 4남 화중(작고)씨와 결혼했다. 훤미씨의 딸인 김선혜(34)씨는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전무와 결혼해 대림가와 대를 이은 혼인관계를 이어갔다. 김용관씨는 경방 회장과 전경련 회장을 지낸 고 김용완 회장의 동생이다. 화중씨는 “딸은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지만 사돈이나 사위는 아들에 준하는 대접을 해준다.”는 LG의 ‘가풍’대로 계열사였던 희성금속 사장을 지냈다. 95년 일찌감치 독립한 2남 구본능(56) 희성그룹 회장은 차경숙씨와 결혼했다. 3남 구본준(54) LG필립스LCD 부회장은 숱한 계열분리 뒤에도 여전히 LG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오너 경영인’이다. 사업가 김광일씨의 딸인 은미(48)씨와 사이에 1남 1녀를 뒀다. 2녀 미정(50)씨는 대한펄프 창업주인 고 최화식 회장의 아들인 최병민(53) 대한펄프 회장과 결혼했다. 4남 구본식(47) 희성전자 사장은 조경아(45)씨와 결혼,1남 2녀를 뒀다. ●LG를 떠나는 滋자 돌림 구자경 명예회장의 첫째 동생 자승(작고)씨는 홍승해씨와 3남 1녀를 뒀다. 장남 본걸(48)씨는 LG상사 대주주이자 부사장을 맡고 있고 본순(46), 본진(41)씨도 LG상사 상무로 일하고 있다.LG상사는 LG의 다른 자회사와 달리 ㈜LG가 대주주가 아니어서 자승씨 집안 몫으로 남겨진 것으로 알려졌다.2000년 아워홈을 갖고 독립한 둘째 동생 자학씨는 이숙희씨와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장남 본성(48)씨는 심재석 전 장은할부 부회장의 딸 윤보(44)씨와 결혼했다. 본성씨는 처가인 삼성에서 사장까지 지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2000년 삼성캐피탈 부장으로 입사해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보까지 지냈다. 장녀 미현(45)씨는 고 이문호 서울대의대 교수의 아들인 이영렬(50) 한양대의대 교수와 결혼했다.2녀 명진(41)씨는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4남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했다. 셋째 동생 자두씨 역시 2000년 LG벤처투자를 갖고 분리했다. 이의숙씨와 사이에 2남 2녀를 뒀는데 장녀 혜란(45)씨는 심창유 청주사대 학장의 아들 현주(50)씨와,2녀 혜선(43)씨는 장홍식 전 극동정유 사장의 아들 원우(44)씨와 결혼했다.LG벤처투자 사장인 장남 본천(41)씨와 차남 본완(39)씨는 각각 22.24%의 지분을 갖고 있다. 넷째 동생 구자일 일양화학 회장은 처음부터 LG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독립했다. 본길(39), 은미(38)씨를 자녀로 두고 있다. 차녀 구자혜씨는 이재연 전 LG카드 부회장과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명망가 집안과 혼사를 맺었다. 아시안스타 사장인 장남 선용(44)씨는 고 오세중 세방여행 회장의 딸 은주(40)씨와 결혼했다. 차남 지용(42)씨는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딸인 재연(38)씨와 결혼했다. 막내 구자극(59)씨는 LG상사 미주법인 회장을 그만두고 대주주로 있던 예림인터내셔널을 통해 전자코일, 변성기 등을 생산하는 이림테크를 인수(현 엑사이엔씨)한 뒤 스피커 전문업체인 모토조이, 성주음향의 중국 톈진공장 등을 인수하며 종합부품그룹을 키우고 있다. 엑사이엔씨 사장인 장남 본현(37)씨와 차남 본우(26)씨는 엑사이엔씨 지분 24%,4%를 각각 보유중이다. ukelvin@seoul.co.kr ■ 그룹 분가-지분율 따라 재산분배… ‘잡음’ 없어 LG는 1999년 LG화재를 시작으로 LG벤처투자, 아워홈,LS,GS그룹 등을 차례로 분리했다. 재산배분을 둘러싸고 ‘집안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예사이지만 유독 LG만은 큰 잡음없이 대규모 분가를 마무리지었다. 이는 LG가 엄격한 유교집안으로 집안 어른이 정한 기준을 자손들이 철저히 지키는데다 수십년간 그룹에서 친족들의 지분을 관리해온 덕분이다. 분가에 앞서 일부 친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그동안 정리해 놓은 지분율을 근거 자료로 제시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구조다. 계열분리의 신호탄이 된 LG화재는 정부의 ‘5대 그룹 생명보험사 진출 금지’ 정책에 맞물려 분리됐다. 한때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들어 손해보험-생명보험을 영위하려했던 LG는 생명보험사업이 좌절되면서 LG화재를 독립시키려 했고 집안회의에서 고 구철회씨 가족들이 화재를 원해 순조롭게 분가가 이뤄졌다. LG벤처투자를 갖고 떠난 구자두씨 가족은 얼핏 ‘재산’이 너무 적어 보이지만 윗대인 구철회씨 가족에 비해 가족수가 적기 때문에 지분도 그만큼 적었다. 아워홈의 구자학씨는 한때 삼성에서 호텔신라 사장을 지내는 등 유통·서비스쪽에 관심이 많아 이견없이 분배가 이뤄졌다. 2003년 말 분리된 LS그룹은 구태회·평회·두회씨가 LG의 창업공신인데다 자녀들도 적지 않아 상황이 복잡했다. 게다가 LS전선은 허씨 가문의 고 허준구씨가 회장을 지내는 등 오랫동안 허씨들이 경영을 맡아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태평두씨’ 가족이 갖고 있던 지분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회사를 묶어 주면서 마무리됐다. LG그룹의 가장 큰 지각변동은 허씨들이 갖고 간 GS그룹의 분리다.GS칼텍스,GS건설,GS홈쇼핑,GS리테일을 주축으로 한 GS그룹은 자산이 18조 7200억원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창업주 형제들이나 구자경 명예회장 형제에 비해 허씨들의 재산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LG관계자는 “고 허만정씨가 처음 사업자금을 댄 이후에도 허씨들은 계속 자금을 출자했고 그 비율은 일찌감치 65대 35로 정해져 있었다.”고 밝혔다. 지분비율은 정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업을 가져갈지에 대해서는 잠시 의견이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씨측은 전선사업에 마음이 있었고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진 금융관련 계열사도 내심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씨측의 어른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씨측의 대표인 고 허준구 회장이 이미 수년전에 정해 놓은 ‘분리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2002년 허 회장이 타계했지만 두 집안의 자손들은 선대의 ‘약속’을 변함없이 이어갔다. ukelvin@seoul.co.kr ■ 필립스 “具·許씨 동업에 감명 LCD합작” 1999년 9월 LG전자에 16억 5000만달러를 투자하며 LCD합작사를 설립키로 한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크리스털리 전 회장은 합작파트너로 LG를 택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파트너를 찾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체크했는데 LG그룹의 구씨와 허씨가 50년 이상 동업자로서 아무런 잡음없이 경영하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LG는 외국기업과의 합작이 이미 13건이나 되는데 이는 LG가 양보와 타협,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업이란 것을 말해 준다.” 구본무 회장의 화답도 이에 못지않았다.“동업은 결혼과 같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남녀가 함께 사는 것처럼 동업자도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양보와 타협을 잃지 않아야 한다.” LG의 58년 역사에는 숱한 합작사가 등장한다. 합작사만 한때 20개에 달할 정도였다.60년대에 이미 66년 미국 칼텍스사와 합작으로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를 설립했고,68년에는 미국 콘티넨털카본사와 합작으로 한국콘티넨탈카본을 세웠다.70년에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으로 금성알프스전자를,71년에는 일본 포스타전기와 합작으로 금성포스타를 설립했다. 독일 지멘스, 일본 후지전기와 3사 합작으로 금성통신을 설립했고 74년에는 일본 NEC와 손잡고 금성전기를 세웠다. 80년대 들어서도 합작은 계속됐는데 84년 다우코닝과 공동출자로 럭키DC실리콘을 설립했고 84년에는 제어시스템 메이커인 미국 하니웰과 공동으로 금성하니웰을 만들었다. 이후 동업관계가 끝났지만 87년 미국 EDS와 합작으로 만든 STM(현 LG CNS),96년 IBM과 맞잡은 LGIBM도 합작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LG계열사 가운데도 합작사가 적지 않다. 히타치LG는 히타치와, LG MMA는 일본 스미토모상사와 합작한 회사다.LG텔레콤은 영국의 BT가 합작투자했고 필립스와는 LG필립스LCD에 이어 LG필립스디스플레이를 합작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오키사와 함께 루셈을 만들었고 올 상반기중으로 LG전자와 캐나다 노텔사의 합작사인 ‘LG-노텔’이 출범할 예정이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기업은 현대산업사회의 근본”

    경제관료가 ‘기업천하지대본’(企業天下之大本)론을 제기해 눈길을 끌고 있다. 재정경제부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에 파견나와 있는 신제윤 국장은 최근 강원도 오크밸리에서 열린 전경련 출입기자단 세미나에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 빗대 이같은 주장을 펼쳤다. ‘우리 경제에 대한 몇가지 생각’이란 주제로 마이크 앞에 선 신 국장은 “우리 선조들이 생산주체인 농업을 으뜸으로 여긴 것처럼 현대산업사회에서는 기업이 생산주체인 만큼 기업천하지대본이 돼야 한다.”면서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보다 일자리 창출과 세금납부 등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기업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일각에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이어 그는 우리 경제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진입을 위해 노력하는 프로 구단으로, 기업은 프로 선수에 비유한 뒤 “메이저리그 진입을 위해서는 리그 규칙에 따르면서 프로선수인 기업이 최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언론·국민 모두가 후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 국장은 또 정책 조합(Policy Mix)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면서 “물가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 달성을 위해 저환율을 유지했던 외환위기 직전의 상황은 정책 조합의 대표적 실패 사례”라고 꼬집었다. 대외균형과 관련한 잘못된 믿음으로는 ▲경상수지가 다소 적자라도 종합수지가 균형이면 괜찮다 ▲주식시장보다는 채권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안전하다 ▲외국인 투자자중 건전한 투자자와 헤지펀드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 등을 꼽았다. 외환위기 이후 팽배해진 리스크 회피 현상, 즉 ‘국제통화기금(IMF) 증후군’의 극복 문제도 재차 강조했다. 신 국장은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성 덕분”이라며 “‘대박신화’나 ‘인생역전’과 같은 역동성도 계속 강조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경두기자 hyun@seoul.co.kr
  • 재계 ‘투란도트’ 왜 함께 볼까

    최고경영자(CEO)들이 단체로 ‘투란도트’를 관람하는 까닭은. 대기업 CEO 200여명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국제경영원 초청으로 오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페라를 단체 관람하기로 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개별 기업 차원의 임직원 단체 관람은 잦았지만 재계 CEO들이 무더기로 문화예술 공연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다. 국제경영원측은 경영진의 문화 마인드 제고와 문화·예술산업 육성에 보탬이 되고자 이벤트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규황 국제경영원장은 “올 제주 하계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회원들에게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계획된 단순한 행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번 행사가 ‘2기 강신호 전경련 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강 회장이 강조한 재계 화합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 전문경영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유대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겠다는 것이다. 재계 총수뿐 아니라 전문경영인도 재계 단합 차원에서 아우르겠다는 강 회장의 의지가 엿보인다. 특히 이같은 대규모 ‘세(勢) 과시’를 통해 전경련의 입지도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재계 총수들은 전경련 월례회장단 회의를 통해 친목을 다져온 것과 달리 전문경영인들은 유대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거의 없었다. 이번 공연 관람에는 조건호 전경련 부회장, 손경식 CJ㈜ 회장, 손병두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정만원 SK네트웍스 사장, 서준모 ㈜동신씨지이 회장, 곽영욱 대한통운㈜ 사장, 안용찬 ㈜애경 사장 등이 참석한다. 한편 국제경영원은 최고경영자 월례조찬회, 제주 하계포럼 등 경영자 연찬행사에도 문화공연을 곁들여 경영자에게 문화 마인드를 심어주고, 문화산업 발전에도 관심을 갖도록 할 계획이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지수경제 쾌청…경기 살아나나

    지수경제 쾌청…경기 살아나나

    ‘지수경제는 호황?’ 원화절상 등으로 수출 증가율 둔화와 주요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겹치고 있지만 각종 경기전망지수는 여전히 좋은 것으로 나타나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5일 업종별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5월 BSI 전망치가 114.1을 기록, 지난 3월의 119.2와 4월의 117.6에 이어 3개월 연속 기준치인 100을 넘어섰다고 밝혔다.BSI 전망치가 100을 넘으면 해당월의 경기를 전월보다 좋아질 것으로 보는 업체가 많음을 의미한다. 전망만 좋은 게 아니라 지난달 BSI 실적치도 107을 기록,3월의 110.7에 이어 2개월 연속 호조세를 보여 실제 체감경기도 좋아지고 있음을 반영했다. 제조업(110.1)보다는 비제조업(121.2)이, 수출(105)보다는 내수(121.2)전망이 좋았다. 자금사정과 투자, 고용 전망 BSI도 각각 104.1,106.8,104.3을 기록해 다소 호전될 것으로 전망됐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전국 1000가구를 조사한 2·4분기 ‘소비자태도지수’는 전분기보다 9.8포인트 상승한 53.1로 2002년 3·4분기(55.1) 이후 2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광고, 유통업, 재래시장 등 부문별 경기전망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한국광고주협회가 신문,TV, 라디오, 잡지 등 4대 매체 기준 300대 광고주를 대상으로 조사한 5월 광고경기실사지수(ASI)는 111.5로 지난 2월(119.4)이후 4개월 연속 100을 넘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조사한 2·4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RBSI)도 106으로 1년만에 기준치 100을 넘어서면서 1·4분기 때보다 38포인트나 높아졌다. 전경련이 재래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2·4분기 매출기준 시장경기실사지수(MSI)는 73으로 나타나 여전히 100 이하였지만 1·4분기 60보다는 크게 호전됐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씨줄날줄] 도어노크/우득정 논설위원

    외국계 자본들이 외환위기 직후 사들였던 금융기관과 부동산을 처분하면서 조 단위의 차익을 챙기고도 세금 한푼 물지 않자 반(反) 외자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5%룰’ 신설, 외국인 이사 수 제한 움직임, 세무조사 착수 등 외자를 겨냥한 규제성 조치들을 잇달아 쏟아냈다. 경제학자들은 투기자본의 폐해를 적시하며 대책을 강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은 ‘경제 국수주의’라는 용어를 동원해가며 한국을 맹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외자의 손익 논쟁과 외신의 ‘한국 때리기’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감정적인 대결국면으로 치닫자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급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 부총리는 “외국 투자자본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벌어들인 수익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비판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못박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라고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실었다. 한국이 ‘외자의 놀이터’가 돼서도 곤란하지만 글로벌 시대와 역행하는 국수주의 흐름도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오는 9일과 17일 한 부총리와 이희범 산업자원부장관, 전경련 회장, 한국노총위원장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노사정 투자유치단이 미국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는 것도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18일과 19일 서울에서 전세계 500여 투자기관이 참여하는 투자유치 콘퍼런스를 기획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숫자로만 따진다면 지난해 외국계 자본의 순투자액은 9조∼10조원이지만 외자 유치를 위해 투입한 통화안정증권 이자와 외국환평형기금 손실액은 15조 8000억원에 이른다. 교역규모 세계 10위, 경제규모 세계 12위로 불어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인 셈이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단이 9일부터 연례 워싱턴 방문행사인 ‘도어노크(Doorknock)’에 돌입한다. 워싱턴 정계와 행정부, 재계에 한국의 실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행사다. 장사꾼의 입장에서 한국에서의 애로사항을 하소연하는 성격이 짙지만 미국에서 보는 것만큼 한국의 투자리스크가 크지 않다는 점도 설명할 계획이라고 한다. 미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데스크시각] 80점짜리 기업도시?/박건승 산업부 차장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은 지난해 10월 초 기업도시법 제정을 위한 국회 정책포럼에서 이런 말을 했다.“정부의 기업도시법 내용은 70점은 되는 것 같다. 전경련이 100점짜리 법안을 만들자고 요구하면 국회 통과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80∼85점짜리 법안을 만든 뒤 차츰 정비하는 것이 좋겠다.” 포럼의 좌장 자격으로 한 말이다. 법안에 담길 노동·환경·세제 부문의 규제완화 수위를 놓고 정부, 재계, 시민단체간에 목소리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양보하자는 주문이었다.‘꾀돌이’로 불리는 강 의원다운 재치가 돋보이는 타협안이었다. 기업도시법은 이렇게 서로 속셈이 다른 주체들간에 타협의 산물로 그해 12월 빛을 보게 된다. 당초 재계가 구상했던 기업도시의 취지와 정신은 법안에서 상당히 빛을 바랜 채로, 그렇다고 시민단체의 요구가 대폭 받아들여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채로 말이다. 아무튼 법안 제정 이후 외견상 기업도시 건설작업은 급물살을 타는 양상이다. 지난 4월15일 8개 지역 컨소시엄이 시범사업 신청서를 낸 데 이어 5월1일에는 기업도시법이 발효됐다. 다음달엔 4곳 정도를 시범사업자로 선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혹시나가 역시나’가 돼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무엇보다 기업도시 시범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일부 기업들의 면면이 미덥지가 못한 탓이다. 어떤 컨소시엄은 신청 마감일에 맞춰 급조된 흔적이 역력하고, 다른 컨소시엄은 정부의 토지용도변경 허가 의지를 떠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심지어 어떤 컨소시엄은 상당수 기업이 실체없는 유령회사(페이퍼 컴퍼니)라는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500만평짜리 기업도시를 개발하려면 3년간 18조원이 투입되고 배후시설 건설에 10조원이 들어가는 등 최소한 28조원이 필요하다는 게 일반적인 셈법이다. 이처럼 막대한 돈이 들고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그만그만한 기업들이 제아무리 컨소시엄을 이뤄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어느 정도의 투자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범사업 컨소시엄 명단을 아무리 훑어도 국내 재계의 대표주자인 삼성·LG·SK·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수조원씩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빅4’는 ‘재벌 특구’라는 기업도시를 왜 외면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부가 낙후지역을 시범사업 우선 선정 대상으로 고집함으로써 대기업의 참여의지를 꺾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경쟁력 확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투자에 나서지 않는 법이다. 전경련은 2년전 기업도시 구상을 정부에 제안할 때 투자활성화, 일자리 창출,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환란 이후 기업의 설비투자율이 0.3%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기업도시란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를 도외시한 채 지리적 여건이나 인력, 인프라가 뒤진 지역을 우선 선정대상으로 삼겠다고 하니 선뜻 투자에 나설 기업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초부터 재계와 정부는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 셈이었다. 정부는 기업도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음달로 예정된 시범도시 선정때 낙후지역 개발과 균형발전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기업도시의 취지를 최대한 살려 엄정한 잣대로 참여 컨소시엄의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 과거 산업공단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정부의 특정 지자체 밀어주기 의혹이 나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더욱이 차기 대선과 총선을 염두에 두고 기업도시 문제를 정치논리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시범지역은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격에 못미치는 곳은 과감히 탈락시켜야 한다. 시범지역은 한두 곳이면 충분하다. 지역안배 차원이 아닌, 시범사업의 취지에 걸맞게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로서는 지역별로 고루 기업도시를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겠지만, 시범사업을 방만하게 펼칠 경우 시행착오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시범사업이란 말 그대로 모범을 보이는 사업이 아닌가. 기업도시가 80점짜리가 될지, 아니면 60점짜리가 될지, 그 운명은 이제 한달여 뒤의 정부 결정에 달려 있다. 박건승 산업부 차장 ksp@seoul.co.kr
  • 디자인클러스터 10곳 육성

    재계가 국내 디자인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올인’을 선언하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일 미래 제품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른 디자인 산업의 선진화를 위해 내년부터 2007년까지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형태로 10개 안팎의 디자인 클러스터 구축을 유도키로 했다. 이를 위해 다음 달부터 삼성전자,LG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이 국내 디자인 전문회사를 대상으로 아웃소싱을 확대, 이를 수행할 디자인 전문회사 컨소시엄 2∼3개를 선정·육성하는 시범사업이 추진된다. 또 디자인 클러스터가 완성되는 2008년 이후에는 범국가 차원의 디자인 집적단지를 조성, 한국을 동북아 디자인산업의 허브로 육성하기로 했다. 전경련 산업디자인특별위원회(위원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는 이날 서울 전경련 회관에서 ‘디자인산업 발전대책 세미나’를 열고 이같은 내용의 디자인산업 발전방안을 제시했다. 전경련은 현재 국내 디자인산업의 경쟁력이 선진국의 70∼80% 수준에 불과한 데다 디자인 전문회사의 경쟁력이 매우 뒤떨어져 있어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산업디자인특위 김쌍수 위원장은 “디자인 기획·개발·컨설팅 등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디자인 클러스터의 조성에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며 “디자인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산업디자인특위 정국현(삼성전자 전무) 실무위원장은 “디지털시대 미래 국가 경쟁력은 기술과 디자인의 소프트 경쟁력에 의해 좌우된다.”며 “투자대비 효과와 미래 전망에서 디자인이 기술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전경련은 또 대기업의 15∼20년 경력 중견 디자이너를 선발, 중소기업에 파견해 디자인 기획·개발·컨설팅을 지원하는 다경험 중견 디자이너 파견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기로 했다. 재계가 이처럼 전경련 차원에서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나서기로 함에 따라 그동안 삼성전자,LG전자 등 개별 대기업을 중심으로 추진돼 온 디자인산업 육성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전망이다. 박건승기자 ksp@seoul.co.kr
  • 전경련 회장단 새달7일 골프회동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오는 5월7일 춘천CC에서 회장단 14명이 참가한 가운데 골프 회동을 갖고 재계 화합을 다진다. 26일 전경련에 따르면 두산 박용오 회장의 초청 형식으로 이뤄지는 골프 모임에는 강신호 회장을 비롯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현재현 동양시멘트 회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류진 풍산 회장, 허영섭 녹십자 회장, 조건호 전경련 상근부회장 등이 참가한다. 그러나 이건희 삼성 회장,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는 불참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관계자는 “5월 회장단 회의를 겸한 이번 골프 모임은 친목을 다지는 자리여서 특별한 안건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건승기자 ksp@seoul.co.kr
  • 해외골프에 年1조원 ‘줄줄’

    연간 50만명 이상이 해외 골프여행에 1조원 가량을 소비함에 따라 이들을 국내로 돌리기 위한 국내 골프 관광상품의 개발이나 세제 감면 등의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1일 내놓은 ‘관광수지 개선을 위한 정책제언’ 보고서에서 “해외골프 여행객이 매년 60%씩 늘어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관광수지 적자(34억달러)의 29%에 달하는 1조원 이상이 해외에서 소비되고 있다.”면서 “이를 줄이기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최근 해외 골프여행의 증가세가 주5일 근무제 확산과 접대문화 변화로 골프 인구는 늘어난 반면 국내 골프장은 부족한 데다 이용료가 비싼 점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취득세와 재산세, 특별소비세 등 골프장에 부과되는 과다 세금이 국내 골프 관광상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국내 관광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제주도나 관광·레저형 기업도시 등에 대표적인 골프 관광상품을 개발해야 하며, 골프장 증설이나 도로표지판 정비, 명승지·해변도로 등에 대한 야경시설·가로등 설치, 전력요금 할인 등 관광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내수중심 경제회복 조짐 뚜렷 지표보다 체감경기 더 나을것”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0일 “경기회복 조짐이 분명하게 관찰되고 있으며, 특히 올해에는 내수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4%대(경제성장률)라고 하더라도 체감경기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 부총리는 이날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민간경제연구협의회 오찬간담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경기회복이 실물경제에 반영되기까지는 시차가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최근 여러 지표들이 나오는데 정부는 한 두가지 지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장기적인 거시경제 안정차원에서 확장정책을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경기회복 조짐은 과거처럼 경기부양의 한 측면에서 나타나는 단기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조정의 결과로 자생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하고 “인플레이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정 속 성장을 바탕으로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간담회에는 이윤호 LG경제연구원장,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 노성태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15개 연구소 전·현직 연구원장이 참석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지금 전남에선] 닻올린 ‘J프로젝트’ 항로 잡았다

    [지금 전남에선] 닻올린 ‘J프로젝트’ 항로 잡았다

    전남도의 미래를 바꿀 ‘서남해안 관광레저도시 건설사업(J-프로젝트)’이 닻을 올리면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 등 서남해안 전체 개발사업의 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사업의 성공여부가 천혜의 섬과 바다, 해안선을 낀 서남해안 개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단계인 2016년까지 해남과 영암 일대 간척지 등 3000여만평에 쉬면서 즐기는 별장형의 미래형 복합 정주도시(50만명)를 세우는 게 목표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가꿔 관광객 1000만명을 끌어들인다는 전략이다. 정부가 이를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사업비 30조원에 달하는 민간 투자유치에 불을 질렀고 국내·외 투자기업군이 화답하고 있다. 전남도는 조기투자를 유도키 위해 사회간접자본 확충, 개발토지 무상양여, 기반조성비 마련 등에 따른 세부작업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 ●언제 시작되나 지난 11일 전남도청에서 국내·외 자본투자 18개사 관계자들이 J-프로젝트 투자협약서(MOA)에 도장을 찍었다. 박준영 전남지사는 이날 “관광레저 도시 시범사업에 국내외 유수기업이 참여함에 따라 시범사업 선정의 당위성은 물론 사업추진의 신뢰성이 확보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항로가 잡힌 셈이다. 그러나 충분한 기름을 넣어야 하고 선장과 기관장, 항해사 등을 정한 뒤 항구에 도착하려면 아직 첩첩산중이다. 전남도는 지난 14일 ‘J-프로젝트’를 관광레저형 기업도시 시범사업으로 선정해 주도록 정부에 신청서를 냈다. 이 시범사업은 6월쯤 정부가 지역 낙후도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이후 사업 타당성 조사를 거쳐 개발계획이 승인되면 최종 참여기업군이 확정된다.9월쯤 개발을 전담할 별도 법인이나 위원회 설립도 검토중이다. 또 5월 1일부터 발효될 ‘도시개발특별법’에 따라 오는 12월 개발구역 지정·승인 등 절차를 거쳐 실시계획 승인과 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쳐 늦어도 내년 초에는 개발예정지 토지구획정비 등 첫삽을 뜬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비해 전남도는 해남·영암의 개발지 인근 주민들로부터 개발 동의서를 받아 놓을 작정이다. 국무총리실에는 태스크포스팀이 꾸려지며,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는 지난달 31일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관광레저도시추진기획단이 발족해 지원사격에 나섰다. 전남도는 7월에 도청 레저도시 기획단을 과 단위에서 국 단위로 승격, 개발에 필요한 서류 발급과 접수, 건축, 개발 허가 등을 원스톱으로 처리해 준다. ●언제 돈이 들어오나 개발방식은 투자자들로 그랜드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개발한다. 즉 투자그룹이 각자 개발플랜(제안서)을 내고 개별적으로 특성에 맞게 개발에 들어간다. 중복되거나 조정이 필요하면 전남도가 중재에 나선다. 투자 제안서를 낸 곳은 전경련 컨소시엄과 전남지역 컨소시엄, 아랍 에미리트, 일본, 미국 등 국내·외 투자자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사업비 규모를 산정해 제출한 곳도 있다. J-프로젝트가 노리는 것은 중국 관광객이다. 전남도가 공공연히 “아시아의 베가스(도박도시)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개발예정지에서 10분거리인 목포항은 중국 최대 상업도시인 상하이와 국내 최단거리에 있다. 또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 등 굵직굵직한 행사도 개발의 호기다. 개발예정지는 L자형 관광휴양 벨트의 중심지다. 인천∼군산∼목포, 목포∼광양∼진주∼부산을 교차하는 지점. 특히 다이아몬드 제도 10개 섬은 다리로 연결돼 환상적인 다리박물관을 선보이는 등 상품화 가능성도 크다. 예정대로 갈 경우 내년 초에는 개발예정지에 대한 기반정비 사업에 들어간다. 사업비는 7조원으로 잡고 정부의 예산지원으로 충당한다. 개발예정지는 정부 땅인 간척지 2300만평과 육지쪽 사유지 700만평이다. 정부 땅의 경우 전남도는 사업추진의 지속성을 위해 소유는 국가로 하되 무상으로 임대해 달라는 입장이다. 사유지는 전남도가 기채를 발행해 보상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중이다. 전남도 양복완 경제통상실장은 “J-프로젝트는 100m 달리기로 치면 이제 0.5㎝만큼 온 셈”이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성급한 눈길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도로망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시급하다. 서남해안 일주도로인 국도 77호선(인천∼신안∼부산)의 확포장과 연륙·연도교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또 무안 국제공항 개항(2007년)이나 고속철도 호남선 건설도 앞당겨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바람이다. ●개발예정지 투기열풍 보상을 노린 나무심기 광풍이 불고 있다. 마구 심어대면서 묘목 값도 크게 올랐다. 느닷없이 새로운 집들이 지어지고 있다. 심지어 남의 땅을 빌려 나무심기를 한 뒤 보상 후 절반씩 돈을 나누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다. 주변 땅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J-프로젝트 예정지인 해남군 산이면과 영암군 삼호읍은 지난해 8월 이미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였다. 산이면 일대는 논·밭이 지난해 초 평당 1만원에서 최근 6만원으로 올랐다. 이곳으로 연결되는 마산면 일대는 도로 주변이 평당 10만원으로 폭등했다. 부동산 중개업소도 이전보다 3배나 많은 40여곳이 문을 열었다. 또한 지난달 해남군 해남읍, 계곡·마산·황산·문내·화원·화산면, 영암군 삼호읍, 미암·서호·학산면 일대도 새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였다. 평당 2만∼3만원이 7만원으로, 무안공항 뒤편은 30만원으로 뛰었다. 모두가 개발기대심리로 부풀어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은 “잔뜩 바람만 들었다가 허탈감만 커지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입을 모은다. ■ 박준영 전남지사“전남 자산가치 국제적 인정받아” “서남해안 관광레저도시 건설사업(J-프로젝트)은 전남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처음으로 전남만의 자원이자 자산이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평가받은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이 사업의 의의가 있습니다.”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않은 박준영 전남지사는 곳곳에 걸림돌이 있어 어려움이 있겠지만 전남도민들이 앞장서서 협력하고 돕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J-프로젝트 성공을 서남해안 개발사업의 시금석으로 보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남이 자랑하는 섬(1969개)과 리아스식 해안선(6431㎞), 세계 5대 청정갯벌 등을 살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가꾸는 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투자자들의 전남도 내 사무실 설치는 현장실사에 따른 투자의지의 척도로 볼 수 있다. 박 지사는 “해외투자그룹 가운데는 조사팀을 전남도에 파견해 일할 장소를 찾은 곳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부분적으로 윤곽을 그려가는 과정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대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박 지사는 “J-프로젝트 사업에 속도를 더하기 위해 투자그룹별로 컨소시엄(공동참여) 체제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출자금을 낸 법인체제로 갈 것인지 여부는 투자적격성 검토가 끝난 뒤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도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돈이 들어오는 시점에 대해’ 박 지사는 “이 사업은 차분하고 안정되게 추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급하게 하다보면 일을 망칠 수도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또 “내 임기내에 뭔가를 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누가 추진하든 잘 되도록 밑그림을 튼실하게 그리는 게 더 중요하다. 안전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되 신속하게 밀고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民資 30조원 유치 최대난제 J-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각도 만만찮다. 사업비 30조원 모두를 민간자본으로 충당해야 하고 대중국 관광객 유치를 겨냥한다는 사업 내용도 마뜩찮다. 주변여건이 전남보다 월등한 인천 송도 신도시 개발이 4년째 제자리 걸음이고 전북도가 무주 리조트에 아랍자본을 끌어들여 ‘동양의 에버랜드’를 만들겠다던 호언도 물거품이 된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남대 경제학부 송인성(59·지역개발학과) 교수는 “J-프로젝트 정보를 공개해 지역개발 전문가나 지역민들이 공감토록 하는 공론화가 선행돼야 하고 정권이나 사람이 바뀌어도 사업추진이 되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못박았다. 그는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20년이 지나도록 허허벌판인 해남 화원반도를 예로 들었다. 송 교수는 “달랑 2∼3쪽짜리 개발계획서로 투자자들과 투자협정서를 체결하는 걸 보면 회의적”이라며 “30조원 사업이라면 적어도 200쪽 분량에 사업 타당성과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상품화 내용 등 구체적인 사업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광주지역 기업인들은 “무안군이 산업교역형 기업도시를 신청했고 신 도청 이전지인 남악 신도시(15만명)를 만든다면서 추가로 50만명에 달하는 관광레저도시 인구는 어디서 유입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해외투자 유치 전문가들은 “해외 투자자들은 투자가치 즉 수익성이 전제돼야만 투자를 한다.”며 “투자 전에 현지에 사무실을 내고 직원을 파견해 실사한 뒤 제공되는 정보의 질이나 투자조건 등을 꼼꼼히 따지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체들이 이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데 과연 참여업체들이 막대한 자금 동원력이 있을지…”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광주지역 환경단체도 도청 앞에서 환경파괴 조장 등을 거론하며 사업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전경련 ‘인사 후폭풍’ 몸살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전경련의 역할이며, 앞으로 현실적 과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 판단해 달라.” 조건호 전경련 부회장은 7일 서울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전직 관료들의 ‘입성’에 따른 전경련의 정체성 우려에 대해 이같이 밝히고 “과거에 정부 일을 했다고 해서 회원사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친(親)정부 색깔 차단에 애썼다. 전경련은 이날 1997년부터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을 이끌어온 좌승희 원장을 경질하고 후임에 노성태 명지대 경영대학장을 선임했다. 전경련 전무에는 하동만 전 특허청장을 임명했으며, 이규황 전무는 전경련 부설 국제경영원(IMI)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로써 전경련은 사무국뿐 아니라 한경연의 핵심 보직까지 물갈이하며, 그동안 ‘삼경련’이라는 비난과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이라는 비판적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사 명단이 사전에 노출되면서 ‘인사 후폭풍’에 휩싸였다.‘삼성 색깔을 지우더니, 이제는 참여정부와 코드 맞추기에 나서냐.’부터 ‘재계를 대변해야 할 전경련이 전직 관료의 구심점 역할로 방향을 틀었다.’는 또 다른 비판이 꽈리를 틀고 있는 것. 전경련 내부에서도 친정부 노선으로 돌아서면 회원사의 정보 수집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전경련 고위 인사에 대한 대우가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좌 원장은 경질에 대한 사전 통보와 관련,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 “아무런 준비도 못했다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나 전경련의 이같은 행보는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삼성 색깔’을 지워 재계 단합을 이끌어내겠다는 방침을 수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 일하는 전경련을 만들기 위해 정부와의 관계 개선도 피력했었다. 일각에서는 강 회장의 지나친 욕심이 재계의 불만을 불러온 것으로 분석한다. 삼성 뿐 아니라 LG, 현대차까지 끌어 안으려다가 무리수가 나왔다는 것이다. 또 기업도시 등 전경련의 역점 사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정부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한 것도 역풍을 가져 왔다는 해석이다. 한편 이날 열린 월례 회장단회의에는 회원사의 참여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안으로 각종 위원회를 활성화시켜 나가기로 하고, 이를 위해 경제계 현안을 다루는 ▲자원대책위원회▲기업지배구조위원회▲부품소재위원회▲자유무역협정(FTA)위원회 등을 시범위원회로 선정, 운영키로 했다. 또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의 활동에 적극 협력하는 한편 강원도 양양과 고성 등 동해안 산불재해 복구에도 힘을 모으기로 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