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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삶 그의 꿈] 한 달에 한 시간, 교훈 하나 이야기 두 개

    [그의 삶 그의 꿈] 한 달에 한 시간, 교훈 하나 이야기 두 개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다. 그런데 먼 앞날을 내다보고 세워야 할 중요한 계획이 목표부터 잘못된 듯하다. 일류대 진학이 교육의 목표가 되면서 학교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양성하는 게 아니라 안하무인 독불장군을 배출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무한경쟁과 1등제일주의가 교육의 다른 말이 된 오늘날, 우리에게 인성교육이 절실한 이유다. 정보통신 발전, 선진국으로 가는 길 삼보컴퓨터 창립자인 이용태 박사가 인성교육 전도사로 변신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용컴퓨터(PC)의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았던 1980년부터 삼보는 국내 컴퓨터 시장을 성장시켜 온 선두주자였다.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대국이 된 과정과 삼보컴퓨터의 발자취는 맥락을 같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보의 역사는 바로 이용태 박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이용태 박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1969년. 귀국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일하던 1970년, 그는 인텔에서 발명한 IC 컴퓨터를 접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1세대 컴퓨터의 구성소자는 진공관입니다. 진공관은 가지만한 크기인데 이때의 컴퓨터는 공장과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다음에 나온 게 콩만한 크기의 트랜지스터인데 이 컴퓨터는 장롱 10개를 펼쳐놓은 것만 했죠. 그리고 1970년에 나온 게 3세대 컴퓨터입니다. 손톱만한 칩 안에 수천 개의 트랜지스터를 인쇄해 놓았어요. 엄청난 혁명이죠.” 복잡하고 거대한 컴퓨터의 시대가 종식되는 것을 목격한 이용태 박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흥분했다. 하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겠구나’, 또 하나는 ‘국산 컴퓨터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보통신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다들 로켓트 만들어 달나라 가자는 사람 취급했지요. 정부와 재벌을 상대로 10년을 설득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제가 직접 만드는 수밖에요. 1980년 청계천에서 자본금 1,000만 원 가지고 삼보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국산 컴퓨터 개발, 정부기관의 행정전산망 통일, 초고속 인터넷 보급…. 뛰어난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그 모든 일을 해온 그가 2005년 삼보컴퓨터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인성교육 전도사로 변신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보산업 발전에 평생을 바쳐온 그는 “컴퓨터 만드는 일보다 인성교육 사업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IT 산업보다 더 중요한 인성교육 이용태 박사가 1996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박약회는, 초대 회장인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과 지인들이 도산서원 내 박약제(搏約劑:학문은 넓히고 예술은 줄이다)에 모여 퇴계 이황 선생에 관한 스터디모임을 가진 것이 시작이었다. 모임의 횟수가 거듭되면서 회원이 늘어났고, 이용태 박사가 회장이 되었을 때는 회원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 그는 박약회 회장으로서 오늘날의 선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해 고심했다. “과거와 미래 중에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문집을 간행하고 서원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과거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미래는 후진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죠. 저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05년 삼보컴퓨터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손자 손녀들을 모아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 인성교육 사업의 첫 걸음이었다. 아이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를 본 그는 ‘인성교육을 국민운동 차원으로 벌이자’, ‘나부터 인성교육의 전도사가 되자’라고 결심했다. 먼저 박약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인성교육법을 강의했고 22개 박약회 지회에서 젊은 어머니들에게 전도했다. 이것이 인성교육 사업의 1단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동래교육청으로부터 인성교육을 특별사업으로 실시할 계획이니 강연을 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2007년 그는 여러 차례 부산을 방문해 동래교육청의 공무원, 초등·중학교 교장,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그리고 2008년 동래교육청에서 본격적으로 인성교육을 시작하면서 각 가정으로 인성교육에 관한 안내문을 보냈고 900여 가정이 신청했다. 이로써 인성교육 사업 역시 2단계로 접어들었다. 한 달에 한 시간, 교훈 하나 이야기 두 개 그가 말하는 인성교육법은 쉽다. ‘한 달에 한 시간, 교훈 하나 이야기 두 개’면 충분하다. “인성교육을 신청한 가정에 한 달에 한 번 교훈 하나와 교훈에 맞는 이야기 두 개를 보냅니다. 그걸 가족들이 다 함께 읽은 다음에 토의합니다. 정말 쉽죠?” 이토록 간단한 인성교육의 실천사례는 실로 놀랍다. 동래교육청과 박약회가 펴낸 《감화이야기를 통한 가정 인성교육 실천사례》를 읽어보면, 새옹지마에 관한 교육 후 실패를 두려워하던 아이가 실수를 하고도 자신감을 잃지 않아 기쁘다는 어머니, 양보와 배려에 관한 교육 후 싸움이 잦던 연년생 형제의 사이가 좋아져 뿌듯하다는 어머니 등 감동적인 실천사례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이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인성교육의 날을 정하고 가족이 둘러앉아 토의의 시간을 가지면서 평소에도 가족 사이에 대화가 늘었다. 부모가 솔선수범하여 그달의 교훈을 실천하다 보니 부부 사이가 좋아졌다는 감화사례도 있다. 이용태 박사는 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데 ‘한 달에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한 달에 한 시간, 일 년이면 열두 개의 교훈을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덕목은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열 가지면 충분하죠. 3년이면 열 가지 이야기를 서너 번쯤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왜 인성이 중요하냐는 질문에 그는 “모든 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취업할 때에는 일류대 나온 게 중요할지 몰라도 입사 후엔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가, 열의와 의지가 강한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가, 하는 것이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수한 사원은 인성으로 판가름 나는 셈이다. 사회활동만이 아니다.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도 결국 가족 구성원의 인성 문제다. “부부 사이에 불만이 있다면 상대가 라틴어 문법을 몰라서도 아니고 칸트의 철학을 몰라서도 아닐 겁니다.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아서, 함부로 말해서, 이기적인 태도를 취해서 불만인 거예요. 그게 바로 인성 아닌가요?” 인성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전후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범죄률과 자살률이 날로 높아가는 현재, 우리가 정말 예전보다 행복한지 자문해 볼 일이다. 이용태 박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GDP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 모두가 반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예전에 저는 우리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선 선진국을 숨 헐떡이며 쫓아갈 게 아니라 그들 앞으로 껑충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컴퓨터였고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보통신에 있어 세계 1등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앞서 가기 위해서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교육이에요. 그래서 인성교육 사업이 제게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일류대에 진학하는 것이 되어버린 세태가 안타깝다. 크게는 사회에 유용한 인간을 기르고 작게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을 만드는 게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불어 사는 법과 스스로를 경영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서양학문엔 없지만 예부터 우리 교육이 중시해 왔던 게 바로 그것이다. 다행히 5년간의 인성교육 사업이 호응을 받고 있어 그는 요즘 너무 기쁘다. “아침부터 밤까지 만나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반듯하고 착하면 그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글_ 하재경 소설가
  • [길섶에서] 나라꽃/노주석 논설위원

    남쪽 땅 진도에서 코끝을 찌르는 화신이 전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으로 왜선 133척을 무찌른 명량해전의 격전지 울돌목이 바라보이는 해안가에 무궁화가 지천으로 피었다는 전갈이다. ‘진도 나라꽃 무궁화 전시회’가 진도군 녹진 무궁화동산 일대에서 6일까지 화려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 4월 ‘무궁화를 보고 싶다’라는 칼럼에서 벚꽃에게조차 구박받는 나라꽃 무궁화의 딱한 처지를 개탄한 적이 있었다. 벚꽃축제는 곳곳에서 열리지만 무궁화잔치는 눈을 씻어도 찾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했다.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돗개의 고장,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울돌목의 급류 흐르는 소리가 20리 밖까지 들리는 진도에서는 무궁화가 온전한 대접을 받는다. 피고 지기를 백일 동안 거듭하는 흐드러진 무궁화 꽃길이 220㎞에 걸쳐 펼쳐진다. 무궁화는 진도의 가로수인 셈이다. ‘무궁화 화가’ 길산 김길록화백이 재촉한다. “아따. 내려와서 눈으로 보라니까, 그러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Zoom in 서울]청계천~종로구청 물길 올 11월 복원된다

    [Zoom in 서울]청계천~종로구청 물길 올 11월 복원된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뒷골목에 실개천이 복원된다. 서울시는 청계천과 북악산을 잇는 중학천(위치도)을 복원해 도심 속 물길을 조성한다고 6일 밝혔다. 1957년 복개공사로 사라진 중학천 2㎞ 구간을 되살리는 이번 사업은 2012년까지 3단계로 나눠 진행된다. 1단계로 오는 11월까지 청계천~종로구청 340m 구간에 폭 3m, 깊이 60~70㎝의 물길을 만든다. 이곳에는 분수대와 휴게시설 등으로 꾸며진 친환경 수변공간이 조성된다. 중학천이 청계천과 수직으로 연결되면서 주변은 광화문광장, 인사동과 연계된 관광명소로 조성된다. 1단계 구간은 차도와 인도 구분 없이 도로 폭이 6~9m로 좁은 점을 감안, 도시환경사업지구의 공지(公地)를 활용하고 주변 건축물 소유주의 동의를 얻어 기존처럼 자동차 통행과 보행이 가능한 공간을 확보하도록 했다. 이어 ▲2010년까지 2단계로 종로구청~경복궁 동십자각 사이 400m 구간을 ▲2012년까지 3단계로 동십자각~삼청공원간 1260m를 잇달아 복원할 계획이다. 특히 도로 폭이 넓고 교통 소통에 지장이 없는 2·3단계의 일부 구간은 조선시대 중학천의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1단계 구간은 청계천에 공급되는 물을 끌어올려 흘려보낼 예정이고, 전 구간이 복원되면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인근 지하철 역사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활용해 맑은 물을 공급할 계획이다. 중학천은 조선시대 집권층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특히 1398년 8월26일 늦은 밤 수송방(현재 종로구청 부근)에 살고 있던 정도전은 중학천 계곡에서 시(詩) 한 수 읊으며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남은의 전갈을 받고 송현(松峴·한국일보 옛터)에 있는 남은의 애첩 누각으로 간다. 여기서 남은, 박이, 장지화 등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참살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1957년,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하천은 도시정비사업이란 미명 아래 뚜껑을 덮은 뒤 아스팔트 도로로 포장됐다. 청계천 지천 중 가장 먼저 복원되는 중학천은 1단계 구간 35억원을 포함해 모두 14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정유승 도심재정비1담당관은 “중학천은 매력적인 관광명소가 될 뿐만 아니라 각종 역사적 사건이 얽혀 있어 역사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육군 과학화전투훈련단을 가다] 특전사·해병대도 두손… 58전 전승

    “58전 전승(全勝)”. 육군 과학화전투훈련단(KCTC) 소속 ‘전문 대항군’의 기록이다. 지난 2003년 3월 창설돼 2005년부터 전투 훈련에 참여한 KCTC 대항군 대대는 지금까지 58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KCTC 대항군 대대의 공식 명칭은 11대대. 군(軍) 내에서는 ‘전갈대대’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구호는 ‘적보다 더 강한 적, 적보다 더 독한 적.’ 부대 관계자는 “대항군을 통해 우리 국군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육군 최정예 부대인 특전사도 대항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지난해 6월 과학화 전투훈련에 참여한 해병대 1개대대가 무참히 패배해 화제가 됐다. 해병 대대의 생존율이 20%에 불과해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대항군이 훈련장의 지형지물과 마일즈 장비에 익숙한 점을 감안해도 해병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해병대는 7월 KCTC 훈련에 다시 참여한다. 이홍희 해병대사령관은 “철저히 체험하라.”며 해병대 장교들의 KCTC 훈련 참관을 지시했다. 지난해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자체 훈련을 통해 대항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대항군 대대는 북한군 군복과 장비(AK 소총)를 사용한다. 전투도 군이 연구해온 북한군 전술을 응용한다. 대항군과 훈련부대가 똑같이 K-2 소총을 쓰지만 대항군이 쓴 총탄(레이저)은 마일즈 감지기에 북한군 화기인 ‘AK’로 뜬다. 실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조치다. 대항군은 매달 두 차례 이상 실전 훈련을 축적해 온 ‘전투 프로’들이다. 전투 생존율은 80%선이다. 인제 안동환기자
  • 트랜스포머2, 어떤 로봇 추가될까?

    트랜스포머2, 어떤 로봇 추가될까?

    트랜스포머 시리즈 2편 ‘트랜스포머:패자의 복수’(Transformers: Revenge Of The Fallen, 이하 트랜스포머2)에 등장할 주요 로봇들의 명단과 일부 사진이 공개됐다. 미국 포털사이트 ‘야후’의 영화섹션 ‘야후 무비’는 트랜스포머2의 등장 로봇들에 대해 지난 1일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발표 내용을 인용해 전했다. 야후는 “마이클 베이 감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번 영화에서는 더 크고 더 나쁜 로봇들이 등장했다.”며 관객들의 기대를 부추겼다.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오토봇 진영에는 전 편에 등장했던 옵티머스 프라임, 범블비 등과 함께 새로운 캐릭터들이 추가된다. 여성 로봇 ‘알씨’와 정찰기 블랙버드로 변신하는 병기형 트랜스포머 ‘제트 파이어’, 원작에서는 디셉티콘이었으나 영화에서 역할이 바뀐 ‘졸트’ 등을 비롯해 총 7대의 로봇이 오토봇 진영에 합류했다. 디셉티콘 진영에는 전편에서 도망친 것으로 그려졌던 ‘스타스크림’이 다시 돌아오며 고양이와 비슷한 형태의 ‘레비지’, 7대의 중장비가 합체된 ‘데바스테이터’ 등의 로봇들이 추가됐다. 제목에까지 등장하지만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폴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아 영화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트랜스포머2에는 이들 주요 로봇 외에도 총 40여종의 로봇이 등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야후 무비가 게재한 트랜스포머2 로봇 명단. (괄호 안은 변신 베이스 모델) <오토봇> - 옵티머스 프라임 / 리더 (피터빌트 379) - 아이언하이드 /무기 담당 (GMC 톱킥 C4500) - 라쳇 / 의무병 (허머 H2) - 범블비 (시보레 카마로) - 알씨 / 여성오토봇 (팬암 스파이더) - 사이드 스와이프 (시보레 콜벳 스팅레이 컨셉트) - 제트파이어 / 디셉티콘 진영에서 오토봇으로 전향 (SR-71 블랙버드) - 졸트 (시보레 볼트 하이브리드) - 스키즈&머드플랩 (시보레 비트, 트랙스 컨셉트) <디셉티콘> - 스타스크림 / 전편에서의 2인자 (F-22 랩터) - 스콜포녹 / 사막 전갈 로봇 - 사이드웨이즈 (아우디 R8) - 사운드웨이브 (통신위성) - 레비지 / 네 발 동물형 로봇 - 더 닥터 / 거미 로봇 - 휠리 / 소형 로봇 - 데바스테이터 / 합체형 디셉티콘 (중장비 7대) - 더 폴른 / 알려진 바 없음 사진=DreamWorks/Paramount Pictures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가정집에 만든 ‘미니 동물농장’ 화제

    최근 영국의 한 부부가 원숭이, 거북이 등 평범한 동물에서부터 이구아나, 미어캣 등 야생동물까지 갖가지 동물들을 모아 만든 미니 동물원이 눈길을 끌고 있다. 동물학자인 마크 아미(Mark Amey·47)와 양서동물 전문가인 수디 질렛(Siouxsie Gillet·34)부부는 길에 버려졌거나 마땅한 새 동물원을 찾지 못해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동물들을 모아 작은 동물원을 만들었다.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고 있는 이 동물원은 두 사람이 약 9년의 시간을 투자해 만든 것이다. 현재 이 동물원에는 다수의 돼지와 중남미산 명주 원숭이(Marmouset), 이구아나 두 마리, 타란툴라 독거미 여섯 마리, 전갈 서른 마리와 각종 물고기, 가재 등 100여 마리의 동물들이 모여살고 있다. 이들 동물들은 각자의 생활특성에 맞게 제작된 우리에 살고 있으며 독성을 가진 뱀이나 전갈 등은 합법적인 승인을 받은 특수 우리에 안전하게 분리돼 있다. 이들은 각종 동물들, 특히 독성을 가진 동물들이 우리 밖을 벗어나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칠 것을 우려해 매년마다 우리를 새로 점검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질렛은 “이곳에서 자라는 동물들의 모든 것들은 문서로 기록돼 보관한다.”면서 “안전을 위해 경보장치와 CCTV등을 꼼꼼히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이 집을 살 때 좋은 화장실, 아름다운 인테리어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오로지 동물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면서 “버려지고 상처받은 동물들에게 새로운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고 덧붙였다. 남편 아미는 “거실과 욕조 등 집안 곳곳에 우리가 설치돼 있어 집 전체가 작은 미니 동물원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동물들에게도 마음 편히 정착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배꼽축제 아시나요”

    “배꼽축제 아시나요”

    “양구가 국토 정중앙임을 알립니다.” 전창범(사진) 강원 양구군수가 이름이 다소 이색적인 ‘배꼽축제’ 알리기에 바빠졌다. 배꼽이란 양구가 한반도 정중앙이란 뜻에서 따온 이름이다. 전 군수는 30일 “인구 2만 3000명의 전국 최소 자치단체이지만 국토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 관광명소로 가꾸겠다.”고 말했다.‘생명·자연·상생의 중심’을 주제로 처음 열리는 이 축제는 새달 1일부터 9일까지 파로호 상류 습지에 마련된 한반도섬과 종합운동장, 서천변 등에서펼쳐진다. 양구가 국토 중앙임을 알리는 축제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축제가 열리는 ‘한반도섬’은 그 중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최근 전국의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146만㎡에 이르는 파로호 상류의 대규모 습지에 인공으로 4만 2000㎡ 크기의 한반도 모양을 만들었다. 제주도는 물론 울릉도, 독도까지 넣어 관람객들이 직접 돌아 볼 수 있게 했다. 섬안의 산책로를 따라 함경도·경상도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한강·낙동강 등 주요 하천의 물길도 냈다. 전 군수는 “한반도섬에는 주제에 맞는 탄생체험관을 만들어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 조선시대 백자의 원료인 백토를 주제로 한 백토체험관을 만들어 공개한다.”고 말했다. 탄생체험관에서는 거위, 십자매, 닭, 오리 등 조류 17종과 악어, 별거북, 아구아나 등 파충류 10종을 비롯해 포유류, 곤충, 전갈 등 45종의 알이 부화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명성을 떨쳐온 방산 백토를 활용해 각종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한다. 백토찜질방, 백토 마사지, 백토를 활용한 먹거리코너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전 군수는 “배꼽축제의 재미도 즐기고 주변의 박수근미술관, 선사박물관, 방산자기박물관, 천문대, 산양증식복원센터, 을지전망대 등 관광지도 둘러 보며 늦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구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남아공 FBI’ 스콜피온 해체

    일명 ‘스콜피온(Scorpion·전갈)’으로 불리며 성역이 없는 수사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검찰 특별수사부(DOSO)가 결국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영국 BBC와 현지 올아프리카 닷컴이 23일 보도했다. 남아공 국회는 23일 스콜피온 해체에 대한 법안 표결에서 찬성 252 대 반대 63표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DOSO는 경찰 수사조직에 흡수된다. 남아공 상원인 국가지방위원회(NCP)의 표결 절차가 남았지만 NCP 역시 스콜피온 해체를 환영하는 집권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절대 다수여서 가결처리는 문제가 없다.스콜피온은 1999년 남아공판 미국식 연방수사국(FBI)을 표방하며 창설된 검찰총장의 직접 지휘를 받는 엘리트 수사조직이다.특히 지난 3월엔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의 측근인 재키 셀레비 경찰청장을 부패 혐의로 기소해 중도 하차시키는 등 권력 핵심에까지 서슴없이 칼날을 들이댔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Local] 나주 농업박람회 24일 개막

    제7회 대한민국 농업박람회가 24일부터 11월3일까지 전남 나주시 산포면 전남도 농업기술원에서 자연과 인간을 주제로 17개 전시관에서 열린다. 주 전시장인 생명예술관은 녹색세상이, 친환경기술관은 친환경농법이 전시된다. 녹색명품관은 최고품질의 농특산물이, 생명산업관은 약초 향기로 넘쳐난다. 또 누에생태관, 잡초를 활용한 분화류, 식용과 약용버섯, 야생버섯 등이 관람 재미를 더한다. 한방산업 전시체험관에는 희귀 약용곤충 등이 전시되고 박람회 기간에 2008 보완통합의학 프레박람회가 열린다. 약용과 식용이 가능한 전갈·뱀·지렁이 등 144종 487점과 곤충 표본 40여점도 특별전시된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넉달만에 딸낳고 신부가 하는말이…

    넉달만에 딸낳고 신부가 하는말이…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지만 신부가 결혼 넉달만에 멀쩡한 애를 낳고『조산(早産)이라우』. 아무리 손꼽아 봐도 조산치고는 너무나 조산인 까닭에 신랑이 고민끝에 고소를 했는데…. “명문집 딸이라 믿었더니 불륜 낳고도 큰소리쳐요” 결혼 4개월만에 아이를 낳았다하여 아내와 장인을 사기결혼으로 처벌해 달라는 색다른 고소사건. 비록 약혼시절에 그녀를 범한 적은 있지만 그나마 7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고소인은 해병대위 양(梁)모씨(32). 피고소인은 서울에 있는 모국영기업체 고위 간부인 이(李)모씨(48) 와 그의 딸 복희(福姬)여인(24·가명). 지난 15일 광주지검에 고소장을 낸 양대위는『뷸륜의 씨앗을 낳고도 뉘우치기는 커녕 나의 자식이라고 우겨대니 이런 기막힌 노릇이 어디있겠읍니까. 자기네들의 권세만 믿고 우리집안이 보잘것없다 하여 무시하려고 드니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라고 호소. 양대위가 억울하다고 펼쳐놓은 사연을 들어 보면-. 양대위가 복희양과 약혼식을 올린 것은 지난 1월 20일의 일. 목포시 용해동 신부집에서 양가의 어른들과 친지들의 축복속에서였다. 식이 끝난뒤 며칠 쉬었다가라는 신부집 사람들의 권고에 따라 자기쪽 사람들을 먼저 광주의 집으로 돌려 보내고 혼자 쳐졌다. 약혼녀의 집에서는 이날 당장 신방을 꾸며주며 후한 사위대접을 해줬다. 『그날밤 저는 그녀에게 몸을 요구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쳐 실랑이를 벌이며 밤을 밝히고 말았읍니다』다음날 장인은 바쁜일이 있다며 서울로 올라갔다.『빨리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라』는 당부를 장모에게 남기고. 장인이 떠난 그날밤 그러니까 1월 22일밤 처음으로 양대위는 약혼녀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몸을 허락지 않으려면 오늘밤은 따로 따로 자자』는 양대위에 그녀는 아무 대꾸없이 몸을 맡겼다는 것. 『한가지 섭섭한 것은 처녀이면 보여야 한다는 것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처녀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양대위라 그까짓것 별게 아니라고 잊어 버리기로 했다. 양대위가 그녀와 첫선을 본 것은 지난해 12월 23일. 부대에서 연가를 얻어 고향인 광주에 돌아 온 그를 늙으신 어머니가 반가히 맞으며 결혼문제를 꺼냈다. 목포에 살고 있는 고종사촌누이가 오빠를 위해 중매자리를 마련해 놓았다는 연락이 왔으니 가보자는 것이었다. 처녀는 1m 68cm의 헌칠한 키에 얼굴도 빠지지 않아 외모로는 합격점을 준 양대위는 다음날 숙부를 만나 마음을 표시하고 승낙을 얻었다. 장인이 본처와 별거, 서울에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자기로선 과분한 혼처라고 자위했다. 누이의 중매가 이렇게 성공을 보아 두 남녀는 서로 장래를 약속했다. 이젠 단지 서울에 있는 장인될 사람의 승낙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때마침 그날은「크리스머스·이브」.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둘을 축복해 주는 듯 하여 행복에 겨웠었다는 둘은「아베크」끝에 완구점에 들러「마스코트」를 사서 서로 교환도 했다, 그다음 양대위는 서울에 올라가 장인될 사람의 결혼 승낙도 얻고 부대로 돌아왔다. 두사람사이에 몇차례 사랑의 글이 오간 어느날, 처녀에게서 약혼식날을 1월 20일로 정했으니 빨리 와 달라는 기별이 왔다. “매사가 신부측 마음대로 결혼날짜 늦췄다, 당겼다” 『모든게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지는 구나…』기쁨에 넘친 양대위가 이렇게 하여 약혼휴가를 얻은 것이다. 약혼후 귀대한 양대위는 사랑의 편지와 함께 여성잡지를 사 보내는 등 만혼의 정열을 불태웠다. 『그런데 갑작스런 통지가 왔어요』신부집에서 결혼날짜를 일방적으로 2월 24일로 했다는 소식이 아닌가. 아직 마음의 준비도 채 갖추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성급하게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더구나 그때 양대위는 고등군사반입교명령까지 받은 처지였다. 그런데도 양대위는 입교명령을 취소시키고 광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결혼날을 또 3월 28일로 연기했다는게 아닌가. 매사가 신부쪽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런대로 결혼식은 예정대로 성대히 올려졌다. 쏜살같은 행복한 3일동안의 신혼여행을 제주도에서 보내고 돌아온 신혼부부는 신부가 시가식구들의 얼굴을 익히고 가풍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신부만 3개월동안 광주에서 시어머니를 모시도록했다. 양대위는 부대로 돌아가고. 이렇게 떨어진 뒤 1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양대위는 아내의 배가 벌써 눈에 띄게 불룩해진 것을 보고 기쁘기보다 오히려 의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약혼날로 따져보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의심을 몰아냈다. 6월 15일 어머니의 진갑잔치를 치르고 난 뒤 아내를 데리고 부대주둔지로 돌아가 새 살림을 차렸다. 군대생활에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새살림도 장만하고 산모에게 좋다는 약도 사먹이며 아기가 태어날 10월 하순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중 7월30일 양대위가 부대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아내가 위급하니 빨리 집에 오라는 전갈이 경비전화로 왔다. “조산이라 하지만 9개월반 된 정상아래요”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의 옆에 갓난 아기가 나란히 누워 있지 않는가. 『10월 하순 예정이라더니 왠 아이를 벌써 낳았는가』이웃 아낙네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딸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은 광주의 집에서는『누구의 아인지 밝혀 내라고 법석을 떨며 성화였다. 그러나 아내는『며칠전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 튀기는 소리에 놀랐더니 조산을 했다』며 천연덕스러웠다. 해산을 도운 산파도『조산』이라고 일러주고 돌아갔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근거를 알아내어 일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양대위는 산파를 다시 쫓아갔다. 『조산이라곤 하지만 9개월 반 이상이 됐으니 정상아나 다름없어요』산파의 이 말은 양대위의『설마』하던 마음을 끝내 무너뜨리고 말았다 좀 더 과학적인 걸 알아본 결과 이젠 절대『내딸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장인마저 마음대로 하라고 배짱을 내밀고 있습니다. 명문의 딸이라 믿고 장가 들었더니 이게 무슨꼴입니까』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양대위. 이 기막힌 사건이 어떻게 끝맺을지는 두고보야 알일. <광주(光州)=정일성(丁日聲) 기자>[선데이서울 71년 11월 7일호 제4권 44호 통권 제 161호]
  • 4억5000만년 전 ‘게 화석’ 캐나다서 발견

    4억5000만년 전 ‘게 화석’ 캐나다서 발견

    미국 과학 전문사이트 라이브사이언스가 지난 28일 ‘가장 오래된 게 화석이 발견됐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투구게’(horseshoe crab)화석은 캐나다 매니토바(Manitoba)의 북쪽 해안가에서 발견되었다. 투구게는 실제 게 보다는 거미나 전갈에 더 가까우며 머리가슴과 배는 유연한 갑각으로 덮혀져 있다. 화석을 발견한 로열 온타리오박물관의 데이비드 러드킨(David Rudkin)은 “크기는 약 4cm정도로 현재의 50cm보다 매우 작다.”며 “기존의 화석(3억5000만 년 전)보다 약 1억년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발견으로 약 4억5000만 년 전에도 해안가에 게가 살았다는 증거를 찾게 되었다.”며 “이 화석은 다른 동식물 화석에 비해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아 가치가 높다.”고 전했다. 또 ”이것으로 5억년 전과 현재의 해안가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드킨은 “현재 투구게와 과거 화석 간 크기의 차이는 아직 수수께끼이다. 이 문제가 풀리면 해양생태의 진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라이브사이언스(사진 왼쪽은 가장 오래된 게 화석, 오른쪽은 실제 투구게)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新 인디아 리포트] (6) 인도 중산층 가정 탐방

    [新 인디아 리포트] (6) 인도 중산층 가정 탐방

    |방갈로르(인도) 최종찬특파원|기자들을 집으로 초대한 스리니바사 무루티(37) 방갈로르대학 외국어대학원 한국어과 교수는 전형적인 남인도인이었다. 키가 작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드라비디안의 후손이었다. 방갈로르 쿠마아파크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집은 5층 연립주택의 3층에 있었다. 현관문엔 가네시 신의 얼굴이 그려진 상징물과 꽃장식이 걸려 있었다. 거실엔 가죽소파와 양탄자에 수를 놓은 그림, 텔레비전, 물소 뿔조각, 장식장 등이 어우러져 인도 중산층에 걸맞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8개 언어 구사… 한국 이름은 ‘박수인´ 무루티 교수는 언어의 달인이다. 영어, 일본어, 한국어, 힌디어, 델레구, 우르드, 카나라, 우르드어 등 8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무르티의 한국 이름은 박수인. 박은 한국 친구의 성에서, 수는 자기 이름의 첫 자, 인은 인도의 첫 자를 땄다. 그가 한국어과 교수가 된 사연은 이렇다. 방갈로르에서 태어나 방갈로르대학을 나온 그는 1992년 문화체험교류 프로그램으로 일본에서 1년간 유학했다. 도쿄, 나가사키, 홋카이도를 오가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운명의 장난인지 인도에 돌아오기 전 한국에 2주간 머물 기회가 왔다. 사찰과 고궁을 돌아보면서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그가 알고 있었던 한국말은 ‘담배’와 ‘고맙습니다’ 단 두 마디. 인도로 돌아온 그는 이화여대에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1994년 한국으로 다시 건너와 이화여대 외국어학당에서 3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수업이 없는 날엔 아르바이트를 했고 휴일에는 강릉 등 동해안 일대를 여행하며 한국문화를 체험했다. 그는 “일본인은 자기 속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알고 나면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된다.”고 평했다. ●한국어 널리 보급하는 꿈 포기 못해 인도로 돌아온 그는 미국 회사인 오라클에서 2002년부터 3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인도에 한국어를 널리 보급하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이때부터 그는 모교인 방갈로르대학에 한국어과 개설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단과대학장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지난해 9월 남인도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한국어과가 개설되는 성과를 얻었다. 그는 한국어과에 대해 “아직은 수료과정이지만 내년에는 학위과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학기의 수강생은 모두 6명. 이중 3명은 IT업체에 다닌다. 이들이 수업을 듣는 이유에 대해 “한국업체에 전직하려는 사람과 다른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 등 두 부류로 나뉜다.”고 설명한 뒤 “다음 학기엔 수강생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달에 8차례 강의 “수강생 많이 늘었으면…” 그는 지금 일주일에 2차례, 한 달에 8차례 한국어 강의를 한다. 학생들은 신문광고를 통해 모집하며,1년 학비는 2000루피(약 4만 8000원)다. 교재는 이화여대의 허락을 받아 외국어학당의 한국어교재를 사용한다. 하지만 월급이 적어 한국어와 일본어 번역·통역하는 일을 함께한다. 그는 “월급은 적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가르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7명이다. 부인 소유잔야(29)는 전업주부로 그와 같은 카스트 출신이다. 수줍은 미소가 일품이었다. 아들 아슈윈(3)은 엄마를 닮아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아버지 K T 벤카타 랑게고다(76)는 투잡맨이다. 가죽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중풍과 피부질환을 고치는 전통의술도 펼친다. 어머니 G P 락슈미(66)는 전업주부다. 형 자야프라카시(42)는 호주로 건너가 살고 있다. 부동산업자로 성공해 미모의 백인여성과 결혼했다. 형 가족은 몇 년에 한 번씩 고향방문을 한다고 했다. 여동생 스리데비(33)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그녀는 인도 랭킹 3위의 실력을 자랑하는 당구선수다. 롤러스케이트 선수로 출발해 사격 등을 하다가 지금은 당구에 전념하고 있다. 거실 장식장에는 그녀가 탄 각종 메달이 놓여 있다. 그녀는 지난해 10월 당구 국가대표선발전에 출전하려고 집을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스쿠터를 타고 동네 주택가 도로를 빠져 나가려는데 1300㏄ 오토바이가 시속 160㎞로 달려와 받아버리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다. 무루티 교수가 보여준 사고현장 사진 속의 스쿠터는 처참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있어 사고 당시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아직도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 그녀는 식당에 걸려 있는 할아버지 사진을 가리키며 “유명한 의사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연애결혼이 갈수록 늘어간다.”며 “나도 다른 카스트의 여자를 좋아해 결혼하고 싶었는데 여자가 싫어해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여동생은 다른 카스트 출신의 남자와 연애를 통해 내년에 결혼을 한다. ●식당 한편에는 가네시 신을 모시는 기도시설 그가 전세금 80만루피(약 1920만원)를 주고 10년째 살고 있는 집안을 둘러보니 큰 방이 4개나 있었다. 주방에는 온갖 향신료가 가득 차 있었다. 문마다 안전고리와 자물쇠 등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했다. 밤손님들의 방문을 사양하기 위해서다. 식당 한편에는 가네시 신을 모신 기도시설이 있다. 그는 “아침마다 목욕재계한 뒤 향을 피우고 신에게 재앙을 막아주고 재물을 벌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고 말했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라는 전갈이 왔다. 모녀가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치킨 칠리(닭고기 고추볶음), 치킨 티카 마살라(닭고기 매운 양념소스), 치킨 비리야니(닭고기가 들어간 밥), 로티(밀가루빵), 파파드(콩으로 만든 넓적한 빵), 찬나 마살라(콩 양념소스), 그린 샐러드, 삼바르(카레수프) 등 북인도 전통음식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힌디어를 하나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알려줬다.“남자가 말할 때는 메 압코 피아르커르타훙, 여자가 말할 때는 메 압코 피아르커르티훙.” 융숭한 대접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밤이 깊어진 줄 몰랐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작별을 고하니 무루티 아버지까지 손자를 안고 맨발로 버스 타는 곳까지 나와 기자 일행을 배웅했다. 인도 중산층 가정과 인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하루였다.“단냐밧(고맙습니다) 무루티!” siinjc@seoul.co.kr ■ 한국어 수업 참관기 |방갈로르 최종찬특파원|방갈로르대학 외국어대학원 캠퍼스는 초라했다. 맨땅에 콘크리트 건물 한 동만 덩그러니 있었다. 스리니바사 무루티 교수의 일요일 강의가 예정된 2층의 강의실에 올라갔다. 학교 전체가 정전이 돼 한국어 수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 6명 가운데 3명은 지방 출장 때문에 빠지고 3명만 출석했다. 학생들은 “한국어 좋아합니다.”라는 인사말로 기자 일행을 환영했다. 서투른 한국어로 학생들은 돌아가며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를 밝혔다. 셋 중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하는 도요타 직원인 토마스 V J(33)는 “갈비와 김치찌개를 좋아하며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가수 계은숙도 알고 아리랑도 부를 수 있다.”면서 “한국어는 쓰기는 쉬운데 읽기와 발음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인포테크 직원인 라슈리 라오(여·34)는 “통역사가 되고 싶어 한국어를 배운다.”면서 “한국어는 쓰기는 쉽지만 발음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엘앤티(L&T) 직원인 자프라카시 라이르(35)는 “상대적 희소성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고 털어놨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남인도에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한국정부가 한국어 보급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물었다. 한참 대화의 꽃이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불이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들 앞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방식은 이러했다. 무루티 교수가 그날 배울 분량을 큰 소리로 한 번 읽어준 다음 원어민의 발음을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했다. 그리고 나서 한 소절씩 듣고 학생들이 따라 읽게 했다. 수업방식이나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 등 모든 것이 초보수준을 못 벗어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루티 교수와 학생들의 눈빛에서는 고급과정 이상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교실엔 우리 말이 번영의 꽃을 피울 것이다. 바로 옆 교실의 일본어 강좌엔 직장인 20명이 몰렸다. 일본 정부에서 파견해준 일본인 강사가 역시 일본 정부가 지원해준 일본어 교재로 열심히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어 교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2010년까지 최소 10개국어를 가르치는 남인도 최고의 글로벌 랭귀지 센터를 만들고 싶다.”며 한국 대사관의 지원을 요청한 로티 뱅크티시 대학 사무처장의 안경 너머로 무루티 교수와 학생들의 타오르는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siinjc@seoul.co.kr
  • 아버지의 장화 발자국

    아버지의 장화 발자국

    칠흑같이 어두운 겨울밤, ‘삐걱’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잠을 주무시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벌떡 일어나 “이제 오는교?”라며 마중했다. 방문을 열자 눈은 마당을 하얗게 덮었고 아버지의 장화 발자국만 또렷이 남아 있었다. “아이고! 또 넘어졌는교? 괜찮은교?” “실산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길이 안 보이는 바람에 그만….” 아버지의 무릎과 어깨 언저리에는 아직도 눈길에 넘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 눈 올 때는 그냥 맨몸으로 오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디, 다리도 옳지 않은 사람이….”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는 항상 시커먼 얼굴에, 동발 서너 개가 어깨에 실려 있었고 손에는 도시락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당시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가장 친근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고 오신 동발은 막장에서 쓰다 남은 나무토막으로 유일한 우리 집 땔감이었다. 아버지는 막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시는 광부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일을 했다고 하니 30년은 훨씬 넘게 하신 모양이다. 집에서 20리 남짓 떨어진 곳으로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고 야간 일이 돈이 더 된다며 밤을 낮 삼아 일하셨다. 몸이 피곤하고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약 대신 흑설탕을 양은 냄비에 타서 훌훌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어머니가 타주신 흑설탕물을 드셨고 나도 아버지가 드시다 남은 달콤한 설탕물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동지가 지난 이튿날, 밤 10시가 넘었을 무렵 이웃집 아저씨로부터 전갈이 왔다. 아버지는 아직 일이 좀 남아 있어 내일 아침에 퇴근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급히 밤참 도시락을 쌌고 몸이 불편하여 못 가니 나보고 다녀오라고 하셨다. 어두컴컴한 밤, 신작로에는 아직 간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어제 내린 눈이 얼어붙어 발을 옮기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타이어 자국을 뽀드득 뽀드득 밟으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오구니재를 지나 청벽에 다다르자 전봇대 사이로 ‘휘휘’ 하며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소리가 귀신의 휘파람 소리 같아 발걸음을 더듬거리게 했고 절벽에서 간간이 돌이 굴러 떨어질 때면 머리끝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작업장에 도착해보니 모두가 시커먼 얼굴에 똑같은 헬멧을 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삐그덕 삐그덕 레일 소리가 들리더니 석탄을 싣고 나오는 활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너 명이 함께 밀고 있었는데, 다리를 절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분명 아버지였다. 막장에서 무너진 돌에 맞아 다리가 골절되어 늘 절고 다니셨고 눈이라도 오면 곧잘 넘어지셨던 아버지. 그래도 왼쪽이 다쳐 천만다행이라며 하루도 일을 빠지시는 날이 없었다. “아버지!” 부르며 가까이 가자 “추운데 여까지 우에 왔노? 집에 가서 묵으면 되는데. 빨리 가그라” 하며 도시락을 받아 드셨다. 뒤돌아선 아버지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전등불 아래서 시커먼 얼굴로 도시락을 드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난로에 끓여 먹는데 아버지는 한쪽 귀퉁이에서 온기가 가신 찬밥에 김치 몇 조각으로 식사를 하셨다. 내가 볼까 애써 감추려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아 한참 동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날 밤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달그락 달그락 밤길을 걸어오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체구도 키도 작은 우리 아버지, 남을 탓할 줄도 시기할 줄도 모르고 동네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셨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늘 부지런함의 표상이었다. 아버지의 삶의 공간은 우리 동네와 일하던 막장, 읍내 시장이 전부였다.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조사하면 ‘광부’라고 써가는 것이 싫었고, 시커먼 얼굴로 동네 앞을 지나실 때 꼬마들이 돌을 던지며 놀리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이젠 잔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불혹이 넘은 지금, 눈 내리는 겨울밤이 오면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우리 집 대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동발을 한 아름 메고 들어오실 것만 같다. 그 작업장으로 달려가 힘껏 안아보고 싶다. 아버지 팔짱을 끼고 하얀 눈길을 따라 밤새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길을 따라 굽이굽이 새겨진 장화 발자국은 저 눈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2008년 1월
  •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유년기를 보낸 시골마을, 기억나십니까. 포장도로라고는 달랑 신작로뿐,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은 이내 흙먼지 폴폴 나는 흙길로 바뀌지요. 때에 전 옷차림의 개구쟁이들이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타던 마을 고샅길이며, 아버지 읍내 나가시던 둑방길이 그랬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 본 고려 500년 도읍지 개성의 풍경이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남바위 비슷한 털모자를 쓴 아낙네가 물을 길어 등지게에 지고 나릅니다. 선죽교 부근의 냇가에서는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여인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버스가 마을을 지날 때 제법 용감한 개구쟁이는 언덕 위에서 늠름하게 폼을 잡고 손을 흔드는 반면, 수줍음 많은 녀석은 담장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손짓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세계가 교차하는 듯한 풍경이었지만, 참 정겨웠습니다. 버스를 함께 탔던 관광객 누구에게서도 잘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상대적 우월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금강산 일대가 처음 개방됐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들의 표정도 놀라울 만큼 변했습니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마다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었지만, 주민들이 예전처럼 외면하거나 심지어 등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웃고 손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전혀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었지요. 박연폭포, 선죽교 등 고도(古都) 개성의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주민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개성에서의 체류 8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그 사이엔 이념과 체제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요.60년 세월을 에둘러 돌아왔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훔쳐보는 묘한 즐거움도 각별했고요. 시간대별로 개성관광의 묘미를 소개해봅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흔히 출입국사무소로 알고 있지만, 서로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 말자는 뜻에서 ‘국’자를 뺐다)에서 개성관광증을 받는 등 수속을 마친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5분 정도 달린 버스가 개성표시판을 지날 즈음 전신주 가운데 테두리 색깔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다. 북한 지역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버스 행렬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북한군 지프차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쯤이다. 경계근무를 서는 앳된 얼굴의 북한군 병사 몇 명을 지나면 곧바로 북측 출입사무소. 간단하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버스에 동승한 북한 안내원 2명과 함께 개성으로 향했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낯익은 남측의 풍경이 이어진다. 공장 건물 사이로 24시간 편의점도 있고,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버스가 출근길의 북한 근로자들을 실어 나른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 15분쯤 경의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면 개성의 초입 송남동에 닿는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였다는 약대다리가 있는 곳이다. 개성 주민들에게는 ‘야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개성에서 경의선 열차가 매일 한차례 와닿는 봉동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야다리를 건너야 한다. 송남동을 지날 무렵, 느닷없이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장차 서울과 평양을 연결할 고속도로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개성과 평양을 오가는 데 이용된다. 고기남새, 세거리 사진관, 리발관 등 개성시내 건물에 내걸린 간판들이 마치 1960∼7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슬그머니 사진을 찍고도 싶었지만, 안내원의 경고대로 ‘피곤한 여행’이 될 듯해 꾹 참고 말았다. 시내는 거의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주민들의 옷이며, 건물들이 검고 어두운 색깔 일색이다. 거기에 낮게 깔린 안개까지 더해지며 무채색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간밤에 무척이나 추웠던 듯, 주민들 대부분이 두툼한 옷차림이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동여맨 여인네의 얼굴이 시선을 붙잡았다. 차가운 날씨 탓에 볼에서 귀밑머리에 이르도록 빠알갛게 얼어 있다. 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40분 남짓 소요된다. 개성시 외곽의 고갯길에 서면 개성을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만삭이 된 여인이 두 팔 벌려 개성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란다. 그래서 개성 시민들은 송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고려 왕조에 정기를 불어넣어 주던 송악산의 여신을 임신시켰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개성시내를 벗어나자 처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산자락이 겹겹이 다가섰다. 나긋나긋한 느낌, 박연폭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산세가 우람해지기 시작했다. 고봉준령은 아니지만 바위산답게 흰 눈을 이고 선 모습이 당당하다. 길도 제법 험하다. 좌우로 휘어지는 모양새가 설악산 한계령에는 못 미쳐도, 속리산 말티재에는 버금갈 듯하다. 마침내 박연폭포 앞에 섰다.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히는 곳. 북측에선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해 놓았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38m 높이 암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겨울이라 가늘어지긴 했지만, 금강의 구룡폭포와 설악의 대승폭포 등과 더불어 국내 3대폭포를 이룰 만한 자태다. 이쯤에서 관광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래전 박연폭포를 찾은 기생 황진이는 폭포 아래 고모담에 훌쩍 뛰어들어 목욕을 즐깁니다. 목욕을 마친 황진이는 폭포 바로 옆 룡바위에 올라 젖은 머리에 먹물을 묻혀 초서체로 시 한 수를 적습니다.‘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 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란 내용이지요.1957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김일성 주석께서 그 문장을 ‘날아흘러 곧추 아래로 떨어진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안내원은 또 “황진이가 적은 글씨를 곧바로 도공들이 새겨 오늘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연폭포의 전경을 감상하기에는 고모담 오른쪽의 범사정이 으뜸이다.‘박연폭포가 안개 위에 떠있는 듯하다’는 뜻의 정자. 범사정에 앉아 쉼을 청한 이옥임(81·하남시)할머니의 눈가에도 옅은 물방울이 괸다.“70년 전 개성에서 소학교 다닐 때 걸어서 소풍왔던 곳이야. 아침나절 개성을 출발하면 저녁 무렵 도착하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구경한 다음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지.” 범사정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고려때 개성 방위를 위해 천마산과 성거산 등의 봉우리를 따라 쌓은 석성이다. 황진이의 연인 서경덕도 산성 동쪽 성거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성 왼쪽의 박연(朴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박연폭포란 이름의 유래가 된 못이다. 폭포 위쪽에 있다. 박씨 성 가진 사람이 폭포 앞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모담(姑母潭)은 아들이 용녀를 따라 죽자 그의 어머니가 몸을 던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흥산성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관음사에 닿는다.970년 조성된 사찰. 작고 화려한 대웅전의 뒷문 장식에 슬픈 전설이 숨어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관음사 조성공사에 동원된 조각 신동 운나(당시 11세)는 뒷문 장식물 조각에 열중하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는다. 곧바로 하산하려 했으나,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 공사 관리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왼손잡이였던 운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도끼로 자신의 왼팔을 자른다. 결국 뒷문 왼쪽은 완성됐지만, 오른쪽은 미완으로 남게된 것. 그는 왼쪽문에 왼팔이 잘린 자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박연폭포를 출발한 버스는 50분쯤 걸려 개성시내 중심부의 통일관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개성 시내와 개성 남대문, 뒤로는 자남산과 김일성 동상이 펼쳐져 있다. 낡은 벤츠 승용차 뒷좌석의 흰 드레스 입은 신부, 파란색 복장의 교통보안원, 삼삼오오 걸어가는 주민 등 모두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관광객들을 관찰하고 있다. 시간이 느린 화면처럼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다.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겨우 수m 쯤. 하지만 말을 걸 수도, 더더욱 손을 잡을 수도 없다. 통일관의 자랑은 닭곰탕과 장지단(계란조림), 이면수 조림 등으로 구성된 ‘개성 13첩 반상기’. 쌀밥에 13가지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개성지역 토속요리다. 여기에 입에 불이 날 만큼 독한 송학소주가 곁들여진다. 개성시 문화회관 뒤편의 숭양서원은 정몽주와 서경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정몽주의 생가터에 지어졌다. 입구 알림판에 따르면 ‘특별한 장식없이 간소하게 지었으나 이 곳 지형조건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크고 작은 집들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조화시킨 우수한 건축물’이다. 정몽주의 영정과 저잣거리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한 친구 우현보, 서경덕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선죽교앞에 섰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당한 곳으로 너비 2.54m, 길이 6.67m의 자그마한 돌다리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인공수로가 물길을 대신하기 이전엔 송악산에서 발원한 로계천이 선죽교 아래를 흐르고 있었다. 선죽교를 지난 로계천은 사천강, 예성강 등과 차례로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갔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것을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돋았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두 개인데, 난간이 있는 멋진 다리가 진짜다. 1780년 이곳에 부임한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선조할아버지의 피가 묻은 곳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다니자 원래 다리에 난간을 만들고 그 옆에 새 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진다.‘문제의’ 핏자국은 화강암의 철분이 산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개성 출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비석 맞은 편에 두 채의 비각이 서있다. 하나는 변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만난 친구 성여완의 것이고, 또 하나는 피습을 눈치챈 정몽주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하인 김경조의 것이다. 선죽교 건너편에는 표충비가 있다. 거북이 두 마리가 정몽주 충정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고 섰는데, 각 각 조선의 21대,26대 임금이 만들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박물관. 성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992년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창설됐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한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17세기 초에 개축했다. 노거수(老巨樹)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넓은 뜰에 심어진 1000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국보로 지정된 곳인데도 건물 내부를 들고 남이 자유롭다. 성균관 내 4개의 전시관에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 1000여점의 고려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헌화사 7층탑 등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개성을 빠져 나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전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숫자다. 때는 이미 땅거미지는 시간. 전력이 부족한 마당에 어두컴컴해 진 건물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을 게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보일 듯 말 듯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개성 시내 한 쪽을 가로지르는 경의선 철길 위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기차가 자주 지나지 않으니 무서워할 것도 없을 터. 어른들도 무시로 지나다닌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던가. 등돌리고 있었던 겨레가 금강산과 개성 등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서히 간극을 좁히려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열매를 거둘 날도 머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글·사진 개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가는 길 :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오전 6시 전후 서울 계동, 광화문 등에서 출발한다.5000원. 자가용의 경우 임진각까지 간 다음, 임진각에서 셔틀버스(6시40분∼7시20분 운행)로 출입사무소까지 가면 된다. 예약은 현대아산의 개성관광 홈페이지(www.ikaesong.com)에 링크된 전국의 개성관광대리점에서 할 수 있다. 현대아산 02)3669-3000, 도라산사무소 031)954-3940,950-5195.1일관광 요금은 18만원이다. ▲신분증 : 현지에서의 신분증은 개성관광증이 대신한다. 관광증 발급에는 여권 사진 2장이 필요하다.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 국내 출국 수속을 위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중 하나는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화폐 : 개성에서는 미국 달러 외 원화나 카드 등을 사용할 수 없다. 출발 전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개성 북측 출입사무소 출구에서도 환전할 수는 있다. ▲휴대 금지 물품 : 필름 카메라는 반입 금지. 디지털 카메라는 허용되지만 초점거리 160㎜ 미만 렌즈, 광학 기준 24배줌 미만일 경우만 가능하다. 남측의 신문·잡지, 휴대전화(배터리 등 관련 용품 포함),MP3와 GPS, 내비게이션, 소형 라디오, 녹음기 역시 반입금지. 해당 물품은 현대 아산측이 보관, 관광 후 돌려준다. ▲국내 반입금지 물품 : 북측에서 구입한 뱀술, 령정술 등 동물을 재료로 만든 주류와 비아그라·우표·불온 서적 등은 들여올 수 없다. ▲남측출입사무소 1층에 설렁탕 등 간단한 아침 식사를 파는 매점이 마련돼 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과 상의하지 않을 경우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며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자리는 반역자 토벌을 논의하는 자리지 군대 해산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귀의 주장을 일축했다. 유흥치의 반란을 응징하겠다는 인조의 결의는 확고해 보였다. ●인조의 토벌 강박증 이귀는 다시 ‘훈련도 안 된 병력을 하루아침에 멀리 보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인조는 ‘병조판서가 그렇게 말하면 병사들의 맥이 풀린다.’며 계속 반대할 경우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군법으로 처벌하려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며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충고를 받아달라고 촉구했다. 이귀가 ‘죽음’ 운운하자 인조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를 파해버렸다. 1630년 4월27일에도 인조와 신료들 사이의 갑론을박은 지속되었다. 이정구(李廷龜)는 먼저 황제에게 주문(奏聞)한 뒤 성지(聖旨)를 받들어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배반한 적은 누구나 토벌할 수 있는 것이라며 명 조정에서 회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인조가 워낙 강하게 나오자 신료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끼리 비변사(備邊司)에 모여 회의할 때는 출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던 신료들도 인조 면전에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최명길은 ‘비변사에 있을 때는 반대하다가 주상 앞에서는 순종하기에만 급급하니 신하의 도리가 어디로 갔냐.’며 이서와 정충신의 태도를 비판했다. 인조는 토벌에 관한 한 강박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맹세코 이 적을 섬멸하여 황은에 보답하고 싶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나라고 좋아서 하겠는가?”라며 신료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김류는, 출정 날짜가 다가오는데 논의가 계속 분분하면 장수들이 동요할 것이라며 성사를 기약하려면 군법을 엄격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류가 자신에게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자 인조 또한 “의심을 품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4월28일, 이귀는 인조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혹시라도 불리할 경우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할 것이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이어 홍문관과 양사(兩司)의 신료들이 나서 출정 명령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향후 망령되이 반대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곧 이어 출정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갑주(甲胄)와 궁시(弓矢)를 하사했다. 그럼에도 병조판서 이귀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인조는 그를 파직시켰다. ●토벌군의 출정과 상황의 변화 비변사는 병선 열 다섯 척을 징발하여 격졸(格卒)과 군량 등을 싣고 5월15일 이전까지 강화도 교동(喬桐) 앞 바다에 대기하도록 조처했다.4월29일에는 정벌에 즈음하여 가도의 중국인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이 만들어졌다. “지금 역신(逆臣) 유흥치는 스스로 사사로운 불화를 조성하여 가슴에 음모를 품고 승냥이나 이리 같은 흉악한 세력을 끼고 벌이나 전갈처럼 독기를 뿜어대었다. 붙잡혀 온 달족( 族-후금 투항자)들을 불러모아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을 멋대로 해쳤는가 하면 통판(通判) 등과 각부(各部)에서 파견한 관리도 아울러 죽여 반역의 기운이 하늘에 닿았다.(중략) 이에 우리 전하가 한 번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본관이 나라의 명을 삼가 받들어 삼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서에서 동시에 포위하려 하는데, 의기에 격동되어 사기가 저절로 배나 치솟고 있으니, 탄환(彈丸)만 한 너희 일개 섬이 어떻게 빠져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반역의 변고가 호로(胡虜)보다 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유흥치를 묶어 군문 앞으로 끌고 오라.” 반란을 일으킨 유흥치 일당에 대한 토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선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4일 인조는 도승지를 서쪽 교외로 보내, 가도를 향해 출정하는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의 장도(壯途)를 축원하는 송별식을 열어 주도록 했다. 이서는 어영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감사 이여황(李如璜), 병사(兵使) 신경인(申景)과 함께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나아가 주둔했다. 부원수 정충신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수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은율(殷栗)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이렇게 가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유흥치가 전함 49척을 이끌고 가도를 떠나 등주(登州)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평안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당황했다. 토벌의 1차 대상인 유흥치가 섬을 비웠기 때문이다. 김시양은, 유흥치가 없는 이상 가도로 진격하여 그의 심복들을 사로잡고 창고를 봉한 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자고 했다. 총융사 이서는, 소굴이 비었으니 가도 공격이 무익해졌다며 아군의 대선(大船)을 숨기고 선봉을 접근시켜 유흥치를 유인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했다. 유흥치가 섬을 비우는 바람에 조선의 정벌은 자칫하면 ‘싸움을 위한 싸움’,‘공격을 위한 공격’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먼저 가도 사정을 철저히 정탐하라고 촉구했다. 유흥치가 병력을 이끌고 섬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명 본토를 공격할 것인지, 후금에 투항할 것인지, 요동 반도 연안의 여러 섬들을 노략질할 것인지, 명의 아문으로 가서 귀순할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류 또한 공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토벌 분위기가 바뀔 조짐을 보이자 인조가 다시 선을 그었다. 그는 ‘유흥치가 우리의 공격 기미를 눈치채고 일단 섬들 사이로 피했다가 우리의 자세가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가도로 들어가 그 심복들을 죽인 뒤 병력을 선천과 철산 사이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또 이서에게도 밀서를 보내 섬을 반드시 토벌하고 항복한 달족들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가도에 대한 공격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던 6월, 후금 사신 일행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이 여전히 가도에 쌀을 공급하고 있다고 힐책하고, 과거 자신들이 무역했던 청포(靑布)를 유흥치에게 빼앗겼다며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실제 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에서는 후금군 3000명이 청포를 내놓으라고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가도 정벌에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가도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벌을 그만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졌다. 토벌군 병력들은 한창 더운 여름철에 무작정 해상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원성이 터져나왔다. 1630년 6월28일, 부원수 정충신은 조정에 보낸 장계에서 군사를 파하라고 촉구했다. 일선 지휘관으로부터 파병(罷兵) 의견이 제시되자 비변사 신료들은 속히 정벌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오직 김류만이 토벌을 중지하는 데 반대했다. 인조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을 때 최명길이 나섰다. 그는 ‘해상에서 노숙하느라 지쳐 쓰러진 병사들이 많은데 장수들은 그들이 도망갈까 염려하여 상륙을 금지하고 있다.’며 현지 상황을 전했다. 놀란 인조는 결국 수군만 남기고 육군은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가도 정벌 시도가 결국 유야무야 되는 순간이었다. 나라 안팎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전후의 맥락을 제대로 헤아려 보지 않고 내렸던 인조의 ‘결단’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세계최대 바다전갈 발톱화석 발견

    ‘발톱길이만 46㎝, 몸길이는 2.5m…’ 세계 최대의 바다전갈(그래픽) 발톱화석이 발견됐다.21일 AFP에 따르면 독일 서부 국경 도시인 프륌의 채석장에서 발견된 바다전갈의 46㎝ 크기 발톱 화석을 분석한 결과 전체 몸길이가 2.5m 안팎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먹이를 붙잡아 턱으로 가져가는 기능을 했던 집게발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는 이보다 0.5m는 더 길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절지동물(마디동물)에는 곤충과 거미, 갑각류 등이 속한다. 영국 브리스톨 대학 지구과학부의 사이먼 브래디는 “이 바다전갈은 집게발을 제외하고도 최대 절지동물보다 거의 0.5m나 더 크다.”고 말했다. 바다전갈은 지금부터 4억 6000만∼2억 5500만년 전에 번성했다. 김성수기자sskim@seoul.co.kr
  • 사람보다 큰 ‘수퍼 전갈’ 실제로 존재했다

    사람보다 큰 ‘수퍼 전갈’ 실제로 존재했다

    사람을 공격하는 엄청난 크기의 전갈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괴물체다. 그러나 최근 사람보다 2배나 큰 전갈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이론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있다. 영국 브리스톨 대학(Bristol University)의 사이먼 브래디(Simon Braddy)지구과학교수는 “독일 라인지역 팔라틴(Rhineland Palatinate)의 채석장에서 46cm크기의 집게발 조각이 묻힌 돌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금까지 같은 종에서 발견된 것들 중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가재의 집게발이다. 이 집게발이 달린 ‘수퍼 전갈’은 고생대 시기인 3억 9천만년 전에 존재했으며 높이 약 2.4m·무게 약 180kg의 몸크기를 가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퍼 전갈은 철갑을 두른듯 딱딱한 외피로 덮여 있으며 먹이사슬의 가장 맨 윗단계에 위치해 물고기와 삼엽충 또는 같은 종을 잡아먹은 것으로 분석된다. 브래디 박사는 “이번 수퍼 전갈의 집게 발견은 정말로 놀랍다.”며 “이는 수퍼 전갈이 존재한 시대의 거미와 곤충들이 거대했음을 충분히 뒷받침하고있다.”고 발견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수퍼 전갈의 집게발은 상당히 강력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골격이 내부에 있어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척추동물과 달리 수퍼 전갈은 딱딱한 껍질이 외부와 계속 충돌했기 때문에 일정 크기 이상 커질 수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사진=영화 ‘타이탄 족의 멸망’(Clash Of The Titans)의 한 장면·브리스톨 대학교 홈페이지 서울신문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강화의 연등국제선원(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85-1)은 한국불교에 귀의한 외국인 스님들이 모여 사는 특이한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 다른 선방과 고향을 찾아 잠시 떠나 두 명만이 선원을 지키고 있지만 평소엔 10여명의 외국인 스님이 각자 소임을 맡아 절집 살림을 꾸리고 수행에 매진하는 이색공간. 이곳에 가면 외국인 템플스테이며 일반인 참선을 지도하느라 늘상 분주하게 움직이는 눈 푸른 스님이 단연 눈에 띈다. 한국 불교계의 웬만한 스님들이 다 이름을 알 정도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러시아 출신 지도법사 일조(日照·34·본명 표트르 가브릴렌코) 스님. 한국에 출가한 외국인 스님 가운데 ‘어렵다 못해 혹독하다.’는 서슬 퍼런 강원과 율원 과정을 가장 먼저 마치고 비구계를 받은 푸른 눈의 납자(衲子)이다. “한국불교를 제대로 배우자.”며 한국으로 출가해 이젠 여느 한국인 스님과 다를 바 없이 ‘한국 스님’이 다 된 일조 스님. 그에게 한국은 배움의 땅이자 소신의 실천처이다. 일조 스님은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이 통과하는 러시아 중남부 도시 케메로보에서 태어난 옛소련 출신. 직장을 옮기게 된 아버지를 따라 중앙아시아 북부 키르기스스탄으로 4살 때 이주해 살아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이중국적자 신원이다. 비록 국적은 한국이 아니지만 1998년 한국불교에 귀의한 뒤 9년간 줄곧 한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살아온 자칭 타칭 ‘한국인’이다. 한국에 사는 뭇 외국인들처럼 일조 스님, 아니 표트르도 한국과는 참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불제자의 길을 걷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16살 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종교서적이 한국과 맺은 인연의 시작이다. 러시아인이 쓴 ‘무신론자’란 제목의 일종의 종교 사전이자 종교 비방서. 옛소련 종교를 탄압하던 시절 발간되어 기독교를 비롯해 불교, 도교, 유교 등 모든 종교를 짤막짤막하게 개괄한 책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님은 책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 부분을 읽고 ‘큰 발견’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독실한 정교회 신자이며 자신 역시 정교회의 의식을 따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침수세례를 받았다는 일조 스님. 그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는 중생의 성격과 신분 차를 짓는 근본 원인이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책 ‘무신론자’중 ‘과거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난다.’는 구절에 마치 큰 숙제를 푼 것만 같아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세상의 어느 가르침과 교훈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나 할까. 일반인이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이른바 윤회의 ‘업(業)’에 신경을 이었으니 분명 예사 사람은 아니다. 그 이후로 늘상 불교와 ‘업’을 머릿속에 넣고 살다가 일종의 예비대학을 졸업하고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지역 군(軍)에 입대해 소위로 군 생활을 하던 중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지역 신문에서 비슈케크에 한국 사찰 ‘보리사’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치 오래 기다렸던 그 누군가를 만난 듯 설다고 한다.1992년의 일이다. 당시 보리사 개원식에 참석한 은사 원명(2003년 입적) 스님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학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근무한 때문에 병영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6년간 보리사를 다니며 일요일 법회에 꼬박꼬박 참석한 것은 물론 평일에도 가끔씩 찾아 법문을 듣고 절집 일도 돕고 참선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보리사는 고려인과 현지인 30명 정도가 법회에 참석할 만큼 보잘것없는 포교원.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언어 소통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조금이나마 한국불교에 더 다가가기 위해 비슈케크 인문대학에 입학해 아시아역사와 한국어, 한문을 파고들었다.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쳤는데 한국의 원명 스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머물 곳이 있으니 강화 연등선원으로 오라는 전갈이었지요.” 모든 것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연등선원으로 들어왔다.1998년 연등국제선원이 막 개원했을 때의 일이다. 연등국제선원은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인 원명 스님이 서울 안국동에서 외국인 대상의 포교원격으로 운영하던 국제불교회관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선원. 현 선원장 겸 주지 원유 스님은 원명 스님의 맏상좌이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한국인 스님이다. “처음 연등선원에 왔을 때 체코 스님과 한국인 스님 한분을 빼곤 도무지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어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서울 만큼 갇힌 상태에서 행자생활을 했지요. 그러던 중 선원을 찾은 한 스님의 ‘공부 제대로 하려면 송광사로 가라.’는 말에 솔깃한 것이지요.” 행자생활 1년을 마치고 절집 살림을 꾸리는 원주 소임 1년째였다.“한국 스님들과 몸을 부대끼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란 생각에 송광사 강원으로 가기 위해 봇짐을 쌌다. 함께 수행하던 스님들이 “틀림없이 중도에 포기할 것”이라며 “못 견디면 언제든지 연등선원으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봇짐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강원 공부는 한국인 스님들도 절반가량이 도중에 포기할 만큼 어려운 과정. 일조 스님과 함께 공부를 시작한 한국인 동기 스님 37명 가운데 16명만 졸업을 했다고 한다. 이를 악물고 치문, 사집, 사교, 대교의 4년과정을 견뎌냈다. 한국어가 서툰 데다 생활방식도 다르고 선배들이 너무 무서워 눈칫밥을 먹고 잠 자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도 수행의 연속이었다. 하루 다섯 시간 잠을 자지만 선배들에게 불려가 밤새도록 엄한 참회(일종의 단체기합)를 받거나 절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날도 부지기수. 가장 낮은 과정인 치문 때는 화장실 청소며 밥짓기 같은 힘든 소임도 도맡아야 했다. 강원을 졸업한 2004년 마침내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됐지만 내쳐 송광사 율원에 들어 2년간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이곳 연등선원에서 뜻을 펴고 있다. “나는 대수롭게 인터뷰할 사람이 못된다.”며 묵묵히 차를 따르던 스님이 은사 스님의 유언을 불쑥 꺼낸다.“세상 만사 모두 헛되니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라.” 한참 공부에 빠져 있던 송광사 강원 학승시절, 병중의 원명 스님이 마지막 대면에서 남긴 한마디는 거역할 수 없는 생활의 처음이자 끝이 되어 있는 듯했다.“인생에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인데 나는 큰 스승을 만났으니 선택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많은 불교 가운데 한국불교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중국불교는 원 속성을 잃은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일본불교는 정통의 수행방식에서 비켜났지요. 티베트 불교가 밀교성격의 복잡한 의식에 치우쳤다면 남방의 소승불교는 보살사상이 빠졌습니다.” 오랜 공부 때문일까 스님의 입에선 온갖 불교의 속성들이 술술 풀어진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존중하는 ‘중생’개념과 내가 아닌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산다는 ‘보살사상’이야말로 대승 한국불교의 핵을 이루는 백미가 아니냐고 묻는다. 무릇 불가에 귀의한 모든 중생들의 귀착점은 ‘아누다라 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일 터.‘더 이상 갈 곳 없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향한 수행이야말로 일조 스님에게도 예외없이 가장 큰 목표일 것이다. 그런 스님에게 지금 할 일이 너무 많다. “‘보살행’의 큰 가르침을 오롯이 담은 한국불교의 제 가치를 만방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큰 업(業)입니다.” 그래서 안거(案居)가 아닌 산철엔 틈날 때마다 러시아며 우크라이나 등지의 한국 사찰을 돌며 참선지도와 법회를 이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틈틈이 전통의 한국불교 수업기관인 강원·율원 등의 교육시스템 안내 책자 짓기와 번역작업에도 매달린다. “죽을 날을 생각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생일수록 속된 것들과의 반연(攀緣·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는 일조 스님.“부처님이 되는 성불(成佛)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버려가는 과정인데 아직도 이렇게 버릴 것이 많으니 부처님 되기엔 아직 멀었다.”며 선원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두 손을 모았다. 강화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일조 스님은 ●1973년 옛소련 케메로보 출생. ●1977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이주. ●1992∼1997년 비슈케크 한국사찰 보리사 신도로 활동. ●1998년 한국행,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출가. ●2000년부터 4년간 송광사 강원생활. ●2004년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2004년부터 2년간 송광사 율원생활. ●2006년 송광사 율원 졸업 및 러시아 등지 만행. ●현재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선원장 원유 스님을 도와 내외국인 상대로 참선지도 중.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 한국정교회 소티리오스 대주교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 한국정교회 소티리오스 대주교

    국내에선 존재감을 잘 알 수 없는 한국정교회. 일반인에겐 러시아정교회와 그리스정교회와는 어떻게 다른지, 그 구별조차 어려운 소수종교다. 서울 마포경찰서 건너편 아현동 언덕배기에 둥근 돔 지붕을 인 채 앉은 자그마한 성당. 이곳에 가면 생소한 정교회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정교회의 요람이자, 대주교가 살고 있어 주교좌성당으로 불리는 성니콜라스 대성당. 이 성당을 비롯해 전국 7개의 성당과 수도원을 이끌고 있는 소티리오스 트람바스(78) 대주교는 바로 한국정교회의 핵이다. 그리스 북서쪽, 그러니까 알바니아에 가까운 인구 4만명의 작은 도시 아르타 태생.33년간 한국에 살며 혼과 몸을 바친 이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한국은 ‘각별한 무엇’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이런저런 인연의 끈에 얽혀 좋든 싫든 한국땅에 몸을 담아 살아 간다.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그 인연의 끈은 이 땅에 사는 이방인들을 아옹다옹 옥죄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끈을 스스로 원하고 택해 살아가는 종교인에게 한국은 훨씬 더 의미있고 자유로운 땅이 아닐까.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한국이 좋아서, 아니 한국인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한국을 선택한 독특한 이방인이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희고 긴 수염과 검은 사제복 차림이 묘한 성스러움을 풍기는 노 사제. 성니콜라스 대성당을 찾는 모든 이들에겐 언제나 푸근한 집주인이자 맘씨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한 친구로 서있다. 오렌지가 아주 많이 나는 지방 아르타에서 어릴 적부터 오렌지를 키우고 내다 파는 집안 일을 도우며 자랐던 소티리오스 대주교. 그를 한국으로 오게 한 질긴 끈은 과연 무엇일까. 아르타는 비잔틴 시기의 성당이며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있어 종교 색이 아주 짙은 도시다.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어릴 적 살던 마을에도 크고 작은 성당과 수도원들이 적지 않았다. 집에서 50m도 채 안되는 곳에 대교구청 주교좌성당이 있었고 성당 사제들이 가끔씩 집에 와서 잠도 자고 했으니 그에게 신앙은 어릴 적부터 생활의 큰 부분이었을 것이다. 몸 속에 어쩔 수 없는 사제의 피가 흘렀을까. 고교에 진학해 의사의 꿈을 키워가던 중 성찬예배 때 ‘설교만 전문으로 도맡는 성직자는 어떨까.’하는 생각을 우연히 갖게 됐다. 결국 아테네대학 신학부를 나왔고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 덕에 장교로 군복무하던 시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군생활은 1951년 아테네대학을 나온 뒤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에서 2년6개월여를 했다. 물론 군인들 대상의 강론자, 즉 준 사제의 임무였다. 한국전쟁의 상황이 급박했던 터라 자신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인들이 당시 라디오방송에 귀기울이곤 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탓에 심한 홍역을 앓았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국에 가서 피를 흘리던 상황에서 당연히 한국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지나고 생각하니 관심의 이유가 전쟁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급박한 전쟁상황이 안타까웠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은 그에게 그리 각별한 대상이 아니었다. 사제서품을 받고 아테네 대주교좌성당 주임사제와 아테네 성모보호성당 주임사제를 맡아 비교적 높은 자리에 있던 1975년. 한국은 이미 기억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행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그리스 종군 사제 앞으로 서울 한국정교회의 한 교인이 보내온 사진 한 장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1973년 6개월간 한국에서 사목하다 귀국한 신부의 손에 날아든 사진은 지금의 아현동 성니콜라스 대성당 앞에 한복차림으로 나란히 선채 찍은 초라한 행색의 아이들 모습.“제발 한국에 정교회 사제를 보내 달라.”는 간절한 사연이 담긴 사진을 보고는 “두 사제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국에 보내 달라.”는 간청을 주저없이 주교회의에 냈다. 그리스를 떠나 아현동 성당에 도착한 게 몹시도 추웠던 1975년 12월의 첫 날이었다. 당시 교인이래야 50여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게 고작. 그 가운데 20여명이 조금씩 내는 주일헌금을 다 모아야 1700원을 넘지 않았으니 전기요금과 공과금 내기도 버거웠다. “한국에 와보니 달랑 아현동 성당건물 하나뿐, 잠 잘 곳도 없었어요. 인근의 허름한 아파트를 전전하다 성당에 사제관이랍시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게 1979년이었지요.” 한국 땅을 밟은 지 4년 만이었다. 어려운 건 교회 살림살이뿐만이 아니었다. 변변하게 출판된 예배서며 성가집 하나 없어 손으로 일일이 그려 써야 했다. 그리스에 눈물겨운 사진을 보냈던 바로 그 교인이 번역·통역을 도와 큰 힘이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정교회 사제로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고 한다. 곁에서 한국어로 연도며 복음을 전하던 한국 사제가 1977년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 혼자 남았을 때는 정말 앞길이 막막했다. 고향을 떠날 때 “몸이 약해 석달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며 수군대던 가족·지인들의 얼굴들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한국 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후 인천, 부산, 전주, 춘천, 울산, 양구 등 6곳의 성당을 번듯하게 가꿔 놓았다. 용미리엔 교회묘지 겸 부활성당을 조성했고 가평 수도원도 문을 열었다. 1982년 아현동 성당의, 지금 기숙사 건물에서 시작한 성니콜라스 신학원은 세계의 정교회가 인정하는 큰 업적. 아시아지역 정교회의 중심 격 교육기관으로 1999년 일단 문을 닫을 때까지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정교회 신학자를 숱하게 배출한 아시아 신학요람이다. 이 신학원을 거쳐간 한국인 사제 세명은 지금도 서울과 전주에서 사목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 신학원은 다시 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신학대학의 한국분교다. 그리스 교육부 승인을 받으면 한국 수도원에 학교건물과 기숙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 한국정교회가 자치구로 독립한 것은 지금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2004년의 일. 그때까지만 해도 뉴질랜드 대관구에 소속되어 교회의 대소사를 뉴질랜드 대관구를 통해 그리스 총대교구청과 소통해야만 했다. 성당이 잇따라 세워지고 교인이 늘면서 독립 관구의 위상을 얻을 수 있게까지 되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소티리오스 총대주교가 있다. 하지만 정작 총대주교는 덤덤하다.“하느님의 자연스러운 은총이지요.” 이런저런 이유 때문인지 2000년 어느 날 서울시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명예서울시민권을 준다는 전갈이었다. 다른 6명의 외국인과 함께 시청 앞에서 당시 고건 시장으로부터 시민권을 받았는데 “내가 가장 한국에 오래 산 외국인인 줄만 알았는데 더 오래 산 이방인이 많아 깜짝 놀랐다.”며 웃는다. 한국을 떠나온 뒤로 1∼2년에 한 번꼴로 그리스를 찾았지만 정작 고향 아르타엔 거의 들르지 못한다. 이젠 아현동 성당에 들어와야 마음도 몸도 편하단다. 아현동 성당이 ‘고향보다 더 편한’ 내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용미리 묘지엔 자신이 나중에 안식할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병원에 입원한 교인의 병문안이며 영결식장을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 곁을 지켜주 는 노 사제. 지금 한국엔 그리스와 러시아 출신 사제가 각 1명씩 있지만 신자들에겐 아무래도 소티리오스 총대주교의 이름이 가장 친숙하다. 한국의 교인들을 숱하게 접했지만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종교간 분쟁 없는 평화로운 공존이다. 한 정교회 교인의 집에 초청받아 갔을 때의 일이다. 가족들이 각자 소개를 하는데 아들은 정교회, 남편은 개신교,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였다. 외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종교 천국’이 바로 한국임을 그 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시청 앞에서 아현동 성당행 버스를 기다리던 중 “나도 개신교 신자”라며 일부러 차를 세워 태워다 준 택시 기사, 천주교 신자라며 차비도 받지않은 한 여성 택시기사, 공항 세관 직원의 깍듯한 대우…. 한국은 그에게 정말 경이로운 종교의 나라다. “정교회에 관한 한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이라고 거듭 말하는 소티리오스 대주교.“정교회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며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교리를 제대로 알려 주기 위해 초대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온전하게 담은 성인·교부의 말씀들을 책으로 펴내는 일에 매달려 있다. 고작 교인 3000명이 속한 작은 교회의 총대주교이지만 팔순을 바라 보는 나이답지 않게 욕심이 대단하다.“한국인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점잖은 사람들”이라는 말에 얹어 “그래서 아직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는 알듯말듯한 말로 기자를 배웅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6살난 ‘살아있는 부처’ 타이완에 나타났다

    6살난 ‘살아있는 부처’가 나타났다 지난 14일 타이완에서 살아있는 부처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 관련 종교단체 및 불교신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환생한 ‘살아있는 부처’라고 공개된 6살의 청옌상(程彦翔)은 지난해 1월 티베트의 홍교(紅敎·라마교의 한 분파)에서 ‘활불’(活佛·라마교에서 살아있는 부처를 지칭하는 말)로 정식 인정 받고 의식을 치뤘다. 청옌상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일반 아이들과 달리 매우 침착하고 점잖으며 법좌상에 단정히 앉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홍교 법왕(法王·홍교의 가장 높은 스님)은 “7년 전 타이완에서 살아있는 부처가 태어날 것이라는 하늘의 전갈을 들었고 4년전에는 부처가 이미 타이완의 가오슝(高雄)시에서 출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홍교 법왕이 발견 당시 고작 2살이었던 청옌상은 법왕을 보자마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오체투지’(五体投地·두 무릎과 두 팔을 땅에 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방식)를 행하며 예의를 갖추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것은 6살 난 아이가 티베트 어를 읽을 뿐 아니라 매우 복잡한 ‘오불수인’(五佛手印· 손가락을 이용해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모양)을 모두 맺을 줄 안다는 것. 홍교 관계자는 “청옌상은 또래와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을 나타낼 때에는 영락없는 6살 아이임에 틀림없다.” 며 “하지만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자제력도 소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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