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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웨이-자연의 웅장한 교향곡 Norway Fjord

    노르웨이-자연의 웅장한 교향곡 Norway Fjord

    자연의 웅장한 교향곡 Norway Fjord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에서 시작해 두 개의 피오르fjord를 만났고, 수도인 오슬로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즉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을 통과하는 항구도시는 비 온 뒤 햇빛을 받은 풀잎처럼 싱그러웠으며 노르웨이의 피오르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풍을 뽐냈다. 글·사진 Travie writer 노중훈 취재협조 노르웨이관광청 02-777-5943, www.visitnorway.com 6년에 걸쳐 베르겐Bergen에 세 번 가봤다. 4월 말, 5월 중순, 5월 말. 세 번 모두 날씨가 좋았다. 푸른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청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서는 맵싸한 기운이 묻어났지만, 그것이 오히려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야구에서는 세 번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 하나만 기록해도 갈채가 쏟아지는데, 매번 쾌청했던 베르겐의 봄은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홈런을 펑펑 쳐내는 전설적인 강타자 같았다. 베르겐의 봄은 3타수 3안타 노르웨이에서 12년을 살았다는 베르겐의 한국인 가이드도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삼았다. “노르웨이의 5월은 파업이 제일 빈번하게 일어나는 달이예요.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화창하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파업을 해서 야외로 나간다는 거죠. 이즈음 베르겐의 관공서들은 일처리가 정말 더디답니다.” 설명의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판독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일기日氣가 화사하다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빛의 알갱이들이 산중턱에 알알이 박힌 집들에 부딪쳐 화려하게 부서졌다. 야외 활동에 최적화된 기후를 뽑는 경연 대회가 있다면 ‘5월의 베르겐’에 으뜸의 지위를 부여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인 가이드는 이런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뭔 줄 아세요? 그건 바로 유치원 선생님이에요. 야외 수업이 워낙 많다 보니 아이들 뒤치다꺼리가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장화를 신고 눈벌판을 누비는 마당에 계절의 여왕 5월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노르웨이 아이들에게 자연은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놀이터이자 인간이 축조한 학문의 세계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빛나는 배움의 터전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베르겐에서 보낸 시간은 노루 꼬리처럼 짧기만 했다. 오후에는 피오르 투어가 예정돼 있었다. 베르겐의 오밀조밀한 모습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던 일행 중 한 명은 “너무 아쉽다”며 입을 한 움큼 내밀었다. 시간의 제약 속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브리겐과 플뢰엔 산이었다. 삼각 지붕의 목조 가옥들이 일렬로 늘어선 브리겐 지구는 한자동맹 시절 독일 상인들이 업무를 보거나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건물들도 13~16세기에 세워졌다. 나무로 지어진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탓에 화재로 인한 소실도 수차례 겪었지만 그때마다 동일한 방식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도시의 역사와 경제적 번영을 기억하는 브리겐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320m 높이의 플뢰엔 산은 도시의 전망대였다. 푸니쿨라를 타고 비탈면을 따라 오르니 가슴이 벅차도록 장쾌한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1 베르겐 출신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과 민간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트롤의 동상 2 베르겐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플뢰엔 산 전망대. 베르겐을 찾은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3 삼각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베르겐의 브리겐 지구. 한자동맹 시절 상인들의 업무 공간이자 거주 지역이었다 4 베르겐의 메인 스트리트인 토르갈메닝겐의 뱃사람 기념탑. 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교과서에서 뛰쳐나온 피오르 노르웨이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노르웨이의 자연은 곧 피오르를 의미한다. 교과서에 따분하게 들어앉아 있던 피오르가 노르웨이에서는 바로 눈앞에서 생생한 표정을 짓는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피오르는 빙하의 흔적이다. 거대한 빙하가 깎아놓은 U자형 계곡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형성됐다. 따라서 태초의 피오르에서는 짠맛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수레가 끊임없이 굴러가는 동안 빗물이 섞이고 눈 녹은 물이 보태지면서 담수화가 진행됐다. 플롬Flam 인근 마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피오르는 바다도 아니고 호수도 아닌 그냥 피오르일 뿐이다”라고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빙하가 후벼 판 탓에 피오르는 수심이 무척이나 깊다. 가장 깊은 곳은 1,300m를 상회한다. 흔히 예이랑에르Geiranger·노르Nord·송네Sogne·하르당에르Hardanger·뤼세Lyse 피오르를 합쳐 노르웨이의 5대 피오르라고 한다. 나는 운이 좋고 복이 많아 세 번의 노르웨이 여행을 통해 노르를 제외한 4개의 피오르들을 알현할 수 있었다. 규모와 길이는 제가끔 상이하지만 저마다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들이었다. 자연은 완벽했고, 그 모습을 적은 문장은 불완전했다. 이번에 만나고 돌아온 것은 송네에서 갈라져 나온 네뢰위NærØy 피오르와 목가적인 풍경이 돋보이는 하르당에르 피오르였다. ‘노르웨이 인 어 넛셀Norway in a Nutshell’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영어 숙어 ‘인 어 넛셀’은 ‘간결하게, 단 한마디로’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자연인 피오르를 짧은 시간 안에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 베르겐에서 기차를 타고 보스Voss까지 간다. 보스에서 버스로 바꿔 타고 선착장이 있는 구드방엔Gudvangen까지 내쳐 달린다. 차창 밖 풍경부터가 드라마틱하다. 주변 산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호수와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길들이 마음 밭에 감겨든다. 구드방엔에 도착하면 크루즈에 올라 플롬까지 나아간다. 갑판 위 의자에 앉아 네뢰위 피오르의 절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면 된다. 누구라도 글로 배운 피오르와 실제 마주한 피오르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다. 구드방엔에서 출발한 배가 종내 몸을 푸는 플롬은 작은 마을이다. 상주인구라고 해봤자 500여 명에 불과하다. 유람선이 닻을 내리면 평소에 적막하던 마을이 비로소 활기를 띤다. 플롬에서는 딱히 할 것이 없다. 21가지의 하우스 비어를 생산하는 맥줏집에서 무위한 시간을 보내거나 자전거를 빌려 마을 산책에 나서면 된다. 플롬에서 하룻밤 묵어갈 계획이라면 인근 마을인 에울란Aurland에 다녀오는 것도 좋다. ‘스테가스타인’이라는 전망 포인트가 있어 빙하와 바다가 협력해서 만들어낸 풍경의 절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플롬에서 뮈르달까지는 산악 열차가 다닌다. 기차는 20개의 터널을 지나고 아찔한 협곡 위를 달린다. 중간에 쇼스폭센 폭포 역에서 5분간 정차한다. 98m 높이에서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그야말로 우렁우렁하다. 1 퀼리티 호텔 보링포센 앞에서 바라본 하르당에르 피오르. 하늘과 구름과 산이 물속에 고스란히 잠겨 있다 2 플롬과 뮈르달 사이를 운행하는 산악 열차. 열차의 규모는 작지만 열차가 통과하는 자연은 웅장하다 3 플롬의 맥줏집. 21가지의 서로 다른 하우스 비어를 생산한다 4 하르당에르는 피오르의 모습도 매혹적이지만 주변 산비탈에 들어선 농가와 밭들이 그려내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5 네뢰위 피오르를 흘러가는 유람선. 물새들이 배의 꽁무니를 줄기차게 쫓아온다. 관광객들이 손에 과자를 올려놓으면 잽싸게 낚아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하르당에르에서 마신 사과주 하르당에르 피오르의 길이는 18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송네에 이어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긴 피오르다. 가장 안쪽에는 에이드Eid 피오르가 있다. 182m의 낙차를 자랑하는 폭포 보링포센이 특히 볼 만하다.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 센터에서는 20분짜리 영화를 틀어 준다.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피오르의 가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너편 레스토랑에서는 순록 고기도 맛볼 수 있다. 하르당에르 민속 박물관도 건너뛰기 아까운 곳이다. 노르웨이의 전통 가옥과 민속 의상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하르당에르는 피오르의 모습도 장관이지만 주변 산과 구릉지에 자리한 마을들도 탐스럽다. 이 지역에는 과일 농장을 운영하는 마을들이 유난히 많다. 농장을 방문하면 사이다를 맛볼 수 있다. 사이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탄산음료가 아니라 사과의 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사과주다. 보통 날씨가 춥거나 포도의 생장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을 갖춘 곳에서 사이다를 만든다. 프랑스어로는 시드르라고 하며, 시드르를 증류시켜 만든 것이 바로 칼바도스다. 하르당에르의 농장에서는 보통 8월 하순부터 사과를 수확한다. 사과를 압착해 얻은 과즙을 10월부터 5~6개월간 발효시킨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사이다에서는 노르웨이의 자연처럼 청량하고 청정한 맛이 난다. 오슬로Oslo로 건너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오페라하우스였다. 문화가 곧 권력이고 가장 중요한 국가 경쟁력으로 대접받는 시대를 맞아 각국은 새로운 문화 아이콘을 배출하는 데 여념이 없다. 문화적 텍스트가 풍성한 오슬로의 선택은 오페라하우스였다. 지난 2008년 4월 개관한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는 최첨단의 기술력과 유장한 문화유산의 토대 위에서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북유럽의 디자인 감각과 발상의 전환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피오르에서 끌어올린 3척의 바이킹 선박과 왕족의 껴묻거리를 전시하고 있는 바이킹 선박 박물관, 해마다 12월이면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시청사, 로댕의 영향을 받은 노르웨이의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필생의 역작 ‘모노리트’를 만나 볼 수 있는 비겔란 조각공원 등도 오슬로가 전면에 내세우는 투어 포인트다. 뭉크의 <절규>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미술관은 일정상 가볼 수 없었다. 사실 뭉크의 <절규>는 판화를 제외하더라도 4가지의 회화 버전이 있다. 그중 두 점은 뭉크미술관이, 한 점은 국립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다. 유일하게 일반인이 소장하고 있던 나머지 한 작품은 얼마 전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절규>의 배경이 피오르라는 점이다. 뭉크의 그림 속에서 피오르는 불온하고 음울하게 묘사됐지만 실제 피오르는 활기차고 건강하다. 특히 요즘처럼 아름다운 날씨를 등에 업은 피오르는 더욱 그렇다. 1 해마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오슬로 시청사. 내부로 들어가면 노르웨이의 역사를 일러주는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2 하르당에르 과일 농장의 여주인. 자신이 만든 사과주인 시드르를 든 채 밝게 웃고 있다 3 오슬로 항구 부근에 자리한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마련된 조각상의 모습이 이채롭다 4 노르웨이의 문화적 자부심을 대변하는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 Travel info 노르웨이까지 가는 직항 편은 없다. KLM 네덜란드 항공을 타고 암스테르담을 거쳐 오슬로나 베르겐으로 들어간다. 하르당에르에서 이용한 호텔은 퀄리티 호텔 보링포센(www.voringfoss.no)이다. 고즈넉한 휴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플롬에서는 유서 깊은 프레타임 호텔(www.fretheim-hotel.no)이 돋보인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베르겐의 그랜드 터미너스(www.grandterminus.no)도 기차역 바로 앞에 자리한다. 오슬로의 톤 호텔 오페라(www.thonhotels.com)는 오페라하우스 건너편에 있다. 노르웨이를 방문한 여행자 입장에서 보면 가장 실감나는 것은 이 나라의 으뜸가는 자랑거리인 피오르가 아니라 살인적인 물가다. 피오르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면 노르웨이의 물가는 관광객의 지갑을 눈 깜짝할 사이에 훌쭉하게 만들 정도로 직접적이면서도 치명적이다. 고율의 부가세와 비싼 인건비 탓이다. 생수 한 병이 5,000원 정도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누구나 외로운 ‘투명인간’이다

    누구나 외로운 ‘투명인간’이다

    전시장에 척 들어서면 적막하다. 그래서 좀 안 어울려보이기도 한다. 카메라를 움켜쥔 연인,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북적대는 곳이니 말이다. 거꾸로 그렇기에 외롭고 힘들어 하는 작품들에게 ‘투명 인간’(Invisible Man)이란 제목을 붙여둔 것이 잘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23일까지 경기 파주 헤이리 갤러리이레에서 열리는 최태훈(47) 개인전은 그런 느낌이다. 조각으로 표현한 인물은 정말 투명인간이다. 사람은 싹 지워졌고 후드티, 바지, 신발로만 묘사되어 있다. 존재감은 인물 안에 숨겨진, 명멸하는 불빛으로 대체됐다. 후드티와 바지는 워낙 오래 입어서 닳아버린 듯 빛이 반짝일 때마다 옷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분명 스테인리스스틸이 재료인데 직조물의 느낌을 내준다. 전시는 1층에서 3층까지 이어졌는데 층을 밟아 올라갈수록 위안을 찾아 헤매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스테인리스스틸 옷을 다 벗어던지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운 모습으로 끝맺었다. 이게 부검을 앞둔 변사체의 모습인지, 자포자기의 몸부림인지, 피로를 풀기 위한 깊은 잠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심이지만 결국 겉도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만들었다는게 작가의 말이다.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전시는 연극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편의 심리드라마 같아서다. 다시 문을 열고 나와 헤이리 길을 걸으면 더 큰 삶의 기쁨을 맛볼는지 모른다. (031)941-4115.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커버스토리] 스파링 상대도 전담코치도 없다 박수? 바라지 않아…그런데 자꾸 주먹이 운다

    [커버스토리] 스파링 상대도 전담코치도 없다 박수? 바라지 않아…그런데 자꾸 주먹이 운다

    스물하나 청춘이 샌드백을 두드린다. 깔끔한 ‘민낯’에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파란색 글러브를 끼고 있다. 대한민국 선수단 본진이 런던으로 떠난 20일 태릉선수촌 복싱 훈련장은 적막하기만 했다. 소녀가 샌드백을 두드리는 타격음만 텅 빈 공간을 채웠다. 개막을 일주일 앞둔 런던올림픽은 근대 올림픽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26개 모든 종목의 남녀 차별이 없어진다. 1900년 2회 파리대회에 처음 입성이 ‘허락된’ 이후 금녀(禁女)의 마지막 빗장이 복싱에서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김예지(한체대 2년·51㎏급)는 런던의 링에 오르지 못한다. 다른 두명의 대표도 마찬가지. 김예지는 지난 5월 중국 세계선수권에서 8강에 들지 못해 올림픽 출전권을 쥐지 못했다. 글러브를 처음 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간직해온 꿈을 이룰 첫 기회를 놓쳤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비난하는 이도 없다. 셋은 전국체전에 대비해 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다. 그나마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신종훈(49㎏급)과 한순철(60㎏급)이 떠났으니 선수촌에서 나가야 한다. 김예지는 오는 28일 오후 11시 30분 시작하는 여자복싱 A그룹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게 됐다. 무관심에서 비롯된 열악한 인프라를 탓할 여유도 없다고 했다. 여자복싱이 유망할 것이란 코치의 말에 복싱을 시작했는데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다이어트 삼아 체육관을 찾는 여성은 늘었지만 대회에 나가기 위해 운동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마땅한 스파링 파트너도 구하기 어렵다. 지난 석달 동안 체격이 엇비슷한 남자 중학생들과 글러브를 맞대 왔다. 이훈(45) 코치는 뼈대가 다른 남자들과 겨루다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아직은 복싱이 너무 좋다.”는 김예지와 달리, 스승은 많지 않은 제자를 받아줄 실업팀이 거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3체급(51·60·75㎏) 선수를 모두 뽑는 곳은 경북체육회와 보령시청뿐. 다른 실업팀은 여자가 없거나 형식적으로 한명만 받고 있다. 남자들의 훈련 메커니즘을 좇을 수밖에 없다. 3분 동안 3회를 뛰는 남자 경기와 달리, 여자는 2분 4회로 정해져 있어 훈련 방법이 달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김예지는 “여자선수에게 여자 코치가 한명쯤은 있어야 하는데…. 여자 선생님들이 있는 유도나 레슬링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김예지는 “오빠(남자 대표)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다시 복싱의 인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코치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와야 하는 남자들에게 훈련이 맞춰지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사진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중국은 산이고 물이로다_산시성 몐산, 쓰촨성 구채구

    중국은 산이고 물이로다_산시성 몐산, 쓰촨성 구채구

    중국은 산이고 물이로다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꾼 장자가 깨어나 말했다지.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한 마리의 나비처럼 중국을 누볐다. 나는 꿈을 꾼 것인가, 여행을 한 것인가. 신의 조각품이라 할 만한 산시성의 몐산, 물감을 엎지른 것만 같은 쓰촨성의 구채구는 ‘중국의 산과 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글·사진 김명상 구명주 기자 취재협조 하나투어, 레드팡닷컴 산시성 몐산 綿山 타이항산맥에서 피어난 한 떨기 산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에서 마침표를 찍는 백두대간을 굽어보면, 산과 산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백두대간이 9개의 산을 안고 있듯 중국의 타이항산맥太行山脈도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 출신의 산을 실타래처럼 엮는다. 남한 쪽 백두대간의 길이는 650km, 타이항산맥의 길이는 남북으로 600km며 동서로 250km. 수치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산시성山西省은 타이항산의 서쪽, 동쪽은 바로 산둥성山東省이다. 타이항산맥의 서쪽에서 솟아오른 몐산綿山·면산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보는 산이었다. 그러나 낯설지 않았다. 4대 명절 중 하나인 한식이 몐산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까닭이다. 한식은 춘추전국시대 충신으로 불리는 개자추介子推를 기리는 날이다. 진나라 문공이 칩거했던 시기,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줄 정도로 문공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 그러나 훗날 문공이 왕이 되자, 개자추는 다툼이 잦은 현실 정치를 뒤로한 채 어머니와 함께 몐산으로 숨고 만다. 충신을 잃은 문공은 개자추를 불러들이기 위해 몐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내려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래서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인 한식에는 뜨거운 불에 죽어간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찬 음식을 먹고 있다.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엔太原·태원에서 개자추의 전설이 영근 몐산까지는 버스로 2시간이면 닿았다. 몐산을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면 ‘이어지는 산’이다. 분명 몐산의 저 너머에는 또 다른 중국의 산이 불뚝 솟아 있을 것이다. 버스에 의지해 몐산을 본격적으로 오르자, 신이 둥근 과일을 칼로 깎듯이 저 산을 곱게 도려낸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해발 2,000m를 웃도는 산 위, 도로가 끊길 듯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연이어 나타났다. 도로의 폭이 워낙 좁은 탓에 대형 버스 두 대가 마주칠 때면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비켜갔다. 버스가 직사각형 반듯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원펑수위안雲峰墅苑·운봉서원이었다. ‘하늘 위 호텔’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았다. 숙소 창문을 열자 한 폭의 동양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1, 2 정궈스에 오르면 등신불을 볼 수 있다 3 몐산의 원펑스에는 한식의 유래가 된 개자추의 전설이 숨쉰다 4 원펑스의 120계단은 108가지 번뇌와 12연기를 의미한다 5 원펑스에서 정궈스로 오르는 계단이 아찔하다 6 군사요새인 몐산의 석채. 타이항산의 서쪽에 솟은 몐산의 높이는 2,000m가 넘는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소원이 박힌 절벽을 지나 ‘미라 승려’를 만나다 원펑수위안의 로비인 10층은 원펑스雲峰寺·운봉사와 이어지는 비밀 통로다. 여기서 원펑스를 오르면 호텔 10층 높이만큼 발품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편한 것을 거부하고 느리게 다가오는 중년의 중국인이 보였다. 그는 아찔하게 펼쳐진 120계단 위에 두 손을 밀착하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시선은 원펑스로 향해 있었다. 120계단은 108가지 번뇌煩惱에 12연기를 더한 숫자를 의미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나는 심적인 고통이다. 마음을 비우면 쉬운 것을 우리는 항상 욕심을 부리고 의도치 않게 성을 내며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았다. 그래서 120계단은 인간의 행렬로 쉴 날이 없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원펑스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죄를 사하여 줄 것만 같은 편안함이 감돌았다. 포복사抱腹寺는 절벽 속에 감겨 있는 원펑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절은 마치 어미의 뱃속에 아이가 안겨 있는 모습을 닮았다. 사람의 손길이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가파른 암벽을 따라 붉은 천이 휘날렸다. 천에 매달린 것은 등불 혹은 방울이었다. 왜 등불과 방울인가. 등불燈·등불등을 단 사람은 “소원이 이뤄지길 기다리겠다等·기다릴등”고 신께 기도했고, 반대로 방울鈴·방울영을 단 사람은 “소원이 이뤄지다니, 영험합니다靈·영험할영”고 감사 인사를 띄웠다고 한다. ‘등’과 ‘영’이라는 한자 음을 이용한 중국인의 재치를 엿볼 수 있었다.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 했다.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이뤄지리라. 원펑스를 지나 ‘之갈지’ 모양의 지그재그 계단을 올랐다. 정궈스正果寺·정과사로 가는 길이다. 정궈스까지 오른 이유는 하나였다. 등신불等身佛을 보고 싶었다. 등신불은 쉽게 말해 ‘미라가 된 승려’다. 미라라 하면 방부처리한 상태로 편하게 누워 있는 이집트 미라가 대번 떠오른다. 그러나 이곳의 등신불은 고고하게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어떻게 꼿꼿한 자세 그대로 ‘인간 불상’이 되었는지는 과학도 풀기 힘든 미스테리라고 했다. 오매불망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그대로 돌이 된 망부석처럼 등신불에는 어떤 애절함과 의지가 선연하게 묻어났다. 등신불의 갈라진 틈 사이로 뼈와 두개골이 보였다. 정궈스에는 등신불 총 12존이 있다. 등신불도 살아온 궤적에 따라 저마다의 표정이 달랐다. 유독 표정을 잔뜩 찡그린 불상이 보였다. 죽어서도 지울 수 없는 한이 가슴 깊숙이 응어리진 게 틀림없었다. 역시나 그 등신불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있다고 했다. 하산한 그대여, 왕자다위안과 핑야오구청으로 가라 몐산에서 내려와 왕자다위안王家大原·왕가대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씨네 집을 찾아간 것이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노래 <왕서방연가> 탓인지 중국의 부자 하면 왕서방의 퉁퉁한 얼굴이 스쳤다. 실제 왕王씨는 이李씨, 장張씨와 함께 중국의 3대 성씨로 꼽힌다. 왕자다위안은 길조차 왕씨의 집임을 증명했다. 남북으로 큰 길이 하나 놓여 있고 동서방향으로 세 개의 길이 나 있으니 영락없는 王자였다. 왕씨 가문의 시조인 ‘왕실王實’은 두부장사로 큰돈을 모은 거상이었다. 왕실의 17대손 형제는 나란히 관직에 등용돼 가문에 영광을 안겨줬고 집을 더 크게 짓고 더 화려하게 치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예를 뽐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 바로 으리으리한 집짓기가 아닌가. 수백년에 걸쳐 대대손손 지어진 이 집은 ‘민간의 자금성’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방의 개수는 1,118칸, 정원의 수도 100개가 넘는다. 집을 구경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족히 1시간은 걸렸다. 왕자다위안에서는 숨어있는 장치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계단과 문 앞에는 복숭아, 박쥐, 원숭이, 물고기 등의 조형물이 나타났다. “복숭아는 장수, 박쥐는 복을 의미하고요…” 여기저기서 숨은 그림 찾기에 빠진 이들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집을 채운 소품 중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었다. 방문객이 어찌나 만졌던지 사람의 손을 탄 장식품은 하나같이 반들반들했다. 하산 후 여행은 대개 왕자다위안에서 핑야오구청平遙古城·평요고성으로 이어진다. 핑야오구청은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명동’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번화해 몐산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적막한 몐산에 파묻혀 며칠을 지냈던지라 왁자지껄한 핑야오구청의 분위기가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몸이 반응했다. 정신없이 골목을 누볐더니 어느새 두 손 가득 간식과 아기자기한 기념품이 들려 있었다. 스토우빙으로 불리는 바삭바삭한 과자, 매콤하고 짭조름한 양 꼬치, 대형 지팡이 과자 등 맛있는 길거리 음식이 워낙 많아 끼니를 걸러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핑야오구청에는 지갑을 열게 하는 마력이 흘렀다. 알고보니 핑야오구청 일대는 상업 중심지로 흥했던 곳이었다. 중국 최초의 은행인 표호票號도 이곳에 있다. 처음 핑야오구청을 둘러보면 망망대해를 누비는 것처럼 막막하다. 다행히 스러우市樓·시루는 든든한 등대 역할을 했다. 아침이면 이곳을 중심으로 거리 공연이 열리고, 밤이면 화려한 빛이 뿜어 나와 여행객을 위무했다. 1 장수, 복 등을 의미하는 조형물이 곳곳에 숨어있다 2 왕자다위안은 민가의 자금성으로 불릴 정도로 거대하다 3 핑야오구청의 아침은 화려한 전통 공연으로 시작한다 Travel tip 산시성 사람은 식사 전 꼭 ‘식초’ 한 잔을 마신다. 상 위에 오른 검정 액체를 보고 당황하지 말자.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고 냉큼 마셔 보시길. 핑야오구청에는 게스트하우스, 중국식 전통 숙소인 객잔이 있다. 특히 객잔에 머물면 홍등과 버드나무를 벗 삼아 객잔 주변을 산책해 보라. 귀부인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진다. 또한 객잔 마당의 테이블에서 맥주 캔을 든다면 풍경에 취해 밤을 새기 십상이다. 단, 객잔의 실내는 약간 쌀쌀한 편이니 취침 전 창문을 잘 닫는 게 좋다. T clip.여행상품 10월20일까지 몐산으로 손쉽게 떠날 수 있다. 바로 인천에서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안까지 아시아나항공이 전세기를 운항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총판매대리점을 맡고 있는 레드팡닷컴을 비롯해 하나투어, 모두투어, 자유투어, 참좋은여행, 온라인투어 등 전국의 여행사를 통해 전세기 상품을 예약할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출발해 4박5일간 현지에 머무르며 몐산, 왕자다위안, 핑야오구청 등 산시성 대표 여행지를 모두 아우르며 중국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디너쇼도 포함한다. 상품가 69만9,000원부터 문의 레드팡닷컴 02-6925-2569 쓰촨성 구채구 九寨溝 고산증은 통과의례였다 오색찬란한 물빛을 보는 순간 당신은 선계仙界에 온 듯한 착각을 할 것이다. 지구상의 온갖 푸른색 보석을 가루 내 물에 푼 듯한 구채구의 물빛은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산을 고이 담아낸 물이 잔잔하고, 웅장한 폭포에서는 거대한 물의 커튼이 눈앞을 가린다. 하지만 구채구에 도착하기 전 고산병이 발목을 잡았다. 구채구로 가는 관문인 청두成都·성도에서 국내편 비행기를 타고 해발 3,500m의 구황공항에 내리자마자 딱따구리가 머리를 쪼는 듯한 두통이 일어났다.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오자 심한 고도차에 몸이 고통을 호소한 것이다. 미리 먹었던 고산병 예방약은 별무소용이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니 몸은 금방 적응됐는지 평소와 같은 기분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정도가 조금 덜할 뿐, 여전히 두통이 남아있다고 했다. 구채구는 해발 1,980~3,100m 정도 높이에 걸쳐져 있는데 한반도의 최고봉, 백두산 높이가 2,744m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종종 발생할 수 있는 고산증세는 하나의 통과의례이며 극복한다면 진한 감흥을 얻을 것이다. 구채구는 1970년대에야 벌목공에게 발견됐을 정도로 오지다. 골짜기 안에 9개의 장족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아름다운 산과 오색찬란한 물로 유명하다. 동화세계, 인간선경 등으로 불리는 중국 관광의 명소로 1975년 중국 정부 지정 관광지로 지정됐고, 1992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1997년에는 세계 생물권 보호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4 진주가 흐르는 듯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진주탄폭포 5 오화해는 꽃처럼 아름다운 다섯 색깔이 비친다는 뜻으로, 비취색이 인상 깊은 곳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감탄사가 절로 터지는 물빛 구채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Y자 형태이며 크게 수정구樹正溝, 일측구日則溝, 측사와구則渣窪溝 3개의 골짜기로 이뤄져 있다. 전체 길이는 55.5km, 입구에서 구채구의 가장 높은 지역인 장해까지의 길이는 총 17.8km에 달한다. 따라서 도보로 걷기에는 힘들기에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같은 버스를 탄 관광객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찬탄을 질러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산이 물 표면에 그대로 비춰지기도 하고, 비취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물 색깔의 오묘함에 홀리듯 빨려들게 된다. 예로부터 장족들이 신산성수神山聖水라 불러 왔다는데 그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 구채구 내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114개, 호수 사이에 17개의 폭포군, 11개의 급류, 5곳의 트래버틴(석회암의 일종) 모래톱이 서로 연결돼 있다. 호수는 이름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는데 명칭이 있는 호수는 보통 오화해, 경해, 장해와 같이 바다海라 명명된다. 구채구에 관한 전설에는 로맨틱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옥낙색모라는 여신이 있었는데 달과라는 남자신이 그녀를 사모했다. 한 번은 달과가 여신에게 바다를 볼 수 있는 보물거울을 선사했는데 갑자기 달려든 마귀에 놀라 거울을 떨어뜨렸다. 그 거울 조각이 인간세상에 떨어져 보석처럼 산 곳곳에 박히게 됐는데 그것이 구채구의 호수가 됐다는 것이다. 구채구의 하이라이트, 오화해·장해 구채구는 면적이 720km2 달하는 만큼 관광객이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모두를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성수기에는 가이드도 압사당할 뻔했다고 할 만큼 중국인 관광객이 몰리기에 여유로운 사진 촬영도 어렵다. 따라서 미리 몇 곳을 정해 놓고 집중해 보는 편이 낫다. 추천하는 곳은 오화해五花海와 장해長海다. Y자 계곡의 오른쪽(일측구) 상류 부분에 있는 오화해는 꽃처럼 아름다운 다섯 가지 색이 비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구채구 호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인데 에메랄드색과 남색, 녹색 등이 서로 교차하고 영롱한 빛을 발해 눈을 어지럽힌다. 이런 신비한 색감은 석회암 지형 때문인데, 물에 석회질이 많아 색깔이 옥색으로 비치는 것에 더해 주변 산의 전경, 태양의 움직임 등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호수 속에는 이미 오래된 나무가 유유자적하게 잠겨 있는데 신기하게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지질 특성상 석회 성분이 고착돼 그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들이 어우러진 오화해는 말 그대로 선경이라 부를 만큼 감동이 살아 숨쉰다. 오화해 위로는 팬더바다라는 뜻의 웅묘해熊猫海가, 아래로는 경내에서 가장 웅장하며 진주가 흐르는 듯 아름답다는 진주탄폭포珍珠灘瀑布가 있는 만큼 천천히 유람하듯 즐기는 것도 좋다. 식사 후 버스를 타고 구채구에서 제일 높은 호수인 장해로 향했다. 장해는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3,101m에 있고 길이는 약 4.3km에 달한다. 유람선이라도 뜰 것 같은 긴 물결이 호수임에도 시야를 탁 트이게 만든다. 이곳을 한 바퀴 둘러보면 마치 중식도로 산을 뭉텅뭉텅 베어낸 듯한 노르웨이의 피오르드fjord와 흡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구채구라는 계곡 하나에서 동양과 유럽의 매력을 아우르는 풍경이 숨쉬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장해 아래 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역시 물 색깔이 곱디고운 오채지五彩池에 닿는다. 1 석회질 성분 때문에 이곳에 잠긴 나무들은 썩지 않고 형태를 유지한다 2 웅장한 풍경을 자랑하는 장해. 이름답게 사진에 보이는 장면이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3 구채구 장족문화촌에서는 장족의 문화와 전통을 만끽하며 쇼핑도 겸할 수 있다 4 장족문화촌에서 전통복장을 한 여인이 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5 장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유일하게 칼을 차고 다니기에 화를 돋우면 곤란에 처할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오지 속 쇼핑몰, 장족문화촌 구채구 내의 수정채에는 각종 기념품을 파는 장족 마을이 있다. 입구 앞에는 쵸르텐불탑과 룽다風馬가 서 있다. 룽다는 긴 장대에 매단 긴 깃발이고 타르쵸는 정사각형의 기를 이어서 매단 것으로 경문이 가득 쓰여 있다.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에 전달돼 모두가 해탈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해져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둔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면 타르쵸가 만국기처럼 내걸려 있다. 상점에서 물품을 파는 이들은 모두 장족 전통 복장을 하고서 그들만의 독특한 기념품을 만든다. 티벳문자가 수놓인 천 제품, 스카프, 옥으로 만든 빗, 각종 의류, 거울, 팔찌, 귀걸이 등의 액세서리 등도 만날 수 있다. 상업적인 느낌이 강해 아쉽지만 장족의 고유한 삶도 들여다보고 기념품도 구매할 수 있어 구채구를 찾은 이라면 누구나 즐겨 찾는 곳이다. T clip.가는방법 청두(성도)는 구채구의 관문이다. 인천에서 청두까지는 아시아나항공, 중국국제항공, 사천항공 등이 운항 중이며 약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청두에서 구황공항까지는 비행기로 45분 걸리지만 육로로는 10시간도 소요될 수 있다. 그만큼 비행기 이용객이 많은데 문제는 날씨가 워낙 오락가락하는 탓에 비행기 연착이 흔하디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 기자는 3시간 넘게 청두 공항 의자에 누워서 기다려야 했다. 상품 문의 하나투어 02-2127-1951 Travel tip. 구채구는 산에 단풍이 들고 물이 많은 가을이 성수기다. 단, 10월에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차서 주변 호텔 가격도 비싸고, 관광할 때 인도를 걷기도 힘들 만큼 붐비니 9월이 가장 적당하다 구채구 내에서 버스 이용할 때는 앉은 자리가 풍경 감상의 핵심이다. 입구에서 상행선 버스를 탈 경우 왼쪽이, Y자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일측구에서는 오른쪽에 앉으면 이동하면서 멋진 장면을 만끽할 수 있다. 고산병은 평소 건강상태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니 자만은 금물. 일단 고산병 증세가 생기면 하산만이 해결책이다. 약을 준비하는 등 미리 조처하고 대비하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길섶에서] 순천만의 역설/구본영 논설위원

    지난 주말 여수 세계박람회장 가는 길에 순천에 들렀다. 10년 만에 찾았는데, 예전과 달리 생동감이 느껴졌다. 포스코 등 산업체가 많은 여수에 비해 적막한 갯마을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깨졌다. 순천은 내년 4월부터 열릴 국제정원박람회 준비에 부산한 모습이었다. 짱뚱어와 게들이 갈대가 우거진 갯벌을 기어 다니는 순천만의 속살을 보러 몰려든 관광객들로 붐볐다. 놀랍게도 깃발을 앞세운 중국·일본 단체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22.4㎢의 갯벌을 끼고 있는 순천은 오래전부터 제조업 대신 녹색 생태도시 조성을 발전 전략으로 선택했다. 전봇대 282개를 뽑아 철새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식이다. 오늘의 활력은 그런 선택이 빚은 역설적 결과인 셈이다. 낙후와 가난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습지가 연간 300만명이 찾는 생태관광지로 자리잡지 않았는가. 그렇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발상의 전환’을 하면 길은 열리는 게 아닐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결함마저 강점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중요할 듯싶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덕유산 칠연계곡…일곱 개의 연못·폭포가 한 줄로

    덕유산 칠연계곡…일곱 개의 연못·폭포가 한 줄로

    덥습니다. 한여름은 아직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더위는 벌써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가뭄까지 겹쳐 어지간한 개천들은 말라깽이 칠십 할머니 젖가슴만도 못하게 쪼그라들었지요. 이럴 땐 수량 풍부한 계곡에 들어 시원하게 탁족(濯足)을 즐기는 게 최고일 겁니다.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덕유산은 안으로 젖줄기 같은 계곡을 여럿 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전북 무주의 칠연계곡입니다. 일곱 연못 사이에 일곱 폭포가 있다고 해서 이른바 ‘칠폭칠연’(七瀑七淵)의 정취로 이름난 곳입니다. 명성으로야 구천동계곡을 따라가겠습니까만, 세상엔 2등만의 풍경도 있는 거지요. 한여름의 구천동이 갖지 못한 적요함, 그리고 작고 예쁜 폭포와 연못 등 독특한 풍경들을 품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기껏 무주까지 와서 구천동계곡은 건너뛰고, 칠연계곡으로 가란다. 그게 무슨 얘기냐는 푸념이 나올 만하겠다. 그렇다면 늘 가던 곳만 갈 거냐는 반문 역시 성립하지 않을까. ‘무슨 산=어느 계곡’이란 정형화된 등식으로 스스로를 얽매는 건 옳지 않다는 거다. 칠연계곡의 정체성은 뭔가. 단답형으로 규정하긴 어려우나, 빼어난 탁족처라 한다면 무리가 없지 싶다. 흐르는 물에 발을 씻으며 더위를 쫓기 좋은 곳이다. 선조들은 탁족을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삶의 비유로도 썼다. 아이들과 물놀이를 할 사람은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는 게 좋겠다. 물놀이 즐기기 적당한 얕고 너른 개울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작고 예쁜 소(沼)들이 많다. 소 주변에서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늘어지게 오수를 즐기거나, 책을 읽기 딱 좋다. 칠연계곡의 소들은 거개가 작다. 위험해 뵈는 곳도 많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소라도 물이 도는 곳은 위험할 수 있다. 덥다고 수영금지 표지판이 붙은 소에 무턱대고 뛰어들지 말라는 뜻이다. 아울러 소 주변은 매우 미끄럽다. 오르내릴 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흔히 칠연계곡의 들머리를 덕유산 안성탐방지원센터로 잡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용추폭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게 옳다. 폭포치고는 비교적 흔한 이름인 데다, 차도에 인접해 있어 스쳐 지나기 십상이지만, 깊은 산자락에 꼭꼭 숨어 있었다면 ‘비경’ 소리를 들었을 만큼 빼어난 자태를 하고 있다. 용추폭포를 품고 있는 마을은 사탄동이다. 부디 이름만으로 ‘종교적인 핍박’을 하진 마시라. 한자로는 모래 사(沙)에 여울 탄(灘)을 쓴다. 한글로 풀면 모래여울 마을이라는 예쁜 이름이다. 사탄동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통안마을이다. 통안마을 위로는 ‘점방’(작은 가게) 하나 없다. 마실 물 등은 이 마을에서 준비해 가야 한다. ●늘어선 활엽수림… 짙푸른 숲그늘 이러구러 숲길로 접어든다. 안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곧바로 칠연계곡이 이어진다. 신갈나무와 고로쇠나무, 물박달나무 등이 계곡을 어루만지며 늘어서 있다. 아그배나무와 함박나무 등 잎이 도드라진 나무들도 간간이 얼굴을 내민다. 깃대종(특정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중요 동·식물)은 구상나무지만 눈에 띄는 나무는 죄다 활엽수다. 당연히 숲그늘도 짙푸르다. 침엽수에 견줘 피톤치드는 적겠으나, 그만큼 쉴 곳이 많다. 바람 소리도 곱다. 침엽수의 뾰족한 잎을 스치는 새된 소리에 견줘 훨씬 부드럽고 상큼하다. 물은 더없이 맑다. 그 안에 깃대종인 금강모치 등이 산다. 탐방지원센터 관계자는 요즘 어디서 들어 왔는지 무지개송어와 산천어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금강모치 등 작은 물고기들이 이들의 주요한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최근 덕유산 국립공원 측이 생태계 교란종에 대한 퇴치작전에 돌입한다고 했으니, 지켜볼 일이다. 계곡을 왼편에 두고 산길을 오른다. 한 굽이 돌 때마다 여울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계곡 밖의 들녘은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상황. 하지만 칠연계곡을 흐르는 물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칠연계곡은 덕유산의 서쪽 사면을 타고 흐른다. 동쪽으로 흐르는 구천동계곡과 반대 방향이다. 명성의 차이만큼, 방문객의 발걸음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덕유산의 물줄기인데도, 칠연계곡 탐방안내소 관계자들이 은근히 건너편의 구천동에 경쟁 의식을 갖는 이유다. 풍경도 낫고, 덜 알려져 조용한 데다, 송어 양식장 등 물을 흐릴 수 있는 시설도 없다며 자랑이다. 탐방지원센터에서 10분가량 오르면 문덕소다. 칠연계곡에서 첫 번째 만나는 비경이다. 제법 규모가 크고 깊은 못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다. 너른 반석 위를 지난 물이 세차게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하얀 포말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계곡 훑고 온 바람, 이마에 땀 거둬가 문덕소에서 20분 남짓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나무다리를 건너면 동엽령과 중봉을 거쳐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1614m)에 이르는 산행코스가 이어진다. 길 오른편의 나무계단 쪽 길로 들어서야 칠연폭포와 만날 수 있다. 이곳부터 칠연폭포 끝자락까지는 10여분이면 족하다. 칠연폭포는 한 줄로 이어지는 일곱 연못 사이에 일곱 폭포가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른바 ‘칠폭칠연’의 풍경이다. 계곡의 이름 또한 이 폭포에서 비롯됐다. 칠연폭포는 한눈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숲 사이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이어져 있다. 그래서 신비감도 더하다. 칠연폭포가 펼쳐지는 구간엔 두 곳의 전망대를 조성해 뒀다. 폭포 쪽으로 내려가려면 미끄러짐에 유의해야 한다. 물기 많은 바위들은 빙판이나 다름없다. 길을 막아 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길을 낸 것도 아니다. 일렬로 늘어 선 폭포의 중간쯤 되는 곳의 너럭바위에 앉아 위아래를 훑어본다. 계곡을 훑고 온 바람이 이마의 땀을 거둬 간다. 얕은 폭포를 지나 온 계곡물은 작은 소로 빨려 들어간다. 이 과정이 일곱 차례 반복된다. 과장 좀 보태면 금강산 상팔담의 축소판이다. 세숫대야를 20배쯤 확대한 것 같은 연못들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다. 숲에 인적은 드물다. 칠연폭포가 길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숲은 늘 섬뜩할 정도로 적막하다. 나무의 삭정이가 부러지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랄 판이다. 무더위도 덩달아 무릎을 꿇는다. 하산길에 칠연의총(七淵義塚)에 들러도 좋겠다. 조선 말기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의병장 신명선과 의병 150여명이 묻힌 곳이다. 칠연계곡 초입, 그러니까 안성탐방지원센터 앞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나온다. 이 의병부대는 1907년에 거병해 무주와 진안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칠연계곡에서 옥쇄(玉碎)한 것으로 전해진다. 글 사진 무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가는 길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덕유산 나들목으로 나온 뒤, 죽천교차로에서 우회전해 19번 국도로 갈아탄다. 이어 죽천삼거리에서 좌회전, 727지방도를 따라 10분가량 곧장 올라가면 용추폭포 앞에 닿는다. 대중교통은 덕유산 탐방안내소 바로 아래 통안마을에서 안성터미널까지 오전 9시·11시 30분, 오후 1시·2시·4시 30분·6시(이상 통안마을 출발 기준) 하루 6회 군내 버스가 오간다. 적상산이나 나제통문 등 무주 북부의 명소들을 먼저 찾을 경우 무주 나들목으로 빠지는 게 낫다. ▲맛집 무주의 대표 먹거리는 역시 어죽이다. 물 맑은 금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여낸다. 읍내 군청 앞의 금강식당(322-0979)과 ‘육지 속의 섬’ 내도리로 건너가는 앞섬다리 부근의 앞섬마을(322-2799), 뒷섬마을의 큰손식당(322-3605) 등이 이름났다. ▲잘 곳 무주읍 당산리의 무주이리스호텔(324-3400), 설천면 삼공리의 제일산장(322-3100), 설인관광펜션(322-0558) 등이 깨끗하다고 입소문난 업소들이다. 좀 더 안락한 잠자리를 원한다면 무주리조트나 티롤호텔 등도 좋겠다.
  • [지금&여기] 세종시 새댁, 그리고 서울 기자/이현정 정치부 기자

    [지금&여기] 세종시 새댁, 그리고 서울 기자/이현정 정치부 기자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기형도의 시 조치원 중에서) 천안과 대전 사이, 영화관이 생긴지도 1년이 안 된 충청남도 연기군의 작은 읍(邑) 조치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대도시인 대전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기억하거나, 잠시 들르더라도 도시도, 시골도 아닌 특색 없는 그 어중간한 정체성 때문에 기억에서 금새 잊혀지곤 한다. 조치원은 아침이면 자욱하게 밀려온 안개로 ‘하얀 어둠’이 내리는 곳이며, 경부선·호남선·전라선 열차가 모두 정차하는 철도 요충지라 사람의 이동이 잦은 곳이다. 토박이 만큼 뜨내기도 많은, 그래서 기형도 시인의 시 처럼 ‘톱밥같이 쓸쓸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이 곳에 이방인 처럼 산지 벌써 4년째. 나는 매일 아침 조치원 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는 ‘서울 기자’이고, 이전까진 조치원으로 시집을 간 ‘조치원댁’이라고 불렸으나 조치원이 세종시로 편입되니 이제는 ‘세종댁’ 쯤 되겠다. 막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 조치원은 적막한 곳이었다. 지금은 연기군 남면 쪽에 세종시 첫마을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가 늘면서 제법 차가 막히는 정도가 됐다. 투기 열풍이 불면서 부동산 침체는 옛말이 됐고, 어느 곳을 가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아파트 분양 얘기를 한다. 세상은 세종시가 4·11총선의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자 다시 한번 이 곳을 주목했다.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와 자유선진당 심대평 후보의 격돌로 주민들은 또다시 정치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을 찾아 악수를 청했고, 주민들은 이 ‘촌동네’에도 거물급 정치인이 나온다며 설레여했다. 조치원을 세종시로 만든 정부와, 뱃지를 놓고 격돌을 벌인 정치인들은 이 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정치적 ‘무대’로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소외받으며 살아온 이 지역의 지난 날과 앞날에 대한 주민들의 설레임도 모두 알고 있을까. 안개가 아름다운 조치원, 세종시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모두 알고 있을까. 이현정기자 hjlee@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2)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루쉰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2)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루쉰

    1898년, 루쉰은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가기 위해 고향 샤오싱을 떠났다. 집을 떠나는 장남의 손을 잡고, 루쉰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8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셨다.” 어머니의 울음에는, 가세가 기울어져 더 이상 과거공부를 시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갈 곳을 찾지 못한 아들에 대한 걱정과 가여움을 담고 있었다. 사실 루쉰의 어머니가 이렇게 서럽게 운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경서(經書)를 배워서 과거를 치르는 것이 정도(正道)였고, 사회통념상 소위 양학(洋學)을 배운다는 것은, 갈 곳 없는 사람이 서양 오랑캐에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간주되어, 몇 배의 수모와 배척을 당해야만 했기”(납함, 자서) 때문이다. 1898년, 18세가 되는 해에 루쉰은 새로운 길을 찾아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루쉰의 본명은 저우슈런(周樹人·1881~1936)으로, 저장성(浙江省)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저우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었으나, 과거시험 부정을 꾀했다는 이유로 조부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독서인 집안은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을 대느라 재산은 탕진되었다. 집안의 장남인 루쉰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가시자 차갑게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다. 루쉰에게 고향 샤오싱은 자신을 얽매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샤오싱은 중국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전통적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고향은 흡사 고인 물처럼, 현재의 도살자들로 가득했다. 루쉰이 소설가로 발을 내딛으면서 말했던 ”철로 만든 방“은 결코 은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방은 철로 만들어져 깨부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질식사를 기다리듯 그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루쉰은 철방에서 홀로 잠을 깬 자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철방 속 적막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사회활동에 더 매진하거나 옛 문헌을 파고들었다. 루쉰은 바로 그런 철방과 같은 고향을 떠났다. 흡사 지금까지의 자신과 결별하듯, 스스로 탯줄을 자르듯. 자신을 짓누르던 전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 루쉰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진화론’이었다. 1901년, 루쉰은 옌푸(嚴)의 ‘천연론’(天演論)을 통해서 ‘생존경쟁’과 ‘자연도태’라는 용어를 접했다. 당시 진화론은 생물학적 다위니즘을 비롯해 사회 다위니즘, 상호부조론 등이 한데 뒤섞인 채 물밀듯이 중국으로 들이닥쳤다.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인 중국 지식인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을 근대 세계와 같은 궤도에 두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했다. 루쉰의 세대에게 진화론은 일종의 돌파구였다. 처녀작 ‘광인일기’(1918)에서 루쉰은 중국 전통의 예의와 도덕의 해악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며, “아이들을 구하라.”고 외쳤다. 자신과 같은 기성세대는 “인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암흑의 수문을 어깨로 걸머질” 터이니, 아이들은 자신들을 밟고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루쉰은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 되기를 자청했다. 1902년 루쉰은 국비로 일본에 유학을 떠난다. 의화단사건(1900)에서 승리한 서구 연합국들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청나라의 해외유학생 파견에 전용하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일본에 간 루쉰은 망설임 없이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부친처럼 어리석은 처방과 치료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의학은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확신은 이른바 ‘환등기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루쉰이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시간 틈틈이 선생들은 환등기를 틀어주었는데, 어느 날 루쉰은 거기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그가 본 환등기 필름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스파이 혐의를 받은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다.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변발이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 양 멍하니 바라보는 중국인의 사진 앞에서 루쉰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의대를 그만뒀다. 의학으로 구국하겠다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납함, 자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루쉰의 답은 “문예”였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펜으로 ‘중국인의 열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 신체에 깃든 병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치료하듯, 루쉰은 글을 써내려갔다. 그에게 글쓰기는 익숙함에 안주하는 중국인들을 향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한 치의 위로나 연민도 없었다. 새것조차 헌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사유방식, 그것의 기초가 되는 철학, 신화, 예술, 고전 등 모든 익숙한 것에 총공격을 가했다. 전통의 해독(害毒)에서 청년들을 지키기 위해 고문은 읽지도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 모두가, 탁자 하나를 옮기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중국의 견고한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루쉰은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 뿐이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는 잡문쓰기에 치중했다. 지금의 에세이에 해당하는 잡문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군벌들의 난립과 폭행, 국민당의 백색테러, 혁명을 팔아먹는 지식인, 현실의 권력에 굴복하면서도 정인군자(正人君子)인 체하는 하는 지식인. 루쉰의 붓끝은 그 모두를 향해 있었다.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고, 혁명에 들뜬 청년들의 조급증을 논파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쉰의 글쓰기는 자신을 부정하고 해부하는 작업이었다. 황금시대로 아이들을 넘겨주는 중간물이자 꽃을 키우기 위한 거름으로 자신을 규정한 루쉰은 새롭게 도래할 혁명의 시기에는 멸망될 운명의 존재였다. 미래세대의 독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신체에 새겨져 있을지 모를 중국인의 열근성과 대면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만큼, 루쉰은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쓴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만 열이 몹시 날 때면 유럽인들은 임종시에 흔히 남이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을 바라며 자신도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지낸다는 사실이 기억날 뿐이다. 나의 적과 원수는 적지 않은데 신식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생각해보고 나서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증오하게 하라. 나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죽음) 루쉰은 죽어가면서까지도 무력으로 중국을 농단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군벌들, 위선적인 지식인들, 그들을 뒷받침하는 과거의 부정적인 것들을 향해 겨누던 창을 거두지 않았다.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두 세계의 어둠을 볼 수 있었던 루쉰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암흑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중국의 역사를 뒤집는 일, 중국인의 혈관을 흐르는 피를 바꾸는 일, 즉 혁명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루쉰은 죽으면서도 모든 익숙한 것들, 자신을 위로하는 것들에 속지 말라고, 투쟁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최정옥(남산강학원 연구원)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네덜란드 출신의 그림책 작가 레오 리오니의 작품 중에 ‘잠잠이’(최근 ‘프레데릭’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가 있다. 주인공인 새앙쥐 잠잠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햇살 좋은 양지 녘에 쪼그리고 앉아 낮잠만 즐긴다. 일은 안 하고 졸기만 하는 잠잠이를 모두들 불만스러워하지만 잠잠이는 끈질기게 잠만 잔다. 그리고 새앙쥐 마을에 겨울이 찾아왔다. 대지에 찬란하던 빛깔도 요란하던 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침묵에 들었다. 새앙쥐들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권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잠잠이가 그때 모두의 앞에 나섰다. 봄부터 가을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모아두었던 빛깔과 소리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잠잠이는 결국 침묵과 권태의 계절인 겨울에 모두에게 봄의 희망, 생명의 노래를 전해 주는 아름다운 시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사람의 마을에 매운 바람이 불어오면 세상은 침묵으로 잦아든다. 하얀 눈까지 소복이 쌓이는 날이면 시골 들녘은 적막이 감돌 만큼 고요해진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찾아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들녘이 꼭 그랬다. 찬바람 맞는 게 결코 좋을 수 없는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어서 대문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다. 눈 내리는 단전리 마을에는 들녘의 커다란 느티나무만 홀로 겨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 20m, 줄기 둘레 10.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다. 사람 없는 들녘에서 나무는 하얗게 침묵으로 잦아드는 겨울의 권태와 적막을 덜어 내기 위해 가물가물 잊혀 가는 옛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림책 속의 새앙쥐 ‘잠잠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도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줄기 안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서리서리 펼쳤다. 나무 이야기는 이곳 단전리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던 400년 전의 옛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단전리는 임진왜란 직후에 도강김씨(도강은 전남 강진의 옛 이름) 가문이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살아온 오래된 집성촌이다. 마을을 일으키는 중심 역할을 한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김충로라는 분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자리에 보금자리를 근사하게 일구긴 했으나 그에겐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었다. 함께 하지 못한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로의 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산화한 김충남이라는 장군이다. 보금자리를 이루기는 했으나 함께해야 할 가족을 잃은 김충로는 설움을 달래지 못했다. ●단전리 입향조가 처음 심고 키운 나무 그가 마을 들녘에 나무를 심은 건 그래서였다. 물론 마을을 처음 일으킨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크게 자라서 마을에 들고 나는 악한 기운을 막겠다는 뜻도 있고, 마을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김충로라고 그런 뜻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나무를 심을 때에는 전사한 형, 김충남 장군의 넋을 기리자는 생각이 더 컸다. 집성촌인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가문의 선조이기도 했으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무를 심은 김충로도 전쟁터에 나가서 형처럼 목숨을 잃었다. 전사한 형제를 나라에서 선무원종공신으로 제수한 게 그나마 가문의 한을 위로할 뿐이었다. 장군으로 불리던 사람도 그를 기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그의 동생도 장군이 되어 똑같이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들녘의 나무만 주인을 잃은 아픔을 안고 무럭무럭 자랐다. 장군 형제의 넋이 담긴 들녘의 느티나무를 사람들은 그때부터 ‘장군 나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한 해에 한 번은 나무 앞에 모였다. 장군 형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닷샛날 치른 당산제가 그것이었다. 단전리 당산제는 유난히 즐거웠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사람들은 우마제(牛馬祭)를 지냈다. ●애국 충정의 찬란한 기억으로 살아남아 농사의 동반자인 소와 말의 먹이를 나무 뿌리 주위에 가지런히 내려 놓고 소와 말의 건강을 빈 것이다. 우마제 뒤에는 나무가 바라다보이는 공터에 나무를 쌓고 불을 피웠다. 이글거리는 불 가장자리에서는 농악대가 풍물을 쳤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춤을 췄다. 사람의 풍경을 바라보는 나무도 따라서 즐거웠다. 평화롭게 세월이 흐르던 1950년, 장군의 넋과 장군 나무가 지켜 주는 단전리에 다시 전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참혹한 전쟁의 폭풍이 지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떠난 뒤였다. 그때부터 누가 결정하지도 않았건만 우마제도 풍물놀이도 당산제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단전리에는 전쟁 전에 70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20가구와 일흔 고개를 넘나드는 노인들만 남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입향조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젊은 시절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많은 어른들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세월은 마치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하얀 눈처럼 세상살이의 흔적을 하나둘 덮을 것이다.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을의 기억도 종작없이 사라질 것이다. 마을에는 하릴없는 적막감이 찾아오고, 견디기 힘든 권태감이 휩쌀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어도 나무는 옛 마을의 영화를 온전히 기억하고 우뚝 서서 찬란했던 옛 마을의 평화로운 빛깔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은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마치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에 나오는 새앙쥐 주인공 잠잠이처럼. 글 사진 장성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291. 호남고속국도의 백양사나들목으로 나가서 백양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호남선 백양사역을 조금 지나면 사가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백양로를 타고 5㎞쯤 가면 장성호 관광지에 닿는다. 장성호를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을 3㎞ 가면 북하면 소재지인 약수리에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계속 3.5㎞쯤 고갯길을 넘어가면 처음으로 나오는 주유소 맞은편에 나무가 있다. 주유소 근처의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한다.
  • 다재다능 시인 둘 새 작품집 선보여

    다재다능 시인 둘 새 작품집 선보여

    이채로운 경력의 두 시인이 각각 새 작품집을 내놓았다. 함성호(48) 시인과 강정(41) 시인이다. 건축평론가 직함을 갖고 있는 함 시인은 사진이 있는 산문집을, 밴드 멤버로도 활동중인 강 시인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네 번째 시집을 들고 나왔다. ■산문집 낸 건축평론가 시인 함성호 시로 지어낸 거유의 뜨락 철학을 품다 지방을 돌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집들과 만난다. 한 칸의 초가부터 90여 칸에 이르는 저택까지, 크기와 모양, 위치, 건축 자재 등이 닮은 듯하면서도 제각각이다. 한결같은 것도 있다. 그 집 건물과 뜨락에 간과할 수 없는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 문제는 집이 품고 있는 철학을 모르면 누구에게든 그저 ‘낡은 집’에 불과할 뿐이란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씨가 지은 ‘철학으로 읽는 옛집’(열림원 펴냄)은 집 지은이의 마음과 집 안에 깃든 뜻을 읽어내는 데 제격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지은 옛집 9곳을 답사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만났다.’가 옳겠다. 그리고 그는 옛집들에서 그 안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를 읽어냈다. 이를테면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獨堂)은 ‘시로 지어진 집’이었고, 정약용의 ‘다산 초당’은 ‘철학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인 이언적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독특한 건축가로 꼽힌다. 그가 경북 경주 양동마을에 지은 ‘독락당’에선 역설이 돋보인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40세에 벼슬자리에서 밀려난 뒤 낙향해 지은 집이다. ‘독락’의 뜻 그대로 남 들일 생각이 없었는지 폐쇄적인 대문을 세웠다. 솟을삼문은 없앴고, 중문은 두 개를 세웠다. 이 같은 건축특성은 그의 정치·사상적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저 희한한 공간일 뿐이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송시열은 충북 괴산 화양리 금사담의 바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은거한다. 하지만 그곳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암중모색의 집이었다. 이황은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안동에만 다섯 채를 지었다. 집이 많았던 것은 그의 학문적 추이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 9명의 집을 ‘만나서’ 그들의 철학을 ‘읽어낸다.’ 저자는 무엇보다 옛집과 옛집을 둘러싼 ‘이야기’에 마음을 둔다. “그 집과 그 집을 지었던 사람의 생각, 무엇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할 때 집이 가진 맨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유(巨儒)들이 직접 집을 지었다는 것도 생경하지만, 여기에 선인들의 학문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잘 버무려져 역사책을 읽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믿음은 “우리 건축은 건물 자체만이 아닌 자연과 함께 계획된다.”는 것이다. 집의 건축 방식보다 집이 지어진 위치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할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새 시집 낸 밴드 출신 시인 강정 청춘 끝나니 비로소 들린 팽팽한 적막 당기고 있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한 단어로 말해야 한다. 언뜻 생각이 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시 한 편을 들여다보자. ‘팽팽하던 힘을 놓아버리면/하나의 점이 수천만 배의 면적을 갖는다/스스로 공간이 되면서 스스로 지워진다’(사물의 원리 중에서) 시인 강정은 ‘활’(문예중앙 펴냄)이라는 시집을 통해 언어라는 화살을 당기고 있는 순간의 팽팽한 적막을 노래한다. 당기고 있는 그때의 긴장, 그때의 몰입, 그때의 적막, 삶의 절정의 순간이 늘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절정의 팽팽함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시편들을 마음껏 보여준다. 빈자리의 적막 속에서 태어난 시들은 그 빈 곳을 메우고 있는, 사라지지 않은, 사라짐을 준비하기에 더욱 강렬한 정념을 표출한다 ‘활’은 2008년 ‘키스’를 발표한 후 3년여 만에 선보이는 네 번째 시집이다. 20대 초반인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에 ‘항구’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시인은 지난 20년 동안 시, 소설, 음악, 문화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내공을 쌓아왔다. 그래서일까. ‘활’을 통해 비로소 자신만의 한 세계를 이루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다른 세계로의 비상을 예비하고 있는 것 또한 시편 곳곳에 담겨 있다. 이 시집의 특징은 ‘고별사’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개의 내가 있다고 합니다/둘은 하나의 상대어일 뿐/알고 있는 모든 수의 무한 제곱일 수도 있습니다’(고별사 첫부분)에서 보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감아 돌아 고별사가 아닌 시편의 무한한 출발을 알린다.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적막을 장전한 키메라’라는 해설제목을 통해 “강정의 새 시집은 시적 언어의 혁신을 모티브로 한 트릴로지의 완결편이자 새로운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두개의 모멘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의 언어는 한 정념이 완결될 때의 적막과 새로운 자유가 꿈틀댈 때의 카오스적 에너지를 동시에 지닌 키메라에 비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이 기미와 예감으로 가득한, 새로운 말을 기다리는 느낌이라면, 그리고 세번째 시집 ‘키스’가 폭발과 파국의 현장에 대한 사후(事後) 술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때 ‘활’은 앞선 두 시집과 더불어 하나의 트릴로지를 구성하며 대미를 장식하는 느낌을 던져준다. 청년 시인과 성년 시인이 교차하는 정거장이라고나 할까.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가톨릭 ‘영성의 심장’을 가다-유럽 수도원·성지 순례기

    가톨릭 ‘영성의 심장’을 가다-유럽 수도원·성지 순례기

    많은 종교는 세상과 섞이기도 하고 세속과 단절한 채 절대자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몸과 마음의 정화를 추구한다. 가톨릭의 수도원은 그런 정화의 가치를 온전히 담은 영성의 뿌리이자 심장으로 통한다. 세상과 교회가 어지럽고 흔들릴 때마다 쇄신과 정화의 기치를 들어 사람들의 영혼을 가다듬었던 수도원은 그래서 세상에서 더 멀리 있을 때 빛이 난다. 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지난 14∼24일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수도원과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에서 진행된 순례의 현장을 소개한다. ●‘수도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트 이상 구현 독일 바이에른 주 수도인 뮌헨 시내를 둘러본 순례단이 처음 찾아간 곳은 성 오틸리엔 수도원. 뮌헨에서 고속도로를 1시간쯤 달려 한적한 시골마을에 접어들자니 고즈넉한 수도원이 얼굴을 내민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창설자이자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트(480~547) 성인이 제시한 규칙과 이상을 변함없이 따르는 수도원. 1500년 전 베네딕트의 정신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는 이곳 사람들의 삶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순례단 앞에 불쑥 나타난 인상 좋은 젊은 수사가 수도원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밭이며 축사·돈사, 출판사, 김나지움(중·고등학교) 교사, 체육관…. 이곳에 살고 있는 100여 명의 수사라면 누구라도 빠짐없이 해야만 하는 노동의 현장들이다. ‘기도하고 노동하라’(Ora et labora). 사막과 동굴에서 흩어져 살던 수도승들을 한 곳에 모여 살게한 정주(定住) 수도원을 처음 세운 베네딕트의 규칙이 생생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 소리가 수도원의 적막을 깬다. 줄을 지어 성당을 들어 선 수사들. 가톨릭 전례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률에 맞춘 ‘요한의 첫째 서한’에 이어 성경 구절 봉송과 시편 독서, 신자들의 기도, 주의 기도를 이어가는 수사들의 표정이 엄숙함을 넘어 신비롭게 다가온다. 수사들의 기도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순례단의 어수선한 몸짓들. 성당 밖으로 순례단을 인도해 던지는 한 수사의 말이 인상적이다. “세상의 소리는 크게 울린다. 그 속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소리는 작다. 우리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선 침묵이 필요하다.” 하루 5차례의 미사말고도 늦은 밤 끝 기도 부터 새벽기도까지 수사들의 침묵이 이어진다. 기도와 노동의 조화를 통해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들의 수도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해발 1300m 알프스 산자락 ‘단절의 땅’ 베네딕도 수도회가 ‘기도와 노동의 조화’를 추구했다면 브루노(1030~1101) 성인이 설립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영성은 철저한 고독과 침묵을 통한다. 순례단이 두 번째로 찾은 해발 1300m 알프스 산자락, 프랑스 생피에르 샤르트뢰즈에 자리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11세기 브루노 성인이 창립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이다.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단절의 땅’이자 ‘창살 없는 감옥’.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그 수도원은 지난 1000년간 외부 세계에 드러나지 않고 수도자들의 고독한 기도처로 존재했던 그대로 순례단에게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구에 수도원 모델 하우스 격으로 설치된 박물관을 통해 수도원 속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33명의 수사가 오로지 기도 수행을 위해 홀로 생활하는 독채들. 1층에 조그만 정원과 목공 및 철공 작업실, 장작보관소,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작은 침대와 기도공간, 세면대, 책상, 성모상을 모신 경당이 들어있다. 매일 아침 함께 드리는 공동미사를 빼곤 모든 시간을 각자의 거처에서 홀로 지내는 수사들은 하루 한끼만 먹는다. 방마다 마련된 음식 투입구를 통해 제공되는 음식은 혼자 해결한다. 1주일에 한번씩 하는 산악행군 때 말고는 철저히 침묵한다는 수사들은 불교 선사들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돌던 때에도 가난과 고독 속에 하느님의 음성을 찾아가는 엄격한 규칙을 고수했다는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휘장엔 이렇게 쓰여있다. ‘세상은 돌지만 십자가는 우뚝하다.’ 알프스 자락 그곳에서 1000년간 이어 온 수사들의 고독한 침묵이 가톨릭과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면 무리한 생각일까. ●聖者 프란치스코의 고향 순례단이 마지막 찾은 영성의 땅은 로마에서 차로 2∼3시간 떨어진 목가적인 지방 아시시. ‘제2의 예수’라 불릴 만큼 성자 중의 성자로 꼽히는 프란치스코(1182~1226)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스무살 때 기사의 꿈을 품고 참가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있다가 병을 앓고 난 뒤 회심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무소유의 탁발승이 됐던 인물이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세속화에 반발해 초기 수도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뜻을 세웠던 그는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채 나환자며 거지 등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청빈’ ‘순결’ ‘순명’. 그가 세운 수행의 정신은 아시시 곳곳에 스며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맨 먼저 수리했다는 작은 ‘포르치운쿨라’성당과 그 성당을 품고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프란치스코의 묘가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사형수들의 처형장이 있어 ‘죽음의 언덕’으로 불렸던 자리에 묻히기를 원해 유해가 안치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희망의 언덕’ ‘천국의 언덕’이라 부른다. 극단적인 가난을 택해 청빈과 단순함을 목숨처럼 여겼던 프란치스코. 그의 영성이 오롯이 담긴 아시시를 떠나는 순례단에게 한 수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잠깐 지나가는 순례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집착하며 살아간다.” 오틸리엔(독일)·상트피에르 샤르트뢰즈(프랑스) 아시시(이탈리아) 글 사진 김성호 편집위원
  • [박원순 시장에게 바란다] “광화문서 벼농사 민족의 광장될 것”

    [박원순 시장에게 바란다] “광화문서 벼농사 민족의 광장될 것”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16일 “대한민국의 중심이자 서울 600년 역사를 간직한 광화문광장에 벼농사를 짓는다면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상들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고, 자연과 함께 살아 숨쉬는 민족의 광장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9년 8월 조성된 광화문광장은 서울의 중심 공간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추진한 과감한 시도였다. 하지만 볼거리 위주의 광장으로 운영되면서 역사의 광장이 지나치게 ‘열린 광장’으로 내려와 버렸고 적막한 광장으로 스러졌다는 지적마저 일었다. 김 구청장은 “광화문광장에서 가까운 창덕궁 내 창의정은 조선 인조 때부터 임금이 직접 모를 심고 수확해 그 볏짚으로 초가를 올렸으며,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만든 곳”이라면서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었듯이 광화문광장에서 벼농사를 지으면 농업의 중요성과 의미를 공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구청장은 전임 서울시장에게도 건의한 바 있다. 그가 구상하는 벼농사 방안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뒤쪽 잔디밭에 너비 10m, 길이 100m로 만들어 유기농법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어린이 이삭봉사단(가칭)을 모집해 볍씨 파종에서 수확까지 농사 전 과정에 참여·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추수 뒤 겨울에는 논바닥에 물을 얼려 천연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하면 괜찮겠다고도 했다. 이런 제안에 한국농민연대·환경농업단체연합회 등 30여개 농민단체들이 지지 성명을 보냈고, 흙과 모판 등 각종 기자재를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단체도 생겨났다. 김 구청장은 “벼농사는 ‘농자천하지대본’이란 전통을 재조명하고 자연친화적인 도시 홍보방법으로 광화문광장의 상징성에 부합한다.”며 “광화문광장에서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이 직접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1) 中 혁명의 아이콘 마오쩌둥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1) 中 혁명의 아이콘 마오쩌둥

    1966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천안문 광장을 가득 채운 홍위병들을 사열하는 순간 문화혁명은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10년 동안 중국은 상처로 얼룩져 갔다. 1976년 마오의 죽음과 함께 문화대혁명은 종결되었고, ‘마오’라는 아우라에 지배되던 중국 현대사도 일단락됐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 창립(1921년) 멤버 12인 중 한 사람으로, 혁명의 씨앗을 뿌린 ‘대장정’(1934년)을 이끌었던 홍군의 일인이었다. 아울러 국공합작을 이끌어 중일전쟁(1937년)에서 승리하고, 1949년 10월에는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는 천안문 광장에 섰다. 신중국 성립 이후 많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내란’ 문혁 때도 마오는 홍위병 곁에 있었다. ‘마오쩌둥 어록’은 홍위병들의 성경이었다. 이렇듯 중국 현대사는 마오의 족적을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오가 걸어간 길은 곧 중국혁명이 걸어간 길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마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민들의 평가는 양가(兩價)적일 수밖에 없다. 마오에 대한 평가는 바로 중국 인민인 ‘나’, ‘우리’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현실에 대한 ‘나’의 저항서 시작 마오쩌둥은 후난(湖南)성 샹탄(香潭)현 출신으로, 소작농에서 자수성가하여 중농이 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머슴과 마찬가지로 호되게 어른 몫의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마오의 어린 시절 학업은 3년 정도의 서당 공부가 전부인데, 부친이 수를 셈하고 장부를 정리할 정도의 지력만 키우고, 소송에 대처할 수 있는 고문만 배울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마오는 자신이 저질렀던(?) 두 가지 일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하나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서당 훈장에게 저항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땡땡이쳤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력과 힘으로 가족을 억누르는 부친에게 목숨을 걸고 대들면서 반항했던 일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오는 그 사건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 “공개적인 반항으로 나의 권리를 지키려고 할 때면 아버지가 누그러지고, 내가 온순하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때는 그가 오로지 욕만 하면서 때린다는 사실을 알았다.”(‘마오쩌둥 자서전’) 마오는 경험을 통해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체득했다. 혁명이란 다른 누구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항을 통해서만 획득된다는 것. 그것은 중국 인민 전체에게 적용되는 문제였다. 마오는 신해혁명을 창사(長沙)에서 맞았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성공 이면에서 혁명의 ‘덧없음’을 경험했다. 그는 빈자와 피억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난의 혁명가들이 상인, 학자, 부르주아지 및 돌아선 군중에 의해 살해당하는 현장을 보게 된다. 혁명이 반혁명으로 변질되던 1910년대에 베이징의 한 처량한 회관에서 탁본을 베껴 쓰면서 적막감을 토로했던 루쉰처럼 마오도 학교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몇 해 동안 점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도서관에서 서구와 중국의 근대 지식을 흡수하는 데 쏟았을 정도다. 그러다 5·4운동(1919년)이 일어날 즈음 마오는 베이징도서관 사서의 조수로 일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접하게 된다. 오랜 적막 뒤 마오가 깨달은 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혁명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인민 스스로가 자신을 해방하고 혁명의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이 혁명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의 임무란 무엇인가. 공산당원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인민을 계몽하거나 그들에게 혁명의 열매를 시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혁명의 주체로 서게끔 실마리를 풀어 주고, 옆에서 뒤에서 그들을 돕는 것, 그게 혁명가의 임무였다. ●‘인민에 의한’ 혁명을 꿈꾸다 “지식을 얻으려면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에 참여하라.”(‘실천론’, 1937년)는 말대로 마오는 혁명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현실의 농민들에게서 ‘몸으로’ 배웠다. 그에게 ‘몸으로’는 결코 은유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는 ‘신체단련’이라는 명목으로 한겨울에 들판을 누비거나 산을 오르내리는가 하면, 남중국 일대를 무전여행하기도 했다. 걸어 다니면서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를 가졌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중농 출신인 마오는 스스로를 인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지식인들과는 달랐다. 마오는 ‘인민을 위한’ 혁명이 아닌, ‘인민에 의한’ 혁명을 꿈꿨다. 그리고 스스로를 그 ‘인민’이라고 생각했다. 마오는 소련의 사회주의 이론이나 강령에 중국 현실 꿰맞추기를 거부하고, 혁명의 현장에 대한 정확한 장악과 실제적인 조직화 사업을 통해 ‘중국적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먼저 농촌 근거지를 만들고 농민운동을 조직화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 경험의 결과물이 ‘후난성 농민운동 시찰보고서’(1926년)인데, 여기서 마오는 농민의 실생활을 직접 조사하고, 농촌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객관적인 자료로 보여 줬다. 농촌 경제의 모순과 농민의 계급분화 및 갈등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런 판단하에 그는 소유 토지 면적이나 높은 이자율뿐만 아니라 돼지기름, 소금, 석유, 차, 종자, 비료, 장작, 가축, 농기구 유지 비용까지 자세히 분류한 후, 그 소유 정도에 맞춰 농민계급을 보다 세분화했다. 이런 실천적 분석을 통해 마오는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혁명을 구상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식 사회주의’의 탄생이었다. 몇 차례 계속된 국민당의 포위공격을 피해 장시(江西)성 징강(井岡)산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은 근거지를 버리고 ‘도주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망으로 시작한 ‘대장정’은 승리로 귀결되었다. 1년 동안 공산당은 18개의 산맥을 넘고(그중 5개의 산은 만년설로 덮여 있었다), 24개의 강을 건넜으며, 12개의 성을 통과했다. 또 62개의 마을과 도시를 점령했으며, 전투를 치르고 돌파한 지방 군벌의 포위망이 무려 10개에 달했다. 지나가는 곳마다 대중 집회를 열어 노예를 해방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이 초인적인 고난의 행군을 가능하게 했던 규율은 가난한 농민들로부터는 어떤 것도 빼앗지 않는다는 것, 지주들에게 몰수한 재산은 소비에트 정부에 전달해서 처분한다는 것, 농민들과의 모든 거래는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한다는 것 등이었다. 지도자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아예 없었다. 마오는 이들과 똑같이 자기 ‘몸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 지역에 마련된 근거지에서 마오가 다른 홍군에 비해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있다면 모기장 정도였다고 한다. ●주어는 ‘나’가 아니라 ‘우리’다 1938년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는 대장정을 마친 공산당의 근거지를 찾아가 직접 보고 들은 중국공산당의 실체와 역사를 담은 ‘중국의 붉은 별’을 출간했다. 여기에는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 스노는 마오의 회고담을 들으면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마오가 행한 역할은 선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개인적인 마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을 의아해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오의 진술에서 사용되는 주어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우리’였기 때문이다. 어느 혁명가가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지 않았겠는가마는 마오는 자신을 온전하게 인민 속으로 던졌다. 때문에 역사적 현장에서 마오는 비인칭으로 존재했다. 자신의 이름을 잊고 혁명의 흐름에 몸을 던지면서 인민과 함께 걸어간 혁명의 동반자 마오의 혁명은 실패였을까 성공이었을까.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을 내 삶의 지침으로, 나의 앎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변혁의 순간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마오의 삶이 일관되게 보여 주는 메시지다. 마오는 어떤 일이든 자신을 온전히 그 현장에 넣지 못하면, 몸으로 전력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마오쩌둥이 중국 현대사의 선봉에 선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였음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정치가라는 이름보다 혁명의 순간에 자신을 내던져 자신을 산 혁명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최정옥 남산 강학원 연구원
  • [씨줄날줄] 폐선의 부활/임태순 논설위원

    길은 사람과 차가 다녀야 제격이다. 사람의 왕래가 많던 길도 인적이 끊기면 금방 잡초가 무성해진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방치된 폐도만큼 을씨년스러운 풍경도 없을 것이다. 철도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던 철도도 쓰임새가 적어지면 용도폐기돼 폐선이 된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 녹슨 철로는 활력과 역동성은 사라지고 적막과 침묵만 남아 마음 한구석을 스산하게 한다. 최근 폐선 철도가 레저, 관광, 휴식공간 등으로 잇따라 부활하고 있어 반가움이 앞선다. 이용객이 적어 폐선된 강원도 정선과 전남 곡성은 ‘폐선 부활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 동강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 풍광이 뛰어난 두 곳은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를 운영,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지역경제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팔당~양평 일대의 중앙선 폐선 구간 26.8㎞가 자전거도로로 변신, 때마침 완성된 한강 수변공간과 어우러져 자전거 애호가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엊그제는 21년간 방치돼 있던 너비 30m 길이 1.7㎞의 서울 문정동 폐철도 부지가 숲길로 재탄생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고 한다. 지난해 경춘천 복선전철 개통으로 폐선으로 남게 된 강원도 춘천시 남면~김유정역 20㎞ 구간은 철도관광지로 개발되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철도 폐선은 2000년 전후로 해서 부쩍 늘고 있다. 폐선은 철도 민영화로 적자노선을 정리해온 데다 최근에는 전철구간의 확장으로 곡선구간을 직선화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철도시설공단에 따르면 폐선 부지는 장항선 천안~서천 구간 106.1㎞에 208만㎡ 등 전국 11개 노선에 367.8㎞, 891만 6000㎡에 이른다. 폐선은 자전거도로, 레일바이크 등으로 변신해 휴식을 제공하고 수익을 올리기도 하지만 아직 대부분은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철도 주변은 개발이 제한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데다 강이나 산을 끼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웰빙시대를 맞아 레저공간이나 관광지로 활용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폐선은 중앙선 고명역~도담역, 전라선 서도~산성·남원~주생 구간에서 보듯 대부분 한적한 시골이나 산골 등 외진 곳에 있어 경제적 활용도나 개발 실익이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코레일과 철도시설공단은 역사, 철도 등 폐선 부지를 활용하기 위해 여러가지 묘책을 짜내고 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지혜를 짜내 더 많은 폐선에서 사람들의 향기가 넘쳐 나길 기대해 본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만추 그윽한 ‘新부여 8景’ 찾아 떠나볼까요

    만추 그윽한 ‘新부여 8景’ 찾아 떠나볼까요

    책 한 권 들고 떠난 여정입니다. ‘윤재환의 신부여팔경’입니다. 세월이 흘렀으니,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에도 그에 걸맞은 새 ‘부여 8경’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책을 따라 부여를 돌아봤습니다. 패자의 역사가 퀴퀴하고 낡은 유물 위에 덧씌워져 있을 거란 선입견도 함께 가지고 갔지요. 그런데 옛것들을 되짚어 가는 길에서 뜻밖에 놀랍고 아름다운 풍경들과 만났습니다.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되 결코 누추하지 않은’, 백제의 향기 오롯한 그런 풍경 말입니다. ●꽃이 진다고 역사를 탓하랴 잊혀진 왕도(王都)는 처연하다. 육당 최남선은 1948년 ‘조선의 고적’을 통해 부여를 이렇게 묘사했다. “평양은 적막한 중에 번화가 드러나고, 경주는 번화한 중에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실시(失時)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 못한 천재같이, 대하면 딱하고 섧고 눈물조차 그렁거리”는 곳이라고. 부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지 싶다. 고을마다 대표적인 여덟 경치는 있게 마련이다. 부여 또한 마찬가지. 1경은 백제탑의 저녁 노을, 2경 저녁 무렵 부소산에 내리는 부슬비, 3경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 4경 낙화암에서 망국의 한을 우짖는 소쩍새, 5경 구룡평야에 내려앉는 기러기떼, 6경 백마강에 고요히 감겨드는 달빛, 7경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아지랑이, 그리고 8경 규암나루로 들어오는 돛단배 등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뀐다. 사라진 것도 있고, 보탤 것도 있다. ‘신(新) 부여 8경’은 부여 읍내를 기준으로 내 4경과 외 4경으로 나눴다. 그중 제1경은 금성산 조망이다. 2경은 부소산 산책, 그리고 3경 백제탑 석조와 4경 궁남지 연꽃, 5경 무량사 매월당, 6경 장하리 삼층석탑, 7경 대조사 미륵보살, 8경 주암리 은행나무가 뒤를 잇는다. 으뜸가는 경치를 ‘금성산 조망’으로 꼽은 것은 부여와 백제를 바로 보자는 뜻에서다. 금성산에 오르면 부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그에 견줘 2경 ‘부소산 산책’은 옛것의 향기를 좇자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외지인들에겐 부소산이 사실상 1경이다. 널리 알려진 부여의 아이콘들은 죄다 부소산에 몰려 있다. 낙화암, 고란사, 백마강 등 귀에 익은 관광지는 물론, ‘삼천 궁녀’의 원혼을 위로하는 궁녀사 등 덜 알려진 유적지도 빼곡하다. 부소산은 낮다. 높이 106m에 불과하다. 남쪽 기슭은 성왕 16년(538년) 이후 123년 동안 백제의 왕궁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북쪽 사면은 낙화암을 통해 백마강과 접해 있다. 산책로는 부소산 전체를 에둘러 조성돼 있다. 오르막 내리막은 있지만, 험하지 않아 2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부소산의 핵심은 낙화암이다. 패망한 백제의 궁녀 3000명이 꽃처럼 몸을 날려 자결했다는 곳. 부소산 들머리에서 채 20분이 안 걸린다. 낙화암 정상엔 육각형의 정자 ‘백화정’이 세워져 있다.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어졌다. 백화정 아래로 백마강이 흐른다. 멀리 신무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부여에 닿으면 백마강이라 불린다. 호암리 천정대 앞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 정도를 흐르는 ‘금강’이 바로 백마강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흔적 가득한 무량사 국보 제9호 백제탑(정림사지오층석탑)과 궁남지까지 살피면 내 4경은 모두 돌아본 셈. 이제 외 4경을 돌아볼 차례다. 그 첫걸음은 무량사다. 고란사와 마찬가지로 개창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9세기말 통일신라시대 때 처음 지어졌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견해다. 100년 넘은 싸리나무를 깎아 만든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절의 중심 건물인 극락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 제356호. 그런데 이 건물, 문외한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단풍 든 나무 아래 떠억하니 버티고 섰는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자태로 단박에 이방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극락전은 중층 불전으로 지어졌다. 겉으로는 2층인데 내부는 트여 있는 형태다. 배흘림 기둥이 든든하게 건물을 받들고, 네 모서리마다 활주를 세워 균형감을 더했다. 단청은 있는 듯 없는 듯 벗겨졌다. 하나, 색이 바랬다고 본연의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 세월의 깊이는 외려 더 무겁게 전해 온다. 무량사는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며 비승비속의 몸으로 떠돌던 그의 영정이 우화당 뒤편 전각에 봉안돼 있다. 그의 절개처럼 곧은 부도탑은 일주문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여기서 순서를 바꿔 8경 주암리 은행나무를 먼저 찾는다. 무량사와 가깝기 때문이다. 녹간마을 은행나무는 백제 성왕 16년(538)에 심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천연기념물 제320호. 풍파를 딛고 살아낸 세월이 1000년을 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 한자락 없으랴. 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이를 알렸다고 한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이 망할 때마다 칡넝쿨이 은행나무를 감아 나라의 망조를 예언했다. 제 몸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데도 신묘한 재주를 펼쳤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이 마을만은 화를 입지 않았고, 1910년 구제역 같은 괴질이 이웃 마을 소들을 삼켰을 때도 이 마을 소들은 끄떡없었다. 고려시대 때 인근 절집 주지가 암자 중수를 위해 자신의 가지를 베자, 급사시켜 응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현재 나무는 부분적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11월 초면 1158㎡에 달하는 몸피 전체가 노란 옷으로 갈아 입는다. ●너른 부여 뜨락 품은 가림산성 6경 장하리 삼층석탑과 7경 대조사 미륵보살도 인접해 있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백제탑과 많이 닮았다. 백제 불교의 향기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셈. 대조사는 황금빛 큰새(大鳥)가 현신한 자리에 세워졌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높이 10m의 미륵보살은 절집 위쪽에 세워져 있다. 미래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바로 그 보살이다. 인체비례를 무시한 게 특징. 얼굴은 각진 데다, 귀는 크고 눈은 작다. 신체 비율도 4등신에 가깝다. 어느 모로 봐도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운 외모다. 하지만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후백제 멸망 이후엔 고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부여 사람들에게 미륵 보살은 일종의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을 게다. 신 부여 8경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대조사를 품고 있는 가림산성(옛 성흥산성)은 반드시 오르는 게 좋다.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확인된 것만 1500m 정도 된다. 가림산성의 자랑은 시원한 조망이다. 백제 도성을 따라 흐르는 금강 하류 일대의 드넓은 뜨락이 한눈에 담긴다. 가까운 논산과 강경은 물론, 익산의 미륵산과 멀리 장항까지 굽어볼 수 있다. 글 사진 부여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 간 고속도로→공주~서천 간 고속도로→부여 나들목 순으로 간다. 서해안고속도로→대전~당진 간 고속도로→공주~서천 간 고속도로→부여 나들목 순으로 갈 수도 있다. 고속버스는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여까지 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맛집 구드래 선착장 주변에 맛집들이 몰려 있다. 구드래돌쌈밥(836-9259)은 다양한 종류의 쌈밥이 주 메뉴다. 향우정(835-0085)은 한정식, 장원 막국수(835-6561)는 충청도 특유의 막국수로 입소문이 났다. ▲잘 곳 부소산성 맞은편에 깔끔한 숙박업소들이 많다. 숙박료도 3만~4만원으로 싼 편.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1934년 식민도시 경성의 여름은 뜨거웠다.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작품 ‘오감도’(烏瞰圖) 때문이다. 작가는 2000여편 중에서 30편을 골라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5회를 넘기지 못했다. 띄어쓰기 무시! 문법 파괴! 기호와 숫자가 문자를 대신하는 시! 독자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당장 원고를 불살라라, 작가가 미쳤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그가 보기에 대중은 게으르고 편협했다. 자신은 지금 시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뛰어넘고 있는 중인데 독자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문학관만 소비하는 중이니 말이다. ‘오감도’의 작가 이상(李箱·1910~1937). 그는 정말 시대와 불화한 천재였을까. 시대가 박제시켜 버린 천재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나 영감에 의지해 개성을 뽐내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모두가 문명화, 근대화라는 덧없는 망상 속에서 허둥댈 때, 그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이었다. ●모던 경성, 적빈(赤貧)의 시공간 1910년 9월생인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통치 기간인 1920년대에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제국 일본의 식민 경영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아울러 경성의 도시경관은 총독부 건물, 경성제국대학, 백화점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의 풍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근대적 학교교육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출판산업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동시대의 근대문화를 흡수하고 소비하는 ‘대중’이 유럽풍 옷가지와 장신구로 몸을 두르고 커피 한잔을 찾아 방랑하는, 보들레르가 명명했던 ‘산보객들’이 경성 한복판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건축과 학생이었던 이상 역시 화구통을 메고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이었다. 끼니를 잇기 힘든 가난한 중인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현미빵을 팔아 학교를 다녔다. 그가 배우는 최신 기하학과 건축학이 식구들과 이웃의 허기를 달래줄 날은 참으로 요원했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의 가난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돈은 아비와 자식, 친구와 애인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의리도 인정도 돈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은 가난한 서민들뿐 아니라 도시인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소비와 향락, 학교에서 강요하는 청결하고 근면한 생활. 이상이 보기에 이것은 실상 일본식 유행풍속을 좇아 양복을 입고 몇 개 안 되는 다방을 전전하면서 ‘교양입네’ 하는 꼴이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도시 경성은 제대로 문명화를 구가하지도 못하면서 박래품 소비에만 열광하는 ‘무늬만 근대도시’였다 경성의 도시인들은 모두 ‘모던’(modern)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정작 자신의 텅 빈 정신은 보지 못하는 불구자들이었다. 왼팔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기묘한 형국처럼 도시인들은 자신을 비추는 문명의 거울 앞에서 분열증에 시달렸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 속에서도 겉으로는 잘사는 척, 문명인인 척하기에 급급한 삶이라니! 이상은 이 사태가 공포스러웠다. 그 수선스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가난에 맞서야 한다! ●나의 펜은 나의 칼이다 1930년 ‘조선’에 연재된 첫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일’을 필두로, ‘이상한 가역반응’,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기하학과 일본어가 맞물린 시들과 ‘지도의 암실’ 등의 소설, 다양한 수필이 발표된다. 문명을 지탱하는 정신의 가난과 대결하면서 그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어가 국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조선어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가난과 소외가 무엇보다도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 사이에 놓인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1930년대를 지배하는 ‘모던’이라는 말 안에는 그 어떤 진지한 성찰도 부재했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양복(洋服), 양행(洋行)과 같이 서양풍을 내세운 습속에만 매달릴 뿐 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에서 나온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았다. ‘모던’이란 말은 식민지 조선에서 텅 빈 기호였다. 그 안에서 어떤 정신적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은 그런 시대를 ‘활자허무시대’라고 명명했다. 이상은 그렇게 기호에 갇혀 자기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문명인의 삶을 해부하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런 그에게 문학은 대중이 기대하는 여가선용이나 위안의 도구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 특정한 계급의 현실을 드러내고 정치적 방향을 선동하는 이념의 도구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문명의 매커니즘을 해부하고, 소외된 삶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문학의 일차적인 임무여야 했다. 이상에게 펜은 그런 가난한 문명과 나태한 정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어야 했다. 그의 시 ‘오감도’는 숫자와 여러 가지 기호들을 통해 근대적 삶의 폐쇄성과 불구성을 해부하는 ‘메스’로서의 문학이었던 셈이다.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 자신의 시도가 불러일으킨 적대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몰라보는 대중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관광객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관조하지도 않았다. 속악한 돈의 횡포나 비정한 이기주의를 직시하면서도, 그는 자신 역시 허위에 찬 근대의 산물임을 처절하게 의식했다. 박태원과 김기림 같은 지인들은 이상이 퇴폐적 카페를 열고 여급들과 연애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문학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문명을 비판하고 자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추려고도, 미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배반과 궁핍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근대문명을 고민하고, 그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이상, 시대의 혈서를 쓰는 자 1936년 가을, 이상은 일본 도쿄로 떠났다. ‘날개’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큰 주목과 호평을 받은 직후였다. ‘날개’는 돈으로 마음과 정신을 사고파는 근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서 이상은 주인공이 날개를 얻어 비상할 것을 꿈꾸는 장면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해부를 넘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그 도덕적 비전이 식민지 조선 바깥에, 현해탄 건너 문명의 본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허영의 낙원이었다. 특가품, 할인품,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 긴자 거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성병에 걸린 듯 화려하게 치장한 채 돌아다녔으며, 최신 서적들은 그저 교양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거기에도 자기 삶의 정열을 태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가 더 노골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영국 런던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딜 가도 적막, 암흑, 권태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도덕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20세기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는 문명이란 정신의 가난만 키우는 황금만능의 허위 세계임을, 이상은 낯선 땅에서 뼛속 깊이 절감한다. 그해 겨울 도쿄 거리에서 이상은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감방에 갇히게 된다. 도일(渡日)하기 전부터 앓았던 폐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문명의 속악성은 그의 마음에서 한 가닥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글을 쓰면서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17일. 채 십년이 되지 않는 창작 기간 동안 오직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글을 썼던 이상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친구 김기림의 말대로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을 갖고 제 혈관을 짜서 쓴 시대의 혈서였다. 죽기 몇 달 전 탈고한 소설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은 자신의 묘지명을 작성한다. “일세의 귀재(鬼才) 이상은 그 통생(通生)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일천구백삼십칠년 정축(丁丑) 삼월삼일 미시(未時)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이십오세와 십일개월.”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로부터 생과 예술의 본질을 투시하려 했던 자.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이상은 그렇게 끝까지 예리한 언어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오선민 남산강학원 연구원
  • 지식인 눈에 비친 장자의 정신세계

    ‘나는 장자다:왕멍, 장자와 즐기다’는 삶의 질곡과 압박, 일상의 굴레와 번쇄를 어떻게 대하고 넘어서야 할지를 대면하게 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깜깜한 어둠을 건너야 했던 한 지식인이 장자를 어떻게 보고 체득하고 있는지를 이 책은 절절하게 보여준다. 가슴과 경험을 통해 장자의 마음을 가지고 독립적인 지성과 자존을 지키려 했던 난세 한 지식인의 독백이며, 인생 독본이라고나 할까. 지은이 왕멍(77)은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지식인. ‘신중국’ 건립 이후 정치 풍파를 한 몸으로 겪은 그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공산당 중앙위원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1957년 우파로 찍혀 9년 동안 강제 노동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16년 동안 신장 지역에 쫓겨 가 있기도 했다. 지은이는 “장자는 인간 내면의 초탈과 해방을 얻는 방법인 소요(逍遙)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했다.”면서 “장자를 음미하려면 소요에 대한 그의 생각과 환상에서 풍기는 독특한 멋과 분위기를 먼저 음미하라.”고 권한다. 왕멍은 경쟁과 분쟁이 갖고 있는 변화의 힘을 긍정하면서도 장자가 경쟁과 분쟁이 갖는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 속에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인간 행동을 수정하고 균형을 맞추고 절제하는 데 (장자의 주장이) 도움이 됐다.”고 평했다. 또 장자가 만물의 상대성과 갖가지 현상의 무의미함, 허무함을 깨닫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장자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노자와 장자도 한쪽 이치만을 이야기했다.”는 비판도 담았다. 저자는 “담담하고 고요하며 적막하고 허무하고 무위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천하의 분쟁과 소란을 ‘마른 고목과 식은 재처럼 대하는 것’을 더더욱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인간과 문화의 황당함과 잔혹함, 일방적인 행동을 반성하고 방향을 바꾸어 사람의 마음과 욕망, 사람들이 말하는 문화가 아닌 하늘(자연)의 뜻에 따라가야 한다.”고 장자의 말을 빌려 답한다. 지은이는 장자가 남다른 상상을 통해 무궁함과 영원함, 출중함에 다가갈 수 있는 정신 확장의 계기를 찾았다고 평했다. 대붕의 날갯짓과 같은 장자의 드넓은 기세와 기백, 몸의 길이가 수천리에 달하는 대어 ‘곤’과 같은 거침없는 종횡무진, 난감한 세상사에 대한 통달과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초연함, 장엄하면서도 다채로운 기상. 이는 굴욕과 억압을 견뎌 온 왕멍 자신의 거울이었다. “나는 장자다.”란 그의 외침은 궁핍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의 주문이기도 했다.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태국 치앙라이-시간은 그들의 규칙대로 흐른다

    태국 치앙라이-시간은 그들의 규칙대로 흐른다

    고산족인 아카족 마을의 어느 집 마당에서 조속조속 졸고 있는 빨래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HAILAND CHIANG RAI 시간은 그들의 규칙대로 흐른다 태국 북단의 치앙라이를 다녀왔다. 화사한 정원을 둘러보고 순백의 사원을 방문했으며 구수한 재래시장도 구경했다. 그리고 소수민족인 아카족의 마을에도 잠시 머물렀다. 한나절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2박 3일의 일정 중에 그게 제일 좋았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의 무구한 표정이 내 코끝에 걸려 있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노중훈 취재협조 태국관광청 www.visitthailand.or.kr 치앙라이Chiang Rai 여정의 첫머리를 장식한 곳은 도이 퉁Doi Tung이었다. 태국과 미얀마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산인데, 산의 등줄기들이 중첩된 이곳에서 세심하게 들여다본 대목은 무성한 수목이 아니라 그 넉넉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마을의 감동적인 변천사였다. 여기에는 현 국왕의 작고한 어머니이자 태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리나가린드라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상전벽해의 마을과 순백의 사원 도이 퉁이 자리한 곳은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이기도 하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가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은 익히 알려진 대로 아편 생산 기지로 악명이 높았다. 사람들은 마약을 재배하고 하릴없이 마약에 중독돼 갔다. 사람과 마을과 자연이 모두 피폐해지는 상황을 가슴 아프게 여긴 스리나가린드라 여사는 이른바 ‘도이 퉁 프로젝트’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녹화 사업, 아편 추방 운동, 주민 재활 사업 등을 맹렬하게 추진했다. 그녀는 마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에게 직접 꽃과 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가르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마약이 지배하던 마을은 점차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도이 퉁은 자연과 인간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공동체의 모범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도이 퉁에는 커피와 마카다미아 농장이 있다. 1983년부터 태국 정부에 의해 아편의 온상 양귀비 밭이 불태워지자 대체 작물로 이들이 선택됐던 것이다. 특히 커피의 존재감이 도드라진다. 태국과 커피의 상관관계에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태국, 특히 북부 고산지대에 위치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Chiang Mai는 커피 재배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맛있는 커피 생산을 위한 기본 삼박자인 고도와 기후와 토양 등이 두루 적합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이 퉁에서 경험한 커피의 향과 맛은 일품이었다. 맛이 복합적이면서도 각각의 맛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 채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보통의 커피와는 다른 상큼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다. 도이 퉁에서 내려와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왓 롱쿤Wat Rong Khun을 찾았다. 왓 롱쿤은 화이트 템플, 말 그대로 백색 사원이었다. 사원은 두 가지 의미에서 눈부셨다. 건물의 장식미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외관이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어 파란 하늘과 강렬한 색의 대비를 이뤘다. 사원의 흰색은 부처님의 순결을, 사원에 쓰인 흰색의 유리는 우주를 밝게 비추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어쨌든 세계를 유람하며 수도 없이 많은 불교 사원을 가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증유의 사원을 창조해낸 인물은 찰럼차이Chalermchai라고 하는 지역의 ‘괴짜 예술가’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1998년에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삽을 뜬 지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왓 롱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방인의 눈에는 흠잡을 데 없는 ‘완성품’처럼 보이지만 창조자의 생각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의 끝없는 창작욕인지 아니면 터무니없는 과욕인지 알 수 없지만 찰럼차이는 해마다 조금씩 왓 롱쿤의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앞으로도 수십년의 공기工期를 더 들일 것이라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풍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화이트 템플의 완성은 그의 사후에나 가능할 일일 것이다. 고산족 마을에서 보낸 한나절 숙소에서 땀으로 뒤범벅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시내로 나가기 위해 자전거 택시에 올랐다. 지붕이 있는 승객용 삼륜 자전거는 노회한 운전사의 인도 아래 물 흐르듯 막힘없이 나아갔다. 지천명을 넘겼음 직한 사내의 종아리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세 바퀴 택시’에서 내려 재래시장 탐방에 나섰다.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컬러풀한 열대의 과일들과 푸릇푸릇한 채소들과 다양한 종류의 길거리 음식들이었다. 그중에는 우리의 순대와 비슷해 보이는 먹을거리도 있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손님을 부르는 소리, 파는 자와 사는 자 사이의 흥정, 그리고 물건을 구입한 사람이 셈을 치르는 소리로 시장은 들끓었다. 치앙라이의 고산지대는 흔히 ‘살이 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카렌족, 아카족, 리수족, 몽족 등의 소수민족이 촌락을 이루어 곳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아카족의 마을로 향했다. 마을이 산악 지대에 올라앉아 있는 탓에 중간에 사륜구동 차량으로 갈아타야 했다. 아카족은 중국 남부의 윈난성 등지에서 메콩 강을 따라 이주해 온 부족이다. 이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야채나 콩을 재배하며 살아간다. 아카족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점은 물을 유난히 무서워하고,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물의 영혼을 두려워한 나머지 잘 씻지 않는데, 물에서 말라리아나 박테리아가 나온다고 믿는단다. 일각에서는 이런 미신이 물이 부족한 아카족의 환경적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아카족의 남자는 15세, 여자는 13세부터 결혼할 수 있다. 결혼식은 보통 여자가 임신을 한 연후에 이뤄지는데,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남자 측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 살펴본 아카족 마을은 짐작했던 대로 시간이 정지한 곳처럼 보였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허름한 풍경과 열악한 삶의 조건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외부인의 일방적인 시선과 편견에 가까운 기준을 마을 주민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잔주름이 많은 할아버지는 대를 엮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으며, 마을 아낙들은 동전이 주렁주렁 달린 전통 모자를 쓴 채 그늘 밑에서 한담을 나누었다. 까맣게 그을린 사내는 내리꽂는 햇볕에 곡식을 말리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며 들까불었다. 그들은 늘 그랬듯이 고유한 시간의 법칙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일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딱히 밝을 것도, 딱히 어두울 것도 없는 그들의 얼굴은 관광객의 순간으로 규정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면면히 이어지는 일상의 표정이었다. 어느 가정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았다. 달걀부침과 나물과 찐 호박이 상 위에 올랐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다음에는 따끈한 엽차도 얻어 마셨다. 안주인의 손맛에 더해 마음 맛이 느껴지는 밥상이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집 밖으로 나왔다. 주민들 모두가 점심을 먹고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마을 전체에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목욕 후의 나른함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유난히 하늘이 높았던 청명한 날, 고산족 마을의 오후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치앙라이Chiang Rai 여정의 첫머리를 장식한 곳은 도이 퉁Doi Tung이었다. 태국과 미얀마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산인데, 산의 등줄기들이 중첩된 이곳에서 세심하게 들여다본 대목은 무성한 수목이 아니라 그 넉넉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마을의 감동적인 변천사였다. 여기에는 현 국왕의 작고한 어머니이자 태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리나가린드라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1 건물의 외관이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일명 화이트 템플로 불리는 왓 롱쿤 2 아카족 마을의 여인들. 악령을 막아 준다는 전통 모자를 쓰고 있다 3 치앙라이 시내를 달리는 자전거 택시와 오토바이들 4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카족 마을의 아이들 5 도이 퉁 지역의 특산물 중 하나인 마카다미아 6 물 위에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는 왓 롱쿤 7 아카족 마을의 최고령 할아버지 8 치앙라이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판매하는 행상 9 먼 길 달려온 손님을 위해 아카족의 한 아주머니가 마련해준 점심상. 누구에게는 소박할 수도 있겠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푸짐한 상차림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상전벽해의 마을과 순백의 사원 도이 퉁이 자리한 곳은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이기도 하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가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은 익히 알려진 대로 아편 생산 기지로 악명이 높았다. 사람들은 마약을 재배하고 하릴없이 마약에 중독돼 갔다. 사람과 마을과 자연이 모두 피폐해지는 상황을 가슴 아프게 여긴 스리나가린드라 여사는 이른바 ‘도이 퉁 프로젝트’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녹화 사업, 아편 추방 운동, 주민 재활 사업 등을 맹렬하게 추진했다. 그녀는 마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에게 직접 꽃과 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가르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마약이 지배하던 마을은 점차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도이 퉁은 자연과 인간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공동체의 모범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도이 퉁에는 커피와 마카다미아 농장이 있다. 1983년부터 태국 정부에 의해 아편의 온상 양귀비 밭이 불태워지자 대체 작물로 이들이 선택됐던 것이다. 특히 커피의 존재감이 도드라진다. 태국과 커피의 상관관계에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태국, 특히 북부 고산지대에 위치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Chiang Mai는 커피 재배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맛있는 커피 생산을 위한 기본 삼박자인 고도와 기후와 토양 등이 두루 적합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이 퉁에서 경험한 커피의 향과 맛은 일품이었다. 맛이 복합적이면서도 각각의 맛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 채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보통의 커피와는 다른 상큼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다. 도이 퉁에서 내려와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왓 롱쿤Wat Rong Khun을 찾았다. 왓 롱쿤은 화이트 템플, 말 그대로 백색 사원이었다. 사원은 두 가지 의미에서 눈부셨다. 건물의 장식미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외관이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어 파란 하늘과 강렬한 색의 대비를 이뤘다. 사원의 흰색은 부처님의 순결을, 사원에 쓰인 흰색의 유리는 우주를 밝게 비추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어쨌든 세계를 유람하며 수도 없이 많은 불교 사원을 가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증유의 사원을 창조해낸 인물은 찰럼차이Chalermchai라고 하는 지역의 ‘괴짜 예술가’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1998년에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삽을 뜬 지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왓 롱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방인의 눈에는 흠잡을 데 없는 ‘완성품’처럼 보이지만 창조자의 생각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의 끝없는 창작욕인지 아니면 터무니없는 과욕인지 알 수 없지만 찰럼차이는 해마다 조금씩 왓 롱쿤의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앞으로도 수십년의 공기工期를 더 들일 것이라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풍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화이트 템플의 완성은 그의 사후에나 가능할 일일 것이다. 고산족 마을에서 보낸 한나절 숙소에서 땀으로 뒤범벅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시내로 나가기 위해 자전거 택시에 올랐다. 지붕이 있는 승객용 삼륜 자전거는 노회한 운전사의 인도 아래 물 흐르듯 막힘없이 나아갔다. 지천명을 넘겼음 직한 사내의 종아리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세 바퀴 택시’에서 내려 재래시장 탐방에 나섰다.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컬러풀한 열대의 과일들과 푸릇푸릇한 채소들과 다양한 종류의 길거리 음식들이었다. 그중에는 우리의 순대와 비슷해 보이는 먹을거리도 있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손님을 부르는 소리, 파는 자와 사는 자 사이의 흥정, 그리고 물건을 구입한 사람이 셈을 치르는 소리로 시장은 들끓었다. 치앙라이의 고산지대는 흔히 ‘살이 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카렌족, 아카족, 리수족, 몽족 등의 소수민족이 촌락을 이루어 곳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아카족의 마을로 향했다. 마을이 산악 지대에 올라앉아 있는 탓에 중간에 사륜구동 차량으로 갈아타야 했다. 아카족은 중국 남부의 윈난성 등지에서 메콩 강을 따라 이주해 온 부족이다. 이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야채나 콩을 재배하며 살아간다. 아카족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점은 물을 유난히 무서워하고,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물의 영혼을 두려워한 나머지 잘 씻지 않는데, 물에서 말라리아나 박테리아가 나온다고 믿는단다. 일각에서는 이런 미신이 물이 부족한 아카족의 환경적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아카족의 남자는 15세, 여자는 13세부터 결혼할 수 있다. 결혼식은 보통 여자가 임신을 한 연후에 이뤄지는데,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남자 측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 살펴본 아카족 마을은 짐작했던 대로 시간이 정지한 곳처럼 보였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허름한 풍경과 열악한 삶의 조건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외부인의 일방적인 시선과 편견에 가까운 기준을 마을 주민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잔주름이 많은 할아버지는 대를 엮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으며, 마을 아낙들은 동전이 주렁주렁 달린 전통 모자를 쓴 채 그늘 밑에서 한담을 나누었다. 까맣게 그을린 사내는 내리꽂는 햇볕에 곡식을 말리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며 들까불었다. 그들은 늘 그랬듯이 고유한 시간의 법칙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일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딱히 밝을 것도, 딱히 어두울 것도 없는 그들의 얼굴은 관광객의 순간으로 규정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면면히 이어지는 일상의 표정이었다. 어느 가정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았다. 달걀부침과 나물과 찐 호박이 상 위에 올랐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다음에는 따끈한 엽차도 얻어 마셨다. 안주인의 손맛에 더해 마음 맛이 느껴지는 밥상이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집 밖으로 나왔다. 주민들 모두가 점심을 먹고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마을 전체에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목욕 후의 나른함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유난히 하늘이 높았던 청명한 날, 고산족 마을의 오후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치앙라이Chiang Rai 여정의 첫머리를 장식한 곳은 도이 퉁Doi Tung이었다. 태국과 미얀마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산인데, 산의 등줄기들이 중첩된 이곳에서 세심하게 들여다본 대목은 무성한 수목이 아니라 그 넉넉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마을의 감동적인 변천사였다. 여기에는 현 국왕의 작고한 어머니이자 태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리나가린드라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Travel to Chiang Lai 1 치앙라이 시내의 불교 사원 2 수안팁 바나 리조트의 객실 내부. 침대 옆에 전통 복장을 한 목각 인형이 놓여 있다 ▶가는 방법 방콕 돈무앙 공항에서 타이항공의 국내선을 이용하면 치앙라이까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자동차로 치앙라이 공항에서 도이 퉁까지는 약 1시간이, 치앙라이 시내에서 아카족 마을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 ▶볼거리 왓 프라캐오Wat Phra Kaeo는 방콕의 왓 프라캐오에 있는 그 유명한 에메랄드 불상이 있었던 곳이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에메랄드 불상이 발견되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됐다. 옥으로 만든 같은 모양의 불상이 본당에 모셔져 있다. 14세기 지어진 왓 프라싱Wat Phra Sing은 ‘신성한 사자의 사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역시 같은 이름의 사원이 치앙마이에도 존재하는데, 치앙라이에 있던 불상을 옮겨다 놓았다. 산악민족박물관Hilltribe Museum은 고산족의 민예품과 생활 도구 등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호텔 레전드 치앙라이 부티크 리버 리조트 & 스파(www.thelegend-chiangrai.com)는 치앙라이 시내를 적시고 지나가는 매콕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다운타운에서 차로 수 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수페리어 스튜디오, 디럭스 스튜디오, 그랜드 디럭스, 풀 빌라 등으로 객실의 종류가 나뉜다. 울창한 열대림에 싸여 있는 수안팁 바나 리조트(www.suanthipresort.com)는 자연의 호젓한 기운이 충만한 곳이다. 널찍한 객실에는 개별 테라스가 딸려 있다. 아유르베딕 마사지를 받거나 쿠킹 클래스에 참가할 수 있다. 리조트 뒤편의 강에서 대나무로 만든 뗏목 래프팅도 즐길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안동-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서

    안동-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서 안동 여행은 ‘내 나라 여행’의 절정이다. 고리타분한 것으로 오역되곤 하는 전통은 안동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하회탈, 고택 모두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옛 것’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안동 여행은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유교의 고고함과 자연과 하나 되라는 도교의 온화함을 배우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곳을 지나간 개개인의 발자취가 조상들이 흩뿌려놓은 과거의 시간과 공존한다. 글 구명주 기자 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PnJ 커뮤니케이션즈 www.pnj21.com 탈 일상을 뒤집는, 해학의 美 민중의 삶을 위로하다 안동 하면 탈, 탈 하면 안동이다. 한국 탈의 진수를 느껴 볼 참이면 ‘안동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공연장인 하회마을 내 탈춤 전수관으로 곧장 달려가야 한다. 공연 전 만난 선비 역할의 권순찬 연출국장은 “탈을 딱 쓰면 본연의 나를 버리고 탈의 캐릭터에 도취되는데, 이게 중독인기라. 일단 보이소”라며 명당을 지정해 준다. 공연장 곳곳에는 일본인, 중국인은 물론이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위스에서 온 서양인도 보였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관객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시선을 집중시키던 사회자가 사라지자, 사물놀이가 울렸다. 강신,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선비마당 등으로 이어지는 공연 내내 야외 공연장을 이러저리 누비는 광대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오리나무를 곱게 도려내 깎은 반달 모양의 인자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치유해 준다. 특히 턱밑이 미완성된 이매의 웃음은 사실적일 뿐더러 그의 대사 또한 코믹해 등장만으로도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이매 이놈아야, 니 여서 머하노. 내가 아까 니보고 선비 데리고 오라 안 카더나” 초랭이의 핀잔에도 이메는 연신 “머라꼬 히히히 흐흐흐”라 받아칠 뿐이다. 탈놀이가 가장 성행했던 때도 신분질서가 사람 위에 군림했던 조선 중기가 아니었던가. 기존 질서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양반, 선비, 중은 탈놀이에서 희화화의 대상에 불과하며 가부장제, 신분제 등으로 억압받던 할미, 초랭이, 백정 등은 오히려 주도적으로 제 할 말을 당차게 내뱉는다. “분홍치마 눈물 되고 다홍치마 행주 되네, 삼대독녀 외동딸이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저 양반집 씨종살이, 씨종 살고 얻은 삼을 짜투리고 어울쳐도 삼시세때 좁싸래기” 할미의 한 서린 타령부터 “중놈이 부네하고 요래요래 춤추다가 중이 부넬 차고 저짜로 갔잖니껴”라는 간들간들 초랭이의 주접까지 대사 하나하나가 압권이다. 민중의 삶을 긍정하고 위로했던 우리네 탈의 힘이다. 양반들도 평민들의 탈놀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탈놀이로나마 억압됐던 감정을 표출하고 다시 순응하는 삶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기 때문이란다. 탈춤이 끝나고 누구는 다시 안동 여행길로, 누구는 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촐랑촐랑 초랭이 역할을 했던 서봉교씨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운 탈놀이를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하고 있다. 고향인 안동을 훌쩍 떠났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 봉교씨에게 탈놀이는 숙명이 되었다. 그는 안동을 지키며 춤을 출 거라 말했다. 그날의 탈놀이는 끝났지만 내일도 모레도 새 공연의 막이 오를 것이다. 1 한국적인 멋은 ‘조화’라는 단어에 응축된다. 특히 안동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다 2 ‘초랭이’ 서봉교씨 3 ‘선비’ 권순찬 연출국장 4 가부장제를 꼬집는 할미의 타령 5 턱밑이 미완성된 이매탈은 웃음이 사실적이다 가장 한국적인 탈이 세계적이다 탈의 신비로움을 일찌감치 알았던 인간들은 문명이 발달하기 전부터 탈을 이용했다. 탈은 전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세계인의 유산’인 셈이다. 그러나 세계 공통으로 얼굴에 쓰는 ‘탈’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생김새와 기능은 천차만별이다. 탈을 절대적이고 상대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하회마을 입구에 위치한 하회동 탈 박물관을 가야 한다. 총 3개의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는 탈 박물관을 둘러보면 ‘세계 속의 한국 탈’이 보인다. 탈은 악귀를 쫓거나 자신이 믿는 신을 향한 일종의 의식에 이용됐다. 박물관 제2전시실의 아시아 탈이 이를 반증한다. 중국의 ‘나희가면’이 붉은 기운을 담아 역병과 잡귀를 몰아내는 역할을 했는가 하면 티벳, 몽골 등지의 챰가면은 라마교 사원에서 연행되는 종교 의식 때 활용됐다고 한다. 서양의 탈은 아시아의 탈과도 약간 다른데, 귀족문화를 반영해 겉이 상당히 화려하지만 정작 표정은 추상적이고 밋밋하다. 제1전시실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한국 탈은 달랐다. 한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탈 역시 다른 나라의 탈처럼 잡귀를 쫓거나 장례의식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본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의 탈은 종교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을 뿐더러 단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계층과 계급을 뒤집고, 양과 음의 융합을 이루는 ‘조화’를 추구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 clip. 2011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속으로 따라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가 4년 연속으로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축제’다. 올해 축제에서도 신명나게 놀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탈을 쓰고 행진하는 ‘미친 퍼레이드’에 어울리거나, 총 상금 7,000만원이 걸려 있는 세계 탈놀이 경연대회의 우승을 노려 봐도 좋겠다. 일시 매년 9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열흘간(2011년 9월30일~10월9일) 주최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장소 안동 시내, 탈춤공원, 하회마을 등 문의 054-841-6397 www.maskdance.com 고택 불편해서 매력적인 역설의 美 고택古宅을 한자어 그대로 직역하면 옛 집이다. 옛 것이라면 손을 저으며 새 것을 찾는 사람들이 갑자기 왜 고택을 찾는단 말인가. 안동의 어느 고택 주인은 도시인들이 고택에 대한 환상으로 숙박을 시도했다가 벌레, 화장실 등을 이유로 하루도 안 돼 떠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최근에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새로 지은 고택도 많지만, 고택을 잘 꾸며진 한옥 펜션 정도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불편해도 끌린다. 무섭게 하늘로 치솟은 아파트 숲에서 살던 도시인에게 고택은 가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넉넉하게 터를 잡고 옆으로 널찍하게 들어서 있는 ‘고택의 아우라’.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택의 본고장 안동에는 몇백년에 걸쳐 제 자리를 지켜 온 ‘명품 고택’이 있다. 1 ‘간재정’은 간재종택의 정자로 투숙객들의 인기 휴식처다 2 간재종택의 종손인 변성렬씨 가문의 향기 ‘원주 변씨 간재종택’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마을은 금제琴堤, 검제黔堤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원히 재앙이 없는 땅으로 불려 왔다. 안동 3대 성씨인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묘가 들어선 이곳에 간재종택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원주 변씨 간재종택은 임진왜란의 공신이자 ‘하늘이 내린 효자’로 불렸던 조선중기의 학자, 간재 변중일의 종택과 정자다. 종손인 변성렬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매 주말 종택을 찾고 있었다. 11남매와 그 가족들이 다 모이는 날에는 종택이 꽉 찬다. 제사만 14번이다. 반복되는 하행길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는 “종손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 했다. 간재종택은 투숙객들이 원할 경우 다도시간을 마련한다. 방문했던 날에도 때마침 일일 차茶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차를 연구하며 경주에서 찻집을 운영 중인 강청원 선생은 1인 다기로 차를 우려먹는 방법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차 뚜껑을 열 때는 안에서 밖으로, 잎차를 뜰 때는 항아리 벽을 향해 왼쪽으로 틀면서, 거름망을 뺄 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떨어뜨린 후에….” 규칙의 연속이었다. 차 예절이 낯설기만 한 간재종택 투숙객들도 자신의 앞에 놓인 1인 다기를 이용해 잎차를 우려냈다. 1분30초. 차가 가장 맛있게 우려내지는 시간이란다. 1분30초라는 시간은 길게만 느껴졌다. 티백 차에 익숙한 탓이기도 했지만 종택에서는 유독 시계바늘이 느리게 걸었다. 종택에 머무는 동안은 느리게 가는 시간을 그저 즐기면 된다. 종택 구경 자체가 타지인에게는 하나의 볼 거리였다. 간재종택은 정침, 별당, 사당, 정자가 하나를 이룬다. 가옥은 ㅁ자형으로 ‘근심을 없앤다’는 뜻의 무민당無憫堂과 안채, 사랑방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사당이 안채 뒤쪽에 서 있다. 종택을 나오면 바로 앞에 국화 다랑이 밭이 있다. 선비의 기상을 빼닮은 국화꽃뿐만 아니라 분홍빛 흠뻑 머금은 백일홍이 마을 곳곳에서 하늘하늘 가지 손을 흔든다. 마치 백일홍이 몸을 간질간질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국화밭을 따라 올라간 끝에 호젓이 앉아 있는 간재정은 투숙객들의 이색적인 쉼터가 되고 있다. 객실료 큰방 4실 4~5인 기준 10만원, 작은방 4실 2~3인 기준 5만원 찾아가는 길 | 자가용 서안동 톨게이트→송야사거리(봉정사, 서후 방면)→원주 변씨 간재종택 대중교통 안동 초등학교 정문 서쪽편 버스 정류장에서 51번 버스 이용(30분 소요) 주소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162 문의 054-852-2345 www.간재종택.com 3 간재종택은 주변 경관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4 병산서원의 만대루나 입교당에 올라서면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5 부용대 층길에서는 하회마을과 줄기차게 흐르는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 폭의 그림 속 ‘병산서원 주사’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한 문신 겸 학자 서애 류성룡 선생이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서애선생이 세상을 뜬 후 제자들이 ‘존덕사’를 지어 위패를 모셨다. 병산서원은 유생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입교당,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 행사를 치르던 만대루, 인쇄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등으로 이뤄져 있다. 만대루나 입교당에 올라서면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병산이 이름 그대로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고 낙동강이 그 앞을 잔잔하게 흐른다. 병산서원의 우측에 들어선 것이 바로 병산서원 주사廚舍다. 병산서원 주사는 서원이 지어질 때부터 병산서원 관리인의 집이었다. 병산서원의 현 관리인도 본래 이곳에서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병산서원에서 가까운 곳에 따로 기거 중이다. 일반인이 고택을 찾기 전 이곳은 빈집인 셈이다. 사람의 온기가 없어서인지 병산서원 주사는 적막하다. 적막을 깨는 것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였다. 대청마루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며 피우는 ‘이야기 꽃’은 평소보다 더 소중하다. 도시보다 빨리 찾아오는 시골의 밤, 잠자리에 들면 한옥 특유의 향이 코 끝을 미세하게 자극하고 풀벌레 소리가 귀에 맴돈다. 방에 놓인 작은 TV에는 온갖 채널들이 나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고택을 갔건만, 속세의 시끄러운 소리에 자유롭기란 힘들다. 실제 낯선 온돌방에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리모컨을 돌리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든다고 한다. 3칸 대청이 마당과 바로 마주하고 있으며 큰 방 하나, 작은 방 3개가 있다. 마당을 기준으로 좌우가 정확히 대칭을 이뤄 안정감을 준다. 객실료 큰 방 4~5인 기준 8만원, 작은 방 3~4인 기준 5만원, 전체 대여 28만원 찾아가는 길 | 자가용 서안동 나들목→34번 국도(예천 방향)→하회마을 방면→병산서원 대중교통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길 건너편에서 46번 버스 이용 주소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문의 054-853-2172 www.byeongsan.net T clip. 안동 음식 4대 천황 1. 헛제사밥 각종 나물이 아삭아삭 씹히는 비빔밥과 삼삼한 탕국이 일품이다. 헛제사밥은 제사음식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2. 간고등어 내륙지방까지 생선을 옮기다 보니 염장처리가 필수였다. 안동 간고등어 한 마리면 밥 한 공기 뚝딱. 3. 버버리찰떡 버버리찰떡의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 방언이다. 1920년대 김노미 할머니가 안동시 안흥동 철길 밑에서 찰떡에 고물을 묻혀 팔던 것이 원조로 지금도 손으로 직접 떡메를 치고 고물을 일일이 붙여 만든다. 4. 안동찜닭 찜닭의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안동찜닭. 간장이 배인 한입 크기의 닭과 감자, 대파, 시금치가 잘 어울린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경북 울진 ‘심연의 계곡’ 왕피천

    경북 울진 ‘심연의 계곡’ 왕피천

    곱씹어 보니 송이버섯 향기 때문이었습니다. 경북 울진으로 발걸음하게 된 까닭 말입니다. 제철 맞은 송이향을 따라 왕피천(王避川) 계곡을 오르다 보니 뜻밖에 장엄한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왕피천이 숨겨둔 풍경의 보물, 용소(龍沼)였습니다. 여느 계곡에서 흔히 마주치는 용소와는 현격히 달랐습니다. 규모가 그랬고, 모양새도 그랬습니다. ‘물웅덩이’의 수준을 뛰어넘어 작은 계곡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아홉 구비 돌아 만난 굴구지 마을 ‘등허리 긁어 손 안 닿는 곳’이 울진이랬다. 두메 산골이란 뜻이다. 빼어난 풍경을 편히 돌아보려는 이들에게 울진은 썩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발품 팔아 느끼려는 사람에겐 맞춤이다. 왕피천 계곡은 울진에서도 오지로 꼽힌다. 울진의 비경 가운데서도 늘 앞줄에 선다. 왕피천은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왕피천을 둘러싼 산자락 또한 공민왕이 기울어진 국운을 통곡하며 넘었다는 통고산(通高山, 1067m)이다. 왕피천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울진군 자료에 따르면 전체 면적이 102.84㎢로, 북한산 국립공원의 1.3배에 이른다. 전체 29곳의 보전지역 가운데 왕피천이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달할 정도다. 꼭 수치가 아니더라도, 왕피천에 들면 참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계곡 트레킹 명소로 이름난 것도 그 때문이다. 왕피천 트레킹 출발지는 굴구지 마을이다. 아홉 구비 산자락을 돌아가야 나온다는 마을이다. 그 아홉 구비 산자락에서 보는 왕피천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가 뱀처럼 굽이친다. 모래톱이 하얗게 빛나는 수곡(水曲)은 애잔하면서도 웅장하다. 왕피천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계곡을 따라 걷거나, 계곡 옆으로 난 생태 탐방로를 따라 걷거나. 그도 저도 싫다면 용소까지의 4㎞는 계곡을 따라 걷고, 속사마을까지의 5㎞ 남짓한 구간은 생태 탐방로를 따라 걸어도 좋겠다. 왕복 6시간이 넘는 코스다. 포장길은 굴구지 마을에서 끝난다. 하지만 풍경은 이제 시작이다. 계곡을 따라 10분 남짓 걷다 보면 깎아지른 절벽과 만난다. 산길처럼 보이지만 바짝 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천길 단애다. 현지 표현대로 ‘널찌면(떨어지면) 행 날아갈’ 것 같다. 주민들은 이곳을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뾰족한 기암 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는데, 제법 장관이다. 집 몇 채 모여있는 올말을 지나면 환경 감시초소다. 왕피천 전경이 한눈에 담기는 곳으로, 금지된 취사·야영·낚시 행위를 감시하는 곳이다. 이곳부터는 계곡을 따라 걷는다. 계곡 트레킹은 산이나 둘레길을 걷는 일반 트레킹보다 훨씬 힘들다. 자갈밭을 걷는 게 평지보다 어려운 데다, 바위를 만나면 올라야 하고, 물을 에둘러 돌아갈 수 없다면 몸을 적셔서라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용이 용솟음칠 것 같은 용소 계곡엔 사람이 없다. 간혹 산새만 삐쭝대며 지날 뿐이다. 물소리만 지운다면 이런 적막이 따로 없다. 계곡은 점입가경이다. 들어갈수록 절경이고 비경이다. 놀라움의 절정은 ‘용소’다. 내 나라 안 계곡치고 용소 없는 곳은 없다. 계곡의 물줄기 가운데 가장 넓고, 제법 깊이가 있는 웅덩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용소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찌나 많은지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란 뜻의 고유명사로 굳어졌을 정도다. 왕피천 계곡의 용소 또한 이름으로만 보자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 정말 남다르다. 여느 계곡의 용소와 견줄 수 없는, 독특하고 장엄한 풍경을 갖고 있다. 유백색의 절벽들이 겹겹이 시립한 사이로 검푸른 계곡물이 흐른다. 휘어지는 물길의 모양새는 그림에서나 보던 용을 빼닮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아래에 승천을 앞둔 용이 누워 있다 해도 믿겠다. 그 분위기가 어찌나 섬뜩하고 장중하던지, 대낮인데도 전율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더는 나갈 수 없다. 암벽 전용 리지화를 신었다면 모르되, 행여 바위를 탈 생각은 접는 게 좋다. 구명조끼와 튜브를 준비해 용소를 건너는 이가 간혹 있지만, 생태 탐방로로 우회하는 게 안전하다. 이런 풍경에 전설 한자락이 빠질 수 없다. 옛날 속사마을에 살던 새댁이 굴구지 친정으로 만삭의 몸을 풀러 가던 길이었다. 새댁이 용소를 지날 때쯤 대홍수를 예감한 용이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됐다. 새댁은 그 자리에서 눈이 멀었고, 낳은 아이의 몸엔 금빛 비늘이 있었다나. 용소 위는 학소대다. 다리쉼을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보는 용소는 또 다른 모습이다. 맨 앞에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고, 그 뒤로 암벽들이 늘어서 있다. 가까이서 볼 때처럼 공포를 느낄 정도로 깊고, 윽박지르던 모습이 아니다. 물길이 잠잠해지는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다. 차갑다는 느낌은 없다. 여름 끝자락, 숲의 온기가 섞인 듯하다. 하늘은 파랗고, 적갈색 몸피의 금강송은 쭉쭉 뻗었다. 고된 산행의 땀이 씻은 듯 사라진다. 이런 곳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반푼이라도 시 한 수 짓겠다. ●새달 1일 금강송 송이축제 울진 금강송 송이축제가 10월 1~3일 울진군 남면 울진엑스포공원과 북면 송이산 일원에서 열린다. 울진의 송이버섯은 표피가 두껍고 향이 진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울진은 국내 최대 송이버섯 산지여서 비교적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축제 기간 중 송이채취체험, 송이무료시식, 송이경매 등 송이와 관련된 행사는 모두 열린다. 특히 해마다 금강송숲에서 진행되는 송이채취는 가장 인기 높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축제기간 중 하루 2회(오전 10시, 오후 2시) 진행된다. 현장에서도 신청할 수 있지만, 인원이 넘치는 경우가 많아 전화(054-789-6828)로 예약하는 것이 낫다. 24일까지 신청하면 된다. 체험비는 1만원. 채취한 것은 가져갈 수 있다. 소광리 금강송 숲에서 진행되는 금강송 생태 숲 탐방도 인기 가족 프로그램이다. 소광리 금강송 숲에는 수령 200~300년의 금강송 8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산책로도 잘 갖춰져 있다. 울진군청 산림녹지과 (054)789-6828. 글 사진 울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 풍기, 또는 영주 나들목으로 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곧장 간다. 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7번 국도→울진 순으로 갈 수도 있다. ▲맛집 송이와 더불어 울진의 제철 먹거리로 꼽히는 해산물이 홍게다. 왕돌회수산에서 붉은 대게 정식, 홍게탕 등을 개발해 팔고 있다. 1만~1만 5000원이면 맛볼 수 있다. 후포항 여객터미널 앞에 있다. (054)788-4959. ▲잘 곳 바다목장 펜션은 최근 문을 열어 깔끔하다. 후포항에서 10분 거리인 평해읍 거일리에 있다. 주말 기준 10만~15만원. (054)788-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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