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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작가 차범석(이세기의 인물탐구:83)

    ◎리얼리즘 바탕 「정통극 파수꾼」 40년/대표작 「산불」 전쟁의 인간파괴 신랄하게 묘파/부당한 것 거부하는 「연극계 면도칼」로 한평생/최승희 무용보고 「무대 인생」 예감… 이해랑·유치진 문하서 엄격한 수련 희곡작가 차범석은 연극계의 로맨티시스트다.동숭동 마롱카페에 나가보면 젊은 연극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맥주를 마시며 연극과 인생을 논하고 있다.「주역만 있고 조연 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다.우리의 삶은 큰 배역만 탐내는 한편의 연극 같이 보이지만 작은 배역 없이 큰연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파우스트보다 메피스토 텔레스가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이듯이 무대 구석구석에 세워둔 단역조역들의 몫에서 극중 희열과 비감,완미가 성취된다.무릇 물이 얕으면 큰배를 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깊고 다양한 여러 경험이 크고 광활한 연기력을 키운다」고 후배들을 가르친다. 한배우가 무대에 등장했다가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퇴장하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이다.그런만큼 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분장을 지우고 무대를 떠나는 사람을 보면 「자기포기와 무책임」이 느껴지지만 연기의 온기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는 배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친다」고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가 63년부터 20년이나 이끌던 극단산하를 해체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연극을 지상목표로 삼으려는 의지는 눈비비고도 찾아볼 수 없이 연기를 가르쳐 무대에 설만하면 그들은 철새처럼 돈을 따라 텔레비전으로 가버린다」고 했다.「연극은 집단예술인만큼 인간적인 결합 없이는 아무런 작업도 가능하지 않다.그럼에도 정신적인 반항이 없는 정지된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껍질을 깨는 아픔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환멸스럽다」고 그는 한 글에서 개탄하고 있다.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것에 얽매어 질척대는 것은 자기비하이자 존재를 흩트리는 추일 수 밖에 없으며」「부나비처럼 떠도는 인간불신풍조속에서 나만이 홀로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것은 명분 없다」고 절규했다. 적자를 면치못하는 극단의 영세한 상황속에서도 「산불」「밀주」「대리인」「손탁호텔」등 알찬 창작극으로 꾸준히 「좋은 무대」를 이끌던 산하는 「연기자의 연극정신부재」「저질공연우려」등을 내세워 83년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채 이렇게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칠순의 나이와는 상관 없이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옛 예술가의 낭만과 니힐과 반항과 순수를 지금도 면면히 지니고 있다.그가 「한달이면 29일」을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람들과의 따사로운 온정에 굶주려 「정을 마시기 위해 술잔을 든다」는 것이며 인생의 어둡고 뒤틀린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긍정에의 동경이 너무 강한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40년간 「연극계의 면도칼」로 불리면서 그는 과연 부당한 것을 굳이 옳다고 양비론을 펼치거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수 있다고 과장한 적이 없다.연극상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무의미한 공연기록과 긴 연륜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질과 연기력을 따져 날카롭게 자격여부를 가려낸다.또한 스스로의 조로를 경멸하여 연극의 모든 일에 은근히 참여하고 옳바른 소리를 주저 없이 하면서도 「번뜩이는 재기나 교변」 사물에 대한 심정의 움직임에서 세말적인 기미대신 싱그러운 미소로 만사를 감싸기 때문에,각층의 폭넓은 호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단산하를 잃은후 그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대한민국예술원회원과 청주대 예술대학장등 여러 역할을 전전했다.86년에는 88올림픽을 앞둔 88서울예술단 초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창단기념 시연회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관련장관이 코를 골고 잔 것에 자존심을 심하게 상한 나머지 사표를 내던진 씁쓸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간과 함께 그의 까다로운 일면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반항과 증오와 충동에서 시작한 초기의 경험을 버리고 「삶이란 양파를 벗겨내듯 아무리 벗겨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나보다.그 때부터 톡쏘는 옳은 소리를 줄이고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계신공구의 자세로 전환했다. 그의 지나온 인생은 평온한 중에 끝 없는 파고가 잔물결처럼 파동치는 것이 남과 다르다. 목포의 개화되고 풍족한 집안에서 일본 메이지대(명치대) 법학과를 나온 차남진씨의 3남3녀중 차남.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집안의 서고에 파묻혀 아리시마 다케오(유도무낭)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무자소로 실독)의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 히메지(희로)고교에 시험을 보러갔다가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후지자와 다케오(등택)의 「신설」을 가슴에 품을 만큼 열렬한 문학지망생의 시기를 보냈다.어릴 때의 아명은 평균.광주고보시절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최승희무용공연을 보고 「정중동의 미세한 움직임과 끊어질듯 이어지고 멈춘듯 움직이는 유현미와 고담미」에 반해 그는 훗날 「무대」와 관련을 갖게 되리라는 예감을 굳혔다.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뒤늦게 23세에 대학에 진학해서 문자그대로 「경마장의 말처럼 정해진 코스를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엄격한 스승인 이해랑 유치진문하에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정통극」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연극계는 언제부턴가 「리얼리즘의 희곡작가」 또는 「리얼리즘의 파수꾼」으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쳐왔다.나라는 인간은 일관성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온 모순덩어리라는 생각 때문이다.그 증거로 나의 인생행로에는 투쟁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다.적극적인 동참이나 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나는 뭐란 말인가」.그러나 평론가 유민영은 「그의 작품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구시대의 붕괴와 전후의 사회변화,변천하는 사회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삶을 끈질기게 묘파」하고 있고 특히 대표작 「산불」은 「전쟁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를 미사여구나 기교 없이 신랄하게 파고든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으로 손꼽고 있다. 지난해 출판한 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에서 그는 「지금까지 나는 대과 없이 살았고 욕심부리지 않았고 하고싶은 일과 가고싶은 길을 지칠줄 모르고 살았으니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영원한 동반자인 박옥순여사와의 사이엔 3남2녀.자녀는 모두 출가하고 송파구 가락극동아파트에서 부부가 노후를 함께 하고 있다. 언제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시민」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이성을 정으로 융해시킨 처절한 삶의 애가와 뜨거운 인간애의 정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참으로 「큰배우」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이제 그의 퇴장은 「한편의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이며 연극계가 그를 두고 「이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고 한 말대로 그는 지금도 동숭동 마롱카페에 앉아 「배우가 되기전 먼저 인간이 될 것」을 젊은 연극인들에게 당부하며 그의 「정」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연보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42년 광주고보 졸업후 도일 ▲1946년 연희전문 문과 입학 ▲1949년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희랍극 「오이디푸스왕」연 출 수상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 공연(목포문화협회 주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당선,제작극회 창단 ▲1961∼71년 문화방송 제작부장·편성부국장 역임 ▲1962년 「산불」 초연(국립극단) ▲1963∼83년 극단 「산하」대표 ▲1965년 이대·연대 출강 ▲1966년 연세대 영문과졸업,국제PEN대회 뉴욕회의 참가 ▲1968∼74년 한국연극협회이사장 ▲1969년 신연극 60주년기념 「그래도 막은 오른다」 공연 ▲197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 ▲1973년 예총부회장 ▲1975년 ITI베를린회의 참가 ▲1978년 ITI한국본부 부위원장,대한민국연극제 심사위원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1983년 서울극작가그룹 발족,회장 ▲1984∼86년 청주예술대학장 ▲1986년 서울88예술단장 ▲1988년 청주대 교수협의회회장 ▲1991년 「연극의 해」집행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회원·한국연극협회이사·공연윤리위 심의이원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대리인」「산불」「학이여 사랑일레라」「식민지의 아침」,수필집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차범석문학전집(12권·융성출판)등 대한민국 문화예술상(70)·대한민국 예술원상(82)·동랑연극상(83)·대한민국 문학상(91)·이해랑연극상(93)
  • 노벨 문학상 수상 히니의 삶과 작품 세계

    ◎고통받는 아일랜드인 그린 민족 시인/자연친화적 간명한 시어로 비평가 극찬/「시의 아버지」 예이츠 시 세계에 큰 영향 9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머스 히니(56)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래 가장 중요한 아일랜드 시인으로 꼽힌다.그는 지난 23년 예이츠가 첫 수상자가 된지 72년만에 노벨문학상을 탄 세번째 아일랜드인이 됐다.또 한사람은 69년에 상을 탄 극작가 베케트.그의 수상으로 92년 데렉 월코트 이후 3년만에 노벨상이 시인에게 돌아갔다. 자연친화적인 시로 아일랜드 분쟁의 피맺힌 역사를 은유해온 그는 지난 39년 북아일랜드 캐슬번에서 소수파 가톨릭 농부의 9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공교롭게도 아일랜드 시의 아버지 예이츠가 숨을 거둔 해이다.그의 정서에 깊이 각인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광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찾기와 함께 뒷날 그의 시세계를 형성한 두 축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야 지역신문 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첫시집 「자연주의자의 죽음」을 27세때 냈다.잡다한 농기구 따위를 끌어들여 소소한 시골의 삶을 보여준 이 시집은 자연이나 흙과의 강한 교감속에서도 그 배면의 어둠과 침묵을 경외심으로 응시하는 켈트문학만의 특성을 드러내 히니 시세계의 앞날을 예고한다. 그의 시세계속엔 아일랜드 정치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은 드물다.몇몇 예외적인 시집을 빼곤 엄숙한 자연의 모습과 소박한 나날이 시집의 전면에 드리워져 있다.그러나 꿰뚫어보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극심한 분규현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내밀한 은유로 부조돼 있음을 알수 있다.아일랜드 민족의 토속정신을 끝까지 파들어가 고통받는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농도짙은 고발을 길어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최고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그의 모국어는 아일랜드어지만 영어로 쓴 시가 더 많이 읽힌다.그는 시속에 민족적 공감과 연민을 담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시가 과연 사회와 역사를 바꿀 유용한 틀이 될지 회의를 토로하기도 한다. 이처럼 두개의 세계 사이에서 부대끼며 움터나온 그의 시는 그러나 간명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시가 난해해지고 푸대접받는 20세기에 그는 드물게 비평가와 일반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말을 아끼면서도 많은 것을 말하는 그의 뛰어난 시는 초급학교 교과서에 실리는가 하면 대학교재로 널리 채택되는 등 영국에서도 대접받고 있다. 89년엔 아일랜드인 최초로 옥스퍼드대 교수로 임명되기도 한 그는 지금은 더블린에서 작품활동에 전념중이다. 한편 그의 시는 지난 87년 문학정신 10월호에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 김종길 시인의 번역으로 3편이 번역,수록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그의 중요시들을 묶은 시집도 김시인의 번역으로 곧 민음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올해 히니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쓴 청주대 홍성숙교수는 『지역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함의를 지닌 그의 문학은 식민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공감과 각성의 기회를 줄것』이라고 말한다. ◎시머스 히니 연보 ▲1939년 북 아일랜드 데리주 캐슬도슨에서 출생 ▲51∼61년 세인트 컬럼대·퀸즈대에서 수학 ▲65년 매리 델빈과 결혼 ▲70∼71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초빙강사 ▲84년부터 하버드·케임브리지·매사추세츠대 등에서 수사학 및 웅변학 교수 ▲89년부터 옥스퍼드대서 시학 교수 ▲66년 에릭 그레고리상,68년 모옴상,71년 아일랜드 학술원상,75년 E.M포스터상 85년 펜(번역부문)상 등 수상 ▲주요작품집으로는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첫시집·66년),「암흑으로 들어가는 문」(69년),「겨울나기」(72년),「북쪽」(76년) 「들일」(79년),「순례의 섬」(84년),「산사나무 등불」(87년) 등이 있음
  • 성폭력 백서(외언내언)

    「성폭력이란 강간뿐 아니라 추행·성희롱·성기노출 등 성을 매개로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정무 제2장관실이 「나의문제·내가족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성폭력 예방·피해신고 안내책자를 펴냈다.일종의 성폭력 백서다. 정부 중앙부처가 이런 책을 펴내기는 정부수립이후 처음이라서 그 용기도 평가할만 하지만 성폭력 범죄에대한 올바른 인식을 강조하고 있어 우리사회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고치는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상당히 많다.▲성폭력은 젊은 여자에게만 일어나고 ▲성폭력은 대개 폭력배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르고 ▲야한 옷차림이나 행동이 강간을 유발한다는 것과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는 것 등이다.이런 통념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가해자보다도 피해자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과 후유증속에 개인 의 파멸은 물론 가정파괴를 겪기도 한다. 성폭력은 생후 6개월 된 어린이부터 6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관계없이 발생하며 드물기는 하나 남성에 대한 성폭력도 발생하고 있다.성폭력의 73%는 친척 이웃 선배 직장동료등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 졌고 대부분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우발적이라기보다 계획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실제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야한 옷차림이나 행동을 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이 책자는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그릇된 통념을 깨우치는 여러 사례도 담고 있다. 성폭력 범죄는 신고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칠 경우 한해 약 25만건이나 발생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실제 발생건수의 2%만이 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성폭력 범죄는 여성쪽에서 보면 바로 인생에 대한 범죄」라는 이 책자의 명시는 바로 여성들 자신의 소리가 아닐수 없다.
  • 문화의 정치화/이태동 서강대 문과대학장(일요일 아침에)

    초가을 햇빛 쏟아지는 남도중심에서 개최되고 있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비록 이 비엔날레는 하나의 세계적인 현대 미술전시회지만 그것은 저항의 도시,광주가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주의를 벗어나서 그것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지방색을 가지고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95광주 통일미술제」를 마련하고 있는 「광주미술인 공동체」측은 이 비엔날레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의 충분한 진보적인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가령 광주 비엔날레가 다른 세계적인 비엔날레와는 달리,세계의 유망한 젊은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1백40점이나 되는 북한 미술작품들과 함께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여진 적이 없는 새롭고 파격적인 작품들을 유감없이 자유롭게 털어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더욱이 전시된 작품의 특징이 기계적인 현대문명에 저항하는 「토속적인 윈시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광주가 추구했던 민주화정신과 일치되는 점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 나타난 가장 뚜렷한 현상은 문화/예술의 정치화이다.대상을 수상한 카초는 폐품처럼 바다로 버려진 쿠바 난민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 「잊어버리기를 위하여」를 통해서 쿠바의 비극적인 정치현실을 황량한 느낌마저 드는 짙은 파토스속에서 고발하고 있는가 하면 「민중 미술운동의 성과」가 인정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특별상을 수상한 한국의 김정헌은 「판문점연작」을 통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조국의 암울한 분단상황을 극복하려는 꿈을 유머러스한 해체적인 터치로 리얼하게 구체화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예술/문화를 정치화하는 문제는 예술가들의 비평적인 시각에 따라 적지않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순수예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예술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정치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정치」는 좋지않은 풍자적인 의미로서의 「정치」가 아니고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의 일치를 나타내는 건강한 정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정치적인 현실을 멀리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그리고 노래하는 순수예술가들의 작품도 따지고 보면 모두다 어느정도의 정치적인 뜻을 담고 있다.왜냐하면 아름다운 대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작품은 무질서한 현실과 비교되는 새로운 비전과 질서를 자연의 위엄을 통해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문화가 도덕성이 결여된 불순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이용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예술이 좋지 않은 의미로서의 「정치」에 종속되어 그것의 시녀로 전락하게 되면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예술의 본질은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무질서에 저항하는 탁월한 질서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케네디대통령 취임식장의 단상에 초대되어 축시가 아닌 과거에 지은 자기 시를 낭독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그들은 문화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독자성과 존엄성을 그만큼 존경하고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주 비엔날레 개막식장의 단상에 원로 미술가 한사람도 초대함이 없이 장관과 시장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만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는 소식은 문화/예술의 「한국적인 정치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우리는 문화/예술의 이데올로기화를 경계해야 하겠지만,그것의 「정치권력화」도 아울러 경계해야 하겠다.미술문화의 국가적인 지원과 그것의 「정치권력화」는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어야만 하겠다.
  • 유형의 수도 이르쿠츠크(시베리아 대탐방:34)

    ◎왕정반란 「12월 당원」들의 마지막 안식처/유형 온 주모자가 살았던 주택을 박물관으로/앙카라 강변엔 17세기 「시베리아 정복탑」 우뚝 이르쿠츠크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은 앙가라강변에 세워진 시베리아 정복탑이다.총독청사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오벨리스크다.동진하던 러시아 정복자들은 17세기말 이곳에 이르러 가쁜 숨을 내쉬고는 잠시 정복의 발길을 멈추었다.그리고는 이곳에 높이 10여m의 대형 정복탑을 세워 그동안의 공적을 자축했다.정복의 상징인 대형 쌍독수리 문양 아래 모라비요프·아무르스키·스페란스키 등 정복자들의 이름이 쓰여져있고 「시베리아 정복자들에게 영광있기를」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철도 개통… 도시 부흥 이르쿠츠크는 1686년 정식 도시가 된 뒤 성장을 거듭,1764년에는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다.그러나 도시발전의 진짜 전기는 1898년 시베리아철도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찾아왔다.따라서 3년 뒤면 동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된지 1백주년이 된다.당시 이곳은 주도 였기 때문에 동시베리아의 철도업무를 이곳에서 관장했다.관공서 거리였던 칼 마르크스거리에는 당시 이르쿠츠크·부리야티·치타주의 철도를 총괄하는 동시베리아 철도청이 있었다.4층짜리 대형 대리석건물인데 혁명 전 세워진 건물원형에다 혁명 뒤 소비에트식 건물장식을 곳곳에 덧붙이고 역시 혁명성이 강한 대리석 조각까지 건물상단 곳곳에 만들어 붙여서 연대불명의 이상한 건물이 돼버렸다.시베리아 곳곳에 이런 식으로 옛건물에 사회주의 장식을 덧붙여 건물의 원형을 훼손시킨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는 혁명 전 러시아 유형의 수도였다.특히 1825년 왕정에 반대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 주모자들 대다수가 이곳으로 유형 와 생을 마쳤다.사회주의 시절 볼셰비키들은 이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추앙했다.그래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 같은 곳이 됐다.당시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 와 거처했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고 성역화해 놓은 이들의 무덤이 곳곳에 있다. ○교회에 구경꾼들 몰려 제르진스키거리에있는 「돔 무제 데카브리스트」는 1826년부터 30여년간 12월당 혁명주모자들 수명이 유형생활을 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대표적인 명소다.12월당 혁명은 1825년 알렉산더 1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할 즈음에 일어났다.당시 군대내에 왕정폐지를 주장하던 비밀결사조직인 12월당원 5백여명이 「새 차르즉위 반대,공화정 수립 지지」를 내걸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나드광장에서 무력저항을 시작한 것이다.25년 12월14일 하오3시 직후였다.물론 이 저항은 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분쇄됐고 이후 주모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주모자급 1백28명이 모두 시베리아로 유형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이들은 중죄인으로 유형지에서도 모두 죽을 때까지 카타르가(쇠족쇄)를 차고 살아야했다.박물관 자료에는 당시 12월당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 소사이어티」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 소사이어티」등으로 나뉘어 이미 광범위한 비밀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박물관,그들의 무덤이 있는 교회입구에는 반드시 늘어서서 여행객들을 맞는 불청객들이 있다.바로 구걸꾼들.입구의 좌우로 10여명씩 늘어서서 연신 성호를 그으면서 자비를 구하는 데 도저히 그냥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이들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신경써야 할 일이다. 이르쿠츠크는 폴란드인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제정 러시아시절부터 러시아에 이주해온 폴란드인의 정신적 수도 같은 곳이고 폴란드인들의 대성당이 이곳에 있다.시베리아 폴란드인들도 유형 와 정착한 사람들이다.나폴레옹시대가 지난 1861년 당시 바르샤바가 있는 동폴란드는 러시아영토였다.1861년부터 63년까지 폴란드인들은 거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러나 이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1만여명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왔다.이들의 주유형지가 바로 이르쿠츠크였고 그들의 친척·후손들이 지금도 이 일대에 모여살게 된 것이다. 주청사 바로옆 「폴란드혁명거리」에 위치한 폴란드성당인 「성모 무염시태(무염시태)성당」도 1884년 이들이 세운 것이다.소련시절 교회가 폐쇄된 채 국유화돼 시립 파이프오르간 연주장 등으로 쓰이다 지난해말 건물 일부가 폴란드신도들에게 되돌려졌다.폴란드에서 파견돼온 베르다벳다라는 젊은 수녀는 현재 이르쿠츠크 오블라스치(주)에 약 3천여명의 폴란드인이 사는 데 매주 3백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이곳 뿐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크라스노야르스크·옴스크 등 시베리아 여러 곳에 폴란드성당이 있는 데 하나 같이 교회건물 반환문제를 놓고 러시아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폴란드 혁명거리로 모스크바에도 많은 폴란드인이 살고 폴란드 성당이 2곳 있는 데 이들은 시베리아 폴란드인들과는 또 다른 이주배경을 갖고 있다.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서부러시아는 과거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당시 그곳에 살던 폴란드인 다수가 모스크바로 옮겨가 살았다.특히 폴란드인들은 교육열이 높아 모스크바의 각종 대학·인스티튜트(단과대학)등에서 공부했다.소련시절에는 모스크바 거주 폴란드인수가 10만명을 넘었다.모스크바의 가톨릭교회도 소련시절 국유화됐는 데 최근 반환을 요구하는 폴란드인들과 시정부가 맞붙어 유혈충돌까지 벌어졌다.모스크바 폴란드성당건물은 외양만 교회이지 시정부에서 건설회사 사무실로 사용해 내부는 완전히 일반 사무실처럼 바뀌어 있다.러시아전역이 마찬가지지만 국유화된 교회는 이렇게 사무실로,창고로,때로는 감옥으로도 바뀌어 철저히 파괴됐다.모스크바의 폴란드성당은 몇개월 전 건물일부가 반환돼 폴란드인들과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외국인 가톨릭신자들이 그곳에서 미사를 본다. 이르쿠츠크의 폴란드성당 멀지 않은 곳에는 주청사건물을 비롯한 정부청사들이 들어서있다.시베리아의 각 도시들이 마찬가지지만 주도에는 주청사·지방의회·지방선거위원회 등과 함께 연방대통령 대리인의 집무실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게 흥미롭다.93년말 새헌법 채택으로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들로 임명하는 지방관을 보내 주정부의 일을 감독·감시토록 하는 것이다.그래서 주민이 선거로 뽑은 주지사·시장과 이 대통령 대리인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 김영삼 대통령 임기후반의 시작(사설)

    ◎일류국가 건설에의 강한 의지와 정성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임기의 절반을 넘기고 오늘로 후반기를 시작한다.지난 2년반 동안의 변화와 개혁은 국가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적인 성취임을 부인할 수 없다.광복 50주년이기도 한 지금 그동안의 성과를 도약의 발판으로 민족의 목표인 통일된 세계 중심국가로 만들 헌신의 각오를 다질 시점이다. ○과감한 변화와 개혁의 2년반 김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시동을 건 개혁드라이브는 한마디로 일류국가건설을 위한 굳건한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대통령으로서 정치자금은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대통령의 식단을 칼국수로 바꾼 솔선수범의 부패척결의지는 사정개혁과 윗물맑기운동,그리고 제도개혁으로 구체화되었다.신한국건설의 국정목표를 위해 역사의 그림자를 지우는 한국병 치유의 과감한 변화와 개혁이었다.직선으로 확립된 정부의 정당성과 민주성의 기틀 위에 군 사조직을 척결하고 그동안 연기되어온 지방단체장선거를 실시하여 전면적인 자치시대를 연 것은 민주정치의 튼튼한 궤도를 깔아놓은 것으로 그뜻이 매우 크다. 금융실명제의 전격적인 실시와 공직자재산공개,정치개혁입법과 아울러 금권·관권선거의 청산을 통한 돈 안쓰고 깨끗한 선거의 실현등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우리역사에 혁명적인 효과와 의미를 남겼다.이런 엄청난 변화는 불과 2년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것이다.거기에 행정의 효율화와 규제완화를 위한 정부조직개편및 행정개혁등 일찍이 유례를 찾을 수없는 개혁의 연속이었다. ○훗날높은 역사적 평가 받을것 이러한 국정전반과 사회각분야에 걸친 개혁은 무한경쟁의 국제질서에 대응하여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려는 김대통령의 세계화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정비이기도 하다.개혁의 시대정신이 만든 문민정부 전반기의 성과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여당의 패배로 나타난 지방선거결과를 들어 개혁에 대한 문제점과 불만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국가운영과 현실관리에는 반작용과 반동이 따르는 만큼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인 전진을 가속화하는 일이다.김대통령이 국민통합과 세계화개혁의 지속을후반국정운영의 기조로 설정한 것도 국민동참과 협력으로 개혁의 내실을 기하려는 뜻이다.사회안정과 국민화합을 다지는 초당적협력의 확보야말로 국가발전을 위한 후반기 국정운영의 절실한 과제다. ○중요한것 국가적 전진의 계속 이를 위해 시급한 것은 국민참여를 확대시키는 주체세력의 성의있는 설득노력이다.대통령을 정점으로하는 집권당과 행정부가 그 견인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조직이기주의를 버리고 대통령과 국민들의 역사창조의지를 구현토록 뒷받침하기 위해 일체감과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춘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이같은 노력이 국가발전을 위한 각계의 고통분담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여론과 역량을 결집하기 보다 지역주의를 중심으로 국민분열의 패싸움을 선동하는 사색당쟁형의 사생결단식 정치행태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민주발전과 일류국가건설의 전제다.민주시대에 들어와 국민과 국가에대한 봉사와 희생이라는 정치의 공적인 목적이 실종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권력투쟁으로 지새는 정치로는국민갈등과 사회혼란 뿐 국가경영정책과 국민통합의 생산성은 기대할 수 없다. ○국민적 인내와 협력의 자각을 바람직한 정치는 국민,좁게는 지도층이 만든다.그런 점에서 언론과 지식인등 여론주도세력이 스스로 지역성이나 당파성을 극복하고 부정과 저항에 편향된 체질을 긍정과 통합쪽으로 균형을 잡는 성숙한 자기변화가 요청된다. 정치가 국민의 고통을 설득하도록 채찍질하여 일류정치를 유도하는 책임을 해야할 것이다.각계의 이기주의를 조정하고 국가관리와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대통령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할 줄 아는 선진국 수준의 통합노력이 있어야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일류국가 건설을 향한 인내와 협력의 국민적 자각이 있어야 한다.
  • 지방행사 현장/경기­화성 화산 독지리서 「3·1운동 봉화」 올려

    ◎제주­법정사 승려들 「항일 만세대행진」 재현/부산­마안산 정상서 3·1운동 기념탑 기공식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 및 예술행사가 15일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마련됐다. 지역 주민들은 「광복 50주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주제로 행사들을 지켜보며 광복의 감격과 의미를 되새겼다.많은 주민이 자녀들과 함께 길놀이나 전시장,예술·문화공연을 관람하며 「나라 사랑」의 마음을 되새겼다. ○…제주에서는 상오8시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법정사 승려들의 항일운동 만세 대행진이 걸궁팀과 사물놀이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6시간에 걸쳐 재현됐다.중문 청년회의소가 주관했으며,1천여명이 참가했다.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공유수면 매립지에서는 제주 해녀항쟁 만세 대행진이 펼쳐졌고 제주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영화인협회 제주지부가 아리랑 영화제를 마련해 도민화합과 통일의지를 일깨웠다. 하오에는 제주시 탑동 제주해변 공연장에서 제주 시립교향악단과 시립합창단,끌리오합창단과 남녕고 합창단이 공동으로 광복 50주년 기념 「연합 음악제」를 마련해 광복절을 경축했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하오7시 우정면 화산리 봉화산과,이 곳에서 20여㎞ 떨어진 송산면 독지리 봉화산 등 두 곳에서 3·1운동을 알리는 당시의 봉화 올리기 행사를 재현했다. 가로·세로 1.5m,높이 2m의 봉화대에 불이 지펴지자 7백여명의 주민은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그날의 감격을 만끽했다. 수원의 경기도 문화술회관에서는 고 전동례 할머니의 체험을 토대로 일제에 저항한 제암리 주민의 비극적인 참상을 그린 창작 무용극 「제암리 아침」이 공연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명장동 마안산 정상에서는 3·1운동을 주도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3·1운동 부산 기념탑」 건립 기공식이 열렸다. 또 부산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리는 백산 독립기념관이 중구 대창동 옛 백산상회 자리에 문을 열었다.전시실 지하 1층에 백산선생이 사용했던 벼루·청동화로·가방·친필 서한 등 유품 12종 55점을 전시해 놓았다. ○…경남에서는 상오10시50분부터 진주시칠암동 경남도 문화예술회관에서 한국예총 경남도지회 주관으로 광복 50주년을 축하하는 종합연극 「지킴이」가 1시간40분 동안 무대에 올려졌다. 무용과 연극·민요 병창·풍물패·합창·태껸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한데 묶어 5막12장으로 구성한 이 극은 일제의 억압과 설움을 꿋꿋한 민족정신으로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극이 끝나자 배우·풍물패·합창단 등 1백30여명의 출연진 모두가 오색 방울이 날리는 무대로 나와 관람객들과 함께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대전시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대전 역사 창조를 위해 지난 6일부터 시민회관에 마련한 「광복과 대전 발전 사진전」에는 마지막 날인 이날도 1천5백여명이 몰렸다. 일제 때부터 21세기 청사진까지 주제별로 시대상황을 담은 사진 2백여점이 전시됐다.
  • 서울까치/파도/광복 50돌 의미 되새기는 무대

    ◎서울시립무용단·국립음악원,세종문화회관서 창작무용극 공연/서울까치­정도 6백년 시대적 흐름 재조명/파도­일에 끌려간 한 도강의 생애 담아 국립국악원과 서울시립무용단이 광복 5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대형 공연을 마련한다. 특히 국립국악원은 드물게 전 공연을 무료 무대로 꾸민다. 서울시립무용단이 오는 10∼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무용극 「서울까치」.서울정도 6백주년을 맞아 서울의 역사를 조선의 성립·일제의 침략·남북분단·산업화에 이르는 시대적 흐름속에서 재조명해본다.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지켜온 정신과 꿈의 상징으로는 의인화된 소나무와 까치가 등장한다.국제무대를 겨냥한 올 하반기 정기공연작품으로 이 무용단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국제화를 겨냥하고있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한국춤의 범주를 벗어나 춤사위에도 현대적 기법을 가미했다.음악도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의 접목을 시도한다.현대적 무대기법으로 서정미 넘치는 춤사위를 역동적으로 형상화했다. 배정혜 단장이 직접 안무를 맡고 중견 연극 연출가인 오태석씨가 대본을 썼다. 국립국악원도 18∼2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대형 창작무용극 「파도」를 공연한다. 일본에 끌려가 온갖 역경을 이기며 예술혼을 지켜가는 한 조선 도공의 생애를 그린 작품으로 70분동안 8장으로 꾸며진다.「파도」는 격동의 역사를 상징한다. 지난해 7월부터 1년여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2억원 가량의 엄청난 예산이 투입됐다.50명의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현장연주를 하는 대형무대이다. 도공들의 힘찬 춤사위를 비롯해 조선민중의 저항춤 「무명저고리춤」「수건춤」「허수아비춤」「약속의 춤」 등 대형군무가 대형무대를 뒷받침해준다.대형무대답게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호리전트막도 올릴 예정이다. 풍랑장면과 도자기 제작과정을 슬라이드 컷과 조명을 이용한 특수효과로 처리하며 금기시됐던 일본춤을 과감히 도입한 것도 특색이다. 중견 연극연출가 차범석씨가 대본을 썼고 문일지 무용감독이 안무를 맡았다. 광복 50주년 공연인만큼 7∼12일 국립국악원에서 원하는 일반인 누구에게나 무료 초대권을 나누어준다.
  •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동경 강연 요지

    ◎일본은 침략의 역사에 눈을 닫지 말라/과거는 역사이자 현재… 진실된 속죄로 불신고리 끊어야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독일대통령은 7일 서울신문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도쿄신문의 초청으로 도쿄 국립교육회관에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 50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가졌다.「독일의 양심」으로 불리는 바이츠체커 전대통령은 이날 과거 침략의 역사에 대해 일본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다음은 2시간여에 걸친 강연 내용의 요약. 독일과 일본 양국의 운명에는 유사점이 많다.양국이 금세기 전반에 군사적 수단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던 점,대부분의 이웃나라와 전쟁상태에 있었던 점,50년 전에 끝난 제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한 점,그후는 특히 경제면에서 극적인 부흥을 이룩했다는 점,따라서 「전쟁의 패자에서 평화의 승리자」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같다. ○독 전후처리와 대조적 그러나 양국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우선 국가 규모의 차이이다.일본은 인구및 경제력에서 독일보다 50% 정도 웃돈다.또 독일은 대륙의 중앙에위치하고 있지만 일본은 섬나라이다.섬나라 사람들은 독자색이 짙은 단일전통,역사,문화를 갖고 있어 이웃 대륙의 여러 민족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갖고 있다.독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독일은 유럽이라는 다민족대륙의 가운데 놓여 있다.독일 역사는 외부로부터 내부로,내부로부터 외부로 부단히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역사였다.독일과 국경을 맞댄 나라는 9개국으로 러시아를 제외하면 세계 제1이다. 이처럼 양국에는 전혀 다른 고유의 특징이 있지만 양국민이 2차대전의 결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과거는 역사다.그러나 과거는 단순히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역사이자 현재인 것은 아닌가.과거 해석은 역사가의 일이지만 그러나 정치가 또는 정신적 지도자들도 참가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나는 있다고 확신한다. 만일 책임있는 입장의 독일 정치지도자가 「전시중의 행위는 역사이므로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할 수 없다면」,「전쟁을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자국의 군대가 타국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판단을 주저한다든지」,「타국에 대한 공격을 자위였다고 해석하는 일이 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 중대한 외교상의 결과로 되고 말 것이다. 이웃나라로부터 정치적,윤리적 판단력을 결여했다고 비판을 받는다든지 아직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나라로 보일 것이다. 불신 해소가 중요하지만 불신이 생긴 것은 전쟁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독일인이라면 확실하게 깨우치고 있다.불신 해소에 성공하는 것,이것이야말로 현재와 장래에 걸쳐 사활적 관심사인 것이다. ○「원폭」이 면죄부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정치적 책임인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할 위험을 안고 있다. 독일은 이런 통찰로부터 적절하게 책임있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어려운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우선 19 68년 「청년들의 반란」으로 과거의 범죄가 용서없이 논의의 대상이 됐다.또 이에 앞서 기독교회가 나치즘 지배 아래서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여기에 저항할 용기가 없었던 점을 고백했다.여기에 아데나워 총리가 50년대 나치 희생자의유족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거액의 보상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독일로서는 전쟁 패배의 날이 독재로부터 해방의 날인 것이다.독일연방공화국이 솔직히 과거를 다룬 것은 국제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유럽공동체의 가맹도,독일연방군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맹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폴란드와도 조약이 체결됐다.정력적인 청소년교류계획도 추진되고 있다.인간으로서,국민으로서 화해에 이른 것이다. 일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아들이기는 하면서도 종속에 빠지지 않았다.일본은 현격히 강해졌고 국민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게 됐다.19세기 일본은 정신적 의미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등을 돌렸다.동시에 이 지역에서 군사적,정치적인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이러저러한 군사적 분쟁을 일으켰다. 독일에 있어 나치는 이상한 시기,단절이었지만 일본은 전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면서도 종교적인 기반,천황제,또 국가체제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일본에서는 종전됐을 때나 그 후나 전통과 계속성이 강력히 유지되고 있다.거기에다 독일과 일본이 다른 것은 원폭 피폭 경험이다.미국이 무방비의 일본 일반시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유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대측이 옳지 않은 일을 범했더라도 우리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솔직히 과거 다뤄야 전쟁에서의 죄와 옳지 않았던 일들을 공평하게 판단하려면 역사의 진실에 눈을 닫아서는 안된다.이 진실은 파사현정,새로운 상호 신뢰를 일으켜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때로는 사죄가 필요하지만 거짓으로 꾸미지 않은 사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마음으로부터 사죄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두어야 한다.또 독일의 경험으로는 보상의 행동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말보다도 크게 효과적이다.적극적으로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독·일 양국민의 내외의 과제의 해결에 있어서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재일동포의 명암(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

    ◎반한반일… 「뿌리」와 「생활」사이 고민/이지메식 차별 극복 각 분야서 두각 광복 50년.한국과 일본은 5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문제를 안은 채 「가깝고도 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현재의 한·일관계는 과연 어떤 상황이며 바람직한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광복50주년,광복의 달을 맞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양국관계를 총점검하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해보는 「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을 연재한다. 재일동포 신인하씨는 도쿄에 있는 어느 신문사 운동부(체육부)에서 일하고 있다.그녀는 지난 91년 요코하마시립대학을 졸업한후 신문사에 들어갔다.그녀는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장을 누비며 기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신씨는 정식 기자가 아니다.그것은 그녀가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동포라는 이유 때문이다.그녀는 단지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정식 사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임시채용에 머물수 밖에 없는 신씨는 보험·후생연금·보너스 등의 혜택을 받지못하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신씨와 같이 민족차별을 받고 있는 재일동포는 그 탄생의 기원부터가 비극적이다.일제 식민통치의 불행한 부산물인 그들의 원초적 비극은 일본 특유의 「이지메」라는 단어속에 증폭되었으며 광복 50년이 된 오늘도 끝나지 않고 있다. 약자를 괴롭힌다는 의미의 이지메 현상은 재일동포들에게는 민족차별로 나타났다.재일동포들은 여러가지 제도적·인습적 차별과 압박·멸시속에 민족차별의 한을 품고 고난의 어두운 세월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재일동포들은 그러한 차별로 삶의 터전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그들은 이때문에 자유업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많은 재일동포들이 야키니쿠(불고기·갈비)음식점이나 소매상을 하고 「빠찡꼬」업에 진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빠찡꼬는 일본거리에서 가장 화려한 간판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재일동포들의 어두운 민족차별의 역사가 배어 있다. 재일동포들은 민족차별을 없애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해왔다.민족차별 문제는 2세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일본사회의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재일동포 1세와는 달리 2세들은 지문제도등 민족차별에 대한 강한 저항을 나타냈다. 지문날인철폐 운동은 대표적인 민족차별 반대운동이었다.오랜 투쟁의 결과 재일동포들의 지문날인제도는 1993년 1월 외국인등록법이 개정되며 없어졌다.그것은 대단한 변화였다.가난과 심한 차별속에 살았던 과거와 비교해 볼때 제도적·법적 지위가 많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사회 각 부문에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재일동포들은 삶의 기본이 되는 취직이 어려우며 취직이 되더라도 컴퓨터등 전문기술을 갖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식사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정식사원이 되더라도 진급에 한계가 있다.그들은 진급을 미끼로 귀화를 요구받기도 한다.재일동포들은 또 세금을 내면서도 지방자치 차원에서 조차 참정권이 없다. 일본사회의 많은 차별로 2세,3세로 내려갈수록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그들에게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민족의식 보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이 더욱 절박한 과제이다.그러면서도 그들은 민족차별과 장래에 대한 불안등으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한 갈등을 감수하기 보다는 차라리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일본인과의 결혼 등으로 귀화하는 재일동포도 늘어나고 있다.최근에는 매년 7천∼8천명이 귀화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총귀화자수는 거의 20만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고난과 차별의 어둡고 긴 터널을 자신의 실력으로 빠져나와 일본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않다.그러한 젊은 세대중 한사람이 유미리(27·여)씨다.재일동포 2세인 그녀는 일본의 대표적인 희곡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연극을 하다가 17세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지난 93년 최연소로 일본 희곡계 최고의 기시다상을 받았다. 유씨는 지금도 정열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 「풀 하우스」는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예비심사를 통과하기도 했다.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제1백13회(1995년)아쿠타가와상 예비심사를 통과한 6개 작품중 그녀의 작품이 선정되자 그녀의 문학적 위치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그밖에도 김경득 변호사,여배우 김구미자,오페라가수 전월선,화가 최광자,이진희·강재언 교수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일본 속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다.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며 사무직종사자는 전체에 26.9%(92년말 현재 일본법무성 통계)나 된다. 보통의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도 과거보다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도쿄 우에노에서 제일물산이라는 한국식품점을 경영하는 강은순씨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일본인들의 멸시도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그녀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일본인들이 재일동포를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국력신장과 일본사회의 국제화로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유형·무형의 각종 민족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민족차별과 조국으로부터도 따뜻한 환영을 받지못하는 재일동포들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쪽 한국인,반쪽 일본인」의 어정쩡한 지위가 되고 있다.더욱이 뿌리의식이 강한 1세가 68만여명의 동포중 5∼7% 정도 밖에 남지않아 멀지않아 1세가 없는 재일동포사회로 바뀔 것이다. 그러한 재일동포들은 세월의 흐름과 언어의 단절등으로 조국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있었던 1세와는 달리 2세이후 세대들은 일본에서의 정착을 당연시하고 있다.그렇다고 배타적인 일본사회속에 완전 동화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탄생부터가 비극적이었던 그들은 귀화를 하든가 아니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 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이세기의 인물탐구:79)

    ◎스스럼없이 화필 휘젓는 큰 예인/작품마다 영혼이 움직이듯 팽팽한 긴장감/화려한 채색 거부… 발묵·석묵법 자재로이/77년 「한국현대회화 유럽전」때 “동양문화의 진수” 보여 산정의 성북동 무송재는 지금 녹음이 한창이다.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벌써 그 짙푸른 녹색으로 인해 집안은 유현한 산곡과도 같다.안채로 통하는 디딤돌 외에 새파란 이끼가 휘덮인 마당은 모든 것이 푸른 가운데 허공에 우러른 첨단에마저 서슬 푸른 냉기가 감돈다.「일편연홍난입문,한조각의 붉은 빛도 문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산정의 말대로 영롱산관 죽리관 수죽원하관 창하헌 등 그의 당호들은 집안에 넘치는 푸른색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화실 창앞에 쭉쭉 뻗어 있는 청청하고 곧고 차가운 대나무며 지금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추국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시든 빛을 보이지 않는 영롱한 환경은 서울 한복판이건만 실로 아득한 선경인 듯 감탄스럽기만하다.여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과 한옥중의 한채에 온통 중국고서적이 산적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이 얼마만한것인가를 미루어볼 수 있다. 그는 성북동 전에는 노송으로 우거진 월곡동에 살다가 대학때의 스승인 근원 김용준을 그리워하여 지금부터 20여년전 스승의 노시산방이 있는 이곳에 한옥을 지어 이사했다. ○회화예술 변혁 앞장 산정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서시문화를 두루 갖추고 상식에 안주하려는 회화예술에 변혁과 개혁의 화업을 이뤄낸 동양화 대가다.초기에는 범속과 권위와 형식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을 앞세워 「고루협애가 없는 방종자일한 표현」으로 개혁의지의 향방을 모색하다가 차츰 「감각의 해방을 원점으 로 되돌린 절제화면」을 이룩하면서 남보다 일찍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첫번째 전시 팸플릿에서 그와 같은 유사성을 「명대의 서위나 청초의 석도」에 비유하고 오광수 역시 「수묵화를 감필묘법으로 구사한다는 차원에서 남송의 양해나 선화파의 목계의 화격」에 닿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병관씨는 「모든 진실한 작품은 침착하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산정의 작품은 무한을 생각케 하는활짝 트인 화면공간속에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과연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상태,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듯하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려는 자기모순을 함축한 그의 작품은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영혼이 움직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9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군무」「사람들」시리즈는 「붓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붓을 던졌다는 표현이 더욱 옳다」는 정병관씨의 평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즉 「붓의 전진하는 속도감과 상하로 누르고 떼는 강약의 압력은 낭만적인 금선의 무쌍한 변화」와도 같으며 「발묵과 석묵법의 자재로운 움직임」은 바로 산정 그림의 즉흥성과 필연성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산정은 「스스럼없이 필력을 구사할 줄 아는 이 시대 재능이 뛰어난 예인」으로서 「흉중의 고고특절한 품성 없이는 문자향과 서권기를 지니지 못한다」는 추사의 지론을 실천시킨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때 뒤늦게 입문 그가 화단에 등단한 것은 아직 대학재학중이던 20세였으나 뒤늦게 45세되던 해 서울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에는 일정한 채색과 반추상의 형태가 깃들여 있었다.그러나 산정 자신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메마른 구각이나 비좁은 질곡은 싫다」고 천명했고 이후 채색이 없는 검정색의 선묘형상들은 그 기호적인 성격과 힘과 자발성을 채색의 경우보다 한층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우리 화단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언제나 커다란 구심점을 긋고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오늘날 수많은 미술대전에서 동양화가 구상·비구상으로 나눠지게 된 것도 단순히 이 작가의 작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화단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산정은 유럽쪽에 눈을 돌려 수많은 해외전에서 한국회화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그중 77년 9개월에 걸친 「한국 현대회화 유럽전」에서는 현지 신문들이 「서세옥의 추상적인 묵화들은 동양화라 일컬어지는 한국 전통미술의 현대적 전모를 집약함으로써 서양인에게 동양문화의 진미를 보여주었다」(르피가로 78년6월28일자)고 쓰기도했다. ○올 11월 개인전 열어 그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고서화가 있는 집안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며 자라났다.독립운동을 하던 부친 서장환(석련)공은 세 아들중 일총한 산정을 특히 총애하여 「성동」이란 아호를 내려주었으나 대학시절 영운(김용진) 춘곡(고희동) 소전(소전 손재형)등 그의 스승들이 「세옥」의 옥자와 관련된 「옥출곤강(금과 옥돌은 산에서 캔다)」이란 의미의 「산정」을 지어주었다. 지난해 서울대 정년퇴임후 산정은 무송재 녹음속에 파묻혀 그의 전생애가 그렇게 일관해왔듯이 자유하는 예술가로서의 절제와 생략과 탈속의 묘를 구체화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의 테마는 여전히 인간에 집착한다.세월도 서릿발 같은 그의 의지를 피해가는지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호랑이나 사자를 사로잡듯」 우주의 올바른 기운을 수백호 화면속에 역동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요즘은 오는 11월로 잡힌 개인전과 그가 발족한 한·중미술협회의 요청으로 그동안 써온 한시를 친필서예로 꾸미는 「산정문집」 출간준비에여념이 없다.그중 연전에 중국 양자강을 둘러보며 지었다는 「단현」이 눈에 띈다. 「비지양현회 농현감금심 고산류수곡 적막실지음 석현호불기 천재거무회 수주아양곡 공류일금대(이땅의 두 현인이 만나 거문고로 서로 마음을 느끼니 이는 고산곡과 유수곡이라,지음이 없으니 적막하구나.옛 현인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천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누가 고산 유수곡을 연주할 것인가,속절없이 거문고 튕기던 언덕만 남았구나)」이는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 명인이던 백아가 그의 거문고소리를 좋아하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현을 끊어버린 일화를 그린 시로 그들이 거문고를 타던 양자강가에 서자 이런 시를 읊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3∼4년전까지만해도 송죽 우거진 뜰에서 산정은 가까운 이들을 모아 거문고며 가야금연주를 즐기곤 했다.그러나 명고수 김명환씨가 4년전 작고하고 단골손님이던 언론인 예용해씨마저 지난해 타계하자 화가는 혼자 남아 그때의 감흥을 한편의 시와 한점 획(화)으로 남기게 됐나보다. 이제 산정댁의 대나무가 그 놀라운 푸른빛을 뻗치고 소나무향이 온산을 뒤덮어도 이 풍치를 음미할 만한 유장한 현금은 울려지지 않는다.단지 우거진 나뭇닢이 단 한 잎도 시든 기색 없이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처럼 시들 줄 모르는 산정의 붓끝은 그 탁발한 금선의 선율로 「청청속의 노주」를 결국 성취하게 될 것이다. □연보 ▲19 29년 대구생 ▲49년 제1회 국전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 수상 ▲50년 서울대 미대 졸업 ▲54년 제3회 국전서 「휘월의 장」으로 문교부장관상 수상 ▲54∼95년 서울대 미대 교수 ▲59년 묵림회 창립대표위원 ▲61∼82년 국전 심사위원·운영위원 ▲62년이후 상파울루비엔날레 칸국제회화제 이탈리아회화제 인도트리엔날레 도쿄비엔날레 파리현대미전 등 출품 ▲64년 국제조형예술(IAA) 한국위원회위원장,신인예술상 심사위원장 ▲64∼88년 한국미협이사장·회장 ▲66∼71년 유럽·남북미 34개국 여행,한국현대미술 프랑스순회전 ▲70년 국전 초대작가상,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73년 예총부회장 ▲74년 서세옥전(현대화랑초대전) ▲77∼78년 한국현대 동양화유럽순회전,스웨덴 폴란드 독일 프랑스 ▲79년 서세옥전(도쿄 우에다화랑 초대) ▲82∼85년 서울대 미대학장 ▲83년 서세옥전(뉴욕 퍼시픽아시아박물관초대),전국미대협의회회장 ▲85년 서세옥특별전(뉴욕 바로카레지미술관 초대) ▲89년 서세옥전(현대화랑 초대),뤼턴오브 마르코폴로전(프랑스 파리) ▲90년 한국작가전(중국 북경),한·중미술협회 결성 ▲91년 한·중미술대전(중국 북경)이후 서울·남경·상해 등지서 교류전시 그외 한국회화대전및 아세아현대미술전 한국미술상황전 LA87미술전 조선일보미술관개관기념 현대작가초대전 서울올림픽아트 국제현대미술전 등 다수 출품,국민훈장석류장 서울시문화상 한·중미술협회회장,미협고문
  • 보스니아서 유럽은 졌다/윌리엄 파프 미 칼럼니스트(해외논단)

    ◎미는 무기금수 해제… 「싸울수 있는 수단」 제공해야 보스니아 회교정부가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와 싸울 의지가 있는한 미국은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미국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파프가 최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주장했다.다음은 「현재 세르비아계가 승리하고 유럽은 패배하고 있으며 미래는 어둡다」는 제목의 그의 칼럼 요지. 보스니아의 고라주데와 사라예보에서 프랑스군을 강화해야한다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의 제안은 단지 백악관을 당황하게 할 뿐이다.그리고 지금까지의 보스니아에 대한 프랑스정책을 입안해온 알렝 쥐페총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라크는 보스니아에서의 현안이 무엇인지를 알고있는 정렬적이고 행동력있는 사람이다.그러나 그는 보스니아사태와 관련해 너무나도 늦게 권력을 잡은 사람이다.그의 제안은 때가 늦은 것이다.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래 미국은 점진적으로 유럽주둔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워싱턴의 시각으로 볼때 이제 유럽인들의 문제는 유럽이 처리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강대국 특히 프랑스,영국등은 처음에는 워싱턴이 떠맡기를 거부한 책임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유럽이 통합된 외교·안보정책을 통해서 유럽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럽의 각국 정부들에게 유럽의 평화와 정치질서에 대한 개별적인 책임의 포기에 대해 변명거리를 제공했다. 미국의 지도력이 없어지자 유럽의 정부들은 그 자신들 모두가 유럽문제에 대한 의견통일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라는 사실이 이들 국가에게 지도적인 위치에 서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즉 유럽의 경제적 통합의 성공이 개별적인 정치적 행동에 대한 장애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경제적 통합은 서유럽국가들에게 동유럽,발칸반도,러시아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는 정치적 권위와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다. 유고슬라비아 문제와 관련,미국정부는 처음부터 유소슬라비아는 유럽의 문제라는 믿음하에 개입을 자제했다.워싱턴은 보스니아인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위해 무장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만을 유지했다.미국정부는 또한 새로운 보스니아정부는 서유럽통합의 근본 원리인 인종간 무차별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라고 믿었다. 유엔의 무기금수는 지정학적으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에 의해 둘러싸인 보스니아인들을 무장시키지 않는데는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무장을 저지하는데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결론은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보면 먼저 미국은 보브 돌 상원원내총무가 요구한 바와 같이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금수를 일방적으로 해제해야한다.만약 보스니아 정부가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아 꾸준히 싸울 자세를 갖춘다면 보스니아군을 무장시켜야만 한다.미국은 또한 보스니아에서의 제공권장악을 위해 보스니아에 충분한 공중지원을 해야한다.결론적으로 보스니아인들이 전쟁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제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럽정부들은 만약 미국이 정책을 바꾼다면 자신들의 군대를 유고슬라비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말해왔다.특히 영국은 이번 겨울이 오기전에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군대를 철수할 것같이 보인다.영국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망신스러운 포기에 대한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줄 미국정책의 변화를 환영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변화에 대한 반대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미행정부는 유엔군을 선발할 때에 2만5천명의 군대를 보내기로 약속한 적이 있다.지금 이 순간에는 고라주데와 사라예보의 강화를 위한 수송수단의 보급이 요청되는 때이다. 만약 미의회가 이것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을 그 맹방들이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맹방들의 기대를 다시 한번 배신한 것이 된다. 스레브레니차의 보스니아 정부군은 30개월전 유엔에 의해 무장이 해제됐다.그것은 그들지역이 유엔에 의해 보호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맞바꾼 것이었다. 지난주말 고라주데의 유엔평화 유지군은 보스니아군들이 그들로부터 유엔군들이 가져간 중무기들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노력에 저항하는등 30개월전의 믿음을 무색케하는 행동을 취했다.
  • 후반기 개혁 이렇게/오인환 공보처장관

    ◎“고통 대신 행복 약속하는 개혁으로”/국민이 바라는 「삶의 질」 헤아려 일관되게 반영/「반발」의미 수용… 보완·개선조치 실천에 옮겨야/절차의 공개·투명성 원칙 지키는 자세 새롭게 오인환 공보처장관은 17일 국정신문에 실린 「후반기 개혁의 중심은 국민이 돼야­변화와 개혁 30개월」이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앞으로의 개혁은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기고 전문. 연이어 일어난 대형사고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참담한 슬픔을 되씹고 있다.왜 이런 일이 한번도 아니고 되풀이되고 있는가.천재지변도 아닌 인재의 형태로 오늘의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이 연이은 재난을 마주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무엇보다도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함께 부상당하고 고통받는 모든 분께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까.정부에 몸담고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안타까움과 자괴감을 무슨 수로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 삼풍참사의 현장에서 뿌리깊은 부정부패의 먹이사슬과 부실의 부조리를 새삼 확인하면서 질기고도 질긴 한국병의 병균을 도려내기 위한 개혁을 앞으로 계속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오를 새삼 다짐하게 된다.그 길만이 이같은 대형참사로 희생당한 피해자와 그들의 유가족,부상자와 고통받은 모든 분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고 그같은 참사의 재발을 원천적으로 막는 유일한 방안이 아닐까. 2년여전 정부는 변화와 개혁,신한국 창조의 깃발을 높이 치켜올렸다.지난 2년여동안 김영삼대통령은 오직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간존중과 정의가 넘쳐흐르는 신한국 창조의 국정지표 아래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한국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과감한 도전이었다.고속성장시대의 부산물인 잘못된 제도와 관행과 의식을 타파하여 사회를 정상화시키고 합리적인 관행과 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는 새 풍토를 일구어내는 일을 모든 것에 우선했다.사정개혁,공직자 재산등록,금융실명제,정치개혁입법,정부조직개편,돈 말썽이 사라진 깨끗한 선거,지방자치 출범,행정쇄신과 규제완화를 위한 개혁,사법개혁,교육개혁,그리고 세계일류를 지향하는 개혁인 동시에 국가발전 전략으로서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지난 2년여의 기간은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쉼 없이 몰아친 기간이었다.그것은 외형보다 내실을,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모든 개혁작업은 정부 출범 초기 윗물맑기운동 이래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고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보아야 한다.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끌어내지 못함으로써 6·27 지방자치제선거에서처럼 강한 제동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금융실명제 개혁당시를 회고해보면 금융실명제야말로 경제를 망칠 것이라는 위협을 앞세운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을 떠올리게 된다.최근 사법개혁이나 교육개혁의 과정에서도 기득권층의 집요한 저항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미흡한 점이나 기득권층의 반발에 대해서 변명하고 원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오히려 그러한 미흡함과 반발이 의미하는 바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믿는다.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곧장 경제정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함을 인식해야 한다.물론 가속되는 부익부 빈익빈을 완화시키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 성과를 국민 개개인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요컨대 재산가·중산층·서민이 각기 나름대로 개혁으로 손해만 보고 있다고 느낀다면 분명 무엇인가 잘못돼 있다.또 그들이 개혁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개혁불감증에 걸려 있다면 이는 분명히 착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동안 여러 부문에 걸쳐 다각적으로 추진해온 개혁의 정지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보완하고 개선하는 후속조치가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정상화·합리화를 위해 고통을 수반하는 개혁이 불가피했다면 이제부터의 개혁은 고통 대신에 즐거움을 주고,부담 대신 행복을 약속하는 방식을 우선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즐거움과 안전과 편안함을 주는 삶의 질을 위한 개혁일진대 국민이 바라고선택하는 삶의 질을 헤아리지 않은 개혁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또 개혁은 절차에 있어서 공개성·투명성의 원칙을 살려야 하고 국민의 생각을 철저하게 수반하는 일관되고 낮은 자세로 새로 가다듬어져야 한다. 변화와 개혁은 대외적으로 존경받고,대내적으로 살기 편한 부민안국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의 신사고 미래상도 겨냥하고 있다.그래서 이 모든 것은 김영삼대통령 임기동안에 완성될 성격이 아니다.이제 우리는 문명사적 변환의 문턱에서 정보화 미래사회를 개척해나가는 긴 안목으로 개혁의 청사진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심기일전해 개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현시점에서 말보다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감한다.특히 정부의 선후와 경중이 잘 정리된 종합적 실천력이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한다.개혁이 갈등보다 화합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국민 자신이 개혁의 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공직사회부터 그러한 방향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자유와민주주의를 위해 바쳐지는 문민정부와 김영삼대통령의 충정이 오해와 편견등에 의해 굴절되지 않고 국민과 호흡을 같이 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높은 파고처럼 밀려오는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를 위대한 한민족의 기회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도 정부와 공직사회는 앞장서야 한다.
  • 원로 연극인 장민호(이세기의 인물탐구:78)

    ◎평생을 연극으로 살아온 연기자의 대명사/파우스트 간판배우… 별명은 “파우스트 장”/이순신서 햄릿까지 어떤 배역도 무난히 소화/칠순이 눈앞에…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기생활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는 관객을 계속 끌고 나가는데 있다』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수로 활약한 샬리아핀은 말한다.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연기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집념어린 정열을 불태우는 이가 있다면 국립극단의 원로배우 장민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그는 평생을 연극으로 일관한 연기자의 대명사다.양심적이고 본질적인 그의 연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일시적인 경이감이나 전율만은 아니다.연기를 통한 인간정신의 승화를 그는 무대 곳곳에서 증명해 내고 있다.예의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인 관객을 이끌어 나가는데」 한번의 실수나 실책이 있을 수 없다는 주의다. ○솔직하고 직선적 성격 그는 언제나 의욕적이다.성격은 명쾌하고 성급하며 솔직하고 직선적이다.항상 모범생과도 같은 이런 유의 성격이란 한가지 일에 몰두하면 끝장을 봐야만직성이 풀리게 마련이다.또한 철두철미하고 다혈질적인 기질로 인해 곧잘 흥분하거나 저항하거나 마찰을 빚기 십상일 것이다.그러나 「칼날처럼 날카롭고 정의감에 넘치건만」 막상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에는 흑백을 가리거나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우회적인 유연성을 지니는 것이 남과 색다르다.이는 아마도 오랜 세월 어지러운 세파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터득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또는 이북에서 혼자 월남해온 그로서는 사방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당연한 견제일 수도 있다.그래선지 국립극단에서 40년이 넘게 한 솥밥을 먹은 동료들도 『그의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다만 무대에 서면 「온몸의 연기로 관객을 압도」하기 때문에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면 모든 것은 침묵」일수밖에 없다. 그는 해방직후 황해도 신천에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연극배우가 된 케이스다.20세되던 해 원예술좌가 공연한 성극 「모세」에서 타이틀 롤을 맡으면서 연극에 입문,그로부터 10년후 하유상의 「딸들자유연애를 구가하다」로 「노역」을 완성시키면서 「성공적인 연기자」의 반열에 올라섰다.이후 「대수양」「세종대왕」「성웅 이순신」에서 완곡하며 기질이 장대한 성군,「오델로」「맥베스」「줄리어스 시저」의 다이내믹한 개성,「밤으로의 긴 여로」「안네 프랑크의 일기」「햄릿」에서의 차분하고 섬세한 내면 연기 등 그에게 돌아오는 모든 배역을 「생생한 극중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한치의 허술함을 보이지 않았다.그중에서도 「역을 최후로 완성시키는 것은 디테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진실성」이라고 믿는 그가 평자들에게 어필된 것은 단연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수 있다. ○66년에 파우스트 초연 66년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로 초연된 「파우스트」에서 그는 학문과 지식에 실망한 노박사 파우스트가 현세적 향락에 침몰되는 과정을 고뇌에 찬 연기로 그려내었고 두번째는 8년후인 74년,순결한 헬렌과의 사랑에서 미마저 구하지 못한채 이상향을 꾀하는 허탈한 파우스트,또다시 84년 한독 1백주년 기념공연에서 독일의 저명한 기싱이 연출한 세번째「파우스트」에서는 지금까지 축적된 파우스트의 진면목을 함축하여 관객은 감전된 듯 박수갈채를 멈추지 않았었다.그때 이 연극을 연출한 기싱은 『그는 인물을 스스로 움직이되 얼굴 표정이 아닌 눈빛만으로 이미 단숙을 성립하고 있다』고 했다.즉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을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에서 그는 감정을 절제하거나 적절히 노출하여 역이 가리고 있던 사상의 베일을 한장 한장 벗겨내고야만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배를 띄우고 그리고 끝없이 높은 탑들을 불태운 얼굴이었던가.사랑하는 헬렌이여 단 한번의 키스로 불멸케 해다오.오! 그대는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밤하늘보다 더 아름답구나­ 가슴속에 박힌 사랑을 고백하는 이 장면은 「드라마틱한 다이너미즘과 명쾌한 표현적 리듬,응축된 긴장감과 생명의 맥박이 충만」하여 이를 앞서 연출했던 이해랑씨는 『중진 장민호의 연기가 폭풍같은 성공을 거둔 근본 요인은 이러한 관념을 최후까지 지킨 지치지 않은 탐구의 결과』라고 못밖았다.이는 50년대 후반국산 영화붐으로 연극계가 부진하자 전 연극인이 분발하여 만든 「대수양」(김동인 작 박진 연출)을 보고 『그곳에 군계일학이 있었다』고 한 이진순씨의 지적과 맥을 함께하는 찬사이기도 하다.이로써 그는 「파우스트」간판 배우로서 평생동안 영광스러운 「파우스트 장」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배우는 무대위에서 기왕에 정해진 다양한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따라서 짙은 분장속에 감추어진 배우의 모습은 다시 그 자체가 그의 얼굴일수도 있다. 더구나 그의 묵직한 바리톤의 음색은 푸짐한 볼륨과 풍부한 음조의 변화,감정의 뉘앙스가 격하게 풍겨나와 어느 대목에서도 무기미를 느낄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중후한 음의 압력은 라디오 드라마에서도 특출난 개성을 돋보여 67년부터 그가 해설자로 등장한 대하드라마 「광복20년」은 10년 장기 연속방송으로 장안의 성가를 높인바 있다. ○연출가로도 한때 활동 그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유치진의 「소」,체호프의 「봐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린 창조적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이며연극적 감각과 지성을 겸비한 영화배우·TV탤런트이기도 하다.한때는 경화 프러덕션을 설립,그가 제작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60년대 초반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인생만사 만능은 없다」는 교훈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절감하고 그는 고향에 돌아오듯 무대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하고싶지 않은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간혹 주변에서 자서전을 내라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해 오거나 방송 대담프로그램등에서 초청하면 일언에 외면한다.「배우는 무대에서 말할 뿐」,연기와 무관한 일은 그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가족은 산행 동반자인 부인 이영애(63)씨와 출가한 남매가 있다. 지금도 젊은 후배 연극인들 사이에서 대사를 가장 잘 빨리 외우고 「내가 만약 저 역할을 맡으면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간파하여 선명하고 강렬한 생명체를 그때마다 새롭게 탄생시킨다.또 주역에서 차츰 비켜나고 있지만 역이 크든 작든 「연기자는 계급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자부심과 열의로 자신의 위상과 예성을 의식하는 도도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양한 인생편력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대하려는 생의 충동은 그가 맡았던 파우스트의 일면이며 결국 「연극은 눈과 귀를 통해서 영혼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연극예술과 미와 환희를 이 세상에 가져다준,우리 연극사상 그는 투철한 한 존재에 틀림없다. 그리고 더이상 열띤 대사를 읊조리지 않아도 「오델로」의 이야고나 브루터스의 배반의 이미지를 물흐르듯 되살리는 경지에서 오늘도 그는 그만의 적광의 광채를 어두운 객석에 뿌리고 있다. 기 자 입 력 □연보 ▲1927년 황해도 신천 출생 ▲45년 월남,조선배우학교 졸업 ▲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제1기 성우 ▲47년 원예술좌 입단,성극「모세」의 타이틀 롤로 데뷔 ▲50년 국립극장산하「신협」입단,유치진 작 연출「원술랑」 조우 작「뇌우」출연 ▲53년 국립극단 입단,오상원 작 「녹슬은 파편」이후 해마다 출연 ▲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셰익스피어 작 「햄릿」출연 ▲66년 괴테 원작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 「파우스트」초연서주역,일본 일생극장 개관기념공연 참가 ▲67∼71년 국립극단 단장 ▲68∼89년 한국 연극협회 이사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북벌」 ▲79∼90년 국립극단 단장 ▲88년 조우 작 이해랑 연출「뇌우」 38년만의 재공연 주역 ▲현재∼예술원 회원,국립극단 원로배우,연극협회 자문위원 제1회 방송문화상(58년) 서울시문화상(63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68·73·78년) 연극평론가 협회상(79년) 대한민국예술상(81년) 목련장(8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88년) 예총예술문화상(89년) 연극­유치진 작 「자명고」(54년)를 비롯,「박쥐」「오델로」「느릅나무 그늘의 욕망」「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인생차압」「시라노드 벨주락」「붉은 장갑」「세자매」「안네프랑크의 일기」「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다」「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빌헤름 텔」「죄와 벌」「결혼중매」「베니스의 상인」「이순신」(신명순 작 66년)「갈매기」「북간도」「수전노」「인종자의 손」「남한산성」「전쟁과 평화」「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73년)「세종대왕」「허생전」등 1백70여편과 영화 TV드라마 다수 출연.8월2일부터 「눈꽃」(11일까지 우봉규 작 김석만 연출 국립극장 대극장공연 예정).
  • 시인 박두진(이세기의 인물탐구:75)

    ◎신·자연·인간을 노래한 “해의 시인”/불의·적당주의·시속과 타협 단호히 거부/독학으로 인생행로 개척한 극기의 인물/등산·수석채집 30여년… 붓글씨·서화에도 능해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혜산 박두진의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그를 일컬어 문단은 「해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대교수)은 『밤과 밤을 몰아내는 해와의 대조위에 전개되는 「해」에는 혜산이 희망하는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세계는 꽃과 새와 사슴과 칡범과 인간이 한 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동심을 이루고 있지만 과연 현실이 기다림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그의 시적 변모는 이러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혜산 박두진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신앙의 영향은그로하여금 인간중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고 가장 위대하게 사랑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언덕과 하늘과,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집단이 감동속에 결속되고 있음을 「갈보리의 노래」로 절규하고 있다. ○“위선과 탐욕 버려야”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같은 치욕을,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 눈을 돌려 「이제 사물과 인간은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하나의 사건이 되고,가식과 위선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의 특징은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추구하지 않는 점이다.86년 한 신문에 발표한 칠순기념 특별기고에서 「가난이라든가 개인적인 슬픔,사람에 대한 배반감이나 기쁨을 시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문학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인류공동의 문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로 천착하여 진실에 대한 투시력을 보여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즉 「시의 사상,시의 윤리,시의 심미적 창조가치는 언제나 그 창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만 시적 진실이 획득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면서 「나이든 사람은 젊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업고 나와 학연·지연을 앞세워 설쳐대는 것은 문학의 권위와 문학인의 자존심을 잃는 일」이라고 우려해 마지않았다. 혜산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고 그의 시의 소재들은 이런 다양한 지란을 이겨낸 심혼의 결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인 신대철은 팔순을바라보는 나이에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와 순수무결한 시심을 잃지 않는 혜산을 향해 『자기초월의지를 가진 인격과 고고한 학자의 기풍과 시인의 기상을 흐트리지 않아 문단에서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기도 안성 「고장치기」로 불리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청렴한 선비이던 선친으로부터 일찍이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고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 외엔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4세때 「문장」지에 등단 24세에 「문장」지의 시 추천을 거쳐 문학활동을 전개하기 이전까지 그는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원 생활을 전전했고 45년 해방과 함께 그 당시 유일한 출판사이던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것이 조지훈·박목월과 만나 「청록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된다.이후 자연과 신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더니 60년대말부터 수석취미에 침몰하여 「돌」 하나만을 주제로 하는 「수석열전」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수년간 연재,지금은 「돌의 시」로써 시인만의 청복을 누리는 시기다. 서대문구 창천동 그의 집에 가보면 마당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는 「뇌뢰낙락하고 고하고 괴하면서 관용자수 한 명석」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고 그의 돌에 대한 사랑은 3천여편 이르는 시작 외에도 서화나 수필에 넘치도록 표현되어 있다. 「작은 한개의 돌이 갖는 형태미와 색채미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막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난이 정의 극치라면 수석은 의 극치,난이 부드러우면서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표일 불기이면서 차라리 성자롭다」등,그리고 「시를 쓸 때의 사무사의 맑은 마음,맑은 눈만이 석격이 심웅하고 석품이 우귀」한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혜산의 취미는 다양하다.시를 쓰는 것과 동시에 30년남짓 등산을 하고 난을 키웠으나 그는 이를 굳이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붓글씨와 서화에 능하여 앞을 향해 질주하는 듯 한 아름다운 필체는 「혜산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서도를 감히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어떤 것은 너무 높은 경지라그렇고,어떤 것은 나 자신이 족히 미치지 못해 모자라는 것을 취미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를 좋아하면서 산을 좋아했는지 산을 좋아하다가 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산은 심약한 그를 「의지적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일목일초에 기울이는 정서적·감각적 운치를 알게 했으며 「한개의 돌에 얽힌 정신적 파동」은 그의 시심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돌아본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진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연포 이하윤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잔의 술실력으로 「도도한 무애의 웅변,월탄의 호통,공초의 무언,수주의 독설속에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철저하게 밤을 새운 이야기」는 문단사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수석에 물을 뿌리고 돌보면서 가슴속에 들끓는 정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그럼에도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의식해 본 일이 없다」고 끝내 도도하다.다만 「시는 한낱 감상이 아닌 인간이 신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덕윤과 경외의 념」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언제나 쓸 것이 밀려 있고 생각에 쫓겨 「한없이 즐겁고 한없이 탄력을 느끼면서 고양된 감정,맑은 생각,투지와 저항,여유와 절박감이 뒤섞인 속에서」 그는 총체적으로는 어떤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껴왔다고 수필집 「돌과 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후엔 일주일에 두번 추계예술대 강의,그외엔 2박3일정도로 수석채집을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수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 지루해 하지 않는다.가족은 동화작가인 이희성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만 4형제.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부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혜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 속에는 시가 있고 시를 상실한 사람은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신의말씀」이라는 그의 시론을 시로써 실천해냈고 마지막 붓끝까지도 신과 자연과 인간의 결속을 불후의 명시로 성취할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연보 ▲19 16년 경기도 안성출신,호 혜산 ▲39년 「향현」「묘지송」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 ▲46년 첫시집 조지훈·박목월등과 「청록집」(을유문화사)출간 ▲48년 한국청년문학협회 시부위원장,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49년 제2시집 「해」(청만사)출간,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51∼81년 연세대 교수 ▲65년 우석대 조교수 ▲70년 이화여대 부교수 ▲81년 단국대 초빙교수 ▲86∼현재 추계예대 전임대우교수 시집 「오도(오도)」(54년)「박두진 시선」(56년),수필집 「시인의 고향」(58년),시론집 「시와 사랑」(60년),시집 「거미와 성좌(성좌)」(61년)「인간밀림(인간밀림)」(63년)「하얀날개」(67년)「청록집·기타」「청록집 이후」(68년),시론집 「한국현대시론」,수상집 「생각하는 갈대」(70년),영역시선집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역 「Sea of Tomorrow」(71년),수상집 「언덕에 이는 바람」,시집 「고산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한국현대시문학대계 「박두진」(73년),시집 「속·수석열전」(76년)「야생대」(77년),시선집 「예레미야의 노래」,시집 「포옹무한」「하늘까지 닿는 소리」「박두진 전집」(범조사 81년)「나 여기에 있나이다,주여」(82년)「청록시집」(83년),수상집 「돌과의 사랑」「그래도 해는 뜬다」,시선집 「일어서는 바다」(86년) 「불사조의 노래」(87년),시집 「빙벽을 깬다」(90년),산문전집 「햇살,햇볕,햇빛」(91년)「박두진 전집」(신원문화사 95년) 아세아자유문학상(56년) 서울시문화상(63년) 3·1문화상 예술상(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76년) 인촌(인촌)상(88년) 지용문학상(89년)
  •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 비밀회담(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5)

    ◎스탈린,김에 「3단계 남침계획」 수립지시/스탈린/“「엘리트 공격사단」·추가부대 창설을”/김일성/“모택동 동지도 조선해방 지원약속”/모택동,“김­스탈린 남침합의” 듣고 「조선인 사단 파견」 결정 □3단계 작전계획 ①38선 가까이에 병력집결 ②북에서 먼저 평화안 제의 ③평화안 거부땐 기습공격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로 제의한 항목은 다음과 같다(1950년3월23일·슈티코프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 「1.남북조선 통일방안 및 방법(의도는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임) 2.경제문제. ⓐ)북조선 경제개발.개발계획의 방향·기간.2·3·5년? 남조선 개발문제는? ⓑ)북조선 철도의 전기화. ⓒ)소련으로부터 산업장비·자동차 추가수입문제. ⓓ)북조선 농업개발문제. ⓔ)소련전문가 파견. 3.중조관계. ⓐ)모택동과의 회담. ⓑ)중국과의 조약체결문제. ⓒ)중국거주 조선인,조선거주 중국인문제. 4.아시아 공산당·노동당간 협조문제.」 ○소서 특별기 제공 이 전문을 보낸 이튿날 슈티코프대사는 재차 김일성과 만나 스탈린이 김과 박헌영 두 사람을 만나는 데 동의했다고 통보했다.김일성은 출발일을 3월30일로 잡겠다고 말했고 이에 슈티코프는 특별기를 이용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물론 이 특별기는 소련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었다.슈티코프대사는 3월24일자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이 특별기는 3월29일 평양에 도착해야 함.비행기가 못올 경우 원산에서 군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간 뒤 그곳에서 특별객차를 단 기차를 이용,모스크바로 가야 함」 이렇게 해서 김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거의 한달을 그곳에 머물렀다.이 기간중 김일성은 세차례 스탈린과 회담했다.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시간·장소별로 별도기록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는다.아마도 보안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아예 대화속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하지만 이들의 회담내용은 당시 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이 내용을 종합한 상세한 보고서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귀한 자료이기 때문에 보고서를 전재하기로 한다(1950년3월30∼4월25일.김일성의 소련방문건.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작성). 「스탈린동지는 김일성에게 국제환경과 국내상황이 모두 조선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강조했다.국제적 여건으로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해 승리를 거둔 덕분에 조선에서의 행동개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중국은 이제 국내문제로 인한 시름을 덜었기 때문에 관심과 에너지를 조선지원에 쏟을 수 있게 됐다.중국은 이제 필요하다면 자기군대를 무리없이 조선에다 투입할 수 있다.중국의 승리는 심리적으로도 중요하다.이는 아시아 해방의 기운을 증명했고 대신 아시아 반동세력과 그들의 주인인 미국·서방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미국은 중국에서 물러나 이제 더이상 군사적으로 새 중국당국에 도전치 못한다. 이제 중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세력에 대한 도전을 더 망설일 것이다.미국에서 오는 정보에 의하면 미국내에도 타국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유럽에서의 위상이 강화됨으로써 이런 불개입분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이 해방의 찬반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한다.첫째 미국이 개입할지 여부를 검토하고,둘째 중국지도부가 이를 승인하는 경우에 한해 해방작전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투수단 기계화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치 않을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그것은 북조선 뒤에 소련·중국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미국 스스로 대규모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내용. 김일성=모택동동지는 항상 조선전체를 해방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지했습니다.모택동동지는 중국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조선통일을 이루겠습니다.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스탈린=완벽한 전쟁준비가 필수입니다.무엇보다 군사력의 준비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엘리트 공격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창설을 서두르시오.사단의 무기보유를 늘리고 이동·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합니다.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계획이 수립돼야 합니다.기본적으로 공격은 3단계로 작성하시오.(1)38도선 가까이 특정지역으로 병력집결.(2)북조선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해 계속 새로운 제의를 내놓을 것.상대는 분명 이를 거부할 것임.(3)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한 뒤 기습공격을 가할 것. 옹진반도를 점령하겠다는 귀하의 계획에 동의합니다.공격을 개시한 측의 의도를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북측의 선제공격과 남측의 대응공격이 있은 뒤 전선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오.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개입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소련은 다른 지역,특히 서방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시 한번 모택동과의논할 것을 강조했다.모택동이 아시아문제에 정통하다는 점을 덧붙였다.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보낼지 모르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일성은 전쟁승리에 대한 강한 자심감을 내 보이며 스탈린을 안심시키려 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 보고서의 계속. 「김일성은 스탈린동지에게 왜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인지 상세한 분석을 해 보였다.공격은 신속히 수행돼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또한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이 강화돼 대규모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미국은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고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전체 조선국민은 열렬히 새 정부를 지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강조했음.박헌영은 남조선내 빨치산활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음.그는 20만 당원이 그곳에서 대규모폭동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음」 이 회담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두 사람은 1950년 여름까지 북조선군이 완전한 동원태세를 갖추고 북조선군 총참모부가 소련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구체적인 남침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모스크바회담을 계기로 남침계획수립의 주도권은 어느덧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남침승인과 함께 스탈린은 즉석에서 구체적인 3단계 작전방향까지 김에게 제시했던 것이다.한편으로 스탈린은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한국전쟁을 아시아공산화운동의 일환으로 만들고자 했음이 이 문서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일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중 누가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두 사람은 때론 경쟁적으로,때론 상대측에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김일성을 지원했다.우선 중국은 1940년대말부터 김일성의 권력강화와 군사력강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다.국민당과의 내전중에도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조선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요하다면 병력지원까지 할 것을 수차례 약속한 바 있다.다만 중국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은 남침문제를 주제로 회담도 가졌다.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이 모스크바회담에서 모택동을 제외한 채 무력남침에 합의했다는 보고를 받고 모택동은 매우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물론 모택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의사를 재삼 다짐했다. ○방소결과 중 통보 김일성은 49년3월 모스크바를 다녀온 뒤,5월초 인민군 정치보위국장이며 당중앙위원인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김일성은 5월14일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김일의 방중결과를 통보했다(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전문.5월15일).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방문목적은 중국공산당중앙위와 교류를 맺고 중국군내 조선인사단(만주출신 조선인으로 구성)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서다」 하고 김일성은 설명했다.김일은 4월30일 고강(고강)을 만나 중국공산당 중앙위로 안내됐다.그러나 김일의 진짜방문목적은 조선군 사단을 북한으로 전출시켜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모택동은 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일을 통해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친서를 전달했다.친서에는 조선군 전출문제 외에도 남침문제가 언급돼 있었다.이에 대해 모택동은 『군사행동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시기적으로 스탈린보다 모택동이 먼저,더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지지한 것이다.
  • 「새로운 문명의 창조」/앨빈 토플러 신저

    ◎“정보화사회선 「미래예측 정치」가 필수다”/과거회귀 집착하는 「제2물결 정치」는 곧 쇠퇴/관료적·획일적 사회구조 깨야 「제3물결」발전 「미래의 충격」「제3의 물결」「권력이동」 등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명저서로 이름난 미국 앨빈 토플러박사가 낸 신간 「새로운 문명의 창조」(부제­제3의 물결의 정치)가 미국 내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해말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압승을 주도한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필독권장 서문을 쓴 이 책은 상당부분이 저자의 기존 저서와 개념을 축약·재강조한 것이나 미국정치의 미래를 논한 7·8장만은 이번에 새로 쓴 대목으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미래예측의 정치,사전예방의 정치」만이 21세기와 제3의 물결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논지의 이 새 부분을 요약 소개한다. 미국 사회가 직면해있는 문제들의 목록표는 한없이 길다.뼈대가 되어온 제도·기관들이 무능과 부패로 붕괴되면서 죽어가는 산업문명의 도덕적 부패가 사방에 악취를 풍기고 있다. 우리가 대담해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지않으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미국의 정치는 양대 정당간에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되는 칼싸움식 쟁탈전이다.미국인들은 가면 갈수록 정치에서 소외되고 흥미가 반감돼 미디어와 정치가들 양쪽에 분노하고 있다.그들 대부분에게 정당 정치는 불성실하고 부패한 고비용의 그림자놀이로 비춰진다.누가 이기든 상관이 있느냐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다. 지난 80년 나는 「제3의 물결」에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발전은 산업혁명적 제2물결에 충실한 한쪽과 제3물결을 따르려는 다른 한쪽 등 2대 정치 캠프의 출현』이라고 썼다.제2물결 파는 산업대중 사회의 핵심적 제도­핵가족,대중교육제,거대기업,대형 노동조합,중앙통제 국민국가,의사 대의정부­의 유지에 진력한다.반면 정보·지식혁명적 제3물결 파는 기존 산업문명의 틀로는 더 이상 에너지,전쟁,빈곤,환경저질화,가족관계 붕괴 등 현재 당면해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의 해결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제2물결파가 제3물결파를 압도한 가운데 미국정치는 움직이고 있다.중앙집중적 관료제도는 제2물결 사회의 본질적 형태다.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관료적 구조를 깨고 제3물결형 경영방식을 고안하고 있지만 정부기구들은 제2물결형 공무원 단체의 저지로 개혁이나 구조개편 바람을 피해왔다.권력 엘리트 뿐 아니라 수백만의 중산층및 빈곤층도 제3물결을 따라가지 못하고 더 낮은 계층으로 전락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물결로의 이행에 저항하고 있다. 미래를 직시하는 정당은 다가올 문제들을 경고하고 사전방지를 위한 변화를 제시해야 한다.자유시장 체제와 민주주의가 앞으로 다가올 거대하고 광포한 물결간의 이행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미래예측의 정치,사전예방의 정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정당들에 다음 선거를 뛰어넘는 장래를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양당은 현재 각자의 선거구민들에게 과거에 대한 향수병을 불어넣기에 분주하다.민주당은 의료보험 개혁실패에서 드러나듯 관료적이며 중앙우선적인,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는 제2물결의 효율성 집착 태도를 반증한다.민주당은 산업,노조,공무원 사회에 포진해있는 제2물결적 지지자들에게 너무 큰 신세를 져 21세기와 얼굴을 마주하고도 마비된 듯 별 신통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다.공화당중 종교를 특히 중시하는 부류는 「전통적」 진리로의 회귀를 추구하면서 자유주의자와 인문주의자 그리고 민주당원들이 「도덕 붕괴」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물결의 세력이 오늘은 강력하게 보이지만 이 물결의 미래는 쇠퇴의 길로 향한다. 오늘날 세상은 또다시 변화하고 있다.미국에서 지식과 관련된 직업 종사자 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가장 빨리 성장하고 가장 중요한 산업은 정보집약적 부문이다.제3물결 산업분야는 상승세의 컴퓨터,전자,생물공학 창설기업에 한정되지 않는다.제조업 가운데 정보가 주요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선진분야는 물론 데이터축적의 서비스업­금융,소프트웨어,연예·오락,미디어산업,통신,의료서비스,자문업,훈련및 교육­이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 근육을 움직이는 분야가 아닌 정신노동의 모든 산업부문을 포괄한다.이 부문의 종사자들이 곧 미국 정치의 최대 선거권자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산업시대의 얼굴없는 「대중」과는 달리 제3 물결의 선거권자들은 아주 다양화되어 있다.탈 대중화된 것이다.남과의 차별성을 중시하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바로 이런 상호 이질성으로 이들은 정치 의식이 취약하다.과거의 대중보다 결집이 훨씬 어렵다. 그러므로 제3물결의 선거권자들은 고유의 싱크탱크와 정치 이념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앞으로 출현하게될 이 광범위한 새로운 유권자층이 합의를 이룰 몇몇 주요 이슈가 있다.그 첫째는 산업 귀족과 과거의 관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생겨난 제2물결의 각종 법령,규정,세금 등으로부터의 해방이다.이것들은 제2물결의 산업이 미국경제의 핵심적 추진력이었을 때는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제3의 물결의 발달에 걸림돌이다. 미국에서 제3물결의 세력은 아직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정당이 미국의 미래를 지배할 것이다. 제3의 물결은 미국을 좀 더 살기 좋고 보다 문명화되고 한층 품위있으며 민주적인 미래로 이끌어 갈 것이 틀림없지만 그러기 위해선 경제·정치·사회의 제반 정책에서 제2 물결의 부질없는 수명연장을 위한 것과 제3물결로의 원활한 이행을 위한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다음 다섯가지 요소를 유념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제2물결적 제도·기관 대부분은 산업사회의 핵심적 상징인 「공장」을 모델로 했다.공장은 규격화,중앙화,최대화,집중화및 관료화 원칙의 구체적 표현이다.예를 들어 미국의 학교는 지금도 공장처럼 운영되고 있고 의료·복지·연방기관 등에 관한 법률도 그러하다.미국은 공장 이후의 탈 관료적인 새 모델이 필요하다. 둘째,제2물결의 공장은 어셈블리 라인에 속을 뻔히 알 수 있고 교체가 가능하며 이유를 따지지 않는 노동자들을 채용한다.반면 제3물결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로자를 요구한다.생각하고 질문하고 혁신하고 모험도 할줄 아는 새 타입으로 개성을 중시한다. 셋째,제3물결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중앙집중화된 조직들을 한물가게 만든다.결정권한이 상부 한곳에 모아진 제2물결과는 반대로 새 물결의 조직들은 가능한한 결정권을 아래와 주변으로 끌어내린다.달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지 않고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는 것이다. 넷째,제2물결의 조직은 시간과 비례해 기능이 추가돼 몸이 불어나게 마련이지만 새 물결은 기능의 하부이양을 덕목으로 한다.산업사회는 수직적 통합에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반면 정보사회는 일거리를 가장 유능한 단체나 개인에게 계약처리함에 따라 본부나 중앙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다섯째,가족이 수행하던 숱한 기능들이 산업혁명과 함께 공장,사무실,병원,학교,극장,양로원 등에 뺏기면서 가족제도는 몰락했고 이같은 기능의 철저한 외부화로 제2물결은 핵가족을 양산했다.이에 대해 제3의 물결은 가족과 가정의 기능·권위를 복귀시킨다. 미국은 미래가 제일 먼저 현실화되는 곳이다.낡은 제도와의 충돌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면 이는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불확실성이 가득찬 21세기를 향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갖춰야할 생존 필수품은 유머와균형감각에 바탕한 다양성의 존중,실패와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관용 등의 덕목이다.
  • 계간문예지/신세대 문학 특집

    ◎문사/김주연씨,윤대녕·신경숙 소설 분석/창비/신예비평가 방민호씨,장정일 비판 80년대 문학의 두 갈래 큰 흐름을 대표하던 계간 「문학과 사회」와 「창작과 비평」이 새로 나온 여름호에서 약속이나 한 듯 신세대문학특집을 마련했다.「활공과 잠행­새로운 세대의 글쓰기」(문사),「90년대 문학의 현황점검」(창비)이라는 특집제목부터 아직까지는 관망에 가까울 만큼 조심스러운 기미가 묻어 있지만 문단의 주목받는 두 세력이 하필 지금 신세대문학을 입모아 말하고 있다는 대목은 시사적이다.그중에서도 김주연씨의 신경숙·윤대녕논인 「소설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한 두가지 이유」(문사)와 방민호씨의 장정일비판 「그를 믿어야 할 것인가」(창비)는 「스타」작가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신세대문학을 읽는 전형적인 두가지 관점을 드러내주고 있다.두 사람의 연배가 틀린 만큼 관점이 편차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젊은 비평가가 또래작가에 대해 더 비판적이라는 점은 뜻밖이다. 중견평론가 김주연은 신경숙을 웃연배와 구분짓는 차이로 사유의 불연속성을 든다.실연의 슬픔에 구차하게 매달리던 기존의 소설과 달리 신경숙은 소설 「깊은 슬픔」을 통해 원고·자료·자동응답전화기 등의 소지품목록과 슬픔을 동격으로 놓으면서 슬픔을 생활의 틈새에 간헐적으로 끼어드는 사물 같은 것으로 처리해버린다.간헐적인 슬픔이란 슬프다고 바로 울고 원인이 있어 행하던 기존 소설문법의 세계와 다르다.여기엔 인과율에의 구속이 없다. 이야기가 인과관계를 따라 진행되지 않기는 윤대녕도 마찬가지.그의 작품은 아주 오래전에 와본 듯한 장소,어디선가 만난 듯한 여자 등 강렬한 실재감을 주지만 결국 허상일 뿐인 것들의 정체를 캐는 부질없는 시도다. 신예비평가 방민호는 인과율의 실종을 「시작과 결말은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서사가 없다」는 얘기로 바꿔 장정일 소설에 대입한다.「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작가 스스로 「서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보를 차단해야 하는데 그것을 막아줄 경험과 사유는 (신세대소설가에게)애초부터 전멸」해버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은 소설전체를 관통하는 지향성 대신공들여 다듬은 단위문장의 미학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문학의 본원적 기능인 현실부정과 치열한 저항이 사라져버렸다는 게 방민호 비판의 골자다.한계를 끌어안고 이것과 대결하려는 부정의 정신만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실마리를 준다.그렇다면 장정일을 포함한 신세대작가들에겐 삶과 이론에 대해 회의하는 비판정신의 회복이 절실하다는 것. 젊은 방민호가 비판적인 반면,구세대에 속하는 김주연이 신세대의 가능성에 더 너그럽다는 점은 흥미롭다.김주연 역시 젊은 작가들이 몰고온 「소설의 위기」를 일단 수긍하지만 소설이란 어차피 거대한 허구인 만큼 이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반란으로 신세대소설을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문학의 영역이 이미 기존의 틀로 잴 수 없을 만큼 확장되어 있는 지금 비난보다는 새로운 소설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갈 작가론적 접근 같은 격려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 십이지장궤양(최선록 건강칼럼:66)

    ◎과다 흡연·무리한 약물복용 조심/발병땐 「위산 억제제」꾸준히 투여 십이지장궤양은 거의(약70%)가 재발하기 때문에 증세가 약간 호전되었다고 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악화되는 과정이 되풀이 된다. 흔히 십이지장궤양은 위궤양과 함께 소화성궤양이라 부르는데 위나 십이지장 점막의 저항력 또는 방어력이 위액에서 분비되는 산이나 펩신의 소화작용을 이겨내지 못할 때 이 부위의 점막이 손상되고 파괴되어 궤양이 형성된다. 십이지장궤양은 가계의 유전적인 인자,정신적인 스트레스,과다한 흡연,계속적인 폭음,무절제한 생활,무리한 약물복용,위산의 과다분비 등에 의해 복합적으로 발병한다. 임상적으로 십이지장궤양과 위궤양의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위산과다증이 가장 특징적 증상인 반면 후자는 오히려 위산분비가 정상이거나 또는 저하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엄격하게 구별된다. 특히 이 궤양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이나 수면부족이 심한 수험생,불규칙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그리고 하루 흡연량이 많은 애연가들에게 자주발생한다.또 연령별로는 20∼30세 사이의 젊은 남성에게 많으며 혈액형이 O형인 사람에게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증상은 항상 속이 쓰리고 앞가슴 아래에 오목하게 들어간 명치에 통증이 심한 것이 특징.매일 새벽 2∼3시쯤 위에 심한 아픔으로 자주 깨고 먹은 음식물이 장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므로 늘 소화가 제대로 안되며 트림을 자주할 뿐 아니라 신물을 자주 토하며 대변의 색깔이 검게 변한다. 가정에서 십이지장궤양의 자가진단은 위암이나 다른 위장병의 증상과 혼동될 수 있으므로 무척 어렵다.다만 식전이나 식후에 관계없이 명치 주위가 자주 아프고 속이 쓰리며 소화불량 증세가 있는 동시에 새벽녘에 위통으로 자주깨면 일단 궤양을 의심,X선이나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아야 한다. 치료는 안정요법,식이요법,약물요법을 의사의 지시에 따라 병용하는 것이 원칙이다.최근 개발된 위산분비 억제제를 약 3개월동안 꾸준히 복용하면 80% 이상이 치료되지만 재발을 조심해야 한다. 증세가 심한 사람은 미음·죽·수프·우유 같은 유동식을 1일5∼6회 가량 조금씩 나누어 먹도록 한다.우유를 먹지 못하는 사람은 살코기와 뼈 및 채소를 함께 끓인 고깃국물을 하루 5∼6회씩 마셔도 치료에 큰 도움을 준다. 십이지장 궤양치료에 적극 권장되는 식품은 찹쌀밥을 비롯,싱거운 미역국 된장국 야채국 시금치 오이 상추 등 야채샐러드,나물 감자 반숙계란 닭고기 소금과 양념을 적게 친 불고기,생선전 부침 심심한 생선구이,감 배 바나나 토마토 참외 수박 등을 들 수 있다.
  • 테러 충격이후의 미국/이경형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탄 테러는 미국민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는 어디에 와있는가』라는 명제를 던져주고 있다.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폭탄 테러가 선입견대로 회교도 원리주의자의 소행이 아니라 바로 미국내 극우세력에 의해 자행 되었다는데서 또다른 충격과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 미대통령은 사건 직후 『이는 분명 미국과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격』이라며 분노했었다.차라리 범인들이 국제테러조직의 일원이었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했을지 모른다.현재 수사당국은 체포된 용의자들을 신문한 결과 이들이 극우세력들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거의 단정하고 있다. 「미시간 민병대」를 비롯한 미전역의 극우단체들은 최근 급속히 세를 확장,무려 47개주에 2만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일반적으로 극우단체들의 성격은 미연방정부에 대한 반감과 증오,저항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조세에의 저항,재산권 제한의 거부와 함께 연방정부가 총기소유권의 박탈로 개인의자위권을 위협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자칭 애국주의자로 그들의 연대정신은 연방정부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 하는데 대한 두려움이라며 독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민병대 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이같은 민병대 조직의 수뇌부는 과거 악명을 날렸던 「쿠 크룩스 크란」(일명 KKK단)이나 신나치그룹인 「아리안 네이션」 「포세 코미타투스」(무장보안대) 등 극도의 백인우월주의,반유태주의와 연계를 갖고 있다고 민권운동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극우 단체들은 2년전 텍사스 웨이코에서 광신적 종교집단 다윗교도들이 연방수사당국의 강제투항에 집단 분신자살로 대응한 것은 연방정부가 일방적인 무력으로 개인의 무기소지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으로 인식하고 있다. 연방정부와 극우단체의 관계에서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국가공권력과 개인의 자유의 개념이 온통 뒤범벅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동서냉전이 종식된 21세기의 전야에서 언필칭 세계 최강국인 미국사회의 이같은 병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오랫동안 미국을 지탱해 왔던 기독교윤리와 가족가치의 붕괴 때문일까.다인종 사회인 미국을 통합하는 새로운 가치의 정립이 시급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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