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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마트폰·TV 많이 본 아이, 언어 능력 떨어져…뇌 구조 변화 탓” (연구)

    “스마트폰·TV 많이 본 아이, 언어 능력 떨어져…뇌 구조 변화 탓” (연구)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또는 TV 등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오랜 시간 본 아이들은 뇌의 구조적인 형태가 바뀔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신시내티 아동병원 의료센터(CCHMC) 연구진이 만 3~5세 아동 47명(남아 20명·여아 27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장치(MRI)로 스캔한 결과를 디지털 기기의 사용 시간과 비교 분석했다. 연구진은 참가 아이들의 각 부모에게 아이가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얼마 동안 보고 있는지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쉬운 접속과 사용 빈도, 콘텐츠 보기를 고려한 15개 항목의 설문지인 스크린큐(ScreenQ) 검사를 사용한 것이다. 스크린큐 점수가 낮으면 미국소아과학회(AAP)의 권고 사항을 잘 따랐다는 것인데 AAP는 3~5세 아동에게 하루에 1시간 이상 디지털 기기 화면을 보여주지 말라고 권고한다. 또 이들 아동은 MRI 스캔 검사를 받은 뒤 어휘와 읽기, 정보 검색 기술의 속도 등 언어 능력을 측정하는 세 가지 표준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1~19점의 스크린큐 점수 중 실험에 참가한 아동들의 평균 스크린큐 점수는 9점이었으며, 9점에 해당하는 아동들의 하루 평균 디지털 기기 이용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스크린큐 점수가 높은 아이들, 즉 디지털 기기 화면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들은 뇌 백질의 질이 떨어져 미엘린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대뇌의 속 부분인 백질은 신경세포(뉴런)들을 서로 연결하는 축삭돌기라는 수십억 개의 가느다란 신경섬유로 구성돼 있으며, 이런 섬유는 축삭돌기를 보호하고 전기 신호의 흐름을 촉진하는 흰색의 지방성 피막인 미엘린으로 덮여 있다. 만일 미엘린이 어떤 이유로 얇아진다면 뇌의 신호 처리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 미엘린은 자기 통제와 관련한 실행 기능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다만 하루에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몇 시간 동안 봐야 뇌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연관성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연구진은 또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오래 본 아이들은 인지력 검사에서도 낮은 점수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아동은 한 사람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정의되는 ‘표현적 언어’에서 상당히 낮은 점수를 받았고, 이른바 ‘처리 속도’로 알려진 사물에 빠르게 이름을 붙이는 능력 역시 떨어졌으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인 ‘문해력’ 검사에서도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 주저자로 참여한 존 허튼 박사는 “연구에 참여한 모든 아동 중 60%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갖고 있고, 나머지 40%는 자기 방에 TV나 휴대용 디지털 기기가 있다”면서 “이번 결과는 아동기 뇌 발달에 화면 기반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의 증가가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다만 영상의학 전문가인 데릭 힐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는 “이 연구는 흥미롭지만, 감정적인 주제를 고려할 때 결과를 해석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면서 “이 결과는 예비적인 것으로, 전체 아동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50명 미만의 아이를 대상으로 한 소규모 연구”라고 말했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미국의학협회 소아과학회지(JAMA Pediatrics) 최신호에 실렸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독서가 힘들 때 함께 읽기의 힘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독서가 힘들 때 함께 읽기의 힘

    저는 혼자 책을 읽습니다. 반면 제 아내는 독서모임 몇 개에 나갑니다. 얼마 전에는 동네 독서모임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서평을 쓰는 게 일이지만, 아내의 독서모임 사랑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책 읽기를 사랑하면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독서모임을 만들기까지 하는 것일까. 최근 출간한 ‘난독 시대를 타파할 독서의 기술’(미래문화사)이 눈에 띕니다. 제목만 보고 한편에 밀어 뒀던 책인데, 책 구성이 의외로 좋습니다. 독서 입문자라면 참고할 만한 내용을 잘 담았습니다. 전체 3개 장 가운데 1장은 독서 방법, 3장은 독서 훈련법을 다룹니다. 두 번째 장은 독서모임이 핵심입니다. 저자는 독서모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함께 읽는 모임, 토의하는 모임,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독서 습관을 들이려면 함께 읽는 모임부터 나가보라 조언합니다. 독서모임을 고를 때에는 독서 목록을 확인하면 좋다고 합니다. 지난 도서 목록과 예정된 목록을 살피면 독서모임 성격이 보인답니다. 독서모임을 만들 때에는 인원, 성별, 연령대를 우선 고려하라고 합니다. 시간은 1회에 3시간이 적당하고, 주기는 월 2회가 좋다는 식의 깨알 팁도 많습니다. 아울러 다섯 가지 독서모임 장, 여덟 가지 피곤한 모임원 유형 등도 재미있게 읽을 만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4월 ‘제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올해부터 2023년까지 5년 동안의 독서진흥 계획을 담았습니다. 자료 제목이 ‘개인적 독서에서 함께 공유하는 사회적 독서로 전환’입니다. 연 400개 독서 동아리 활동과 동아리 모임공간 100개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쉽게 말해 책을 혼자 읽기보다 여럿이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개인’에서 ‘함께’로, ‘소유’에서 ‘공유’로 독서 가치를 확산하는 정책입니다. 그래야, 저조한 독서율도 올라간다고 문체부는 강조합니다. 아내는 이미 독서 트렌드에 몸담고 있었던 겁니다. 책골남으로서 트렌드에 동참해 봐야겠습니다. 우선 ‘선배’인 아내에게 괜찮은 독서모임을 추천해 달라고 해야겠군요. gjkim@seoul.co.kr
  • 신군부 관통한 1세대 스타 PD의 비망록

    신군부 관통한 1세대 스타 PD의 비망록

    1980년대 신군부가 3S(Sports, Screen, Sex) 정책으로 국민을 우민화하려던 시절. MBC가 중심이 돼 프로야구단을 창설하고, VTR이 가정에 보급되면서 포르노 필름이 기승을 부렸다. 자극적인 기사들로 가득 찬 황색 언론도 범람했다. 권력이 언론을 통제하니 정론은 숨죽이고 가십이 판을 쳤다. 그렇게 엄혹했던 시절에 권력과 맞서며 드라마를 제작해 온 이가 있다. ‘1세대 스타 PD’로 꼽히는 고석만 PD다. 새책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는 드라마 ‘수사반장’, ‘제1공화국’, ‘땅’ 등으로 1980~90년대 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았던 고 PD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천생 연출가다. 밋밋한 자서전은 성에 안 찼던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몰입으로 이끌려는 ‘연출가적 기교’를 책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다. 책은 숱한 억압과 중단의 역사로 점철됐다. 땅 투기를 조명한 드라마 ‘땅’은 첫 회가 방영되자마자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되는 역사를 남겼다. 최초의 정치드라마로 꼽히는 ‘제1공화국’을 만들 때는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당대 재벌들을 소환했던 ‘야망의 25시’는 “정경유착의 힘” 탓에 조기 종영되는 비운을 겪었다.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일대기를 담아내려던 시도는 기획 단계에서 좌절되기도 했다. 저자는 당시 방송심의위원회 등에 참여해 권력의 손을 들어줬던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옷깃을 여미는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책이 묵직한 주제의식만 담고 있지는 않다. 지각 버릇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개진했던 ‘영원한 수사반장’ 최불암 이야기, 황당한 간계로 갓 데뷔한 탤런트 이미영, 정애리 등과 저자와의 스캔들을 ‘기획’했던 일부 매체의 기자 이야기 등이 맛깔스러운 조미료 노릇을 한다. 저자가 드라마 PD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도 담겼다. 전북 전주의 ‘할리우드 키즈’가 MBC에 입사해 열정을 불사른 시절, 프리랜서 시절과 드라마 PD 이후의 삶 등이 소개됐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사람이 만든 지옥 한복판에서 짓뭉개진 인간성을 목격하다

    사람이 만든 지옥 한복판에서 짓뭉개진 인간성을 목격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주요 미 해군 기지와 조선소가 있는 진주만을 폭격한다. 불시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군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다. ●스무살에 참전… 저자가 본 전쟁의 의미는 신간 ‘태평양 전쟁’은 미군 해병대 포병 출신 유진 B 슬레지 몬테발로대 교수가 겪은 1944년 필리핀 펠렐리우, 1945년 일본 오키나와 전투의 기록이다. 대개 ‘전쟁’이라 하면 죽음을 불사하며 적진에 뛰어들고, 적을 용감히 쳐부수는 영웅적인 군인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반 사병으로 직접 전장에서 뛰었던 그의 기록은 결이 다소 다르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젊은이라면 마땅히 전장으로 가야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자는 만 20세인 1942년 12월 전쟁에 관한 호기심 반 의무 반으로 해병대에 지원한다. 그는 대학에서 기초 훈련, 해병대에서 실전 훈련을 받고 전장으로 향한다. 막상 도착한 전장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다. 저자는 병력을 육지에 수송하는 보트인 암트랙에서 내린 뒤부터 지옥을 맛본다. 섬에 내리려는 순간 총탄이 눈앞을 스쳐 가고 모랫바닥에 처박힌다.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야말로 악몽의 세상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고.“사흘이면 끝날 것”이라는 소대장의 호언과 달리 전투는 1944년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10주간 지옥처럼 펼쳐진다. 일본군은 거의 전원이라고 할 1만 1000여명이 죽고, 미군도 8769명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저자가 속했던 해병 1사단은 6526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대원 235명 가운데 죽지도, 다치지도 않은 사람은 85명에 불과했다. 극적으로 첫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두 번째 전장도 마찬가지였다. 패망 직전 일본은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당시 전투에서 확인된 일본군 시신만 10만 7500여구에 달한다. 미군도 사상자가 4만명에 이른다. 저자의 중대원 485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50명에 불과했다. ●인간의 밑바닥 감정까지 긁어낸 참상 묘사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그 자리에 인간성이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동료가 창자를 드러내고 죽어 있는 풍경이라든가, 미군이 죽은 일본군 입에서 금니를 빼내는 장면, 일본군이 죽은 미군의 시체를 훼손하는 등의 묘사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다. 그러나 책은 전쟁의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을 겪은 인간의 온갖 감정을 밑바닥까지 긁어낸다. 저자는 자신이 쏜 총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일본군을 보고 부끄러움과 역겨움을 느끼며 “갑자기 전쟁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바뀌었다”고 했다가도 이내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감상주의일 뿐이라는 자각이 들었다”고 밝힌다.인간성 상실의 한복판에 서 있다가도 병사를 위해 노력했던 중대장의 죽음, 위기의 순간에 상사를 거스르면서까지 동료를 지킨 군인, 그리고 짧은 휴식 동안 이야기를 나눈 군인들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발견한다. 두 번의 치열한 전투를 마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만일 우리 조국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좋은 나라라면, 이런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저자는 전투 현장에서 수첩 크기의 작은 성경책에 몰래 기록을 남겼고, 이를 토대로 책을 썼다. 두 전투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지 36년 만인 1981년 책을 내며 그는 “이제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깊고 큰 고통을 감당했던 전우들에게 오랜 세월 지고 있던 빚을 갚는 셈”이라고 밝혔다.●톰 행크스 주연 인기 드라마 ‘퍼시픽’ 원작 2001년 저자 사망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2010년 10부작 드라마 ‘퍼시픽’으로 제작하면서 책이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유럽 전선에서 전쟁을 다룬 ‘밴드 오브 브러더스’와 함께 명작 드라마로 꼽힌다. 드라마를 봤던 이들이라면 책에 관심이 가는 게 당연지사일 터고, 책을 모두 읽으면 드라마에 관심이 갈 법하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은 전쟁을 이처럼 한 발짝 멀리서 쳐다보지만, 책이든 드라마든 짓뭉개진 인간성을 보는 일은 고역이긴 하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우리는 전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떠나야 비로소 들리는 선율

    [그 책속 이미지] 떠나야 비로소 들리는 선율

    “내가 피리를 불면 양들이 조용해져. 내 음악을 듣느라.” 터키 타르수르의 한 마을에서 만난 사나이. 옹성거리는 양 무리 앞에서 피리를 꺼내더니 털썩 앉아 연주한다. 왼손에 담배를 끼운 채, 두 눈은 지그시 감은 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며 울던 양들이 이내 조용해진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알아본 ‘양들의 침묵’이로다. 신간 ‘세상의 끝에서 만난 음악’은 그저 그런 여행기가 아니다. 리듬 따라 선율 따라 떠난 음악 여행기다. 저자는 어느 날 아프리카 말리의 음악을 듣다 감명을 받았다. 남편이 은퇴하자 자신도 조기 은퇴한 뒤 전 세계 음악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세네갈과 모로코, 모리타니를 다녔다. 여정은 그리스와 알바니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터키와 쿠르디스탄까지 갔다. 여행에서 만난 현지 음악가들의 이야기, 전 세계의 이색적인 민속 악기를 연주하는 사진들이 흥미진진하다. 처음 만난 이들과 나눈 대화를 읽다 보면 저자의 친화력에 놀라게 된다. 어쩌면 음악이 이들을 이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中의 속살 ‘후통’서 건져 올린 망각의 역사

    中의 속살 ‘후통’서 건져 올린 망각의 역사

    자금성을 중심으로 3000여개가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중국 베이징의 전통 뒷골목 후통(胡同). 1980년대부터 추진된 개혁개방 정책으로 재개발되면서 옛 모습을 대부분 잃었지만 원(元)대 이후 800년간 이어져 온 중국 역사의 수장고이자 삶의 터전이다. 자금성이며 만리장성, 천안문 같은 걸출한 명소에 가려져 건성건성 보고 지나치는 관광지쯤으로 여겨지는 곳. ‘베이징 후통의 중국사’는 그 먼지에 뒤덮인 수장고를 열어젖혀 역사 속에 숨었던 공간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복원해 놓은 노작(勞作)이다. 저자는 2015년부터 3년 6개월간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던 현 서울신문 사회부장 이창구씨. ‘유서 깊은 후통에서 중국의 다른 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지인의 권유로 매주 토요일 자전거를 타고 후통 곳곳을 누볐다. 그 발굴 작업(?)을 통해 건져 올린 망각과 방치의 역사며 인물들의 면면이 방대하고 흥미롭다. 맨 앞에 배치한 ‘독립운동가의 거리’에선 우리 독립운동사의 숨은 명장면이 숱하다. 이육사 선생이 순국한 둥창 후통 28호, 김원봉의 의열단이 암약했던 와이자오부제 후통, 신채호 선생의 활동상이 혁혁한 난뤄구샹과 진스팡제…. 특히 허우구러우위안 후통의 이회영 선생 집이 독립투사의 아지트였음이 밝혀져 놀랍다. 매일 적게는 10명, 많게는 40명이 찾아왔다는 증언을 보면 이회영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이자 망명객들의 사랑방, 독립운동 본부였음에 틀림없다. 발굴 작업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깃든 이색적인 거리로 이어진다. 전통 담뱃대 가게며 골동품 가게, 고서점, 표구방이 즐비한 옌다이셰제, 공묘와 국자감이 있는 궈쯔젠제….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후통은 중국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공간이다. 타 후통에선 늘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는 루쉰의 연민과 동심 가득한 얼굴을 찾아내고, 화 후통에서는 청을 멸망시킨 장군 차이어가 위안스카이에 의해 가택 연금당했던 고통을 읽는다. 신문기자답게 순례의 자전거 페달은 베이징의 진보 신문 징바오를 창간해 ‘중국 기자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사오피아오핑(邵萍)의 혼이 깃든 웨이란 후통 30호에서 멈춘다. 5·4운동의 발기인이었던 사오피아오핑은 결국 총살당했다고 한다. 흉물스럽게 방치된 징바오의 옛 건물 앞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언론의 감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내부 모순과 부패에 스스로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식물의 책(이소영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서울신문에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을 연재하고 있는 식물세밀화가의 ‘전지적 식물 시점’ 이야기. 악취로 가을철 도시의 골칫덩이가 된 은행나무를 두고, 저자는 식물의 시선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번식 본능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차단한 권리가 있는지 되묻는다. 밀려나는 토종 민들레, 경제를 살린 딸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에 손맛을 살린 세밀화를 덧댔다. 288쪽. 1만 5000원.엄마를 위하여(에리크 에마뉘엘 슈미트 지음, 김주경 옮김, 북레시피 펴냄) 엄마를 우울증에서 구해 내기 위한 아들의 분투기. 아들 펠릭스는 엄마의 고향인 아프리카 세네갈로 치유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만난 강과 안개와 나무의 정령들은 이들 모자를 따스하게 품는다. 공쿠르상을 받은 프랑스 극작가 에리크 에마뉘엘 슈미트의 장편소설. 212쪽. 1만 4000원.독일 현대사(디트릭 올로 지음, 문수현 옮김, 미지북스 펴냄) 1871년 제국 수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현대사를 정치, 외교관계, 사회경제적 상황, 문화로 풀어낸 역사서. 특히 기독교민주연합과 기독교사회연합,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등 다양한 정당이 서독 의회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과정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이 사회 내부의 지지를 잃으며 쇠락하는 모습을 상세히 설명했다. 852쪽. 3만 8000원.테드로 세상을 읽다(박경수 지음, 메이트북스 펴냄) 수천 편의 테드(TED) 강연 중에서 명강연 27편을 사람·리더·경영·기술이라는 4개의 키워드로 분류해 엄선했다. 경영 컨설턴트로 활약했던 저자의 경험과 지식을 담아 풍부함을 더했다. QR코드를 넣어 바로 강연을 감상할 수 있게 했으며, 함께 첨부된 관련 자료 사진과 그래픽 자료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68쪽. 1만 5000원.비평의 조건(고동연 외 2명 지음, 갈무리 펴냄) 세 명의 미술비평가가 미술 현장과 밀접한 다양한 조건의 미술비평가 16명(팀)을 인터뷰해 기록했다. 현대미술 비평은 작업이나 작가를 설명하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철학적 관점을 택해 현대미술만큼이나 어려워졌다. 평가 기준의 다원화, 비평의 생산 및 유통에 내재한 권력의 역학 등 달라진 환경 속에서 비평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528쪽. 2만 4000원.서른다섯, 내 몸부터 챙깁시다(최혜미 지음, 푸른숲 펴냄) 여자 몸이 달라지는 나이 서른다섯을 기준으로 몸에 일어나는 변화와 흔히 겪는 건강 문제, 각 문제에 맞춤한 해결법을 담았다. 패션지 에디터로 일하다 퇴사 후 한의사가 된 저자는 ‘노산’ 같은 말들이 나타내는 사회적 시선에 선을 긋고 내 몸이 느끼는 변화를 직접 알아 가야 한다고 말한다. 316쪽. 1만 7000원.
  • 영남대, 면역항암치료 효과 높이는 ‘핵산 복합물질’ 개발

    진준오 영남대 의생명공학과 교수(제1저자)와 곽민석 부경대 화학과 교수(교신저자)가 우리 몸이 가진 면역세포의 항암작용을 높일 수 있는 핵산 복합물질을 개발했다. 부경대 김해주 박사과정,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허양훈 박사, 독일 아헨공과대학교 안드레아스 헤르만(Andreas Herrmann) 교수도 연구에 참여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핵산 복합물질은 암세포를 인식할 수 있는 센서로 작용할 단백질 조각과 면역 세포를 자극할 핵산물질 등 생체분자를 활용한 복합물질을 합성한 것이다. 핵산은 뉴클레오티드라(nucleotides)는 단위체로 구성된 중합체로 DNA와 RNA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유전정보의 저장과 전달, 발현을 돕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 중 DNA는 유전정보를 저장해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유전물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서열 특이적인 결합 특성으로 인해 나노구조물의 구성단위 또는 약물전달체로의 활용 가능성도 주목받아 왔다. 이번에 연구팀은 구(球)형으로 자가조립되는 지질 DNA에 암세포 인식력을 높일 단백질 조각과 면역증강효과가 있는 DNA 조각을 탑재한 복합물질(INA, Immunotherapeutic nucleic acid)을 제작했다. 연구팀은 이번에 개발한 핵산 복합물질을 종양을 가진 생쥐 투여 실험을 통해 종양의 성장과 전이를 억제하는 것을 확인했다. 흑색종에 걸린 생쥐에 투여한 결과, 흑색종 특이적인 단백질 조각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면역세포가 증식하는 것과 면역활성을 의미하는 염증성 단백질(Cytokine)이 분비되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생쥐의 흑색종 및 상피세포암종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최근 병원균 등 외부침입에 대비해 우리 몸이 선천적으로 가진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암세포를 공격하는 면역항암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정상세포가 아니라 암세포만을 선별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면역항암 치료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돼 이번 연구 성과가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연구재단 미래소재디스커버리사업 및 신진연구자지원 사업으로 수행했다.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은 약학 분야 국제학술지 <저널 오브 컨트롤드 릴리즈>(Journal of Controlled Release) 최신호(10월 19일자)에 실렸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신간]

    [신간]

    당신의 운명을 읽는 사주 공부 첫걸음(윤득헌 지음, 중앙생활사 펴냄) 효천생활역학연구소 대표인 윤득헌 교수의 사주 입문서로, 사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썼다. 1부 기초편에서는 사주팔자가 무엇인지, 역사는 어떠한지, 기본 요소는 무엇인지 보고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다. 2부 연구편에서는 오행론을 바탕으로 한 천간과 지지를 비롯해 그 작용을 분석, 사주팔자 풀이법을 살펴본다. 출판사 관계자는 “삶의 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바꿀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운명”이라며 “운명을 읽고 내다보는 사주명리학을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했다고 말했다.사주풀이 운명을 읽다(윤득헌 지음, 중앙생활사 펴냄) ‘당신의 운명을 읽는 사주 공부 첫걸음’에 이은 책으로, 사주명리학 이론을 실생활에 적용해 풀이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부에서는 간명과 통변이 무엇이고 어떤 순서로 이어지는지 알아본다. 2부에서는 일주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60갑자를 간명해 놓았다. 3부에서는 10성의 성질과 장점 및 단점, 희신 및 기신과의 관계 등을 알아본다. 4부에서는 일간 및 월지와 성격의 관계를 살펴보고, 지지의 변화에 따라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한다. 5부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내용이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간명에 활용되는지 설명한다.바쁜 3·4학년을 위한 빠른 분수(강난영 지음, 이지스에듀 펴냄) 책은 3·4학년 분수 개념에 관한 26가지 호기심 질문으로 시작한다. 질문들은 초등 3·4학년이 꼭 알아야 할 분수 개념에서 뽑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개념이 정리되고 원리가 이해된다. 또한 개념과 계산 원리를 그림으로 설명해 이해도를 높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빵을 나눠 먹는 그림으로 분수 개념을 설명하는 식이다. 개념을 이해한 다음에는 분수 개념을 익히는 최적의 연산 문제로 훈련한다. 바쁜 3·4학년이 최고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적정한 분량의 문제를 배치했다. 연산 훈련을 마친 뒤 ‘생각하며 푸는 문제’로 기본 개념을 탄탄하게 다지고 문제 해결력까지 키운다.주택임대사업자의 모든 것(지병근·지병규·김영선 지음, 리북스 펴냄)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했을 때 얻게 되는 득과 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려준다. 다양한 사례를 알기 쉽게 표와 그림으로 정리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최근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개정세법을 모두 반영해 정확한 최신 정보를 담았다. 또한 주제별로 질문과 답변을 별도 구성해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부록에는 주택임대사업자의 취득·보유·처분 단계별로 구분해 각각의 장단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저자 중 한 명인 지병근 세무사가 직접 강의한 내용이 유튜브(www.youtube.com/user/gagamcta)에 주제별로 등재돼 있다.다니엘의 명품도서 해설 I(다니엘 최 지음, 행복우물 펴냄) 출판사 행복우물의 대표이자 작가인 다니엘 최가 기획한 ‘노벨상 지원 프로젝트’다. 저자는 동서양 3000년의 문명을 대표하는 도서 중 국내에서 출간된 바 있는 전 세계의 유명 도서(한국 작가의 도서 포함)를 총 300종으로 한정해 소개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해설에 감동을 받아 해당 도서를 사서 읽고(300종 중 적어도 150종 이상), 그러다 보면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결국에는 자신이 본래 파고들었던 전공 분야의 지식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노벨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길섶에서] 법(法)과 겁(怯) 사이/박록삼 논설위원

    물(水)이 흘러가는(去) 대로, 즉 순리를 따르는 것이 법(法)이길 바랐다. 바람은 늘 배신이었다. 권력을 이용해 재벌 손목을 비틀어 정치자금을 뜯어내고, 뇌물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각각 ‘황제입원’, ‘자유로운 가택연금’으로 감옥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재판을 받고 있다. 코카인보다 환각성이 강한 마약 LSD를 밀반입한 전직 국회의원 딸은 구속되지 않았고, 음주운전에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현직 국회의원 아들도 구속되지 않았다. 국립대 시설을 사사롭게 사용하고 논문 포스터에 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의혹을 받는 역시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도 검찰에 고발된 뒤 한 달이 넘었는데 조사받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관제시위를 주도한 이는 범죄 혐의가 드러났으나 구속되지 않았다.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도 경찰·검찰의 수사에 콧방귀만 뀌는 국회의원들도 득시글하다. 혹시 법(法)이 아니라 겁(怯:비겁하다, 무섭다)을 잘못 읽은 걸까. 아니면 원래 마음(心) 가는(去) 대로 하는 게 법인 걸까. 일관성 없는 법 집행으로 국민이 겁먹고 좌절하게 하는 것이 법의 존재 의미이자 실체적 역할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이러니 사법개혁의 요구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법이 길을 잃는, 혼돈의 시대다.
  • 대검 “나경원 악플 고소 건 처분 보류 지시”

    170여개 아이디 모욕 혐의 고소 관련 “사건마다 결과 달라 처리 기준 마련” 관련 판례 많은 모욕사건에 이례적 ‘나 의원 자녀 입시 의혹’ 형사 1부 배당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악성 댓글을 단 네티즌들을 고소한 사건과 관련해 대검찰청이 일선 검찰청에 처분을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검은 “균형 있게 처리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지만, 관련 판례가 많은 모욕 사건에 대해 대검이 기준을 만드는 걸 놓고 이례적이란 지적도 나온다. 29일 검찰에 따르면 대검은 전날 전국 검찰청 기획검사들에게 “나 원내대표가 고소한 댓글 모욕 사건 처리와 관련해 현재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처분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앞서 나 원내대표는 자신이 원내대표로 선출된 기사에 악플을 단 170여개의 아이디를 모욕 혐의로 지난 6월 초 경찰에 고소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아이디 사용자들의 거주지 관할 경찰서로 사건을 넘겼고, 일부는 검찰 수사까지 마무리됐다. 그런데 사건마다 처분 결과가 다르게 나오자 대검에서 처리 기준을 마련할 때까지 처분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진모 검사는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참 친절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단순한 형사 사건인 ‘모욕’인데, 어떤 분이 고소했다고 공공부(과거 공안부)에서 직접 전국 검사들에게 공문을 보낸 것을 보니 특수부가 사문서 위조 사건을 수사하는 사안과 아울러 매우 이례적”이라고 지적했다. 논란이 커지자 대검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피고소인이 100명이 넘고, 사실상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건에 대해 청별로 처리가 달라지는 것을 방지하는 등 통일적인 기준을 세워 사건을 균형 있게 처리하기 위해 일선 청에서 수사 중인 사건 현황을 파악한 것”이라면서 “과거 유사한 고소 사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사건 현황을 파악해 통일적인 기준을 정립한 뒤 처리했다”고 밝혔다. 한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최근 나 원내대표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과 관련해 업무방해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사건은 이날 형사1부(부장 성상헌)에 배당됐다. 고등학생이던 아들의 서울대 의대 실험실 사용과 포스터 연구물(논문) 제1저자 등재 등 특혜 시비, 딸의 대학 합격 과정 등 특혜 의혹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해 달라는 게 고발 취지다. 고발인 조사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각주가 말하는 것들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각주가 말하는 것들

    최근 만난 학자 J는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다가 탈락했고, 나름 원인을 분석한 뒤 재심사를 준비하면서 초고에는 누락시켰던 한 저명한 학자의 논문을 출처 각주로 삽입했다. 학계에서 각주는 종종 권위 있는 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여겨진다. 만약 어떤 학자의 선행 연구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는 의도적인 배격 행위로 읽힌다. 생략된 자에게 그 빈칸은 커다란 구멍처럼 보일 테니 ‘나를 역사에서 배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각주의 연대기는 학문적 논쟁의 역사, 시기심의 물밑 다툼, ‘서사’(본문)와 ‘증거’(주석)의 맞섬, 세부 사실의 경중을 둘러싼 입장 차로 서술될 수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고전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은 본문에 전면화하고, 예의를 벗어던진 사견이나 비판은 각주로 후면화했다. 의심은 각주에 은근한 희화화로 배치되기 마련이라 각주는 결코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다. 저자가 동류로 인정받고 싶은 학파의 문헌을 인용하거나 조롱하고픈 이들을 향해 칼을 겨누는 장소가 바로 각주다. 독서할 때 각주도 챙겨서 읽는 독자는 주에서 밝혀 놓은 참고문헌이 보잘것없으면 그 책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가령 저자들은 미처 읽지 못한 원자료를 자기 논거 증명에 활용하고자 다른 책에서 재인용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다른 책’의 저자가 얕은 바닷물에 불과하다면 독자는 ‘왜 섣불리 이런 유를 인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가끔 서양 학문 전공자들은 한문에 접근하기 어렵다 보니 2차 텍스트를 통해 동양 고전을 전거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런 인용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은 그럴듯한 박학다식함의 이면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각주는 글쓴이의 실력을 검증하는 세밀한 장치다. 모름지기 학자는 선대의 문헌을 모두 검토한 뒤 그로부터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즉 매력적인 서사들은 저자가 매끈하게 창작한 도자기라기보다는 앞선 자들의 글을 모두 섭렵하는 성실성, 깎고 다듬는 도공 실력, 마침내 한발 내딛는 진보로 인해 빚어진 것이다. 독자가 각주를 보면서 안심하는 까닭은 글쓴이가 선대와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마침내 살아 남았음을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각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역사가 랑케다. 그는 독자의 수준을 높게 봤는데, 가능한 한 그들이 본문과 함께 각주에 밝혀진 ‘생생한’ 사료까지 공부할 것을 원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자네들이라면 분명히 역사가 도출된 사료를 알고 싶겠지”라며 서사의 제공자들을 파헤칠 것을 권유했다. 1차 사료의 중요성을 간파한 학자로서 랑케는 유서 깊은 기록보관소들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 방법을 강구했으며, 필경사들을 고용해 사료들을 옮겨 쓰게 했다. 필부필부들이 밤에 먹고 마실 때 그는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려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으며, 올빼미형 인간들의 쾌락을 한 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후대에 올수록 각주는 출처만 밝히는 무미건조한 공문서처럼 바뀌었다. 게다가 점점 길어지는 각주가 본문을 몽탕하게 만드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럴 경우 책 전체의 논리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책 읽기는 불쑥 튀어나오는 방해물로 내내 덜컥거리게 된다. 그런 이유로 각주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가 많아졌다. 랑케조차 각주는 필요악이라 선언했고, 헤겔은 전염병을 피하듯 각주를 피했다. 기번은 “세부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적 열등감의 표시”라고 했다. 그리하여 현대에는 한쪽에서 학자들이 각주를 위한 공간을 요구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각주 없는 원고를 써 달라”는 출판인들의 요구가 상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각주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각주의 역사와 심리학에 통달한 ‘섬세한’ 각주의 달인을 만나고 싶다.
  • 다 쓴 공연·영화 관람권 주면 책으로 바꿔 드려요

    다 쓴 공연·영화 관람권 주면 책으로 바꿔 드려요

    내일 서울·전주서 ‘도깨비책방’ 새달엔 지역서점 저자·명인 만남 이번 달 ‘문화가 있는 날’인 30일 전후로 전국에서 문화행사 2736개가 열린다. 특히 깊어 가는 가을을 맞아 책 관련 행사를 눈여겨볼 만하다. 문화가 있는 날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민이 일상에서 문화를 쉽게 접하도록 정해 운영한다. 공연, 전시, 영화 유료 관람권과 지역 서점 구매 영수증을 도서로 교환해 주는 ‘도깨비책방’이 30일부터 나흘간 서울 마로니에공원과 전북 전주 롯데시네마 전주점에서 열린다. 이달 5000원 이상 현금 또는 신용카드로 결제한 관람권이나 영수증으로만 도서를 교환할 수 있다. 온라인 도깨비책방 ‘서점온’(booktown.or.kr)에서도 신청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저자, 출판사, 표지 등 주요 정보를 가린 ‘블라인드 책’ 교환 행사도 있다. 다음달 2일엔 지역 서점에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경남 밀양 청학서림은 명인들의 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어디간다고(go)? 서점간다고(go)!-김지립과 함께하는 우리 춤 이야기 편’을 연다. 김지립류 살풀이춤 나르리와 익산 한량춤을 볼 수 있다. 광주 검은책방흰책방에선 지역 예술가와 주민이 만나 낭독 공연을 꾸미는 ‘당신의 밤과 꿈에 빛과 파도로 만날’을 진행한다. 충남 당진 책방 허송세월은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축제인 기지시 줄다리기를 이용한 그림책과 짚공예를 소개한다. ‘모두 모두 의여차’를 쓴 한선예 작가와 만나고,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와 함께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만든다. 이 밖에 커피와 함께 음악을 즐기는 ‘제29회 탐스테이지’가 30일 서울 탐앤탐스 블랙청계광장점에서 열린다. 관련 정보는 지역문화진흥원의 문화가 있는 날 홈페이지(culture.go.kr/wday)를 참고하면 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전광훈 “문재인, 공수처법으로 공산주의 집행하려 해”

    전광훈 “문재인, 공수처법으로 공산주의 집행하려 해”

    주최 측 “100만명 참석” 주장…황교안 등도 참석보수 유튜버 “정경심 다음은 조국, 문재인” 발언보수단체들이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총괄대표를 맡은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는 이날 저녁 7시 광화문 삼거리∼세종대로 사거리 500여m구간 12개 차로와 인도,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이날 집회에 100만명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집회에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등도 참석했다.참가자들은 ‘문재인 하야’, ‘공수처법 폐지’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전광훈 대표는 “문재인(대통령)이 조국을 앞세워 공산주의를 완전히 실행하려다 우리의 집회로 태클이 걸리자 이제는 공수처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을 만들어 다시 공산주의를 집행하려고 한다”며 “문재인을 반드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유튜버인 신혜식 신의한수 대표는 무대에 올라 “정경심이 구속됐다. 다음은 조국이고 그다음은 문재인”이라며 “저자들은 촛불을 들었지만 우리는 횃불을 들었다”고 말했다.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로 건설한 대한민국을 문 대통령이 파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안 의원은 또 “공수처는 중국밖에 없다는 독재 통치기구”라며 “독재 정권을 만들려는 문 대통령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투쟁본부는 오후 10시 행진 없이 본 대회를 마친 뒤 광화문광장에서 이튿날 오전 5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경찰은 이날 광화문 인근에 경비병력 78개 중대 약 4000명을 투입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학부모 길잡이 책 쓴 엄마, 아들의 대리 응시 부탁하며 5만 달러

    학부모 길잡이 책 쓴 엄마, 아들의 대리 응시 부탁하며 5만 달러

    훌륭한 학부모가 되는 길을 조언하는 책을 쓴 여성이 아들의 대리 시험을 눈감아 달라며 감독관을 매수한 사실이 들통나 감옥에 가게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케팅 관련 회사 인텔리전스 그룹을 차려 성공한 사업가 평판을 듣던 제인 버킹엄(51)이 장본인. 국내 정보통신(IT) 업계에도 책 ‘왓츠 넥스트’의 공동 저자로 얼굴이 알려져 있다. ‘모던걸의 모성에 관한 가이드(The Modern Girl’s Guide to Motherhood)’란 제목의 책도 펴낸 그녀는 지난해에 아들의 ACT 대입 시험을 대신 치를 사람을 알선하거나 감독관을 매수하겠다는 교육 컨설던트 윌리엄 릭 싱거의 제안을 받고 5만 달러를 건네겠다고 약속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실제로 그녀는 3만 5000 달러를 송금했고, 아들이 써준 글씨를 플로리다주 사립 학교의 입시 컨설던트 마크 리델이 미리 연습하고 ACT 시험을 대신 봐 35점을 받았는데 만점은 36점이었다. 인디라 탈와니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원 판사는 지난 23일(현지시간) 검찰의 6개월 미만 징역형 구형과 보호관찰 처분을 내려달라는 변호인의 호소를 모두 일축하고 “심각한 범죄”라며 3주의 실형과 4만 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24일 전했다. 버킹엄은 “내가 저지른 일은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고 참회했다. 버킹엄은 지난 3월 미국 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35명의 학부모와 입시 컨설던트 등 모두 52명이 기소된 대입 사기 스캔들 피고인 가운데 한 명이다.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 출연한 배우 펠리시티 허프먼이 이번 주부터 14일의 실형을 복역하기 시작하는 등 이날 버킹엄까지 모두 11명이 1심을 마쳤다. 일부 학부모는 곡절을 거치긴 했지만 유죄를 인정해 징역 5개월에서 집행유예까지 다소 가벼운 형량이다. 그러나 미드 ‘풀하우스’에 얼굴을 비쳤던 로리 러플린은 여전히 혐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법정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만능 백신 나오나…실험한 모든 독감 바이러스와 싸우는 항체 발견

    만능 백신 나오나…실험한 모든 독감 바이러스와 싸우는 항체 발견

    다양한 독감(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막는 항체가 발견돼 만능 백신 개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대와 아이칸의대 그리고 스크립스연구소 공동연구진이 한 독감 환자의 혈액 표본에서 이런 항체를 발견했다고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25일자)에 발표했다. 연구를 이끈 앨리 엘레베디 박사(워싱턴의대 병리·면역학과 조교수)는 2017년 겨울 여러 독감 환자의 혈액 표본을 조사하다가 한 표본에서 독감 바이러스 표면의 주요 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 항체 외에도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 다른 항체 3종을 발견했다. 당시 그는 연구를 막 시작해 연구실이 완비되지 않아 이들 항체가 무엇을 표적으로 삼는지 관찰할 도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는 연구 공동저자로 참여한 플로리안 크래머 박사(아이칸의대 미생물학과 교수)팀에 표적도 확인되지 않은 항체 3종을 보냈다. 크래머 박사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또 다른 단백질인 뉴라미니다제의 전문가인데 항체 3종 중 나중에 ‘1G01’으로 명명된 1종이 실험 대상이 된 모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뉴라미니다제 활동을 차단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크래머 박사는 “1G01 항체의 범용성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항뉴라미니다제 항체는 H1N1과 같은 하나의 변종바이러스에 영향을 주지만, 다양한 변종바이러스를 막는 항체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처음에 결과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플루엔자 A형과 B형을 아우르는 이 항체의 능력은 그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뉴라미니다제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복제에 꼭 필요하다. 이 단백질은 새로 형성된 바이러스를 감염 세포로부터 자유롭게 떼어내 새로운 세포를 감염시킨다. 신종 플루와 같이 심한 독감에 가장 널리 쓰이는 약물인 타미플루 역시 뉴라미다제를 비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연구진은 이들 항체가 심한 독감 환자를 치료하는 데 쓰일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쥐를 대상으로, 치사량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투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항체 3종 모두 많은 변종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1G01 항체는 실험에 쓰인 변종 바이러스 12종 모두에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2종의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B·C형 세 그룹에 속하는 것들 외에도 조류인플루엔자(AI)와 같이 비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변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1G01 항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 뒤 72시간 만에 투여해도 모든 쥐의 목숨을 구했다. 이에 대해 엘레베디 박사는 “모든 쥐는 확실히 독감에 걸려 살이 빠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들 쥐를 구할 수 있었다. 결과는 주목할 만하다”면서 “타미플루를 사용하기에 너무 늦은 환자를 집중 치료하는 시나리오에서 이 항체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타미플루는 24시간 이내에 투여해야 한다. 나중에 사용할 수 있는 약은 타미플루를 사용할 수 없는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연구진은 이 항체를 기반으로 한 약물을 설계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항체가 뉴라미니다제를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 연구자는 스크립스연구소의 저명한 구조 생물학자로 공동저자로 참여한 이안 윌슨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공동저자로 참여한 윌슨 박사는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주쉐융 박사와 함께 세 항체가 뉴라미니다제에 들러붙어있는 동안 이들 항체의 구조를 지도화(매핑)했다. 두 연구자는 이들 항체가 모두 기어 스틱처럼 뉴라미니다제의 활성 부위 안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루프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고리는 뉴라미니다제가 세포 표면에서 새로운 바이러스 입자를 방출하는 것을 막았고 따라서 세포에서 바이러스 생성 주기를 깨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123rf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새 시대 두려워한 제국주의가 낳은 모험소설

    새 시대 두려워한 제국주의가 낳은 모험소설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를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책, 영화 등으로 한 번쯤 접해봤을 고전이다. 한데 이 소설에 19세기 말 영국에 횡행했던 백인과 남성 우월주의, 순혈주의, 제국주의 등의 가치관이 투영됐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신간 ‘들려준 것과 숨긴 것’은 이처럼 세기말을 풍미했던 모험소설들을 해부해 책 속에 감춰진 온갖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낱낱이 끄집어내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 등 익히 알려진 책 외에도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쉬’(그녀) 등 다양한 책들이 도마에 오른다. 되짚어 보면 사실 드라큘라는 도입부부터 서양의 우월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국의 전도유망한 젊은 변호사 조나단 하커가 여행을 시작하며 “서양을 벗어나 동양으로 진입하는 것 같다”고 중얼거린 대목이 그 예다.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 있는 곳은 트란실바니아 동북쪽의 후미진 지역이다. 이 지역에 정착한 민족은 ‘세클레르족’이다. 아시아에 거주했던 기마민족 훈족의 후예다. 훈족은 한때 서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야만족’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배경부터 당대의 유럽인을 위협했던 ‘퇴행성’이 유래한 곳으로 설정된 셈이다. 흉물스런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드라큘라 백작은 더 말할 게 없다. 동양의 전제주의, 비합리적 미신, 야만성 등이 죄다 그에게서 구현된다.●신여성에 대한 불안감 드라큘라에 반영 왜 이런 소설이 당대에 유행했을까. 저자는 영국 내부의 제국주의적 요소 외에도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던 ‘신여성’에 대한 강력한 경계 심리가 또 하나의 축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19세기 말 영국에는 가부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들은 여성의 성에 대해 가졌던 온갖 의심과 불안을 경제 영역에서 남성의 경쟁자로 떠올랐고, 정치적 권리까지 요구하는 신여성에게 투사했다. 신여성은 “공격적”이고 “악의에 차” 있으며 “성적으로 무절제”한 데다 “도덕적으로도 타락”했다며 공격했다. 신여성의 문란한 성에 대한 불안은 ‘드라큘라’의 여성 흡혈귀들에 대한 묘사에도 반영된다.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의 성에서 만나는 세 명의 여성 흡혈귀들은 각기 피부색은 다르지만 관능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자태도 관능미가 넘쳤지만 “날카로운 흰 이빨”은 결코 야수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남성’ 하커가 ‘여성’의 유혹에 굴복하는 대가로 문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야만적 수준으로 퇴행한다는 메시지가 이 대목에 담겼다.●19세기 ‘제국주의 로맨스’ 낱낱이 해부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이제껏 고전으로 여겨졌던 영국의 모험소설들을 낱낱이 해부한다. 예컨대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로빈슨 크루소’(1715)의 경우, 전체 얼개를 영국 제국의 식민지 경영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했던 ‘제국주의 로맨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그러니까 유럽 중심적 시각, 백인 남성성을 입증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던 해외 모험, 여성을 배제하거나 주변화시키면서 드러내는 특권화된 남성성 등이 원형적 형태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보물섬’(1883)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보물은 하층민이 상류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 노릇을 한다. 하지만 보물들의 출처를 거슬러 오르면, 보물은 모두 이전 세대의 해적질로부터 온 것이란 걸 발견하게 된다. 결국 해적은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란 얘기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성은 약하다? 과학의 가설, 과학이 뒤집다

    여성은 약하다? 과학의 가설, 과학이 뒤집다

    남성우월주의자 찰스 다윈 지목하며 성차별 답습한 과학계 왜곡·횡포 비판 뇌 무게, 성별 지적능력 가릴 기준 못돼 같은 병 걸려도 男보다 女 더 살아남아 “진정한 성평등, 과학적 접근 충실해야”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 ‘여성은 약하다.’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성별의 차이다. 그리고 과학은 그 통념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정말 여성은 인류의 ‘열등한 절반’일까. 영국의 과학 저널리스트 앤절라 사이니가 쓴 ‘열등한 성’은 각종 연구와 실험 결과를 통해 그 오랜 통념을 보란듯이 뒤집어 눈길을 끈다. 탄생에서부터 직장 생활, 육아, 폐경, 노년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인생 단계를 훑어 ‘열등한 여성’이라는 세상의 편견과 왜곡을 조목조목 짚어 낸다. 우선 뇌의 성별 차이로 인한 ‘여성 열등’설을 보자. ‘여성의 뇌 무게는 남성에 비해 28g 적다’는 사실은 지적 능력 차의 단초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선 뇌의 성별 차는 하잘것없는 것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공간 시각화, 수학적 능력, 언어 유창성에서 남자와 여자아이 간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매우 작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2016년 뇌과학 학회지 뉴로이미지에 실린 논문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논문은 여성의 뇌에서 더 크다고 알려진 영역인 해마의 크기가 양쪽 성 모두에서 동일함을 밝혔다. 시카고 로절린드 프랭클린대 연구팀은 6000명의 건강한 사람을 연구한 76개 논문을 분석해 ‘여성이 언어 기억력과 사회적 기술이 더 뛰어나고 감정을 더 잘 표현한다’는 가설을 뒤집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단순히 뇌가 무거워 지능이 높다면 고래나 코끼리가 인간보다 훨씬 똑똑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저자는 또 ‘남성이 여성보다 더 튼튼하고 강하다’는 가설도 허물면서 “단순하게 생존이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강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유아 사망률을 보면 남아가 여아보다 첫 달에 사망할 위험이 10%가량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고 아픈 사람도 많다는 통념이 굳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같은 질병에 걸려도 여성은 살아남고 남성은 그렇지 못해서 아픈 남성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남성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더 좋은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날카로운 지성과 훌륭한 신체를 갖게 됐고 여성은 남성보다 진화가 덜 됐다’는 가설을 놓고도 이중 잣대로 가득 찬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고릴라는 신체가 너무 크고 강해서 고등한 사회적 동물이 될 수 없다면서 인간에 관해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가 크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한쪽에 기운 남성 우월의 통념을 갖게 됐을까. 저자는 과학계의 횡포에 메스를 들이대면서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란 말은 허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원조 격으로 진화론자 찰스 다윈을 지목해 흥미롭다. 다윈은 말년에 한 여성운동가에게 보낸 답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전의 법칙에 따라 여성이 남성과 지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결국 다윈은 여성을 남성의 종속적인 존재로 낮게 봤던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과학에 그대로 연결한 남성우월주의자였고, 후대의 과학은 그 왜곡과 편견을 답습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과학계에서 여성 배제와 홀대의 사례는 흔하다. 케임브리지대는 1947년이 돼서야 남성과 동일한 기준으로 여성에게 학위를 수여했고, 하버드 의과대학은 1945년까지 여성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마리 퀴리는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과학자이지만 1911년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20세기 미국 생물학자 네티 마리아 스티븐스는 성별을 결정하는 염색체를 발견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지만 그녀의 과학적 기여는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많은 이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페미니즘 계열에 속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성별의 우위를 따지고 밝히자는 게 아니라 과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라는 강변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폐경 연구에 천착해 온 유타대 인류학자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말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진지하게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이런 것들의 토대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싶다면 생물학이 답이에요. 과학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2020년 ‘혼템’이 주목하는 건 공간 아닌 공감

    2020년 ‘혼템’이 주목하는 건 공간 아닌 공감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뜻의 ‘혼밥’이 등장한 뒤 몇 년 동안 ‘혼술’(혼자서 술 마시기), ‘혼영’(혼자서 영화 보기)과 같은 이른바 ‘혼○’이 유행어가 됐다. 이런 단어만 무려 40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밥 먹을 사람조차 없는 빈약한 관계라며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상사, 동료들과 거의 매일 같이 먹는 점심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터다. ‘혼코노’(혼자서 코인노래방 즐기기)는 회식은 싫지만 노래방은 가고 싶은 심리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신간 ‘2020 트렌드 노트’는 다음소프트 생활변화관측소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살펴본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생활변화관측소는 월 1억 2000만건의 소셜 빅데이터에서 1000여개 키워드를 뽑아 변화상을 관찰한다. 몇 년간 떠오른 키워드들을 살펴본 뒤 우리 사회가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아 모이고 흩어지는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활변화관측소는 설명한다. ‘혼○’과 같은 유행어는 관계 단절이 아닌,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적극적인 행동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책은 이를 바탕으로 해 우리 사회의 공간, 관계, 소비의 변화에 집중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집을 꾸미고자 조명, 수전, 문고리 등을 공부하고, 서툴지만 셀프 페인트칠을 한다. 소비 패턴도 바뀌었다. 어차피 소비할 것, 가급적 더 좋은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왕이면’이라는 단어의 언급도 부쩍 늘었다. 택시보다 비싸지만 기사가 말을 걸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 ‘타다’ 이용률이 급격하게 늘어난 게 무관하지 않다. ‘○○계의 명품’이란 말도 유행어가 됐다. 1개에 2만원이 넘는 ‘루치펠로’와 같은 고가 상품을 일명 ‘치약계의 샤넬’로 부르는 식이다. 공간, 관계, 소비 변화를 읽다 보면 앞으로 어떤 사업이 유망할지 짐작할 수 있다. ‘셰어하우스’나 ‘공유오피스’의 미래가 낙관적이지는 않다. 사람들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관심사이지 사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장사를 잘하려면 소비자와 친구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작업물을 멋지게 소개하고, 질문이 들어오면 친절하게 답하는 목수나 도배사에게 일을 더 맡기고 싶은 것처럼.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시에 기대다(정우영 지음, 문학들 펴냄) 등단 30년을 맞은 중견 시인의 시평 에세이집. 박승민, 송태웅, 장철문, 박형권 등 독자적인 성취를 이뤘으나 세간의 관심에서는 다소 비켜난 시인들의 작품에 애정 어린 평을 더했다. 시인은 요즘 시의 조류를 일컬어 당대의 사회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언어적 감수성과 실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융합적 리얼리즘’으로 설명한다. 448쪽. 2만원.이 순간 사랑(송정림 지음, yeondoo 펴냄) 33편의 오페라를 소재로 인간의 사랑을 이야기한 에세이. ‘슬플 때 사랑한다’ 등 많은 드라마를 쓴 작가 송정림은 ‘막장 드라마’의 시초는 다름 아닌 오페라라고 말한다. 권선징악, 출생의 비밀 등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원조는 오페라이며 우리는 오페라를 통해 다채로운 사랑의 감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208쪽. 1만 4000원잘못 든 길도 길이다(김여옥 지음, 책만드는집 펴냄) 1991년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하고 ‘월간문학’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의 신작 시집. 삶의 과정에서 응어리진 마음을 어르고 달래 신명 나게 풀어내는 시들이 담겼다. 그의 시는 특히 돌발적인 상황 속 죽음에 대한 자의식을 통해 강렬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164쪽. 1만원.감국대신 위안스카이(이양자 지음, 한울엠플러스 펴냄)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까지 10여년 동안 이뤄진 중국 청나라의 군사·정치·경제 침탈의 선봉에 있던 위안스카이. 당대는 제국주의 격랑 속 조선이 자주 개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위안스카이의 당시 행적과 조선의 대응을 통해 이 천금 같은 기회가 어떻게 유실됐는지 분석한다. 240쪽. 2만 8000원.앞서가는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알렉스 비어드 지음, 신동숙 옮김, 글담출판사 펴냄) 교육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혁명을 이끌고 있는 교사·학생·교육학자·혁신운동가들을 만나 21세기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혁신에 대한 관심이 들끓는 실리콘밸리, 생각하는 기계를 이용해 스스로 학습하는 미국의 로켓십 페르자 초등학교,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학습 능력이 뒤떨어지는 아이들을 최상위 성적으로 끌어올린 런던 킹 솔로몬 아카데미 등에서 비법을 찾는다. 560쪽. 1만 7800원.한국영화 표상의 지도(박유희 지음, 책과함께 펴냄)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 다섯 가지 표상으로 보는 한국영화사. 눈가에 흉터가 깊게 팬 북한군 장교, 남성 마초처럼 괄괄한 여성 검사, 북과 나팔을 불며 쥐 떼처럼 몰려드는 중공군처럼 표상화된 이미지는 한국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됐으며 우리의 상상을 어떻게 구성해 왔는지 연원을 짚어 본다. 584쪽. 3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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