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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盧대통령 신년기자회견] 서민경제 안정에 ‘올인’ 양극화 해소·성장 ‘사냥’

    1.경제살리기 해법 “양극화 해소를 통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잡는다.” 13일 노무현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밝힌 경제구상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이날 노 대통령의 모두발언은 “새해 여러 소망이 있겠지만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경제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로 시작했다. 에두르지 않고 처음부터 ‘경제’라는 본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실용노선 뚜렷해진 ‘선진경제’ 구상 노 대통령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대목은 ‘양극화 해소’. 그는 “산업, 기업, 근로자간 양극화가 더 이상 지속되면 소득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물론, 성장잠재력과 사회통합의 기반마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기상황이야 언젠가는 좋아지겠지만 양극화는 그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지난해 수출이 전년대비 30% 이상 늘고 경제성장률이 5%에 육박했는데도 서민층, 중소기업, 자영업자, 비정규직 등의 고통이 컸던 까닭을 양극화에서 찾았다. 노 대통령은 또 “이제 (구호로 그칠 게 아니라)선진한국을 향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노력할 때가 됐다.”고 강조하고, 방법론으로 ▲문화·관광·레저 등을 비롯한 서비스산업 육성 ▲자유무역협정(FTA) 확대 등 개방형 통상체제 구축을 제시했다. 그동안 참여정부의 입장과 비교할 때 ‘실용주의’로의 전환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특히 문화·관광·레저서비스 산업 발전에 역점을 두기로 함에 따라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해 온 대규모 복합관광레저단지 개발에 힘이 실리게 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복합관광레단지 개발을 언급하면서 “올해 중에 서남해안 등지에 대규모 관광레저단지를 선정해 사업이 구체화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남도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도시 겸 복합관광레저단지 ‘J프로젝트’를 염두해 둔 것으로 해석된다.J프로젝트는 외자 38조원을 유치해 2013년까지 전남 해남 일대에 관광·레저·위락·복지시설 등을 갖춘 3200만평 규모의 관광레저도시를 1,2단계로 나눠 조성하는 것으로 이곳에는 오션타운(400만평), 종합위락타운(370만평), 실버타운(1080만평), 골프타운(920만평) 등이 들어서게 된다. ●“양극화 해소, 경제회생에 짐 안 돼야” 이날 연두회견 내용에 대해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힘을 쏟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국경제가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대기업들을 격려한 점도 주목된다.”고 밝혔다. 한 민간연구기관 관계자는 “당초 예상보다는 경제회생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특히 ‘소수에 대한 두터운 보호보다는 다소 수준이 낮더라도 다수가 폭넓게 보호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통령의 언급은 ‘성장보다는 분배’라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2.남북정상회담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개최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임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6자회담의 틀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한 뒤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제안할 용의가 있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정상회담은 필요하고 우리의 희망이지만 상대가 있는 사안이라 희망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응한다면 때와 장소·주제에 관계없이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역설했다. 현 시점에서는 가능성이 낮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평소 정상회담과 북핵문제 협상에 대한 비유로 사용해 온 ‘상품 흥정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물건도 계속 사려고 흥정하면 값이 비싸지듯 가능성이 낮은데 자꾸 목을 매면 협상력이 떨어진다.”면서 “가능할 때 적절한 수준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협상에 도움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분위기만 띄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며 ‘특사 파견설’에 대해서도 예단을 경계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3.고위공직자 인선 노무현 대통령은 후임 교육부총리를 비롯한 장관 선임을 ‘좋은 신랑감 얻기’와 ‘기업의 임원 구하기’에 비유했다. 노 대통령은 “기업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마음에 쏙 드는 인재가 많지 않다고 한다. 딱 마음에 들면 어디 다른 데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는 소개로 인선 애로를 표현했다. 특히 도덕성·참신성·능력·전문성 등 4가지의 일반적인 인선기준 중 능력과 품성을 제일로 꼽았다. 재산관계에 대해서는 “20여년 전 전 국민이 부동산 투기할 때 퇴직한 돈 갖고 땅 한 필지 샀던 일을 놓고 검증한다고 하니까 어렵긴 어렵다.”고 말해 그다지 중요한 덕목이 아님을 시사했다. 도덕성의 기준으론 ‘절대적으로 깨끗하다.’ 보다는 ‘공사를 분명히 하고 사심없이 일할 수 있는 것’을 제시했다. 참신성과 관련해서는 “지금 국회는 매우 참신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죠.”라며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전문성에 대해서는 “장관 선임에서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통합적 관리’ 능력을 우선했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을 재계·보수언론과의 대화창구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그렇게 평가를 하니까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이어 “국민들이 저를 약간 개혁쪽으로 치우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비서실장은 조금 덜 치우친 사람이 좋지 않겠나.”라면서 “듣고 보니까 잘된 일”이라고 진단했다.‘이기준 파문’과 관련해서는“(민정·인사수석의)문책조치는 청와대가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잘못은 대통령의 것”이라고 참모진을 감쌌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儒林(264)-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4)-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모택동이 애독했던 책으로 전쟁 중에도, 외지로 출장 갈 때도 항상 곁에 두었던 고전 중에 ‘용재수필(容齋隨筆)’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송대의 홍매(洪邁)가 지은 책인데, 그는 남송의 사대부 가정에서 태어나 4대에 걸쳐 재상에 이르렀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안질 때문에 눈이 나빠졌을 때에도 특별히 읽기 편하게 글씨를 확대해서까지 탐독하였던 이 책은 모택동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읽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이 책에 나오는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면 곧 화를 당한다.’,‘재앙은 혀에서 비롯된다.’,‘경솔한 말 한마디에 7백리의 국토를 잃는다.’라는 구절 등은 오늘날에도 정치가들이 명심해야 할 구절이며,‘종기는 그대로 두었다간 끝내 곪아 터지고 만다.’,‘공을 이룬 사람은 시기하는 무리를 조심하라.’,‘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위기상황에서는 전례 없는 진급도 필요한 법이다.’라는 구절들은 오늘날에도 경제난국을 헤쳐가는 경세지략(經世之略)인 것이다. 일찍이 명조의 감찰어사였던 이한(李翰)으로부터 ‘이 책은 사람들에게 선을 권하고 악을 버리도록 경계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경악하게도 한다. 이 책은 사람들의 견문을 넓혀 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며 의심을 해소하고 사리를 밝게 한다. 이 책은 세속을 교화시키는 데도 도움을 준다.’라고 극찬을 받았던 송나라의 대표적 서적인데, 홍매는 자하경학(子夏經學)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 중 오직 자하만이 여러 경전에 관해서 홀로 저서가 있다. 비록 그러한 전기(傳記)나 잡언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요컨대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중략)…춘추(春秋)에 있어서는 자하가 단 한마디도 더 보탤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그것에 대해서 자하가 연구한 일을 뜻하는 것이다.‘공양전(公羊傳)’을 쓴 공양고(公羊高)도 그것을 자하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며, 논어에 있어서는 정현(鄭玄)이 자하가 편찬한 것이라 하였다. 후한 서방(徐防)이 상소문에서 ‘시, 서, 예, 악은 공자가 편정(編定)하였으나 그 장구의 뜻을 밝히는 일은 자하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하가 여러 유가의 경전들을 전수하였다는 말은 대부분이 한대의 이야기여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의 전수근원을 자하에게 두었던 것은 그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학문에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하는 예수의 제자 중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모시며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고 4대복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한복음’과 ‘계시록(啓示錄)’을 쓴 요한을 연상시킨다. 요한은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예수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녔고, 예수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제자였으나 복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만 ‘사랑받은 제자’라는 익명으로 숨기고 있다. 이는 자하도 마찬가지여서 유가의 성전(聖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근본 문헌인 논어를 편찬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인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자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고 있는 것은 공자의 제자들인 자하, 자공, 증자 등의 말을 간추려 놓은 ‘자장(子張)’편에 집중되고 있을 뿐인데, 그 내용을 추려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자하가 말하였다. “ ‘널리 배우되 독실하게 뜻을 가지고,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으로부터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하가 말하였다. “‘모든 장인은 공장에 있으면서 자기 일을 완성하고, 군자는 학문을 통해 자기의 도를 이룬다.’”
  • [司試 최연소 합격기] (하) 2차과목 교재 1권으로 승부

    [司試 최연소 합격기] (하) 2차과목 교재 1권으로 승부

    2차는 기본서에 제시된 논점을 사례집으로 보충하는 방법으로 단권화했습니다. 기본서의 경우 헌법은 성낙인, 행정법 장태주, 상법 정찬형, 민법 지원림, 민사소송법 이시윤·호문혁, 형법과 형사소송법은 정웅석 교수의 저서를 봤습니다. 사례집의 경우 헌법은 김선택, 행정법 김연태 교수, 상법 김혁붕 강사편저, 민법 송덕수, 민사소송법 전병서, 형법과 형사소송법은 이재상 교수의 책을 탐독했습니다. 2차 공부는 단권화에 초점을 뒀습니다. 다만 따로 자료를 보충할 때에는 기본서의 어느 행간에 들어가야 하는지, 왜 논의가 되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부를 했던 것은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충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기본서의 단어나 행간에서 내용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1차 공부와 병행해 기본강의 테이프를 구하여 들었고,1차 시험 후 서울 신림동을 나와 학원에 등록한 뒤 오후와 저녁 모두 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하루에 여러 과목을 봐야 했습니다. 학원진도에 따라서 공부해 나갔고 그렇게 3월과 4월을 보냈습니다. 다만 아직 실력이 부족했지만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는 꾸준히 응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르는 논점이 나오면 책을 찾아보면서라도 써봤던 것이 많은 공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5월이 되면서 2차 시험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재시로 시험보는 사람들에 비해 저는 너무나 아는 게 부족했고 모의고사 점수도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는 합격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과락을 면하는 방법으로 작전을 바꿨습니다. 저는 2차 시험은 모범답안을 쓰는 시험이 아니라 틀리지 않은 말을 쓰면 되는 시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논점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학설의 요점만 알면 답안지에 어지간히 지어서 써도 틀리지 않은 말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목마다 지엽적인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고 논점별로 핵심단어 몇 개씩만 정리된 기본서에 따로 연필로 표시해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공부해 답안지를 작성해보면서 어느 정도 과락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자신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과락을 면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니 암기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줄었고 대신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중요 판례를 무조건 5줄 이상씩 쓰기로 마음먹고 판례가 제시하는 논거만큼은 머리글자를 따서라도 암기해서 답안지에 표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 전날까지도 판례를 답안지에 적어보며 논점을 복습하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헌법은 헌법재판소 판례를 가지고 책정리를 해나가면서 공부했습니다. 특히 헌법은 자칫 양이 너무 많아질 수 있는 것 같아서 교과서에 나온 것만이라도 확실히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행정법은 체계를 잡는 데 고생을 했었는데, 행위의 의의와 성질-행위의 위법 여부-권리구제로 나누어 이해하고 사례를 접근했더니 효과적이었습니다. 상법은 관심 분야여서 그런지 공부하는데 다른 과목보다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보험과 해상편을 미리 공부해놨던 것이 시험 전날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민법은 1차를 공부하면서 사례집도 병행을 했고 기본서 책정리를 해놓았습니다. 민법은 그 양이 많아서 2차를 준비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서 보기 곤란한 점이 많은데 미리 대비를 해놓았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민사소송법은 김영식 선생의 강의로 체계를 잡고, 기본서와 조문을 꼼꼼하게 읽은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형법은 새롭게 논의되는 문제보다는 기본적인 문제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형사소송법은 다른 과목보다 늦게 공부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를 위주로 수사와 증거법을 유기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 [열린세상] 2005년의 한류와 반일은?/임춘웅 언론인

    이른바 ‘한류(韓流)’와 관련해서 요즘 일본에서 전해오는 뉴스들은 한국사람들까지 놀라게 한다. 그래서 가끔 우쭐해지는 느낌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월19일 일본의 NHK 위성방송은 무려 8시간에 걸쳐 한류특집방송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어떤 교수는 한류가 일본인, 특히 일본여성들을 ‘꿈의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고 쓰고 있다. 이제는 미국·캐나다는 물론 유럽에서까지 일본의 한류바람을 보도하고 있다.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한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다. 한데 일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여러 면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는 나라이고 또 일본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반적으로는 한국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던 나라이기 때문이다.60∼70년대 일본 지식사회에서 한국은 차라리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혐한론(嫌韓論)’이 그것이다. 혐한에서 한류까지, 반전이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참으로 극적이다. 그 배경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대체로 바뀌고 있는 변환의 시점임을 지적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2001년 도쿄 지하철역에서 일본인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군의 의로운 행동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고, 한국의 경제발전과 2002년 월드컵때 길거리 응원에서 보여준 한국인들의 결집력과 활력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터에 ‘겨울연가’가 다시 일본인들의 마음에 산뜻한 감상을 안겨주었다는 얘기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본의 ‘욘사마 열풍’을 설명하는 데는 60여년 전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보다 적절한 설명은 없을 듯하다.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고 쓴 ‘국화와 칼’은 아직도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 그만한 책이 없을 만큼 일본연구의 고전에 속한다. 베네딕트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명예를 매우 중시해서 자기 명예를 더럽혔다거나 상대로부터 모욕을 받으면 기필코 복수를 하거나 죽음으로라도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갓푸쿠(割腹)가 많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45년 일본의 항복을 받아 본토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에서 패전의 굴욕을 참지 못한 나머지 집단 자결이 이어지고 요즘 이라크에서처럼 미군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가 계속될 것이란 우려에서 맥아더 사령부는 한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사람들은 미군을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다. 미군 혼자 길거리를 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미군 당국은 이런 뜻밖의 현상에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을 제대로 몰라 혼동이 있었을 뿐 일본인들은 일본인의 방식대로 일관성을 유지했고 명예를 지켰다고 베네딕트는 지적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명예를 지키는 길은 미국을 환영하고 미국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일본인들은 즉각 발상을 전환했다는 것이다.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승자에게서 배우는 게 일본문화의 뿌리라는 설명이다. 지금 일본에서 일고 있는 한류를 이해하는 데 베네딕트의 연구를 상기시키는 일이 적절한지는 의문이 없지 않지만, 그의 연구는 한류로의 반전을 이해하는 데는 참고가 될 것이다. 현실을 있는 대로 즉각 받아들이는 일본문화의 개방성과 현실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2005년은 한·일관계에서 매우 의미있는 한해가 될 것 같다. 광복 60년이 되는 해이고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해이다. 또 한번 캘린더 저널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광복과 을사조약을 되새기자면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다시 떠오르게 될 것이다.2005년이 시작됐다. 올해 한국에서 일본을 되돌아보는 일과 일본의 ‘욘사마 열풍’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게 될지 궁금하다. 임춘웅 언론인
  • 곤혹스런 청와대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이 5일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을 찾았다. 이기준 교육부총리의 임명이 부적절하다는 논란 확산을 조기 진화하기 위해서다. 공식적인 인사발표가 아니고는 좀처럼 춘추관을 찾지 않는 정 수석의 방문은 매우 이례적이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도 “이 부총리 임명을 다시 논의하는 분위기가 없다.”면서 파문의 진화를 시도했다. 그만큼 청와대가 ‘이기준 파문’ 확산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목되는 김우식-이기준 관계 김우식 비서실장과 이기준 교육부총리의 각별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부적절 인사 논란은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다. 김 비서실장과 이 부총리는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같은 시기에 총장을 지냈다. 김 비서실장이 한국공학교육인증원 회장을 지낼 당시 이 부총리가 이사장을 맡아 학계 활동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말을 터놓고 지내고, 총장 시절에 공식 회의석상에 만나면 서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강한 친밀감을 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농촌의 초등학생들에게 과학서적을 보내는 운동을 펼치는 사이언스북 스타트운동의 공동대표도 나란히 맡고 있다. 두 사람의 공동저서는 5권에 이른다. 이런 관계 때문에 장관을 추천하는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비서실장이 이 부총리를 추천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정실인사 보도 법적대응” 이에 대해 정찬용 수석은 “김 비서실장이 추천했다는 얘기는 맞지 않는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정 수석은 개각 후보명단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자신을 포함해 4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공개하면서 김 비서실장 방어에 나섰다. 이날 김 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비서실의 현안점검회의에서는 이 부총리 임명이 ‘정실인사’라는 일부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상당히 불쾌하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김만수 부대변인이 전했다. 보도 내용에는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여권에서는 이 부총리를 천거한 인물로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부총리는 이 총리가 교육부 장관을 맡았던 당시 호흡을 맞춰 서울대 개혁 정책을 펴왔고, 이번에 이 부총리의 발탁 이유도 대학 개혁이다. 청와대가 이 부총리의 결점들을 알고도 임명한 것은 인사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일고 있다. 정 수석은 “흠이 있지만 교육개혁의 중요도에 비해 덜 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면서 “(흠들이)잘한 일은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청와대는 일단은 ‘이기준 파문’을 정면돌파한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 부총리 임명 철회에 교원단체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여론도 부정적인 점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청와대 관계자는 “(여론 추이를)지켜보자.”고 했다. 이 부총리에 대한 다른 의혹이 불거지지 않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새해 가장 바빠지는 사람들은 점술인이다. 개명한 세상에 누가 미신 따위에 솔깃하랴 싶지만, 일간지조차 새해를 맞아 국운이 어떠할지를 점친다. 옛날부터 이 땅에는 나라의 앞날을 예언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뿌리도 제법 깊어서 삼국통일 이전까지 소급된다.‘고려비기(高麗秘記)’,‘고경참(古鏡讖)’이 고대의 예언서라면,‘삼한회토기’ ‘삼각산명당기’는 중세의 예언서였다. 근세의 예언서로는 ‘도선비기’를 비롯해 수십종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이다. 18세기부터 민중의 사랑을 받던 ‘정감록’은 국가의 탄압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다종다양한 필사본만 유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감록’은 1923년 드디어 활자화되었고 그것이 사실상 정본 취급을 받고 있다. ‘정감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곧 조선이 멸망하는데, 그 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계룡산에 세워질 새 왕조는 언제 나타나는지로 압축된다. 아무 해에 무슨 사단이 터진다는 식의 짤막한 예언이 대부분인데, 한국의 예언서가 대개 그렇듯 60갑자로 햇수가 적혀 있어 세월의 흐름에 구애되지 않는다. ●예언서에 보이는 민중의 공포 ‘정감록’의 비교적 앞쪽엔 이런 오싹한 대목이 있다. 원숭이해 봄 삼월과 성스러운 임금이 다스리는 가을 팔월, 인천과 부평에는 밤중에 배 1000척이 들어오고, 안성과 죽산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여주와 광주에는 인적이 영영 끊어져버리고, 수원과 남양에는 피가 흘러 냇물을 이루리라. 한강 이남 100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지고, 인적도 영영 사라질 것이다. 전쟁영화의 섬뜩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예언은 수도권 전체가 전쟁 통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작년 2004년도 원숭이해였다. 최악의 경제난으로 먹고 살기 참 힘든 한 해였고 북한의 핵문제로 전쟁 걱정도 컸었다. 북핵문제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강경책이 화근이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땅에 그런 참극은 없었다.‘정감록’의 예언이 틀린 셈이다.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구절을 보여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다들 그렇단다. 과연 ‘정감록’에는 민심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나 보다. 서울로 통하는 관문 인천 앞바다에 적을 태운 배가 1000척씩이나 들이닥친다고 했다. 그런 변고가 없다.1592년의 임진왜란, 그보다 5년 뒤의 정유재란도 이처럼 끔찍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참혹한 예언은 뜬금없이 나오는 예가 없다. 지난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바그다드 상공에 쏟아진 폭탄이 불꽃놀이 같았고, 명분 없는 전쟁에 죽은 사람만도 10만을 헤아렸다. 훗날 이라크에 예언서가 작성될 경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남긴 상흔은 집단적 기억이 되어 남을 것이다.‘정감록’에 담긴 이 대목도 민중의 전쟁공포증으로 헤아려봐야 한다. 우선 인명의 대량 살상을 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안성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도 대수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정감록’의 예언은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만 같다. 1894년 7월 하순 일본군함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하다가 아산(牙山)·풍도(豊島)로 내려가 청의 해군과 한바탕 싸웠다.‘정감록’에 나오는 인천 앞바다 운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격전지 아산과 풍도는 바로 예언서에 언급된 남양의 코앞이다. 그 뒤 일본군대는 천안 부근의 성환(成歡)에서, 같은 해 9월에는 평양에서 청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뒀다.‘정감록’에 나오는 안성, 죽산 등도 실제의 전쟁터 성환에서 멀지 않다. 근대식 무기가 동원된 청·일 양국간의 살벌한 전투 장면을 지켜보면서 민중은 공포에 떨었고 이것이 다소 과장된 형태로 ‘정감록’에 아로새겨졌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한 가지 다른 가능성도 있다.19세기 후반부터 한국에는 ‘서양오랑캐’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1840년 여름, 영국은 4000명의 병력으로 중국의 다구·톈진(天津)을 위협하였고, 이듬해에 다시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물밀 듯 난징(南京)으로 쳐들어갔다. 아편전쟁의 놀라운 소식은 연달아 한국에 알려져 조정은 물론 민심마저 발칵 뒤집혔다. 외침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1866년 프랑스 함대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불과 5년 뒤인 1871년에는 미국함대가 쳐들어와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당황한 나머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외국과 교섭을 전면 금지했지만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 속에서 각종 소문과 예언이 유행했다. 갑자기 1000척의 배가 쳐들어와서 수도권을 피바다로 만들어놓을 것이라는 예언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일 것이다. 거기에 청·일전쟁의 집단기억이 덧칠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정감록’에 숨겨진 비밀을 읽는 법 10년쯤 전이었다. 역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상세계를 탐구하던 내 눈길이 예언서 ‘정감록’에 닿았다. 한국역사상 대표적인 예언서라면 다들 ‘정감록’을 첫손가락에 꼽았기에 그 책을 끌어당겼던 것인데 실망이 컸다. 거기에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없었고, 성경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같은 것도 안 보였다.‘정감록’에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서술은 없고 대신 알쏭달쏭한 표현만 단편적으로 눈에 띄었다. 하지만 거듭 읽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정감록’이 지닌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마침내 ‘정감록’에는 비밀스러운 문화의 코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정감록’의 한 줄 한 줄은 수천년 동안 생성된 우리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였다. 민중은 공포와 절망에 떨면서도 예언 가운데 희망의 빛을 감춰두었던 것이다. ‘정감록’의 문화적 코드는 예언서를 예언서로서 바라보는 편협한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자구의 해석에 매달릴 경우 ‘정감록’은 그저 단편적이고 무질서할 수밖에 없다.‘정감록’을 읽는 옳은 방법은 그게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의 앞뒤를 재고 정치와 문화를 하나로 뚫어서 읽을 때, 그 비밀스러운 코드는 비로소 풀릴 것이다. ‘정감록’의 밑바탕에는 풍수지리설과 선천후천 교대설(옛 세상이 끝나고 이제 곧 천지가 개벽한다는 주장)이 있다. 맥맥이 흐르는 미륵신앙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은 한국문화의 젖줄이다. 따지고 보면 동학, 증산도, 원불교와 같은 근현대 한국의 신종교도 ‘정감록’으로부터 생명수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정감록’과 김지하 ‘정감록’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대 한국의 지식인 몇몇도 오래 전부터 ‘정감록’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시인 김지하다.‘오적’이란 시를 비롯, 군사독재에 목숨 걸고 맞서 싸운 그의 투쟁담은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김지하는 사상적으로도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생명이니 살림이니 하는 토종의 생각으로 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주의 주장을 아우르고 싶어했다. 그런 김지하가 ‘정감록’을 즐겨 인용하였다면? 김지하는 사실 ‘정감록’을 본떴으며,‘정감록’의 정수를 꿰뚫어 보았다. 이 말이 쉽게 믿기지 않을 사람도 있을 테니 그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다. 김지하의 책 ‘말뚝이 이빨은 팔만사천개’의 ‘오행’이란 시가 앞서 살핀 ‘정감록’의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그 해 여름 복중 큰 눈이 내리고, 큰물이 지고, 큰 흉(凶)이 들고 안성과 죽산(安竹)과 수성과 당성 사이(隨唐間)에 굶어죽은 송장이 산처럼 쌓이고 비석이 땀을 흘리고 우물에 피가 솟고 대꽃이 피고 운운. 여기서 김지하는 전쟁의 참혹상을 흉년의 비극으로 바꿔놓았지만 지명도 그대로 두었고 얼개도 ‘정감록’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앵적가’의 경우는 더 심하다. 안성과 죽산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며 하는 식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김지하의 패러디는 계속된다.‘이 가문 날에 비구름’에서는 아예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정감록’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 이 작품은 동학의 역사를 한 편의 유장한 시로 풀어낸 것인데,‘정감록’을 빌려다가 최제우가 동학을 개창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왜 김지하는 ‘정감록’을 자꾸 빌려다 썼을까. 단순히 그 예언서의 몇 대목에 관심을 둔 것일까, 아니면 ‘정감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큰 매력을 느낀 것일까. ●‘정감록’이란 민중의 밥그릇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문득 정경모란 이름도 생각난다. 그는 80년대 중반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찢겨진 산하’의 저자로, 남북통일에 관한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씨알의 힘’에는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저본)이 실려 있다. 정경모는 그 글에서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그리고 장준하 세 사람이 천상에서 만나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치 ‘정감록’에서 정감, 이심 및 이연이 금강산 비로봉에 앉아서 나라의 운명을 논의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정경모와 김지하가 ‘정감록’의 형식과 내용을 빌린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들은 민중의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한 사상가 또는 운동가였고, 그 점이 ‘정감록’을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같다. 그들로서는 ‘정감록’에 담긴 예언의 내용 못지않게 지난 수백년 동안 민중이 사용해온 비밀스러운 화법을 터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언서가 그렇듯 민중은 겉으로 절망을 말하면서도 희망의 씨앗을 남몰래 감춰두고 싶어했다. 김지하 등은 그 점을 간파하였다고 할까. 그런 그들에게 ‘정감록’은 일종의 교과서였을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선 지식인들은 실의에 빠진 민중을 고무하고 싶었고 따라서 민중의 혀로 말하는 법을 배우려 애썼다고, 그렇게 믿어진다. 조선 후기부터 오랜 왕조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민중은 ‘정감록’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잊을 만하면 ‘정감록’을 매개로 한 역모 사건이 터졌다. 그 때마다 수십 또는 수백명의 연루자가 붙잡혀 가 매를 맞고 더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기도 했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양반들의 조선이 영영 망하고 말 것이다. 천지개벽하면 시쳇말로 개똥쇠에 불과한 이 몸도 운대가 풀릴 것이다.” 민중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는 심정으로 예언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으리라. 집권층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다. 그래서 금서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정감록’은 합법적으로 출판되지 못한, 그러나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로 남았다. 일제시대까지도 그 인기는 여전해 ‘정감록’이 점지한 길한 땅을 찾아 수만명이 정든 고향을 버렸다. 일제시대 계룡산자락에는 불과 수년새 작은 읍 하나가 들어설 정도였다. 무수한 민중이 한 글자씩 ‘정감록’의 예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난세에 살아갈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김지하가 ‘정감록’을 방불케 하는 담시를 연달아 지은 것도 민중의 마음에 희망의 싹을 틔울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정감록’은 예나 지금이나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는 민중의 희망을 퍼 담는 밥사발이다. ● 정감록이란 조선후기부터 유행한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정도전, 정여립 등이 저자란 설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영조 때 실록에 처음 등장한 뒤 조정의 금령으로 출판, 소지 및 독서가 일체 금지되었다. 지배층에게는 혹세무민의 황당한 책, 민중들 입장에선 위로와 희망의 터전이었다. 곧 조선왕조가 망한다, 살아남으려거든 복된 피난처로 가라, 정씨(鄭氏) 진인(眞人)이 와서 새 왕조를 연다는 것이 예언의 골자다. 조선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역모사건과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수십곳에 정감록촌이 들어섰고, 수천의 신(新)종교단체가 등장했다. 겉보기엔 정감(鄭鑑), 이심(李沁), 이연(李淵) 3인의 엉성한 대담집인데, 풍수지리설·해도진인설·미륵신앙 등이 저변을 흐른다. 그들의 대화엔 은어(隱語)가 많아 해석이 안 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제목은 달라도 내용이 엇비슷한 온갖 예언서를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 백승종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現 푸른역사硏 소장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독일 괴팅겐 막스·플랑크 역사硏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진단학회 총무이사 ●저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2003년)‘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2002년)‘아버지 난 누구에요’(궁리,2001년)등 다수.
  • [司試 최연소 합격기] (중) 출제빈도 높은부분 집중공략

    1차 시험을 준비할 때 헌법은 권영성, 민법은 지원림, 형법은 이재상 교수님 저서를 봤습니다. 문제집은 고시계의 기출문제집을 여러번 풀면서 지문을 꼼꼼히 정리했습니다. 1차는 100점을 맞아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 85점 정도만 맞으면 되는 시험입니다.85점을 맞기 위한 공부는 100점을 맞기 위한 공부와는 방법이나 양이 본질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기출문제와 판례를 중점적으로 보고 출제빈도가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을 구별하여 공부한다면 짧은 기간에도 합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 기본강의를 테이프로 빠르게 듣고 기출문제(사법시험 및 행정고시, 변리사시험 등)를 가지고 지문을 찾아서 기본서에 표시하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2003년 1차 시험에 대비해서 처음 공부할 때 두 달 동안 기본3법(민법·헌법·형법)의 테이프를 듣고 바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시험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더라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풀었습니다. 아직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여서 문제를 푸는 데 정말 어려웠고 많이 틀렸지만 억지로라도 생각하면서 풀었던 것이 나중에 기억에 잘 남았던 것 같습니다. 시험 전날까지 고시계 기출문제집 3권에 나와 있는 모든 지문을 기본서에 표시해 가면서 소화했습니다. 이때 기본서 각 부분마다의 완벽한 정리는 불가능했지만, 문제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서 합격선 정도의 점수를 맞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기출문제를 반복해 풀다 보니 문제가 어떤 부분에서 집중하여 출제되고 있는지, 출제자가 물어보려는 것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객관식에서 판례문제는 깊이 있는 이해가 없어도 맞힐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에 중점을 두고 공부했습니다. 각 과목별로 판례집을 사서 테이프와 병행해 빠르게 들은 뒤 기출문제집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판례공부는 자주 출제되는 중요한 판례와 출제자가 틀리라고 내는 판례를 구분하여 신경써서 보았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1차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출제 빈도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여 공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1차 시험과 같이 광범위한 내용에서 출제되는 객관식의 경우에는 자주 출제되는 부분에서 특정한 내용을 묻기 위해서 문제가 출제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기출문제를 단원별로 어느정도 출제되는지 표를 만들어서 보았고, 그에 따라 공부 정도를 조절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조문과 부속법령의 경우에도 틀리라고 출제되는 것도 있지만, 출제위원들이 비중있는 부분에서 출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암기할 것은 선별하여 확실하게 암기했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1차 준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나올 부분과 안 나올 부분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출제빈도가 낮은 부분은 기출문제만 정리하는 식으로 넘어가고 출제빈도가 높은 부분에 집중했습니다. 또 민법 중 가족법과 선택과목의 경우에는 그 양에 비해서 할당돼 있는 점수가 크기 때문에 이 부분을 우선적으로 봤습니다. 가족법과 선택과목을 다 맞게 되면 합격선 정도의 점수를 받기 위해 다른 과목에서 약간 틀려도 되는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유분을 헌법 조문, 부속법령, 각 과목의 판례 등 점수로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암기하는 데 쏟았고 그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우선 민법의 경우 곽윤직 교수님의 저서를 꾸준히 읽었고, 그것이 기초실력이 돼 민법에서 고득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각 제도마다 의의 등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만이라도 꼭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지원림 교수님의 책을 기본서로 삼아 기출문제를 풀고 모든 지문을 체크해가면서 1차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민법 판례강의를 테이프로 들었는데, 판례강의를 들으면서 기본서를 같이 병행해서 유기적으로 공부했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특히 민법의 경우 판례가 다른 과목보다 어렵기 때문에 따로 외우려고 하게 되는데, 객관식에 있어서도 기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판례를 이해해야 응용된 판례 문제가 나와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헌법의 경우 권영성 교수님의 책을 기본서로 삼고 부속법령집과 판례집을 따로 사서 보았습니다. 헌법 조문이나 부속법령은 사시나 행시 기출 부분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많은데 그것을 꼼꼼히 파악하여 공부했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형법의 경우 이재상 교수님의 책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기출문제를 정리하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특히 형법은 판례 출제 비중이 높기 때문에, 다른 과목보다 판례를 열심히 보았습니다. 신호진 강사 편저 판례집을 강의 테이프와 병행하여 여러번 봤던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신 판례 출제 비중도 높기 때문에 신경 써서 봤습니다.
  • [이젠 사람입국이다] 이젠 사람이 생산 중심…평생학습 필수

    [이젠 사람입국이다] 이젠 사람이 생산 중심…평생학습 필수

    |클레어몬트(미 캘리포니아주) 전경하특파원| “평생학습은 당신을 젊게 만들고 삶을 윤택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평생학습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영학자로 꼽히는 피터 드러커 교수가 ‘사람입국 신경쟁력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 보낸 축하 메시지다. 문국현 특위 위원장은 지난해 말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한국에서 드러커혁신상을 제정하는 취지를 설명하고 향후 방향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이번 만남은 그동안 드러커의 저서 10여권을 번역한 이재규 대구대 총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지난 50년간 한국이 이룬 경제성장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앞으로 30∼40년간 한국은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한국은 10년안에 전쟁의 상흔을 극복했고 지금은 경제강국이다. 한국의 지난 50년간의 성공은 20세기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산업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나라다. 성공요인은 뭐라고 보는가. -교육이다. 한국에 두 번 갔는데 엄청난 교육열을 보고 놀랐다.50년대 미국 정부에 한국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장학금 제도를 만들도록 해 이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게 나에겐 큰 보람이다. 한국민은 학습의욕과 성취욕이 높다. 기업가 정신도 뛰어나다. 지난 50년은 당신이 언급한 지식사회로의 진입단계였는데. -아직 초입이다.50년간의 발전은 혁신이라기보다 진보에 의해 이뤄져왔다. 그러나 앞으로 20년 안에 제조업(manufacturing)과 육체노동자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미국에서도 1953년 노동자의 3분의1이 생산직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11%에 불과하다. 컴퓨터가 가져온 진정한 변화다. 지식사회로의 진입은 필연적인가. -기술변화라기보다는 인구학적 변화 때문에 필연적이다. 저출산으로 인구도 줄어들지만 경제성장으로 인해 수입이 괜찮은 제조업 종사자의 아이들도 이제는 공장이 아닌 대학에 간다. 생산의 중심이 기계에서 지금까지의 생산자본 중 가장 비싼 인적자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결국 사무실과 공장에서 자동화가 필연적이다. 한국은 이민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다. 반면 노령화사회로의 진입은 매우 빠르다. 인구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럼 생산성 문제 해결은. -지식노동자의 인사배치와 지속적인 학습, 두 가지가 중요하다. 지식은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전문적이다. 육체노동자는 똑같은 일을 하고, 그래서 서로 대체가 가능하다. 지식노동자는 아니다. 각자의 영역이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사, 특히 상위 직급의 인사배치가 중요하다. 인사에 관한 규칙도 세워야 한다. 지식이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인사이동이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중요하다. 또 지식은 없어질 수 있고 3∼4년만 연습하지 않으면 굳어진다. 계속 훈련받아야 한다. 그럼 교육이 더 중요해지나. -미국에선 교육자가 가장 빨리 성장한 직업군이다.2차 세계대전 전에는 7만 5000명의 교수진이 있었지만 지금은 250만명에 달한다. 늘어난 수만큼 앞으로 교육방법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지식사회에 있어 어느 수준에 와 있나. -유럽과 일본에 비해서는 경이적이다. 유럽은 정보기술에서 많이 뒤처져 있다.‘과거(yesterday)형’이라 할 수 있는 육체노동자조합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산업사회에서 노동자의 결속’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쇠퇴하고 있다. 한국도 탈노조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또 한국은 산업사회에 과도하게 적응했기 때문에 지식사회에 힘이 달려 적응이 늦을 수도 있다. 급속한 성장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경제의 발전은 어디에 달려 있다고 보나. -10년 정도는 중국과의 경쟁,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에 자리를 잘 잡았다. 다음은 인도다. 인도와 중국은 매우 다르지만 어렵고 가능성 있는 시장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인도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나라다.1억 5000만명의 주요 언어가 영어이고 7500만명이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쓴다. 이런 요인으로 인도는 지식경제에서 중요한 경쟁자이다. 인도에 자리를 잡은 외국은 아직 없다. 지식사회 발전을 위해 한국이 힘써야 할 점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 고등학교 졸업생의 25%가 제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을 위해 지적인 일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이 분야에서 성공하면 일본을 훨씬 앞서갈 수도 있다. 각국 정부가 취해야 하는 중요한 정책은.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육체노동을 분석하고 이를 독립적이고 경쟁적이며 숙련된 일련의 움직임으로 조직화하는 과학적 경영으로 세계 지도자가 됐다. 이것이 지난 50년간 경제적 성공의 기초가 되었다. 지금은 정보기술분야에 있어서 도입부다. 정부 뿐만 아니라 기업이 리더십을 가져야 지식근로자를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제조공정에서 세부적인 기술들이 프로그램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는 아직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기업의 시민의식을 강조한 까닭은. -우리 사회는 조직사회다. 최근까지 정치·사회과학과 경영학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이전에는 미국 기업이 사회 자체를 구성했고 교회는 봉사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봉사의 중심에 서야한다. 기업은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비영리단체에서 활동하도록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왜 기업이 직원들의 사회활동 참여를 독려해야 하나. -큰 조직의 문제는 사람들이 은퇴한 뒤다.20대에 영리했던 기술자는 20년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기술자이며 일반 관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공동체 조직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 두 번째 경력을 만드는 건가. -한때 두 번째 경력을 믿었다. 오류였다. 훌륭한 두 번째 경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그 예다. 나는 1929년 이후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내 일을 좀 더 잘하길 바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두번째 경력이 아니라 두번째 관심사다. 두번째 관심사는 왜 필요한가. -첫번째 승진에서 사람은 50명인데 일은 20개가 있다. 다음 승진에서는 사람수에 비해 자리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직업 이후의 관심사가 필요하다. 두 번째 관심사가 있으면 계속 배울 것이다. 또 평생학습은 당신을 젊게 할 것이다. 평생학습을 하게 되면 뇌세포가 늙지 않는다. 뇌세포가 건강하면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은 호기심이 없어지면서부터 늙는다. 배우면 젊어지고 삶을 즐길 수도 있게 된다. 지금은 무엇을 공부하나. -몇년전에는 페루 미술을 공부했었다. 지금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프랑스 정치와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lark3@seoul.co.kr ■ 피터 드러커는 누구 피터 드러커 교수는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만 96세를 맞았지만 지금도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지식근로자’ 개념의 전형인 셈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20대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통계학, 철학, 경영학 등 강의를 했다.39년 나치의 종말을 예언한 저서 ‘경제인의 종말’,42년 ‘산업인의 미래’로 미국 정치·경제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50년부터 뉴욕대 정교수로 20년간 일하고 71년부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시 드러커 경영대학원에서 강의하며 현대 경영학의 주춧돌을 놓았다. 또 제너럴모터스(GM), 제너럴일렉트로닉스(GE) 등 대기업에 컨설팅을 하면서 이론의 현실화에도 힘을 쏟았다. 국내에서 ‘경영의 실제(54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93년) ‘21세기 지식경영’(99년) ‘다음 사회’(2002년) 등 저서가 번역돼 있다. ■ 드러커혁신상이란 드러커 교수의 이름을 딴 드러커혁신상 제정은 미국 캐나다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번째다. 오는 3월 드러커상 제정에 대한 세부사항이 발표되며 연말에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다. 드러커상은 미국에서 1991년 처음 제정됐다. 매년 11월 일반인들, 특히 소외계층의 삶을 개선시킨 비영리단체에 주어진다.1위 1곳,2위 2곳 등 총 3개 단체가 상을 받는다. 상금은 각각 2만달러와 2500달러다. 캐나다에서는 1993년 제정됐고 수상방식은 같다. 클레어몬트대학 드러커 경영대학원이 2년전부터 선정·시상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드러커 관련 사업을 드러커 경영대학원 테두리안에 두자는 드러커 교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드러커 재단이 총괄한다. 2004년 미국측 수상자로는 극빈층을 위한 차량제공 프로그램을 4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 ‘Wheel Get There’가 뽑혔다. 캐나다에서는 수상자 선정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동안의 수상자와 그들의 활동은 드러커상 홈페이지(www.drucker.org/award)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드러커상 운영은 국내 여건이 적극 고려됐다. 비영리단체가 아닌 공공부문이나 기업이 상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금 조성에도 정부가 일정부분 참여할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상금을 기업과 독지가들의 후원으로만 마련한다. 드러커상을 총괄하는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의 코넬리스 클류버 교수는 “한국은 미국·캐나다와는 다를 수 있다.”면서 “한국적 상황에서 합당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사를 표시했다.
  • [지진 해일 대재앙] “해저서 인도의 땅이 지구 일부 들어올려”

    “길이 745마일(약 1192㎞), 폭 6∼9마일의 해저 지층을 뜯어낸 뒤 100피트(약 33m)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이번처럼 살인적인 해일(쓰나미)이 만들어집니다.” 엄청난 인명·재산피해를 가져오는 해일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미 일간지 USA투데이는 29일 해일·지진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해일의 생성과정을 설명했다. 지난 26일 동남아·서남아 일대를 강타한 해일을 만들어낸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은 해저에서 인도의 땅이 태국·말레이시아를 지탱하는 대륙 밑으로 약간 파고 들어가 지구의 일부분을 들어올리면서 발생했다. 그 결과 메가스러스트(megathrust)로 불리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충격으로 발생한 물기둥은 시간당 500마일(약 800㎞)의 빠른 속력으로 퍼져나가다가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느려진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의 지질학자인 텡홍웡은 “앞서가던 파도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파도와 겹쳐지게 되므로 육지에 도착할 때에는 50피트 높이의 거대한 해일 파도가 된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해일 파도는 육지에 도착하기 전 해안의 바닷물을 끌어들인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조개를 줍기 위해 바다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해일 파도에 휩쓸려간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司試 최연소 합격기] (상)삭발후 하루 8시간 책과 씨름

    [司試 최연소 합격기] (상)삭발후 하루 8시간 책과 씨름

    올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은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일규(21)씨가 차지했다. 역대 최연소 합격자 가운데서도 어린 편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고등학생티가 묻어난다. 그는 서울계남초, 목일중, 대일고를 나왔다. 좌우명은 ‘큰뜻 큰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대학입학과 함께 사법시험에 도전해서 합격하기까지의 과정을 3차례에 걸쳐 싣는다. 대학을 입학하던 2002년 5월 말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업전문 변호사가 되겠다는 어렸을 적 꿈을 구체화해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병원에 두달 정도 입원을 하고 나서도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집에서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곽윤직 교수님의 저서를 임영호 선생님의 강의 테이프로 들으며 여러차례 탐독했습니다. ●2002년 교통사고후 시험 준비 시작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02년 겨울이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목표를 2003년 2월 치러지는 1차 시험 합격에 두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기본강의를 제대로 듣는 것을 포기하고 기출문제를 풀면서 지문을 가지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식으로 1차에 대비했습니다. 기출문제를 풀다보니 기본서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고,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의 경향을 파악하면서 자주 출제되는 부분을 우선적으로 공부하면서 효율을 높였습니다. 판례강의도 따로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이런 공부방법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2003년 1차의 판례 문제는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임했더니 평균 80점 정도를 맞았습니다. 합격점이 2점 부족해 떨어졌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시 1차 시험 공부를 하면 느슨해질 것 같아 2차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민법과 형법의 사례집을 사서 기본서와 병행했고 민사소송법은 테이프를 듣는 식으로 했습니다. 민법과 형법을 공부하면서 책을 이것저것 많이 사보고, 하자담보책임의 본질론 등 이론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집착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법에 대한 기초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공부했던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교수님들의 책을 한꺼번에 보아 혼란스러웠고, 한 문제에 골몰하다 보니 전체를 유기적으로 보고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진도도 잘 나가지 않고 그러면서 흥미를 잃었고 어느 정도 외출할 수 있게 되면서 공부를 등한시했습니다. ●이책 저책보다 한때 흥미 잃어 2003년 5월 말에 급성 장염에 걸려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한 과목씩 여러 번을 보기로 방향을 잡고 공부를 해나갔습니다.6월부터 방학 동안 후4법(형사소송법·민사소송법·상법·행정법)의 기본강의 테이프를 다 듣고, 기본3법(헌법·형법·민법)의 사례강의 테이프를 병행해서 훑는 식으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빠르게 여러 과목을 같이 듣다보니 학설이 대립하는 경우 비슷한 논리 구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각 과목마다 이해도가 높아지고 여러 과목을 종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훨씬 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학한 뒤 잠시 공부를 게을리하던 지난해 10월쯤 당장 올해 2월 1차 시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민법의 기본강의부터 1차 시험 대비를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테이프를 들으면서 한 달동안 기본강의를 소화해냈습니다. 목표를 올해 1·2차 동시합격으로 잡았기 때문에 후4법도 병행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김영식 선생님(45회 사법시험 차석)의 민사소송법 강의를 들었고, 이 때 책정리하는 방식이나 보충 교재 등 다른 책을 활용하는 방법 등에 관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2학기를 마치고 민사소송법 강의도 끝나고 나니 12월말이 되었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험이 두달도 남지 않은 상태여서 막막했습니다. 우선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 삭발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를 오후와 저녁 시간으로 나누어 두 과목씩 보았습니다. 집 근처의 독서실을 다니면서 거의 하루에 8시간 정도를 꼬박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 송두율·김홍신·이현세 칼럼 새해부터 싣습니다

    송두율·김홍신·이현세 칼럼 새해부터 싣습니다

    서울신문이 새해부터 특별 기명칼럼으로 ‘송두율 칼럼’ ‘김홍신의 세상보기’ ‘이현세의 만화경’을 신설합니다. ●2003년 한국사회에 뜨거운 이념과 사상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경계인’ 송두율 교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송두율 칼럼’을 월 2회 집필합니다. 송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21세기의 대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등 한반도 근현대사와 관련한 많은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소설가 김홍신씨가 월 1회 ‘김홍신의 세상보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상들을 날카로운 작가의 눈으로 분석합니다. 김씨는 건국대에서 국문학박사와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제15,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인간시장’ 등 다수의 소설과 시집 ‘한 잎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국민 만화가 이현세씨가 삽화를 곁들인 칼럼 ‘이현세의 만화경’으로 월 1회 독자와 만납니다. 이씨는 세종대 예체능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를 맡고 있습니다.‘천국의 신화’ ‘공포의 외인구단’ 등의 작품으로 노소와 계층을 가리지 않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왕성한 작품활동과 함께 후진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서울신문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네오콘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네오콘

    “지금 중국도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대비하고 있는데 유독 노무현 정부만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정권과 사랑하고 있다.”마이클 호로위츠 미국 허드슨 연구소 종교담당 선임연구원이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겨냥해 독설을 퍼부어 ‘네오콘’이 또한번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를 뜻하는 네오콘은 미국 패권주의와 북한 적대국가에 대한 강경노선을 추구한다.9·11 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지만 기본적인 노선에서 네오콘과 갈등을 겪을 소지를 안고 있다. 네오콘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해 한국의 정계 지도층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그들과 노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도 미국의 입장과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대외정책을 펴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네오콘이란 백과사전에 따르면 네오콘은 네오 콘서버티브(neo-conservatives)의 줄임말이다.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자들 또는 그러한 세력을 통틀어 일컫는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최대의 과제이자 목표로 삼는다.1980년대 초 레이건 정권에서 세력을 얻은 뒤 클린턴 정권에서는 권력에서 밀려났다가 공화당의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오로지 힘을 바탕으로 불량국가에 대한 선제공격 등을 감행함으로써 미국이 훨씬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부시 정권의 핵심 인물인 체니, 럼즈펠드, 울포위츠, 리비 등이다. 정계와 언론계는 물론 싱크탱크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유대인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네오콘의 기원과 활동, 주장 네오콘의 사상적 교조(敎祖)는 “야만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자연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철학자로 유대계인 스트라우스(Leo Strauss)다. 스트라우스의 사상적 후계자들은 미국과 서양문명을 구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힘의 사용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스트라우스 교수의 수제자는 앨럼 블룸 시카고대 교수로 1980년대 초 ‘미국 정신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좌익 학자들이 대학에서 냉전시대의 안보 개념을 흐려놓아 민주주의 국가들을 무너뜨리려는 적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나무랐다. 이러한 사상은 네오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기틀과 가치를 제공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싱크탱크요 네오콘의 결집지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라는 단체로 1997년 6월에 창립됐다. 신보수주의는 원래는 20세기 초 서유럽에서 진보주의에 대립하여 자유주의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정치적 신념체계를 지칭했다.1970년대에 나타난 신보수주의는 대체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미국제일주의, 평등화의 거부, 그리스도 부흥으로 요약된다. 네오콘은 냉전시대의 승리자요 세계 유일 초강국인 미국은 21세기를 미국의 원칙과 이상을 전파할 세계적 지도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세계 평화를 수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은 그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험이 도래하기 전에 이를 방지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여야 한다고도 한다. 따라서 국방비의 증액을 주장한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와의 유대를 강화해 비민주적인 국가를 견제할 것을 요구한다. 세계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를 권장하고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과 네오콘 네오콘과 결부지어서 생각할 문제가 이라크 전쟁과 한국의 파병이다. 네오콘을 등에 업은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선제 공격한 것은 미국의 힘을 과시하고 소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불량국가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재국가의 지도부를 교체해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파병은 어떻게 볼 것인가. 테러에 항전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와 주장을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정부도 고심했을 것이다. 파병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미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과 미국의 전통적인 관계와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병에 반대한 사람들은 정부의 파병 결정이 줏대 없는 종속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난한다. 나아가 김선일씨 피살 사건도 파병을 결정한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 침공을 자행하고 이라크 국민들을 끊없는 항전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부시와 네오콘 세력에 분노의 화살이 향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2004 결산] 사라진 별들-꽃은 졌으나 그 향기는 영원하리라

    세월은 정직하다. 그 어김없는 흐름에 올해에도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는 법. 그들이 남긴 지혜와 역정은 오롯이 남아 후세의 귀감이 된다. 현실이 실타래처럼 꼬일 때마다 그들의 부재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각부 종합 ■ 국내 ●정·관계 지난 9일 한국 외교계와 야당사에 큰 획을 그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과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가 나란히 타계해 세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 전 장관은 10여년 동안 한국 외교사의 주요 현장을 지킨 ‘외교사의 산 증인’으로 65년 한·일협정을 비롯, 베트남 파병 등 외교사의 길목에서 기틀을 다졌다.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6선을 거쳐 87년 신민당 총재로 정계 은퇴하기까지 정치 인생 40여년을 외곬으로 야당을 지켰다. 유도 10단으로 대한유도회장, 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던 5선 의원 출신의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관계 인사로는 장예준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을 비롯, 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한빈 전 부총리,98년 한은법 개정 뒤 첫 한은 총재에 부임해 외환위기 타개를 이끌었던 전철환 전 한은 총재, 내무부와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친 뒤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씨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밖에 5·16 직후 군정에 반대하다 군복을 벗은 원충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캐나다에서 생을 마감했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수사받던 안상영 전 부산시장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시절 인사·납품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 전남지사는 ‘자살’로 삶을 마감해 충격을 던졌다. ●재계 카지노의 대부로 불렸던 전낙원(77)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는 73년 국내 최초의 서울 워커힐호텔 외국인전용 카지노를 관광공사로부터 인수, 이를 기반으로 호텔과 면세점, 건설 등 관광·레저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파라다이스그룹을 일궈냈다. 대한산업그룹 창업주의 아들로 40여년간 대한전선을 중견그룹으로 키워낸 설원량(62) 대한전선 회장도 지난 3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박남규(83)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도 해체된 조양상선그룹의 재기를 보지 못하고 지난 2월26일 세상을 떴다. 또 장기하(72) 전 진로그룹회장은 9월에, 이은범(76) 전 범양사 사장은 5월에, 양회문(53) 대신증권 회장은 9월에 타개했다. ●사회·체육계 사회분야에서는 종군위안부로 고통을 겪은 김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김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머물며 종군위안부의 피해실태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원일한 전 연세대 재단이사와 설대위 전주예수병원 원장 등 두 사람의 미국인도 눈에 띈다. 원씨는 연세대와 YMCA를 설립한 언더우드가(家)의 3세이다. 미국 이름이 데이비드 존 실인 설씨는 전쟁 고아와 버림받은 노약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체육분야에서는 1970년대 씨름왕 김성률씨와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 이원우씨, 송만덕 한양대 배구감독 등이 많지 않은 나이에 부음을 알려 안타까움을 더했다.1935년 프로자격을 얻은 한국인 프로골퍼 1호로 국제대회 첫 출전과 국내대회 첫 우승 기록을 보유한 연덕춘씨도 타계했다. ●문화예술계 문화예술계에서는 우리 문학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해온 큰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남겼다. 연작시 ‘초토의 시’에서 한국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줬던 한국 시단의 원로 구상(85) 시인은 7개월여의 폐질환 투병 끝에 지난 5월11일 별세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다보탑’으로 친숙한 시조 시인 김상옥(84)은 부인 김정자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장례식 이틀만인 지난 10월31일 세상을 하직해 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의 애송시 ‘꽃’의 시인 김춘수(82)는 기도폐색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4개월간 투병을 벌이다 지난달 29일 끝내 타계했다.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과꽃’‘꽃밭에서’등 350여편의 주옥 같은 동시를 지은 아동문학가 어효선(79)도 지난 5월15일 소천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농부 작가 전우익(79)은 지난 1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등의 저서를 통해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의 소중함은 더욱 가치있게 다가온다. 1953년 출판사 ‘일조각’을 설립, 반세기 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 원로 한만년 대표도 ‘한국사신론’(이기백 저),‘고가연구’(양주동 저) 등 기념비적인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술계에서는 6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누빈 악역 스타이자 영화배우 독고영재의 부친인 원로배우 독고성(75)이 지난 4월10일 별세했다.‘빨간 마후라’를 작곡한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85)도 800여곡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재즈계, 타악 연주계의 거목인 김대환(71),‘오뚜기 인생’의 가수 겸 음반제작자 김상범((66),‘곡예사의 첫사랑’을 부른 가수 박경애(50)도 올해 우리가 떠나보낸 스타들이다. ●학계 올해 학계도 훌륭한 스승을 잃었다. 사학계에서는 동양사학계의 거목 고병익(80) 박사와 연세대 황원구(74) 교수가 5∼6월 잇따라 별세했다. 실증주의사관의 확립자로 불리는 국사학계의 태두 서강대 이기백(80) 교수도 6월 타계했다. 한글학회에서도 ‘한글지킴이’ 허웅(86) 한글학회 회장이 1월26일 눈을 감았고 지난달 21일에는 KBS 라디오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로 유명한 한글재단 한갑수(91) 이사장마저 세상을 떠났다. 진보사회과학계의 큰별 서울대 김진균(67) 교수도 2월14일 별세했다.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한 김 교수는 늘상 정권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그가 만든 산업사회연구회는 진보학술운동의 모태였다.‘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도 김 교수의 작품이다.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육각수이론을 창안해 ‘물박사’로 통했던 전무식(72) 박사와 한국 핵의학분야를 개척한 전 서울중앙병원장 이문호(82) 박사가 8월13일, 지난 5일 각각 별세했다. 또 전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84) 박사도 5월29일 타계했다. 화학야금학을 공부한 최 박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소장, 과기처 장관을 지내면서 과학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았다. ●종교계 올해 종교계는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세수 77)의 입적이 무엇보다 큰 뉴스였다. 지난달 30일 원적에 든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 낫한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으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진력해왔다.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세웠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가르침 속에 한국 불교 세계화에 일생을 바친 숭산 스님은 5만여 눈푸른 납자와 제자들을 뒀다. 기독교 쪽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지낸 조용술 목사가 지난달 15일 84세로 별세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신대를 나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재단이사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복음 전파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 국외 한 시대를 풍미한 지구촌의 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숱한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한줌의 흙이 됐으나 그들이 남긴 자취는 또렷하다. 올해 사라진 인물들을 되돌아본다. 야세르 아라파트(75) 35년간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이끈 중동의 풍운아. 이집트 태생으로 지난달 파리의 군병원에서 사망했다.59년 무장단체 ‘파타운동’을 설립했다.6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96년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 테러와 평화협상을 병행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부패와 개인축재 등의 의혹에 시달렸다. 그의 사망으로 중동의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로널드 레이건(93) 구두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B급 영화배우에서 미 40대 대통령(81∼89년)에 올랐다. 뛰어난 정치감각과 유머로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공급경제학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고 우주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스타워스’를 구상,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타계했다. 자크 데리다(74) 이성 중심의 전통적 서양철학에 반기를 든 ‘해체론’의 창시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로 10월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숨졌다. 언어의 명료성과 통일성이 아니라 다극적 의미를 강조,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반(反)철학’의 후계자로 평가된다. 레이 찰스(74) 노래로 미국 내 흑백통합을 이룬 흑인 솔 음악의 거장.7살 때 시력을 잃고 15살 때 고아가 됐으나 천부적인 자질로 13차례나 그래미상을 받았다.‘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8월 사망했다. 말론 브랜도(80) ‘대부’의 돈 콜리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워터프런트(50년)’와 ‘대부(73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두번째 상은 북미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차별정책에 항의해 거부했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51년)’,‘지옥의 묵시록(79)’ 등에서 열연했다.7월 타계. 크리스토퍼 리브(52) 가슴에 ‘S’자를 달고 붉은 망토를 걸친 불멸의 ‘슈퍼맨’.78년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슈퍼맨에 발탁된 뒤 83년까지 3차례 시리즈에 출연했다.95년 승마대회에서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재활치료 끝에 휠체어를 타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나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애인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다. 에스티 로더(97) 지난 4월 타계한 미 화장품업계의 여왕. 그가 창안한 ‘공짜샘플’과 ‘고급매장’ 전략은 20세기 모든 마케팅의 표본이 됐다. 부엌에서 만든 미용크림으로 46년 에스티 로더를 창업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현재 세계 130여개국에서 50억달러어치의 화장품을 판다. 프랜시스 크릭(88)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처음 발견한 영국의 생물학자. 지난 8월 결장암으로 미 샌디에이고에서 숨졌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을 밝힌 공로로 62년 노벨상을 탔다. 생명공학 산업의 기초를 일궈 다윈과 멘델에 견줄 만한 과학자로 평가된다. 이밖에 할리우드의 여배우로 ‘킹콩’의 페이 레이(96)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릴러 ‘사이코’에서 열연한 재닛 리(77)가 8월과 10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내전을 카메라에 담은 전설적 사진작가 앙리 브레송(96)은 8월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69)은 9월에 타계했다. 자신을 마담으로 부르도록 한 네덜란드의 여왕 줄리아나(94)는 1월에, 장징궈(蔣經國) 전 타이완 총통의 부인인 장팡량(蔣方良·88)은 지난 15일 사망했다. 1968년 북한에 피랍된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함장 로이드 부커(76)는 1월에 죽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창시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66)은 이스라엘의 헬기 공격으로 숨졌다. 의약업계의 황제 잭 에커드(91)와 이탈리아 자동차 왕국 피아트의 움베르토 아그넬리(69)는 5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 마하뜨마 간디의 도덕·정치 사상/라가반 이예르 엮음

    마하트마 간디는 참의 실현을 위해 몸으로 행동한 인도의 정치가이자 성자다. 그는 참의 실현이 단순한 말이나 글에 의해서도 아니고 무행위로 빠질 수 있는 명상이나 선정(禪定)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로지 민중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때문에 간디는 경전의 집필조차 거부했다. 스스로 고대의 위인과 감히 견줄 수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세상이 갈망하는 것은 경전이 아니라 성실한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디 사후 인도정부가 발간한 ‘간디전집’은 90권에 달할 만큼 방대하다. 이는 그가 인도는 물론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지에서 편지를 보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답장을 쓸 만큼 양심적이어서 하루 최고 70통의 편지를 40여년 동안이나 계속 보낸 데서 연유한다. 또 ‘인디언 오피니언’ ‘영 인디아’ ‘하리잔’ ‘나바지반’ 등 주간지에 매주 쓴 기사량도 엄청나다. 그는 또 많지는 않지만 ‘힌드 스와라즈’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타그라하’ ‘아슈람 실천 규율’ 등 몇권의 저서와 ‘바가바드 기타’ 등 건강 관련 소책자들도 썼다. 최근 발간된 ‘마하뜨마 간디의 도덕·정치 사상’(전6권, 라가반 이예르 엮음, 허우성 옮김, 소명출판 펴냄)은 90권의 간디전집 핵심내용을 뽑아 엮은 것이다. 그동안 국내에 자서전 등을 통해 간디의 말과 사상이 어느 정도 소개되기는 했지만, 이번에 나온 것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종합적으로 다룬 저작은 없었다. 총 6권으로 나온 이번 책들은 진리와 비폭력, 사랑에 대한 간디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생각, 비폭력과 사랑의 적용 사례집으로서 간디의 사상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각권 2만 1000∼3만 9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내인생의 등대] 권문용 강남구청장

    [내인생의 등대] 권문용 강남구청장

    권문용 강남구청장은 정부 각 분야에서 ‘성장’과 ‘분배’를 놓고 뚜렷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지방분권,4대 입법, 수도이전, 종합부동산세 신설 등 굵직굵직한 정부 정책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서구 선진국가들도 이런 사회적 갈등을 여러차례 경험했고 그때마다 진통을 겪었다.”며 60여년 전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하이예크의 저서 ‘노예로 가는 길’을 소개한다. 저서는 우리와 같은 이런 사회적 갈등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전체주의는 국민을 노예로 전락시킨다는 내용이다. 권 구청장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나서는 사람 때문에 세상이 지옥으로 바뀐다.”는 이 책의 경구(警句)를 자주 인용한다. 이는 이상과 현실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는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신설 움직임은 서울의 비싼 집에 사는 사람과 땅 부자들로부터 돈을 거둬 지방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그럴듯하고도 인기를 끌 만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라고 반문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종합부동산세는 큰 아파트로부터 받은 세금은 500억원에 불과한 데 반해 지방중소도시의 일반상가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은 6000억원에 달한다. 한마디로 어려운 지방에서 돈을 걷어 중앙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치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구청장으로서 작금의 우리사회는 ‘하이예크’가 우려한 그런 상황이 아닌지 걱정이다.”고 다시 이 책을 꺼내든 심경을 밝혔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여의도 IN] “과거 찌꺼기 털어버리자” 이철우, 여야의원에 책 선물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던 주인공인 이철우 의원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자신의 저서 ‘백두산 호랑이’이와 ‘한탄강에 서면 통일이 보인다’ 2권을 여야 의원들에게 선물했다. 이 의원은 직접 책을 포장하고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는 자필로 쓴 카드를 책갈피에 끼워 보냈다. 이 의원은 카드에서 “저무는 한 해 과거의 찌꺼기를 털어버리고 국민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면서 “서로 생각은 달라도 건전 경쟁으로 거듭나는 국회가 됐으면 좋겠다. 한나라당과 의원님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책 선물을 보내는 이유에 대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세상의 가치와 변화의 원리를 인정하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한다면 갈등과 대립은 극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백두산 호랑이’는 이 의원이 지난 1994년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투옥중일 때 당시 여섯살이던 딸에게 선물로 써보낸 편지 200여통에 실린 창작동화를 엮은 책이고 ‘한탄강에 서면 통일이 보인다’는 한탄강댐 반대 시민운동을 하면서 쓴 자서전이다.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모든 공직자들에 고함’

    국회의원을 지냈던 박석무(62)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공무원들에게 쓴소리를 하고 나섰다. 박 이사장은 13일 다산연구소 홈페이지(www.idasan.org)에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100회째 글로 ‘모든 공직자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박 이사장은 이 글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모든 꿈을 공직자들에게 걸었다.”면서 “공직자들만 청렴하면 깨끗한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고 소개했다. 또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서 대부분은 공직자들에게 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며 다산의 글을 인용했다. 박 이사장은 우선 “공직자에게는 ‘4지(四知)’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지는 내가 알고 있고, 네가 알며,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기 때문에 아무리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뇌물일지라도 반드시 들통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4외(四畏)’도 들었다. 공직자는 감독관청, 정부,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감독관청과 정부는 두려워하면서, 가장 무서운 백성과 하늘은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공직자들이 많다고 책망했다. 이와 함께 징계권을 지닌 공직자들에게 ‘4형(四刑)’을 역설했다. 하급관료가 죄를 지어 징계할 때에 네 가지로 구분하여 징계하라는 것이다. 백성들의 이해에 관한 일에 잘못을 저지르면 가장 무거운 형벌(上刑)을 내리고, 공사(公事)에는 중형(中刑)을, 관사(官事)에는 하형(下刑), 징계권자 본인의 일에 잘못을 저지르면 일체의 징계를 하지 말라고 권했다. 김용수기자 drago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조순 전 부총리는 한국의 ‘케인스(J.M.Keynes)’다. 아니다, 관악산 ‘산신령’이다. 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행을 거른 적이 없다. 또 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진짜 산신령’과 고난도의 선문답을 질펀하게 주고받는다. 북망산에 누워 있는 이태백과 두보가 놀라 깨어날 정도다. 그가 직접 지은 산시(山詩) 하나를 감상해 보자. ‘산위의 어긋어긋 늙은 소나무/꾸불꾸불 구름으로 용처럼 들어가네/평생의 친구라곤 새와 참새뿐/밤낮으로 의지하며 여름 겨울 보내누나’(山上參差列老松/入雲屈曲似蒼龍/巢枝鳥雀平生友/日夜相依過夏冬. 제목 두타산노송(頭陀山老松).2002년 8월23일 작.‘參差’는 ‘참치’로 읽는다.) 조 전 부총리는 제자들과 산행을 자주한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산신령’이라는 표현을 아무 거리낌없이 한다. 그는 오히려 즉흥시를 지어 화답까지 한다. 이래저래 지어놓은 산시(山詩)만 해도 수백편에 이른다. ‘산신령’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 그는 6공화국 시절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그때 자택인 서울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출근하곤 했다. 하루는 출입기자들과 함께 관악산을 올랐다. 그런데 산을 타는 모습이 마치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했다.30대의 젊은 기자들이 60대의 부총리를 뒤따르지 못했다. 그저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앞서갈 뿐이었다. 이를 본 누군가 ‘야, 산신령이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한시(漢詩) 실력은 중국에서도 알아줄 만큼 해박하다. 중국 방문 때 즉석에서 한시를 읊으며 일필휘지로 써내려가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선친한테 한문을 배웠다. 논어·맹자 등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는 요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회장직을 맡아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발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일성록’은 조선시대 정조임금부터 고종까지 임금이 직접 쓴 일기다.‘승정원일기’는 60년 사업이고 ‘일성록’은 30년 사업이다. 학계에서는 ‘일성록’이 발간되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본다. ●스테디셀러 ‘경제학원론’ 조 전 부총리는 딱딱한 경제얘기를 하지 말자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요즘의 화두가 ‘경제’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는가. 그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두로 꼽힌다. 그가 지은 ‘경제학원론’은 전공에 관계없이 대학생이면 누구나 일독할 정도로 대학가의 ‘스테디셀러’이다. 얼마 전에는 제자인 이정우 대통령정책기획위원장에게 ‘분배론’을 더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쓴소리를 던져 관심을 모았다. 서울 구기동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하얀 머리와 흰눈썹만 빼면 여전히 동안의 얼굴. 먼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의 관계를 물었다. “내가 교수 시절 그는 무척 똑똑한 대학생이었지. 그래서 ‘경제학원론’을 만들 때 다른 제자 5명과 함께 참여시켰어. 그는 인플레이션 부분을 맡았지. 숙제를 줬더니 아주 똑떨어지게 정리했더군.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3,4차례 만날 정도로 여전히 아끼는 후배지. 얼마전 언론에서 쓴소리 했다고 보도했는데 사실은 치켜세우려고 한 게 그렇게 됐어.” 현 정권의 경제운영에 대한 ‘고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있어야 해.”라고 했다. 이어 “386들은 (머리가)우수하나 경험이 적어. 그러다보니 자기들만 아는 이론이 바탕이 되고 있지. 결국 현실과 맞지 않게 되고 말아.”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도 실사구시야말로 (경제정책의)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겼다.”면서 “실사를 파악한 뒤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곧 국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어려움의 씨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며 경제난의 뿌리 깊은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386세대 머리 우수하나 경험 적어 걱정” “70년대 관치경제에 의해 공업화를 이루다보니 대기업 중심으로 성공을 거두었어. 그러나 이면에는 불균형성이란 이중구조가 생겨났지.80년대에 이를 치유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어. 중소기업은 잘 안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크게 일어난 시기였지. 결국 문민정부가 등장했으나 경제운영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어.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고 국제 경쟁력은 떨어지고.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았지.” 김대중 정권 때의 관치개혁도 들춰냈다. 즉 금융·노동 등 4대 공공부문을 개혁하면서 2년 만에 IMF를 극복했으나, 카드남발과 소비진작, 건설경기를 부추기는 등의 내수를 통한 성장정책의 실정을 꼬집었다. 결국 참여정부가 이를 고스란히 넘겨 받았지만 비슷한 관치개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닌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식 같은 경제운영, 예를 들어 동북아 중심 성장, 금융허브, 경제특구 등 과거의 방법을 답습 하다보니 실사구시는 여전히 뒷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경제는 오랜 지병처럼 일조일석에 낫지 않는다. 방법은 딱히 없으며 시일을 두고 치유해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과 기업의 사기를 올리고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원동력이 생겨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국민과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책임감을 통감하고 ‘좀더 잘해 보자.’는 사회적 운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부연했다.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 화제를 돌려 수능부정 사태 등 최근의 교육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기러기 아빠가 있는 나라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수능처럼)전국적으로 똑같은 기준을 정해도 (교육제도의)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경쟁이 없는 교육은 국가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며 대학마다 자율권을 많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익과 좌익 등 최근의 분열양상과 관련, 그는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을 예로 들었다. 남북분단과 좌·우익 투쟁의 역사성이 물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늘 분열의 소지가 많다는 것. “가급적 봉합하는 정책이 많이 나와야 해. 정책 입안자들은 말 한마디라도 조용하게 하고 분배 얘기는 될수록 꺼내지 말아야 돼.” 그는 1928년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에 유학자 조정재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9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는 1년여 동안 강릉농고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그 경력으로 그는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했다.51년에는 육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발탁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육사11기생들이 그의 첫 제자였다. 1957년 대위로 제대한 그는 경제학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11년 뒤 귀국, 서울상대 교수로 몸담았다. 이때 정운찬 현 서울대 총장, 좌승희·김승진 박사 등이 그의 제자로 몰리면서 ‘조순학파’라는 한국경제학계의 한 맥을 이루게 됐다. “산이란 춘하추동 언제나 고향이지. 좌우명? ‘도(道)를 밝혀 공(功)을 계산하지 말고, 바름(正)과 의리를 밝혀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이지.” 바둑 아마5단인 그는 최근 조훈현씨와 4점 접바둑을 두어 이겼다. 또 논어와 노자에 빠진 것도 즐거움 중 하나이다.24년째 봉천동에 살고 있는 그는 매일 아침 새벽 서울대까지 부인과 함께 산책을 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49년 서울대졸업 ▲67년 캘리포니아대 경제학박사 ▲68년 서울대상대 부교수 ▲70∼88년 서울대 경제학과교수 ▲81년 학술원회원 ▲92∼93년 한국은행총재 ▲93년 도산서원 원장 ▲95년 서울시장(초대민선) ▲97∼98년 한나라당 총재 ▲98∼2002년 15대국회의원 ▲2002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등으로 활약 ■ 주요저서 경제학원론, 한국경제의 현실과 진로, 중장기 경제개발 전략에 관한 연구,J.M. 케인즈, 화폐금융론, 한국경제의 이해, 조순 경제논평 등
  • 학문에 녹아든 세계화·정보화

    학문에 녹아든 세계화·정보화

    “산 끊기고 물 다하여 길 없는 줄 했더니(山窮水盡疑無路), 버들가지 그윽하고 꽃 밝은 또 한 마을 나오네(柳花明又一村)” (본문 63쪽) 귀 따갑도록 들어왔던 ‘세계화, 정보화의 시대 21세기’. 하지만 정작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대형 얼개그림이 나왔다.‘책으로 읽는 21세기’가 그 주인공이다. 철학, 역사학, 사회학에서 시작해 여성학과 NGO학을 거쳐 영화·광고·애니메이션학까지. 누구랄 것도 없이 쟁쟁한 소장학자 59명이 각 학문분과와 주요 저서에 대한 평가를 각각 19개,76개씩 썼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버들가지 그윽하고 꽃 밝은 마을’을 기쁘게 산책하면 된다. 너와 나를 나누어 갈등빚고 대립한 끝에 ‘산 끊기고 물 다 했던’ 것 같던 20세기적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지난해 4월부터 작업을 시작해 책을 출간한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말처럼 이 책은 “세계화와 정보화가 어떻게 각 학문 분야에 녹아들었는지”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시대 변화를 떠안으면서도 유행에 밀려 가지않는 중심잡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학문 분야가 섞이고 결합해야 한다. 20세기 인류학이 문화의 특수성을 긍정하는 데 치중했다면 21세기 인류학은 이제 외부와의 관계를 다뤄야 한다. 세계화·정보화의 영향으로 종속성의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도 있다. 실증주의에 파묻혀 있던 지리학은 축소된 공간의 구조변화에 맞춰 인간주의, 구조주의 사회이론을 접목시키고 있다.NGO학은 연대의 의미를 되새긴다. 전세계적 통합에 맞춰 개별 정부와의 전략적 동맹과 NGO들의 세계적 연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학은 정치사에서 사회사로, 그리고 다시 생활사로 넘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등 연결된 여러 학문들의 연구법이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다. 정치경제학은 안보중심의 비교정치론에서 벗어나고 있다. 경제적인 결합이 세계화인데다 냉전까지 붕괴했으니 아무래도 안보는 이제 뒷전이다. 체제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 체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을 따져야 한다. 한편 환경과학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재앙을 경고만 할 게 아니라 공동의 대책을 논의하는 학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총정리판이라 그런지 읽는 내내 숨고르기가 만만찮다. 또 한 편의 글이 200자 원고지 50장 분량쯤이다 보니 평소 관심있었던 주제에는 갈증이, 잘 몰랐던 주제에는 갑갑증이 인다. 원래 안내역이었으니 길잡이를 탓할 바는 아니다. 한 주제가 끝날 때마다 저자와 더 읽을 책을 소개해주는 친절함에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가 역사상 최근래에만 있었다는 전제가 깨진다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술발달은 여러 가능성을 만들 뿐 구체적인 방향은 제도와 정책,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몇몇 경제학자들은 아예 증기선과 전보가 고작이었던 19세기말이 경제적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지금보다 더 세계화되어 있었다는 실증연구자료를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일촌(又一村)을 지나면 또 다시 산 끊기고 물 다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3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다. 겨울 기운이 느껴진다. 술꾼들은 퇴근길에 소주잔을 걸치면서 화끈한 안주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여기에 아귀찜이 제격이다. 점심식사나 가족 회식에서도 인기다. 시뻘건 아귀찜에 밥을 비벼 먹거나 아삭아삭한 콩나물을 씹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이 글의 방향을 짐작했겠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본디 아귀는 ‘비료’ 정도로나 썼던 바닷물고기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흰살 생선, 즉 조기나 명태, 민어 등을 선호했다.‘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듯’ 못생긴 해물은 기피했다.‘몬도카네’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것 같지만 한국인들의 수산물관은 보수적이며, 선택과 집중을 선호하는 형식을 보여 왔다. ●못생긴 아귀 처음엔 안먹고 버려 뱀장어도 일본의 ‘우나기’에서 전이됐으며, 예전에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먹장어(꼼장어) 식용도 근래의 일. 복어도 독이 있어 다루기 까다롭다 하여 그대로 버렸다. 동해안 해장국의 별미인 토속어 ‘삼순이’도 아예 잡으려 들지 않았다. 남해안 어판장에 자주 등장하는 못생긴 물메기도 7∼8년 전까지는 잘 먹지 않다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갑자기 수요가 폭증했다. 아귀도 못생겼으니 당연히 먹지 않는 어류 반열에 속했다.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먹을 때면 덤으로 내주던 복국이나 아귀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아귀를 먹지 않아 전량 한국으로 수출한다는 점.‘아직’이란 단서에 유의할 것이, 김치의 매운맛에 길들여진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 서서히 아귀로 젓가락을 옮기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불도 징그럽다고 먹지 않다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음을 보면, 먹지 못하는 모든 해산물에 ‘아직’이란 단서를 붙여야 할 성싶다. 워낙 ‘원조타령’이 심한 사회이므로 아귀찜의 원조 역시 분간하기 어려우나 역시 마산이 아닐까. 마산 아귀찜과 군산 아귀찜이 쌍벽을 이루는 인상이지만 역시 원조는 마산 쪽이 맞는 것 같다. 마산에서는 아귀가 ‘아구’로 불린다.198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매스컴을 타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제한적으로 잡히던 아귀 물량이 딸리자 2∼3미에 18만∼25만원을 호가했다. 그러다 중국 수입산이 쏟아지면서부터 가격이 안정을 찾게 됐다. 예전에는 서민, 정확히 말하면 하층민 음식이었다.1000∼2000원에 한 마리를 사서 무를 넣고 푹 끓여 온 식구가 배불리 먹었다. 겨울의 속풀이거나 빈속을 채워 주는 고기였다. 아귀찜이 마산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는 한국전쟁이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아귀의 문화사적 배경이라고나 할까. 우선 마산이란 항구도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도시전문가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보한다. 뉴욕대 역사사회학 교수인 리처드 세넷이 ‘육체의 경험으로 풀어본 도시의 역사’란 부제가 달린 ‘살과 돌’(flesh and stone)에서 언급하였듯, 코를 자극한 냄새는 무엇이며,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차려 입는지, 언제 목욕을 했는지, 그러한 ‘도시의 육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항구도시들의 ‘육체’는 무엇일까. 역시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먹을거리다. 우리는 도시와 음식의 기질론 혹은 풍토론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어디 가면 어느 집의 무엇이 맛이 있다.’라는 식의 음식점 순례기가 우리의 지적 수준이다. ●‘매운 음식’·‘화끈한 기질’ 궁합 맞아 아귀찜도 항구도시의 기질 풍토를 교묘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마산의 살아 있는 육체라고나 할까. 맵고 강력한 아귀찜같이 기질이 강한 음식은 음식궁합으로 볼 때 ‘태양’에 속한다. 마산이란 도시의 육체에서 아귀찜은 궁합이 대단히 잘 맞는다. 마산 자체가 한마디로 ‘화끈’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대적 화끈함에 역사적 화끈함까지 가미돼 아귀찜 같은 먹을거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어느 항구치고 격동의 세월을 겪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마산항은 변화 정도가 극심했다. 대충 손꼽아 보아도 몽골족이 주축인 원나라의 군사적 요충지, 왜구들의 주요 침입로, 임진왜란의 전투지, 개항장, 일본인 집단거류지, 미군 군수물자 하역항,4·19와 부마항쟁의 진원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등 역사적 격변상만도 단숨에 세기 어려울 정도다. 규슈(九州)의 오랜 국제무역항 하카타(博多) 연안에는 장장 20㎞에 걸친 해안 성벽이 있다.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가마쿠라 시대에 쌓았다고 하여 일명 원구방루(元寇防壘)라고 부르니, 그 진원지가 바로 마산이다. 세기의 대격돌이 마산에서 시작된 것이니, 역사적·운명적으로 태생부터 국제적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4만 여원(麗元)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오늘의 마산인 합포를 출진기지로 삼았다. 규슈 북부 해안의 하카타만에 이르러 폭풍으로 말미암아 2회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때부터 합포가 남해를 아우르는 전략 요충지임이 내외에 알려졌다. 마산항의 본류인 마산포는 조용한 어촌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마산창이 설치되면서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번성하면서 수산물 반입이 활발해져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3대 수산물 집산항으로 손꼽혔다. 만기요람 재용편에 경상도 정기시장으로 오로지 창원 마산장 하나만을 들고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해안의 거제도와 통영·고성 등에서 잡힌 어류는 대개 마산항에 모였다. 구한말에 벌써 이곳에 30여호의 객상이 즐비했으니 그 번창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3대 수산물 집산항 명성 1899년에 개항하면서 1905년부터 일본집단촌(속칭 지바촌)이 건설된다. 경찰서·재판소·형무소 등이 설치되고, 시가지는 혼마치(本町)·교마치(京町) 등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옛 사진을 보면 게다짝을 끌고 돌아다니는 일본인들이 많이 보인다. 일본식 집이 즐비하다. 미곡 적출항으로서 정미업, 조면업, 인쇄업, 조선, 철공, 제빙, 방적, 기타 제조업이 모두 성했다. 빼어난 자연적 기후조건과 양질의 쌀, 맑은 물이 주류와 장류에 적합해 일찍부터 양조산업이 시작됐으니, 마산의 명물 무학소주나 몽고간장 등이 여기에서 비롯됐다.1개 항구도시에 양조장이 20곳이나 되던 곳은 마산뿐이었다. 해방이 되자 이곳에 거주하던 6000여명의 일본인이 모두 돌아갔고 2만여명의 동포가 귀국했다. 이런 ‘인구교체’ 역시 마산의 독특한 변수가 됐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후방 병참기지였다. 소개령으로 시민들이 떠난 마산의 거리는 온통 카키색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시가지가 온통 미군 일색이었고 마산 제1부두는 전쟁물자의 집산지였다. 한꺼번에 밀려온 피란민들로 전에 없던 특미가 생겨났다. 재래의 마산 특미라면 단연 ‘대구깡다구찜’과 ‘미더덕찜’이었다. 그물에 잡히면 재수없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아귀들이 구마산 선창가에 그대로 버려졌다. 그 아귀를 인근 농부들이 가져다가 비료로 사용했다. 이 천대받던 아귀가 피란민의 공짜 반찬거리로 변하면서 아귀를 말려서 각종 양념을 넣어만든 아귀찜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수입산이 아닌 자연산 아귀는 마산 근해에서 ‘고데구리’로 훑어온다. 해저 밑바닥을 기면서 사는 저서류라 불법 어획도구인 ‘고데구리’가 보편적으로 사용돼 왔고, 어찌 보면 맛있는 아귀를 다량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산 시내에는 아예 아귀찜 골목이 따로 있다. 아귀찜은 이곳에서 아귀찜집을 경영하는 김삼연(57)씨의 ‘초가할매집’에서 출발했다. 나이 스물에 시집와 38여년 동안 아귀찜만 만들었다.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기술을 이제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애초에는 두 집이었다. 과거에는 아귀를 무쳐 조림으로만 팔았다. 말린 아귀가 너무 딱딱해 여기에 콩나물을 푸짐하게 넣고 조선된장을 풀어 담백한 맛을 살려내고 여기에 맵싸한 고춧가루·콩나물이 궁합을 이뤄 오늘의 마산아귀찜이 탄생했다. 마산에서 다량 소비되면서 전국의 아귀가 마산항으로 모여들었다.‘아귀는 무조건 마산에 가야지만 팔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내장을 걷어내고 씻어서 태양볕에 20여일을 꼬득꼬득 말린다. 이때 1년치를 갈무리하는데, 겨울에 말려야지 여름에는 벌레가 생길 뿐더러 냄새가 나서 말리기가 적당하지 않다. 크기도 중간짜리라야 건조도 잘되고 살집이 말랑말랑해 먹기 좋다. 아귀는 탕, 수육, 해물볶음, 불고기전골, 불갈비, 해물찜 등으로 속속 조리법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중심은 아귀찜. ●아귀 뱃속엔 온갖 생선이 가득 마산 어시장의 터줏대감 격인 권철주 보현수산 대표의 말을 빌리면 “아귀는 정말 ‘아귀’처럼 처먹는다.”뱃속을 따보면 온갖 생선이 수북하게 쏟아져 나온다. 이런 ‘속것’이 너무 많아 김삼연씨는 아예 ‘아귀속젓’을 개발하기도 했다. 갈치 전갱이 꽁치 오징어 장어 돔 도다리 등 아귀의 반을 차지하는 이 ‘속것’들을 버리기 아까워 그걸 모아 젓갈을 담근 것. 그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이 젓갈이 바로 동의보감”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마산 아귀찜은 국물이 걸쭉한 서울 것과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 잘 말린 아귀 냄새, 비린내를 없애는 조선된장, 통통하지 않게 기른 콩나물에다 태양초를 빻아 쓰되 매운 것과 덜 매운 것을 섞어 쓰며, 여기에 마산명물인 ‘진동 미더덕’을 곁다리로 넣어 마산 아귀의 오미(五味)를 이뤄낸다.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눈을 맞혀야 제 맛이 든다는 말을 듣자니, 진부령 황태가 여느 북어와 맛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아귀찜 하나의 문화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도 많은 지면이 필요하니, 우리 해산물 모두를 설명하자면 ‘천일야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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