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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이 ‘남침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옛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에 따라 북한을 부추겨 남한의 무력통일을 획책했다는 주장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학설이 ‘북침설’이다. 미국이 한국을 조종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중간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남침유도설’이다. 대체로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다. 냉전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는 분분한 학설을 일거에 정리하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주고받은 대화록과 편지가 담긴 극비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서방세계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의 남침설은 다시 뒤집히기 어려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는 누구일까. 전쟁의 주체는 남침설과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어느 학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침설은 스탈린의 김일성 사주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모설, 마오쩌둥 주도설 등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은 대체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전쟁발발의 공동주체로 본다.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해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국내적 요인보다,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은 결론이다. ●스탈린·마오쩌둥 한국전 공동주체 북침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본다. ‘김일성 저작집’ 제6권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 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해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km 침공하였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지금은 북한주민들만 그렇게 믿는다. 중국군이 펴낸 책자에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8도 선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소규모 무장충돌과 마찰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내전으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초기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미군 등 유엔군 참전과 중국의 개입 이후를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한때 수정주의 이론이 득세했다.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5년 해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이데올로기로 나뉜 불완전한 해방의 연장 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옆에서 전쟁결정 과정을 지켜봤던 후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밝혔지만, CIA 공작설을 거론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주의 이론은 러시아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돼 세상에 공개되자 설득력을 잃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각본을 썼고, 스탈린이 연출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저돌적인 전쟁공세에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밑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전쟁을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군사고문단을 보내 전쟁준비부터 휴전까지 직접 챙겼다. 1953년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휴전협정 조인은 더 미뤄졌을 것이고 꽃다운 생명의 희생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김일성은 꼭두각시”… 평가절하 러시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둥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절하된 감이 있다. 갑자기 압록강 국경을 넘어 나타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38선 이남까지 밀려난 정도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이 전쟁발발을 선창했다면, 스탈린은 총연출을 맡았다. 주역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측면에서 조종했고, 참전을 선택했고, 치렀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압록강 국경까지 진군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공군이었고, 휴전협정의 관장자도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의 당당한 주연배우로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이 38선 분할통치에 합의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면 미군을 끌어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중국해방군은 예외라고 판단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참전을 이끌어낸 김일성의 역할도 무시할 순 없다. 주지안룽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김일성은 온 힘을 기울여 소국의 지혜로 대국의 지도자를 움직이게 하는 일류의 연기를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말과 중국말에 능했던 김일성은 양국 수뇌와 외교관 사이를 오가면서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 카드’를 내밀고, 마오쩌둥에게는 ‘스탈린 카드’로 말을 바꾸는 절묘한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마오쩌둥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전쟁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분명히 김일성이었다. 다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950년 10월 19일 이전까지 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북한의 군비 요청 사항 중 90% 이상을 지원했다. 1950년 6월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적 주력부대는 서울 근방에서 괴멸되고 서울과 춘천, 강릉이 동시 점령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한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크렘린에 보고했다.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개시일과 전황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8월20일쯤에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영토의 90%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서울의 총사령부에 상주토록 조치했다. ●기고만장해진 北, 中 홀대 스탈린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8월25일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해방투쟁에 찬사를 바친다. 미군개입으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지원할 맹우들이 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종사를 지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 김일성은 용기백배해 다음날 노동당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북한지도부는 ‘친애하는 동지 스탈린의 아버지와 같은 심려와 지원이 조선인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공식 회답문을 채택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9월21일 ‘소련군 제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 야크-9형 40기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소련 조종사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군에게 숨길 수는 없다. 공중전에서 행해지는 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에 불과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인 성공은 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꿔 놓았다. 인민군과 소련군사고문단은 이 작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국은 서방 측 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상륙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문책해 스티코프 대사를 경질했다. 인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9월29일 ‘적이 38선을 넘을 때 대비해 소련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라며 보병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중국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스탈린은 10월13일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부대 및 병기를 대피할 필요가 있다.’라는 절망의 통첩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라는 사실이 러시아 비밀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미국이 한국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갖춘다는 게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정말 염려했던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미군의 전투력이 일본군 이하이므로 우리가 이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美·中·소련 관심대상은 日 스탈린은 패색이 짙어진 10월8일자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을 막으려면 중국의 참전이 필요한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를 보면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을 원조할 수 없다. 중국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의 동맹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나는 미래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이승만 치하의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에 대한 전진기지가 될 수년 후보다 지금이 유리하다.’라고 썼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점령국 일본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판단오류 중 하나였던 ‘중국 불개입론’은 그의 신념이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맥아더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기간에 파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중공군의 개입시기를 앞당겼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다시 유월이다. 60년 전 한반도를 선혈로 물들였던 한국전쟁 발발의 막전막후에서 남북한, 미국과 옛 소련 그리고 공산화된 중국 간의 이합집산과 동상이몽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던 바로 그 여름이다. 일갑자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전쟁의 두 당사국과 주변 4강이 편을 갈라 맞서고 있는 풍경의 흑백판이다. 한국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와 원인 그리고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주변 4강의 지정학적 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신문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발굴을 통해 전쟁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려고 시도했다. 문서 속에는 한국전쟁의 총연출자인 스탈린과 동조자이자 막후 조종자였던 마오쩌둥, 각본을 썼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노렸던 적화통일의 염원이 빛바랜 엽서처럼 남아 있다. 1949년 3월5일은 김일성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정부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았기 때문이다. 소련군 장교출신의 풋내기 김일성이 절대적 독재자에게 첫선을 보인 날이다. 김일성으로서는 우상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과 지원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 비밀문서는 겉으로는 경제협력, 문화교류 확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소련의 군사 및 군비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월4일 평양에서 외무성에 보낸 전문 중에는 ‘2월3일 남조선 경비대가 38선을 넘어와 북한 경비대와 교전 끝에 격퇴됐다. ’는 내용의 문서가 있다. 4월20일 소련 국방상이 스탈린에게 보낸 38선 상황에 대한 극비보고서에서도 ‘남한의 38선 침범행위는 도발적이며 체계적이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모두 37건의 침범사례가 있었다. 발포는 남한이 시작했다. 남한군의 38선 집결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회담을 전후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46년 대구폭동과 1948년 제주 무장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으로부터 한숨을 돌린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부근에 국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했으며 시중에는 ‘8월 북벌론’이 팽배해 있었다.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얼마나 있으며, 남한군의 규모와 남한군을 두려워하는지 여부, 희망하는 차관액수 등등에 대해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일성은 2만명의 미군이 있으며, 남한 군대는 6만명이고, 남한군보다 북한군이 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스탈린은 빨치산의 남한 군부 침투를 주문했으며 동석한 박헌영은 ‘침투를 시켰지만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38선 충돌상황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또 ‘김일성, 박헌영 둘 다 전보다 살이 많이 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46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실을 염두에 둔 얘기다. 이후 스탈린은 ‘ 첫째, 북한군은 남한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며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남한에 있는 미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 셋째, 38선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이 유효하다.’는 이른바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전쟁의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데뷔는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스탈린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항일 유격전에서 일본군이 가장 체포하고 싶어 하는 게릴라 지휘관 출신이었다. 1942년 소련군에 입대해 1945년 평양에 지도자로 나타났을 때 적군 군복에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중국보다 소련을 후원자로 선택한 스탈린 추종자였다. 그는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실한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파헤친 최신작 ‘콜디스트 윈터’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을 좋아한 이유를 ‘김일성의 지도력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당연했다. 다소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미화시킨 다음 권좌에 앉히면 그만.’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마오쩌둥에게 빌붙기 전까지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김일성은 평양주재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구워삶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는 남한의 북침 가능성이 크며, 북의 준비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 전문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보냈다. 스탈린은 이 같은 스티코프의 언동에 대해 경고장을 보냈을 정도다. 스탈린은 북한의 선제공격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유발할지 모른다면서 몸을 사렸다.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전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는 경우밖에는 없다.’라며 남한이 공격해 올 때까지 자제토록 지시했다. 김일성의 다음 행로는 마오쩌둥 설득에 맞춰졌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한 다음 날 소련과, 나흘 뒤 북한과 각각 국교를 맺었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을 보내 원조의사를 떠봤다. 베이징 지도자의 답은 ’선제공격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필요하면 중국군 조선인 사단 2개를 지원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검은 머리이니까 중국 해방군인지 북한 인민군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라는 희망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이때만 해도 김일성은 신생 중국을 얕봤다. 소련에 매달렸고, 중국의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전쟁을 통해 입지를 다지려던 김일성은 끈질겼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났다. 마오쩌둥의 개입 의사를 전해 들은 스탈린의 마음도 움직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나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20만명의 공산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북한을 지지할 것’이라고 허풍을 쳤다. 스탈린은 마침내 ‘북한군을 38선에 집결시키고서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의할 것, 남한이 거부하면 옹진반도를 점령하되 남한이 반격하면 전선의 폭을 넓혀 나간다.’는 이른바 ‘3단계 작전지침’을 제시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AV토르쿠노프 총장은 저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서 “전면전 허용은 아니었다.”라고 분석했지만 김일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뜸을 들일 의사가 없었다. 마오쩌둥도 합류했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국도 북한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기본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16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석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만났다. 그 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혁명에 성공한 영웅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숱한 공산주의 국가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스탈린의 고희연에 참석, 장기집권을 축하하도록 초대받았을 뿐이었다. 두 공산주의 국가 거목 사이에는 불화가 싹트고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고마워하는 단일 공산국가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또한 일본에 맞설 정도로 강해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일본 동양학원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중국의 참전이유를 ‘첫째, 미국 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을 대중국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둘째, 한반도 개입이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셋째, 미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군하면 중국 동북지역이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전문가인 선즈화 화동사범대 교수는 ‘미국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미·중대결의 전장으로 한반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본토 원자폭탄투하설을 입에 올린 맥아더 장군의 쇼맨십도 마오쩌둥의 참전의지에 불을 붙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깎아내렸다. 인도의 네루 수상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1000만~2000만명의 인명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공산진영 세 나라 지도자의 성격과 품계가 잘 나타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평양주재 대사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김일성에게 문서를 읽어주고 나서 베껴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문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 문서의 서두는 스탈린의 암호명인 ‘필리포프 동지’로 시작했고, ‘귀하의 검토와 의견을 바란다.’라고 마무리했다. 또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모택동’이라고 썼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국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휴전교섭 지침을 스탈린에게 의뢰한 1951년 6월30일자 전보에서 마오쩌둥은 ‘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도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 귀하가 김일성과 접촉하고 나서 나에게도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썼다. 의례적인 칭송은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은 물론 김일성과 공산진영에서 ‘무시 못할 둘째 형’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줄기차게 주장한 ‘남침공격’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결국 허락했지만 상호 담보를 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베이징 지도자의 지원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1950년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베이징 장도에 올랐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진영 3자의 전쟁 합의는 이날 성사됐고, 한국전쟁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감정으로 엿보는 지구의 미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의 이 말 한마디는 서구 근대인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기에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기에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신(神)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설파했다는 사실은 서구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 수학과 물리학, 경제학 같은 학문이 발전한 게 바로 이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됐던 까닭이다. 국제정치학이라고 다를까. 인간 개개인으로 구성된 국가는 철저히 합리적이고, 철저한 계산을 통해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식의 전제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미국이 중동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석유’ 자원에 대한 상대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계산된 행동이라는 주장도 이런 식의 합리적 선택론을 전제한다. 하지만 곱씹어 보자. 과연 우리는 합리적으로만 선택하는 존재일까. 오히려 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릴 때가 많지 않은가. 프랑스 국제문제연구소 연구고문인 도미니크 모이시의 저서 ‘감정의 지정학’(랜덤하우스 펴냄)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국제정치학과 지정학에서도 감정은 여전히 의사결정 과정에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다만 이성에 밀려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을 뿐. 모이시는 아시아는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희망’의 감정을, 이슬람은 역사적 몰락과 쇠퇴에 대한 두려움으로 ‘굴욕’의 감정을, 서구는 도전하는 아시아와 이슬람의 위협에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이른바 ‘감정이 폭발하는 세계’가 돼 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감정은 국가 혹은 지역의 흐름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분석 방식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유사하다. 하지만 헌팅턴이 아시아와 이슬람 문명 환경 속 서구 문명의 딜레마를 묘사하며 ‘문명’이라는 합리적 근거를 제시했다면, 저자는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충돌’을 설파한다. 합리성 중심의 전통적인 연구 흐름에 충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1만 3000원.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북한연구자 서동만을 추모하다

    지난해 폐암으로 사망한 서동만(1956~2009) 상지대 교수를 기념하는 책이 나왔다. 서동만 저작집 간행위원회가 고인의 주요 논문과 잡지 기고 글 등을 모은 ‘북조선 연구-서동만 저작집’(창비 펴냄)과 유족 중심의 서동만 추모집 발간위원회가 지인 52명의 추모글을 모아 낸 ‘서동만, 죽은 건 네가 아니다’(삶과 꿈 펴냄)이다. 일급 북한 연구자로 꼽히는 고인은 ‘내재적 접근론자’다. 송두율과 동의어처럼 돼 버린 내재적 접근법은 색깔 공세의 좋은 먹잇감이다. 그런데 원래 내재적 접근법은 그런 이론이 아니다. 어떤 사회를 평가하려면 그 사회의 논리와 잣대를 들이대자는 것인데, 색깔론자들은 ‘평가하려면’을 ‘찬양하려면’으로 바꾼 뒤 ‘칼질’했다. 실제 내재적 접근법을 제일 처음 적용한 저작은 E H 카의 1950년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였다. 저 유명한 ‘역사란 무엇인가’는 러시아 연구자인 카가 역사철학 문제를 언급한, 일종의 ‘외도 저서’다. 공산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논리로 평가할 수는 없으니, 소련이 얼마나 공산주의 원칙에 충실한지 자체 논리로 어디 한번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송두율의 문제점은 내재적 접근법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실증적 연구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고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지점이다. 일본에서 발굴한 각종 북한 관련 1차 사료를 정밀하게 분석, 가공해 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지도 아래 쓴 박사논문을 손봐 2005년 출간한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은 학계에서 최고의 북한 연구서라 평가받았다. 한국전쟁 뒤 북한이 지금의 북한과는 다른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런 움직임이 패배했다는 게 책의 논지다. 현재의 기괴한 북한 사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규명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비판하는 것이니 가장 뼈아픈 비판인 셈이다. 2003년 당시 서 교수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임명하는 문제를 두고 색깔론이 횡행할 때 보수 일간지 논객(권영빈 중앙일보 당시 편집인)마저 “저작을 검토해 보니 친북좌파라는 비난은 얼토당토않다.”며 “‘서동만은 빨갱이’라고 누군가 잘못 짖으니 너도나도 짖다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우리 사회의 무분별이 이렇게 개판인가.”라고 탄식했다. ‘서동만을 아는가’라는 제목의 이 칼럼은 추모집에도 실렸다. 고인은 다만 북한에 대한 비판과 북한에 대한 공격을 엄격히 구분했을 뿐이다. ‘북조선 연구’ 2만 9000원, ‘서동만’ 2만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CEO 칼럼]미래에 대한 책임/홍기준 한화케미칼 사장

    [CEO 칼럼]미래에 대한 책임/홍기준 한화케미칼 사장

    지난 100여년간 인류의 삶 전반을 지탱해주던 석유가 바닥나면 과연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바뀔까. 석유 생산량이 일정한 시점에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부터 급격한 공급 부족을 겪을 것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석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의 격주간지 포브스의 수석기자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는 ‘석유종말시계’라는 책에서 유가가 싼 상황을 등에 업고 발달한 현재의 우리 생활은 석유 고갈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항공 산업이 쇠퇴하고 기차가 주요 운송수단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자동차의 개념도 완전히 바뀌어 전기차가 대세를 이루고, 자동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것으로 봤다. 자동차의 도움으로 교외로 확대됐던 도시 공간도 다시 도심으로 축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대형 마트는 사라지고 지역의 소규모 가게들이 힘을 얻고, 글로벌화 측면에서는 다시 소규모의 지역주의로 바뀔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변화가 우리의 행복을 축소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더 많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몸을 더 많이 움직이게 돼 예전보다 더 건강해질 수도 있다. 지역사회에서 사람 간 친밀감은 더해져 참여하는 문화 생활의 기회가 확대될 것이다. 그나마 이같은 미래상을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체계가 가동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평범한 27세의 미국 청년 빌은 4층 건물에 살고 있다. 이 건물은 사실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낡은 건물이지만 곳곳에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온수와 전기의 절반은 이 건물의 지붕과 위쪽 벽에 설치된 태양전지판으로부터 얻는다….” 사실 이 같은 미래 전망과 상상은 이제 책이나 영화 속에서만 그려지는 모습이 아니다. 고갈되고 있는 기존 에너지를 대체할 분야에 대한 투자가 세계적으로 활발히 진행되면서 태양광과 풍력, 조력 등 신재생에너지가 우리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태양광의 경우 독일과 이탈리아, 체코 등 유럽을 중심으로 미래 에너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독일은 말 그대로 태양광 발전의 ‘열풍’ 지역이라고 할 수 있하다. 2009년 말 기준으로 전세계 태양광 발전설비 중 49.2%가 독일에 집중돼 있다. 독일에서는 태양전지판을 마당에 세운 가정집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도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해 신재생에너지 찾기에 나서고 있다. 오일산업에서 탈피해 산업 다변화를 꾀하고 태양광 등을 신성장동력 산업의 하나로 집중 육성하려는 것이다. 우리 에너지기업들도 미래를 위해 신재생에너지 사업 중 전력생산 사업인 태양광과 전력저장 사업인 중대형 2차전지 관련 사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런 신사업들은 각 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사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또 이같은 투자는 일개 기업 차원의 수익성 사업이라기보다 미래에 대비해 현재 세대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다. 리처드 하인버그는 그의 저서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앞으로 수십 년간 인류의 중심적 생존 과제는 화석 연료의 사용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가능한 한 평화롭고 공평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소비하기만 한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책임지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는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현 세대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같은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업들의 분발이 더 요구되고 있다.
  • 서프라이즈, ‘몽스천사’의 진위여부 파헤쳐

    서프라이즈, ‘몽스천사’의 진위여부 파헤쳐

    30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몽스 마을에 나타난 ‘몽스천사’를 다뤘다.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8월 14일 밤, 벨기에 몽스마을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무기 등 모든 면에서 독일군을 이길 수 없었지만 몽스지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이에 영국군은 죽을 각오로 모든 힘을 다해 싸웠지만 존 프렌지 장군의 퇴각명령을 받고 퇴각하던 중 뒤쫓아 오던 독일군에게 포위당했다. 영국군은 몰살위기에 처했고 승리는 불가능해보였다.이때 영국군은 하늘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하늘에 천사 형상이 나타난 것.천사가 나타나고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겼다. 천사를 함께 본 독일군은 특별한 외상없이 죽었고 이 틈을 타 독일군에게 수적으로 열세했던 영국군이 독일군을 전멸시켜 전투에서 승리했다.영국군은 하늘에 나타난 천사가 과거 위기에 빠진 영국을 구한 수호 성인 세인트 조지라고 생각해 절대 이길 수 없었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이 천사를 ‘몽스천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후 ‘몽스천사’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졌다. 먼저 1914년 아서 메이첸 저서 ‘사수들’이라는 소설이 실제 몽스전투와 비슷해 영국작가 케빈 맥클루어가 “몽스천사는 꾸며낸 이야기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몽스전투 이후에 쓰여진 소설이다.또 다른 주장은 독일군이 만든 기상천외한 신무기로 천사의 형상을 만들어냈다고 했지만 이는 그 당시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투로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 때문에 만들어낸 집단히스테리의 산물이라는 영국 심리학자의 주장이 있지만 이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마지막으로 천사의 형상이 야광군이라는 영국작가 데이비스 클라크의 주장이 있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이에 따라 전투의 승패마저 바꾸어놓은 ‘몽스천사’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사진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방송 캡처서울신문NTN 강서정 인턴기자 sacredmoo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인영, 신곡 티저서 직접 머리카락 잘라 ‘눈길’

    서인영, 신곡 티저서 직접 머리카락 잘라 ‘눈길’

    서인영이 신곡 뮤직비디오 티저영상을 공개하며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서인영은 26일 스페셜 미니앨범 ‘러블리’(Lov-Elly)의 타이틀곡 ‘사랑이라 쓰고, 아픔이라 부른다’의 뮤직비디오 티저영상을 공개했다. 공개된 뮤직비디오 티저영상에서 서인영은 그동안 보여줬던 섹시 댄스가수의 이미지가 아닌 폭발적인 가창력과 발라드 타이틀에 맞춘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서인영이 직접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며 촬영에 임했다. 또 곡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6Kg의 체중감량까지 감행하며 노력했다는 후문이다. 서인영의 신보는 오는 6월1일 온·오프라인을 통해 동시 발매된다. 사진 = 티저영상 캡처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지동설’ 코페르니쿠스 두번째 장례식

    ‘지동설’ 코페르니쿠스 두번째 장례식

    지동설을 주창한 16세기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유해가 22일(현지시간) 폴란드 동북부 프롬보르크 대성당에 사망한 지 5세기 만에 최고의 예우를 갖춰 ‘영웅’으로 재안장됐다. 대성당 측은 코페르니쿠스의 사망 467주기 다음날이자 대성당 창립 750주년인 이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탄압에 대한 유감도 표시했다. 또 폴란드 국민들은 코페르니쿠스를 국민영웅으로 칭송하는 추모행사를 갖기도 했다. 새로 세워진 검은 화강암의 묘비에는 지동설을 표시하는 태양계의 도형을 새겨 넣었다 천문학자·수학자이며 가톨릭 성직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던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묻혔다. 이후 폴란드와 스웨덴 공동연구진은 2005년 묘지에서 발굴한 부러진 코와 왼쪽 눈 위 흉터, 치아를 비롯해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한 책에서 나온 두 올의 머리카락 등의 DNA검사를 통해 유해를 확인했다. 또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와도 대조했다. 요제프 지친스키 루블린 대주교는 재매장 예식을 집전하는 강론에서 “가톨릭 수호자라고 지칭한 이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규탄하면서 취한 지나친 조치”에 대해 비판했다. 바티칸 교황청은 지동설의 논리를 담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간된 지 반세기도 더 지난 1616년 배교적 저술로 규정, 금서목록으로 지정했다가 1835년에 들어서야 삭제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현장법사, 정체가 뭐요?

    현장법사, 정체가 뭐요?

    역사 속 현장 법사는 소설처럼 어리버리하지도 않았고, 소설처럼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같은 제자들도 없었다. 오로지 부처의 법을 접하고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 낯선 문명을 접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앞세웠을 뿐이다. 1400년 전 현장 법사가 떨치고 나선 그 길 위로 19년의 시간이 흘러갔고, 10만리가 넘는 여정이 쌓였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그렇게 완성됐다. 해학과 풍자에 방점을 찍은 소설 서유기와는 다르지만, 현장 법사의 긴 여정에는 오디세우스의 파란만장한 모험도, 마르코 폴로가 둘러본 동양의 낯선 문물 소개도, 천로역정의 진지한 구도 모습도 훌쩍 뛰어넘는 재미와 감동, 정보가 담겨 있다. #장면 1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기 일쑤다. 부처의 법을 구하러 가는 길을 방해하려는 괴물과 현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자주 보여준다. 말솜씨도 별로 없고 그저 긴고아(緊?兒·손오공의 머리테)를 옥죄기 위한 긴고주나 줄줄 외는 정도다. 괴물들을 물리치려는 손오공에게 오히려 “또 살생의 업을 끊지 못했구나.”하는 한가한 소리나 읊조리다가 화를 자초하곤 한다. 수백 년을 이어오는 동양의 판타지 소설 ‘서유기’ 속 칠칠맞지 못한 현장(삼장) 법사다. #장면 2 펄펄 피 끓는 스물 일곱의 청년이다. 떠나야 한다. 천축국(인도)으로 가서 부처의 참된 경전을 구해 배우고 싶다. 서역의 낯선 세상도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 갓 세워진 당(唐)은 병역에 충당할 장정의 유출을 막기 위해 ‘국경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제법 이름 짜한 고승이건만 과소(過所·요즘날의 여권) 발급도 해 주지 않았다. 아무튼 떠나자.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뜀박질, 등산, 승마 등 체력 훈련도 했다. 여기에 뙤약볕의 사막을 건너야 할 테니 물 적게 마시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떠났건만 지명수배령이 떨어졌고, 목숨을 위협하는 도적 떼도 만났고, 단식 농성도 불사해야 했고, 얼음산 위에서 숙식해야 했으며, 인도 경전 토론대회에서는 조국을 조롱하는 수십 명의 승려들과 맞서 완승을 거두는 등 토론의 달인 면모도 보여줬다. 훗날 동서고금에 명성을 남긴 현장(玄?) 법사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현장 법사의 실제 모습을 조명한 책이 잇따라 나왔다. ‘현장 서유기’(첸원중 지음, 임홍빈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와 ‘현장 법사’(샐리 하비 리긴스 지음, 신소연·김민구 옮김, 민음사 펴냄)다. ‘현장 서유기’는 중국 상하이 푸단대 첸원중(錢文忠) 교수가 CCTV의 인기 학술프로그램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 방송한 36차례 강좌를 엮어 책으로 낸 것이다. 첸 교수는 주요 텍스트인 ‘대당서역기’와 함께 ‘대자은사 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 속에 기록된 현장 법사의 ‘서유기’도 소설 서유기 못지않게 얼마든지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또 다른 책, ‘현장 법사’는 서구의 눈에 비친 탐험가 현장 법사의 매력에 집중한다. 구도자이자 탐험가인 현장 법사의 매력에 흠뻑 빠진 미국 여성 리긴스가 그의 여정을 직접 되밟으며 썼다. 관련된 기록과 함께 불교 미술, 건축 조각물 등을 소개한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대불을 파괴할 때도, 첼리스트 요요마가 실크로드를 형상화시켜 연주할 때도 그 자체를 넘어 현장 법사의 행적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커져만 갔다. 아시아 전문가인 리긴스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현장 법사와 정신적 교감을 나눈다. 그 결과물로서 일정을 세분화한 지도를 실었고, 현장 법사의 여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담았다. 직접 발로 써낸 저서인 만큼 현재적 느낌으로 읽기에 편하다. 현장 법사가 지나온 10만리 여정이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인도, 네팔, 티벳 등 수십 개 나라의 지리, 풍물, 문화 등의 소중한 기록 보고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길을 떠나기 전 현장 법사의 가장 큰 위협은 당 태종이었다. 하지만 먼 길을 다녀온 뒤 태종은 그의 가장 큰 후원자가 돼 있었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 어느 책을 집어 들어도 재미있고, 현장 법사의 진면모를 확인하기에 나쁘지 않다. ‘현장 서유기’ 3만 5000원, ‘현장 법사’ 2만 3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인혜 “엄친딸 되려면 나처럼 공부하세요”

    이인혜 “엄친딸 되려면 나처럼 공부하세요”

    ’엄친딸’ 이인혜가 자신만의 공부 비법을 공개했다. 배우 이인혜는 2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의 한 갤러리에서 저서 ‘이인혜의 꿈이 무엇이든 공부가 기본이다!’ 출간기념회를 가졌다. 지난 6개월간 공부 비법책 출간을 준비해 온 이인혜는 고등학교 내신 1등급, 고려대학교 수시 합격, 최연소 연예인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연예계의 대표 ‘엄친딸’이다. 이날 이인혜는 “공부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자리라 무척 떨리지만 온 힘을 다해 쓴 책인 만큼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길 바란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인혜는 이 책에서 동일한 시간에 더 큰 능률을 얻는 비법과 자투리 시간 활용으로 목표를 이루는 노하우를 공개한다. 또 자신의 성격에 맞는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아 적용하는 ‘공부 스타일링’비법 또한 알려줄 예정이다. 한편 대학 교수 겸 고려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인혜는 현재 오는 6월 19일 첫 방송되는 KBS 2TV 주말 드라마 ‘전우’를 촬영 중이다. 서울신문NTN 오영경 인턴기자 oh@seoulntn.com / 사진 = 한윤종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美·佛 영부인 ‘섹스 토크’

    │워싱턴 김균미특파원│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카를라 브루니 여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를 만났을 때 대뜸 ‘섹스’ 얘기를 꺼내 미셸 여사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선임 편집자인 조너선 앨터는 오는 18일 발매되는 ‘약속: 오바마 대통령, 집권 첫해’라는 저서에서 미국과 프랑스 퍼스트레이디 간에 흔치 않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고 CNN방송 등이 12일 보도했다. CNN이 입수한 책의 내용에 따르면 브루니 여사가 한번은 미셸 여사와 만났을 때 “남편(사르코지 대통령)과 섹스를 마치느라고 외국 정상을 기다리게 한 적이 있다.”면서 “혹시 미셸 여사는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이유로 외국 정상을 기다리게 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미셸 여사는 예기치 않은 질문에 신경질적인 웃음을 지으며 단호하게 “노(NO)”라고 답했다. 책에는 브루니 여사가 남편의 바쁜 일정 때문에 충분한 성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주변에 불평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kmkim@seoul.co.kr
  • [부고] 김의환 전 총신대총장 별세

    복음주의 신학자인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이 10일 오후 2시30분쯤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소천(召天)했다. 77세. 미국 칼빈신학대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을 거쳐 템플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1976~1995년 미국 LA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지냈다. 이후 1995~1999년 총신대 총장을, 2002~2007년 칼빈대 총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전받는 보수신학’,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복음과 역사’, ‘현대신학해설’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원순씨와 3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예배는 14일 오전 7시. 장지는 천안가족공원. (02)2227-7500.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원더걸스 혜림, 새앨범 티저서 ‘여성미’ 물씬

    원더걸스 혜림, 새앨범 티저서 ‘여성미’ 물씬

    컴백을 앞둔 걸그룹 원더걸스의 새 멤버 혜림이 새 앨범 티저 사진에서 여성스런 매력을 물씬 발산했다. 원더걸스는 지난 5일 새 앨범 ‘2 Different Tears’(이하 ‘2DT) 재킷사진을 공개한데 이어 9일 혜림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 혜림은 데님의 펑키함과 시스루의 여성스러움이 절묘하게 조화된 의상을 입고 시원한 업스타일의 헤어로 귀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느낌을 풍긴다.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는 혜림은 부드럽고 귀엽게 미소 짓고 있다. 혜림이 들고 있는 TV 모니터 속에서 컬러풀하고 발랄한 펑키 스타일의 또 다른 혜림은 클럽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한 남자의 옆을 맴돌고 있다. JYP엔터테인먼트 측은 “이달 중순부터 시작될 원더걸스의 ‘2DT’ 활동을 통해 멤버 혜림의 다양한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라며 “원더걸스의 컴백과 활동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원더걸스는 미국에 머물며 한국시각으로 오는 16일에 있을 앨범 론칭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 JYP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英 차기 총리 유력 캐머런은 누구

    英 차기 총리 유력 캐머런은 누구

    13년 동안 영국을 장기 집권했던 노동당 정권을 끌어내리고 ‘다우닝 10번가’(총리 관저)의 새 주인으로 유력한 데이비드 캐머런(44) 보수당 당수는 스스로 ‘기분 나쁠 정도로 특권 계층’이라는 농담을 할 만큼 엘리트다. 1966년 부유한 주식중개인 집안에서 태어난 캐머런은 명문 사학인 이튼 스쿨을 졸업, 옥스퍼드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에서 철학과 함께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서도 정치에는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폭음과 악행으로 악명이 높은 대학의 클럽 멤버로 활동한 데다 대마초를 피우기도 했다. 이 같은 전력 탓에 1988년 보수당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당수 선출 과정 등에서 수시로 경쟁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캐머런은 2001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지 4년 만에 ‘보수당 개혁’을 외치며 39세의 젊은 나이에 당권을 장악했다. 정치적으로 시장을 중시하는 보수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분배에도 비중을 둔 중도 좌파의 철학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동성애자 권리나 기후변화 문제처럼 과거 보수 야당이 꺼렸던 민감한 현안에 대해 노동당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지난 2월 ‘보수당: 대처부터 캐머런까지’라는 저서를 발간한 팀 베일은 캐머런을 “보수당이 전통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환경, 육아, 삶의 질, 복지 등을 강조함으로써 당의 본질을 정화한 지도자”로 평가했다. 산악자전거를 즐기고 인디 록 음악을 좋아하는 캐머런은 이번 총선 과정에서 36시간 밤샘 유세 및 1만마일(약 1만 6000㎞)의 강행군 등을 실천, ‘듀라셀 토끼’라는 별명도 얻었다. 듀라셀 토끼는 ‘힘세고 오래가는’ 성능을 강조하는 건전지의 마스코트다. 1996년 부인 사만다(39)와 결혼, 3명의 자녀를 뒀으나 뇌성마비와 간질을 앓아 온 맏아들 이반은 6살 때인 지난해 2월 숨졌다. 박성국기자 @seoul.co.kr
  • “마오기념관은 중국의 야스쿠니”

    │베이징 박홍환특파원│“‘마오쩌둥(毛澤東) 기념관’은 ‘학살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중국의 야스쿠니 신사다.” 타이완 급진 선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중국 수도 베이징의 역사교사 위안텅페이(袁騰飛·38)가 강의에서 쏟아내는 마오 및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독설이 중국을 들쑤셔 놓고 있다. 베이징 하이뎬(海淀)구에 위치한 징화(精華)학원의 교사 위안은 ‘문화대혁명’에 관한 110분짜리 온라인 강의에서 ‘신’처럼 떠받쳐지는 마오와 중국 역사교과서에 날선 비판을 퍼부었다. 위안은 “마오 기념관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이 국민들의 피를 손에 묻힌 학살자가 숭배받고 있는 중국의 야스쿠니 신사라는 것을 잊지 마라.”면서 “마오가 1949년(신중국 건국) 이후 유일하게 잘한 점은 죽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중국 역사교과서에서 진실은 5%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면서 “오히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중국보다 덜 왜곡됐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수백만명에 이르는 강의 시청자는 대부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다. 위안은 지난해 7월부터 한 달간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의 유명 강의 프로그램인 바이자장단(百家講壇)에서 북송과 남송시대의 역사강좌를 맡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가장 화끈한 역사교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역사교과서 편찬 및 대입시험 출제위원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위안이 자신의 저서를 팔기 위한 홍보수단으로 독설을 쏟아내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위안의 최근 세 번째 저서 ‘중국 고대사’는 출판권 분쟁에 휘말렸다. 이미 출간한 두 권의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티베트 관련 발언도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위안은 “시짱(西藏·티베트)은 신중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 반(半)독립 상태이고 국기도 있다.”면서 “달라이 라마가 노벨상은 탄 것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위안이 지금까지는 표현의 자유를 구가했지만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려 논란이 된 이상 곧 중국 당국의 제재가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오고 있다. stinger@seoul.co.kr
  • 노무현의 질문에 답하다

    한 네티즌이 물었다. “왼쪽 사람들은 똑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오른쪽 사람들은 한때 똑똑했던 것 같은데 왜 공부를 도통 하지 않나요?” ‘노무현이 꿈꾼 나라’(이정우 외 38명 지음, 동녘 펴냄)의 공동 저자인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머리말에서 책의 발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친 뒤 앞으로 올 미래의 민주정권은 제대로 된 개혁을 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책을 남기고 싶어 했다. 노 대통령은 학자들과 함께 토론해서 책을 쓸 계획을 갖고 있었고, ‘노무현이 꿈꾼 나라’의 장과 절 상당 부분을 직접 만들었다. 각 장과 절에 들어가야 할 내용도 다듬어 2009년 가을쯤 책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책의 저자를 대통령 단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학자들과 공저로 할 것인지도 의논했다. 대통령은 공동 저서로 하기를 바랐지만 학자들의 생각은 그 반대가 많았다. 노 대통령이 떠나고서 남은 학자들이 모여 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의논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대통령이 남긴 장, 절 구분과 메모가 너무나 생생하고, 책을 쓰려는 그 분의 의지와 열망이 너무나 강했기에 남은 학자들은 그 뜻을 도저히 그냥 묻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물론이고 참여정부를 비판했던 학자들까지 필자로 포괄했다. 집필 참여 기준은 대통령의 질문에 답할 만한 최고의 실력과 개혁성을 갖출 것, 그것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39명의 저자, 47개의 장을 갖춘 방대한 책이 나오게 됐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수언론에 공격당하던 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한 “그럼 내가 (형용 모순인) 좌파 신자유주의자겠네.”란 말을 인용하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실제 경제정책은 ‘중도우파(중도 보수파)’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특히 삼성이 제공한 ‘국민소득 2만달러론’을 받아들인 데서 보듯 정책 운영에서 삼성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책의 첫 장 ‘현대 한국에 보수주의는 있었나?’를 쓴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위의 네티즌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은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가 다 부러져 버린 아픔을 안고 있다. 대한민국은 합리적 보수와 따뜻한 진보가 서로 자극을 주고 때로 협력하고, 때로 경쟁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2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부고]이상수 前카이스트 원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물리학자 이상수 전 한국과학기술원장이 7일 오후 2시30분 별세했다. 84세. 1925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9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에 임용된 뒤 한국과학기술원장, 원자력청장, 한국과학원장 등을 역임했고,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을 받았다. ‘파동과학’, ‘레이저광학’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은 영식(경희대 교수)·형식(프리즘주식회사 이사)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8시.(02)3410-3151.
  • [Weekly Health Issue] 역사·현대적 의미

    복진의 역사는 2000년 전 중국 장중경의 저서 ‘상한론’에서 비롯됐다. 장중경은 상한론에서 각각의 처방으로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증상과 복진 특성, 투약에 따른 예후까지 상세하게 기술한 최초의 의서이자 임상 기록서다. 하지만 고대 동양사회에서 의사의 지위가 낮았고, 특히 봉건적 계급사회에서 신분이 귀한 환자의 몸을 직접 만져 진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극에서 어의가 왕족을 진맥할 때 팔목에 실을 묶어 활용하는 광경이 그런 사회적 상황을 대변한다. 이런 환경 때문에 복진은 명맥이 끊기고, 그 자리를 음양오행, 장부변증 등 기존 한의학이 대체했다. 하지만 근대 들어 계급사회가 붕괴되고, 현대의학이 도입되면서 의학의 대상인 인체를 보는 관점 역시 이념적·추상적 시각에서 직관적·실험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먼저 상한론의 복진을 복원하기 위해 애쓴 이가 바로 에도시대의 일본의학자였던 요시마쓰 도도(吉益東洞·1702∼1773)였다. 그는 기존 한의학의 한계 및 문제를 인식하면서 상한론의 복진에 관심을 갖고,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복치의학’을 집대성했다. 이후 국내에서도 많은 한의사들이 연구를 거듭해 지금의 복치의학을 일궈냈다. 노영범 회장은 “현대의 과학성은 추상적이고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데, 한의학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복치의학은 오랜 역사 속에서 실험과 경험을 축적해 온 과학적 의학”이라고 설명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김현중, 거미 ‘남자라서’ 티저서 눈빛연기…여심 자극

    김현중, 거미 ‘남자라서’ 티저서 눈빛연기…여심 자극

    김현중이 거미의 미니앨범 타이틀곡 ‘남자라서’ 티저 영상을 통해 여심을 자극했다. 27일 오후 2시에 공개된 이 티저 영상에서 김현중은 섬세한 표정연기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곡의 느낌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날 영상에는 ‘남자라서’의 음원 일부도 함께 공개됐다. 30초가량 되는 티저 영상 속 노래는 기존 거미의 음악보다 한층 산뜻해진 비트와 보컬로 성숙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김현중은 려원과 함께 연인으로 등장, 호흡을 맞추게 됐다. 뮤직비디오 풀버전은 앨범 발매일인 30일 동시 공개될 예정이다. 한편 거미의 ‘남자라서’는 YG의 메인 프로듀서인 테디의 곡으로 강렬한 록과 힙합이 어우러진 노래다. 그동안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했지만 둘의 공동작업은 7년만에 처음이다. 사진 = 티저영상 캡쳐 서울신문NTN 박영웅 기자 her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KT, 글로벌 경쟁시대에 혁신만이 살길이다

    KT는 28일 분당 본사에서 상무 이상 임원 87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고로부터 배우는 혁신과 성과창출’을 주제로 상반기 임원전략 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는 ‘혁신’이란 회의 주제에 걸맞게 금융산업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국내 최고 혁신기업가로 인정받는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과 혁신경영에 관한 한 세계적 석학이자 컨설턴트인 게리 하멜(Gary Hamel) 교수가 강연자로 참석했다. KT 이석채 회장은 인사말에서 “KT가 애플, 구글과 같은 글로벌 회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혁신과 스피드.”라며 “기존의 모델에 연연하지 말고 규제나 시장상황에 따라 변화가 필요하다면 비즈니스 모델도 새롭게 변화시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강연을 통해 “혁신을 통해 경쟁의 룰을 새롭게 짜서 경쟁자를 자신의 장으로 유도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말하며, “KT가 기존 통신사업의 경쟁 구도에서 탈피하여 WiFi존 확대 등을 통해 스마트폰 시장을 더욱 주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혁신에 대한 강연 외에도 게임형태의 토론이 장시간 진행됐다. 혁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게리하멜 교수팀과 무작위로 선발된 24명의 임원은 ◆잡지에서 사진을 오려 KT가 지향하는 이미지를 꼴라쥬 기법으로 만들기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7가지 ‘성공요소’중 KT에게 부족한 세 가지를 찾아 토의하기 ◆지속가능하고 창조적인 혁신을 위해 임원이 해야 할 일 찾기 등 혁신이 가져다 줄 긍정적인 효과와 리더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이날 KT는 게리 하멜 교수와 정태영 사장의 강연을 사내 방송을 통해 전사에 생중계함으로써 전 직원이 혁신대가들의 생각을 직접 듣고 느끼며 혁신의 의지를 되새기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이날 강연에서 게리 하멜 교수는 “이석채 회장 취임 이후 KT가 추진해 왔던 강도 높은 변화와 혁신의 사례를 높이 평가한다.”며 “KT가 경쟁의 룰을 바꾸고 기존의 모델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경영 전반에 대한 혁신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현재 KT는 지속적이고 창조적인 혁신활동 정착을 위해 ‘코어팀(Core Team)’을 구성해 게리 하멜(Gary Hamel)교수가 이끄는 경영 컨설팅팀과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게리 하멜 교수는 ‘경영의 미래’, ‘미래를 위한 경쟁’, ‘꿀벌과 게릴라’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졌으며,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는 경쟁의 룰을 바꾸는 혁명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창의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등 혁신 전도사로 맹활약 중이다. 서울신문NTN 차정석 기자 cj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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