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저도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659
  • [김문이 만난사람] 10년째 ‘재즈 아리랑’ 해외공연… 유럽 한류음악 원조 세계적 재즈가수 나윤선

    [김문이 만난사람] 10년째 ‘재즈 아리랑’ 해외공연… 유럽 한류음악 원조 세계적 재즈가수 나윤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영혼을 울린다. 들어도 들어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 식이 아닌 ‘재즈’로 풀어내기에 더욱 그렇다. 잠시 ‘재즈’를 얘기해 본다. 아프리카 음악과 미국 흑인, 그리고 백인 유럽인들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즉흥 연주와 창조성, 활력이 독특하다.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유럽 등 세계적인 현대 음악의 한 장르로 발전했다. 이러한 재즈의 세계 무대를 한국인이 섭렵하다시피 활동하고 있다. 서양의 재즈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까지 재즈로 편곡해 불러 인기를 모은다. K팝 스타들보다 일찍 유럽에 진출했으니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44살의 나윤선씨가 주인공이다. 그가 잠시 한국에 왔다. 아리랑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재 등록 기념 콘서트,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재즈의 날 기념 공연, 8집 앨범 ‘렌토’(Lento) 발매 기념 등등을 위해서다. 아울러 4월 한국 공연을 시작으로 다음 달부터 미국 등 세계 17개국 52개 도시 순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1년에 평균 100여 차례 이상 해외 공연을 갖는다. 동양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오라는 곳이 많으며 이미 세계적인 재즈 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음을 입증한다.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호원아트홀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임시로 노래 연습하는 곳 근처이다. 먼저 8집 앨범 타이틀곡 ‘렌토’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렌토’는 음악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라는 ‘빠르기 표’라고 설명한다. 7집 앨범을 낸 지 2년 반 만에 새 앨범을 냈으며 우리의 아리랑도 삽입곡으로 있단다. 지난 3월 한국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발매됐고 이어 4월 22일에는 유럽 전역에서 발매돼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6월에는 미국에서도 발매되며 이를 위한 여러 도시의 순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7집 앨범을 냈을 때 280여회 초청 순회 공연을 가질 만큼 많은 팬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재즈 앨범으로는 보기 드물게 10만장 이상 팔렸다. 나머지 1~6집도 10만장 가까이 팔렸다. 유럽 재즈음반 시장에서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8집 앨범 또한 그만큼 기대가 되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벨기에, 노르웨이 재즈차트 1위에 올랐으며 프랑스 아마존닷컴 음반 순위는 현재 1·2·3위가 모두 나윤선의 앨범이다. 8집 앨범은 거의 연습 없이 이틀 만에 녹음을 마쳤을 만큼 특유의 순발력으로 이루어졌다. 같이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 울프 바케니우스(기타), 라르스 다니엘손(베이스·첼로), 뱅상 페이라니(아코디언) 등과도 5년 넘게 손발을 맞춘지라 연습 없이 녹음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저 평상시 라이브 공연을 하던 대로 했단다. ‘아리랑’은 7집부터 들어가 있다. 어떻게 해서 ‘아리랑’을 재즈 무대에서 부르게 됐을까. 10년 전 같이 연주하던 스웨덴 출신의 울프 바케니우스가 ‘한국의 아리랑이 감동적이지 않으냐’며 먼저 제안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스웨덴 출신 연주자가 직접 아리랑을 편곡한 것이 오히려 특이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무대 중간중간에 아리랑을 불렀더니 다들 울었다. ‘참으로 한이 많다’ ‘너무 아름답다’라는 평을 들었다. “제가 아리랑을 안 하더라도 자기네(연주자들)끼리 아리랑을 연주합니다. 왜냐 하면 유럽 현지 팬들이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요청도 하고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감성이 와닿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반응을 보고 눈물이 찡하지요. 제가 한국에 있었으면 아리랑의 소중함을 몰랐을 텐데 이제 외국 아티스트들도 서로 좋아 부를 정도가 됐습니다. 7집에는 ‘강원도 아리랑’이 들어가 있고 8집에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일반 ‘아리랑’이 삽입됐어요. 울프 바케니우스 등의 연주자들은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등 한국에 몇 차례 와서 공연도 했고 한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는 아리랑의 매력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꼽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멜로디가 장점이라는 것. 재즈 아티스트들이 연주를 할 때 기본 재료가 되는 ‘재즈 스탠더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10년째 해외 공연에서 아리랑을 전파하고 있다. 그가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가 된 것은 우연으로 시작됐다. 건국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카피라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란 생각에 8개월 만에 그만뒀다. 마침 1994년 ‘지하철 1호선’ 뮤지컬 배우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디션을 봤다. 그가 노래했던 경력은 대학 때 프랑스문화원 주최 ‘샹송대회’에서 수상을 한 경험이 전부였다. 기분 좋게 합격했다. 그런데 노래는 좀 됐지만 연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됐다. 친구한테 ‘프랑스나 가서 노래 공부할까’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는 ‘응, 거기 가면 샹송도 있고 유럽 최초의 재즈학교도 있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나윤선은 재즈가 뭔지 몰랐다. 친구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 1995년 무작정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한 프랑스의 재즈학교 등 네 군데 음악학교에 동시 진학했다. 왜냐 하면 클래식과 성악, 컨서버토리 등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수업을 다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틈틈이 개인교습까지 받으면서 서서히 재즈로 방향을 굳혔다. 그렇게 3년만 공부하려고 했으나 학교(CIM)에서 장학금을 주고 나중에는 교수 제의까지 받았다. 학교 측에서 ‘아시아에서 온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재즈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학생들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재즈 명문 CIM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했고 그동안 품어온 음악적 이상을 현실로 이루게 된다. 피아노 트리오 편성에 비브라폰과 나윤선의 보컬이 더해진 ‘나윤선 퀸텟’이 결성되면서 프랑스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아울러 각종 페스티벌과 레코딩에 참여하면서 많은 매체로부터 극찬을 받기 시작했다. 2001년 나윤선과 퀸텟 멤버들은 첫 데뷔작 ‘러플레’(Reflet)를 발표했고, 국내외 재즈 팬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재즈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신들린 듯한 나윤선의 음성이 통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를 찾는 공연장이 늘어나면서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2009년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고, 2010년 7집 ‘세임 걸’로 독일 에코 재즈 어워즈 해외 부문 ‘올해의 여가수’로 선정됐다. 유럽에서 ‘소녀시대’ 등 K팝 스타 이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런 그에게 재즈란 무엇인지 물었다. “한국인인 저도 할 수 있는 음악입니다. 국적과 종교, 인종을 떠나 전 세계인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세대 간 구분 없이 무대에 같이 설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어느 나라에 가도 그쪽에 있는 뮤지션과 함께 언제든 무대에 오를 수 있지요. 또 한 가지. 재즈를 하노라면 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안이잖아요(웃음). 살아서 움직이는 음악이죠.” 유네스코에서 재즈페스티벌을 주관하는 것도 바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소통과 교류의 음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의 재즈 뮤지션들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오고 싶어 한다. 한국에 오면 불고기도 먹고 한국의 재즈팬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재즈팬들이 많다는 것을 유럽 재즈 뮤지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재즈페스티벌이 1년에 200회 정도 열릴 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그는 지난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무려 160여 차례 공연을 가졌다. 올해만 해도 벌써 100여회가 넘는다. 주로 프랑스에서 지내고 한국에 들어오는 시간은 1년 중 넉 달이 채 안 된다. 남편인 인재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예술감독도 거의 못 본다고 한다. 가끔 외국 일정이 맞으면 그때 반갑게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바빠서일까. 아이는 아직 갖지 못했다. 이런 궁금증에 “무대에 서는 것이 행복하다”며 웃어넘긴다. 그의 아버지 나영수씨는 한양대 명예교수로 음악감독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어머니 김미정씨는 뮤지컬배우 출신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언제 고국팬들과 다시 만나느냐고 했더니 “연말쯤이 될 것 같다. 고국 무대는 항상 떨린다. 가족이랑 친구들이 다들 보러 오기 때문”이라며 수줍게 웃는다. 꿈이 무엇이냐고 하자 “음악은 내 정신이기 때문에 계속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나윤선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일반 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1994년 ‘지하철 1호선’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듬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재즈 명문학교 CIM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 후 2000~2001년 이 학교 교수로 몸담았고 줄곧 퀸텟(5인조 밴드 구성)으로 프랑스의 현지 매체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2001년 첫 정규 앨범 ‘러플레’(Reflet)에서 최근 8집 ‘렌토’(Lento)까지 음반을 발표, 왕성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2005년에는 일렉트로닉 재즈밴드와 파격적인 음반을 발표했고, 2007년에는 팝 음반을 내기도 했다. 7집 앨범 ‘세임 걸’(Same Girl)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재즈 차트 1위, 80주간 스테디셀러, 프랑스 골든디스크 수상, 10만 장 이상 판매 실적을 올렸다. 2009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고, 2011년 프랑스 재즈 어워드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독일 레코드산업협회가 주는 ‘에코 재즈 2011’ 시상식에서 해외 아티스트 부문 ‘올해의 여가수’에도 뽑혔다. 지금도 유럽 주요 대형 음반매장의 재즈 코너에는 대부분 나윤선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관광부,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음반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껴”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껴”

    토요일인 지난 27일 오후 3시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아파트 앞 작은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사러 온 아이들 3명이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어? 이건 ‘1+1’ 상품이네요. 가서 먹고 싶은 거 하나 더 가져오세요. 그리고 사탕은 보너스.” 꼬마 손님들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편의점 아저씨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보통 사람’ 김능환(62)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요즘 일상은 이렇다. 30년 공직자의 권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입가에 진 잔주름이 소탈한 웃음을 닮은 그의 삶의 궤적을 대변한다. 김 전 위원장은 아내 김문경(58)씨를 위해 지난해 4월과 9월 상도동에 각각 편의점과 채소가게를 열었다. 지난 3월 5일 퇴임한 뒤 평일엔 아내의 ‘운전기사’, 주말엔 ‘편의점 알바생’으로 8시간씩 가게 일을 돕고 있다. ‘청백리’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다는 그는 “별다를 것 없어요. 그냥 내 처지와 상황에 맞게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언론에 자꾸 노출되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봐 부담스럽다”고 했다.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부하던 그는 기자가 이날 오후 편의점에 불쑥 찾아가 손님들 틈에서 꾸준히 질문을 던지자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 권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김 전 위원장은 ‘착한 아저씨’로 통했다. 주민들에게는 대법관, 중앙선관위원장 출신이라는 그의 ‘과거’보다 인심 좋고 친절한 아저씨라는 ‘현재’가 훨씬 강하게 부각된 듯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김정원(16)군은 “이 분이 전직 대법관과 선관위원장이었다”고 말해 주자 “진짜 몰랐어요. 그냥 되게 착하셔서 인상 좋은 편의점 아저씬 줄만 알았다”며 깜짝 놀랐다. 김 전 위원장은 모든 손님에게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를 잊지 않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를 받지 않고 그냥 나갔지만 그는 이런 무반응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기계 조작이 느린 그에게 욕설과 함께 “짜증 나네”라고 말하며 나가는 20대 손님도 있었다. “가게 일을 하다 보면 상처를 받을 때도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손님은 왕이잖아요.” 복지카드를 들고 온 할머니가 카드 한도 초과로 사려던 빵을 제자리에 놓고 그냥 가려 하자 그는 빵을 다시 할머니의 손에 쥐여 줬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갑을 열어 계산을 했다. “내 가게는 아니니까 돈은 채워 놔야죠. 전 알바생인데….” 이곳 계산대 앞에 막대사탕통 두 개가 놓여 있다. 파는 게 아니라 편의점을 찾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주기 위한 ‘사은품’이다. 사탕을 종류별로 담아 놓고 먹고 싶은 걸로 가져가되 ‘한 명당 한 개씩’이란 원칙이 있다. 아이들은 다들 “우와, 저 아저씨 되게 착하다”며 좋아했다. 때로는 대법관 출신다운 잔소리도 했다. 로또 복권을 사러 온 여성에게는 “저희는 로또는 취급을 안 합니다. 사행성 게임은 하지 마세요. 좋을 게 없어요”, 담배를 사는 학생에게는 “담배는 몸에 해로워. 벌써부터 피우지 않아도 돼. 잘생긴 얼굴 미워져”라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났다는 편안함 때문일까. 손님들 외에 김 전 위원장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날도 초등학교 동창 김길용씨가 편의점을 찾아왔다. 49년 만에 처음 본다고 했다. “예전부터 방송, 기사 등을 통해 활약상은 봐 왔지만 공직에 있을 땐 혹여 누가 될까봐 내가 먼저 연락을 못 했어요. 이제는 편하게 자주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능력 있는 친구가 이러고 있는 게 마냥 좋은 건가 싶긴 하죠.” 김 전 위원장을 보려고 먼 곳에서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못생긴 얼굴 보러 여기까지 와 주시는 분들 보면 고마울 따름이죠. 편의점에 직접 오시거나 편지를 보내 법률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도 많아요. 소송을 대리해 주고 싶은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지요.” “전 그냥 비정규직이에요. 뭔가를 보여 주려는 생각도 없고, 탐험하듯 완전한 자유인으로 지내고 있어요. 편의점 하면서 잔돈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죠.” 그는 아내로부터 용돈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가게 경영은 철저히 아내의 몫이다. 그는 관여하지 않는다. 돈에 집착하기 싫어서다. “내가 경영에 관여하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신경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운영을 잘하니 못하니 잔소리하고 싸우게 마련이죠. 그냥 필요할 때마다 뭐 사달라고 얘기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돈에 연연하지 말고 서비스를 하자는 뜻에서 바로 옆 채소가게에도 ‘영업시간’ 대신 ‘업무시간’이라고 적힌 팻말을 붙여 놨다. “영업시간이라고 하면 장사한다는 느낌이 많아서 그냥 서비스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거죠.” 김 전 위원장은 조심스레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지금은 저도 아내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연하지 않아요. 다만 후배 법관들이 ‘아, 퇴직하면 저렇게 살아야 되나 보다’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에요.” 가게 사정이 어렵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라면서 “집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집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손님이 없는 가게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편의점 가맹주들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의 어려움도 알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하며 의욕을 갖도록 정치권이나 기업에 계신 분들이 더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다음 직업으로 변호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제가 아는 게 법이니 그걸 활용할 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결정된 건 없고 방향만 모색 중입니다. 지금도 법률 상담은 무료로 하고 있지만 변호사로 일한다면 서민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글 사진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끝없이 준 어머니, 더 원하는 며느리… 여자의 적은 정말 여자인가?

    끝없이 준 어머니, 더 원하는 며느리… 여자의 적은 정말 여자인가?

    ‘구강건조증’, 안구건조증과 비슷한 것이었다. 인공눈물이 있듯이 인공침도 있었다. ‘사회파 작가’ 김숨(39)의 장편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현대문학 펴냄)이 표현한 ‘여인’ 정순자씨가 앓는 고통스러운 병이다. 정순자는 1949년생 소띠로 충남 부여가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17살에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 직물가게를 하던 친척집 일을 돕다 남자를 만나 결혼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36살에 과부가 돼 파출부, 요구르트 배달, 버스회사 청소부, 식당 주방일 등 안 해본 허드렛일이 없다. 맞벌이를 포기하지 않은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인 며느리의 요청으로 살림을 합쳐서 5년 동안 말없이 살림과 보육을 도맡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대놓고 무시하고 핍박한다. 지방 3류 대학을 나와 중소건설사 직원으로 출장이 잦은 아들은 대한민국 귀한 아들답게 저밖에 모르고, 못났다. 정순자의 며느리 김미선은 누구인가. 구세대 어머니를 표상하는 ‘여인’들을 압박하는 ‘진화하는 적’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른다. 정규직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으로 15년 다녔던 회사에서 최근 해직됐다. 전문대 출판학과를 나온 그녀는 교사를 어머니로 둔 ‘노량진 고시촌의 번데기’ 같은 남자와 사귀다가 계층, 신분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껴 포기하고 32살에 36살의 중소건설사 직원과 결혼했다. 해직되자 구강건조증 환자 시어머니를 내쫓으려 한다. 김숨은 중세적 권력관계가 역전된 ‘며느리 시집살이’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자본주의적인 진화일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 덕분에 신생아의 칭얼거림 없이 개운하게 잠을 자고, 시어머니가 6시 30분 남편의 아침밥을 대령하는 등으로 육아와 가사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도 야박한 수고비를 책정한다. 그 쥐꼬리만 한 수고비마저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자 절반으로 잘랐다. 필요가 사라지자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김미선은 “부모가 뒷바라지를 얼마만큼 해 주느냐에 따라 자식 인생이 달라지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정순자를 비난한다. 순박하고 희생적인 정순자는 “얼마나…인생이 얼마나 달라진다는 거냐?”고 되묻지만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외제 차 끌고, 휴가 때마다 온 가족이 해외로 여행 다니면서 사는 게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느냐”는 김미선 앞에서는 말복을 채워 주기 위해 어머니 세대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박탈하고 침해하는 것이 마땅할까. 이것이 오늘날의 진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단독]甲의 행패… 매 맞는 乙 고발은커녕 ‘쉬쉬’

    [단독]甲의 행패… 매 맞는 乙 고발은커녕 ‘쉬쉬’

    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이 항공기 안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해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전통 경주빵과 천안명물 호두과자를 생산 판매하는 ㈜프라임베이커리 강수태 회장이 롯데호텔(서울) 현관서비스지배인을 폭행해 말썽을 빚고 있다. 호텔 측도 강 회장의 직원 폭행에 대해 적극 대응하기보다 입단속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9일 롯데호텔 관계자 및 목격자들에 따르면 강 회장은 지난 24일 정오쯤 지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1층 주차장 입구 임시 주차장에서 자신의 BMW 735 차량을 탄 채 정차해 있었다. 이곳은 공무로 호텔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들만 잠시 주차하는 곳이다. 강 회장은 이곳에서 지인을 만나기 위해 호텔 측의 허락을 받고 정차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 회장 차량이 수십분 동안 주차하면서 국회의원 차량 등 다른 차량의 진입을 막게 되자 현관서비스지배인 박모씨가 강 회장에게 다가가 이동 주차를 요구했다. 하지만 강 회장은 박씨의 거듭된 요구에 “너 이리 와 봐. 네가 뭔데 내게 차를 빼라 마라 그러는 거야”라며 약 15분 동안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욕설을 듣던 박씨가 “저도 군대 간 아들이 있는 50대인데 욕은 안 하고 말씀하시면 안 되느냐”고 하자 강 회장은 “나는 70이 넘었다”며 욕설과 함께 장지갑으로 뺨을 후려치고 다시 얼굴을 3~4차례 가볍게 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박 지배인이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강 회장 지갑에 들어 있던 신용카드 등이 10m쯤이나 날아갔다”고 말했다. 폭행 후에도 강 회장의 욕설은 약 4~5분간 더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강 회장은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던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수차례 한 것으로 전혀졌다. 결국 국회의원들이 탄 차량은 1층 주차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호텔 좌측 발레파킹 전용 주차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목격자들은 “박씨가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요청했으나 강 회장이 다짜고짜 욕설을 하고 폭행을 가했다”면서 “호텔 도어맨이라고 얕본 것 같아 보는 사람이 불쾌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씨는 “폭언, 폭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원만히 해결됐다”며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호텔 측도 “고객에 대한 프라이버시 때문에 (직원 폭행 사실 여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 폭행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공개는 회사 방침상 불가하다”며 여론화되는 것에 부담감을 보였다. 한편 강 회장은 폭행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25일)부터 서울신문이 직원들을 통해 수차례 전화 통화를 요구했으나 이날 현재까지 응하지 않고 있다. 2006년 설립된 프라임베이커리는 자본금 5억 3000만원 및 사원 수 21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경북 경주빵과는 다른 회사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3742건 실종가족 찾은 이건수 경위 세계기록 인증

    3742건 실종가족 찾은 이건수 경위 세계기록 인증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은 행여라도 아이가 찾아올까 하는 마음에 이사는커녕 집 한번 못 비웁니다. 그 마음을 아니까 저도 절박한 마음으로 수사를 하는거죠.” 경찰청 182실종아동찾기센터에서 근무하는 이건수(46) 경위는 ‘가족찾기의 달인’이다. 지난 11년 동안 가족 상봉을 도와준 게 모두 3742건에 달한다. 거의 하루에 한건 꼴이다. 이 중에서 입양인의 국내 가족을 찾아준 것이 1651건이나 된다. 이 경위는 30일 미국 월드레코드 아카데미로부터 공식 세계기록 인증서를 받는다. 국제적으로 비교 대상이 없는 기록이지만 이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족 상봉을 도왔다는 사실에 의문을 달기는 불가능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미 한국기록원도 지난해 6월 이 경위를 ‘최다 실종가족 찾아주기’ 기록 보유자로 등재한 바 있다. “본격적으로 실종자 찾는 일을 시작한 건 2002년부터였어요. 경기 남양주경찰서 민원실의 헤어진가족찾기팀에 배치됐는데, 아이를 잃어버리고 절규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무슨 사명감처럼 치솟아오르더군요.” 그는 숱한 가족상봉을 이끈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절박함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2남 1녀를 둔 아버지로서 실종자 부모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고, 가족상봉만 도울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했다. 10여년간 실종아동을 찾기 위해 전국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고 부모 잃은 아이와 비슷한 인상의 어린이가 발견됐다는 제보가 접수되면 주말이라도 현장에 달려갔다. “주말에도 늘 집을 비워 아이들에게는 빵점짜리 아빠예요. 그래도 남편과 아빠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서 애써 이해해 주는 가족들이 너무 고맙지요.” 이 경위는 실종자를 찾는 과정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별다른 단서없이 수십년 전의 기억에 의존해 끊긴 인연을 다시 이어주는 일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작은 실마리에 기대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어느 순간 기적이 온다. “지난해 한 50대 남성이 ‘강원도 태백에서 50년 전 가족과 헤어졌다’는 기억만 가지고 저를 찾아왔어요. 태백 일대를 며칠간 함께 훑고 돌아다녔는데 결국에는 외삼촌집부터 실마리를 찾아 마지막엔 어머니, 형과 만날 수 있었지요. 그럴 때면 저 스스로 기적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놀라움을 느끼게 되지요.” 이 경위는 날씨가 좋은 4~6월 가족 나들이를 나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가까운 파출소 등에 아이의 지문을 사전에 등록하면 혹시 아이를 잃어버려도 찾기 쉽습니다. 지난해 7월 이후 벌써 18명의 아이가 등록된 지문으로 가족을 찾았지요.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좋겠어요.”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롯데호텔, ‘제빵사 회장님’ 직원 폭행에 ‘쉬쉬’

    롯데호텔, ‘제빵사 회장님’ 직원 폭행에 ‘쉬쉬’

    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이 항공기 안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해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전통 경주빵과 천안명물 호두과자를 생산 판매하는 ㈜프라임베이커리 강수태 회장이 롯데호텔(서울) 현관서비스지배인을 폭행해 말썽을 빚고 있다. 호텔 측도 강 회장의 직원 폭행에 대해 적극 대응하기보다 입단속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9일 롯데호텔 관계자 및 목격자들에 따르면 강 회장은 지난 24일 정오쯤 지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1층 주차장 입구 임시 주차장에서 자신의 BMW 735 차량을 탄 채 정차해 있었다. 이곳은 공무로 호텔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들만 잠시 주차하는 곳이다. 강 회장은 이곳에서 지인을 만나기 위해 호텔 측의 허락을 받고 정차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 회장 차량이 수십분 동안 주차하면서 국회의원 차량 등 다른 차량의 진입을 막게 되자 현관서비스지배인 박모씨가 강 회장에게 다가가 이동 주차를 요구했다. 하지만 강 회장은 박씨의 거듭된 요구에 “너 이리 와 봐. 네가 뭔데 내게 차를 빼라 마라 그러는 거야”라며 약 15분 동안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욕설을 듣던 박씨가 “저도 군대 간 아들이 있는 50대인데 욕은 안 하고 말씀하시면 안 되느냐”고 하자 강 회장은 “나는 70이 넘었다”며 욕설과 함께 장지갑으로 뺨을 후려치고 다시 얼굴을 3~4차례 가볍게 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박 지배인이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강 회장 지갑에 들어 있던 신용카드 등이 10m쯤이나 날아갔다”고 말했다. 폭행 후에도 강 회장의 욕설은 약 4~5분간 더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강 회장은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던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수차례 한 것으로 전혀졌다. 결국 국회의원들이 탄 차량은 1층 주차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호텔 좌측 발레파킹 전용 주차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목격자들은 “박씨가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요청했으나 강 회장이 다짜고짜 욕설을 하고 폭행을 가했다”면서 “호텔 도어맨이라고 얕본 것 같아 보는 사람이 불쾌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씨는 “폭언, 폭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원만히 해결됐다”며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호텔 측도 “고객에 대한 프라이버시 때문에 (직원 폭행 사실 여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 폭행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공개는 회사 방침상 불가하다”며 여론화되는 것에 부담감을 보였다. 한편 강 회장은 폭행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25일)부터 서울신문이 직원들을 통해 수차 전화 통화를 요구했으나 이날 현재까지 응하지 않고 있다. 2006년 설립된 프라임베이커리는 자본금 5억 3000만원 및 사원 수 21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경북 경주빵과는 다른 회사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개성공단 어디로] 향후 개성공단 관리 어떻게

    정부는 개성공단 잔류 인원 철수 완료 후 개성공단 내 남측 자산을 북한이 점유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춰 후속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단전·단수 등 다양한 방안 등이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29일 개성공단 ‘봉인’ 문제와 관련해 “입주기업들이 철수하며 북한이 공장 설비를 임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일단 공장 문을 걸어잠갔다”며 “단전·단수 등의 문제는 정부 간 협의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번 주 별도의 단전·단수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한국전력과 한국수자원공사 직원들이 철수하면 전기와 용수 공급은 자연스럽게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 하루 6만t 규모의 용수 공급을 담당해오던 한국수자원 공사 직원들이 없으면 개성공단에는 상하수도 시설과 정·배수장을 관리할 인력이 남지 않게 된다. 개성공단 북측 관리 직원 가운데 상하수도 기술사가 있다면 북한이 임의적으로 시설을 가동시킬 수도 있지만 이마저도 전기가 끊기면 가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개성공단에 공급되는 전기 10만㎾(한 달 기준)는 전부 남측 문산 변전소에서 송전해왔다. 정부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가동이 중단되고 우리 인력도 없는 개성공단에 매달 10만㎾에 달하는 전기를 보낼 이유가 없을 뿐더러, 사람이 없는 공장에 전기만 가면 화재 등 사고 발생 위험도 높다”며 단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문제는 단전에 이어 단수 조치까지 취해지면 개성 시내 물 공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전기는 개성공단에만 공급되지만 남측이 공급해온 6만t의 물 중 1만 5000t은 개성시 생활용수로도 사용돼 왔다. 전문가들은 인도주의적 문제까지 발생할 공산이 큰 데다 북한이 이를 빌미로 남측 자산을 몰수·압류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전·단수는 북한을 치명적으로 아프게는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개성시 5만명의 식수 공급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해 북한을 자극하고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며 “다음 달 7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유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교단 위 성범죄자들… 학교 보내기 겁난다

    최근 서울의 한 고교 교사가 학교 복도에서 자위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광주의 한 중학교 교사가 제자들에게 유사 성행위를 강요하다가 적발되는 등 교사의 성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이 같은 교사들의 성범죄 예방을 위한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각 교육청은 교사들을 상대로 성범죄 예방 강의만 1년에 한 차례씩 실시하는 데 그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사의 성범죄에 무감각한 것으로 지적된다. 광주의 모 사립중 교사 A(40)씨는 29일 제자들에게 음란 행위를 시키다가 적발돼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A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차 안과 학교 계단 등에서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의 여학생 2명에게 수차례에 걸쳐 유사 성행위를 시키거나 자신의 몸을 만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이들 중 1명에게 카카오톡으로 음란한 내용의 메시지도 수차례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사실은 학생에게서 피해 내용을 들은 학교 상담교사가 학부모에게 통보하면서 알려졌다. 경찰은 A씨의 카카오톡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복원해 분석한 뒤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A씨는 이 학교에서 5년 전부터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다가 3년 전 정교사로 임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교육청은 자체 조사 결과 내용을 토대로 해당 학교 법인에 A씨에 대한 파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사전 예방보다는 ‘사후약방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예방 조치 미흡 등으로 각급 학교에서는 교사의 성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서울 양천구의 한 고등학교 복도에서 자위행위를 한 교사가 구속됐고 최근 강원 강릉시에서는 30대 교사가 초등학교 6학년 제자와 성관계를 가져 물의를 빚었다. 지난 2월에는 전남 순천에서 제자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여고 교사가 기소됐고 광주에서는 지난해 8월에도 중학교 교사가 여학생에게 음주를 강요하고 성추행하다 적발돼 파면됐다. 교육당국은 사립학교 교원이라 하더라도 교사 채용 당시 공무원에 준해 범죄 경력을 조회하는 등 나름대로의 검증 절차를 밟고 있다. 하지만 교사가 채용된 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선제적 예방은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채용 이후 저지르는 성추행과 성폭행 등의 성범죄와 관련해 금고 이상의 형만 받지 않으면 교단에 설 수 있는 만큼 해당 교사에 대한 ‘특별 관리’ 대책 마련도 시급한 실정이다. 그러나 일선 학교와 교육당국은 교사 반발 등을 우려해 지속적인 성범죄 예방 교육에 소극적이다. 이번 경우처럼 채용된 이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교사가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학교나 교육당국으로서도 속수무책인 셈이다. 1년에 한 차례씩 이뤄지는 성폭력 예방 교육이 전부이며 이마저도 형식적으로 운영되기 일쑤다. 광주·전남 교육을 생각하는 학부모연합 관계자는 “채용 때 교원의 자질을 보다 면밀히 검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사후에는 주기적인 적성검사 등을 통해 문제 교사를 가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개성공단 완전 폐쇄 언급 없는 北… 정상화 기대 접지 않은 듯

    개성공단 완전 폐쇄 언급 없는 北… 정상화 기대 접지 않은 듯

    개성공단 잔류인원 철수가 29일 마무리될 예정인 가운데, 이제 관심은 이대로 개성공단이 문을 닫게 될지에 쏠리고 있다. 남은 인원 50명이 철수를 완료하면 개성공단은 기약 없는 잠정 폐쇄 상황을 맞게 된다. 다만 남북 모두 개성공단 완전 폐쇄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어 당장 폐쇄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회생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지난 27일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을 통해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체류자 전원 철수 조치를 강하게 비난했지만 공단 완전 폐쇄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청와대 안주인이 개성공업지구마저 대결정책의 제물로 만들 심산이 아닌지 예리하게 지켜보고 있다”며 당분간 남측의 행동을 지켜본 뒤 대응하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먼저 폐쇄 조치를 취하는 데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총국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 형식을 통해 “현 괴뢰보수패당처럼 시한부를 정하고 중대조치니 뭐니 하며 오만무례하게 대화제의를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며 정부를 조목조목 비판했지만 박 대통령을 실명 거론하며 비난하는 것은 삼갔다. 최고통치기관인 국방위원회가 아니라 개성공단을 담당하는 실무기관인 지도총국이 입장 발표에 나선 것도 남측의 조치에 북한이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도총국은 이마저도 성명이나 담화가 아니라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비난의 수위를 최대한 낮췄다. 개성공단 정상화에 대비해 수위 조절에 나선 모습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28일 “만약 북한이 완전 폐쇄를 염두에 뒀다면 이렇게 수위 조절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완전 폐쇄와 정상화 여지를 남겨두면서 지켜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음 달 7일 한·미 정상회담이 향후 상황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어떤 비전을 제시할지에 따라 현재의 대결 국면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미 정상회담으로도 회생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개성공단은 이대로 완전 폐쇄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도총국은 “개성공업지구가 완전히 폐쇄되는 책임은 전적으로 괴뢰패당이 지게 될 것”이라며 개성공단 폐쇄에 앞서 남측에 미리 책임을 전가하려는 속내를 내비쳤다. “괴뢰패당이 도발에 매달릴수록 더 위태롭게 될 것”이라며 위협하기도 했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 1년 9개월 만에 남측 자산을 동결·몰수조치한 것처럼 개성공단의 자산을 점유할 가능성도 있다. 아예 개성공단 설립 이전처럼 군사지역으로 되돌릴 공산도 적지 않다. 지도총국은 “밑져야 본전”이라며 “개성공업지구의 넓은 지역을 군사지역으로 다시 차지하고 서울을 더 바투 겨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 고를 뿐이다

    [주말 인사이드]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 고를 뿐이다

    전자책이 정말 종이책을 없앨까.1998년 미국의 누보미디어가 처음으로 ‘로켓 e북’을 내놓자 출판계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이래 15년째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비명이라기엔 앙칼진 목소리가 무던해져버린 비명이다. 공상과학(SF)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처음 전자책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 머릿 속에 그려진 그림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책을 쓴다. 전문가? 교수? 작가? 기자? 그런 계급장 따윈 필요없다. 분량에 상관없이 모든 주제, 모든 형식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렇게 써서 올리면 소비자의 선택이, 그러니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걸 알아서 정리해준다. 전자책 사업자는 일종의 유통 플랫폼 사업자로 중개수수료만 챙긴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책을 매만져왔던 노련한 편집자? 책의 전반적인 가치와 위치를 설정해주는 평론가? 그런 혹 따윈 떼버려도 된다. 좀 지나친 거 같다고? 그럴리 없다. 전자책으로 마침내 ‘글쓰기의 민주화’가 완벽하게 달성되는거니까. 민주화, 그 얼마나 신성한 단어이던가. 이런 시나리오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에 그쳤다. 그러나 한번씩 고개를 쳐든다. 처음 고개를 든 것은 2007년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을 내놨을 때다. 뒤질세라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단말기가 나왔다. 전자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호들갑이 들끓었다. 결과는 실패. 단말기 생산이 은근슬쩍 중단되더니 차츰차츰 시장에서 사라졌다. 단말기를 산 사람들도 대개 20~30대 남성이었다. 20~30대 여성, 40~50대 남성처럼 책시장의 주력부대군이 아니었다. 책읽기 도구로 단말기를 샀다기보다, 단말기 그 자체의 성능을 시험해보려는 얼리 어답터, 그러니까 ‘IT 덕후’들의 놀잇감에 더 가까웠다는 뜻이다. 그뒤 사그라졌던 전자책 얘기가 다시 불거져나온 것은 순전히 스마트기기 덕이다. 휴대전화, 패드, 태블릿PC 등 값비싼 전자기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자, 그 훌륭한 기계로 고작 웹서핑이나 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결국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한 요소로 전자책이 다시 불려나온 것이다. 아니, 화려한 동영상 콘텐츠에 밀려 자꾸만 변방으로 내밀리니 뭐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어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한동안 사라졌던 전용단말기도 슬금슬금 다시 등장했다. 이전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파격적 행보도 곁들였다. 교보문고는 전용단말기와 함께 회원제 전자책 대여 서비스인 ‘샘’을 내놨다. 한 달 만에 1만 3000대를 팔았고 회원도 1만명 이상 확보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지난해 ‘크레마터치’를 내놓으면서 살림지식총서 100권을 붙인 버전, 박경리·조정래의 소설을 붙인 버전, 셜록 홈스 등 추리소설을 붙인 버전 등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개별 출판사로는 대형출판사 ‘열린책들’이 지난 2월에 ‘세계문학’ 앱을 내놓고 애플 앱스토어 매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출판계로부터 욕은 진탕 들어먹었지만 일단 이런 움직임들이 전자책에 대한 호감도를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이용자들은 만족감을 드러낸다. 전자책에 특화된 ‘e-잉크’ 기능을 사용하는 전용단말기의 경우 요즘의 현란한 디지털기기에 비하자면 다소 답답한 부분이 있다. 화면전환도 느린 편이고 잔상도 남는다. 그럼에도 10만원 정도의 비교적 싼 단말기 가격에다 읽는 데만 특화돼 쓸 만하다는 평이다. 한국 소설을 즐겨 읽고 학생시절 때부터 모아온 책들이 상당한 회사원 강소연(여·37)씨는 “책을 쭉 꽂아놓고 소장하는 재미는 줄었지만, 그 대신 정말 소장하고픈 책을 빼고는 나머지는 전자책으로 바꿔나갈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고전을 즐기는 회사원 강신(남·30)씨는 순전히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앱 때문에 아이패드까지 사들인 경우다. 강씨는 “실물 책이 가득찬 책장이 주는 뿌듯함이 없고 오래 읽으면 눈이 좀 아프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만족”이라면서 “처음에는 종이가 주는 질감이나 맛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책갈피, 밑줄, 메모, 독서노트처럼 종이책과 다를 바 없는 여러 기능들을 쓰면서 아쉬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실제 판매 추이에서도 약간의 변화 조짐이 보인다. 그동안 전자책이라면, 가벼운 자기계발서나 확실한 마니아계층이 형성되어 있는 장르소설이 대부분이었다. 쉽게 말해 가벼운 내용의 책을 싸게 사들이는 곳이 전자책 시장이라는 얘기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의뢰해서 최근 3년간 베스트 50에 든 전자책들의 종류를 확인해보니 2011년 18권에 이르던 장르문학의 비중이 최근 6개월간에는 5권으로 줄었고, 문학 비중이 12권에서 18권으로 늘었다. 인문·사회분야가 5권에서 10권으로 늘었다. 예스24 측은 “장르문학의 비중이 차츰 낮아지고 있는 데다, 책 가격이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면서 “이는 고만고만한 책을 싸게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써본 사람들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고, 고전급 문학서적을 발판 삼아 전자책이 마침내 IT덕후들의 놀잇감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고 있으니, 이제 전자책의 공포가 마침내 현실화될 차례인가. 무슨무슨 연구소니 무슨무슨 증권사들이니 하는 곳에서 잠잠할 만하면 전자책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한껏 분위기도 띄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출판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지금 느껴지는 전자책 붐은 고전을 덤핑으로 팔아치운 데 따른 거품이라는 진단이다. 이런저런 시장 조사 결과를 보면, 같은 콘텐츠라면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보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나마 자본력을 갖춘 곳에서 저작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고전을 이렇게 싼값에 폭탄세일하듯 팔아치워버리면, 나중에 새 콘텐츠를 제값 받고 팔 수 있겠느냐는 반문도 나온다. 최근 전자책 행보에 출판계가 끙끙 앓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전자책으로 제작되는 것은 저작권 시효가 끝난 고전, 그냥 쓱 읽고 마는 가벼운 에세이나 장르소설들, 토익이나 운전면허시험 같은 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가벼운 수험서, 대학 등에서 쓰이는 각종 두꺼운 교재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실은 이마저도 잘 안되고 있다. 복제의 위험 때문이다. 대학교재를 많이 내는 A출판사 관계자는 “종이책을 변환한 것은 물론, 전자책 버전으로 다듬은 시험제작판도 나름대로 만들고는 있지만 회사에 차곡차곡 쌓아만 두고 있다”면서 “가장 큰 걱정은 시장에 내놓는 순간 저작권 침해행위가 만만치 않을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콘텐츠를 내놓을 출판사들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으니 시장선점 욕심 때문에 몸이 바짝 달아오른 플랫폼 사업자가 그간 문화사업자로서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가며 가격을 후려치는 방식으로 일단 판을 벌린 경우”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종이책을 즐겨보는 독자가 전자책도 사보고, 전자책을 보는 독자가 종이책도 사보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독자라는 사실”이라면서 “저가전략, 할인공세는 결국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자책 시장이 안 뜬다고 초조해하는 이들은 독자들이나 출판사들이 아니라 오직 전자책 시장 관련 사업자들뿐”이라 꼬집었다. 그래서 여전히 전자책은 시험 중이다. 가령 민음사는 기존 콘텐츠를 디지털화해서 공개하는 대신 ‘디지털 싱글’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다. 잡지 기사보다는 길고 단행본보다 짧은 분량의 글을 선보이는 것이다. 출퇴근시간, 찻집에 앉아 보내는 시간 등에 스마트기기를 통해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집중 개발, 보급한다는 전략이다.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실험이 많다. 장르, 분량, 형식면에서 기존 단행본의 전철을 밟지 않는 책이 나오면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 실험일 가능성이 높다. B출판사 관계자는 “대기업 혹은 언론사를 끼고 최근래 몇년간 새롭게 생긴 각종 문학상, 혹은 보통 300쪽 안팎으로 구성되는 단행본 분량에 비해 더 짧거나, 아니면 아예 다 파괴하고 더 길게 쓰면서도 파격적으로 편집된 책 같은 경우 전자책 제작을 염두에 둔 일종의 실험이라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15년 동안 전자책 혁명을 떠들었으나, 전자책 혁명은 여전히 더 두들겨봐야 할 돌다리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가난한 베이비부머 “돈 없어 30% 깎여도 노령연금 조기수령”

    가난한 베이비부머 “돈 없어 30% 깎여도 노령연금 조기수령”

    요양보호사 최모(56·여)씨는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해 월 28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 정상적인 수급연령인 61세에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30% 삭감된 액수다. 최씨는 “몸이 아프신 시어머니의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신청했다”면서 “오래 살아서 연금을 더 받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 노령연금 수급자 10명 중 1명 이상이 최씨처럼 조기노령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후 당장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연금 수령액의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조기노령연금의 수급 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해 이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지만, 최근에는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정년 연장과 같은 해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기노령연금은 만 61세에 수령할 수 있는 노령연금을 56~60세 때 앞당겨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한 해 앞당겨 받을 때마다 수령액이 6%씩 감액돼 56세 때 수령하면 30% 감액된 금액을 받는다. 25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는 지난해 말 32만 3238명으로, 전체 노령연금 수급자 274만여명의 11.7%다. 이 비중은 2008년 7.7%에서 계속 증가 추세다. 베이비부머들의 조기노령연금 신청이 급증한 데에는 은퇴와 이로 인한 노후 빈곤이 주된 영향을 끼쳤다. 국민연금연구원의 ‘조기노령연금 수급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조기노령연금 수급자 500명과 비수급자(56~64세)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수급자 중 비경제활동인구는 62.4%로, 수급자가 비수급자(37.8%)보다 일을 하지 않는 확률이 높았다. 김헌수 국민연금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들 중에는 주된 일자리에서 은퇴했거나, 은퇴 후 재취업을 해도 이전과 같은 급여수준의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기노령연금 수급자가 느는 것은 그만큼 ‘저연금 수급자’의 양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기노령연금은 정상적으로 받는 노령연금보다 전체 수령액이 적을 수밖에 없다.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들이 비수급자보다 소득도 적고 근로 기간도 짧은 경향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노후소득마저도 ‘부익부 빈익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조기노령연금의 신청 조건을 보다 엄격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올해는 월 급여가 291만원 이하면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한 연금 전문가는 “연금을 쉽게 앞당겨 받을 수 있으면 일을 포기할 가능성도 높은 만큼, 근로 유인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관대한 소득 기준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비부머들이 노후 준비를 못한 채 은퇴에 내몰린 상황에서는 조기노령연금의 수급 문턱을 높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다.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는 정년 연장과 같은 해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연구센터장은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 등 노동시장 개편을 통해 베이비부머들이 근로할 수 있는 기간을 늘려야 조기노령연금 급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삼성 홍보담당 300명 왜 한자리에?

    삼성그룹의 홍보 담당자 3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25일 삼성그룹에 따르면 그룹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 임직원과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생명 등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임직원들은 이날 경기 용인에 위치한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워크숍은 삼성그룹에서 같은 일을 하는 홍보 담당자끼리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유대와 결속을 다지고 홍보 노하우를 공유하는 시간을 마련하자는 의견이 그동안 많았다”며 “원래 연초에 계획돼 있었으나 삼성전자 불산유출 사고 등으로 인해 뒤늦게 열렸다”고 말했다. 행사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됐으며, 단순히 안면을 익히는 자리가 아니라 효율적인 홍보를 위한 방법 등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4개 계열사가 홍보 사례를 발표했으며, 20개 계열사는 올해 중점 홍보 추진 전략 등을 공개했다. 홍보 원칙과 관련한 강연도 진행됐다. 삼성그룹 홍보 담당 임직원들이 하루 일정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과거에는 조찬세미나 등의 형태로 모임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최근 몇년 동안은 이마저도 열리지 않았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北, 위협 수위 낮추고 ‘출구찾기’ 나섰나

    동해안 지역에 미사일 이동식 발사대를 배치하는 등 연일 위협 수위를 높여 왔던 북한이 최근 대남 위협 수위를 낮추고 인민군 창건 81주년(25일)도 차분한 분위기에서 맞고 있어 주목된다.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기 위한 국제사회의 대화 노력이 계속되고, 미국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 재개까지 검토하고 나서자 북한도 출구를 찾기 위해 숨 고르기에 나선 모습이다. 지난주 국방위원회 등 각종 기관을 동원해 연달아 발표한 대남·대미 비난 성명도 이번 주 들어 1건으로 줄었고, 이마저도 미국이 최근 인권보고서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은 데 대한 외무성 대변인의 의례적인 입장 발표였다.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가능성까지 제기된 인민군 창건기념일 행사도 우려와 달리 조촐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열병식 등 대규모 행사를 벌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인민군 창건기념일을 하루 앞둔 24일 북한 주민 대표들이 인민군 부대를 찾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군인들에게 보내는 선물을 전달했으며, 군인들과 함께 체육·오락 경기를 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등 격려했다고 전했다. 우리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도 군 창건일을 앞두고 지난 23일 북한 주재 외국무관단 등을 초청해 연회를 여는 등 예년 수준의 사전 행사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 15일 최대의 명절로 여기는 김일성 주석의 101회 생일도 열병식 없이 비교적 작은 규모로 치렀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4월 말까지 북한 각 기관의 대남·대미 압박성 성명이나 담화 발표가 간간이 있을 수 있지만 미사일 발사 등 실질적인 긴장 고조 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전반적인 흐름이 관망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다음 달 7일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화 국면이 열리면 북한과 미국이 각각 새로운 제안을 갖고 비공식 외교 경로인 ‘뉴욕채널’을 통해 물밑 접촉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가왕, 2000여 팬 앞에서 10년만의 ‘헬로’…“신인때 처럼 제 심장도 바운스 바운스”

    가왕, 2000여 팬 앞에서 10년만의 ‘헬로’…“신인때 처럼 제 심장도 바운스 바운스”

    “다행히 예순 세 살 먹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해서 너무 기뻤어요. 목소리가 힘이 없으면 너무 실망이 될 것 같아서 연습도 많이 했습니다.” 폭발적이면서도 절제된 목소리, 풍성하면서도 간결한 음악. ‘영원한 오빠’ 조용필의 열정은 여전히 젊고 푸르렀다. 23일 10년 만에 선보인 19집 앨범 ‘헬로’로 온·오프라인 음반시장을 석권한 조용필은 이날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쇼케이스를 열고 2000여 팬 앞에서 ‘가왕’(歌王)의 귀환을 알렸다. 그는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선 공개곡 ‘바운스’에 이어 앨범 타이틀곡 ‘헬로’ 등 신곡들이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20~30대는 물론 중장년층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끄는 데 대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앨범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뜨거운 반응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저도 심장이 바운스한다(뛴다)”고 말했다. 음악 차트에서 1위를 해본 것이 근 20년 만이라는 그는 이번 앨범이 지금까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10년간 기다려 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헬로’에서 보듯, 19집 앨범은 팝과 발라드는 물론, 록앤롤과 일렉트로닉 등 장르를 아우르는 혁신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음악의 깊이보다는 그냥 편안한 것을 찾았어요. 지금까지 리듬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음악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전곡이 밝은 내용입니다. 때로는 절제하고, 뱉고, 속으로 움츠러들기도 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데뷔 45주년을 맞은 그는, 여전히 젊은 감각과 한결같은 목소리를 유지하는 비결은 ‘연습’이라고 강조했다. “공연 시작 전에도 두 달간은 하루 서너 시간씩 연습을 합니다. 노래를 더 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을 건강하게 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죠. 녹음을 할 때도 음악과 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하나가 되도록 음악을 완전히 내 속으로 집어넣는 작업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월드 스타’ 싸이와 음원 차트 정상을 다툰 그는 “너무 기뻤고 우리 가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면서 “앞으로 20, 21집을 따지기 전에 노래할(수 있는) 동안 많은 곡을 녹음해 놓고 싶고 공연이 시작되면 새 앨범 구상에 들어갈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이날 쇼케이스 현장에는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층의 팬들이 대거 몰렸다. 조용필이 ‘바운스’와 ‘헬로’ 등을 열창하자 ‘조용필’, ‘오빠!’ 등을 연호하며 그의 컴백을 반겼다. 조용필도 “신인가수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면서 두 팔을 벌려 팬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한편 앨범이 발매된 23일 아침부터 서울 영풍문고 종로 분점 등에는 그의 음반을 구입하려는 팬 400여명이 250m가량 줄을 늘어서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경남 김해에서 온 김경애(46)씨는 “열 살인 딸과 함께 어제 저녁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 하룻밤을 자고 오전 6시 여기에 왔다”면서 “‘창밖의 여자’ 때부터 팬이었고 딸도 ‘조용필 오빠’라고 부른다”고 웃었다. 낮 12시에 온라인에 공개된 타이틀곡 ‘헬로’는 주요 온라인 차트에서 1위를 휩쓸었다. 특히 벅스에서는 수록곡 10곡이 1~10위를 모두 차지했고, 네이버뮤직에서는 9곡, 싸이월드뮤직에서는 8곡 등 앨범 수록곡들이 ‘톱 10’을 차지했다. 앨범 선 주문량 또한 2만장을 넘는 등 앨범 판매량도 큰 폭으로 늘 것으로 전망된다. 조용필 기획사인 YPC프로덕션의 관계자는 “마치 조용필의 한창 때인 1980년대 팬들이 음반을 사려고 줄을 섰던 때와 비슷한 풍경”이라며 “팬들의 정성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기계전사 109’의 김준범, 힐링 만화로 돌아오다

    ‘기계전사 109’의 김준범, 힐링 만화로 돌아오다

    늘 옛 작품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현재진행형인 작가에게 그리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20여년 전 장편 데뷔작을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작품이 한국 만화사의 한 페이지를 아로새긴 까닭이다. 1989년 12월 청소년 만화 잡지 ‘아이큐점프’를 통해 처음 선보인 한 편의 SF 만화에 국내 만화 팬들은 열광했다. 인간과 사이보그의 전쟁을 다룬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이었다.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으나 민주화 물결과 계급 투쟁 등 당시 국내 사회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국형 사이버펑크로 각광 받았다.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일본 만화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그 시기. ‘망가 쓰나미’에 맞서 한국 만화의 자존심을 살렸던 작품으로도 기억된다. 바로 ‘기계전사 109’다. ‘기계전사 109’의 김준범(46) 작가가 힐링 만화로 돌아왔다. 최근 ‘네모가 동산으로 간 까닭은?’(북극곰 펴냄)이라는 명상 만화를 출간했다. 법륜 스님의 정토회 홈페이지와 정목 스님의 유나방송 홈페이지에서 ‘코스모스 로드’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연재했던 것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동글선사와 그의 제자인 네모, 동글이와 그 친구들, 외계인과 견공들이 주고 받는 문답을 그렸다. 1990년대 국내 출판계에 명상 에세이 바람을 일으켰던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 힐링 만화다. “우리 나라가 어느 정도 경제적 부유함을 갖추긴 했어도 강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때문이에요. 요즘 세상을 보면 아이들에게 마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경제적인 동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죠. 쉬엄 쉬엄 마음 편하게 살아도 나쁠 게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결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예수, 부처, 노자, 장자가 했던 이야기들을 21세기 현재 우리 식으로 바꿔 만화로 옮긴 것 뿐이죠.” ’기계전사 109’를 생각하면 언뜻 연결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힐링 만화를 그리게 되기까지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2000년 대 들어 별자리와 인연을 맺은 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그는 2002년 천문 해석 공부를 시작한 뒤 만화 보다는 천문 해설 활동에 매진했다. 천문선원이라는 작은 오프라인 공간과 코스모스로드(www.cosmosroad.com)라는 온라인 공간을 근거지 삼아 별자리 강좌와 상담을 갖고 별자리 입문서 ‘별이 전하는 말’을 집필하기도 했다. “10년 정도 천문 공부를 했어요. 어스트랄로지(astrology)하면 대개 점성술이겠거니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 데 그것만은 아니에요. 마음 공부의 하나죠.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부터 성경, 불경까지 공부해야 해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죠. 그래서 힐링을 키워드로 만화를 그리게 됐죠.” 그가 새로 단행본을 낸 것은 거의 10여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만화로는 소식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중의 뇌리에서 김준범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서서히 잊혀져 갔다. 한국 만화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 작가로 손꼽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무대였던 만화 잡지 시장에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이 찾아왔어요. 만화 대여점이 생기며 더욱 부채질했죠. 서른 즈음에는 2년가량 투병 생활을 하며 펜을 놓기도 했습니다. 창작 환경이 원고 작업에서 컴퓨터 작업으로 옮겨갔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까닭도 있어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그림체가 바뀌고 스토리가 달라졌습니다. 인기를 쫓는 쪽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대중에게는 활동을 안하는 것처럼 보였나 봐요. 그렇게 대중과 점점 멀어진 것 같아요.” 마냥 세상의 변화를 탓하며 방황만 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흐름 속에서 1인 만화 웹진이나 선주문 출판 등을 통해 기존 만화 유통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만 남았을 뿐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지금은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발 비껴 선 처지. 시대의 파고를 넘어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는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을 지켜보면 부럽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몇몇 작가라도 살아남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윤태호 작가 등 가진 실력에 견줘 조명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상태는 너무 기쁘죠. 저도 언젠가 살아날 수 있는데, 그 무대를 지켜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김 작가는 2013년을 만화 복귀 원년으로 삼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비상업 만화를 그렸다면, 앞으로는 상업 만화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작화 보다는 스토리 작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조만간 스마트폰을 통해 선보일 계획이다. 별자리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랑에 대한 청춘들의 고민을 다루는 아이돌판 ‘섹스 앤 더 시티’ 느낌의 작품이라고 김 작가는 귀띔했다. 원소스멀티유즈(OSMU)를 꿈꾸며 2500년 전 인도를 배경으로 한 부처 제자의 삶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오랫 동안 천문 공부, 마음 공부를 하며 수 천 년 내려온 좋은 말씀들을 만화로 옮기다보니 언젠가부터 스토리 창작에 대한 욕구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지난해부터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올해엔 만화와 관련한 여러가지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우리 만화 팬이라면 ‘기계전사 109’ 같은 작품을 기대할 게 분명할 터.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다른 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만화 팬들이 20년 전 ‘기계전사 109’ 같은 그림만 떠올리는 게 아쉬워요. 그 같은 작품을 소설이라고 한다면 언젠가부터 한 편의 시 같은 그림체로 옮겨갔지요. 소설 같은 그림체는 저보다 훨씬 잘 그리는 후배들이 많아 굳이 직접 그릴 필요가 있겠나 싶어요. 그래서 서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후배에게 그림을 맡기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직접 그려 보려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 고승들의 삶을 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설 같은 그림체로 한 번 쯤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준범 작가는 원래 만화가가 아니라 화가를 꿈꿨다. 그런데 화가는 미대를 나와야 할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을 만큼 고지식 했다. 공부에 자신이 없었다. 미술 외에 국영수까지 잘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던 그는 1985년 허영만 화실의 문들 두드리며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2시간 10분’ ‘아스팔트 위의 사나이’ 등의 스토리를 써 이름을 날리던 노진수 작가와 의기투합해 내놓은 첫 장편이 바로 ‘기계전사 109’다. 이후 ‘따로 따로 형제’(1991) ‘ ‘부전자전’ ‘필승아 놀자’(이상 1998) 등을 가족과 따뜻함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글·사진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경제민주화는 내리치고 옥죄는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리면 꿈 이루는 환경 만드는 것”

    박근혜대통령은 22일 경제민주화 개념과 관련해 “어디를 내리치고 옥죄는 게 아니라 각 경제주체가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려서 일하면 꿈을 이룰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열고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눌러서 열심히 땀 흘려도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는 사회는 절망적이니 그런 얘기가 없게 하자는 것이지 누구의 희망을 꺾자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취지에 맞춰 보면 경제민주화는 틀림없이 제 길을 갈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개념이 사실상 ‘재벌 개혁’에서 ‘공정 경쟁’으로 바뀐 것으로 분석된다. 박 대통령은 중소기업을 전담 지원할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드러냈다. 그는 “우리나라에 여러 출연연이 있지만 그중 한 출연연은 중소기업 전담이 돼야 한다”면서 “중소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할 수 없는데 도와주는 전담 출연연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도 강력히 촉구했다. 그는 “한쪽에선 규제를 풀고 한쪽에선 또 만든다고 고통을 얘기하는 기업들을 많이 봤다”면서 “경제는 심리라고 하는데 이 어려운 상황에 투자를 하겠다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힘을 실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부에 와닿게 확실하게 규제를 풀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그냥 찔끔찔끔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서는 “화상회의 등 과학기술을 최대한 이용해 업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정보기술(IT)이 게임만 하는 데 쓰이는 건 아니다”며 “일상화돼야 한다. 국무총리도 시범을 보이시고 저도 시범을 보여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20일 장애인의 날… 하반신 마비 8살 수민이의 일기

    20일 장애인의 날… 하반신 마비 8살 수민이의 일기

    20일은 33회 장애인의 날이다. 초등학교 1학년 수민(가명)이는 태어나면서 소아암에 걸려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활동보조인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어른스러운 수민양의 일상을 통해 장애복지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안녕하세요. 전 서울 강동구 A초등학교 1학년 수민(가명)입니다. 올해 8살이 됐죠. 태어나자마자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소아암 진단을 받았고 15번의 항암치료 끝에 완치됐죠. 하지만 암세포가 척추를 눌렀던 후유증으로 걸을 수 없어요. 전 4살 때부터 학교에 가는 게 꿈이었어요. 친구들이 뛰어노는 시간에 전 책을 읽고 시도 쓰면서 초등학생이 되기를 기다렸죠. 학교에 가면 교실에서 선생님한테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니까요. 엄마는 절 평범한 애들이랑 한 반에 넣으셨어요. 특수반은 머리가 아픈 친구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서 공부는 잘 안 배우거든요. 저도 몸은 불편하지만 공부는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입학하고서는 이모(활동보조인)와 함께 학교에 다녔어요. 저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서 나라에서는 사람을 보내 주는 ‘장애인 활동지원제도’라는 걸 시행하고 있는데 올해부터 저 같은 ‘2급 장애인’도 지원해 주거든요. 지난해엔 하루 종일 누워 있는 1급 장애인들만 도와줬는데 돈이 많이 남았대요. (지난해 지원제도 예산은 800억원이 남아 올해로 이월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장애인 24시간 돌봄서비스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모는 참 고마운 분이셨어요. 친구들이 뛰어다니는데 혹시 제 휠체어가 넘어질까 봐 잡아 주기도 하고 하루에 두 번씩 제 도뇨(소변을 기구로 뽑아내는 일)도 꼬박꼬박 도와주셨죠. 떨어진 지우개도 집어 주셨어요. 그런데 2주 있다가 휴가를 내셨어요. 절 들어서 옮기거나 휠체어를 미는 게 힘들어서 몸살이 나셨대요. 허리 보조기까지 하면 제가 30㎏이나 되거든요. 수업 시간 내내 저 같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의자를 놓고 수업을 듣는 것도 부끄러우셨대요. 이틀 있다가 오신다던 이모는 다시 오지 않으셨어요. 이모부가 관두라고 하셨대요. 지금은 도뇨는 집에서 할머니가 와서 해 주시고요. 학교에선 친구들 방해 안 되게 무조건 조용히 있어요. 제가 넘어지면 담임 선생님이 불편하시잖아요. 엄마는 한달째 전화통을 붙잡고 계세요. 복지관이랑 서울시랑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이제 엄마랑 제 이름을 척 아실 정도죠. 저처럼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나 많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활동보조인 구하기가 힘들대요. 그분들이 거의 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서 힘든 일은 잘 못 하신대요. 전 복잡해서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이렇게 전해 달래요. “활동보조인의 업무 강도를 감안하지 않고 지금처럼 장애 정도에 따라 월 사용 시간만 정해 주면 수민이 같은 중증 지체장애인들은 계속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고요. 나라에서 전 한달에 72시간짜리 서비스 대상이라고 정해 줬거든요. 그런데 이모들은 한달 내내 한 사람만 보고 싶어 한대요. 제가 생각해도 차비도 안 주니까 직장이 하나인 게 좋을 거 같아요. 엄마가 또 한숨을 쉽니다. ‘저 장애인 처지가 딱하니 네 몸이 망가지더라도 좀 돌봐 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시간이 아니라 제가 얼마나 학교에 잘 다니고 싶고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지를 재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로비단체에 밀린 총기규제안… 美상원 부결

    ‘오바마의 총기 규제안, 결국 로비단체에 밀렸다?’ 지난해 12월 미국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최악의 총기 참사를 계기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추진해 온 총기 규제법안 가운데 7가지가 17일(현지시간) 미 상원 전체회의에서 모두 부결됐다. 특히 지난 11일 초당적 합의로 토론에 부쳐졌던 총기 구매자에 대한 예외 없는 신원·전과 조회 조치마저도 예상과 달리 부결되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총기 규제안이 로비단체에 밀려 한동안 표류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미 상원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총기 구매자에 대한 신원 조회 확대 조치를 포함한 7가지 총기 규제 개정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한 결과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피하는 데 필요한 60표를 얻지 못해 모두 부결시켰다. 특히 구매자 신원 조회 확대 조치는 지난 11일 찬성 68표, 반대 31표에서 이날 찬성 54표, 반대 46표로 찬성표가 14표나 줄어들어 집권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11일 표결에서는 민주당 의원 2명이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5명으로 늘었고 공화당 의원 상당수가 반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들이 반대표를 던진 것은 내년 재선거를 고려한 처사”라며 “총기 소지를 찬성하는 지역 여론과 미국총기협회(NRA) 등 로비단체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라고 전했다. NRA 등 총기 소지 옹호 로비단체들은 총기 규제가 헌법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의원 등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 왔다. 이날 반자동 소총 등 공격용 무기와 10발 이상 대용량 탄창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도 표결에 부쳐졌으나 찬성 40표, 반대 60표로 과반조차 얻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표결 직후 총기 사건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오늘은 부끄러운 날”이라며 “총기 로비단체가 미국인들에게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우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며 이날 표결이 마지막이 아님을 강조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