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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사회 징검다리 역할 할 것”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계 언론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가슴이 뿌듯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검찰의 첫 아시아계 공보관인 교포 신디 신(33)씨가 6년 만에 모국을 찾았다.재외동포재단이 28일부터 개최하는 ‘차세대 지도자 워크숍’에 초청받아 방한한 신씨는 법무부 등을 비공식 방문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신씨는 22일 대검을 방문한 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는데 뒤돌아보니 지금 자리에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것 같다.”면서 “21살 때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절반씩 살아 영어·한국어에 능통하고 기자생활을 한 점이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낸 부친이 KBS 특파원일 때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신씨는 미국에서 10년을 살다 한국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방송저널리즘을 전공했다.2000년 시카고의 한인 방송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2년 뒤 LA로 건너와 한인 TV나 라디오 방송의 앵커 겸 기자로 활약했다.연합뉴스
  • [옴부즈맨 칼럼] 편파보도와 사회분열/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옴부즈맨 칼럼] 편파보도와 사회분열/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대한민국을 한차례 뒤집어 놓았던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사태가 무더위와 장마의 계절 속으로 그런대로 사그라지고 있다. 대신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과 일본의 독도 도발 사건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회 이슈들은 이처럼 한쪽이 다른 쪽을 대체하며 나아가는 법이지만, 광우병과 촛불 사건은 이를 보도하는 언론 문제와 뒤얽혀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언론들은 제멋대로 편파 보도, 공격 보도를 일삼았고, 사회는 문제의 언론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모습이 너무 후진적이어서 부끄럽다. 문제의 발단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의 통합을 지향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에서 비롯됐다.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국민과 살갑게 대화할 줄 모르는 정치권력은 촛불에 기름을 부은 꼴을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분열케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언론들은 사회적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드는 확성기 노릇을 했다. 소위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으로 나뉜 언론들은 더이상 편파보도를 숨기지 않는다.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애시부터 찬반 입장이 먼저 정해지고, 거기에 맞춰 사실과 정보들을 편향적으로 취사선택 편집함으로써 이슈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 버린다. 언론의 광우병 보도, 촛불시위 보도에는 저널리즘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 보도, 객관보도의 정신이 실종됐다. 언론들은 사실을 비틀고 축소 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의견과 주장이 다른 편에 대해 공격을 쏟아 붓는다. 일부 언론의 공격 저널리즘은 분노와 저주, 비난과 비아냥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동반한다. 감정으로 격해진 언론의 공격 보도는 언론들간의 한바탕 싸움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민집단간의 분열적 다툼으로 비화된다. 광우병 보도를 놓고 MBC PD수첩과 이른바 조·중·동 신문이 한바탕 기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편파적 언론들의 네탓 싸움에 불과하다. 정파적으로 편이 갈라진 언론들의 편파 보도는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있다. 보수집단은 진보언론을, 진보집단은 보수언론에 대해 불신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 서울신문은 지난주 창간 104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언론의 이념적 정파적 편향 조건을 경험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극복하기도 했던 서울신문은 이제 객관과 공정 언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서울신문의 광우병과 촛불시위 보도만 보아도 객관과 균형을 위해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PD수첩 관련 보도는 ‘방통심의위 결정, 해명방송 임박,PD수첩 수사 이번주 ‘분수령’’(7월15일자 9면),‘한총리 PD수첩에 손배 검토’(7월19일자 2면),‘여야 국회 긴급현안질의 무게중심 이동, 쇠고기 잠잠 촛불-PD수첩 공방’(7월19일자 4면),‘MBC,PD수첩 징계수용? 불복?’(7월19일자 9면) 등의 기사에서 사태의 추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한 7월18일자 9면 ‘언론자유 침해 vs MBC 신뢰 추락’,‘與6 대 野3 방통심의위원 중립 논란’ 기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16일 MBC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관련 방송에 대해 ‘시청자에 대한 사과’란 중징계 결정을 내린 데 대한 사회적 논란을 균형감 있게 보도하고 있다.7월17일 ‘PD수첩, 완벽하진 않지만 왜곡없다고?’ 사설은 PD 수첩이 왜곡 편파 보도의 문제를 제대로 시인하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 “PD수첩 제작진의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며 따끔하게 질타하고 있다. 편파와 분열의 언론 환경에서 객관과 공정과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정론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104년의 전통과 역사를 근거로 하여 서울신문이 혼탁한 이 시대의 정론지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PD수첩 사과방송 중징계’ 논란 가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16일 MBC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관련 방송에 대해 ‘시청자에 대한 사과’란 중징계 결정을 내리면서 PD수첩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방통심의위 결정에 대한 반응부터 크게 엇갈린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방통심의위가 주의 정도에 그치지 않고 언론에 사과방송을 하도록 한 것은 매우 정치적인 판단”이라면서 “언론의 자유와 양심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방통심의위 결정은 공적 기관이 PD수첩의 왜곡·편파보도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MBC 전체의 공신력 추락은 물론 MBC 민영화 논의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PD저널리즘의 효용성을 놓고도 의견이 갈린다. 김서중 교수는 “사실과 진실에 근거해서 보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PD저널리즘과 기자저널리즘 모두 예외일 수 없다.”면서 “100% 사실보도라는 기준으로만 저널리즘을 평가한다면 PD수첩을 비판하는 모든 언론들이 매일 사과문을 내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룡 교수도 “중요한 건 왜곡보도 여부이지 일반저널리즘과 구분되는 PD저널리즘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이번 사건을 통해 ‘PD수첩식’ 저널리즘은 존립 자체에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방통심의위 결정은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법원 판단 이전에 내려진 위원회 중징계 결정은 어떤 식으로든 사법기관의 판단 근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PD수첩에 대한 중징계를 계기로 여당 대 야당 몫의 위원 비율이 6대3인 방통심의위의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 또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구조상 정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방통심의위가 정치적 맥락 속에서 방송이라는 매체를 다루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MBC는 17일 오후 9시 뉴스데스크를 통해 “프로그램 내용 중 일부 오역과 생방송 중 진행자의 실수가 있었고 정정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방통심의위의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방송 내용 전체가 불공정하게 비쳐지고 일부 신문 보도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확산되는 상황은 유감”이라며 “이는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판단돼 (다음주 중) 방통위로부터 공식 결정 문안을 받는 대로 재심신청 여부 등 회사 방침을 정할 것”이라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신문산업과 서울신문] 규제 커진 포털 해법은 ‘오프라인과 상생’

    ■온라인 저널리즘 전망 ‘온라인 저널리즘’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신문 기업들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콘텐츠 유통 창구의 이동을 가속화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저널리즘의 건강성과 효용성의 측면에서 보완할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최진봉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교수는 “온라인 저널리즘의 출현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쌍방향적 정보 유통의 구조를 실현하고 있고 그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점으로 ▲인터넷 매체의 편집 구조가 기존 언론 매체처럼 폐쇄적이고 ▲정보의 검증이 쉽지 않아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이용자층이 일부에 집중돼) 전체 사회 구성원의 의견 수렴에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일정 단체나 기관의 홍보 매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든다.(디지털 미디어 트렌드 08-03호 ‘온라인 저널리즘의 영향력과 한계’) 포털의 ‘뉴스유통자’로서의 영향력 심화도 우려되는 대목의 하나다. 포털은 각 언론사의 뉴스를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배열·편집 등을 통해 뉴스 생산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파급력이 크고 신속한 인터넷의 특성상, 오보나 명예훼손성 댓글 등으로 인한 피해가 커 향후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네이버가 하반기부터 정보 편집권을 개방하는 ‘오픈 캐스트(Open Cast)’ 전략을 구체화할 방침이어서 주목된다. 이에 대해 김영주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은 “그동안 포털에 대해 제기된 사회적 책임 요구를 받아들인 타협책으로 보여진다.”면서 “책임의 상당 부분이 신문사 각자의 몫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으며, 네티즌들의 뉴스 이용 습관도 조금씩 변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는 포털이 우월적인 위치에서 계약을 맺고 불공정한 편집과 거래 등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신문이 차별화된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등 서로 협력하고 공존하는 상생의 모델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신문산업과 서울신문] 신문 없이 인터넷만으로 ‘세상’이 보일까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신문산업과 서울신문] 신문 없이 인터넷만으로 ‘세상’이 보일까

    종이신문의 생명력은 영원할까. 첨단 뉴미디어 매체가 한층 보편화될 미래에도 종이신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할까. 종이신문의 미래를 보는 시각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혹자는 “영향력은 줄어도 매체 다양성의 측면에서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시점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널리즘의 기능은 어떤 형식으로든 존속할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언론재단이 전국 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언론 수용자 의식조사’(‘신문과 방송’ 7월호)에 따르면, 신문의 위기는 양적·질적 모두 고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기구독률은 36.8%로 1996년 69.3%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신문의 대표적인 강점으로 꼽히던 ‘신뢰도’와 ‘영향력’도 인터넷보다 뒤지는 결과를 보였다. 특정사안에 대해 신문,TV, 잡지, 라디오, 인터넷 등 5개 매체가 동시 보도했을 경우 어떤 매체의 보도를 가장 신뢰하는지 물어본 결과,TV(60.7%)-인터넷(20.0%)-신문(16.0%)의 순으로 나타났다. 신문이 어쩌다 이같은 위기를 맞게 된 것일까. 황용석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산업의 위기와 신뢰의 위기가 동시에 왔다.”고 진단한다. 전자는 구조적·수용자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신문이 과잉공급되는 상태에서 경쟁매체보다 고품질의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뉴스 이용 패턴이 1일 주기성에서 다접점 소비로 바뀌는 등 전통적 주기성이 깨져 신문의 효용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후자에 대해서는 ▲정치논쟁과 저널리즘 사이를 오가며 정파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신뢰도를 잃게 됐다고 지적한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김서중 교수는 “신문은 영상·음성 매체와 달리 문자매체로서 일관성·심층성·전문성에서 월등하다.”면서 “현재의 위기는 이를 제대로 차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신문이 설사 다른 형태의 매체로 대체된다 하더라도 특유의 역할 자체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 신문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황용석 교수는 “신문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에 맞는 고급형 보도를 제공하고, 신문사별로 시장을 세분화해서 자기의 고유한 마켓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우수한 저널리스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콘텐츠 생산 방향과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영과 저널리즘 양 측면에서의 변화가 절실하다는 설명이다. 한편 최진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는 “신문의 구성원·조직·고객관리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전제, 우선 종합멀티미디어 환경에 맞게 통합뉴스룸을 만드는 등 조직 체질을 바꾸고, 일대일 마케팅·개인별로 타깃화된 뉴스 생산 등 고객관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설정할 것을 주문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신문산업과 서울신문] 신문 위기 탈출구 ‘시민 이야기’서 찾아라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신문산업과 서울신문] 신문 위기 탈출구 ‘시민 이야기’서 찾아라

    신문의 미래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창간기념 특집호에 실린다니 희망적이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신문의 미래를 잘 모릅니다. 들려오는 풍문은 두 가지입니다.‘암담하다.’와 ‘그래도 길이 있다.’입니다. 저는 후자를 믿습니다. 이건 인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미래를 안다고 말하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모호하게 말하면 점쟁이, 분명하게 말하면 사기꾼입니다. 학문도 미래를 추론하는 한 가지 단서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찍이 가수 전인권은 미래를 탐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1980년대 들국화의 히트곡 ‘행진’의 한 대목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미래의 전망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걸 사랑할 수 있다면 눈비도 껴안고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자아의 서사’가 있다면 과거의 힘으로 미래로 행진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물론 행진의 결과가 주체의 태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의 운명은 환경의 변화와 주체의 행동이 반응하는 화학방정식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노래는 환경에 적응하는 민첩함보다 주체의 꿋꿋함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을까요? 알기 어렵고 변화시키기 어려운 미래의 환경보다, 너무 잘 알고 마음만 먹으면 변화도 가능한 현재의 주체를 통해 미래를 대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래서 저도 ‘뉴미디어 환경에서 신문의 미래’란 주문을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더 나은 신문의 미래를 위해 현재 기자들은 무얼 해야 할까? 신문이 위기라고들 합니다. 다들 이유를 진단합니다. 뉴미디어 환경에서 매체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신문사의 경영 노하우가 신통찮다는 진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간혹은 언론의 신뢰도 하락도 지목됩니다. 다 맞는 얘깁니다. 이에 따른 타개책이 제시됩니다. 매체겸영이 매체경쟁력을 살려줄 거라고 합니다. 뉴스룸 통합이 생산비를 절감해줄 거라고도 합니다. 기자의 전문화가 기사 품질을 높일 거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몇몇 현장기자는 기사체를 바꾸자고 합니다. 다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위기의 대상이 ‘언론’이 아닌 ‘언론사’로 가정된다는 겁니다.‘신문의 위기’는 ‘뉴 미디어 환경에서 신문사의 산업적 위기’를 줄여 놓은 말 같습니다. 일선기자들도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 신문의 위기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성장한 시민사회 속에서 신문의 신뢰성 위기’가 본질에 가깝습니다. 신뢰성 하락은 산업적 위기가 아닌 저널리즘의 위기입니다. 환경의 변화가 아닌 주체의 행동이 원인입니다. 위기의 대상은 ‘언론사’가 아니라 ‘언론’으로 가정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혹자는 언론사가 있어야 언론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건 경영자의 시각입니다. 언론이 있어야 언론사도 있다고 보는 게 기자의 시선입니다. 언론사가 있어야 언론이 있다는 주장은 경영과 편집의 조직 위계를 확인하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기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편집권 박탈에 순응하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촛불집회는 ‘언론’의 위기가 ‘언론사’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조중동의 보도에 화난 시민들은 절독운동과 광고주 압박 운동을 펼쳤습니다. 촛불집회는 ‘일부 세력’에 의한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큽니다. 지금은 종교단체까지 동참하고 있습니다. 조중동은 촛불집회의 성격을 민심의 폭발로 보지 않았습니다. 6월11일자 지면은 그 엄청난 집회를 건조한 시위기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의견이래야 보수단체의 소규모 집회를 촛불집회와 기계적 균형을 갖춰 편집하면서 ‘의견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정도였습니다. 폭력에 대한 우려를 가불하는 글도 몇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편집의 수사학이 초라한 ‘물타기’였습니다.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촛불집회 보도는 조중동의 완벽한 참패였습니다. 그것이 평소의 정치적 성향 때문인지, 참여정부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진보정권 내려앉히기에 성공을 거둔 나머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과도한 애프터서비스의 책임을 느낀 탓인지, 촛불집회 초기에 변화의 행방을 잘못 판단한 편집과정의 실수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에브리싱 콤비네이션’이겠지요. 어쨌든 조중동은 엄청난 자산을 까먹었습니다. 당장의 절독과 광고 감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초·중·고생들의 이목까지 집중된 인터넷에서 입은 이미지 손상을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그 반사이익을 경향과 한겨레가 챙겼습니다. 두 신문은 촛불집회의 성격 규정은 옳았지만, 표현의 수위는 매우 선정적이었습니다. 아마 세계 유력지를 불러 모아 촛불집회 보도 콘테스트를 했으면 하위권에 머물렀을 겁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절대적 지지를 보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민들이 조중동은 없었고 한겨레와 경향은 있었던 그 무엇에 목말랐던 게 아닐까요? 저는 그게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의 대리인 역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 반대 역할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시민의 생각을 정책자에게 알리는 일은 매우 소홀합니다. 현재 취재관행으로 보면 구조적인 사각지대입니다. 대부분의 취재가 출입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민의 존재를 염두에 두는 감각 자체가 퇴화한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분명한 사실은 시민사회의 의지를 정책자에 알리는 언론의 역할을 시민들이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재의 언론이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촛불이 꺼지고 광장의 함성이 사라진다 해서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의심과 요구가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입니다. 이제 시민들은 ‘사실보도’를 표방하는 언론의 수사학에 좀체 속지 않습니다. 눈 밝은 이들이 보도의 문제점을 인터넷에 올리면 귀 밝은 이들이 여기에 맞장구치는 거리의 미디어비평이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사실보도’의 의미는 다만 사실을 알고 있다며 발언권을 독점하기 위한 슬로건이 아니었나? 그래서 객관주의의 정치적 사용맥락은 엘리트주의가 아니었나? 사건 기사처럼 건조하게 기사를 쓰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은 시민의 위치가 아닌 국가의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저는 요즘 내러티브 저널리즘에 흥미가 많습니다. 개인의 이야기를 전면화하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기사를 흥미 있게 쓰는 글쓰기 전략이기 이전에 개별적 인간을 존중한다는 철학적 함의가 있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현장과 사실의 강조는 일반화하지 말고 개별성을 오래 응시하라는 주문입니다. 그건 제도와 개인이 충돌하는 곳에서 개인의 자리에 서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치열한 언론의 현장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교통사고 현장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 삶이 사회제도와 충돌하는 바로 그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평론가
  • [서울광장]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구본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구본영 논설위원

    며칠 전 저녁. 서울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캐나다인 지인과 만났다.“미국인들은 광우병 걸릴 위험성이 747비행기가 벼락 맞고 자신에게 떨어질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글을 읽은 뒤였다. 그런 그에게 촛불시위의 배경을 권위있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식탁의 안전에 대한 걱정과 일부 반미 정서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쇠고기 문제로 불붙은 ‘촛불’이 두 달 넘게 서울 도심을 달궜다.‘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주말에만 집회를 갖기로 한 데서 짐작되듯 정권퇴진으로 이슈가 변질되면서 기세가 약해지긴 했다. 그러나 공기업 개혁 등 계기가 생기면 다시 터질지 모를 휴화산이다. 그런가 하면 한·미간 추가 협상 이후 미국산 쇠고기를 파는 업소에선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한다. 이쯤 되면 뭐가 진정한 민심인지 헷갈린다. 촛불정국 초반 한 여성 탤런트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 먹느니 차라리 입안에 청산가리를 털어넣겠다.”고 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 또한 연초 미국에서 쇠고기 버거를 먹는 장면이 뒤늦게 인터넷에 오르면서 도마에 올랐다. 문제는 두 사안에 대한 댓글이 찬반에 따라 극단적 편차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자신의 주장은 절대 선이라면서 상대의 의견은 무조건 저주하는 ‘집단사고’만 범람하고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본래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라는 글귀를 원용해 유명해진 말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이 된 듯하다. 이치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중도적 입장은 아예 설 자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촛불시위의 본질은 쇠고기가 아니라 보혁 대결이라는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분석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항로를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광우병 난기류’로 연착륙(soft landing)을 못하고 있는 꼴이다. 국민의 선택으로 출범한 정권이 추락(crash)해서도 안 되지만, 그럴 확률도 적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럭저럭 날아가는(muddling through)’ 5년이 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촛불시위가 상시화하면서 정권이 개혁 추진 동력까지 잃는다면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불행일 게다. 촛불을 든 다수 서민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터이기에…. 그런데도 언론마저 철지난 ‘주창 저널리즘’에 빠져들어 혼돈을 부채질하고 있다. 국민에게 정확한 판단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할 미디어 스스로 패싸움의 주체가 된 꼴이다. 보수성향의 큰 신문들과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신문 및 MBC·KBS 두 공영방송이 뒤엉킨 난전이다. 그러나 이는 공멸의 게임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신뢰도 급락은 국민 다수의 정서에 반해 쇠고기 협상을 졸속 타결한 데 따른 자업자득이라 치자. 신문들이 좌우로 나뉘어 뉴스 아닌 격문을 쏟아내고 있지만, 신문구독률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는 역설을 보라. 우리 사회가 촛불 이후 대의민주주의의 좌절을 이야기하기 전에 ‘숙의민주주의’의 정착에 힘을 모을 때다. 숙의란 “서로 경청하면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대안을 찾아가는 대화”라 할 수 있다. 이는 언론이 제 구실을 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PD수첩 논란 전문가 견해

    검찰이 PD수첩의 광우병 쇠고기 보도 수사에 속도를 붙이면서 이를 바라보는 언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보수·진보 성향과는 무관하게 PD수첩 방송내용에 의도적 왜곡이 있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창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의도적 왜곡이냐 실수냐는 제작진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한 판단하기 힘들다.”고 말했고, 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외부인으로서는 프로그램 왜곡 여부를 가릴 만한 근거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반면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방송 취지와는 무관하게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의 PD수첩 수사에 대해서는 왜곡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채백 교수는 “방송의 공정성을 평가하는 자율규제기구가 있음에도 검찰이 공권력을 동원해 수사에 나선 것은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보수언론단체인 ‘공영방송 발전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이창근 교수도 “언론자유를 감안할 때 검찰 개입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논란의 해법도 검찰 수사가 아닌 저널리즘 원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창근 교수는 “MBC 스스로가 자체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논란의 진실을 밝히는 게 맞다.”고 말했고, 김영호 교수도 “MBC가 이해당사자들이 출연해 해명할 건 해명하고 논쟁할 건 논쟁할 수 있도록 후속 프로그램을 만들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김우룡 교수는 “기왕에 검찰이 손을 댔다면 순수하게 광우병을 우려해 방송을 제작한 것인지, 사회 혼란을 부추기려는 악의적 의도가 있었는지 분명히 밝혀서 언론이 윤리의식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검찰 수사를 지지했다. 한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9일 전체회의를 열고 MBC PD수첩의 의견진술일을 16일로 결정했다. MBC는 방통심의위의 심의결과가 재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며 의견진술을 법원의 1심 판결 이후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방통심의위는 “위원회 심의는 법원 판단과는 성격이 다르다.”며 MBC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아레사 빈슨의 뇌 MRI가 PD수첩 논란을 규명할 핵심 자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 무역대표부(USTR)에 자료를 요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씨줄날줄] 주창 저널리즘/박재범 수석논설위원

    엊그제 한국언론학회가 ‘광우병 파동에서 나타난 언론의 자유와 한계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언론학자들은 무엇보다 ‘뉴스보도의 객관성’에 대해 앞다퉈 쓴소리를 제기했다.“패를 지어서 같은 사안을 다르게 보도함으로써 국민을 혼동케 하는 주범” “경찰기자마저 논객이 된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 등의 따가운 지적을 쏟아냈다. 신문기자를 20여년 이상 직업으로 가진 언론인으로서 뼈아프게 들리는 얘기들이다. 학자들은 현재 언론을 주창(主唱) 저널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객관성보다는 주장을 외친다는 뜻이겠다. 과연 보도는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주관적으로 주창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언론계에서 해묵은 주제이다. 다만 한가지, 객관적 보도를 중시하는 태도는 현대적 언론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20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를 바꿔온 저널리즘의 전통이 됐다.6하원칙에 기초해 사실(fact)을 추적한다. 보도와 논평을 명확히 구분한다. 반면 주관적 저널리즘은 부침을 거듭해 왔다.19세기의 이른바 정파지(政派紙)가 첫번째이다. 정파지는 객관보도에 밀려 퇴장했다. 그러나 물결은 다시 돌아오는 법. 대략 40∼50여년 전쯤 미국에서 다른 포장으로 등장했다. 뉴스에 주관을 섞는 형태로 주관적 저널리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의 대표선수가 21세기를 맞아 한국언론이 매달리고 있는 주창저널리즘이다. 이들은 사실의 정확성이나 객관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한쪽의 팩트와 논리만 옹호하는 보도태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도 초기에 상당히 강세를 띠었다. 젊은 층과 소시민 등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20여년쯤 지나 퇴조했다. 물론 객관보도만이 지고지선일 수는 없다. 부작용이 있기에 새로운 보도태도가 나타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한국언론들이 주창에만 매달리는 건 뭔가 안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주창이 언론의 본질이라면 독자의 신뢰도가 높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수년전 신문의 위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정파성이 뚜렷해졌으나, 신뢰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언론학자들이 주창저널리즘에 대해 질타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재범 수석논설위원 jaebum@seoul.co.kr
  • [부고] 美 ‘뉴욕 매거진’ 창간 펠커

    미국 출판계의 ‘개척자’ 클레이 펠커가 1일(현지시간) 별세했다.82세. 로이터 통신은 이날 “40년 전통의 미국 유명 문화잡지 ‘뉴욕 매거진’의 창간인 펠커가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펠커는 이 잡지를 통해 독보적인 보도 영역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애덤 모스 뉴욕매거진 편집장은 펠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가 없었다면 미국 언론 저널리즘과 뉴욕시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펠커는 1964년 일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일요판 부록으로 뉴욕매거진을 창간했다. 이후 1968년 잡지를 독립시켜 특유의 냉소적 논조와 도시적 색채로 인기를 얻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더 고민해야 할 촛불집회 보도/남재일 세명대 교수

    [옴부즈맨 칼럼] 더 고민해야 할 촛불집회 보도/남재일 세명대 교수

    물대포를 맞고도 활활 타오르던 촛불이 장맛비에 사위어 간다. 소리 없는 가랑비가 더 오래, 더 깊이 적신다더니….6월10일 촛불집회가 정점을 기록한 뒤로 광장은 달라졌다. 지친 시민들이 귀가한 자리를 단체가 메우기 시작했다. 집회 규모는 작아지고 강도는 격해졌다. 때맞춰 정부가 강경 자세로 나온다.‘주모자’를 구속하고 ‘PD 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집회 초반부터 “촛불에도 매연이 있지 않을까?”, 탐구적 자세로 폭력의 단서 찾기에 열중했던 조·중·동은 드디어 “공권력이 짓밟히고 있다.”며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경향과 한겨레는 ‘의견저널리즘’의 극한을 보여주면서 촛불집회를 제2의 민주화 운동으로 부각시켰지만, 지난주부터는 현장사진이 줄어들고 있다. 최근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양상의 격렬함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경향의 28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과격시위 누가…극소수 ‘바뀐 게 뭐냐’”는 최근의 폭력시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기사이다. 전체 촛불집회가 매도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기사 같았는데, 자세가 방어적이었다. 촛불집회는 이제 2라운드를 맞고 있다. 보도의 양상도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겨레, 경향 대(對) 조·중·동의 구도로 대립하고 나머지 신문은 관망했다. 이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의 입지가 넓었다. 6월11일자 지면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향과 한겨레의 기사제목은 마치 격문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촛불집회의 성격을 ‘대의민주제를 보완하는 시민들의 참여’로 본 시각을 자신한다는 것일 게다. 반면 조·중·동의 제목들은 지극히 건조하다. 아무리 봐도 평소의 프레임대로 ‘시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부의 시위’로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을 것이고, 그래서 강 건너 불 보듯 대상화시켜버린 것일 게다. 정치적 동기 때문인지 제작과정상의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촛불집회를 대형 교통사고처럼 다룬 것은 편집의 완전한 실패이다. 사안의 성격과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편집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싫어도 변방에서 잃어나는 폭력의 실마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애초의 판단 착오를 정당화하려는 한판 뒤집기를 시도하려 하지 않겠는가? 경향과 한겨레는 촛불집회를 ‘의심할 바 없는 민심’이고 민주적 집회로 주장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방어의 부담을 진다. 그래서인지 촛불보도의 2회전은 ‘한겨레, 경향이 폭력시위 선동’ 대(對) ‘조·중·동이 강경대응 유도’의 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의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제3의 신문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지난주 서울신문의 촛불보도는 의견을 배제한 사실전달의 기조 위에 진행됐다. 정치권의 대응 중계, 현장 스케치가 주 내용들이다. 의견은 극도로 자제되거나 원론적이다. 현장 상황은 기계적 중립에 의해 봉합된다. 아무런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고 사실보도가 담보되는 건 아니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관행에서는 ‘건조한 사실=정책자의 시선’으로 귀결된다. 그런 가운데 26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경찰 촛불끄기 무리수’,25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두 얼굴의 경찰’은 일각에서 시위대의 폭력성이 과도하게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의 진압방식에 문제제기를 한 기사였다.24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어청수 경찰청장 ‘전의경제 고수’” 는 현장기자가 스트레이트로 문제 제기를 한 사례이다. 이런 기사들에 비해 정치기사는 너무 단순한 중계에 그치고 있고, 칼럼과 사설은 침묵하는 인상을 준다. 사옥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너무 ‘쿨’한 것 아닌가. 남재일 세명대 교수
  • 국론분열 부추기는 ‘이념적 언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을 보도하는 언론사별 논조가 크게 엇갈리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언론사별 정파적 편가르기’란 지적에서부터 ‘모두가 나쁘다는 양비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각 언론사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무관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발췌해 전달하는 보도태도가 저널리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촛불시위의 일차적 원인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정부의 협상결과에서 비롯됐지만, 이차적 원인은 이를 보도하는 언론사별 상반된 보도 태도”라면서 “언론이 정부 정책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간의 분열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최 교수는 “어느 언론사 보도가 진실에 가까운가와는 별개로 언론사별 보도내용이 양 극단을 달리는 상황이 계속되면 조선·중앙·동아의 보도를 소비하는 그룹과 한겨레·경향 보도를 소비하는 그룹 간에 공론장이 쪼개져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호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최근 쇠고기 관련 보도에서는 언론들이 사실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발췌해서 전달하는 데 문제가 있다.”면서 “이는 독자들에게 언론 보도를 진실의 판단 근거로 삼기엔 불충분하고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현 언론보도의 문제를 양비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김 교수는 “‘미국산 쇠고기 사태’에서 분명 잘못한 측이 있는데 정부와 언론, 조·중·동과 한겨레·경향, 촛불집회 참가자와 경찰 등 양쪽 모두에 책임을 돌리는 건 오히려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언론보도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도 판이하게 갈린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30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신문 중 일부는 일방적으로 불법집회하시는 분들한테만 옹호적인 신문이 있다.”고 말한 반면, 원혜영 통합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검찰이 일부 언론들의 보도 행태에 맞서 광고중단을 요구하는 시민과 네티즌을 처벌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조정식 통합민주당 원내대변인은 29일 “촛불정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자처하는 언론들의 보도경향이 극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서울신문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이문영 김지훈기자 2moon0@seoul.co.kr
  • [씨줄날줄] PD 저널리즘/함혜리 논설위원

    언론학자들에 따르면 PD 저널리즘이란 우리나라에만 있다. 사회 소외계층을 대변한다는 ‘애드보커시 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생성과정이나 성격은 판이하다.PD 저널리즘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전통적으로 취재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방송국의 교양 PD들이 보도 영역에 진출하면서 생겨났다.KBS ‘추적 60분’,MBC ‘PD수첩’,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의 시사 프로그램은 단편적인 TV뉴스가 커버하지 못했던 고발, 사회 비판 등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PD 저널리즘은 전통적 저널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고,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많은 논란거리를 낳고 있다. 전통적인 기자 저널리즘이 확인된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적 방식을 취하는 반면 PD저널리즘은 기획 방향이나 비판 대상을 정해 놓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들을 취재하는 연역적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논쟁적 사안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팩트(fact)를 전달해야 하는 기자들은 상충되는 입장을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지만 PD들은 제작 의도에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취재해 다룬다. 시청자들에게는 제작자의 입장과 시각이 부각된다. 저널리즘의 본령인 객관성과 중립성, 공정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단한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끌어가고,PD 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영상들을 골라 사용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몰래 카메라와 비밀 녹취 등 취재윤리 문제도 심각하다. 연세대 윤영철(신문방송학) 교수는 “뉴스의 경우 데스킹 과정을 거치지만,PD 저널리즘은 1인의 작품이 대부분이어서 객관성·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한다. 광우병 정국의 도화선이 된 MBC ‘PD수첩-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의 왜곡·오역·편파 논란으로 PD 저널리즘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수용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정한 대안 저널리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모두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68혁명 40돌] (2) 혁명은 살아있다-佛 대표적 68세대 이냐시오 라모네 교수 인터뷰

    [68혁명 40돌] (2) 혁명은 살아있다-佛 대표적 68세대 이냐시오 라모네 교수 인터뷰

    |파리 이종수특파원|“모든 종류의 권위주의와 싸웠던 68혁명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30주년이니 40주년 하면서 68혁명을 자꾸 ‘의례화’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앙가주망(현실 참여)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냐시오 라모네(65) 파리7대 교수는 68혁명 40돌을 맞이한 심정이 약간 착잡한 듯했다.2일(현지시간) 파리 13구 ‘비판적 저널리즘의 상징’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건물에서 만난 그는 68혁명의 ‘계승’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혁명 주역들의 ‘변신’을 뼈아프게 꼬집었다.“당시 학생운동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녹색당의 일원으로 유럽의회에 진출한 것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현재의 그는 정치적 부르주아에 불과하다.” 68혁명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주의자로서 비판의 칼을 빼들었던 철학자 앙들레 글뤽스만에 대한 평가는 더 혹독했다.“그는 아예 신보수주의로 돌아섰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더니 지난해에는 사르코지를 공식 지지했다. 그의 모습에서 타락·부패를 연상했다. 깨끗하지 못한 ‘늙음의 형태’라고나 할까.” 인터뷰 도중 그의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1997년부터 10여년간 맡았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주간직을 지난 3월에 그만뒀지만 여전히 분주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68세대로서 68혁명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그에게 68혁명의 본질과 현대적 의미를 물어보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이제껏 인터뷰 한 인사 가운데 가장 듣기 쉬운 프랑스어였다는 느낌이었다)로 68혁명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해줬다.“68혁명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삶을 변화시키자.’는 문화 혁명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혁시키자.’고 했지만 68세대는 ‘삶을 바꾸자.’고 거리로 나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서양사가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어 68혁명의 현대적 계승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특히 세계화라는 거센 물결과의 싸움은 매우 중요하다. 각국의 경제 주권을 훼손시키는 국제 자본의 거대한 야망과 싸우는 것은 68혁명과 맥이 닿는다.” 그는 199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인연을 맺은 뒤 세계화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기고문을 남겼다. 또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단체 ATTAC(Association for a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in Assistance to the Citizens)를 세워 세계화와 싸우고 있다.ATTAC는 지난해 5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등급을 결정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장 앞에 항의 시위를 하러 왔던 한국 농민단체와 함께 지지 시위를 했다. 이어 68혁명의 현재적 의미와 관련, 최근 벌어지고 있는 고교생들의 시위를 주목했다.“교원 정원 감축에 항의하는 고교생들의 시위는 겉으로 보면 교사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일방적으로 감원안을 밀어붙이는 정부 입장에 반발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68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움직임이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지방 도시 보르도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파리 시위 현장에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보르도에서 열린 시위와 정치 논쟁에 참가했는데 ‘새 사회’의 대안으로 마오쩌둥주의, 체게바라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들이 분출됐다. 당시 열기는 혁명적 낭만주의에 비유할 수 있다.” 이어 68년 5월혁명의 정점이었던 5월 ‘바리케이드의 밤’에 참여한 많은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려줬다.“경찰과의 대치 속에 팽팽한 긴장이 오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 현장에 참여한 남녀노소가 모두 하나가 돼 갔다.”고 들려주었다. 화제는 프랑스의 현안으로 넘어갔다. 기자가 지난해 대통령선거 2차 국면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가 발전하려면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인 주장을 해 거센 논란이 일었다고 환기시켰다. 그러자 라모네 교수는 즉각 냉소적 표정으로 “사르코지 대통령이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하자고 한 것은 자가당착이다.”라고 맞받았다. 구체적 이유를 묻자 “68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이혼 경력이 있고 이민자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프랑스와 한국 등 최근에 일고 있는 실용주의 ‘열풍’에 대한 우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네차례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과 프랑스 대통령이 모두 ‘실용주의’를 주창하고 나섰는데 실용주의가 무엇인가. 돈이 되면 다 한다는 것 아닌가. 연대와 공동체 정신이 훼손될 가능성이 많아 걱정스럽다. 또 한 국가의 경제가 쉽게 개선될 수 있는가. 한 국가의 경제는 국제 경제와 맞물려 있다.” 그 연장선에서 자신이 비판해온 세계화가 첫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파동에서 시작한 세계 금융 위기는 결국 세계화의 위기를 의미한다. 또 석유·곡물 가격의 폭등과 환경 파괴 등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려 있어 국제 경제의 사이클이 달라지는 시기에 직면했다. 이와 관련 미국 대통령 선거가 주목된다.” vielee@seoul.co.kr ●이냐시오 라모네는? 프랑스에서 68혁명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 지식인.1943년 스페인 레돈델라에서 출생. 기호학자 롤라 바르트의 제자로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리7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1997년부터 지난 3월까지 국제문제 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주간으로 활동. 이 신문에 실은 세계화에 대한 날카로운 기고문으로 유명하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를 비롯 ‘상업의 제물, 커뮤니케이션’‘세계의 새로운 권력과 지배자’‘조용한 프로파간다-대중, 텔레비전, 영화’‘마르코스, 반역의 존엄성’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 [옴부즈맨 칼럼] 재미있는 신문,재미없는 신문/전범수 한양대 신방과 교수

    [옴부즈맨 칼럼] 재미있는 신문,재미없는 신문/전범수 한양대 신방과 교수

    미래의 신문은 어떤 모습일까. 디지털 사회로 진입할수록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 신문이다. 종이 신문만으로는 포털이나 IPTV 등의 뉴미디어와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지만, 뉴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새롭게 성장과 생존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적지 않다. 그러나 독자적인 뉴스미디어로서 신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미디어와 구별되는 콘텐츠의 독자성이 필요하다. 그동안 신문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속보성, 의제 설정, 사회비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의 속보성은 이미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자리를 내주었다. 신문이 주도하는 의제 설정 기능도 약화되고 있으며, 사회 비판 기사도 예전과는 달리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문이 살아가야 할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신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재미에서 신문의 미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신문은 경쟁 미디어와는 다른 재미와 즐거움, 기대감을 제공해야 한다. 대부분의 일간지들이 재미라는 특성을 신문 지면에 반영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의 접근 방식은 매우 다르다. 재미있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구독자들의 입맛만 맞추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신문의 재미는 즉각적으로 표출되는 감정적 반응보다는 기사와 정보를 곱씹어 보는 인지적 반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신문 읽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을 시도하고 있을까. 서울신문은 펀이라는 섹션을 통해 만화와 바둑, 오늘의 운세, 깔깔깔 등과 같은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신문이 재미를 펀(Fun) 개념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심리적 즐거움인 만큼, 펀 개념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TV 프로그램 소개 섹션도 단순히 지상파 방송이나 케이블 텔레비전 편성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TV 및 다른 뉴미디어 콘텐츠와 정보에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획을 강화했으면 한다. 국내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 관련 기사들도 과학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좀 더 재미있는 기획과 구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서울신문 1면을 포함해 본문 지면을 통해 이소연씨 ISS 입성에 대한 기사들이 넘쳐났다. 대부분 국제우주정거장 소개와 유영 방식, 도킹 과정 스케치,18가지 우주실험 등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방송이나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와 같은 기사 및 사진, 동영상 등이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었다. 재미있는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 개발 역사와 정치적, 경제적 맥락의 설명, 어린이와 노인들의 시각에서 살펴본 우주에 대한 향수와 기대 등을 흥미롭게 재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래 신문의 생존은 얼마나 재미있는 신문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 과잉으로 독자들의 선택권이 무제한 늘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품격있고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미디어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문사는 독자에 대한 심층 연구를 기반으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획력을 늘려야 할 것이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은 보수화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회문화적 의식은 전통적 방식과 다른 방향으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재미있는 신문이란 감각적이거나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연예, 오락 기사로 채워진 신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다양한 시각이 반영된 뉴스 콘텐츠, 신선한 기획 및 국내외 밀착 현장 보도, 스크랩 가치가 있을 정도의 유용한 정보 제공, 변화하는 독자들의 문화 욕구 충족 등과 같이 독자들의 인지적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신문이 바로 재미있는 신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범수 한양대 신방과 교수
  • [시론] ‘신문의 날’ 박수를 보내며/임영호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시론] ‘신문의 날’ 박수를 보내며/임영호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원래 기념일에는 과거의 업적을 칭송하고 앞날에 대해 덕담도 하는 게 관행이다. 지난 시절 신문 특유의 화려한 무용담들을 기억하거나 현재의 중요한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리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 신문의 날(7일)을 맞은 소감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현재 신문업계 전체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하고 빠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문업계는 성장세 둔화와 독자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포털을 비롯한 뉴 미디어의 도전으로 고전하고 있다. 현재 신문은 광활한 벌판을 힘겹게 달려온 뒤 다시 끝없는 바다와 맞닥뜨린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고 신문의 운이 여기서 다한 것처럼 절망할 필요는 없다. 도전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신문은 종이로 찍어내는 뉴스였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것은 종이이지 뉴스가 아니다.“뉴스페이퍼는 페이퍼가 아니라 뉴스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아서 설즈버거가 한 말이다. 미래를 개척하는 데 어제의 감각과 관행은 도움이 안 된다. 신문 종사자들은 화려한 시절의 기억은 잊어버리고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는 심정으로 뼈를 깎는 개혁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신문의 개혁 방향에 대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는 저널리즘의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좋은 신문의 요건이 무엇이던가? 바로 정확하고 믿을 수 있으며 권위있는 뉴스가 아닌가? 이런 진단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인터넷에는 방대한 정보가 유포되고 있지만, 약간의 가공과 포장을 걷어내면 이 정보에는 정작 새로운 게 그리 많지 않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이 정보의 출처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대개 전통 매체인 신문이 나온다.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를 가늠하는 잣대는 뉴스 매체의 권위이다. 신문의 권위는 오랫동안 권력이나 외부의 압력에 대항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지키려고 노력해온 과정에서 축적된 것이다. 독자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이미지, 이것이야말로 신문의 브랜드 가치이며, 이 점에서 신문은 아직 어떤 매체보다 경쟁력이 있다. 또 하나의 처방은 정보의 부가가치를 높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문은 사건에 관한 뉴스를 빠르게 취재하는 데 전념해 왔다. 그래서 특종은 신문 기자에게 자랑스러운 훈장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매체가 다양해지고 정보의 전파 속도가 빠른 시대에 속보 경쟁은 의미가 없다. 기자들은 한두 시간 앞서는 특종에 목숨을 걸지 몰라도 여기에 신경 쓰는 독자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부가가치가 높은 정보가 되려면 사실 전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신문 뉴스는 사건의 여러 측면과 의미를 알려주는 정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전문성이라 불러도 되고 심층성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신문에서 정보의 플러스 알파가 된다. 또한 이는 앞으로 신문이 디지털 콘텐츠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새로운 매체와의 무한 경쟁 시대에 신문이 살 길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 숙제를 푸는 데 있다. 적어도 포털의 블로그보다 신문이 더 유익하다는 확신이 들 때, 젊은이들은 다시 신문으로 돌아올 것이다. 신문의 날을 맞아 그간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신문이 인류 정신유산의 보루로서 더욱 발전하길 빈다. 임영호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옴부즈맨 칼럼] 프로슈머 시대의 기사쓰기/금희조 성균관대 신문방송학 교수

    [옴부즈맨 칼럼] 프로슈머 시대의 기사쓰기/금희조 성균관대 신문방송학 교수

    지난주 서울신문의 많은 지면을 장식한 뉴스는 새 정부의 내각인선 파동, 총선공천 갈등, 물가불안과 무역적자 등이다. 다른 중앙 일간지들의 지면을 살펴봐도 중요하게 보도한 사안들은 비슷하다. 새 정부 구성, 총선, 경제문제 등은 국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언론이 뉴스가치를 부여하고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 이번 주는 유난히 그러한 기사들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지난 대선부터 이어져온 도덕성 검증과 폭로 그리고 정치공방이 지면을 너무 오래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일간지마다 같은 사안을 비슷한 프레임으로 다루는 상투적인 기사들을 읽으면서 언론학자들이 우려하는 신문의 위기를 신문사에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독자들은 과거와 전혀 다른 복잡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신문 기사를 접한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신문사뿐 아니라 방송사, 통신사, 인터넷 언론, 국정브리핑 등 족히 수백 개의 정보원에서 쏟아지는 뉴스를 한꺼번에 제공한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터넷TV(IPTV)를 통해서도 다양한 언론사의 신문보기 서비스, 지난 방송뉴스 보기, 인터넷 사이트 검색이 한꺼번에 가능하다. 콘텐츠 무한경쟁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독자들은 신문매체를 거치지 않고도 다양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함께 위기를 맞고 있는 중앙 일간지들은 영상문화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디어 환경과 문화적 변화 속에서 서울신문도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발전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를 위해 독자의 입장에서 기사쓰기에 관해 기자들에게 제안을 하고자 한다. 보도대상이 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사안을 정치인·기업인 입장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 전환을 제안한다. 새 정부 내각인선 보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내정자들의 재산, 자녀, 표절 관련 도덕성 검증을 둘러싼 정치공방이다. 야당은 폭로하고 여당은 문제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정치인들의 싸움을 구경꾼 입장에서 쓴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표절문제가 대두됐을 때, 표절이 어떤 것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정의와 원칙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정치 공방을 해석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인들의 주장은 이제 신문에서 보도하지 않아도 정당 홈페이지와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브리핑자료로 충분히 알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이 조성됐다. 현재 신문에서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닌 사안을 바르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와 시각, 그리고 토론의 공간이다. 독자들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보도는 기자들의 더 많은 노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번 총선에서는 더 이상 경마식 보도, 네거티브 폭로가 중심이 되지 않도록 창의적 기사쓰기를 제안한다. 기자들의 적극적인 현장취재를 통해 우리 지역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각각 어떤 것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일꾼으로 어떤 인물이 적합할지 국민들이 토론할 수 있는 진정한 공론장을 제공해 주기 바란다. 캐서린 쿡(마이이어북닷컴 창업자)은 앨빈 토플러가 30년 전에 얘기한 프로슈머가 앞으로 미디어 환경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독자들은 더 이상 구경꾼으로 사회적 사안을 대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정보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찾고 생산과정에까지 참여하고 있다. 기자들도 이제는 브리핑 자료를 가지고 책상에서 쓴 기사를 지양해야 한다. 독자들을 현장에서 취재하고 생산과정에 참여시키는 시민 저널리즘적 트렌드를 기사쓰기에 반영해야 한다. 프로슈머의 시대에 서울신문이 뒤떨어지지 않고 언론으로서 독자 영역을 구축하기를 기대한다. 금희조 성균관대 신문방송학 교수
  • [토요영화] 스쿠프

    [토요영화] 스쿠프

    ●스쿠프(EBS 세계의 명화 오후 11시 20분) 특종을 거머쥘 기회가 눈 앞에 있다.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냐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터뜨리면 대박이다. 그런데 범인이 너무 매력적이다.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당신이 기자라면 보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주제로 한 우디 앨런 감독의 2006년작 ‘스쿠프’(Scoop,‘특종’이란 뜻)는 범죄를 소재로 다루지만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다. 전작 ‘매치 포인트’(2005)에서 다소 심산한 결말을 선보였던 우디 앨런은 이번 작품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유머 감각을 제대로 살렸다. 출세에 거치적거리는 정부(情婦)를 제거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삼은 대목은 두 작품의 공통점. 하지만 ‘매치 포인트’가 도덕성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던진다면,‘스쿠프’는 범인을 미리 밝혀놓은 채 딜레마를 놓고 유희를 벌인다. 영화는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미국 대학생 산드라(스칼렛 요한슨)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방학을 맞은 산드라는 런던 상류층 친구 집에 머무는데, 어느날 마술사 시드니(우디 앨런)의 쇼를 구경간다. 거기서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 속임수 상자 안에 들어가는데, 이 속에서 떡하니 조 스트롬벨(이언 맥셰인)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조는 얼마 전 사망한 저널리스트로, 저승 가는 길에 얻게된 특종 제보가 아까워 잠깐 이승에 돌아온 참이다. 이 제보는 다름아닌 여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라이먼 경의 아들 피터 라이먼(휴 잭맨)이라는 것. 조는 산드라에게 후속 취재를 신신당부하고 사라진다. 능력을 인정받을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산드라. 그녀는 상류사회에 잠입해 피터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피터의 완벽한 면모가 그녀의 이성을 흐트러뜨리고 만다. ‘매치 포인트’에 이어 ‘스쿠프’에서도 주연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은 순진한 소녀의 눈빛과 매혹적 관능미를 동시에 지닌 그녀만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생생히 새겨놓았다. 유머와 로맨스가 뒤섞인 앨런식 코미디가 한층 문학적이면서도 색다른 색채를 입었다는 평가를 얻은 것도 그녀의 존재감 덕이 크다.15세 이상 관람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노먼 메일러 소설 ‘파이트’

    노먼 메일러 소설 ‘파이트’

    1974년 10월30일 오전 4시, 콩코민주공화국(옛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 멤링 호텔은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프로복싱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무하마드 알리와 무패 챔피언 조지 포먼 간의 헤비급 타이틀 매치.8라운드 종반 도전자 알리는 포먼의 얼굴에 날카로운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묵직한 훅 한 방을 날려 KO승을 거뒀다. 무하마드 알리의 삶을 담아낸 미국 작가 노먼 메일러의 소설 ‘파이트’(남명성 옮김, 뿔 펴냄)가 나왔다.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한 메일러는 실제 사건이나 인물 이야기에 작가 자신의 해석이나 상상력을 가미하는 ‘뉴저널리즘’문학의 선구자.‘파이트’는 61전56승5패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알리와 KO율 92.7%의 포먼이 가진 세기의 대결을 생생하게 되살린 르포르타주다. 작가는 알리를 1963년 라스베이거스 듄스 호텔 카지노에서 처음 만났다. 키가 크고 마른 데다 신경질적인 소니 리스턴과의 대결을 앞두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촌놈 복서’로 그를 기억한다. 알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다.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챔피언 벨트를 빼앗기는 수난도 겪는다. 메일러는 이 책에서 ‘노먼’ 또는 ‘작가’라는 이름의 객관화된 화자로 등장해 알리를 인터뷰하고 경기를 관전하며 그에 대한 인상이 변해 가는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1만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전설적 종군 사진기자 카파 스페인 내전 기록 필름 3500여장 멕시코서 찾았다

    “이 필름들은 카파의 잃어버린 성배와 같다.”포토 저널리즘의 신화로 불리는 전설적인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사진 왼쪽)가 스페인 내전을 기록한 필름 3500여장이 멕시코에서 발견돼 사진계가 들썩이고 있다. 국제사진센터(ICP)는 1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라진 카파의 필름을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전격 공개했다.ICP는 카파의 작업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제다 타로,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을 함께 세운 데이비드 세이머의 작품들도 같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3개의 얇은 종이가방에 담겨 뉴욕타임스, AFP 등에 따르면 이번 발견은 사진계의 일대 충격이다. 그동안 그의 스페인 내전을 담은 필름이 ‘멕시코 가방’에 들어있다는 풍문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 중 찍은 필름들을 파리의 암실에 남겨두고 1939년 미국으로 떠났고 나치의 파리 침공 와중에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필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고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필름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2년 미국의 한 기차역에서 분실한 초기 원고뭉치와 더불어 전세계 문화계에서 ‘보물분실’ 사례로 거론돼 왔다. 하지만 필름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한 멕시코 장군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의 후손들이 뒤늦게 가치를 알고서 카파의 동생 코넬이 세운 ICP와 몇 년간 협상 끝에 이번에 공개됐다.‘멕시코 가방’은 3개의 얇은 종이가방으로 판명됐다. ●‘병사의 죽음´ 연출 여부 밝혀질 듯 필름들에 세간의 눈이 쏠린 이유는 전쟁사진 중 최고걸작인 그의 작품 ‘병사의 죽음(오른쪽)’의 연출 여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1936년 스페인 코르도바 인근의 한 언덕에서 찍은 ‘병사의 죽음’은 당시 프랑스 잡지 ‘뷔(Vu)’에 실린 뒤 완벽한 구도와 현장감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등의 말을 남긴 카파이즘(Capaism·투철한 기자정신)도 그의 스페인 내전 취재에서 태동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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