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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산불 3년’ 헬기 르포/ 숯검댕 숲·황톳빛 산 그속에 ‘희망의 싹’이…

    검은 숯검댕을 달고 유령처럼 늘어선 죽은 나무숲,푸석거리며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토양,그 틈새에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자라나는 작은 생명의 싹들…. 강원도 동해안의 산불 발생지역은 황량한 사막의 죽은 모습과,자연의 생명력이 태동하는 두 얼굴을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산불로 모든 것이 초토화된 지 3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이다.한식날인 6일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불지역은 여전히 삭막하기만 했다.최북단 고성군 현내면에서부터 남단 삼척시 원덕읍까지 이어지는 강원도 동해안의 태백산맥 자락은 양양군과 속초시 일대의 국립공원 설악산 자락만 남겨놓고 온통 황톳빛 민둥산 일색이다. ●여의도 78배 삼림 여전히 삭막 꼭 3년 전인 2000년 4월7일.이날부터 9일동안 번진 산불로 삼림이 불덩이에 휩싸이며 잿더미로 변했다.여의도 면적의 78배(2만 3258㏊)나 되는 면적만 봐도 당시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산불이 강풍을 타고 날아다녔던 탓에 골짜기를 중심으로 군데군데 외딴 섬처럼 남아있는 푸른색의 숲들이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민둥산 능선마다 벌목과 식목을 위해 거미줄처럼 이어진 작은 산길도 흉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국토의 허파 역할을 하며 관동팔경의 풍치림을 자랑하던 동해안 소나무 군락지도 온데간데 없다.흙먼지 바람만 휑하게 불어대는 삭막한 땅으로 변한 모습이 가슴을 절로 아리게 한다.산불로 집과 세간살이를 몽땅 태우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는 송태설(60·고성군 죽왕면)씨는 “봄철만 되면 가위눌린 듯 가슴이 답답해진다.”며 “지금도 산불 얘기만 나오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강릉시 사천면 인공조림지역에서 간이소방차로 물주기에 나선 함석호(38·강릉시)씨는 “사람들의 한 순간 실수로 중요한 자연이 어떻게 망가지는 지를 잘 보여준 교훈”이라며 “동해안 산들이 울창한 옛 모습을 찾으려면 적어도 50년에서 100년은 걸려야 할 것같다.”고 안타까워했다.함씨와 함께 식목에 나선 최종욱(39)씨는 “인간이 만든 재앙은 인간이 다시 가꾸고 살려내야 한다.”며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고 가꾸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푸른숲의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고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옛모습 찾으려면 50~100년” 한숨 산불피해 지역은 지난해 여름,태풍 ‘루사’ 때 폭우 속에 무너져내려 또 한차례 시련을 겪었다.손톱으로 할퀴어 놓은 것같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 붉은 산들은 나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주민 최돈희(41·강릉시 초당동)씨는 “3년 전 산불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데,수해까지 겹쳐 살기 좋은 동해안의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며 “아름드리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동해안 명물인 송이가 다시 돋아나려면 수십년은 족히 걸리지 않겠느냐.”고 한숨지었다.설상가상으로 고성군 일대에 산불을 피해 군데군데 살아있는 소나무 군락지들은 지난 겨울 잦았던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뚝 부러져 산불피해의 동병상련을 앓는 듯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산불 피해 삼림지역 가운데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선을 긋고 지나는 국도 7호선이나 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 등 주요 도로변에는 지난 3년 동안 벌목작업과 인공조림이 이뤄져 어느 정도 새 단장이 됐다.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은 어림잡아 전체 산불면적의 20%쯤 될까.아직도 광활한 피해지역 대부분은 자연복원을 기다리며 고스란히 남아 있다.이같은 지역은 백두대간과 인접한 내륙 쪽이 대부분이다.아직 벌목도 안된 죽은 나무들은 세찬 풍파 속에 껍질이 벗겨진 채 회색빛 유령처럼 남아 있다.조상들의 묘지를 쓴 선산이 험준한 대관령 아래에 있어 3년째 벌초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김동일(54·삼척시)씨는 “봄철만 되면 간간이 묘목을 심으며 가꾸려하지만 산세가 깊고 면적이 워낙 넓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작년엔 수마까지… 사막처럼 푸석푸석 산불이 두번이나 휩쓸고 지나간 고성군 죽왕면과 삼척시 근덕면·원덕읍 일대는 아예 토양이 푸석푸석하게 사막의 모래흙처럼 변해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강릉시 사천면 지역도 숱한 산불로 흙이 푸석푸석하기는 마찬가지다.강릉시 사천면 최종두(40)씨는 “나무를 심어 놓아도 활착률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절망의 숲에도 새 살이 돋아나듯 곳곳에 생명이 움트고 있다.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수년째 방치된 피해지역도 가까이 들어가 살펴보면 죽은 나무 밑동에서 어린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다.왕성한 자연의 복원력을 보여주고 있다.주종을 이루던 소나무는 거의 사라졌지만 때죽나무·졸참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물푸레나무 등 활엽수가 소나무를 대신해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이들 나무는 벌써 2∼3m 높이의 키를 보이며 제법 숲의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이달 중순 쯤이면 새싹들이 잎을 삐죽 내밀면서 민둥산도 푸른색 옷을 갈아입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연복원지역 회복속도 더 빨라 산불지역을 수시로 찾아 식생을 조사하고 있는 강원대 정연숙(46·생물학) 교수는 “인공조림 지역보다 자연 그대로 남겨놓은 지역이 더 빠르게 복원되고 있다.”며 “육안으로는 사막처럼 보이지만 곤충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개체 변화가 거의 없을 만큼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정 교수는 또 “죽은 나무의 싹인 ‘맹아’들은 병충해에 약하고경제적 가치가 떨어지지만 해마다 도토리 등의 열매를 생산해 숲속에 뿌리며 건강한 활엽수림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공조림으로 심은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우는 사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죽은 나무 사이에는 새로 돋아난 싹들과 함께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새로운 숲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속초·강릉·삼척 조한종기자 bell21@
  • 편집자에게/ 이라크 유적 전쟁파괴 막아야

    -‘7000년 이라크 유적 풍전등화’기사(대한매일 2월27일자 9면)를 읽고 인류가 이뤄놓은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훼손되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발견된다.전쟁이 일어난 이유야 어떻든간에 그로 인해 세계적 문화재들이 잿더미가 된다는 것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슴 아픈 일이다. 최근 이라크에 전운이 감돌면서 이 지역의 고대 유적들이 또다시 훼손될 위기를 맞고 있다.이라크는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발원한 곳이며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이 번성했던 곳이다.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조상인 네안데르탈인의 흔적도 이 지역에서 발견됐다.특히 이 뼈 주변에서는 장례의식을 하면서 뿌린 것으로 추정되는 꽃가루가 발견돼 전세계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5만년전에도 일종의 종교의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특정 국가의 범위를 넘어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으로 당연히 보존돼야 한다. 나는 아직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방문하지 못했고 언젠가꼭 가보고 싶다.그런 만큼 이번 전쟁으로 이 지역의 유적이 훼손될 것이 더욱 우려된다. 첨단무기 등 때문에 우리 시대의 전쟁은 그 지역의 문화유산을 모두 없애 버릴 가능성이 크다.전 인류가 지혜를 모아 전쟁을 피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 이융조 충북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
  • 대구지하철 참사/ 국과수 직원이 본 1080호 전동차 내부

    “지하철 안은 지옥 같았습니다.” 21일 오후 대구 달서구 율촌동 월배차량기지.1080호 전동차 내부의 참혹함 앞에 경력 많은 베테랑급 감식반원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동차는 마치 용광로를 통과하기라도 한 듯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과 내부시설이 엉켜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연상케 했다.시신은 특히 전동차 마지막 두 칸에 몰려있었다.“많은 주검들이 의자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아비규환이었다.”고 감식반원들은 말했다.감식반이 투입된 첫날인 20일에는 사진을 찍어 현장을 보존하는 일과 전동차 안을 구역으로 나누는 작업이 진행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시신이 몰려 있는 5,6호차에선 작업 구획을 정하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렸다.”면서 “이틀 동안 밤을 새워 시신을 수습했지만 6호차의 30% 정도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수습 작업은 나뉘어진 구역을 중심으로 방사선 사진을 찍어 유류품을 찾아내고,시신과 바닥의 재·먼지 하나까지 나눠 담는 식으로 진행됐다. 한 감식반원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 무척 까다롭다.”면서 “시체가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정도로 타 버려 시신을 옮기는 작업은 마치 종교행사를 연상케 했다.”고 설명했다. 분리된 시신은 서랍식 상자에 넣어 냉동탑차에 보관된다.냉동 보관된 시신은 유족 입회하에 유류품이나 신체의 특이점 등을 토대로 신원을 확인하며 훼손이 심한 경우에는 유전자 샘플 채취,치아대조,안면복원술 등을 통해 신원을 최종 확인하게 된다. 한 감식반원은 “유가족이 치아검사 기록이나 방사선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손쉽게 찾는 경우가 많지만 DNA검사는 3개월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틀 동안의 작업 끝에 감식반원들은 반지 3개,안경 2개,구두굽의 쇠붙이,시신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여성용 시계를 찾아냈다. 유류품을 찾기 위해 시체를 제외한 잿더미는 따로 모아 방사선검사를 실시하고 다시 고운 채로 거르는 중복검사를 한다.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시신이 남는 경우다.국과수 관계자는 “유전자 검사의 정확성은 사실상 100%라고 알려져 있지만 시체가너무 타면 DNA 자체를 추출할 수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대구 지하철 참사/사고 차량 찾은 유족들

    “와 문이 다 닫혀 있노.그렇게 열어달라고 애원했는데 꽉 닫아놔서 우리 아들이 죽은 거 아이가.이제라도 문 좀 활짝 열어두고….” 19일 대구 달서구 월배 차량기지를 찾은 사고 유가족들이 시커멓게 그을린 전동차를 살펴보다 끝내 한맺힌 울음을 토해냈다.굳게 닫힌 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전동차 안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유족들은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전동차 쪽으로 달려들었다.차량을 에워싼 채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경찰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콧등으로는 시큰한 한 줄기 눈물도 떨어졌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유족 300여명은 이날 새벽부터 차량기지로 몰려들었다.그러나 현장 훼손을 우려한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측이 회의를 거듭한 탓에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기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딸 미희(21)씨를 잃은 정인호씨는 “유품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모두 녹아버렸으니 네 마지막 흔적조차 찾을 길 없구나.”며 흐느꼈다.경일대 2학년에 재학 중인 미희씨는 대학편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중앙로의 학원에 가던 길이었다. 사고 당일 아침 부산에서 올라온 박지혜(24·여)씨는 영남대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는 길에 변을 당했다.아버지 박성열씨는 “그날 따라 딸 아이가 부지런을 떠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찍 대구에 도착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한 유족은 “불이 옮겨붙은 차량에 탔던 한 학생이 대구역을 막 출발할 즈음 ‘중앙로역에 불이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면서 “중앙로역으로 향하던 승객들도 미리 화재 사실을 알았는데 왜 전동차 기관사는 차를 멈추지 않았느냐.”고 오열했다. 유족들은 껍데기만 남은 전동차를 살펴본 뒤 구내식당에 모여 전동차 내부를 촬영한 모습을 지켜봤다.잿더미 속에 뒤엉킨 시신을 본 이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특별취재반 ◆안타까운 사연들 안타까운 사연들 달구벌은 온통 눈물바다였다.실종자 가족들은 달서구 월배차량기지로 몰려가 사고 차량이 녹아내린 모습을 지켜보다 실신했고 병원 장례식장은 유족들의 오열로 뒤덮였다. ●“사진의 주인공이 내아들이다” 허우석(48)씨는 화재 발생 직후 한 승객이 전동차 안에서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자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라며 울부짖었다.허씨가 집에서 가져온 사진을 본 다른 유족들도 “객실에 앉아 있는 젊은이의 모습과 똑같다.”고 입을 모았다. 허씨는 “사진을 찍은 사람은 탈출했는데 왜 우리 아들은 실종됐느냐.”면서 “기관사와 역무원들이 안내방송을 제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일가족 참사에 할 말 잃어 두돌을 막 넘긴 아들 생일에 아내와 아들,장모를 모두 잃은 서원우(33)씨는 가족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서씨의 아내 강은숙(26)씨와 아들 민수(2)군,어머니 박춘지(58)씨는 사고 당일 여동생 정숙(25)씨의 졸업식에 참석하려던 길이었다.민수군의 생일까지 겹친 겹경사에 가족들 모두가 오후에 왁자지껄한 가족모임을 갖기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하철의 화마에 희생되고 말았다.정숙씨만 간신히 살아났지만 3대가 모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대학동창이 변을 당해 대구 가톨릭대 체육과의 서동민(23)·김종석(23)씨와 입학을 앞둔 새내기 김택수(20)·방민휘(20)씨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순직직원 분향소 대구지하철공사는 19일 전동차 방화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직원 4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안심기지 2층 교육장에 합동 분향소를 설치했다. 통신역무사업소의 정연준(37),최환준(35)씨는 불이 나자마자 역사로 달려가 승객 10여명을 지상으로 안내해 목숨을 구했지만 자신들은 끝내 숨졌다.검수팀 장대성(35),김상만(31)씨도 사고당시 시설을 점검하다 변을 당했다.지하철공사 직원 1200여명은 합동장례식날까지 검은색 ‘근조’리본을 달기로 했다. 특별취재반
  • [Look!아시아] 1부 新장보고 루트르포 (3)쇼와 붐,일본

    |도쿄 황성기특파원|‘잃어버린 10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 일본 역사상 가장 활력이 넘쳤다는 쇼와(昭和)시절에 대한 향수로 상처받은 마음들을 달래고 있다.당시를 테마로 한 서적,영화,패션,심지어 과자점까지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인다.그러나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와 좌절감에서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는 ‘일본어 붐’ 등 일본적인 것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되며 민족주의의 재발현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요코하마(橫濱) 시내 미나토미라이 21지구.이곳에 들어선 ‘하이카라 요코초’에는 쇼와시대(1926∼1989년)를 재현한 약방,과자점,사진관 등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언제나 붐빈다.연인들,혹은 가족끼리 놀러 온 사람들은 연신 “이때가 좋았네.”,“그리워,이때로 돌아갈 수 없나.”라는 탄성을 터뜨린다. 2001년 4월 문을 연 당시에는 호기심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입소문이 퍼져 그들의 부모세대나 할머니,할아버지 세대들도 찾는다.3대가 함께 이곳을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이카라 요코초의 운영회사인 ‘젠토’의 니시무라는 “테마를 쇼와 30년대(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로 잡은 것은 그때가 일본에 가장 힘이 넘쳤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일본인들이 이 시대를 그리워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치유받는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인다. 오메(靑梅)시의 ‘쇼와 레토로 박물관’은 전후 부흥시대인 쇼와 30년대를 컨셉트로 과자점,문구,영화간판 등을 전시하고 있다.이 박물관은 당초 지방에서 불고 있는 심각한 불황으로 빈 가게들이 늘면서 상가 부흥을 위해 고안됐으나 예상 외의 성황을 누리고 있다. 도쿄 긴자에도 메이지 제과가 쇼와 초기를 재현한 카레 전문점을 오픈했고 오다이바에도 쇼와 상점가가 명물로 등장해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린다.서점에는 ‘쇼와 천황’ 같은 쇼와 시대를 테마로 한 서적들이 즐비하다. 쇼와 시대의 신문소설을 드라마화한 ‘진주부인’이 지난해 공전의 시청률을 올렸는가 하면 ‘황갈색 머리소녀’,‘낡은 시계’ 등 쇼와 시대의 노래가 리바이벌돼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젊은 세대에게 전쟁 중 일본 국민의 고생을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1999년 개관한 ‘쇼와관’에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15만명이 찾기도 했다. “회고 붐이다.옛날로 돌아가자기보다 시간 감각이 어긋나 있는 현상이다.젊은 세대는 과거의 것이 흡사 새로운 것처럼 보이고 나이든 세대는 그리움이다.시간이 텅 비어 있다.”(사회평론가 미야자키 데쓰야) 일본어붐은 이런 쇼와붐과 함께 찾아왔다. ‘소리를 내 읽고 싶은 일본어’가 140만부라는 히트를 친 뒤 ‘아름다운 일본어’‘상식으로서 알아두고 싶은 일본어’등 일본어를 주제로 한 책들이 물결을 이뤘다. 일본어붐의 배경에는 구구한 설이 있다.붐에 불을 댕긴 ‘소리를…’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메이지대 교수)의 말대로 “신체학의 발로”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의 회복”(시인 다와라 마치)이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일본인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80년대 나카소네 총리의 전후 총결산 때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찾기의 흐름에 일본어 붐은 놓여 있다.”(이종원 릿쿄대 법학부 교수) 쇼와붐,일본어붐이 자기 정체성 찾기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지금 왜 이런 문화적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미야자키는 “9·11테러,월드컵 16강 진출,북한의 일본인 납치 등 일본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국내외 사건이 잇달았다.”고 설명한다.이런 한덩어리가 되는 위험은 무엇인가.“쇼와붐이든 일본어붐이든 그 공통 키워드는 ‘일본’이다.일본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좇다 보면 합리적 사고를 넘어 불합리하고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이종원 교수) 민방 아사히 TV는 새해 벽두 5시간짜리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로 ‘전후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을 택했다.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일본,일본인들이 거품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사키 다케시 도쿄대 총장의 ‘경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일본에는 좌절감이 있다.좌절감은 내셔널리즘같은 것으로 흐르기 쉽다.일본의 정치가 공동화되고 있다.무슨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들다.”붕괴의 10년이 시작된 지금,일본에서 무엇이 일어날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됐다. marry01@kdaily.com ◆‘쇼와 30년대'란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쇼와 30년대’(1955∼1964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이 그 시절을 이토록 그리워하는가.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그들은 도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하고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다.1956년 유엔에 가입한 일본은 1957년 일본원자력연구소의 원자로가 임계(臨界)에 성공하고 도쿄 인구는 850만명으로 세계 인구 1위의 도시로 올라선다. 1958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층이라는 도쿄타워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 건설되고 이듬해 아키히토(明仁·현 일왕) 왕세자가 결혼했으며 사상 첫 일본인 미스 유니버스가 탄생한다.2년 뒤 60년에는 컬러 TV방송이 시작됐으며 61년에는 도쿄가 인구 1000만 도시로 부상한다.이어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서 쇼와 30년대를 특징짓는 힘과 번성의 시대는 절정에 이른다. 이런 쇼와 30년대에는 일본의 공업사회가 완성단계에 들어선다.수도 도쿄로의 집중,규격 대량생산형 사회의 틀이 잡힌 것이다.이 시기에 이른바 ‘연공서열’,‘종신고용’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본식 경영 스타일이 정착되면서 근무처나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회사인간’이라는 말도 탄생한다. 이러한 일본식 경영에 맞춰 촌락을 비롯한 지역사회 중심의 대가족사회에서 핵가족 사회로 바뀌고 지연·혈연사회에서 직장을 중심으로 한 직연(職緣)사회로 변화한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연호인 쇼와(昭和)는 시대 전체로 볼 때 침략,식민지배,전쟁과 패전과 부흥을 겪었으며 군사대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변신한 다종다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 정신과 의사가 진단하는 '쇼와 붐' |도쿄 황성기특파원|“경제가 좋지 않아 일본인은 지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믿을 수 있고 변함 없었던 대기업,전통기업,은행들의 도산은 물론 교사의 비리,의사의 의료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아무 것도 신용할 수 없게 됐다.” 정신과 의사 가야마 리카가 보는 현대 일본인이다.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일본인에게 희망과 성장이 있던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당연하다는 진단이다. ●쇼와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밝은 앞날을 찾을 수 없을 때에 과거 일본이 좋았던 시대,일본인이 열심히 뛴 전후 부흥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물질적,경제적,과학적 발전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등식이 있었던 태평스러운 시대였다.당시를 겪었던 윗 세대나 겪지 못한 젊은 세대는 쇼와시대에서 일종의 파워,세계적으로 일류가 되고자 했던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일본어붐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일본에는 전쟁의 싫은 기억 때문에 강제로 한덩어리가 되는 데 대해 엄청난 알레르기가 있었다.젊은 세대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월드컵에서의 일본 붐과 일본어 붐을 전혀 저항없이 받아들여 너무 놀랐다.그들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단지 축구가 좋을 뿐”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좋다고 하면 무의식중에 다른 나라는 싫다는 정반대의 의미도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도. ●그것이 일본의 젊은 세대의 문제점인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딱 잘라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본인의 미덕이었다.결단력이 없다든가 우유부단하다고 비난받는 그런 것들이다.그러나 요즘 젊은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정신장애자를 사회와 격리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있으면 그들은 “격리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미국식으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어디로 가는가. 하나의 흐름이 있으면 반대의 흐름이 일어나는 힘이 아직 있다.그러나 경제악화로 반작용이 쉽지 않다.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릴 가능성이 있다.그래서 걱정이다.젊은 세대는 무력감이라든지 상상력 결여로 지금은 그런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이시하라 신당의 움직임이 나왔을 때에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리는 밑바탕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이시하라 신당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그들이 이시하라의 정치이념을알고 지지한다기보다 그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고 낯익은 얼굴이기 때문에 지지하곤 한다.정치가는 다 똑같다는 체념 속에서 친근하고 쉬운 말을 힘있게 하는 이시하라에게 쏠리는 것이다.우경화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그렇지만 젊은 사람 중에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지식인 중에서도 과거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그것은 위험하다. ●납치 일본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도 그런 맥락인가, 일본은 세계 속에서 북한을 바꿀 수 있다는 중요한 입장에 있는데도 넓은 시야나 장기적으로 뭔가를 생각할 수 없게 됐다.대단히 근시안적으로 되고 있다.납치도 내 가족의 문제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고 만다. ■가야마 리카는 43세.도쿄의대 졸업.신문,잡지,TV에서 사회·문화비평을 비롯,현대 일본인의 ‘마음의 병’을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는 젊은 정신과 전문의.월드컵에서 나타난 일본 젊은이들의 민족주의 성향을 분석한 ‘소 내셔널리즘 증후군’을 비롯,다수의 저서가 있다.
  • 이런 책 어때요

    ●악마의 무늬,스트라이프(미셸 파스트로 지음)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핀 줄무늬의 문화사.줄무늬는 유럽 중세사회에서는 이단자·배신자·창녀·어릿광대·난쟁이 등의 옷에만 사용된,경멸과 수치를상징하는 무늬였다.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는 세로줄무늬가 등장하면서 낭만의 무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혁명기에는 개혁과 자유를 상징하는 무늬로 사용됐다.다양성이 강조되는 현대에는 위생,위험에 대한 경고,자유,고급스러움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중세 문장학의 대가인 저자는 중세의악마적 이미지에서 오늘날 역동성과 젊음을 상징하기까지,줄무늬의 의미변화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살핀다.9800원. ●아메리카(이그나시오 라모네 등 지음) 동서냉전이 끝나고 국민국가의 경계를 허무는 세계화와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미국은 하나의 ‘제국’이 됐다.로마제국·신성로마제국 이후 시민혁명을 통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제국’이 역사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탄생한 것이다.이제 ‘미국’이라는 문제는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의 화두다.각 나라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미국을 어떻게 인식할까.이 책에는 이그나시오 라모네(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사장),조지프 나이(하버드대 교수),르네 지라르(스탠퍼드대 교수)등 각국 지성이 쓴 70여편의 미국 관련 글들이실렸다.1만 5000원. ●청계천은 살아 있다(이경재 지음) 서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청계천의 주변 역사를 일화를 곁들여 엮었다.청계천은 조선시대에는 본래 이름인 ‘개천(開川)’으로 불렸다가,일제시대초 서울의 지명을 개칭하면서 ‘청계천’으로 바뀌었다.광교를 비롯한 청계천에 걸려 있던 수많은 다리에는 많은 전설과 일화가 전해내려온다.광교 밑에는 훤히 트인 마른 땅이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들이 곧잘 노숙을 했다.또 청계천 장목교 근처에는 대치 유홍기를 비롯해 정치적으로 눈을 뜬 중인들의 마을이 있었다.이곳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드나들어 갑신정변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9000원. ●평민열전(허경진 엮음) 조선시대,평민들은 처음엔 관청의 실무를 맡기 위해 간단한 글자를 배웠다.그러나 여유가 생기고 실력이 쌓인 평민들은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길 원했다.마침내 평민들은 양반의 전유물인 한시까지 짓게 됐다.나아가 평민시인들은 자기의 삶을 전(傳)의 형식으로 기록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평민전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이 책은 19세기 평민전기를 집중 소개한다.평민 출신 화가 조희룡이 지은 평민전기집 ‘호산외기’,아전 출신 유재건이 엮은 ‘이향견문록’,그들의 친구인 시인 이경민이 엮은 ‘희조질사’등을 기본자료로 삼았다.1만 5000원. ●핫 그룹(진 립먼-블루먼.해롤드 J레빗 지음) 마이크로소프트사,인상파 화가들,로마 가톨릭교회의 공통점? 조직을 지탱하는 기본 단위가 ‘핫 그룹(hot group)’이란 점이다.핫 그룹이란 열정적으로 일하는 소규모 자생조직,야생오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조직을 말한다.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16세기,헨리 8세는 수도원장이라는 수장 한명을 제거해 수도원을 붕괴시켰다.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 건재하다.그아래 수많은 핫 그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공식에 맞는 그림만을 인정하는아카데미 살롱전에 대항,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하려고 뭉친 인상파 화가들도핫 그룹이다.1만 2000원.
  • 독자의 소리/ 등산길도 하산길도 불조심

    올 가을은 유난히도 짧은 것 같다.나무들은 단풍이 들 새도 없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그래서 어느 산에건 낙엽이 무척 많이 쌓여 있다.가을 산불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실수로 발생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산림청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가을철 산불 발생 평균건수는 연간 발생량의 13%에 해당한다.봄철의 산불발생 건수에 비해 적기는 하나 가을 산불에도 한시도 방심하면 안 된다. 산이 민둥산이 되면 산림의 주요 기능인 대기정화·홍수조절·산림휴양 능력 등이 상실돼 자연생태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없어짐으로써 자연환경·인간생활 면에서 황폐해진다.이제는 온 국민이 온 정성을 모아 가꾸어온 산림을 더욱 보호하고 가꾸어서 산불에 혼을 빼앗기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나무는 단기간내 자라고 수확하는 작물이 아니다.울창한 숲을 이루려면 최소한 30∼50년 걸린다.한번 실수로 산불을 내면 몇십년 피땀흘려 가꾼 산림이 금방 한줌의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앞으로도 너나없이 산을 찾을 것이다.그럴 때마다 ‘내 산’이라는애림정신을 마음에 지닌다면 푸른 산은 더욱짙고 울창해질 것이다.‘등산길도 산불조심 하산길도 산불조심’이다. 박행모 [phmo3@hanmail.net]
  • [인터넷 스코프] 그 옛날 콘텐츠 다 어디갔나

    지금 한국은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상처로 인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이번 태풍으로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전화나 인터넷 같은 통신시설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었다고 한다.물론 엄청난 고통과 비용이 따르겠지만 붕괴된 통신망이야 결국 다시 복구하면 되는 일이다.하지만 한번 사라지고 나면 쉽게 복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디지털 콘텐츠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년여전 미국의 9·11테러 당시 11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사무실들이 가진 정보와 각종 자료는 여전히 인터넷 공간에 건재해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대부분의 콘텐츠는 붕괴된 건물속 컴퓨터가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장소의 서버에 저장돼 있었다. 그래서 비록 미국 경제의 심장부 건물은 파괴됐지만 우려했던 경제질서의 대혼란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콘텐츠의 보호와 보존은 이토록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보기술(IT) 강국임을 자랑하는 우리의 콘텐츠 보호와 보존실태는 어떠한가.정부는 콘텐츠를 보호하겠다며 ‘온라인 디지털콘텐츠 산업발전법’까지 만들었다.사실 이 법률이 보호해 주는 것은 콘텐츠 자체라기보다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콘텐츠들,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있는 콘텐츠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인터넷 공간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터넷 초창기 수준 높은 담론문화를 주도했던 ‘스키조’ ‘펄프’ ‘이미지’ 등과 같은 웹진은 지금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불과 2년전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네티즌 선거혁명의 진원지 ‘총선시민연대’홈페이지도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다.각종 독립영화제가 1년에도 몇 차례씩 열리고는 하지만 몇해 전 거행됐던 독립영화제 홈페이지를 다시 찾아가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라고 쓰여진 흰 화면만 보고 씁쓸히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올해 엄청난 돌풍을 몰고 왔던 ‘노사모’나 ‘붉은악마’의 홈페이지도 몇년 후에는 이들과 똑같은 운명을 밟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콘텐츠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디지털 지식자산임과 동시에 인터넷발달사적 측면에서도 보존가치가 높은 생생한 자료들임에 틀림없다.아날로그 자료야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다시 볼 수 있겠지만 디지털 콘텐츠는 한번 서버에서 지워지면 아주 소멸되고 마는 것이기에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인터넷에 유해한 쓰레기 정보들만 늘어간다고 걱정하면서도 정작 보존해야할 콘텐츠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없이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이 얼마나 모순된 태도인가. 지난해부터 미국에서는 ‘인터넷 아카이브(www.archive.org)란 웹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1996년 이후 인터넷 공간에서 사라진 수백만개의 웹페이지를 복구해 놓은 세계 최대의 인터넷 무료도서관이라고 한다.이 웹사이트가 보유하고 있는 문서량이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미국 의회도서관 보유장서의 다섯배 분량이라고 한다.그 규모를 상상하면 가히 입이 딱 벌어질 일이다. 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하듯 생산과 성장위주의 정보화로 치달아온 한국 사회도 이제는 보호와 보존이라는 또 다른 가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소장
  • 천재 건축가 가우디 탄생 150주년/가우디-“난 집짓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인간 가우디'조명한 평정 출간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추앙받는 스페인 출신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자연친화적 건축 디자인으로 유명한 그는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대중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이다.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매년‘가우디’를 보기 위해 200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이 도시는 가우디 탄생 150주년인 올해를 ‘국제 가우디의 해’로 정하고 100개가 넘는 행사를 기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예술관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그것은 무엇보다 가우디 자신이 이렇다 할 저작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가우디는 생전에 “나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간이다.작업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한 바 있다.또 다른 이유는 그에 대한 공적·사적 자료가 스페인 내란 초기에 파손됐기 때문이다.1936년 그가 남긴 걸작인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파밀리아)의 지하납골당이 더럽혀지고 가우디의 설계도,서류철,모형 등이 불타 없어졌다.성가족 대성당의 주임신부이자 가우디의 친구였던 힐 파레스도 이때 살해됐다.건축학자 하이스 반 헨스베르헌이 쓴 ‘어머니 품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양성혜 옮김,현암사 펴냄)는 가우디와 관련된 풍부한 자료와 건축에 대한 전문지식이 동원된 가우디 평전이다.가우디가(家)의 세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난 그가 스페인 근대사의 중대 고비였던 스페인제국 패망(1898년)과 수도원과 성당을 잿더미로 만든 ‘비극의 주(週)’(1909년) 시기를 관통하며 불후의 대작에 잇따라 착수하고 전차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기까지의 행로를 추적한다. 저자는 “가우디의 건축세계는 열린 책이지만,인간 가우디는 닫힌 책”이라고 밝힌다.예술가로서의 가우디는 잘 알려져 있지만,인간으로서의 가우디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가우디를 ‘미를 숭배한 고독한 사제’라고 평하는 저자는 “무덤 속에 있는 지금도 가우디는 쉬지 않고 건물을 짓고 있다.”고 말한다.건축중인 성가족 대성당을 염두에 둔 것으로,1880년대 초반에 착공된 이 건물은 앞으로 150년은 더 걸려야 완성된다. 가우디의 삶은 모순 덩어리였다.그의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관능미는 일부 건축가들로부터 저속한 키치(Kitsch)라는 평가를 받았다.그러나 가우디는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으며,성 프란체스코처럼 누더기를 걸친 성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또한 무정부주의와 무신론에 가까웠던 달리나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보수세력과 가까웠던 가우디를 높이 평가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도 아이러니다.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외국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지독한 카탈루냐 지역주의자였으며,연인들의 산책장소인 구엘공원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 보고 독신으로 산 것도 놀랍다. 그래서인지 가우디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바스크 철학자 미겔 데우나무노는 그의 건축을 ‘술 취한 예술’이라고 폄하했고,피카소 등 다른 비방자들도 가우디가 튀려고 일부러 저급한 건축물을 짓는다고 꼬집었다.반면 독일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허만 핀스테를린은 “성가족 대성당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다.타지마할 묘당처럼 이 성당은 남신을 위한 집이 아니라 여신을 위한 집”이라고 추앙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낯선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가 가우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도록 씌어졌다는 점이다.가우디 ‘인물 탐구서’이자 가우디를 통한 ‘스페인 문화기행서’인 셈이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강릉·고성 또 닥친 재난 - ‘火魔 이은 水魔’ 겹친 악몽

    “2년전 화마(火魔)의 악몽이 수마(水魔)로 되살아나 너무나 끔찍합니다.” 2000년 4월 동해안 일대를 덮친 화재로 마을이 새카맣게 탔던 강릉시 사천면의 주민들은 휩쓸고간 태풍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마을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듯했다.당시 산불은 불과 2시간만에 해안선까지 8㎞에 이르는 마을 전체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할까.불탄 흔적이 지워지기도 전에 이번엔 물난리였다.사천면 15개 마을 가운데 노동상리와 사기막리는 아예 접근을 하지 못할 정도로 고립됐고,노동삼리와 석교리 등 나머지 마을은 농경지가 유실되고 가옥이 침수됐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 수해를 2년전 화재가 부른 ‘인재(人災)’라고 주장한다.산불로 나무들이 죄다 불탄 뒤 올해 봄에야 새로 심은 나무들이 뿌리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빗물이 고스란히 마을로 흘러내렸고,산사태가 잇따랐다는 것이다.낡은 제방과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공사 등도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6대째 사천면 판교1리에서 살고 있는 김진균(金振筠·39)씨는 물에잠긴 16만여평의 사천면 일대 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김씨는 “80㎏짜리 쌀 3만가마가 떠내려간 셈”이라고 했다.김씨는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시뻘건 황토산을 가리켰다.나무가 없는 산에서는 산사태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그는 “처가가 있는 장현저수지 일대는 평소 물이 샌다고 주민들이 신고를 했는데도 낡은 둑을 한 차례도 보수하지 않았다.”고 당국을 비난했다. 사천면 석교2리 이장 장대순(張大淳·52)씨는 지역 산림조합의 무책임한 태도를 질타했다.장씨는 “산불이 난뒤 불탄 나무의 줄기와 뿌리,가지 등을 모두 매립해야 하는데,개발업자들이 쓸만한 것만 골라 가져가고 나머지는 내버려 두었다.”면서 “남아있던 나뭇가지 등이 하천의 다리 부근에 쌓이는 바람에 빗물이 빠지지 못해 큰 피해가 났다.”고 말했다.장씨는 사천마을과 바로 옆 연곡마을을 연결하는 인터체인지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건설시공업체가 공사전에 잔디를 심거나 망이라도 설치했다면 저 많은 흙탕물이 휩쓸려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격분했다. 산불 피해가 극심했던 고성군 죽왕면 일대도 이번에 극심한 피해를 봤다.농경지 21만평이 유실되거나 침수돼 내년에 농사를 지을 볍씨도 구하기 힘들게 됐다.고성군청 관계자는 “천재(天災)라고는 하지만 경사가 급한 산이 많아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데도 화재 이후 관리가 부실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강릉 시민환경센터 운영위원인 박상덕(朴相德·44·강릉대 토목공학과)교수는 “강릉지역에는 높은 산이 많고 토심이 얕아 산사태가 많이 일어난다.”면서 “평소 산에 심은 나무들을 제대로 관리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또 “하천 구조물의 설계기준을 엄격히 하고 다리는 교각과 교각 사이를 넓게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릉 구혜영기자 koohy@
  • [9·11테러 1주년] (상)현장르포: 아물지 않는 상처

    전대미문의 9·11테러가 일어난 뒤 지난 1년 미국사회는 물론 전세계가 다방면에서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겪었다.충격에서 조금씩 회복해 가는 뉴욕시민들의 모습과 증오와 비탄속에서 상처의 치유를 모색하는 미국사회,그리고 대 테러전의 와중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국제사회의 재편 움직임을 시리즈로 점검한다. ***참사 폐허에 관광객 물결 [뉴욕 백문일특파원] 비행기 자살 공격으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세계무역센터(WTC) 자리는 이제 현대판 ‘성지 순례지’가 됐다.하루 평균 방문객은 2만 5000명,연간 900만명 이상이 다녀간 셈이다.공식 확인된 사망자와 실종자는 2819명.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맨해튼 월가 전철역에서 내려 북서쪽으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앞서가는 행렬만 따르면 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고 있다.거리 이름이 여운을 남기는 ‘처치(Church)가’와 ‘리버티(Liberty)가’가 만나는 교차로에 이르자 마천루 사이로 횅하게 뚫린 참사 현장이 드러났다.지반을 다지는 듯한 굉음소리가 요란하다. 얼핏 보면 일반 공사장과 다를 게 없다.둘러쳐진 철조망과 어지럽게 널려있는 철골더미.그러나 그 가운데에 우뚝 솟은 녹슨 철 십자가와 철조망에 걸린 꽃다발,군데군데 세워진 성조기 등은 이곳이 ‘그라운드 제로(피폭의 중심지)’임을 말해준다.남쪽의 도이체방크 건물은 붕괴 위험이 있어 아직도 문을 닫고 있다. 방문객들은 남쪽 철조망 너머의 폐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가족 단위로 온 경우가 많다.시카고에서 온 제임스 킹은 “아이들에게 역사적인 현장을 보여주러 왔다.”고 했다. 다른 한 켠에선 희생자 가족들이 1주년 특집을 준비하는 현지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소방대원인 20대 초반의 아들이 구조작업을 벌이던 도중 숨졌다는 남미 출신의 한 부인은 끝내 오열했다.방문객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구조작업에 나섰다 오른쪽 팔을 못쓰게 된 뉴욕소방국(FDNY) 미드맨해튼의 전 부서장 클레언시 싱글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잔해에 깔린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했다. WTC 맞은편에 있는 트리니티 성당에 딸린 묘지는 순례의 두번째 코스다.그 울타리에는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신문기사가 걸려있다. 이들을 기리는 글을 써놓은 깃발과 모자도 있다.자원봉사자들은 펜을 들고 추모의 글을 남길 사람을 기다린다.방문객들은 인근 상점에 들러 WTC가 새겨진 모자나 티셔츠를 산다.뉴욕소방국(FDNY)과 뉴욕경찰국(PDNY) 이니셜은 기념품의 로고가 됐다. WTC 터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원웨이’선물점을 운영하는 한인 교포는 “아침 일찍 피자나 꽃 등을 배달하거나 청소를 하다가 테러를 당한 불법 체류자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첼시 진’이라는 옷 가게는 당시 잿더미로 덮인 옷과 WTC에서 날라온 서류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테러 직후 ‘유령의 도시’같던 맨해튼은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됐다.50∼60%까지 뚝 떨어졌던 주변 사무실의 입주율은 80∼90%대로 올라섰다.건물 뒤쪽에 사무실을 임대한다는 대형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지만 적어도 ‘고층빌딩 기피증’은 사라지고 있다.주변 26개 아파트 7000가구에도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키로 하자 주민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관객이 급감,위기에 몰렸던 브로드웨이의 극장가 역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밤 10시40분,뮤지컬과 연극공연이 끝난 46번가 일대에는 갑자기 쏟아진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뮤지컬 ‘미녀와 야수(Beauty and Beast)’가 공연되고 있는 런트 폰테인 극장의 스태프 조제트 소토는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을 보러 온다.지난해보다 훨씬 나아져 주말 표는 거의 매진된다.”고 말했다. 영화 스파이더 맨의 무대가 된 타임스퀘어 맞은 편 음식점 ‘록시’의 점원은 “9·11을 잊을 수는 없지만 추가 테러 경고에 겁먹지 않는다.”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누가 알겠는가.”라고 말했다. 맨해튼 중심가 호텔에 방을 구하려면 적어도 10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70%까지 요금을 깎아준다던 얘기는 옛말이 됐다. 그러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5월 말 잔해 제거 작업이 끝났음에도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 가족들은 1주기가 되도록 영결식조차 못 치르고 있다.정부가 1인당 평균 150만달러의 보상금을책정했지만 보상을 신청한 가족은 620명,이 가운데 보상금을 받은 경우는 일부다. 유골을 찾기 전까지 보상이나 WTC 재건은 있을 수 없다는 절규의 목소리도 나온다.시 보건당국에는 아직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가 2만점이나 있다. 비행기 여행을 꺼리거나 정신병원을 찾는 환자도 줄지 않고 있다.초등학교에서는 9·11 테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고층빌딩마다 보안요원이 배치돼 있고 공공기관과 공항 출입에는 까다로운 보안검색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뉴욕뿐 아니라 미국이 겉으로는 충격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충격과 잠재적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mip@ ■WTC 재건축 계획은/ 70층 이상 금융빌딩 세울듯 [뉴욕 백문일특파원] 9·11 테러 1주기가 다가오지만 붕괴된 세계무역센터(WTC)의 재건계획은 아직도 진행형이다.지난 7월 1단계로 6개안이 제시됐으나 밋밋하다는 부정적인 반응만 얻었다.그러나 공청회와 1차 설계공모 등을 거치면서 기본적인 개념은 정해졌다.무엇보다도 남부맨해튼의 포괄적인 개발과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리려는 취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건계획을 전담하기 위해 주정부와 뉴욕시가 설립한 남부맨해튼개발공사(LMDC)는 지난달 19일 전세계 건축가와 도시계획가 및 조경설계사 등을 대상으로 공모조건을 밝혔다.16일까지 신청을 받아 이달 말 5개팀을 선정한다.이가운데 연말까지 1팀을 정해 최종적인 마스터 플랜을 만들 예정이다. 논란을 거듭한 WTC의 재건축 여부는 세계 금융시장의 심장부 역할을 할 수 있는 오피스 빌딩을 짓는 것으로 정리됐다. 꼭 같은 층수의 쌍둥이 빌딩을 세울 필요는 없다.역사의 현장을 되새길 기념비를 세우고 쌍둥이 빌딩이 섰던 터를 하나만이라도 보존하는 것으로 대신키로 했다.다만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을 복원시킨다는 취지 아래 적어도 70층 이상의 건물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개발공사와 WTC의 소유주인 뉴욕 및 뉴저지 항만청은 민간투자 촉진의 일환으로 통근자와 관광객들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도로,지하철,항만시설,도보 등과 종합 연계된 교통센터의 건립을 필수요건으로 꼽았다. 지금까지 5000건에 이르는 재건 계획안이 접수됐으며 개발공사 웹 사이트에는 각종 단체와 시민 등으로부터 하루에도 수백건의 의견이 올라오고 있다. ■9·11테러 이후 주요일지 2001년 ◆9월12일 부시 미 대통령,테러를 전쟁행위로 규정.유엔 안전보장이사회,테러 비난 결의문 만장일치로 채택 ◆9월13일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 배후로 지목 ◆9월21일 탈레반,미의 빈 라덴 인도 요구 거부 ◆10월2일 나토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방위권(제5조) 발동 ◆10월7일 미·영 연합군 아프간 공습 개시 ◆11월3일 북부동맹,카불 입성 ◆12월11일 알 카에다 항복 선언 ◆12월22일 카르자이 아프간 과도정부 수반 취임 2002년 ◆1월30일 부시 대통령 이란·이라크·북한 ‘악의 축’으로 규정 ◆1월31일 미군,필리핀서 아부 사야프 공격작전 개시 ◆5월23일 부시 대통령,사담 후세인 축출 천명 ◆5월24일 부시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대테러 협력’조약 체결 ◆8월1일 미국,아세안과 대테러 협약 체결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개도국 지원 늘리자

    월드컵의 신화적 성공을 국가의 총체적 역량 제고로 승화시키기 위한 방안들이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외교면에서도 여러가지 방안들이 나오고 있는데,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진정한 존경을 받으려면 대외협력,특히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개도국들에 대한 지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긴요하다. 오늘날 세계는 기술혁신과 세계화를 통해 괄목할 만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그러나 음지에서는 아직도 전세계 인구의 절반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연명하는 절대빈곤층으로 남아있다.이에 대한 각성을 바탕으로 국제사회는 개발원조의 중요성에 대한 컨센서스를 형성해 가고 있다.국제사회는 2000년 유엔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전세계 절대빈곤 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자는 천년개발 목표를 채택했다.이에 따라 지난 5월 개발에 관한 OECD선언이 채택되었고 6월에는 선진7개국과 러시아(G8)정상회담에서는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행동계획이 채택됐다.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2006년까지 120억달러의 개발원조를 추가로 제공키로 약속했다.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적극 동참,개도국에 대한 개발원조(ODA)를 우리의 국력과 소득수준에 상응한 수준으로 늘려나가야 한다.지난해 우리나라의 개도국 원조액은 총 2억 6000만달러로 국민총소득 대비 0.06%이다.개발원조 모범국가인 덴마크(1.01%),노르웨이(0.83%),네덜란드(0.82%)와는 비교가 안된다.우리와 1인당 소득이 비슷한 그리스(0.19%),포르투갈(0.25%),뉴질랜드(0.25%)에 비해서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우리가 개도국 원조를 늘려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는 203억달러의 유·무상 원조를 제공했다.형편이 나아진 지금 우리나라가 베풀 차례라는 기대를 받는 것은 개인간에서나 국가간에서나 다르지 않다.또한,개도국은 수출시장의 절반을 상회하는 우리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다.특히 선진국에서는 소액의 적자를 보고 있는 반면,개도국 시장은 지난해 우리에게 99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안겨 주었다. 개발 원조는 우리의 우수한 상품과 기술을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통로로서 수출시장을 계속 육성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개발원조는 지원 대상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우리의 따뜻한 우의를 각인시키게 된다.이는 계량화할 수 없는 외교자산이다.우리나라는 지난해 페루의 ‘우앙카요’라고 하는 조그만 지방도시에 조그만 식품기술훈련원을 지어줬다.준공식이 열린 지난해 2월 톨레도 대통령을 비롯한 페루정부의 요인들이 이 작은 도시에 대거 내려왔다.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감사의 표시였다.개발원조의 엄청난 효과를 말해주는 사례다. 끝으로 개발원조는 평화를 위한 투자가 된다.역사적으로 빈곤과 기아는 폭력과 전쟁의 주요 원인이 돼 왔다.지난해 9·11테러는 빈곤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둘 경우 테러리즘의 온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국제사회에서 우리보다 못한 이웃나라들에 따뜻한 협력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단순히 자선이나 경제행위를 넘어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는 안보차원의 기여가 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경협도 평화를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일궈낸 나라,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나라,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나라로서 개도국 원조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국격(國格)을 나타내는 지표가 됨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최성홍/ 외교부장관
  • “짝수해 대형산불 악몽 끝”

    “짝수해의 대형 산불 악몽은 이제 그만,늦은 봄나들이갑시다.” 강원도 동해안지역 공무원들이 짝수해마다 겪어오던 대형산불의 긴장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안도의 숨을 고르고 있다. 봄철 산불조심 강조기간이 종료되는 이달 15일을 앞두고6∼8일에는 강릉시내에 30㎜를 비롯, 동해안 각지에 많은비까지 내려 올 봄 산불은 사실상 막내렸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릉시 산림과 관계자는 그동안 산불방지를 위해 협조해준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편지(e메일)를 보내 “아카시아꽃이 피면 산불도 끝난다고 했는데,마침내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며 “대형 산불을 막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푸른 강릉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결실”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다른 부서 직원들도 “이제 산림녹지과 직원들도 철늦은 꽃구경도 하고 가족들과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보기 바란다.”며 답신을 보내는 등 자축 분위기가 가득하다. 봄철 산불조심 강조기간이었던 지난 2월15일부터 지금까지 강릉시내에서 발생한 산불은 모두 2건으로 피해면적도모두 0.6㏊에 그쳤다. 지난 98년 사천 산불을 비롯, 4건의 산불로 306.9㏊의 산림이 잿더미로 변하고 2000년에는 4월7일부터 연쇄 산불이 강릉 도심까지 위협,1447㏊를 태우면서 숱한 이재민까지낳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역대 최저의 봄 산불피해 기록이다. 대형산불을 막기위해 강릉에서는 지난 3월초부터 공무원460명과 이·통장 156명,유급 감시원 284명이 건조기에 매일 교대로 주·야간 교대근무 및 순찰활동을 폈고 42개 사회단체에서 산불감시 지원 및 격려에 나서는 등 주민들의성원도 줄을 이었다. 강릉시 김용수(金龍洙) 농림수산경제국장은 “산불예방에 불철주야 협조해준 시민들과 공무원들에게 감사한다.”며 “산불 경계기간이 일단락되는 15일이후에는 그동안 고생한 산림녹지과 직원들을 중심으로 2박3일 정도의 휴식시간을 줄 방침”이라고 말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2000-9595)
  • 印 종교분쟁 사망 500명 육박

    [아마다바드(인도) 외신종합]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에서 지난달 27일부터 계속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의 유혈충돌로 사망자수가 3일 현재 500명에 육박하고 있다. 구자라트주와 경찰 관계자들은 이날 도시들에서는 사태가진정돼 가고 있지만 시골지역에서 잇따라 유혈충돌 사태가보고되는 등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AP와 AFP통신은 구자라트주 및 경찰 관계자들을 인용,유혈충돌 닷새째인 3일 현재 사망자 수는 모두 485명이라고 보도했다.여기에는 지난달 27일 이슬람교도들의 습격으로 숨진힌두교도 58명이 포함돼 있다.아마다바드에서만 모두 225명이 숨졌으며,군·경찰의 발포로 73명이 사망했다.시골지역의 희생자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어 사망자는 더 늘어날것으로 보인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유혈충돌은 도시에서 시골로확산되고 있다.아마다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데오드하르 마을에서는 3일 힌두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의 집에 불을 질러 4명이 불에 타 숨지고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2일 구자라트주 북부의 이슬람교도 정착촌인 사바르칸타에힌두교들이 몰려와 방화했으며,인근 바나슈칸타에서도 이슬람교도 3명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유혈충돌 규모는 줄었지만 시골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익명을 요구한 인도 경찰은“사태가 진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시골 마을에서 수주간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잿더미로 변한 아마다바드시에서는 힌두교도들이 자위대를구성,이슬람교도들의 보복에 대비하고 있다. ◆조지 페르난데스 인도 국방장관은 아마다바드 등 4개 시에 파견된 3000명의 보안군 이외에 여단 규모의 추가 병력을인근 지역으로 파견했다고 3일 밝혔다.추가 병력은 시골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유혈충돌을 막기 위해 구자라트주 북부등에 배치됐다.보안군에는 현재 발포명령이 내려져 있다. 한편 군·경의 경계 강화로 치안이 안정돼가고 있는 아마다바드시는 통행금지 명령을 해제하는 등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다.하지만 이슬람교도 밀집거주지역에는 통금이 해제되고 않고 있으며 시민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CNN 등 일부방송 방영이 금지됐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2일 국영방송 연설을통해 “이번 사태는 나라 망신이며 전세계 앞에서 인도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제를 호소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3일 이번 사태에 당혹감과 유감을 표시하고,인도 정부에 소수파인 이슬람교도들의 신변을 적극 보호해줄 것을 촉구했다.한편 인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무장조직들은 이번 사태에 분노를 표시하면서 무장분리주의 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 [도쿄 이야기] 우울한 일본의 50대

    도쿄에 본사를 둔 일본 중견기업 A사의 부장인 B씨(53)는 지난 달 30일 총무성이 발표한 사상 최악의 실업률 보도에 우울한 모습이다. 장기 불황과 대규모 적자,대량 해고의 바람이 한창인 일본에서 A사는 비교적 탄탄한 회사이긴 하지만 B씨로서는실업률 5.4%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B씨는 일본의 베이비붐이 최고조를 이뤘던 1948년에 태어난 ‘단카이(團塊)세대’이다.잿더미 속에서 일본 부흥을이끌어야 한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난 세대로 그는 20∼30대에 일본 경제의 전성기를 몸소 겪었다. 74년 지금의 회사에 들어간 그의 연봉은 보통의 기업보다는 많은 1,000만엔(1억300만원 상당)을 조금 넘는다.언뜻큰 액수 같지만 부인과 3남매를 둔 그에게는 세금을 뺀 실수입 900만엔으로 생활하기 빠듯하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93년 미국 지사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도쿄에서 50㎞ 떨어진 근교의 30평짜리 집을 사는데5,000만엔이 들었다.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그는 주택구입비의 대부분을 25년 장기상환의 빚으로 충당했다.빚과 이자를 갚는데 한해 300만엔이 들어간다. 대학생인 둘째,셋째의 수업료는 100만엔인데 그나마 사립의 절반정도인 국립대학을 다니고 집에서 통학을 하고 있어 부담을 덜었다.이들에게 용돈은 한푼도 주지 않는다.상환금과학비를 빼면 500만엔 가량이 처분가능한 소득으로 월 45만엔이 생활비이다. 그의 용돈은 월 7만엔.인터넷 비용과 책 구입비를 제외하면 3만엔 정도가 실제 용돈이다.그래서 웬만하면 집에 일찍 간다. 뉴욕 지사 근무 이후 지난 8년간 외국 여행은 한차례도못했다.부인이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봄과 가을 온천에 가는 게 고작이다.외식이나 옷 구입도 쉽지 않다. 월급날인 25일이 다가오면 집의 생활비도 바닥을 보이기시작하는데 그때쯤이면 탁아소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하는 부인이 벌어오는 3만엔이 구세주이다. 전후 일본의 꿈나무 세대였던 지금의 50대가 구조조정의표적인 된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자신을 50대 초반 평균적인 일본 월급쟁이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B씨는 “지금의 생활에 절망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도 없다”고푸념한다. 황성기 특파원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대한포럼] 풍납토성은 국사교과서다

    서울 송파구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에 관한 제1차 발굴보고서가 지난주 나왔다.1997년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식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보고서에서 문화재연구소는 ▲서기전 1세기부터 풍납토성 안에 대규모 주민집단이 정착했고 ▲‘특별한위상’을 지닌 초대형 주거지들이 확인됐으며 ▲기존에 알려진 한성백제(BC 18∼AD 475)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이곳에서 거의 다 출토됐다고 밝혔다.보고서는 “한성백제 유적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고,주거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위상으로 보아 주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성이인정된다”면서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결론지었다.학술적으로 신중하게 표현된 결론을 쉽게 풀어 쓰자면,풍납토성에는 서기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그 주거지 규모와 생활용품 수준에비춰볼 때 백제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이틀림없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 온조가 서기전18년 하남 위례성에 도읍했다는 기록이나온다.하남 위례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침해 백제개로왕을 참살하고 성내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이미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고,그 뒤 지금까지 학계는 서울·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과 멀리는 충남 직산까지를 후보지로 검토했다.그런점에서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확정짓게 된 것은 역사·고고학의 큰 성과다. 더 나아가 풍납토성이 갖는 실체적 진실은 ‘한 왕조의 수도 확인’이라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 고대사체계를다시 세우도록 요구할 만큼 넓고 깊다.불행히도 지금의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일본 관학자들이 세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일본 관학자들의 체계란 ▲단군의 실체는 신화일 뿐 역사가 아니므로 고조선도 사실상 믿기 어렵다(또는 무시해도 된다)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에 망해 한반도 중부 이북에 한사군이 들어선 것이 사실상 한국사의 시작이다 ▲특히 낙랑·대방은 4세기 초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중부에군림했고,백제·신라는 소국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3세기에 힘의 공백지대인 한반도 남부에 진출,식민지경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한국 침략은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는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이를주장하고자 일제 관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인한다.삼국사기는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은 뒤 주변소국을 차례로 정벌해 재위 13년에 벌써 영토를 동서로 서해에서 춘천까지,남북으로 안성천에서 예성강까지 넓혔다고기록했다. 그런데도 일제 관학자들은 백제가 3세기나 되어서야 제대로 국가 형태를 갖추므로 그 이전의 활동 기록은믿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같은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을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가지금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 그늘은 여전히 짙게 덮여 있다.예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역사교과서들은 “왜(倭)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6세기에야 상실했다”고 왜곡하고 있다.우리 고교 국사교과서도 “백제는 한강 유역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3세기 중엽 고이왕때에 이르러…중앙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다”(45∼46쪽)고 서술할 정도다. 풍납토성의 전체 규모는 성벽 밑면의 폭이 40m,높이 9∼15m,총길이 3.5㎞로 추정되며 공사에 동원된 노동력은 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계산된다.건국 초기에 이같은 성을 쌓은백제는 그만큼 강력한 국가였고 이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옳았음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서기전 1세기에서 3세기까지 민족사의 실체를 되찾은 것이다.또 풍납토성이 존재하게끔 그전에 축적된 우리 역사의 두터움도 입증한다.풍납토성은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다.이 시대 우리가풍납토성을 되살린 것은 기적이자 민족사의 축복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일본은 대국… 배울점 많아”

    [도쿄 황성기특파원] 김현장이 일본행(行)이라니,그것도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현장(金鉉奬·51)씨는 지금 도쿄에 있다.엉뚱맞게도 도쿄대 대학원 과정인‘동아시아 사상과 문화’ 2학기째이다.괴짜란 표현이 딱맞다.지난해 10월 일본에 왔다. “일본을 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반일 감정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역사 교과서 문제가 있지만 그건 별개의문제로 쳐야 합니다.그들은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20년 만에 부흥했고 지금은 대국입니다.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루 600만명이 오간다는 도쿄의 최대 번화가 신주쿠(新宿)에서 만난 그는 ‘전통(전두환 전 대통령),노통(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사형수,무기수로 14년 옥살이를 했던 사람같지 않다.흰머리를 염색한다면 족히 40대 중반으로 보일건강한 얼굴이다.“0.8평의 감방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운동이든 뭐든 즐겁게 지내려고 했던 게 몸에 배서 그런가요” 젊게 보이는 비결인 셈이다. “배울 게 많은 것 같습니다.일본은 우리를 속속들이 잘 알지만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릅니다.그런 뜻에서 ‘일본 바로 알기’같은 운동을 펼치고 싶어요”.르포 작가이기도 한 그는 더위가 걷히면 준비에 들어가 ‘또 하나의 일본’이란 제목으로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경력도 ‘화려한’ 그는 그 연배의 운동권 출신이 흔히 그러하듯 지금쯤 정치권에 있을 법하다.그런데 왜 야인(野人)을 택했을까.어느 세상에 필요한지를 굳이 난세(亂世),치세(治世) 두 부류로 나눈다면 “나는 난세”라는 그는 “20년 전에나 필요했던 사람이지 지금은 아니다”고 했다.“사람이 회절(回折)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이유는 꼭 밝혀야 한다”는 그는 정치판에 들어가 운동의 초심을 잊고있는 선후배에게 할 말이 많아 보인다. 학교에서 1시간반쯤 걸리는 도쿄 외곽의 기숙사에 혼자 산다.빨래도 손수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도 싼다.돈을 아끼려고 웬만하면 걷는다.광주에 있는 부인(44)은 한달에 한번쯤 다녀간다. “재야 운동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그는 왜 일본을 알고 배워야 하는지를 알리는 것도새 시대 새 운동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나를 친일파라고 해도 할 수 없지 않겠어요?”변신이 놀랍다. marry01@
  • 누런 민둥산엔 불탄 나무만 앙상히…

    ‘사막같은 황토빛 민둥산과 군데군데 앙상한 수수깡처럼 남아 방치된 회색빛 불탄나무들’1년만에 다시 찾은 강원도 동해안 산불지역은 여전히 황량하기만 하다. 지난해 4월 초 동해안 일대를 휩쓴 9일동안의 화마로 잿더미가 된 2만3,138㏊의 산림은 지금까지 흉한 모습 그대로였다.수백년생 소나무로 울창했던 산은 사막에서나 볼수 있는 흙먼지 날리는 푸석푸석한 땅으로 변해 나무를 심어도 살아날까 의심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주요도로변 등에는 불탄 나무를 잘라내고 나무심기를 서두르고 있지만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는 아직도 앙상한 뼈대만 남은 나무들이 방치돼 있다. 96년 대규모 산불이 났던 고성군 죽왕면 마좌리 죽변산일대는 4∼5년 자란 나무들이 제법 자리를 잡고 있다.하지만 지난해 산불이 난 고성군 토성면 학야리 지역과 강릉시사천면지역 동해시 삼화동,삼척시 근덕·원덕지역에는 여전히 흉물스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요즘에도 바람불고 사이렌소리 나는 밤이면 산불을 겪었던 지역 주민들은 밤에 자다가도 지난해 산불을 떠올리며몸서리친다. 산불이 휩쓸고간 선산 묘지를 살펴보기 위해 산에 오른강릉시 주민 최돈희(崔敦熙·40·자영업)씨는 “순간의 실수로 산에서 나무 한그루 볼 수 없게 됐다”며 “복구하는데 짧게는 30∼40년,길게는 100년까지 걸릴 것이라는 얘기에 참담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산불로 주민들의 생활상도 많이 변했다.삼척시 원덕읍 노경·이천·임원·옥원리와 근덕읍 궁촌·장호리,고성군 죽왕면 야촌리 주민들은 그동안 가을철 송이채취로 높은 소득을 올리며 산촌생활이 남부럽지 않았다.주민들은 산불이후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나물채취 등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고소득을 바라보고 귀향했던 많은 젊은이들도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내몰리고 있다.야촌리 주민 함명식(咸明植·58)씨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생활의 터전을 잃고 하나둘 고향을 다시 떠나는 게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한편 강원도 동부지방산림관리청은 산불 피해 지역에 우선 황벽나무와 들메나무,산벚나무 등 불에 강한 나무를 심는 등 혼합림으로 산불을 예방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올해에는 21억7,300만원을 들여 873ha에 29만그루의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 *산불감시 강릉시청 황계진씨. “해마다 봄철만 되면 산불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공무원들이 안스럽기만 합니다” 강원도 강릉시청 황계진(黃桂振·44·여·회계과)씨는 봄만 되면 밤낮없이 산불예방에 나서야 하는 고달픔이 이만저만하지 않다. 더구나 황씨는 토·일요일도 없이 겪어야 하는 4교대 주·야간순찰근무가 여자로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순찰당번이 돌아오는 날이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자신의 업무를 서둘러 처리한 뒤 오전 10시쯤 동료들과 지정산불감시지역인 왕산면사무소로 이동한다. 면사무소에서 근무일지에 간단히 산불근무 신고를 한 뒤수백년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대관령아래 곰자리골마을과 큰골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마을도로를 순찰한다.이곳을 지나는 차량들과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묻고 산불예방계몽활동을 펼친다. 저녁 6시에 잠시 시내에 있는 집에들러 저녁식사를 한 뒤쌀쌀한 밤기온을 견디기 위해 겨울외투로 갈아입는다.여자동료와 팀을 짜 밤 10시쯤 다시 왕산면 마을을 찾아간다.다음날 오전 6시까지 꼬박 8시간의야간 산불감시에 들어간다.쏟아지는 졸음과 온몸이 얼어붙는 고충을 견뎌내야 한다.오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면 다시 사무실을 찾아 자신의 업무를 챙겨야 한다. 이같은 생활은 강원도 동해안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3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두달동안 연례행사처럼 해오고 있다. “차라리 주말마다 비나 눈이라도 내렸으면”하는 게 황씨의 솔직한 심정이다.잠시라도 산불 걱정을 덜고 일상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서다. 강릉 조한종기자. *정연숙 강원대교수의 제언/””소나무림 최소화 활엽수림 전환을””. 지난 동해안지역의 산불이 대형화한데는 기후·토양·지형 등의 지역적 특성은 물론 밀집된 소나무숲도 한 원인인것으로 알려졌다. 소나무 등 침엽수림의 경우 피해지역의 나무 66%가 완전히 죽었지만 활엽수림은 피해지역 나무의 36%만 죽었다는‘동해안 산불피해지 공동조사단’의 조사에서도 밝혀진사실이다. 이같은 조사는 대형산불 예방에는 단기적으로 입산통제,소각금지,숲가꾸기가 효과적이지만 장기적 처방으로는 불에 잘 타지 않는 활엽수림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관계기관들은 동해안 피해지 산림복구를 위해 소나무 인공조림을 넓게 계획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산불에 취약한 소나무숲을 산불상습발생지에 또다시 조성한다는 점이 첫째 문제고,소나무숲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과 관리인력이 투입 돼야 한다는 점이 둘째 문제다. 소나무는 햇빛 선호도가 높은 양수(陽樹)이기 때문에 어린 묘목은 기존 수종의 움싹(萌芽)과 초기 경쟁력이 약하다.따라서 소나무숲을 조성하려면 반복적으로 움싹제거를해야하는데 관행적인 육림예산과 관리인력을 고려할 때 가능할지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 “60년만에 둘러본 고국 내생애 최고의 5박6일”

    “내 생애에 가장 기쁜 날들이었지만 함께 이 날을 기다리며 타국땅에서 고생하다 죽은 친구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입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고향방문단 중 최고령인 장진섭씨(93)는 26일60년 만에 찾아온 고국에서의 ‘5박6일 여정(旅程)’에 대한 소감을이같이 말했다. 마지막 공식일정으로 이날 서울 종로구 창덕궁을 방문한 그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유산들이 6·25전쟁 때 잿더미가 된 줄로만 알았는데,이렇게 잘 보존돼 있다니 고맙고,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돌아가게돼 너무 기쁘다”며 후손에게 잘 물려줄 것을 당부했다. 장씨는 “고향 경주로 내려간 지난 23일 남동생,사촌 등 친척과 마을사람들이 환영 잔치를 열어줘 눈시울을 적셨다”면서 “반세기 만에 다시 본 고향이 옛 자취를 몰라 볼 만큼 변한 데 놀랐다”고 말했다. 사업 및 관광차 북한도 여러 번 다녀왔다는 장씨는 “만나면 다 똑같고 뿔달린 사람은 없다.지금까지는 문을 닫고 있었지만 앞으로는자유롭게 왕래해야 한다”면서 “이제 경의선까지 놓였으니 서울에서세계 어디든 갈 수있도록 벽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20대 청춘에 먹고 살기 위해 일본 철공장으로 일하러 갔던 장씨는아들과 손녀 둘,손자 하나를 두었고 고손녀까지 보았다. 장씨는 “우리가 잘못해 이렇게 됐다”며 분단된 조국을 물려 준 구세대로서의 아픔을 표시한 뒤 “남과 북이 합친다면 강성대국이 될수 있다”며 젊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27일 출국하는 장씨는 앞으로 오래오래 살며 고향을 모르는 아들,손자도 데리고 오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윤창수기자 g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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