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재혼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한화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606
  • 무고사범 두달새 29명 구속/검찰,66명 적발

    ◎민주화 편승 허위고소 일삼아/국민 불신풍조 조장,화합 저해/악질적 명예훼손범 등 뿌리뽑기로 재산상의 이득을 노리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시킬 목적으로 상습적으로 고소·고발을 일삼아온 무고사범 66명이 검찰에 무더기로 적발됐다. 서울지검은 26일 지난 9월1일부터 본·지청합동으로 무고사범에 대한 일제단속을 실시,한국화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박노학씨(58·이학박사) 등 29명을 구속하고 박장용씨(73·동작구 상도1동) 등 37명을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최근 수년동안 우리사회의 민주화분위기에 편승해 허위고소를 일삼아 국민들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고 화합을 깨뜨리는 무고사범이 늘고 있어 일제단속에 나섰다』면서 『앞으로도 악질적인 무고사범과 명예훼손사범은 지속적으로 단속,엄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 K대교수인 박씨는 87년 1월 재혼,동거해 오던 S대 이모교수와 헤어진뒤 재결합을 요구,거절당하자 이씨가 재혼전에 가지고 있던 자금으로 구입한 1억여원짜리 아파트 한채에 대한 공동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냈다가 이길 가능성이 없자 지난 3월 『이씨가 아파트 매매계약서를 위조했다』는 내용의 허위고소장을 제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함께 구속된 동해특산대표 김상백씨(50)는 81년 유모씨에게 경북 울릉도에 있는 땅 3천6백여평을 판뒤 이전등기를 해주지 않아 유씨가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자 유씨를 소송사기혐의로 고소,무혐의처분이 내려지자 헌법소원까지 내 기각당하고서도 지난해 10월 다시 유씨를 허위 고소했다는 것이다. 또 최홍승씨(70·용산구 서계동 230)도 자신이 인천 백병원에 기증했던 병원신축예정지 부근의 토지 반환문제를 놓고 백병원 직원 정모씨를 고소,무혐의처분이 내려지자 주임검사 등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허위고소,무고죄로 징역 8월을 복역하고서도 90년부터 담당검사 18명과 정씨를 상대로 재정신청과 헌법소원까지 내면서 고소를 계속해오다 적발됐다. 최씨는 특히 88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11차례에 걸쳐 28명을 고소하고 1백여차례에 걸친 진정서를 관계기관에 냈던 것으로 검찰수사결과 밝혀졌다. 한편 검찰은 지난 한햇동안 접수된 각종고소사건 24만7백여건 가운데 30%가 넘는 7만9천여건이 무혐의 처리됐고 4백69건이 무고로 형사처벌받았으며 올 상반기에도 전체 12만6천여건 가운데 4만여건이 무혐의처리됐고 3백22건이 무고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 가정집 LP가스 폭발/주부·친척 등 4명 사망/4명 중화상

    12일 하오1시30분쯤 서울 노원구 상계4동 111의421 권오영씨(45·목공)집에서 가정용 프로판가스가 폭발,권씨의 부인 김성자씨(45)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권씨등 4명은 화상을 입었다. 이 폭발로 권씨집 지붕과 벽등이 무너져 내렸다. 사상자들은 지난해 재혼한 권씨부부의 결혼 1주년을 맞아 초대된 친척들이며 이들은 점심을 먹고난 뒤 식당에서 얘기를 나누다 변을 당했다. 권씨는 『처가 식구들이 놀러와 점심을 먹고난뒤 방이 차 가스보일러를 틀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 보니 가스호스에서 가스가 새 가스를 끄고 환기를 시킨뒤 보일러를 다시 켜는 순간 폭발했다』고 말했다. 사고당시 권씨 집에는 권씨 부부와 친척등 8명이 있었으며 옆방에 세들어 사는 박영만씨(29·고려대 법학과대학원)와 권씨의 아들 혁이군(17·H고3년)은 잠시 집을 비워 화를 면했다. 사고를 본 이웃주민 김리용씨(46·자동차정비업)는 『낮잠을 자다 「꽝」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현관문과 안방유리창이 깨져 나가보니 권씨집 슬래브지붕과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비명소리가들렸다』고 말했다.
  • 서인도­유럽문화 작품속에 접목

    ◎노벨문학상 수상 월코트의 생애와 문학세계/수상소감/“서인도문학 우수성 인정에 뿌듯” 내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때 무척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내생각에는 트리니다드 출신작가 V S 나이폴이나 에이레 출신 시인 시머스 히니가 받을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내가 받게됨으로써 서인도문학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됐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나는 어렸을때부터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꿔왔고 이제 그 꿈을 이뤘다.그러나 이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열심히 창작에 몰두할 계획이다.또 상금을 받게되면 고향에 연극스튜디오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카리브해 민요·토속신화를 시로/영국인 아버지·아프리카 출신 어머니 복합전통 계승/은유속의 강렬한 이미지가 특징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영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데릭 월코트씨(62)는 서인도·유럽·흑인문화,흑·백문화간의 통합이라는 주제를그의 작품속에서 일관되게 그려왔다. 한림원은 월코트의 수상이유를『일생을 통해 탁월한 역사적 안목과 다양한 문화를 접속시킨 훌륭한 시들을 발표해 서인도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밝혔다.그의 시들은 아름다운 운율과 다양한 이미지·은유,언어(영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으로 알려져왔으며 특히 지난 90년에 발표된 「오메로스」는 『64장으로 된 장엄한 카리브 서사시』라는 극찬을 받았다.이밖에도 그는 독창적인 희곡들을 다수 발표,이를 자신이 창단한 트리니다드 극장에서 직접 연출하는등 희곡부문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오기도 했다.특히 「원숭이 산에서의 꿈」(67)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이작품은 캐나다와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되었다.그리고 트리니다드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근 20년간의 역사를 다룬 또 다른 희곡 「마지막 카니발」(86)이 곧 연극으로 만들어져 스톡홀름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월코트는 영국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후예로 식민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복합적인 문화에서 성장했다.따라서 자신의 복합적인 문화적 환경들을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속에 그려 내용과 형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카리브해에 살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흑인 후예인 그는 이런 문화적·형식적인 상이점등을 강력하고도 독창적으로 작품속에 용해시켜내는 문학적 업적을 남기는데 공헌했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과 배경,주제들을 즐겨 다루어왔다.인종주의,제국주의의 부당함,열강들의 멸망,그리고 개인적·문화적·정치적인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도 주제로 등장한다.그의 작품세계는 은유와 이미지가 다양하고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세인트 루시아와 자메이카에서 수학한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크레오어와 서인도지방의 방언을 작품속에 가능한한 많이 도입,지방방언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는 남다른 노력을 쏟는등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그는 또 작품의 소재와 모티브를 서인도제도의 민담과 토속신화,전설등에서 많이 가져옴으로써 이곳 문화를 외국에 자연스럽게 소개시켰다. 그는 희곡 「도핀바다」(1954) 「원숭이산에서의 꿈」(1967)등에서 세인트 루시아지방의 전설들과 신화,그리고 식민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식민정치가 인간의 영혼에 끼칠 수 있는 해악등을 강력히 떠올렸다.반면 그의 시들은 희곡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종문제,식민지문제등을 다루고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희곡보다 영국적인 전통을 많이 따르고 있다.대표시집 「또 하나의 삶」(1973)은 자전적인 장시로 이전의 역사적·사회적인 주제들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접근들을 보여준다. 18살때 2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를 한 그는 그러나 62년에 시집 「푸른 밤에」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는 문학이외에도 미술과 언론등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활동을 해온 인물로 알려져있다.1962년 현재 부인인 마가레드 루스 메일리드여사와 재혼했고 세자녀를 두었다. ○월코드 연보/1954년 희곡 「도핀바다」로 데뷔 ▲1930년 서인도제도 세인트 루시아 출생 ▲세인트 메리대및 자메이카 웨스트 인디즈대 수학 ▲1948년 시집 「젊은이들을 위한 비문」으로 데뷔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주 ▲1954년 희곡집 「도핀바다」출판 ▲1959년 트리니다드 극문학연구회 설립 ▲1962년 시집 「푸른 밤에」로 유명해짐 ▲1971년 민속극 「원숭이 산에서의 꿈」으로 오비상 수상 ▲1986년 희곡 「최후의 카니발」출판 ▲1988년 퀸즈 골프 메달 시부문 수상 ▲현재 미보스턴대 영문학교수 재직 ○대표작/장편서사시 「오메로스」로 영예 ◇희곡=▲도핀바다(1954) ▲이오네(1957) ▲티 진과 형제들(1958) ▲원숭이산에서의 꿈(1967) ▲오 바빌론!(1976) ▲회상(1979) ▲판토마임(1981) ◇시=▲푸른 밤에(1962) ▲캐스터웨이와 시들(1965) ▲걸프와 시들(1969) ▲또다른 삶(1973) ▲모자반(1976) ▲스타애플왕국(1980) ▲행복한 여행가(1982) ▲한여름(1984) ▲오메로스(1990)
  • 젊은층/결혼에 부정적 견해 증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미혼남녀·기혼부인 1만여명 조사/“꼭 해야한다” 남 39%·여 16%에 불과/경제력가진 여성 독신 느는 일본과 비슷/기혼여성은 76%가 결혼에 대해 긍정적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결혼은 「당연히 해야할」 인륜지대사였다.그러나 최근 상당수의 사람들이 결혼을 개인이 처한 조건과 환경에 따라 「선택」할수 있는 문제로 인식하면서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의 1만2천여가구중 18∼34세의 미혼남녀 3천7백15명,15∼49세의 기혼부인 7천5백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91전국 출산력및 가족보건실태조사」결과를 토대로 제출한 「한국에서의 가족형성과 출산행태」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이 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미혼남자는 39.5%,여자는 16.1%에 불과했다.또한 결혼을 「하는 것보다는 안하는 것이 좋다」「안하는 것이 좋다」의 두항목에 전체의 11%가 응답해 만만찮은 수가 결혼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특히 여자의 경우 14.1%로 남자(7.6%)보다 2배나 많이 응답,여자들이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 결혼을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표시,적극적인 독신 희망의사를 나타낸 응답자중 남자는 1.6%에 불과했으나 여자는 4.5%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최근 우리나라 여성의 생활패턴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로 풀이된다. 독신을 희망한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실제 행동으로 연결시킬지의 여부는 알 수없다.그러나 경제력을 가진 여성들의 독신경향이 늘고 있는 일본의 경우 89년 「독신희망자 조사실태」결과 남자가 4.5%,여자가 4.6%로 나타난데 비추어볼때 여성의 경우 그 추세를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한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와함께 「독신의 이점이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남녀 공히(남55.7%,여61.8%) 「행동및 활동의 자율성」을 가장 큰 이점으로 들었다. 다음으로 「직장·사회생활에서의 자율성」순이었는데 이 항목에서는 여자가 28.9%,남자가 17.7%로 응답해 「결혼=속박」이라는 관념이 여성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줬다.또 「폭넓은 이성관계를 가질수 있어서」항목에 대한 응답자는 남자가 6.3%로 여자(3.1%)의 두배로 나타났다. 이밖에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혼필요성에 대한 의식조사에서는 대상자의 약76%가 「하는 편이 좋다」고 응답했으나 부정적인 견해 역시 약15%로 만만찮은 편이었다.이러한 의견의 경우 결혼한지 10년 전후(18%),또 30대 연령층의 부인들에서 가장 높은 분포도를 나타냈다. 한편 현재 사별·이혼·별거등으로 배우자가 없는 부인중 재혼할 의사가 있다는 부인은 10.0%에 불과했으며 73.4%가 재혼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나머지 16.6%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재혼의사는 젊은층·고학력일수록,또 80년대이후 최근에 해혼한 경우에서 높았다.
  • “「사할린의 한」 고국서 풀렵니다”

    ◎무연고 독신 노인교포 76명 어제 영주귀국/춘천군 「사랑의 집」서 여생보내/징용뒤 50년간 설움속 타국살이/“고향에 뼈 묻게돼 이젠 여한없어” 『꿈에도 잊을 수 없던 고향에 다시 돌아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29일 하오 2시10분(현지시간 하오 4시10분)사할린국제공항의 활주로를 천천히 미끄러져나가는 대한항공 전세기에 몸을 실은 사할린동포 1세 76명(남 69·여 7명)은 설렘과 감회가 교차되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한채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눈을 감는 모습들이었다. 『도대체 고향이 뭐길래…』 이번에 영주귀국하는 65세가 넘은 동포들중 최고령인 강시동옹(90·경남 하동출생)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훔치며 지나온 과거를 회상한다. 강옹은 자신의 생일보다 아직도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44년2월16일 아침,아내와 4살난 아들을 고향에 남겨놓고 일제의 강제징용에 이끌려 산설고 물설은 머나먼 이국땅 사할린으로 왔다.태평양전쟁 막바지를 악으로 버티던 일제의 활주로 건설작업에 투입돼 전쟁이 끝난 45년9월까지 하루 15시간 이상 땅을 파는 중노동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해방이 됐건만 강옹에게는 주인만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달라졌을 뿐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밭에서 이삭을 주워먹고 풀을 뜯어 연명하는 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탄광부로 끌려왔던 한국인 여자를 만나 40년대말 현지에서 재혼을 하고 아들·딸까지 두었으나 11년전 부인이 사망하면서 자식들마저 노쇠해진 아버지가 부담스러워 어느날 말없이 떠나갔다.다시 혼자가 된 그는 지난 89년 모국방문단으로 45년만에 고향을 찾은 이래 『반기는 사람들은 없지만 뼈만은 고국땅에 묻겠다』고 다짐,마침내 소원을 이루게 됐다고 한많은 세월을 되뇌었다. 『이제야 기나긴 고통의 세월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원두옹(72·경북 칠곡군 지천면 백운동출생) 역시 지난 43년9월 결혼한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아내를 뒤로 하고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왔다.56년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그동안 고수했던 무국적의 고집을 버리고 러시아국적을 취득했던 것이 평생 마음에 걸린다는 그는 『또다시 자식과 생이별하는 아픔보다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너무나 커 인간으로서 해선 안될 짓을 다시 하게됐다』고 풍파가 새겨놓은 깊은 주름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는 또 『막노동하며 겪어야 했던 고통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마늘냄새가 난다며 식품가게에서 쫓겨나던 설움과 마누라에게조차 소수민족이라고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수모는 떠나는 이날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며 입을 굳게 다문다. 43년 가을 결혼 한달만에 징용에 끌려가는 남편을 따라 무작정 따라온 박정숙할머니(66·경남 하동출생)는 4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젖먹이 아들 하나에 의지하며 50년 가까운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고 울먹인다.부모님의 산소에 절이라도 한번하고 그 곁에 묻힐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남몰래 간직해온 소원을 말한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약소민족으로서의 설움을 평생 몸으로 체험하고 돌봐줄 피붙이 하나없이 쓸쓸한 여생을 보내던 이들은 앞으로 강원도 춘천군의 서울 광림교회(담임목사 김선도)가 운영하는 양로원 「사랑의 집」에서 마지막 안식처를 찾게 된다. 귀국동포들은 30일 민속촌과 삼성전자를 둘러보고 1일부터 사흘간 고향을 방문한뒤 사랑의 집으로 들어간다.
  • 절대권력의 절대부패/장수근 북한부장(오늘의 눈)

    「하느님」이 애첩을 둔 꼴이 됐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이 「하느님」이란 호칭을 붙여가며 신격화·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김일성에게 30살짜리 첩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말이다. 원체 비밀이 많은 집단이긴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김일성의 가족관계는 더더욱 두꺼운 베일에 가려져 북한에서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김일성이 전처인 김정숙과 결혼한 날짜도 이제껏 밝혀진 적이 없다. 김일성이 지금의 처 김성애와 재혼한 연대역시 비밀에 붙여져 있다.그뿐 아니다. 김성애가 불가리아주재대사인 아들 김평일외에 몇명의 자녀를 낳았는지도 일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일성 일가에 대한 철저한 비밀유지는 그의 신격화를 위한 공작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게 북한전문가들의 해석이다.북한에서 절대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일성.그가 인민들과 다를게 없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그에 대한 개인숭배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취한 조치가 바로 주석궁 일대를 비밀의 커튼으로 차단했다는 풀이다. 아무도 보는이가 없다보니 그 안에서의 김일성·김정일부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일 수 밖에 없을 터이다. 대낮에 애첩을 끼고 노닥거리든,「목란관」에서 서양 무희들이 추어대는 스트립 쇼를 즐기든 뭐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장수연구소」에서 마련한 식단에 따라 차려진 밥상을 받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한편 김정일은 한술 더 떠 호사를 극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게 망명자들의 증언이다.김정일은 북한에서 나는 것은 아무 것도 먹지를 않는다.그는 오로지 세계 각처에서 들여온 값비싼 수입식품만을 먹는다고 한다. 김일성 일인지하의 세상인 북한에서 그가 몇명이고 애첩을 거느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북한에서 김일성 일가는 일반 국민과 유리된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돼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하루에 두끼만을 먹고 있다는게 외신의 보도다. 이런 판에 애첩 일가에게 호화판 해외여행을 시키고 싹쓸이 쇼핑에 외화를 펑펑 쓰게 한 패악은 김일성이 그토록 위한다는 「인민」들을 정작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고 끝내는 무너진다고 했다.이번에 밝혀진 김일성의 파렴치한 축첩행위는 북한 최고 권력층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는게 산케이(산경)의 분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체제가 붕괴직전에 있다며 지금은 일본이 대북원조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한 폴토라닌 러시아부총리의 경고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 독일/이혼뒤 제3자와 동거 부부 인정여부 논란

    ◎40대여인 전남편에 생계비수송으로 발단/지방법원선 “법률관계 성립안해”/최고심판소 판결남아… 사회적파문 결혼신고를 않고 사는 동거부부를 법률상으로 부부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근 독일에서 관심을 끌고있다.동거부부의 법적 지위문제는 유럽사회에서 이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다 독일에만 1백만쌍이 결혼 신고를 않고 살고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발단은 결혼에 일차 실패한 42세의 여성이 두 자녀를 둔 이혼남과 동거,아이를 낳았는데 이 여인이 최근 전남편 수입중 일부를 자신에게 실업 생계비로 지급할 것으로 풀다지방법원에 신청하면서 시작되었다.풀다법원은 법률상으로는 부부가 이혼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재혼을 하지 않고 직업도 못구했을 때에는 수입중 일부를 전배우자에게 생계비로 떼어 주도록 하고 있으나 이 여인은 두 자녀 아버지와 가정을 꾸미고 아이까지 낳아 사실상 재혼 한것과 다름 없는데 평생동안 전남편이 수입중 일부를 이 여인에게 주어야 할 것인지를 판결하기 힘들어 이 사건의 법률 적용문제를칼스루헤 최고법률심판소에 넘겼다. 풀다법원은 『사실상 부부관계라 할지라도 법률적인 부부가 아니면 생계부양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동거하는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는 볼수 없다』고 밝히면서 이 여인에게 근로촉진법 137조를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를 물었다.칼스루헤 법률심판소는 이번 사건에 대해 오는 11월3일 결정을 내릴 예정이나 이번 사건은 연금이나 생계비보조등 금전적인 목적의 동거부부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사회분위기속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례대로라면 만약 이 여인이 결혼도 않고 직업도 못가졌을 때는 전남편이 평생동안 생계를 도와 줘야 한다.그러나 최근 이같은 법률상 보장을 악용,이혼후 정식 재혼을 기피하고 동거생활을 하며 전남편으로부터 생계비를 챙기는 사람이 늘어 사회문제가 되고있다. 이같은 현상은 45년 2차세계대전이 끝난뒤 크게 늘어난 전쟁과부들 중에서 전사한 남편의 연금이 끊기는 것을 피해 재혼을 하기보다는 동거생활을 많이해 「삼촌부부(옹켈에헤)」라는 계층이 풍미하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72년 서독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옹켈에헤」는 13만7천여쌍에 이르렀으며 시대변천에 따라 내용은 달라졌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전남편이나 전부인으로부터 생계비를 계속 받기위해 이혼후 재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부부가 1백만쌍이나 된다. 칼스루헤심판소가 만약 이 여인의 생계비보조를 보장하는 법적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결정할 경우 이들 동거부부의 법적 지위는 보장될 것이지만 도덕상으로나 사회정의상 용납키 어려운 문제점이 부각되며 잘못된 것으로 판결할 경우에는 관계 법개정이 불가피 해진다. 베르너 텍트마이어 연방정부 노동차관은 『노동촉진법의 요체는 모든 근로자의 생활을 보장하자는 제도적 장치이며 동거부부라고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며 현제도를 옹호하고 있으며 법률가협회의 레나테 예거회장은 『실업자보호는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사회구호와는 구별돼야하며 금전적인 목적의 동거부부를 정상부부와 동일시해서 보호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동거부부중에는 정식결혼을 위한 「실습부부」도 크게 늘어나는 만큼 이에대해 일괄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정상부부와 어느선에서 차등을 두어야 할것인가가 이번 사건의 판결로 규범이 마련될 전망이다.동거부부가 늘어나면서 90년 독일인들의 평균결혼연령은 20년전에 비해 2년반이,부모가 되는 것은 1년반이 늦어졌다.
  • 독일 첫 여성외무장관/슈배처

    ◎겐셔문하서 외교수업 쌓은 자민당 여걸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의 뒤를 이을 이름가르트 슈배처 건설장관(50)은 독일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으로 리타 슈스무트 연방 하원의장과 더불어 독일정계를 대표하는 여걸. 화학자 출신으로 겐셔장관과 같은 자유민주당(FDP) 소속인 슈배처 여사는 헬무트 콜총리가 이끄는 기민당(CDU)과 FDP및 기사당(CSU)간의 연정구성 당시 이루어진 「외무장관직은 FDP인사가 맡는다」는 합의에 따라 행운을 안게 됐다. 옷을 잘 입는 여성으로도 잘 알려진 슈배처여사는 작년 1월 건설장관이 되기 전까지 4년동안 겐셔외무장관 밑에서 고위보좌관,외무차관등으로 「외교수업」을 쌓은 겐셔문하의 우등생이기도 하다. 작년 1월 건설장관이 된 이래 주택난과 구동독지역의 주택임대료 인상등 산적한 난제들을 대과없이 요리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슈배처여사는 또 지난 80년대초 쇠퇴일로를 치닫던 자유민주당의 당운을 회생시킨 맹렬여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재혼한 남편인 TV방송기자 우도 필립씨와의 사이에 자녀를 갖지않은 그녀는 또 낙태금지법 폐지를 강력히 주창,콜총리의 연립내각에서 보수적인 CDU및 우파성향의 CSU인사들과 종종 충돌을 빚어온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다.
  • 미입양 4남매,18년만에 생모 상봉

    ◎뉴욕등에 흩어져 살다 어렵게 재회/“엄마찾자” 의기투합… 김포서 포옹 『마마(엄마)…』 『은미야.은희야.원형아.원철아…』 18년전 가난에 못 이겨 미국에 입양됐던 윤은미(27)은희(24)원형(23)원철(21)씨 등 4남매가 4일 꿈에 그리던 친어머니 유정희씨(56)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은미양 남매는 이날 하오 4시15분 대한항공051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씨를 보자 처음에는 머뭇머뭇거리다 곧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너희들을 무슨 낯으로 보겠니만 이렇게 훌륭히 큰걸 보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유씨는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자신들을 버린 생모를 찾아온 4남매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다가 설움에 북받친 나머지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씨가 이들 남매를 미국에 입양시킨 것은 지난 74년과 75년.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어렵게 지내던 유씨는 남편이 병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가장이 됐다. 그러나 홀몸으로 5남매를 키우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이럴 바에야 해외에 입양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결심,큰딸 순자씨(37)만 남겨두고 홀트아동복지회에 나머지 4남매의 입양을 신청했다. 셋째딸 은희양(당시 6세)과 막내 원철군(당시 3세)은 지난 74년 9월 미국 미네소타주로,둘째딸 은미양과 넷째 원형군은 뉴욕으로 각각 보내졌다. 유씨는 어린 자식들을 떠나보내던 날 훗날 커서라도 고국을 생각토록 지갑속에 10원짜리 동전 몇개와 흙을 담아줬다. 4남매는 그후 뿔뿔이 흩어져 각각 미국인 양부모와 함께 살아왔다.은미씨는 지난 88년 미국인과 결혼해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으며 원형군은 대학에 재학중이고 원철군은 이번 학기에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유씨는 이들 남매를 미국에 보낸뒤 8년동안 혼자 살아오다 지금의 남편 명달산씨(56·노동)를 만나 재혼했다. 미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4남매는 1년에 한번 정도 만나오다 지난해 홀트아동복지회에 친모의 연락처를 수소문,이날 재회에 성공했다. 『기억이 흐려져가는 엄마를 꿈에선 그래도 보았어요.정말 엄마를 만나다니 믿어지질 않아요』 18년만에 친어머니를 만난 4남매는 유씨의 손을 놓지 못했다.
  • “부모의 잦은 싸움 창피하다”/의붓자매 음독 자살

    【안동=이동구기자】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을 비관해오던 자매가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지난 2일 하오5시20분쯤 경북 안동군 예산면 인계리 616 박병창씨(32·농업)집에서 박씨의 맏딸 미희(14·중학2년)셋째딸 원미양(8·국교2년)자매가 농약을 먹고 신음중인 것을 둘째딸 진미양(10·국교4년)이 발견,이웃주민들과 함께 병원에 옮겼으나 숨졌다. 진미양에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이종임씨(39)가 평소 가정불화로 부부싸움이 잦았는데 이날도 언니와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다 밭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 『창피해서 못살겠다』며 창고에 있던 농약을 마셨다는 것이다. 경찰은 어머니 이씨가 숨진 큰딸 미희양을 데리고 박씨와 재혼한 뒤 자주 부부싸움을 해왔다는 주민들의 말에 따라 이들 자매가 이를 비관,자살한 것으로 보고 부모들을 불러 정확한 사고경위를 조사중이다.
  • 남아공 흑백갈등 절묘하게 묘사

    ◎노벨문학상 수상 고디머의 생애와 작품세계/여성으론 66년 삭스후 25년만에 영예/26세때인 49년에 데뷔… 장편 10·단편집 7권 펴내/“백인·흑인 모두 정치적 피해자다” 역설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의 양심을 대표하여 백인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글과 행동을 보여온 여류작가이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1966년 독일계 스웨덴 작가인 넬리 삭스의 수상이후 여성으로서는 25년만에 7번째로 받는 것으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고디머는 40여년간의 작가생활동안 일관되게 남아공의 현실을 작품소재로 삼아왔다.그의 작품들은 남아공의 정치체제가 소수 백인층과 다수 흑인층에 끼치는 영향을 냉철히 관찰하면서 백인이나 흑인이나 모두 똑같이 체제에 의한 정치적 피해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1923년 11월20일 남아공의 스프링스에서 러시아계 유태인 아버지와 영국계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여학교를 거쳐 요하네스버그의 위트워터스트랜드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일찍부터 글을 쓰기시작했으며,다른 작가들이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망명을 하던 시절에도 계속 남아공에 남아서 자신의 정치사회적 신념과 작가로서의 신조를 지켜왔다.1949년 26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그는 작품을 발표할때마다 평론가들의 주목과 찬탄을 받으며 지금까지 7권의 단편집과 10편의 장편을 발표했다.그는 지금까지 WH 스미스문학상,제임스 테이트 흑인기념상,토머스 프링글상,부커상등을 수상했으며 허위의식을 거부하고 진실을 보고자 하는 용기있는 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문학적 양심의 대변인으로 꼽히는 고디머의 작품들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방식은 주로 백인주인공의 갈등하는 내면세계를 통해서이다.백인자유주의자로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던 전남편 맥스의 자살소식을 들은 리즈 반 덴산트의 하루를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는 백인중산층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준다.분노와 좌절의 암울함이 넘치는 이 작품에서 고디머는 흑인 뿐아니라 백인도 인종차별체제의 희생물임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7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영국 부커상수상작인 「보호주의자」역시 진보적인 성공한 백인기업가 메링의 삶과 흑인 농장노동자들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지배층인 중산층 백인세계의 불안과 정신적 불모성을 그리고 있다. 고디머는 지난해 장편 「아들의 이야기」를 출간했는데 이 역시 흑인 유부남과 반인종차별운동을 하는 백인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아공의 현실을 조명하고 있다. 고디머의 작품이 갖는 장점은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개인이 겪는 갈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자신이 처해있는 정치환경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사회적관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는 또 같은 소재라도 작품에서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과 스타일을 개발해 기법적인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이번수상자 선정에 있어서도 「보호주의자」「버거씨의 딸」등의 복합적인 기법이 주요 선정경위가 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 번역소개된 고디머의 작품으로는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창작과 비평사),「보호주의자」(지학사)등의 장편소설과 단편 「아이들」「방문객」등이 있다. □고디머 연보 ▲1923년11월20일=남아프리카공화국 스프링스에서 리투아니아계인 부친 이시도어 고디머와 영국계 모친 낸 고디머 사이에서 출생. ▲1949년=결혼,첫 단편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출간. ▲1954년=라인홀드 카시러와 재혼,두 자녀를 둠. ▲1961년=「프라이데이의 족적」으로 WH 스미스 문학상 수상. ▲1969년=토머스 프링글상 수상. ▲1972년=「명예로운 손님」으로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수상. ▲1974년=장편소설 「보호주의자」로 부커상 수상 ▲주요작품=「보호주의자」「버거씨의 딸」「7월의 손님」「이방인들의 세계」「허위의 나날들」「아들의 이야기」등.
  • “한민족체전 통일 앞당기는 계기 됐으면”

    ◎북한 국적 몽골선수단장 김은송씨/“평양의 경직된 모습만 보다 활기찬 서울거리 보니 감동”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돌아가 몽골에 살고있는 한족들에게 알리겠습니다』 15일 하오 2시50분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한민족체전 몽골선수단 대표 김은송씨(37·여·내과의사)는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겨레가 한데 모여 화합을 다지는 축제에 초청해준 동포여러분께 감사한다』며 밝게 웃었다. 4명 모두 여성으로만 구성된 선수단을 이끌고 고국을 찾은 김씨는 『이번 행사가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덧붙였다. 『북한의 경직된 분위기에 비해 한국은 자유롭고 활기차며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생명력이 넘친다』고도 했다. 지난 75년 21일동안 평양을 방문했고 올해 3월에는 2주일동안 한국을 돌아봐 남북의 분위기를 모두 잘아는 김씨는 북한국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62)가 몽골인과 재혼,13살때인 지난 65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시로 갔으며 몽골과의 관계가 좋지않던 중국의 국적으로는 몽골의과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어 북한국적을 취득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지난 78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몽골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울란바토르 노동자구역병원에서 내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몽골전국을 통틀어 6가구 20여명에 불과한 한민족들은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겨레의 혼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 자주 만나 어울리고 있다』고 밝혔다. 몽골은 사회주의국가여서 흡족할만한 많은 봉급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몽골인 남편(39)이 마사회 사무총장이어서 사회지도층인사에 속한다. 당초 지난10일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비행기편이 닿지 않아 늦게 도착했다는 몽골선수단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일주일쯤 머물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 경제발전상을 살펴 보고갈 계획이다. 지난 3월 한·몽협회 초청으로 몽골백화점 직원 9명을 이끌고 내한했던 김씨는 『당시 빠듯한 일정때문에 찾지 못했던 친척들을 수소문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김씨가 찾으려 하는 친척은 외할아버지 김동주씨,외할머니 윤체화씨,해방직후 군청직원이었다는 삼촌 김기택씨(73)등이다.
  • 김지미씨 올 가을 결혼/의사 이종구씨와 4번째로

    영화배우 김지미(51·본명 김명자)가 올가을 서울중앙병원 심장센터 소장인 이종구박사(59·울산의과대교수)와 결혼한다. 두사람의 결혼은 지난1월 김씨의 어머니 고순남씨(84)가 동맥경화증으로 서울중앙병원에 입원,이박사의 치료를 받게 된것을 계기로 사귀다가 최근 이박사의 청혼으로 이뤄진것. 김씨는 『이박사의 인품과 중후한 멋에 호감을 느껴 앞으로의 삶을 맡기게 됐다』면서 자신이 기획·제작중인 영화 「명자 아끼코 소냐」의 소련로케를 마치는데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씨는 서울대의대를 나와 26세때 캐나다로 유학,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유럽에서 심장순환기내과수업을 쌓아온 석학.캐나다 앨버타 의과대학 재직중 31년만인 88년 한림대 교환교수로 서울에 온 이박사는 89년3월 서울중앙병원 개원에 초빙받아 지금까지 이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김씨는 18세때 「황혼열차」(김기영감독)로 데뷔,지금까지 5백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지난 86년부터는 영화사 「지미필름」을 운영하고 있다.김씨는 이번이 4번째 결혼이며 이박사는 재혼이다.이박사는 2년전 이혼한 전부인과의 사이에 장성한 세아들을 두고 있다
  • “감격속 현충일”… 황규만씨의 외길정성 결실

    ◎「그날의 전우이름」 40년 만에 찾았다/국립묘지 「김○○의 묘」 주인공은 “김수영씨”/서울신문 읽은 동기생이 명부 보내 실마리/“현대사의 비극” 기억하게 무명비는 그냥 두기로 40년을 찾아 헤맨 그 전우의 이름은 군번 117162의 육군소위 김수영이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5만여 순국영령들의 묘비 가운데 단 하나뿐인 무명용사비(서울신문 90년 6월25일자 11면 보도)의 주인공 이름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상오 국립묘지 동쪽 제2묘역에서는 김 소위의 아들 종태씨(40·춘천시 후평동 주공아파트 407동 308호)와 40년 전 전우인 예비역 육군준장 황규만씨(61·범양상선 부회장) 등이 오열하고 있었다. 황씨는 지난 50년 8월 경북 포항지구 전투 때 새로 전입한 지 5분 남짓 만에 전사한 김 소위를 현장에 매장하고 후퇴한 뒤 계속 군무에 쫓기다 14년 전 이름도 모르는 김 소위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하고는 유족들을 찾는 데 반평생을 바쳤었다. 황씨의 이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지난해 6·25를 맞아서 서울신문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김 소위의 가족임을 자처하는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었다. 그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조목조목 여러 정황을 캐물어 보곤했지만 하나같이 실제인물이 아니어서 실망만 거듭됐다. 그러던 지난해 11월초 김 소위와 시흥보병학교 갑종간부 1기 동기인 나보현 예비역 대령(62)이 동기생 명부를 보내왔다. 김 소위의 이름을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하고 있던 황씨는 다시 한가닥 희망을 걸고 1백46명의 명부를 뒤져가며 김 소위를 찾기 시작했다. 6·25 때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4명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50년 8월24일 전사한 것으로 돼 있는 김수영 단 한명뿐이었다. 산천이 4번이나 바뀌도록 목메게 찾던 바로 그 김 소위가 분명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전사일과 불과 3일 차이가 날 뿐 아니라 국립묘지에 알아본 결과 어디에도 김수영 소위의 묘비는 없었다. 김 소위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황씨는 곧바로 유족을 찾아 나섰다. 보훈처에 알아보니 춘천에 김 소위의 혈육인 딸 광성씨(44)와 아들 종태씨가,서울영등포에 누이들인 수덕씨(59)와 수봉씨(56)가 살고 있었다. 구청과 동사무소를 통해 이들 가족이 해방 후 함남 원산에서 월남한 사실을 확인한 황씨는 10여 일 만인 11월13일 마침내 유족들을 만났다. 김수영 소위는 해방 후 원산에서 월남,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50년 1월 갑종 1기생으로 시흥보병학교에 입학했다. 김 소위는 전쟁이 터지기 이틀 전인 6월23일 아들 종태씨가 태어나자 다음날 휴가 나와 잠깐 아들을 본 뒤 곧바로 전쟁터로 나가 그해 8월 포항 안강지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4살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을 해 그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고모집에서 생활해온 종태씨는 해마다 현충일이면 할머니 손을 잡고 국립묘지 산마루에 서서 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며 서러움을 달래왔다고 했다. 김 소위의 가족들은 사흘 뒤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고 또 지난달 말에는 황씨와 함께 포항 전사지에도 다녀왔다. 황씨의 40년에 걸친 전우애는 이날 두 번째로 아버지의 묘비를 찾은 종태씨가 황씨의 만류에도 불구,본사에 전해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황씨와 유족들은 「김 소위의 묘」에 이름을 새겨 넣으려다 현재 그대로 이름없는 묘비로 남겨두기로 했다. 40년 동안 이름없이 세워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전쟁의 아픈 상흔을 기억하는 하나의 유물로 길이 남기기 위해서이다. 다만 묘비 아래 상석에 「김수영」이라는 이름과 유가족을 만난 날짜 등을 새겨두기로 했다.
  • “자기실현이 요즘 학생의 첫째 욕구”

    ◎“교수직 50년” 연대 원일한 박사/“40년대엔 사회적 책임의식 강했죠”/설립자의 손자… 개교 1백6돌 감회 깊어 지난 11일 창립 1백6주년을 맞은 사학의 명문 연세대의 학교법인 이사인 원일한 박사(74)에게는 올해가 참으로 뜻깊은 해이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원 박사는 1885년 4월5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원두우) 박사의 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이 학교에 봉직하고 있으며 맏아들 한광씨(48)도 영문과 교수로 있다. 따라서 원 박사 집안 4대의 역사는 연세대학교의 작은 역사이기도 하다. 원 박사의 할아버지 언더우드 박사는 1915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이던 현재의 학교부지 일대의 땅 19만 평을 사들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초대 교장으로 학교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언더우드의 발음을 따 원두우라는 우리 이름을 썼다. 연세대 본관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 「언더우드관」으로 불린다. 원 박사의 아버지 원한경 박사도 이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34년 9월부터 41년까지는 제3대 교장으로 일했다. 원일한 박사는 1917년 10월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외국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해밀턴대학에서 교육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원 박사는 40년 서울로 돌아와 연희전문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의 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는 자부심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했으나 요즘 학생들은 자기실현의 욕구가 가장 큰 것 같다』는 것이 원 박사의 평이다. 그는 42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대위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45년 전쟁의 승리는 제2의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기쁨을 주기도 했다. 『해방후 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이 학교에 머물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때 대학생들은 해방의 흥분과 조국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으며가르치는 교수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원 박사는 41년 결혼,아들 셋을 두었다. 43년 맏아들이 태어나자 당시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한국의 빛을 받고 태어났다」는 의미로 한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으며 뒤에 아버지의 「한」자를 물려받기 위해 한광으로 고쳤다. 그는 한자도 한국의 상징인 한강과 통하기 때문에 한자와 마찬가지로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원한광 교수는 영문과에서 영미소설을 강의하고 있다. 둘째 윌리엄과 셋째 피터의 한국이름은 이 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용제 백낙준 박사가 영어이름의 원뜻을 살려 한웅과 한석으로 지었다. 흥분의 시대가 지나고 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원 박사는 다시 해군으로 복귀,현역장교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53년 휴전회담이 이루어지자 원 박사는 유엔군측 수석대표 통역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꿔 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원 박사는 이때부터 83년까지 전공인 교육학을강의했다. 75년 부인과 사별한 원 박사는 호주 출신의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화여대 종교음악과 원성희 교수(58)와 77년 재혼했다. 파란눈에 다부진 몸집을 가진 원 박사에게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느냐 』고 묻자 『책상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부으면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 간다』고 말하며 웃었다.
  • 선정주의 열병 앓는 미언론계

    ◎증거없이 의원 성추문 폭로에 비난 빗발/NBC방송/강간피해자 실명 공개… 항의받고 사과도/NYT지 미국 언론계가 최근 갑자기 불어닥친 황색 선정주의 바람속에 몸살을 앓고 있다. 스캔들이나 가십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기사발굴로 재미를 본 과거 미국 언론의 선정주의는 이제는 이른바 타블로이드 신문이나 그 분야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들 속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최근 고급신문이나 전국망을 가진 텔레비전이 일련의 사건을 다루면서 선정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미국 언론의 본류에 선정주의 얼굴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비난의 발단은 지난 부활절 휴가기간중 플로리다주에 있는 케네디가 별장지역에서 발생한 강간사건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상원의원의 조카가 용의자로 지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NBC방송은 강간피해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 관례를 깨고 그 이름을 공개함으로써 충격을 던졌다. 물론 NBC방송에 앞서 크고 작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연일 플로리다일대에 진을 치고 피해자 주변을 비롯,온갖 「소문사냥」을 이미 시작한 뒤였다. NBC방송은 강간 피해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에게 강간사건은 일단 「불명예」라는 오랜 관념 때문인데 이를 언제까지 계속할 경우 피해자만 손해를 보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고 케네디 상원의원 자신이 사건발생 전날밤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유명인사 연루사건이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공개 이유를 제시했다. NBC의 뉴스담당 사장인 마이클 가트너는 『내가 어렸을 때는 신문이 사망원인이 암이라는 얘기도 보도하지 않았다』고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논란이 더 확대된 것은 다음날 뉴욕 타임스가 NBC방송을 통해 수백만 시청자가 피해자의 신원을 알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신원을 활자화하는 한편,한술 더 떠 피해자 어머니의 재혼경력 등 사건과 관계가 없지만 가십거리가 될 만한 내용을 흥미본위로 다룬 뒤였다. 인콰이어러 잡지 등 이런 유형의 사건을 다루어인기를 끌고 있는 대중잡지들이 오히려 피해자 이름을 끝내 발설하지 않음으로써 뉴욕 타임스의 방침은 더 두드러져 보였다. 이 때문에 뉴욕 타임스는 이름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편집간부들과는 더이상 일을 같이할 수 없다는 많은 기자들의 항의가 제기돼 전체회의를 소집해 간부진의 해명을 듣고 부분적으로 신원공개를 사과하는 글을 싣는 등 법석을 피웠다. 이 문제가 잠잠해지려는 순간,이번에는 낸시 레이건의 전기를 놓고 미 언론계는 또 한 차례 공방을 벌이게 됐다. 프랭크 시내트라·엘리자베스테일러 등 유명인사에 대한 「승인받지 않은」 전기를 써온 키티 켈리가 낸시와 시내트라가 백악관에서 어쨌다는 등의 얘기를 담은 책을 발간했으며 뉴욕 타임스는 책 출간을 앞두고 1면에 내용과 함께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또 한 번의 논란을 야기했다. 작가 키티 켈리가 여러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책 내용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점잖은 사람들이면 입에 담기도 어색한 내용의 책을 대서특필해 장사를 도와주는 것이 일류신문이 할 짓이냐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켈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발간될 것이라는 보도가 논란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난 일요일 NBC방송은 다시 한 번 황색 저널리즘의 논란을 확대하는 일을 일으켰다. 골든 타임에 방영된 「폭로」프로에서 이 방송은 버지니아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찰스 로브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다. 그 주 내용은 마약이 사용됐을지도 모르는 개인파티에 로브 의원이 참석한 적이 있다는 것과 대학에서 미의 여왕으로 뽑힌 적이 있는 젊은 여성과의 관계엾다. 이같은 폭로내용이 새로운 것도 또 폭로를 입증할 만한 새로운 사실이 별로 추가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 재상영이 됐는가 하는 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걸프전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정보독점을 비난했던 미국 언론계가 수십 년 전에 불붙었던 선정주의 논란에 다시 휩싸이고 있는 것은 상업주의 저널리즘의 화려함 뒤의 어두운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알리는 것 같다.
  • “페만 파장”… 후세인 관련책 “불티”

    ◎한겨울에 휘몰아친 출판가의 “이상현상”/「…대야망」 초판 나오자마자 매진… 재판찍어/청년시절·통치철학·집권과정등을 다뤄 전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이라크대통령 사담 후세인,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사담 후세인의 성장과정과 가족관계,통치스타일 등을 규명한 전기 「사담 후세인의 대야망」이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전쟁으로까지 치닫는 오늘날의 중동사태를 사담 후세인의 생애와 통치철학을 통해 조명한 이 책은 현재 영국 더타임스의 중동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주디스 밀러와 하버드 대학교수 출신인 로리 마일로이의 공저로 미국 독서계를 휩쓸고 있다. 중견언론인 진영수씨가 펴낸 국내 번역판도 지난해 말 선보인 후 초판이 매진되고 재판에 돌입했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바그다드에서 1백마일 떨어진 티그리스 강가의 알아우자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차 대전으로 5백년간의 터키 식민지배가 끝나고 12년간의 영국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은혼돈의 시기였다. 후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으나 그가 태어나 몇달 안돼서 아버지 후세인 알 마지드와 사별,어머니 수바와 재혼한 난폭한 의붓아버지 이브라힘에 의해 학대받으며 길러진 것으로 후세인 비서의 증언을 통해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후세인은 10살 때 바그다드에 있는 외삼촌집에 와서 늦게 국민학교에 들어가 16살에 중학교를 마쳤다. 원래 호전적인 성격인 그는 육군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희망했으나 성적이 나빠 들어가지 못하고 바그다드에 와 있던 고향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당시 중동의 정세는 1952년 이집트 나세르중령의 왕정 전복 쿠데타 성공과 수에즈운하 국유화선언 등으로 아랍민족주의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정치적 음모의 세계에 휩쓸리게된 그는 1956년 이라크 왕정타도 쿠데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이듬해 20살의 나이로 아랍급진 민족조직인 바트당에 입당했다. 본격적으로 정치단체의 일원이 된 후세인은 1958년 비바트당 계열의 민족주의 군장교들을 동원해 국왕 파이잘2세 축출에 성공한 압둘 카림 카심장군 저격단의 일원으로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피신,공부를 계속해 24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카이로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1963년 카이로에서 외삼촌의 딸인 사지다와 결혼하고 외양으로는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내고 있는듯 했으나 마음은 고국의 정치상황에 있었으며 그해 바트당 소속 장교들에 의해 카심장군이 살해되자 그는 바로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26세에 새로운 혁명정권에 가담하게 된 후세인은 반바트당 인사들의 고문을 담당하며 악명을 날렸다. 그후 바트당내의 세력투쟁 과정에서 그는 2년여의 옥고도 치르지만 결국 31세가 되던 1968년 권력장악에 성공,바트당 사무총장 겸 혁명사령부 평의회 의장이던 사촌형 바크르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혁명사령부 평의회의 부의장으로 내부보안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2인자가 되었다. 권위주의적이고 난폭한 성격의 그는 수많은 비밀경찰을 배출,정보정치를 폈으며 인척들을 요직에 앉혀 부정부패에 앞장서게하는 등 국가를 개인왕국화시켰다.결국 1979년 7월16일 바크르대통령을 사임케하고 후세인 자신의 대통령에 올라 바트당 사무총장 및 군 최고사령관으로 전권을 장악하게 됐으며 그후 10년 가까이 이란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개인독재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같이 후세인의 성장 및 집권과정을 기술한 이 책은 후세인이 영화 「대부」를 가장 좋아하며 그 주인공 돈 콜레오네와의 공통점을 규율·충성·잔인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세인의 개인적인 측면 외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강점 및 미국의 적극적 개입배경 등도 상세히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아울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후세인 자신이 아랍제국의 맹주가 되어 미국을 비롯한 서구강대국 정상들과 함께 중동의 모든 것을 요리하겠다는 원대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미군의 적극적 개입은 결국 미국 석유수입권 보호를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페르시아만의 위기는 결국 서방의 합리주의와 아랍 사고방식의 중간정도에서 해결책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후세인과 같은 무자비하고잔인한 지도자는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논지도 펴고 있다.
  • 모국방문 7순 사할린교포 할머니(조약돌)

    ◎50년만에 남동생ㆍ조카와 극적상봉 ○…사할린동포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강한갑씨(76)가 27일 하오2시 마포구청장실에서 50년만에 남동생 강평순씨(74ㆍ강서구 화곡본동 1130의20)와 극적으로 상봉. 강할머니는 지난25일 호적등본을 갖고 마포구청을 방문,딸과 동생을 찾으려 했으나 컴퓨터 조회에 실패,이날 장조카의 주민등록사항을 확인해 장조카 강성옥씨와 전화통화에 성공,동생과의 해후가 이뤄진 것. 그러나 강할머니가 찾고있던 남동생 2,여동생 2명중 큰동생인 강할아버지만 생존,다른 가족은 모두 사망했으며 딸 윤인섭씨(일명 강정자)는 출가한 것으로 밝혀져 현재 호적을 추적중. 강할머니는 40년 여름 유복자로 태어난 딸과 함께 서울 마포에서 살다가 딸이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돈을 벌어 자립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잡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혈혈단신으로 사할린으로 떠났었다. 강할머니는 그곳에서 재혼,2남3녀를 낳았지만 고향에 두고온 첫딸과 동생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날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동생을 만나게된 것. 이날 상봉을 주선한 이원택 마포구청장은 강할머니 남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50년만에 해후를 한 이들과 이산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 숭의여고 이우균교사 「30년교단」서 순직

    ◎끝내 못다부른 노해병의 망향가/부인ㆍ아들 북에두고 단신월남… 독신고수/“반드시 고향에… ” 대교류무산으로 좌절 정년을 1년 남기고 2학기 개교 첫날인 지난21일 30년동안 지켜온 교단에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운명한 서울 숭의여고 이우균교사(64ㆍ국어담당)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중구 저동 백병원 영안실에는 그를 아끼는 동료교사와 제자들의 흐느낌소리로 가득했다. 하늘도 그의 순직을 애통해 하는듯 영안실 밖은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되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소 이교사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진장철교사(57ㆍ서울혜화여고ㆍ영어담당)는 기어이 목을 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옛 제자 김연선씨(36ㆍ의사)도 『지난70년 중3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마치 학처럼 살다 가신 분』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교사는 지난 1927년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50년7월 김일성치하의 청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1ㆍ4후퇴때 단신 월남했다. 공산독재하에서 잠시 피신했다 되돌아가면 밝은 세상이 되리라 믿고 부인과 아들을 남겨둔채 떠나온 것이 지금까지 한순간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산의 아픔이 될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교사는 월남이후 지금까지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으며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재혼도 하지 않은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알며 외롭게 살아왔다. 특히 적십자회담이 별 성과없이 끝난 이후 최근 노태우대통령의 7ㆍ20선언으로 이번에는 정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민족대교류도 북한측의 생트집으로 끝나자 이산의 고통은 더욱 찢어질듯 아팠다. 천부적인 낙천가요,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이교사는 개학을 앞둔 지난주만 동료교사 몇사람과 만난 술자리에서 『8ㆍ15민족대교류도 무산되고 말았으나 다음달 북경에서 있을 아시안게임때 중국으로 가 만주의 훈춘에 꼭 들러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겠다고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때를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그런뒤 개학을 맞은 지난21일 낮12시50분쯤 중학교 1학년3반 교실에서 3교시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교단위에 앉아 학생들이 내미는 답안지를 정리하던 이교사는 「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교단밑 시멘트바닥에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 가까운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단신 월남한 직후인 지난52년 1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여러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용감한 해병용사이기도 하다. 전역후 홍익대 문학부 국문학과를 나와 60년 4월부터 지금까지 숭의여고에서 외길 교직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에서 살며 지난 30년동안 부어온 연금 2억여원을 포함,4억여원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있으나 연고자가 없고 유언도 없어 국고에 귀속될 처지에 놓인 외로운 한평생이었다. 학교측에서는 온 몸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며 평생 사도의 길을 성실히 걸어온 이교사를 위해 23일을 추모의 날로 정해 수업을 하지않고 학교장으로 성대히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 방려지 출국허용과 이철영 방일의 의미

    ◎“경제봉쇄 풀기”… 중국의 실리외교/일 총리와 친한 이,56억불 차관교섭 추진/“서방에 경원재개 설득”요청할 듯 중국당국이 지난해 6ㆍ4 천안문사건 이후 서방세계에서 자국에 대해 취하고 있는 경제봉쇄령을 풀도록 하기 위해 요즘 들어 다양한 외교전략을 숨가쁘게 구사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5일 북경의 미국대사관에 1년이 넘도록 피신해 있던 반체제물리학자 방려지부부의 출국을 허용,서방국가들로부터 일단 환심을 사는데 적잖이 성공을 거둔데 이어 오는 30일엔 국무위원 이철영을 일본에 보낼 계획이다. 이의 방일계획이 발표된 것은 지난 21일이었지만 사실은 중국정부가 방교수부부의 출국허가를 이미 결정,이 조치의 파급효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부드러운 분위기속에 놓이게 될 것을 미리 계산하고 이의 방일날짜를 30일로 잡았을 것이란 지적이 유력하다. 또 시기적으로도 24일이 강택민이 당총서기에 취임한지 한 돌이 되며 7월들어 곧 서방선진 7개국(G7) 정상들이 모여 대중관계정상화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져 중국으로선 이번 기회에 서방세계의 경제제재가 종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번 일본행에 나서는 이철영의 경우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가 비록 대외적으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중국권력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부총리와 장관 사이의 직급으로 모두 9명뿐인 국무위원직을 맡고 있는 것 외에도 이철영은 최고정책결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당중앙정치국의 14명 위원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함께 국가교육위원회 주임(장관급)도 겸임하고 있다. 그러나 직함외에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의 등소평 친자설이다. 등은 지난 30년대 중반 권력투쟁에 패해 심한 곤경에 빠졌을 때 두번째 부인 김유영(사망)과 이혼했으며 당시 등의 반대파였던 이유한(사망)과 재혼한 김이 얼마후 낳은게 이철영이라는 것. 따라서 이가 빠른 속도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보이지 않는 등의 뒷받침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번 일본행도 등의 특명을 받은 밀사자격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는게 관측통들의 지적이다. 그러면 지난해 6ㆍ4 천안문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중국고위층인사인 이가 지닌 임무는 무엇일까. 크게 세가지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는 7월9일부터 11일까지 미 휴스턴에서 열리는 서방 7개 선진국(G7)정상회담때 일본이 다른 국가들에 세계은행(IBRD) 차관동결을 비롯한 각종 대중국제재조치를 풀도록 설득해줄 것을 요청하는 일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본의 가이후(해부)총리는 지난해 총리가 되기 전 같은 문교행정을 맡은 장관으로서 이와 절친했고 당시 이에게 일본방문을 요청한 사실도 있고 해서 이번에 가이후ㆍ이회담은 당연히 이뤄질 전망이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가 일본에 대해 종전에 이미 중일간 계약이 체결된 56억달러 상당의 엔화표시 장기저리 차관을 하루 빨리 공여해주도록 촉구할 것이란 점이다. 이 엔화공공차관은 중국이 90∼96년에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재원이다. 그러나 6ㆍ4사건이후 서방선진국들이 공동으로 취한 대중국 경제제재조치 때문에 이 차관제공계획도 동결된 상태이며 중국은 철도ㆍ항만ㆍ발전소시설 등의 건설계획이 큰 차질을 빚음에 따라 고통을 겪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가이후가 중국을 대신해서 미부시대통령에게 중국수출상품에 대한 미측의 지속적인 최혜국대우(MFN)조치를 요청해 주도록 바랄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가 1년시한부 연장의사를 밝힌 이 조치는 현재 미의회에서 중국의 인권문제와 관련,찬반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이 조치가 중단될 경우 연간 1백억달러 가까이로 예상되는 중국의 대미무역흑자는 10분의 1정도로 격감되고 경제운용은 말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또 일본으로선 중국의 총외채 4백13억달러 가운데 그들몫이 35%나 되는데다 다른 나라에 크게 앞질러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므로 자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대중국제재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장기화할 경우엔 오히려 일본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일본측은 중국과 자국의 이익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다른 서방국들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같다. 가이후총리가 7개국 정상회담 직전에 단독으로 부시대통령과 만날 것으로 전해지는 것도 일본이 중국을 위해 단단히 총대를 메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철영의 이번 방일은 중국과 서방의 관계회복에 도움을 주고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의 교류에도 융통성이 주어질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