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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개월 장기연극축제 “호흡 맞추기”

    ◎히트작 제조기 이만희­흥행귀재 강영걸/첫 작품 「돼지와 오토바이」 등 6편 차례로 무대에/히트한 합작품 3편 포함… 옛명성 재현 나서/성루 작은두레극장 개관기념… 오늘 공연 시작 극작가 이만희씨(43)와 연출가 강영걸씨(54)가 장기간 손을 맞잡는대서 연극계의 화제다. 문화예술단 서울두레가 대학로에 또하나 마련한 작은두레극장 개관기념으로 마련한 「97­98 이만희·강영걸 연극축제」.오늘부터 무대를 여는 이 연극축제에서 각기 「히트작제조기」와 「흥행의 귀재」 소리를 듣는 두 사람이 1년6개월이 넘게 긴 호흡을 맞춘다.첫 작품 「돼지와 오토바이」를 비롯해 과거 공연됐던 이씨의 화제작 5편과 현재 집필중인 신작 1편 등 모두 6편을 강씨의 연출로 차례차례 무대에 올리는 것. 비록 나이는 열살 이상의 터울이 지지만 이 둘의 결합은 이미 흥행실적으로 검증받은 명콤비중의 명콤비.91년 첫 호흡맞춤한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로 서울연극제 대상·희곡상·연기상 등 5개부문을 휩쓸었고 두번째 합작품 「불좀 꺼주세요」는 한 극장 3년6개월 연속공연에 20만명 이상 관객동원이라는 위력을 발휘했다.또 93년의 세번째 합작품 「피고지고 피고지고」 역시 국립극장 사상 첫 연장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우는 등 그해 『이만희와 강영걸이 무대를 평정했다』는 찬사를 낳게 했다.이들 3편의 작품은 이번 연극축제에 모두 포함돼 옛 명성 되살리기를 시도한다. 두 사람의 결합이 이처럼 빛을 내는 것은 둘이 지닌 많은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작품속에서 자연스런 조화를 이뤄내기 때문.이들은 무엇보다 언어를 통한 관객에의 어필을 중시한다.이씨의 작품이 소재의 특이성과 함께 대사의 감각적 묘미를 살리는데 탁월하듯 강씨 역시 배우의 맛깔스런 화술 구사에 큰 비중을 둔다. 물론 두 사람의 이번 결합에 대해 일부의 비판적 시각도 없지는 않다.관객이 들지 않는 끝모를 불황탓에 신작보다는 한때 재미를 본 히트작들의 재공연 붐이 일고 있는 요즘 공연계의 현실반영일 뿐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하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리즈 공연을 통해 침체된 연극계에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연극은 언제든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교훈을 확인시키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오늘 첫 공연에 들어가는 「돼지와 오토바이」는 지난 93년 북촌창우극장 개관기념으로 무대에 올라 큰 호응으로 장기공연했던 작품.한번 결혼에 실패한 주인공 황재규가 재혼을 앞두고 고민하면서 털어내놓는 삶에 대한 넋두리를 틀로 해서 남녀배우 세 사람이 풀어가는 다중극의 형식이다.오토바이를 타기만 하면 즐거워하는 돼지의 우매함에 견주어 인간의 삶을 풍자,제목이 「돼지와 오토바이」다. 탄탄한 연기력의 연극배우 유영환과 배우·MC·DJ 등 다재다능의 재주꾼 송채환·성병숙이 출연한다.9월말까지 평일 하오7시30분,금∼일 하오4시30분·7시30분.수요일은 휴관.3673­2961.
  • 귀순아들 권유로 「동토의 땅 탈출」/북 가족 감격의 「서울재회」

    ◎94년 탈북 홍진희씨 일가 셋 입국/외화벌이 지도원 등 2명도 함께 지난해 1월 귀순한 북송 재일교포 2세 홍진희씨(28·고려대 중어중문 1년)의 일가족 3명과 탁영철씨(25·신의주 경공업대학 기계학부 5년)등 북한 주민 2명 등 모두 5명이 29일 하오 5시10분 대항항공 602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했다. 귀순자는 홍씨의 어머니 주영희씨(49·가내협동조합중앙회 농장원),여동생 경화씨(26·비닐신발공장 노동자),남동생 진명씨(20·농장원)와 탁씨,최명동씨(51·군부대 소속 외화벌이지도원) 등이다. 이미 귀순한 탈북자의 나머지 가족이 북한을 탈출,잇따라 귀순한 것은 처음이다. 주씨 가족의 귀순은 서울에 있는 큰 아들이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한 끝에 이뤄졌다.이날 공항 입국장에서는 홍진희씨가 북한을 탈출한 지 4년3개월만에 만나는 어머니와 두 동생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주씨는 『무사히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게 돼 무척 기쁘다』면서 『특히 지난 2월 중국에 머물때 북한 공안요원들의 감시를 따돌려 준 중국 교포들에게감사한다』고 말했다. 주씨는 특히 『지난해 12월 함경남도 단천의 한 아파트 모퉁이에서 죽어가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하루에 평균 2∼3명씩 목격했다』고 폭로,북한의 식량사정이 크게 악화됐음을 증언했다. 주씨 일가족과 함께 이날 귀순한 탁씨는 『재학 중인 신의주 경공업대학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국의 KBS 사회교육방송을 청취,남한 실정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면서 『이 사실이 사회안전원에게 적발돼 신변에 위협을 느껴 탈북했다』고 말했다.한편 최씨는 언어 장애를 겪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씨는 61년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으나 첫 남편과 사별했고 93년 3월 맏아들 진희씨가 중국으로 탈출한 뒤 직장에서 쫓겨나 94년 1월 함남 허천군 상남리의 외딴 산촌으로 가족과 함께 강제 이주했다.주씨는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96년 7월 재혼한 뒤 단천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재혼 한달만에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 연길에 갔다가 맏아들이 외화벌이 요원때 알고 지내던 조선족 동포를 만났고 그를 통해 96년1월 한국에 귀순한 맏아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진희씨는 그때 어머니에게 탈북을 권유했고 이후 편지와 전화를 주고 받으며 탈출계획을 세웠다. 주씨 일가족은 북한의 최대 국경일인 김정일의 생일 하루 전인 지난 2월15일 함남 단천에서 회령 부근의 상봉으로 이동,17일 밤 두만강을 건너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진희씨가 부쳐준 2천만원을 탈출자금으로 사용,중국의 연길·심양·청도 등지를 거쳐 탈북 31일 만인 지난 3월20일 홍콩으로 밀입국해 망명을 신청했다. 이들이 망명한 뒤 우리 정부는 홍콩측과 두달여에 걸친 망명협상 끝에 무사히 귀순시켰다.
  • 오는 11일 막오르는「서울여성영화제」/첫 상영작품 한국「미망인」

    ◎출품작 39편·상영일정 확정 오는 11∼17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일대에서 열리는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출품작과 상영일정이 최근 확정됐다.상영작은 13나라에서 초청한 29편과,단편영화·비디오 부문 경선에 진출한 10편 등 모두 39편. 11일 하오7시 열리는 개막식 상영작은 한국영화인 「미망인」(감독 박남옥).1955년작 흑백필름인 이 영화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의 재혼 문제와 자유로운 삶의 추구 등을 다루었다.또 17일 하오7시 폐막식에서는 경선 부문 수상작을 재상영한다. 영화제가 마련한 프로그램 가운데 영화팬에게 가장 관심끌만한 부문은 세계에서 최근 2년간 제작된 여성영화들을 소개하는 「뉴 커런츠」.할렘가에서 자란 흑인여성 4명이 절망끝에 은행강도를 한다는 내용의 「셋 잇 오프」,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노동자계급의 여성이 정체성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린 「바비의 일생」들이 포함됐다. 이밖에 ▲중국 근현대사를 누빈 송미령 3자매의 이야기인 「송가황조」 ▲레즈비언 관계인 두 여성의 범죄행각을 그린 스릴러 「바운드」등 곧 극장가에 오를 영화 2편도 미리 볼 수 있다.문의 (02)762­6038.
  • TV 드라마/비정상적 스토리 전개 여전/방송개발원 조사

    ◎사랑타령·입양­사생아 등 주류 TV 드라마들이 여전히 비정상적인 애정 및 가족관계라는 왜곡된 스토리텔링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방송개발원이 지난달 10일부터 16일까지 방송된 KBS·MBC·SBS 등 3개 공중파방송의 드라마를 서사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결과 이같은 문제점이 재확인된 것. 분석에 따르면 등장인물들간의 복잡한 감정을 무분별한 애정행각으로 드러내거나,한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이성이 밀고 당기는 사랑타령을 벌이는 등 비정상적인 애정관계가 여전히 두드러진다는 것.KBS­2의 「내 안의 천사」,SBS의 「꿈의 궁전」「연어가 돌아올때」,MBC의 「욕망」「의가형제」「길위의 여자」 등이 대표적인 드라마들. 또 입양아·이복형제·사생아 등 무리한 인물설정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도 지적됐다.「연어가…」에서는 사생아인 남자주인공과 계모의 혼전 딸을 연인 사이로 설정하고 있고,「의가형제」는 일종의 원한관계에 있는 집안에 입양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는 갈등구조또한 외도나 불륜 등에서 비롯된 남녀갈등(KBS­2 「유혹」,MBC 「길위의 여자」)이나 재혼·입양 등을 계기로 한 갈등관계(KBS­1 「하얀 민들레」「사랑할 때까지」)가 선호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전체 드라마 흐름상 별로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결말을 자주 만들어내는 것도 문제.KBS-2의 「내안의 천사」는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으면서 끝이 났고,MBC 「의가형제」는 드라마 갈등의 한 축이었던 남자주인공을 느닷없이 폐암말기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밖에 시청률 강세를 이어가거나 방송횟수 연장을 위해 자주 이용되는 조연배우들의 푼수연기나 흥미성 캐스팅도 문제점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
  • 40대이후 이혼 많아진다/95년 인구동태 통계

    ◎여자초혼 갈수록 20대 후반으로 늦춰져/하루평균 1천981명 출생·680명 사망 95년들어 여자의 초혼연령층이 20대 전반에서 20대 후반으로 바뀌었다.40대 이후의 이혼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사회참여와 교육기회의 확대로 자아성취욕구가 높아지면서 가정의 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통계청이 20일 발표한 95년 인구동태통계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다. 출생과 사망=95년 연간출생수는 72만3천명으로 추산돼 하루 평균 1천981명이 태어났다.30대 후반과 40대 전반 여자의 1천명당 출산율이 86년 8명,1.9명에서 15명,2.1명으로 늘어나 늦동이 출산경향을 보였다.95년 출생성비는 113.4명으로 최근 2∼3년간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상성비(100∼107명)를 웃돌았다. 95년 연간사망수는 24만8천명으로 추산돼 하루평균 680명이 사망했다.성별 사망률성비는 127.8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1.3배 가량 높았지만 연령별로는 15∼19세 계층부터 남자 사망률이 여자사망률을 2배가량 웃돌기 시작,40대 연령층에서 2.9배로 최고에 이르렀다.남자의 활동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이후 50대 초반 2.8배,60대 초반 2.5배,80대 1.3배로 격차가 좁혀졌다. 결혼과 이혼=95년 남자의 평균 초혼연령은 28.6세,여자는 25.5세로 86년보다 각각 1.5세,1.2세 늦어졌다.특히 여자초혼은 94년까지만 해도 20대 초반(20∼24세)이 전체의 46.6%로 가장 많았으나 95년에는 20대 후반(25∼29세)이 47.7%로 20대 전반(43.9%)보다 많았다. 평균 재혼연령은 남자 41.8세,여자 36.8세로 10년 전에 비해 각각 2.6세,2.4세 높아졌다.95년 평균 이혼연령은 남자 38.6세,여자 34.9세였다.10년전에 비해 각각 1.9세,3세 높아진 것이다.이로 미루어 결별한 뒤 2∼3년 뒤에 재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혼이 가장 많은 연령층은 남녀 모두 30대로 30∼39세의 이혼구성비가 남자 49.5%,여자 50.4%로 가장 많았다.50대 이후의 늦은 이혼도 남자가 86년 6.3%에서 95년 9.6%로,여자는 2.6%에서 4.3%로 높아졌다.40대의 이혼구성비도 남녀 각각 19.9%,10.6%에서 27.4%,17.3%로 증가했다.
  • 하루 결혼 1,121쌍 이혼 190쌍/통계청 95년 인구동태

    ◎초혼 남·재혼 여 결합 증가추세/이혼부부 동거기간 평균 9.5년 장년이 지나 헤어지는 「황혼이혼」과 결혼에 실패한 남자와 초혼인 여자가 혼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통계청이 20일 발표한 95년 인구동태통계결과에 따르면 이혼건수는 86년(3만8천7백건)에 비해 79% 늘어난 6만9천3백건으로 하루평균 190쌍이 결별했다.이에 따라 15세이상 인구 1천명당 이혼건수를 나타내는 일반이혼율은 86년 2.7건,90년 2.8건에서 95년에는 4.0건으로 증가했다.〈관련기사 10면〉 이혼부부들의 평균 동거기간은 9.5년으로 10년전보다 2.1년이 길어졌으며 특히 전체 이혼부부에서 20년이상을 살다 헤어지는 부부의 비율이 86년 4.5%에서 95년 9.1%로 2배이상 높아졌다.20세미만의 미성년 자녀를 두고 이혼하는 사례는 93년 70.1%,94년 72.9%에서 95년에는 74.6%로 높아졌다.95년 부모들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은 미성년자는 6만3천여명으로 추정됐다. 95년 혼인건수는 40만9천건으로 추산돼 하루평균 1천121쌍이 결혼했다.혼인형태별로는 남녀 모두 초혼인 경우가 89.7%로 대부분이었다.초혼인 남자와 재혼인 여자가 결합하는 사례는 2.6%로 86년에 비해 0.8%포인트 증가했고 재혼인 남자와 초혼인 여자의 혼인하는 경우는 2.8%로 1.0%포인트 감소했다.인구동태통계란 출생·사망·혼인·이혼신고를 분석,인구의 변화모습을 조사하는 것으로 1년에 한차례 발표된다.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워터 게이트」 폭로 사연 등 술회/WP지 회장 회고록 발간

    ◎오나시스­재클린 재혼 낙종 경위 공개/역대 대통령·명사·언론인 일화도 수록 【워싱턴 AP 연합】 워싱턴포스트사 회장인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79)가 회고록 「퍼스널 히스토리」를 펴냈다. 오는 2월 발매될 625쪽의 이 회고록에서 그레이엄 회장은 재클린 케네디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특종을 물에 떠내려 보낸 에피소드,국방부 기밀문서와 워터게이트 특종을 터뜨린 과정과 그 전후의 긴장,역대 대통령들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유명인사들과 언론인들에 얽힌 이야기,그리고 자신의 가족역사를 부담없이 써내려 갔다. 남미를 여행중이던 그레이엄여사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 재키가 오나시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트루먼 카포테가 귀띔해주더라고 알려주었으나 포스트는 본국에서 확인이 안돼 보도를 못했다.그러나 트루먼 얘기는 옳았고 포스트지는 잡은 대어를 놓친 꼴이 되었다. 63년 남편의 자살로 워싱턴 포스트 총수직을 떠맡은 그레이엄여사는 베트남전에 관한 국방부 기밀문서와 워터게이트사건을 터뜨리도록 진두지휘했다.이들은 미국 언론사에 큰 획을 그은 특종으로 기록됐지만 워터게이트의 경우 보도당시 아직 구체적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단계여서 이를 폭로하는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었다. 앨프리드 A 노프사에서 출판된 이 회고록에 따르면 린든 존슨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케네디의 암살과 내 경우에 차이가 있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 뿐이고 이쪽이 더 고통스럽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재키에 관한 포스트기사에 불만을 품은 로버트 케네디 의원은 그레이엄여사를 향해 『당신도 남편을 잃은 마찬가지 신센데 좀더 주제파악을 잘 해야지 않소』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 운명 기구한 대리모/남편과 합의 시누이대신 출산(조약돌)

    ◎시누이남편과 재혼뒤 또 파경 ○…서울가정법원 가사1부(재판장 박준수 부장판사)는 22일 A모씨(여)가 B모씨를 상대로 낸 위자료 등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결혼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책임을 지고 위자료 2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A씨는 지난 89년 시누이의 남편이었던 B씨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남편과 B씨 부부 등과 협의한뒤 자신이 대리모가 돼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출산했으나 이것이 빌미가 돼 A·B씨 부부는 모두 갈등 끝에 이혼하게 됐다. A씨는 이에 자신이 낳은 아이를 혼자 기르다 지난 92년 양육문제로 자주 집에 드나들던 B씨와 결혼했으나 B씨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등 행패를 부리자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소송을 냈다.
  • 하벨 체코대통령 재혼/17세 연하 코믹배우와

    【프라하 AFP DPA 연합 특약】 바츨라프 하벨 체코대통령(60)이 4일 가까운 친지들만 참석한 가운데 체코의 유명 코믹 여배우 대그마르 베스크르노바(43)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CTK통신이 보도했다. 작년 1월 첫 부인 올가여사와 사별한 하벨 대통령은 지난달 폐암수술을 받았을때 베스크르노바의 간호가 회복에 큰 힘이 됐다고 이 통신이 전했다. 체코국영 비네야드스극장에 소속돼 있는 베스크르노바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 북한에 두고온 처자와 교신/실향 70대 부인신고로 입건(조약돌)

    ○…칠순 실향 노인이 북한에 두고온 본처와 자식들에게 불법으로 편지를 교환하고 생활비와 약을 보냈다가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부인이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에 입건. 서울 북부경찰서는 19일 이모씨(76·서울 강북구 수유3동)가 지난 91년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6·25때 북한에 두고온 처가 재혼을 하지 않고 자식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당국의 허가없이 편지와 생활비를 보낸 사실을 밝혀내고 남북교류 협력법 위반혐의로 입건,조사중이다. 이씨는 북한의 가족들과 편지교류를 하려면 1년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어긴채 지난 6년간 30차례에 걸쳐 편지를 불법으로 주고 받았으며 생활비조로 미화 1천6백달러와 약까지 보낸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는 부인(66)에게 이같은 사실을 들키고도 4년여간 북한의 가족들과 접촉을 취해오다 끝내 부인이 중간에서 송금역할을 한 자신의 친구를 간첩혐의로 고발하는 바람에 적발됐다.
  • “누님을 뵙게 될 줄이야”/탈북 최현실씨 사촌동생 인터뷰

    ◎기쁘고… 반갑고… “얼떨떨”/탈북사실 언론통해 알아 『평소 아버님이 북한에 있는 친척들에 대해 거의 말씀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사촌누님을 만나게 된다니 무척 기쁩니다』 지난 10월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지난 달 23일 홍콩에 도착해 남한으로의 망명절차를 밟고 있는 최현실씨(57·여)의 사촌동생 최철욱씨(43)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감을 말했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베델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최원장은 『사촌누님의 탈북사실도 언론보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최원장은 부친 최전도씨(78)가 30년 전 개원한 병원을 지난 해부터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최원장에 따르면 아버지와 큰아버지 영도씨(80),작은 아버지(작고)는 6·25때 월남했다.3형제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영도씨는 3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살고 있다.그는 월남 전 북한에서 결혼,이번에 북한을 탈출한 딸 현실씨를 두었고 미국에서 재혼해 1남2녀를 두고 있다.영도씨는 10여년 전 마지막으로 한국에 온 뒤 가끔 전화통화만 할 뿐이다. 최원장의 아버지 전도씨는 월남 후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60년대초 의원을 개업했다.전도씨는 지난 해 8월 병원을 아들에게 물려준 뒤 현재 잠실의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최원장은 작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병원개업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작고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 화니와 알렉산더·페드라/저무는 이 가을… 불멸의 명화와 함께

    ◎페트라­67년 「죽어도 좋아」로 국내 개봉 큰 인기/하니와 알렉산더­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대역작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영화팬들은 좀처럼 보기 힘들던 명화 두편을 만나는 행운을 맞는다.오는 16일 나란히 극장가에 오를 작품은 영화음악으로도 유명한 「페드라」와 잉그마르 베르히만감독의 대작 「화니와 알렉산더」.이 가운데 「페드라」는 지난 67년 「죽어도 좋아」란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돼 큰 인기를 얻은 영화로 한 세대를 건너 새로운 팬들을 다시 찾아왔다. ▷페드라◁ 금기인 사랑,그러나 운명적으로 타올라 끝내 파멸로 마감하는 사랑을 그린 그리스영화.그리스신화의 비극을 현대에 재구성한 이 작품은 스스로 전설적인 고전이 되었다. 그리스 해운왕의 딸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분)는 해운업계 실력자 타노스(라프 발로네)와 재혼한다.타노스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알렉시스(앤터니 퍼킨스)가 있다.『알렉시스를 그리스로 데려오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페드라는 런던으로 가 그를 만난다.스물넷의 청년 알렉시스와 그의「새 어머니」인 서른네살의 페드라.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관계를 잊은채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둘은 일단 헤어지지만 곧 그리스에서 재회한다.더 이상의 사랑을 거부하는 알렉시스,게다가 그를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시키려는 남편의 계획은 페드라를 질투에 눈멀게 한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와 알렉시스의 대사,자동차 질주의 소음들이 뒤섞인 영화음악 「굿바이 요한 세바스찬」은 지금껏 팬들에게 사랑받는 곡.이 음악이 깔린 장면,해변도로를 질주하다 바다로 뛰어드는 신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일듯.멜리나 메르쿠리와,히치콕작 「사이코」로 유명한 앤터니 퍼킨스의 연기는 마력을 뿜어낸다.1962년작 흑백필름이지만 지금 보아도 감각이 떨어지지 않는다. ▷화니와 알렉산더◁ 위대한 영화예술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자신의 40년 영화인생을 정리해 만들었다고 공언한 작품.탄생과 죽음,사랑과 증오 등 삶의 갖가지 모습을 3시간이 넘는 화면 속에 펼쳐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인간의 내면심리,신과 인간의 관계,꿈·무의식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난해한 기법에 담아 표현한데 비해 이 영화는 인물과 스토리 중심으로 엮어 「비교적 쉽다」는 평을 듣는다. 3대가 모여사는 엑달일가는 대대로 극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이다.첫째 아들 오스카의 자녀인 알렉산더,화니 남매는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그러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뒤 어머니는 자신을 위로해 준 목사와 재혼한다.어머니를 따라 목사 집으로 들어간 알렉산더남매에게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차갑고 어두운 세계가 기다린다. 영화에서는 상반되는 두 세계,곧 따스하고 인간적인 엑달가정과 냉혹하고 위선적인 목사집안이 극명히 대비된다.그럼으로써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라는 주제가 더욱 또렷이 드러난다.1984년작.예술영화전용관 동숭시네마텍이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마련했다.
  • D­1 미 상·하원선거 이모저모

    ◎아칸소주 ‘100년 민주아성’ 붕괴될듯/부자 미남후보 맞붙은 ‘케네디 고향’ 최대접전/남북전쟁이후 남부서 첫 흑인상원 탄생할듯 대통령선거와 함께 실시되는 올 미연방 상·하원 선거는 공화당이 계속해서 다수당이 될 것인지 여부가 최대의 관심사지만 몇몇 주에서는 거물,스타급 후보들이 접전을 벌여 전국적인 시선을 모으고 있다.특히 상원은 수적으로 아주 적은 34명을 뽑게 되지만 435명 전원의 하원선거에 비해 정치적,사회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거나 불꽃튀는 대접전이 벌어지는 레이스가 많다. 고 케네디 대통령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주는 똑같이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엘리트의 두 후보가 지금까지도 인기도에서 근소한 접전을 이루며 투표날만 기다리고 있다.3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존 케리 현 상원의원은 예일대 출신인데 자신도 부자지만 미국 최대 케첩 재벌 상원의원의 미망인과 재혼해 뉴스인물이 된 바 있다.공화당의 빌 웰드 후보는 또한 이곳 상류출신으로 하버드대를 나왔으며 71%의 득표율로 재선된 현 주지사다.두 사람 다 부자고 미남이고 육척장신인데 선거자금을 각 6백50만달러까지만 쓰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노스캐롤라이나와 미네소타 두 주에선 당파적 정치이념이 유달리 강한 현역의원이 모두 6년전의 경쟁자와 또다시 맞붙은 채 치열한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노스캐롤라이나의 제시 헬름스 공화당 의원은 4선으로 현재 상원 국제관계위원장의 파워맨.보수 이념의 대명사로서 미국내 진보파 인사들의 공적1호이고 국무부 축소안과 대사인준 장기지연으로 원성이 자자했었다.이에 맞서는 민주당 후보는 이곳에서 제일 큰 샤로트 시장을 지낸 건축가로 흑인인 해리 갠트.90년 첫 접전 때 갠트가 우세하자 헬름스 의원은 마지막 카드인 인종 카드를 써 10만표,6%포인트 차로 뒤집어 당선됐었다.이번에 갠트후보가 이기면 남북전쟁이후 최초로 남부에서 흑인 상원의원이 탄생한다. 미네소타에서 옛 패배자에게 맹렬한 추적을 받고 있는 현역의원은 폴 웰스톤 민주당의원으로 초선이나 상원 민주당에서 현재 가장 리버럴(진보)하다는 평을 듣는다.이에 맞선 공화당 후보는 러디 보이쉬츠 전상원의원으로 백만장자인데 90년 선거에서 재산없는 경제학교수인 웰스톤에게 져 의원 배지를 뺏겼다.웰스톤의원의 배지를 지키기 위해 클린턴도 지원유세를 했었다. 올 34개 상원선거중 현역의원 출마자는 20명인데 잘못하면 낙선할 가능성이 있는 의원은 위 3인 외에 래리 프레슬리(공화·사우스 다코다),보브 스미스(공화·뉴햄프셔)의원이 지목되고 있다.그러나 미 상원의 현역의원 재선율은 94%로 가공할 정도다.현역의원이 은퇴해 새 얼굴의 후보끼리 싸우는 오픈 지역 14곳 중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 아칸소에서 상원직선제(1904년)후 처음이자 100년만에 최초로 클린턴과 반대당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탄생할 것인가도 주목거리. 임기 2년의 하원선거에서 가장 큰 초점은 이름없는 70명의 공화당 초선의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진짜 의원 대접을 해주기 시작한다는 재선에 성공할지 여부.중진으로선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도 출마했던 골수 보수정객 로버트 도난(캘리포니아),물좋은 세입위원회에서 최장수이나 뇌물 혐의를 받고있는 조셉 맥데이드(공화·펜실베이니아),깅리치 하원의장을 가장 준열하게 질타해와 공화당의 표적이 되고 있는 민주당 수석부총무 데이빗 보니오르(미시간) 및 흑인위주 선거구 특혜가 사라진 몇몇 흑인의원들의 당선 여부가 관심사.
  • 「백범암살 진실」 영구 미제 가능성/안두희 피살과 배후규명 노력

    ◎당사자 통한 진실규명 불가/「참회록」 존재여부 관심 집중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의 피살로 백범 암살의 진실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자칫 영구 미궁에 빠질 가능성도 커졌다. 안씨는 지난 49년 6월 범행 이후 지금까지 암살 동기 및 배후에 대해 한번도 속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단독범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진실 규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60년 4·19 혁명 직후부터였다.「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안씨를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끝내 안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안씨는 87년 권중희씨에게 각목폭행을 당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91년 처음으로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전신인 OSS를 배후로 거론했으며,92년 4월12일에는 김창용 특무대장이 4∼5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암살지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92년 9월에는 권씨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범행 6일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채병덕육군참모총장 등을 만났다』고 말해 당시 권력 핵심부의 배후관련성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씨는 『권씨 등의 강요에 의해 자백한 것』이라고 곧바로 부인해 의문만 증폭시켰다.94년 국회 백범 암살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단독범행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제 진실은 92년 그가 쓰겠다고 약속했던 「참회록」의 존재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안씨의 유품에서 참회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백범암살의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김태균 기자〉 ◎피살 안두희는 누구인가/백범 저격… 47년간 은둔생활/암살죄로 15년형… 6‘25때 사면·군복귀/한때 군납공장 운영… 강원 제2갑부로/4·19후 「응징」 두려워 개명후 자취감춰/87∼88년 권중희씨에 수차례 납치·피습/94년 국회 증언… 암살 배후인물 안밝혀 백범 김구 선생을 지난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저격,암살했던 안두희씨는 범행후 47년 동안 은둔과 잠행속에 살아왔다. 범행 당시 32세의 포병장교였던 안씨는 평생을 「백범 시해범」이라는 꼬리표를 단채,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했다. 안씨는 백범 시해 직후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6·25가 터지면서 당시의 실세였던 김창용 특무대장의 비호로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아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나 전투도중 부상당해 51년 군복을 벗었다.56년 옛 동료장교들의 도움으로 강원도 양구에 군납공장을 지어 군대 부식을 공급하면서 부를 쌓았다.한때 강원도에서 두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후 터진 4·19혁명은 그가 진정한 죄과를 치르게 되는 계기가 됐다.혁명 직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본격적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공장 문도 닫고 처 박모씨와 3남2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안영준」 등 가명을 써가면서 종로구 명륜동,동대문구 신설동,강원도 양구 등지로 도망다녔다. 안씨를 「응징」하려는 추적자들의 노력도 집요했다.65년 곽태영씨로부터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린 뒤 극적으로 살아나는 등 피습이 이어졌다.여러차례 이민을 시도했으나 법무부로부터 출국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실패했다.장성한 자녀들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70년대 말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다.부인 박씨도 합의이혼하고 자녀들의 뒤를 따랐다. 86년 김명희씨(63)와 재혼하는 등 은둔에 「성공」,편안한 삶을 살아오던 그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87년 3월 27일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온 권중희씨의 피습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권씨와의 질긴 악연은 이때부터 이어져 88년 2월,92년 2월과 4월·9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권씨로부터 납치 및 구타를 당했다. 말년에는 언론사의 인터뷰에도 응하고 94년엔 국회 법사위에서 병상에 누운채 증언하는 등 약간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하지만 백범 시해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는 점은 한결같았다.〈김태균 기자〉 □안두희씨 피습일지 ▲87년 3월27일=권중희씨,서울 마포구청 버스정류장에서 각목으로 안씨의 머리 구타. ▲88년 2월=권씨 등 3명,인천 집에서 안씨를 나무 막대로 구타. ▲92년 2월28일=권씨 등,백범묘소에서 안씨를 각목으로 폭행. ▲92년 4월12일=권씨 등,안씨 집으로 찾아가 안씨 구타. ▲92년 9월23일=권씨 등 4명,안씨를 경기 가평군 농장으로 납치,구타.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내

    ◎조선시대/식사를 「조석」으로 부른 까닭은?/아침·저녁 하루 두끼… 점심은 국수·다과로/신분따른 담뱃대 길이·신문고 얽힌 얘기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 셈이라고 했다.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아침,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한국역사연구회(회장 안병욱)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소개한 역사교양서「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도서출판 청년사·전2권)를 펴냈다.43명의 소장사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이 책은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는가」 등 소제목이암시하듯 조선시대 사회·경제·문화·정치 전반의 실상을 이야기체로 흥미롭게 풀어 전해준다. 우리나라에서 담배는 임진왜란 직후인 16세기말∼17세기초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그런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 역시 일본의 양식을 따라 담배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그러나 18세기 들어서는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듯 담배통이 커진 장죽이 이미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또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 길이가 긴 장죽은 양반층이,짧은 곰방대는 상민층이 주로 이용했다.장죽의 경우 혼자 담배통에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아 시중드는 하인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또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마련한 신문고의 사용자는 엉뚱하게도 서울에 사는 전현직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밝힌다.지나치게 복잡한 절차로 인해 정작 힘없는 백성이 신문고를 이용하기는 실제로 불가능했으며,다만 역모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에만 곧바로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다는 것.16세기 들어 왕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시끄럽게 징을 쳐 이목을 끈 뒤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른바 「격쟁」이 자주 일어난 것은 신문고의 구실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가를 반증하는 예라는 게 이 책의 설명이다. 아내가 불효나 음행등 일곱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쫓아내도록 한 칠거지악의 유교 관습대로라면 조선시대 여성들은 매일 이혼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을까.이에 대해 이 책은 조선시대엔 국가가 제도적으로 이혼을 막았기 때문에 일부 서민층을 제외하고 실제 이혼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답한다.그 논거는 바로 당시 팽배한 「정절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수 있다.남편이 죽은 뒤까지 정절을 지키자니 재혼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고,재혼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산된다는 것은 곧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서민들은 양반에 비해 이혼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부가 서로 마주앉아 사정을 말하고 서로 응낙한 뒤 이혼하는 「사정파의」나 칼로 웃옷 자락을 베어 그 조각을 상대방에게 줘 이혼의 표지로 삼는 「할급휴서」 등이 서민들이 흔히 사용한 이혼방법이었다. 이 책은 이밖에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궁궐의 뒷간」 「판소리는 과연 민중예술이었나」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등 다양한 영역을 다루어 대의 역사적 맥락을 속속들이 엿보게 한다.〈김종면 기자〉
  • 미 공화 대통령후보 돌/3번 도전끝 지명된 의지의 인물

    ◎2차전 중상 극복 재기… 28세때 주의원 당선/상원원내총무 11년 지낸 입법정치 신봉자 보브 돌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에겐 으레 육체적 장애를 이겨낸 불굴의 의지와 양당 합의도출을 통한 입법의 귀재라는 칭송이 트레이드마크로 따라붙는다.16년에 걸친 3번의 도전 끝에 공화당 대통령후보 자격을 정식으로 따낸 데는 이같이 드문 장점이 큰 도움을 줬다. 만 73세의 돌은 80·88년 대통령후보 지명전만 빼고는 20대 후반부터 숱한 선거를 모두 성공적으로 치른 노련한 정치가다.51년(28세) 캔자스 주의원,53년 고향 러셀군의 선출직 검사,61년 연방 하원,69년 상원에 차례로 진출했다.그러나 참전,이탈리아전선에서 반신불수 중상,극적 재기 등 정치 홍보감으론 아주 휼륭한 2차대전 경험을 유세장이나 의정단상에서 직접 거론하기를 삼가왔다. 전쟁부상에 대해 입이 무거운 것과는 반대로 돌은 35년의 연방의원 경력을 국민·유권자들에게 뛰어난 정치적 자산으로 자랑해 마지 않는다.돌은 농업·재정통이었고 85년부터 올 6월 선거전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기까지 11년여를 상원원내총무로 당을 리드했다.공화당 최장기록이다.상대 민주당의 많은 의원으로부터 공화당의 컨센서스를 이뤄가는 돌의 탁월한 능력 덕분에 많은 법안이 성사되었다는 칭찬을 받았다.원칙에 충실한 이념파라기 보단 입법화 자체에 더 큰 의미를 주는 실용주의 성격이 강하나 공화당원으로선 드물게 민주당 발의의 민권법안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지금까지 7천만달러가 넘는 정치헌금을 받아 상원최고라는 지적이 있다.그러나 헌법정신에 맞게 연방보다는 주정부에 재량권을 더 많이 줘야한다는 주 우선론,증세를 통해서라도 균형재정을 이뤄야 한다는 균형우선주의 원칙을 굳은 신념으로 삼았다.그럼에도 「의사당 일은 유리알처럼 꿰뚫고 있지만 일반 중산층의 정서와는 유리되어 있다」 「그런대로 일을 잘해 나가는 현직대통령을 밀어 내야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라는 비판은 입법귀재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23년 캔자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축구선수였다.현 엘리자베스 여사와는 75년 재혼했다.
  • 정흥진 종로구청장 항소심 선고유예/4언절구 판결문 화제

    ◎“민주발전 노력… 언설 잘못 속죄케 할만” 선거법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서울 종로구청장 정흥진 피고인(52)에 대한 2심 재판부의 판결문이 법조 주변에서 화제다. 서울고법 형사1부 권성 부장판사는 25일 지난해 6·27지방선거때 상대후보를 비방한 정피고인에 대해 이례적으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1심에서 벌금 3백만원을 선고받았던 정피고인은 당선무효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권부장판사는 선고유예의 변을 4언절구로 남겼다. 「실언가석,전공속죄,해의선겁,선고유예」. 권부장판사의 해석은 이렇다. 『가사를 돌보지 않고 민주주의발전에 행동으로 헌신한 전력이 인정되며 이 사건과 같이 언설만으로 빚은 죄책에 대해서는 능히 이를 속죄케 할만하다.이에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다』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한 권부장판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전해졌다.55세. 재판부의 선처에 따라 정피고인은 구청장직을 계속 유지하게 됐다.정피고인은 지난해 6·27지방선거당시 서울시 의원가운데 유일하게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구청장후보로 출마,당선됐다.그러나 합동연설회 등에서 민자당 배문환 후보(62)를 비방한 혐의로 기소됐었다. 정구청장은 정읍농고와 한양대를 나와 중고교 교사를 지냈으며 평민당 청년국장과 김대중 대통령후보 수행실장 및 서울시의원을 거쳤다.태권도 8단의 무골로 최근 재혼했다.〈박상렬 기자〉
  • “배고파 죽느니 차라리 남으로…”/박철호씨

    ◎DMZ 통해 민간인으로 5번째 귀순/“대북방송 통해 남쪽사정 잘알아/2∼3일에 한번꼴 아사자 목격”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4㎞남짓 떨어진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 건천리에서 농부로 일하는 북한 주민 박철호씨(41)가 24일 상오 철책선을 넘어 귀순했다.박씨는 배가 고파서 잘사는 남한으로 탈출하게 됐다고 귀순동기를 밝혔다. 국방부 윤창로 대변인은 『이날 상오 7시 42분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험동석리 전방 아군 경계초소(GP)로 북한 주민 박철호씨가 귀순해 왔다』고 밝혔다. 박씨는 이날 상오 7시 35분쯤 강원도 철원군 철책선 부근에서 3사단(사단장 안충준 소장·육사 25기) 소속 이장혁상병 등 2명의 초병에게 발견돼 남쪽으로 인도됐다. 박씨는 지난 22일 밤 건천리를 출발,한탄강 상류를 건넌 뒤 북측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박씨는 농사도 지으면서 김화군 식료수매조합 수매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로 올해 재혼한 부인 김정숙씨(39)와 자식으로는 아들 2명,딸 2명을 두고 있다.이 지역으로는 지난 86년 북한군 홍명진 중사가귀순했으며 비무장지대를 통해 민간인이 귀순한 것은 이번이 5번째이다. 박씨는 귀순 직후 3사단에서 기자들과 만나 『평소 대북방송을 듣고 남한이 잘 사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배고파 죽는 것보다 차라리 남쪽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귀순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2∼3일에 한번씩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봤으며 지난 19일에도 여자 1명이 굶어 죽었다』면서 『나도 15일동안 나물밥만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박씨가 살던 건천리는 우리측 대북방송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여서 평소 북한군의 경계가 삼엄한 지역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최초 신문 직후 탈진,GP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에 실려 3사단 사령부 의무실로 옮겨졌다. 국방부는 박씨가 귀순하던 당시 안개가 많이 끼어 이상병 등이 철책선 30m 전방까지 접근해 박씨를 인도하는 작전을 펼쳤으며 북한 경계병들은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황성기 기자〉
  • 「95 인구·주택 총조사」 주요내용

    ◎가구당 평균인원 3.3명­방 3.1개/5년간 주택증가율 대전 70.5% “최고”/교육수준 향상… 초등교육이상 92.7%/강원·충남·전남북·경북 전출초과 현상/통근·통학수단은 버스·도보·승용차 순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95 인구주택총조사 2%표본 속보 집계결과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구 ◇교육정도별 인구=95년 11월1일 현재 만6세이상 인구 4천45만명중 초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사람(재학생 포함)은 3천7백48만4천명(92.7%)으로 90년의 91.8%보다 증가,국민의 교육수준이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15세이상 인구 3천4백21만명중 고등학교 이상 졸업자의 구성비는 57.8%,전문대 이상 졸업자는 16.6%로,90년의 50%와 11.6%에 비해 각각 크게 늘어났다.여자는 5년간 전문대 이상 졸업자 증가율 68.9%,대학이상 졸업자 증가율 65.5%로,남자의 42.5%,42.2%를 크게 앞질러 여성의 고등교육 이수가 급증하고 있다. ○여성 고등교육 급증 ◇혼인상태별 인구=15세이상 인구중 배우자가 있는 인구의 비율은 59.1%에서 61.2%로,사별인구는 7.2%에서 7.5%로,이혼인구는 0.8%에서 1.1%로 각각 늘었으나 미혼인구는 결혼적령기 인구의 절대감소로 인해 32.9%에서 30.2%로 줄었다.그러나 20∼30대 인구중 미혼비율은 크게 늘어 만혼추세를 드러냈다.20대 남자의 미혼비율은 77.5%에서 80.5%로,20대 여자는 50.8%에서 56%로,30대 남자는 9.5%에서 13%로,30대 여자는 4.1%에서 4.8%로 각각 늘었다.이혼인구 비율은 85년 0.6%에서 계속 증가추세다.배우자와 사별해 재혼을 안하고 사는 인구는 여자가 13.2%로 남자 1.8%보다 훨씬 많다.여자의 평균수명이 남자보다 높은 반면 재혼율은 남자보다 낮기 때문이다. ◇출생지별 인구=태어난 시·도를 떠나 다른 시·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2천4백41만1천명(44.3%)으로 90년의 41.3%보다 늘어 이동이 많아졌다.6대도시와 경기도는 타시·도 출생자 비율이 과반수를 넘어 51.4∼61%이나 나머지 8개도는 타시·도 출생자 비율이 30% 미만으로 낮게 나타났다.출생시·도를 떠나지 않고 사는 사람의 시·도별 구성비는 전남(89.1%) 전북(86.3%)이 높고 대전(39%) 인천(39.2%) 경기(39.9%)가 낮았다.서울은 43.5%다.6대 도시중 서울과 인천은 각 지역 출생지 인구가 비교적 고르게 전입된 반면 부산·대구·광주·대전 등은 인근 도지역의 인구가 주로 전입됐다. ◇5년전 거주지별 인구=5세이상 인구 4천37만4천명중 1천12만2천명이 5년전 거주지를 벗어난 다른 시·군·구에 살고 있어 25.1%의 이동률을 나타냈다.시·도경계를 벗어나 이동한 인구는 5백73만9천명으로 90년에 비해 24만7천명(4.5%) 증가했다.서울과 부산은 전입보다 전출이 많으나 대구·인천·광주·대전과 수도권 인접지역은 인구집중현상이 지속되고 있다.강원·충남·전남­북·경북 등 5개 도는 계속 전출초과현상을 나타냈다. ◇통근·통학인구=6대도시의 12세 이상 인구중 다른 읍·면·동으로 통근·통학하는 인구비율은 90년의 55∼60%보다 높은 60∼65% 수준이다.서울이 64.6%로 가장 높고 대구가 60.1%로 가장 낮다.광주가 55.5%에서 62.9%로 통근·통학인구 비율 최고증가율을 기록했고 부산이 57.3%에서 61.7%로 최저였다.주·야간 인구이동은 6대도시중 서울만 신도시 개발 등의 영향으로 주간유입(95만5천명)이 유출(51만8천명)보다 43만7천명 많아 주간유입초과현상(주간인구지수 1백5.2%)을 보였고 나머지 5개 도시는 인근 외곽지역에 위치한 공장 등 산업시설과 대학 등으로의 통근·통학으로 인해 낮에 유입보다 유출이 많았다.서울시내 25개구중 상주인구에 비해 주간인구가 많은 지역은 대기업 본사와 도산매업 및 서비스업체가 밀집돼 있는 중구(낮인구가 밤인구의 3.9배)와 종로구(2.4배)를 비롯한 10개 구이고 강북·은평·중랑·양천 등 15개 구는 주간인구가 더 적다.6대 도시의 교통수단별 통근·통학인구는 시내버스 이용이 31.7%,도보 22.5%,승용차 20.4%,전철 7.8% 순이다.승용차 이용객은 5년전 9.6%에서 배이상 늘어난 반면 시내버스 이용객은 40.8%에서 크게 줄었다.단일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통근·통학 인구가 92.8%다. ◆가구 ◇가구현항=가구수는 1천2백96만1천가구로 90년보다 14.1% 늘었고 가구당 평균 가구원수는 3.7명에서 3.3명으로 줄어 가구분화가 지속되고 있다.4인가구가 31.4%로 가장 많고 3인가구 20.7%,2인가구17.3%,1인가구 12.7%다.혼자 사는 단독가구는 5년전 1백2만2천가구에서 1백65만가구로 61.4%나 증가했다.독신자와 농어촌 노인단독가구 급증 때문이다.단독가구중 29세 이하는 51만4천가구(31.1%)로 36.4% 늘어난 데 비해 30∼59세는 64만4천가구(39.1%)로 75%나 늘었다.60세 이상 단독가구도 49만2천명(29.8%)으로 77.8% 증가했다.단독가구중 도시지역에서는 30∼59세가 42%로 가장 많고 29세 이하 39.5%,60세 이상 18.5%인 반면 군지역에서는 60세 이상이 58.9%로 가장 많고 30∼59세 31.5%,29세 이하 9.6%여서 농촌지역일수록 단독가구중 고령자 비율이 높다.단독가구중 여자가 58%로 남자보다 많다. ○4인가구 가장 많아 ◇세대 구성별 가구=단독가구 12.7%,1세대가구 13%로 5년전의 9%,10.7%에 비해 크게 늘어난 반면 2세대가구 62.8%,3세대가구 9.9%,4세대 이상 0.2% 등 2세대 이상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추세다. ◇점유형태별 가구=자기집에 거주하는 가구는 6백91만3천가구(53.4%),전세가구는 28.1%로 90년의 49.9%,27.8%에 비해 높아진 반면 월세는15.5%로 낮아졌다. ◇주택당 거주가구수=주택당 거주가구수는 평균 1.4가구로 90년의 1.6가구보다 감소했다.독립거주에 적합한 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이 많이 신축됐기 때문이다.도시지역의 주택당 가구수는 1.5로 군지역의 1.1에 비해 아직 많다. ◇가구별 사용방수=가구당 사용방수는 3.1개로 5년전의 2.5개보다 크게 증가했다.도시지역은 3.2개,군지역은 3.0개로 90년에 비해 각각 0.7,0.5개 늘어났다.방을 1∼2개 사용하는 가구는 3백80만2천가구(29.3%)로 90년에 비해 38.6% 감소한 반면 3개 이상 사용하는 가구는 9백15만9천가구(70.7%)로 대폭 늘어났다. ◇주거시설 형태별 가구=입식부엌시설·수세식화장실·온수목욕시설을 갖춘 비율은 각각 84.5%,75%,75.1%로 90년의 52.4%,51.3%,34.1%에 비해 크게 개선됐으나 도시지역과 군지역의 주거시설 차이는 여전히 크다. ◆주택 ◇주택종류별=빈집을 제외한 총주택수가 9백21만6천호로 90년에 비해 28.7% 증가함에 따라 주택보급률도 72.4%에서 86.1%로 높아졌다.단독주택은 5년간 34만4천호가 감소한반면 아파트는 1백11.7% 증가했다.공동주택의 비중(48.9%)이 단독주택의 비중(47.6%)을 앞서 주거환경 변화를 나타냈다.나머지 3.5%는 비거주용건물내 주택이다.5년간 시·도별 주택증가율은 대전이 70.5%로 가장 높고 전남이 9.1%로 가장 낮다. ○주택당 방수 4.4개 ◇연건평별 주택=주택당 평균건평은 25.1평으로 5년전에 비해 0.6평 증가했다.시지역은 26.3평으로 오히려 0.4평 줄어든 반면 군지역은 1.6평 늘었다.19평 미만주택은 16.4% 증가에 그쳤으나 19∼29평 주택은 48.5%나 증가했다. ◇총방수별 주택=주택당 평균방수는 4.4개로 90년의 4개보다 늘었다.방4개인 주택이 3백55만5천호(38.6%)로 가장 많고 방5개 이상인 주택이 2백58만2천호(28%),방3개인 주택이 2백42만5천호(26.3%)로 각각 증가추세인 반면 방1∼2개짜리 주택은 65만4천호(7.1%)로 감소추세다. ◇대지면적별 주택=전국의 단독주택 평균 대지면적은 77.5평으로 90년의 73.8평보다 3.6평 늘었다.군지역의 대지면적이 1백1.7평으로 도시지역의 54.2평보다 배 가까이 크다.〈김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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