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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풍공판’새달13일로 연기

    서울지법 형사합의26부(재판장 宋昇燦 부장판사)는 총풍사건 변호인단의 신청을 받아들여 23일 열릴 예정이었던 14차 공판을 다음달 13일로 연기했다. 변호인단은 송부장판사가 다음달 1일 사직하는 점을 고려해 연기 신청을 한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록기자
  • 고관집털이 김강룡 무기구형 “국민화합 깨뜨려 중형”

    인천지검 형사1부 문규상(文奎湘)검사는 21일 인천지법 제3형사부(재판장金玉信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고관집 전문털이범 김강룡(金江龍·32)피고인등 8명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김피고인에 대해 특가법상 상습절도 및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무기징역 및 보호감호를 구형했다. 검찰은 공범 김영수(金永洙·47)피고인 등 7명에 대해서는 징역 3∼15년을각각 구형했다. 검찰은 논고문에서 “많은 전과가 있는 김피고인이 여론의 동정을 받아 보호감호를 피하기 위해 정치세력을 악의적으로 이용,공직에 있는 피해자의 신분을 폭로하고 범행 부풀리기를 해왔다”며 “여론을 호도해 국민화합을 깨뜨린 망동을 저지르고도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김피고인에게 중형이 선고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선고공판은 9월4일 오전 10시 인천지법 103호 법정에서 열린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姜慶植·金仁浩씨 ‘환란 무죄’

    지난 97년 말의 환란(換亂) 책임과 관련,전 경제부총리 강경식(姜慶植)피고인과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인호(金仁浩)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李鎬元 부장판사)는 20일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과 3년을 각각 구형받은 강·김피고인에 대한선고공판에서 환란 책임과 관련된 직무유기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그러나 97년 말 진도그룹과 해태그룹에 각각 1,000여억원의 협조융자를 하도록채권은행단에 압력을 행사한 직권남용 부분에 대해서는 일부 유죄를 인정,자격정지 1년씩에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97년 당시 외환위기의 상황을 안이하게인식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외환사정의 심각성을 고의로 축소·은폐 보고했다고는 볼 수 없다”면서 “특히 후임 부총리에 대한 인수인계도 통상 부하직원에 의해 이뤄지는 데다 후임인 전 경제부총리 임창열(林昌烈)씨도 IMF행논의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직무유기 부분은 모두 무죄”라고밝혔다. 한편 검찰은이같은 판결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강·김피고인은 97년 10월 말 윤진식(尹鎭植) 당시 청와대 비서관과 한국은행 관계자 등으로부터 외환위기 상황과 심각성을 보고받고도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에게 은폐·축소 보고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5월 구속됐다가 같은해 9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강충식 이상록기자chungsik@
  • 무죄판결 李鎬元재판장

    강경식(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金仁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환란책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의 재판장인 이호원(李鎬元) 부장판사(사시 17회)는 20일 첫 공판부터 선고공판까지 무려 407일 동안이나 강행군을 계속한 탓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부장은 선고 직전까지도 “판결문 분량도 정보가 될 수 있다”며 극도로조심스런 자세를 견지해왔다. 이 부장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와 80년 서울 동부지원에서 법관생활을 시작,대법원 재판연구관,부산지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으며,5공 때에는 잠시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된 경력도 있다. 그는 지난해 5월 히로뽕 투약 혐의로 기소된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朴志晩)씨에게 검찰이 벌금형을 구형했음에도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한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원칙을 소중히 여긴다. 환란사건 재판과정에서도 소환요구에 2차례 불응한 임창열(林昌烈) 경기도지사 등에게 여지없이 과태료를 부과했다. 우배석 호제훈(扈帝熏·사시 34회)판사와 좌배석 왕정옥(王正沃·여·사시35회)판사는 지난 3월 22부에 합류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의열 독립투쟁(2)-강우규 의사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서 의사(義士)라고 하면 흔히 20∼30대 열혈청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윤봉길(尹奉吉)·조명하(趙明河)의사는의거 당시 24세였고,이봉창(李奉昌)의사는 32세, 김상옥(金相玉)의사는 33세,그리고 나석주(羅錫疇)의사는 36세였다. 1924년 일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의거 당시 44세로 드물게 40대에 속하는 정도다. 그런데 환갑이 넘은 60대 나이로 의거를 행한 의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지.그러나 실제 우리 의열투쟁사에는 60대 노(老)투사의 의거기록이 있다. 1919년 9월2일 오후 5시경.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현 서울역)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펼친 가운데 어느 고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준비가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이윽고 5시가 되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도착하였다.사이토 총독 내외와 일행은출영나온 내외 인사·신문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귀빈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사이토가 귀빈실에서나와 입구에 마련된 쌍두마차에 오르려 하자인근 한양공원(현 남산공원)에서는 그의 부임을 축하하는 21발의 예포(禮砲)소리가 울려퍼졌다.예포가 끝나고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사이토가 탄마차 인근에 폭탄 한 발이 굉음을 울리며 작렬하였다.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병을 비롯해 신문기자 등 30여명이 일순간 현장에서 고꾸라졌다.폭탄이 떨어진 곳은 사이토가 탄 마차로부터 불과 7보(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3·1의거 후 격앙된 조선민족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후 받은 첫번째 선물은 ‘폭탄세례’였다.이날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자리에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인 의사가 바로 강우규(姜宇奎)의사다.강 의사의 그때 나이는 64세,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일제하 숱한 의·열사 가운데 강 의사는 가장 고령에 속한다. 1855년(철종 6년)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이듬해 봄 가솔(家率)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만주길림성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해온 강 의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에 참가,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키로 작정한 강 의사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 돈 50원을주고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구입한 후 6월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배를타고 원산을 거쳐 8월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머물면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운 강 의사는 마침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남대문역에서 그를 처단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9월2일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또 시골영감 티를 내기위해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손에는 양산과 수건을 하나씩 들고 남대문역으로 향했다.이런 강 의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 구내 다방에서 군중 틈에 끼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 의사는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투탄거리가 불과 6∼7m 정도에 그쳐 사이토가 탄 마차에는 미치지 못한데다 폭탄의위력이 약해 사이토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폭탄의 파편이 혁대를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같이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그러나 성과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총 37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가운데 스에히로(末弘又二郞) 경기도 경시(警視)는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 9일 후인 9월11일 사망하였다.또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 11월1일 사망하였으며야마구치(山口諫男)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고 결국 팔을 절단 하였다. 한편 사건 직후 일경·헌병들은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수색을 벌였다.그러나 60대 노인인 강 의사는 별다른 검문도받지 않은 채 무난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투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의거 보름 만인 9월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강 의사를 체포했다.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가운데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태석(金泰錫)이었다. 강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과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인 재판장이 ‘영감님’ ‘강선생’으로 호칭하였다고한다.고등법원의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강 의사는 면회온 장남중건(重健·작고)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고 하고는그 뜻을 전국 13도의 각 학교와 교회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노 투사는 최후까지 조국을 걱정하였다.1년간의 옥고를 치른 강 의사는 이듬해 11월29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때 나이 65세였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자가 “유언이 없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 강 의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다시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로 이장됐다.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강 의사의 의거현장인 서울역 역사(驛舍) 앞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념표지석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긴 상태다.장남 중건씨는 연해주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손녀 영재(榮才)씨도 수년 전 작고했다.영재씨의부군은 도쿄제대 출신의 농학자로 수원농사시험장장을 지낸 최병석씨.현재강 의사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는 조카 항렬의 강영복(姜榮福·72·서울 거주)씨로 강씨가 강 의사의 훈장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직계 후손이 아니어서 연금수령은 못하고 있다.강 의사의 제사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매년 순국일인 11월29일 지내고 있다.변변한 일대기 한 권도 없고 그흔한 추모사업회,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은 대가 끊겨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이다.강 의사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고적(孤寂)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나체사진 촬영은 친고죄”

    사진기 등으로 나체 사진을 강제로 찍었더라도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친고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金二洙 부장판사)는 18일 “헤어지자”며 만나주지 않는 여자 친구를 수차례 성폭행하고 나체로 사진을 찍어 협박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김모 피고인(27)에 대해 재물손괴죄 등을 적용,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강간 및 나체사진을 찍은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에 대한 공소는 기각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세무조사 무마 청탁 수뢰 KBS 이강균기자 執猶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李根雄 부장판사)는 17일 의류수출업체로부터 세무조사를 받지 않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구형받은 KBS 보도국 기자 이강균 피고인(42)에 대해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의 알선수재죄를 적용,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농지 용도변경 관련 金宗培의원에 執猶 선고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金二洙 부장판사)는 17일 농지 용도변경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은 국민회의국회의원 김종배(金宗培) 피고인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죄를 적용,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96년 국정감사 무마 청탁과 함께 유기산처리제 제조업자로부터 2,000만원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피고인이 지난 97년 농지용도변경 청탁과 함께 받은 3,000만원은 대가성이 인정되나 96년 국감 전에 받은 돈은 국감에 부정한 결과를 야기하지않아 대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 피고인은 96년 9월 국감을 앞두고 유기산 처리제 제조업자로부터 “국감에서 유기산 처리제의 불량 여부에 대한 질문을 빼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뒤 97년 농지 용도변경과 관련,이모씨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추가기소됐다. 이상록기자
  • 朱惠蘭씨·崔箕善시장 혐의시인

    경기은행 퇴출저지 로비사건에 연루돼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된 임창열(林昌烈)경기지사 부부와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최기선(崔箕善)인천시장 등 6명에 대한 첫 공판이 16일 인천지법에서 제11형사부(재판장 李宇根부장판사)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임지사의 부인 주혜란(朱惠蘭)피고인은 서이석(徐利錫)전 경기은행장으로부터 은행퇴출 무마조로 2차례에 걸쳐 4억원을 받은 것 등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최시장도 검찰의 직접신문에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재판부가 검찰에 구형을요청했으나 검찰이 이견을 제기해 구형이 연기됐다. 임지사는 변호인단이 검찰 수사기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문 연기를 요청,인정신문만 이뤄졌다. 한편 서 전행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이영우(李映雨)피고인은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은행퇴출 저지나 취업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공소사실을 일부 부인했다. 다음 공판은 오는 9월 6일 오후 2시 속개된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신학철씨 그림 모내기는 이적물”

    서울지법 형사항소3부(재판장 金建興 부장판사)는 13일 ‘모내기’ 그림을그린 혐의로 기소된 전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신학철 피고인(55)에 대한파기환송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징역 10월형의 선고를 유예하고그림을 몰수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모내기 그림은 북한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에 의한 연방제 통일을 찬양하는 이적표현물”이라면서 “그러나 신피고인이10여년간 이 사건 재판에 따른 심적 고통을 받았고 그림으로 인해 실제 피해가 생기지 않은 점을 감안,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신피고인은 지난 87년 모내기하는 농부가 코카콜라,양담배 등을 바다 속으로 쓸어넣는 남쪽의 모습과 풍년으로 행복해 하는 북측의 모습을 대비시킨‘모내기’ 그림을 그려 미전에 출품한 혐의로 89년 기소돼 1,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지난해 상고심에서 유죄취지로 파기환송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항소심도 4세 여아 증언 인정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宋基弘부장판사)는 11일 이웃집 주부를 살해한 뒤 불을 질러 강도로 위장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이모 피고인(35)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살인죄와 현주건조물방화죄를적용,원심대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목격자인 피해자의 딸이 사건 당시 4살에 불과했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정신능력이 뛰어나고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일관된 증언을 하고 있는 만큼 증거능력과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상록기자 myzodan@
  • “두원 회장에 받은 30억은 공천대가 아닌 정치자금”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찬두(金燦斗) 두원그룹 회장으로부터 전국구의원 공천 청탁과 함께 30억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된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윤환(金潤煥)피고인에 대한 공판이 9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李根雄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김 피고인은 이날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96년 총선을 앞두고 김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공천 청탁과는 무관한 순수한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초코파이는 보통 명사다”

    특허법원 특허3부(재판장 朴一煥 부장판사)는 5일 동양제과가 롯데제과의초코파이 상표등록은 지적재산권 침해라며 낸 등록무효심판 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지난 20년 동안 초코파이 상표를 다른 업체들이 사용하는 동안 원고는 독점적 사용을 위한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아 ‘초코파이’는 이미 보통명사화 됐다”면서 “명칭 앞에 제조회사 이름이 들어가기때문에 상품을 혼동하거나 소비자를 속일 우려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71년 국내 처음으로 초코파이를 만들기 시작한 동양제과는 74년 ‘오리온 초코파이’라는 상표로 등록을 마쳤지만 79년 롯데제과가 ‘롯데 초코파이’라는 상표로 등록한 뒤 꾸준히 성장,경쟁상대로 떠오르자 지난 97년롯데제과의 상표등록을 취소해 달라며 특허심판을 냈다가 기각되자 소송을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단양군수 항소심 벌금80만원 선고

    대전고법 형사부(재판장 이동흡 부장판사)는 30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충북 단양군수 이건표(李建杓·55)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 ‘위드마크’ 음주측정 근거없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宋基弘 부장판사)는 30일 술을 마신채 무면허로운전을 하다 단속 경찰관을 창문에 매달고 도주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장모군(19)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파기,음주운전 혐의에 대해 무죄를선고하고 징역 장기 1년6월에 단기 1년을 선고했다. 장군은 당시 14시간만에붙잡혀 혈중 알코올 농도 역추산 기법,즉 위드마크(Widmark) 공식에 따라 음주운전 혐의가 적용됐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위드마크 공식은 다른 음식물은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마신 결과를 통계수치화 했을 뿐 술을 마시는 속도나 습관,빈도 등 개인적 특성과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형사재판에서 신체조건,술의 종류,음식물의 종류 등 변수에 따라 큰 오차를 보일 수 있는 위드마크 공식에 따른 혈중 알코올농도 측정은 유죄의 근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 96년 음주 뺑소니 운전자의 처벌을 위해 국내에 도입된 위드마크 공식은 사람의 혈중 알콜농도가 1시간에 0.015%씩 감소하는 것으로 추산해 운전당시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역추산 하는 기법이다. 장군은 지난 2월 술을 마시고 무면허로 운전을 하다 음주 측정을 요구하는단속경찰관을 매달고 도주했다가 14시간만에 검거됐다. 경찰은 당시 장군이 마신 술의 양과 몸무게 등을 바탕으로 위드마크 공식을적용,혈중 알코올농도를 0.11%로 추정,음주운전 혐의를 추가해 기소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백남치의원 6개월만에 출석

    김포매립지 용도변경과 관련,동아건설로부터 1억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지난 1월 불구속기소된 한나라당 국회의원 백남치(白南治) 피고인에 대한 공판이 30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李鎬元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 백피고인은 이날 검찰 신문에서 “동아건설로부터 받은 돈은 모두 7,000만원이며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운영비와 후원비로 받았을 뿐 당시 동아측이 매립지 용도변경을 추진한 사실조차 몰랐다”며 대가성을 부인했다. 한편 백피고인은 지난 3월5일 첫 공판 이후 4번이나 공판기일에 불출석한것에 대해 “국회일정 때문이었고 앞으로는 재판에 꼭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金鍊判 前식약청국장 집유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李光烈 부장판사)는 29일 금품을 받고 의약품 인허가 과정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전식품의약품안전청 의약품안전국장 김연판(金鍊判·52) 피고인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죄를 적용,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과 추징금 830만원을 선고하고 2,770만원을 몰수했다. 김 피고인은 지난 1월23일 J제약 회장 박모씨로부터 “우황청심환에 천연사향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는 등 제약업체 12곳으로부터 모두 3,6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2월 구속기소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서울고법, 한글글꼴 저작권 인정 판결

    서울고법 민사5부(재판장 申正治 부장판사)는 28일 ㈜휴먼컴퓨터 등 컴퓨터프로그램 개발업체 5곳이 저작권을 침해당했다며 정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는 모두 5,800여만원을 지급하고 프로그램 배포를 중단하라”고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의 한글 폰트(글꼴) 프로그램에는 단순 기능수준을 넘는 개성과 창의성이 포함돼 있다”면서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되므로 모방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개발된 프로그램에 대한포괄적인 보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지난 4월 서울고법의 다른 재판부가 “한글 폰트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저작권을인정할 수 없다”며 기각한 판결과 배치돼 대법원의 판단이 주목된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최순영 회장 징역 5년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李根雄부장판사)는 27일 거액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12년을 구형받은 신동아그룹 회장최순영(崔淳永·61)피고인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국외재산도피죄 등을 적용,징역 5년에 추징금 1,964억원을 선고했다. 또 전 신아원 대표이사 김종은(金鍾殷·46)피고인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대한생명 대표이사 박종훈(朴鐘勳·62)피고인 등 4명에게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4년을 각각 선고했다.신아원의 후신인 SDA 인터내셔널 법인에는 1,500억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피고인은 해외사업 투자금 마련을 위해 변칙적으로 거액의 외화반출 위장무역을 주도했고 김피고인도 최피고인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등 역할을 분담했다”면서 “이후 대한생명의 국내외 자금을 동원,해외로 빼돌린 돈의 대부분을 국내로 반입했지만 이로 인해 대한생명의 재무구조를 크게 악화시켜 금융감독원 관리체제에 들어가게 하고 보험계약인들에게 손해를 입힌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최피고인이 20여년간 기업을 경영하면서 종교·교육계등 국가사회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한 점도 참작했다”고 밝혔다. 최피고인의 변호인단은 선고 직후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최피고인은 지난 96년 5월부터 1년여동안 수출서류를 위조,4개 시중은행에서 수출금융 명목으로 1억8,500여만달러를 대출받아 이중 1억6,500여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지난 2월 구속됐으며,그룹 계열사에 1조2,000여억원을 불법대출하고 대한생명 공금 88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 4월 추가기소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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