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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민·현 앨리스 사건(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8)

    ◎재미교포 부부… 49년 입북후 고위직 올라/북,「미 간첩」 혐의로 체포… 남로당 숙청 이용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남북한 집권세력은 내부투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남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9 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재집권한데 이어 북쪽에서는 그해가 끝날 무렵 남로당계 숙청을 서둘렀다. 김일성은 52년 12월15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종파주의 잔재들이 당과 정부기관에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이들을 남겨두면 적의 「탐정배」(간첩)로 변하고 만다고 강조했다.남로당계를 겨냥한 이 발언을 뒷받침해 19 53년 1월 「문헌토의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남로당계 검거선풍이 일었다. ○53년 남로당 숙청 시작 3월 들어 박헌영을 비롯,이승엽·이강국 등 주요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됐으며 이 가운데 이승엽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휴전직후에,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55년에 각각 열렸다.이들에게 걸린 죄목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와 「국가전복 음모」,「남반부 민주역량 파괴」등이다.따라서 이 사건을 흔히 「박헌영사건」또는 「박헌영 미제간첩 사건」이라고 부른다.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대표적인 의혹사건의 하나로 꼽힌다.이는 사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박헌영사건의 성격을 가늠해 주는 또 다른 간첩사건인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재미동포인 이사민·현앨리스 부부가 북한 정권 수립 후에 입북,고위관리로 일하다 한국전쟁 발발후 소련을 통해 탈출을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남로당 숙청에 앞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이승엽등의 재판과 박헌영재판에서 그들의 「미제 간첩」행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서울신문이 이사민부부에 관한 자료와 당시 그 사건을 취급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발굴해 사건 내막을 상당한 부분까지 밝혀냈다. 이사민은 본명이 이경선(미국명 이윌리엄)으로 출신지·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나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일하는등 항일독립운동에 관계 했다.부인 현앨리스는 재미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물로 꼽히는 현모씨의 딸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부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1947년 초 이미 재미 친북파의 대표로서 자리를 잡았다.이사민은 그해 4월부터 정기적으로 북한에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보고서는 주로 체코 수도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한오수를 통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됐다. 이들의 미국내 활동은 매우 적극적인 편이었다.미국 공산당에 가입해 한인조직을 결성,한달에 한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그러면서도 평소 이사민은 워싱턴에,현앨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떨어져 살며 각각 활동한 것을 보면 상당한 골수분자들처럼 보인다. 이와 함께 외부조직으로 민주인민전선연맹과 진보당후원회를 결성해 재미 한국인 단체,미국 좌파단체들과 고리를 맺었다.이들은 민주인민전선연맹을 통해서는 한인 최대 조직인 국민회에 북한에 설립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또 「독립」이라는 주간신문을 2천여부 발행하여 국외및 각급단체에 배포했는데 당시 현지에서 발행된 한글 주간신문 4종 가운데 북한 소식을 보도한 것은 「독립」하나 뿐이었다. 이처럼 활발히 움직이던 이사민부부가 갑자기 북한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뜻을 밝힌 때가 1948년 12월이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별도기사 참고)에서 이사민은 김일성·박헌영에게 동구권 국가를 통해 입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실제로 이 부부는 1949년 1월 체코 프라하로 가 체코정부에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청했다. ○박헌영이 적극 도와 그러나 북한행이 생각대로 쉽지는 않았다.이들의 망명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3∼4개월이 걸렸다.체코정부가 이들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체코 안전기관은 먼저 분명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으며,게다가 이들은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인 것으로 판명됐다.정체를 의심한 체코 안전기관은 이를 북한 내무성 안전국에 알렸으며 북한당국도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때부터이사민·현앨리스와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당시 외무상인 박헌영은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부부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아울러 이들이 북한에 도착하자 외무성을 동원해 환영행사를 해주기까지 했다.그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부장으로,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북한에 들어와 5∼6개월 동안 아주 성실하게 일해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그러나 입국을 거부했던 내무성 안전국은 여전히 부부를 주시하고 있었다.이들은 직위를 이용,유럽에 편지를 자주 했는데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따라서 답장은 한차례도 받을 수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이사민부부는 황급히 북한당국에 유럽여행을 요청했다.내무성은 「불가」통보를 했지만,이번에도 외무성이 출국사증을 내주었다.북한을 떠난 이들이 소련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하자 북한 안전국 요원들은 짐을 수색했다.의심했던대로 그동안 수집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 가운데는 군대관계 비밀자료도 여럿 들어있었다. 그길로 북한으로 강제귀환된 부부는 안전국의 추궁 끝에 미 정보기관으로 부터 정보수집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고 자백했다.마치 한국 땅을 밟았다 사이공으로 탈출했던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을 보는 듯이 북한의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북한판 「이수근 사건」 이 사건의 불똥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에게로 튀었다.이사민부부의 북한 입·출국을 방조한 박헌영이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3년 7월30일 열린 이승엽등의 재판에서 이강국은 『50년 7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한 간첩분자 이윌리엄(이사민)과 현앨리스를 평양에 있는 집에서 두차례 만나 공화국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제공하는데 대한 토의를 했다』고 고발됐다. 또 55년 12월 재판받은 박헌영도 같은 혐의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다.곧 박헌영은 48년 6월 하지로부터 『이사민등미국 정보원들을 유럽을 통해 북한에 보내겠으니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해 주라』는 지령을 받았다.이에 따라 이사민등이 입북할 때 입국사증을 내주었으며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외무성에,이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과연 미국의 간첩이었을까,아니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지는 바람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까.그 진실을 알려줄 것으로 기대되는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이 이제 막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사민의 대북 보고서/“미 교포 공산당원 26명” 김일성에 보고/47년부터 미 정세 등 탐지… 편지 보내/“곧 동구 경유 입북” 박헌영에도 알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박헌영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 관계 자료를 이번에 발굴했다.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이사민이 미국에 있던 19 48년 12월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직접 보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 워싱턴주재동지대표」이사민은 ▲당 동지들의 활동 ▲조선인 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의 정세들을 자세히 전했다.당 동지들의 활동에 대해 『현재 당원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 13인,샌프란시스코에 1인,뉴욕에 4인,워싱턴에 2인,기타 지역에 6인을 합하여 26인』이 있으며 이들은 『미국 당부(미국 공산당)의 허락으로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밝혔다.또 현지의 당원 대표는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김강·현앨리스,워싱턴의 이사민·선우학원,뉴욕의 신두식·곽지순』등 7명이라고 소개했다. 이사민은 이와 함께 동지들 중 일부가 동유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그후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체코 프라하를 경유해 북한에 들어갔다.이 대목이 이사민과 박헌영의 연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 수신자중 한명이 박헌영이었으므로 그가 이사민의 입북계획을 미리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박헌영은 이사민의 입북이 어려워지자 적극 도왔으며,북한에 있을 때나 뒷날 출국할 때도 이사민을 옹호했다.박헌영의 이른바 「미제간첩 사건」과 이사민을 직접 연결시킬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심받을 만한 정황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에서 이사민은 47년 4월이후 동구권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 루트가 이제 불가능한 듯 하다고 밝혔다.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에게 직접 연락달라며 미국 주소를 제시했다. 이사민이 보고서를 작성할 무렵은 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한 뒤 동서냉전이 더욱 격화된 시기라는 점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이 시기에 동구권을 통한 북한과의 서신교류나,미국 주소로 연락을 받겠다고 제의한 사실들은 미 정보기관의 양해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박헌영사건」관련인물로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은 이 자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 월드컵 축구/한국유치 가능성 크다/29일 방한 메넴 아르헨 대통령

    ◎“육류수입 확대·원전 기술협력 증진 희망”/대통령 연임… 인플레 등 경제난 타개 진력 카를로스 사울 메넴 아르헨티나대통령은 명문 국립대인 코르도바대 법대를 졸업,잠깐의 변호사근무를 거친뒤 지난 55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정계에 뛰어든 베테랑 정치인이다.올해 63세. 아르헨티나의 라 리오하주 페론당 청년위원장으로 시작,18년만인 73년 라 리오하주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중앙정치무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의해 5년간 투옥된 민주투사이기도 하다.석방된뒤 알폰신 전대통령의 문민정부시절이던 83년 다시 주지사에 당선됐고 이어 89년 6년단임의 대통령에 선출돼 정상에 올랐다. 엄청난 인플레등 알폰신의 경제난을 이어받은 그는 온 힘을 다해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임기를 1년남긴 지난해 4년의 임기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작업을 끝낸뒤 올해 5월 실시된 선거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재집권에 성공,정치역량을 과시했다. 메넴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아르헨티나측에서 보면 주로 경협증진이 주목적이다.이를 반영하듯 그의 방한에는 아르헨티나 기업인이 50명이나 수행할 예정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우리와의 무역에서 4억달러 이상의 적자를 봤다.그들은 우리에게 까다로운 육류수입 제한규정을 완화,쇠고기류 수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한국은 축구강국인 아르헨티나가 우리의 2002년 월드컵 유치노력을 지원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문제와 우리 기업과 원양어선단의 남미 진출,3만5천명에 이르는 교민보호도 협조 요망사항이다. 아르헨티나의 KEDO참여,한·아르헨티나 두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공동추진하는 「빈곤퇴치운동」도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메넴대통령에 이어 브라질의 카르도소 대통령의 내년초 방한이 추진되고 있다.김대통령도 내년중 남미 순방을 검토하고 있어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남미와 우리와 경제를 비롯,각 분야에서의 협력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한편 메넴대통령은 한국방문에 앞서 현지에서 연합통신과 인터뷰를 가졌다.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정상회담에서 주로 무엇을 논의할 예정인가. ▲양국간 투자와 교역증진등 경협과 원자로개발등 원자력 기술협력문제등을 거론할 예정이다. ­양국의 민주화에 대한 견해는. ▲아르헨티나는 민정이후 군정청산을 하면서 인권상황이 많이 개선됐다.한국 역시 문민정부이후 경제와 개혁,민주화 부문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남북대화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견해는. ▲오늘 날의 상황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의 최적기라고 생각한다.모든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겠다. ­한국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월드컵 축구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적극 지지할 것이다.한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다른 나라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회개최권이 한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주한미 대사관 무관보고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0)

    ◎북,남침 보름전 남·북총선 제의/조국전선 요원 남파… 각계지도층 시도/“국회통합” 등 위장 평화공세… 전쟁준비 숨겨 북한정권은 대한민국 제2대국회의원 선거인 5·30총선이 끝난 직후에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을 내세워 남북총선을 제의하는 등 한국의 혼란을 부추겼다.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19 50년 6월16일자 주한 미대사관 무관들의 주간보고서 조인트위카(JOINTWEEKA)에 따르면 이를 위해 북한은 조국전선 요원들을 남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국전선이 남한으로 보낸 요원은 서기국 조직부장 김태홍·이인규와 조국전선 신문기자 김재창.조인트위카는 19 50년 6월10일 38선 경계의 여현에 도착한 이들은 8월 5∼8일 사이에 남북총선을 실시하고 8월 15일 최고입법기구를 창설하자는 조국전선 선전선동물을 휴대 했다고 기록했다.이들은 5·30총선을 참관하기 위해 한국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을 여현에서 만나 남북총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구 설치를 주장하는 전단을 전달했다. 조인트위카는 김태홍일행이 한수를 더 떠서 남한의 여러 정당및 사회단체 인사를 만난다는 이유로 부득부득 남행을 강행 했다고 밝혔다.그런데 이들은 38선을 넘자마자 한국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다.북한은 이 사건에 이어 6월 19일 자신들의 최고회의 정령을 통해 대한민국 국회와 최고인민회의가 단일 입법기관으로 연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제의 했다. 북한정권의 이같은 제의는 진정한 평화통일의 의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이 제안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집권층을 대화의 상대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실현성이 희박 했던 것이다.특히 일련의 제안들이 나온 6월 25일에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평화의 제스처는 전쟁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이었다고 할수 있다. ◎2대국회와 정계재편/신진들 대거 진출… 여소야대 정치구도 형성/지지기반 잃은 이승만… 새 정당 창당 서둘러 1950년 5·30선거를 통해 구성된 2대국회는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초라한 피란국회의 인상이 짙게 남아있다.6월19일 개원한지불과 1주일도 채 안돼 한국전쟁을 만난 2대국회는 27일 새벽 긴급회의를 끝으로 서울을 떠났다.9.28수복과 더불어 서울에 잠시 들렀지만 환도는 19 53년 8월16일에 가서 이루어 졌다. ○보수 기득권세력 참패 그러나 제2대 국회는 한국 정당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우선 제헌국회에서 보수세력이 철저하게 기득권을 이용해 세력을 굳혔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2대 국회에서는 이들 기존 세력들이 대거 탈락하는 대신 그 반대세력인 신진과 소장파등 무소속이 압승을 거두어 판도의 대변화를 일찍 예고했다.이로 말미암아 2대국회는 보수파 세력간의 각축장이 아니라 본격적인 여·야의 대립양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마련됐다.이는 실질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기반 약화를 가져온 것으로 이대통령은 이에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2대 국회를 낳은 5·30선거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5·30선거는 19 48년 제헌국회를 낳았던 5·10선거와는 크게 구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외부 개입없이 한국인들만에의해 실시된 5·30선거는 보수세력들만이 참여했던 5·10선거와는 사뭇 달랐다.그래서 남북 협상파와 중간파들까지 모두 끼어들었다.이 5·30선거야말로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을 빼놓고 당시 한국의 전 정치세력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총선이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파 총선 참여 5·30선거에서는 모두 2백1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다.총선에는 여당인 대한국민당(국민당) 1백65명,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1백54명을 포함해 39개 정당 사회단체에서 모두 2천2백9명이 입후보 했다.이 가운데 10명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 사회단체가 30개,1명 밖에 못 낸 정당 사회단체도 무려 18개나 됐다.특히 1천5백13명이라는 무소속 입후보자는 의원 총수의 7.2배나 됐다.이처럼 5·30선거에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한 데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과 제헌국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키워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제헌국회에 비해 입후보의 난립상을 보여준 5·30선거는 예상대로 여권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국민당 24명,국민회 14명,대한청년단 10명,일민구락부 3명,대한노총 3명,여자국민당 1명,대한부인회 1명,중앙불교위원회 1명등 여권에서 57명이 겨우 당선했다.야당은 민국당 24명,사회당 2명,민족자주연맹 1명등 27명이었지만 의원 정원의 3분의 2를 차지한 무소속 1백26명을 일단 야권으로 보았을때 여소야대가 분명했다.국회가 개원하던 6월19일 의장선거에서 5·30선거가 철저한 야권의 압승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날 의장선거 1차투표 결과는 민국당의 신익희 96표,사회당의 조소앙 48표,무소속의 오하영 46표,국민회의 이갑성 11표,무소속 안재홍 3표순으로 집계됐다.이승만 정부가 지지하던 무소속 오하영은 46표밖에 못얻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2대국회에서의 야당 우세는 이날 2차투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야당세력과 무소속의 대부분이 민국당으로 쏠려 결국 1백9표를 얻은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됐다.이는 정치갈등을 드러낸 제1라운드의 게임이었다. 민국당은 한민당과 신익희등 대한국민당의 일부의원,그리고 대동청년단등 3개 세력이 합동해 19 49년 2월20일 창당한 정당이다.민국당은 상해 임시정부에도 반대하고 국내 좌익세력과도 척을 졌던 한민당이 주축을 이루었다.한민당은 해방공간에서 남북의 대치상황이란 특수상황에 편승해 독립적 세력이었던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일제하 기득권층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반공에 치우쳤던 이승만을 도와 정부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 볼때 한민당이 가장 이상적인 정당은 아니었다. 한민당이 제헌국회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개각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는 사실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한민당측은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의 결별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던 세력과의 연합으로 손을 잡아 만들어낸 정당이 바로 민국당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직선 개헌 준비 민국당은 창당직후부터 이승만의 힘을 약화시키는 제도적 장치인 내각책임제 개헌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주장은 제헌국회에서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당등 여권세력의 결사적인 반대로 부결됐다.하지만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과 국회가 낸 내각책임제 개헌의 대립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은 민국당의 성격이 이처럼 자신에 대한 반대와 퇴진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이승만은 5·30선거에서 민국당측이 실질적으로 원내를 장악하게 되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한 창당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창당과정에서는 지지세력을 모으는데 이승만이 직접 나섰다.물론 여기에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던 여권이 만족할 만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자유당 창당에 박차 5·30선거후 정당의 이합집산을 계속했던 2대국회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민국당을 중심으로한 야권의 결집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등 양분상을 나타냈다.야권이 이승만 퇴진이란 기치아래 민국당을 주축으로 굳건히 뭉친반면 여당은 상대적으로 약했다.이승만 대통령 쪽의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의 연합인 신정동지회,그리고 공화구락부의 통합 교섭단체인 공화민정회는 전체의원수의 과반수인 94명이 포진했다.그럼에도 민국당에 비해 오합지졸의 취약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공화민정회는 열세를 면하기 위해 신당 창당을 서둘렀다.19 51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승만대통령이 드디어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창당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그로부터 4개월후 피란지 국회의사당에서 장차 독재집권의 기반이 될 자유당 결당대회가 열렸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이승만,부의장에 이갑성과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 광복 50돌 맞아 「한·일관계 소설」 출간 붐

    ◎가즈오의 나라­광개토왕 비문 변조싼 한·중·일 시각차 조명/세종로 1번지­“치욕의 상징” 옛 조선총독부 건물 보존 주장/제국의 별­일 육사출신 이청천·홍사익·박시찬 삶 대비 광복 50주년을 맞아 최근 출판가에 한일관계를 다룬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이 소설들은 한일간 역사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각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인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작품은 「가즈오의 나라」(전2권·프리미엄북스 펴냄),「세종로 1번지」(전2권·여백),「제국의 별」(전4권·우석)들이다. 「가즈오의 나라」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지난해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김진명씨의 두번째 작품.「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을 변조해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으며,지금도 그 맥을 이은 극우파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내용이다.「무궁화꽃…」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리적 기법이 동원돼 연쇄살인과 범인 추적,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을 흥미있게 풀어나갔다. 이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경로,비문 해석을 둘러싼 한국·일본·중국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소개해 작품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다만 줄거리에 「김정일의 일본 방문­평양에서 쿠데타 발생­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김정일 재집권」으로 전개되는 남북관계 진전을 담은 것이 작품의 전체 틀을 어그러지게 하는 인상을 준다. 「세종로 1번지」의 작가는 지난해 「원균 그리고 원균」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던 고정욱씨다.앞의 작품에서 「이순신은 선이요,원균은 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한 지은이는 이번 작품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내세웠다.오는 15일 광복50주년에 맞춰 철거하기로 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 곧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은 우리 의식에서 형성돼야지,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파괴한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논리다.또 한마당 잔치를 벌인 것으로 우리 자신이 청산을 끝냈다고 만족해 하지나 않을지 경계하는 마음도 내보인다. 작가는 건물철거에 관련된 토목업자가 점차 역사의식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형상화했다. 「가즈오의 나라」와 「세종로 1번지」가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해석했다면 유현종씨의 「제국의 별」은 일제강범기 때 실재했던 인물들의 다기한 삶을 보여준다. 한일합병 직후 일본은 조선무관학교 생도인 이청천·홍사익·박시찬 등을 국비유학생으로 뽑아 일본육사에 입학시킨다.이들 가운데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이청천·박시찬은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친다.그러나 홍사익은 육사를 우등으로 졸업,중장까지 진급했다가 일본 패망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 소설은 홍사익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이청천 등의 독립운동과 대비시킨다.역사소설가로 손꼽히는 작가의 선굵은 문체가 일본·필리핀·만주 등지를 넘나드는 웅대한 스케일 속에 녹아들어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을 향한 「쇼」(해외사설)

    얼마나 흥미를 끄느냐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좋은 술책이다.이 말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이탈리아총리가 정치적 교훈을 얻으려던 모든 사람들에게 했던 답변이다.그는 피닌베스트사 방송사 주식의 25%를 외국인 친구인 기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해야만 했다.그가 밀라노에서 제시한 이른바 「물결」작전이라는 것은 변화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었으며 변해야 할 것이 아무런 변화를 하지않은 것이었다. 전직총리는 재집권을 바라면서 중도우파의 중심이 됐고 과거와 같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다.도중에 그는 많은 유동자산을 모았고 그를 숨막히게 했던 빚을 깨끗이 정리했다. 비즈니스는 역시 쇼다.끊임없는 선언적인 운동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모든 것을 팔겠다」고 한 그의 흥미유발성 발언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고 결국은 재정적으로 수지맞는 일이 됐으며 정치적인 과장은 광고역할을 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유료방송사인 텔레퓨사의 주주이기도 한 독일인 레오 키르치씨와 남아공의 요한 루퍼트씨와의 모험을 한층 강화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친구인 독일인 거물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것이 또 다른 유럽판 투자는 아닐까.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상황은 그리 밝지는 못하다.지난 6월 3개 방송사 가운데 2개를 팔아야 할지도 몰랐던 국민투표에서 승리한뒤 다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그곳에는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연정도 포함돼 있다.람베르토 디니 현총리의 기술적인 정부아래서 정당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직 사임이후부터 줄곧 향후 총선시기를 결정하는데 좌우파의 복잡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각자는 이길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있다.방송사의 후계자를 정하는 협상은 이제 끝났으며 며칠후부터는 중도우파가 제기한 개헌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결국 베를루스코니는 방송사로 야기된 흥미위주의 논쟁에 직면할 것이다.이유는 반독점 법안이 준비중에 있기 때문이다.재집권을 향한 장애물들이 유권자와 소비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 일 정계 재편·총리 진퇴 갈림길/내일 참의원선거 전망

    ◎사회당 득표 따라 무라야마 재집권 결정/93년 연정수립후 첫 선거… 126명 선출 일본 참의원 선거가 23일 실시된다. 93년 중의원 선거로 자민당 단독정권이 무너지고 연립정권의 시대로 들어선 이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다. 이번 선거는 일본정계의 재편과 맞물려 관심을 모아왔으나 막상 선거에 들어서서는 사회당이 얼마나 득표할지,그에따라 무라야먀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퇴진하게 될 것인지 여부로 의미가 축소돼 버렸다. 일본 정계의 재편과 진로탐색이라는 과제는 중의원 선거로 넘어가는 형국이다.이번 선거에서는 정책상의 뚜렷한 쟁점도 부각되지 못한 상태다. 참의원은 6년임기인 전체 2백52명 가운데 3년마다 절반씩 개선한다.이번 개선대상은 89년 당선된 1백26석이다.그 당시 사회당은 도이 다카코위원장(현 중의원의장)의 이른바 「마돈나 선풍」으로 일거에 약진,41석을 차지했다.자민당은 33석으로 참패했었다. 지난해 신진당 창당뒤 정당별 의석수는 자민당 개선 33석(비개선 61석),사회당 41석(22석),신진당 19석(16석),신당사키가케 1석(0석),공산당 5석(6석) 기타등이다. 이번 선거에서 제일 확실하게 전망되고 있는 것은 사회당이 크게 쇠퇴할 것이라는 점.사회당은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저인 15석 전후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15석조차 못 건질 경우 무라야마총리가 계속 집권할 수 있겠느냐는 점.연립여당 특히 자민당안에서는 당장 대안이 없다는 점을 들어 연립여당 전체로 과반수인 64석을 넘으면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사회당이 15석 이하를 얻게 될 경우 「무라야마 이후의 내각」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게 될 것이다.또 사회당안에서는 구보 와타루 서기장의 퇴진등이 모색되면서 다시 한번 진통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는 또 지난 4월 지방선거의 무당파 돌풍이 재현될 것이냐는 점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기성정치권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에 관심이 있다는 응답이 80년이후 처음으로 50%이하로 떨어졌다.그러나 무소속의 난립과 정당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무소속 돌풍보다는 유권자의 투표기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 선거가 지나면 다음은 중의원 선거다.여야가 모두 중의원 선거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선뜻 총선거를 치르려 하고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일본 정계는 2년이상 표류하고 있는 데 대한 국민의 본격적인 심판을 앞둔 「정치의 계절」로 진입할 것이다.
  • 카타르 무혈 궁중쿠데타/하마드왕자가 부친 폐위/QNA통신 보도

    ◎할리파국왕도 72년 형 내쫓고 정권잡아 【도하(카타르) 로이터 AFP 연합】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카타르 국왕(65)이 26일(이하 현지시간) 그의 아들 하마드 빈 할리파 알­타니 왕자(47)에 의해 축출됐다고 카타르 관영 QNA통신이 27일 보도했다. QNA통신은 하마드 왕세자가 할리파 국왕이 외유중인 틈을 이용, 부왕을 폐위시키고 국왕에 즉위함으로써 권력 장악을 공식화했다고 전했다. 하마드 왕세자는 지난 10년 가까이 카타르 정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여온 국방장관을 맡아왔다. 이 통신은 하마드 왕세자가 왕실과 카타르 국민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나 할리파 국와폐위에 관한 세부적인 내막과 그의 체류지역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카타르 방송들은 이날 국가와 함께 하마드의 업적을 찬양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방영하는 한편 그가 외국귀빈과 왕실의 다른 왕자 및 각료들을 영접하고 있는 모습을 내보냈다. 현지 목격자들은 26일 밤부터 도하의 공항이 폐쇄돼 모든 항공편의 이·착륙이 중단된 뒤 27일 상호 9시30분부터 다시 공항이 개방됐으나 아직 이 공항을 통해 이·착륙한 비행기는 없다고 전했다. ◎국왕 귀국선언 【제네바 AFP 로이터 연합】 27일 왕세자에 의해 축출된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카타르 국왕(63)이 자신은 카타르로 돌아가 카타르의 합법적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스위스를 방문중인 할리파 국왕은 이날 제네바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카타르로 돌아갈 것』이며 자신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타르 쿠데타 언저리/거세불안 황태자가 전격거사/최근 부친 재집권 시도하자 축출 카타르의 하마드 빈 할리파 알 타니 황태자 겸 국방장관(47)이 27일 부친인 할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65)의 해외여행을 틈타 무혈 쿠데타를 일으킨 배경은 최근 끊임없이 나돌았던 부자간의 권력투쟁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축출된 할리파국왕도 지난 72년 2월, 형인 아흐마드 당시 국왕의 부재중 무혈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경력이 있어 권력찬탈의 부전자전을 여실히 보여준다.하마드황태자는 지난 92년부터 사실상 일상적인 국정을 총괄해왔으나 할리파국왕이 최근 국정운영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시도함에 따라 신변불안을 느낀 나머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수십억달러 규모의 가스개발 투자에 관련된 금융가들이 카타르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누구인지 불확실한 점에 대해 우려할 정도로 부자간의 갈등은 심했었다.할리파국왕은 장남이 지나치게 독주하자,파리에서 살고 있는 차남 압델 아지즈를 귀국시키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압델은 지난 92년 하마드황태자가 주도한 개각 당시 석유 및 재무장관직을 박탈당한뒤 프랑스에서 살아왔다.압델의 귀국시도에 격분한 하마드황태자는 할리파국왕에게 지난 6월18일 이집트를 시작으로 한 이번 외국여행을 연장하도록 요청하는 등 사전에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아들인 압둘라 내무장관은 이날 쿠데타 직후 하마드황태자의 국왕취임 행사에 참석,가장 먼저 축하했고 재무장관인 넷째아들 모하메드는 부친과 동행중이다.나머지 아들 3명은 아직 어려서 공식직위가 없다. 하마드황태자는 국정을 관리하기 이전까지 군에서 일생을 보내왔다. 10대 후반에 영국 최고의 왕립군사학교에서 수학한뒤 카타르가 영국에서 독립하던 71년 졸업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한뒤 하마드는 무엇보다 카타르군을 현대화하는데 앞장서 걸프전 당시 카타르군이 카프지 전투에서 용맹성을 떨친데 기여하기도 했다. 또 국정을 장악하고부터는 그의 탁월한 성실성으로 각료들을 독려, 수십억달러의 천연가스 개발을 비롯, 산업화계획에 착수했다. ◎카타르는 어떤 나라/71년 영서 독립… 석유 33억배럴 매장/면적 1만1천㎢… 국민 95% 회교도 페르시아만 연안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 카타르는 면적 1만1천㎦의 경기도만한 작은 나라다.총인구는 51만명(외국인 노동자 포함)이며 국민의 95%가 수니파 회교도. 규모는 작지만 석유매장량이 풍부하며 석유수출로 국민소득은 선진국과 비슷하다.석유매장량은 33억 배럴이며 하루 원유생산량은 37만8천배럴. 1차대전 이후 영국보호령에 편입됐다가 1971년 완전독립.한국과는 74년에 수교했다. 세습군주제로 국왕이 총리직을 겸임하고 입법권도 갖는다.자문위원회가 의회역할을 하지만 입법권은 없고 정당도 인정되지 않는다.
  • 김 대통령 체코방문 의의/주체코대사 민병석씨(인터뷰)

    ◎“동·중부 유럽 진출 교두보 구축”/체코 정국 안정… 파·러시아의 모델로/“경협·북 인권개선 노력” 합의 큰 성과 김영삼 대통령의 유럽순방 두번째 방문국인 체코 주재 한국대사관의 민병석 대사는 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의 이번 체코 방문 등으로 한국은 동·중부 유럽지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을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접근 우회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 ­김 대통령이 이번 유럽순방에서 옛 동구권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체코를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지.또 옛 동구국가들의 요즘 상황은. ▲체코는 옛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이 재집권을 할 위협이 거의 없는 유일한 나라로 평가를 받고 있다.그만큼 시장경제체제 전환에서 가장 모범적인 나라라 할 수 있다.러시아와 폴란드 등의 나라에서 체코의 모델을 배우고 갈 정도다. 지난해 체코는 2.7%의 국내총생산 성장률에다 3.5%정도의 실업률을 기록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 선진국보다 더 안정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뛰어난 과학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또 체코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지역 어디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어 세계화의 원년에 동·중부 유럽지역 진출의 전진기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EU의 비회원국 가운데 가장 빨리 EU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체코와의 관계강화는 장기적으로 우리와 EU관계도 마찬가지로 다지는 간접적인 효과도 가져올 것이다.또 체코의 입장에서도 가장 빨리 성장하는 지역에서 가장 빨리 발전하는 한국과의 관계강화가 실리와 함께 국가위상을 높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체코가 옛동구권 국가 가운데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모범국가로 성장한 배경은 무엇인가. ▲체코는 89년 공산집권이 무너진 뒤의 혁명기와 93년1월1일 슬로바키아와 분리된 뒤의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대체적으로 혁명기 이후의 발전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데 체코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철저한 계획과 차질없는 실행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특히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과 클라우스 총리의 적절한 콤비도 크게 작용했다. ­한·체코 정상회담의 의미와 특징은 무엇인가.우리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외교관례상 드문 일인데. ▲정상회담은 무엇보다 양국간 미래지향적인 실질적 협력관계를 이뤘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체코 국영기업의 민영화사업과 통신망 현대화사업 등에 우리기업들이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해 경협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그리고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한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벨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외무장관은 이런 내용을 문서화했다.체코의 이런 입장발표는 동·중부 유럽국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뿐아니라 지금도 어느나라를 지지할지 망설이는 나라들이 있다면 그들의 결정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앞으로 양국 및 다자관계의 전망은. ▲체코는 우리를 통해 아·태지역 진출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체코를 통해 유럽지역에 진출을 확보했다. ­체코는 북한과 중립국감독위 철수문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데 체코는 북한을 어떻게 보고 있나. ▲하벨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공산주의는 반드시 없어지고 아무도 이런 역사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또 북한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고 한국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했다. ­김 대통령의 체코방문에 대한 체코 현지의 반응은. ▲김 대통령의 체코방문은 체코에서 가장 큰 뉴스였다.언론들도 김 대통령의 방문 기사를 크게 취급하면서 환영했다.
  • 르완다·보스니아 종족학살 최대비극/되돌아 본 지구촌 ’94

    ◎중동·남아공·아일랜드 평화 큰 걸음/아·구·미주 경제블록간 경쟁 격화 예고/부패스캔들·폐페스트 공포로 “홍역” 94년 역시 수많은 사건·사고가 지구촌에서 벌어졌다.제각기 별개의 사건들인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하지만 굳이 두드러진 한가지 추세를 끄집어낸다면 종족분쟁으로 대표되는 정치 측면에서의 분열과 블록화라는 말로 상징되는 경제 측면에서의 통합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두드러졌던 한 해였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은 앙골라·라이베리아 내전 등의 휴전 돌입,남아공·북아일랜드에서 볼 수 있었던 기대 이상의 평화 진전 및 반세기만에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찾은 미국과 북한,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를 낳은 중동 각국간의 관계 개선에 비해 눈에 띄게 심했던 보스니아와 르완다,체첸공화국 등에서 목격된 비극적 분쟁에서도 뚜렷한 대비를 나타냈다. ○명암 뚜렷이 갈려 국제정치면에서는 냉전구조 와해 후 단결목표를 잃은 각국이 아직 윤곽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새 국제질서를 어떻게든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확립하기 위해 끝없는 암중 대결을 계속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미국에 밀리기만 하던 러시아는 옛 영화를 되찾으려는 듯 코지레프 외무장관,옐친 대통령 등이 미국에 대해 러시아를 배제한 국제사회의 안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경고를 잇따라 내놓았다.또 그동안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했던 아시아에서도 일본과 동남아 등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서유럽도 보스니아 내전 해결 방안을 놓고 미국과의 대립을 서슴지 않았다. ○미·러 대립 새국면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 이념 대립에 따른 대결 구도는 사라졌다.그러나 종족대립과 종교갈등 등이 그 빈 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면서 아프리카와 옛 소련,동유럽 등지에서 과거와는 다른 국지적 분쟁이 94년 지구촌의 새 이슈로 떠올랐다.종족·종교갈등은 분쟁의 최대 원인으로 부각됐다. 소수 투치족에 대한 다수 후투족의 학살로 시작돼 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르완다 내전과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 주민들에 대한무자비한 「종족 청소」가 끝없이 이어진 것은 94년 지구촌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됐다.분리독립을 선언한 체첸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전격 무력침공은 「도를 지나친」 인권탄압이란 비난을 불렀고 성탄절을 앞두고 벌어진 알제리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비행기 납치와 인질 살해극은 사랑과 평화로 가득해야 할 성탄절을 피로 물들게 했다.협상을 통한 통일성취로 부러움까지 샀던 예멘은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불만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예멘측이 다시 독립을 시도,전쟁까지 치른 끝에 무력으로 독립 움직임을 잠재웠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또다시 쿠웨이트에 침공 위협을 가해 걸프전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하기도 했다. ○러 인종분규 이슈화 이같은 사건들은 국제정치 분야에서 확실한 중심 핵이 사라짐으로써 옛 체제속에서의 협조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구심점을 잃은 국제정치무대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목소리만 커졌고 구멍난 협조체제의 균열 사이를 종족·종교갈등과 이해대립이 비집고 나왔다.옛 소련의 자멸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란 뜻하지 않았던 지위를 얻은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확고한 지도자의 위치를 굳히려 했지만 소련의 공백을 채우지 못함으로써 기대 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그 반면 나날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경제 분야에서는 세계경제를 하나의 협조틀 속에 묶는다는 취지 아래 오랜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세계무역기구(WTO)를 내년초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그러나 WTO체제가 얼마만큼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선 전망이 불투명하다.협조체제 구축보다는 치열한 경쟁에 따른 이해 마찰의 소지가 아직도 더 크다.살아남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올 한해 지구 전체에서 큰 유행을 이룬 통합의 물결은 경제주도권을 잡기 위한 통합경제세력간의 경쟁이 격화할 것을 예고해 주고 있다. ○WTO성공 불투명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한 유럽경제지대(EEA)의 창설과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를 미주자유무역지대(AFTA)로 확대·발전시키려는 움직임,가장 활발한 경제성장을 계속한 아시아지역에서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출범 노력등 94년 내내 이어진 활발한 통합 물결은 정치분야와는 달리 경제분야에서는 어떤 틀을 형성해 간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같은 경쟁 심화는 한편 실질적인 경제 성과와는 관계없이 경제적인 위기감을 느끼게 해 국민들로 하여금 보수화의 길을 걷게 했다.그 대표적인 예가 40년만에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한 미국 중간선거 결과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깨끗한 정치와 개혁을 내걸고 출범한 일본 연립정권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민·사회 연정에 정권을 내준 것이라든지 독일의 콜 총리가 전후 최장수 총리 기록을 경신하면서 재집권한 것과 프랑스 좌파정부의 몰락,동유럽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옛 공산정당들의 부활 추세 등 보수화의 물결은 올 한해 지구촌 곳곳을 휩쓸었다. 한국에서도 세도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시끄러웠지만 유럽,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부정·부패 스캔들은 94년 주요 뉴스로 연일 현지 언론들을 장식했다.지난 3월 화려한 출범식을 가진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끝내 부패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임,단기총리로 막을 내렸다.프랑스에서는 끝없는 각료들의 부정·부패 스캔들로 현직 각료가 구속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영국에서 전해진 살을 파먹는 괴박테리아 소식과 인도에서 발생한 폐페스트 소식은 전염병에 대한 인류의 공포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지옥이 따로 없는 참극을 빚은 르완다는 곳곳에 널린 난민들의 시체와 불결한 위생 상태로 온갖 전염병의 발원지가 됐으며 그밖에도 아프리카와 동남아,러시아와 동구,또 중국에서도 페스트와 콜레라,디프테리아,홍역 등 갖가지 전염병의 발병 소식이 전해졌다. ○종파갈등 더욱 심화 한편 연초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연말 일본에서 일어난 강진,유난히 잦았던 호우·가뭄 등 자연재해와 일본에서의 여객기 추락과 에스토니아호 침몰 등 많은 인명피해를 낸 대형사고 앞에서 인류는 엄청난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기만 한 존재를 다시 실감해야만 했다.「인간복제」실험은 그 결과가 가져올 가공할 사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논란을 빚었으나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메디컬센터연구팀이 결국 이 연구를 중단해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성의 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김 대통령,최 내무에 화냈다/“JP용퇴·부총재 경선” 발언 질책

    ◎「당활성화」 YS의중 잘못 짚어 「민자당의 활성화」를 위한 대통령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 의중을 처음으로 헤아려보려던 최형우내무장관이 강한 질책을 받았다.김영삼대통령은 13일 김종필대표의 용퇴를 전제로,부총재제를 신설해 경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심각한 유감을 표시했다.이례적으로 청와대측은 질책사실을 공개했다. 김대통령이 12일 『민자당 전당대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당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밝힌 뒤 정가에는 무수한 관측이 떠올랐다.대통령이 생각하는 당의 활성화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최장관은 이를 김대표의 퇴진과 복수 부총재의 신설및 경선이라고 해석했다.그러나 이런 해석에 곧바로 질책이 가해짐으로써 새로운 방향에서의 해석이 불가피해졌다.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는 질책이유에 대해 『대통령의 의중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의 의중과 관련,『시대변화에 맞춰 노력과 지혜를 동원해 전당대회를 계기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자는 것이나,어떤 방법으로 할 것이냐는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그는 『모두가 잘되게 하자는 것이며 자기나름의 입장이나 선입관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최장관은 특히 당도 아닌 정부에 있는 사람이고 대통령을 오래 모신 사람이어서 더욱 질책을 받았다』고 말했다.그의 설명에 따르면 최장관은 자기중심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을 해석했다는 것이 된다.대통령이 당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밝혔을 때는 활성화방안을 연구해보라는 뜻이다.그럼에도 최장관식 해석에는 언짢아했다.생각이 실제 그러면서도 짐짓,예를들어 파문이 커지니까 진화를 위해 화를 냈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보다는 대통령의 생각과 최장관의 해석이 달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김대표의 유임을 전제로 한 당활성화를 대통령은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아니면 최장관의 이야기 가운데 「경선」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경선이란 말이 나오는 그순간부터 민자당은 후보경선체제로 돌입하게 되는 탓이다. ◎민자 조직개편 어떻게/전당대회 소집 절차/대의원 수결정→선출→확정후 공고/준비에 45일 소요… 체제개편땐 세다툼 치열 내년 2월로 예상되는 민자당의 전당대회는 크게 보아 ▲대의원 정수확정 ▲지구당및 시·도지부에서의 대의원 선출 ▲대의원명단 확정및 소집공고와 대회등 모두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먼저 대의원정수는 당헌에 7천명이내로 규정돼 있으나 구체적 숫자는 당무회의에서 개정이 가능한 「규정」에 위임돼 있으므로 당무회의에서 대의원수를 줄일 수 있다. 따라서 당무회의는 우선 대의원수를 몇명으로 할 것인지 확정해야 한다.여기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정부조직 개편과 발맞추어 「작고 내실 있는」 전당대회를 추구하기 위해 정수를 4천∼5천명선으로 줄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총재 대표 고문 당무위원 현역의원 지구당위원장 국책자문위원 중앙상무위 운영위원 등 당연직 대의원 1천4백여명을 빼면 선출직 대의원정수는 2천3백∼3천3백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선출직 대의원은 당무회의 3,시·도지부 3,지구당 23.7,지역구 국회의원 추천 6.85의 비율로 각각 선출하므로 시·도지부와 현역의원및 지구당위원장의 입김이 대의원들의 성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첫단계인 정수 확정에는 별로 시일을 요하지 않는 반면 두번째 단계인 시·도지부및 지구당에서의 대의원선출에는 20여일이 소요된다. 시·도지부와 지구당은 각각 5일동안의 대의원선출을 위한 개편대회를 공고해야 한다.대회는 먼저 전국 2백37개 지구당이 순차적으로 실시하는데 2주가량,이어 15개 시·도지부 대회가 하루 2개 꼴로 모두 1주일쯤 걸릴 전망이다. 세번째는 대의원명단을 취합,당무회의에서 최종 확정짓고 전당대회 소집공고를 5일에 걸쳐 실시한뒤 본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여기에는 20일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같은 기본 일정말고도 전당대회가 단순한 단합대회 성격을 넘어 지도체제 개편의 양상을 띠게되면 당헌 개정을 위한 준비절차가 필요하다. 당헌은 전당대회에서 개정되지만 전당대회가 열리지 않을 때는 중앙상무위 운영위가,운영위가 열리지 않을때는 당무회의가권한을 대신할 수 있으므로 당무회의에서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전당대회에서 추인하는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도체제 개편을 둘러싼 계파별 이해관계가 대립될때는 당무회의에서 일차적 격돌이 예상된다.여기에 부총재나 최고위원을 선출제로 할때는 전당대회 대의원을 자파 세력으로 충원하기 위해 지구당,시·도지부,당무회의,중앙상무위 각 단계에서의 치열한 움직임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도체제 어떤 형태로/「대수술」이냐 「수혈성」이냐가 변수/민주계 전면개편 주장… 일부 “최악” 우려 반대 지도체제의 「대수술」이냐,지방선거에 대비한 「수혈성」단합대회냐.내년 2월쯤 열릴 민자당 전당대회의 성격을 둘러싼 이 두가지 변수가 여권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후반기 정국운영 구도를 읽게해 줄 그 선택에 따라 여권 내부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몰고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김종필대표(JP)의 거취문제가 최대 관심사이고,또한 각 계파들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지도체제의 전면개편 주장은 민주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그동안 물밑에서 조심스럽게 개진되어 왔으나 김대통령이 전당대회를 거쳐 민자당직을 개편하겠다고 선언한 뒤 민주계의 한 실세 관계자가 그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하면서 수면위로 급부상하고 있다.이 관계자는 대표위원 체제를 대신할 「부총재」직의 신설을 주장했다.김대표의 일선 퇴진문제와 연관될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방자치선거에 대한 「위기론」과 「개혁 지속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즉 『이대로는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인식아래 당에 활력을 불어넣고 재집권을 위한 제2의 도약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민자당이 그동안 보여준 「무기력」을 탈피해 김대통령의 집권 후반기까지 개혁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더 나아가 세계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결단」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지도체제의 전면 개편을 주장하고 있는 쪽에서는 「경선」(경선)을 통해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JP가 경선에 참여해서 패배를 하든지,아니면 스스로 제2선으로 물러나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효율적인 방편이라는 판단이다.아울러 차기를 노리는 민정계 중진들의 「호응」도 일단 기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즉 민주계 1명,민정계 2명 등으로 부총재제도를 구성함으로써 민주계의 단합과 민정계 구심점의 이중분할을 꾀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묵살하는 의견들은 「부총재」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민정계 인사의 주변을 제외한 민정계 대다수와 민주계 일부에서도 나오고 있다.양적으로는 반대가 더 많은 것이다.강삼재 기조실장은 『지도체제 개편문제는 대통령만이 알 사안』이라고 일각의 논의를 일축했다.민주계의 한 당직자도 『잇따른 사고로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지도체제의 변화를 전제로 한 전당대회는 어렵다』고 내다보았다.이같은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쪽에서는 김대표의 일선 퇴진이 몰고올 후유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자칫 3당통합 이전의 상황,즉 최악의 상황에서 당이 깨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전당대회를 둘러싼 이러한 이분법적 논의와는 달리 절충안도 제기되고 있다.형식적이든,실질적이든 김대표의 「관리자」역할을 그대로 부여하면서도 지도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 대만 오늘 지방선거/국민당 정권 시험대… 야당승리땐 큰 타격

    【대북 AP AFP 연합】 대만은 3일 지난 45년간 집권해온 국민당 정권의 최대 시험대가 될 대만성 주석및 대북등 2개 직할시장을 뽑는 사상최초의 직접선거를 실시한다. 7개년 정치 민주화 과정의 이정표가 될 이번 지방 선거는 경제적으로는 성장을 구가했으나 외교적으로는 고립된 대만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국민당 정권이 전통적인 대중국 통일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야당인 민진당등은 대만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어 향후 대중국 관계에도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앙직할지인 대만성의 주석,대북,고웅등 2개직할시의 시장을 뽑는 이번에서 야당이 승리할 경우,오는 96년 사상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노리는 이등휘 현총통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안겨줄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 언론들은 3일 상오8시(한국시간 상오9시) 1만1천여 투표소에서 실시될 이번 선거에 1천3백80만명의 유권자 가운데 70%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다.선거 결과는 이날 밤 12시쯤 나올 것으로 보인다.
  • 재집권 콜총리에 축전/김 대통령

    김영삼대통령은 18일 최근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의 헬무트 콜총리에게 축하전문을 보냈다. 김대통령은 전문에서 『이번 승리는 각하의 영도하에 독일통일이 이뤄졌을 뿐 아니라 현 내각이 통일에 따르는 제반 난제들을 훌륭히 해결하고 독일의 경제·사회안정을 이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새 내각의 임기중 한국과 독일 양국간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가 더욱 심화·발전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가까운 장래에 만나 양국의 공통관심사와 우호협력관계에 관해 협의할 기회를 갖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북핵타결의 파장과 우리의 과제/긴급 대담

    ◎“경수로 지원,남북신뢰회복과 연계를”/미­북·일관계개선 대응전략 조속 수립/북의 비핵화 약속 이행여부 지켜봐야/한반도에 탈냉전 분위기 가속화 기대/정전체제서 평화체제로 전환대비 필요 북한핵관련 전문가들은 이제까지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의 핵협상 과정에서 미흡한 면도 보여줬지만 이번 제네바협상 결과를 수용하고 남북관계 개선 등의 계기로 활용한다면 한반도 전체의 장래에 있어 바람직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미국과 북한의 제네바회담 타결과 관련,이용필교수(서울대)와 신정현교수(경희대)등 국제정치학자들의 긴급좌담을 통해 그 의미와 앞으로의 우리 정책방향을 짚어 보았다. ▲이교수=미국과 북한의 협상에서 북한핵문제가 완전히 타결돼 앞으로 남북간 갈등과 긴장이 크게 완화될 것으로 보입니다.물론 지금까지의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우리의 뜻을 반영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이제부터 더욱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장기적으로 남북대화가 진전되고 경제협력은 더욱 활성화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신교수=지난 18개월동안 미국과 북한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적이 많았습니다.이제 그것을 극복,합의에 도달해 한반도 안팎에 평화와 안정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국제적인 탈냉전시대에 한반도 주변은 아직도 냉전의 요소가 남아 있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도 탈냉전의 기운이 무르익을 것입니다.이러한 결과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합의된 내용이 어떻게 실천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교수=이번 협상에서 북한이 IAEA의 안전조치 의무를 전면 이행하고 핵관련 시설을 즉각 해체하기로 한 것은 우리 정부와 미국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라고 봅니다.앞으로 우리 정부는 북한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겠다는 자세로 성의있게 대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북한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행하겠다고 국제적으로 공약,한반도의 긴장완화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효성 여부는 좀더 두고 봐야 합니다. ▲신교수=이번 합의는 세가지 점이 중요합니다.첫째는 북한핵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핵동결,NPT복귀,IAEA사찰수락 등이 그것이지요.둘째는 경수로전환과 관련해 북한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는 연락사무소 설치를 통해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졌다는게 특징입니다. ○남북대화 진전 기대 합의문 내용을 보면 상당히 포괄적입니다.단순히 핵에 관련된 게 아니고 북한의 변화를 한 눈에 전망할 수 있습니다.그 가운데 우리의 주된 관심은 남북한 관계가 어찌 되느냐하는 것입니다.미국과 북한과의 합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남북한관계가 달라질 것은 분명합니다.합의내용에 IAEA특별사찰 수용 등을 포함,북한핵 투명성 확보에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그러나 과거핵문제를 거론 않은 것은 앞으로 주시해야 할 겁니다.경수로지원 관련 기술진이 들어가 북한핵시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한핵과거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때문에 핵투명성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번 합의 자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교수=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의 핵사찰을 받는 대신 한국형 경수로를 지원받고 미국의 대북 투자제한이 일부 해제돼 남북 경협은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러나 북한이 우리 정부의 노력과 미국의 지원으로 원자력발전 시설을 갖출 때까지 국제적 약속을 이행할 지는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이번 협상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북한의 불가피한 전략으로 보여지지만 북한의 권력구조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정부와 미국이 제공하는 경제지원은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교수=미국과 북한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먼저 북한측의 대외정책에 변화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국제규범을 지킨다든지 대외적 위상을 높이려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이제까지 북한이 집착했던 주체성보다는 개방적 대외정책을 우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현재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경제난의 극복입니다.핵개발중지의 대가로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지원을 얻겠다고 나선 것은 북한이 처한 경제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반영합니다.그만큼 경제가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새로 등장한 김정일체제가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존속이 어렵기에 이런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핵투명성 확보 진전 미국측에서 볼때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북한과의 합의는 NPT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이와 함께 미국의 한반도정책의 변화도 엿보이고 있습니다.기존에는 우리와의 관계만을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북한을 인정하는 구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미국의 한반도정책도 탈냉전으로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연락사무소설치는 미국과 북한의 관계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일본과 북한 관계도 새롭게 하는등 주변 강대국을 포함,한반도에서 탈냉전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특히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개선 속도는 우리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으며 바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상황도 배제하기 힘듭니다. ▲이교수=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서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다음달 초에 있을 미국의 중간선거에 대비한 전략적 측면과 동북아에서의 실리추구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11월초의 선거를 앞두고 최근 인기가 급락하는 클린턴 행정부에게 미국과 북한의 협상 카드는 놓칠 수 없는 호재입니다.미국이 바라는 대로 타결되면 인기를 한꺼번에 만회할 뿐아니라 재집권할 수 있는 계기도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미국은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무대에서 다소 소외됐다고 생각했었습니다.그래서 최근에는 카터 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남북한 정상 회담을 주선하며 남북대화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이번에도 마찬가지 전략이 깔려 있습니다.최근 한국 주재 미상공회의소가 북한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사실과 나진·선봉 지역에 관심을 표명한 것 등은 이미 미국이 북한에 진출,실리를 추구하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협상은 미국의 선거 전략과 동북아에서의 실리추구 정책이 북한의 경제적 이해와 맞물려 타결된 것입니다.미국은 한반도 주변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 다음 자국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려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우리 정부는 이점을 분명히 알고 남북관계를 이끌어야 합니다. ○미정책 변화 엿보여 ▲신교수=합의내용의 실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가 어찌되느냐하는 것입니다.남북관계의 진전이나 대화의 재개없이 한반도비핵화는 달성되기 어렵고 따라서 경수로 지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로서는 너무 조급하게 서둘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남북관계의 진전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남북대화에 있어 우리 정부가 관심을 갖고 추진해야 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첫째는 핵통제위의 개최로 비핵화선언을 이행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좀더 진전된다면 남북한사이에 군비통제에 관한 대화가 뒤따를 수 있으므로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북한도 군비통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서고 있기에 군비축소가 남북한의 공통이해 사항이 될 수 있습니다.둘째로는 경제협력과 관련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한국 중심으로 경수로지원이 이루어진다면 그것과 맞물려 경협을 추진해야 합니다.경수로 지원에 미국 일본이 참여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한국이 중심이 될 것이므로 그것을 계기로 북한을 점진적으로 개방시키고 남한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경수로 지원을 남북한관계 전반과 링키지(연계)시켜야 합니다.돈만 주고 이번 미국과 북한의 협상과정처럼 아무 것도 역할을 못해서는 안됩니다.미국 일본과 긴밀한 협력아래 남북한간 정치적·군사적 협력관계만 이끌어 낸다면 10억∼20억달러를 지원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아닐 겁니다. 군사분야와 경제분야등 두 부분의 남북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세밀한 전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교수=북한은 NPT에 복귀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미국과 협상을 매듭지어 장기적으로는 수교의 길을 닦았으며 나아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도 한발짝 다가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동안 일본과의 협상에서 남북문제가 항상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명심할것은 남북사이의 불신과 감정의 대립은 오랫동안 지속돼 왔으므로 당장 남북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기업과 북한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나진·선봉 지역에 투자를 하는 등 남북 경협을 꾸준히 지속한다면 언젠가 남북간 군비 축소나 휴전협정 문제도 새롭게 논의될 것으로 봅니다. 이를 위해 경수로 지원 등 남과 ▦북이 핵 문제를 논의할 때 경협과 신뢰회복 등을 연계해 거론해야 합니다.문제는 정부가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고 정책적으로 얼마만큼 조율했느냐 하는 것입니다.그런 측면에서 부정적인 견해가 많습니다. 앞으로 경수로 지원을 비롯해 민간 기업인의 대북 접촉에 정부는 일사불란한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기업과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기업들이 각자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남북 경협은 부작용만 드러낼 것입니다. 대북정책에서 정부는 신중한 자세를 지녀야 하며 대미 관계에서도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사실 새정부 들어 외교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습니다.미국이나 중국·일본 등은 다양한 제스처를 보이면서도 대북한 정책은 항상 일관성있게 추진했습니다.반면 우리는 단선적인 입장만 보이다 미국의 외교 전략에 휘말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미리 정책방향을 정한 뒤 형식적인 검증 과정만 거칠 게 아니라 전문가의 의견도 듣고 국민의 합의점을 도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합의 도출해야 ▲신교수=북한핵문제가 제기된 뒤 이제까지 한국 정부의 태도는 수동적이고 일관성이 없었다는데 비판받아 마땅합니다.그동안 우리의 생각이 반영되도록 얼마나 노력했고 미국과의 공조체제를 얼마나 유지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우리의 북한 및 외교정책이 신축성이 없었다는 점도 반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북한핵협상 타결은 우리 정부에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이제는 미국을 통해 북한핵과 관련된 우리의 생각을 북한에 전달하는 자세를 탈피해야 합니다.북한과 직접 협상하겠다는 전략이 필요합니다.지금부터는 북한이 변할 것이 틀림없기에 이러한 직접 협상전략이 주효하리라 확신합니다.한반도 전체의 상황이 탈냉전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남북관게 개선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정부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외교안보팀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화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한반도에서 교차승인이 이루어지고 탈냉전이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우리 외교의 틀도 과감하게 냉전논리를 벗어던져야 합니다.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과제입니다.이제까지는 냉전구조아래서 한미간 동맹체제가 유지되어 왔습니다.우리가 냉전구조에서 안주한다면 변화하는 주변에 적응하지 못해 우리의 행동반경은 좁아들 수 밖에 었습니다.평화협정,주한미군문제등 우리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난제가 한두개가 아닙니다.이번에 북한핵과 관련한 미국과 북한의 합의는 우리로 볼때 타결이 아니라 시작인 셈입니다.
  • 독 콜총리 재집권/총선서 야에 신승

    【베를린 연합】 통독후 두번째로 16일 실시된 전독총선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집권 기민당(CDU)연정이 미세한 차이로 승리,현 중도보수 연정세력이 재집권하게 됐다. 통독 직후인 90년12월 총선에 이은 이번 연방하원 선거 결과 콜총리의 기민당과 자매정당인 기사당(CSU)은 동·서독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졌음에도 불구,41.5%를 얻어 1위 자리를 유지했다. 이번 선거에서 연방 정치무대 잔류여부가 관심을 끌었던 민사당(옛 동독공산당)은 총유효투표수의 5%를 넘지 못했으나 동베를린지역 4개 선거구에서 승리,비례대표제 규정에 따라 30석을 차지하게 됐다.최종집계 결과 기민·기사당은 41.5%로 2백94석을,현연정 참여정당인 자민당(FDP)은 6.9%로 47석을 각각 얻어 현집권 연정세력이 과반을 가까스로 넘었다. 루돌프 샤핑당수를 총리후보로 내세웠던 사민당(SPD)은 동·서독지역에서 고른 분포로 지지율이 상승했으나 36.4% 득표에 그쳐 2백52석을 차지했다.녹색당/동맹 90은 7.3%로 49석을 얻었다. 기민당은 그러나 승리에도 불구,지난90년 총선보다 동독지역에서 지지율이 3.6%가 떨어지는 등 전체적으로 2.3%를 잃어 49년 이래 최악의 선거결과를 기록했다. 콜총리는 이날 승리가 확정된 후 『우리는 제2차 전독총선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뒀다』고 말했다.그는 『이번 선거 득표율은 현 연정이 계속 집권할 수 있는 분명한 과반선』이라고 강조,현재의 기민/기사당·자민당 연정체제를 고수할 것임을 강조했다.
  • “힘겨운 승리” 콜총리에 부담

    ◎독 기민·기사·자민연정 재집권 했지만…/사민 약진으로 “사실상 패배” 분석/“통독4년간 경제치적엔 지지” 의미 16일 실시된 독일총선에서의 승리로 헬무트 콜총리가 90년 통독이후 4년간 펼쳐온 정책이 국민의 신임을 받게됐다.이는 비록 극히 미세한 차이로 이기긴 했지만 통일이후 변화보다는 안정을,경제적 분배보다는 성장을 추구해온 콜총리의 정책이 독일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이후 실업률증가·물가상승 등 통일후유증이 심각해지면서 올초까지만 해도 콜총리가 이끄는 기민·자민당 연정의 재집권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특히 지난해에는 경제가 1% 이상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고 올 1월달에는 실업자수가 전후 최고치인 4백만명으로 정점에 달하는 등 경제상황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94년 들어 옛 동독 지역경제를 중심으로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해 9월에는 실업자수가 3백40만명으로 감소하고 경제성장률도 2%대로 회복되는 등 경제여건이 호전되면서 콜총리는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콜총리의 재집권에는 야당인 사민당의 타협할 줄 모르는 우직한(?)선거전략도 한몫을 했다.선거기간내내 「변화와 사회적 정의」를 강조해온 사민당의 정책노선에 불안을 느낀 유권자들이 반대진영인 콜총리의 집권연정에 투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현 연정참여정당인 자민당이 하원자동진출 득표하한선인 5%를 무난히 넘은 6.9%로 47석을 얻은 것은 콜정권의 붕괴를 우려한 유권자들이 정당별투표에서 연정의 일원인 자민당을 밀어줬기 때문이다. 콜총리의 재선에는 야당인 사민당의 인물난도 일조했다.「미완의 스타」로 이번 총선에서 총리후보로 선전한 루돌프 샤핑총재가 있으나 브란트 슈미트 등 스타들을 배출했던 사민당이 아직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결론적으로 지난 82년 총리에 취임한 콜이 총선에서 연속 4번째 승리한 요인은 집권연정의 막판 인기회복,야당의 경직된 선거전략및 인물난 등으로 압축될 수있다. 그러나 콜정권은 가까스로 과반의석을 확보,앞으로 정국운영에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됐다.과반수를 훨씬 넘는 압도적 우세를 차지했던 90년 총선에 비해 과반수를 겨우 넘는데 그친 이번 총선 결과는 재집권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독일 정치분석가들은 지적하고 있다.이는 기민당으로선 1949년 총선이래 최악의 선거결과이기도 하다. 선거기간중 독일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꼭 재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콜총리는 마지막 집권이 될 이번 승리로 통일의 뒷마무리와 유럽통합정책,독일의 국제적 역할 확대 등을 위해 다시 한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현재도 사민당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어 정책을 집행할 때 야당과의 타협이 불가피한 콜총리로서는 하원의석수마저 크게 줄어들어 정책추진에 큰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콜은 누구/69년 주지사로 입문… 통독의 주역 헬무트 콜 독일총리(64)는 이번 총선 승리로 자신이 주도한 독일통일 업적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얻어냄으로써 유럽사에 있어 또 한명의 위대한 정치가로서 발자국을 남기게 됐다. 지난 69년 라인란트­팔츠주의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시작한 정치무대의 관록은 76년 연방의회의원으로 올라선 뒤 82년 수상직을 맡아 독일통일을 이끌어냄으로써 총리 4선이란 정점을 이뤄낸 것이다. 강직하지만 어눌한 표정을 지녔다 해서 그를 소재로한 정치유머가 유행하기도 했으나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지난 73년 기민당을 주도한 이래 『좋아하지는 않아도 유권자들은 그를 믿는다』는 말이 입증된 셈이다. 1백94㎝의 키에 1백12㎏의 거구인 그는 몸집에 걸맞지 않게도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유럽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으며 지난 93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는가하면 러시아·미국·프랑스 등 이웃나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는데 앞장서는 등 국제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는 냉전에서 화해시대까지 권력을 지킴으로써 아데나워가 갖고 있던 전후 독일의 최장수 총리 기록을 경신하게 됐다.
  • 콜총리 재집권 할듯/독 어제 총선/여론조사서 연정 우세

    【본 AP 연합】 헬무트 콜 독일총리가 금세기 최장기 집권을 기록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결정할 독일 하원선거가 16일 상오 8시(한국시간 하오 4시) 시작됐다. 선거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3차연임으로 12년째 집권하고 있는 콜 총리의 기민당(CDU) 등 현재의 연정참여 정당들이 재집권에 필요한 충분한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다시 4년 임기가 보장되는 콜 총리는 지난 49년부터 63년까지 집권한 콘라트 아데나워 전총리의 기록을 넘어서는 금세기 최장집권 총리가 된다. 이번 선거전에서는 ▲세금인상 ▲독일군 해외파병 ▲아우토반(독일고속도로)에서의 속도제한 ▲외국인들의 이중국적 등이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총 6백56명의 의원을 뽑는 이번 선거의 총 유권자수는 6천20만명이며 투표는 하오 6시(한국시간 17일 상오 2시)에 완료된다.
  • 콜 정권의 통일업적 평가한다/독일 총선 이틀 앞으로

    ◎기민당 지지 상승세… 사민당 맥못춰/재집권 확실시… 연정 대개편 예상도 앞으로 4년간 독일의 진로를 결정할 전체독일 총선이 16일 실시된다.통일이후 두번째로 통일 4년간의 치적에 대한 평가 성격을 띠고 있는 이번 총선의 관심사는 ▲헬무트 콜 현총리의 재집권 여부 ▲최근 실시된 주선거에서 대약진을 보인 민사당(구동독 공산당)이 총선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냐등에 모아지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많은 여론조사 결과는 별 이변이 없는한 콜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콜총리와 기민당은 지난 82년 선거이래 연속 12년동안 기사당과 자민당과 함께 중도우파 정부를 이끌어왔다. 루돌프 샤핑당수가 이끄는 사민당은 올초까지만 해도 기민당을 앞지르는등 강력한 지지율을 보이면서 수권정당 태세를 갖춰 왔으나 6월 유럽의회선거를 전후해 지지율이 급전직하했다.관측통들은 독일경제가 최악의 침체기를 벗어나 회복세를 보인데다 각종 정책이나 당이미지 홍보면에서 사민당지도부가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한점을 지지율 역전의 배경으로 분석했다. 이달초 실시된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기민당은 기사당과 함께 42%를 얻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위인 사민당은 34.9%,녹색당/동맹 90은 8.1%,자민당은 8%를 얻을 것으로 예측됐다.또 민사당은 3.9%,극우 공화당은 2%에 머물러 하원진출을 위한 득표하한선인 5%를 넘지 못할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어느 조사에서도 절대과반수를 차지할 정당이 없어 결국 차기정권도 연립정부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변수는 자민당과 민사당이다.자민당은 최근 실시된 주의회 선거에서 연이어 5% 득표에 실패,지방정치무대에서 모두 밀려났다.총선에서도 이같은 결과가 나타나면 기민당으로선 기존의 연정 파트너를 잃게 되는 결과도 전적으로 배제할수 없다.민사당도 전체독일에서의 예상득표율이 5%를 넘지 못하고 있지만 동독지역에서 3개 선거구를 장악할 경우 자동배정되는 비례대표 의석을 통해 중앙정치무대에서 상당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변수들 때문에 대연정의 탄생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독일의 국내외정책상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두 정당은 국내현안과 관련,세금인상문제를 둘러싸고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정책홍보전을 전개하고 있다.대외정책면에서도 사민당이 대외군사작전참여에 약간 소극적인 면을 제외하면 대나토정책,대유럽연합(EU)정책,대미정책면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 한편 총선과 같은날 실시되는 자르란트,메클렌부르크­포어폼머른,튀링겐등 3개주 주의회선거 결과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사민당이 이 3개주선거에서도 선전,주정부 장악을 확대하게 되면 기민당의 콜총리는 재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정책집행에 상당한 곤란을 겪게될 전망이다.
  • 우파성향의 “차기총리감”/블레어 영노동당 새당수(뉴스인물)

    ◎변호사로 76년 정계 입문… 유럽통합 적극적/18년집권 보수당에 맞설 “야당의 희망” 평가 21일 영국 제1야당인 노동당의 새 당수로 선출된 토니 블레어(41)는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노동당의 희망으로 간주되는 인물.보수당의 인기 급락과 노동당에 대한 지지 급상승이란 현재의 영국 정치상황 속에 노동당의 새 당수에 선출됨으로써 차기총리로 유력시되고 있다. 최근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은 집권보수당에 비해 무려 25%포인트나 높은 전체 투표자의 50%의 지지를 얻어 이같은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경우 오는 97년 총선에서 18년만에 재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블레어당수는 지난 5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타계한 스미스 전당수의 선례를 따라 현대화주의를 제창하고 있으며 좌파 성향의 노동당내에서 우파적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최근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 유럽통합에 대해서도 보수당의 통합반대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큰 실책』이라고 비판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에게 가해진 비난은 너무 온순·덤덤하며 지나치게 말쑥하고 지루하며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정도.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립학교에서 블레어를 가르쳤던 당시 스승은 「매우 영특하지만 반골기질이 있는 학생」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53년 5월 에딘버러에서 출생한 블레어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뒤 75년 런던의 한 법률회사에 들어가 법률가로서의 수업을 시작했다.76년 노동당에 가입,83년 영국 북동부 서지필드에서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돼 5년뒤에는 고용 대변인으로 노동당 예비내각(섀도우 캐비닛)에 들어갔다.92년 고 스미스당수에 의해 예비내각의 내무장관에 임명됐으며 지금도 여전히 입심좋은 변호사로,TV 화면발 잘 받는 정객으로 명성이 높다. 역시 변호사인 부인 체리 여사와의 사이에 3자녀를 두고 있다.
  • 아라파트,예루살렘 분할요구/“동쪽은 팔레스타인국 수도로 달라”

    ◎아라파트 곧 가자 영구정착 【가자·런던·예루살렘 AFP AP 로이터 연합】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3일 이스라엘의 우파 야당이 재집권하더라도 평화의 여정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아라파트의장은 이에앞서 2일 영국 BBC방송과의 회견에선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수도로 분할하는 방안을 지지하며 이스라엘과 체결한 자치이행 협정의 장래에 대해서 낙관한다고 밝혔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처리 문제에 관한 BBC의 질문에 도시국가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2개 국가의 1개 수도」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에,나머지는 이스라엘에 할당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라파트의장은 한편 이스라엘의 우익신문 마아리브와의 회견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총리를 진실로 존경하며 일이 쉽지는 않으나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일은 평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아라파트의장은 이밖에도 이날 가자지구 최초의 감귤 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새 경제체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공장으로 가는 동안 10㎞의 연도에 나와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날 예루살렘에서는 우파 이스라엘인들의 대규모의 반아라파트 시위가 벌어졌다.우파 이스라엘 청년 수천명은 이날 예루살렘에서 약 10만명이 모인 반아라파트집회가 끝난 뒤 경찰의 제지를 뚫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 【가자지구 로이터 AFP 연합】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팔레스타인 자치행정 책임을 담당하기 위해 조만간 가자지구에 영구 정착할 것이라고 그의 보좌관들이 4일 밝혔다. PLO의 자치 협상 담당자인 하산 아스푸르씨는 『아라파트가 이곳에 거주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 있는 가자지구가 그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해 당초 예상됐던 예리코시가 아닌 가자지구가 그의 정착지가 될 것임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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