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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민 승리 동북아안정 위협”/홍콩 언론

    ◎한·중과 영유권 마찰 불가피 【홍콩 연합】 홍콩언론들은 21일 일본 자민당의 중의원 선거 승리와 관련,비록 연정이기는 하지만 자민당의 재집권은 정치대국화 노선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동북아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신문들은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총리가 독도와 조어도 영유권,그리고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허용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점을 중시,앞으로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마찰의 먹구름이 끼게 됐다고 전망했다. 홍콩의 최대 중국어신문인 명보는 이날 사설에서 자민당은 시민들의 경제및 개혁부진에 대한 실망감을 위로하기 위해 정치대국화의 길을 계속 추구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공격적 외교를 표방,인접국들과의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봤다.
  • 국수주의,일이 갈길 아니다(사설)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일본정치제도에 일대개혁이 단행된 이후 처음 실시된 20일 총선결과를 두고 저마다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집권 자민당이 총선전보다 의석수를 28석이나 늘렸다는 점에서 자민당의 승리라고 말할수도 있고 선거제도를 바꿔가면서까지 안정적 정치기반을 구축해보려던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250)을 확보치 못했다는 관점에서 일본정치의 시련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자민당 주도의 연정구성에는 어려움이 없게됐고 아울러 하시모토(교본) 총리의 재집권도 확실시된다.그런 점에서 일본정치권력의 기본 골격이나 성격은 선거제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큰변화가 없었다고 볼수있다. 결국 일본국민은 특별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편한 길을 택했고 그런 분위기가 자민당에 재집권의 기회를 안겨줬다.따라서 이웃나라들도 안면이 있는 친구와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돼 우선은 대하기가 편하게 됐다.따라서 북한에 대한 정책조정이나 한·일간 기본관계에도 큰 변화는 없을 것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에도 여러차례 지적해왔듯이 자민당이 집권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국민일부의 우경화 내지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에까지 영합하려는 성향을 보여온데 대해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우선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야스쿠니 신사참배의 공식화문제라든지 독도의 영유권 주장같은 것들을 자민당 중심의 새정권이 어떻게 처리해 나갈것인지 주목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은 동북아의 안정적 정세유지와 국제적 평화구도가 오늘의 일본을 만들어준 기초환경이었음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자민당은 일본내의 일부 국수주의적 요인들을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국제적 협조체제를 유지해 나갈 현실적 필요가 있다.그것이 일본의 번영은 물론 자민당의 정권기반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길이다.
  • 재선 옐친의 과제는/안택원(특별기고)

    ◎민생해결·정치안정 힘써야/공산당 연립정부 구성은 불가능 할듯 러시아대선에서 옐친 대통령이 승리한 것은 다시금 배회하기 시작한 공산주의의 망령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국내외 개혁지지세력을 안도하게 한다.그러나 옐친의 승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옐친의 승리라기보다는 백과 적 사이에서 대안 없는 유권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실제로 레베드를 포함한 중도 민족·자유주의세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승리는 분명히 공산당 주가노프후보의 몫이었을 것이다.미국등 서방의 강력한 지원 역시 옐친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앞으로 옐친대통령은 험난한 파고를 헤쳐가지 않으면 안된다.주가노프후보는 4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해 지난 연말의 총선이후 공산당 지지도가 계속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많은 국민이 옐친 개혁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 반개혁,과거회귀로 돌아섬으로써 러시아에는 극단적 양극화현상이 재현되고 있다.급격한 시장화의 기득권자와 젊은 비즈니스맨이 몰려 있는 대도시와 보수적인 농촌,개방에호의적인 20∼30대 젊은 층과 분노에 찬 노인층 연금생활자,산업화된 북부와 고립된 남부 농촌,대중의 절반가량이 그날그날의 연명이 어려운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는 속에서 벤츠에 몸을 묻은 채 서방적 풍요를 즐기는 소수의 상층 졸부등등.이런 양극화 속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민생고의 해결이다. 시장경제의 이면에는 정치·관료·군·기업·범죄단체를 한데 묶는 거대한 마피아조직이 있다.이들 마피아는 4만여개의 기업과 4백여개의 은행,증권시장을 포함한 공식·비공식경제의 거의 전부문을 장악한 채 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부패와 뇌물이 사회전반에 먹이사슬을 이루고 정당한 경쟁보다는 연고와 사술·투기등이 사회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은행은 인플레와 정정불안 속에서 투자를 기피하고,저축자금이나 해외차관은 상업·투기자금으로 이용되고 있다.국가재정에 맞먹는 자금이 국외로 빼돌려지고 있으며,수출품중 원자재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지식산업이 공동화되고 첨단인력이 방치되면서 고급인력의 국외탈주가 이어지고,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다. 또 다른 위협은 증가하는 범죄다.통계에 의하면 91년이래 10만명이상이 강력범죄로 희생되었다.이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방송관계자·기업인·은행인이 포함돼 있다. 민족주의와 공산당의 회귀움직임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싹튼 것이다.이들은 개혁과 민주주의를 「반러시아적」이고 「매판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그들의 주장은 건전한 슬라브주의적 애국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반동적 국수주의를 띠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옐친의 당면과제는 민생의 해결과 함께 좌우상하를 어떻게 조화시켜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이다.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레베드의 민족주의세력의 지원에 의해 재집권에 성공한 옐친으로서는 이들 세력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과제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옐친의 건강 역시 심상치 않아 레베드의 권력분점 목소리가 커가고 있다. 주가노프는 옐친의 제의가 있을 경우 신정부구성에 공산당의 참여를 고려할 것이라 제안했으나 연립정부의 구성은 개혁의 향방을 잡고 서방의 의구심을 잠재우는 문제와 관련이 있어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번 투표에서 나타난 사회적 분위기나 세력안배의 필요성,양극화된 사회적 통합 등을 위해 장기적으로는 연립내각의 구성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개혁을 둘러싼 권력싸움은 의사당이나 거리에서 당분간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옐친의 선거슬로건이 「자유」 「질서」 「인간에 대한 배려」였음에 비추어볼 때 앞으로 개혁의 골격은 지속되겠지만 국내외 정책노선은 보다 민족주의적이고 자기방어적이 될 것이다. 그동안의 개혁이 그 외양과 내용이 다름으로써 사회적 분극화와 민생고를 가중시켰음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시장경제가 실질화될 수 있도록 경제의 하부구조·유통망·정보체계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부패가 아닌 경쟁·창의성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사회 전부문을 에워싸고 있는 범죄망을 소탕하지 않으면 안된다.질서와 법치의 확보는 개혁노력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여전히 어려움은 있을 것이나 개혁이 「루비콘강」을 건너 기득권세력이 과반을 넘어선 것이 판가름난 이상 옐친개혁의 앞날은 밝다고 본다.
  • 옐친 대통령 재집권후 한반도 정책 어찌될까

    ◎한국과는 경협중심 동반자관계 지속할듯/대북지원재개 등 유대복원 추진 가능성도 러시아대선 개표결과 보리스 옐친 현대통령의 재집권이 확정됐으나 북한이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만 하루가 지난 5일 하오까지도 축전 타전도 축하메시지 발표도 없었다.내심 주가노프 공산당후보의 승리를 성원해온 북한당국의 상실감을 나타낸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반면 우리측은 한숨 돌린 표정이 역력하다.한 당국자는 옐친의 승리가 굳어지자 『큰 짐을 벗은 기분이다』라며 안도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5일 옐친의 승리 이후 한반도의 기상도와 관련,『폭우가 쏟아질 가능성은 소멸했으나 하늘이 완전히 갠 것은 아니다』라고 비유했다.옐친의 재집권으로 남북관계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다수 정부관계자는 옐친대통령의 재선으로 향후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에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특히 한·러관계도 경제를 중심으로 한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지속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시장경제확대 등 그의 개혁노선이 러시아인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선거과정에서 구소련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부 러시아인이 주가노프후보에게 상당한 지지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옐친도 이들의 이반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해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정책을 대거 수용했다. 한마디로 향후 그의 개혁노선이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띨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러시아와 북한문제에 정통한 전인영 교수(서울대)는 『러시아는 한·소수교 이후 북한을 무시하는 듯한 정책을 앞으로는 지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소규모로나마 지원을 재개하는등 러·중·북을 잇는 「북방 3각관계」가 부분적으로 복구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러시아는 이미 지난 4월 이그나텐코 부총리를 북한에 보내 「조·러 무역경제 및 과학기술협력」에 합의하는 등 유대관계 복원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우리의 북방외교가 좀더 정교하게 펼쳐져야 할 당위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구본영 기자〉
  • 옐친 재선/1억 유권자 「개혁·안정」 선택

    ◎개혁 부작용 보완… 수정 노선 채택할듯/옐친 건강·연정·민족주의 강세 변수로 3일의 러시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의 가장 큰 의미는 러시아 1억8백만 유권자들이 그들의 미래가 공산주의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이번 선거로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개혁과 안정」이라는 옐친의 프로그램이 지속되게 됐으며 공산주의가 부활,냉전체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국제적인 의혹도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이번 선거가 옐친 개인의 승리는 아니었다.지난 5년간의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국민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다.수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부패의 고리에 놀아났고 국민들은 범죄와 부패의 소굴속에서 허리띠를 죄어갔다.그런데도 국민들이 옐친을 선택한 것은 그가 러시아의 미래,러시아의 희망에 대한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유권자들에게는 억압정치,공포정치로 상징되는 옛 공산주의가 뇌리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미래를 맡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옐친후보는 캠페인 기간중 자신의 개혁추진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라며 솔직이 시인했다.따라서 집권2기 옐친정부는 개혁프로그램을 지속시켜나가면서도 그 노선은 다소 수정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민족주의 색채가 가미된 정책도 적지않게 나올 것으로 분석된다.보수·민족주의화되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은 옐친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옐친은 캠페인 내내 「국가안보와 국익의 극대화」를 천명해왔으며 이는 40%에 달하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달래는데도 유용할 것이다.이같은 변화는 나토확장,독립국가연합(CIS)정책 등을 둘러싸고 서방과의 마찰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더욱이 민족주의자로 대변되는 레베드의 가세로 이같은 물결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레베드의 등장은 사회내부적으로 범죄의 퇴치,부정부패 추방운동을 강화,헌법질서를 잡으며 옐친의 집권초반을 도울 것이다.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민영화,토지의 사유화,조세체제의 확립등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시에 국가관리강화라는 계획경제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이같은 정책들은 새로 구성될 내각의 면면에서 드러날 것이다.이와 관련,옐친진영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이해가 같으면 내각에 포용하겠다』면서 공산당 일부 간부의 등용을 시사하고 있다.공산주의자의 입각은 다수지지를 받고 있는 공산당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민족주의화되고 있는 국내분위기를 감안한 전략적 선택으로 파악된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옐친의 건강상태다.그는 결선투표 직전 다시 한번 건강상의 문제점을 드러냈다.레베드의 부통령직위요구는 이와 관련해 여러가지 시사하는 점이 많다.많은 분석가들은 옐친후보가 직무수행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상의 문제가 다시 드러날 경우 새 권력투쟁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한다.권력투쟁 가능성은 어렵게 쌓아올린 러시아 민주주의 미래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불안요인이다.〈모스크바=유민 특파원〉 ◎옐친이 걸어온 길/87년 정치국 축출·91년 보수파 쿠데타…/고비마다 투혼·재기 “오뚝이”/음주벽·심장발작·「체첸 희생」 등 흠집도 옐친 대통령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뚜렷한 족적은 한마디로 불같은 투지이다.조국 러시아와 자신의 정치생명이 위기에 처한 고비마다 그는 초인같은 의지로 이를 돌파해 나갔다. 그의 최초의 정치적 위기는 모스크바당 제1서기로 있던 때.당시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그의 눈에는 적당주의자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사사건건 고르비와 맞서다 마침내 87년 그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어서 정치국에서도 축출됐다.그때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는 것 같이 보였다.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일대 도박에 나섰다.소연방이 종말을 향해가던 91년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출마,당당히 당선된 것이다.그해 8월 연방와해에 두려움을 느낀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또한번 불같은 투사의 기질을 발휘했다.국방·내무·KGB 등 모든 권력부서들이 쿠데타세력 밑에 모일때 그는 단신으로 탱크위에 올라가 쿠데타 분쇄를 외쳤다.이 감동적인 장면은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히 다져주었다.그해말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그는 명실상부한 대러시아의 대통령이 됐다. 「권력의 아편」에중독돼가는 징조인가.그후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너무 쉽게 무력에 의존하려하고 음주벽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3만여명의 희생자를 낸 체첸전쟁은 민주지도자로서의 그의 명성에 결정적인 흠집을 냈다.건강이상설이 밑도끝도 없이 나돌기 시작했다.지난해에는 두차례의 심장발작을 겪으며 모두 4개월의 휴가를 가야했다.그의 병세가 정확히 어떤지는 누구도 발설치 않았다.이런 가운데 그는 또다시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했다.5개월여에 걸친 대통령선거운동 유세를 거뜬히 치러낸 것이다. 나이 65세.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다시 한번 건강이상설이 흘러나왔다.공개석상에서 사라진 그는 투표도 모스크바 교외 별장지역에서 해야했다.세계는 지금 그가 과연 2000년까지 임기를 제대로 마칠수 있을는 지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나이와 건강앞에 그가 다시 한번 마지막 투혼을 발휘할수 있을는지 주목되고 있다.〈이기동 기자〉 ◎레베드 역할 “눈길”/킹 메이커 대가 안보·군사 등 장악/독자정책 발표… 「포스트 옐친」 암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보이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과연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있는 가에 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레베드(46) 대통령 안보보좌관 겸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주목을 받고있다. 그는 옐친 진영에 합류할 때 옐친으로부터 차기대통령 후보 지명을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전직 장성출신인 그는 지난 6월의 대선 1차투표때 15%라는 적지않은 득표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있는 유리한 위치에서 옐친지지를 전격 선언하면서 그 대가로 안보,군사,치안,정보분야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레베드는 최근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방위산업및 농업에서의 개혁정책을 재정립하는 것등을 골자로하는 22페이지짜리 정책프로그램을 발표하기도 했다.그는 또한 그가 필요로 하는 권한을 옐친이 자신에게 주기로 동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옐친이 재임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오랜 지병인 심장병 등으로 사망할 경우 레베드는 체르노미르딘 총리와 치열한 파워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러시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직이 공석이 될 경우 총리가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되며 3개월 이내에 새로운 선거를 치르도록 되어있다.서방의 분석가들은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통령후보로 주목할 인물이 레베드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러시아의 민주주의 및 개혁지지자들이 레베드를 불신하는 측면이 많아 그의 경쟁상대인 체르노미르딘이 대선후보로 부상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유상덕 기자〉 ◆미·일 등 해외 반응 ◎역사 전환에 또 하나의 공적­미·일/21세기 「전략적 동반자」 희망­중국 ▷미국◁ 보름전 1차선거 때와 달리 옐친 대통령의 재선 뉴스를 의외일 정도로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모든 방송들이 옐친의 당선이 확정적인 순간에도 일반국내 뉴스에 이어 4∼5번째 순서로 별 논평없이 보도하는데 그쳤다. 앞서 클린턴 대통령은 개표 초기에 이번 러시아 대통령선거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옐친의 초기 승세가 알려지자 보브 돌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옐친 대통령이 또다시 러시아의 민주주의 전환에 역사적 공을 세웠다』고 치켜세웠 듯이 미국내에선 클린턴 대통령이나 야당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옐친의 재선성공에 안도하는 모습.〈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일본◁ 일본정부는 4일 러시아 대선에서 옐친 대통령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나자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분수령을 이룬 기념비적 사건』이라며 환영을 표하면서도 앞으로 러시아 개혁의 성패 여부는 옐친 대통령의 건강에 달려 있다며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를 보였다.〈도쿄=강석진 특파원〉 ▷중국◁ 중국은 러시아 대선과 관련,『러시아 국민들의 선택을 존중할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의 대변인은 4일 정례 기자설명회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21세기의 전략적 동반과 관계의 발전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히면서 두 나라는 상대방을 존중한다고 덧붙였다. 대변인은 또 러시아는 중국의 최대 인접국이라면서 중국은 러시아 대선결과를 줄곧 관심을 갖고 주시해 왔다고 말했다. ◎러 공산당의 장래/40% 지분… 건실한 견제세력 변신/강경파 입지 약화… 정책대안 찾기 이번 대선에서의 패배로 공산당은 내부 체제정비는 물론 노선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4일 성명을 통해 『선거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한편으로 『옐친은 40%라는 공산당 지지유권자들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노력하라』고 촉구했다.동시에 선거후 긴장이 야기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당원들에게도 『거리시위에 나서지 말 것』도 당부했다.공산당의 이같은 대응은 변신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분석가들은 이번 패배로 공산당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며 대신 건실한 견제세력으로의 변신을 시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실제로 러시아의 국회인 두마의 제1당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공산당이다.또 선거에는 졌지만 국민가운데 2천8백만명이 공산당에 표를 던졌다.현실정치에서는 앞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정비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우선 강경파의 목소리가 다소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그렇지만 이들도 「선동과 대중집회」라는 그들 특유의 방식을 벗고 정책적 대안제시 혹은 과학화된 대중에의 접근방식으로의 변신이 예상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번 대선으로 공산당이 현대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모스크바=유민 특파원〉
  • 김 대통령과 민주화투쟁 경험 공유/부토 파키스탄 총리 방한 안팎

    ◎친북 외교노선 변화계기 기대/우리기업 진출에도 유리할듯 모트라마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의 방한은 두가지 점에서 뜻깊다.첫째는 김영삼 대통령과 부토 총리가 아시아를 대표할만한 「민주화 지도자」라는 것이다.두번째는 정치적으로 북한에 친밀감을 보여왔던 부토총리의 태도변화가 주목된다. 부토총리는 지난 77년 지아 울 하크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권한 알리 부토 총리의 딸이다.쿠데타후 파키스탄 민주화를 선도,아시아지역의 민주지도자로서 명망을 높여왔다.김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문민정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지난 88년 12월에서 90년8월까지 1차 집권후 93년10월 총리에 재선됐다.김대통령과 부토총리의 서울 정상회담은 민주화 투쟁경험을 공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부토총리는 재집권한지 두달만인 93년 12월 북한을 방문했다.북한에 친밀감을 보이던 부토총리가 이번에 우리나라를 찾은 것은 비동맹 주도국인 파키스탄이 한반도문제에 있어 우리를 적극 지지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된다. 우리로서는 김대통령이 지난 2월 인도를방문한데 이어 부토총리가 방한함으로써 서남아외교의 기본틀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인구 1억2천의 파키스탄은 인도와 함께 「새롭게 부상하는 거대시장」이다.저렴하고 숙력된 노동력을 갖고 있어 우리의 투자진출에도 유리하다.〈이목희 기자〉
  • 러시아 대선이 주는 교훈/임춘웅 논설위원(서울논단)

    지난 16일 실시된 러시아대통령선거는 이스라엘 총리직접선거와 더불어 올해의 「가장 중요한 선거」로 주목을 받았다.이스라엘 선거가 중동평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면 이번 러시아선거는 「러시아의 실험」이 과연 성공할수 있을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대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실험」은 세계질서의 재편,세계의 평화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러시아의 실험」이란 공산주의로의 회귀없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러시아가 경제체제와 정치·사회체제에 변화를 계속해서 이끌어 낼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러시아선거는 러시아의 공산경제체제는 무너졌지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후보가 얻은 32%의 득표는 1억5천만 러시아인의 3분의1이 아직도 공산주의로의 복귀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주가노프후보에게 표를 몰아준지역은 대체로 기존산업이 무너지고 농업이 황폐화돼 실업률이 높고 임금체불이 누적돼 일상생활이 어려운 지역들이었다.반면에 옐친후보는 개혁과 개방의열매를 보기 시작한 대도시지역에서 선전했다.따라서 러시아의 투표성향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만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꼭히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그들이 직면한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하고 지지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러시아인들은 이념의 혼재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다시 말하면 「러시아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이 최고지도자를 직접 뽑는 이번 선거가 민주적으로 공정하게 치러질수 있을 것인가도 세계의 관심거리였다.그러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선거과정,투·개표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는 성공적인 선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모든 후보를 대신한 감시요원들이 큰 불편없이 감시활동을 할수 있었으며 54개국에서 온 1천여 참관인들도 순조롭게 투·개표과정을 지켜봤다. 7월초에 실시될 2차결선 투표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아무도 단정할수 없다.그러나 1차에서 15%의 득표로 파란을 일으킨 민족주의자 알렉산드로 레베드후보와 연합에 성공한 보리스 옐친 현대통령의 재집권이 유력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누가 되든 러시아의 대내외정책에는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옐친후보가 레베드의 지원을 엎고 당선이 된다면 옐친정부는 레베드의 민족주의적 기반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며 32%나 되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을 외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공산주의자 주가노프후보가 당선된다면 정책에 전면적인 수정이 가해질 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제의한 4자회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있는 러시아는 북한과 지난해 시한이 만료된 북·러 기본조약 개정문제를 현안으로 갖고있다.옐친후보가 재집권을 하게 되더라도 한동안 우리쪽에 기울었던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이 얼마간은 남북간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쪽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주가노프후보가 당선되면 북·러관계는 이데올로기적 연대감이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한국이 비록 공개적이라고는 할수 없었지만 옐친후보를 지지하는 것처럼 된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한국이 러시아의 내정문제에간여할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쪽을 편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우리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나 베트남과 수교하고 있듯이 한국의 외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가이익의 추구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번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외교의 독자성 확보문제가 다시 검토되고 한·러관계의 재정립도 모색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대선은 전체적으로 보아 긍정적이다.이번에 러시아가 실험한 민주적인 선거제도는 민주화와 자유경쟁체제를 필연적으로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이시대에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민주적 선거제도인 것이다.
  • 옐친·주가노프 서로 “승리” 장담/러시아 대선 D­1

    ◎옐친­“러 미래 선택을… 승리후 대대적 개각”/주가노프­“여론조사 왜곡… 공산당 재집권 확실” 【모스크바 외신 종합】 오는 16일 실시되는 러시아대통령 선거의 막바지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는 14일 각각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엘친 대통령은 이날 고향인 예카테린부르크에서 1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마지막 유세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며 공산당이 다시는 권좌에 복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옐친 대통령은 또 자신이 승리하면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시장개혁을 시작한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기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옐친의 라이벌인 주가노프 후보는 『이번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재집권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옐친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여론조사는 완전히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모스크바 N­TV 방송이 여론조사 공표시한을 하루 앞둔 1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옐친은 36%,주가노프는 24%의 지지를 얻어 옐친이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러시아의 「베타넬리 사회연구소」가 1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는 주가노프에 대한 지지율이 35.6%로 32.7%의 옐친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선거는 1차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이 오는 7월초에 실시되는 2차 결선투표를 실시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며 2차투표는 많은 변수가 작용할 것으로 보여 결과 예측을 어렵게 하고 있다. 힌편 러시아 선거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폭력사태는 선거 폭력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 「왜 옐친을 지지해야하나」/불 몽드리알 국제문제연소장(해외논단)

    ◎주가노프 승리땐 냉전회귀 가능/공산당 제집권 서방국가 큰 부담/「러」부채 400억불 상환도 불투명 티에리 몽브리알 프랑스 국제문제연구소(IFRI)소장은 최근 「왜 옐친을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르 피가로지에 기고했다.다음은 이 기고문 내용이다. 러시아의 대통령선거가 5주일 남았지만 뚜렷한 것은 거의 없다.단 한가지 서방국가들이 옐친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일본은 매우 외교적인 수사로 예친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다.선진7개국(G7) 정상들은 실제로 지난달 19,20일 이틀동안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자력안전회담에서 러시아가 주요 선진국들과 자리를 함께 하도록 배려했다.이렇게 과시함으로써 체첸문제에 대한 내부적인 이의나 항의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3월말 러시아에 3년동안 1백2억달러를 대출해 주기로 했다.이는 지난 95년 멕시코에 대한 긴급원조자금을 빼면 전례가 없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29일 구 소련의 4백억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 거의 전부에 대한 재분할지불을 얻어냈다.또 2020년까지 기간을 늘려 상환해도 된다는 약속도 받아냈다.러시아의 대외부채는 이미 지난 93년과 95년 두번에 걸쳐 재분할지불키로 했으며 이번에 또 다시 재분할지불에 합의한 것이다. 우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해외 불법예치금이 정확하게 4백억달러에 이른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어떤 의미로는 서방국가들이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돈을 댄다고 말할수도 있다. 옐친을 지지하는 가장큰 이유는 그대로 놔두면 공산당의 게나디 주가노프를 고무시킬수 있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물론 체코를 제외한 동유럽에는 공산당이 그대로 있거나 재집권을 하고 있다.하지만 서방의 러시아전문가들은 주가노프의 승리는 완전히 또 다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러시아 공산당 총서기는 대외용의 자제된 발언과 민족주의자들을 향한 교리라는 2중적인 발언을 해왔으며 그의 교리는 서방국가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열렬한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주의자들은 현실정치에 굴복해 옐친이텔레비전 통제를 통해 상대방을 쳐부수려한 방법을 애써 무시하는체 했다. 갖가지 방해공작에도 불구,6월16일 선거에서 주가노프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서방의 민주주의자들은 주저없이 그 선거 결과에 승복할 것이다.사실 옐친과 프리마코프 외무장관의 정책이 서방국가의 이익에 특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며칠전 러시아정부는 보스니아의 전범에 대해 스스럼없이 고도의 차별성을 부여했다.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란과의 핵협력을 강화했다. 옐친은 지난달 24일부터 2박3일동안 중국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려 했다.그러나 옐친은 강택민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을 「21세기를 향한 전략적 동반자」로 규정지었으며 러시아는 이미 일본과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한바 있다. 반면 중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장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 했다.이런 모든 사실들이 양국관계가 평온하리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두나라는 석유와 가스를 확보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어떻든 러시아의 현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점점 더 서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국내여론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러시아에 관용을 덜 베풀수록 문제는 어려워지지 않을까. 옐친이나 대부분의 그의 정적들은 어려움에 직면해 자신들이 구 소련 체제이후의 희생양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그리고 불행히도 그렇게 될 위험성은 우리의 머리를 항상 떠나지 않고 있다.때문에 새로운 낙원이 될 곳에 돈을 쏟아붇는다.여전히 혼동스러운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냉전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 측과 손잡고 구 소련이 만든 재정적인 구멍들을 계속해서 막지 않으면 안된다.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도와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정리=박정현 파리특파원〉
  • 4·11 총선과 대남 선동공세/이재근 연구위원(남풍북풍)

    한동안 뜸했던듯 싶던 북한의 대남 선전 선동공세가 총선거가 가까워올 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그러한 정치적 선동이야 이쪽의 중요한 정치일정이 있을 때마다 계속되는 버릇이지만 15대총선을 앞둔 요즘은 특히 남한당국 배제전략을 노골화하면서 그 수위가 훨씬 높은 것이다. 남한당국 배제전략은 이쪽 야당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않고 정부·여당의 움직임만을 헐뜯으며 「선거투쟁」과 「정권타도」를 선동하는데서 나타난다.노동신문 등은 「4·11총선」과 내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싸잡아 거론,『남조선에서 선진세력으로 정권이 교체돼야 한다』고 주장한다.방송들은 연일 한국내 지하당으로 날조 선전하고 있는 소위 「민민전」명의로 된 「전국민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표,15대 총선의 최종 목표는 『신한국당을 파멸시켜 문민독재의 재집권 음모를 분쇄하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과거 한국의 역대 선거때마다 대개는 특정 야당후보에 대한 지지를 내놓고 선전하며 정부 여당타도를 부르짖은 게 관례였다.이제 그러한 행태가 자신들의 판단과는 달리 역으로 여당의 득표에 오히려 도움이 된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분석도 가능하다.선거때가 아니더라도 이쪽의 정치사회적인 일정이나 행사를 계기로 우리사회의 혼란을 획책해 왔음에 비추어 총선기간중 대남비방의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선거라면 예외없이 투표율·찬성률 1백%의 흑백 공개투표 행태만을 익혀온 북한주민들에게 오히려 남한의 민주적인 선거에 대한 호기심만을 더해주는 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가 지켜볼만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그나마 그런 선거라야 6년전에 있었을 뿐이다.1948년 8월25일 제1기 대의원선거이후 90년 4월22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9차례 대의원선거를 실시해 9기에 걸친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해왔으나 헌법상 규정된 임기를 제대로 지킨 적은 거의 없다.이대로라면 아마 북한에서 「선거」라는 용어자체가 사라질 날이 올 지도 모른다.
  • 제1당 부상 아스나르 국민당수의 앞날

    ◎민주주의·경제발전 동시해결이 과제/연정구성 실패땐 사회당 재집권 우려 사회당의 집권 13년에 종지부를 찍은 스페인 국민당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당수(43)는 승리 이후에 더욱 짐이 무겁다. 총선에서 1당 부상에 성공했지만 의석수가 단독정부 구성에 필요한 과반수(1백57석)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스나르로서는 연정구성 문제가 가장 먼저 풀어야할 「급한 불」이 됐다. 관측통들은 이와 관련,93년 1백57석에 머물렀던 사회당이 카탈란당과 연정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은 보수우익을 표방하고 있어 독립을 외치는 카탈란당이나 바스크민족당과 연정을 맺기에 껄끄러움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관계자들은 국민당이 연정에 실패하고 사회당이 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예측하면서 정국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번 국민당의 승리는 장기집권한 사회당의 실정에 국민의 염증이 커진 반면 아스나르의 인기가 치솟았기 때문이다.사회당은 지난해 후앙 카를로스국왕을 도청하는등 최근 부정부패와 스캔들을 양산,국민들의 눈총을 받았다.대신 마드리드법대를 졸업하고 36세에 당수에 오른 아스나르는 「정직과 성실」을 모토삼아 젊은 테크노크라트의 높은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아스나르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노씨 구속­육사서 구치소까지

    ◎「2인자 처신」 성공후 「탐욕의 추락」/9사단장때 「12·12」 가담… 권력 전면에/올림픽 조직위장→민정대표→대통령으로 팔공산 기슭.꿈많던 피리부는 소년 노태우는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었던 꿈은 이제 한낫 물거품이 됐다. 현재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차디찬 감방.만인지상으로 일국을 호령했던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되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또 온 국민들의 가슴속에 참담한 상처를 남기게 됐다. 꿈많던 소년시절,명예를 존중했던 육사시절,화려했던 군생활,세계에 올림픽개막을 선언하던 당당한 대통령의 모습은 이제 과거사가 됐다.가난한 시골 면서기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또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죄인으로까지 그는 전락했다.노씨가 예순넷 평생을 걸어온 길은 한 인간이 얼마만큼 화려하게 변신할수 있는가,또 얼마만큼 비참해 질수 있는까 하는 점을 극한적으로 보여준다. ○51년 육사11기 입학 그는 1932년12월4일 팔공산 기슭인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룡리(현재 대구시 동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7살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뒤 삼촌의 도움으로 공산국민학교를 거쳐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대구공업중학교 4학년때 경북중학에 편입해 졸업한뒤인 51년 육사 11기로 입학하면서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육사는 그의 인생항로를 크게 뒤바꿔놓았다.노씨는 육사에서 동기생인 전두환전대통령,김복동자민련부총재 등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전전대통령과는 군요직과 대통령직을 주고받는 동지로,후계자로 인연을 맺게 된다.김씨와는 59년 김씨의 여동생 옥숙씨와 결혼해 처남 매부지간이 됐다. 노씨는 대위로 서울대사대 ROTC교관으로 지내던 중 5·16을 맞았으며 전두환대위와 함께 하나회를 이끌며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계기를 마련한다.이후 67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68년에는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70년에는 대령진급을 했다.74년 장군에 진급해서는 전씨의 뒤를 이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78년 소장으로 진급해 9사단장을 맡았다.그는 9사단장 시절 자신의 병력을 12·12군사쿠데타에 동원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이미 그때부터 그의 영광과 오욕의 운명이 예고되었을지도 모른다. 노씨는 12·12거사의 주모자였던 전두환보안사령관과 함께 하극상에 성공함으로써 권력의 길을 걷는다.12·12 다음 날인 79년 12월13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옮겼고 다음해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기용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또 그해 8월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는등 권력의 핵심인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했다.마침내 81년 7월 대장계급을 달고 29년 6개월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전국구로 국회 진출 그는 정무장관,초대 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을 거쳐 올림픽조직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을 맡는 등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85년 2·12총선에서는 민정당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초선이며 전국구인 그는 전대통령의 후광으로 민정당대표위원에 올라 본격적인 차기대권수업에 나섰다.이때 그는 최고권력자에게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2인자의 처신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전전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잃지 않았다.친구였던 전씨에게 사석에서도 반말은 커녕 다리를 꼬고 앉지도 않았다.마침내 그는 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전씨로부터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는 87년 12월 대선에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세우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와 대결해 유신이후 16년만에 직선제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됐다.이에 앞서 그는 재집권 시나리오의 하나인 직선제 개헌수용등을 「6·29선언」으로 묶어 자신의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88년 4월26일 13대총선은 여소야대로 나타나 정국운영에는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됐다.과거청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는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전씨를 국회증언대에 세우고 백담사에 유배시키는 등 평생동지의 관계가 돌이킬수 없는 원한관계로 돌아섰다.전씨의 형과 동생,처남 등 친인척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전씨측 사람들은 이를두고 노씨를 배은망덕하다느니,배신자라는 소리가 나왔으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비난에 묻혀버렸다. ○외교치적 긍정 평가 노씨는 재임시 「물태우」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에 무난한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특히 북방외교를 통해 소련과 중국등 구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를 하면서 우리의 외교적 지평을 넓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여세를 몰아 모두 8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이나 남북유엔동시가입을 성취해 내는등 외교적인 치적에는 상당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93년 2월 퇴임후 밝은 얼굴로 연희동 사저로 돌아갔다.그는 한때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이웃의 환영을 받은 전직대통령이었다.전씨와 화해를 한 것도 사저로 돌아간 뒤였다.그러나 퇴임후 불과 얼마 안돼 과거정권의 비리설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측근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 6공시절 장관들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에게도 거액의 정치자금 은닉설이 공공연히 떠돌았고 급기야 금융실명제의 위세는 그를 더 이상 보통사람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역사적 책임」 망각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망각했다.국책사업과 관련한 이권개입,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비자금 착복은 그가 역사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의 불행은 대한민국 역사의 불행이라는 점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그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그는 대통령후보가 됐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 사는 길이라면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나는 대장이 되고자하는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지만 우연히 대장이 됐고,장관을 꿈꾸지 않았는 데도 3부장관을 지냈고,민자당대표나 대권후보를 목표로 하지 않았는데도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내 운명은 기구하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도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만 남은」지금의 처지에 까지 이를 정도로 기구한 운명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 포르투갈 야당 총선 압승/사회당

    ◎의석 과반 육박… 10년만에 재집권 【리스본 AP AFP 연합】 1일 실시된 포르투갈 총선의 종반개표에서 중도 좌파 야당인 사회당이 집권 중도우파 사민당을 누르고 압도적 승리를 거둬 10년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안토니오 구테레스 당수(46)가 이끄는 사회당은 2일 총 4천2백21개 선거구 중 14개를 제외한 대다수 선거구의 개표가 종료된 가운데 단원제 의회 2백30개 의석 중 과반수에서 불과 7석 모자라는 1백9석을 확보,제1당으로 부상했다. 반면 각종 부패 스캔들과 지도력 부족 등으로 한계를 드러낸 집권 사민당은 83석으로 2위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이밖에 유럽통합 반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우파 인민당과 공산당 주도의 CDU연맹은 각각 15석을 확보한 것으로 집계됐다. 구테레스 사회당 당수는 이번 총선에서 신중한 경제정책과 교육개혁,강력한 마약퇴치운동,근로조건 개선,중앙정부의 권한분산을 내걸어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낸 것으로 분석됐다. 사회당 관계자들은 총선결과와 관련,절대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더라도 다른 연정파트너를 물색하지 않고 소수 단독정부를 구성할 것임을 천명했다. 구테레스는 특히 『변혁이 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전제,유럽통합을 위한 기존의 제반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사민당이 지난 10년 동안 도입한 자유시장경제개혁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포르투갈 해 총리 구테레스/“「충격없는 변화」 추구”/공학 전공한 온건 실리주의자 포르투갈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함에 따라 10년만에 첫 사회당출신 총리가 될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오 구테레스 당수(46)는 재치있고 말주변이 좋은 온건한 실리주의자이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통치경험이 없는 구테레스 당수는 「충격없는 신중한 포르투갈의 변화」를 추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그는 92년 사회당 당수직을 맡았으며 취임 즉시 당내 이념상의 불평을 침묵시키고 사회당의 집권을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그는 교육비 지출증가와 자활수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보장 수당지급을 2대 개혁목표로 정했다. 경제정책에 관해 구테레스 당수는 보수적이며 예산지출과 인플레를 엄격히 견제하여 20세기말 이전에 실시될 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제에 대비한 내실을 기하겠다고 다짐했다.그는 또 보다 개방적인 정책의 추진을 약속했다. 국영 전기회사 사무원의 아들로 출생한 구테레스 당수는 리스본의 카톨릭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으며 지난 74년 포르투갈 혁명 직후 사회당에 입당한 후 76년에 의회의원이 됐다.그는 열정적인 오페라 애호가이기도 하다.부인은 정신과 의사이며 두 자녀가 있다.
  • 이사민·현 앨리스 사건(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8)

    ◎재미교포 부부… 49년 입북후 고위직 올라/북,「미 간첩」 혐의로 체포… 남로당 숙청 이용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남북한 집권세력은 내부투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남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9 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재집권한데 이어 북쪽에서는 그해가 끝날 무렵 남로당계 숙청을 서둘렀다. 김일성은 52년 12월15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종파주의 잔재들이 당과 정부기관에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이들을 남겨두면 적의 「탐정배」(간첩)로 변하고 만다고 강조했다.남로당계를 겨냥한 이 발언을 뒷받침해 19 53년 1월 「문헌토의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남로당계 검거선풍이 일었다. ○53년 남로당 숙청 시작 3월 들어 박헌영을 비롯,이승엽·이강국 등 주요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됐으며 이 가운데 이승엽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휴전직후에,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55년에 각각 열렸다.이들에게 걸린 죄목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와 「국가전복 음모」,「남반부 민주역량 파괴」등이다.따라서 이 사건을 흔히 「박헌영사건」또는 「박헌영 미제간첩 사건」이라고 부른다.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대표적인 의혹사건의 하나로 꼽힌다.이는 사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박헌영사건의 성격을 가늠해 주는 또 다른 간첩사건인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재미동포인 이사민·현앨리스 부부가 북한 정권 수립 후에 입북,고위관리로 일하다 한국전쟁 발발후 소련을 통해 탈출을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남로당 숙청에 앞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이승엽등의 재판과 박헌영재판에서 그들의 「미제 간첩」행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서울신문이 이사민부부에 관한 자료와 당시 그 사건을 취급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발굴해 사건 내막을 상당한 부분까지 밝혀냈다. 이사민은 본명이 이경선(미국명 이윌리엄)으로 출신지·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나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일하는등 항일독립운동에 관계 했다.부인 현앨리스는 재미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물로 꼽히는 현모씨의 딸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부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1947년 초 이미 재미 친북파의 대표로서 자리를 잡았다.이사민은 그해 4월부터 정기적으로 북한에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보고서는 주로 체코 수도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한오수를 통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됐다. 이들의 미국내 활동은 매우 적극적인 편이었다.미국 공산당에 가입해 한인조직을 결성,한달에 한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그러면서도 평소 이사민은 워싱턴에,현앨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떨어져 살며 각각 활동한 것을 보면 상당한 골수분자들처럼 보인다. 이와 함께 외부조직으로 민주인민전선연맹과 진보당후원회를 결성해 재미 한국인 단체,미국 좌파단체들과 고리를 맺었다.이들은 민주인민전선연맹을 통해서는 한인 최대 조직인 국민회에 북한에 설립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또 「독립」이라는 주간신문을 2천여부 발행하여 국외및 각급단체에 배포했는데 당시 현지에서 발행된 한글 주간신문 4종 가운데 북한 소식을 보도한 것은 「독립」하나 뿐이었다. 이처럼 활발히 움직이던 이사민부부가 갑자기 북한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뜻을 밝힌 때가 1948년 12월이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별도기사 참고)에서 이사민은 김일성·박헌영에게 동구권 국가를 통해 입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실제로 이 부부는 1949년 1월 체코 프라하로 가 체코정부에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청했다. ○박헌영이 적극 도와 그러나 북한행이 생각대로 쉽지는 않았다.이들의 망명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3∼4개월이 걸렸다.체코정부가 이들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체코 안전기관은 먼저 분명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으며,게다가 이들은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인 것으로 판명됐다.정체를 의심한 체코 안전기관은 이를 북한 내무성 안전국에 알렸으며 북한당국도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때부터이사민·현앨리스와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당시 외무상인 박헌영은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부부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아울러 이들이 북한에 도착하자 외무성을 동원해 환영행사를 해주기까지 했다.그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부장으로,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북한에 들어와 5∼6개월 동안 아주 성실하게 일해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그러나 입국을 거부했던 내무성 안전국은 여전히 부부를 주시하고 있었다.이들은 직위를 이용,유럽에 편지를 자주 했는데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따라서 답장은 한차례도 받을 수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이사민부부는 황급히 북한당국에 유럽여행을 요청했다.내무성은 「불가」통보를 했지만,이번에도 외무성이 출국사증을 내주었다.북한을 떠난 이들이 소련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하자 북한 안전국 요원들은 짐을 수색했다.의심했던대로 그동안 수집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 가운데는 군대관계 비밀자료도 여럿 들어있었다. 그길로 북한으로 강제귀환된 부부는 안전국의 추궁 끝에 미 정보기관으로 부터 정보수집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고 자백했다.마치 한국 땅을 밟았다 사이공으로 탈출했던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을 보는 듯이 북한의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북한판 「이수근 사건」 이 사건의 불똥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에게로 튀었다.이사민부부의 북한 입·출국을 방조한 박헌영이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3년 7월30일 열린 이승엽등의 재판에서 이강국은 『50년 7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한 간첩분자 이윌리엄(이사민)과 현앨리스를 평양에 있는 집에서 두차례 만나 공화국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제공하는데 대한 토의를 했다』고 고발됐다. 또 55년 12월 재판받은 박헌영도 같은 혐의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다.곧 박헌영은 48년 6월 하지로부터 『이사민등미국 정보원들을 유럽을 통해 북한에 보내겠으니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해 주라』는 지령을 받았다.이에 따라 이사민등이 입북할 때 입국사증을 내주었으며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외무성에,이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과연 미국의 간첩이었을까,아니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지는 바람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까.그 진실을 알려줄 것으로 기대되는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이 이제 막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사민의 대북 보고서/“미 교포 공산당원 26명” 김일성에 보고/47년부터 미 정세 등 탐지… 편지 보내/“곧 동구 경유 입북” 박헌영에도 알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박헌영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 관계 자료를 이번에 발굴했다.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이사민이 미국에 있던 19 48년 12월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직접 보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 워싱턴주재동지대표」이사민은 ▲당 동지들의 활동 ▲조선인 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의 정세들을 자세히 전했다.당 동지들의 활동에 대해 『현재 당원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 13인,샌프란시스코에 1인,뉴욕에 4인,워싱턴에 2인,기타 지역에 6인을 합하여 26인』이 있으며 이들은 『미국 당부(미국 공산당)의 허락으로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밝혔다.또 현지의 당원 대표는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김강·현앨리스,워싱턴의 이사민·선우학원,뉴욕의 신두식·곽지순』등 7명이라고 소개했다. 이사민은 이와 함께 동지들 중 일부가 동유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그후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체코 프라하를 경유해 북한에 들어갔다.이 대목이 이사민과 박헌영의 연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 수신자중 한명이 박헌영이었으므로 그가 이사민의 입북계획을 미리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박헌영은 이사민의 입북이 어려워지자 적극 도왔으며,북한에 있을 때나 뒷날 출국할 때도 이사민을 옹호했다.박헌영의 이른바 「미제간첩 사건」과 이사민을 직접 연결시킬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심받을 만한 정황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에서 이사민은 47년 4월이후 동구권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 루트가 이제 불가능한 듯 하다고 밝혔다.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에게 직접 연락달라며 미국 주소를 제시했다. 이사민이 보고서를 작성할 무렵은 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한 뒤 동서냉전이 더욱 격화된 시기라는 점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이 시기에 동구권을 통한 북한과의 서신교류나,미국 주소로 연락을 받겠다고 제의한 사실들은 미 정보기관의 양해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박헌영사건」관련인물로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은 이 자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 월드컵 축구/한국유치 가능성 크다/29일 방한 메넴 아르헨 대통령

    ◎“육류수입 확대·원전 기술협력 증진 희망”/대통령 연임… 인플레 등 경제난 타개 진력 카를로스 사울 메넴 아르헨티나대통령은 명문 국립대인 코르도바대 법대를 졸업,잠깐의 변호사근무를 거친뒤 지난 55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정계에 뛰어든 베테랑 정치인이다.올해 63세. 아르헨티나의 라 리오하주 페론당 청년위원장으로 시작,18년만인 73년 라 리오하주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중앙정치무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의해 5년간 투옥된 민주투사이기도 하다.석방된뒤 알폰신 전대통령의 문민정부시절이던 83년 다시 주지사에 당선됐고 이어 89년 6년단임의 대통령에 선출돼 정상에 올랐다. 엄청난 인플레등 알폰신의 경제난을 이어받은 그는 온 힘을 다해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임기를 1년남긴 지난해 4년의 임기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작업을 끝낸뒤 올해 5월 실시된 선거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재집권에 성공,정치역량을 과시했다. 메넴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아르헨티나측에서 보면 주로 경협증진이 주목적이다.이를 반영하듯 그의 방한에는 아르헨티나 기업인이 50명이나 수행할 예정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우리와의 무역에서 4억달러 이상의 적자를 봤다.그들은 우리에게 까다로운 육류수입 제한규정을 완화,쇠고기류 수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한국은 축구강국인 아르헨티나가 우리의 2002년 월드컵 유치노력을 지원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문제와 우리 기업과 원양어선단의 남미 진출,3만5천명에 이르는 교민보호도 협조 요망사항이다. 아르헨티나의 KEDO참여,한·아르헨티나 두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공동추진하는 「빈곤퇴치운동」도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메넴대통령에 이어 브라질의 카르도소 대통령의 내년초 방한이 추진되고 있다.김대통령도 내년중 남미 순방을 검토하고 있어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남미와 우리와 경제를 비롯,각 분야에서의 협력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한편 메넴대통령은 한국방문에 앞서 현지에서 연합통신과 인터뷰를 가졌다.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정상회담에서 주로 무엇을 논의할 예정인가. ▲양국간 투자와 교역증진등 경협과 원자로개발등 원자력 기술협력문제등을 거론할 예정이다. ­양국의 민주화에 대한 견해는. ▲아르헨티나는 민정이후 군정청산을 하면서 인권상황이 많이 개선됐다.한국 역시 문민정부이후 경제와 개혁,민주화 부문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남북대화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견해는. ▲오늘 날의 상황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의 최적기라고 생각한다.모든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겠다. ­한국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월드컵 축구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적극 지지할 것이다.한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다른 나라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회개최권이 한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주한미 대사관 무관보고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0)

    ◎북,남침 보름전 남·북총선 제의/조국전선 요원 남파… 각계지도층 시도/“국회통합” 등 위장 평화공세… 전쟁준비 숨겨 북한정권은 대한민국 제2대국회의원 선거인 5·30총선이 끝난 직후에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을 내세워 남북총선을 제의하는 등 한국의 혼란을 부추겼다.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19 50년 6월16일자 주한 미대사관 무관들의 주간보고서 조인트위카(JOINTWEEKA)에 따르면 이를 위해 북한은 조국전선 요원들을 남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국전선이 남한으로 보낸 요원은 서기국 조직부장 김태홍·이인규와 조국전선 신문기자 김재창.조인트위카는 19 50년 6월10일 38선 경계의 여현에 도착한 이들은 8월 5∼8일 사이에 남북총선을 실시하고 8월 15일 최고입법기구를 창설하자는 조국전선 선전선동물을 휴대 했다고 기록했다.이들은 5·30총선을 참관하기 위해 한국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을 여현에서 만나 남북총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구 설치를 주장하는 전단을 전달했다. 조인트위카는 김태홍일행이 한수를 더 떠서 남한의 여러 정당및 사회단체 인사를 만난다는 이유로 부득부득 남행을 강행 했다고 밝혔다.그런데 이들은 38선을 넘자마자 한국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다.북한은 이 사건에 이어 6월 19일 자신들의 최고회의 정령을 통해 대한민국 국회와 최고인민회의가 단일 입법기관으로 연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제의 했다. 북한정권의 이같은 제의는 진정한 평화통일의 의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이 제안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집권층을 대화의 상대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실현성이 희박 했던 것이다.특히 일련의 제안들이 나온 6월 25일에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평화의 제스처는 전쟁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이었다고 할수 있다. ◎2대국회와 정계재편/신진들 대거 진출… 여소야대 정치구도 형성/지지기반 잃은 이승만… 새 정당 창당 서둘러 1950년 5·30선거를 통해 구성된 2대국회는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초라한 피란국회의 인상이 짙게 남아있다.6월19일 개원한지불과 1주일도 채 안돼 한국전쟁을 만난 2대국회는 27일 새벽 긴급회의를 끝으로 서울을 떠났다.9.28수복과 더불어 서울에 잠시 들렀지만 환도는 19 53년 8월16일에 가서 이루어 졌다. ○보수 기득권세력 참패 그러나 제2대 국회는 한국 정당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우선 제헌국회에서 보수세력이 철저하게 기득권을 이용해 세력을 굳혔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2대 국회에서는 이들 기존 세력들이 대거 탈락하는 대신 그 반대세력인 신진과 소장파등 무소속이 압승을 거두어 판도의 대변화를 일찍 예고했다.이로 말미암아 2대국회는 보수파 세력간의 각축장이 아니라 본격적인 여·야의 대립양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마련됐다.이는 실질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기반 약화를 가져온 것으로 이대통령은 이에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2대 국회를 낳은 5·30선거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5·30선거는 19 48년 제헌국회를 낳았던 5·10선거와는 크게 구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외부 개입없이 한국인들만에의해 실시된 5·30선거는 보수세력들만이 참여했던 5·10선거와는 사뭇 달랐다.그래서 남북 협상파와 중간파들까지 모두 끼어들었다.이 5·30선거야말로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을 빼놓고 당시 한국의 전 정치세력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총선이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파 총선 참여 5·30선거에서는 모두 2백1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다.총선에는 여당인 대한국민당(국민당) 1백65명,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1백54명을 포함해 39개 정당 사회단체에서 모두 2천2백9명이 입후보 했다.이 가운데 10명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 사회단체가 30개,1명 밖에 못 낸 정당 사회단체도 무려 18개나 됐다.특히 1천5백13명이라는 무소속 입후보자는 의원 총수의 7.2배나 됐다.이처럼 5·30선거에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한 데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과 제헌국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키워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제헌국회에 비해 입후보의 난립상을 보여준 5·30선거는 예상대로 여권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국민당 24명,국민회 14명,대한청년단 10명,일민구락부 3명,대한노총 3명,여자국민당 1명,대한부인회 1명,중앙불교위원회 1명등 여권에서 57명이 겨우 당선했다.야당은 민국당 24명,사회당 2명,민족자주연맹 1명등 27명이었지만 의원 정원의 3분의 2를 차지한 무소속 1백26명을 일단 야권으로 보았을때 여소야대가 분명했다.국회가 개원하던 6월19일 의장선거에서 5·30선거가 철저한 야권의 압승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날 의장선거 1차투표 결과는 민국당의 신익희 96표,사회당의 조소앙 48표,무소속의 오하영 46표,국민회의 이갑성 11표,무소속 안재홍 3표순으로 집계됐다.이승만 정부가 지지하던 무소속 오하영은 46표밖에 못얻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2대국회에서의 야당 우세는 이날 2차투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야당세력과 무소속의 대부분이 민국당으로 쏠려 결국 1백9표를 얻은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됐다.이는 정치갈등을 드러낸 제1라운드의 게임이었다. 민국당은 한민당과 신익희등 대한국민당의 일부의원,그리고 대동청년단등 3개 세력이 합동해 19 49년 2월20일 창당한 정당이다.민국당은 상해 임시정부에도 반대하고 국내 좌익세력과도 척을 졌던 한민당이 주축을 이루었다.한민당은 해방공간에서 남북의 대치상황이란 특수상황에 편승해 독립적 세력이었던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일제하 기득권층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반공에 치우쳤던 이승만을 도와 정부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 볼때 한민당이 가장 이상적인 정당은 아니었다. 한민당이 제헌국회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개각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는 사실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한민당측은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의 결별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던 세력과의 연합으로 손을 잡아 만들어낸 정당이 바로 민국당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직선 개헌 준비 민국당은 창당직후부터 이승만의 힘을 약화시키는 제도적 장치인 내각책임제 개헌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주장은 제헌국회에서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당등 여권세력의 결사적인 반대로 부결됐다.하지만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과 국회가 낸 내각책임제 개헌의 대립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은 민국당의 성격이 이처럼 자신에 대한 반대와 퇴진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이승만은 5·30선거에서 민국당측이 실질적으로 원내를 장악하게 되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한 창당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창당과정에서는 지지세력을 모으는데 이승만이 직접 나섰다.물론 여기에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던 여권이 만족할 만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자유당 창당에 박차 5·30선거후 정당의 이합집산을 계속했던 2대국회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민국당을 중심으로한 야권의 결집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등 양분상을 나타냈다.야권이 이승만 퇴진이란 기치아래 민국당을 주축으로 굳건히 뭉친반면 여당은 상대적으로 약했다.이승만 대통령 쪽의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의 연합인 신정동지회,그리고 공화구락부의 통합 교섭단체인 공화민정회는 전체의원수의 과반수인 94명이 포진했다.그럼에도 민국당에 비해 오합지졸의 취약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공화민정회는 열세를 면하기 위해 신당 창당을 서둘렀다.19 51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승만대통령이 드디어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창당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그로부터 4개월후 피란지 국회의사당에서 장차 독재집권의 기반이 될 자유당 결당대회가 열렸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이승만,부의장에 이갑성과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 광복 50돌 맞아 「한·일관계 소설」 출간 붐

    ◎가즈오의 나라­광개토왕 비문 변조싼 한·중·일 시각차 조명/세종로 1번지­“치욕의 상징” 옛 조선총독부 건물 보존 주장/제국의 별­일 육사출신 이청천·홍사익·박시찬 삶 대비 광복 50주년을 맞아 최근 출판가에 한일관계를 다룬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이 소설들은 한일간 역사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각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인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작품은 「가즈오의 나라」(전2권·프리미엄북스 펴냄),「세종로 1번지」(전2권·여백),「제국의 별」(전4권·우석)들이다. 「가즈오의 나라」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지난해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김진명씨의 두번째 작품.「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을 변조해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으며,지금도 그 맥을 이은 극우파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내용이다.「무궁화꽃…」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리적 기법이 동원돼 연쇄살인과 범인 추적,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을 흥미있게 풀어나갔다. 이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경로,비문 해석을 둘러싼 한국·일본·중국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소개해 작품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다만 줄거리에 「김정일의 일본 방문­평양에서 쿠데타 발생­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김정일 재집권」으로 전개되는 남북관계 진전을 담은 것이 작품의 전체 틀을 어그러지게 하는 인상을 준다. 「세종로 1번지」의 작가는 지난해 「원균 그리고 원균」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던 고정욱씨다.앞의 작품에서 「이순신은 선이요,원균은 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한 지은이는 이번 작품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내세웠다.오는 15일 광복50주년에 맞춰 철거하기로 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 곧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은 우리 의식에서 형성돼야지,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파괴한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논리다.또 한마당 잔치를 벌인 것으로 우리 자신이 청산을 끝냈다고 만족해 하지나 않을지 경계하는 마음도 내보인다. 작가는 건물철거에 관련된 토목업자가 점차 역사의식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형상화했다. 「가즈오의 나라」와 「세종로 1번지」가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해석했다면 유현종씨의 「제국의 별」은 일제강범기 때 실재했던 인물들의 다기한 삶을 보여준다. 한일합병 직후 일본은 조선무관학교 생도인 이청천·홍사익·박시찬 등을 국비유학생으로 뽑아 일본육사에 입학시킨다.이들 가운데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이청천·박시찬은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친다.그러나 홍사익은 육사를 우등으로 졸업,중장까지 진급했다가 일본 패망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 소설은 홍사익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이청천 등의 독립운동과 대비시킨다.역사소설가로 손꼽히는 작가의 선굵은 문체가 일본·필리핀·만주 등지를 넘나드는 웅대한 스케일 속에 녹아들어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을 향한 「쇼」(해외사설)

    얼마나 흥미를 끄느냐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좋은 술책이다.이 말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이탈리아총리가 정치적 교훈을 얻으려던 모든 사람들에게 했던 답변이다.그는 피닌베스트사 방송사 주식의 25%를 외국인 친구인 기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해야만 했다.그가 밀라노에서 제시한 이른바 「물결」작전이라는 것은 변화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었으며 변해야 할 것이 아무런 변화를 하지않은 것이었다. 전직총리는 재집권을 바라면서 중도우파의 중심이 됐고 과거와 같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다.도중에 그는 많은 유동자산을 모았고 그를 숨막히게 했던 빚을 깨끗이 정리했다. 비즈니스는 역시 쇼다.끊임없는 선언적인 운동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모든 것을 팔겠다」고 한 그의 흥미유발성 발언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고 결국은 재정적으로 수지맞는 일이 됐으며 정치적인 과장은 광고역할을 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유료방송사인 텔레퓨사의 주주이기도 한 독일인 레오 키르치씨와 남아공의 요한 루퍼트씨와의 모험을 한층 강화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친구인 독일인 거물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것이 또 다른 유럽판 투자는 아닐까.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상황은 그리 밝지는 못하다.지난 6월 3개 방송사 가운데 2개를 팔아야 할지도 몰랐던 국민투표에서 승리한뒤 다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그곳에는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연정도 포함돼 있다.람베르토 디니 현총리의 기술적인 정부아래서 정당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직 사임이후부터 줄곧 향후 총선시기를 결정하는데 좌우파의 복잡한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각자는 이길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있다.방송사의 후계자를 정하는 협상은 이제 끝났으며 며칠후부터는 중도우파가 제기한 개헌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결국 베를루스코니는 방송사로 야기된 흥미위주의 논쟁에 직면할 것이다.이유는 반독점 법안이 준비중에 있기 때문이다.재집권을 향한 장애물들이 유권자와 소비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 일 정계 재편·총리 진퇴 갈림길/내일 참의원선거 전망

    ◎사회당 득표 따라 무라야마 재집권 결정/93년 연정수립후 첫 선거… 126명 선출 일본 참의원 선거가 23일 실시된다. 93년 중의원 선거로 자민당 단독정권이 무너지고 연립정권의 시대로 들어선 이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다. 이번 선거는 일본정계의 재편과 맞물려 관심을 모아왔으나 막상 선거에 들어서서는 사회당이 얼마나 득표할지,그에따라 무라야먀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퇴진하게 될 것인지 여부로 의미가 축소돼 버렸다. 일본 정계의 재편과 진로탐색이라는 과제는 중의원 선거로 넘어가는 형국이다.이번 선거에서는 정책상의 뚜렷한 쟁점도 부각되지 못한 상태다. 참의원은 6년임기인 전체 2백52명 가운데 3년마다 절반씩 개선한다.이번 개선대상은 89년 당선된 1백26석이다.그 당시 사회당은 도이 다카코위원장(현 중의원의장)의 이른바 「마돈나 선풍」으로 일거에 약진,41석을 차지했다.자민당은 33석으로 참패했었다. 지난해 신진당 창당뒤 정당별 의석수는 자민당 개선 33석(비개선 61석),사회당 41석(22석),신진당 19석(16석),신당사키가케 1석(0석),공산당 5석(6석) 기타등이다. 이번 선거에서 제일 확실하게 전망되고 있는 것은 사회당이 크게 쇠퇴할 것이라는 점.사회당은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저인 15석 전후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15석조차 못 건질 경우 무라야마총리가 계속 집권할 수 있겠느냐는 점.연립여당 특히 자민당안에서는 당장 대안이 없다는 점을 들어 연립여당 전체로 과반수인 64석을 넘으면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사회당이 15석 이하를 얻게 될 경우 「무라야마 이후의 내각」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게 될 것이다.또 사회당안에서는 구보 와타루 서기장의 퇴진등이 모색되면서 다시 한번 진통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는 또 지난 4월 지방선거의 무당파 돌풍이 재현될 것이냐는 점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기성정치권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에 관심이 있다는 응답이 80년이후 처음으로 50%이하로 떨어졌다.그러나 무소속의 난립과 정당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무소속 돌풍보다는 유권자의 투표기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 선거가 지나면 다음은 중의원 선거다.여야가 모두 중의원 선거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선뜻 총선거를 치르려 하고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일본 정계는 2년이상 표류하고 있는 데 대한 국민의 본격적인 심판을 앞둔 「정치의 계절」로 진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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