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재조명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736
  • 왜 「성전」인가/아랍의 시각/반이스라엘단체 간부 LA타임스 기고

    ◎“이스라엘 건국 이래의 분쟁이 전쟁 초래/미가 이기겠지만 중동혼란은 가중” 대표적인 팔레스타인 지식인인 사리 누세이베는 21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에 실린 기고문에서 걸프전쟁에 관해 서방세계와 아랍권은 근본적인 시각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봉기)를 주도하고 있기도 한 누세이베의 기고문을 요약한다. 걸프전쟁에 관한 「서방시각」과 「아랍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두개의 시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서방시각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아랍관점을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걸프전쟁을 정치적 노력에 이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선택으로 보고 있는 반면 팔레스타인인 등 일부 아랍세계는 외교의 실패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서방세계는 유엔헌장과 국제적 합법정부에 대한 침략행위는 1990년 8월2일에 일어났으며 이번 분쟁은 지리적으로 아라비아만에 국한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랍시각은 다르다. 아랍의 관점은 중동분쟁은 적어도 1948년 이스라엘 국가창설과 이에 따른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주로부터 잉태되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중동의 다른 지역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걸프전쟁과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중동문제는 지리·역사·종교·문화적으로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가 보고 있다. 미국은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랍세계는 미국이 포괄적인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평화 회의를 거부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28개국의 다국적군이 합동으로 「사막의 폭풍」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미구은 이스라엘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다국적군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랍의 관점은 그러나 미국이 이번 전쟁을 주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사막의 폭풍」 작전의 주요 파트너라는 것이다. 서방세계는 걸프전쟁을 유엔 결의안의 정당화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 및 원리를 보호하기 위한 「도덕전쟁」으로 보고 있다. 반면 아랍관점은 걸프전쟁은 유엔 결의안의 선택적 실행이며 비도덕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전쟁에는 기술적으로 고도의 정글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서방세계는 중동문제의 「외과적 수술」을 통해 중동 및 새 국제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승리는 더 많은 분쟁을 촉발시켜 중동은 앞으로도 불안·혼란·폭력이 난무하는 위험지역으로 남게될 것이다. 미국은 걸프전쟁이 끝난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재조명하고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 아랍권은 미국이 이번 전쟁으로 중동의 평화중재자로서의 신임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될 것으로 보고 있다.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한 많은 아랍인들은 미국이 이스라엘에 지난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부터 철수하라는 압력을 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방세계와 아랍권은 이같이 많은 시각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호 불신과 반목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서방과 아랍세계는 중동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 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 정치적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걸프전쟁이 계속되면서 인명피해가 늘어나면 같은 말에 대한 정치적 해석의 차이는 더욱 증대될 것이며 그만큼 상호화해는 멀어질 것이다. 논리상으로 새 국제질서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강점에 대한 국제적 제재조치와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공화국의 독립투쟁에 대한 크렘린의 탄압에 대해서도 같은 국제적 제재조치가 취해져야 할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참다운 새 국제질서의 정착을 위해 즉각적인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 지휘자 정명훈씨(’90인물)

    ◎유럽 음악계 놀라게 한 “30대 거장” 웅비의 90년대,그 서막을 장식한 경오년의 한해가 저문다. 유달리도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내며 지난 한해 화제를 모았던 각계의 인물들을 간추려 당시의 행적을 재조명해본다.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오페라하우스인 파리의 바스티유오페라단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정명훈씨(36). 그는 지난 3월17일 자신의 데뷔무대이자 프랑스정부가 만든 바스티유오페라단의 개막공연 작품인 「트로이 사람들」을 훌륭히 지휘해 내 한국인의 이름으로 파리음악계를 정복한 「마에스트로」(거장)가 됐다. 오페라 최대 난곡으로 꼽히는 베를리오즈의 대작을 장장 6시간30분에 걸쳐 완벽하게 재현해내면서 그는 「정명훈 신화」를 창조했던 것. 정씨는 최근 발행된 프랑스 종합교양지 「로피시엘 옴므」가 선정한 「90년의 영웅 16명」에 포함됐는데 이 때 이 잡지는 정씨에 대해 『7살 때 이미 서울교향악단과 독주회를 가졌으며 그 뒤로 많은 월계관이 이 젊은이의 머리위에 얹어졌다』고 극찬했다. 지난 7월엔 대규모파리 바스티유 국립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고국을 찾아 세계정상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을 고국팬들에게 보여주었다. 늘 온화하고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지휘대에 오르면 맑은 영혼속에서 솟아나는 광염에 찬 눈빛으로 청중을 매료시킨다.
  • 국민화합 차원서 “파격적 배려”/「광주」 보상액 확정의 의미

    ◎보훈대상자들과의 형평문제로 고심/성금 목표 7백억 달성여부는 미지수 정부가 29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생활지원금을 포함,총 보상액 규모를 확정함으로써 정부차원에서의 광주보상문제는 일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강영훈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이날 광주보상지원 위원회에서는 그동안 부처간 이견을 보였던 국민성금 모금형식의 생활지원금 규모의 경우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에게는 7천만원씩,상이자에게는 3천만∼5천만원을 지급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국고로 지급되는 보상금(호프만식 소득손실분+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합친 총 보상액 규모는 사망자 및 행불자의 경우는 7천1백만∼1억2천3백만원,상이자의 경우는 3천만∼1억9천2백만원으로 책정됐다. 정부는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 보상법이 통과된 직후 보상금 지급에 필요한 절차에 들어가 지난 8월17일부터 9월15일까지 모두 2천6백90명으로부터 피해자 신청을 받았다. 이 가운데 1차로 2천2백40명을 보상대상자로 판정하고 나머지 4백50명에 대해서는 재심토록 했다. 이들 보상대상자를 유형별로 보면 ▲사망자가 1백65명 ▲행불자가 37명 ▲상이자 1천9백74명 ▲연행·구속자 등 기타 생활지원금 대상자가 64명이다. 정부가 보상금 결정과정에서 특히 고심을 한 부분은 생활지원금 이란 것이 전례가 없던 것이어서 국가보훈대상자들이 형평의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이를 어떻게 무마하면서 적정수준의 보상규모를 산정하느냐 였다. 총 보상수준이 1억원을 넘을 경우 국가보훈 대상자들이 보훈연금과 비교해 과다하다고 불만을 나타낼 것이고 광주 피해자들은 나름대로 적은 액수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입장에서 정부는 광주문제의 해결이라는 정치적 차원에서 국가보훈대상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총 보상액의 규모를 상이자의 경우 최고 1억9천2백만원으로 「파격적」으로 지급키로 했다. 정부는 이와 관련,『광주문제 해결은 결코 금전이나 보상규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만큼 이번 보상금 규모는 정치적 차원의 결단과 보훈대상자에 대한 배려를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와 병행해 보훈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연금을 대폭 인상키로 했으나 차별의식에서 오는 반발이 무마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정부 주변에서는 그동안 대략 1억∼1억2천만원선에서 총 보상규모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이번에 결정된 보상규모는 그같은 관측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아 정부의 광주문제 조속해결 의지를 반영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6공 정부의 최대 과제라 할 수 있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정부가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현지의 여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렴해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첫째가 국민성금으로 충당키로 한 7백억원에 달하는 생활지원금을 어떻게 모금할 것이냐의 문제다. 정부에서는 일단 광주시가 기채를 통해 선지급한 뒤 모금이 완료된 뒤 정산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긴 하지만 모금목표가 예상대로 달성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재벌들의 참여 없이는 힘들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기적으로 불우이웃돕기운동 등이 겹쳐 목표액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정부로서도 「국민화합차원」에서 전 국민적 모금 운동 동참을 언론에 호소하는 등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는 있으나 재해발생시에도 통상적으로 국민성금 모금액이 2백억∼3백억원에 불과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둘째 광주 현지에선 일부 피해자들이 보상에 앞서 선광주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요구하면서 수령거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정부로서는 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당 및 재야에서는 국가의 잘못된 행위를 전제로 한 배상을 주장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의 보상금 수령을 더욱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로서는 그러나 최종적으로 수십명 정도만이 보상수령을 거부할 것으로 보고 이들에 대해서는 법원에 보상금을 공탁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셋째 상무대 공원화와 기념관 건립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보상금 지급을 시작하면 광주 현지에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여론이 돌아설 소지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 내부에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보상금 지급 추진일정에는 큰 탈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가 총 보상금 규모가 확정됨에 따라 12월 초부터 보상금 지급을 시작,가급적 연내에 마무리 짓는 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한편 국민성금 모금기간을 내년 2월까지로 잡은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 기간을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광주문제 치유기간으로 삼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명코자 하는 정부의 「의지」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주목된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발 10년 만에 그 관련 피해자들에게 형식상으로는 「금전상」의 보상으로 위무를 한 것이지만 정부로서는 광주 문제를 확실히 한 단계 높은 「민주화운동」으로 규명하는 절차일 수밖에 없어 그 만큼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 한국전 재조명 놓고 미서 「작은 논쟁」(특파원 코너)

    ◎「기록영화」방영 이후 엇갈린 반향/“승자도 패자도 없다”… 평가도 결산도 애매/“미 참전 공산주의 팽창 막아” 긍정시각도 미국 역사에서 한국전은 2차대전과 월남전 사이에 눌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에 대한 평가나 결산도 애매하다. 한국전은 승리였나,패배였나. 공산주의에 영웅적으로 맞선 것인가,비극적인 교착상태인가. 미국은 자유의 기수였는가,아니면 냉전게임을 추구한 간섭자였는가. 말하자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구구하다.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한국전 평가를 둘러싸고 작은 논쟁이 일고 있다. 논쟁의 발단은 지난주 공영방송인 PBS­TV를 통해 방영된 한국전 기록영화와 이 영화에 나온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 해석,그리고 워싱턴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 기념비의 설계 변경 등에서 시작됐다. 하루 2시간씩 3일간 방영된 「한국,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제목의 PBS 다큐멘터리와 커밍스 교수의 최근 저서는 해방 후 남한에 세워진 정부를 「민주주의의 등대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미 점령군이 세운 반동적인 억압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중 미군 포로에 대한 북한의 학대와 중국의 세뇌교육을 두고두고 비난했지만 이 영화를 시청한 미국인들은 아직도 생생한 월남전의 메아리 속에 한국과 미국의 퇴색한 이미지를 보았을 것이라고 뉴욕 타임스지 일요판은 보도했다. 영국의 런던 테임스 TV와 미 보스턴의 WGBH방송국이 공동 제작한 이 기록 영화는 북한에 2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남긴 남한측의 양민학살과 미군의 융단 폭격 및 네이팜탄 사용을 사진과 증인 회견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 영화와 커밍스의 새로운 한국전 해석은 「침략자는 분명히 북한이었다」는 미국인들의 오랜 인식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커밍스는 최근 펴낸 신저 「한국전쟁의 기원 제2부··격류의 굉음(The Roaring Of The Cataract),1947∼1950」에서 1950년 6월25일에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이 북한을 패주시키기 위한 싸움에 미국을 끌어들이려고 침략을 도발했던 것인지,아니면 아주 적은 가능성이지만 침략에 맞서 자신을 거의 방위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의문은 그냥 남겨 놓고 있다. 미국서 저술상을 탄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제1부)」은 과거 한국에서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으며 아직도 학생운동의 바이블로 남아 있다. 커밍스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은 미국의 세계 경찰역 및 대 아시아 군사개입의 시초로서 월남전 개입의 징후를 이때부터 벌써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전을 승리와 패배중 어느쪽으로 분류해야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은 슬픈 수기로 끝났고 전쟁의 추억은 허공속을 떠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에 대한 커밍스의 이러한 비영웅적 해석은 일부 군인과 정치인,그리고 역사학자들을 격분시키고 있다. 한국전 참전 용사이며 지난 73∼76년 사이에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한국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것임에도 이 영화에선 그걸 알 수가 없다』고 지적하며 『내가 보기에 이건 용감하게싸운 미군의 공적을 훼손하는 반미물』이라고 비난했다. 퇴역장성인 그는 『한국에서 공산주의 저지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는 봉쇄정책의 개념을 처음부터 올바르게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40년 후 전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멸망이 온 것』이라고 한국전을 평가했다. 그는 또 미국이 한국에 대해 방패를 제공함으로써 한국민들이 오늘의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이 기록영화의 제작에까지 비화됐다. 커밍스와 런던 테임스 TV의 대본 작가 존 헤리데이는 이 영화를 미 관중용으로 번안할 때 스틸웰 장군등 비판자들의 압력 때문에 일부 내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틸웰 장군은 자신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으며 영화는 여전히 편견을 담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국전 연구가로서 커밍스 비판론자인 뉴멕시코 주립대학의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많은 신진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수정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커밍스는 미국에 대해 너무 엄격한 반면 북한에 침략 무기를 제공해 준 소련에 대해선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한국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컨센서스는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후세에 어떻게 전할지에 관한 토론만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월남전 참전기념비는 오래전에 세워졌지만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계획은 아직도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다. 당초 설계에 따르면 이 조형물의 중심은 성조기를 향해 행진하는 병사 38명의 입상이다. 병사들의 자세와 표정을 통해 한국전이 걸었던 길,즉 초기엔 패하고 나중엔 이기지만 결국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을 묘사하자는 것이 그 의도였다고 설계자의 한 사람인 존 루카스는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계자들에게 2만달러의 상금을 주었던 건립추진위는 여러차례의 설계 변경 끝에 행진하는 병사들을 전투대형의 병사들로 개조했다. 건립위원회 위원장인 스틸웰 장군은 이 변경이 대부분 장식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설계자 루카스는 전투와 승리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 노대통령 본지창간 45돌 특별인터뷰

    ◎“지금은 역사부정보다 화합하는 슬기 필요”/“북은 「변혁의 흐름」 맞춰 개방화 나서야/경쟁력 확보위해 제조업 지속적 지원”/지역감정 불식하기 위한 정치인 각성·성숙한 국민의식 절실 ­북방정책은 누구나 예상하던 것보다 급속히 진전되었습니다. 한소정상회담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것도,또한 지난 9월말 한소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도… 모두 예상을 앞지른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의 12월 중순 방소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나의 소련방문은 지난 반세기 우리에게 분단과 전쟁,엄청난 비극과 고통을 안겨다준 냉전체제의 높은 벽을 우리 스스로가 뛰어넘는 역사적인 발걸음입니다. 우리의 인접국인 소련과 86년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 우호협력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두 나라 국민과 세계에 밝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이루는 데에도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입니다. 나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양국 관계는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국제정세에 관해 깊이있는 논의를 가질 것입니다. 나의 소련방문을 계기로 한소 양국간의 관계발전과 협력증진을 위한 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두 나라 정부간에 협의되어온 무역·투자보장·이중과세방지·과학기술협력협정과 항공협정 등이 체결될 것입니다. 이러한 교류협력의 틀 위에서 한소 양국의 실질적인 관계가 발전되어 나갈 것입니다. ­소련은 한국에 대해 상당한 경제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을지… 경협은 어떤 방향으로 추진되어나갈 것입니까. ○한·소 경협 먼 안목으로 ▲우리 경제는 소련이 필요로 하는 많은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통한 개발의 기술과 경험… 선박·자동차로부터 전자제품과 각종 소비재를 공급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건설·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자재와 기술… 우리의 우수한 인력과 기업경영능력… 이 모든 것은 소련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소련은 광대한 국토에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으며 넓은 잠재시장을 갖고 있습니다.소련이 갖고 있는 첨단과학기술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경제구조는 이처럼 상호보완적이며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습니다. 당장 소련경제가 어려움을 맞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양국간의 교역·경제협력의 확대는 두 나라 모두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될 큰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소련의 외채는 현재 4백억∼4백50억달러 수준입니다. 이것은 소련경제의 규모에 비하여 큰 것이 아니며 지불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소련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를 공급하고 또 그것을 생산할 기계와 기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분은 신용이나 연불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소련으로부터 들여올 수 있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소련과의 경협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긴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추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게 되면 내년 봄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남북한 동시방문 의사를 타진할 생각은 없습니까. ▲나의 이번 소련방문은 우리의 필요에 의한 것도 있지만 소련의 필요에 의한 것도 많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한국 대통령으로서 소련 대통령을 우리나라에 와달라고 초청은 할 수 있지만 북한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예의상으로나 관행상으로 부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들 사이에 그 얘기는 거론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고르바초프 대통령 본인의 뜻이 북한에 가고 싶다든가 해서 그쪽과 접촉해서 이뤄지는 것은 별 문제입니다. ­최근 미국의회의 페르시아만사태 추가지원 압력이라든가,한미간 통상마찰의 증가 등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에 있는 한미 관계에 그늘을 드리우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는데… 한소 관계의 급진전에 비해 한미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미간의 작년 연간 교역은 3백65억달러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통상관계를 갖게 되면 부분적인 마찰이 파생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일을 「관계소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양국간 원만한 협의를 통해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페르시아만사태에 관한 유엔의 결의와 미국의 확고한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원에 대해서는 미국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북방정책에 대해 미국은 여러 차원에서 적극 이를 지원해왔습니다.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장관회의는 한반도 안보에 있어 한미 양국의 굳건한 협조체제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북방정책에 미서 지원 내가 취임한 뒤 지난 2년간 네 차례의 한미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두 나라 관계가 전례없이 좋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 한미 관계의 소원을 가져올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팀스피리트훈련의 단계적 규모 축소나 격년제 실시 등이 한미간에 검토되고 있습니까. ▲지난 76년부터 매년 실시되는 팀스피리트훈련은 미국의 대한안보공약 실천의 상징이 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한미 안보협력체제를 공고히하고 한국군과 미군의 연합·합동훈련을 통한 전투능력을 함양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해왔습니다. 팀스피리트훈련은 매년 한미간에 협의를 거쳐 훈련목표·훈련일정·참가병력규모 등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남북대화와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우리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훈련을 축소 실시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팀스피리트훈련은 매년 한미간 사전합의에 의해 훈련방법을 개선하거나 필요한 경우 훈련규모를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북경아시안게임 이후 한중간에 무역대표부를 상호 설치키로 하는 등 관계개선이 눈에 띕니다. 한중 관계정상화의 목표시기를 언제쯤으로 구상하고 있습니까. ○냉전종식 수용 바람직 ▲한중 양국간의 무역대표부 상호설치 합의는 양국 협력관계를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중 협력의 추세가 이대로 나아간다면 양국 관계정상화도 멀지않은 장래에 이룰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도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는 12월11일로 남북고위급회담 제3차 서울회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곧이어 대통령의 소련방문 일정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북한대표들이 서울에 올 것으로 보십니까. 한소 관계의 급진전이남북 관계개선을 오히려 저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남북고위급 제3차 서울회담은 남북간의 합의입니다. 남북간에 신뢰를 쌓아가는 데 합의의 이행은 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대표단이 올 것을 기대하며 오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남북간의 회담이 제3국과의 관계 때문에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북한이 그들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소련이 우리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데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갖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세계질서를 바꾸고 있는 이 변혁의 큰 흐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이제 누구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북한이 냉전의 대결을 종식시키는 이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남북관계에서도 현실적인 노선으로 전환하는 것이 북한의 발전을 위해서도…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나는 7·7선언을 통해 우리가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이 우리의 전통적인 우방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책임있는 성원으로 나오는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북한이 멀지않아 스스로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정책을 택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이번 유엔총회 기간중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하실 계획입니까. ▲유엔가입 문제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즉 우리의 유엔가입 문제는 가입의사를 갖고 있는 우리와 유엔간의 문제이며 남북한 통일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만,우리는 남북한이 국제사회의 축복 속에서 다함께 유엔에 가입하여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정당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서 그동안 남북한고위급회담 및 실무대표회의 등을 통하여 북한이 우리와 함께 유엔에 가입할 것을 권유해왔으나 북한은 아직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이 우리와 함께 유엔에 가입한다면 남북간 신뢰구축과 긴장완화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남북간에 동반자적 관계를 발전시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촉진시키는 데도 기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에 가입할 의사가 없거나 아직 가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만이라도 우선 유엔에 가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기는 국내외적인 여건을 검토하여 우리가 결정할 것입니다. ○세대교체 국민이 결정 ­민자당 내분 이후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3김퇴진론이 상당한 지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이와 관련 정치권에서의 신진대사·세대교체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민주사회에서 정치인의 공과는 선거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국민들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국가발전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여해온 특정인의 거취문제를 두고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정치권의 신진대사,정치담당자들의 세대교체도 선거나 당대회를 통하여 국민과 당원들이 결정해나갈 일입니다. 다만 이런 논의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풍토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여망이 높다는 것을 뜻하며 정치인 모두가 겸허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차기 민자당의 대권후보는 대통령 임기종료(93년 2월) 1년 이내에 결정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92년 2월 이전에 선출한다는 뜻입니까.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십시오. ▲날짜를 언제라고 꼭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1년 전쯤이란 기준은 외국의 관례 등에 비추어 그런 시기면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미국 등의 예에서 보더라도 차기 대통령후보로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실제 누가 후보가 되는지는 지명전에 나와서 언론과 국민여론의 평가를 받고 그것이 다시 당원들의 평가로 집약되어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우리도 빨라야 임기종료 1년쯤 되어야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민자당이 거대여당이라 해도 여러 가지 시대의 부름에 부응해야 하고 이질적인 3당이 합쳐 창당했으므로 이를 동질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륜·정책으로 판단을 차기 후보가 너무 일찍 부각되면 국민들이 모두 염려하는 통치권의 혼선이라고 할까 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법질서를 세우고 공권력을확립하라는 국민의 여망 속에서 통치권 누수현상이 일어나면 이는 결국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차기 후보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임기종료 1년쯤 가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번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는다면 영남후보의 호남유세,호남후보의 영남유세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십니까. ▲지난 13대 대통령선거 때 지역감정이 격화되어 겪은 아픔은 우리 모두가 뼈아프게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런 일이 다음 선거에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선거에서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철저한 각성과 국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각계,국민 모두가 이러한 전근대적인 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대통령 후보라도 그가 어떤 경륜과 정책을 가졌으며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지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어느 당의 대통령후보이면 후보이지… 영남후보,호남후보가 있을 수 있습니까. ◎노대통령 본지창간 45돌 특별인터뷰/「범죄와 전쟁」 온국민이 동참해야 성공/특명사정은 계속… 공직기강 꼭 확립 ­대통령께서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많은 국민들이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는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경찰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부당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공권력 하나에만 의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난번 시민들과의 토론에 대전의 자율방범대장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지역은 경찰관 1명이 3천명의 주민을 담당하고 있다더군요. 옛말에도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공동체 스스로 지켜야 영국 등 유럽국가들도 마을마다 자율방범대가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어요.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킨다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어느 부분이 취약하다고 하면 자치적으로 보완하고 고도의 장비나 수사력이 요구되는 부분은 공권력,즉 경찰력이 담당하게 됩니다. 범죄와의전쟁은 공권력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경찰관서에 불을 지르는 과격사태에도 공권력이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이제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마당이니 엄격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법을 바로 세우고 엄정하게 집행할 것입니다. ­지방자치제 실시문제에 대해서는 여야간에 대체적인 일정을 합의해놓고 있습니다만 내년 상반기의 지방의회선거를 필두로 14대 국회의원총선거,지방자치단체장선거,차기 대통령선거 등 4차례의 선거를 93년초까지의 2년여 기간에 치러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경제·사회 여건에 비추어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선거를 치르는 것이 아닙니까.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총선과 동시에 실시하거나 차기 정권으로 넘기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현재의 우리 선거풍토에 비추어 그같은 많은 선거가 국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은 됩니다. 경제인들도 그런 점을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풍토가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선거를 많이 하는 것은 연구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야도 공감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여야가 서로 논의를 하게 되면 국민들도 수긍하고 안도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금년도 한 달 1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연말까지 정치·경제·사회적 안정을 이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연말에 가서 각 분야별로 총점검을 하여 미흡하거나 부실한 점이 드러난다면 해당부처 장관을 문책하실 작정이십니까. 개각을 한다면 그 시기는 연말입니까. 내년초가 될까요. ▲책임을 질 일이 있으면 언제든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나의 방침입니다. 연말이다 연초다… 신문은 왜 그런 것을 지레 쓰려고만 합니까. 언제든 꼭 필요할 때는 하는 것이고 때를 정해 놓고 개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특명사정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초 발표대로 금년말까지만 운영하실 생각인지 아니면 활동시한을 더 연장하실 생각인지. ▲그동안 특명사정반의 활동은 공직기강을 바로잡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던 부동산투기의 열기를 진정시키는데 성과를 거두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활동은 그 일을 맡은 기구나 사람의 명칭에 관계없이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경제에 대하여 안팎에서 우려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수출이 매우 저조한 상태이며,물가는 한자리 수가 지켜질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제상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이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떤 특별한 구상이 있습니까. ○경제 구조적 전환기에 ▲우리 경제가 도전을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나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성장은 상반기중 10% 가까운 성장률을 보여 높은 편이고 고요사정도 9월 현재 실업률이 2.3%로 매우 양호한 수준입니다. 물가도 최근에는 상승세가 둔화되었고 상반기중 큰 폭의 적자를 보였던 국제수지도 하반기에는 개선되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선진경제로 가는 구조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는데다 그동안 우리의 성장을 뒷받침해온 기업가정신과 근로의욕이 떨어져 경쟁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근의 페르시아만사태로 인한 도전을 극복해야 할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기업인·근로자·소비자 등 모든 경제주체들이 또 한 번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경제에서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정부는 제조업에 대한 자금지원,인력과 공장용지의 공급 등 투자의욕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입니다. 기업은 설비투자와 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근로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생산성을 높여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에 나서줘야 합니다. ­민주화와 함께 각계의 제몫 찾기 소리는 높고 때로는 이것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소득분배의 형평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대통령께서는 분배문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은 이 정부가 분배문제에 너무 치중한다고 불만입니다. 근로자나 서민은 분배문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정부 만큼 분배문제에 적극적인 정부가 있었습니까. 근로3권을 보장하여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문제가 될 만큼 임금이 개선되었습니다. 세제도 과감히 개혁해왔고 부동산투기 등 불로소득을 사회에 환수하는 제도도 이루었습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저소득층에 대한 각종 지원도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나의 임기중 2백만채의 주택을 건설하는 일이 진행중인데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중 90만채가 임대주택·근로자주택 등 어려운 계층을 위해 공공부문에서 짓는 집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복지사회나 분배문제의 해결은 하루아침… 한꺼번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인내를 갖고 힘모아 하나씩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는 23일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은둔한 지 2년이 됩니다. 전직대통령이 이같이 장기 은둔하고 있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나 공인의 입장에서나 전임자가 산간벽지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이제 은둔생활을 그만하고 정상적인 시민생활로 돌아오도록 권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역사와 국민에 대한 본인 나름대로의 인식을 갖고 좀더 정리해야겠다는 뜻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둔 2년이 되고 추운 겨울이 닥치게 되니 내 마음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국민들도 더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루속히 자유로운 입장에 서게 되면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국내외 인사들의 공식접견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 바깥 여론을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공식적인 만남은 주로 언제,어떻게 이뤄집니까. 친인척들이 청와대에서 모이는 기회는 얼마나 됩니까. ○객관적 얘기 많이 들어 ▲나는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많은 이야기와 의견을 듣는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야기를 듣는 일도 더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불가피한 일정과 제약으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내기부터 힘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장관이나 관계자들의 보고와 품의를 받은 뒤 꼭 외부인사의 객관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공식일정 사이사이 그리고 저녁시간도 자유로울 때가 별로 없습니다.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가까운 친척들이 가끔 모이지만 개별적으로 만날 틈은 별로 없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지금 가장 고심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의 신념,철학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화합을,그리고 나아가 민족의 화합을 어떻게 이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쩐지 이런 것이 잘 안 될 때는 내 능력의 부족 탓인가 아니면 국민성의 탓인가 하고 깊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지역간의 갈등,계층간의 갈등도 모두 화합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는 근본핵심은 역사관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대사가 잘못돼 있구나,현대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구나 하고 절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성세대와 정치지도자들이 역사를 동강동강 잘라놓았습니다. 건국 후 자유당·민주당·공화당 할것없이 모두 전 정권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통성마저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과거가 모두 나빴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계가 부러워하는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으며 우리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북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새로운 인식과 발상으로 다시 써야 합니다. 「내 자신 역사의 죄인이 아니고 역사에 이바지했노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해야 합니다.
  • “변혁기 안보관 재확립 민족통일에 국력 모아야”/노대통령

    노태우대통령은 7일 하오 재향군인회·한국자유총연맹·전쟁기념사업회관계자 등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 행사유공자 48명을 청와대로 초치,다과를 베풀며 이들의 노고를 위로,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내외적인 변혁기를 맞아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번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여 확고한 안보관 확립으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금년은 6·25발발 40주년이 되는 해로서 잊혀져가는 6·25를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재조명함으로써 국민들이 올바른 시국관을 갖고 통일을 위한 국력을 하나로 결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 뒤 『앞으로도 더욱 창의적인 방법으로 지속적인 대민안보 홍보행사를 전개하여 6·25의 쓰라린 역사가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 미,6ㆍ25 계기로 초강대국 부상/WP지,「한국전 40년」재조명

    ◎국방비 지출 3배ㆍ병력수 6배 늘어나/외교정책 반공으로 선회… 냉전 본격화 미국에서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진다.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아 오래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세계전략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고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전 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회고했다. 다음은 EJ 다이오네 기자가 쓴 이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 처럼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지만 월남전 처럼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았다. 초기를 제외하면 한국전은 특별히 인기있는 전쟁도 아니었고,또 월남전처럼 극심한 국론 분열도 야기 하지 않았다. 결말도 나지 않고 인식도 잘못된 한국전은 그후 미국이 50년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뻗어 나가자 재빨리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버렸다. 한국전은 미국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정치,대통령권한에 대한 이해,군의 지위,그리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은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고,또한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깔아 놓았다. 어느 면에서 이 잊혀진 전쟁은 미국 전사상 가장 긴 파장의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도 좌파 정책연구소의 리처드 바네트는 『장차 한국전은 월남전보다 더 중요하게 회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역사가들 사이에서 토대를 넓혀 가고 있다. 몇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전은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사비 지출은 49년의 1백40억달러에서 53년엔 4백40억달러로 늘어났다. 한국전이 터진 50년 6월 미국은 59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된 53년에 이 숫자는 3백60만명이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침공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의 실존」증거를 제공했다. 역사학자이며 50년대에 출간된 「미국 전성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오닐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2차대전 후 조지케넌이 제창한 대소 봉쇄정책의 골간 수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을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겨 주었다는 비난 속에 대소 자세를 경화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한국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한국 파병 결의를 내세워 전쟁 선포에 관한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냉전의 중요한 선례가 된 이같은 처사는 월남전 기간중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은 또 미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고립주의에서 반공으로 바꾸게 했으며,이러한 변화속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공산주의 탄압 입장을 강화시켰다. 역사학자 존 패트릭(캘리포니아대)은 매카시즘을 『전쟁의 성취도가 결여된데 따른 심리적ㆍ정치적 좌절의 소산』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냈을때 전쟁을 종결했다면 미국은 신속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것이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때까지 한국전에서 미국인 남녀 3만3천6백29명이 죽었고 10만3천명이 부상했다. 한국전 종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휴전이라는 모호한 결론을 성립시킨후 『우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이뤘을 뿐 세계 평화는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한국전이 후에 월남전까지 이어진 긴 냉전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신사고 바람」의 주역 고르바초프/정상회담 계기,재조명 해본다

    ◎“이념보다 빵”… 실용주의 노선 추구/동구권 개혁ㆍ냉전종식에 큰역할 베를린장벽 붕괴등 동구의 대변혁을 가져오고 2차대전이후 지속되던 냉전체제를 화합의 새시대로 바꿔가는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기왕에도 세계 여론의 주목대상이었지만 4일 한반도주변상황에 역사의 새 지평을 열 전격적인 한소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소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공화국에 대해 소련이 천연가스의 공급감축등 경제봉쇄란 강경조치를 취했는데도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세계는 말로만 이를 비난했을뿐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는 실제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순전히 고르바초프가 서방측이 취할 어떤 행동으로 타격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고르바초프는 서방 세계로부터 절대적인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가 올해초 미시사주간지 타임으로부터 80년대의 인물로 선정된 것이라든지 지난달 영국에서 전유럽을 대상으로 창간된 유러피안이 창간특집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자유선거로 통합유럽의 대통령을 뽑을 경우 고르바초프가 1위를 차지할 것이란 결과가 나온 것등이 고르바초프에 거는 서방세계의 기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또 과거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아시아에도 유럽에 못지 않은 관심을 갖는 지도자로 평가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86년 7월 소련이 아시아ㆍ태평양국가의 일원임을 천명한 블라디보스토크연설 이래 89년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한반도정세의 전반적인 개선으로 한국과 경제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는가 하면 지난 3월 김영삼 민자당대표의 방소때는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싶다고 밝히는 등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꾸준히 눈길을 돌리고 있다. 물론 이는 일본을 선두로 한 한국 등 아시아의 신흥경제세력들이 이룩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세계경제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진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의 새 조류를 재빨리 간파,때를 놓치지 않고 그 조류에 올라타며 스스로 그 흐름의 방향을 조정해 나가는데서 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고르바초프의 탁월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4일의 한소정상회담 개최도 이같은 고르바초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소정상회담을 발판으로 한국과 소련과의 경제협력이 강화되면 자연 일본도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일본까지 소련경제에 참여하게 되면 아시아쪽에 주도권을 뺏기는 것을 우려,구미경제도 대소경제협력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3일 미소정상회담을 마감하는 백악관회견에서 자신의 일본방문계획을 피력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며 한소에서 소일,소ㆍ구미로 이어지는 소련경제회복 전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이래 그에겐 언제나 개혁세력이나 수식어가 따라다녔으나 사실 그에겐 개혁세력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있어선 인간의 삶의 질이 최우선이며 여기에 위배될때는 기존의 이념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가 지난 85년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즉시 개혁과 개방을 제1의 기치로 내건 것도 종래의 이념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로 국민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우방이었던 북한의 불만을 무릅쓰고 전격적인 한소정상회담을 갖는 것도 현실을 속박하는 과거로부터의 틀은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내에서 최근 옐친 등 급진개혁파가 급격히 부상함으로써 이들 급진개혁파들이 개혁세력으로 지칭되고 고르바초프자신은 여기서 떨어져 중도노선의 정치인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은 이제야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옐친등 이른바 새 개혁세력의 주장도 역시 그 뿌리는 고르바초프가 내건 페레스트로이카에 두고 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소련개혁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 개막전야의 현지표정(워싱턴 미소정상회담:3)

    ◎소수민족 시위 예상… 고르비경호 비상/회담외 「자유시간」 많아 미의 전관리 골치/87년 첫 방미때보다 관심 덜보여 기념품인기도 시들/세계각국 취재진 5천여명 경쟁… 전화 1천회선 가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일행을 태운 18대의 비행기가 워싱턴 근교 앤드루스 미공군 기지에 도착하는 30일 저녁(미국시간)부터 그가 미네소타로 떠나는 6월3일까지 세계의 관심은 워싱턴으로 쏠려 두 초강국 정상의 발언과 결정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와 ABC뉴스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73%가 고르바초프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건 조지 부시 미대통령에 대해 호감을 표시한 80%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관심의 열기는 고르바초프의 첫 방미(1987년)때와 비교해 크게 가라 앉아 있는 편이다. 노점상들은 예전처럼 티셔츠 스티커 핀 등 기념품 판매로 재미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학교들도 견학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과거보다 많은 그룹이 항의 시위를신청했지만 시위 조직자들은 『참가자가 과거 보다 적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공항 영접행사가 끝난뒤 소련제 질 리무진을 타고 워싱턴에 입성한다. 그의 수행원 2백50명이 뒤를 따르고 35대의 미경호차와 FBI(미연방수사국)특별기동대ㆍ비밀경호헬기 등이 이를 호위한다. 고르바초프는 영빈관(블레어 하우스)을 이용하라는 미측 제의를 거절하고 백악관에서 4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련대사관에 머문다. 대부분의 수행원이 투숙하는 메디슨호텔은 시위자들이 1백피트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 외국공관 대우를 받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리투아니아계 주민과 베트남,아프간인들뿐 아니라 한국주도하의 남북한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미국내 소수민족단체들이 항의시위를 벌일 계획으로 있어 그의 신변경호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소련측 방문단의 대변인인 블라디미르 우스티멘코는 29일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대규모의 중무장한 경호인력이 동원될 것』이라면서 미국안의 소수민족들이 수십건의 항의시위를 벌일 것으로 보여 경호원들이 잠시라도 긴장을 풀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해연안공화국출신 주민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일 계획이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과 에리트레아인들이 항의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등 고르바초프가 가는 곳마다 시위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의 경호인력규모는 미국이나 소련 양쪽 모두 1급비밀로 돼 있다. ○…이번 고르바초프의 방미를 앞두고 미국관리들을 가장 골탕먹인 것은 그의 체미기간중 미국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자유시간이 너무 많다는 점. 미국대통령이 나들이할때 몇달전부터 분단위까지 빈틈없는 일정을 마련하는데 익숙해진 미국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체미기간의 많은 부분이 공란으로 비어있는데 초조하다 못해 안달이 날 지경.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르바초프의 일정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나 미국측은 정확히 몇시간동안누구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려 하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스탠퍼드대학의 대변인은 『우리는 소련측 선발대로부터 고르바초프가 4일 상오 11시에서 하오 1시사이에 온다는 것을 통보받았을 뿐 아무리 캐물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푸념. 미국관리들은 모든 구체적 일정을 고르바초프가 직접 결정하는 것 같으며 따라서 그가 소련관리들에게 지시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수 없다고 한마디. ○…고르바초프의 워싱턴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1백70여명의 소련기자들을 포함,전세계에서 5천여명의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조지 워싱턴대학 구내 스포츠시설에 설치된 프레스센터에는 1천1백50개회선의 전화선이 가설됐다. 3만평방피트의 카펫이 깔린 농구장은 이 기간동안 백악관의 브리핑장소로 활용될 예정. ○…고르바초프는 워싱턴을 떠나 귀국길에 캘리포니아를 방문할 예정인데 16시간의 캘리포니아 체류기간중 관심을 끄는 행적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반공산주의 자료가 집대성돼 있어 보수주의의 요새랄 수 있는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를 4일 방문하는 것. 레온 트로츠키의 노트,레닌의 1912년 서한,1917년 3월의 프라우다신문 등 소련에도 없는 진귀한,특히 혁명에 관한 자료들이 산적해 있는 후버연구소를 소련의 집권자가 찾는다는 사실에 흥분한 연구소 관계자들은 『그의 방문이 정말 실현된다면 그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상상을 초월한 개방적 행동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그들은 『소련혁명기의 잃어버린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기 위해 고르바초프가 희망한다면 연구소에 소장중인 방대한 자료들의 마이크로필름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피력. 러시아혁명과 1ㆍ2차 대전의 혼란기에 방치했으면 모두 파기됐을지도 모를 자료를 수집해온 후버연구소는 그동안 냉전기간중 대소공격용 보수이론을 제공하는 산실이었으나 고르바초프의 방문을 계기로 대결의 차원이 아닌 진리탐구의 차원에서 과거 역사를 재조명하는 미소협력의 장소로 탈바꿈한 셈.
  • 거여 자존심훼손ㆍ민주 새입지 확인/대구ㆍ진천 보선이 남긴뜻

    ◎합당에 대한 시각반영…“지지절제”/민자,책임싸고 민정ㆍ민주계 갈등예상/비호남권 소야,기대이상의 성공거둬 14대총선의 예비전이라 할 대구서갑및 진천ㆍ음성 보궐선거는 군소야당이었던 가칭 민주당의 가능성을 화려하게 확인시키면서 끝났다. 당초 두지역 모두에서 압승을 거두리라던 민자당은 대구서갑에서 비교적 큰표차로 당선권에 들어섰으나 진천ㆍ음성에서 민주당의 허탁후보와 엎치락 뒤치락 시소게임을 벌임으로써 거대여당의 자존심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이들 두 지역 보궐선거는 아직 태아상태인 가칭 민주당의 화려한 데뷔무대였던 반면 민자당에게는 3당통합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3당통합후 처음 치러진 두 지역의 보궐선거는 정계개편을 보는 유권자들의 시각을 관찰할수 있다는 의미와 소야의 향후입지를 가늠케 할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해의 동해나 영등포 을 재선거와는 또다른 관심을 끌었왔다. 특히 정계개편후 비대해진 민자당과 비호남권 야당의 기치를 들고 출범한 민주당의 대결은 2년앞으로 다가온 14대총선때 비호남권에서의 대결양상을 미리 시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14대총선 전초전 혹은 예비전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됐었다. 유권자들의 민자당 후보에 대한 「지지절제」는 3당통합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을 그대로 담았다고 봐야할 것 같다. 「거대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한 심리가 진천ㆍ음성에서의 예상밖 투표결과를 초래했고 대구서갑 역시 예상보다 적은 표차로 문희갑후보의 당선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특히 진천ㆍ음성에서 나타난 읍지역의 여당후보 지지,면단위지역의 야당후보 지지는 새로 나타난 「야촌여도」현상으로 14대총선과 관련해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같은 「야촌여도」는 6공화국의 농촌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표시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비해 가칭 민주당은 당락의 결과에 관계없이 비호남권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기대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당장 중앙정치에서의 가칭 민주당 영향력은 의석수 7석을 훨씬넘어 교섭단체에 준하는 영역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칭 민주당이 군소야당에서 정치권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를 잡은 계기가 된 셈이다. 민자당은 전 선거기간을 통해 대구에는 40∼50명선,진천ㆍ음성에는 충청출신 소속의원 대부분을 지원부대로 내려 보내면서까지 사실상 총력전을 전개해온 편이다. 또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도지사를 각각 후보로 내세워 후보지명도면에서 절대적 우위를 자랑했던 점을 고려할때 두 지역에서의 득표결과는 참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같은 결과는 중앙정계개편을 통해 의석면에서는 절대다수를 움켜잡았지만 유권자의 지지는 산술적 의석비를 따라오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민자당이 검토하고 있는 내각제로의 개헌등이 개헌선 의석확보와 상관없이 다른 야당의 협조가 없을경우 국민을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평민당은 두 지역 모두에 후보를 내지 못함으로써 지역정당의 한계를 또 한번 드러낸 셈이다. 특히 이번 선거가 14대 총선의 예비전내지는 전초전 성격을 지닐수 밖에 없음을 고려할때 평민당의 향후 입지는 오히려 현재보다 어려워질 가능성도 배제키 어렵고 민주당과의 또한차례 통합시비에 시달릴 가능성이 커졌다. 민주당이 거대 민자당과 맞붙어 예상외의 소득을 올린데는 대구서갑의 경우 정호용씨 사퇴가 있었고 진천ㆍ음성의 경우 박찬종의원 폭행사건이 투표에 영향을 주는등 자신들의 능력과 무관한 호재의 작용에도 한 원인이 있다. 특히 대구에서는 정호용씨의 지지자 상당수가 백승홍후보에게 반발 투표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항을 고려하더라도 창당등록이 되지 않아 민주당 공천후보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는 점,민주당측이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다는 점등의 열악한 조건을 고려할때 이들 후보의 선전은 놀라운 가능성의 확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선전은 14대 총선에서는 가칭 민주당이 적어도 비호남권에서는 사실상의 제1야당으로서 민자당과 볼만한 게임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을 낳게한다. 가칭 민주당측에서는 대구서갑,진천ㆍ음성의 보궐선거 결과를 놓고 민주당이 다음 총선에서는 3당통합전의 민주당에 버금가는 세를 만들수 있을것이란 성급한 기대까지 내놓고있다. 민자당의 예상밖 고전,가칭 민주당의 선전은 필연적으로 민자당내에 선거후유증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민주계측은 선거에서의 고전책임을 들어 당운영과 국정운영에 새로운 차원의 개혁을 요구할 것으로 보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같은 개혁요구가 지도체제에 대한 당헌개정문제와 결부돼 조기당권경쟁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대도시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계 의원들은 이번 선거결과를 다음 총선에서의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적색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어 탈당을 배수진으로 치면서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도 큰 것으로 여겨진다. 민자당의 두 후보 모두가 민정계였으며 선거운동 역시 민정계 주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계가 민정계를 선거책임과 관련해 공격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또한 민정계 내부에서도 정호용씨 사퇴와 관련한 도덕성 훼손문제등을 들어 민정계 지도부에 대한 제한적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어 주목된다.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민정계 내부의 진통은 창당전당대회와 함께 또 한번의 당직개편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 “고르비의 딜레마” 발트3국 독립 요구

    ◎확산되는 민족문제 어떻게 처리될까/「무력사용」 근본적인 해결책 안돼 전전긍긍/미소 정상회담 영향 우려,서방여론에 신경 연방공화국들의 독립요구로 발전한 소련의 민족문제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지난 11일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소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뒤 무력대결이라는 「위험수위」까지 갔던 양측의 대치상황은 2주여만에 일단 고비는 넘겼으나 수도 빌나 일원에는 여전히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리투아니아와 함께 같은 발트해 연안국인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분리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법적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함으로써 이 지역의 독립 무드는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에스토니아 공화국 공산당은 25일 특별당대회를 개최하고 중앙당과의 결별과 독자정당 설립을 선언했고 라트비아는 오는 5월 공화국 최고회의에서 소연방으로부터의 분리여부를 결정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앞으로 2∼3개월 내 발트해 3개국 모두가 독립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이번 리투아니아사태에서 다시 한번 드러났듯이 소련 당국의 입장은 이런 식의 일방적인 독립요구는 절대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다. 리투아니아 정부가 자체 통화도입과 국경세관의 관할권 인수,연방군대 복무거부 등 독립에 따른 구체적인 조치에 들어갈 움직임을 보이자 소련 당국은 즉각 비상포고령을 발동하는 외에 수도 빌나 일원에서 대대적인 무력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리투아니아 공화국 정부는 연방정부의 무력위협에 대해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무력대결 불원과 대화를 통한 해결을 요구했다. 소련 당국도 무력시위는 하면서도 구체적인 무력사용 의사는 좀처럼 내비치지를 않았다.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을 비롯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측근참모들은 이 가운데서도 오히려 무력 불사용원칙을 계속 천명해 무력시위는 어디까지나 심리전용임을 짐작케했다. 계속되는 독립요구로 연방체제 자체가 위협받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력진압을 쓸 수도 없는 입장,이것이 바로 민족문제에 대해 크렘린이 처한 딜레마이다. 지난 15일 개정된 헌법에 따라 고르바초프는 각 연방공화국에 대해 해당 최고회의의 기능을 일시 정지시키고 직접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상조치권 등 종전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무력동원 등 강경대응이 사태를 일시 진정시킬 수는 있겠지만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된다는데 크렘린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첫째 미국 등 서방국들의 반응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번 리투아니아 무력시위때도 미상원의 항의결의문 채택 등 서방국들은 신속한 대응을 했고 리투아니아 정부도 즉시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나섰다. 현재의 경제난을 극복키 위해 무엇보다 서방의 원조가 긴요한 소련으로서는 이를 무시하고 무력사용을 강행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특히 소련은 오는 6월로 예정된 미소정상회담을 앞두고 전략핵무기감축협상(START)ㆍ재래병력감축협상 등 서방의 이해를 구해야 할 과제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발트해 연안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연방공화국들의 독립요구가 무력으로 진압될 단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르바초프가 취한 개방정책 덕분에 합병과정을 둘러싼 과거 역사의 재조명 작업 등이 활발해져 이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소련은 「이민족」 「점령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민족전선」(사주디스) 등 일부 민족주의 단체 주도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이 지방선거를 통해 새로 구성된 공화국 최고회의 등으로 통합,보다 단합된 함을 갖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지금까지 소련 당국이 내놓은 최종방안은 21일 최고회의에서 채택된 연방탈퇴법안이다. 독립에 관한 모든 논의와 절차는 이 법안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해당 공화국들로 부터 사실상 독립의 길을 막아놓은 악법으로 비난받고 있어 앞으로 크렘린의 양보없이 민족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고르바초프의 대통령 취임 후 처음이 되는 이번 연방공화국과 크렘린의 정면대결이 과연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 것인지에 일단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한국 OECD가입의 득실/유장희 대외경제정책연 부원장(서울시론)

    ◎국제 경쟁력 확복가 선결 과제 국내에서는 불황이니 경기침체니 하여 걱정이 많고,혹시 선진의 문턱에서 우리경제가 남미식으로 전락해 버리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높으나,국외에서 평가하는 우리경제의 잠재력은 우리 스스로가 평가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높은것 같다.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OECD워크숍에는 선진24개국 대표들이 참석,세계경제의 흐름과 교역환경의 변화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교환이 있었다. 앞으로 새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교역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각국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기탄없이 제시하는 제시하는 회의였다. ○신고전파 이론 퇴조 마침 우리나라에서는 요며칠간 큰 뉴스거리가 많아서 이렇게 중요한 회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좀 아쉬웠으나 적어도 참석한 국내 여러관계자들은 우리경제의 실상을 재조명 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외국경제전문가들의 눈에 비친 한국경제는 당면한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망이 밝다고 평가되고 있다. OECD 선진24개국에는 동양권에서 일본만이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는데 만일 동양권에서 한나라를 더 가입시킬수 있다면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한국이라는 것이 대표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가입을 권유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OECD에 가입코자 해서 절차를 밟을때 이를 기꺼이 검토하겠다는 것이 사무국측의 입장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OECD에 정식 가입의 의사를 밝힐때 이에는 각종 의무가 따르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즉 자유무역의 제반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OECD에 가입해야 하느냐 여부는 가입에 따른 이해득실을 점검해봄으로써 판정될 일이나,그외에도 국제경제학에서 지금 조용히 일고 있는 이론적 양립현상을 주시해 봄으로써 옳은 판단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 반세기를 지배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국제경제이론의 주류는 헥셰르 올린의 신고전파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국가간의 교역은 각국이 서로 다른 부존생산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서 값싼 노동력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상품의 수출국이 될 것이고 반대로 자본이 풍부한 나라는 자연적으로 자본집약적인 상품(자동차ㆍ비행기ㆍ컴퓨터 등)의 수출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ㆍ후진국 결속해야 이러한 자연스런 요소집약적인 상품의 흐름은 자유무역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며 또 자유무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여러가지 좋은 경제적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수출국과 수입국간에 존재하던 요소간 가격비율의 차이가 없어지며 ▲한 나라 안에서도 소득분배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양국 공히 자국에 부족한 생산요소를 비교적 싼값으로 도입할 수 있음으로 해서 생산능력을 높일 수 있고 고성장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후진국 및 중진국의 경우 헥셰르 올린식의 모델이 성장에 꼭 필요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상의 부존자원 중심의 교역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적지 않은 수의 국제경제학 및 개발경제학자들은 헥셰르 올린의 도식은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며 국제무역의 현장에는 각종 정치요소가 판을 치는 냉엄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역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들이 완전한 자유무역을 실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들간에 아무런 무역장벽이 없어야 하는데 인류역사상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진대국들이 자기네들 필요에 따라 장벽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심지어는 GATT의 여러 규정도 의도적으로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헥셰르 올린이론이 주장하는 계층간의 소득균형 달성 가설도 듣기에는 그럴듯 하나 세계경제의 성장사에서 그러한 신데렐라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뮈르달 같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 신이론은 개발도상국에 맞는 새교역의 도식을 따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중ㆍ후진국은 선진국으로 부터 복지재(의약품ㆍ필수화공제품ㆍ통신기기 등)를 최소가격으로 수입하여 저소득층의 실질소득 증대에 기여하고,둘째 자유교역은 증진시키되 되도록이면 비슷한 나라들끼리 교역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과거 20년간의 통계를 본다면 이른바 자유무역의 정신과 무역혜택의 공평한 분배원칙을 위배한 쪽은 후진국이 아니고 거의다 선진국 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만일 국제정치의 여건이 허락할때 선진대국들의 엄청난 완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교역을 통한 정당한 성장을 누리려면 중ㆍ후진국들도 어떤 힘의 결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시아지역에서는 「아세안」이라는 클럽이 형성되어 있고 중남미에서도 최근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등이 참여한 중남미자유무역권이 형성된 것은 이러한 신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가입여부 숙고를 세계경제는 바야흐로 경쟁과 협력이 병존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급격한 변화까지를 합친다면 90년대는 가위 격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선진권을 향해 줄곧 항진을 계속해야 할 한국경제로서 실시 해내야할 일들이 태산같다. OECD에의 가입은 바람직스러우나가입했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경쟁력 확보와 성숙열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 분단책임,미소 균형있게/통일교육 지침 마련/「반공 일변도」서 탈피

    ◎지식인ㆍ학생등 각계 책임 강조 정부는 동서 양진영의 신데탕트추세와 남북교류의 실질적 증진에 대비,종전의 대국민반공교육을 보다 전향적인 내용의 통일교육으로 바꿔 실시한다는 방침 아래 새로운 통일교육기본지침을 마련했다. 통일원이 9일 배포한 통일교육지도자료에 따르면 기본지침은 남북통일달성과 관련된 국내외의 역사적ㆍ현실적 조건과 변수들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지적하고 있다. 지침은 이에따라 분단의 배경에 대해서도 ▲독립운동 주도세력인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이 분단고착화에 미친 영향 ▲분단의 기본성격에 관한 재조명 ▲남북한정권수립과정비교 ▲분단책임주체로서 미소에 대한 균형적 인식 ▲분단이 오늘에 가져다주고 있는 민족사적 상황인식 등이 교육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침은 또 동구권의 변화와 미소화해,그리고 미북한및 한소ㆍ한중접근 등 외부적 요인과 노사갈등ㆍ정치불안ㆍ개방화 등 국내적 요인등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석토록 했다. 통일과업의 주체에 관해서도 어느 특정집단이나 정부만의 노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정치인ㆍ지식인ㆍ학생 등 사회각계각층의 능동적인 책임과 역할을 주문했다.
  • 정책대결보다 달라진 위상 정립 공방

    ◎민자ㆍ평민당 대표연설 비교 분석/합당의 당위성ㆍ정국운영 복안에 큰 시각차/경제현안ㆍ통일문제 원칙론엔 의견 접근/법률개폐ㆍ지자제법안 절충 난항 겪을 듯 민자당 김영삼최고위원과 평민당 김대중총재의 임시국회 대표연설은 정계개편에 대한 당위성과 부당성을 상반된 입장에서 부각시키려한 공방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양 김씨 모두 정계개편이후 민자ㆍ평민당이 쉴새없이 주고받은 언쟁의 조각들을 종합해 발표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다만 정치권의 혼돈상황을 나름대로의 논리로 정리함으로써 앞으로 정국의 향방을 어느 정도 점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사실상 양 김씨의 대표연설은 얼마전까지 야당의 양대 지도자였던 두 사람이 이제는 여와 야로 나뉘어 맞대결을 벌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쇼」라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우리 정치의 현실과 미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줄 수 있는 중요한 이벤트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적지않았다. 이번 임시국회의 최고 하이라이트를 양 대표 연설로 꼽은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양쪽 진영도 이같은 일반의 관심과 기대를 의식해 연설문 준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도 사실이다. 김영삼최고위원의 경우 민정ㆍ민주ㆍ공화계를 포괄한 연설문작성기초소위까지 별도로 구성했고 김대중총재도 6인소위외에 각계 인사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공식대결에 대비했다. 그러나 준비가 철저했던 것 만큼이나 양 김씨의 정계개편에 대한 시각이나 정국운영에 대한 복안은 현격한 차이를 나타냈다. 양 김씨는 과거와 같은 협조ㆍ동반관계가 앞으로 상당기간은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대표연설에서 충분히 짐작케 했다. 가장 관심이 컸던 정계개편에 관한 공방에 있어 김최고위원은 개괄적인 측면에서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강변했고 김총재는 구체적으로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김최고위원은 『세계의 물결은 개혁및 개방과 화해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당구조는 이러한 조류에 부응하지 못하고 경제ㆍ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배경설명과 함께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악순환을 청산하고 통일을 향한 역사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온건중도세력의 대결집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통합논의를 전향적으로 개진했다. 김최고위원은 자신의 결단을 『역사적 과업이며 한국정치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일대혁신』이라고 규정하며 『민자당 창당의 평가는 92년 총선,길게는 후일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김총재는 합당 자체가 「정치쿠데타」이며 「국민배신행위」라고 몰아붙이고 본질에 있어서도 ▲보수와 반동수구세력의 합작 ▲정경유착을 통한 기득권의 수호공작 ▲특정지역과 특정계층에 대한 철저한 고립화음모라고 비난했다. 김총재는 한발 더 나아가 『의원직을 총사퇴해 오는 6월 지자제선거때 총선을 함께 실시해 심판을 받자』고 요구했다. 김최고위원은 3당통합을 정치발전측면에서 기정사실화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정국운영을 강조한 반면 김총재는 통합 자체가 반민주ㆍ반국민적이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원인무효」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최고위원은 특히 대야관계에 있어 『야당에 몸 담았던 경험에 비추어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묵살하지 않을 것이며 야당의 진취적인 대안제시에 남다르게 귀를 기울이겠다』고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3당통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면서 이에대한 거부운동을 끈질기게 밀고나가겠다고 강조하고 『만일 민자당정권이 수와 힘을 가지고 이 문제를 기정사실화하는 데만 급급한다면 국민의 무서운 저항을 면치 못할 것이고 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 김씨의 정계개편에 대한 이같은 입장과 시각차이는 민생치안ㆍ경제문제 등에 대한 처방과 대응에 있어서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양 김씨는 지금의 사회ㆍ경제가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김최고위원이 여당의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원칙론적인 대응방식을 제시한 것과는 상반되게 김총재는 문제의 근본원인을 여권의 실정에 있다고 강조하며 이를 정치상황과 연계시키려 했다. 김최고위원은 민생치안및 노사문제는 공권력의 엄정한 행사로 대처하겠으며 경제문제도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존 여권의 방침을 그대로 수용했다. 김총재는 이에비해 민생치안의 악화원인을 불공정 분배에 대한 저항과 힘의 정치에 의한 영향등에 있다고 해석했고 노사문제는 정부의 엄정한 중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다루게 될 쟁점법안의 처리방향에 대해서도 김최고위원과 김총재의 시각차이는 뚜렷했다. 김최고위원은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은 전향적으로 개정하겠다고 했으나 김총재는 「악법 개폐」라는 차원에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지자제선거법ㆍ광주관련법 등에 대해서도 이번 임시국회에서 매듭짓겠다는 방침은 두사람 모두 분명히 했으나 행간마다 엿보이는 여야라는 대립적 개념에서 재조명해볼 때 적잖은 파란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남북문제ㆍ통일문제에는 다소 시각차가 있으나 모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김최고위원은 통일ㆍ북방외교문제에 역점을 두어 『오는 3월 소련방문을 통해 북방외교의 영역을 넓혀 통일외교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밝혀 모종의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임을 구체적으로 시사했다. 김총재도 북한 TV와 라디오의 일방적인 개방을 제안하는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종전입장의 수준에 그쳤다. 총체적으로 김최고위원과 김총재의 이번 국회연설은 쌍방이 정계개편이후의 첫번째 대결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의식,자기방어와 상대의 공격에 치우쳤으며 정책제시도 백화점식 나열에 그쳤다는 평가이다. 김최고위원의 경우 3당통합의 주요명분이었던 개혁의지와 장래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지극히 의례적인 여당 지도자로서의 연설수준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총재는 거대여당에 대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유일야당」으로 평민당의 면모를 일신할 수 있는 야권 단일화방안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데다 정책제시등에 있어서도 야성만을 부각시키려 한 나머지 무책임한 부분도 더러 있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김명서기자〉 ◎김대중 평민총재 연설 요지/“합당은 특정지역ㆍ계층의 고립화 작전/남북한방송 상호 자유청취 허용해야” 3당통합은 우리 역사상 가장 반민주적 정치쿠데타이다. 또 철저한 국민배신 행위이고 역사에 대한 배반이다.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ㆍ김종필 민주자유당최고위원은 4당체제가 망국의 체제이기 때문에 구국의 차원에서 통합을 단행했다고 했으나 그들이 과거에 한 말과 너무나 다르다. 양당제도와 여대야소가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당 이래 전두환정권 때까지 우리나라는 주로 양당제이고 여대의 정치였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13대 국회는 4당구조와 여소야대였으나 사법부와 입법부 독립,청문회 개최,법안처리 등에 있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3당통합이 그토록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고 명예혁명이었다면 왜 떳떳이 국민앞에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나. 3당통합은 보수와 반동수구세력의 합작이다. 정경유착을 통한 기득권의 수호공작이다. 특정지역과 특정계층에 대한 철저한 고립화작전이고 평민당에 대한 제2의 파괴음모이다. 만일 민자당정권이 수와 힘을 갖고 3당통합을 기정사실화하기를 고집한다면 멀잖아 국민의 무서운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총선거를 통한 민의의 심판만이 3당통합을 국민이 지지하는지,내각책임제 개헌을 국민이 바라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선거비용과 노력을 절감하기 위해 다가오는 지방의회선거와 총선거를 같이 실시하자. 만일 민자당정권이 우리의 이러한 제안을 수용치 않을 때는 1천만인 서명운동등 평화적이고 국민적인 투쟁을 계속 전개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겠다. 이번 임시국회는 6공의 방향ㆍ운명을 가늠하는 국회로 청산ㆍ개혁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되고 민주제도수호법으로 대체돼야 한다. 안기부는 국내수사에서 손을 떼고 해외정보에만 전념해야 한다. 5공시대보다 더 많이 수감된 모든 민주인사와 장기수를 전면석방해야 한다. 경찰중립화 없이는 경찰 사기의 앙양이나 민생치안의 회복을 결코 바랄 수 없기 때문에 경찰중립화법은 이번 회기에 반드시 입법화돼야 한다. 민자당은 내년 봄의 자치단체장선거를 회피하고 지방의회의원선거에서 정당추천제도 하지 않으려 하나 이는 여야 합의사항이다. 법대로 해야 하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국방참모총장제를 창설하는 국군조직법개정은 문민통제를 마비시키고 군국주의화의 길을 열게 되므로 철회해야 한다. 광주시민의 명예회복ㆍ기념사업ㆍ적절한 배상이 이뤄져야 하며 삼청교육대ㆍ의문사희생자ㆍ해직언론인에 대한 배상도 해결돼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치안은 단군이래 최대로 악화됐다. 살인강도ㆍ인신매매ㆍ마약ㆍ정체불명의 방화 등 무법천지다. 국민생활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적은 물가앙등이고 물가앙등의 주범은 토지투기다. 또 하나의 폭발적 문제는 집 전세금의 앙등이다. 전세값 앙등의 근본원인은 정부가 세입자를 위한 임대주택건설을 등한히 한 데 있다. 노정권이 다가오는 가을까지 이같은 3대 민생과제를 해결치 못하면 그 때는 우리가 노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일성의 생사에 관계없이 북한은 멀지않아 크게 변할 것이다. 서독이 동독을 매료하듯이 대한민국이 북한을 이끄는 우월성이 없이 북한의 동독화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TV와 라디오의 상호 자유청취를 북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만이라도 일방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남북간의 회담은 예비회담이건 본회담이건 판문점을 쓰지 말고 서울과 평양에서 해야 한다. 결렬위기에 있는 아시안게임의 단일팀 참가를 성공시켜야 한다. 북한도 남한의 공산화를 명기한 것으로 알려진 당규약을 바꾸는등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 노정권이 올림픽과 북방외교에 있어서 성과를 올린 것은 인정하고 환영한다. 그러나 3당통합으로 민주개화의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우리 당의 통합반대투쟁은 여론투쟁ㆍ의회투쟁ㆍ천만인서명운동,그리고 다가오는 지자제 선거투쟁 등 4단계에 걸쳐 진행시키겠다.
  • 「탈소도미노」확산땐 고르바초프“위기”/거세지는 소 민족분규의 저변

    ◎영토ㆍ종교ㆍ문화 달라 반목 고질화/소수민족정책 근본적 궤도수정 불가피 고르바초프서기장의 리투아니아방문 마지막날인 13일 남부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유혈충돌이 벌어짐으로써 소련의 인종분규는 이제 동시 다발적인 국면을 맞고있다. 특히 이번의 유혈사태는 분리독립자제를 설득키 위한 고르바초프의 리투아니아방문이 실패로 끝난데 연이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련의 민족문제는 물론,러시아제국의 영토확장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인 뿌리를 갖는 것이지만 제민족의 불만이 이렇게 표면화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개방화로 인한 과거 역사의 재조명 움직임과 사회전반의 민주화ㆍ자유화가 소수민족의 독립분위기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나고 있는 소련내 민족운동의 흐름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반소ㆍ반러시아운동으로 궁극적으로 소연방에서의 분리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움직임이다. 최근 발트해 연안 3개공화국에서 일고있는 민족주의운동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련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문제의 핵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리투아니아방문때도 드러났듯이 절대로 독립은 허용않겠다는 것이 소련당국의 입장인 반면 이들 3개공화국의 요구는 독립이다. 두번째는 소련영토내 각 공화국간의 영토와 영역의 변경을 요구하는 것으로 소수민족들끼리의 분쟁이다. 이번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인들간의 유혈충돌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분쟁의 주된 배경은 아제르바이잔내 나고르노 카라바흐자치주의 귀속문제 때문이다. 지난 1923년 스탈린에 의해 아제르바이잔에 강제편입된 이지역은 원래 아르메니아공화국에 속해있던 곳으로 지금도 주민의 80%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다. 아제르바이잔인은 수니파회교도가 대부분이고 아르메니아인은 대부분이기독교도들로 역사적으로 양측간 민족감정은 좋지가 않았다. 수십년간 갖은 인종적 편견과 불이익을 당해온 이지역 아르메니아주민과 아제르바이잔인들과의 해묵은 감정이 소련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분위기를 타고 폭발한 것이다. 지난 88년 2월에도 한차례 유혈충돌을 겪은 두민족은 이후 소련당국의 강경조치에 밀려 주춤한 상태였으나 양공화국이 각자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자국소유로 선포하는등 계속 불씨를 안고 있었다. 이 경우도 소련당국으로서는 쉽게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르메니아측의 요구대로 이 지역을 넘겨줄 경우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반발 또한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련은 현재 1백개가 넘는 다민족국가로 15개의 독립된 민족공화국,20개의 자치공화국,그리고 8개의 민족자치주가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곳에서 영토변경이 허용되면 도처에서 유사한 요구가 속출,엄청난 혼란에 빠져들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와 같이 탈소독립요구와 민족간 분쟁이 복합적으로 그리고 타지역과 동시에 진행될 경우 민족문제는 항시 유혈사태로 발전할 소지가 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세번째로는 앞의 두 경우와 같은 폭발력은 없지만 러시아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퍼지고 있는문화적인 자치 무드이다. 각민족의 권리확대와 종교의 자유,독자 언어사용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확대되고 있는 이런 운동은 근본적으로 앞의 두가지 흐름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지속적인 성격을 가진다. 분리요구가 가장 강하게 일고있는 발트해 3개국은 제2차대전때 소련에 합병되기전까지 높은 문화적전통을 가지고 있어 반소ㆍ반러시아 의식이 특히 강한 지역이었다. 그것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과 함께 「인민전선」등 조직적인 힘으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역시 유혈참극을 빚은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도들이 많은 지역으로 종교적으로 회교도인 아제르바이잔인들과는 충돌의 요소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전반적인 민주화분위기와 함께 내재하던 이질감이 표출된 것으로 볼수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제 민족문제에 대한 소련당국의 기본정책에 전면적인 손질이 불가피해졌다고 보고있다. 역설적이지만 1988년 제19차 당대회에서 개혁노선의 방향이 확실히 잡혀진 이래 민족분규는 한시도 그친 적이 없다.그해 6월 에스토니에서는 자체 국기게양과 함께 에스토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그리고 11월 에스토니아의회는 주권국가임을 선포하고 연방법률의 비토권을 천명했다. 발트3국중 다른 2개 공화국도 거의 같은 길을 걸었다. 89년에는 그루지야의 압하지아에서 대규모시위가 일어나 군이 투입되고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임시당대회에서는 민족문제에 관한 모종의 해결방안이 강구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고르바초프가 리투아니아방문때 밝혔듯이 소련당국의 입장으로 미루어 각 공화국의 탈소독립은 거의 실현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지금까지 해온 개혁과 개방의 기조 위에 각민족의 「실질적인 자치」를 허용한다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을 것같다. 물론 이것이 가능키 위해서는 각공화국에 경제면에서 개혁의 실질적인 과실이 돌아가고 정치의 분권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