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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인 간첩단’ 5명 전원 44년 만에 누명 벗었다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벌했던 ‘문인 간첩단 조작사건’의 마지막 피해자가 검찰의 재심 청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로써 44년 만에 피해자 5명의 간첩 누명이 모두 풀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홍기찬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임헌영(본명 임준열·77) 민족문제연구소장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24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당시 접촉했던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총연맹계인 것은 인정되지만, 그들이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라는 점과 원고 청탁을 받은 잡지가 위장 기관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면서 “또한 당시 수사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에 의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모두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문인 간첩단 사건은 1974년 1월 문학인 61명이 발표한 개헌 지지성명에 관여한 문인들을 국군보안사령부가 영장 없이 연행해 고문한 뒤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임 소장은 다른 문인들과 함께 구속됐고, 그해 6월 28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이들이 보안사의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임 소장은 검찰이 지난해 9월 대신 재심 청구를 하면서 이번에 무죄를 선고받게 됐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日 ‘조선학교 어머니회’ 한경희통일평화상 수상

    성공회대는 제3회 한경희통일평화상 수상자로 일본 ‘조선학교 어머니회’를 선정하고 6일 시상식을 갖는다. 일본 조선학교는 재일조선인 초·중·고교생 등을 대상으로 민족 교육을 하는 곳으로 일본에 60여곳이 있다.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조선학교 어머니회는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차별이나 탄압에 맞서 학교 사랑 운동, 민족 교육의 중요성 알리기 활동 등과 함께 조선학교를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다. 한경희통일평화상은 1982년 발표된 간첩조작 사건인 ‘송씨 일가 간첩단’의 여두목이라는 누명을 썼던 고 한경희 여사를 기리고자 제정됐다.
  • “정부 입맛 따라 특정 영화인 배제, 통렬하게 반성”

    “정부 입맛 따라 특정 영화인 배제, 통렬하게 반성”

    “지난 10년간의 블랙리스트 실행기관 노릇한 데 대해 통렬하게 반성합니다.”영화진흥위원회가 이명박·박근혜 전 정부의 입맛에 따라 특정 영화와 영화인, 영화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한 데 대해 국민과 영화인들에게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4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두 정부에서 당국의 지시를 받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차별과 배제를 직접 실행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이는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일도 너무 많이 늦었다”고 밝혔다. 지난 1월 취임한 오 위원장은 그간 내부 진상 조사를 통해 블랙리스트 실행 사례를 파악해 왔다. 영진위의 ‘적폐’는 200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인디포럼 작가회의와 서울인권영화제를 주최하는 인권운동사랑방, 전북독립영화협회 등의 단체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지원사업, 독립영화 제작지원사업, 다양성영화 배급지원사업 등의 지원 대상자를 결정할 때도 심사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 이는 ‘천안함 프로젝트’를 상영한 동성아트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벨’을 상영한 여러 예술영화전용관과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지원 배제로 이어졌다. ‘다이빙벨’을 상영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지원금도 절반이 깎여나갔다. 2015년 예술영화 지원 사업에서 박찬경 감독의 ‘산’은 그가 ‘야권 지지자’ 박찬욱 감독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청와대로부터 지원 배제 지시를 받았다. 세월호, 위안부, 재일조선인, 용산참사, 노동자, 강정해군기지, 한진중공업, 밀양송전탑, 국가보안법, 성미산마을, KT노동자 등의 키워드와 관련된 영화도 ‘문제 영화’라며 지원이 배제됐다. 자체 조사에서 파악한 피해 사례만 56건에 달한다. 오 위원장은 “당시 청와대와 관계 당국은 영진위에 특정 영화인 배제 지침을 내렸고, 이에 따라 영진위는 각종 지원 신청작에서 이 지침에 해당하는 작품과 영화인을 선별 보고했다”며 “편법 심사를 위한 심사위원단을 꾸리고 심사과정에도 개입해 지원을 막았다”고 말했다. 그는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에 ‘걸림돌’이 될 내부 직원을 별도로 관리해 불이익을 준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드러난 과오를 바로잡고 재발을 방지하는 후속조치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라며 “부단히 되돌아보고 준엄하게 혁신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6월 북·일 정상회담...? 아사히신문 “조총련 통해 제의”

    6월 북·일 정상회담...? 아사히신문 “조총련 통해 제의”

    일본이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를 통해 북한에 북일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이에 북한도 6월에 두 나라 사이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아사히신문은 29일 서울발 기사에서 북한 관계 소식통을 인용, 최근 북한 노동당이 당 간부를 대상으로 배포한 교육 자료에 ‘6월초에 북일 정상회담 개최가 있을 수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고 전했다. 해당 자료는 북한 노동당이 당 간부에 대해 정치 교육을 하는 자리에서 제시된 자료로,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외교 수완을 치켜세우면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5개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료는 대일 정책에 대해 “일본 정부가 최근 조선총련을 통해 북일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북한측에 타진해 왔다”면서 북일 정상회담이 6월 초 평양에서 개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자료에는 일본인 납치문제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침이 적혀있지 않았다. 아사히는 북한 매체가 최근 일본에 대한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며 “안보문제의 상대가 미국이지만, 대규모 경제지원을 바랄 수 있는 상대는 일본뿐이라서 북한이 (비판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교섭 조건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다른 북한 관계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북한 내에서는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 200억~500억(약 21조6000~54조1000억원) 달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고 아사히는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일본 도쿄 조총련 건물에 총격…남성 2명 체포

    일본 도쿄 조총련 건물에 총격…남성 2명 체포

    23일 새벽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중앙본부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고 NHK가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이들 남성 2명은 이날 오전 4시쯤 차량으로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조선총련 중앙본부 인근에 도착, 출입문을 향해 권총을 수 발 쐈다. 총알은 출입문에 맞았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현장에서 경계활동을 하던 경시청 기동대원이 이들을 건조물 손괴 혐의로 붙잡아 자세한 경위와 동기를 조사 중이다. NHK는 수사 관계자를 인용해 남성 2명은 우익단체 관계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이들이 조선총련 중앙본부 출입문 앞에서 건물을 향해 권총을 수 발 발포했다면서 부상자는 없다고 보도했다. 통신도 경찰을 인용, 현행범으로 체포된 남성 2명이 우익단체 관계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지상 10층·지하 2층의 조총련 중앙본부는 북한의 일본 공작거점 및 대사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월호 등 키워드로 독립영화 지원 배제

    박근혜 정부가 영화진흥위원회를 도구로 용산·세월호 참사, 강정 제주해군기지를 비판적으로 다룬 독립영화 17개를 지원 배제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다른 문화예술 장르의 블랙리스트와 달리 독립영화의 경우 ‘특정 키워드’를 설정하고 이와 연관된 영화들이 지원 대상에 오르면 국가정보원이 사전 검증하는 시스템으로 작동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관 합동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는 2014~2016년 정부가 영진위의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과 ‘다양성영화개봉지원사업’ 부문에서 정부·사회 비판적 독립영화들을 배제한 사례 27건(중복 작품 포함)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발표는 특검 수사와 감사원 감사를 통해 드러난 부산국제영화제와 예술영화 지원 배제 등 8건 외에 새로 드러난 블랙리스트 사례로 더 많은 블랙리스트의 존재 가능성도 시사한다.  정부가 ‘문제 영화’로 낙인찍기 위해 선정한 키워드는 정부·공권력·정치 비판(좌파적 성향) 한진중공업, 밀양송전탑, 용산·세월호 참사, 강정해군기지(시국사건) 위안부, 재일조선인(역사) 대북, 간첩, 국가보안법(북한 연관성) 시네마 달 등 블랙리스트 단체 연관성 등으로 드러났다. 작품으로는 용산 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2’, 강정 해군기지가 소재인 ‘구럼비 바람이 분다’, 국가보안법을 영상으로 풀어낸 ‘불안한 외출’, ‘자백’ 등이다.  블랙리스트 가동 경로는 청와대→문체부→영진위→국정원·문체부였다. 이 과정에서 문체부는 영진위 측에 ‘국정원 스크린 여부’를 점검했으며, 국정원은 문체부의 최종 대처를 확인하는 등 정부 기관끼리 사전 논의한 정황도 확인됐다. 아울러 국정원에 의해 개봉 차단 조치가 이뤄진 작품 중에는 박 전 대통령 비하 영화로 분류된 ‘철의 여인’(2013년 4월)과 청와대 비판 영화 ‘자가당착’(2015년 1월) 등이 있다.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블랙리스트가 가동됐다면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1987’도 여러 압력을 받았을 것”이라며 “현재 영화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적용 부분과 상업영화의 투자배급과 연관된 모태펀드에 대한 조사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재일동포에 혐한발언 인격권 침해”…日법원, 극우단체에 손해배상 판결

    “재일동포에 혐한발언 인격권 침해”…日법원, 극우단체에 손해배상 판결

    일본 법원이 재일동포에 대해 인터넷상에서 혐한 발언을 한 일본의 극우단체와 활동가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아사히신문이 1일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지난달 29일 재일 조선인 작가 리신혜(46) 씨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과 이 단체의 사쿠라이 마코토 전 회장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에 대해 77만엔(약 745만원)을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 법원은 앞서 열린 1심과 2심에서도 리씨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9월 판결에서 재특회 측이 2013~2014년 거리집회와 인터넷 방송, 트위터에서 리씨에 대해 “허위사실을 쏟아내고 있다”, “조선인 할머니다” 등의 발언을 했다며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범위를 넘은 모욕행위로 원고의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지난 6얼 2심 판결에서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조장해 증폭시키려는 의도로 행해졌다”며 1심 판결을 지지했다. 리씨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피해를 당하더라도 소송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며 “여성차별, 민족차별 발언이라는 것이 인정돼 다행이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3 사건 함께 못한 죄책감이 건축물 같은 픽션 쌓아”

    “4·3 사건 함께 못한 죄책감이 건축물 같은 픽션 쌓아”

    “일본 첫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70년대 초반 ‘조선을 문학의 주제로 삼으면 보편성이 없다’는 얘기를 했어요. 어찌나 굴욕적이던지 일본 문예지에 반론을 쓰려 했는데 작가가 자살하면서 기회를 놓쳤어요. 그 말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던 지배 논리의 잔재이자 문학적 제국주의나 마찬가지 아니오. 그래서 일본어로 조선에 대해 쓰더라도 보편성을 지닐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일본어란 외피로, 상상력을 무기로, 제주 4·3사건을 소설로 썼죠. 험하고 외로웠지만 그것이 작가로서의 내 자유와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었지.”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92)이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알리고 진상을 밝히는 데 평생을 걸었던 이유다. 내년이면 70년을 맞는 제주 4·3사건은 작가의 마음속엔 여전히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비극이다. 서울 은평구청이 제정한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초대 수상자로 시상식 참석차 방한한 그는 18일 기자들과 만나 “4·3사건을 전해 들으며 받은 충격과 그 지옥세계에 함께 있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건축물 같은 픽션, 하나의 우주를 쌓아 올리게 했다”면서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192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발표한 소설 ‘까마귀의 죽음’으로 제주 4·3사건의 참혹함을 처음 전 세계에 알렸다. 1976년 일본 문예 춘추사 ‘문학계’에 연재를 시작해 1997년 완성한 원고지 2만 2000매의 소설 ‘화산도’는 4·3사건과 해방 직후의 혼란상을 그려 폭력의 한가운데 인간의 존엄을 일깨운 역작이다. “화산도는 발표 직후 10년간은 일본에서 영 평가를 못 받았어요. 사소설이 주류인 일본 문학과는 달라 이단자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너희도 이런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작품을) 밀어 댔죠. 일본 문단에 빌붙어서 등장하지 않고 주류 문단에 머리 숙이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 해도 내겐 큰 긍지요.” 그는 남북한과 일본, 어느 쪽의 국적도 거부하는 조선적(朝鮮籍)을 고수해 고국을 찾을 때마다 여행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제주를 그린 ‘화산도’를 쓰면서도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상상력에 의존해야 했던 그는 “고향 산천 냄새를 맡고 땅도 밟아 보고 싶었다”고 울먹이며 “1988년 42년 만에 고국에 왔을 때는 흥분해서 하루에 평균 두어 시간 자면서 고국을 둘러봤다”고 했다. 2015년 4월 제주 4·3평화상 수상 당시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연설이 논란이 되며 그해 10월 심포지엄 참석을 위한 입국이 불허되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분단된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자체가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니란 증거로 재일 조선인이란 등록표를 만들어 줬어요. 그건 국적이 아니지, 말하자면 기호죠. 남과 북, 어느 쪽의 국적도 선택하지 않은 건 분단된 나라, 동강난 한 조각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야. 한겨레의 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지.” 아흔을 넘긴 나이지만 하루 한 시간씩 체조와 산책을 빼먹지 않으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그는 아직도 창작의 열망이 깃든 눈빛으로 말했다. “화산도를 마치면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해 왔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써 보고 싶거든.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여자 편에 서고 싶은 자기반성이 있는 거죠. 어디까지나 내가 한번 여자가 돼서 남자를 부려먹고 싶소.”(웃음) 글 사진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제정… ‘분단문학의 큰 별’ 빛낸다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제정… ‘분단문학의 큰 별’ 빛낸다

    남북 문제 천착한 수십 편 창작재일작가 김석범 초대 수상자에특별상엔 김숨… 17일 시상식 ‘분단문학의 큰 별’로 평가받는 이호철 작가를 기리는 문학상이 처음 제정됐다. 서울 은평구는 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제정’을 선포했다. 초대 수상 작가로는 소설 ‘화산도’의 김석범 작가를 선정했다.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은 분단 현실을 비롯해 민족, 사회 갈등에 관한 집필 활동을 하다 지난해 9월 타계한 이호철 작가의 정신을 되짚고 그 뜻을 기리고자 마련됐다.고인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전쟁에 인민군으로 동원돼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뒤 이듬해 1·4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1955년 ‘문학예술’에 단편소설 ‘탈향’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60여년간 장편소설 ‘소시민’, ‘서울은 만원이다’, ‘남풍북풍’ 등 수십 편의 작품을 통해 전쟁과 남북 분단 문제에 천착해 왔다. 남과 북의 분단을 잇는 통일의 길목 은평구에서 50년 이상 거주하며 마지막까지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김우영 은평구청장은 이날 이 작가가 국립한국문학관의 은평구 유치를 위해 유치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던 일을 소개하며 “이 작가는 국립한국문학관에서 마지막 작품을 쓰고 싶다. 마지막엔 ‘귀향’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밝혔다. 이어 “이 작가가 말한 귀향은 단순히 고향에 돌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치유하자는 문학정신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염무웅(문학평론가)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심사위원장은 “통일을, 분단 극복을 주제로 한 상이 아직 없었다는 게 의아스럽다. 그래서 이 상의 제정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은평구는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자문위원회 및 운영위원회, 추천선고위원회 및 심사위원회 등을 운영했다. 초대 수상 작가로 선정된 김 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재일조선인으로 1957년 4·3사태를 다룬 최초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해 전 세계에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알렸다. 1976년에는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 ‘화산도’를 일본 문예 춘추사 ‘문학계’에 연재했다.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특별상은 소설가 김숨 작가가 수상했다. 그는 1997년 ‘느림에 대하여’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투견’, ‘국수’ 등의 소설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연민,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형상화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장편 ‘한 명’을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시상식은 통일의 염원을 담아 경기 파주 DMZ에서 오는 17일 열린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이방인… 노숙자… 소외된 아픔을 들춰내다

    이방인… 노숙자… 소외된 아픔을 들춰내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요.…나는 무식한 아줌마여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어요. …제발, 사람이 소중한 나라, 사람 목숨이 소중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아들이 입고 뛰었던 운동복을 든 여인은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가슴속에 맺힌 한을 털어놓는다. 백범 선생의 좌상을 본뜬 거대한 조형물에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비롯해 탈북 예술가, 해고 노동자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귀화한 영화배우, 동성애 인권운동가, 20대 청년 등이 각자의 소원을 말하는 모습이 투사된다. 한결같이 억압과 차별을 견뎌 온 사람들, 심리적 외상과 박탈감에 고통받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가득 메우며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폴란드 출신의 공공미술 거장 크지슈토프 보디츠코(74)의 신작 ‘나의 소원’이다. 자주적인 문화대국을 꿈꿨던 백범의 ‘나의 소원’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지난해 5월부터 약 1년간의 조사를 거쳐 백범을 상징적인 인물로 선정한 데 대해 그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통일된 한국에 대한 비전을 기쁨의 국가,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환되는 민주적인 국가, 제국주의가 아니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문화에 초점을 맞춘 그런 국가를 꿈꿨다”면서 “이상적인 사회, 특히 민주주의를 향한 기대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결코 타인의 고통의 깊이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 귀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귀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면서 “심리적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예술가도 사회의 고통과 문제를 극복하도록 예술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1943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보디츠코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1968년부터 현미경을 디자인하는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업무 이외의 시간에는 실험적인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운영하던 대안공간(갤러리 포크살)을 중심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캐나다의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캐나다로 이주한 그는 1980년대 들어 미국 뉴욕과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카셀 등 여러 도시에서 사회비판적,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야외 프로젝션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세계 각지에서 난민, 외국인, 노숙자, 가정폭력 희생자 등 상처받고 억압된 사람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발언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공공 프로젝션과 디자인 작품을 선보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이번 전시는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의 주요 작품 80여점이 총망라된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사회의 주요 담론을 선도해 온 보디츠코의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회고전 형식의 5전시실은 모두 4개 파트로 구성됐다. 폴란드에서의 초기작으로 최초의 퍼포먼스 작품인 ‘개인적 도구’와 바삐 움직이는 공공장소에서 혼자 느린 속도로 걸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수레’, 사방으로 감시당하고 막막한 상황을 표현한 ‘자화상’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억압 간의 긴장을 다룬 작품들이 소개된다.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논의할 때 자주 언급되는 대표작 ‘노숙자 수레’도 눈길을 끈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폐타이어를 태운 열로 몸을 녹이는 노숙자, 쇼핑카트에 빈 캔을 모아 파는 노숙인들의 모습을 본 그가 쇼핑카트를 개조해 만든 복합기능의 수레는 사람들이 길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도록 내몰린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90년대 초에 발표한 ‘외국인 지팡이’와 마우스피스 모양의 ‘대변인’은 거리에 들고 나가면 누구라도 쳐다볼 기이한 모양이다. 보는 사람들이 말을 걸게 만듦으로써 발언과 소통의 기회를 내포한 작품들을 작가는 ‘문화적 보철기구’라고 부른다. 공공장소에서 건물 외벽 등을 스크린 삼아 영상작업을 투사하는 공공 프로젝션에서는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현지 공동체와 함께 진행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치료에서 차별을 받은 재일조선인 등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히로시마 프로젝션’(1999), 가정폭력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티후아나 프로젝션’(2001) 등 10점의 영상이 소개된다. 보디츠코는 “프로젝션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가 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경험을 다른 곳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면서 “대규모 집회나 시위를 통해 공공장소가 활기를 띠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공공장소에서 보여 준다면 시위나 집회가 일어날 이유와 조건이 조금은 줄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 ‘나의 소원’은 7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20세기 조선 밀항자들은 전후 일본 - 해방 한국 두 주권 사이 잉여자였다

    20세기 조선 밀항자들은 전후 일본 - 해방 한국 두 주권 사이 잉여자였다

    “너! 오무라에서 나간다니까 그렇게 좋아?” “예, 일본이 좋습니다. 일본에 살고 싶어요.” “오무라에서 있었던 일, (떠들지 않는 거) 알고 있지?”(1960년대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 입국관리소 직원과 체류가 허가된 조선인 밀항자 간 대화) “(김일성 사진을) 안 봤다고 해도 매 맞고, 봤다고 해도 매 맞고, 이거는 맞는 거야. 이거 말해도 되나? 괴정 수용소는 죽음의 장소야.”(1970년대 일본에서 추방된 강제 송환자들을 수용한 부산 괴정 수용소에 대한 증언)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식민지 제국이 붕괴된 ‘전후 일본’, 그리고 혼돈과 폭력이 횡행했던 ‘해방 한국’, 그 양 극단의 국경선에 균열을 낸 20세기 조선 밀항자들은 냉전과 국민 국가로 이행하던 두 주권 권력 모두로부터 폭력과 배제를 경험했다. 오무라 수용소는 1970년대까지 조선인 밀항자를 억류하며, ‘일본의 아우슈비츠’로 불린 악명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 밀항자들은 괴정 수용소에 머물며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공식 기록 없이 단편적 문헌과 구술로만 존재했던 20세기 조선인들의 탈국경 역사를 복원한 책 ‘주권의 야만-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한울)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기획으로 1일 출간됐다. 일본으로의 밀항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만 7733명(검거자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일본 점령군의 대책 없는 귀환과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와 일본 간 일상화됐던 양국의 이동과 단일 생활권은 식민지 붕괴로 차단됐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밀항자가 다소 감소했지만 1946년부터 1979년까지 8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에서 검거됐으며 이 중 7만여명이 한국, 북한, 제3국으로 송환됐다. 책은 밀항과 수용소가 일부 조선인의 특수 경험이 아닌 20세기 한반도와 일본 간 인구 이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조선 밀항자는 개별적으로 ‘절박한 선택’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점유한다. 양국 주권의 입장에서는 ‘주권을 위협하는 불법적 존재’들이자 그 어디에서도 주체성을 묻기 어려운 ‘잉여적 존재’들이었다. 반공 체제가 구축된 한국에서는 배신자 혹은 간첩 취급을 받았다.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 세 축을 한데 묶은 이 책이 들춰내는 게 바로 20세기 미완의 탈식민화와 동아시아 냉전 질서를 배경으로 은폐된 모순과 억압이다. 양국의 오무라 수용소와 괴정 수용소 모두 주권 밖의 잉여적 존재들을 걸러내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며 “냉전 체제 한·일 정부가 적대하면서 협조하는 모순이 중첩된 무대”였음을 이 책은 밝힌다. 책은 이 밖에 양국의 냉전 질서 밖에서 사상과 운동을 전개한 자들의 흔적을 좇고, 1970년 전후 재일조선인 문학에 나타난 ‘인류’(人流) 현상도 밀항, 민족, 젠더의 관점에서 다룬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40년전 납치된 일본인 평양서 입원”

    日 “진위 확인 불가”… 北은 부인 약 40년전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마쓰모토 교코(68)가 현재 평양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의 주장을 인용해 16일 보도했다. 최 대표는 평양 소식통을 인용해 마쓰모토가 시력이 극도로 나빠졌으며 통풍 합병증 치료 등을 위해 평양 적십자종합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마쓰모토의 신변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 일본인 납치 피해자로 알려진 요코타 메구미의 전 남편이자 한국인 납치 피해자인 김영남씨도 이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최씨는 설명했다. 최씨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쓰모토는 북한에서 결혼한 뒤 청진에서 꽃가게를 하며 살다 2011년 북한 당국이 특별 감시대상으로 지정하자 평양 순안 구역으로 옮겨졌다. 마쓰모토가 특별 감시대상에 지정된 이유는 일부 북한 관련단체들이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남편은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 때 북한으로 건너간 한국인이며 마쓰모토가 평양으로 이동할 무렵 사별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 관계자는 마쓰모토가 입원 중이라는 주장에 대해 “진위 확인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마쓰모토는 29세이던 1977년 10월 21일 오후 8시쯤 “뜨개질 교실에 간다”며 돗토리현 요나고의 자택에서 나간 뒤 실종됐다. 일본 정부는 2006년 마쓰모토가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라고 인정했지만 북한은 이를 부인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한일합의로 위안부 문제 끝내선 안 돼”

    “한일합의로 위안부 문제 끝내선 안 돼”

    30년간 올곧은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기자에게 치욕을 주는 건 ‘팩트’를 왜곡하는 기자라는 일방적인 중상 비방일 게다. 게다가 그 공격이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살해 예고로 이어진다면 그런 참혹한 협박에 자신이 쓴 기사의 ‘진실’을 부인해야 할까. 이는 우에무라 다카시(58) 전 아사히 신문기자의 얘기다. 그는 1991년 8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도한 언론인이다. 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가 쓴 기사가 별안간 날조 기사로 둔갑하고 공격이 쏟아졌다. 이른바 일본 우익들의 ‘우에무라 공격’ 현상이다. 2014년 그가 대학교수로 부임하기로 했던 고베쇼인여자학원대와 오쿠세이학원대는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협박에 굴복해 그의 임용을 취소했다. 인터넷과 블로그에는 그의 딸의 사진과 실명 아래 섬뜩한 내용을 담은 글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쓴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는 바로 25년 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도를 지키기 위해 우익들과 벌인 투쟁을 담은 책이다. 일본어판 제목이 ‘진실’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가톨릭대 초빙교수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우에무라는 26일 한국어판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 12월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정부가 맺은 양국 위안부 합의부터 강하게 비판했다. “10억엔을 내고 위안부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게 조건입니다. 이 합의가 한국과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위안부 문제는 끝난 문제로 하자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재일조선인 차별과 인권 문제를 주로 다뤄 온 아사히신문 사회부 기자 우에무라는 1991년 8월 10일 서울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테이프에 녹음돼 있던 김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첫 위안부 기사를 내보냈다. 사흘 뒤 김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마침내 우에무라의 특종은 역사 앞에 일본군 위안부의 민낯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까지 발표했다. 최근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은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 세력들의 반격이다. 위안부 문제를 날조로 만들려는 시도다. 그는 책에서 우익들의 날조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고통스러운 협박과 폭력의 기억을 담담히 진술한다. 우에무라 교수는 “내 개인 문제가 아니라 용기를 내어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진실을 보도하려는 언론에 대한 압박”이라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는 매주 도쿄와 삿포로에서 진행 중인 명예훼손 소송을 위해 양국을 바쁘게 오가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그의 딸이 자신에게 인신공격을 가한 중년 남성과의 재판에서 첫 배상 판결을 받아 내 그에게 큰 용기를 줬다. 우에무라 교수가 가톨릭대에서 맡은 강의 이름은 ‘동아시아 평화와 문화’다. 그는 “정말 소망하는 건 일본과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우호 관계를 맺도록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조총련 기관지, 북한 핵실험 후 “끝장 볼 것”

    조총련 기관지, 북한 핵실험 후 “끝장 볼 것”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10일 “(북한은) 이미 시작한 핵 무력 강화 계획을 끝장을 볼 때까지 추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신보는 이날 ‘자기 운명은 오직 자기 힘으로, 전쟁억제를 위한 단호한 조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 전쟁연습과 (대북) 제재소동으로 남은 임기를 채우기로 결정한 조건에서 (북한은) 수소탄 시험을 기점으로 하는 새 단계의 핵 무력강화 계획을 끝장을 볼 때까지 주저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또 다른 길을 검토했었다”며 “미국이 남조선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한다면 핵시험을 임시중지할 수 있다고 밝혔고, 평화협정 체결로 조미(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할 데 대한 제안도 거듭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러나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핵전쟁억제력을 갖춘 조선의 전략적 지위를 바로 보지 못하고 무모한 전쟁훈련과 악랄한 제재소동에 매달리고 있다”며 이번 핵탄두 폭발시험은 이에 대한 실제적 대응 조치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앞으로) 미국과 추종세력이 헤어날 수 없는 궁지에 더 깊이 몰아넣기 위한 파격력(파괴력)이 큰 사변적인 조치들이 다계단적으로 취해질 것”이라고 위협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국·북한·일본의 ‘경계인’ 재일조선인, 또 다른 이름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

    한국·북한·일본의 ‘경계인’ 재일조선인, 또 다른 이름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

    자이니치의 정신사/윤건차 지음/박진우 외 옮김/한겨레출판/ 928쪽/4만 5000원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용어가 일정한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성을 띠고 있는 반면 197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한 ‘자이니치’(在日)는 단지 ‘일본에 있다’는 뜻의 보통명사다. 한국, 북한, 일본 세 나라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이니치의 정신사’는 자이니치 2세이자 한·일 현대사상사 연구가인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 대학 명예교수가 온 삶을 걸고 쓴 역작으로,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재일조선인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을 의미하는 역사적 용어다. 하지만 그 출발은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이다. 1911년 2527명에 불과하던 재일조선인은 1945년 해방 당시 230만명으로 늘었다. 생계를 위해 밀항한 이부터 일본 본토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강제 연행된 이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 귀환을 서둘렀지만 결과적으로 60만~70만명이 일본에 남게 됐다. 저자의 경우 1930년 도일한 부모 밑에서 1944년 12월 태어나 다섯 살 무렵 귀환하려다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돼 일본에 머물게 됐다. 이처럼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내몰려지곤 했다. 책은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자이니치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해 어떻게 신음하고 고뇌해 왔으며 일본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고군분투해 왔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각종 학술자료와 200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이니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책의 제목에는 ‘정신사’를 내세웠지만 내용은 재일조선인의 사상·정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이니치가 가지는 의미를 역사·정치·사회·문화·문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해방 이후 점령 공간의 재일조선인, 조총련의 탄생과 민족갈등, 북한의 귀국사업과 한일조약에 이어 자이니치의 사상·사회운동사와 재일 문단, 자이니치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의 삶 등 여성·젠더 문제까지 다뤘다. 저자는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적 체질과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절대적 소수자인 자이니치의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되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최전선서 조총련과 맞섰지만…동포 줄면서 조국도 잊더군요

    최전선서 조총련과 맞섰지만…동포 줄면서 조국도 잊더군요

    일본 땅에서 교포의 권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 모국과의 다리 역할을 해 온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의 격렬한 노선 경쟁, 일본 사회의 차별시정 투쟁 등 민단 70년의 굴곡과 현재의 모습을 ‘재일교포의 요람’으로 불리는 오사카와 도쿄 등의 현지 취재를 통해 바라봤다. 민단은 1946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란 이름으로 결성됐다. 일본 땅에 설립됐던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북한 쪽으로 기울자 이에 반발한 이들이 뜻을 같이한 여러 단체들을 합쳐 민단을 세웠다. 창설 당시 일본에 남은 한국인은 64만 7000여명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재일 한국인은 193만 6843명까지 불어났다가 광복 후 귀국 대열에 끼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었다. 지난 19일 현재 민단 등록자는 33만명(8만 2091세대)으로 집계됐다. 도쿄의 중앙단과 전국 48개 지방본부, 276개 지부를 두고 있다. 이처럼 대단한 재외 국민 조직은 일본 말고는 없다. 그러나 세월의 풍화 속에 주역이 바뀌면서 민단도 흔들리고 있다. 전국적으로 70~80세의 고령이 이끄는 조직이 돼 버렸다. 젊은 세대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잦은 이사에 어디로 갔는지 파악조차 안되는 경우도 많다. 민단의 위상이 추락한 직접적인 원인 동포 수 감소에 있다. 귀화자까지 포함해 1995년부터 한 해 1만명 이상이 줄었고, 2011년 이후에도 한 해 8000~1만명이 감소했다. 1993년부터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많아졌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귀화한 재일 한국인은 34만명으로 파악됐다. 1970~80년대에는 해마다 4000~5000명이 귀화하다가 1995~2005년에는 한 해 1만명이 넘게 귀화자가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부금과 단원 회비도 줄고 있다. 단원 20만명이 활동하는 ‘민단의 고향’이란 오사카 등 긴키지방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민단 오사카 본부 관계자는 “수억·수천만엔의 뭉칫돈을 내놓으며 단합을 주도하던 지도자들도 사라져 가고, 지방 말단 지부와 산하 단체들도 슬그머니 없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1980년대까지는 재일 한국인들은 민단을 거쳐야 재외국민신고도 하고, 여권도 발급받을 수 있어서 조직 유지가 수월했다. 하지만 제도가 바뀐 뒤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조총련과 대척점에서 팽팽하게 맞서던 활력도 시들해지고 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당시 조총련과의 화합 정책 등이 진행됐지만 지금은 다시 조총련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 원로 단원은 “대한민국 최전선에서 북한·조총련과 치열한 싸움을 해 왔던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며 섭섭해했다.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으로 10만 가까운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속아서 넘어갈 때 국교도 없던 그 시기 민단은 시위를 벌이며 북송 저지에 안간힘을 썼다. “한국전쟁 때 642명의 재일 학도병들이 자유민주주의 편에서 참전, 135명이 산화한 것만으로도 민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고 민단신문의 배철은 국장은 강조했다. 민단 중앙의 하정남 사무총장은 “모국에선 조총련은 잘 알면서 오히려 민단은 잘 모른다”며 “재일동포의 역사, 민단 역사를 역사책, 교과서에 넣어 주고 알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 총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뒤 특별영주권 신청 운동, 조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 사업 등도 민단이 벌였고, 지난 5월 재일 한국인에 대한 혐한 발언인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에 대한 일본 내 입법화도 민단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도쿄·오사카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문경근의 남북통신] 뜨는 신의주와 지는 원산…북한 지역 간 ‘흥망성쇠’

    [문경근의 남북통신] 뜨는 신의주와 지는 원산…북한 지역 간 ‘흥망성쇠’

    서울과 인접한 ‘인천’의 인구가 300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조만간 제2의 도시 ‘부산’을 앞지를 기세입니다.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국경을 맞닿아 있는 현 상황에서 항만과 공항을 보유하고 있는 인천은 다른 의미에서 ‘접경도시’이기도 합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은 인천이 부산을 추월할 수 있는 근거로 지목됩니다. ‘14억 인구’, ‘세계의 공장’,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는 중국과 인접하고 있는 인천은 그야말로 ‘복터졌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입니다. 1970~80년대 부산이 일본의 호황과 맞물려 번성했듯이 지금은 인천이 중국‘덕’을 보고 있습니다. 북한에도 일본의 침체와 중국의 부상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지역 있습니다. 바로 ‘신의주’와 ‘원산’ 입니다.  뜨는 신의주와 ‘화교·조선족’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90%이상이 중국과의 교역이고, 압록강 철교를 통한 육로 수송인 점을 감안하면 북한 내 대부분의 무역활동이 신의주에서 이뤄진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지속하면서 신의주 인근 황금평, 위화도 등 대표적인 북중 경협 프로젝트들이 모두 중단돼 현재는 괄목할 만한 개발이 없지만, 핵문제가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면 북중 간 사업들은 봇물 터지듯 재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이 뜨면서 덩달아 북한에 살고 있는 화교들과 조선족들의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전세계에 화교들이 안 가있는 나라가 없듯이 북한에도 많은 화교들과 조선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1960~70년 중국 ‘문화대혁명’ 때 정권의 핍박을 피해 북·중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피신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주민들도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간 사람이 3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인생사 돌고 돈다’는 말이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화교들과 조선족들 대부분은 북·중 국경이 맞닿아 있는 신의주와 룡연, 정주, 선천 등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분포돼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은 중국이 발전을 시작한 1990년대 친척방문을 통해 북한과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잇점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보짐장사를 하면서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단동-신의주, 신의주-평양 열차를 이용해 봇짐장사를 하는 화교들과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그들 중심으로 북한의 경제권이 형성돼 갔습니다. 북한이 국제사회로 부터 대북제재가 강화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중국과의 정상 교역이나 밀무역을 통한 상거래는 더욱 활발해지고, 화교들과 조선족들의 영향력은 확대됐습니다. 중국에서 ‘부’의 상징은 ‘집’입니다. 중국의 문화를 고스란히 옮겨온 화교들은 신의주에서 정원과 주차장을 곁들인 ‘고대광실’(높은 누대(樓臺)와 넓은 집이라는 뜻으로, 크고도 좋은 집을 이르는 말)에서 살고 있습니다.  화교들과 조선족들이 1990년대는 봇짐장사로 부를 늘려나갔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식당과 상점 등을 통해 북한 상권을 잠식해 갔습니다. 신의주와 룡연, 정주 등지에서 웬만큼 큰 식당들은 화교, 조선족들과 북한 당국간의 합자형태로 인해 생겨난 식당들이었습니다. 신의주를 터전으로 삼고 평양과 남포 등 대도시로 진출한 이들은 고리대금업, 부동산 개발·임대, 당구장, 노래방, 사우나, 오락실 등은 물론 운수업, 광물거래, 자원개발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중국경제가 침체되지 않는 한, 북한 내 화교들과 조선족들의 영향력은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는 원산과 ‘재일동포’ 원산은 남한의 부산과 마찬가지로 항구도시이자 북한과 일본을 연결하는 ‘접경도시’입니다. 원산항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항구도시는 1980년대 세워진 북한 내 지방도시 중 가장 화려한 경관을 자랑합니다. 현재는 낡은 아파트들과 상가들이 줄비하지만 과거에는 평양 다음으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원산은 북한에서 평양을 제외하고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2006년 북한인권법을 시작으로 독자 대북제재에 나서기 전까지 일본과 북한을 왕래하던 여객선 ‘만경봉 92호’는 재일동포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이 배는 사람만 실어나른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남겨진 재일북송동포 가족들은 가난한 조국에서 고생하는 형제·자매, 친척들에게 갖가지 생필품과 돈을 보내줬습니다. 수많은 물자들이 이 배를 통해 원산항에 도착해 북한전역으로 펴져갔습니다. 또한 일본의 중고제품은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도 수요가 높아, 북한은 일본과 중국의 중간 교역국가 역할도 했습니다. 덩달아 원산에 거주한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보내온 물자들을 팔아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일제 물건은 북한에서도 ‘최상품’으로 취급돼 고가에 거래됐습니다.  2000년대는 화교와 조선족의 세상이었다면, 1980~90년대는 재일동포들이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도요타, 니싼, 마즈다, 미쓰비시 등 일제차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재일동포들은 북한주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재일동포들이 부러운 나머지 “우리 가족이나 친척들은 일제시대 때 왜 일본에 안갔나”며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1970~80년대 일본 내 도쿄, 오사카 지역에서 ‘빠칭꼬’(일본의 도박 게임)와 ‘야끼니꾸’(일본식 불고기), ‘다다미’(일본식 주택에서 쓰는 돗자리) 등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번 재일조선인들 중 일부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합작사업을 하면서 점차 북한에도 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시 중구역에 거주했던 재일동포 배모씨는 1990년대 기준으로 400만 달러(약 45억원)를 ‘조선합영은행’에 예치하기도 했습니다. 재일동포들 중 일부는 일본에서도 비싸기로 소문난 ‘도요다 크라운’ 승용차를 타며, 평양과 원산 등지에 2층 규모의 서양식 단독주택을 짓고 살 정도였습니다. 또 평양과 원산의 고급식당과 호텔 등지에서 돈을 펑펑 쓰며 사치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만경봉 92호’를 통해 일본에서 중고 자동차, 오토바이는 물론 자전거,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을 들여와 높은 값을 받고 팔아 이익을 챙겼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가장 수요가 높은 ‘기모노’(일본 전통옷)를 들여와 북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옷깃이나, 소매에 ‘수예’를 놓은 뒤 일본에 되파는 방법으로 큰 돈을 버는 재일동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북한의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일본인 납치문제에 반발한 일본이 독자제재를 시작하면서 북한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게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일본정부는 우선 재일조선인들이 북한 내 가족, 친척들에게 보내는 대북송금을 차단했습니다. 북한 선박의 입항금지는 물론 교역도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직격탄을 맞은 곳이 원산입니다. 원산 주민들 대부분이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대일 관련 운송, 가공, 판매, 외환거래 등 연계사업들이 하루 아침에 도산하게 되면서 원산은 부유한 도시에서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일본과의 무역이 중단되자 원산을 중심으로 살던 재일교포들도 길고 긴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일부는 그동안 모아둔 재산으로 다른 사업을 통해 현상 유지에 나섰으나, 대부분은 일본에서 주는 돈을 받고 살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생활고에 찌들게 됐습니다. 북한 내 재일동포들은 ‘오매불망’ 일본의 대북제재 해제를 바라고 있지만, 그 바람은 아득히 멀어 보입니다.   앞으로 주목해 볼 지역은? 북한에서 주요 거점으로 뜰 지역은 평양을 제외하면 우선 ‘나진-선봉’(나선)과 ‘남포’가 될수 있습니다. 나선과 남포 모두 항구 도시로서 이미 북한에서는 특구로 지정돼 있습니다. 북·중·러·일 모두와 교역할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는 나선은 향후 한반도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 거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선의 주변에는 청진과 혜산 등 대도시들이 있어 인구 흡수 측면에서도 다른 곳보다 유리할 전망입니다. 일각에서는 나선에 중국과 러시아,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카지노를 비롯한 복합리조트를 건설할 경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 것이란 전망도 내놓습니다. 실현 여부는 역시 북핵 문제의 진전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남포 역시 평양과 인접해 있는 항구 도시로 남한의 인천과 비슷한 환경입니다. 바다와 수도를 잇는 항구도시로서 평양과도 2개의 고속도로로 연결돼 접근성 측면에서도 다른 지역보다 유리합니다. 북한 내 몇 안되는 특급시로 인구면에서도 평양 다음으로 많습니다. 정확한 인구는 파악되지 않지만 약 80만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남포는 정련소, 제강소를 시작으로 철강, 유리, 조선, 화학공업이 발달했습니다. 남포는 현재는 북한 내에서도 유리, 기계, 유색 금속류 중심 산업 지역입니다. 이미 남한의 대우그룹이 세운 남포공단 등 합작기업을 한 경험도 있어, 앞으로 남북 간 경제협력이 활성화 될 경우 첨단 산업단지로 손색이 없습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조총련 前간부 “대북 종속 끊고 김일성父子 초상화 철거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의 전직 간부가 이 단체의 대북 종속 관계 단절을 집행부에 촉구해 조선총련 내부에서 파문이 일고 있다. 24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히로시마 지방에서 선전간부 등을 지낸 고충의(70·도쿄 거주)씨는 지난달 중순 도쿄에서 열린 조선총련 산하 상공회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를 전원 귀환시킬 것 ▲모든 시설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철거할 것 등을 요구하는 제언서를 배포했다. 허종만 조선총련 의장이 수신자로 명시된 이 제언서에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할 것 ▲북한과의 종속 관계를 끊기 위해 조직의 간부는 조선노동당의 당적을 이탈하거나 당원이 아닌 사람이 맡을 것 ▲재일조선인계 신용조합을 거쳐 사라진 방대한 자산의 행방과 그 책임을 분명히 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더불어 북한의 납치 문제와 개인숭배 등에 대해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호소하면서 “더이상 죄를 쌓지 말라”고 요구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급격히 악화됐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련의 대북 종속에 불만을 가진 내부 목소리가 그동안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처럼 실명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산케이는 지적했다. 이 제언서는 배포 도중 회수됐고, 배포자 고씨는 제명 통보를 받았다. 고씨는 산케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 피해자 관련 뉴스를 볼 때면 모순을 느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며 “실현은 어렵더라도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담아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뉴스 플러스] “中 구속한 일본인 중 1명 탈북자”

    지난 5월 스파이 혐의로 중국 당국에 구속된 일본인 2명 가운데 1명이 탈북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사히신문은 중국 랴오닝성에서 붙잡힌 일본 가나가와현 거주 50대 남성은 재일조선인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960년대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1990년대 후반 탈북해 2000년대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30일 “일본인 2명이 간첩 활동을 해 온 혐의로 체포됐다”고 밝혔다.
  • “대학생 ‘하숙비 잡기’도 지원하는 서울시에 감탄”

    “대학생 ‘하숙비 잡기’도 지원하는 서울시에 감탄”

    “인권 변호사 출신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을 배우러 왔습니다.” 한국의 지방자치 정책과 시민활동 등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야마다 다카오(66) 일본 ‘다문화공생 자치체 정책연구회’(정책연구회) 사무국장은 21일 이렇게 말했다. 정책연구회는 일본 시의회 의원들과 대학교수, 시민활동가 등 민·관·학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4박 5일 일정으로 지난 18일 한국을 찾았다. 올해는 가와사키시와 사이타마시 관계자도 참석했다. 야마다 사무국장은 “박 시장이 한국의 새로운 사회운동을 이끈 인물로 일본의 시민활동가 사이에서 잘 알려졌다”고 전하며 “그가 2000년 일본 시민운동에 관심을 두고 비정부기구(NGO)들을 찾았는데, 이제 일본 시민단체가 한국의 시민활동을 연구하러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일 서울시 인권위원회와 면담한 뒤 “시 공무원이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도 위원회가 시정을 권고해 인상 깊었다”며 “여성·장애인 등 인권 취약계층의 목소리를 반영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노력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익활동가의 크고 작은 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인 NPO지원센터를 높게 평가하며 “‘대학생 하숙비 잡기’ 프로젝트와 같은 실질적 활동까지 지원하다니 신선하다”고 밝혔다. 야마다 국장은 지난 19일 경기 수원시도 시찰했다. 그는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노래교실과 아저씨 밴드를 운영하던데 흥미로웠다”면서 “일본은 재래시장에 경영 비법을 전수하지만 지자체가 이런 프로그램까지 유치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야마다 사무국장은 대표적인 일본 인권활동가다. 1970년 일본 기업의 재일조선인 고용 차별에 맞서 ‘히타치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둬 왔다. 지난해 6월 도쿄에서 열린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롯한 관련 단체들과 ‘일본 정부를 향한 제언’을 발표했다. 야마다 사무국장은 “일본 정부가 성의 있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항의 방문 시위는 당연하다”며“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사죄하고 배상 등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앞으로 일본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내용을 싣는 등 후손을 대상으로 한 교육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2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박 시장과의 면담이 준비됐다. 그는 “일본에선 한국처럼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지자체의 정책을 바꿀 수 없어 시나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구성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글 사진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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