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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연고 재일동포단/1백70명 어제 내한

    정부초청 재일동포 무의탁노인 모국방문단(단장 여기성ㆍ52ㆍ재일거류민단 민생국장)일행 1백70여명이 15일 하오2시45분 후쿠오카발 아시아항공 131편을 시작으로 이날 하룻동안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 「남북공존」으로 체제유지 모색(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4)

    ◎비현실적 「대남혁명」 보류,노선전환 꾀할 듯 최근 북한은 대남·대외 관계에서 전례없이 유연한 자세를 보여 북한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은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에서,회담외적인 문제로 회담자체를 공전시켜오던 종래의 상투적인 태도를 바꿔 본회담 개최에 완전 합의를 하였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된 1차 본회담에서 과거에는 보기드문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고 2차 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할 것에도 합의했다. 그후 북한은 남한음악인들을 대거 초청하는 한편 북경에서는 남북공동 응원단 구성이 논의되었고,양측 선수들의 여느 때보다 다정한 소식들이 연일 들어오고 있다. 또 북한은 일본의 적극적인 대북한접근을 뜻밖에도 수용해버리는 대외전략 변화를 보였고,미국과의 정부간 접촉 촉진 등 대외관계의 모든 부문에서 유연성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였다. 폐쇄체제 속에서 제한된 변화만 해오던 북한이 동구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한꺼번에 보이는 것은무슨 까닭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소련·중국 등 북한의 전통적 우방의 동요에 따른 고립의 심화,내부경제의 핍박 등 국가적 난경을 타개하고 「하나의 조선」을 가시적으로 실증시켜,이른바 분단고정화를 추구하는 한·소 수교와 한국의 유엔단독가입 추진의 부당성을 나타내려는 종합적인 처방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그러한 태도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라면 북한의 대외적인 상황이 바뀌면 또다시 굳어진 자세로 바뀔 것은 정해진 이치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것이 북한의 대남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북한의 태도 변화조짐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며,그러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다.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는 폐쇄사회의 기초와 대남혁명 완성이라는 과업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을 개방함으로써 기존체제의 기초를 동요시키거나 대남혁명을 공공연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남 적화전략도주변상황이 불리하게 변하면 어쩔 수 없이 일시 보류를 시키거나 크게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변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전반에 걸쳐 시작이 되었고,앞으로도 그러한 변화는 지속될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는 폐쇄사회의 특수한 성격상 급격한 변화를 수용할 수는 없으며,점진적인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북한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들 중 우리에게 관심있는 분야를 몇가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점진적인 개방을 통한 변화이다. 북한은 지금 폐쇄와 개방의 기로에 서있지만,개방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숙명적인 것이다. 체제와해의 위기를 최소한으로 피해가면서 서방국가들에 경제를 개방시켜,신속한 체제보강을 겨냥하는 것이다. 미·일을 비롯한 서방선진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침체된 경제(89년도 2.4% 성장)를 활성화시키지 않고서는 체제의 유지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성공적인 북방외교로 심화된 북한의 고립을 모면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88년 12월 연형묵 총리를 기용하면서 종래의 자력갱생을 앞세운 폐쇄적인 주체경제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정책 주력방향을 제시하는가 하면 합영공업부 전자자동화공업위원회 및 도시경영부 등 새로운 경제부서를 증설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던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둘째는 북한주민들의 의식구조의 변화다. 세계적 추세인 개혁·개방·자유화·민주화의 영향이 북한사회에 점진적으로 침습됨에 따라 북한주민들이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독재권력에 항거하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사노청 국제부위원장 김창영은 당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교육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층의 당으로부터의 일탈현상은 점증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바 있고 로동신문(9월21일)은 「제국주의자들이 썩어빠진 부르주아문화와 생활양식을 퍼뜨려 새세대 청년들을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산케이신문(2월15일)은 도쿄의 관계소식통을 인용,최근 평양시내에서 「민주화요구 데모」가 발생했다는 미확인보도가 나돌고 있다고 했으며 통일일보(3월13일)는 김일성 독재를 타도,「북」과 그에 추종하는 조총련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재일동포 사이에서 처음 표면화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의 중앙집권체제가 한번 흔들리게 되면 주민들의 조직적인 자유화·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셋째 북한의 대남전략의 변화이다. 김일성이 생존하는 한 가까운 장래에 북한의 기존 대남전략이 획기적인 변화를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공산권의 본질적 변화 및 대한국수교,남북한 국력격차의 확대,한국의 민주화 발전을 통한 정치적 안정과 남북한 군사력의 균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북한은 남북평화공존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앞으로 대남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기대를 포기하자마자 비현실적인 대남혁명노선을 일단 보류하고 남북공존으로 노선전환을 하게 될 전망이다. 김일성도 그동안남북공존에 반대했었으나 88년 신년사를 통해서 「남북한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9월8일 40주년 9·9절 행사 연설에서는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공존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태도를 바꾼 바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통일을 외면하고 체제유지를 위한 자기적응이기 때문에 결국 조국의 통일은 그만큼 지연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북쪽에 다른 체제가 공존하는 한 남북한간의 경쟁과 대결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며 평화공존의 기초위에서 통일을 성취하는 일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큰 과제가 될 것이다.〈유석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 한ㆍ일 아주국장회의/내일 서울에서 개최

    재일동포 후손지위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한일 고위실무회의가 오는 14일 서울에서 열린다고 외무부가 12일 밝혔다.
  • 오늘의 「한반도 상황」 서대숙 교수 진단

    ◎“「평양 빗장」 생각보다 단단… 통일은 아직도 멀다”/북녘선 「4.19」식 급진적 변혁 기대못해/상호검증 전제되어야 군축협상 진전/통일열기 한국쪽만 “후끈”… 차분한 접근 바람직 서대숙 교수는 한국의 남북한 문제는 동서독과 다르며 통일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전망했다. 북한은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를 앞두고 있어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으며 동서 화해무드와 관계없이 북한은 주체사상을 고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선 북한에는 언제 다녀왔는가. ▲지난 7월6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 갔었다. 작년에는 8월말에 가서 9월초에 나왔다. 자주 다니고 보면 더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갔었다. ○동ㆍ서독 경우와 달라 ­통일과 남북교류에 관한 견해는? ▲나는 우리나라 통일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통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한국에서 모두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ㆍ글라스노스트 해서 조금 더 소련이 개방되고 소련에서 공산당을 개편하고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없애고 자기들도 잘 살아봐야겠다는 입장에서 변하고 있는데다가 동구 나라들이 다 공산당을 없애고 이제는 정말 사회주의국가 경제체제로는 못살겠다 하는데서 나온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이제는 굶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런면에서 대내적인 원인으로 이제는 먹고 자고 입고 이런 것은 모두 해결하고 대외적으로도 떳떳하게 나가고 돈도 좀 있고 이러니 이제 나라를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분으로 통일에 관한 열기가 굉장한데 우리나라의 통일이라는 것은 남한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북이 관련돼 있다. 그러니 이북하고 이남하고 같이 하지 않고서는 통일이라는 것이 안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남한에서 이북을 너무 모른다. 이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괜히 혼자 흥분하고 있다. 이북에서는 아주 완고하게 자기주장을 말하는 그런 곳이다. 지난 해에도 평양에 가서 김일성대학 총장도 만났는데 김일성대학에서 나 아니라도 나같은 사람,외국에서 와서 반공적이 아니고 친한적이 아닌 좀더 객관적으로 남북한사정을 보는 사람들을 그곳의 학생들과 토론하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의 만세를 불러야만 그곳에서 문을 열어주고 「아 이 사람은 애국자다」하는 것이지 아직은 이북이 열려져 있거나 열려지려는 태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통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남한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북에 있을때도 그곳의 학자들과 임수경양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들의 운동선수가 이북은 올림픽을 보이콧하는데 어떻게 몰래 남한에 가서 마라톤에서 1등을 하고 노태우 대통령 앞에 가서 인사하고 나는 고향이 평양이니 휴전선을 통해 이북으로 오겠다고 할때 당신들이 받아주겠는가? 그리고 처벌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더니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행진하겠다고한 범민족대회의 경우도 그렇다. 이북에서 자기들의 통일주장을 지지하는 재일동포ㆍ재미동포ㆍ재중동포 등 다 모아다가 전국에서 왕왕하고 해서 통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나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나 다 통일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제도나 민도나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이 너무 달라 지금은 안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직 통일이 요원하다고 말한다. ○제도ㆍ민도 너무 달라 ­북한은 다른 세상 다 바뀌어도 바뀌지 않을 무풍지대란 말인가. ▲안바뀐다. 이북의 변화는 이북체제내에서 그 사람들대로의 변화가 와야지 옛날에 있었던 4.19같이 『못살겠다 갈아보자』해서 국민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김정일은 김정일대로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 무엇을 좀더 잘하고 이루려고 하거나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상상하는 그런 혁신적인 변화는 없다.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군축문제가 논의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는데 의견이 접근될 수 있을지,또 고위급 회담에 진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지. △지금 강영훈 총리와 연형묵 총리가 무슨 이유로 만나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군축문제 같은 것은 다른 나라에서 하는 것을 보라. 소련과 미국의 경우 얼마나 힘들게 오랫동안 협상을 벌여왔는가. 미소관계가 군축문제로 좋아진 것이 아니다. 소련내의 개혁 등 다른 일로 좋아졌다. 나는 군축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군축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믿지 못하면 가서 조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측이 서로 신뢰라는 것은 없다. 남한사람은 이북을 안믿고 이북도 남한을 절대로 안믿는다. 이북에서는 큰 문제가 해결되면 작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큰 문제부터 해결하자 하는데 큰 문제는 절대로 먼저 해결되지 않는다.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올림픽이 실마리가 못됐다. 아시안게임도 남북단일팀이 안돼 실마리가 되지 못했다. 이산가족문제도 남한문제다. 이북에는 이산가족 문제가 없다. ○“북엔 이산가족 없다” ­이북에도 이산가족이 있지 않은가.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이 남쪽에는 많지만 남쪽 사람들이 북으로 간 사람은 적다. 그때 잡혀간 사람들도 이제 거의 다 죽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때 이북으로 간 사람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밖에 없다.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은 거의안갔다. 이남에는 피란온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고향이나 한번 가보고 가족이나 한번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지금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부모들은 벌써 계시지 않는다. 이번에도 내가 이북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그는 이북에다 6살난 딸을 두고 왔다가 어떻게 딸의 소식을 알아서 이북에 갔다. 그 딸이 지금 46살인데 부녀간에 만났으나 정을 못느꼈단다. 그 딸은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떠나 살다가 이제 가족이 있고 또다시 같이 살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는가.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하느님이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한다. ­한국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국도 문제가 있다. 동서독 통일하는 것을 보고 『야 이거 우리도 하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남한사람들이 동독 서독의 경우를 보고 서독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도 그만큼 투자하면 되지 하는데 한국사람들이 자기를 모르는 것이다. 한국은 서독이 아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시절을 모르는 꼴이다. ○반정ㆍ친북 구분해야 ­서울에서 89년에 6개월간 강의하셨는데 젊은 학생들의 생각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나한테 제일 가슴아팠던 것은 학생들이 공부를 안하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의 학생들은 정부비판과 친북한 활동을 구별 못한다. 정부에서 잘못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 친북한 활동을 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정치문제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예를 들어 『미군 철수하라,미국 대사관에 CIA등을 대사로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나라에 사는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조건하고 이북을 찬양하는 것,주체사상의 주자도 모르면서 얘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에 대해 공부를 해서 북한을 많이 알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남한정부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맹목적으로 이북을 좋아하는 것이 어리석고,대학생답지 않게 보였다. □서대숙 하와이대 한국연구소장 ▲1931년 중국 간도 용정에서 출생. ▲1946년 월남해 연세대 정외과 1년때인 52년 도미. ▲1964년 미 콜럼비아대에서 「조선공산주의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 재일동포 지위향상 공동성명 채택키로/한ㆍ일 의원련 총회

    제18차 한일ㆍ일한의원연맹 총회가 오는 5,6일 한일의원연맹회장인 박태준 민자당최고위원과 다케시타(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등 양측 의원 1백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시내 동조회관에서 열린다. 특히 합동총회에서는 재일동포의 법적지위향상문제등 양국간 현안의 해결과 상호 우호협력증진을 위해 노력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할 예정이다.
  • 일 어학연수생 부업알선 미끼/일당 30%소개비로 갈취

    ◎20여학원 수사나서 【부산=김세기기자】 한국인 어학연수생을 모집한 일본의 어학연수학원이 부직알선을 미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피해시민들의 진정에 따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부산시경은 29일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B통역관광학원,N관광학원 등의 알선으로 지난해 11월과 올 3월 일본 기부국제외국어학원 2년과정의 랭기지스쿨에 입학했던 연수생 1백40명이 이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용역회사 평전림업(대표 김정일재일동포)이 제공하는 각종 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받은 일당의 30%를 소개비명목으로 갈취해 왔다고 진정해 옴에 따라 시내 20여개소의 외국어연수학원에 대한 수사를 버리고 있다. 박동희씨(29ㆍ부산 남구 대연3동 613의135) 등 연수생들에 따르면 수수료 입학금 등 1백20만원을 납부하고 지난 3월26일 현지에 도착하자 학원측은 교과과정 설명이나 입학식 등도 하지 않은채 빠찡꼬 식당 공사장 등 업종별로 부직희망자를 모집,부직을 알선했다는 것이다.
  • 여성교육에 평생바친 “큰 이화인”/타계한 김옥길 명예총장의 생애

    ◎80년대 문교장관때 학원자율화 앞장/지조의 70년… 도량 넓어 “여장부”별명/손수만든 평양식 냉면ㆍ빈대떡 대접은 유명 김옥길 이화여대 명예총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25일 서울 이대 후문앞 대신동 골목은 슬픔에 싸여 있었다. 애통해하는 동생 김동길교수와 정의숙전이대총장,윤후정신임총장 등이 지킨 빈소에는 많은 졸업생을 비롯,여성계ㆍ학계 등 사회 각계의 조문객들이 찾아와 자유ㆍ자율ㆍ책임을 강조하며,여성교육의 요람을 키워온 큰 거목을 잃은 슬픔에 할 말을 잊었다. 김옥길명예총장은 4ㆍ19로 상처를 입은 이화여대에서 1961년부터 79년까지 18년동안 총장직을 맡아 종합대학교로서의 반석을 굳혔다. 또한 세종대학 등 많은 사립대학들이 학내문제로 갈등을 겪는 일을 보고 가슴아파했고 병환중에도 자신의 장례준비를 하게했다. 최근 정의숙전총장이 임기를 1년이나 앞두고 사표를 내고 윤후정교수가 총장의 자리를 이어 받게한 것도 다 그의 사려깊음에서 이어진 작품이라는 것이 측근들의 이야기다. 1921년 평남 맹산에서 면장을 지낸 아버지 김병두씨와 어머니 방신근씨 사이에서 태어나 평양 숭의여고에 들어갔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숭의고녀가 폐교되면서 서문고녀로 편입,졸업했다. 40년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전 문과,미오하이오 웨슬리안대,미국 템플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52년부터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어렸을적 한때 『의사가 돼 가난하고 병든사람을 고쳐주겠다』고 생각했고 『여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살겠다』고 했던 꿈은 이루지 못한 대신 여성교육을 위해 평생을 바친 것이다. 그는 61년 고 김활란박사의 뒤를이어 총장에 올라 79년 정년 퇴임을 7년 앞두고 『너무 한사람이 오래 해 학교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후배 정의숙총장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단 새사람에게 맡겼으면 마음 편히 일할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며 7년동안 이대 교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충북 괴산군 연풍면 문경새재에서 촌로처럼 지내며 이대 1백주년인 86년5월 기념강연하기 위해 한차례,그리고 지난4월 고희때 다시한번 이대캠퍼스에 발을 들여 놓았을 정도로 남들에게는 따뜻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는79년 12월15일∼80년 5월17일까지 5개월동안 문교부장관직을 맡아 외도를 했다. 학생소요로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던 당시 당국의 강경책을 거부하고 학원자율화에 앞섰으며 획기적인 교복자율화 실시를 주장,사회에 자율화 바람을 일으켜 최규하내각의 「유일한 남성장관」이란 평까지 받았다. 그의 웅변은 유명하다. 73년9월 남북적십자 2월본회담때(서울) 이산가족대표로,또 76년2월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때 『과거는 울어서 눈물로 한강에 띄워버리고 내일은 하나가 되어 후손에게 영광스런 조국을 심어주자』며 굵직하고 윤기어린 낭랑한 목소리로 명연설을 하여 심금을 울렸다. 「감사하라」 「생각하라」 「수고하라」. 이것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한 말. 평양식 냉면과 빈대떡으로 이웃을 대접하기 좋아했던 푸근했던 총장할머니. 그의 가르침과 사랑을 나눠준 생애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책임과 할 일을 일깨워준다.
  • 「사천왕사 왔소」 개막/어제 오사카/한국문화 일 전파과정 재현

    【오사카=김성호특파원】 일본하늘 아래 민족의 자긍을 한껏 심은 가운데 우리의 가락과 몸짓,그리고 함성으로 오사카를 뒤 흔들어 놓은 축제 「사천왕사 왔소」. 3천명의 재일동포들이 참가한 이 역사문화의 행렬 「사천왕사 왔소」가 19일 하오3시부터 6시까지 오사카 생혼소학교∼곡정근∼사천왕사까지 1.5㎞ 구간을 무대로 막을 올렸다. 축제는 역사행렬 퍼레이드와 사천왕사 석무대에서의 개막공연으로 시작되었다. 백제ㆍ탐라ㆍ신라ㆍ고구려와 발해ㆍ조선 등 시대순으로 이어진 이 행렬에는 고ㆍ양ㆍ부,왕인,담징,인월군,세종대왕 등 일본문화에 충격을 안겨준 우리 역사속의 인물 17명이 의연하게 등장함으로써 눈길을 끌었다. 이들 역사인물을 중심으로 기수와 무희,군사들이 뒤따르며 큰 북을 울리고 「왔소」라는 함성을 열창할때 마다 연도에 늘어선 관중들이 큰 소리로 「왔소」를 화답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이들 시대별 역사행렬은 우리 문화를 적극 수용한 성덕태자 등 일본 역사속의 인물들과 문무백관이 사천왕사 서문에서 출영하는 것으로 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 「사천왕사왔소」 전야제 성황/오사카서 재일동포등 3천명 참석

    【오사카=김성호특파원】 고대 한반도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과정을 재현해 보이는 재일한국인들의 민족문화축제인 「사천왕사 왔소」가 18일 오사카 사천왕사에서 열린 전야제를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이번 행사는 대판흥은을 비롯한 일본 관서지역의 동포들이 20억엔을 모금해 「민족의 자긍심과 뿌리를 찾는다」는 취지에서 지난 6월12일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여 펼치는 사상유례없는 해외동포들의 대규모 문화축제이다. 19일의 본행사에 앞서 18일 하오6시부터 오사카 사천왕사에서 4시간동안 전야제로 펼쳐진 「아시아음악제」에는 「사천왕사 왔소」에 참여하는 재일동포 3천명이 모두 모여 축제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고수대 등 사천왕사내에 마련된 3개의 무대에서 펼쳐진 이날 행사에는 한국ㆍ일본ㆍ대만ㆍ인도ㆍ인도네시아ㆍ몽고 등 6개국의 전통 및 현대음악인들이 각 나라의 고유음악을 선보였는데 한국측에선 이생강씨의 대금산조를 준비했다.
  • “모국투자 용의있다”37% 재일교포 상공인/청년상공인회 설문결과

    ◎나이 많고 기업규모 클수록 적극적/“조건 맞을 경우 부동산업 진출”39%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 상공인 가운데 모국에 투자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37.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이같은 생각은 나이가 많을수록,기업규모가 클수록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내 한국기업인들의 모임인 「재일한국청년상공인 연합회(청상)」가 일본전역 동포상공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앙케이트결과에서 밝혀졌다. 모국에의 투자의사를 묻는 설문에서 재일상공인들의 37.4%가 직ㆍ간접으로 투자의욕을 보였다. 6.3%는 「현재 모국에서 사업중」이고 4.4%는 「과거에 투자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또 26.7%는 「조건에 따라」투자할 뜻을 비췄다. 그러나 「전혀 고려치 않고 있는 사람」도 35.3%나 됐다. 이같은 비율은 8년전 조사당시의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응답보다 10% 가깝게 줄어 모국에 대한 투자관심이 높아졌음을 보여줬다. 연령별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상공인이 60세이상에서 39%로 가장 높았고 나이가 낮을수록 비율이 낮아져 20대는 31.1%에 그쳤다. 매출액으로 따진 규모별 비율에서는 5억엔이상에서 54.1%인 반면 1억∼5억엔은 47.4%,1억엔미만은 28%쯤으로 낮아졌다. 투자의욕은 업종별로 차이가 커 현재 진출중인 업체비율은 호텔업이 27.8%로 가장 높았고 「조건에 따라」투자할 의사는 부동산업이 39.6%로 첫째였다. 재일동포상공인들의 경영현황을 보면 업종별로는 유흥ㆍ숙박등 서비스업이 22.5%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음식업(15.6%) 부동산(11.5%) 제조업(10.4%) 판매업(8.8%) 건설업(8.3%) 순이었다. 연간 매출규모로는 10억엔이상이 15%,5억∼10억엔 미만이 13.5%이며 3천만엔이하의 소규모가 3분의 1 가량됐다. 현재의 경영자중 절반이상이 창업자이고 2세가 물려받은 경우가 35%,형제등 친척이 승계한 경우는 5%였다. 한편 이번 자료를 공개한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는 『조사 결과에서 보듯이 재일동포상공인들이 젊은 세대일수록 모국에의 관심이 줄고 있다』고 밝히고 『현재 6∼7%정도 남아있는 1세들이 더이상 줄어들기전에 본국투자 기회를 확대하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에는 부동산투기와 관련,재일동포의 국내진출을 투기의도로만 오해하는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깔려있어 재일동포들이 모국진출을 꺼리고 있다고 밝혔다.
  • 북측 8백여명 판문점 집회

    【내외】 북한은 15일 하오1시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북측대표 1백11명을 포함해 모두 8백59명의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범민족대회를 개회했다고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범민족대회 북측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여연구의 개회사로 시작된 이날 범민족대회에는 구라파 지역대표 1백51명,미주지역대표 1백14명,재일동포대표 1백1명,재소동포대표 1백65명,재중동포대표 80명 등 모두 8백59명이 참석했는데 대회 공동위원회에서 공동의장으로 임민식(남측추진본부위임),안병수(북측준비위원회),양은식(해외추진본부) 등 3명을 선출했다고 북한방송들은 전했다.
  • 민단­조총련 「35년 대립」청산의 첫 걸음

    ◎두단체 “연락기구 설치”합의의 뜻/신데탕트 기류속 조총련내 인식 변화 반증/남북한 당국의 영향력 커 자율대화엔 한계 재일한국거류민단(민단ㆍ단장 박병헌)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ㆍ중앙상임위의장 한덕수)는 1일 「조국의 평화통일 촉진을 위한 대화에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두 단체간에 연락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민단과 조총련이 이같이 대화를 갖고 합의케 된 것은 지난 55년 조총련 결성 이후 처음있는 일로서 박성우 민단기획실장등 4명이 조총련 사무실을 방문,백한기 사무국장등과 회동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날 합의는 반목과 질시를 거듭해온 양 기구가 불신의 벽을 허물고 협조체제를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 대화에도 도움을 줄 뜻있는 일로 여겨진다. ○남북대화에 큰 도움 지난달 17일 조총련측은 한덕수 중앙상임위의장 명의로 ▲조총련과 민단의 8ㆍ15 범민족대회 참가 ▲8ㆍ15를 전후해 재일동포 예술의 밤,체육교류모임 개최 ▲이같은 공동행동을 중앙은 물론 지부ㆍ거주지 등 하부조직에서도행할 것 ▲이같은 문제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정상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락기구 설치를 제의했다. 민단은 이에 대해 18일 ▲조총련 간부ㆍ동포의 고향방문 ▲민단 대표단의 평양방문과 조총련측 대표단의 서울방문을 판문점을 경유해 실현할 것 ▲북경아시안게임 공동응원 등 3개항을 제의했다. 1일 양측은 양측제의를 상호 검토한 끝에 연락기구 설치부분에 합의를 본 것이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재일동포 사회에 깊은 분열을 가져 온 양 기구가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이전부터 산견돼 왔다. 민단 박병헌 단장은 지난달 1일 서울신문과의 회견에서 조총련과의 조건없는 대화용의를 표명했었다. 또 조총련측에서는 올해 1월 채택한 활동목표와 지난 5월 조직결성 35주년 중앙대회 보고를 통해 ▲재일동포의 권리옹호투쟁을 강화하고 ▲8ㆍ15 범민족대회가 성공리에 소집되도록 주력하며 ▲최근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조총련내의 인식전환을 배경으로 조국통일과 애국사업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키 위한 대외사업을 강화하기로 「과업」을 설정했다. 즉 민단과 조총련은 상호대화와 협조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국제적인 동서 화해무드 ▲남북한 사이에 조심스럽게나마 진행되고 있는 대화 움직임 ▲그리고 조총련 내부,특히 조총련계 상공인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점등도 양기구간의 대화 채널마련에 이바지한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난 55년 조총련이 결성된 이래 불신과 상호비방의 벽을 쌓아 온 양기구가 대립청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를 연락기구를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화해 낙관하긴 일러 우선 1일의 합의내용을 보면 양측 7개항 제의 가운데 단 한가지 연락기구설치만이 합의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양측은 이날 대좌에서 나머지 상대방 제의는 사실상 모두 거부 또는 보류했다. 또 양기구는 각각 남북한 당국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있기 때문에 자율성을 갖고 문제를 풀어나가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다만지난 35년간 반목과 질시로 일관해 오며 의사전달은 우편으로나 하던 과거를 거두어들이고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해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평가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강석진기자〉
  • 재일동포,범민족대회 참가/「협의기구」 설치 합의/민단­조총련대표

    【도쿄=강수웅특파원】 재일한국거류민단 중앙본부 박병헌단장은 1일 조총련중앙상임위원회 한덕수의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 ▲남한출신 조총련계 인사들의 고향방문 ▲남북교류를 촉구하기 위한 민단대표단의 평양방문및 조총련대표단의 서울방문 실현 ▲9월 북경아시안게임에의 공동응원단 파견 등을 제의했다. 민단중앙본부 박성우기획실장등 4명의 대표에 의해 조총련본부에 전달된 이 서한에서 박단장은 『8·15 범민족대회는 어디까지나 민족화합을 추진한다는 차원에서 각계각층의 민족성원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할 수 있어야 하며 특정단체나 특정인사들만이 참가하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일본지역에서만이라도 대립과 불신을 제거하고 동포화합과 상호협조하는 길을 모색하고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 이같은 사항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이날 민단측 대표들은 조총련 백한기국제국장등 4명과 1시간20분 동안 회동,양측의 제반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협의기구」 설치와 소모적인 선전전 중지에 합의했다.
  • 공무원 전직시험 응시 재일교포/일,원서접수 거부 말썽/동경도에서

    【도쿄연합】 도쿄(동경)도 스기나미(삼병)구에서 급식조리원으로 일하는 재일동포가 일반직으로의 직종전환 시험에 응시하려다 「국적조항」을 이유로 원서접수를 거부당해 일본사회의 뿌리깊은 국적차별이 또다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도쿄도 스기나미구는 23일 「일본인에 한하도록 돼 있는 지방공무원 채용규정」을 이유로 이 구내의 한 국민학교에서 급식조리원으로 일하는 재일동포 김태화씨(32)가 낸 일반 사무직으로의 전직시험응시원서접수를 거부했다. 도쿄도내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후 4년전부터 현재의 일을 해오고 있는 김씨는 한 직종에 3년이상 근무한 사람이 다른 직종으로의 전직을 희망할 경우 응시할수 있도록 매년 한차례씩 실시되는 전직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지난해에도 원서를 제출했다 접수를 거부당했었다. 김씨는 이날 지원자 40여명과 함께 구청을 방문,원서를 접수시키려 했으나 담당자로부터 『일본국적을 취득했느냐,하지 않았다면 시험요강에 의해 접수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접수를 거부당했다.
  • 「사천왕사 왔소」 새달 일 공연… 연출가 허규씨(안녕하십니까)

    ◎“전통축제 「해외마당」에 큰 보람”/“전래문화의 뿌리,일 재현에 가슴 뿌듯/춘향제등 향토축전의 활성화 힘써야”/재일동포들에 민족문화의 우월성 심어줄 터 【대담:장석영문화부장】 오직 무대를 통해 말한다는 연극연출가 허규씨(57). 그가 최근 연출가에서 문화이벤트기획가로 변신,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특히 지난 4월 진해 군항제를 시작으로 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에서 지역문화와 관련된 인물의 행차행렬을 꾸며 지역축제를 활성화시킨 데 이어 오는 8월 일본 오사카에서 펼쳐질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맡아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에 몰두해 있다. 허씨는 이번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의 전통축제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선보여 한일문화의 고리를 복원시켜 보겠다고 벼른다. 그는 또 이번 행사가 자신의 연출무대를 제한된 실내 공간에서 실외마당으로 옮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내마당에서 해외마당으로 넓혀나가는 길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재일동포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온 정열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예술가에서 민족예술가로 도약해 보겠다는 그의 오늘과 내일의 목표는 무엇일까. -먼저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맡게 된 동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이 행사가 태동된 것은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진 이후였습니다.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서 거리축제인 「상감마마 행차요」를 기획·연출했는데 아마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저에게 이번 행사를 맡긴 것 같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기획에 들어가 이미 지난달 12일 서울 임진각에서부터 본행사가 시작됐습니다. -행사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원래 이 행사는 신한은행의 모체인 대판흥은의 이승재전무가 「빛나거라 21세기의 어린이여」를 기업이미지의 주제로 내세우다가 교포 3세이하의 세대를 위한 전통문화축제를 착안,재일실업가들로 후원회를 결성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이 후원회는 후쿠다 전일본수상등 한일 주요인사 18명으로 「사천왕사 왔소」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나라를 연결하는 첫 행사를 이번에 갖는 것입니다. 지난달 12일 임진각에서 5백여명의 교포가 성토제등을 올려 조국순례행사의 막이 올려졌고 이달 31일 부산을 출발,다음달 19일 오사카에서 약 3천여명의 교포가 참석하는 고대의상 퍼레이드와 일본 사천왕사에서의 전통예술공연등으로 행사는 이어집니다. ○올림픽뒤 축제에 전념 -왜 행사의 이름을 「사천왕사 왔소」라고 했습니까. ▲교포들의 사상최대 뿌리찾기 운동인 이 축제의 명칭이 어째서 「사천왕사 왔소」인가 하면 일본의 사천왕사가 부여의 정림사지를 모방한 사찰로 고대 한일문화 교류의 창구역할을 맡았고,일본의 전통축제에서 「왔쇼이」(□□□)라고 외치는 말의 어원이 한국어 「왔소」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축제의 의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대로부터 많은 문물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넘어갔다는 인식은 일본 사회에 깔려 있으나 그것을 기리는 축제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축제는 그 명칭에서 나타나 있듯이 한반도에서 받은 영향을 기리자는 최초의 축제로 오사카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고대 사기에도 나타나듯이 일본인 모두가 좋아하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고구려인이며 그런 분들이 이 시대에 오사카에 다시 나타났음을 표현해 보일 계획입니다. 또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들을 재현하려 합니다. 이 행사를 8월에 갖는 이유는 우리의 광복일이 8월에 들어있기 때문등입니다. -연출가에서 기획가로 변신한 셈인 데 보람을 느끼십니까. ▲물론입니다. 저의 활동을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0년 주기로 변한 것 같습니다. 60년대에는 주로 서구식 연극에 주력해 왔고 70년대에 넘어오면서 우리 연극 찾기에 눈을 돌렸죠. 그러다 80년대에 와서는 창극쪽으로 관심을 모았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른 뒤부터 축제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축제다운 축제가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축제를 기획·제작·연출하는 단체를 만들어 보자는 데 착안했던 것입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단체가 축제문화진흥회죠. ▲81년부터 89년초까지는 국립극장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종합기획 「마루」라는 이름으로축제행사를 맡아 추진해왔는데 지난해 3월 주식회사로 등록하면서 「축제문화진흥회」란 간판을 달게 되었습니다. 거리축제는 가만히 서 있는 무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오고 가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구간별로 업무를 분담해 조립형태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인력과 장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각 지방에 따라 고유의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경시되어 온 경향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활성화가 되리라고 보십니까. ▲각 지역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유의 축제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 축제들이 주로 관청에서 주관해 왔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행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남원의 춘향제만 해도 제가 거의 30여년간 굿판등을 쫓아다니며 보아왔지만 전혀 발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어디든 백일장,노래자랑 등이 있고 난장에 서서 먹고 마시고 떠들썩한 것만 있었지 정작 삶의 질을 높여주는 축제다운 축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올해부터 전국 10개 지역에서 펼치는 향토문화축제는 그런 면에서 매우 바람직스럽고 반드시 지역문화 발전에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됩니다. ○마당극 현대에 잘 맞아 -현재 우리의 공연계에 대해 하실 말씀은. ▲제 자신이 공연계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꼬집어 얘기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연예술은 지금까지 보다는 앞으로 훨씬 독창력을 발휘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더욱 활성화도 이루어지리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우리는 전파와 전자의 뉴미디어시대에 살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인간적인 모습의 예술공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또 그리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리워지고 자연이 그리워지고 하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어찌보면 우리 공연계도 혼돈적 상황이라고 해야겠지요. 각종 개방화에 편승,외국의 공연단체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외국과 문화의 뿌리를 달리하는 우리나라에서 현재의 예술적 환경과 시대상황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극형식은 어떤 것일까요. ▲저보고 마당극의 기수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은 줄 알고 있습니다만 마당극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맞는 전통의 현대적 수용의 지름길이 된다고 봅니다. 지난 75년 미국과 유럽을 40여일간 여행을 하면서 그곳의 공연만 38편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각 나라의 연극이 자기네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일성은 언어입니다. 음식문화도 중요하지요. 역사와 국가를 떠나 인간중심의 시각에서 언어나 음식이 같으면 그 기질도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우리의 기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민족의 신명,신바람도 그런 것중의 하나죠.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또 놀기 좋아하는 특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놀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예능적 재질이 뛰어난 민족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을 무수히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같은 언어,같은 음식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음악적으로나 기타 다른 형식에서도 나름대로 획일적이 아닙니다. 신바람 잘 내는 민족이기 때문에 싸움도 잘하고 분파도 잘 일으킵니다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자존심과 자신감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 -맨 처음 연극을 하시게 된 동기는. ▲원래 대학의 전공은 임학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할 때인데 연극에 열을 올리던 아저씨 집에서 기거를 했어요. 그때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서울농대 3학년때 연극부에 들어가면서 연극인의 길을 걸었죠. 그동안 연극연출 횟수는 1백10여편정도였고 방송드라마는 약 5백여회를 제작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물도리동」과 68년에 제작했던 드라마 「탑」입니다. -가족이 분야는 달라도 모두 한길을 걷고 있다고 들었는데. ▲시인인 아내(박현영)와 시립국악단에 있는 딸,그리고 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 가족인데 모두 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전통예술의 뿌리에서 우리 예술을 꽃피우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갈 작정입니다.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우리 문화예술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노력해 나갈 계획입니다.
  • “평양에도 개혁의 미풍”/호 국립대 연구원,홍콩지에 방북기

    ◎자영업 인정ㆍ화폐경제… 10년전 중국과 비슷/「국방우위」변화… 보수파 제동으로 개혁 더뎌 북한은 아직도 겉보기에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회로 보이지만 최근 들어 자영업이 인정되고 화폐경제요소가 등장하는가 하면 국방우위정책을 재평가 하는 등 안으로는 중요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홍콩의 시사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가 5일 발매된 12일자호에 보도했다. 호주국립대학 동북아과정 연구원인 개리 클린트워스씨가 지난 4월 북한을 다녀온뒤 기고한 「평양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북한의 내면적 변화가 흡사 10년전 중국의 변화를 방불케 한다고 진단하면서,그러나 당과 군의 보수세력 때문에 변화는 느리고도 통제된 형태로 진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은 이 기사의 요약. 북한은 겉보기에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북한에도 오래전부터 단파방송이나 재일동포들의 왕래를 통해 조금씩 외부소식이 들어왔다. 북한당국도 중앙계획경제와 지나친 국방우위정책으로 자원배분이 왜곡되고 있으며 동북아지역 경제발전의 흐름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북한도 개혁을 통해 살아남길 원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ㆍ동구ㆍ소련처럼 권력이 불안해지거나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북한의 기술관료 엘리트들은 사석에서 사회주의의 폐단과 북한구조의 단점을 인정하곤 한다. ○사회주의 폐단 시인도 북한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도 승리할 수 없으며 테러ㆍ원자탄 등이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와 보수적인 당관료를 중심으로 신사고에 대한 저항도 엄존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는 완만하고 통제된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북한에도 이미 변화가 발생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10년전 중국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생산량에 따라 현금 보너스ㆍ상품ㆍ메달 등을 추가로 받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자영업도 허용되고 있다. 기차역에는 주로 여성들이 삼륜차를 대기시키고 있는데,이것이 대표적인 자영업이다. 이들의 노동은 매우 힘드나 수입은 일반인들에 비해 4∼5배에 달한다. ○국가발행 복권도 등장 또 북한이 점차 화폐경제로 이행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보조금에 의해 싸게 공급되던 난방ㆍ주택임대료ㆍ수도ㆍ전기료 등을 실제가격으로 올리는 계획을 추진중이다. 지폐를 쿠폰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이자(일반예금 1∼2%,정기예금 3∼5%)도 지급된다. 국가가 운영하는 복권도 등장,당첨자는 TV 1대를 구입할 만한 「거액」도 만져볼 수 있게 된다. 청진ㆍ함흥ㆍ판문점,그리고 북방의 일부지역등 군사적 관련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행제한도 크게 완화됐다. ○중국경제특구에 관심 이같은 변화는 북한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신호」이다. 국방우선주의에 대한 재평가는 최근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이 군사적 반응을 초래할 어떠한 자극도 회피하고 있다. 또 비무장지대의 땅굴이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하면서 그같은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비친다. 북한은 중국의 경제특구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방위산업의 일부를 자전거ㆍ완구ㆍ컴퓨터ㆍ레코드ㆍ생필품 공장으로 바꿔 나가고 있다. 물론 주한미군철수문제,일본에 대한 불신등 변하지 않고 있는 부분도 있다.
  • 민단,조총련과 화합 모색/올 8ㆍ15계기 남ㆍ북한 교차방문등 제의

    ◎지위향상 대일 공동 로비도 추진 【도쿄=강수웅특파원】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단장 박병헌)는 일본에 거주하는 67만 한인사회에 있어서의 민단계ㆍ조총련계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8ㆍ15광복절을 계기로 ▲조총련중앙과 민단집행부와의 조건없는 대화 ▲인도적 차원에서의 남북한 상호방문추진 ▲스포츠ㆍ문화ㆍ경제면에서의 상호교류 등을 제의키로 했다. 민단중앙본부는 이번 대화제의를 통해 구체적 공동추진사업으로 취업ㆍ공직채용 등 전 재일동포의 이익확보를 위한 대일본정부에 대한 로비활동을 공동으로 펼치는 것은 물론 의료분야 등 첨단과학기술부문에서의 공동연구ㆍ개발추진,노인홈(양로원)건설 등 전시효과적이 아닌 실질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와함께 남한출신 조총련계 인사들은 한국을,북한출신 민단계인사들은 북한을 각각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하며 오는 10월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5백여명 규모의 공동응원단을 파견하는 문제등도 중점 논의키로 했다.
  • 교포화합에 앞장 민단 박병헌단장

    ◎“민단­조총련 장벽도 곧 헐리겠지요”/조총련 내부에도 「변화의 기류」 움터/노대통령 방문계기,“동포로 포용” 결심 민단사상 최초의 소련 공식방문을 앞두고 있는 박병헌단장(61)은 분주한 속에서도 1시간여에 걸쳐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성과,조총련과의 대화계획,소련방문의의 등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먼저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은 재일동포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이를 계기로 조총련측과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요. ▲사실 대통령의 방일결정때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민단내의 의견도 찬ㆍ반으로 갈려있는 상태였습니다. 우선은 일본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태도가 분명치 않은 상태였다는 점,또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보장문제도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대통령의 방일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재일동포의 법적지위문제는 70만 동포의 생활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민단이 대통령 방일을 반대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민단집행부에서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민단입장에서는 이만큼 노력했으면 이제는 대통령이 직접와서 한말씀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며,90년대 정리의 계기가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대통령의 방일은 45년 재일동포의 한을 풀어주었고,일본의 정치ㆍ지식인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차원높은 국회연설에 대해서는 민단ㆍ조총련을 불문하고 재일동포전체가 긍지를 갖게 한 큰 성과였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방일은 재일동포사이의 민단ㆍ조총련의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노대통령은 법적지위해결은 민단계동포 뿐만 아니라 조총련계동포들도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본정부도 수긍했고,한국과는 교제를 갖지않던 일본사회당ㆍ공산당 수뇌들과도 대화를 나눌 계기가 됐습니다. 대통령의 국회연설 때 사상유례없이 전 국회의원이 참석했다는 것은 한일관계를 중요시하려는 인식의 변화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밖에는 모르던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민단ㆍ조총련의 장벽을 제거할 것입니까. ▲노대통령이 민단주최 환영리셉션에서 『조총련계 인사들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동포로서 포용해 나가야할 것』이라는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책임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45년간 일본에서 받았던 차별의 설움을 씻고,동포간 투쟁의 역사를 종식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우리의 문호는 개방되어 있으며 조총련중앙과 조건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기 때문에 이달중으로 제의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동안에도 몇차례에 걸쳐 대화를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제는 여건이 다릅니다. 독일의 통일에서 교훈을 얻는 바와 같이 우리의 남북통일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 시초는 일본 도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계정세가 변화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시도되는 우리의 제안은 받아들여지리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조총련이라는 조직은 아직도 북한의 지령을 받아 파괴활동을 일삼는 적성단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공작적 차원의 흉계는 버리고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대화에 나서도록 권고하려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로 보아 저쪽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조총련 조직자체로서는 아직도 일체의 대화접촉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한덕수의장은 나이도 많고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일반회원들의 공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인들은 융통성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총련인사들의 한국방문도 매년 2천여명씩을 상대로 실시하는 성묘단의 차원을 떠나 지도층에서 부담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폭을 넒혀나가도록 주선하겠습니다. ­이번 민단집행부의 대거 소련공식방문단 구성은 사상최초의 것이 아닙니까. 방소 목적은 무엇입니까. ▲소련거주 한인들의 모임인 고려한인회(회장 미하일박) 간부들과 만나 소련과 북한의 현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듣자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해외동포로서 본국의 북방정책을 지원하고 참여할 길을 찾자는 뜻도 내포된 것입니다. 이와함께 북한의 지도급 출신 소련 거주 인사들의 일본방문도 초청,의견을 듣는 기회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오는 7월4일에는 파리에서 개최되는 해외한민족협의회 운영위원회에도 참석키로 되어 있습니다.
  • 징용 한인명단 64명 일 돗토리서 또 발견

    【도쿄 연합】 일본 홋카이도(북해도)와 효고(병고)현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 명단이 발견된데 이어 돗토리(도취)현에서도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이 지방 이와미(암미)광산에 끌려와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한국ㆍ조선인 64명의 명단이 사회당의원과 재일동포에 의해 보관돼온 사실이 11일 밝혀졌다.
  • 조총련까지 등돌려 간다(사설)

    얼마전 일본의 한 유수한 일간지에 장명수란 사람의 회견 기사가 실렸다. 「공화국(북조선) 귀국자 문제 대책 협의회사무국 대표」라는 기다란 직함의 인물이었다. 『대단히 곤란한 일을 시작해 버렸습니다』로 그 회견 기사는 시작된다. 직함 그대로 그는 북한으로 간 「재일 조선인」의 실태조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 자신 재일동포의 북송을 적극 추진했고 그의 부모형제도 이른바 「귀국선」을 탔던 처지이다. 80년에는 「조국 방문단」의 부단장으로서 방북한 바도 있다. 그런 처지의 사람이 어째서 「귀국자 실태 조사」에 나선 것인가. 북송에 관여할 때까지 「지상천국」으로 생각했던 북한이건만 그 후의 사정은 그렇지 못한 곳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돈을 보내 달라,병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는가 하면 행방불명자 또한 속출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던가 반성하면서 행방불명자 친척들의 호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0만명 가까운 북송 동포의 처지와 그 일의 선봉에 나섰던 자신의 과오를 아프게깨달은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북한이 지구상에서 타국땅에 존재하는 가장 강대한 우익으로 쳐오는 것이 일본에 있는 조총련이다. 그들은 조총련을 많이 이용해 왔다. 김부자의 생일이면 강제로 성금을 거둬들이는 대상이 그것이었으며 해외공작을 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무대가 되었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 세력은 막강했다. 양두구육의 감언이설이 먹혀들었을 때까지 그러했다. 하지만 진실이란 언제까지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벌이는 재일동포 모국방문 사업에 조총련계 동포들이 끼어들면서부터 북의 일방적 메시지가 얼마나 허위에 찬 것인가는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이미 북녘땅에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다.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 위에 북이 자랑스럽게 벌인 북송사업은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어 버렸다. 「낙원」아닌 「지옥」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엊그제 도쿄에서 조총련에 의해 「김일성 타도 재일 조선인 궐기대회」가 열린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그동안의 흐름으로 보아 당연히 있어야 할 움직임이 현실화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들은 김일성을 조국통일의 「암적 존재」로 규정했다. 성숙한 정치사회에서 사는 그들은 남과 북의 실체를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KAL기 폭파사건과 김현희의 증언을 들었고 그에 대한 북의 엉뚱한 반응도 보았으며 한필성­필화 남매 관계의 시말도 엄정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번 불 댕겨진 그 움직임이 일본전역으로 확산되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나갈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의 방일도 그런 움직임의 현실화에 촉매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노대통령은 교민 리셉션 석상에서 『조총련을 적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한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도와 달라』고 하여 동족으로서의 끈끈한 정의를 환기시킨 바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북한의 자세전환 그것이다. 지구촌의 조류를 직시해야겠건만 그렇지 못하는 그들이 참으로 답답하다. 며칠 전에 열린 최고인민회의도 「체제고수」를 재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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