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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조직 출신-야쿠자, 北韓産히로뽕 5,000억대 거래

    국내 폭력조직원 출신 사업가와 일본 폭력조직인 야쿠자가 연계,북한산으로추정되는 5,000억원대의 히로뽕 100㎏을 일본으로 밀반입한 사실이 한·일 수사당국에 적발됐다.한·일 수사당국이 공조를 통해 마약사범을 일망타진한것은 처음이다. 히로뽕 100㎏은 330만명이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서울지검 강력부(朴英洙 부장검사)는 10일 히로뽕을 북한에서 구입,일본으로 보낸 폭력조직 ‘신상사파’ 조직원 출신인 농수산물 수입업체 ‘에이치타워’대표 구기본(具箕本·52)씨와 구씨에게 돈을 댄 일본 3대 야쿠자조직인 ‘스미요시파’ 부이사장 양종만(梁鐘萬·52·재일교포)·조직원 정지원(鄭智源·42)씨 등 3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했다.또북한에서 히로뽕을 선적한 사실을 입증하는 ‘조선대외상품검사위원회’ 발행 산지증명서와 검사서를 공개했다. 일본수사당국은 구씨 등과 짜고 북한에서 히로뽕을 싣고온 중국선적 임양냉2호 선장 장일철(張日哲·51·조선족)씨와 ‘스미요시파’ 부회장이자 양씨의 부하인 사사모토 도모유키(笹本智之·24)씨 등 3명을 구속기소하고 히로뽕 100㎏을 압수했다. 구씨는 지난 2월초 선장 장씨로부터 “북한에서 히로뽕 100㎏을 구해올테니 판매처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양씨 등과 접촉해 히로뽕 1㎏당 300만엔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구씨는 이어 같은 달 10일 양씨로부터 경비 명목으로 1,000만엔을 받아 장씨에게 건넨 뒤 북한 흥남항에서 민물조개류인재첩상자에 히로뽕 100㎏를 숨겨 강원도 묵호항을 거쳐 일본 돗토리현 사카이항으로 옮기도록 했다. 구씨 등은 지난 3월13일 히로뽕을 넘겨받기 위해 시카이항에 갔으나 스미요시파 조직원들이 임양냉2호에서 히로뽕을 트럭에 옮겨싣다 일본 수사관들에게 검거되자 국내로 피했다가 지난달 붙잡혔다. 양씨 등은 지난달 15일 일본당국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국내로 건너와 구씨에게 ‘나의 개입을 숨겨주면 20억원을 주겠다’고 제의하는 등 알리바이를조작하려다 검거됐다. ‘스미요시파’는 일본 도쿄를 본거지로 8,000여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3대야쿠자조직의 하나이며,‘신상사파’는 70년대초서울 명동일대를 장악했다가 75년 ‘양은이파’의 도전을 받은 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검찰은 국제범죄조직 전담반을 구성,국내 출입이 잦은 일본의 3개 폭력조직원 46명에 대한 특별관리에 나섰다. 박홍기 김재천기자 hkpark@
  • [제2공화국과 張勉](21)對日외교 전략

    장면(張勉)정부가 넘겨받은 해묵은 숙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이다.앞서 집권한 이승만(李承晩)은 국시인 ‘반공’ 못잖게 ‘배일(排日)’을 강조했고 국민감정도 일본에는 아직 적대적이었다. 이승만정권 때 한·일회담은 모두 4차례 열렸다.1951년 10월20일 도쿄에서1차회담을 가진 것을 비롯해 53년 4월과 10월 2·3차 회담이 이어졌다.그러나 3차회담에서 일본대표 구보타(久保田)가 “일본의 지배는 한국측에도 유익했다”는 망언을 해 결렬된다.이후 4년여 동안 중단됐다가 58년 4월 4차회담에 들어가지만 일본이 59년 2월 재일교포 북송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시 흐지부지된다. 이같은 상태에서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장 총리는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양국 회담을재개하고 ▲재일교포에의 경제적 지원,교육지도를 강화하며 ▲교포 자본을국내에 도입하는 길을 열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이어 정일형(鄭一亨)외무장관은 “외교관계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총리 또는 외무장관 회담을열 수 있다”고 공표했다. 일본도 즉시 반응을 보였다.장면내각이 출범한 지 열흘 남짓한 60년 9월6일 고사카(小坂)외무장관 일행을 친선사절단으로 파견했다.일본 고위 관리가정식으로 한국땅을 밟기는 일제가 쫓겨간 뒤 처음이었다. 고사카가 방한한 날 오후 양국 외무장관은 회담을 가져 하루빨리 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한다.고사카 일행은 불과 22시간 머물고 돌아갔지만 양국정부가 ‘선린우호’ 방침을 서로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시기에 한·일회담이 주요 이슈로 떠오른 까닭은 한국·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일본은 55∼56년역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뒤 상품 및 자본의 해외진출을 노릴 때였다. 미국도 60년 1월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일본에 동북아 반공망 구축에 한몫을 맡기려 했으므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줄곧 유도했다.이승만정권 때인60년 3월 허터 미 국무장관은 양유찬(梁裕燦)주미대사를 만나 한·일관계에우려를 표명하는 등 직접 관계개선을 촉구할 정도였다. 장면정부도양국 국교정상화가 꼭 필요했다.‘경제 제일주의’를 추진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과 국교를 맺어 식민통치에 따른 청구권을 해결하고 국교 수립 이후로 미룬 민간자본 유치도 실현해야 했다.남북이 대치한 상태에서 등 뒤에 있는 일본을 자유우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양국은 외무장관 회담에서 결정한 5차 회의의 예비회담을 60년 10월25일 도쿄에서 시작했다.한국측 수석대표는 1차회담에도 참석한 유진오(兪鎭午)전고려대총장이 맡았고 엄요섭(嚴堯燮)주일공사,유창순(劉彰順)한국은행부총재 등이 대표단에 동참했다. 한국은 청구권문제에 초점을 맞춰 ‘청구권 8개 항목’을 내놓았다.하지만일본은 장면정부를 애태우려는 듯 개막 다음날 ‘교포 북송’문제를 핑계로북한과 별도의 회담을 시작했다.12월19일에는 이케다(池田)총리가 “한국에정부가 둘 있다는 인식 아래 한·일회담에 임한다”고 국회에서 공표했다. 일본이 ‘북한카드’를 갖고 지연작전을 쓴 탓에 회담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일본은 ‘장면정부는 아직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회담진행을 의도적으로 늦춘 면도 있다. 61년 초 일본이 경제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하자 장면정부는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다.그러나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정부·여당 연석회의가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에라도 일본의 민간차관과 재일교포 재산의 반입을 허용한다’고 결정한 1월22일 밖에서는 ‘반일투쟁위원회’(위원장 劉錫鉉)가 결성된다. 김병로(金炳魯) 변영태(卞榮泰) 등 60여명이 참여한 이 위원회는 “국교수립 전에 경제교류를 하는 것과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을 반대한다”면서 실력저지를 선언한다.신민당(민주당 구파)도 다음날 “장면정부의 대일 외교에 반대하는 범국민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환영위원회는 취소되고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도 무산됐다. 4월26일 정일형 외무장관이 위싱턴에서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에 이익일 뿐아니라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이어 5월6일 일본에서 노다(野田)를 단장으로 하고 외무부 아시아국장이 수행한 일본 의원단이 방한한다.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가 정계·사회에 “장면정부는 매우 안정돼 있다”고 보고하고 다닐 무렵 ‘5·16쿠데타’가 발생한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은 4년 후인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다. 주 관심사인 청구권 금액은 ‘무상 3억,정부차관 2억,민간차관 3억달러’로결정났다.64년의 ‘6·3사태’라는 치열한 국민 저항을 억누르고 얻은 결과였다.박정권의 논리 또한 ‘경제건설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국교정상화가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장면정부에서 일한 인사들 누구나가 아쉬워하는 대목이 청구권문제다.장면정부는 한·일회담 성공을 눈앞에 두었고 그때 타결됐더라면 최소한 청구권금액만큼은 훨씬 늘어났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박정희의 한·일회담 강행을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한 정일형의 회고록 중 한 부분이다. “외무장관 당시 우리가 12억달러를 요구하고 일본이 8억달러를 주장해 타결을 못보았는데,이제 3억달러에 낙착됐다.이 하나만으로도 박정권이 얼마나 한·일회담을 졸속·저자세로 진행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를 이뤄 청구권을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하려고 했다.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이루었을지도 모른다.이러한 가정을무시하더라도 장면정부가 최소한 ‘6·3사태’와 같은 폭압을 국민에게 저지르지 않았음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이용원 기자
  • 평양 옥류관 냉면 서울서 맛본다

    평양냉면 전문점으로 북한 최고의 음식점으로 평가받는 평양옥류관의 냉면맛을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됐다. 조총련계 기업의 중개를 통해 평양옥류관과 분점개설 계약을 체결한 주식회사 옥류관(대표이사 김영백)은 3일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823번지에 옥류관서울점 개점식을 갖고 4일부터 정상영업을 시작한다. 옥류관 서울점에서는 평양냉면을 비롯해 평양온반,평양불고기 등 약 20여종의 메뉴가 제공된다.메밀을 비롯한 식자재와 식당운영에 필요한 수저,냉면그릇 등 집기류,비품,소모품 등은 모두 북한에서 직반입했다.평양옥류관에서수차례 조리기술을 연수받은 재일교포 박수남(43)씨가 주방고문역을 맡아 평양옥류관 냉면의 진수를 선보인다. 구본영기자 kby7@
  • 오늘 尹奉吉의사 의거 67주년…유해봉환사진등 첫공개

    오늘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67주년.윤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白川) 일본군 대장 일행을 폭살시키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5월 25일 상하이 주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일본으로 호송돼 그 해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인근 공병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윤의사의 유해는 인근 쓰레기매립장에 가매장됐다가 해방 이듬해 5월 초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씨 등 재일교포들에 의해 발굴,봉환됐다. 다음 사진들은 윤의사 의거 67주년을 맞아 백범 차남 김신(金信) 전 교통부장관의 개인소장 사진첩에서 단독입수,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재일교포 쓰카 고헤이 연출작품 3편 무대에

    재일교포 연출가 쓰카 고헤이(김봉웅)의 세 작품이 동시에 무대에 오른다.16일부터 27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 세 작품 중 ‘뜨거운 바다-동경에서 온 형사’는 지난 85년 공연해 커다란반향을 일으켰다.당시 출연진인 전무송 강태기 최주봉 김지숙의 연기는 87년 일본 도쿄 키노구니야홀 앙코르 공연에서 일본 관객들의 호평을 얻었다. 이번 무대에는 최주봉이 손병호로 교체되고 나머지 세명의 배우는 그대로출연,14년 전의 감동을 재현한다.도쿄 경시청에서 서울 경찰청으로 파견나온 재일교포 형사(강태기)를 통해 모국의 의미와,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모색하는 내용이다.전무송이 한국인 형사부장,김지숙이 여형사,손봉호가 범인으로나온다. ‘뜨거운 파도-여형사 이야기’는 ‘매춘 수사관’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공연되어 인기를 끌었던 작품.쓰카 고헤이 극단의 일본 배우들이 한국 연극사상 처음으로 일본어로 연기해 화제다. ‘뜨거운 파도-평양에서 온 형사’는 김정일의 밀명을 받은 평양 형사가 한국에 파견온다는 시나리오로 통일 문제를 다룬다.특히 전무송의 딸 전현아가 평양 형사 손봉호를 사랑하는 여형사로 나와 아버지와 연기 대결을 펼친다. 쓰카는 “연극으로 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동경에서 온 형사’의 경우 조국이 재일교포를 지켜보고 교포는 조국을 우러러본다는 암시를 담고 있어 일본 우익을 자극할 수도 있지만 공연을 강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02)826-6123이종수기자
  • 1단계 외환자유화 시행 첫날

    1단계 외환자유화 시행 첫날인 1일 한국은행과 외환은행 등에는 환전상,비거주자의 원화예금,교포의 국내부동산 매각대금 반출 등과 관련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재경부와 한은은 외환자유화에 따른 외국인의 투기성 단기자금유출입 등 외환시장 움직임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는 외환전산망을 가동했으며,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설립된 국제금융센터도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정보수집 및 분석업무를 시작했다. ●환전영업 등록업무를 맡고 있는 한은 국제부 외환심사과에는 담당직원 4명이 자리를 뜰 수 없을 정도로 문의 전화가 쇄도.한 직원은 “문의 내용은 환전영업을 하기 위한 등록절차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라며 “직접 찾아와 상담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설명. ●환전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명예퇴직자나 슈퍼마킷·약국 운영자,오퍼상이 대부분으로,겸업을 허용한 외환자유화 조치는 일단 성공작으로 평가된다.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柳모씨(50)는 이날 오후 2시30분쯤 등록신청을 해‘등록 1호’를 기록.그는 “무역업을 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환전상에 관심을 갖고 준비해 왔다”고 언급. ●외환은행은 1일부터 본점 지하 1층 외환센터에 ‘해외교민 전담 데스크’를 설치,교민들의 국내예금 가입과 송금업무 등을 원스톱(One-Stop)으로 처리해 주고 있다. 외환업무팀 李鍾冕과장은 “재일교포들이 국제전화로 비거주자의 원화예금과 영주권자에 대한 국내 부동산 매각대금 반출 허용에 대해 물어본다”고말했다.외환은행은 “한국 금융기관에 투자하면 해외에서보다 많은 수익을올릴 수 있고,나라경제 발전에도 도움을 준다” “한국 금융기관의 신용도는 믿을만 하다”는 내용을 일본 ‘교포일보’에 실어 홍보하는 방안도 검토중. ●환전상 등록절차: 일반개인은 주민등록증,개인사업자는 사업자등록증,법인은 법인등기부등본을 제시하면 된다.건물 등기부등본이나 임대차 계약서,환전영업자 표기(국문,영문 혼용),외국환매매율 게시판을 준비해야 한다.환전영업자 표기나 외국환매매율 게시판은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제시해도 된다. 주거래은행을 정하고, 금전등록기와 위폐 감식기를 산 영수증 사본을 내면된다.한은은 서류를 심사해 바로 등록증을 내주고 있다. 吳承鎬
  • [오늘의 눈] 형평 어긋난 투표권

    “23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투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각각 한번씩단 두번밖에 못했습니다” 외교통상부의 한 간부의 이야기다.선거가 있을 때마다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공직선거법 38조1항은 국내 거주자만 투표에참여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이같은 사정은 외교관 뿐 아니라 유학생과 상사원 등 해외에 체류중인 27만명 모두에게 똑같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5일 유학생과 국책은행 해외 사무소직원이 낸 ‘공직선거법 38조1항에 대한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판결을 냈다.“해외거주국민에게도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현행 선거기간과 비용을 고려할 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공정성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와는 정반대의 논리를 펼치며 해외거주국민에게도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고 있다.“국가가 전기와 가스를 공급할 때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산골에는 공급하지 않는가.공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돈이많이 들어가더라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는 게 프랑스가 내세우는 논리다.프랑스는 모든 공관에서 해외거주 국민에대한 부재자투표를 실시하고 있다.선거 때면 관할 공관장과 본국에서 파견된 법관들이 해외 선거관리위원이 된다.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 여러차례 방식을 바꾸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미국도 마찬가지다.재외공관과 미군우편사무소(APO)가 있는 곳이면 해외거주국민들이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말 재외동포특례법안을 만들어 오는 7월부터 국내에 90일 이상 체류하는 재일교포와 미국영주권자에 대해 투표권을 주기로 한 상태다.또 지난 20일에는 재일교포의 일본 지방참정권 확보를 위해 국내에 거주하는정주(定住)외국인에 대해서도 참정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히기도했다.해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교포와 외국인에게까지 참정권을 주려고 검토하면서 정작 공무나 학업 때문에 일시적으로 해외에 살아야 하는 진짜‘국민’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바뀐 것같다.시행착오를 거치며 해외 부재자투표를 정착시킨 나라도 있지 않은가. 추승호 정치팀 기자chu@
  • 한국계 음악가 3인 고국 나들이

    독일과 미국,러시아에서 각각 활동중인 한국계 피아니스트 카롤리네 피셔(15)와 첼리스트 다니엘 리(19),재일교포 지휘자 박태영(36) 초청 내한 연주회가 잇따라 열린다. 22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02-538-3200)에서 서울 바로크합주단과 협연무대를 갖는 피셔는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지난해 9월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방한때 특별연주회를 가져,국내에 알려졌으며 이번에 독일대사관 초청으로 연주회를 펼친다.지난 17일 독일문화원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지난해 폴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앙드레 리유의 눈에 띄어 올 1월부터는 그의 후원을 받고 있다. 이번 연주회에서 피셔는 러시아 국립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재일교포 출신 박태영의 지휘로 바로크합주단과 협연,멘델스존의 ‘실내악단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한국초연)을 들려준다.지휘자 박태영은 이번이 국내 첫무대이다. KBS교향악단과 25∼26일 KBS홀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02-781-2252)에서협연무대를 갖는 다니엘 리는 첼로 거장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으며 현재미 커티스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95년부터는 정경화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미 메이저 음반사 ‘데카’와 전속계약을 맺고 지난해 첫 독집 음반을 냈다. 박은성씨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을 들려준다.(02)781-2252
  • 재일교포 인권운동가 徐勝씨“모국방문중 사면·복권돼 기뻐”

    ‘비전향정치범’으로 19년동안 형을 살다 지난 90년 석방됐던 재일교포 국제인권운동가 徐勝씨(54·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교수)가 최근 한국을찾았다.서씨는 지난 71년 동생 俊植씨(인권운동사랑방 대표)와 함께 이른바‘재일교포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비전향정치범’으로서는 최초로 석방됐다. 그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서울대 안에 지하조직을 만들어 군사훈련 반대와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반대를 배후 조종했다는 것. 조사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받던 중 ‘살아서는 도저히 고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고문기술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의 석유를온몸에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몇 차례의 수술끝에 겨우 ‘사람모습’을 되찾았지만 “원자탄으로 타들어간 들판처럼 타 문드러진 나의 얼굴”이라는 서씨의 표현처럼 그의 얼굴은 아직도 흉한 모습이다. 이번 그의 방한은 지난 94년 일본에서 나온 옥중기의 한국어 번역판 ‘서승의 옥중 19년’(김경자 옮김,역사비평사)출간이 계기가 됐다.출국 전날인 지난달 27일 서울대 호암관에서 그를 만났다. ▒방한 목적과 소감은. 옥중기 출간을 기념하고 서울대학과 ‘한·일간의 법과 정치제도 비교연구’라는 공동프로젝트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28일은 내가 출소한 지 꼭 9년째 되는 날인데 한국 체류기간중 3.1절 특사로 나의 사면·복권이 이뤄져 더욱 기쁘다. ▒비전향정치범 출신으로서 이번 비전향장기수 17명의 추가석방을 어떻게 보나. 옥중에서 만났던 ‘선배’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반가워 봉천동 ‘만남의 집’을 찾아가서 만나봤다.이제 늙고 병든 그들에게 남북한 당국의 선처가 있기를 바란다. ▒‘옥중기’는 언제,어떻게 집필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94년 일본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친구의 권유로 병실에서 오른쪽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에 담기 시작했다.옥중에 있을 때 집에 보낸 편지,가족의 면회기록 등을 참고해 옥중생활을 재구성한 것인데 더러 희미한 부분은 출소자들을 인터뷰해서 보충했다. ▒94년 일본에서 ‘옥중기’를 냈을 때의 반응은. 그동안 약 5만부(5쇄)가 판매됐다.독자의 편지만을 모아 다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석방된 후 뭘 하고 지냈나. 석방직후 일본에서 타이완(臺灣) 정치범 출신 모씨를 만나면서 동아시아의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97년 타이완에서 개최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심포지엄과 이듬해 제주도에서 개최한 ‘제주4·3’ 심포지엄은 모두 이같은 취지에서 조직한 것이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남북의 분단,중국과 타이완의 분단,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갈등 등 ‘분단문제’를 집중 연구할 계획이다.금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주한미군범죄를 주제로 제3회 국제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서씨는 출소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지난해부터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 재직중이다.
  • 은행장 물갈이 문제많다

    은행 주총시즌을 맞아 은행장 물갈이가 이뤄지고 있으나 문제가 많다. 멀쩡한 은행장이 옷을 벗는가 하면,부실경영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은행 간판만을 바꿔달고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기업(은행)윤리가 실종됐다는 비난마저 쏟아지고 있다. 은행권은 羅應燦 신한은행장이 3연임 임기를 1년 남겨두고 중도 하차한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분위기다.羅행장은 선린상고를 나온 전문경영인으로,91년 행장에 선임된 뒤 8년간 신한은행을 이끌며 개혁을 주도해 왔다. 신한은행은 IMF한파로 국내은행들이 지난해 14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음에도 590억원의 흑자를 내는 등 경영능력이 뛰어나 대주주로부터 절대신임을 받아왔다.신한은행 임직원들도 1년 남은 임기를 다 채우고 명예롭게 물러나기를 갈망해 왔다. 羅행장이 물러나게 된 명분은 세대교체다.금융감독당국 고위관계자는 지난주 羅행장의 거취와 관련,“대주주가 재일교포여서 정부에서 어떻게 할 수없다”고 말했었다.당국은 그러면서도 내심 “羅행장이 세대교체를 위해 물러나 줬으면 좋겠다”며 퇴진신호를 보내왔다. 급기야 羅행장은 설 연휴에 일본으로 건너가 지난 17일 李熙健회장의 동의를 얻어냈으며,18일에는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후임행장 후보로 李仁鎬전무(56)가,權寧鎭감사의 후임으로는 姜喜文 전 은행감독원 검사1국장이 각각 추천됐다. 한빛은행과 한미은행은 행장을 서로 맞바꿨다.金振晩 전 한미은행장은 지난 1월4일 한빛은행장으로 옮겼고,申東爀 전 한일은행장 대행은 지난 12일 한미은행장에 뽑혔다.이로써 두 은행 모두 서로 은행경영의 고급정보를 독점할 수 없게 됐다. 洪世杓 외환은행장도 독일 코메르츠은행과의 합작성사라는 ‘업적’과 상관없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다.후임으로는 吳浩根 기업구조조정위원장과 魏聖復 전 조흥은행장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吳위원장은본인이 고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魏행장이 명예회복을 노리고 있다고도 한다. 지난해 연말 상업은행장에서 물러난 裴贊柄 전 행장도 조흥은행장 후보로떠올랐다.한편 李鍊衡 부산은행장 후임에는 金璟林 전 은행감독원 부원장보(57)가,李春永 경남은행장 후임에는 朴東勳 전 상업은행 상무(57)가 내정된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계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 퇴사한 뒤 3년 정도는 경쟁기업으로 가지 않는 것이 직업윤리상 관례로 돼있다”며 “내부 적임자가 없으면 과감히외부 전문가를 공채하는 풍토가 아쉽다”고 말했다. 吳承鎬 osh@
  • 은행장 ‘2차 물갈이’시작

    은행장 2차 물갈이의 서곡(序曲)이 울렸다.지난해 은행장 퇴진은 부실경영에 대한 문책이었다.반면 올해는 비상임이사 중심의 은행구조 개편과 맞물리면서 젊고 유능한 경영인을 발탁하는 ‘세대교체’라는 점이 특징이다. 물갈이가 다시 이뤄지면서 40년대생 은행장 시대가 다져질 전망이다.현재金振晩(42년생) 한빛,金正泰 주택(47년생),金勝猷 하나은행장(43년생)이 은행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올 주총에서 바뀔 은행장은 6∼7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지난 11일 사의를 표명한 洪世杓 외환은행장 후임으로는 吳浩根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과 魏聖復 전 조흥은행장,외환은행 상무를 지낸 李英雨 수출보험공사사장이 거론된다. 다음달 10일 강원은행 및 현대종금과의 합병승인 주총에서 결정될 조흥은행의 초대 합병 행장도 관심이다.현 李康隆 행장대행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관측과 함께 裴贊柄 전 상업은행장이 물망에 오른다.지난 10일 사의를 표명한 李鍊衡 부산은행장 후임에는 金璟林 전 은행감독원 부원장보가 유력하다.張廣所 전 상업은행 상무와 金基潤전무도 후보군(群)이다.李春永 경남은행장의 교체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제일·서울은행은 해외매각계약을 하는 오는 5월쯤까지는 현 柳時烈·申復泳행장 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제일은행을 인수하는 뉴브리지캐피털은 뱅커스트러스트컴퍼니(BTC) 동아시아본부장을 지낸 李健三씨를 포함해 2∼3명의 후보를 고르고 있다.金正泰행장을 뽑기 이전 주택은행장 자리를 고사했던 李씨가 외국계 은행이 되는 제일은행장 자리를 수락할 지 관심이다. 羅應燦 신한은행장의 거취는 이번 주총의 최대 관심거리.국내 은행사상 첫3연임 기록 보유자로,내년 2월이면 ‘은행장 9년’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세운다.羅행장은 IMF한파 속에서도 지난해 590억원의 흑자를 낸데다 재일교포주주들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어 임기를 채울 가능성이 크다.다만일부에서 거론되는 세대교체 명분이 변수다.
  • 한국 영화 이제 세계로 뜬다/100% 외국어 대사로 진행

    ◎‘가족 시네마’ ‘투 타이어드 투 다이’ 해외배급 겨냥 제작/한국·외국 유명배우 캐스팅/신선한 기획… 각국서 호평 “어,이거 진짜 한국영화 맞아?” 28일 개봉하는 ‘가족시네마’와 ‘투 타이어드 투 다이’는 관객이 한번쯤 이런 의구심을 가질 만한 영화다. 감독,제작자,투자자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선 분명 한국영화지만,영화 자체로만 보면 국적을 가늠하기 힘들다. 100% 외국어 대사로 진행돼 자막에 의존해야 하고 거의 전부 외국배우가 출연하기 때문. 전세계 배급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이같은 영화는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생경하겠지만 해외시장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도가 먹혀드는 것이다.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는 정부의 일본문화개방 발표가 없었다면 연내 개봉이 어려웠을 작품.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유씨의 친동생 유애리,작가 양석일,이사야마 히로꼬,마츠다 이치호 등이 출연했다. 국내 첫 상영되는 일본어 영화라는 이유로 주목받지만 정작 박감독은 “일본어,일본배우가 출연한다는 것보다 한국자본과 한국감독이 만든 영화라는걸 강조하고 싶다”고 말한다. 시류에 영합하는 발빠른 영화가 아니라 일본시장을 개척할 한국영화의 대안으로 보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는 “일본은 정말 욕심낼 만한 시장이며 모든 일본인에게 꼭 내 영화를 보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소니,닛카츠 등 일본 메이저배급사 4곳과 40만달러선에서 판권 얘기가 오가고,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지난주 개인시사후 관심을 표명해 해외시장 전망이 밝다. 진원석 감독의‘투 타이어드 투 다이(Too Tired To Die)’는 국내 개봉에 앞서 해외 판권만으로 130만달러의 순제작비를 모두 회수해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큰 시장을 제외한 판권 판매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이익은 더욱 늘어날 전망. 특히 지난 8월 일본에서는 한 극장에서만 개봉하고도 첫주에 1,000만엔의 수익을 올렸으며,이에 힘입어 내년 1월까지 35군데로 개봉관을 확대할 예정이다. 30만달러의 판권비외에 총수익이 이 액수를 넘을경우 이익을 절반씩 나눠갖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했다. ‘투 타이어드 투 다이’는 무엇보다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끈다. 뉴욕에 거주하는 진감독은 데뷔작에서 김혜수와 홍콩배우 금성무,미국의 미라 소르비노 등 세 나라 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저력을 발휘했다. “종래의 감독들처럼 국적과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영화를 만드는 풍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이 여러나라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다. 신선한 기획과 한발 앞선 제작방식으로 해외진출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두편의 한국영화가 과연 국내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런지 기대된다.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비켜간 쟁점들 후속협상에 관심/金 대통령 訪日­미해결 과제

    ◎독도 영유권­우리측 실효적 지배따라 먼저 거론 안해/교포 참정권­시기상조 판단속 정상간 문제제기 수확/교과서 개정­“과거사 문제 완결”… 양국공동연구 이견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양국 현안을 대부분 들춰내서 점검했지만 결론을 유보한 쟁점도 몇개는 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그 대표 사례. 우리 정부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먼저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거론 자체가 국제적으로는 영유권 분쟁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기 때문. 일본은 독도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선에 대해서도 우리는 울릉도와 오키섬의 중간선을,일본은 독도와 울릉도의 중간선을 내세우고 있다. 독도를 자국 EEZ에 포함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재일교포의 지방참정권은 우리 정부가 시기상조라는 판단 아래 애초부터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국가원수간에 이 문제가 제기됐다는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는 평가. 하지만 재일교포들은 일본 헌법상 불가능한 국정참정권은 어렵다고 치더라도납세의무를 지고 있고,역사적 특수성도 있는 만큼 지방참정권은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 일본 최고재판소도 지난 95년 “정주(定住)외국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는 위헌이 아니며 입법정책상 문제”라고 판시했고 일본 지방의회의 40.3%인 1,332곳이 정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 결의를 채택한 상태다.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난 93년 물질적 보상은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최근 피해자들에게 정부 지원금을 지급했다. 정부는 일본이 민간기구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통한 위로금 지급을 중단하고 일본정부 차원의 책임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지난 65년 국교정상화 때 청구권 문제는 이미 종결됐다면서 민간차원의 지원 의사만을 밝히고 있다. 역사교과서 개정도 “역사교육이 중요하다”는 정도로 희미하게 표현됐다. 우리 정부는 교과서 개정을 과거사 사과의 완결로 보고 먼저 해석이 다른 역사적 쟁점에 대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 반면 일본은 교과서 개정을 위한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았으며 역사 공동연구 이전에 먼저 정부자료의 공개 여부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일간 남은 현안 ▲독도영유권 ­우리입장:실효적 지배중. 먼저 거론하지 않는다는 방침 ­일본입장:영유권 분쟁지역,국제사법재판소에서 논의 ▲EEZ 협정 ­우리입장:울릉도·오키섬 중간선이 경계 ­일본입장:울릉도·독도 중간선이 경계 ▲재일교포 지방참정권 ­우리입장:재일교포·2·3세에 부여해야 ­일본입장:주권적 사항,법률적 검토 거쳐야 ▲역사교과서 개정 ­우리입장:과거사 사과의 완결판,역사적 쟁점에 대한 공동연구가 첫 단계 ­일본입장:일본내 분위기 미성숙,진상연구를 위한 자료공개가 선결돼야 ▲군대 위안부 ­우리입장: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표명 요구,민간차원 배상 거부 ­일본입장:65년 청구권 문제 종결,민간기금서 위로금 지급
  • 단편·독립영화 시선끌기 성공

    ◎동숭아트센터 첫 유료상영에 관객 몰려/‘간과 감자’·‘스케이트’·‘햇빛…’ 국내외 영화제서 작품성 인정/등급심의 면제·전용관 설립 절실 단편·독립 영화가 일반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상업영화와 달리 자본과 흥행의 제약을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추구해온 이들 영화는 그동안 배급의 어려움등으로 매니아들사이에서만 환호를 받아왔다.그러나 올들어 국내외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들이 쏟아지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9일 막을 내리는 동숭아트센터 ‘동숭단편극장’의 성공은 이같은 단편영화 관객층의 저변확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송일곤 감독의 ‘간과 감자’,조은령 감독의 ‘스케이트’,김진한 감독의 ‘햇빛 자르는 아이’등 3편을 묶어 지난달 5일부터 상영한 결과 한달간 5,200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일반극장에서의 첫 유료상영인데다 상영횟수가 하루 두차례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의미있는 숫자다.동숭아트센터 영상사업팀의 신수연씨는 “첫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으로반응이 좋다”며 “완성도 있는 단편영화의 경우 이제 상업영화처럼 극장에서 관객들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3편 합쳐 상영시간이 47분에 불과한 이 영화들에 관객이 몰린 이유는 역시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간과 감자’는 올해 폴란드 토룬 국제영화제 최우수상을,‘햇빛 자르는 아이’는 96년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스케이트’는 국내 영화사상 처음으로 올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단편과 독립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은 예년과 달랐다.‘둘 하나 섹스’‘하우등’‘벌이 날다’등 일반극장 개봉이 힘든 이들 독립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앞에 줄을 선 이들이 많았다.특히 일본 이름을 가진 한 재일교포 소년의 정체성찾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은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상영때는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이밖에 매달 첫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독립영화협의회의 정기발표회에도 관객들이 꾸준히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단편·독립영화를 학생들의 습작영화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수준작이 드문 탓이다.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이들 영화가 관객들의 호기심 채우기에 그치치 않고 확고하게 자기영역을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작품을 상영한 세감독은 이를 위해 ‘3호선’이라는 단편영화작가모임도 만들었다.나아가 단편영화에 대한 제작지원과 함께 등급심의면제,독립영화 전용관 설립 등 정부차원의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높다.
  • 야쿠자 살해 30년째 복역/金嬉老씨 새달 석방될듯

    ◎‘金의 전쟁’ 30년만에 마감/김 대통령 방문계기 일 성의 지난 68년 한국인 차별에 격분,일본인 야쿠자 2명을 살해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0년째 복역중인 金嬉老씨(70)가 다음달초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가석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29일 “한·일 관계를 고려,金대통령의 방일 기간중 일본 법무성이 이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일본 법무성은 지난 8월 朴三中 스님(55·부산 자비사 주지)이 金씨의 가석방에 필요한 신원 인수보증서를 제출하자 현재 이를 심사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재일교포 金嬉老 석방 후원회’의 李在鉉 대표(52·서울 관악구 봉천 3동)는 지난 5월 金대통령 앞으로 金씨 석방 탄원서를 보낸데 이어 지난 16일에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나카무라 쇼지부로(中村正三郞) 법무성 장관에게도 탄원서를 송부했다.金씨가 석방되면 한국에서 살수 있도록 그의 일본의 친지와 부인 頓卿淑씨(51) 등이 인천 부평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해 놓았다. 金씨는 39세이던 지난 68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돼지 같은 조센진”이라고 자신을 모욕하던 이나카와 폭력단 소속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사살했다.이어 45㎞ 떨어진 후지미 여관으로 달아난 그는 20여명의 투숙객을 인질로 잡고 ‘재일한국인 차별대우 시정’을 요구하다 5일만에 기자로 변장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金씨는 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서 30년째 복역중이다.일본 최장기수인 金씨는 아직도 법정대리인과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된 채 지내고 있다. 金씨는 지난 80년 3월 頓씨와 옥중재혼했다. 사건 당시 金씨에게 “일본인에게 잡히느니 자결하라”고 권유했던 어머니 朴득순씨는 지금 95세의 고령으로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재일교포 연출가 김봉웅씨 작품/‘뜨거운 파도‘ 한·일 연속공연

    ◎내년 4·5월 서울선 일본어로 일선 한국어로 추진 일본 오이타시의 극단 쯔카 코우헤이가 내년 4월 연극 ‘뜨거운 파도­여형사 이야기’를 일본어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다.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중인 김봉웅씨(50)가 지난 95년 자신의 일본이름을 따 창단한 이 극단은 99년 4월과 5월 서울과 오이타시에서 이 작품의 연속 공연을 시도하면서 해방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일본어공연을 시도한다.반대로 오이타시에서 열릴 5월 공연은 한국어로 진행될 예정이며 현재 한국인 출연배우를 모집중이다. 한일 연속공연으로 추진되는 이 작품은 김씨의 자작 연출극 ‘매춘 수사관’으로 이 극단의 창단작품으로 소개된뒤 도쿄에서 호카이도,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호평을 받은 화제작. 게이오대학 문학부를 중퇴한후 희곡을 쓰기 시작한 김씨는 73년 ‘아타미살인사건’이란 작품으로 키시다 쿠니오상을 최연소로 수상했고 82년 ‘카마다 행진곡’으로 나오키상을 받는 등 일본 연극계에서 입지를 굳혀왔으며 특히 오이타시에서는 ‘지방으로부터의 문화발신’이란 새로운 문화경향을 주도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김씨는 재인한국인으로서 이같은 한일 연극 페스티벌을 통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두나라간에 작은 가교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밝혔다.일본 공연에 참가할 배우에 대한 원서접수는 2일까지 극단 쯔카 코우헤이 서울사무소.1차 오디션은 10월26∼30일.(02)826­6126
  • 경기도 5천만弗 외자유치/4억弗 투자의향서도 접수

    ◎林 지사,LA서 투자설명회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해외를 방문중인 경기도 해외투자유치단(단장 林昌烈지사)은 14일 하오(현지 시각) 미국 LA에서 첫 투자 설명회를 갖고 5,0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한데 이어 4억달러 규모의 투자의향서를 접수했다고 15일 경기도에 알려왔다. NOVA사의 조명호사장(재일교포)은 이날 LA의 OMNI호텔에서 가진 경기도 투자유치단과의 개별 상담에서 용인시 기흥읍 일대에 자동항법장치 연구소 및 공장 건립을 위해 5,000만 달러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50대 투자은행인 APISC사는 3억달러 규모의 축령산 리조트 사업 투자의향서를 전달했다. 가평군 상면에 163만평 규모로 건설되는 축령산 리조트 사업은 스키장,골프장,청소년 수련원,호텔 등을 오는 2005년 건립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투자설명회에 앞서 교포사업가인 텔레비디오사 黃규빈 사장은 샌프란시스코에서 林지사와 개별 상담을 통해 경기 동부지역 실버산업 진출을 위해 1억달러 규모의 투자의향서를 제출했다. 유치단은 15일 워싱턴에 도착,미국 투자회사들을 대상으로 투자설명회를 열고 IMF와 IBRD를 방문,중소기업 정책자금 유치와 SOC프로젝트에 대한 투자협의를 갖는다.
  • 公州 아시아 1인극 메카 꿈꾼다/새달 4일부터 3회 1인극제

    ◎일본·인도 등 6개국 13편 공연/소민연극상 첫 수상자 문장원옹 서구극에 밀려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 1인극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3회 공주 아시아 1인극제’가 9월4일부터 6일까지 충남 공주민속극박물관 극장과 놀이마당,고마나루 야외무대에서 펼쳐진다. 이 연극제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모습을 잃어가는 아시아지역 1인극의 상호교류를 통해 문화적 자생력과 긍지를 되찾으려는 취지로 아시아1인극협회 한국본부가 해마다 실시하고 있다.올해엔 일본 인도 베트남등 아시아지역 6개국 13개 작품이 참가한다. 해외초청작 가운데 말레이시아 탄 아이 수안의 ‘시간이 흐르면…’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친구가 편지와 전화로 대화하는 삶을 그린 작품. 일본 고규미의 ‘사상화(相思花)’는 재일교포 3세인 고규미씨의 시각으로 바라본 조국과 자신의 의지를 무언인형극으로 풀어내고 있다. 1,2회 때도 참가,어린이 인형극을 공연했던 일본의 미야하라 다치오는 ‘원숭이’와 ‘축제의 밤’ 등 성인을 위한 인형극을 공연한다.황푹시(베트남)의 ‘북소리’와 쉬리 아쇼크 챠텔지(인도)의 ‘인생’,‘연’,그리고 질러 라만 존(방글라데시)의 ‘투쟁’ 등도 눈길을 모으는 작품들. 국내작으로는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인 심우성씨가 분단된 조국의 통일전선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한쌍의 젊은이를 추모하는 ‘결혼굿’과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사람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한국마임협의회장 유진규씨의 ‘빈 손’ 등 6개 작품이 소개된다. 소리꾼 장사익씨가 참가,9월6일 하오5시 노래잔치도 벌인다. 전통 연극인을 대상으로 ‘소민연극상’을 선정했는데,첫 수상자로 문장원옹(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유 인간문화재)이 선정됐다.(0416)855­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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