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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림사건 28년만에 명예회복

    법원이 5·18 민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한 용공 조작사건 가운데 하나인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부산지법 형사항소3부(홍성주 부장판사)는 14일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3~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김재규(61)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등 재심청구인 7명에 대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법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 법 개정에 따라 면소 판결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집행유예 2년~징역 1년6개월과 함께 자격정지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고인들의 계엄법 위반 혐의는 모두 무죄”라며 “집시법도 관련 법규정이 바뀌어 사회불안 야기 우려에 대한 조항이 삭제돼 면소 판결을 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국가보안법 부분에 대해서는 파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판단을 할 수 없어 형량으로 대신한다.”면서 피고인들의 형을 대폭 줄여 재심청구인들은 이 부분에 대한 명예도 일부 회복할 수 있게 됐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문병 온 전두환 “DJ 집권때 제일 행복”

    문병 온 전두환 “DJ 집권때 제일 행복”

    1970, 80년대 신군부의 수장과 민주화의 상징으로 대척점에 섰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상에서 해후했다. 전 전 대통령이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12·12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거머쥔 전 전 대통령은 이듬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로 김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음의 위기에서 옥고를 치른 김 전 대통령은 2년 만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2004년 재심에서 2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종교적 용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입원 전까지 준비하던 자서전에서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죽음 직전의 고초까지 안겨준 그를 신앙적으로 용서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용서는 최대의 용기이고, 관용은 정치의 최대 덕목’이라고 강조해왔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1996년 12·12 및 5·18과 관련, 사형을 선고받은 전 전 대통령을 위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며 사면을 건의하고, 자신이 집권했을 때 이를 단행했다. 그는 또 국민의 정부시절 전 전 대통령을 수차례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날 병세가 위중한 김 전 대통령 대신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전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각별한 보살핌을 회고했다.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는 전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외국 방문 후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을 성대하게 준비해주고 선물도 섭섭하지 않게 해주셨다.”고 했다. 그는 “연세가 많아 시간은 걸리겠지만 틀림없이 완쾌해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쾌유를 기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3·1운동 민족대표 길선주선생 ‘독립장’ 서훈

    3·1운동 민족대표 길선주선생 ‘독립장’ 서훈

    국가보훈처는 12일 제64주년 광복절(15일)을 맞아 3·1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한 사람인 고(故) 길선주 선생 등 독립유공자 192명을 포상한다고 밝혔다. 포상 대상인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19명(독립장 2명, 애국장 57명, 애족장 60명), 건국포장 21명, 대통령 표창 52명이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된 길선주(1869~1935년)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유일하게 무죄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동안 포상이 보류됐다. 올해 재심사를 통해 독립선언서 서명과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공적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행적 혹은 월북으로 포상에서 제외된 이는 김창준, 최린, 박희도, 정춘수 등 4명이다. 평양 출신인 길 선생은 1919년 3월 초 체포돼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1928년에는 민족 저항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가 29일 동안 구류됐다. 올해 포상자 192명 중 보훈처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발굴한 대상은 169명이다. 3·1운동 만세시위에서 두 아들을 잃은 윤석원(1861~사망 미상) 선생 등이 새롭게 발굴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된 윤 선생은 1919년 3월 평남 대동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해 일본인 헌병 1명과 조선인 헌병보조원 1명을 살해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소크라테스·로젠버그 부부 등 부당한 세기의 재판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공연을 할 때 ‘히어스 투 유’라는 곡을 자주 들려준다. 1971년 이탈리아 출신 줄리아노 몬탈도 감독이 연출했고, 리카르도 쿠치올라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사코와 반제티’에 쓰여진 노래다. 모리코네가 애절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멜로디를 쓰고, 포크가수이자 인권운동가, 반전 평화운동가인 존 바에즈가 ‘죽음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비장한 노랫말을 썼다. 영화는 미국 최악의 사법 살인으로 꼽히는 재판의 피고인이었던 구두 직공 니콜라 사코와 생선 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실화를 다뤘다. 이탈리아 이민자였던 이들은 강도살인 사건으로 기소됐고, 혐의를 부인했으나 재판은 유죄 분위기로 흘러갔다. 재판이 진행된 7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항의 데모와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사코와 반제티는 결정적인 유죄 증거가 없었음에도 결국 1927년 8월23일 전기의자에 앉는다. 50년이 지난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재판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이들이 사형당한 날을 기념일로 선포한다. 그들이 실제로 유죄였을까, 무죄였을까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국적과 정치적 견해에 대한 편견 속에서 재판이 진행됐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아서 슐레진저 하버드대 교수는 “사코와 반제티는 이민자였고, 가난했으며 무신론자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였고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든 미국인들은 무조건 유죄라고 생각했을 만한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해 가을 사법부 60주년 기념식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은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의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고 국민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권위주의 시절에 유죄 판결됐던 많은 사건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로 뒤바뀌고 있는 게 우리의 요즘이다. 영국 출신의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는 ‘인저스티스’(이보경 옮김, 열대림 펴냄)를 통해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 재판부터 20세기 원폭 기밀 간첩 로젠버그 부부 재판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재판으로 인식되는 13가지의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물론 무고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거나, 유죄 판결에 적어도 합리적인 의혹이 존재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기의 정치범 재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권력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에게 가하는 행동이며, 불확실함과 도덕적 모호함이 넘치는 정치범 재판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시험대”라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회는 반대자를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사회 정의를 향한 불타는 신념이 테러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자국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든 사람에게 반역죄 혐의를 씌우는 것이 적절한 대응인가. 자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다른 나라의 압제자를 공격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2만 3000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검찰 수사관행 이것만은 고치자] 3 유죄의 대변자

    1968년 7월3일 오후 목조기관선 태영호가 연평도 근해 해상에서 다른 선박들과 함께 병어잡이를 하고 있었다. 해군함정은 선박들이 북쪽 어로저지선을 넘지 못하도록 보초를 섰다. 갑자기 북한 경비정이 군사분계선을 뚫고 내려오더니 태영호를 나포해 끌고 올라갔다. 선주 강태광(당시 28세) 등 선원 8명이 4개월간 북한에 억류됐다가 연평도 해상에서 풀려났다.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선원들은 인천·여수경찰서에 34일간 갇혀 구타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태영호가 자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고문에 지친 선원들은 월선했다고 진술했고, 검찰은 69년 9월12일 반공법(탈출)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며칠 후 해군본부가 검찰로 공문서를 보냈다. 태영호가 월선한 것이 아니라 북한 경비정이 나포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태영호 선원들이 무죄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자료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결국 선원들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간첩’이라는 낙인 속에 살았다. ●검찰은 피고인 억울함도 풀어야 2006년 1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태영호 사건을 조사해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밝혀내고 재심을 권고했다. 특히 “무죄를 증명할 해군 공문서를 검찰이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 피해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서 “이는 공익의 대변자로서 직무를 저버린 위법 행위로 (검찰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지난해 7월 40년 만에 선원들에게 무죄 판결했다. 검찰청법은 검찰을 ‘공익의 대변자’로 규정한다. 검찰이 피고인의 잘못만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억울함도 풀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법정에서 승소하려고 검찰은 무죄 증거는 감추고 유죄 증거만 선택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태영호 사건’처럼 그 피해는 치명적이다. ‘용산참사’도 그런 경우다. 검찰은 현재 수사기록 1만 5000쪽 가운데 2500쪽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수뇌부의 진술이 기재된 수사서류, 정보상황 보고 등 경찰의 내부 자료와 경찰 무선교신 자료, 통신사실 조회자료 등이 그것이다. 법원은 이 증거들을 변호인단에게 공개하라고 명령했지만, 검찰은 그 명령마저 거부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경찰 진압 과정이 적법했는지, 참사의 원인이 경찰의 과잉 진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한다.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상죄가 적용된 피고인들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자료다. ●공개재판 기록도 열람 제한 공개 법정에서 작성된 재판기록까지 검찰은 열람을 제한한다. 1989년 조총련 간부에게서 간첩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재미교포 김철(78)씨는 2006년 9월 재심을 준비하며 검찰·법원의 사건기록을 열람하려 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씨의 진술서 1500장을 제외하고는 수사에 지장을 준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공개 법정에서 다퉜던 증인신문은 물론 피고인에게 제시·통보됐던 구속영장, 구속통지서, 공소장, 판결문까지 비공개로 결정했다. 다행히 이후 형사소송법이 개정돼 피고인이 확정된 재판의 기록을 열람 요청하면 검찰이 제한할 수 없도록 바뀌었다. 덕분에 김씨는 수사·재판기록을 받아볼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무죄를 입증하려는 피고인에게 엄격하지만, 유죄를 입증하는 증인에게는 관대하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조작 간첩’ 사건의 재심 재판에 나와 “피고인을 때리고 자백을 강요한 적 없다.”고 뻔뻔스럽게 거짓 증언해도 위증죄로 처벌한 전례가 없다. 한 변호사는 “검찰의 책무가 불법적 행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올해는 죽산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지 꼭 반 백 년이 되는 해다. 1958년 1월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음해 7월 간첩죄로 처형되었으니 실로 일사천리의 고속 재판이었다. 그가 저지른 죄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니 그 전전해 치러진 대선에서 너무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보수정치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는 점이 그 하나요, 그때까지도 금기시되었던 남북의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 둘이었다. 그 재판이 가진 정치적 성격을 알고 있는 1심 재판부는 간첩죄에는 무죄를 내리고 국가보안법 일부에 비교적 가벼운 5년 형을 선고했으며, 진보당 간부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을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검찰이 구형한 대로 간첩죄를 적용, 그에게 사용언도를 내렸으며, 이듬해의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사형언도가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5개월 뒤의 재심청구가 대법원에서 기각된 바로 다음날(7월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의 비통하고 절망적이던 느낌을 나는 ‘그날’이라는 시에서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바도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명명백백한 사법살인의 희생자인 죽산이 아직도 명예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크게 퇴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장황하게 죽산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그 재판과정에서 한 재판관이 보여준 용기있는 결단이 최근 새삼스럽게 생각나서다. 1심의 재판장이던 그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죽산의 평화통일론에 손을 들어주었다. 북진통일 이외의 어떠한 방식의 통일도 논해서는 안 되는 서슬 퍼런 시대에 말이다. 매일처럼 경찰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용공판사를 규탄하는 데모가 벌어졌고, 당국은 공공연히 그에게 사퇴 압력을 가했다. 그 뒤 압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가 사퇴한 것으로 알지만, 그가 남긴 기록 한 대목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책(아마도 ‘어느 재판관의 고뇌’라는 책이 아니었나싶다)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육이오 때 그는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고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급조된 계엄법은 재판관의 재량을 한껏 제한, 유죄인 경우 사형, 무기, 15년의 세 가지 형을 선고하는 자유밖에 주지 않았다. 그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거의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범법의 심증이 있을 경우에도 그것이 가벼운 것이면 무죄로 판결했다. 강제 동원되어 노래 몇 마디 부르고 박수 몇 차례 쳤다가 15년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불행한 삶이 있게 하는 것이 법의 취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통한 죽음과 죽산의 사법 살인은 서로 닮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문득 죽산 사건이 생각난 것은 그 재판관이 피의자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 노 전 대통령을 다룬 검찰의 태도가 너무나 판이해서였다. 그 재판관은 피의자는 유죄가 확정되기까지는 일단 무죄라는 생각으로 피의자를 대했으며, 피의자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피의자를 조롱하고 망신주고 모욕하는 일을 법관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터부로 여긴다는 뜻의 진술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합리적이고 온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검찰에 몇 사람만 있었어도, 전직 대통령의 자결이라는 불행한 광경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지 않았어도 좋았을는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새삼스럽게 그를 생각나게 하며 죽산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법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진술도 잊히지 않는다. 시인
  • [검찰 수사관행 이것만은 고치자] 피의사실공표죄 유명무실

    [검찰 수사관행 이것만은 고치자] 피의사실공표죄 유명무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검찰은 확정되지 않은 혐의를 직접 중계하거나 내부 ‘빨대(취재원)’를 통해 언론에 흘렸다고 비판받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수사책임자인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과 홍만표 수사기획관, 우병우 중수1과장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했다. 형법 제126조는 수사기관이 피의사실(혐의)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公表)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때부터 존재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장 대리였던 엄상섭 의원은 “요새 경찰서 문 앞에만 가도 당장에 신문에 나서 혐의를 받는 사람이 명예를 유지하는 데 대단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확정판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헌법상 원칙에도 어긋나고 소문이 퍼진 뒤에는 다시 주워 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아 법조항을 신설한다.”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 피의사실공표 사건 기소 전무 이러한 입법 취지는 56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피의사실공표죄는 ‘죽은’ 법조항이나 다름없다. 형사처벌을 받은 검사나 경찰관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05년 1월 이후부터 올 4월까지 검찰에 접수된 피의사실 공표 사건 116건 가운데 기소된 것이 하나 없고 확인되는 대법원 판례도 없다. 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처벌 대상자라 피해자가 고소·고발하더라도 검찰이 불기소 처분하거나 기소유예로 재판에 넘기지 않아 범죄 통계나 판례가 축적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검찰의 기소독점주의가 불러온 폐단이라는 설명이다. 형사처벌이 불가능하자 ‘피의사실 공표’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청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검사가 구속 피의자의 혐의 사실을 자료로 배포한 것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99년 1월 처음 나왔지만, 그후에도 피의사실 공표 수사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대법원이 선진국에 비해 기준을 관대하게 정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당한 관심 대상이고 ▲정당한 목적이 있는 수사 결과를 ▲발표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공식 절차에 따라 ▲유죄를 속단할 수 있는 표현을 피해서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공표하면 형사처벌은 물론 민사배상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 美선 수사기관 정보누설 엄격 금지 반면 선진국은 수사기관의 정보 누설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미국의 카젠바흐-미첼 가이드라인은 ▲피의자의 성격에 관한 진술 ▲피의자 진술이나 자백, 알리바이 ▲피의자 진술상 오류나 진술거부 사실 ▲지문·거짓말탐지기 등 과학수사에 피의자가 응하지 않은 사실에 관한 언급 등을 공표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주택의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는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진술이나 “아내(권양숙 여사)가 회갑선물로 받은 고급 시계를 버렸다.”는 노 전 대통령의 진술을 언론에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의사실공표죄가 유명무실하다 보니 검찰은 ‘언론플레이’로 피의자를 압박해 자백을 이끌어 내고 ‘여론재판’으로 법관의 유죄 심증을 굳히려 시도한다. 그런 사례가 노 전 대통령 수사에서도 있었다. 대검 중수부는 지난 4월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을 때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대질할 계획이라고 미리 언론에 공식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며 거부하자 곧바로 이 사실을 공개했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떳떳하지 않아 대질신문에 응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한발 더 나아가 검사가 피의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보도했다고 민사소송을 내기도 한다. 지난 대선 때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검찰수사를 받던 김경준씨가 검찰이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면 형량을 낮춰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하며 메모와 녹음테이프를 건네자 시사주간지 ‘시사IN’이 이를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김씨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한 것처럼 보도해 검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시사IN을 상대로 6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김씨 가족 말만 듣고 보도했다며 언론사가 36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래도 피의사실공표죄가 되살아날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다.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더라도, 고소·고발인이 법원에 재정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법원이 사건을 재심리해 재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수사관을 피의사실공표죄로 기소하게 된다. 노 전 대통령 사건이 첫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80년 아람회 사건 5명 재심서 무죄·면소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 이성호)는 2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신군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나누다 ‘아람회’라는 가상의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박해전(52)씨 등 재심 청구인 5명에게 모두 무죄 또는 면소 판결했다. 이들은 1980년 6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진압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국가보안법 및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6개월∼10년형이 확정됐다.재판부는 “이들이 친목 모임을 하다 전두환 정권을 비난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영장없이 이들을 대공분실로 끌고 가 한 달 정도 불법구금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고문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생존을 위해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또 “이 사건은 처음에는 정부를 비방한 단순 반공법 위반 사건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공무원·교사·군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청와대 등에서 관심을 갖고 경찰에 격려전화를 하게 되면서 확대·조작됐다.”고 설명했다.재판부는 아울러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지 못함으로써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피고인과 가족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DJ 목숨 구한 ‘교황 편지’ 첫 공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확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지는 데 당시 교황이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케 하는 문서가 처음 공개됐다. 19일 광주일보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자료에 따르면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11일 서울 주재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제5공화국 정부에 보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5일자 ‘회답서신’을 통해 “(김대중은) 어떠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오직 불법적인 방법과 폭력에 의한 합법 정부의 전복 기도를 포함한 반국가적 범죄로 인하여 재판을 받고 있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교황) 성하의 호소가 순전히 인도적 고려와 자비심에 의거한 것임을 유념하겠다.”고 답했다. 이 후 김 전 대통령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진 것은 교황이 첫 편지를 보낸지 43일 만인 1981년 1월23일 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2월14일자 친서를 통해 “최근 사형이 감형된 김대중에 대해 순수하게 인도적 이유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요청했습다.”며 “(전두환) 각하께서 신속히 배려(감형)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됐지만 교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구명 운동을 벌이고 미국 등이 ‘김대중 사형은 지나치다.’며 군사정권을 압박한 결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나서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1987년 사면·복권되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국제 사회의 구명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구명운동에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신군부가 정권 탈취과정에서 발생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5·18 민주화운동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전 총리 등 당시 민주화 인사 24명이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서울광장] 징역12년 구형과 무죄 판결 사이/황성기 편집위원

    [서울광장] 징역12년 구형과 무죄 판결 사이/황성기 편집위원

    검찰이 액셀을 과도하게 밟았다. 간첩이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인신을 구속하고 기소부터 해놓고 증거를 모았다. 그 귀결은 무죄였다. 탈북자 김동순(64)씨. 지난해 9월 기소 때부터 “진짜 간첩이 맞냐?”는 의구심을 낳았던 사건이다. 18일 수원지방법원 310호 법정. 재판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가 떨어지자 김씨는 지난 반년 미결수로 지낸 끔찍한 시간을 털어내듯 울먹인다. 지난해 촛불정국 직후 여간첩 사건이라고 발표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원정화(35)씨의 의붓아버지이다. 김씨 재판은 원씨와는 달리 이목을 끌지 못했다.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방청권까지 나눠줬던 원씨 때와 비교하면 김씨의 재판은 방청석이 썰렁했던 잊혀진 간첩 사건이었다. 남에 있는 가족조차 간첩 친척이라는 눈길이 무서워 재판에 거의 오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본다면 김씨는 원씨 못지않은 간첩이다. 공작원 원씨에게 간첩 행위의 편의를 제공하고, 황장엽씨 거처를 알아내려 시도했고, 노동당 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중국 단둥에 있는 북한대표부 부대표로 위장한 보위부 직원과 만났다는 게 기소 내용이다. 그에게는 국가보안법의 간첩, 잠입·탈출, 찬양·고무, 회합·통신, 편의제공이란 무시무시한 죄명이 적용됐다. 하지만 검찰이 내놓은 증거는 원씨 진술과 중국을 왕래한 행적, 조선노동당 당원증이 고작이었다. 김씨는 원씨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자신이 공작원이라는 것을 계부가 알고 있었다는 딸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맞섰다. 유일한 직접 증거라 할 수 있는 당원증도 그가 훗날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 자료로 활용하려고 가지고 왔다고 했다. 당원증은 김씨 집을 압수수색할 당시부터 김일성 얼굴에 낙서가 돼 있는 상태였다. 진짜 간첩이라면 소지할 리가 없고 훼손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다른 탈북자의 증언이 공판에서 채택됐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간접증거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선고를 한 차례 연기하면서 열렸던 변론재개에서도 재판부는 원씨와 김씨의 전화통화 감청 가운데 검찰에 유리한 발췌 기록이 탐탁지 않은 듯 감청내용 전부를 듣고 피고에게 진위를 물어보는 씁쓸한 광경도 있었다. 간첩 하나 만들고 낙인 찍긴 쉬워도 잘못 찍힌 낙인을 지우기는 어렵다. 지난달 법원은 ‘80년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29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무죄로 돌렸다. 검찰은 민주화 이전 시절의 살벌한 공안 드라이브를 타려는 것일까. 검찰의 “국민의 보안의식이 해이해져”라는 논고처럼 최근 공안을 강화하는 데 2008년판 ‘가족 간첩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재판장이 판결에서 지적한 대로 “간첩이라는 대전제 하에”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지적을 들을 만하다. 공안당국의 폭주에 손바닥을 맞췄던 과거 사법부 같았다면 분명 유죄 판결이 나왔을 것이라는 섬뜩한 상상도 해본다. 이 사건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전가의 보도처럼 국보법을 빼든 검찰의 징역 12년 구형은 무죄로 매듭지어졌다. 검찰의 역주행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려고 남에 왔다.”는 김씨. 탈북 2년 사이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만신창이가 된 그는 도대체 어떻게 위로 받고 보상 받아야 하나. 황성기 편집위원 marry04@seoul.co.kr
  • 무죄판결 대법 홈피에도 공시

    오는 3월부터 대법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무죄 판결 공시가 이루어진다. 무죄 판결 공시의 폭이 넓어지는 셈이다.대법원은 이 같은 내용으로 공시절차 지침을 개정해 3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15일 밝혔다.이 제도는 범죄 혐의를 받고 기소됐으나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 무죄 취지를 널리 알려 명예회복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재심 사건은 원칙적으로 공개하고, 일반 형사 사건은 당사자가 요청하면 재판장의 판단에 따라 공개가 결정된다. 재판장은 대개 무죄 판결을 내릴 때 공시할 뜻이 있는지 피고인에게 확인한다.그동안 법원은 관보와 해당 법원 소재지에서 발간되는 일간지의 광고면에 무죄 판결의 주요 내용을 1차례 게재하며 공개해 왔다. 이번에 개정된 지침에 따라 대법원은 홈페이지에 무죄 판결을 알리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 공고 내용은 6개월 뒤 자동 삭제된다.우리나라의 경우 무죄 판결을 받아도 재판정에 섰다는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이 제도의 활성화가 더딘 상황이다. 하지만 수사를 받거나 기소되는 자체로도 마치 죄가 있는 듯 여겨지는 국내 정서상, 이 제도는 당사자의 명예회복에 큰 도움이 되며 꾸준히 활성화를 유도하겠다는 게 대법원 입장이다.대법원 관계자는 “지방 소재 신문의 경우 공시의 실제 효과가 높지 않았으나 이번 개정으로 효과가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27년만에 다시 법정에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27년만에 다시 법정에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을 법원이 다시 재판을 하기로 결정했다. 송기준(81·징역 6년)·송기복(67·징역1년)씨 등 피고인 8명이 27년만에 법정에 선다. 송기섭(84세·징역 6년)씨와 송지섭(83·징역 7년6개월)씨는 지난해와 2006년에 숨져 가족이 대신 출석한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서기석)는 “당시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을 영장 없이 불법 연행해 최장 116일간 구금하고 고문 등 가혹 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인정돼 송씨일가 사건에 대해 재심을 개시하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1982년 9월10일 안기부는 “월북했다가 남파된 송창섭에게 포섭돼 서울·충북에서 25년간 간첩 활동한 그의 처와 아들 등 28명이 적발됐다.”고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시 공무원, 대학 음악교수, 중학교 미술교사 등이 포함돼 있었다. 자백 말고는 물증이 없었던 터라 대법원은 안기부의 불법 구금이 인정된다며 두 차례나 무죄 취지로 사건을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고법이 모두 대법원 판결에 불복했고 사법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7차례 재판까지 열렸다. 1984년 11월, 피고인 12명은 징역 7년6개월~징역1년형을 확정받았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2007년 10월 “안기부가 대법관 인사 등을 대가로 재판 과정에 개입했고 법원이 이에 적극 협력했다.”고 발표했다. 형사소송법은 수사관의 폭행 및 불법구금이 확정판결로 밝혀지면 재심을 개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송씨일가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7년)가 지나 안기부 수사관을 처벌할 수 없지만, 재판부는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 결과를 확정판결을 대신하는 객관적인 증명으로 인정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대법 “기각 신정아 학위위조 재심리하라”

    대법 “기각 신정아 학위위조 재심리하라”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30일 위조한 대학 졸업장을 제출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신정아(36) 전 동국대 조교수에 대한 상고심에서 “업무방해 혐의 중 이화여대에서 허위 학력으로 강의한 부분은 무죄취지로, 공소기각된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 및 행사 혐의는 다시 심리하라.”면서 사건을 서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또 경북 울주군 흥덕사에 특별교부세를 지원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 등으로 신씨와 함께 구속 기소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해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씨가 이대에 제출한 서류는 허위 학력이 기재된 이력서뿐이었다.”면서 “신씨가 다른 대학이나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선임과정처럼 이력서 외에 다른 위조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점, 심사업무 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를 고려할 때 업무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예일대 박사학위를 위조하고 행사한 혐의에 대해 원심은 신씨가 동국대 등에 제출한 박사학위 사본과 대조할 원본이 없어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는다면서 공소기각을 선고했지만 검찰의 공소사실 중 박사학위 위조 부분은 신씨가 위조했다는 문서의 내용 및 그 명의자가 특정되었을 뿐 아니라 위조 일시, 방법이 기재되어 있다.”면서 “재심리하라.”고 덧붙였다. 앞서 신씨는 뇌물수수 등 10가지 혐의로 기소돼 1, 2심에서 미술관 공금 횡령과 미국 캔자스대 졸업 및 예일대 박사과정 입학 학력을 위조한 혐의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민청학련 45명 재심 청구

    이해찬 전 국무총리, 유인태·장영달 전 민주당 의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이철 전 철도공사 사장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자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30일 서울고법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민청학련 소속 대학생으로 지목돼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이 전 총리 등 45명은 “인혁당의 재심 무죄 판결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민청학련 수사 당시의 고문과 공판기록 조작 등이 드러났다.”며 재심 청구 이유를 밝혔다. 재심 개시 결정에 앞서 검찰은 “증거에 따라 재판부의 현명한 결정을 바란다.”는 의견을 냈다. 재심 청구인에는 일본 ‘주간현대’ 기자로 한국을 방문해 이철 전 사장 등을 취재하고 약간의 사례비를 건넨 것이 ‘좌익자금’으로 조작돼 구속됐던 다치가와 마사키도 포함됐다. 민청학련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90년 12월에 사망한 김병곤씨를 대신해서 부인 박문숙씨가 참여했다. 이들이 청구한 17건의 사건은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서기석), 형사4부(부장 윤재윤), 형사9부(부장 고의영),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규진), 형사합의23부(부장 민병훈)에 각각 배당됐고 해당 재판부는 관련 기록을 검토해 재심 개시를 결정할 예정이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1974년 4월 당시 정부가 유신 반대 집회를 준비하던 민청학련 소속 대학생 등 18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특히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고 도예종 등 인혁당 소속 8명에게는 사형을, 민청학련 대학생에게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 1월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피고인의 수사 기록이 장기간 구금된 상태에서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구타 등을 통해 작성돼 증거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29년만에 벗은 ‘간첩 누명’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한양석)는 22일 ‘80년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석달윤(75·18년 복역)씨와 박공심(70·여·1년6개월형)씨, 장제영(81·2년형)씨에게 29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석씨는 “한숨과 눈물 속에서 29년을 기다렸다.”며 감격했다. 그러나 같은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김정인(당시 41세)씨는 아직 ‘간첩 누명’을 벗지 못했다. 김씨의 부인 한화자(66)씨가 남편을 대신해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첫 재판조차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 진도 간첩단 사건’은 진도 임해면 한 어촌 마을에 모여 살던 일가족이 6·25 때 월북한 친척 박모씨를 도와 10여년간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6월 김씨 등 4명이 간첩으로 조작됐다고 결정했다. 남편 김씨의 재심 재판을 기다리는 부인 한씨는 석씨가 먼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참 좋은 일”이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내 한씨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 “날 구하려고 남편이 허위 자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가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아 까무러칠 때 남편은 “마누라는 죄가 없으니 나만 죽이시오.”라고 울부짖었다. “당신과 자식들만 살 수 있으면 나는 100번이라도 누명 쓸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큰아들이 열일곱, 막내딸이 세 살이었다. 그래서 한씨는 두 달간 고문을 받았지만, 허위 자백하지 않았다. 한씨는 ‘간첩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에 시어머니(지난해 사망·91세)와 5남매를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났다. 목포에서 식모살이, 공장 야간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남편의 누명을 벗기려면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다.”고 다짐했다. 남편 김씨는 1985년 10월31일 사형이 집행됐다. 눈을 기증한 남편은 붉은 피로 뒤덮인 채 누워 있었다. 새옷을 장만할 돈이 없어 그대로 묻었다. 남편이 품고 있던 가족사진에는 ‘하느님,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도록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 글이 적혀 있었다. 지난해 12월12일 한씨는 석씨의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가 고문하던 중정 수사관들을 맞닥뜨렸다. 살이 찌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그러나 그들은 “28년이나 지났는데 알 턱이 있나.” “그렇지.”라고 희희낙락했다. “남편은 생명을, 나는 인생을 잃었는데 그들은 죄책감이 전혀 없더라. 남편도 무죄를 받으면 그때 이 한을 다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 가기] 선씨 종부 ‘350년 간장’ 인터넷에 팔았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나 뉴타운이 애물단지가 된 이유 또 다른 철거민들…세운상가 떠난 이들의 겨울 “나도 힘깨나 썼지만 요즘같은 폭력 국회는…”
  • 마침내 벗은 간첩누명

    “이제 법정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 좋습니다.” 법원이 19일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확정받았던 피고인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이중간첩’으로 사형된 이수근씨의 처조카 배경옥(70)씨는 39년 만에,‘조작 간첩’ 고(故) 이장형(사망 당시 74세)씨는 23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박형남)는 배경옥씨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에 대해 “이수근씨가 이중간첩이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어 이씨를 도왔다는 배씨의 혐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씨 외조카 김세준(61)씨도 이날 무죄를 받았다.다만 배씨가 이씨의 변장 사진을 다른 사람 명의의 여권에 붙인 것은 공문서 위조라고 판단,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였던 이수근씨는 1967년 3월 판문점으로 귀순했다.그러나 69년 1월 위조 여권으로 캄보디아로 떠나다 중정 수사관에게 체포됐고 ‘이중간첩’으로 몰렸다.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씨는 항소했지만,항소심 재판이 열리기도 전인 그해 7월 사형이 집행됐다.배씨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89년까지 20년간 복역했다.김세준씨(61)도 이씨 도망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확정받았다. 재판부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피고인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검찰은 피고인이 진술을 번복할 때마다 중정 수사관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인권 유린을 묵인했다.”면서 “법원도 증거재판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해 인권의 마지막 지킴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광만)도 이날 고 이장형씨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다만 이씨가 기준 환율을 따르지 않고 엔화를 원화로 바꿔 외국환 관리법을 위반했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이씨는 조총련 간부인 숙부에게 간첩 지령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85년 9월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13년간 복역했다. 이씨를 대신해 피고인석에 앉은 부인 임윤근(74)씨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재판 소식을 물으며 기다렸는데….”라며 눈물을 쏟았다.98년 8·15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씨는 고문 탓에 허위 자백했다며 2005년 8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그러나 2006년 12월27일 이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지난 5월20일 진실화해위가 재심을 권고했고 지난 10월17일에 첫 재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구속 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57일간 불법 구금됐고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 허위 진술했다.”면서 “간첩 혐의를 자백한 진술조서는 신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억울한 옥살이 15년’ 36년만에 누명 벗다

     지난 1972년 춘천에서 경찰 간부의 딸을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간 복역했던 살인범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 36년만에 누명을 벗었다.춘천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정성태 부장판사)는 28일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5년간 복역했던 정원섭(74·당시 38세)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씨로서는 당시 사건 이후 살인범으로 낙인찍힌 지 36년만이자,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1999년 서울고법에 첫 재심을 제기한 지 10년만의 명예회복이다.  특히 그동안 간첩 조작 등 시국관련 사건 피고인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수차례 있었으나,이처럼 일반 형사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 경찰관들이 정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폭행·협박 내지 가혹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며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는 적법 절차에 반하는 중대한 하자가 있어 증거 능력이 없거나 절차적 하자 등의 문제로 증명력이 부족한 만큼 정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긴 시간 동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법원의 문을 두드린 피고인 정씨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댔던 법원마저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고,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언급했다.  당시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972년 9월27일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한 초등학생(당시 9세·여)이 피살됐다.이 초등생 살해 혐의로 붙잡힌 정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이후 정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기각됐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감사원 직불금 국조 망신은 예정된 일”

    “감사원 직불금 국조 망신은 예정된 일”

    16일 점심 무렵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현준희(55)씨는 12년 만에 명예를 회복한 이답지 않게 덤덤한 표정이었다. 기뻐 들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현씨는 “쑥스럽다.”고 했다.“슬픔도 오래되면 눈물이 마른다고 하던데 제가 딱 그렇네요.”다시 시작한다는 현씨는 자신의 파면을 인정한 법원판결에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현씨는 감사원 주사로 있던 지난 1996년 “권력형비리 감사가 외압으로 중단됐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그에게는 파면 소식과 명예훼손소송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명예훼손소송은 1심과 2심에서 승소했지만 2002년에 대법원(주심 이규홍 대법관)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다.4년 뒤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재상고했고, 지난 13일 드디어 대법원(재판장 전수안 대법관)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됐다. 현씨에겐 지루한 사건의 ‘종결’이자 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어낸 명예회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씨에게 사건의 종결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현씨는 자신을 파면한 감사원 결정을 인정한 법원판결에 대해 재심을 신청할 계획이다. 변호사도 선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몇 년이나 걸릴 것인가. 현씨는 “답답하다.”는 말을 토해 내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현씨는 1995년 효산그룹이 경기 남양주시에 콘도를 건립하기 위해 김영삼 정권 실세들과 결탁해 주무기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감사과정에서 콘도 사업허가가 법규를 위반한 것이고 건설교통부와 경기도·남양주시 공무원들이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있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갑자기 감사를 중단시켰다. 현씨는 이에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 상급자로부터 “보관하는 서류를 없애 버려라.”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궁지에 몰린 현씨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1996년 4월 이같은 사실을 폭로했다. 감사원은 즉각 현씨를 파면했다. 파면무효청구소송을 냈지만 2002년 패소했다.7급으로 공직을 시작해 5급 승진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 부분에서 현씨는 “12년 동안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누명을 벗었지만 사과하거나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솔직히 허망합니다.”라고 했다. 현씨의 말은 이어졌다.“그때로 돌아간다면 결코 공익제보 같은 것은 안 할 겁니다. 주변에서 공익제보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말했다. 현씨는 자신에게 감사 중단을 지시한 당시 감사원 모 국장은 퇴임 후 건축사로 일한다고 했다. 현씨는 “그에게 ‘이제 당신이 양심선언을 할 차례’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묵묵부답”이라고 밝혔다. 파면된 후 2개월간 감옥생활을 겪기도 한 현씨는 학습지 판매, 휴대전화 영업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다행히 2000년에 외국인 상대 숙박업소인 국내 첫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이어져 지금은 형편이 예전보다 나아졌다. 현씨는 “참여연대와 민변에서 12년 동안 돈 한 푼 받지 않고 내 사건을 맡아서 처리해 줬기 때문에 승소할 수 있었다.”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밝혔다. 현씨는 “감사원이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본래 취지만 잘 살렸어도 쌀직불금 국정조사 같은 망신을 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과거사 재심 속도낸다

    간첩으로 몰린 납북 어민이 24년 만에 재심 재판에서 검찰의 무죄 구형에 이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전북 군산 개야도 납북어민 서창덕(62)씨는 3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 201호 법정에서 간첩의 누명을 벗게 되자 끝내 눈물을 흘렸다. 지난 4월8일 재심을 청구한 지 거의 7개월 만이다. 서씨는 “‘간첩 아버지’로 만들었던 그 법원이 무죄라고 하니, 이제라도 ‘아버지’ 소리를 제대로 듣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법부의 과거사 재판이 지지부진하다는 서울신문 보도가 나온 가운데 재심을 청구한 지 7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검찰의 무죄 구형과 법원의 무죄 선고가 잇따라 이뤄진 과거사 재심 사례가 처음으로 나왔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합의부(부장 정재규)는 이날 “피고인은 과거 법원의 유죄 판결로 수형생활을 했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을 입었다. 새로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그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씨와 방청객들은 “재판부 만세”를 부르며 신속한 무죄 판결을 반겼다. 서씨도 “모든 조작 간첩들이 빨리 무죄 선고를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씨는 열여덟살이던 지난 1967년 5월 황해도 구월봉 앞바다에서 조기를 잡다가 북한 경비정에 피랍된 뒤 124일 만에 귀환했다. 이 일로 그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17년이 지난 84년 5월26일 전주 보안대 소속 수사관 4,5명이 서씨를 연행해 33일간 고문하며 간첩 활동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한글을 배우지 못한 서씨에게 보안대 요원들은 임의로 만든 자술서에 무인을 찍게 했다. 법원은 자술서만으로 서씨를 간첩으로 인정, 징역 10년을 선고했다.7년간 옥살이를 끝내고 91년 5월 그는 석방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말 “민간인을 수사할 수 없는 전주 보안대가 고문과 협박으로 서씨를 간첩으로 허위 조작했다.”며 재심을 권고했다. 재심이란 확정 판결 후 무죄로 인정할 만한 새 증거 등이 나오면 피고인이 다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제도로, 법원이 새 증거의 가치를 인정해 개시 결정을 내려야 재판이 시작된다. 서씨는 지난 4월8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열흘 뒤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이례적으로 “재심 개시가 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조작 간첩 사건에서 흔히 재심 개시를 반대하던 종전 입장과 사뭇 다른 결정이었다. 재판부도 두 달 만인 6월16일 개시 결정을 내렸고 신속히 재판을 진행했다. 지난 24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재심 사건에서 처음으로 무죄를 구형했다. 검찰은 “24년이 지나 돌이키기 어렵지만, 공인의 대변자인 검사로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했다. 앞서 지난 2005년 조작 간첩으로 첫 무죄를 선고받은 함주명씨 사건(83년)에서는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다.‘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74년)의 재심에서도 검찰은 구형을 하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피했다.군산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말뿐인 사법부 과거 반성] 여전히 기울어진 ‘신의 저울’

    [말뿐인 사법부 과거 반성] 여전히 기울어진 ‘신의 저울’

    대법원은 사법 60주년을 맞아 재심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겠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법원 일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건 당사자에게 재판 기록조차 공개하지 않고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결정을 재심 사유로 인정하지 않는 판례들이 잇따르고 있다.1·2심에서 재심을 허가한 사건을 대법원이 거부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비판하던 대법관들이 두 달만에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사건 당사자조차 재판기록 못봐 조총련 간부인 동업자 정모씨에게 간첩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된 재미교포 김철(77)씨는 1989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했다며 2006년 9월 재심을 준비하며 검찰·법원의 사건기록을 열람하려 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은 김씨의 진술서 1500장을 제외하고는 수사에 지장을 준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 법원도 사건 당사자인 김씨를 정보공개법상 ‘제3자‘로 취급하며 수사에 필요하다는 자료를 빼고 열람하라고 판결했다. 공개된 법정에서 다퉜던 증인신문조차도 비공개 목록에 포함됐다. 김씨는 항소했고 사건은 서울고법에 계류 중이다. 법원은 국가보안법 제4조의 국가기밀 누설죄에 대한 헌재의 한정합헌 결정도 재심 사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97년 비밀로 보호할만한 실질적 가치가 있어야 국가기밀이라며 한정합헌 의견을 냈다. 신문에서 읽은 뉴스 등 ‘일반에게 알려진 공지의 사실‘조차 국가기밀로 폭넓게 해석하던 법원 판례에 제동을 건 것이다. 한정합헌이란 법률이 위헌 소지가 있어 특정하게 해석할 때만 합헌이라고 판단하는 헌재의 결정이다. 국가기밀 누설죄로 처벌받았던 함정희씨는 헌재 결정을 토대로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2001년 5월 10일 재심 개시를 거부했다. 헌재가 단순 위헌이라고 결정하지 않는 한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정합헌은 법률 해석에 관한 일종의 권고에 불과해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법원의 재량이라며 배척했다. 한정합헌도 위헌 결정의 일종이라는 헌재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신귀영(72)씨 가족은 80년 재일교포인 형 수영씨의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유출하는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3~15년형을 받았다. 사건 당시 일본에 거주해 증언할 수 없었던 수영씨는 95년, 조총련 간부도 아니고 간첩 지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진술했고, 신씨 가족은 이를 토대로 재심을 신청했다.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새로운 증거 하나만 보았을 때, 무죄가 나올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될 때만 재심을 허용해야 한다.”며 진술서만으로는 재심을 허용할 수 없다고 원심을 뒤집었다. 5년 뒤 신씨 가족은 고문에 의해 위증했다는 당시 증인의 진술을 토대로 두 번째 재심을 신청했다. 부산지법은 재심을 허용했지만, 부산고법과 대법원은 배척했다. 지난해 1월23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씨 사건을 간첩조작 사건이라 결론짓고 재심을 권고했고, 신씨는 같은 해 7월10일 세 번째 재심을 청구했다.1년이 지났지만 법원은 묵묵부답이다. ●이용훈 “구차한 소멸시효 주장 용납못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96년 12월에 삼청교육대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용훈 현 대법원장을 포함해 천경소·정귀호·이임수 당시 대법관은 “국가가 정정당당하게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소수의견을 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97년 2월 정귀호·이임수 대법관은 동일한 삼청교육대 사건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기존 의견을 철회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였다. 이전에 다수의견을 냈던 이돈희 대법관까지 세 대법관의 의견이 일치해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의 불법행위에 소멸시효를 적용한 대법원 판례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수지 김 사건, 최종길 교수 사건 등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한 하급심 판결이 2003년과 2006년에 나왔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강남경찰서, 기업형 룸살롱에도 ‘性戰’ 칼날 주택금융公, 직원엔 펑펑 서민엔 찔끔   [뉴스in뉴스] 촛불 농성 100일,조계사에서는 지금…   [캐릭터뷰] 박철민이 말하는 ‘불광동 배용기’ 그리고 ‘배우 박철민’   기획재정부의 아고라 활동에 네티즌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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