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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단일 통화 「유로」 유력

    ◎EU 재무장관들 의견 접근… 12월 결정 【발렌시아(스페인) 로이터 연합】 유럽연합(EU) 단일통화의 이름은 「유로(EURO)」로 정해질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벨기에의 필리페 마이스타트 재무장관은 「유로」가 모든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로」라는 이름은 독일의 테오 바이겔 재무장관이 제안한 것이다. 지난주 발렌시아에서 열린 EU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 유럽통화위원회 나이젤 윅스 의장은 EU단일통화의 명칭이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EU단일통화를 성공적으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단일통화의 이름은 어떤 불쾌한 역사적인 연관이 없어야 하며 짧아 발음하기 쉽고 어디서도 같아야 하며 유럽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나라들은 「ECU」라는 이름에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독일은 최근 몇년간 꾸준히 약화돼온 유럽통화 ECU바스켓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EU 15개 회원국은 오는 12월 마드리드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 1달러 1백엔 유지/G­7 재무 합의할듯

    【도쿄 연합】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는 다음달 초 워싱턴에서 열릴 연석회의에서 현재 달러당 1백엔을 오르내리고 있는 외환시세를 안정적으로 1백엔선으로 정착시키자는데 합의할 전망이라고 일 교도통신이 25일 국제금융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일본의 경기 침체가 세계 경제의 안정 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G­7 안에서 고조되고 있다면서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연석회의는 현재의 외환시장을 「질서있는 반전과정」으로 인식하고 협조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G­7 회의는 의장성명 등으로 이같은 상황 인식을 강조할 것이라고 이통신은 설명했다.
  • 알와리드 사우디 왕자 사업가로 “대 성공”

    ◎세계굴지 기업·은행·호텔 대거 매입/장래 중시… 부실기업 집중투자 적중/언론매체·쇼비즈니스도 큰 관심… 한해 5천만달러 수익 호화궁전,전용 비행기,40인승 호화요트에 4백명의 가신,2명의 24시간 무장경호원을 거느린 아라비안 나이트 왕자 알와리드 빈 타랄.이들 식솔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그러나 그의 가계비 지출의 2%도 안될 만큼 「사막의 왕자」는 갑부다.알와리드는 또한 궁핍한 서민들에게 한해에 1억5천만달러를 희사하며 가난한 왕자들을 먹여살리기도 한다. 세계 굴지의 기업체·은행·호텔·유통체인 위락시설등을 닥치는대로 매입,1백억달러의 「부의 왕국」을 건설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자이자 톱 경영자로 자리잡은 알와리드.왕자라기 보다는 전문기업가로 성공을 거듭하는 그에게 유수의 세계 경영인들이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알와리드는 현 파드국왕의 조카로 재무장관직을 맡고 있는 타랄의 아들이다. 올해 38세인 알와리드의 다음 목표는 이탈리아의 전직 총리이자 언론재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TV매체 인수를 성사시키는 일이다.한때 미국 CBS매입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탈리아 TV왕국의 12억달러 상당의 주식 매입을 놓고 요즘 호주출신의 황색 언론재벌 루퍼트 머도크와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않는 알와리드는 지난 70∼80년대에 오일달러를 흥청망청 낭비하던 아랍의 귀족이나 거부들과는 달리 사업수완이 출중하다.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멘로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전과목 A학점을 받을 정도로 학업성적도 우수했다. 사우디 수도 리야디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레흐만 브러더스,메릴 린치,골드만 삭스등 투자자문회사의 신용조사 자료로 가득차 있다.그는 핵심측근 10여명의 자문을 받아 당장 목전의 수익보다는 3∼4년후,아니면 10년후의 투자전망을 더 중시한다.그리고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그는 계약을 체결할 때는 반드시 대리인을 내세워 리야드에서 무선전화를 통해 지시한다. 그 좋은 사업 성공사례가 15년전 미국 중앙은행(FRB)으로부터 부실기업 판정을 받은 시티은행의 주식을 다량 매입할 때의 일이다.측근들은 주식인수를 적극 만류했지만 그는 주당 16달러에 이 은행 보유 주식의 9.9%를 과감히 사들였다.현재 시티은행 주가는 당시보다 4배 이상(주당 67달러) 올라 이 은행내 그의 자산을 2백80억달러로 늘렸다. 적자 투성이인 유로 디즈니랜드에도 3백50억달러(24.8%의 주식보유)를 투입했지만 투자전망이 밝다고 판단하고 있다. 알와리드는 또한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1억6천만달러(50%),샌프란시스코의 페어먼트 유통체인에 4천만달러(50%),토론토의 포시즌 호텔에 1억2천4백만달러(26.6%)등을 투자해 호텔업계 종사자들을 놀라게 한다. 현재 이들 호텔에 대한 투자가치는 다소 떨어지고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오히려 그는 5년 이내에 호텔수를 40개,10년후에는 80개로 늘릴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알와리드는 그러나 커크 커코리언 회장의 크라이슬러 자동차,영국 사치 & 사치 회사의 주식 인수제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사업 스타일과 관련,사우디 거부 아므로 카쇼기는 『외국 기업인들과 공동출자를 통한 그의 사업수완이 점차 세련되고 있다』며 『실패를 거듭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알와리드는 한해에 5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사우디 주재 한 전직 미국대사도 『그는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하고 있고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하다』고 전한다. 아랍 TV & 라디오(ART)를 소유하고 있는 알와리드는 특히 언론매체와 할리우드의 쇼비즈니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보내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점심식사에 초대할 정도로 절친하다.영화,만화영화,리조트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초대형 멀티미디어 왕국을 겨냥하는 두사람은 최근 비밀협정에 서명,더욱 주목되고 있다. 비교적 비대한 몸집의 아랍귀족과는 달리 알와리드는 주치의가 처방해주는 하루 1천3백 칼로리의 영양분만 섭취할 정도로 절제력이 뛰어나다.한밤중에 조깅을 하고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며,반드시 오후 4시에 점심식사를 하는 괴벽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절제한 식사로 몸이 뚱뚱해지는 것이다.
  • 전시경제와 통화(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7)

    ◎전비 하루 10억∼40억원 지출… 인플레 심각/52년 화폐발행고 1조… 100대1로 화폐개혁 1951년 봄 전선에서는 수 많은 인명이 죽어갔으나 전선은 진지밖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그렇다고 숱한 인명의 희생이 국민들에게 어떤 반대급부적 대가를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후방은 그저 전선이 멀리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 날로 가중되어가는 경제적 궁핍이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당시 경제문제는 전선의 전투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이다. ○부산 빈민도시 전락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에는 1백50만명의 인구가 들끓었다.전쟁전 43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던 매력있는 도시 부산은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남한의 피란민은 물론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전쟁고아,전상자들이 삽시간에 부산을 빈민가로 만들어버렸다.전국의 후방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부두에는 태평양에서 꼬리를 물고 입항한 거대한 선박들이 매일 산더미같은 짐을 풀었다.그러나 당장 끼니거리가 없는 피란민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이들을돌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한국정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하루 10억원에서 40억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입장이었다.이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원화경비를 지출키로 합의한 이른바 대구협정에 따른 것이다.유엔군에게 꾸어주는 대여금 이었지만 이를 흡수할 실물경제의 기반은 계속 허물어졌다.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돈의 홍수는 결국 한국통화의 지독한 인플레현상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전쟁은 벌써 2년째에 접어들어 세입이 전무한 상태였다.그래서 세입은 한국은행에서 꾸어오는 인플레 방식의 한은차입금이 큰 줄기를 이루었다. 한국은행은 1951년 한햇동안 5천5백79억원의 화폐를 발행했다.이 수치는 전년도 화폐발행고 2천2백92억원에 비해 자그마치 3천2백87억원이 늘어난 것이다.그해 51년의 통화량은 전년도 보다 3천9백77억원이 많은 6천4백98억원을 기록했다. ○2년새 6배 치솟아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 조차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 밖에없었다.해방 당시 도매물가지수를 1백으로 할 때 1951년 초에 이미 5천을 뛰어넘어 52년에는 단숨에 3만을 돌파했다.배고픈 피란민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쌀값은 1946년 1월 기준 1만6백50원에서 1952년말에는 9만원대로 치솟았다. 한국전에 개입한 미군 주축의 유엔군은 한화가 필요했다.그래서 한국정부는 대전에서 철수한 1950년 7월28일 대구협정을 맺었다.한국정부는 유엔군 지출관이 요구하는 액수의 원화를 필요한 장소에서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이후에 어떻게 갚는다는 조항을 두지않고 일방적으로 공급의무 만을 규정한 이 협정은 오랫동안 말썽을 빚었다.이 협정에 따라 한국은 유엔군에게 원화를 꾸어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한은 20억 북에 뺏겨 그러나 현찰이 없었다.유엔군 대여금 보다 더 급했던 한국군에 공급할 현찰도 부족한 판이었다.한국은행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6월26∼27일까지 20억원을 서울에서 풀었다.그리고나서 피란지로 수송한 돈은 5억원에 불과했다.금고에 그냥 두었던 20억원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남한경제 교란에 악용되었다.이때에 화폐인쇄용 원판을 서울 원효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빠뜨리고 온 실책을 저질렀다.대전에서 이 정보를 수집한 미 대사관은 곧바로 맥아더 사령부에 통보했다.그래서 원효로 일대는 개전 초기 미공군으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받았다. 한국은행은 궁여지책으로 저액권 지폐에 고액 스탬프를 찍는 작업에 착수했다.10원짜리 지폐에 「당백원」 또는 「당천원」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었다.이 지폐가 유통되지는 않았다.미 경제협조처(ECA)와 맥아더 사령부의 주선으로 19 50년 7월 하순부터 일본 토쿄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얼굴 도안이 들어있는 새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한국은행 토쿄지점이 발권업무를 맡아 서북항공(NWA) 전세기와 DC4 쌍발수송기로 부산 수영공항에 공수되었다.비행기만으로는 수송능력이 모자라 9·28 수복 이후에는 캐나다 선적의 1만t급 상선 아일랜드사이드호가 8일 간격으로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에게 꾸어준 대여금을 받아내는 일이 시급했다.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상환독촉은 보통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미국은 원화대여금을 전쟁이 끝난 뒤 그동안의 전비와 상쇄할 전도금으로 해석한 것이다.한·미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다가 1952년 1월10일 우선 유엔군 휴가비로 나간 한화를 달러로 받았다.처음으로 한국정부 손에 들어온 외화는 1천2백15만5천7백14달러였다. 미국은 그 뒤에도 대여금 상환을 놓고 한국과 줄다리기를 계속했다.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월 클레어렌스 마이어를 대통령특사로 한 사절단 12명을 부산에 보냈다.백두진 재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대표단과 이들의 회담은 5월에 접어들어서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미국은 달러를 되도록 덜 주면서도 지불시기를 늦추고 지불한 돈에 대한 사용처를 명시한다는 입장이었다.이와달리 한국은 많은 액수를 빨리 받아 자유롭게 써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쪽에서 먼저 2천8백만달러를 제시하고 나섰다.이 액수는 지금까지 가져간 돈 가운데 52년 1월∼4월까지 4개월분을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한국대표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마이어는 이 대통령을 직접 예방하고 5개월분을 제시하고 수락을 간청했다.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장장 40일간의 마라톤 회담이 5월24일 타결되었다.이를 양국 대표가 서명했는데 바로 유명한 마이어협정이다. ○6천대1 환율 적용 마이어협정은 미국의 대여금 상환 말고도 고용 한국인에 대한 노임 및 물자대(월 4백만달러)상환내용 등이 들어있다.여기서는 6천대1의 환율이 적용되었다.이 협정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통화팽창과 투자억제를 골격으로 한 한국정부의 의무조항이다.의무조항은 한국의 통화개혁을 부추켰다. 1952년 여름에 접어들어 화폐발행고는 1조원을 넘어서고 말았다.그해 가을 백두진재무장관이 국무총리 서리 겸임 발령을 받았다.백서리로부터 통화개혁 기초작업 착수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히 조치해보라』는 말로 이를 동의했다.백두진과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필두로 김정렴,배수곤 등이 실무팀으로 참여했다.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통화개혁 작업은 11월말 가닥을 잡았다.그 내용은 당시 통용화폐 원을 1백대1로 낮추어 환(원)으로 하고 일정액 이상의 통화를 예금으로 동결시킨다는 것이었다.백두진팀이 쉽게 통화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에스 프린트」라는 사용하지않은 신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미군정이 화폐교환을 위해 1947년 미국에서 인쇄한 화폐였는데 그 도안이 절묘했다.이 미사용 신권지폐는 1천원,1백원,10원권 등이 「원」으로 표기되었지만 「환」으로 호칭한다는 원칙 아래 1953년 2월15일부터 통용되었다. ◎미 대사관 보고서 「조인트 위카」/미,통화개혁후도 원화 평가절하 요구/다스카 사절단 내한… 백두진 총리에/53년 1달러=60환서 18환으로 올려 한국정부가 1953년 2월15일 통화개혁을 단행한 이후에도 미국으로부터 원화의 평가절하 요구를 계속 받아들여 이를 수용했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주한미대사관 무관들의 19 53년 5월15일자 주간보고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에서 드러났다.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한국에서통화개혁이 이루어진 지 약 2개월 이후인 53년4월에 다스카가 이끌고 온 다스카사절단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원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당시 한국의 공정환율은 1달러당 60환(원)이었는데 다스카의 평가절하 요구액은 1달러당 2백20환이었다.이에 대해 백총리는 1백80∼2백환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스카는 미국의 요구가 수용되어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는 기록이 「조인트 위카」에 나온다.다스카의 예상은 사실상 적중했다.그해 12월 백총리와 우드간에 체결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통해 1달러당 60환이었던 환율이 자그마치 3배나 오른 1백80환으로 결정되었다.다스카의 애초 제시한 2백20환 보다는 적지만 원조 공여국인 미국의 요구가 어느정도 관철된 셈이다. 다스카는 방한중에 파악한 한국경제상황을 근거로 「다스카 보고서」를 작성했다.이 보고서에 실린 한국원조 3개년 계획안은 군사원조,구호,재건사업으로 나누어 모두 8억8천3백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았다.그러면서 한국이 악성 인플레이션과 환율문제를 해결하지않고는 어떠한 시설투자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원조물자의 구성을 소비재 7,시설재 3을 제시했다.
  •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6)

    ◎미­북한,송환방법 싸고 2년간 첨예 대립/이 대통령,반핵포로 2만여명 전격 석방 1951년 7월 8일 개성회담을 시작으로 2년간 지속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포로문제였다.한국전쟁에서 독특한 양상을 표출한 포로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까지 비화됐다.그래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이 포로문제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포로문제를 불리해진 전황정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또 전쟁 조기 종료를 바란 미국 주축의 유엔은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전세가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특히 포로문제에 있어서 유엔 협상대표들이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침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전에서 포로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엔군에 생포된 포로의 성분이다.생포된 공산측 포로중에는 북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수많은 남한출신과 함께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 중공군이 끼어 있었다.이에따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문제가 거론되자 이들이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북·중 송환거부자 급증 미국은 휴전회담이 개막되기 전인 7월에 접어들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당시 미 육군 심리전감 매클루어 준장은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정전이 될 경우 국부군 출신 포로들을 대만으로 보낼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워싱턴에서는 51년 가을내내 포로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그러나 자원송환과 강제송환,1대1교환과 전체대 전체 교환,인도주의적인 입장과 제네바협정 준수가 엇갈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협상 벽두부터 북한측은 휴전협정 조인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그러면서도 북한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도 터무니 없게 축소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2천4백74명(중공군 2만7백명)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민간인 수용자로 별도 격리 수용한 3만7천명이 더 있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반면 공산측은 한국군 7천1백42명과 유엔군 4천4백17명을 합쳐 고작 1만1천5백59명의 포로숫자를 제시했다.북한측이 한달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포로수가 6만5천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유엔군측은 그 때까지 실종인원을 한국군 8만8천명,미군 1만1천5백명 이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한채 51년을 마감했다.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양상이 달라져 양측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왔다.19 52년 1월2일 회담에서 유엔군측 대표 R E 리비 미 해군 소장은 자원송환 원칙을 강력히 담은 포로교환을 제안하고 나섰다.공산군측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이무렵 워싱턴에서는 자원송환의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었다.반드시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송환원칙으로 인해 협상이 교착되자 쌍방은 세부적인 사항의 타결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듯 했다.3월5일 공산측은 전년도 12월18일 교환된 명단에 입각한 송환을 제의하면서 꼬리를 달았다.전선에서 석방했다는 유엔군측 포로 5만여명의 행방을 유엔군이 묻지 않는다면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3만7천명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유엔군측은 이미 명단을 제출한 공산군 포로 13만2천여명에 대한 조사결과 겨우 7만명이 송환을 원한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공산측은 이를 유엔군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맞서 회담은 또 교착상태에 빠졌다.4월28일 유엔군측은 일괄타결안을 제시하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은 각각 성명을 내놓았다.유엔군측이 제시한 일괄 타결안에는 공산측이 통고한 송환가능 유엔군 포로 1만2천여명을 인정하고 송환을 희망하는 유엔군 억류 공산군 포로 3만여명과 교환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당시의 분위기를 볼때 상당히 완화된 이 조건은 공산군측에 실리를 넘겨준 것이었다. ○공산포로,소장 인질로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피랍되면서 공산측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도드 준장을 인질로 잡은 공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측에 ▲독가스 및 세균무기 사용,원자탄 실험중지 ▲불법 부당한 인민군과 중공지원군의 자원송환 즉각 중지 ▲수천명의 포로를 재무장시키려는 강제조사 중지▲포로대표단 구성 승인등을 요구했다.도드준장 후임인 새 포로수용소장 C F 콜슨 준장은 포로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공산측은 콜슨 준장의 회신내용을 들어 유엔군측이 지금까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고 세균전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선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유엔군측은 10월8일 마침내 최종안을 제출했으나 공산군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끝이났다.이후 10월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포로문제를 다시 다루어 휴전문제가 유엔으로 옮겨갔다.유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스위스,스웨덴등 4개국으로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해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그리고 모든 포로가 선택의 권리를 갖고 90일의 시한을 넘기고도 결정하지 못한 비송환자들은 휴전회담에서 위임한 정치회담에 이양하자는 인도의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러나 공산군측은 기본적으로 자원송환을 지지하는 유엔결의안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판문점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병상포로교환에 우선 합의했다.이에따라 4월26일 판문점에서 양측의 대표단 전원이 만났으나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미국정부는 5월25일 회담대표자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전달했다. 이 최종안은 6월4일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지만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후 2개월내에 송환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그후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일단 도출해냈다.또 30일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못한 해당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키로 합의했다.민간인이 된 포로들은 뒷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향하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첫 석방계획은 실패 그로부터 14일후인 6월18일 자정 남한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6천4백24명이 국군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으로 불리는 이 한국판 엑서도스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했다.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본격 진행되자 휴전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등 군 수뇌들을 불러들였다.이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문제를 검토하고 다음날 정오 이를 시행토록 명령했다.그러나 한국군 병력배치등 준비미흡으로 첫 계획은 실패하고 1주일뒤인 18일 북한행을 거부한 포로들이 미군 경비 수용소를 빠져나와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미 힉컬슨 작성 문서/미,공산군포로 난동에 시종 곤욕/북·중서 강력 항의… 정전협상 불리/도드 수용소장 피랍사건 상세 기록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내내 공산군 포로문제로 시달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MARA)에서 입수한 문서더미 가운데 국제정치관계철 북한 전쟁포로 관련 시리즈는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시리즈는 미 국무성 차관보 힉컬슨이 1952년 2월18일 「한국의 전쟁포로」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극동과 간부 엘리손과 존슨에게 발송한 문서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이 문서시리즈에 따르면 미군측은 공산포로로 인해 지휘체계 상부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문서가 작성된 당일만 해도 한국인 포로를 조사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제62동에 진입한 미군병력과 포로들의 충돌로 미군1명과 포로 7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이밖에 미군 38명,포로 1백40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공산군측은 이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유엔군측은 「민간인이 관련된 내부사건」으로 일축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엔군과 미군측은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이 시리즈 4월29일자 전문에서 수용소 상황에 대해 기술한 내용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장군은 전문을 통해 『이들 수용소는 잘 조직돼 수용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다.하지만 위험한 폭동이나 유혈사태등의 모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기술하는 등 포로문제로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 시리즈는 또 52년 5월7일 도드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장의 납치사건도 기록하고 있다.콜슨장군은 도드의 석방을 위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5월20일 도드와 콜슨장군이 모두 대령으로 강등하는 과정도 잘 드러내 보였다.
  • 「사시 총장시대」 본격 개막/김기수 검찰총장 체제 출범의 뜻

    ◎검찰 중립성 확보·위상강화 기대/후속인사싸고 악성루머 큰 부담 제27대 김기수(55·사시2회)검찰총장이 16일 상오 취임식을 갖고 공식업무에 들어간다. 김총장의 취임으로 검찰안에서 고시의 양대산맥인 고시출신은 모두 퇴진하고 본격적인 사시 총장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러나 김총장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바로 목전에 둔 후속인사뿐만 아니라 검찰의 중립성 확보방안 등 영원한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김총장은 우선 합리적인 후속인사를 통해 조직의 안정을 꾀함과 동시에 개혁의 새바람도 불러일으키는 첫번째 단추를 잘 꿰매야 한다. 검찰주변에서는 김총장이 검찰총장에 내정된 지난 11일부터 후속인사를 놓고 하마평과 함께 온갖 악성 루머가 나돌아 분위기를 흐려 놓고 있다. 특히 있지도 않은 소문 등을 퍼뜨리면서 상대방을 헐뜯는 사례가 많아 검찰내부에서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P모부장검사는 『17년 가까이 검찰에 몸담아 왔지만 이번처럼 인사를 앞두고 흑색선전이 나도는 것을 본적이 없다』면서 『일과 능력으로 평가받는 인사관행이 정립되어야지 학연과 지연에 얽매이는 인사를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검찰의 중립성 문제는 김총장의 재임기간 동안 내내 제기될 공산이 크다.이는 김총장이 아무리 올바르게 「검찰권」을 행사하더라도 야권 등에서 그가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 직계 후배인 점등을 들어 정치공세를 펼 가능성이 짙은데 따른 분석이다. 이보다 앞서 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조성사건 당시 이원조 전의원과 이용만 전재무장관의 수뢰사건이나 최근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대 비자금 조성사건 등에서 보여준 검찰의 태도는 검찰의 중립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총장은 이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과 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통해 국법을 바로 세우고 법치주의을 확립하는데 앞장설 각오』라고 다짐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검찰의 「권위」와 「명예」를 회복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사회일각에서는 문민정부 들어서도 변하지 않은 곳으로 검찰을 첫손에 꼽고 있는 실정이다.심지어는 「개혁의 대상」으로도 지목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지난 14일 퇴임한 송종의(송종의)전대검차장의 「충언」은 귀담아 들을만 하다. 『검찰의 권위는 어두웠던 시절에 스스로의 안녕을 보전하기 위한 가면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이 검찰에 달아주는 고귀한 훈장이어야 합니다』
  • 홍 부총리 내년 총선 출마할까

    ◎잦아진 청주방문… 측근들 “가능성 높다”/당정선 충북지역 금융지원 건의 수용 경제팀장인 홍재형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의 발걸음이 경쾌하다.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진입을 위한 행보가 점차 가시화하는 인상이다. 최근 여권의 「홍재형 키우기」전략과 무관하지 않다.자민련의 텃밭인 충청권에 대한 당정의 잇단 대규모 금융지원이 이뤄지는 가운데 그도 고향인 청주를 자주 방문하는 등 총선출마를 위한 터다지기에 일단 시동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요즘의 총선출마설에 대해 『예산철인데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린다.그러나 너털웃음을 하며 『생각이 없다』고 일축하던 2∼3개월전의 정황과는 다르다. 재경원의 한 측근은 그의 총선출마설에 대해 『홍부총리가 유력한 카드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전한다.그는 본인의 뜻과는 달리 소명으로 정치권에 진입했던 역대 경제관료들을 들며 『시간은 없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로 바빠진 경제팀장의 근황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지난달 18일 재경원내 청주고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사흘뒤인 21일에는 향우회인 「충우회」모임에도 참석했다.뭔가 대사를 앞두고 단단히 준비에 들어간 것같다는게 주변인물들의 전언이다. 홍부총리의 최근 행보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 2일 고향인 청주를 방문,지역금융기관장들과 오찬을 함께 한 것이다.이날 방문은 올들어서만도 충북금고 등 지역금융기관들의 잇단 대형 금융사고로 지역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는 시점에서 이뤄졌다.때문에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경력관리와 대민이미지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유추한다. 이날 모임에서 충북지역 금융기관장들은 홍부총리에게 금융지원을 각별히 건의했다.이 직후 당정이 청주와 충북지역에 5백억원의 자금을 긴급 지원하기로 한 것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볼 수 있다. 정통 재무관료출신이면서도 과거 수출입·외환은행장시절 남다른 경영수완을 발휘한 홍부총리는 옛 재무장관으로 복귀해서도 매끄럽고 소리나지 않는 업무처리로 전천후 축구선수를 일컫는 리베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정치권진입이 임박한 그의 처신이 현시점에서 무척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그를 잘 아는 한 재경원 후배는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것같다』면서 『그렇다고 지구당조직책으로 임명받은 사람들처럼 드러내놓고 뛸 수도 없고해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같다』고 전했다.
  • 세계경제 블록·요새화 막아야 한다/폴존슨 영 저명언론인(해외논단)

    ◎대외관세 인상경쟁이 관세전쟁·경제전쟁 유발/EU·NAFTA·아시아권 동시가입국 늘려야 유럽연합,북미자유무역지대 등 거대 무역권역은 세계가 단일무역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휼륭한 징검다리일 수 있지만 일면 블록·요새로 변해버릴 가능성도 있다.이를 방지하는 방안의 하나로 「오버랩」국가론을 펴고있는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폴 존슨이 미국월간지 「코멘터리」에 쓴 글을 소개한다. 다가오는 21세기 세계무역에 관한 시나리오는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 두가지가 있다.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들은 모두 낙관적인 시나리오 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경기 사이클의 어느 국면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속도가 다르긴 하겠지만 아무튼 세계무역은 확대일로를 달린다.지금의 미·일 통상마찰같은 일로 들쭉날쭉하면서도 결국 무역장벽은 지난 반세기 때처럼 계속 낮아진다.세계는 3대 무역대권으로 궁극적 틀을 갖추게 된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포용하고 유럽연합(EU)은 러시아를 포함한 동구권을끌어안는다.동아시아 교역대권은 일본,중국,동남아에 이어 인도를 포괄한다.차근차근 권역내의 관세를 철폐해간 3대권은 권역 외부에 대한 관세감축 협상을 서로서로 벌인 끝에 21세기 후반 드디어 통합된 세계무역 체제를 구축한다. 세계의 모든 상식있는 사람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으로 믿고 있다.그러나 이런 믿음아래 이를 운명에 맡겨버린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왜냐하면 한마디로 자유롭게 교역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디 성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당한 규모로 국가간에 교역이 이뤄진 것은 7천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실제적인 의미의 자유무역은 18세기말에 고안됐고 그후에도 자연스럽게 발달한 게 아니라 일부 인사들이 굳은 의지로 이를 강력히 추진한 덕분에 19세기의 발전이 이뤄졌다.21세기라 할지라도 우리가 방심하면 어느새 이 틀은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릴 정도로 우그러지고 만다. 그래서 비관적 시나리오가 대신 현실화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21세기 초반 유럽연합은 보다 긴밀한 통합을 지향하는 연방주의자의 힘이 더 세 단일통화와 단일 경제정책 아래 움직이는 슈퍼국가화 한 다음 복지국가 이데올로기에 집착,각국 갹출예산 뿐아니라 기업등 민간부문에 대한 강제성 부담을 늘려 생산비용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상품의 경쟁력을 저하시킨다.이같은 현상은 벌써 기미를 보이고 있다. 권역내의 재산증대와 이에따른 흑자교역을 무조건 우선시하는 중상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된 유럽연합의 경제정책은 외부 권역에 대한 관세를 높이고 권역내의 제조업에 대한 보조금지급을 강행한다.이런 새로운 반자유무역 정책은 우선 단기적인 이득 때문에 정당화되고 거기에 자유무역은 유럽 고래의 농업사회와 공예산업,허약하나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문화적 전통,그리고 환경 등을 파괴한다는 강론에 큰 힘을 얻는다.이론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이 녹색(환경) 덧칠의 21세기 중상주의는 권역내 산업및 노조와 연대해 보호주의를 제창한다. 북미지역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거슬러 올라가면 미국등 3개 구성국 모두 남못지 않은 보호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미국은 근래에 들어서야 자유무역으로 개종했을 따름이다.현재의 유럽이 펴고있는 논조와 똑같은 내용으로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 첫 재무장관이 국내산업 육성을 위한 조직적인 보호관세를 역설한 이래 미국은 경제가 조금 안 풀린다 싶으면 보호주의 방책에 의지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을 보여왔다.2차세계대전 때까지 고율관세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연합이 관세를 높이면 북미자유무역지대 역시 고율관세로 맞받아치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사태전개인데 이로써 무역및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정신은 산산조각난다.그러면 아시아는 어떤가. 예전에 서방 식민지였던 싱가포르,홍콩,마카오는 차치하고 이 지역에서 진정한 자유무역 국가를 찾아보기 어렵다.일본과 중국,인도의 많은 지식인들은 서방이 아시아의 토착민족 산업을 파괴할 셈으로 이곳에 자유무역을 강요한다고 믿고 있고 이런 견해를 대학등에 강력 전파하고 있다.모두가 「백인」인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지대가 고율의 대외관세를 매기면 아시아인도 즉각 적대적으로 대응,바깥에 높다란 장벽을 둘러치고 권역내 국가끼리 어깨를 튼튼하게 결은 무역연방으로 치닫는다. 비관적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유럽 요새,아메리카 요새,아시아 요새의 굳건한 구축이다. 높은 대외관세가 꼭 관세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다.그러나 이론은 비록 그렇지만 역사적 경험은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일러준다.마찬가지로 관세 전쟁이 필연코 경제 냉전,열전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그렇지만 이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역사는 말한다.대공황과 싸우기 위해 미국이 지난 1930년 관세인상법을 제정하자 다른 나라도 같은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1939년 세계무역고는 1914년보다도 적었다. 어떤 수를 쓰면 이같은 관세 경쟁이 재발되지 않을 것인가.여러 가지 방안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3개 거대 무역블록들 안에 두 블록에다 양다리를 걸치는 오버랩·중첩 국가들을 양성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유럽연합의 슈퍼국가화 움직임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는 영국을 비롯,유럽연합 멤버인 포르투갈,비멤버인 노르웨이등 지리적으로 아메리카에 보다 가까운 나라들을 북미자유무역지대에 편입시켜 NAFTA를 문자 그대로 북대서양자유무역지대로 키울 수도 있는 것이다.
  • 「새정치 국민회의」 출범의 함축

    ◎김대중씨/’97 대선레이스 돌입 신호탄/정계 재진입 절차 공식적 마무리/세대교체론·야공조 등 난제 산적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식 출범은 김대중 총재가 차기대권주자중에서 가장 먼저 출발선상에 섰음을 의미한다.김총재로서는 네번째 대권도전이다.연령을 감안하면 이번이 마지막일수 밖에 없다. 그만큼 김총재는 어느때보다 결연하다.「수평적 정권교체」에 대한 확신도 큰 것 같다.무엇보다 6·27지방선거 승리가 커다란 버팀목이다.민자·국민회의·민주·자민련으로 구성된 4당체제도 내년 총선과 97년 대선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믿고 있다.「TK(대구·경북)쪽의 움직임도 우호적으로 한단한다. 그는 창당과정에서 대권을 겨냥한 발판을 다졌다.「네오 뉴 DJ플랜」에 따른 변화된 DJ의 모습이 골간이다.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정강정책에 중도보수를 표방,보수세력 끌어안기에 힘을 쏟았고 여권의 세대교체 공세에 대한 역풍차원에서 젊은 층과 여성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지역색 탈피에도 체중을 실었다. 가신들도 고위당직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여하튼 김총재는 정치권 중심에 재진입하는데 성공했으며 김총재는 앞으로 김영삼 대통령과의 「양김구도」로 정국을 몰아갈 것으로 보인다.이 과정에서 자신만이 차기대권후보 적임자임을 주장하는 「대안부재론」과 「비교우위론」이 중요한 무기가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김총재가 이날 취임사에서 김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공식 제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김총재 스스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했듯이 김총재와 국민회의의 향후 행보는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권을 포함한 다른 정파들이 본격적인 힘겨루기날 조직적인 공격에 나설 경우 득보다는 실이 많을 수 밖에 없다.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대교체 공방이다.이미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신3김시대」청산을 기치로 내걸었고 「정치개혁시민연합」과 「젊은 연대」도 같은 취지로 정치세력화에 한창이다.여권도 40대 사무총장을 임명,세대교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론도 DJ에게 결코 우호적일 수만은 없다.야권공조가 잘 되지 않는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최근 정치권에 대한 검찰수사를 「표적수사」라고 되받아치고 있지만 연루자가 국민회의 소속의원이라는 점에서 김총재가 내세운 「새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적 여론도 적지 않다.무엇보다 DJ의 변화노력에도 불구,여전히 「호남당」과 「1인지배」의 부정적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는 것도 난제다.이를 감안,거의 무차별적인 외부인사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오히려 당내 이질감만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김대중 총재 일문일답/“야를 「국정파트너」로 존중해야”/“정기국회서 「정치권사정」 철저히 따질것” 김대중 총재는 창당대회 직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김영삼 대통령이 나를 국정파트너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김총재는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폭로성,무책임한 공격은 않겠지만 검찰의 정치권 사정에 대해서는 철저히 진상을 따지겠다』고 말했다. ­많은 논란속에 정치에 복귀,신당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한 소감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낀다.창당과정을 지켜볼때 정치는 생물이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된다. ­김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했는데 만나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여야관계의 설정이다.서로를 애국자로 믿고 국민의 안녕과 경제발전,통일에 대한 시각이 같다면 나를 국정파트너로 대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여야간 합의 없이는 정국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정권의 선거자금 비리와 관련한 구체적 정보나 증거가 있는가. ▲이원조 전의원·이용만 전재무장관과 관련된 것이다.그러나 남의 일을 구체적으로 말할 것은 못된다. ­내년 총선때 지역구로 출마할 생각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정치권 수사와 관련해 앞으로 정국운영의 기조를 말해 달라. ▲야당을 국정운영의 한축으로 인정해야 한다.최락도의원이나 박은대의원 수사는 검찰이 지나쳤다.당사자로부터 한마디 진술도 받지 않고 여론에 흘린 것은 야당을 무시한 처사다.정기국회에서 철저히 진상을 규명할 예정이다.그러나 국사를 논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본다. ­여권으로부터 대화 제의가 있는가. ▲아직 없다. ­정기국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생각인지. 폭로성,무책임한 공격은 배제하겠다.확실한 근거와 증거,당연한 논리로 예산심의를 하겠다.특히 중소기업 위주로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중소기업의 자금난과 인력난을 해소하는데 역점을 두겠다. ◎DJ/대권4수/당권4임/정치생활 40년간 10개정당 거쳐 정계은퇴 2년8개월만에 새정치국민회의의 총재로 복귀한 김대중 총재의 야당 40년은 「대권4수」와 「당권4임」으로 요약된다.당권을 네차례 움켜쥐고 4번째 대권도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40대 기수」에서 「지역감정의 희생자」로,다시 「지역감정의 수혜자」로 세대교체의 표적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역정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풍상과 영욕으로 점철돼 왔다.6년의 투옥과 10년에 걸친 망명과 연금생활은 그를 「인동초」로 불리게 했다.10개 정당에 몸담았던 이력은 과거 난마처럼 얽힌 우리 야당사를 대변한다. 54년 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남목포에서 출마,정치를 시작한 DJ(김총재)는 4,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거푸 낙선했다.절치부심 끝에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사흘만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이어 63년 6대총선에서 새로 재건된 민주당 공천으로 전남 목포에서 출마,당선됐다.이후 야당통합에 따라 민중당(65년),신민당(67년)으로 당적을 바꾸어 67년 7대총선에선 신민당 공천으로,8대 때는 전국구로 원내에 진출했다.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입지를 확대,지난 71년 「40대 기수」 경쟁자인 김영삼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의 대통령후보에 당선됐으나 박정희 대통령과 겨룬 72년 대선에서 패했고 「도쿄납치사건」의 고행이 이어졌다.79년 10·26 직후 잠시 복권됐으나 80년 5·17 사태로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며 시련은 계속됐다. 82년 정치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도미했던 김총재는 84년 김영삼대통령과 함께 민추협을 결성,85년 2월에 귀국해 2·12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87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이민우씨의 신민당을 깨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실패,평민당을 창당했고 평민당은 이후 신민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 91년 이기택씨의 「꼬마민주당」과 합쳐 민주당이 되었다.김총재는 92년 12월19일 대권3수에 실패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6·27 지방선거 과정에서 정계복귀를 선언,오늘에 이르렀다.
  • 경색정국 해빙 가능성/여권 핵심부,조기매듭 시사

    ◎정치사정 싸고 여야 대립속 검찰이 새정치국민회의 최락도 의원을 구속한 데 이어 2일 박은대의원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밝히면서 여야간에 대립국면이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가운데 여권 핵심부에서 정치권에 대한 사정작업을 조기에 매듭지을 가능성을 시사,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민자당은 선거부정비리 사건에 대해서는 계속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철저히 엄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 데 반해 국민회의측은 다른 야당과의 공동투쟁을 모색하면서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자세여서 대치정국이 쉽게 해소될 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민자당은 이날 정치권에 대한 비리조사가 사법적 차원에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정기국회 및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국경색이 장기화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판단,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검찰에 촉구했다. 김윤환 대표위원은 최근 이같은 뜻을 이홍구 국무총리에게 전달한 데 이어 이날 김영삼 대통령과의 오찬을 겸한 주례당무보고에서 완곡히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앞으로 선거부정 수사는 계속될 것으로 본다』면서 『10명,20명이 구속돼 당선무효,선거무효가 되더라도 공명선거를 정착시키기 위해 선거부정을 발본색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총장은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인의 비리문제 때문에 정치권 전체가 불신을 받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지적한 뒤 『국민회의 최의원과 박의원 말고 비리와 관련돼 검찰의 수사를 받는 사람이 더 있느냐』고 반문해 검찰 수사가 더 확대되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민회의의 야당탄압비상대책위는 이날 상오 정부종합청사로 이홍구국무총리를 방문,『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고 있으며 국민회의 창당을 겨냥한 명백한 표적수사』라고 항의했다. 국민회의는 여권에 대해 정면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원조전의원 및 이용만전재무장관의 정치자금조성 의혹 등 여권내 문제사건들을 다시 조사하고 결과를 공개할 방침이다.
  • “대여일전”­“과민반응” 공방 가열/「사정 회오리」속 여야 움직임

    ◎“성역없는 수사”… 대치정국 장기화 불원­민자/“형평잃은 조사… 명백한 야당탄압” 비난­신당 김대중 창당준비 위원장의 새정치 국민회의가 1일 최락도의원의 구속 등에 반발,대여강경투쟁을 선언하고 나섬에 따라 사정회오리 속에 여야간 대치국면이 더욱 가파라지고 있다. 민자당은 이날도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부정척결 차원』이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국민회의는 『창당방해를 위한 표적수사』라고 규정,「야당탄압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정면대응하겠다는 자세다. ▷민자당◁ ○…국민회의가 최의원 구속에 대해 『사정정국 조성기도』라고 반발하고 나서자 『성역 없는 수사의 일환』이라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하지만 여야간 냉각국면의 장기화는 바라지 않는 눈치다. 이신범 부대변인은 국민회의측이 정면대응을 선언하자 『비리사건 조사를 두고 과거 독재정권하의 사건조작이나 야당탄압에 견주어 대응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과민반응』이라고 성토했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검찰당국에 최의원의 비리사실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실수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수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강총장은 정치권 비리 전반에 대한 수사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수사중인 서해유통 연루자 정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해 문제의원 한두명에 대한 추가 사법처리로 정치권에 대한 「사정바람」이 수그러들 것임을 시사했다.특히 교육위원 선출 비리와 관련해서도 아태재단의 운영자금으로까지 수사가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내비친 것으로도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선거부정 사범과 교육위원 선출비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사정당국의 자세로 미루어 여야간 대치상황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민자당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새정치 국민회의◁ ○…검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전날까지와는 달리 정면대응으로 방침을 정했다.명백한 야당탄압이라는 주장 아래 절대 물러서지 않고 현 정권과 한판승부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해 온 김대중위원장도 이날은 입을 열었다.강도 높은 대여공세였다.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4차상임준비위 회의에서 김위원장은 모두 발언을 통해 『최의원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며 정말 파렴치한 짓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권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김위원장은 『백번 양보해서 최의원의 수뢰가 사실이더라도 여당쪽에서 저지른 수나 액수를 보면 단연코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특히 대선때 몇천억원을 해준 사람은 외국으로 도피시켰다가 돌아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이원조전의원의 경우를 들어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이종찬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야당탄압 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이와 함께 당내 「4천억원 비자금의혹 조사특위」(위원장 조세형)를 본격 가동하는 것은 물론 이원조전의원과 이용만전재무장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고 서석재전총무처장관도 변호사법 위반과 위증혐의 등으로 고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민주당◁ ○…사정한파로 정국이 급속히 냉각돼 정기국회가 파행운영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이규택대변인은 『불과 일주일전만 해도 국가원로오찬,8·15대사면 등 국민대화합을 하자고 해 놓고 갑자기 사정태풍으로 정국을 경색시키는 것을 국민들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권을 비난한 뒤 『어떤 정당도 민생문제를 다뤄야 할 중차대한 정기국회를 파행으로 몰고가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자민련◁ ○…안성열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사정정국을 조성,여당을 이탈하려는 의원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고 야당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정정국 조성기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안대변인은 『며칠째 정치권 비리를 조사한다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진전이 없다』면서 『검찰이 정부 여당의 다목적 용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고 공정한 검찰권의 행사를 촉구했다.
  • 르완다군 재무장 자제해야(해외사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지난 16일자로 르완다행 무기의 금수조치를 중단했다.키갈리정부는 그것을 당연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르완다의 공보장관은 「새로운 소식」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르완다 정부는 군대를 중립화할 수 있게 됐다고 결론지었다.동시에 유엔의 결정과 르완다의 반응은 곧바로 수천명의 르완다 난민이 있는 주변국가에 팽배해 있던 불안을 해소시켰다. 르완다는 군대의 배후에 있는 인간살육의 책임자를 적시하라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구체제 군대의 지도자들은 오늘날 자이레와 탄자니아에 2백만명의 후투족 난민들과 함께 있다.사실 이들 난민들은 신체제를 불안하게 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아니면 르완다 애국전선(FRP)이 지배하는 정권을 다시 세우겠다고 밝히고 있다. 르완다 장관의 발표도 주변의 어떤 국가들에게는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구체제의 후투족이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난민촌에 대한 르완다의 공격이 우려되고 있는 자이레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르완다 군대가 재무장할 것이라는전망때문에 르완다국경에서의 군사개입 우려를 더해주고 있다.당장 자이레의 지도자들은 정부군이 증강하기 전에 후투족의 과격주의자들이 르완다에 신속한 행동을 옮길지 걱정한다. 주변국의 우려를 맞아 우리는 르완다정부가 난민들이 돌아올 수 있는 진정한 긴장완화 조치들을 취해주기를 기대한다.인권기구들은 난민복귀 조치가 정체상태에 있다고 상기시켰다.르완다의 군대는 쫓겨난 후투족에 대해 여전히 공갈만을 하고 있다.르완다 난민들은 군대가 돌아올 것을 권해 놓고 수백명의 난민을 죽인 키베호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 금수조치의 중단이 불가피했음은 물론이다.르완다정부는 구체제를 겨냥한 금수조치를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구체제는 애국전선에 의해 전복됐다고 밝혀 왔다.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유엔에 의해 인정되기는 했지만 주변의 긴장과 공포를 심화시키는 재무장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러시아입장 고려 NATO확대 신중히/예브게니 바자노프(지구촌칼럼)

    ◎동구국가입 서두르면 96년 러 대선서 민주개혁파 곤경에 러시아와 서방과의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쟁점중 하나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확대문제다.문제의 발단은 소련의 옛군사동맹국들인 동구권이 자신들의 적이었던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나선 데서 시작됐다. 그렇게 나선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동구국들은 우선 나토가입을 통해 서방의 일원으로 대접받고 싶어한다.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기대한다.이와 함께 나토 가입이 안보보장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동구,경제적 이익 기대 이들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강대국의 먹이가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갖고 있다.체코는 2차대전 전 나치독일의 먹이가 됐고 폴란드도 마찬가지였다.지금 체코,폴란드,기타 동구국들의 우려 대상은 나치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란 점이 다를 뿐이다.이들은 2차대전 뒤 모두 러시아에 의해 점령돼 비인간적이고,비효율적인 공산주의에 의해 속박됐다.몇몇 나라들은 이 속박을 벗어나려고 하다 소련군의 침공을 받아 저지됐다.동구국들은 이런 아픈 역사의 기억이 있다. 러시아가 민주화됨으로써 동구국들은 큰 혜택을 받았다.이들은 자유를 되찾았고 서구식 사회 건설의 기회를 얻었다.이웃 대국 러시아에 대해 품었던 공포감도 사라지는듯 했다.그러나 러시아의 개혁이 비틀거리고 외교정책 기조가 흔들리면서 이 공포감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1993년 12월 총선에서 극우민족주의자 지리노프스키의 압승은 동구국들을 아연 긴장케했다.지리노프스키는 수시로 동구권을 포함,주변국들을 러시아영토로 귀속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외에도 러시아 정치인들중에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펴는 인물이 많다.정치적 불안정,경제·사회적 제불안요인은 동구국들로 하여금 러시아의 앞날에 대해 짙은 우려를 갖게 했다.이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독립,자유,안보를 지키기 위해 동구국들은 나토로 몰려든 것이다. ○러시아­서구 관계 냉각 애초에 러시아 민주지도자들은 나토확대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91년,92년 공산주의를 종식시킨 승리감에 도취돼 있을 때는 모든 서방국들이 하나같이 동맹국처럼 느껴졌다.처음 폴란드의 나토가입문제가 나왔을 때 옐친대통령은 주권국가가 어떤 국제기구에 가입하든간에 그것은 그나라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했다.한때는 러시아 자신도 나토가입을 고려했을 정도였다.이같은 입장은 그러나 보수민족주의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러시아와 서방과의 관계도 긴장관계로 바뀌었고 러시아내 서방에 대한 기대,신뢰분위기도 급속히 냉각됐다.러시아에서 반서방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동구국들은 더 결사적으로 나토가입을 희망했다.그러면서 러시아 역시 나토확대에 강경반대입장을 고수했다. 지금 나토문제는 러시아정부의 최대현안이다.러정부의 입장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첫째,서방은 처음부터 러시아를 기만했다.소련이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했는데도 서방은 그 대응기구인 나토가 동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존속시키고 있다.둘째,나토를 동구권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서방이 여전히 러시아를 적으로 본다는 증거이다.셋째,나토확대는 유럽을 분열시켜 대결분위기를 조장한다.넷째,나토확대는 러시아를 유럽대륙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다. 위 4가지 논지는 러시아정부내 대부분의 인사들이 동감한다.극우민족,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 몇가지 주장을 더 추가한다.우선 나토확대는 러시아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온다는 것이다.러시아는 서방의 군사,정치적 위협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주장이다.또한 이런 세력불균형은 종국에는 전면대결로 발전케 된다고 말한다. 나토확대에 관한 러시아정부의 공식입장은 매우 강경하다.옐친대통령은 이 움직임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그러면서도 미국등 서방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시키고 싶어한다.그래서 타협의 여지는 있다.러외무부가 나토국들에게 제시한 몇가지 방안을 보자. 첫째,나토를 해체하고 전유럽을 포괄하는 안보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물론 서방은 이에 반대한다.그 다음으로 내놓은 안이 바로 동구권을 받아들이되 정회원이 아닌 동반자관계 자격으로 받으라는 것이다.러시아정부의 지도자들은 서방지도자들에게 최소한 나토확대를 서두르지는 말아달라고 주문한다.나토확대를 서둘러러시아내 보수여론을 자극할 경우 96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수파들이 승리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이다.반대로 민주개혁파가 승리하면 나토확대에 크게 반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동구국 역시 굳이 나토에 가입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논리이다. ○회원국들 입장 엇갈려 나토국 내부에서도 확고한 컨센서스는 아직 없다.예를 들어 스페인,이탈리아는 나토확대에 반대입장이다.기구가 너무 커져 자신들의 입지가 더 좁아지는 걸 우려해서이다.미국 역시 러시아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신중히 추진하자는 자세이다.반면 독일은 이를 빨리 추진하고 싶어한다.독일국경에 맞닿은 나토방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보내고 싶기 때문이다.그 경우 독일은 실로 50년만에 최전방국가의 짐을 벗는 것이다.군사전문가들은 대체로 나토확대에 신중한 견해를 밝힌다.무엇보다 그렇게 비대한 기구를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우선 동구국들은 가입하더라도 군사장비,인력을 재무장하고 재훈련시켜야 한다.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할 때 나토확대는 최소한 수년은 걸려야 해결될사안이다.그리고 미·러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양국 모두가 그런 사태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경기부양 필요” 미·일 공동개입/달러화 급상승 배경

    ◎79엔대서 4개월만에 98엔대로 점프/독·스위스까지 개입… 엔화 하락 가세 미국의 달러화가 연일 초강세 상승행진을 계속하고 있다.16일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및 일본은행(BOJ)과 함께 독일 분데스방크와 스위스 국립은행도 달러화 공동구매에 적극 가세,달러화가 6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달러당 1백엔에 가까운 수준을 보여주며 「엔화 약세」를 기정사실화했다.독일 분데스방크와 스위스 국립은행의 개입은「달러화 강세」와 「엔화 약세」를 확실히 가르는 분수령이 됐다. 달러화는 16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99엔대에 육박하는 초강세를 보였다.달러화는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도 1달러당 96.90엔까지 치솟아 지난 3월1일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또한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화의 환율은 1달러당 1.48마르크까지 올라가 지난 2월21일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달러화는 특히 최근 며칠동안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달러화는 지난 4월19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79.75엔까지 폭등해 전후 최고를 기록했었다. 선진4개국 중앙은행들의 적극 개입으로 이날 달러화의 가격은 1달러당 각각 3엔과 3페니히씩 오른 셈이 됐다.4개국 중앙은행의 동시개입은 최근 달러화가 꾸준한 오름세를 보이기 시작한 점에 미루어 볼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따라서 이를 뒤집어보면 특히 미·일·독등 3대 경제강국들이 달러화의 강세를 그만큼 계속적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엔 약세와 마르크 약세가 무엇보다 시급한 일본과 독일,여기에 달러 강세가 필요한 미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국제외환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특히 미국은 달러강세를 통해 인플레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장기금리를 인하하고 경기후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미국은 올 2·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5%로 지난 분기 2.7%보다 떨어졌는데도 장기금리가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점을 매우 우려해왔다. 최근 경기침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독일 역시 인플레에 연결될 수 있는 금리인하를 피하면서 경기를 상향조절하기 위해 달러 매입과 마르크 매각을 통한 외환시장 개입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날 달러화의 공동구매에는 독일이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준다. 일본에서는 의외로 엔화 약세가 급격히 진전돼 향후 3개월 이내에 달러당 1백엔까지 엔화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지난 2일 미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데 이어 15일부터 나타난 독일의 가세가 촉발제가 됐다고 보고 있다.4월의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담에서 합의된 「외환변동의 질서있는 반전」내용이 실질적으로 기속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뉴욕의 외환전문가들은 『4개국 중앙은행의 달러화 집중구매가 성공을 거두면서 1달러당 1백엔대와 1.5마르크대가 이미 사정권에 들어왔다』고 강조한다.
  • 달러화 초강세… 96엔 돌파/미·일·독 시장개입따라

    【런던·워싱턴AFP 로이터 연합 미국과 독일,일본 등 3개국의 중앙은행이 15일달러화 부양을 위한 공동시장개입에 나섬에 따라 런던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대엔화 및 마르크화 환율이 지난 3월1일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 달러화는 이날 한때 엔화 환율이 달러당 96.87엔,마르크화 환율은 1.4745 마르크로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하오 1시15분 현재(현지시간)는 96.60엔과 1.4760 마르크로 5개월 보름만의 최고가로 거래됐다. 또 프랑스 프랑화에 대한 달러화 환율도 5프랑 장벽을 돌파,달러당 5.065 프랑으로 거래됐다. 로버트 루빈 미재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뉴욕은행이 독일,일본 통화당국과의 협력하에 달러화 부양을 위한 시장개입에 나섰다고 확인했다.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아주에 고액 사립교육 “바람”

    ◎태·말련·인니·중 등 사립교설립 확산/입학금 8백만원선… 1인 GNP보다 높아/고도 경제성장 따른 중산층 교육열 부채질 아시아에 고액 사립학교 바람이 불고 있다. 입학금이 최고 1만달러(약 8백만원),월수업료 2백달러(약 16만원)씩 들어가는 사립학교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등 최근 폭발적인 경제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아시아 국가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수천개의 사립학교중 3분의 1 이상이 수도 방콕에 집중돼 있는 태국은 학교의 지방분산을 위해 민간기업에 대한 8억달러의 저리융자를 통해 사립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중이다.이 사업을 추진중인 전 재무장관은 태국이 노동집약적인 경제에서 기술집약적인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교육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 약 5천여명의 중·고생들이 미국,호주,싱가포르 등지에서 외국유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양질의 교육제공과 유학방지를 위해 사립학교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리포 그룹이 최근 자카르타 교외에 「펠리타 하라판」이라는 사립중·고등학교를 세운데 이어 시푸트라 개발회사도 곧 또하나의 사립학교를 열 예정이다.둘다 입학금이 1만달러,수업료가 월 2백달러에 이르는 최고급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이는 1인당 국민소득(GNP)이 7백80달러인 나라치고는 엄청난 액수다. 중국 광동성 심천 특별경제지구에 있는 아태국제학교는 서구의 사립학교에 버금가는 고급학교다.70㎦의 교정,실내체육관,천문기상대 등이 고루 갖춰져 있다.기숙생활이 의무인 이 학교는 학생 1명당 욕실이 갖춰진 1개의 방이 배정돼 심천에서도 비싼 학교에 속한다. 중국의 경우 7백곳이상의 사립학교중 약 90%가 국민학교라는 점이 특이하다.중등 사립학교 54곳중 20곳이 광동성에 몰려있다. 이같은 비싼 사립학교의 확산은 균등한 교육기회를 박탈,교육부문에서 빈부차를 심화시켜 「엘리트주의」를 낳는다는 점과 정부가 공교육에 져야할 책무를 피하는 「더러운」 음모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서 심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립교육의 부실이 사립학교의 확산을 부채질한다는 점이다.빈약한재정지원과 이에 따른 과밀학급,교재부족등 경제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공립학교의 교육여건은 학부모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중국이 지난 85년 지방정부에 대한 재정지원을 삭감한뒤 사립학교가 등장한 것은 좋은 예다. 학부모들의 교육열도 한몫을 했다.늘어나는 중산층은 양질의 교육을 자식들에겐 당연한 권리로 간주한다.게다가 학교의 질을 대학교 입학생 숫자로 가늠,학력이 높고 대학입학생 숫자가 많은 사립학교로 몰려든다는 지적이다.
  • 이용만 전재무 은행계좌 추적/4개은 압수수색

    대검 중수부(이원성 검사장)는 20일 동화은행장 불법비자금 조성사건과 관련,7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중지된 이용만(이용만)전재무장관의 혐의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전장관이 거래하던 4개 시중은행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계좌추적에 나섰다.
  • 수뢰경위·액수 조사/이용만 전재무 소환

    대검 중수부(이원성 검사장)는 18일 하오 동화은행장 불법 비자금 조성사건과 관련,7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중지된 이용만 전재무장관을 서울 서소문 대검청사로 소환해 수뢰 경위 및 액수등에 대해 조사한뒤 귀가시켰다. 검찰 관계자는 『이 전장관의 혐의사실중 상당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93년 검찰 수사과정에서 수표추적 등을 통해 물증까지 확보된 상태여서 조사는 혐의사실 확인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며 『구속여부는 이 전장관의 건강상태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 교육개혁안 세부계획 추진 어떻게…(정부시책 이렇습니다)

    □지난 1월 정부의 교육개혁안이 발표된 이후 세부 추진방안에 대한 여러가지 언론보도가 많아 혼란스럽다.세부계획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가=교육부는 교육개혁의 차질없는 추진을 위해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육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실천계획의 수립과 추진업무를 총괄하면서 교육개혁추진 실무작업반을 별도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또 시·도 교육청에도 교육개혁추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개혁방안의 책자 2만여부를 각급 학교와 기관에 배포했다. 97년부터 국어 영어 수학 위주의 대학별 고사를 폐지하고 사립대에 입시자율권을 보장함에 따라 각 대학은 자체 입시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96년부터 시행되는 평준화 해제 문제도 교육청별로 마련하고 있어 곧 발표될 것이다.서울의 경우는 학군을 5∼6개로 묶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지만 학군은 그대로 두고 인접학군에도 지원할 수 있게하는 안도 유력하다.8월말까지는 확정,발표할 것이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운영 방안과 구성 문제는 이미 공청회와 전문가 협의를 거쳤으므로 이달 안에 운영방안을 확정해 2학기부터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5살 어린이의 국민학교 취학은 수용능력에 따라 생년월일이 빠른 순으로 선별 취학시키면 내년부터라도 시행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시행방안과 취학아동 선발 등의 문제는 11월쯤까지 공청회 등을 통해 여론을 수렴해 결정할 방침이다. ◎“공무원 부정·무사안일” 비난 높은데/사회봉사교육 강화… 공익정신 함양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비롯한 대형사고가 있을 때마다 공무원들의 부정과 안일한 근무자세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공무원들의 공익 정신을 높이는 조치는 없는가=이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공직사회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번 사고에도 일부 공직자의 비리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공직자들의 기강확립은 물론 공익정신을 함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내무부는 삼풍사고를 계기로 일선 공직자들의 도덕 재무장 노력이 절실하다고 보고 지방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3주 이상의 모든 교육·훈련 과정에 사회봉사 활동 과목을 넣어 「인성 교육의 장」으로 활용키로 했다. 실제로 지난 7일 지방행정연수원(경기도 수원)에서 5월부터 6개월 코스로 「중견간부 양성과정」 교육을 받는 교육생 50명이 수원시 감천동 중앙양로원을 찾아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빨래를 해주는 등 2시간 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또 지난 3월부터 1년 일정으로 「고급간부 양성과정」을 밟고 있는 시·도 과장급의 고위 공직자 36명도 오는 21일 수원시 정자동의 아동복지시설인 효행원을 찾아 주변 청소,어린이 목욕시키기,공부지도 등 봉사활동을 갖기로 했다. 내무부는 교육생은 물론 일선의 모든 공직자들에게도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 권유하는 한편 새로 공개 채용하는 공직자들도 임용에 앞서 사회봉사 교육을 반드시 받도록 함으로써 공익정신을 키우기로 했다. ◎주택임대업자 양도세 감면요건은/5가구이상 5년넘게임대해야 혜택 □주택임대 업자에게는 주택을 팔때 양도소득세를 감면해 준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주택을 임대하면 무조건 양도소득세가 감면되는가=아니다.우선 5가구 이상을 임대해야하고 관할구청에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해야 주택을 팔 때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그리고 요건별로 감면율도 다르다. 85년 말 이전에 지은 주택 중 단독주택(다가구 주택 포함)은 장기임대에 따른 양도세 감면 혜택이 없다.아파트등 공동주택은 감면대상이 된다. 감면율은 95년 이전에 신축된 공동주택과 86년부터 94년말 사이에 지은 단독주택은 5년 이상 임대할 경우 50%,10년 이상 임대할 경우 양도세 전부를 면제해 준다. 95년 이후에 신축된 주택은 5년 이상만 임대해도 전액 면제다.그리고 95년 이후에 지어진 주택에 한해 등록하지 않더라도 5년이상 임대하면 양도세 50%를,10년이상 임대한 경우에는 전액 감면해준다. 임대업자 등록은 임대를 시작한지 3개월내에 주택임대 신고서를 관할 세무서장에게 제출하면 된다.주택을 양도한 뒤에는 임대사업자등록증,임대차계약서 사본,임차인의 주민등록 등본 또는 주민등록증 사본,임대주택에 대한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및 건축물 대장등본을 첨부해 세액면제 신청서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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