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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경환 적정수준 임금인상 요구…재계는 ‘냉랭’

    최경환 적정수준 임금인상 요구…재계는 ‘냉랭’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계에 적정수준 임금인상과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을 주문했다. 최 부총리는 1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5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가급적 적정 수준 임금인상으로 소비가 회복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 부총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들도 청년 고용, 적정수준 임금 인상, 투자활성화 등에 적극 동참해 달라.”면서 “특히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에 적정 대가 지급을 통해 자금이 중소 협력업체에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 부총리는 또 “무엇보다 청년 취업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한다.”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30조원 규모의 기업투자 촉진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한편, 민간투자사업에도 적극 참여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이달까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질 수 있도록 경제계도 양보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재계의 반응은 냉랭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이 예상된다. 간담회에 참석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임금 인상과 가계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를 활성화한다는 정부의 정책 취지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임금은 한번 올리면 잘 내려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크기 때문에 (인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G] 가장 성공한 민영화 기업 평가 … 공격 경영으로 해외시장 장악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G] 가장 성공한 민영화 기업 평가 … 공격 경영으로 해외시장 장악

    KT&G를 말할 때 ‘가장 성공한 민영화 기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2002년 말 공기업인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민영화한 기업인 KT&G는 민영화 이후 적극적인 기업 인수로 기존의 담배, 인삼을 넘어 제약과 화장품, 부동산업까지 다양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주력 사업인 담배와 홍삼은 해외시장까지 장악하고 있다. 공기업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민영화 이후 공격적인 경영이 가능했기에 이뤄 낸 성과인 셈이다. KT&G의 모태는 1899년 대한제국 궁내성 내장원 삼정과다. 이후 1948년 재무부 전매국, 1952년 전매청으로 개편됐고 1987년 한국전매공사가 창립됐다. 이때까지 국내 담배시장에서 제조·판매 독점권을 행사했다. 담배시장이 개방된 이듬해인 1989년 한국담배인삼공사로 바뀌었다. 공사는 1997년 공기업 경영구조 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에 의해 상법상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KT&G의 민영화 작업은 1993년 10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공기업 경영쇄신 방안 수립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1998년 7월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계획이 발표되면서 KT&G의 민영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어 1999년 KGC인삼공사가 자회사로 만들어졌다. 같은 해 기업공개(IPO)를 통해 한국거래소에 상장했고 2001년 7월 담배사업법이 개정, 시행됐다. 잎담배 전량수매제도와 담배제조독점권은 폐지되고 제조 허가제가 도입됐다. 이어 해외증권 발행과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2002년 12월 임시주주총회 의결을 통해 사명을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KT&G로 바꾸면서 법률상 완전한 민영기업으로 전환했다. 기업명인 KT&G는 한국담배인삼공사(Korea Tabacco&Ginseng)의 약자라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내일과 세계’(Korea Tomorrow&Global)라는 의미다. 자회사인 KGC인삼공사는 ‘공사’라는 이름 때문에 공기업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민영화 이전 한국담배인삼공사가 1999년 인삼사업부를 분리해 세운 100% 자회사다. 여전히 공사라는 이름이 붙는 것에 대해 인삼공사는 “홍삼의 해외 수출 부분이 큰데 회사 이름이 바뀌게 되면 정통 고려삼이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흔들릴 수 있어 이름만 공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영화 이후 KT&G의 성과는 꽤 눈부시다. KT&G의 매출액은 2002년 2조 306억원에서 2014년 4조 1129억원으로 102.5% 증가했다.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5863억원에서 1조 1719억원으로 99.9% 뛰었다. KT&G의 시가총액은 민영화 이전 3조원에서 현재 약 11조원으로 4배 가까이 성장했다. KT&G의 성장에는 공격적인 기업 인수가 한몫했다. 2004년 영진약품공업을 사들인 데 이어 2011년 소망화장품을 인수해 제약 및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해외사업 확대를 위해 2011년에는 인도네시아 담배 기업인 트리삭티사(社)도 인수했다. 성과를 내기까지 어려움도 있었다. 2010년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이 50%대로 떨어지자 노동조합은 임직원의 10%가량을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임직원 수는 공사 창립 당시인 1987년 1만 3082명에서 민영화 당시인 2002년 4768명, 2014년 현재 4077명으로 크게 줄었다. 민간기업식 경영전략은 담배 제품 제조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대기업에서 적용하던 브랜드 매니저 시스템을 도입했다. 필립모리스 하면 말버러,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 하면 던힐 같은 유명 담배가 떠오르는 반면 과거 KT&G만의 뚜렷한 브랜드가 없어 나온 대책이었다. 브랜드 매니저를 도입해 각 담배의 브랜드 고유 특성을 살리고 마케팅에 집중한 결과 에쎄와 보헴 같은 KT&G만의 브랜드가 구축될 수 있었다. 또 2000년에 출시된 담배 ‘타임’을 시작으로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했다. 덕분에 국내 시장점유율도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2004년 77.3%에 달했던 시장점유율은 2008년 66.1%, 2009년 62.3%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브랜드 구축 작업과 R&D 과정을 거치면서 2011년 59.6%, 2012년 62%, 2013년 61.7%, 2014년 62.3%로 상승 추세로 돌아섰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G] 양대사업 담배·홍삼 수출 효자… ‘금연’ 파고 해외시장서 넘는다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G] 양대사업 담배·홍삼 수출 효자… ‘금연’ 파고 해외시장서 넘는다

    KT&G가 가장 성공한 민영화 기업으로 불리는 데는 민영화 후 다른 대기업의 경영 기법을 그대로 따와 회사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한 민영화 기업’이라는 말 자체가 완전히 정부의 그늘을 벗어났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KT&G가 당면한 과제와 미래도 이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KT&G의 핵심 사업인 담배사업 관련 법규를 기획재정부가 관할하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정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또 KT&G의 지분구조를 보면 대주주는 최근 지분 매각을 발표한 기업은행(지분율 7.55%)이다. 이 밖에도 공기업일 때의 직원들이 민영화가 된 현재 임원이 돼 있고 개인이 회사를 소유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사장 교체기에 크고 작은 구설수로 홍역을 치르는 게 KT&G다. KT&G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주력 사업이 받은 타격을 회복하는 일이다. 담배와 홍삼 판매가 주력 사업인 KT&G는 경기에 관계없이 무난히 실적을 올리는 이른바 경기방어형 기업이지만 건강 문제, 담뱃값 인상이란 논란은 항상 제기되는 문제거리다. 담뱃값 인상 정책에 따라 KT&G는 올해 1월 1일부터 기존 담뱃값에 갑당 2000원씩 인상했다. 담뱃값 인상에 따라 KT&G의 수익도 오를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부의 인상 방침이 발표된 후 금연이 늘면서 판매량이 감소한 상황이다. 또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가 무산됐지만 담뱃값에 흡연의 폐해를 나타내는 경고 그림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건강증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담배 제조사들은 담뱃갑의 앞면과 뒷면에 각 면적의 30% 이상을 흡연경고 그림으로 채워야 하며 경고 문구까지 포함해서 면적의 50% 이상을 채워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담배 제조사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제조 허가권이 취소될 수 있다. 법안 통과는 지지부진하지만 건강을 위한 금연정책으로 담뱃값은 올리면서 경고 그림은 왜 못 싣게 하느냐는 여론의 반발에 따라 언젠가는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될 경우 담배 사업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KT&G로서는 창사 이래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KT&G와 필립모리스코리아,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코리아 등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537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KT&G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통과된 이른바 ‘김영란법’도 KT&G에 타격을 줄 전망이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등이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을 따지지 않고 처벌하도록 돼 있다. 홍삼은 기업에서 많이 선호하는 고가 상품으로 어느 정도 판매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악재는 KT&G의 지분 7.55%를 보유한 1대 주주인 기업은행의 지분 매각이다. 최근 기업은행은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KT&G의 주식 951만 485주(지분율 7.55%)를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기업은행의 KT&G 지분 매각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KT&G에 불확실성이 커져 주가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각종 어려움에 처해 있는 KT&G를 이끄는 민영진 사장은 올해가 연임한 임기의 마지막 해다. 올해 말 새로운 사장 선임을 두고 혼란이 예상된다. 일단 KT&G는 올해는 민 사장이 이뤄낸 경영 실적의 주된 성과였던 해외사업 확장에 더 박차를 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와 함께 건강보조식품인 홍삼을 동시에 파는 회사. 아이러니하지만 담배와 홍삼은 KT&G를 굴러가게 하는 양대 사업이다. KT&G에 따르면 특히 올해는 해외 담배판매량이 국내시장을 추월하는 원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세계 50개국에 수출을 하고 있는 KT&G는 세계 담배시장에서 필립모리스,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 제이티, 임페리얼토바코 등 빅4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1999년 해외 판매수량은 26억 개비, 판매금액 1476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지난해에는 16배 성장한 343억 개비를 팔았고 판매금액은 43배 뛴 6억 3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에쎄 제품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에쎄는 현재 전 세계 초슬림 담배 소비자 3명 가운데 1명이 애용하는 담배로 자리 잡았다. KT&G의 해외담배 판매량 가운데 에쎄 비중은 절반 정도에 달한다. 에쎄는 1996년 첫 발매 이후 지난해까지 해외 누적 판매량이 1603억 개비에 달하며 이를 길이로 환산하면 지구 약 400바퀴를 도는 것과 같다는 것이 KT&G 측의 설명이다. 이 밖에도 KT&G는 해외시장에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시킨 에쎄의 1위 굳히기는 물론 보헴 브랜드를 제2의 에쎄로 자리 잡게 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KT&G의 자회사 KGC인삼공사의 해외 진출 무기는 홍삼이다. 인삼공사 전체 매출의 12%, 960여억원은 해외 수출 비중으로 특히 한류 열풍에 따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인삼공사의 홍삼제품은 전 세계 4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고 해마다 한국 인삼류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인삼공사는 중국 상하이, 대만 타이베이, 미국 LA, 일본 도쿄 등지에 법인을 설립해 고려삼(한국산 6년근 홍삼)을 홍보하고 있다. 앞으로 홍삼의 중동 진출이 활발할 전망이다. 지난해 뿌리삼과 수출용 홍삼정, 홍삼정 플러스 3종이 할랄 인증을 받았다. 이슬람교도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 처리된 할랄 음식만을 먹을 수 있어 이슬람권에 식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할랄 인증이 필수적이다. 인삼공사는 이슬람권(중동+인도네시아)에서 지난해 803만 달러어치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올해 매출 목표는 1050만 달러어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경기부양 나서는 정부] 초이노믹스, 빗나가는 세 화살

    [경기부양 나서는 정부] 초이노믹스, 빗나가는 세 화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해 7월 취임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쏘아 올린 ‘세 개의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고 있다. 재정확대 정책과 부동산 규제 완화는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로 이어지고 있고 구조개혁은 이해관계자의 거센 반발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임금 인상 카드도 꺼내 들었지만 기업들이 외면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세 개의 부러진 화살’과 닮은꼴 운명에 직면한 셈이다. 다급해진 최 부총리는 ‘한국판 뉴딜’까지 만지작대고 있다. ●“경제 회복 생각보다 더뎌” 실패 인정하는 듯 최 부총리는 9일 서울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공사 현장 방문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경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회복세나 회복 속도가 상당히 미약하다”며 “민간소비 회복 속도가 생각만큼 견조하지 못하고 수출 증가 속도도 연말연초에 전망했던 것보다 미약하다”고 진단했다. 첫 번째 화살인 ‘46조원+α’의 정책 패키지가 내수 경기를 살리는 데 실패했다고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발언이다. 올 들어 경제지표는 더 악화됐다. 지난 1월 전(全)산업생산은 전월 대비 1.7%, 소매 판매는 3.1% 줄었다. 기업의 설비투자는 7.1% 급락했다. 우리 경제를 이끌던 수출도 지난달에는 전년 동월 대비 3.4% 감소했다. 정부는 그나마 부동산시장을 띄운 점을 성과로 내세우고 있지만 가계부채라는 또 다른 뇌관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2분기 1038조원이었던 가계부채는 반 년 새 1089조원으로 불어났다. 디플레이션(장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급증하는 가계부채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결국 부동산 규제 완화가 통화완화 정책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됐다. 두 번째 화살인 구조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다. 정부는 노동 구조개혁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을 이달 말까지 이뤄 내겠다고 했지만 노동계와 재계 모두 반발하고 있어 시한을 넘길 공산이 크다. 공무원연금 개혁도 여야 정치권의 갈등으로 두 달째 제자리걸음이다. 임금 인상론도 벽에 막혔다. 최 부총리는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며 소득 주도 성장론을 제기했지만 ‘믿었던’ 삼성전자마저도 외면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기본급을 동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4000여 회원사에 아예 “올해 임금인상률을 1.6% 범위에서 조정하라”고 권고했다. 지난해 2.3%보다 낮은 수준으로 사실상 동결이다. ●전문가들 “임기응변식 대응이 빗나간 화살 초래” 지난해 내놓은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 효과도 미지근하다. 배당이 크게 늘었지만 주된 수혜자는 재벌 총수 등 대주주와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전문가들은 최 부총리의 임기응변식 대응이 ‘빗나간 화살’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에 재정지출 확대와 부동산 규제 완화로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한 뒤 구조개혁으로 선회했다”면서 “결국 가계부채만 늘었고 부동산 거품이 우려되면서 한은의 추가 금리 인하를 어렵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한영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임금을 올리라고 해도 기업들이 움직이지 않아 소비를 살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서 “가계소득을 늘리려면 체감 물가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세, 밥값, 옷값, 사교육비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금호아시아나 금호고속 품을 듯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태’인 금호고속이 3년 만에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고속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 행사 기한 마감일인 9일 IBK투자증권·케이스톤파트너스 사모펀드(이하 IBK펀드)에 금호고속을 인수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단 금호고속이 보유한 금호리조트 지분 48.8%를 빼고 인수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금호산업 인수전이 남아 있어 매각금액을 낮춰 자금을 아끼려는 의도로 보인다. 금호고속의 매각 대금은 약 4800억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금호리조트 지분(800억원 수준)을 제외하면 실제 금호고속 가격은 4000억원대 초반인 것으로 전해진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해 금호고속이 매물로 나왔을 때부터 강한 인수 의지를 밝혀 왔다. 금호고속은 2012년 금호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각됐다. 이후 2년의 매각 유예 기간을 거쳐 지난해 매물로 나왔다. 재계에선 경쟁자가 없다는 점에서 금호고속이 금호아시아나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변수도 있다. 매각 주체인 IBK펀드가 금호리조트 지분을 빼고 파는 부분 매각안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금호그룹은 앞으로 3개월 안에 금호고속 인수 대금을 내야 한다. 기한 내에 돈을 내지 못하면 IBK펀드는 공개경쟁을 통해 금호고속을 매각할 계획이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 130년 국내 통신 산역사… 공룡 이미지 벗고 국민기업 날갯짓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 130년 국내 통신 산역사… 공룡 이미지 벗고 국민기업 날갯짓

    KT는 ‘한국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민영화가 된 지 13년이 됐지만 공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조직 규모가 방대하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통신공룡’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그러나 국내 통신 시장의 30%가량을 차지하는 KT는 우리의 통신 역사이자 ‘통신 맏형’으로 통신 업계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KT의 뿌리는 조선 고종 22년인 1885년 생긴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현 우정사업본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보 업무를 담당했다. 지금도 KT 광화문빌딩에서 내려다보면 세종대로 건너편 한성전보총국 터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이후 정체된 한국 전화사업은 광복 후인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체신부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박정희 정권 수립 이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비약적 경제성장은 거대한 통신수요를 가져왔다. 그러나 체신부 내에 속한 정부기업 형태로는 기술변화에 따른 발빠른 대응과 공격적인 경영이 어렵다는 판단이 대세였다. 체신부의 전기통신 사업을 분리해 오늘날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A: Korea Telecommunication Authority)를 1981년 12월 설립했다. KT는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시절부터 일찌감치 인터넷과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준비에도 박차를 가했다. 1989년부터 무료 전자우편서비스, 공중영상회의 서비스, 공중기업통신망 상용서비스 등 초보적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선보인 데 이어 1994년 코넷(KORNET)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용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훗날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대를 연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도 앞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984년 2월에 출범시킨 것이다. 이 회사는 1992년 SK로 매각돼 지금은 국내 최대 통신사업자인 SK텔레콤으로 변신, 지금은 모기업이었던 KT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사건은 KT 역사의 큰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다. 개방과 경쟁 시대를 앞두고 KT는 민영화 추진이라는 거시적인 목표 아래 1989년 주식회사형 공기업으로 전환한다. 1991년 한국통신(Korea Telecom)으로 회사 이름도 한 번 더 바뀐다. 정부 지분율을 꾸준히 줄여가던 한국통신은 2002년 5월 정부 지분을 모두 다 팔고 민영화에 성공한다. 민영화된 한국통신의 이름이 바로 지금의 KT다. KT는 이후 공격적인 투자로 각종 ‘최초’ 퍼레이드를 기록하며 업계를 이끄는 ‘맏형 행보’를 보여 왔다. 2004년 6월 홈네트워크 서비스 ‘홈엔’에 이어 2005년 7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간 광통신망을 연결해 남북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2006년 와이브로 상용화도 처음 성공시켰다. VDSL과 FTTH, 기가 인터넷 등 국내 최초와 최고 인터넷 기술을 개발해 인터넷 대중화를 선도했다. KT는 민영화 이후 독립적인 이사회를 구성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정착시키는 식으로 지배구조 개선에도 공을 들였다. KT 이사회는 8인의 사외이사와 3인의 사내이사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KT의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민영화 직전보다 인원이 2만명 이상 줄었지만 조직이 여전히 커 투입 대비 수익성이 좋지 못한 점은 KT의 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 ‘공룡의 굴레’라는 말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실제로 KT의 직원수는 동종 업계 1위인 SK텔레콤(4200명)보다 5배가량 많은 2만명을 넘는다. 그러나 인력이 많이 투입되는 주력 사업인 유선전화의 수익은 매년 4000억원씩 줄고 있다. 민영화는 됐지만 주인이 없는 탓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CEO 문제로 조직이 크게 흔들리는 것도 발전을 저해한다. 민영화 이후 CEO 선임 때마다 잡음이 일었으며 이는 사내 파벌 갈등과 대규모 임원 교체 문제로까지 이어지면서 경영 안정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가시지 않는다. KT는 올 들어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국가 경제와 국민 행복을 추구하겠다며 새로운 경영 목표로 ‘국민 기업’을 내세웠다. KT는 2014년 한 해 이동통신 가입자 수를 87만명 늘렸다. 인터넷 가입자(812만명) 1위, IPTV 가입자(585만명) 1위 등의 성과를 이룩한 점은 향후 전망을 밝게 하는 점이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경총 “올 임금인상률 1.6% 내 조정”

    정부와 재계가 올해 임금 인상률을 놓고 서로 부딪쳤다. 정부가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며 재계를 압박한 지 하루 만에 재계를 대표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임금 인상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정부의 임금 인상 요청을 사실상 거부했다. 경총은 올해 임금 인상률을 1.6% 내 범위에서 조정할 것을 5일 회원사에 권고했다. 1.6%에는 통상임금 확대, 60세 정년의무화 등 노동시장 제도 변화로 인한 임금상승분이 포함되기 때문에 최종 임금 조정률은 이를 고려해 정하라고 주문했다. 제도 변화에 따른 임금 인상률이 사실상 1.6%를 초과하는 기업은 임금을 동결하라는 뜻이다. 경총은 “과도한 임금 상승은 해당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 축소로 이어져 근로자 삶의 질을 저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총이 이날 제시한 임금 인상률 권고안 1.6%는 지난해 권고안인 2.3%와 비교해 낮은 수치다. 경총의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임금 인상을 통해 내수를 진작해야 한다’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주문과 배치된다. 최 부총리는 지난 4일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의 포럼 강연에서 미국과 일본을 사례로 들며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며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여당도 최 부총리의 발언을 지지하며 재계의 임금 인상을 요청한 바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요청을 맞받아친 이번 경총의 가이드라인은 경제 관료 출신인 박병원 회장이 지난달 경총 회장에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내놓는 공식 입장이다. 재계는 환영하는 입장이다. 최근 삼성그룹 계열사를 시작으로 일부 대기업들이 경영 상황 악화를 이유로 임금을 동결하고 있는 데다 경총까지 이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재계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라 기업의 임금 인상 자제 분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 회장은 “노동계는 올해도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기업의 지불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임금 인상은 수출 경쟁력 저하, 투자 위축 등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정부는 빚내서 집 사라는데…당신은

    정부는 빚내서 집 사라는데…당신은

    서민교(36·가명)씨는 결혼 이후 6년 동안의 ‘전세살이’를 끝내고 지난 1월 서울 외곽에 85㎡형 아파트를 3억 4000만원에 샀다. 서씨가 ‘내 집 마련’을 한 이유는 치솟는 전셋값 때문이다. 서씨가 살던 수도권 소재 전셋집 보증금은 1억 4000만원이다. 그런데 재계약을 앞두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4분의1이 넘는 4000만원이나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서씨는 고심 끝에 은행에서 2억원(15년 만기, 원리금 균등분할상환)을 대출받아 아파트를 샀다. 외벌이인 그가 매월 내야 하는 원리금은 170만원에 가깝다. 월급의 절반 이상이 주택 비용으로 들어간다. 김미영(38·가명)씨는 자녀가 없는 맞벌이 부부다. 부부 합산 연소득이 1억원이 넘지만 늘 전세를 살았다. 지금도 서울 잠실 110㎡형 아파트에 보증금 6억 5000만원을 주고 전세를 산다. 대신 오피스텔을 갖고 있다. 매월 70만원씩 임대료가 들어와 연 수익률이 6~7%다. 김씨는 4일 “집값 하락 위험이 없고 재산세 등 세금 부담이 없어 전세를 선호한다”며 “앞으로도 수익형 부동산 외에는 집을 가질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빚을 내 집을 사라’고 강권하고 있다. 가계 부채 건전성 유지를 위해 ‘성역’처럼 여겨지던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지난해 완화된 데 이어 올해는 정부 주도로 1%대 수익공유형 주택담보대출도 나온다. 전셋값이 매매 가격에 육박하는 곳들이 속출하면서 매매 시장이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주택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양분돼 있다. 집값 하락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전세를 고집하는 ‘그래도 전세족(族)’과 서씨처럼 ‘이 참에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부류로 나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주택 매입의 적기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다만 ‘전세’와 ‘자가’는 연령대, 소득 수준, 지역에 따라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전세는 원금 손실(집값 하락) 위험이 없고 주택 매입보다 주거 비용 부담이 적다. 2억원을 은행에서 전세자금으로 빌리면 금리는 연 3.4% 수준이다. 매달 이자가 56만원 정도다. 반면 전셋값이 매매가보다 빠르게 오르고 있어 부담이다. 일부 지역에선 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이 80~90%에 육박한다. 김규정 NH투자증권 부동산 전문위원은 “당분간 가파른 전셋값 상승률과 전세 매물 품귀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며 “전세가와 매매가 차이가 없는 지역에서는 주택 매입을 고려해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실거주를 목적으로 자녀가 있는 30~40대 역시 주택 매입에 합류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정태희 부동산써브 팀장은 “현재 집값이 바닥을 다지고 있고 수도권 일부 지역에선 미미하지만 소폭 오르고 있다”며 “자녀 학교 때문에 5년 이상 한곳에 살아야 한다면 금리가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 집을 사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추후 환금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수요가 끊이지 않는 서울 중심가나 역세권, 중소형 주택 위주로 사라는 뜻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원리금 분할 상환 조건이 부담된다면 거치 기간(3~5년)을 두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원리금 균등분할상환에 비해 금리가 연 0.3%~0.5% 포인트 올라가지만 매월 금융 비용 부담은 줄일 수 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안원경 인턴기자 cocang43@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포스코] 2000년 민영화… 소유·경영 완전분리

    2000년은 포스코가 민영화라는 커다란 변화를 맞은 시기다.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단순히 손바뀜을 한 것을 넘어 기업의 지배구조가 지속적으로 개선된 때이기도 하다. 민영화 이후 포스코는 전문 경영진의 전횡 가능성을 줄이고 투명성을 강화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민영화 완료 1년 전인 1999년 3월, 전문경영진의 책임경영과 이사회의 경영감시 및 견제기능을 강화한 전문경영체제를 도입해 내부 통제 기능을 강화하고 투명경영과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소유와 경영은 완전히 분리됐다. 전문 경영진이 책임경영을 하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은 독립적인 이사회를 거치게 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외환 위기 당시인 1997년 국내 대기업 중 최초로 도입한 사외이사제는 상장 기업 중 가장 선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포스코 이사회는 독립적인 사외이사 7인과 사내이사 5인으로 구성된다. 7명의 사외이사 중 1명이 반드시 이사회 의장 및 이사회 산하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사외이사 중심의 운영 체계를 확립했다. 특히 2006년에는 이사회를 대표하는 이사회 의장과 경영진을 대표하는 최고경영자(CEO)를 분리해 이사회 독립성을 확보하고 경영진 감독 기능을 강화했다. 정기적으로 사외이사만 참석하는 회의를 운영해 각 의제에 대한 사외이사들의 독립적인 의견을 수렴할 기회도 보장한다. 이사회 내 전문위원회는 모두 6개에 달한다. 철강 투자의 검토와 심의를 담당하는 경영위원회는 사내이사가 위원장을 맡고 나머지 5개 전문위원회는 사외이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여기에 감사위원회, 평가보상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는 사외이사로만 구성해 이사회의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보장한다. 해외 유력 투자가들이 포스코 지분을 늘리며 과감한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도 이와 같은 투명한 지배구조가 배경이 되고 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포스코] 기술도 자본도 없는 亞 변방 황무지에 ‘금빛 철강신화’ 일구다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포스코] 기술도 자본도 없는 亞 변방 황무지에 ‘금빛 철강신화’ 일구다

    포스코의 47년 역사를 논할 때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빼놓고는 이야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고 경영자로 일한 25년간 그는 불가능할 것만 같던 철강 보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박 회장이 철강왕이라 불리는 건 글로벌 철강업체로 우뚝선 포스코를 일궈낸 그의 업적을 감안할 때 결코 무색하지 않다. 미국의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조강(가공되지 않은 강철) 1000만t을 이뤘지만 박 회장은 25년(1968~1992년) 내 연산 조강 2100만t이라는 신화를 일궈냈다. 기술도 자본도 없는 아시아 변방의 후진국에서 만들어진 신화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물론 포스코가 지금의 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는 1960~80년대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존재감은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일본 방문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 기미쓰제철소를 방문한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이나야마 회장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 이 대화는 한동안 중국 대륙에서도 ‘박태준 신드롬’이 나타나는 배경이 됐다. 1927년 부산 기장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일자리를 찾아 현해탄을 넘은 부친을 따라 학창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1940년 이야마북중에 다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제철 근로봉사에 동원됐다. 용광로와의 첫 만남이었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에 합격했지만 2년만 다니고 귀국해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에 입학했다. 박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이때다. 당시 사관학교 중대장이던 박정희는 수학 실력이 탁월한 박태준을 눈여겨봤다. 박태준이 임관한 후 한동안 두 사람은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발령받은 박정희가 박태준을 참모장으로 발탁하면서 인연은 다시 시작됐다. 10살 터울인 부하 장교 박태준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5·16군사혁명을 준비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박태준을 따로 불러 부탁한다. “임자는 이 일(쿠데타)에 참여하지 말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 결국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스스로 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르면서 비서실장에 박태준을 임명했다. 2년 후 대부분 정치에 입문한 혁명세력과 달리 박태준은 소장으로 예편했다. 박 전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겼고 이어 제철사업도 지시했다.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우방인 미국은 물론 일본까지 비웃었다. 군사정권의 과시용 사업일 뿐이라는 냉소만 돌아왔다. 그럴 법도 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이하, 국가의 총수출액은 4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종합제철소는 건설에 드는 돈만 무려 1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1968년 4월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장 큰 걸림돌인 자금은 해외 차관에 의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 세계은행(IBRD), 미국국제개발처(USAID),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등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국을 방문해 KISA 대표에게 최종적으로 ‘협력 불가’라는 답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박태준 사장은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당시 8000만 달러 정도 남아 있던 대일청구권 자금을 제철사업에 투자해 보자는 아이디어다. 곧바로 박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박 사장은 곧장 일본으로 가 일본 정재계 주요 인사들 설득에 나섰다. 미쓰비시상사의 후지노 사장 등 철강업계 관계자는 물론 통산성의 오히라 마사요시 장관 등을 연이어 만나 한국에 철강산업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며 설득했다. 오히라 장관은 김종필과 함께 한·일청구권 협상을 타결 지은 인물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박 사장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박 선생은 보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은 감동했다” 박 사장은 결국 대일청구권 자금 7370만 달러와 일본 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합한 1억 2370만 달러로 제철소사업을 시작했다. 1969년 8월 제3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 정부도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자금이 확보되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는 대일청구권 자금은 우리 민족에겐 피 같은 돈이었다. 회담을 성사시킨 박정희 정권은 ‘3억 달러에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사실을 박 사장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사를 독려하면서 박 사장은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3년여에 걸친 공사 기간 중에 13번이나 포항 현장을 방문했다. 박 사장에게 건넨 ‘종이 마패’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다. 공사 과정에서 당시 정치인들이 박 사장을 흔들어대자 박 전 대통령은 종이 마패 한장을 박 사장에게 쥐여 줬다. 마패에는 ‘박태준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고 적혀 있었다. 포항제철은 가동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빚을 다 갚고 흑자를 기록했다. 결국 1970년 4월 1일,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연산 130만t 규모의 철을 생산하는 포항 1기 설비를 착공했다. 1973년 6월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는 쇳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며 포철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세계 최대 제철소라는 타이틀은 포항제철소에서 광양제철소로 이어지며 1992년 2100만t의 사반세기 대역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설비 가동 첫해인 1973년 매출액 416억원에 46억원 흑자를 기록한 이래 1992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매출액을 149배(6조 1821억원), 순이익을 40배(1852억원) 이상으로 늘렸다. 용광로가 가동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단 한번의 적자 없이 흑자 행진을 지속하는 기틀이 됐다. 한국 제철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던 존 자페 전 IBRD 한국 담당자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대한국제제철차관단에 투자 반대 의견을 제출했던 내 보고서가 옳다고 믿는다. 다만 박태준 회장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해 나의 보고서를 틀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포스코의 성공은 지도자의 끈질긴 노력을 바탕으로 설비 구매의 효율성, 낮은 생산 원가, 인력 개발, 건설 기간 단축을 실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이 참에 내 집 마련, 이왕이면 명품 아파트!”…‘당산역롯데캐슬’ 주목

    “이 참에 내 집 마련, 이왕이면 명품 아파트!”…‘당산역롯데캐슬’ 주목

    전셋값 고공행진에 저금리 기조, 정부의 부양책이 맞물리면서 분양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전세 재계약을 앞두고 수 천 만원씩 가격 부담에 세입자들이 분주하게 전셋집을 보러 다니지만 매물은 자취를 감춘 상황. 대출 이자 부담이 완화되고 정부의 정책 여파로 집값이 더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기대심리가 작용하면서 이 참에 집을 사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에 편리한 교통과 우수한 입지에 미래가치 품은 이른바 알짜 단지마다 수요자들이 몰려들며 성황을 이루고 있다. 주택시장에서도 같은 조건이라면 조금이라도 낫고 좋은 것을 택하는 ‘동가홍상(同價紅裳)’식 소비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서울지역에서는 재개발 물량들이 분양시장을 주도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말 부동산 3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수혜효과가 예상되면서 향후 미래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자 실수요는 물론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분양 중 현장들의 분위기도 한층 달아올랐다. 영등포구 당산동 일대에 들어선 ‘당산역롯데캐슬프레스티지’의 경우도 최근 부쩍 늘어난 관심에 힘입어 막바지 분양이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롯데건설이 당산4구역을 재개발해 선보인 당산역롯데캐슬프레스티지는 지리적 이점과 탁월한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노후화된 아파트 문제가 지적됐던 영등포구에서 15년만에 등장한 신규 브랜드 아파트로 관심을 모았다. 이 아파트는 실제 청약 당시 지역 내 수요자들은 물론 주변 목동, 여의도 거주자들이 몰리면서 4개의 주택형이 모두 1순위 당해 지역 마감을 기록하기도 했다. 단지 구성은 지하 2층, 지상 22~26층, 2개 동, 전용 84㎡ 총 198가구로 현재 조합원 물량을 제외한 일반 분양 106가구 중 일부 잔여세대를 분양 중이다. 지하철 2, 9호선 환승역인 당산역과 2, 5호선 환승역 영등포구청역이 도보 거리에 위치한 트리플 역세권 프리미엄이 강점으로 꼽힌다. 당산동 부동산 관계자는 “당산역롯데캐슬프레스티지의 경우 소규모 단지 구성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명품 아파트로 평가 받으며 수요자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며 “입지적으로 이미 주변 1만여 세대에 이르는 주거타운과 함께 풍부한 생활기반시설을 공유할 수 있는 데다 브랜드 품격을 높인 특화설계가 경쟁력으로 주목 받고 있다”고 전했다. 건설사 측은 지역 내 오랜만에 들어서는 브랜드 아파트에 걸맞게 품격의 차별화에 주안점을 뒀다. 각 가구의 거실에는 10인치 터치 월패드를 도입했으며 홈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방문자 확인과 현관문 개폐, 세대침입 감지 및 알림 등의 보안기능을 강화했다. 이 외에도 스마트 에너지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에너지 절감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며 집 안에서 콜 버튼 하나로 편리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다. 브랜드 특화 커뮤니티시설도 눈에 띈다. 약 330평 규모로 조성된 피트니스클럽, 실내 골프클럽, 남녀샤워실, 관리사무소, 경로당 등 입주민을 위한 생활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특히 지하에는 영등포구 최초로 세대별 전용창고도 제공돼 이목을 끈다. 주차장은 모두 지하로 배치해 단지 전체를 안전하고 쾌적한 힐링 아파트로 꾸몄으며, 주차대수도 가구당 1.46대로 넉넉하게 설계해 지역 내 고질적인 문제였던 주차문제도 해결했다. 분양가는 주변 시세 대비 저렴한 수준인 3.3㎡당 약 1800만원 대부터다. 여기에 현재 잔여세대에 한해 발코니 확장비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계약금 10%도 우선 1000만원을 낸 후 1개월 이내 나머지 차액을 납부할 수 있도록 완화했다. 입주는 오는 2017년 8월 입주 예정이며 모델하우스는 신용산역 2번 출구 방향에 마련돼 있다.분양문의: 1899-4222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금호아시아나·호반건설 등 압축

    신세계그룹이 금호산업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신세계그룹은 “경쟁 업체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향후 본입찰 참여 등 금호산업 지분 매각 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27일 밝혔다. 신세계그룹은 앞서 지난 25일 금호산업의 계열사인 금호터미널에 광주신세계가 입점해 있어 영업권 방어 차원에서 금호산업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신세계그룹이 밝힌 경쟁 업체를 롯데그룹으로 해석하고 있다. 신세계그룹이 처음부터 인수 의사가 있었던 게 아니라 롯데그룹의 참여를 견제하기 위해 인수의향서를 냈다가 롯데그룹 측의 불참을 확인하고 생각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신세계그룹이 빠지면서 금호산업 인수전에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사활을 걸고 참여한 가운데 호반건설과 IBK펀드, 자베즈파트너스 등 사모투자펀드(PEF)들이 경쟁한다. 재계에서는 박 회장의 금호산업 인수전 성공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채권단은 금호산업의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때 인수금액을 우선 고려하되 인수의향자가 기업을 제대로 운영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도 평가 요소로 고려하기로 했다. 따라서 사모펀드들이 막대한 인수금액만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단독으로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되기는 쉽지 않다. 박 회장은 금호산업 우선매수청구권을 가졌고 금호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강점이지만 1조원대 인수자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금호아시아나] 중고택시 2대로 시작해 여객·타이어로 확장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자 고 박인천 회장은 1901년 7월 5일 전남 나주에서 출생했다. 빈농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29세에 독학으로 경찰에 입문했고, 같은 해에 이순정 여사를 배필로 맞았다. 1946년 박인천 회장은 17만원(圓)의 자본금으로 미국산 중고택시 2대를 사들였다.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출발을 알리는 ‘광주택시’를 설립한 셈이다. 그는 사업을 확장해 1948년 ‘광주여객’을 세워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여객사업은 1950년대 말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타이어를 구하는 게 문제였다. 지금처럼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터라 타이어는 수월하게 닳았다. 여객사업 과정에 타이어를 쉽게 구하고자 1960년 설립한 회사가 금호타이어다. 생산 초기 하루 20본 정도의 타이어를 생산했지만, 기술부족과 열악한 생산환경 등으로 시판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5년 만에 KS 마크를 획득했고 이와 때를 맞춰 군납업체로 지정받으면서 타이어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창해 나갔다. 박인천 회장은 1972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장남 박성용 박사(금호아시아나그룹 2대 회장)로부터 ‘지주회사’ 설립을 건의받아 10월 10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자신을 비롯해 장남 박성용 박사 등 7명을 발기인으로 ‘금호실업’ 설립을 결의했다. 금호실업이란 이름은 박 회장의 아호인 ‘금호’(錦湖)를 따온 것이다. 금호실업은 금호타이어,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전남제사, 한국합성고무(현 금호석유화학) 등의 주식 100%를 거머쥔 명실상부한 지주회사의 틀을 갖추게 된다. 또 계열사 통합관리를 위해 ‘투자사업부’를 설치해 신규사업 추진을 담당하는가 하면 그룹 공채사원 모집과 교육 등 전반적인 인력관리, 경영실적 평가 등을 수행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흔한 시스템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사세는 확장일로를 걸었다.1973년 출범 당시 6개에 불과했던 계열사는 4년 만인 1977년에는 12개로 늘어났다. 특히 고속버스와 타이어 부문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여서 1970년대 업계 선두로 부상했다. 1984년 6월 6일 박인천 창업회장의 타계로 금호는 2세 경영시대를 열게 됐다. 장남인 박성용 그룹부회장이 아버지를 이어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성용 회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부총리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던 국정참여 경험을 경영에 결합해 실력파 전문경영인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그는 아시아나항공을 출범시키면서 취임 당시 6900억원이던 그룹 매출을 1995년 4조원 규모로 끌어 올렸다. 1996년 4월 금호아시아나그룹 3대 회장에 취임한 박정구 회장은 ‘세계 일류 기업을 만든다는 화두를 던졌다. 1995년 문을 연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강원 설악과 전남 화순 등에 잇달아 콘도를 개장해 회사의 외연을 관광과 레저까지 넓혔다. 이들에 비하면 박삼구 회장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안 살림을 맡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그룹 구조조정이 한창이었던 2002년 9월 2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 1년 만인 2003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해 온 구조조정을 완료해 위기 속 리더십을 선보였다. 이후 재도약은 시작됐다. 금호산업과 아시아나 등 반등한 계열사들의 실적에 힘입어 그룹 재건에 나섰다. 2006년 대우건설에 이어 2008년 대한통운 인수에 성공하는 등 굵직한 기업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며 금호의 가장 화려한 때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같은 외양 불리기는 지난 10년간 금호가 ‘승자의 저주’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朴대통령 “한국의 메디치 가문 돼 달라”

    朴대통령 “한국의 메디치 가문 돼 달라”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재계 총수들을 만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나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 등 재벌그룹 오너와 유수 기업 대표 21명이다. 2013년 8월 28일 국내 민간 10대 그룹 회장단과 오찬 간담회를 한 이후 1년 6개월 만이다. 만남은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활동인 ‘메세나’에 적극적인 기업들을 격려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부탁하기 위해 마련됐다. 한편으로는 지역별 창조경제혁신센터 설립을 지원해 온 기업들에 감사의 뜻도 전하는 동시에 집권 3년차 경제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박 대통령이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요청하는 뜻도 담긴 듯 보인다. 오찬에서 박 대통령은 메세나의 어원이 된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이케나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던 메디치 가문을 거론하며 “기업인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메디치 가문이 돼 달라”면서 문화예술 분야의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 줄 것을 희망했다. 이어 “지금 우리 앞에는 경제 체질을 혁신해 다시 한번 경제 대도약을 이루고 국민행복시대를 열어 가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고 그것을 이루는 길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에 있다”면서 “기업 메세나는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이고도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 후원의 다양하고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발굴해 나가면서 우수 메세나 사례를 널리 알리고 기업의 명예를 높이는 방안도 마련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와 관련해 “기업인의 도움으로 세 번 만에 어렵게 유치한 대회다.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경제계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면서 “평창동계올림픽이 세계인의 문화올림픽이 될 수 있도록 스폰서십 지원에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드린다”고 당부했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CJ그룹 총수 공백 리스크 가시화

    CJ그룹 총수 공백 리스크 가시화

    CJ그룹이 총수의 부재로 투자 계획과 임원 인사 등이 지지부진한 데다 회사가 한 단계 더 클 수 있는 기업 인수 기회마저 놓치면서 시계 제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2013년 7월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건강 문제로 치료를 받게 되면서 2년 가까이 총수 부재의 특수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후 이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위원장으로 이채욱 CJ주식회사 대표와 김철하 CJ제일제당 공동 대표이사 등 3인 중심의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해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지만 인수전 실패는 물론 투자 계획 등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룹경영위원회에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들어가 있었지만 지병 등의 이유로 이달 초 미국으로 다시 출국하면서 실질적인 경영에는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연말쯤 나는 정규 임원 인사도 늦어지고 있다. CJ그룹의 복잡한 내부 사정에 따라 임원 인사가 이례적으로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상고심이 빠르면 다음달쯤 진행될 예정이고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상고심이기 때문에 이에 집중하자는 의미에서 정규 임원 인사가 미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CJ대한통운은 지난 13일 마감된 싱가포르 물류기업 APL로지스틱스 본입찰에서 일본 물류기업인 KWE에 밀려 인수에 실패했다. KWE는 2013년 기준 연매출 2조 7000억원에 시가 총액 1조 3000억원인 기업으로 이번 입찰에서 1조 3500억원가량의 금액을 제시해 인수 가격에서 CJ대한통운을 누른 것으로 알려졌다. APL로지스틱스는 기업 부문 물류 쪽에 강점이 있는 회사로 앞서 인수적격 후보로 선정됐던 CJ대한통운이 이를 인수했다면 회사가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결국 놓치게 됐다. 재계에서는 CJ대한통운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데 대해 총수 부재에 대한 어려움이 가장 주된 이유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인수전에서는 누가 높은 가격을 써 내느냐가 중요한데 그런 중요한 결정을 때맞춰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너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 후계 경영인의 명암 대림그룹] 기획서 운영까지 토털 솔루션… 디벨로퍼 사업으로 새 도약 추진

    [재계 인맥 대해부 (2부) 후계 경영인의 명암 대림그룹] 기획서 운영까지 토털 솔루션… 디벨로퍼 사업으로 새 도약 추진

    국내 최고(最古) 건설사 대림그룹이 최근 위기를 맞았다. 경고등은 해외 공사 현장에서 켜졌다. 대림그룹의 모태인 대림산업은 1997년 기업들이 줄도산하던 외환위기(IMF)가 왔을 때도 이듬해 2251억원의 영업이익(매출 3조 9033억원)을 낸 기업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제 살 깎기식’ 저가 수주 전쟁은 실적 악화라는 상흔을 남겼다. 지난해 대림산업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발생한 4000억원의 추가 비용으로 인해 1998년 이후 17년 만에 2703억원의 영업손실(매출 9조 2961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지난해 재개발·재건축 시장에서 전년보다 14배나 늘어난 2조 3498억원을 수주하며 GS건설을 누르고 1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다. 대림산업은 올해도 2만 8000가구를 분양하고 기업형 임대주택사업에도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위기에 강한 대림의 뚝심, 그 비결은 뭘까. 대림산업은 1939년 10월 인천 부평역에서 간판을 내걸고 건설 자재를 팔았던 부림상회에서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목재와 건자재상에서 출발했다. 경기 시흥에서 태어난 고 이재준 대림산업 창업주는 부친이 운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 수업을 받으며 대림의 기반을 닦았다. 당시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해 사세를 키웠다. 광복 이후 군정청에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팔기도 했다. 하지만 산림이 북한에 편재돼 있는 등 목재업의 한계를 느낀 창업주는 1947년에는 대림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건설업에 본격 진출했다. 부평경찰서 신축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한국전쟁 때는 군시설 공사를 맡았고 휴전 이후에는 재건 공사를 통해 회사를 키웠다. 1966년에는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진출해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했다. 창업주의 장남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것은 이때다.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이 명예회장은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학자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그해 대림산업의 계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에 이어 1973년 국내 최초로 중동에 진출해 해외 플랜트를 수출했다. 대림산업은 현재 35개 국가에서 플랜트, 댐, 도로, 공공주택 등 다양한 사업들을 하고 있다. 국가 기반시설인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 잠실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국회의사당, 서해대교 등이 대림산업에 의해 탄생됐다. 1979년에는 호남에틸렌 주식 지분 80%를 획득하며 현재 그룹의 양대 축인 석유화학 분야에도 진출하게 됐다. 그러나 1986년 개관을 코앞에 두고 터진 독립기념관 화재사고 등 아픔을 겪기도 했다. 1세대가 대림산업의 토대를 만들고 건설업을 특화시켰다면 2세대는 유화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3세대인 이 명예회장의 아들 이해욱 부회장은 IMF 외환위기 당시의 변화와 혁신을 통한 위기극복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2000년 국내 최초로 ‘e-편한세상’이라는 아파트 브랜드를 만들어내 업계 판도를 바꿨다. 현재 3세 경영은 건설과 유화를 넘나들며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자체 개발한 브랜드인 글래드(GLAD) 호텔을 여의도에 열어 시공에서 운영까지 전 과정을 그룹이 맡기도 했다. 올해 창립 76주년을 맞는 대림산업은 격동의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 없이 무난하게 위기를 넘어왔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나 불투명한 투자를 하지 않는 대림그룹의 사풍이 대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림그룹의 지난해 재계 순위는 27위(공기업 제외시 18위)로 자산 규모는 16조 3000억원이다. 건설사업과 석유화학 사업부 두 축으로 운영되는 대림산업 외에 대림코퍼레이션, 고려개발, 삼호, 대림자동차, 오라관광, 대림 I&S, 대림 C&S 등 22개의 계열사가 있다. 상대적으로 기업 순위가 낮게 매겨진 것도 사업 영역을 다각도로 확대해 수익을 늘리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오로지 건설과 유화에 사업 역량을 집중해 내실 다지기를 한 영향이 크다. 3세 경영이 본격화되면서 변화의 속도도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이해욱 부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디벨로퍼 사업을 적극 전개해 한 단계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디벨로퍼 사업은 프로젝트 기획 발굴에서 투자, 건설, 운영 관리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토털 솔루션 사업자를 뜻한다. ‘한 우물 경영의 달인’ 할아버지 이재준 창업주의 뚝심과 달리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3세들의 경영 성적표가 어떤 결과를 낼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두산그룹] “두산 하면 야구”… 代 잇는 두산家 야구사랑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두산그룹] “두산 하면 야구”… 代 잇는 두산家 야구사랑

    재계에서 손꼽히는 야구 열성팬 하면 두산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첫해인 1982년에 함께 창단한 두산베어스는 1982년과 1995년, 2001년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구단주는 두산가(家) 4세의 선두 주자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이다. 박 회장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두산베어스 경기를 심심찮게 찾는 열성팬이기도 하다. 특히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은 두산가 사람들 가운데 야구에 대한 관심이 오래전부터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시절 야구 동아리에 들어가 선수로 뛰기까지 했다. 그의 포지션은 2루수였다. 박 회장은 “아마추어 선수들 가운데 밀어치는 선수가 거의 없어 2루 쪽으로 볼이 많이 오지 않아 수비하기 편했다”며 “끝까지 2루수로만 선수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제는 선수가 아닌 구단주로서 야구를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두산의 홈경기를 잠실야구장 관중석에서 관람하는 것이다. 한 시즌 동안 20회 정도는 방문하고 포스트시즌처럼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라도 야구장에서 보고 있다. 지난해 두산베어스의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 팬들이 박 회장과 감독, 선수들에게 바라는 기대도 크다. 지난해 7월 경기도 이천에 두산베어스의 미래를 담보할 초현대식 2군 연습장인 베어스파크를 개관한 것도 우승을 위한 박정원 회장의 투자였다. 그는 “항상 1등이 되기는 어렵고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더라도 팬들이 외면하는 구단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스포츠맨십”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몇 년간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는데 우리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외부에서 보충해서라도 올해는 꼭 팬들의 갈증을 풀어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올 34조 프로젝트 투자 나선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디스플레이, 에쓰오일, GS칼텍스 등 주요 기업들이 올해 34조 4000억원을 공장 신·증설 투자프로젝트에 투자한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1일 “기업 간 인수·합병(M&A), 비핵심부문 이전 등을 통해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기업체질을 개선하는 사업재편 노력을 가속화해 달라”고 밝혔다. 정부가 기업투자 애로 해소와 함께 ‘사업재편지원특별법’(가칭)을 제정해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나섬에 따라 삼성·한화의 ‘빅딜’과 같은 초대형급 M&A가 추가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산업부는 이날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윤 장관과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 주요기업 최고경영자(CEO), 산업은행,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주요 경제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주요기업 투자간담회를 열어 이런 내용의 투자방안을 논의했다. 지난해 10월 투자간담회에서 집계된 28조 4000억원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 가운데 이미 투자된 것들을 제외한 22조 40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가 올해 착수된다. 삼성전자는 15조 6000억원 규모의 평택 반도체 신규라인 건설투자와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의 대규모 생산라인 증설에 투자한다. 산업부가 투자애로 해소 차원에서 발굴한 10조 9000억원 규모의 투자와 지난달 1월 신규 조사를 통해 발굴된 1조 1000억원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도 가동된다. 에쓰오일은 올 초 8조원을 들여 울산공장 신증설 사업에 착수하며 GS칼텍스 등은 2조 7000억원 규모의 여수산단 공장을 착공한다. 포스코는 2000억원을 들여 광양~여수 부생가스 교환망 구축 사업과 광양 아연도금강판 공장도 신축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엔진고장 라인 증설을, 현대모비스는 충주 친환경 공장 증축을 진행한다. 산업은행은 또 제조업과 외국인 투자프로젝트 등 7조 1000억원 이상 규모의 총 23건에 대해 투·융자를 신청했다. 실제 투·융자 여부와 규모는 사업성 검토를 거쳐 결정된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한진그룹] 인천 창고서 ‘한진상사’로 출발… 2019년 세계 10대 항공사로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한진그룹] 인천 창고서 ‘한진상사’로 출발… 2019년 세계 10대 항공사로

    1945년 11월 인천 해안동의 한 허름한 창고. 당시 25세의 청년 조중훈은 ‘한진상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회사 이름엔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다소 거창한 포부를 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트럭 1대였지만 조씨는 이곳에 터를 잡으면 일거리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해방과 함께 인천항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건너온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의 생필품들이 밀려들었고 누군가 이런 물건을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 창고가 올해로 만 70살이 된 한진그룹의 모태다. 한진상사는 5년 만에 종업원 40여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한 단단한 회사로 자라났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사업은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 탓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에서 기회를 찾았다. 한진은 1956년 무렵 주한 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다. 가용 차량만 500대에 이르는 번듯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1961년에는 주한 미군 통근버스 20대를 사들여 서울~인천 간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한진고속의 시초다. 한진그룹은 월남전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베트남에 파병 중인 미군 장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1966년에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체결했다. 그 후 1971년 종전 때까지 5년간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이었다. 1968년에는 한국공항과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인하공대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로 만성적인 적자를 보이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항공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한항공공사는 당시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꼴찌에 금융 부채만 27억원에 달했다. 조 회장은 훗날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적기 사업을 국익 차원에서 이끌어야 할 소명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1977년에는 육·해·공을 잇는 종합 수송 그룹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로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90년대 들어 조 회장의 주요 관심사는 2세 경영 체제 확립이었다. 4명의 아들을 모두 주력 계열사에 포진시킨 그는 장남 양호씨는 대한항공, 차남 남호씨는 한진중공업, 삼남 수호씨는 한진해운, 사남 정호씨에게는 한진투자증권 등의 금융사를 맡겼다. 1990년대 후반엔 정치적인 격랑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김대중 정권 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1997년 대한항공의 괌 추락 사고 이후 2년 만에 다시 상하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족벌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어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3개월간 조사 인력만 240여명이 동원된 국세청 조사에서 한진그룹은 무려 1조 395억원을 불법적으로 빼돌린 사실이 적발돼 5416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이어진 검찰 수사에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및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정권은 “정치적 배경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재계에선 여전히 “박정희부터 김영삼 정권까지 한진그룹이 보여 온 ‘반DJ 행보’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이후 한진호의 키는 2세들이 넘겨받았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등을 중심으로 글로벌 종합물류기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조남호 회장은 중공업계열, 조정호 회장은 금융계열사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각각 제조와 금융그룹을 키워 가는 모양새다. 2006년 사망한 삼남 조수호 회장이 맡고 있던 한진해운은 부인 최은영씨가 8년간 회장직을 수행해 오다 지난해 초 조양호 회장에게 넘겼다. 한진그룹은 2014년 12월 말 현재 지주회사 한진칼 아래 대한항공, 진에어, 한국공항, 에어코리아(이상 항공 부문), 한진해운(해운 부문), ㈜한진(육상운송), 한진관광, 정석기업, 칼호텔네트워크(관광·호텔·레저 부문), 한진정보통신(정보 서비스 부문) 등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현재 148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대한항공은 전 세계 45개국 126개 도시를 취항 중이다. 대한항공은 창사 5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는 매출액 25조원을 달성해 항공여객 부문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진해운도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등 170여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60여개 정기 항로를 운항하며 연간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세계적인 선사로 발돋움했다. 덕분에 한진그룹은 2013년 기준 매출 24조 7760억원, 자산 총액 39조 5220억원 규모의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 현재 한진은 예기치 못한 위기를 겪고 있다. 땅콩 회항으로 대두된 3세의 ‘오너 리스크’ 때문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한진그룹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고, 일각에선 대한항공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창업주 가문에 계속 경영을 맡기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데다 경험이 짧아 능력과 품성이 검증되지 않은 3세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 올바르냐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로 칠순을 맞은 한진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한진그룹] 법조·학·관·재계 망라…명문가와 폭넓은 인맥

    관가와 경제계·학계·법조계까지 폭넓게 구성된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혼맥은 국내 대기업 어느 집안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다. 유난히 중매결혼이 많다.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은 1944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92)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동생들과 자녀들은 당대 명문가 자녀들과 연이어 짝을 맺었다. 4남 1녀 중 장녀인 조현숙(70)씨는 1968년 숙부인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중매로 당시 법조인인 이태희(75·대한항공 법률 고문) 전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인연을 맺었다. 흥아타이어 감사를 지낸 이상묵씨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이다. 1983년 KAL기 폭파 사건 당시 보상 문제와 관련된 법률적 문제에 앞장서 주목을 받았다. 둘째이자 장남인 조양호(66) 한진그룹 회장은 19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이자 서울대 미대 출신인 이명희(66)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양가 부모가 한 모임에서 각자의 아들딸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사돈이 됐다고 한다. 당대 유력 운수기업 후계자와 주무 부처인 교통부의 이례적인 만남인 셈이다. 조 회장의 장인인 이 전 차관은 1976년 공직에서 물러나 인하대 총장을 거쳐 국민대, 중앙대 총장을 역임했다. 셋째인 조남호(64) 한진중공업 회장은 김원규 전 교육감의 차녀인 고 김영혜씨를 우연히 만나 연애결혼했다. 넷째 고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은 한진 일가를 다른 재벌가와 이어 준 중심축이다. 우선 처가는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93) 총괄회장 집안이다. 부인인 최은영(53·유수홀딩스 회장)씨의 모친이 신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씨다. 또 신씨의 남편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이다. 막내인 조정호(57) 메리츠종금증권 회장은 1987년 LG가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인 구명진(51)씨와 혼인했다. 구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80)씨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차녀라는 점에서 삼성가와도 이어진다.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41) 전 부사장은 2010년 10월 경기초교 동창인 박종주(41)씨와 결혼했다. 박씨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성형외과 의사다. 공동투자했던 성형외과 병원은 유명 연예인들이 찾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최근 이 병원 생활을 접고 한진그룹 등이 380억원을 투자한 인하국제의료센터에서 근무 중이다. 2013년 하와이에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이 일로 조 전 부사장이 원정 출산 논란에 휩싸였다. 조 회장의 외아들인 조원태(40) 부사장은 2006년 5월 김태호 충북대 정보통계학과 교수의 외동딸인 김미연(37)씨와 결혼했다. 김 교수는 3대 중앙정보부장과 8,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재춘 5·16민족회 이사장의 장남이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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