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바다를 환희의 물결로/최호중(시론)
김일성 생존시 평양을 방문하고 나온 제삼세계 국빈들은 대체로 둘로 나누어 지는 소감을 밝혔었다.상상조차 하지 못했던,거의 광적이라고 할만한 연도환영을 받은 것을 놓고 참으로 놀랍다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인간사회를 어떻게 하면 그지경으로까지 만들수 있는지 소름이 끼친다는 반응을 보이는 다른 쪽이 있었다.
김일성 사망후 평양주민들이 그의 동상앞에서 연출한 통곡의 장면을 놓고도 바깥 세상에서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두 갈래 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어쨌든 그것은 북한이 아니고서는 오늘의 지구촌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민주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장면을 보고 남들과는 또 다른 감정에 사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그것은 민망함과 연민의 정이 교차하는 착잡한 심경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민망함은 같은 민주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오늘의 열린 사회에서 어쩌다가 북녘 우리 동주이 그런 전세대적인 모습을 보이게 돼버렸는가 하는,낯뜨거워지는 심정에서 우러나는 민망함이었다.
연민의 정은 같은 민주이기 때문에 갖게되는 동정심 때문이었다.자의건 타의건간에,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북한에 사는 우리 동족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을 불쌍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아내는 연민의 정이었다.
이제 김일성은 갔다.김일성 왕조가 막을 내린 것이다.우리는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동서냉전이 풀리는 국제조류속에서도 한반도에서만은 냉전 기류가 오히려 거세지는 것을 걱정하면서,김일성이 사라지면 이 땅에도 어떤 변화를 가져올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제 김일성이 간 이 마당에 과연 어떤 전기가 마련될 것인지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많이 다를 수 있다.부자승계로 뒤를 이은 김정일이 선친을 본받아 자신도 나름대로 하나의 왕조를 이루어 앞으로 30년후,또는 20년후,그가 눈을 감았을때 통곡의 바다가 재연되기를 바랄수 있을 법하다.그렇게 된다면 이는 참으로 기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고,북한이 오늘과 같은 곤경에 빠진 것은 필승불패라고 믿었던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때문임을 깨닫고 과감하게 개혁과 개방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다분히 희망적인 이 양상이 벌어진다면 이는 우리에게 밝은 앞날을 약속하는 정말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한편으로 김정일이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지금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대내외 여건과 그의 자질로 보아 물려받은 권좌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유력하다.이 경우 발생하게 될 필연적인 혼란이 매우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변수는 많다.그러나 워낙 내부 사정이 밖에 알려지지 않아 북한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러쿵 저러쿵 미리 떠들어대는 것은 마땅치 않다.좀더 침착하고 의연하게 북한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에 차분하게 대비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여겨질 뿐이다.
이제 우리는 싫든 좋든,지난 20년에 걸쳐 터를 닦아온 덕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전권을 장악한 김정일을 상대하지 않을수 없게 됐다.이는 전대미문인 부자 세습 공산체제를 합당한 것으로인정해서도 아니고,김정일이 고와서도 아니다.현실을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이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우리 대응은 다를수 밖에 없다.굳이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전망을 할것이 없이 희망적인 기대를 해본다면,핵개발을 포기하고 적화통일의 꿈을 버리고,그리고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세가지가 우선 머리에 떠오른다.그러면 우리로서도 화해와 협력의 따뜻한 손길을 뻗칠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 않고 핵개발을 서두르고,통일 전선전략을 고수하고,이산가족의 재결합을 가로 막는다면 우리의 대응은 단호하고 강경할수 밖에 없다.
이에 못지않게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금 생존을 위협 받고 있는 북한주민의 장래문제이다.김일성은 끝내 해마다 되풀이 해온 「쌀밥에 고깃국,비단옷에 기와집」을 마련해 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버렸다.『우리는 행복해요』라고 주입시켜온 지상낙원도 우리가 알기로는 자유를 잃은 동토 인채로 남아있다.
김정일은 선친으로부터 이어 받은 것이 군림하는 권좌만이 아니라,구호에 그치고만 인민에 대한 약속을 명실공히 실천하는 의무도 그 하나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그가 이 의무를 다할때 그 땅에 다시는 통곡의 바다가 재연되지 않을 것이고 남북을 통틀어 거짓이나 과장이 없는 환희의 물결이 넘쳐 흐르는 날이 찾아 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