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자가 만난사람]30년만에 뮤지컬 ‘고교얄개’ 이승현
인생을 정신없이 살다가 중년의 나이에 딱 어느 하루쯤이다. 20~30년 전의 ‘나’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면? 당신은 과연 무슨 말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하루를 같이 지낼 거나.
무대 구석에 조명이 들어온다.40대 후반의 ‘나두수’가 등장한다.(객석을 향한 독백)참 세월이 빠르죠. 저도 여기까지 오는 데 한 30년은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더니만 틀린 말이 아닌가 봐요. 바람이 차가워지면 사람이 추억에 잠기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옛날 생각나고, 몰려다니던 친구들, 옛날에 가던 빵집, 영화관이 떠오르고, 그리고 첫사랑. 영아, 오영아~
나두수는 유재하의 ‘지난날’을 부른다.‘지난 옛일 모두 기쁨이라 하면서도~’ 이어 학창시절의 자신을 만난다.
젊은 두수: 어? 누구세요?
중년 두수: 나, 나두수다. 30년 후의 바로 너.
젊은 두수: 나라구요? (중년두수를 훑어본다) 야, 너 왜 이렇게 망가졌냐? 관리 좀 하지.
중년 두수: 너도 내 나이 돼 봐. 그게 쉽나. 그건 그렇고 이 자식이 왜 반말이야!
젊은 두수: 씨이, 아저씨가 나래매요. 자신한테 존댓말 쓰는 사람이 봤냐... 구요. 아무튼 그래서 대체 누구신대요?
중년 두수 : 내가 너라니까?
젊은 두수: 아 진짜 쪽 팔려, 아저씨가 나라는 증거를 대보시죠.
세월이 지난 중년의 ‘나’와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의 ‘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나’라는 증거가 쉬이 나올 리 만무하며 소통 또한 썩 잘 될까 걱정이다. 어쨌거나 둘이 지낸 하루가 어떠했을지는 작가적 상상에 맡겨보자.
여기에 등장하는 ‘중년 두수’가 바로 하이틴의 우상으로 한때를 풍미했던 배우 이승현(47)씨.1977년 영화 ‘고교얄개’ 를 비롯,24편의 얄개 시리즈에서 주인공 ‘얄개’를 맡아 1970년대 중·후반의 스크린을 휘어잡았다. 당시 5만 관객만 들어도 흥행성공이었지만 ‘고교얄개’는 무려 25만명이 넘을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얄개는 어느날 팬들의 곁을 홀연히 떠났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이름도 점점 잊혀져 갔다. 몇 번의 국내 컴백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럴 때마다 이상한 소문만 무성했다.
이런 그가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뮤지컬 ‘돌아온 고교얄개’(주원성 연출·내년 1월4일까지)에서 중년의 두수가 되어 추억의 팬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세월속에 쪼그라진 지금과 꿈 많던 학창시절의 ‘얄개’를 만나 회상하는 형식이어서 이 가을에 잔잔한 추억을 선사한다.
그는 다섯살 때 영화에 데뷔,20여년 동안 무려 4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연만 100여편을 맡았다. 또 80여편의 드라마에도 출연했으니 웬만한 30대 후반 이상의 팬들은 왕년의 얄개 모습을 여전히 생생 스토리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에도 포털사이트에 얄개팬클럽 회원만 5000여명에 이른다. 서울 정동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에서 데뷔 40여년 만에 오랜 침묵을 깨고 뮤지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씨를 만났다.
▶뮤지컬 무대에는 처음 서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다. 사실 늘 긴장이 됩니다. 한달 정도 연습을 했는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라요. 미흡한 점이 많지만 노래와 대사 등이 버무려지는 뮤지컬 특유의 맛을 느끼고 있습니다. 웃음을 일궈내고 관객들한테 박수도 많이 받아 기분도 좋습니다. 또 지난날의 나였던 젊은 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찡하고 그래요.
▶어떻게 뮤지컬을 하게 됐습니까.
-제가 올 2월에 ‘잘될거야’라는 음반을 냈습니다. 이때 주위에서 뮤지컬을 한번 해보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그러던 중 ‘진짜진짜 좋아해’를 만든 제작진에서 교복세대를 위한 추억의 우리 뮤지컬을 만들자는 취지로 ‘돌아온 고교얄개’를 준비했지요.
▶팬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객석을 꽉꽉 메워 주시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요. 왕년에 추억의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아줌마 아저씨는 물론 요즘의 젊은 연인들도 많이 오는 것 같아요.
▶하이틴의 우상으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훌쩍 떠난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때 군사정권 시절이었지요. 가요계에는 금지곡이 많이 있었고 영화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열도 심했고, 그때 제가 우상으로 너무 뜨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은연 중 압박이 왔어요. 우상이라는 게 용납이 안 됐습니다. 특히 하이틴의 우상이라고 하니까 말이죠. 당연히 의욕이 꺾일 수밖에요. 그렇게 주춤하던 차에 서울에서 음식업을 하던 어머니의 사업이 실패하고 말았지요. 하루아침에 몰락하자 저는 영어공부나 하겠다며 달랑 3000달러만 갖고 캐나다로 혼자 떠났습니다.26살 때였지요.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그는 랭귀지스쿨을 마치고 영화역사를 공부하려고 토론토대학 1학기 과정을 다녔다. 하지만 돈이 쪼들리게 되자 공부를 포기하고 식당일이며 지렁이잡기 등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다. 사는 곳도 토론토에서 몬트리올과 캐나다 북부의 위니펙 등을 전전했다. 그렇게 7년,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1993년 10월에 귀국했다. 곧바로 어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갔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했다. 그러던 1995년 필리핀 현지 목사의 소개로 유학 온 한국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2년 뒤 귀국한 그는 처가가 있는 대전에 살림을 차렸다. 마땅한 돈벌이가 없어 부인과 함께 만두가게를 열었다. 만두도 직접 만들고 배달도 했다.
1998년 어느날 옛고향인 서울 충무로를 찾았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충무로에서 여관을 하던 어머니 친구한테 놀러 갔다가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에 첫 출연하면서 배우인생이 시작된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다행히 지인을 만나면서 그렇게 원하던 영화 한 편을 찍게 됐다. 전무송, 박준규 등이 출연한 ‘블루스’에서 조폭 중간보스역을 맡았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시 절망을 한 그는 대전에서 공중전화기와 감식초 판매일을 했다. 그러던 2001년 후배와 함께 영화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투자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이 무렵 부인과 이혼하는 아픔까지 겪었다. 술만 마시고 자살하려고 한강까지 갔다. 어린 아들과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 포기하고 돌아왔다. 마음을 다시 고쳐 먹은 그는 지방의 문화행사 등에 쫓아다니며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얄개는 울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KBS의 ‘인간극장’에 등장,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팬클럽과 ‘얄개 이승현 살리기 운동본부’까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해입니다.‘잘될 거야’라는 음반을 내자 방송출연도 이어지고 있고, 영화 출연제의도 들어오고, 공연중인 뮤지컬도 반응이 좋구요.”
내년 봄에는 TV 방송 드라마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만큼 앞으로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으로 방송이든 영화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팬들과 만나겠다.”고 했다. 아울러 ‘고교얄개’ 이상으로 대박을 터뜨릴 영화 한 편을 꼭 만들겠다고 했다.2대독자인 그는 슬하에 초등6년생의 아들을 두었다. 재결합한 부인과 함께 대전에서 산다. 영문학을 전공한 부인은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이승현은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66년 조긍하 감독 ‘육체의 길’ 영화데뷔.
▲68년 동양방송 아역 탤런트 데뷔.
▲77년 ‘고교얄개’ 빅히트, 이후 24편의 얄개시리즈 주인공 출연.
▲80년 경복고 졸업.
▲82년 장안대 졸업.
▲86년 캐나다 출국.7년동안 토론토 몬트리올 위니펙 등에서 지냄.
▲93~97년 필리핀에서 신학공부 및 선교활동.
▲98년 귀국. 영화 ‘블루스’ 조연출연.
▲2008년 2월 음반 ‘잘될 거야’ 출반.
▲08년 11월 뮤지컬 ‘돌아온 고교얄개’ 출연 중.
●주요수상 청룡영화상(1972,73), 대종상특별상(73), 백상예술대상(74,75), 국무총리상(75)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