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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맞수 CEO] 권순엽 하나로텔레콤 사장 직대 vs 박종응 파워콤 사장

    [우리는 맞수 CEO] 권순엽 하나로텔레콤 사장 직대 vs 박종응 파워콤 사장

    ‘380만 대 0’→? 하나로텔레콤과 파워콤의 초고속인터넷 시장 점유율이다.8월31일까지는 이 수치가 맞았다. 초고속인터넷망만 임대하던 파워콤이 지난 9월1일 시장에 입성하면서 ‘0’의 수치는 올라가고 있다. 시장 분위기는 ‘출렁거림’ 그 자체다. ●‘2인자’에서 이슈 인물로 파워콤 박종응(55) 사장은 모회사인 데이콤 정홍식 사장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전면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하나로텔레콤 권순엽(48) 사장 직무대리는 최근 윤창번 사장의 사의로 갑자기 사장 자리를 꿰찼다. 다음달 주총에서 사장 자리를 정식으로 받는다. ●법률가-행정가의 싸움 하나로텔레콤의 권 사장 직대는 법학(서울대 법대)을 전공했고, 파워콤 박 사장은 행정고시(19회)에 합격, 재정경제부에서 잠시 공직에 몸담았다. 두 CEO는 기업인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지 않아 인터넷시장 싸움만큼이나 동적(動的)이지 않다. 두 회사 측근들은 “나서지 않으면서 조용히 내부적으로 조직을 다져가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통신분야의 식견은 남 못지않게 다져온 두 사람이다. 권 사장 직대는 법률 회사에서 통신담당 변호사와 한솔엠닷컴 신규사업부문 부사장을 역임했고, 박 사장은 LG텔레콤과 모회사인 데이콤에서 오래도록 근무해 통신분야는 박학다식하다. 마케팅 영업분야에선 박 사장이 다소 경력이 많다. 나서지 않는 성격과는 달리 공직 이후 첫 직장이던 LG상사와 LG텔레콤, 데이콤에서 영업을 두루 거쳐 일가견을 갖고 있다.‘CEO는 실적으로 말한다.’는 신조가 이를 잘 말해준다. 권 사장 직대는 하나로텔레콤 입사 이전에 국제통상과 투자분야 변호사를 역임했고, 하나로텔레콤의 경영총괄부사장 겸 두루넷 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장점은 대학 때부터 다니던 교회를 지금까지 다닐 정도로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과감하게 위임하는 스타일이다. 포화상태인 현재의 시장 여건상 공세적인 ‘신참(박종응)’보다는 방어적인 ‘고참(권순엽)’이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다. ●물러섬 없는 한판 싸움 권 사장 직대는 사원에게 보낸 메일에서 “클린 마케팅과 공정 경쟁을 기반으로 고객 리텐션을 강화하는 등 수익성 향상에 역량을 집중하자.”고 주문했다. 박 사장도 최근 “초고속인터넷 싸움터에서 (직원들에게) 무리수를 두지 말 것”을 제안, 두 CEO는 공정 경쟁으로 박자를 맞추는 듯했다. 하지만 이같은 다짐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합리적이고 신의를 쉽게 저버리지 않지만 ‘패하면’ 향후 인수합병(M&A)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돼 직원들에게 전의를 북돋우고 있다. 권 사장 직대의 언급과는 달리 하나로텔레콤은 최근 “후발인 파워콤이 가격으로 치고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박 사장도 지난달 30일 기자 간담회에서 “광(光)랜 서비스로 본격 질주하겠다. 내년 말까지 최고 100Mbps급으로 100만명을 확보, 점유율 7.5%를 달성하겠다.”며 선전 포고성 발언을 했다. 투자 및 마케팅에서도 불꽃튀는 접전이 예상된다. 파워콤의 박 사장이 올해 1730억원, 내년 1250억원 등 향후 5년 동안 총 5000억원 이상을 시설 투자에 투입한다고 밝히자, 하나로텔레콤은 연말까지 500개 단지를 추가해 총 3500개 단지로 늘려 광랜 서비스 커버리지를 약 40%까지 확대할 방침이라고 맞받아쳤다. 마케팅에서도 박 사장이 “고객에게 속도를 확인시킨 뒤 가입 여부를 물을 것”이라고 밝히자, 권 사장 직대는 “망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어 속도 차이는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고, 자회사인 하나로드림과 함께 자사 서비스인 ‘하나포스’ 고객에게 ‘24가지 특별한 혜택’을 확대 제공키로 했다.”고 정면 응수했다. 두 ‘작은 거인’은 현재 영업현장을 찾아 초반 기세몰이에 나서고 있다. 시장도 이용료 면제와 위약금 대납 시비에 이어 파워콤의 경쟁업체 ‘직원 빼내가기’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 박종응 파워콤 사장 ▲1950년생 ▲경남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재경부 경제협력국 사무관(행시 18회) ▲LG상사 부장(이사대우) ▲LG구조본 프로젝트담당 상무 ▲LG텔레콤 업무홍보실담당 전무 ▲데이콤 영업사업본부 부사장 ■ 권순엽 하나로 사장 직대 ▲1957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 로펌 ‘폴 와이즈’ 변호사 ▲한솔엠닷컴 신규사업 부사장 ▲한솔아이글로브 사장 ▲하나로텔레콤 수석 부사장 ▲하나로텔레콤 경영총괄부사장 겸 두루넷 사장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2년만에 컴백한 류시원

    2년만에 컴백한 류시원

    류·시·원. 부드러운 미소의 그가 돌아왔다. 그것도 멋지고 능력있는 ‘외교관’으로 말이다. 오는 22일 첫 방영되는 KBS2 미니시리즈 ‘웨딩’(오수연 극본·정해룡 연출)의 주인공 ‘한승우’역을 맡았다. 한승우는 ‘잘 나가는’ 외교부장관 비서. 일본 한류(韓流) 열풍의 주역인 그가 안방 드라마장에 복귀하는 것은 미니시리즈 ‘그녀는 짱’ 이후 거의 2년만이다. 서울 강남의 한 촬영장을 찾았을 때 그의 상대역 ‘세나’를 맡은 장나라는 촬영 중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류시원은 다소 촌스러운 머리에 격식을 너무(?) 갖춘 줄무늬 양복 차림이었다. 다소 소심한 ‘범생이’같은 느낌. 주인공들의 데이트 장면 등 촬영장에서도 짧은 치마에 한껏 멋을 부린 장나라에 비해 항상 단정한 양복을 입어야 해 연신 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세나는 사랑스러운 여자” “승우는 중심이 있고 상대방을 잘 배려하는 성격입니다. 기존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더욱 성숙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하는 연기라 설레기도 하고요.”맞선을 통해 만난 철없는 부잣집 딸 세나와 좌충우돌 사랑하는 과정을 그린다. 결국 결혼에 골인하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하지만 투정만 부리는 세나를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연기를 한 지 벌써 11년째다. 그런데도 소속사 없이 혼자 뛴다. 드라마 선택의 첫째 기준은 당연 좋은 대본이다.“영화 얘기가 오가던 중 ‘웨딩’이 들어왔어요.1회분만 읽어도 상대역인 세나를 사랑할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어요. 승우라는 역할은 튀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힘있고 단단해 드라마의 중심을 잡는 것 같아요. 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멋진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가을동화’‘겨울연가’의 오수연 작가가 그려낸 로맨스가 마음에 쏙든 모양이다. 게다가 처음 드라마를 함께 찍는 장나라와 첫날부터 말을 놓고 편하게 촬영하고 있다고 한껏 자랑한다. ●“그래도 중매는 어색해…” ‘중매로 만나 멋지게 결혼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게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다. 특히 성격과 배경 그 어느하나 비슷한 것이 없는 커플이라면?“글쎄요….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처음엔 잘 어울리지만 어려운 점도 있어요. 이번 주인공들은 여건이 너무 다르지만 만나서 결혼하고 화합해 하나가 되면서 사랑이 더 커지고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힘든 사랑을 이루는 만큼 의미도 크지요.” 그러나 중매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개인적으로 중매결혼보다 연애결혼이 좋아요. 약속된 만남은 제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선보는 거 이해는 가지만 저는 중매결혼은 안 할겁니다. 이번 드라마에서 승우와 세나가 초반에 결혼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맞선을 봐서 일찍 결혼하지만 애인같은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려고요.(웃음)” ●“한국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싶다.” 일본에서 앨범을 3장이나 내고 콘서트에 드라마, 요리책·DVD 발매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정작 그의 일본활동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소위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철저히 일본 방식과 스타일에 따라 일했습니다. 현지 소속사와 계약하고,3장 앨범 모두 일본어로 발매했어요. 한국에서의 대규모 팬미팅 등 수익성에 치중하기보다는 신인같은 마음으로 활동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던 같아요.”일본 활동을 접고 한국 드라마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한류로 인기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 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더욱 중요해요. 한국 팬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욱 행복하거든요. 성숙된 모습의 ‘연기자 류시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내년에는 좋은 영화도 하려고요.”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4) 이주노동자도 다같은 노동자(독일)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4) 이주노동자도 다같은 노동자(독일)

    독일은 이주노동자의 선진국으로 꼽힌다. 노동시장의 문을 조금씩 열어, 지금은 자국민과 같은 수준의 대우와 적극적인 사회통합 정책을 통해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새 이민법을 낳기까지 외국에서 노동인력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1970년대 이후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이다. 지금은 이주노동자들이 참정권을 갖고 국회 진출도 모색할 정도로 그들의 인권은 앞서 가고 있다. |베를린·본 구혜영특파원| 독일 연방고용사무소가 조사한 지난해 9월30일 현재 전체 취업인구는 2690여만명이다. 이 가운데 이주노동자는 8%에 이르는 180여만명을 차지한다. 이 정도면 단순한 독일 산업현장의 모자라는 곳을 메우는 ‘노동인력’이 아니라 독일 곳곳에 스며든 ‘사회구성원’이라고 해도 족하다. ●‘다름이 아름다운’ 차별 없는 사회 독일 노동청 직업알선중앙본부의 사라 프리쉬(25·여)는 “한때 이주노동자 취업인구가 10%를 넘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취업인구가 줄어들긴 했어도 내·외국인 차별로 (이들의 비율이) 준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일자리가 줄어들자 이주노동자를 자국민에 앞서 해고했다기보다, 이주노동자 숫자의 감소 등으로 비율이 낮아졌을 뿐이라는 뜻이다. 독일은 1960∼70년대 초반까지 상당수의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였다. 독일 경제노동부 외국인노동자 고용과의 총책임자인 루트빈 마찬트(56) 참사관은 “당시 송출국과 협력을 맺으면서 이주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동일한 수준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사용자들 입장에서 값싼 임금의 이주노동자를 골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자국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잠식하지 않게 하는 장치였다. 30년 전부터 자동차 회사 ‘오펠’에 근무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 구이로 카수(55·뤼셀하임 거주)는 “독일은 노동·체류허가를 받으면 내국인과 동등한 노동권을 가진다. 독일이 필요한 외국인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이라는 이유로 저임금 분야에 종사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스스로 노력하면 능력에 따라 임금을 받고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본에 있는 연방고용사무소 직원인 우도 마리네트(46)는 “사회복지사가 고용돼 직업재활교육을 시행하고 실업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실업수당을 지급하면서 직업상담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발달과정을 거친 독일의 입장에서는 ‘생산성’을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주노동자를 들여오는 과정에서부터 저임금 노동인구를 받아들이며 체불임금과 노동력 착취로 비난받고 있는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이었다. ●함께 나눈 경험을 중시하는 ‘통합’정책 독일도 한때는 이주노동자를 배격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독일 튀빙겐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승협(성공회대 연구교수) 박사는 “독일은 2차대전 이후 전후복구를 위해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일 때 ‘노동력’만 받아들였지 ‘인력’으로서의 고민은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손님 노동자’라는 말이 이를 방증한다.1969년 독일에 건너온 터키 출신의 이주노동자 이브라힘 에센(61·프랑크푸르트 거주)은 “1974년 외국인력 도입 중단을 선언한 이후 이주민 귀환을 장려하는 등 독일정부가 나서 내국인과 이주노동자의 융화를 차단하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귀환하면 1년치 월급인 2만 4000마르크를 퇴직기금에서 지급하기도 했다고 그는 전했다. 지난달 9일은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터키인들의 보금자리인 ‘터키 민중의 집’ 40주년 건립 기념일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외국인 736만여명 가운데 터키인은 전체 15%에 이르는 200여만명으로 가장 많다. 이곳에서 태어난 2,3세대들에게 터키 민속춤과 전통악기 연주법, 독일어도 가르치며 스스로 소외되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민중의 집’ 회원인 뮤닥 알박(38)은 “한달 집세 3600유로(한화 440만원) 가운데 1600유로를 프랑크푸르트 시당국에서 지급하고 사회사업가들을 배치해 컴퓨터와 독일어 강습 등을 지원할 뿐 아니라 탁아소를 지어 직원들도 보내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독일 사회의 대표적인 이주민 융화를 위해 노력한 계층은 이주노동자는 물론 노조운동가, 학생계층이었다.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노총연맹 빌리하예크(56) 사회교육위원은 “독일 사회에 1970년대부터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옹호를 위한 투쟁이 본격화됐다.”면서 “우리도 독일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자의식이 강해지면서 이들의 통합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주노동자 인권확보’라는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정치의 장으로 등장하는 결실을 보게 됐다. 독일 철강산별노조 대표로 오는 9월 총선에 출마하는 터키 출신의 하칸 도가나이(43)는 “이데올로기나 정책보다는 함께 사는 연습이 통합을 이끄는 힘”이라면서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독일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 국적을 취득하면 참정권을 주고 10명의 직원을 채용하면 고용주로 인정하는 나라. 국가가 나서서 이주노동자들에게 독일 언어·문화를 가르치고 전문인력에게 문호를 연 나라.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가 아닌 어깨를 맞댄 ‘이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독일 이주노동자의 현주소였다. koohy@seoul.co.kr ■ “시민 34%가 외국인… 사회 세력화 지원” |프랑크푸르트 구혜영특파원| 프랑크푸르트 시청 산하의 ‘다문화사회 연구소’는 독일 내 이주민들을 자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 지원하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유명하다. 1989년 문을 연 이 연구소에는 19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인종으로 다양한 업종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팀 자체가 프랑크푸르트 사회의 축소판인 셈이다. 지난 2001년부터 총책임을 맡고 있는 프라우 나겔(58·여) 소장은 “개소할 때 캐나다식 모델을 참고했다. 연간 10만여명의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캐나다의 사회융합정책을 연구하면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프랑크푸르트시민 가운데 외국인 비율은 약 27%. 이중국적 소유자 1만 4000여명(약 7%)까지 합하면 외국인은 약 34%에 이른다. 나겔 소장은 “이 정도면 독일 자국민들은 이미 다수파의 모습을 잃어간다고 할 수 있다.”며 다민족사회를 피부로 느끼고 있음을 강조했다. 연구소에서는 이웃과의 갈등과 체류조건·직업문제, 거주와 노동·문화적 갈등 해소 등 외국인들의 생활정책 전반을 다루고 있다. 한해 예산은 약 300만유로(37억 6000만원). 전액 시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2세들의 교육권과 근로 동등권 문제가 특히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2세 교육권 문제에 대해서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독일의 교육과정과 언어학습, 실태 등 정보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2세 문제의 경우 ‘근로의 동등권’과도 연결된다. 주정부 차원에서 적극 받아들인 이주노동자는 주로 비전문직, 비정규 노동계층이다. 이 때문에 청소년 시절부터 직업교육을 강화하지 않으면 요식업계와 단순노동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연구소의 판단이다. 연구소의 최종 목표는 사회 구성원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독일사회와 융화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나겔 소장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주며 점점 이 사회에 가시화된 세력으로 등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koohy@seoul.co.kr ■ [기고] 외국인 불법체류 10만 개선책 적극 모색할 때 지구상에는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일하며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가 약 5000만∼60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중 한국에는 35만 5000여명이 살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제조업과 건설업, 광업에서 일손이 크게 모자라 눈감아주며 시작된 외국인 취업은 1991년에 이르러 산업연수생제도 도입으로 귀결되면서 많은 문제를 재생산했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산업연수생제도를 수정해 고용허가제를 도입한 지 1년. 불법체류 10만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속 강화와 자진 귀국 시 범칙금 면제 및 재입국 유예기간을 단축해주는 ‘채찍과 당근’ 정책은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은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가, 아니면 우호적인가. 어쩔 수 없어 외국 인력을 받아들였지만 얼마간 일하다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나라, 값이 싼 노동력을 선택해 3D직종의 인력난을 해결했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 부여에 인색한 나라,‘때리지 마세요, 월급주세요.’라는 말을 필수적으로 익혀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 외국 인력의 사회통합에 국가 대신 종교·시민단체가 나서서 지원하는 나라. 이 정도면 한국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구는 다인종·다문화 공동체로 재편되고 있고, 고용허가제와 국제결혼, 고령화, 저출산 등 달라지는 사회는 단일민족의 순기능만을 웅변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상품과 자본만이 아니라 사람도 함께 각국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로 흘러가고 있다. 이제는 장기체류 외국인노동자를 한국사회에 어떻게 편입시킬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할 때가 된 건 아닌가. 이미 한국의 경제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정강자 인권위 상임위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두산그룹 (1)-박용곤 명예회장 형제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두산그룹 (1)-박용곤 명예회장 형제

    박용만(50) 두산그룹 부회장은 지난 2월 선친인 박두병 초대 회장의 가르침을 예로 들며 “두산에는 파벌이 딱 하나 있는 데 그게 두산파다. 우리 형제도 마찬가지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적이 있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를 계기로 가진 만남이었지만 박 부회장의 ‘집안 자랑’은 가풍과 장자를 중심으로 한 단결력, 비즈니스 패밀리 등으로 이어지며 그는 “가족간의 인화가 두산이 109년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재계에서도 두산가(家)를 우애깊은 형제지간으로 꼽는다.‘돈 앞에 추한 꼴’을 적잖이 보인 재계 가문이 많았던 탓인지 ‘공동 소유, 공동 경영’이라는 두산가만의 독특한 가풍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박 부회장이 그렇게 자랑했던 화목한 집안이 요즘은 쪼개져 살벌하다. 차남 박용오 회장의 퇴진과 3남 박용성 회장의 추대로 시작된 ‘형제의 난’은 ‘동생들의 쿠데타’와 ‘두산산업개발의 경영권 탈취 미수 사건’으로 각각 주장되며, 양측의 진실공방 싸움이 한창이다. 수년간 쌓여온 형제간 갈등이 이제야 곪아 터졌다는 것이 두산가 안팎의 지적이다. 피붙이가 등을 돌리면 더 무섭다고 했던가.“비리를 저지른 동생과 조카를 잡아가라.”와 “가문에서 빼버리겠다.”로 상징되는 이번 분쟁은 결국 검찰 수사 결과로 귀결될 전망이다. 이 때문에 109년 전통의 두산그룹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휩싸였다. 자칫 오너가의 집단 사법처리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행보에 큰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두산으로서는 호사다마가 아닐 수 없다. 박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우연히 그룹내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마주쳤지만, 급히 자리를 떴다.6개월 전 당당했던 그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어제의 두산과 오늘의 두산이 다르다는 점을 새삼 보여줬다. ●‘박승직상점’이 그룹의 모태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인 두산이 1일 창립 109돌을 맞았다. 보름 전만 해도 ‘잔치’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경영권 분쟁으로 쏙 들어갔다. 두산 창업주 고 박승직씨는 1896년 서울 종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상점’을 열고, 두산그룹의 기초를 닦았다. 등짐 장사와 면포상, 보부상 등 밑바닥 생활 15년 만에 마련한 가게였다. 이후 박 창업주는 포목상으로 대성공,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이라 불렸다.1906년에는 중추원 의관과 정3품에 승서되는 등 이미 거상으로서 황실의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박 창업주는 1905년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을,1907년에는 국내 최초의 무역회사인 공익사 설립에 참여했다.33년에는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와 함께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 두산의 모기업인 동양맥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소화기린맥주는 일본 기린맥주의 국내 생산공장이다. 박 창업주는 해방 후 새롭게 출발하는 수송사업을 위해 장남인 두병의 이름 첫 자인 말두(斗)자와 묏산(山)자를 붙여 ‘두산’이란 새 상호를 짓는다.‘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올려 재화가 산같이 커져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박가분과 정정숙 여사 여느 재벌가와 마찬가지로 두산가의 3,4세 며느리들도 바깥 활동이 잦지 않다. 내조와 자녀교육이 최우선 순위다. 이는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의 며느리 고르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남인 용곤 명예회장의 배필감을 찾던 박 초대 회장의 안테나에 맏딸 용언씨의 친구인 이응숙(작고)씨가 잡혔다. 다소곳하고 참해 마음이 끌렸다. 박 초대 회장은 지프를 타고 한동안 이씨를 추적하며 인물과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낙점했다고 한다. 가족간 인화에 며느리가 중요하다는 박 초대 회장의 평소 지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초대 회장의 모친인 정정숙 여사와 그의 아내 명계춘(92) 여사는 내조뿐 아니라 남편들 못지 않은 사업수완을 발휘, 여장부로 통했다. 국내 화장품의 효시인 ‘박가분(朴家粉)’은 사실상 정 여사의 작품이다. 정 여사는 1915년 부업 삼아 분기술자 3명을 고용, 재래식 화장분을 근대적으로 포장 판매했다. 처음엔 면포상품을 구입한 고객에게 주던 미끼 상품이었다가 여성 반응이 의외로 좋아 박승직상점의 어엿한 거래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정 여사는 국내 최초로 화장품 신문 광고를 하기도 했다. 박가분 광고 내용은 이렇다 “죽은 깨와 여드름이 없어지며, 얼굴에 잔티가 없이 피부가 윤택하고, 고아지게 하는 박가분”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의 부인인 명계춘 여사도 중고 미제 승용차와 일제 트럭 등을 구입해 한때 운수업을 벌였다.‘남자는 보다 큰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대신 떠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훗날 두산상회의 토대가 됐다. ●귀하게 얻은 늦둥이 박 창업주는 1910년 딸만 여섯을 두다가 첫 아들을 얻었다. 박두병 초대 두산 회장이다. 박 창업주의 나이 46세로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후에 우병과 기병, 규병 등이 태어났지만 우병을 빼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래서 그런지 박 창업주의 자식 교육은 별났다고 한다. 두산가에서 인화를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박 창업주가 장남에게 들려준 ‘지붕에 소 올리기’다. 가장의 터무니없는 지시도 가족이 믿고 따라야 집안이 화목해진다는 내용이다. 또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근자성공’은 4대째 내려오는 두산가의 좌우명이다. 박 초대 회장은 경성중을 거쳐 1932년 경성고상을 졸업한 뒤,1931년 대지주인 명태순의 딸 계춘씨와 결혼했다. 이어 조선은행에서 4년간 근무하다가 박승직상점에서 본격적인 2세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는 해방 후 동양맥주를 인수해 두산그룹의 토대를 쌓았다.60년대 들어 한양식품(코카콜라·환타 제조)과 윤한공업사(현 두산메카텍), 동산토건(현 두산산업개발) 등을 설립했으며, 한국병유리(현 두산테크팩)를 인수하며 그룹의 외형을 크게 확대했다. ●두산 1번은 용곤 명예회장 두산가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장유유서 원칙이 철저히 지켜진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장자인 박용곤(73) 명예회장은 여전히 ‘두산의 1번’이다. 전화번호도 ‘1∼2번’을 쓴다. 이어 용오(68) 전 회장(3∼4번), 용성(65) 회장(5∼6번), 용만(50) 부회장(7∼8번) 순이다. 그래서 이번 ‘형제의 난’은 다른 그룹의 경영권 분쟁보다 상처가 유난히 깊어 보인다.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우애가 좋던 형제가 어쩌다가….”라며 허탈해 했다. 두산가는 사실 이번 사태가 있기 전까지 재계에서 형제간 최고의 화음을 자랑했다. 이는 박 초대 회장의 철저한 자식 교육에서 비롯됐다. 박 초대 회장은 형제간 말썽이 나면 잘못이 있든 없든 무조건 장자를 혼냈다고 한다. 동생들을 잘못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자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자연스럽게 뭉칠 수 있도록 했다. 인화와 관련된 박 초대 회장의 이야기는 지금도 입에 오른다.“가정이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 그러자면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고, 지아비는 화하고, 지어미는 순해야 한다. 이럴 때 한 푼의 재산이 없어도 그 가정은 언제나 평화스럽다.” 박 부회장의 설명이다.“부친은 인화가 깨질 수 있다는 이유로 직원들이 설날 세배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풍양속 차원에서 권장할 일이지만, 개인 간에 친소관계가 만들어지면 조직이 공평해질 수 없다고 본 거죠.” 두산가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가족 모임을 갖는다. 명계춘 여사를 중심으로 3대(3∼5세)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며 친목과 화합을 다진다. ●“남의 눈치밥 먹어봐야….” 두산가는 기업의 오랜 역사 만큼이나 자녀 교육도 독특한 전통이 있다. 박 초대 회장은 자식들에게 “도둑이 와서 재물을 훔쳐갈 수는 있지만,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은 절대 훔쳐갈 수 없다.”며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부회장이 들려준 부친의 자식 교육은 이렇다.“우선 남의 눈칫밥을 먹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은행 근무를 적극 권했습니다. 또 최강대국인 미국을 알아야 한다며 미국 유학을 꼭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용곤 명예회장이 일본을 강조해 일본어 공부가 추가로 들어갔죠.” 이같은 방침에 따라 용곤 회장은 한국은행, 용성 회장은 한국투자금융, 용만 부회장은 외환은행에서 각각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6형제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다. 이들은 미국 유학생활 동안 용돈이 넉넉지 않아 자취 생활을 하면서 직접 음식도 해먹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두산가는 경영수업도 다른 재벌가와 차이가 있다. 밑바닥부터 출발해 모든 계열사를 거치게 한다. 또 30대 초반에 계열사에 배치해 평균 1∼2년에 한번씩 승진시킨다. 4세도 예외없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4세 중 장자인 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43)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은 일본 기린맥주에서, 차남인 박지원(40) 두산중공업 부사장은 미국 매켄에릭슨에서 근무했다. 용오 전 회장의 장남인 박경원(41) ㈜전신전자 대표는 미국 코닥에서, 용성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37) 두산인프라코어 상무는 대한항공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용현(62) 서울대 의대 교수의 장남인 박태원(36) ㈜네오플럭스 상무는 효성에서 시작했다. ●“정략 결혼은 피하라”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두산가의 혼맥은 의외로 담백하다. 정·관계 집안과 직접적인 사돈 관계가 없다. 대부분 평범한 집안과 통혼했으며, 간혹 재계 집안이 눈에 띈다.“자녀 혼사에 정략 관계를 두지 마라.”는 박 창업주의 당부를 후손들이 잘 지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 6월 박 부회장의 장남 서원(26)씨와 구자철 한성 회장의 딸 원희(26)씨 결혼은 두산가에서 눈길을 끌 만한 혼사였다. 구 회장은 범 LG가로 구태회 LS 명예회장의 4남이자,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막내동생이다. 이 때문에 박 부회장은 집안의 첫 경사였지만 ‘재벌가 정략 결혼’이라는 시선 탓에 다소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박 부회장과 구 회장은 경기고 동기생으로 양가가 예전부터 서로 교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서원씨와 원희씨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미국에서 공부하다 관계가 급진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박두병 초대 회장은 모두 6남1녀를 뒀다. 장녀 용언(72)씨는 당시 실력파 검사였던 김세권(74)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변호사는 대검찰청 차장과 서울고검 검사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KCL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차남 용오 회장은 1962년 미국에서 만난 최금숙(작고)씨와 결혼했으며,3남 용성 회장은 66년 김선필 전 삼성물산 사장의 딸인 영희(62)씨와 혼례를 올렸다.4남인 박용현 서울의대 교수는 68년 이화여대 음대를 나온 엄명자(작고)씨와 인연을 맺었다. 5남 용만 부회장은 바깥에 잘 알려진 집안으로 장가갔다. 당시 ‘증권업계 대부’로 통했던 강성진 전 증권협회 회장이 그의 장인이다. 박 부회장은 79년 강 전 회장의 장녀인 신애(50)씨와 혼례를 치렀다. 그는 강 전 회장의 차남 흥구씨와 동기생으로 집에 놀러갔다가 신애씨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6남 박용욱(45) 이생그룹 회장은 이건 전 대호건설 회장의 딸인 상의(45)씨와 인연을 맺었다. golders@seoul.co.kr ■ 박두병 초대회장등 3명 상의 회장 역임 두산그룹과 대한상의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두산이 재계에서 최고(最古)의 기업이라면 상의도 경제5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체(1884년 한성상업회의소 설립)다. 두산그룹 회장은 묘하게도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954년 공식 출범한 이후 배출한 회장은 12명. 이 가운데 두산그룹 회장 출신은 무려 3명이나 된다. 고 박두병 초대 두산그룹 회장이 1967∼73년 상의의 회장을 맡았다. 전문경영인 가운데 재계 최초로 그룹 회장직에 오른 정수창 전 두산 회장도 1980년부터 88년까지 상의 수장을 역임했다. 박용성 현 두산 회장도 2000년 이후 상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상의의 반백년 역사 가운데 총 20년을 두산측에서 집권한 셈이다. 특히 대(代)를 이어 경제단체의 수장을 맡은 곳은 두산 박씨가(家)가 재계에서 유일하다. 그래서 4세에서도 상의 회장이 나올지 주목된다.30년간 상의에서 근무한 전 임원은 박두병-용성 부자에 대해 “성격 급하고, 타성에 젖은 일들을 뒤집어 버리는 게 꼭 붕어빵”이라고 했다. 사실 두산과 상의의 인연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그룹의 창업주인 고 박승직씨가 1906년부터 5년간 상의의 전신인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무려 3대가 상의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이다. 박용성 현 회장은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며 역대 회장 가운데 상의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박 회장이 상의 회장으로 출근한 첫 날 기자들에게 던진 첫 말이 이렇다고 한다.“예산 규모나 회원사 수, 단체의 역사로 보면 상의가 국내 경제5단체 중 맨 앞인데 왜 항상 전경련을 맨 앞에 세우는 것이냐. 앞으로 경제단체를 소개할 때는 상의를 맨 앞에 써라. 가나다 순으로 해도 상의가 전경련보다 앞이 아니냐, 또 우리는 법에 의한 단체고 나머지는 임의 단체로 사단법인으로 해서 승인 받은 데가 아니냐.”고. 그러나 형인 박용오 전 회장이 제기한 비자금 조성 및 분식회계 의혹으로 박 회장의 향후 행보가 그다지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golders@seoul.co.kr ■ 3·4세 MBA출신 많아… 며느리는 ‘이화의 딸’ ‘가방 끈’이 긴 두산가문에서 MBA(경영학 석사) 학위는 당연히 따야 할 자격증처럼 보인다. 없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다. 오너 집안인 데다 미국 유학이 일종의 통과의례인 만큼 3세 ‘용’자 돌림과 4세 ‘원’자 돌림 대부분은 경영학을 전공했다.3세 가운데 용오-용성-용현-용만 4형제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다. 다만 차남 박용오 전 회장은 경기고-뉴욕대를 나왔다. 3세 가운데 MBA 학위를 딴 사람은 3남인 박용성 두산 회장과 5남 박용만 그룹 부회장이다. 박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박 부회장은 보스턴대에서 MBA 학위를 땄다. 4세로 넘어가면 MBA는 그야말로 흔하디 흔하다.‘원’자 돌림 15명 가운데 박용곤 회장의 장녀인 박혜원 ㈜두산 잡지BU 상무를 뺀 9명이 MBA 학위를 갖고 있다. 또 박 부회장의 장남 박서원씨 등 학업중인 4세가 5명이나 돼 앞으로 MBA 학위 소지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집안에 MBA 출신이 많다 보니 동문들도 적지 않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과 숙부인 박용만 부회장은 보스턴대 MBA 출신이다. 또 박 회장과 박 명예회장의 차남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박용오 전 회장의 차남 박중원 전 두산산업개발 상무, 박 회장의 장남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차남 박석원 두산중공업 차장, 박용현 서울대 의대 교수의 장남 박태원 네오플럭스 상무 등 6명은 모두 뉴욕대 MBA 동문들이다. 이밖에 박 교수의 차남인 박형원 ㈜두산 식품BG 차장은 조지워싱턴대 MBA 출신이며, 박인원 ㈜두산 전자BG 과장은 하버드대 MBA 학위를 땄다. 반면 며느리들은 ‘이화의 딸’들이 많다. 서미경(박경원 전신전자 대표 부인·고대 신문방송학과)씨와 이상의(박용욱 이생 회장 부인·한양대 기악과)씨를 빼면 대부분 이대 동문들이다. 맏며느리인 고 이응숙씨를 비롯해 김영희(셋째 며느리), 고 엄명자(넷째 며느리), 김소영(박정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 부인), 서지원(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부인), 정윤주(박중원 전 두산산업개발 상무 부인)씨 등 두산가의 3,4세 며느리들은 이대 선후배 관계로 맺어져 있다. 박지원 부사장과 부인은 공교롭게 이름이 같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儒林(39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儒林(39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이렇듯 맹자는 고향인 추나라에서부터 이웃 나라에서까지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올 만큼 이미 학문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공자처럼 사(士)란 벼슬에 종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맹자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여러 나라를 주유할 것을 결심한다. 일찍이 제자 공손추(公孫丑)와 대화를 나누다가 ‘선생님은 어느 쪽입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벼슬해야 될 때는 벼슬하고, 그만두어야할 때는 그만두며, 오래 머물러야 될 때는 오래 머물고, 빨리 떠나야 될 때는 빨리 떠나는 것이 공자이시다. 모두 옛 성인이시오니 나는 아직 그런 것을 행할 수는 없지만 원하는 것은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공자를 배우는 것(願則學孔子)’을 자신의 천업으로 삼았던 맹자였으므로 고향에서 어느 정도 학문이 무르익자 천하를 유세하면서 공자처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보일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13년간의 주유열국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인 기원전 497년. 그러나 맹자가 천하주유를 시작한 것은 시기가 불분명하다. 다만 맹자가 만났었던 수많은 왕들의 재위연도를 미루어 추정하여 볼 때 맹자가 고향을 떠나는 것은 대충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여겨진다. 또한 맹자가 돌아다닌 열국의 순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제나라에 간 것이 먼저인지 양나라에 간 것이 먼저인지 하는 문제와 제나라에 간 것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 하는 것 역시 일치되는 견해가 없다. 다만 맹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던 시절에 이미 상당한 사회적 명망과 지위를 얻고 있었고,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맹자가 공자보다 열국으로부터 더 환영을 받았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제자 팽경(彭更)은 이 무렵 맹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스승이 길을 떠날 때면 뒤쪽에는 언제나 수십 대의 마차가 뒤따랐으며, 수백 명의 수행원이 줄을 이어 참으로 장관이었다.” 맹자가 처음으로 찾아간 나라는 제나라로 추정된다. 맹자가 제나라에 간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위왕(威王) 때였고, 두 번째는 선왕(宣王) 때였다. 공자 역시 35세 되던 해 제나라로 첫 번째 출국을 단행하였는데, 그것은 그 무렵 제나라가 재상 안영이 다스리던 최고의 강국이자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던 문화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는 성 안의 가구 수만 7만으로 길마다 수레의 바퀴가 서로 맞부딪치고, 행인의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라 해서 ‘곡격견마(擊肩摩)’로 불리던 화려한 도시였던 것이다. 그것은 1세기가 지난 맹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선왕은 선비들을 좋아하여 수도 임치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세워 천하에 이름난 선비들을 널리 초빙하여 거처를 마련해 두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맹자가 제나라를 주유열국의 첫 번째 나라로 선택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으나 이루하(離婁下)편에 나오는 맹자와 광장(匡章)과의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맹자가 제나라를 첫 번째로 방문한 것은 대충 38세 이전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제나라가 맹자의 첫 번째 출국지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 [스포츠 포커스] 4강 티켓 ‘남은 2장’ 어디로

    ‘PO 티켓을 잡아라.’ 짧지만 꿀맛 같은 올스타전 휴식기를 보낸 프로야구가 19일 후반기에 돌입하면서 ‘가을 축제’의 초대장을 어느 팀이 거머쥘지 팬들의 궁금증을 더한다. 후반기 총력전을 선언한 각 구단이 자체 분석한 4강 판도를 종합해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양강체제는 계속될까 전반기 내내 철옹성 같은 ‘양강체제’를 구축하다가 막판에 삐긋거렸던 삼성과 두산의 포스트시즌 진출 전망은 여전히 가장 밝다. 9승1무14패로 ‘잔인한 6월’을 보낸 삼성은 7월 들어 반타작(4승1무4패)에 성공, 한숨을 돌렸다.4강은 99% 확실한 가운데 한국시리즈 직행 여부가 관심거리. 선발에 새로 합류한 교체용병 팀 하리칼라(혹은 임동규)와 권오준의 활약 여부,2할6푼대까지 떨어진 팀타선의 부활이 변수다. 1위 점령을 눈앞에 두고,7월에 1승7패로 최악의 부진에 빠졌던 두산엔 올스타브레이크가 가뭄 끝에 단비였다. 부상으로 한 달 넘게 결장한 ‘주포’ 김동주-안경현의 복귀와 기아에서 영입한 선발 다니엘 리오스의 부활이 2위 수성의 열쇠다. ●4위 다툼은 점입가경 3위 한화와 4위 SK는 불과 1.5경기차. 게다가 7위 현대도 SK에 불과 4경기 뒤져 4강 싸움은 여전히 혼미하다. 다만 6·7월 상승세를 탄 한화와 SK,LG가 상대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하위권을 멤돌다 9연승을 달리며 일약 3위까지 치솟은 한화는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끌어내는 카리스마가 무섭다.”는 평가를 받는 김인식 감독의 용병술이 최대 장점. 다만 선발 송진우-정민철-문동환과 마무리 지연규가 모두 삼십줄을 훌쩍 넘어 체력과 부상 등이 우려된다.6월 이후 20승12패(승률 .625). 8개구단 중 가장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하는 SK는 6월 초까지 꼴찌를 다투다 막판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6월 이후 성적만 보면 22승3무10패(.687)로 단연 1위. 이진영과 이호준, 박경완이 제 실력을 발휘하면서 지뢰밭 타선을 구축했다. 론 차바치와 엄정욱, 이승호의 복귀가 빨라진다면 탄력을 더할 태세다. LG는 후반기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 주전 절반이 부상으로 신음하던 초반 부진을 딛고 완연한 회복세. 외국인 투수 레스 왈론드와 ‘돌아온 에이스’ 이승호의 어깨로 4강을 넘본다.6월 이후 승률 .531(17승1무15패)의 강세. 초반 돌풍을 일으켰던 롯데는 장원준과 염종석의 활약, 마무리 노장진의 부활이 관건이다. 현대도 김수경의 복귀와 무너진 불펜을 재건해야 가을에 야구를 할 수 있다. 꼴찌 기아는 남은 48경기에서 31승을 거둬야 5할 승률에 도달할 만큼 안타까운 상황이다. ●박노준 SBS 해설위원 용병활약이 4강의 열쇠다. 리오스(두산)를 포함, 무려 9명의 용병들이 교체됐다. 삼성과 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팀 가운데 투타에서 안정적인 SK가 가장 유리하다.3위 한화는 전반기 투수난을 ‘단방 처방’으로 메웠지만 후반기에는 엄정욱 이승호, 차바치 등이 복귀할 SK에 순위를 내줄 가능성이 높다.LG의 상승세도 무시할 수 없다. 승차가 거의 없는 롯데와 현대는 후반 초반에 승부를 내지 않는 한 제자리 싸움을 벌일 공산이 짙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 1위 삼성과 2위 두산은 안정권이다. 나머지 티켓은 한화와 SK가 좀더 가까이에 있다. 한화는 송진우·정민철의 활약에 따라 2위도 넘볼 수 있다. 토종 선수들의 힘으로 4위에 오른 SK는 가장 잠재력이 큰 팀이다. 하지만 LG도 다크호스로,4∼5선발의 활약에 따라 4강도 충분하다. 롯데는 장원준과 염종석, 현대는 김수경과 불펜에 따라 대반전을 이룰 수도 있다. 기아는 김진우와 그레이싱어가 선발등판한 전경기를 낚아야 희망이 있다. ●하일성 KBS 해설위원 4강 여부는 마운드에서 판가름날 전망이다. 모두 믿을 만한 왼손 투수가 없어 결과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삼성은 4강 진출이 확실하다.2위 두산은 김동주의 방망이와 용병 투수 리오스가 얼마만큼 해 주느냐에 달렸다.SK는 선수층이 두터워 7∼8월을 잘 넘기는 데 가장 유리한 팀이다. 기아는 김진우의 어깨에 달렸다. 하반기 스타트 이후 4∼6연승으로 탄력을 받아야 4강이 가능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박범준·장길연 지음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또 많은 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때’라고 답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보면 다시 한번 올려다보게 된다. 만일 그가 단단한 사회적 통념의 굴레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전북 무주 진도리란 산골마을에서 사는 30대 초반의 박범준·장길연 부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결혼과 함께 도시를 버리고 산간오지의 흙집을 빌려 2년째 살고 있는 이들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정신세계원 펴냄)란 책을 냈다. 특이한 것은 이 두 사람이 거창한 생태주의자거이거나, 복잡한 문명세계를 탈출하고자 한 방외지사를 꿈꾸고 산골마을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똑떨어지는 논리도, 산골 삶에 대한 고집스러운 예찬도 없다. 다만 예전부터 복잡하고 바쁜 도시보다 시골이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고, 이제 그같은 삶을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통념상 이들은 도시에서의 삶이 더 어울리는 커플이다. 남편 박범준은 서울대 독문과를 나와 벤처기업 이사를 지냈고, 아내 장길연은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졸업한 재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까지 배운 교육과 지식에 매달리기보다, 낯설고 새롭지만 스스로 원하는 삶을 택했다. 박씨는 친구들과 벤처 창업후, 사업 규모가 커지고 직원도 수십명으로 늘면서 사회적 성공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심해졌고 사람간 갈등도 심해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연애 중이던 아내도 도시의 삶을 유독 힘들어했다. 하지만 시골에만 가면 생기가 넘치는 것을 보며 결국 함께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을 모았다. 산골에서 뾰족한 생계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박씨는 궁여지책으로 드라마 극본 공모에 응했지만 떨어졌고, 번역일에도 기웃거렸다. 한데 번역을 부탁한 출판사에서 그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보고, 글을 써보라고 해 요즘은 글쓰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아내 장씨는 예전에 틈틈이 배워두었던 조각보와 천연염색 솜씨를 발휘, 인근 학교 등에서 강습을 한다. 과학영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 바느질로 먹고 산다는 게 어찌보면 아이로니컬하다. 하지만 생계대책에 대한 이들의 개념은 일반인들과 조금 다르다. 이들은 먼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과 행복에 대한 그림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적인 계획이 나올 때 진정한 생계대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행복찾기를 추구한다. 월 5만원씩 내고 빌린 흙집은 400여평의 텃밭까지 끼고 있다. 여기에 감자와 고추, 배추, 상추, 양배추, 딸기, 참외 등을 가꾼다.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스스로 만든 퇴비만으로 이들을 정성스럽게 키운다. 아이주먹만한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나오는 것을 보며 이들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초여름 땡볕에 새빨갛게 익은 딸기를 한 바구니 따서 시원한 그늘에 함께 앉아 먹는 재미는 예전에 결코 맛보지 못한 것이다. 부족하지만 내 손으로, 내 오줌을 뿌려서, 제철에 키운 딸기의 맛에 이들은 행복감을 느낀다. 도시에서 그렇게 힘들어하며, 여위기만 하던 장씨는 시골생활 1년만에 살이 붙었다. 남편 박씨가 보기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따금 도시를 향한 향수에 빠진다. 그럴 땐 트럭을 타고 전주에 나가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 또 대학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신다. 이들은 단순히 자연이나 생태적 삶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나가던 두 엘리트 젊은이에게 높은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는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자유로운 이상을 일상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99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주가 연중 최고 기록

    종합주가지수가 외국인 순매수에 힘입어 장중 한때 1050포인트를 뛰어넘으며 이틀째 상승,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이틀째 하락세를 나타내 증시에 ‘환율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제기된다. 12일 거래소시장에서 주가지수는 전일보다 3.45포인트 오른 1043.88에 마감됐다. 이날 시장은 국제유가 하락으로 미국·유럽 증시가 모두 강세였다는 소식과 함께 개장 초반부터 외국인 매수세가 쏟아지며 장중 1051선을 넘기도 했다.그러나 외국인들이 6개월만에 최대인 3175억원을 순매수했음에도 2372억원에 이르는 프로그램 순매도가 쏟아지면서 지수상승폭이 크게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지수가 1050선 위에서 급등락할 가능성은 커지겠지만 상승추세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엔·달러 환율 하락의 영향으로 원·달러 환율은 전일보다 4.20원 떨어진 1039.50원으로 마감됐다.주병철 김경운기자 bcjoo@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2)-2세 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2)-2세 경영

    한진 조씨가(家)의 2세들이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3년.4형제의 ‘홀로서기’가 정착된 가운데 이제는 선친이 다져놓은 반석에서 세계 일류 수송기업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난 3년간 2세들의 경영 성적표는 ‘기업은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 나간다는 것’임을 증명해준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도 “전문경영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이라고 말한다. ●조중훈 회장의 자식 교육 고 조 회장은 자식들에게 인성에서는 검소와 성실을, 일에서는 프로를 강조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엄격하게 교육 시켰지만, 때론 애틋한 부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선진 지식을 습득하도록 조기 유학을 보내 자식들에게 전문가의 길을 걷도록 했다. “미국 유학 시절 때입니다. 부친은 틈틈이 자신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저에게 보내 격려를 했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부친의 자식 사랑을 확인하면서 큰 힘을 얻은 거죠. 그리고 저도 1주일에 한번씩 아버지께 편지를 썼죠. 부친은 ‘훌륭한 경영자가 되기 이전에 훌륭한 인간이 되어라.’,‘현재의 조건에서 행복을 찾아라.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를 가르치곤 했었습니다.”(조양호 회장) 조양호 회장과 부친과의 일화 한 토막. 조 회장이 유럽여행을 떠날 때 부친은 궁색하지 않도록 3000달러를 경비로 줬다. 조 회장이 여행을 끝내고 홍콩에서 부친을 만났을 때, 그는 부친이 건네준 돈의 절반인 1500달러을 돌려드렸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다니며 1∼2달러짜리 값싼 여인숙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후 부친은 조 회장의 검소한 생활과 관리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단다. 말은 안 했지만 장남의 됨됨이와 장차 그룹의 후계자로서 자질을 테스트했던 것이다. ●4형제의 소그룹 독립경영 “4형제 모두 대한항공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했지만, 선친(고 조중훈 회장)께서는 자식들의 전공과 성격 등을 감안해 주요 계열사를 맡기신 것 같습니다. 항공은 그룹의 주력 업종이고, 전문 기술의 이해가 필요한 만큼 공대 출신인 제가 맡게 됐고, 둘째(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데다 성격도 걸걸해서 건설·중공업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셨죠. 또 국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한 해운쪽은 사교적인 셋째가 적성에 맞을 것으로 보셨고, 막내는 금융분야 공부를 죽 해왔으니 그룹의 금융을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선친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이같은 밑그림을 그려놓고, 자식들을 관련 계열사에서 꾸준히 트레이닝을 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4형제가 각각 항공과 중공업, 해운, 금융을 맡게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그룹은 2002년 조중훈 회장의 별세 이후 4형제간 ‘독립 경영’을 정착시켰다. 그룹 후계구도를 일찌감치 ‘교통 정리’한 데다 확실한 계열 분리를 위해서는 독립경영이 선결돼야 한다는 4형제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한진 주요 계열사의 ‘성적표’는 독립경영의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세계적인 항공사 독일 루프트한자의 19년 아성을 깨고, 화물수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진중공업은 국내 조선업체들이 적자에 허덕이던 지난해 367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으며, 한진해운은 지난해 사상 최대의 경영성과를 올렸다. 메리츠증권은 동양화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한진은 올해 창립 60돌을 맞아 계열사간 지분 정리를 마무리짓고, 확실한 ‘홀로서기’에 나설 전망이다. 한진중공업은 사실상 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가 마무리됐으며, 금융(동양화재)은 지난 3월 계열 분리를 끝냈다. 4형제의 독립 경영이 자리잡으면서 계열사간 의존 관계도 시나브로 엷어지고 있다.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은 주보험 거래처를 조정호 회장이 수장인 동양화재에서 다른 대형 보험사로 옮겼으며,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이끄는 한일레저는 한일 컨트리클럽내에 있던 대한항공 광고판을 철수시켰다. 또 금융계열사인 한불종합금융은 사무실을 서울 중구 해운센터에서 인근 파이낸스센터로 옮겼다. ●항공 전문가 조양호 회장 “회장님의 ‘러브레터’ 받았습니까.”,“이번주에는 두번이나 받았습니다.”대한항공 임원 사이에 오가는 아침 대화 가운데 하나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조 회장께서 해외 출장이 잦다 보니 업무를 주로 온라인으로 처리하는데, 좀 부족하거나 따로 지시할 내용이 있으면 담당 임원에게 이메일을 보내요. 임원들은 이를 회장님의 ‘러브레터’라고 부릅니다. 조 회장께서 워낙 전문가이다 보니 내용이 아플 때가 많죠.”이어 “모언론사 기자가 국내 그룹 회장들의 인터넷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늦은 밤에 질문서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조 회장은 본인 메일을 확인한 뒤,‘이런 질문은 홍보실에 문의하십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에요. 그 기자가 회장들로부터 되받은 유일한 메일이었고,30분만에 답장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은 늦은 밤에도 노트북을 열어 회사 현황을 파악하고, 결재도 한다. 의문 나는 사항은 담당 임원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로 질문을 한다. 직원들도 이제는 회장이 밤중에 결재한 서류를 보아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조 회장은 국제 항공업계에서 알아주는 거물급 인사다.2000년 출범한 세계적 항공동맹체 ‘스카이팀’ 결성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미국 델타항공의 레오뮬린 회장과 의기 투합해 결성키로 한 ‘스카이팀’은 당시 참여항공사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다. 조 회장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에어프랑스와 알리탈리아의 최고경영자(CEO)를 집요하게 설득, 결국 ‘스카이팀’에 참여토록 했다. 그가 일궈놓은 스카이팀은 이제 국제 항공동맹체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또 30년간 대한한공에서 잔뼈가 굵은 항공 전문경영인이다. 영업·정비·전산·자재·인사·총무 등 항공사 경영에 필수적인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전문경영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되, 경영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경영인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항공사 경영은 제조업과 달라 전문적인 경영 능력없이 권위만을 앞세워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수한 업종입니다. 저는 조종사들과 전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경비행기를 직접 조종할 수 있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조 회장이 2003년 그룹 회장에 취임하면서 임직원에게 던진 첫 일성은 ‘세계 최고의 종합 물류기업’이었다. 이를 위해 2010년까지 항공 여객운송 세계 10위, 항공 화물운송 세계 1위, 해상운송 세계 3위, 국내 육운 1위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하대 공대를 거쳐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출신이다. ●선 굵은 조남호 회장 조남호(54) 한진중공업 회장은 4형제 가운데 가장 선이 굵은 경영스타일을 보여준다. 직원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철저히 따진다. 경영진이 일일히 챙기다 보면 실무 책임자의 활동 폭이 좁아지고, 책임감있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1995년 인천 영종도의 남측방조제 건설 에피소드는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한진은 당시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던 인천국제공항 공사에 남측방조제를 맡았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이 빨라 물막이공사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급히 대안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또 북측방조제 공사는 경험많은 국내 굴지의 건설사가 맡은 터라 서로 자존심을 걸고 공기단축에 매달렸다. 이 때 조 회장(당시 부회장)은 현장 책임자를 직접 방문,“현장을 말아 먹든 말든 모든 권한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을 믿으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해내리라 믿는다.”며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여러 개의 바위로 5t이상의 돌망태를 만들어 쌓아나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공사를 조속히 끝냈다. 더구나 경쟁사의 북측방조제 완공보다 간발의 차이로 일찍 끝내 업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준공식 날 헬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조 부회장은 현장 책임자와 만나자마자 뜨거운 포옹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조 회장은 국내에서 경복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해외 근무경험은 풍부하다. 선친에게도 필요하면 바른 말을 했고, 부하 직원을 포용하는 스타일이다. 조 회장은 1971년 입사, 네덜란드와 중동, 동남아 등에서 근무하며 해외 건설사업의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다. ●‘국제통’ 조수호 회장 조수호(51) 회장은 해운업계의 ‘국제통’으로 통한다.1991년 우리나라가 국제해사기구(IMO)의 상임이사국 가입을 위해 발벗고 나설 때, 정부가 그를 로비스트(?)로 낙점할 정도였다.1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세계 곳곳에 지인들을 심어 놓은 조 회장이 적격 인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각국 대표를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협력을 요청, 결국 이사국 선임을 이뤄냈으며,93년에는 IMO이사국 연임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는 딸만 둘이다. 딸들을 위해 주방에서 요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대놓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조 회장은 해운업계의 ‘페미니스트’로 불린다. 여성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해운업계의 금기를 깨고, 한진해운은 1995년 국내 최초로 12명의 여성 해기사(항해사, 기관사)를 선발했다. 또 1997년에는 여성주재원을 파견했으며,2000년에는 최초의 여성 일등항해사를 배출했다. 특히 대졸 신입사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절반에 육박한다. 조 회장은 미국 남가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79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85년 한진해운 상무를 시작으로 10년만인 94년 사장으로 취임했으며,2003년 7월 회장직에 올랐다. 그는 20년간 해운업 ‘한 우물’만 판 전문경영인이다.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과 LNG선 등 150여척의 선박과 전세계 53개의 항로를 운영, 연간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의 선사다. 지난해 매출액 6조 2000억원, 순이익 6457억원을 기록했다. ●금융그룹 시동 건 조정호 회장 98년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증권)의 재무구조는 최악이었다.9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자기자본은 411억원으로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를 반전시킨 주인공이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이다. 당시 조 회장은 푸르덴셜증권 자회사인 PAMA(푸르덴셜에셋매니즈먼트아시아)로부터 510억원의 외자 유치에 성공한 뒤,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듬해에 순이익 753억원, 자기자본 2156억원으로 불려놓았다. 외자 유치에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PAMA 코리아 대표인 김한 사장의 도움이 컸다. 이 인연으로 김 사장은 2003년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된다. 김 부회장은 “메리츠증권과 PAMA를 결혼시킨 중매쟁이로서 맡은 역할을 다하기 위해 메리츠증권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나서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발동이 걸리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 지난해 ‘우수영업직원 격려행사’에 참석했던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직접 만든 ‘드라큐라주(포도주 폭탄주)’를 돌리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또 무대에 나가 자신의 18번곡을 멋지게 부르기도 했다. 조 회장은 최근 PAMA의 메리츠증권 지분 인수를 진두지휘하며,‘금융그룹’을 향한 시동을 걸고 있다. 지분 인수에 성공하면 동양화재를 정점으로 메리츠증권과 기존 한불종합금융을 아우르는 자산규모 3조원대의 중견 금융그룹을 이끌게 된다. 조 회장은 남가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스위스 IMD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다. ●조씨가 3세는 ‘공부중’ 조씨가 3세들은 이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이들이 많다. 유독 중매 결혼이 많았던 조씨가에서 3세 결혼은 어떻게 될까.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얘기다. “부모가 하라고 해서 요즘 젊은 애들이 그대로 따릅니까. 중매든, 연애든 사람만 좋으면 저는 반대할 생각 없습니다. 시대도 옛날하고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조 회장과 이명희(56)씨는 장녀 현아(31)씨와 장남 원태(29)씨, 차녀 현민(22)씨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아씨는 99년 미국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대한항공의 호텔기판사업본부 기내판매팀장을 맡고 있다. 활달한 성격에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며, 항공업무 전반에 대해 해박하다는 평이다. 원태씨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일하다가 지난달 미국 남가주대 MBA(경영학 석사)를 밟기 위해 출국했다.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앞서 능력을 더 키우는 것이 낫겠다는 조 회장의 판단에서다. 조 회장은 “능력과 관심이 있다면 모를까,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시키지는 않겠다.”면서 “전문가적인 자질을 지녀야 한다.”고 밝혔다. 인하대 경영학과 출신인 조 차장은 합리적 사고에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 막내 현민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 결혼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김영혜(54)씨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원국(29)씨와 장녀 민희(25)씨는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2세들은 현재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조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43)씨가 롯데가 출신으로 일본에 적지 않은 일가 친척이 있기 때문이다. 장녀 유경(19)씨와 차녀 유홍(17)씨 등이 있다.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과 구명진(41)씨는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효재(16)양은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원기(13)군은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막내 효리(4)양이 있다. ●한진그룹의 대표 CEO 이종희(63) 대한항공 총괄 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CEO다. 경상도 사투리가 무뚝뚝하기보다 사근사근할 정도다. 그러나 78년 항공사에서 가장 바쁜 자리인 영업스케줄 과장 시절에는 5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정도로 독종 기질이 다분하다. 이 사장은 대한항공 공채 1기 출신으로 정비·자재·기획·영업 등을 두루 거쳤다. 겉보기에는 소탈한 전문경영인으로 보이지만 업무만큼은 빈틈이 없다는 평이다. 매달 책 3권 이상을 읽을 정도로 독서파이기도 하다. 대구 출신으로 대구상고와 단국대 경영학과,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김정웅(63) 한진중공업 건설부문 사장은 실무형 리더로 1993년부터 국가 최대의 국책사업인 인천국제공항 건설 현장소장과 총괄본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쳤다. 인하대 토목과를 졸업했다. 홍순익(59) 한진중공업 조선부문 사장은 국내 조선 1번지에서 출발한 한진중공업을 세계 조선기술 센터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이다. 홍 사장은 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왔다.70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뒤, 외국계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와 동종 대형업체의 조선소장, 미국선급협회(ABS) 부사장을 역임했으며,2001년 다시 조선 현장에 복귀한 정통 조선맨이다. 박정원(60) 한진해운 사장의 집무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직원들 중 누구라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올라오라는 뜻에서다. 그는 평사원 출신 CEO로서 포용력과 리더십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원들의 생각을 직접 듣기 위해 평사원 및 특정 부서와 호프타임을 자주 갖는다. 서울 출신으로 중동고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한(51)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글로벌 마인드와 감각을 갖춘 CEO다. 서울대와 미국 예일대 MBA 출신이다. golders@seoul.co.kr ■ 조씨 부자의 ‘사진 사랑’ 항공사의 수장으로서 숱한 해외 여행 때문일까. 고 조중훈 회장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취미는 똑같이 사진 촬영이다. 솜씨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프로급이다. 일만큼이나 취미도 극성스러운 것이 부자간 닮은 꼴이다. 고 조 전 회장은 공식 업무에서 벗어나면 카메라를 메고 낯선 땅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국의 풍물과 사람사는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1985년 ‘이집트 고대문화 사진 전시회’에 내놓았다. 또 그의 사진 작품이 수만 점에 달해 한때는 개인 사진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고 조 회장은 사진 취미에 대해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유별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자주 해외에 나가는 사업 특성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여기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그 많은 감동과 경이를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장남인 조 회장의 사진 실력도 이미 재계에서 유명하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찍은 작품으로 달력을 제작,4년째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 취미 활동을 비즈니스로도 활용하는 조 회장이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부친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로 받으면서다. 조 회장은 부친을 따라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부친이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사진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해외 출장 때면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를 분신처럼 꼭 챙긴다. 그리고 노트북에 작품을 담아 놓은 뒤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지인들에게 직접 메일로 보내준다. 그가 사진 촬영에 이렇게 빠지는 데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의지대로 잘 표현할 수 있고, 간직할 수 있다는 점과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넓은 세상을 작은 렌즈에 담아 낸다는 점을 꼽았다. 그도 부친만큼이나 취미에 열성적이다. 평소 국내외 사진 전문잡지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스크랩을 해뒀다가, 작품 활동에 참고한다. 또 사진 전문가와 만날 기회가 있으면 미진한 부분을 곧잘 묻기도 한다. 바쁜 해외 출장 중에도 차량으로 이동하다 차창 밖의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차를 세워 촬영을 할 정도다. 조 회장은 “해외에 예정된 행사보다 하루나 이틀 정도 일찍 출발해 사진을 찍기 위해 도시 주변을 돌아다닌다.”면서 “사진은 잠시 잊었던 삶의 소중한 순간과 기억을 되살려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golders@seoul.co.kr ■ 대한항공의 ‘화물 수송사’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로부터 어제 연락이 왔는데, 대한항공이 지난해 항공화물 수송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해요. 이번주에 공식 발표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동북아 물류중심기지 건설에 대한항공이 일조를 했다는 점에서 뿌듯합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소문 KAL빌딩에서 만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같이 밝혔다. 당시에는 아직 공식 발표된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지만 대한항공 창사 36년만에 세계 항공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자부심은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대한항공이 세계 항공화물 수송 분야에서 톱이 되기까지 우여곡절과 애환도 적지 않았다. 대한항공이 화물사업을 시작한 것은 민영화 2년 후인 1971년 4월. 서울∼일본 도쿄∼미국 LA를 잇는 태평양 노선에 화물기를 처음으로 취항하게 된 것. 한·미 항공협정을 개정할 정도로 어렵게 노선을 취득했지만 막상 실어나를 화물이 없는 상황이 터졌다. 시도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심정에서 당시 대미 수출품의 대부분이 가발인 점을 착안, 직원들에게 가발 수출업체를 찾아 나서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가발업체 대부분이 소규모 중소기업으로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행히 수출조합을 방문해 주소를 얻고, 복덕방에서 위치를 알아냈지만 또 다른 걸림돌이 있었다. 이제 막 출발한 대한항공에 대한 불신이 적지 않았던 것. 결국 애국심에 호소하며 설득전까지 치러가며 겨우 승낙을 받았다. 또 당시 해외 비즈니스맨들이 주로 이용하던 조선호텔 프런트를 찾아 숙박부를 뒤져가며, 접촉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고생끝에 대한항공의 첫 화물기는 휴항없이 태평양을 건너게 됐다. 대한항공의 항공화물 변천사는 우리나라의 산업 발달사와 맥을 같이 한다.1970년대 초반에는 가발과 스웨터 등이 화물의 주종을 이뤘으며,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는 모피류와 전자제품,1990년대에는 전자제품과 의류 등이 시장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반도체와 휴대전화,LCD 등 고가의 IT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휴대전화만을 위한 전세기가 인도에 운항한 적도 있다. 대한항공은 또 별난 특수화물을 수송한 경험도 많다.1983년 11월에는 B747화물기로 서울대공원에 수용될 동물 418마리(54t)를 미국 댈러스에서 서울까지 수송,‘현대판 노아의 방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핵연료와 탱크, 헬리콥터 등 다른 항공사들이 좀처럼 수송할 수 없는 특수화물을 실어나른 경험도 쌓았다.94년에는 89마리의 미국산 말을 제주로 수송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경주마들을 실어 나르고 있으며, 무역전시장(COEX)내에 개장된 아쿠아리움(대형수족관)에 전시될 상어 35마리 등 희귀 어류들을 호주로부터 운송한 적도 있다. 또 운송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악어 72마리를 성공적으로 수송하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북창비결’은 조선 명종 때 도사(道士)로 유명한 북창(北窓) 정렴(鄭 1506-1549)이 썼다고 하는 비결인데, 난해한 부분이 많다. 이 예언서는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때부터 줄곧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창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奇人)으로 손꼽힌다. 꽤 흥미로운 인물인 셈이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북창비결’을 비롯해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 보는 것도 한낱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북창 정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정렴은 다재다능한 선비였다. 그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는 물론, 불교와 도교에 모두 정통하였고, 음악과 그림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문집인 ‘북창집(北窓集)’ 외에도 ‘북창비결(北窓秘訣)’,‘용호비결(龍虎秘訣)’,‘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유씨맥결(劉氏脈訣)’ 등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전호에서도 인용한 ‘궁을가(弓乙歌)’ 역시 정렴의 글이라 한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글을 보면, 정렴은 유·불·선 3교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사상적 중심은 유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사라기보다는 유학자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말에 불과한 것 같다.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렴은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점쟁이였다는 말이다. 정렴에겐 남다른 풍모가 있어 성수익(成壽益)과 같은 조선후기의 학자는 정렴을 신인(神人)이라 평했다. 성수익은 일찍이 정렴이 중국에 가서 유구(琉球·오키나와)의 사신을 만난 이야기를 예로 든다. 당시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다고 한다. 유구 사신이 소지한 책자에는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시(某時)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유구 사신은 정렴을 바로 그 진인(眞人)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여러 시간 동안 정렴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와 대담하는 동안 놀랍게도 정렴은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삼현주옥 三賢珠玉’). 정렴이 과연 언제 어디서 일본어를 배웠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렴이 대단한 인물이라 믿었고, 특히 지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언젠가 한 번은 정렴의 사촌이 아버지 묏자리를 부탁하러 왔다고 한다. 사양하던 끝에 정렴은 묏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는데, 땅을 파자 온통 물구덩이였다. 모두들 당황했으나 정렴은 시종일관 그 자리만을 고집했다. 결국 구덩이에 큼지막한 돌멩이 몇 개를 채워넣고 장례를 마치게 됐다. 이것은 이른바 수중명당(水中明堂)이었다. 훗날 무덤 안에 채워넣은 돌멩이 숫자만큼 무덤 주인공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정렴이 수중명당을 정했다든가 일본어에 능통했다, 또는 100리 안팎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아 맞혔다는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의 사신을 만난 것, 주역과 풍수지리에 밝았던 점 그리고 도가적 수련을 즐겼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정렴은 점술에 능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중 특이한 이야기 하나가 있어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본래 그는 슬하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이들을 좀체 귀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의 불평이 무척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렴의 어린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렸다. 가족과 친지들은 깜짝 놀라서 죽은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구렁이였다. 소년 시절 정렴은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 하나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한다. 그 구렁이가 정렴에게 복수하려고 둔갑술을 빌려 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런 사실을 미리 눈치챘기 때문에 아이들을 전혀 귀여워하지 않았다 한다. 구렁이가 변해 아이들이 될 이치는 없다. 방금 말한 이야기는 정렴이 세상살이에 만족하지 못해 후세에 혈육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맞을 것 같다. 뒤에 다시 말하듯 정렴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불화하였다. 정렴은 여러 면에서 재능이 빼어났지만 불우했고, 그래서인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해서도 이를 미화하는 설화가 있어 주목된다. 요컨대 정렴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떼어줬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정렴의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윤두수는 어디선가 자신이 단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아는 친구 정렴에게 매달렸다. 정렴은 친구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 마침내 신선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서 수명을 빌라고 했다. 덕분에 윤두수는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그러나 신선들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정렴의 수명을 줄이기로 했고, 정렴은 친구를 위해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일 정렴이 오래 살았더라면 윤두수에 못지않은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후대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정렴의 능력은 특히 방외(方外)에서 빛났던 모양으로,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에서 정렴을 김시습·권극중·이지함·곽재우에 비견되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손꼽았다. ●정렴은 정치에 희생된 불우한 인물 위에서 간단히 암시했듯이 도사 정렴은 말년이 무척 불우했다. 그가 39세 되던 해, 명종 즉위년(1545)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은 윤원형, 이기 등 세력자들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억울하게 죽이고 귀양보냈다. 정순붕은 이른바 소윤의 핵심세력으로서 명종 초년 세도가로 행세했다. 하지만 정렴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컸다. 그는 사화로 인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했다. 아울러 권력을 잡기 위해 그런 일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말로가 평탄하지 못할 줄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렴은 곧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다시피 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류해 사화를 막아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술과 시로 달래며 소일했다. 그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정렴은 성품이 명민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아비가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일찍이 간(諫)하여 말렸으나 아버지 정순붕이 따르지 않았다. 동생인 정현이 부자간에 이간질하여 온 집안에 변고가 일어나려 하였다. 정렴은 아버지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양주(楊州)의 시골집에 가 있거나 산사(山寺)에 머물러 지낸 것이 실로 여러 해였다(명종 즉위년 8월28일 무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아버지 정순붕은 둘째아들 정현과 공모하여 큰아들 정렴을 죽이려고까지 했다.‘집안에 변고’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정렴은 현실정치에 관해 아버지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아우로부터 버림받은 정렴은 산중에 파묻혀 지내다가 슬픔을 안고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고,‘이 점을 지금까지 선비들은 슬퍼하고 있다.’고 할 지경이었다(실록, 명종20년 10월29일 임진). 자세히 알고 보니 정렴은 너무도 불우한 재사였다. 집안의 저버림을 당한 그는 불교와 도교에 침잠했고, 천문, 풍수지리, 수학, 음악 및 미술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초인적 능력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사후에 내려진 것이었을 뿐, 그의 인생은 처참했다. ●‘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최우선으로! ‘북창비결’은 말세의 한 가지 조짐을 음주의 폐습과 음란한 풍토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에서 인터넷 성매매와 호스트 바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런 해석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북창비결’에선 말세가 되면 남쪽에서부터 나라가 망한다고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해 “물과 물이 있는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남쪽이라면 제주도와 전라남도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운동 또는 이재수의 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드시 이런 사건을 미리 염두에 둔 예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딱 들어맞는 예언은 도리어 그런 사건이 일어난 뒤 소급해서 조작된 예언서라는 증거가 될 뿐이다. 어쨌거나 말세가 되면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나리라.’고 했다. 쥐의 아비와 뱀의 형이 누군지 모르겠다. 혹시 쥐의 해와 뱀의 해보다 한 해 앞선 시점 또는 해당 되는 해의 첫머리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뱀해보다 한 해 전인 용해에 일어났고, 병자호란은 쥐해에 있었다.‘북창비결’의 독자들은 이 두 전쟁이 정확히 예언됐다며 이 예언서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시절이로다.’ 요점은 말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구절을 나름대로 짐작해보면 이렇게도 풀이된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을 이끌고 와서 싸운 이여송(松)과 이여백(栢) 형제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燕行)길이 잦아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행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비가 간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포로와 사신 행차가 기러기 떼마냥 연이어 서울과 연경을 오갔기 때문에, 이를 암시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창 정렴이 과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창비결’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난세를 극복할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만 난세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북창비결’의 대답이다. 지혜와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애써 십승지(十勝地) 같은 데를 찾아 피난해도 결국 아무 ‘쓸데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기러기 신세를 후회하리라.’고 했다. 정리하면,‘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처세의 으뜸으로 친다는 사실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에서도 전혀 없지는 않다. 어쨌든 말세에 피난할 장소를 거론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덕성을 온전히 갖추는 일이라고 말한 점은 인상적이다. ●곡식이 풍부한 평야지대로 가라! 그러면서도 ‘북창비결’은 말세의 피난지에 상당한 비중을 할당하고 있다.‘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피난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북창비결’이 선호하는 피난지역이 다르다는 점이다.‘충청도와 강원도는 살 수가 없고, 경기도 동쪽에서는 어육(魚肉)이 난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강원도, 특히 오대산 이북을 위험지역으로 선포한 점은 쉽게 확인된다. 하지만 강원도에 이웃한 경기도 동부 및 충청도까지 위험지역으로 본 것은 ‘북창비결’의 특징이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흰 것에 의지하는 자는 살겠고, 풍년 든 곳에 가까이 있으면 살리라.’ 이른바 십승지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백두대간의 명산대천을 말하며 다른 예언서에서는 피난지로서 중시된다. 그러나 ‘북창비결’엔 그와 전혀 다른 의견이 제시돼 있다. ‘흰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풍년’을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보았던 점으로 미루어 물산이 풍부한 평야지대를 선호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돈과 곡식이 쌓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구조할 것이네.’라고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흰 것’은 백미, 즉 흰쌀이나 당시의 화폐였던 무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북창비결’이 말세의 조짐을 흉년에서 읽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흰쌀과 흰 베가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면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조건상 서쪽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북창비결’은 말세에 ‘기강은 서쪽에서 지탱한다.’고 하였다. 서쪽의 곡창지대라면 전라북도의 김제 만경평야를 비롯해 충청남도의 내포평야, 경기도의 김포평야, 황해도의 연백평야 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황해도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조선시대는 서북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고,‘정감록’은 어느 예언서에서나 이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북창비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역시 피난지로 삼지 말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나라가 지탱해야 될 서쪽은 김제 만경 평야로 대표되는 호남평야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마땅한 피난지와 관련해 ‘명승지(名勝地)라는 곳이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한다.’고 말한 대목도 유념할 만하다. 정감록의 다른 예언서와는 전적으로 달리 ‘북창비결’은 십승지 자체를 부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이 깊은 곳 섬에 숨어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명산대천 또는 섬에서 말세의 피난처를 구한 흔적이 다소나마 감지된다. 그런 충고는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라던 ‘북창비결’의 또 다른 구절과 모순된다. 하지만 내용상의 이 같은 모순은 예언서의 역사를 감안할 때 도리어 당연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예언서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개작(改作)돼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언서의 논지가 중층적이거나 상호 배치된 경우가 없을 도리가 없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노숙자의 ‘3000만원짜리 베개’

    한 노숙자가 3000만원의 돈다발이 든 보자기를 베고 잠자며 떠돌이 생활을 해 화제가 되고 있다. 5일 부산의료원에 따르면 행려환자 병동에 최근 입원한 60대 초반 김모씨가 풀어보인 낡아빠진 옷보따리를 보고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묵은 때와 땀에 절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데다 먼지까지 뽀얗게 낀 보따리에서 무려 3000만원에 이르는 현금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속이 쓰리다.”며 병원에 찾아온 김씨는 자신에게 늘 목욕을 시켜준 한 남자 간호사에게 “고생이 많은데 커피나 한잔 하라.”며 보따리에서 3만원을 꺼내줬다. 김씨는 전에도 복통 등을 호소하며 세 차례나 경찰관과 함께 이 병원을 찾아왔는데 목욕을 하면서도 이 보따리만은 손에서 절대 놓지 않았다고 한다. 줄곧 이를 궁금해하던 간호사가 “도대체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데 신줏단지처럼 모시느냐.”면서 “한번 풀어보자.”고 간곡히 부탁하자 10여분간을 망설이다 결국 보따리를 풀었다는 것이다.김씨는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30여년간 노숙하면서 행인들에게 구걸한 돈으로,1000원짜리가 10장 모이면 근처 은행에 가서 1만원짜리로 바꿔 보관해 왔다.”면서 “돈보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베개로 베고 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163명중 한명이라도 이름 알 수 있다면”

    “공권력에 의해 집단 학살된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망했지만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아직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의 신원확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경남대 이상길(45·사학과) 교수. 그는 “당시 피해자 중에는 좌익활동 경력자도 있지만 이와는 무관한 양민도 많다.”면서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이 교수는 지난해 5월 태풍과 폭우 등으로 유골이 드러난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일대에 대한 발굴을 신청,2개월여의 작업 끝에 163명의 유해를 발굴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피해자들의 유골을 당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한 최초의 사례다. 이 교수는 발굴된 유골과 유류품을 컨테이너 박스에 담아 대학의 양해 아래 교내에 보관하고 있다. 이같은 소문을 듣고 그동안 수십명의 유족이 찾아 왔지만 유골의 신원이 확인된 경우는 없다. 유골과 함께 발굴된 비닐팩과 반지·도장 등으로 신분은 추정할 수 있었지만 신원을 확인할 단서는 아니었다. 이 교수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泰仁’이라고 새겨진 목도장의 주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키 165㎝ 정도, 연령은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며, 입고 있는 양복 상의에 양복점 이름인 듯한 ‘대송(大松)’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고, 주머니에서 목도장이 나왔던 것. 이 교수는 “진주형무소 수감중 끌려왔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라 진주와 하동 등지에 전단 1만여장을 뿌렸지만 제보는 전혀 없었다. 지난해 말 송모(66)씨가 목도장의 주인이 자신의 외삼촌 같다는 연락을 받고 만나본 결과 정황상 동일인 일 가능성은 높았지만 과학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송씨 어머니(87)의 젊은 시절 사진을 입수해 두개골 등을 대조한 결과 남매가 분명하다는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송씨 어머니의 혈액을 채취,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DNA 분석을 의뢰한 결과 염기서열이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연세대 법의학과 연구팀에 재감정을 의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 교수는 지난 3일 경남대에서 이 같은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절차가 어렵고 까다롭지만 한 명이라도 신원이 명확히 확인되면 관계기관에 종합적인 대책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마산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어? 여기가 난곡 맞아?

    어? 여기가 난곡 맞아?

    헬기에서 내려다본 난곡 재개발 공사현장(사진 위)에서 우리가 기억하던 난곡은 보이지 않는다. 허리를 펴면 머리가 닿을 만큼 낮은 천장, 태풍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만 같았던 낡은 판잣집(사진 아래)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난곡은 2000년대 초반까지 도시 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가운데 한 곳이었다. 본디 난초가 많이 자라 은은한 난초향기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산이 깊어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1960년대 서울로 대거 유입된 농촌인구와 도심 재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난곡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때는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다. 아시안게임·올림픽을 앞두고 상계동 철거를 시작으로 서울 시내 빈민촌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갔다. 난곡 역시 1990년대 중반부터 재개발 사업이 추진됐지만 외환위기의 역풍으로 지금까지 미뤄졌었다. 지난 2003년 철거를 완료, 지난해부터 착공에 들어간 재개발 현장은 외부공정 대부분이 완료된 상태였다. 내년 하반기 입주를 위해 현재 마무리 공정이 한창이다. 주변지역에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지역 상권도 점점 변해가고 있다. 야학에 투신하겠다던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시민운동계와 학계 등으로로부터의 관심도 끊이지 않았던 마지막 달동네 난곡은 그렇게 중산층이 사는 지역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글 고금석기자 사진 남상인기자 ■ 판잣집 달동네가 마천루 아파트 숲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지 않았다. 난곡(蘭谷), 신림역에서 101-1번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를 20여분이나 타야 다다를 수 있었던 하늘아래 첫동네. 누추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오갈데 없던 사람들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아늑했던 곳. 한곳 빈틈없이 산등성이 가득 메웠던 판잣집들은 이제 간데없고 번듯한 아파트들만 난곡을 지키고 서 있었다. ●들어선 아파트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27일 난곡을 찾았다. 난곡 사람들의 발이었던 101-1번 버스는 이제 5521번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있었다. 종점에 다다를 무렵 우뚝 솟은 아파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난곡의 새모습이었다. 난곡은 원래 서울 관악구 신림7동 산101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다.1960년대 말 도심미관 정화사업이 추진되면서 도심 불량주택에 거주하던 빈민들이 몰려든 곳이 바로 난곡이었다. 한때는 1만 3000명이 넘게 살던 이곳 판잣집들은 거의 모두 헐리고 이제 ‘신림 제1구역 재개발지역’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도로변 일부에 남은 낡은 무허가주택들 역시 머지않아 재개발 열풍 속으로 빠져들 운명에 처해있다. 재개발사업은 대한주택공사와 대우건설이 맡아 진행하고 있다. 주택공사는 모두 3322가구, 대우건설은 모두 499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할 예정이다. 지난해 초 착공해 벌써 외부공정은 거의 마친 상태이며 현재 내부공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관악구청 성순경 주택개량2팀장은 “공정이 순조롭게 진행돼 내년 9∼10월로 예정된 입주예정일이 6∼7월로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늘어선 부동산 여느 재개발 지역에서처럼 난곡에도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 아파트 진입로와 보성운수 종점 주변으로 50∼60개의 업소가 성업 중이다. 대부분의 중개업소는 지난해 아파트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우후죽순격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는 새로 조성될 아파트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환경이 좋고 4000 가구에 이르는 대단지로 실입주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R공인중개사 김모(60)씨는 “전화 및 방문상담이 하루 수십건이 넘는다.”면서 “재개발되는 지역의 아파트가 이처럼 대단지가 없어 지난해부터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고 말했다. 최근 지상경전철(GRT) 도입이 가시화돼 취약했던 교통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한달새 3000만∼4000만원의 프리미엄이 추가로 붙었다.H공인중개사 이모(49·여)씨는 “현재 24평형은 1억원,34평형은 1억 5000만원∼2억원,44평형은 2억원 이상의 프리미엄이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기대 부푼 관악구 관악구는 한층 기대에 부푼 상태다. 명절이나 세밑만 되면 달동네 많은 지역으로 주목받던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관악구는 난곡지역 재개발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원래 95년 무렵부터 진행되던 민간업자 위주의 재개발사업이 97년 외환위기로 차질을 빚자 김희철 구청장이 직접 주공을 찾기도 했다. 구는 내년 입주에 맞춰 난곡사거리부터 난곡에 이르는 진입로를 현재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후 2008년까지는 GRT를 가운데 2개 차선에 만들어 신대방역까지 연결할 계획이다. 여기에 단지 인근에 추진되는 강남도시순환 고속도로가 착공된다면 관악구로서는 더이상 바랄 게 없게 된다. 구청 관계자는 “아파트 내·외부에 공원·산책로 등이 잘 꾸며져 있고 강남·도심 진입도 빨라지면 자연히 서울 서남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흥주거단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 지역 주택소유자들 사이에서도 아파트 입주 뒤 지가상승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형성돼 있다. 이 지역에 연립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강모(55)씨는 “아파트 입주 뒤 주거환경이 좋아지면 집값도 좀 오르지 않겠냐.”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계층갈등 소지도 있어 하지만 내년 입주 뒤 입주자들과 기존 주민들 사이의 정서적 괴리가 생길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곳은 큰 물리적 충돌 없이 무난히 철거가 진행돼 현재 주민갈등은 심각하지 않은 편이었다. 이는 주공측에서 공식이주비 외에 비공식적으로 이주비 등을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았던 기존 주민들은 대부분 근처 연립주택의 반지하방이나 봉천동 등 영구임대아파트 등으로 옮겨가 살고 있다. 입주권 역시 68년 이전 거주자들에게만 부여돼 대부분 혜택을 얻지 못했다. 이에 대해 신림종합사회복지관 김춘근 사회복지사는 “판잣집에 살던 대부분이 무연고 노인들이며 주민이 자주 바뀌어 지역성이 잘 형성되지 않았던 곳이라 주민간 갈등의 소지는 적은 편”이라면서도 “주민들 사이에 경제적 박탈감·괴리감 등을 이유로 보이지 않는 갈등은 일부 상존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예전 상계동 등에서 추진된 재개발 사업에서 보면 임대아파트 거주자와 일반아파트 거주자 사이에 담을 쌓고 서로 무시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계층갈등’이 생겼다.”면서 “난곡 지역에서도 동사무소와 주민자치센터, 사회복지관 등을 중심으로 혹시 생길지 모르는 주민갈등을 조정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경전철 건설 등 교통·문화 환경 혁신 “난곡의 변화는 관악구 전체의 이미지를 쾌적한 주거환경지역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희철 관악구청장은 난곡 개발과 동시에 이에 필요한 도시 인프라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그는 “난곡이 단순히 달동네에서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면서 “교통·환경·문화·복지가 어우러진 복합기능의 신도시처럼 꾸밀 계획”이라고 말했다. 난곡개발이 완료되면 이 일대는 인구 10만명이 넘는 작은 신도시가 형성된다. 교육·문화복지·환경분야에 차근차근 대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난곡 일대 경전철 건설도 이같은 맥락에서 5년 전부터 추진돼 왔다. 이곳에 건설될 경전철은 고무바퀴형 차량에 전기공급을 받는 철도시스템으로 자기궤도가 설치돼 있고 첨단유도장치를 갖춰 무인운행도 가능한 것으로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다. 현재 2차선 또는 4차선에 불과한 난곡길을 왕복 6차선인 30m도로로 확장하고 중앙차로를 일반차로와 분리, 경전철 전용차로를 확보해야 한다. 김 구청장은 이를 위해 지하철의 정시성과 버스의 접근성을 겸비한 도로 건설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는 “내년 5월까지 설계를 완료하고 보상이 실시되는데 이때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 구청장은 “이 일대의 교육·문화·복지환경 조성을 위해 ▲특목고 유치 ▲대형병원과 할인점 유치 ▲신림체육관(수영장) 건립 ▲신림 빗물펌프장 건립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있는자와 없는사람 차별없는 터전돼야 “토박이 주민들이 난곡의 새 주인들과 함께 ‘난곡 공동체’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31년 동안 난곡에서 살며 빈민 운동을 이끈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는 “난곡은 빈민들이 오랫동안 끈끈한 공동체 생활을 해온 곳”이라면서 “이들은 개발 과정에서 흩어졌지만 공동체 문화는 이어져 가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난곡이 서울의 수많은 ‘달동네’ 중 유독 관심을 받는 이유를 김 대표는 ‘자발적인 공동체문화’라고 진단했다.1970년대 초,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쫓겨나 난곡으로 모여든 3만여명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다. ●빈민들이 ‘없어도 서로 도우며’ 살던 곳 “난곡으로 이사해 동네 아주머니 15명과 ‘국수 모임’을 만들었어요. 한 명당 100원씩 모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점심을 제대로 먹어보자는 ‘계’였죠.” 이러한 자발적 주민 모임은 점차 늘어 1976년에는 주민 118가구가 참여한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이 생겼다. 김 대표는 “3만여명의 사람들이 공동수도 10개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하루에도 수십명씩 죽어나갔다.”면서 “주민들이 자기 자신과 이웃의 목숨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서울대 의대생과 자매결연을 맺고 협동 진료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이들이 난곡 재개발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새로 생긴 아파트의 ‘있는 자’와 인근에 남은 ‘없는 자’가 차별없이 함께 교육받고 생활할 수 있는 지역사회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토박이와 새주인이 어울리는 공동체 그는 이어 더불어 사는 것은 비단 난곡이라는 지역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서울 전 지역에 걸쳐 재개발·재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지역 개발은 사람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면서 “돈 없는 사람들이 부자들과 더불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하며 난곡이 그 효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인간시대] 윤혁경 서울시 도시디자인과 과장

    [인간시대] 윤혁경 서울시 도시디자인과 과장

    “명함이 특이하시네요.”서울시 도시디자인과 윤혁경(52) 과장이 명함을 내밀 때마다 듣는 말이다. 서울시 공무원들의 통일된 명함 디자인과 달리 윤 과장의 명함은 세로로 만들어졌다. 여백의 미가 살아있고 색깔도 흰색으로 통일해 세련된 느낌을 살렸다. 윤 과장은 “디자인하는 사람의 명함인데 당연히 뭔가 달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웃는다. 윤 과장의 이런 마인드는 지난 77년부터 주택·도시관리 등의 업무에 매달린 다양한 경험에서 배어난다. 개인 홈페이지에 적힌 이력서만 해도 글자크기 10폰트로 A4용지 4장에 이른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11권의 책을 출판해 ‘책 제조기’라는 별명도 붙었다. ●‘건축조례 해설´ 등 저서 11권… 총 1만 5000여 페이지 그동안 윤 과장이 낸 책의 페이지를 모두 합치면 1만 5000페이지는 족히 넘는다. 내년에는 ‘건축법해설집’의 출간과 ‘건축이야기’ 보완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에 1시간만 준비하지만 일년이면 360시간이니 이같은 책을 쓰기에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윤 과장이 처음 펴낸 책은 지난 94년 송파구 건축과장으로 있을 때 쓴 ‘서울시 건축조례 해설’이다. 당시 구청공무원을 비롯해 건축사 등의 전문가들을 위해 ‘실무+이론’을 정리할 생각에서 책을 펴냈다. 이후 실무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자 ‘공동주택관련법령’,‘건축법 해설’ 등을 잇달아 펴내면서 장동찬, 최찬환씨와 함께 건축법 ‘3두마차’로 불리기도 했다. 이 중에는 일반인을 위한 책들도 있다. 건축법을 쉬운용어로 풀어쓴 ‘알기쉬운 건축여행’의 경우 5판까지 찍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또 ‘도시·건축 엿보기’에는 인사동에 불어닥친 개발논리로 인해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아쉬움, 서울의 마지막 남은 한옥마을인 북촌보존사업, 도시 스카이라인 관리 등에 대한 실무자의 고충점·안타까움 등 실무자로 느끼는 소회를 실었다. 윤 과장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공무원교육원, 건설교통부 공무원교육원 등에도 강의를 나가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더 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에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았지만 시간이 좀체 나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해 제적된 아픈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도시 관리 잘 못하면 괴물로 변하기 십상” 윤 과장은 그동안의 공무원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로 잠실·청담 등 5개 지구 저밀도 아파트 기본계획을 꼽았다.1998년 건축지도과 관리팀장을 맡고 있을 때 이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후 2년 반동안 주택기획과 저밀도아파트지구 개발기본계획수립팀장을 맡아 2개의 팀을 이끌기도 했다.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첨예한 자리라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5만가구에 조합장만 69명이었죠. 나중에는 왜 아수라장에 뛰어들었나라는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아파트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죠.” 윤 과장은 이후 서울시 도시경관과·건축지도과·도시관리과 등을 거치면서 인사동 도시설계, 가회동 북촌마을 가꾸기 사업, 도심 야간경관 기본계획 수립 등을 맡아왔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도시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도시는 살아있는 생물체입니다. 제대로 제어되지 못하면 언제든 공룡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괴물로 변하기 전에 바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도시 문제가 어렵다고들 하지요.” ●경제·기능성보다 자연환경과 조화 이뤄야 윤 과장이 현재 이끄는 도시디자인과는 지난 1월 옛 도시정비반이 거듭난 것이다. 주변 환경을 무시한 이기주의적인 기능 위주의 도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문화도시 만들기와 맞물린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경제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둔 도시 개발로 인해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소홀히 해 왔던 것은 사실이죠. 또 디자인·설치물이 따로따로 설치되다 보니까 전체적으로는 난잡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고요. 앞으로는 도시의 품격을 업그레이드시키자는 것이죠.” 윤 과장은 오는 2006년 6월까지 서울도시디자인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로시설물은 물론이고 간판·표지판, 야간경관조성계획, 색채계획, 도시경관계획 등 섬세한 부분까지 관리할 예정이다. 특히 사업 초반부터 맡아온 북촌가꾸기 사업에 애착이 많은 만큼 올해 안으로 나올 ‘북촌 가꾸기 10개년 계획’도 끝까지 맡으면서 나머지 사업도 마무리 짓는 게 꿈이다. 글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사진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윤혁경 과장은 6월30일자 서울시 인사에서 주거정비과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골동품 수집 열 올리는 중국인들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골동품 수집 열 올리는 중국인들

    중국에 ‘골동품 열풍’이 불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소득 수준 향상으로 중국인들도 이제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서서히 ‘정신문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중국 언론들은 북송(北宋) 말기와 청조(淸朝) 초기인 강희제,1850년 이후의 청조 말기 등에 이어 4번째로 중국에 골동·예술품 수집 광풍이 몰려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근 중국내 확산되고 있는 ‘중화사상’의 고조와 민족주의도 골동품 열풍에 일조하는 분위기이다. 지난 1949년 공산정권 출범 이후 홀대받던 중국의 ‘전통 문화’가 사회주의 퇴조와 함께 중국인들의 새로운 관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20년만에 찾아온 베이징의 무더위만큼이나 판자위안(潘家園) 시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베이징의 대표적인 골동품 시장으로 꼽히는 이 곳은 4만 8500㎡(약 1만 5000평)의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걸어다닐 수 없을 만큼 사람들도 붐볐다. 베이징 자오양(朝陽)구 동남쪽의 삼환(三還)에 위치한 이 시장은 1993년 자연발생적인 ‘벼룩 시장’으로 시작해 지난 97년 정식 시장으로 변모했다. ●활황 맞고 있는 골동품 시장 3000여개의 상설·간이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골동품 도매상과 수집 애호가, 관광객들간의 ‘흥정 소리’로 시장 전체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콜라회사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20대 청년은 소매가 닳고 군데군데 해진 청조 시대 비단옷 1벌을 2500위안(약 30만원)에 샀다. 자신의 월급 절반 이상을 투자했지만 그는 “고대의 비단 무늬 복장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 아깝지 않다.”며 웃는다. 그는 ‘짝퉁(모조품)’이 곳곳에서 판치고 있어 각종 관련 서적을 통해 전문지식을 쌓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 수집가인 천펑(陳馮·53)은 ‘사기 조각’이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좌판에 걸음을 멈췄다. 얼핏 아무짝에도 소용 없어 보이지만 진품 조각은 무려 2000위안(약 26만원)까지 거래된다. 골동품 시장에서 모조품이 판을 치고 있어 이 조각들은 진품 판별의 주요 기준이 된다고 한다. 동전 수집 애호가인 또 다른 20대 청년은 청조 말기 쑨원(孫文) 시대의 동전을 개당 5위안씩 100개를 골랐다. 하루종일 전통 향로(香爐)만을 찾아다니는 장카이이(張凱一·62)는 향로 전문가로서 이 곳에서 간간이 나오는 진품을 구입, 애호가들이나 전문 소매상에 되파는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한달 수입이 5000위안을 넘어 중국에선 제법 ‘먹고 살 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판자위안 시장은 중국 전통 예술품과 골동품의 도매상 역할도 하고 있다. 광저우(廣州)에서 왔다는 30대 스님은 부처상과 불주(佛珠) 등 불교용품이 가득 쌓인 점포에서 리어카 1대분의 물건을 구입했다. 다른 곳에 비해 30% 이상 싸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구입, 광저우 인근의 사찰에 공급한다. 이외에 윈난(雲南), 신장(新疆), 티베트 등의 소수 민족은 물론 만족(滿族) 회족(回族) 묘족(苗族) 등의 민속 예술품들도 인기가 높다. 이 곳에서는 문방사우와 도자기, 고가구, 소수민족 복장, 서화, 고서적 등 1000여종의 각종 상품이 판매된다. 주말에는 하루 8만명의 방문객들이 찾고 있으며 골동품 수집가는 물론 일반인과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연간 거래액은 4억위안(약 500억원)∼6억위안(약 750억원)에 달한다는 것이 시장 관리소측의 설명이다. 베이징의 경우 판자위안 외에도 류리창(琉璃廠)·바오궈스(保國寺) 문화거리와 베이징구완청(北京古玩城), 량마 수장품(亮馬收藏品)·훙차오(紅橋)시장 등 10여곳이 성업 중이다. ●작년 골동·예술품 1조3000억원대 거래 중국의 골동품 소장 애호가들은 전국적으로 6800만명을 넘어섰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들의 소장 분야는 고대 청동기와 자기, 옥기, 서화, 가구, 동전, 복식, 편액, 문방사우, 고서적, 고사진 등 다양하다. 지난해 중국 전역에서 거래된 골동·예술품은 대략 100억위안(약 1조 3000억원) 안팎으로 알려졌으며 앞으로 1000억위안(약 13조원) 이상의 ‘발전 공간’이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터넷 예술품 거래도 성행, 지난해 25만여점이 거래됐다.1분마다 2명이 가격을 흥정하고 2분마다 1건씩 소장품이 거래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설명한다. 이러한 열기에 힘입어 골동·예술품 투자는 중국의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떠올랐다. 골동품에 대한 투자 이익은 30%가 넘어 증권의 평균투자 이익률(15%)이나 부동산(21%)보다 유망하다는 분석이다. 베이징 수집가협회 관계자는 “중국경제의 고도성장과 소득확대에 따라 중국인들의 정신문화 수요가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 최근 골동품 관련 정기 간행물은 물론 언론, 방송사들의 골동·예술품 안내 프로그램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모조품 난립·가격체계 혼란 하지만 급속한 시장 확대에 따른 모조품 난립과 가격체계 혼란 등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지난 4월1일 선전에서 열린 ‘제1회 예술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모조품일 정도로 ‘짝퉁’의 폐해는 심각하다. 공정한 시장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거래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화 소장가협회 옌전탕(閻振堂) 회장은 “중국 고전 예술품 시장은 급격히 확대되고 있지만 아직 시장 질서와 안정을 확립할 법적 규제가 미비하다.”며 시장 규범화와 모조 방지를 위한 ‘소장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oilman@seoul.co.kr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원저우(溫州) 상인들이 골동품 시장으로 몰려온다. 중국의 부동산 붐을 일으킨 원저우 상인들은 160만명의 탄탄한 조직망과 1000억위안(약 13조원)의 유동 자산을 번개처럼 움직이는 ‘게릴라 상단’으로 유명하다. 올초 항저우(杭州) 경매에서 140만위안(약 1억 8000만원)에 황빈훙(黃賓虹) ‘청록산수(靑綠山水)’를 구매한 게 신호탄이다. 지난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서화 경매에서는 2000만위안(약 26억원)에 리커란(李可染)의 ‘황산만학도(黃山萬壑圖)’를, 최근에는 당대(唐代) 최고의 화가인 루옌사오의 ‘두보 100절’을 6930만위안(약 90억원)에 사들였다. 최근 중국당국이 부동산 투기근절을 선언하자 수익률 높은 예술품 투자회사를 설립하는 등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예술품 경매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01년부터 약 4년동안 원저우 상인들이 상하이에만 퍼부은 부동산 자금은 100억위안(약 1조 3000억원)이다. 골동품 업계에서는 “전국에 걸친 원저우 조직망을 이용해 고가의 예술품을 싹쓸이할 것”이라며 벌써부터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oilman@seoul.co.kr ■베이징 골동품 상인 수레이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의 농민들은 지금 돈이 되는 집안의 가보나 소장품들을 앞다퉈 내다팔고 있습니다.” 중국에 불고있는 골동품 열풍이 농촌으로 파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판자위안(潘家園) 시장 어귀에 좌판을 깔고 ‘사업’을 하는 수레이(蘇雷·41)는 매달 9000위안(약 110만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는 고소득층이 됐다. 허베이(河北)성 농촌 판타오(蟠桃) 출신인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베이징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96년부터 골동품 장사로 나섰다. 주로 100∼2000위안짜리의 중·저가 향로나 촛대, 자기류가 주종이고 간혹 명·청대의 고급 도자기 등도 매매하고 있다. 고객들은 주로 수집가이지만 최근 도매 상인들이나 외국 관광객들의 출입도 잦아지고 있다. 젊은층 중심의 수집가들이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서방 세계를 흠모하던 청년층들이 요즘 들어 ‘중국적인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골동품·서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도 새로운 고객이 되고 있다. 그는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는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지만 지난해부터 골동품 바람이 불면서 수입이 3∼4배나 늘었다.”며 최근 젊은층들이 골동·예술품 구입에 가세하면서 시장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oilman@seoul.co.kr
  • 화장품 브랜드숍 특장점 가이드(下)

    화장품 브랜드숍 특장점 가이드(下)

    “골라 바르는 재미가 있어요.” 서울 명동 마니아인 홍은미(33·서울 마포구 창전동)씨는 요즘 화장품 브랜드숍을 파헤치느라 바쁘다. 일 주일에 한 차례씩 이곳에 나와 브랜드숍을 하나씩 훑고 있다.“내 피부타입에 맞는 화장품을 고르는 ‘숨은그림 찾기’죠. 비싸지 않으니까 맘놓고 사고, 문제가 생기면 100% 교환해주니까 걱정 없어요.” 홍씨는 색조는 물론 기초·보디화장품도 각각 다른 매장에서 구입했다. 명동에 20군데가 넘는 화장품 브랜드숍이 몰려 있는 까닭이다. 어느 브랜드숍에 가면 내가 찾는 화장품이 있을까. 가격은 얼마일까. 매장별로 어떻게 다를까. 명동과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 들어선 화장품 브랜드숍 14곳을 직접 찾아가 봤다. ●1등을 고수하라 미샤(www.beautynet.co.kr)는 화장품 브랜드숍의 개척자다. 명동에만 점포가 4곳이다.2000년 ‘비싸야 잘 팔린다.’는 업계 통념을 깨고 중저가 화장품 시장을 열었다. 가격은 1000∼9800원. 인터넷에 이어 2002년에는 종합화장품점에 맞선 단독 브랜드숍도 오픈했다. 중저가 브랜드로선 세계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모험은 성공했다. 미샤는 제품 가격이 1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코스메틱넷(www.cosmetic.net)은 미샤에 이은 ㈜에이블씨엔씨의 두번째 브랜드. 지난해 6월, 미샤의 색조화장품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 탄생했다. 미샤의 대표 색상이 빨강이라면 코스메틱넷은 초록이다. 매장 인테리어는 물론 직원 유니폼도 그렇다.‘자연주의’를 강조한 것. 주원료도 포도씨 오일, 녹차, 토마토, 알로에, 대나무, 망고, 키위, 아세로라 등 식물 추출물로 제한했다. 기준 가격은 미샤가 3300원이라면, 코스메틱넷은 3800원이다. 인터넷 판매도 활발하다. 배송은 무료. 더페이스숍(www.thefaceshop.com)은 미샤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무서운 기세로 추격했다.2003년 12월 명동에 1호점을 낸 뒤 매장을 국내 321개, 해외 40개로 늘렸다.‘자연주의 화장품’ 이미지 덕에 중저가 브랜드숍인데도 기초화장품이 인기다.3300원 상품은 눈에 띄게 줄었고,1만 4900원짜리(주름개선 에센스)도 등장했다. ●후발주자, 발걸음 재촉하다 성공신화를 쫓아 소망화장품과 보브, 도도화장품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초 뷰티크레딧, 캔디숍, 도도클럽을 나란히 런칭한 것이다. 강남 뷰티크레딧(www.beatycredit.co.kr)은 화장품과 더불어 먹을거리도 판매한다. 아름다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제공한다는 개념. 페퍼민트티, 인삼잎차와 말린 과일, 비타민 등까지 갖췄다. 동결 건조시켜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딸기, 감, 사과(각 2500원) 등이 인기상품. 제품의 특·장점을 자세히 적은 이름표를 붙여놓아 편리하다. 회전목마, 대형 커피잔, 꽃그네를 매장 내에 설치한 것도 특이하다. 소비자가 사진 찍고 쉴 수 있도록 마련했단다. 제품에 만족하지 않으면 100% 환불한다는 정책을 갖고 있다. 동대문 캔디숍(www.myvov.xom)은 신세대 스타 문근영을 내세운 색조전문 브랜드.1000∼9900원 가격대로 10대 후반∼20대 초반을 공략한다. 아이섀도, 마스카라, 립글로스, 네일 색상이 다른 곳보다 선명하고 다양하다. 우울한 날 튀는 화장을 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 오렌지향을 머금은 비타민 화장품 C24가 히트상품. 스킨·로션이 각 5300원이다. 눈에 띄는 제품은 2000원짜리 마스크팩 5장을 플라스틱 통에 넣어 7000원에 판매하는 것. 한쪽으로 기울이면 에센스가 흘러내리는 게 흠이다. 명동 도도클럽(www.dodoclub.co.kr)에는 개성 넘치는 화장품이 많다. 펀펀 볼터치와 파우더는 용기에 분첩을 붙여 뚜껑만 열어 얼굴에 직접 톡톡 바르도록 고안됐다. 아이섀도에도 거울(8800원)을 추가했다. 두가지 립글로스를 손가락만한 투명 플라스틱에 넣은 제품(4800원)도 인기다. 중간을 열어 붓으로 찍어 바른다. 도도클럽의 대표 제품은 빨간통 파우더.15g을 7700원에 판매한다.1만원을 넘기지 않는다는 경영전략이 묻어 있다. ●고급 브랜드숍도 있다 외국산 고급 화장품도 단독 브랜드숍을 열고 있다. 명동에 들어선 영국의 ‘더바디숍’과 호주의 ‘쥴리크’가 대표적이다. 더바디숍(www.thebodyshop.co.kr)에선 목욕용품(8500∼3만 9000원) 외에 다양한 기초(1만 1900∼4만 5000원)·색조화장품(9000∼2만 9000원)을 만날 수 있다. 직접 발라보고 씻도록 매장에 세면대를 놓았다.1호점인 명동은 1층 매장,2층 손톱손질 카페,3층 야외 카페,4층 웰빙 스파로 구성, 커피를 마시며 마사지를 즐기도록 했다. 식물성 화장품 원료는 아프리카 오지 원주민들이 천연의 자연환경에서 재배, 공급하는 것이다. 설립자 아니타 로딕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제3세계 지역 단체와 협력관계를 맺은 덕택이다. 쥴리크(www.jurlique.co.kr)는 유기농 허브와 꽃만으로 화장품을 만든다. 쥴리크 본사가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40여종의 허브를 유기농법으로 직접 재배한다. 화학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모든 화장품에서 풀잎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색상도 반투명이거나 흰색으로 단조롭다. 가격은 2만 1000∼19만 5000원. 명동 1호점은 기초화장품과 목욕용품, 아로마테라피 등을 갖춘 1층 매장과, 스파를 받을 수 있는 2·3층으로 구성돼 있다. 글 사진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이란 대통령선거 막판 3파전

    이란 대통령선거 막판 3파전

    17일(현지시간) 실시되는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당초 하셰미 라프산자니(70) 전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세 명의 후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라프산자니 지지율 하락 이란 여론조사기관 ISPA가 지난 14일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총 7명의 후보 가운데 실용보수파로 평가되는 라프산자니 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지지율은 선거운동 초반 35%에서 21.7%로 크게 떨어졌다. 이어 보수파인 모하마드 바르크 칼리바프(43) 후보가 14.4%의 지지율로 2위, 개혁파 무스타파 모인(54) 후보는 11.5%로 3위를 달리고 있다. 부동층은 21%로 조사됐다. 1989∼1997년 대통령을 지낸 노련한 정치인 라프산자니는 전국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고 폭넓은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반면 고령인데다 ‘카멜레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치적 성향이 오락가락한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제2의 하타미’를 자처하는 모인은 민주주의 법제화, 자유 증진, 여성 권리 신장 등 개혁적 공약을 앞세워 청년·여성층의 인기를 얻고 있다. 선거 초반 5.5%에 불과했던 지지율이 2배 이상 오른 것에 고무돼 있다. 칼리바프는 이란의 최고권력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15일 보수파 후보였던 모흐센 레자이가 사퇴하면서 보수층의 몰표를 기대하고 있다. ●청년·여성 투표참여가 성패 좌우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재 추세로 볼 때 1차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는 후보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오는 24일 또는 다음달 1일 1,2위 후보가 결선 투표를 벌이게 된다. 칼리바프가 선전하고 있지만 보수진영이 후보단일화에 실패, 보수층 표가 분산돼 결국 라프산자니와 모인의 대결로 압축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결국 유권자의 70%를 넘는 30세 이하 청년층이 얼마나 투표에 참여할지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 영국 가디언은 이란 사회에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여성들이 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될까 라프산자니는 14일 CNN과의 회견에서 “미국과의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 때가 됐다.”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은 중단할 수 없지만 국제기구의 사찰을 폭넓게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모인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잠정 중단할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결국 최고권력자 하메네이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모하마드 알리 압타히 전 이란 부통령은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은 미국과 수차례 관계개선을 시도했지만 하메네이가 막았다.”면서 “차기 대통령도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꼭꼭 숨어라 과학 보인다”

    ‘극과 극은 통한다.’미술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온 계기로는 16세기 원근법 도입,19세기 카메라 발명,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과학이론의 발달,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즉 인간 감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미술작품이 이성의 산물인 과학기술과 맞물려 진보를 거듭한 셈이다. 세계적인 명작 속에 녹아있는 과학을 들여다본다. ●기하학을 모르면 화가도 아니다 15∼16세기 르네상스시대 초기에 활동한 화가 지오토의 ‘죄없는 학살’은 3차원적 깊이감, 즉 원근법을 살린 최초의 작품이다. 기존의 미술작품은 대다수 문맹자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돼 오로지 신에 대한 신앙심을 표현했을 뿐, 사실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오토의 원근법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자로 잰 듯한 수학적 원근법은 마사초에 의해 제시됐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는 원근법이나 비례법 등 기하학의 원리를 모르고는 화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크게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같은 기하학적 원리를 절묘하게 활용, 예수와 12명의 제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해 구성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 ‘모나리자’에서는 기존의 정밀한 선을 활용한 원근법 대신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해 원근감을 표현하는 공기원근법이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모나리자의 신비감이 더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원리가 미술작품 전체를 지배한 것은 아니다. 수학적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프란체스카의 ‘성스러운 대화’의 경우 그림 중간에 위치한 달걀이 원근법에 맞지 않게 크게 그려졌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됐다는 성스러운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뜻으로 풀이된다. 즉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때론 과학을 희생시키기도 한 것이다. ●미술가의 눈은 곧 과학자의 눈 17세기 바로크시대에 접어들면서 화가들은 선과 색채 대신 빛과 어둠이 주는 광학적 효과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는 ‘의심하는 도마’ 등에서 빛을 극적으로 활용해 인간의 심리상태까지 묘사했다. 이어 램브란트의 ‘야간순찰’도 작품에 역동감을 불러오는 매개체로 빛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은 이 작품이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당시에는 작품 외적인 요소 때문에 램브란트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순찰대원들의 얼굴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한 후원자들이었으나 그림이 완성된 후 얼굴이 어둠에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자 후원금을 돌려달라는 소동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평가를 받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 소녀’도 빛이 들어오면서 뺨과 콧날의 선을 투명하게 처리해 해체함으로써 특별한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이처럼 빛을 포함한 외부세계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18세기말 영국 풍경화에서 꽃을 피운다. 자연의 현장감을 살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과학자의 눈을 빌려 대기의 흐름까지 그림에 표현했다. 영국 풍경화의 대부 컨스터블과 영국 최고의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터너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학이 어려워지면 미술도 어려워진다 그러나 19세기 카메라의 발명은 이같은 화풍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며 동시에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현대미술을 낳는 씨앗이 됐다. 마네의 ‘오페라 홀에서의 가면무도회’에서는 16세기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던 원근법이 파괴됐다. 이는 2차원적인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할 수 없다는 회의에서 출발, 미술의 본질을 추구하겠다는 의도였다. 모네는 ‘노적가리 연작’ 등의 작품을 통해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모습을 그려냈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와 색채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한 장소에 14개의 캔버스를 놓고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세잔의 ‘생 박토아르 산’에서는 한쪽에서만 들어오는 빛, 한 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점 등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미술에서 고정관념에 대한 의문과 파괴 현상은 20세기 초반 각종 과학이론이 발표되면서 더욱 증가했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달리의 ‘기억의 고집’에서 등장하는 늘어진 모양의 시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영향을 미쳤다. 즉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시간의 속성을 보다 유연하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또 입체주의 화가인 파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X-레이의 등장으로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사물을 기하학적으로 해체,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처럼 과학의 영향을 받는 미술은 20세기 후반 컴퓨터 등 이미지를 시각화할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되면서 과학과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기도 했다. 광학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옵티컬아트의 경우 과학이 곧 미술이라는 사조도 만들어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처럼 새로운 과학적 비전을 제시하는 과학자나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이 앞으로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 도움말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국민대 미술학부 겸임교수)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윤원아, 신원아, 월요일자 신문 꼭 봐라. 우리 회사가 크게 나온다.”(고 최종건 SK 창업주) “아버지,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최신원 SKC 회장) “그때 보면 알 수 있어, 이놈들아.”(고 최종건 창업주) 최신원 SKC 회장이 공개한 워커힐호텔 인수 직전 부자간에 오갔던 대화다.1973년 1월 선경(현 SK)은 정부로부터 서울 워커힐(현 쉐라톤 워커힐)호텔을 26억 3200만원에 인수하며,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선경이 국민과 재계에 던진 ‘무명의 반란’이었다. 최종건 선경(현 SK) 창업주가 맨손으로 선경직물을 일으킨 지 20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최 창업주는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별세,‘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원대한 꿈을 동생인 고 최종현 SK(당시 선경직물 부사장) 회장에게 맡긴 채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갔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최 창업주가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25년간 SK를 이끈 고 최종현 회장은 ‘석유’를 개척하고,‘이동통신’의 길을 터놓았다. 고 최종현 회장의 50년 지기(知己)인 언론인 홍사중씨가 본 형제는 이렇다.“형(최종건)은 좋은 의미의 ‘보스형’이었다. 의논할 상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는 모든 일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동생(최종현)은 ‘리더형’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좋은 짝이었다.” 소리없이 일을 꾸미는 사람은 동생이요, 밖에서 뛰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서 회사 돌아가는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형을 가리켜 ‘용장’이라 했고, 아우를 가리켜서 ‘지장’이라 했다. 형제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SK를 자산규모 재계 4위의 대그룹으로 일궈냈다. ●‘원조 불도저’ 최종건 창업주 최근 재계 CEO(최고경영자) 가운데 강한 추진력과 남다른 승부 근성 때문에 ‘불도저’라 불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 불도저라는 애칭은 최 창업주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의리파, 불같은 추진력, 강한 뚝심’은 최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비’ 같은 성격에 ‘조조’의 꾀도 많았다. 이런 점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 하나.1966년 선경직물은 차관 도입 문제로 일본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선경직물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싶었던 최 창업주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술집 마담에게 거짓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하라는 것. 술집 마담은 때가 되자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말을 건넸다. 최 창업주는 일본 관계자 앞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가겠다.”고 밝힌 뒤 2시간 가량 단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 오느라 늦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은 최 창업주가 정부 최고위층의 부름을 받고 나간 것으로 모두 오해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선경직물이 정부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구나.’를 암시하며, 차관 도입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그의 장비 같은 성격은 또 이렇다. 최 회장의 지인들은 그가 다혈질인 데다 성미가 급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화가 나면 앞뒤 생각없이 퍼부었다. 그러나 뒤끝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화난 얼굴로 “누구 불러오라.”고 불호령을 내리면 서울에 있으면서도 일본으로 출장갔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고 회고한다. 최 창업주는 1926년 수원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양분, 양순, 종건, 종현, 종분, 종관, 종순, 종욱)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취직, 사회 첫 발을 내디뎠다.24세 때인 1949년에는 교하노씨인 노순애(77)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선경직물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상반된 스타일의 ‘안주인’ 노순애 여사가 넉넉한 시골 인심을 느끼게 한다면, 최종현 회장의 부인인 고 박계희 여사는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풍긴다. 노 여사는 시동생과 시누이 등을 거느린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만만치 않게 했다. 차남 최신원 SKC 회장의 얘기다.“100마지기 농사 일에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셨으니 고생이야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부친은 사업 때문에 공장에서 먹고 자며,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었습니다.” 노 여사의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에 반한 최 창업주의 누나 최양분(83) 여사는 그를 맏며느리감으로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고 박 여사는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넷째딸로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라마주대학을 졸업했다. 최종현 회장과 만났을 때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자기 의사를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태원에 가서 1만∼1만 5000원짜리 옷을 사 입을 정도로 검소하고, 깍쟁이였다. 고 박 여사가 모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내가 ‘이태원표’ 옷을 입고 있으면 모두들 몇십만원짜리로 아는데, 그래서 더욱 그런데 가서 사 입어도 불편한 게 없어요.” 최 회장도 부인을 깍쟁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병마와 씨름하던 그는 먼저 간 박 여사를 두고 “자기 성격 따라 깍쟁이처럼 죽었다.”고. 박 여사는 1997년 6월18일 최 회장의 폐암 수술 경과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두 ‘안주인’은 상반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특히 가정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박 여사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도 최 회장이 일찍 퇴근하면 아무리 중요한 미술관 행사를 주재하는 중이라도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은 “모친은 외출도 좋아하시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라며 “두 분께서 같이 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골프였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과 혼맥 고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은 이렇다. 그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책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에서 “나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지켜본 바에 따라 나는 남녀간의 연애과정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연애는 ‘date→steady date→I love you’, 이렇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처음에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다가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를 하지 않는 ‘스테디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면 ‘아이 러브 유’가 되어 결혼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너 없이는 못살아.’가 되는데 이것은 병이다.” 최 회장 본인의 경험 때문일까. 최씨가의 2세들은 정략이나 중매 결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특히 최종건 전 회장이 일찍 별세한 이후 최종현 전 회장이 사실상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자임했던 만큼 ‘큰집’ 조카들도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신원 SKC 회장은 “숙부는 자식들 결혼과 관련해서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면서 “예물 등도 가능한 한 안 주거나 받지 않는 주의였다.”고 설명했다. 장남인 최태원(45)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결혼했다. 부친과 똑같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 관장을 만나 연애했다. 차남인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의 부인은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다. 막내딸 최기원(41)씨는 당시 ㈜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46)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큰집’인 고 최종건 회장의 일가 혼맥도 학계부터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는 없어 보인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인 채헌(51)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원(50)씨의 남편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54)씨며, 차녀 혜원(48)씨는 박주의 전 금융인 아들인 박장석(50) SKC 사장과 결혼했다. 막내 아들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은 변호사 집안인 최유경(38)씨와 결혼했다. 4녀 예정(43)씨의 남편인 이동욱(43)씨가 최종건가(家)에서는 눈에 띈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의 부친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 양가가 둘의 결혼을 일찍이 약속을 했고, 결혼은 최 창업주 사후에 이뤄졌다. 고 최종건 회장이 각별하게 지냈던 재계 인물로는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었으며, 언론계에서는 고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방계로 넘어가면 장녀 최양분 여사는 한때 종건·종현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고 표현구 전 서울대 농대 학장과 결혼했다. 표문수(52) 전 SK텔레콤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3녀 최종분(73) 여사는 고 이한용 신아포장 대표와 혼인했으며, 막내 사위인 정재현(46)씨는 현재 SK C&C 전무로 일하고 있다. 차녀 최양순(82) 여사는 고 여운창 경기개발 대표와 결혼했으며,4녀 최종순(69) 여사는 해군 중령 출신인 고 조제동씨에게 시집갔다. 3남 최종관(71) 전 SKC 고문은 장명순(71) 여사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3녀 경원(42)씨가 김연준 전 한양대 이사장 아들인 김종량(55) 한양대 총장에게 시집갔다. 또 4녀 은성(40)씨는 나웅배 전 부총리 아들인 나진호(42)씨와 짝을 이뤘다. 장녀 순원(47)씨는 존 캐리 퍼크너(47)씨와 국제 결혼했다. 장남인 최철원(36) 마이트엔메인 대표이사는 한숙진(34)씨와 인연을 맺었다. 4남 최종욱(66) 전 SKM 회장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 딸인 조동옥(59)씨와 결혼했다. 조씨의 남동생이 조동성 서울대 교수다. 미혼인 장남 준원(30)씨는 현재 SK C&C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차녀 윤선(29)씨도 통신·방송장비 전문업체인 SK텔레시스에서 일하고 있다. ●섬유에서 석유…정보통신 SK그룹의 모기업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193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鮮滿綢緞)과 일본의 교토(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교토직물은 현물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를 비롯한 건물 공사비 등을 투자했다. 상호도 선만주단의 ‘선’자와 교토직물의 ‘경’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고 지은 것이다. 고 최종건 회장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부친 몰래 빼낸 땅문서로 공장을 불하받는다. 이후 선경직물은 나일론 생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섬유기업으로 탈바꿈한다. SK의 성장사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3단계로 나눠진다.1단계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현 SK케미칼) 건설.2단계는 유공(현 SK㈜) 인수,3단계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다. 소프트웨어로 볼 때 최종현 회장의 경영 참여와 이순석과 손길승, 김항덕 등 1세대 전문경영인의 합류 등이다. 1980년은 유공 인수로 선경의 숙원 사업을 달성한 해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울산을 오가며 국내 유일의 정유사였던 유공을 넘본 지 10년 만이다.‘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위해 매진한 결과, 돌아온 보상이었지만 당시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선경은 유공을 손에 넣자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경이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상한 것은 80년대 초반까지 올라간다. 당시 국내 어느 기업도 정보통신사업에 대해 꿈도 꾸지 않을 때,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방문길에서 통신사업에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미국 현지에 경영기획팀을 만든다. 이것이 훗날 한국이동통신 인수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는 밑거름이 됐다. golders@seoul.co.kr ■ 풍수지리 거부한 최씨 형제 “집터보다 내 기가 더 세니까 염려들 말어.” 국내 재벌가(家)가 최근 서울 한남동과 이태원동에 둥지를 트는 까닭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곳은 남산을 베개삼아 한강으로 다리를 곧게 쭉 뻗어 복록과 자손복이 대대로 넘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아예 재벌가 ‘집성촌’으로 불린다. 이처럼 집터의 풍수지리를 꼼꼼히 따지는 재벌가에서 유독 이에 무관심한 집안이 있다.SK그룹 최씨가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1968년 서울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 데이진 오야 사장의 부인이 풍수지리를 잘 안다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삼청동 자택의 지형 사진을 보내달라고 연락해왔다. 당시 최 회장과 오야 사장은 비즈니스를 떠나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오야 사장은 당시 일본 정·재계의 거물로 최 회장의 호탕한 성격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야 사장 부인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 탓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잠옷만 두 박스를 가지고 왔으며, 매일 밤 우유로 목욕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최 회장은 이들이 한국에 머물 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을 본 오야 사장 부인은 “지형이 사나워 좋지 않다.”며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삼청동 자택은 화재로 가정부가 화상을 입어 숨진 데 이어 여름 장마철에 큰 물난리를 겪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집터의 기가 세서 그런 것이니 이사가는 게 좋다고 자주 권했다. 그래도 최 회장은 “내 기가 집터보다 더 세니 염려말라.”고 했다고 한다. 고 최종현 회장도 집터와 관련된 고집은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 풍수지리 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최 회장이 사는 서울 워커힐 호텔 내 빌라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인 탓에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며 이사를 권했다. 그는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전 회장이 풍수지리 연구를 위해 교수직을 내던진 최 전 교수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조건 없이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맺어졌다. 최 회장은 그러나 “집이란 어차피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며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최 회장은 훗날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여기서 산 지가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느냐.”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golders@seoul.co.kr ■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 ‘그룹부흥 한몫’ “손길승 실장은 단순히 내가 부려먹는 사원이 아니라 나의 비즈니스 파트너, 동업자입니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 받을 때 일개 그룹 기획실장이 거액의 정치헌금을 다룰 수 있느냐는 검사의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손 회장을 경영 참모가 아닌 동반자로서 얼마나 믿고, 의지했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정태수 한보 회장의 ‘머슴론’과 비교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SK그룹이 오늘날 재계 서열 4위의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순석 전 ㈜선경(현 SK네트웍스) 부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김항덕 고문 등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들의 역할은 이 전 부회장이 ㈜선경, 김 고문은 유공(현 SK㈜), 손 전 회장은 경영기획실로 나눠진다. 특히 손 전 회장은 20년간 기획실에서만 근무해 직업이 ‘기조실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59학번 서울대 상대 동기 출신으로 때로는 ‘맞수’로 경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회장이 1995년 가장 먼저 SK를 떠났으며, 한때 ‘좌(左)길승, 우(右)항덕’으로 불렸던 전문경영인 체제도 결국 손 전 회장의 단독 체제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김 고문은 손 전 회장이 당시 그룹 회장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최종현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룹 회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 격론을 벌인 결과, 그룹 전반을 꿰찬 사람은 손길승 전 회장 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명분이나 이치에도 맞았고요. 그리고 나는 사심없이 회사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손 전 회장은 1998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야인으로 물러났던 김 고문을 회장대우 상임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는 회장 집무실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김 고문에게 제공했고, 경영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 그러나 3인방 가운데 ‘SK호’에 가장 먼저 탑승한 사람은 이 전 부회장이다. 그는 1965년 4월 고 최종건 회장의 설득에 못이겨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수원 출신으로 최종욱 전 SKM 회장과는 초등학교 동기다. 김 고문은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69년 선경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는 39세 때 대한석유공사의 수석 부사장에 올라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전 부회장의 강력한 권유로 65년 12월에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지난 40년간 고 최종현 회장의 평생 동지이자, 경영 전도사였으며,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였다. 그는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그룹 회장에 오른 최초의 전문경영인인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목소리의 마술사’가 있다. 반세기 동안 격동의 현대사를 ‘목소리’ 하나로 관통했다. 질곡의 50년 세월속에 가느다란 성대의 떨림으로 감동과 추억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연출했다. 타고난 ‘천(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쥐락펴락했다. 암울했던 1960∼70년대, 라디오의 ‘연속방송극’과 ‘추억의 영화’ 등 무려 1000여편에 출연했다.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얼굴없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 주변에서 이꼴저꼴 다 보면서 연설과 다큐멘터리 대역(代役) 등을 해 흥미진진한 야화도 간직하고 있다. ●‘여자의용군 예술대’ 자원입대 고은정(70)씨.1954년 12월 KBS 성우 공채 1기로 출발,50년 ‘목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단막극을 직접 쓰고 출연까지 했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모호텔 정원에서 만났다. 먼저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름 아닌 6·25에 참전했던 것.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0년 11월 어느날. 수도여중 3학년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고은정은 친구들과 모여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대열에 합류하는데 우리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며칠 뒤 고은정은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막사는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 자리). 때마침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가칭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됐다. 고은정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외출허가가 떨어졌다. 이때 가족들이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어떻게 외출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귀대했다. 그런데 동료 3분의1가량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어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별도의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당도했다.(관련자료에 따르면 50년 9월 여군교육대가 부산에서 결성됐으며, 군부대와 병원 등의 위문을 위해 군악 및 예술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번 0995862 육군 제대 부산에 도착한 예술대원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 이브때 고은정은 면회 온 목사의 도움으로 십수권의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워낙 책을 좋아한 데다 병원위문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숙소 앞에 ‘소공녀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그러던 51년 2월 부대에서 휴가를 다녀오란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지난번 도움을 받은 목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때마침 목사는 제주도의 피란민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은정도 목사와 함께 떠났다. 도착했더니 돌아올 여객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목사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복귀를 하지 못했다. 고은정은 관계요로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전한 뒤 그해 2월 제주 오현중에 설치된 피란민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 고씨는 “얼마전 육군에 확인해 보니 군번도 있고 제대처리돼 있었다.”면서 당시 입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눈다고 귀띔했다. # 에피소드 1. 74년 8월14일이었다.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 더빙을 하느라 밤을 새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고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했다. 고씨는 의사 동생과 함께 갔다. 육 여사는 진작 보고 싶었다며 “조국을 위해 고생이 많은데 부탁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고씨는 “서울신문에 다니던 오빠가 필화사건으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고씨는 육 여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단골로 등장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들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TV 전원이 꺼졌다.8·15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피격사건’이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육 여사 다큐멘터리에 더욱 많이 출연하게 됐다. 박근혜씨가 영부인 역할을 맡을 때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는 고 선생의 목소리가 엄마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뒤 연말마다 청와대에서 금시계를 보내왔다. ●대통령 부인들과 자주 만나 # 에피소드 2. 5·16 직후였다. 동아방송에서 ‘천일야화’라는 대담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김종필(JP)씨를 초청했다. 시간이 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찾아나섰다. 점퍼차람의 한 사람이 방송실 입구에서 “나를 찾는 겁니까.”하고 말했다. 인사를 하자 JP는 “고 선생은 골라쓰는 단어가 아주 달라요.”라고 했다. 인연이 돼 나중에는 JP자택에서 부인과 자주 만나게 됐다. “80년대 초반 민정당 창당대회 때 권정달씨의 부탁으로 봉두완씨와 사회를 같이 보게 됐지요.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정치 언저리에 맴돌게 된 것 같아요. 여성계 대표라는 명분으로 종종 청와대에서 이순자·김옥숙 여사와 식사도 했지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마침 우리 아들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8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노태우 후보측에서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이종찬씨도 함께 있었다. 노 후보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노씨는 “고 선생, 어떻게 하면 목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종찬씨는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고씨는 “소염제를 먹고 당분간 필담으로 대화할 것”을 주문한 뒤 연설 때 5만,10만 관중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자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상대로 감동을 시킬 것을 권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오히려 장점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어 노 후보가 여성정책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자 “이제와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은들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까지 애처가라는 소문만 잔뜩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전직 대통령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설득력은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현대적 감각에는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0분 동안 113개의 언어가 틀릴 정도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나라에선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고씨는 “스피치는 공인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한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출강에 여전히 방송활동 고씨는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고흥숙.‘흥’자 돌림이다. 막내동생이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흥길(성남시 분당갑)씨. 오빠 고흥욱(72)씨는 청와대 출입을 오래한 기자출신으로 현재 LA에 산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걸어와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는데 무슨 일이냐.”고 뜬금없이 물어 “아냐, 길은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겠지.”하고 대답했단다. 어머니는 5남매를 남겨놓고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54년 교통사고로 일찍 명을 달리했다. 새어머니는 5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 현재 94세로 분당 아들집에서 산다. 고씨 자신은 59년에 결혼, 이듬해부터 연년생으로 자식 넷을 낳았다. 함께 지내는 둘째딸(44)을 제외하곤 다들 결혼했다. 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해 고비를 맞았지만 요즘은 서울예대 장로신학대 출강과 극동방송에서 매일 10분짜리 방송 등을 하며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사를 쓰고 있어요. 여름방학 때는 밀린 대본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일생을 담은 모노드라마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36년 서울 출생 ▲ 51년 제주 피란민학교에서 수도여자중학 졸업 ▲ 54년 수도여고 졸업, 숙명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KBS 성우공채 1기 ▲ 56년 최초 연속방송극 ‘청실홍실’ 성우 ▲ 58년 연속방송극 ‘산너머 바다건너’에서 상하이 여자 ‘미라’역을 맡아 주목받음. ▲ 이후 ‘장희빈’‘고운정 미운정’‘왕비열전’‘대동강은 알고 있다.’‘불꽃의 소리’‘113수사본부’등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000여편 출연. ▲ 77년 드라마 ‘대니할머니’당선으로 방송작가 데뷔. ▲ 97년 고은정언어예술원 개원 ▲ 98년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 2000년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저녁노을, 사랑의 계절, 두고온 언니에게 등. ■ 소설작품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 상훈 국민훈장동백장(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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