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장혁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31
  • TV 단신/ ‘명랑소녀 성공기’ 오늘 막내려

    ◆최고인기 드라마로 올라선 SBS 수·목드라마 ‘명랑소녀성공기’가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뒤로 하고 2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장나라,장혁의 연기와 장기홍 PD의 연출력이 어우러진 이 드라마는 미니시리즈로는 드물게 초반부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극 중반이후에는 30∼40%대의 시청률을 넘나들며 ‘장나라·장혁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정통드라마에 첫 출연한 장나라는 안방인기를 이끈 일등공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지상파 중계가 30년만에 사라진다.오는 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제46회 ‘미스코리아선발대회'는 케이블 TV와 인터넷(misskorea.hankooki.com)으로만 방영된다. 지난 1972년부터 지상파로 생중계된 이 대회는 여성계로부터 미적 기준의 획일화,성의 상품화를 부추긴다는 비난을받아왔다.여성연합과 한국여성민우회,여성의전화연합 등은 93년 미스코리아 선발과정에서 뇌물과 청탁 등으로 관련자들이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미인대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나섰다.
  • SBS ‘스타GOGO’ 출연진 불참

    지난 27일 방영된 SBS의 오락 프로그램 ‘스타 Go Go’에 예고된 출연진이 나오지 않자 시청자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스타 Go Go’는 방송 전 god,핑클,신화,장나라,장혁 등이 출연한다고 광고를 했다.하지만 god를 제외하고는 2∼3분 정도만 나오거나 아예 출연조차 안했다.방송 뒤 이 프로그램의 게시판에는 100여건의 항의성 글이 쏟아지고 있다. 네티즌 정영숙씨는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의 인기를 업고 장혁,장나라 팬들을 이용했다.”고 의견을 달았고,김선영씨는 “시청자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SBS는 사과해야 한다.”며 강하게 항의했다.연출을 맡은 심성민 PD는 “프로그램 앞뒤로 대선후보 방송이 나가면서 방영시간이 줄어 불가피하게 편집됐다.”고 해명했다.
  • ‘4월 중소기업인’ 박주철 서원 대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4월의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서원 박주철(朴株哲) 대표이사를 선정했다고 26일밝혔다. 박 대표이사는 지난 97년 전문경영인으로 취임해 전사적수익률 향상운동,공장혁신 및 경영혁신활동,공정자동화 등을 통해 연평균 10% 이상의 매출신장과 재무구조 건전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됐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새음반/ 명랑소녀 성공기 OST 발매

    ◆명랑소녀 성공기 OST= 30%가 넘는 시청률을 자랑하며 젊은 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SBS드라마스페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조장혁이 부른 주제곡 ‘러브송’을 비롯해 장나라와 장혁이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회상하는 ‘혼자 지킨 사랑’,두 주인공의 깊어가는 사랑을 그린 ‘사랑이 온거야’ 등 16곡이 실려있다.예전미디어. ◆Rock In Rio= 80년대를 대표하는 헤비메탈그룹 아이언 메이든의 라이브 앨범으로 2001년 브라질 공연 실황을 담았다.아이언 메이든은 이를 제외하고도 5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는 등 라이브 음악에 강하다.이번 앨범은 세계 최대의 록페스티벌인 ‘Rock In Rio’에 16년만에 참가한 아이언 메이든의 진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록페스티벌의 이름과 동명의 앨범을 내놓아 그들의 열정적인 라이브 사랑을 과시했다.EMI.
  • 새영화/ ‘정글쥬스’

    “에라,이 양아치같은∼” 상대도 하기 싫을 만큼 비굴한 이에게 갖다붙이는 시쳇말이다.뒷골목을 전전하면서도 제대로 주먹 한 번 쓸 줄 모르고,되도록이면 고민은 하지 않되 최대한 세상을 즐기며살고픈 단순한 인생관의 소유자들.영화 ‘정글쥬스’(제작 싸이더스·22일 개봉)는 딱 그런 유형의 남자 둘이 주인공인 ‘생양아치 영화’다. 아무리 잘 봐주고 싶어도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는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다.꼬마들 모아놓고 걸핏하면 동네축구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철수.뭣 하나 내세울 것없이 잔뜩 폼만 잡는 기태. 청량리 사창가에 빌붙어 살며 둘이 기껏 함께 한다는 짓이 친구같은 창녀 멕(전혜진)을 붙들고 하는 정력 겨루기다. 그런 그들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게 만드는 사건이 생긴다. 조폭의 중간보스인 민철(손창민)의 마약거래에 끼어들었다가 꼼짝없이 그가 잃어버린 마약값을 물어주게 생겼다. 영화속엔 상식을 기대할만한 인간유형이라곤 아예 없다. 마약값을 물어주려고 엄마같은 아줌마에게 몸을 팔고,꼬맹이들의 코묻은 돈을뺏는 것도 모라자 장기까지 팔려는 기태와 철수에게서 영화의 특별한 스케일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힘들다.잃어버린 마약봉지를 우연히 손에 넣은 이들이 부산까지 원정밀매하러 나선 것도 멕의 배짱 덕분이다. 정글쥬스란 여러가지 약을 뒤섞어 만든 즉석 환각제.범죄와 폭력의 수위는 잔혹액션 뺨치게 높지만 가볍게 난무하는 욕지거리와 잡다한 유머에 얼렁뚱땅 희석됐다. 피비린내가 역겨울 만큼 과잉인 데도 낙천적이고 씩씩하고 경쾌한 액션영화라는 ‘환각’을 일으킨다.‘개같은 날의 오후’,‘인샬라’를 조연출했던 조민호 감독의 데뷔작. 황수정기자
  • 드라마 데뷔한 가수 장나라 “사투리 대사 너무 힘들었어요”

    드라마 데뷔한 가수 장나라 “사투리 대사 너무 힘들었어요”

    “정식드라마 도전은 처음인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처음 대본 연습을 할 때 사투리가 너무 힘들었어요.이제는 평소 생활에서도 충청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와 걱정이긴 하지만…” 13일 첫 방송될 SBS 새 수목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오후 9시55분)로 드라마에 도전하는 가수 장나라(22).인터뷰내내 얼굴을 찡그렸다가 혀를 내미는 등 온갖 표정을 지어보여,귀여우면서 개성있는 모습이 보는 이를 유쾌하게 한다.동그란 얼굴과 눈,오똑하고 작은 코와 입술이 마치 어릴 적 갖고 놀던 깜찍한 바비인형이 살아서 걸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명랑소녀 성공기’에서 그의 역할은 충청도 산골에서 자라나 서울 부잣집 가정부로 상경한 뒤,화장품 회사의 홍보사원으로 성공하는 차양순.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명랑함으로 일과 사랑을 성취하는,만화같은 캐릭터이다. “평소에 동경했던 장혁 오빠와 같이 드라마에 출연해서 기분이 좋아요.과묵한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장혁에 대한 인상을 묻자 얼굴이 빨개진다.스타라고 하기에는 아직 풋풋한 순진함이 배어있다.자신의 이상형은 천사같이 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라고. 이런 장나라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유지되는 것은 물심양면으로 뒤를 봐주는 아버지 주호성씨의 정성 때문인 것 같다.매니저를 겸한 그는 인터뷰 장소에도 장나라보다 먼저 나와 있다.혹시 딸이 말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세심하게 신경을쓴다.장나라는 연극배우인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연극 ‘레미제라블’을 통해 처음 연기에 도전했고 대 연기자의 꿈을 키워왔다. “아버지가 드라마 ‘파천무’에서 팔삭둥이 한명회 역을하실 때 제가 그걸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열심히 따라했다고 합니다.그때부터 연기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연기에 앞서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MBC시트콤 ‘뉴논스탑’에 출연하면서 연기 경험을 쌓았다.그때부터 드라마며 영화 출연 제의가 많았지만 모두 사양했다.가수의 길을고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버지의 강력한 추천으로 ‘명랑소녀 성공기’에 출연하게 됐다.드라마의 분위기와성격이 자신을 잘 받쳐줄 것이란 생각도 작용했다고 귀띔한다. “아버지의 관심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무대 안에서 튀는 모습을 연기할 때 아버지가 지켜보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요.그래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주호성씨는 장나라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밤 11시면 장나라의 근황과 심경을 실시간으로 들려주는 등 애틋한 팬 서비스를 하고 있다. 장나라는 “가수와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싶지만 가수로 조금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면서 “드라마 촬영이 끝나는 가을 쯤 새 앨범을 들고 팬들을 찾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송하기자 songha@
  • 화제의 영화 ‘화산고’ 내일 개봉

    “우리가 한번쯤 생각은 해봤지만 실현할 수 없었던 그런이야기다. 하늘을 날아다니고,기(氣) 싸움하고….지금까지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8일 개봉되는 영화 ‘화산고’(제작 싸이더스)의 김태균감독이 밝히는 연출의 변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목표밖에 없었다”는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이전의 한국영화들에서 볼 수 없던 특별한 시도를 눈에 띄게 많이 했다. 무엇보다 ‘학원 무협’이란 낯선 장르부터 그렇다.이는학교를 배경으로 너나없이 붕붕 허공을 날아다니며 무협액션을 펼치는 영화 내용을 그대로 담은 말이다. 다음은 미국 할리우드산 뺨칠 만큼 화려하고 세련된 컴퓨터 그래픽 기술.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분필이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고,차(茶)잎들이 용 모양을 그리며 움직이고,난데없이 물기둥이 치솟는 장면 등에서는 입이 딱 벌어진다.“영화를 통째로 컴퓨터에 담갔다 뺀 셈”이라고 감독이 자랑할만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신세대 취향의 무협소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때는‘화산(火山) 108년’.무림의 고수들만다니는 학교 ‘화산고(高)’가 무대의 전부다.8번이나 퇴학을 당한 못 말리는 문제아 김경수(장혁)가 전학을 오면서 학교는 시끌시끌해진다. 이번엔 기필코 졸업만은 하겠다는 각오로 조용히 살기를각오하지만 타고난 공력을 지닌 그를 고수들이 몰라볼 리없는 터.검도부,유도부 등에서 그를 끌어가려고 앞다퉈 제의해온다. 10대 고교생들이 주인공일뿐 중반을 들어서면서 영화는‘무림 열전’ 그 자체다.교장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교감(변희봉)과 화산고 역사상 최단기간내에 학원을 평정한 송학림(권상우),학교의 1인자를 꿈꾸는 역도부 주장 장량(김수로) 등이 전설의 무림비서(秘書) ‘사비망록’을손에 넣기 위해 김경수를 거미줄처럼 둘러싸고 대결한다. 영화의 환상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들이 많다.시간배경을 과거인지 미래인지도 모르게 막연히 ‘화산 108년’이라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이를 미리 전제하고 보지 않는 관객들은 황당한 만화적 설정에 끝내 고개만 갸웃거리다 극장을 나올 수도있다. 록음악에 버무려진 신세대 감각의 무협영화에는 볼거리가 곳곳에 널렸다.주인공 장혁과 허준호(극중 수학선생님 마방진)가 장력(掌力)으로 물기둥을 치솟게 하며 벌이는 마지막 부분의 대결은 미국 할리우드 무협액션 ‘와호장룡’ 못지 않다. 황수정기자 sjh@
  • 4집 앨범 낸 싱어송라이터 조장혁

    “듣는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지난 2일 발매된 4집 앨범 ‘SAD’와 함께 9개월만에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조장혁(28)에서 쓸쓸한 겨울 내음이 났다. “3집의 성공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9개월동안 10여곡을쓰면서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스카이나 김정민 등의 노래를 히트시킨 작곡가이지만 정작 자신의 1,2집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한 3집에서 ‘중독된 사랑’이 대중의 호응을 얻자가수로서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017휴대폰 선전에 2집에 수록된 ‘실연’이 삽입됐어요.017휴대폰 선전 1년 전 발매된 2집은 참패했지만 덕분에3집이 잘 알려지게 됐지요” 바이올린,비올라,첼로,하프 등 현악기를 사용한 4집 ’SAD’에서는 조금 거친 느낌을 주었던 3집과는 다르게 부드러움을 강조했다.남다른 섬세함도 흐른다. “3집은 강렬한 남성적인 느낌에 치중해 표현하다보니 보편성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모두에게 공감대를형성하기위해 더욱 감미로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4집은 3집에 이어만화가 박희정이 그린 일러스트로 표지를 만들었다.여성 팬들의 소녀취향을 배려한 앨범표지이다. “인터넷을 보니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뜬 글들을 이야기하면 싱글벙글이다.4번째 앨범인데도 항상 처음 시험받는 것같이 불안하단다. “방송에 출연해야하니 이것저것 신경쓸 것이 많아요.방송에 나갔을 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보일지 무슨 옷을입고 나가야하는 지 걱정이예요. 작곡만했을때보다 두배는힘들어요.” 지난 9개월동안 작곡에 전념하면서 밤낮이 바뀐 조장혁은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얼굴에는 설레는 미소가 감돌았다. 이송하기자 songha@
  • 2001 대한매일 광고 카피상/ 매일유업(위장혁명 구트)

    매일유업은 요구르트인 ‘구트’ 광고로 대한매일 광고대상 카피상을 수상했습니다.구트 광고는 단순히 장(腸)건강만을 강조했던 기존 요구르트와 달리 위(胃)건강을 생각한 기능성 요구르트라는 개념이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위 질환의 원인균인 헬리코박터파일로리균은 위산에도 죽지않고 위 점막에 파고들어 위궤양,위암 등의 질환을 일으키는 병원균입니다. 구트는 이를 억제하는 유산균과 헬리코박터파일로리균 항체를 지닌 난황추출 면역성분,이 균의 위벽 부착을 억제하는 GMP,녹차카텐킨 성분 등이 혼합돼 있습니다. 한국 직장남성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위질환에 착안해30대 남성 직장인을 타깃으로 홍보한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또 ‘위와 장은 하나이기에 선택은 하나입니다-위장혁명구트’는 단순하지만 직선적으로 의미전달이 됐습다. 매일유업은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제품으로 소비자에게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한도문 매일유업 홍보실장
  • CBS 수도권 모니터요원 모집

    ◆CBS가 방송에 관심이 있고,매일 3시간 이상 방송을 들을수 있는 수도권 거주자를 대상으로 모니터요원을 모집한다. 활동기간은 11월 1일부터 내년 10월 31일까지 1년.희망자는 이달말까지 청취 소감문과 이력서 각 1통을 ‘www.dawn@cbs.co.kr’로 접수하면 된다.청취소감문은 ‘최종원-장미화의 행복을 찾습니다’‘김현주의 산뜻한 오후’‘장혁재의라디오 헤븐’등 CBS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를 택해 적당량을 보내면 된다.(02)650-7073◆매일경제TV(MBN)가 10일부터 일부 프로그램을 확대 강화하는 부분 개편을 실시한다.오후 11시40분 ‘MBN 뉴스’ 신설과 ‘이 시각 뉴욕증시’의 확대개편으로 MBN은 사실상 24시간 생방송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9)월북작가 김남천

    편지를 잡문 차원에서 본격적인 문학 토론의 마당으로 격조있게 끌어올린 사람은 김남천(金南天,본명 孝植·1911∼?)이다.평남 성천군청에 근무했던 아버지나,일본 유학중 결혼하게 된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가 성천 군수였다는 사실은 김남천의 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육중한 몸매에 미남이기도 했던 그는 일본 호세이(法政)대 시절부터 좌익운동에 투신,당대 운동권의 주역 임화,최승희의 남편 안막 등과 도쿄에서 카프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약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임화와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카프 후반기를 제압하는 주역으로,비단 문학활동만이 아니라 평양고무공장 파업(1930년)에 참여하는 등 현장성 강한 운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1931년 8월)때 2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33년초 병보석으로 출옥하나 두 딸을 남겨둔 채 아내가죽어 조신하던 터라 이듬해 카프 제2차 검거 때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1935년 평양에서 상경한 그는 임화,김기진과함께 경기도 경무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여,10년에 걸친한국문학사에서 카프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이 사실 때문에 이들 셋은 두고두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여운형이 발행인이었던 조선중앙일보(1933년 2월 창간)에입사했던 그는 근대 민족언론사의 획을 그었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베를린 올림픽(1936년 8월1일)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국내에 처음소개한 것은 8월 25일자 동아일보였고,이 사건으로 사회부장이었던 작가 현진건이 언론계를 떠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신문사 끼리의 경쟁심리 때문에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를 없애고는 그 위에다 희미한태극까지 부각시켜 자진 휴간(9월5일)을 거쳐 아예 폐간되었다.바로 김남천의 실직 사연인즉슨 이러하다.이즈음 그는 창작과 비평의 양수잡이로 맹활약하면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내막이 담겨있다. 그는 최정희의 소설 ‘흉가’에 대하여 월평 ‘여류작가의난관과 ‘흉가’ 검토의 중점’(조선일보 1937년 4월8일)에서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가하고 있다.당시 김남천의 태도에 대해서는 출옥후 이미 전향했다는 관점과,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다 있는데,이 편지로 미뤄볼 때 후자 쪽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글이다.김남천의 비평활동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은 많았는데,편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한 건 극작가 김진수(金鎭壽.1909∼1966년)였다.평남 중화군 출신인 그는 릿교(立敎)대학 졸업 후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延吉縣) 용정가(龍井街) 은진(恩眞)국민고등학교에근무(1938∼45년)했다.1920년 캐나다인 부두일(富斗一)이 창립한 이 학교는 송몽규 문익환 윤동주가 다녔던,민족의식이강한 명문교인데 1946년 ‘룡정중학’으로 병합되어 오늘날중국 동북지역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그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지는 바로 이 학교 공문서 서식용지이며,내용은 김남천의 평문 ‘동시대인의 거리감-9월 창작평’을 화두로 삼는다.최정희의 ‘지맥(地脈)’을 언급한이 평문이 김진수에게는 무척 못 마땅했었던 것으로 썼지만속내는자신의 분풀이가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을 쓴 날자가 9월28일,책방에서 ‘문장’지를 샀다면서 그는 김남천을 한껏 물어뜯는다.누가 읽어도 편견과 속좁음이 느껴지는 이 글을 왜 썼을까.김진수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황순원등과 학생예술좌를 창립(1935년),연극활동을 했는데,문단활동은 극예술연구회(1931년 김진섭 유치진 이헌구 등이 창립) 공모에서 장막극 ‘길’이 당선(1936년)되고서였다.그가 단막극 ‘향연’을 ‘조광’에 발표한 것은 1938년 11월호였는데,김남천은 발 빠르게 조선일보 창작평 ‘미성년의 문학-김진수와 권명수’(1938년 11월11일)에서 “극연(劇硏) 당선작가(불행히 나는 당선작을 읽지 못했다)김진수씨의 희곡 ‘향연’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분이 미혼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그리 탐탁찮은 평을 가해댔다. 김남천에 대한 유감은 아마 이때부터 똬리를 튼 것 같다. 불만은 또 있다.김진수는 애시당초 문학에서 사회니,민족이니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김진수의 울분 속에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이 탄탄하게 드러난다.작가 최명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바로 김진수의 미학적 체질을 엿볼 수있는 대목이다.친일작가 장혁주와 최대의 친일평론가 김문집은 긍정하면서 김남천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비꼰 김진수가 8·15 후에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는 물으나마나다.“유치진과 더불어 해방 이후부터 50년대 희곡계의 주도적 세력이었던 보수주의적 극작가들의 보편적인 유형”(박명진 ‘한국희곡 이데올로기’)이었다는 게 정평이다. 김진수에게 그렇게도 못 마땅했던 김남천은 8·15 후 임화와 함께 화려하게 재기,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월북,남로계의 몰락으로 남북한 문학사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별이 되었다.통일은 아마 이들의 복권과 더불어 다가 올것이다.역사는 어떤 탄압으로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을 중퇴한 정비석(1911∼1991년)이 ‘성황당’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7년)되어 상경을 꿈꾸다가 매일신보 기자가 된 것이 1941년 10월이니,그가 최정희의 소설 ‘인맥’(1940년 4월)을읽고 감동하여 보낸 편지는 이즈음의 것이다.그가 상경 직전 있었던 곳은 평북 용천군.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백천(白川)온천을경영하며 많은 문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장만영(1914∼1975년)은 뭔가 최정희와 토라짐 같은 게 내비치는 사연을 담고 있다.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시라. 이렇게 한쪽에서는 싸우며 고뇌하는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또 어느 다른 곳에서는 친일에 열을 올려 그 대가로 호사를 누리는가 하면 어느 곳에서는 유유자적 즐기고 있는 속에서 역사는 흐른다.이럴 때대체 남도출신 문학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을까.김동리(金東里,본명 始鍾·1913∼1995년)는 이 무렵 참담한 심경으로 경신학교에다 휴학계를 내고 형 범부(凡父,1897∼1966년)가 살던 부산으로 내려갔다.동양사상의 대가인 이 당대의 수재이자 기인인 범부가 어렵사리 꾸려가는 살림살이에 얹히게 된 동리는 영도다리에 떨어져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으나,어찌 연이 닿아 형이 은신처로 삼았던 경남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거처를옮긴 게 1935년이었다.신춘문예 당선상금을 밑천 삼아 창작에 몰두하겠다는 결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17대손인 이들 형제의 성공담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없지 않다.무오사화에 얽혀 부관참시형을 당한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은 그 화를 피하여 월성군 서면 계림골로 숨어들어 정쟁을 피하곤 했다.이런 문중일수록 풍수지리에 밝아 김동리의 할아버지도 선산을 보유했는데,한 권세가가 그 터에다 묘를 쓰자 그는 겁도 없이 그걸 파헤쳐 버렸다고 전한다.권세가는 할아버지를 귀양보냈는데 돌아와서는또 그 권세가의 무덤을 파헤쳐 다시 귀양,또 귀향하여 파헤치기를 세 번 되풀이하자 세도가의 기가 꺾여 포기했다는 전설 아닌 사실이 전한다.그 할아버지의 본댁은 이 와중에서자살해 버렸고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壬守)이다.권력의 피해를 입으면 이를 피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도전한다.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겸하기도 한다.김동리 일가가 지녔던 이런 가풍은 그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샤머니즘적 인습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로 입문한 것은 어머니였고,그녀의 영향으로 동리는 경주 제일교회 부속학교를나와 대구 계성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의 경신으로 전학했지만 중퇴했다. 다솔사에서 이내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김동리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약간은 들떠서 상경하나 이 시골뜨기 신인에게 인정을 베풀기에는 당시 경성(京城,현 서울)문단은 너무 재재다사(才才多士)에다 각박했다.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료인 서정주와 어울리면서 울분을달래던 그는 이듬해에 다솔사가 세운 광명학원 교사로 내려가게 된다.처음에는 다솔사에 기거하며 광명학원까지 걸어다니던 김동리는 그 지방의 몰락 토호집에 하숙하다가 그 집 딸 김월계와 결혼(1938년),학교 부근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때 그는 쇠약과 우울증으로 수필 한 편도 쓸 수 없었던 지경인데도 선비의 후예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큰 불평이 있더라도 내 자신의 신념이,일테면 천지의 정기(正氣)와 통하는 것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으니까,그른 것은 현실의 그것이요,그 그른 현실은 천지의약속에 따라 시정될 것이라고,이건 ‘만만디’식이라고 웃으실는지 모르지만 여기엔 조곰도 독기(毒氣)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말하자면 결코 염세자(厭世者)도 아니겠습니다.”이 편지들은 대략 1940년부터 1943년 그가 징용을 피해 사천읍에서 양곡조합 촉탁이 되기 이전에 보낸 것들인데,입장이달랐던 선배에게 꺼내기 어려운 화두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만큼한 절조 위에서라야 순수문학은 제 자리를 찾을 수있을 터이다.그의 발신지 주소는 정확히 ‘사천군 곤명(昆明)면 원전(院田)' 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고침/ 23일자 굄돌 기사 중

    23일자 굄돌의 필자 임장혁씨는 국립민속박물관장이 아닌,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이기에 바로 잡습니다.
  • [굄돌] 서로를 인정하는 부부

    지난해 합의이혼은 13만여 건이고 법원에 접수된 이혼소송건수는 4만3,000여건에 달한다고 한다.하루에 10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을 위해 법정을 찾은 셈이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또 과거와 달리 이혼소송을 당하는 경우는 남편이62%에 달한다니 무기력해지는 현대 남성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이혼율 급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여성들의 경제력 향상에 있다.과거에 여성 불임이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사회가 너무나 변하였음을 실감할 수있다. 농업사회에서는 가정이 곧 직장이었다.가족이 함께 일하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생활의 보람을 찾았다.그러기에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근대화와 함께 많은 남자들이 ‘입신출세’를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면서 직장과 가정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부부간에는 임금 노동자인 ‘샐러리맨’과 가사노동자인 ‘전업주부’라는 남녀간의 역할 분담이 생겼다.전업주부인 여성이 소득의 분배까지 맡으면서 남편들은 아들과 마찬가지로용돈을 타쓰는 형편이 되었다.옛날에 시어머니로부터 호된 시집살이를 하고 곳간 열쇄를 넘겨받으며 주부권을계승하던 시절과는 급격한 변화이다. 요즘은 여성의 능력이 남자와 동등하게 인정받게 되었으며맞벌이 부부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여성이 가사일 뿐 아니라 경제력 일부를 담당하며 출산 자녀 수도 정하는 실정이다보니 경제력만 남아있는 남편으로선 위치가 흔들리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가부장제도의 전통 속에서 아버지의 권위를보아온 기성세대의 남자들은 여성파워에 당황하고 있다. 이제 남성들이 가정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왔다.가장들이 ‘일벌레’란 소리를 들으며 가정을 희생하고사회발전에 기여하던 시대는 가버리고 만 것이다.주부들도남편들이 사생활과 가정을 포기하고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노력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부부가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고 함께 대화의 시간을 많이 공유해야 할 ‘때’가 왔다.남자들이여,가정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회,교육 모든 문제가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평범한진리를다시 한번 되새기자. 임장혁 국립민속박물관장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굄돌] 추억속의 경주

    요즘 한국영화가 침체에서 벗어나 영화 애호가들의 사랑을받고 있다. ‘쉬리’를 시작으로 ‘공동경비구역’‘친구’‘신라의 달밤’등이 잇따라 외화를 누르고 관객 동원에성공했다. 특히 ‘신라의 달밤’은 1988년 배창호 감독이 만든 ‘안녕하세요 하나님’처럼 경주를 무대로 한 영화여서 왠지친근하게 느껴진다.‘안녕하세요…’은 소아마비를 앓았던주인공 병태가 고교시절 포기했던 수학여행지 경주로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경주는 청소년은 물론 누구나 한번쯤은 가 보았고 모든 이에게 푸근하게 남아있는 ‘고향’과 같은 도시지만 영화속주인공은 환상의 도시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코믹 폭력물 ‘신라의 달밤’은 경주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문제학생과 모범학생이 10년 후 사회에서는 정반대의 역할이 되어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경주에서 파국을 맞는 우울한 현실과경주를 시작으로 예기치 못한 미래를 그린, 정반대의 전개로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의 경주.그 곳은 지역적인 개념보다 한국인의 가슴속풍경으로 다가온다. 우리 기억속의 경주가 어떤 곳인가.‘고대 도시’로서의 문화재적 가치와 고상함보다는 ‘수학여행’에 얽힌 친구와의 진한 추억을 새겨두었던 곳이다. 잠 안자고 장난하며 어른 흉내를 내보기도 하던 기억들,돌아볼 순 있어도 돌아갈 수는 없는 그리움의 정거장이 아닌가.청소년기에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나름대로 멋을부리고 튀고싶어 했던 일들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러기에 늘 졸업앨범 뒤에는 수학여행 사진들이 진한 추억으로 장식되곤 한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몸이 불편하여 수학여행을 함께 하지 못했던 이들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그러나 기억되고야 마는 아픈 ‘풍경’이기도 하다.하여튼 경주는 청소년이든 노인이든 누구에게나 추억의 모서리로 남아있고때로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할 ‘고향’같은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달밤’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닌희극을 통해, 청소년의 ‘짱문화’를 어둡게만 볼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각해 봄직하다. 올 여름휴가는 아들과 함께 경주로 다녀오고 싶다. △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장 임장혁
  • [굄돌] 휴일문화를 바꾸려면

    최근 화제가 되는 ‘주5일 근무제’는 샐러리맨들에게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선진국처럼 우리도 단계적으로 실시하면큰 무리없이 머지않아 정착될 듯하다.그때부터 사회적인 풍속도도 변할 것같다.샐러리맨은 ‘여가를 어떻게 보낼까’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또한 현대인의 생활리듬에도 변화가 있어 금요일이면 북적되던 유흥가의 풍속도도 달라질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휴일이라 할 수 있는 삼짓날,단오,백중날과같은 세시(歲時)는 이웃과 더불어 풍년과 안녕을 신에게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직업이 다양하고 거주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핵가족 단위의 휴일문화가 주를 이룬다. 요즘도 일요일이면 가족끼리 백화점에 쇼핑나온 모습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백화점은 쇼핑공간에 이어 식당가·화랑 등 문화공간을 늘려가며 고객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휴일에 마땅히 갈곳이 없는 도시인에게는 쉽게 발길을줄 수 있는 곳이 백화점이긴 하다. 그러나 늘어난 휴일에 갈 수 있는 곳은 백화점 말고도 많다.각종정보채널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문화공간이 잇달아 생겨나고 있다. 우리 박물관도 일찍이 가족과 함께하는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로 ‘할머니 손녀 공예교실’을 운영하고 주말에는 무료공연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예산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하는 문화공간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물론 우리 박물관은 매년 300만명이란 관람객이 찾아오기에 위안이 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유물이 풍족해야 전시물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며 다시 찾은 관람객을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데,유물구입비가 턱없이 부족하니 언제쯤이나 관람객들에게 확실한 서비스를 할 수 있을 지…. ‘문화’에는 예산이 보다 과감하게 투자되어야 한다.휴일나들이에 나선 가족들이 갈 곳 없어 방황하지 않게 하려면지금부터 공공 문화시설을 보강하고 유용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예산 확보와 전문인력 보강은 두말 할 필요도없다.주5일 근무의 첫째 목적은 생산성 증대에 있다.매주이틀간의 휴일이 무의미한 시간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국가적 손실이된다는 건 뻔한 이치다. 임장혁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장
  • [굄돌] 일본인, 기습에 능한 까닭은?

    일본인들은 “하게 되었습니다”란 표현을 잘 사용한다.예를 들어 “취직을 했습니다”보다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란 말에 익숙하다.자신의 의지로 한 행동에 대해서도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담는다.또한 남이 호의를 베풀면 우리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반면,그들은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한다.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이 해주었기에 스스로 점잖지 못했다는 표현인 것이다.이렇듯 자신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일본인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은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의 서점에 가면,과거를 기술한 역사관계 서적이 대단히많은 반면 미래 관련 서적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국민성이 구심적인 일본인들은 역사에 관심이 많으며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하다.또한 일본인만큼 ‘일본인론’을 좋아하는 국민은 드물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그들은 자신을 논리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그래서 한국과 중국,그리고 일본 지성인의 수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현행 검인제도의 틀 안에서 최선을다했다”는 해명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딱하다. 일본인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화나는 일에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필자가 유학시 경험한 바로,일본인은길가에서건 집에서건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일이 없다.남편과 부인,주인과 아랫사람이 다투는 것을 금하며,표면적으로는 항상 평온과 예의를 갖춘다.하지만 그들은 때를 기다릴줄 안다.남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며,상대가 억울하여 모든 말을 토할 때 기꺼이 들어주고 본심을 알아낸다.그리고 기습을 한다.우리는 임진왜란이나 진주만 공격과 같은 역사에서 이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서부영화에서 보는 결투장면을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상대의 약점을 파악한 후에 기습하는 것이 그들의 전술이다. 우리는 뻔한 답변을 듣고 흥분할 필요가 없다.분에 찬 나머지 너무 쉽게 본심을 보이기보다 일본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일제 강점기에 이미 경험했듯이 문화왜곡은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8·15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일본이 고개 숙일만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한 ‘때’이다. 임장혁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장
  • [굄돌] 세계 곳곳에 한국 알리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연해주립박물관에서는 지금 ‘한국문화로의 초대’ 전시회가 현지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열리고 있다.그곳에서 한국 관련 전시회가 마련되기는 처음이다.지난달 15일 개막식을 준비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우리 일행은 “100년이 넘은 박물관인데 오늘같이 잔칫날같은 분위기는 처음”이란 관계자의 귀띔에 흐뭇했다.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남짓의 가까운 거리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왠지 멀게만 느껴져 온 게 사실이다. 문화관광부의 지원으로 연해주 5개 도시 순회전시를 준비하기 전만 해도 이곳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다.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던 고려인들이 1993년부터 이주해 온 곳,발해가 일본과 교역하면서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항으로이어졌던 곳 등 역사적으로 접근했던 지역이었을 뿐이다.그러나 이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며칠동안 머물며 체득한문화적 체험은 내가 살아오며 쏟아 부은 학문적 자산에 새로운 파장을 준 ‘떨림’,그 자체였다. 전시 준비를 위해 그곳 박물관 직원들도 우리들 만큼이나진지하고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그런데 개막식이 끝나고한 큐레이터가 “일본어를 배우러 간다”며 성급히 가방을챙기는 것이었다.“아니 이곳에 일본어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니….” 내심 궁금해 물으니 ‘일본문화센터’가 있다고한다.충격이었다. 이미 일본은 연해주에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북방영토를되찾겠다는 그들의 운동이 떠올랐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했나’싶어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늦게나마 이번 전시가 이뤄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우리 동포 뿐 아니라 타민족에게도 우리문화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이같은 전시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확신도 생겼다.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어느 한국상사 주재원의 고백이 박물관 직원들의 각오를 더욱 굳혀주었다.“고맙습니다.일본 때문에 잔뜩 의기소침했었는데,이제는 한국을 설명하지 않고 우리 기업만 설명하면 거래처가이해해 줄 듯 합니다.” 이제 때가 왔다.‘한국문화전’으로 첫발을 내디뎠으니 보다치밀하게 우리를 알려야겠다. 임장혁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장
  • 무협물이 몰려온다

    무협물이 몰려오고 있다.오는 9월8일 개봉하는 영화 ‘무사’를 비롯,10월에는 ‘싸울아비’,11월17일에는 ‘화산고’가 바람을 가르고 스크린에 등장한다.KBS2는 내년 1,2월쯤국내 드라마사상 처음으로 중국에서 전장면을 촬영한 ‘사대신검’을 방송한다.7월12∼20일 열리는 부천영화제는 이같은 무협열풍을 반영,무협영화의 아버지인 후진취안(호금전)감독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무사’는 편집,사운드믹싱 등 후반작업에만 6개월을 투자해 고려무사들의 절절한 전투장면을 만들었다.옷깃 스치는소리에까지 공을 들였다고 한다.최재성 남궁원 양택조 등이출연하는 ‘싸울아비’는 112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사무라이와 갈등하는 백제 유민을 그렸다.장혁 허준호가 출연하는김태균 감독의 ‘화산고’는 학원무협물.화산고라는 시·공불명의 학교를 배경으로 학생과 교사가 공중부양과 장풍 대결을 벌인다. ‘사대신검’은 대원미디어와 KBS가 2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함께 만드는 총20부작의 미니시리즈다.대원미디어는 해외판권을 갖고,게임으로도 제작할 예정이다.시대배경은 명말청초.서로 원수를 사부로 둔 쌍둥이 형제의 대결과 신검을가지려는 무림고수들간의 경쟁이 얽힌다.‘마지막 승부’등을 쓴 손영목 작가가 4회까지 초고를 완성했다.8년 전 왕룡무술감독이 ‘고려무궁’이란 제목으로 추진했으나 불확실한 중국 현지 촬영과 제작비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던 작품이다.최근 중국 베이징,구이링,쑤저우 등 촬영후보지를 돌아보고 온 윤흥식 주간은 “10월부터 시작,4개월간 촬영할 예정”이라며 “안재욱 등 중국에서 인기있는 탤런트들을 캐스팅할 것”이라고 말했다.이녹영 프로듀서는 “무술,미술 등에 중국 스태프를 활용,검범과 권법 뿐 아니라 줄을 이용한 세련된 와이어 액션 장면을 연출하겠다”고 말했다. 부천영화제가 마련한 후진취안 감독의 회고전에서는 ‘첩혈쌍웅’‘천녀유혼’등 걸작 무협물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와호장룡’의 인상적인 대나무 대결장면이 어떻게 ‘협녀(俠女)’의 무협시학에 대한 오마주(존경)를 표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무사’‘화산고’를 제작한 싸이더스의 이현순팀장은 “‘와호장룡’이 미국,유럽 등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후 중국·홍콩 등에서도 해외판권을 염두에 둔 무협영화가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
  • KBS 청소년드라마 ‘학교’ 새단장

    학교가 모두 쉬는 일요일 오전 KBS ‘학교’는 문을 연다. 매주 일요일 오후7시10분 1TV를 통해 방송돼온 KBS 청소년드라마 ‘학교’시리즈가 오는 4월8일부터 2TV 일요일 오전8시50분으로 터를 옮긴다.99년 개교이래 벌써 ‘학교Ⅳ’(가제, 문은하 극본 정해용·황의경 연출)가 됐다. 미니시리즈 호응을 발판으로 고정프로 티켓을 따낸뒤부터 ‘학교’가 겪어온 우여곡절은 우리 방송가 ‘마이너리티 프로’의 현실을 몸으로 보여준 셈.소재고갈 시청률 등을 이유로몇차례나 올랐던 폐지의 도마에서 꺼내준 건 3사 통틀어 유일한 ‘청소년드라마’에 쏟아진 불같은 네티즌 성원.또하나는 KBS 뒷덜미를 채온 ‘공영성’이란 화두다. 터전 이전을 계기로 학교의 콘텐츠도 싹 물갈이될 예정.기존의 일반고등학교가 예술학교로 바뀜과 동시에 교사 학생들도전원 교체된다. 홈드라마시간대 온가족을 흡인하기 위해 그간 들러리같았던 교사·학부모들도 한층 볼륨높여 자기발언을 하고 로맨스도 펼친다. ‘학생선발’을 위해 제작진은 지난 1월부터 비공개 오디션을 진행해왔다.250여명 응시자 가운데 1차 오디션에서 40여명을 걸러냈고 17일 최종 테스트를 마쳤다.드라마 ‘6남매’의 장남이었던 오태경급 정도의 풋풋한 연기경력자들과 신참들이 함께 교실을 메운다.정해용 PD는 “‘학교’를 신인육성의 장으로 세팅하는 게 회사 취지이기 때문에 선도가 떨어지는 인물을 유명세만으로 캐스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기실 ‘학교’시리즈는 무명의 배두나 안재모 장혁 김래원 고호경 김민희 하지원 등을 단련시킨 스타사관학교.뿐만 아니라 주말극 ‘태양은 가득히’의 고영탁 PD,KBS 일일극 ‘해뜨고 달뜨고’의 김지우 작가-박찬홍 PD 등이 거쳐갔다. 당초 예술학교와 대안학교 사이에서 저울추가 예술학교 쪽으로 기운 데는 “엘리트 학생들의 자기수련쪽으로 무게중심을옮겨보려는” 조심스런 의도가 깔려있단다. 비틀린 교육현실을 고발하는 학생들 육성은 이왕의 ‘‘학교’에만도 충분히담아온 만큼, 조금 일찍 진로를 결정한 또래들의 경쟁과 우정 등을 보여주며 또다른 청소년 미래설계에도 보탬을 주고싶다는 것이다.손정숙기자 jssohn@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