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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考試플라자」영어 고시당락 최대변수로

    고시에서 영어 과목이 합격을 결정짓는 열쇠가 되고 있다.올해 사법시험과행정고시 1차시험이 그랬고,공인회계사(CPA)시험에서도 영어는 가장 어려웠다.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 되면 과락(科落)으로 다른 과목을 아무리 잘봐도 불합격되는 까닭에 수험생들 사이에는 ‘영어 공포증’이 생기고 있다. 지난달 28일의 공인회계사 1차 시험은 다른 과목이 대체적으로 쉬웠지만 영어는 ‘엄청나게’ 어려웠다고 수험생들은 말한다.영어에서 과락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회계사 시험을 본 강상욱씨(ID:엘케)는 PC통신 게시판에 “내가 지금 유학시험 보러 와 있는건가 생각될 정도로 어려웠다”라고 불만을 나타냈고 정우진씨(ID:bonnevil)는 “시험 본 사람치고 영어 과락 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푸념했다. 외국에서 살다왔다는 최모씨(23·여)도 “어감(語感)을 요구하는 문제가 많아 한국에서만 공부한 사람에게는 까다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평가했다.사법시험과 행정고시를 치른 노장파 수험생들은 “고시생 생활 10여년에 이렇게어려운 영어는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사법고시 1차시험은 영어가 선택과목이어서 다른 외국어 선택과목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영어 기피 현상도 있다.수험생들의 불만에 대해 일부에서는 국제화시대의 엘리트를 선발하는 시험이라면 그 정도의 영어실력이 있어야 하고,변별력을 가지려면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영어가 어렵게 출제되자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공부 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공인회계사 수험생인 박모씨(25·연세대 경영학 4년)는 “영어를 하루에 1시간 정도 짬짬이 공부해 왔는데,앞으로는 하루 3시간 이상 집중 투자해야 할 것같다”라고 말했다.옥승호씨(ID:Gregory )는 “영어어휘력 향상 서적인 2만2,000 수준의 어휘로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힘들고,타임 에세이나 3만3,000에 나오는 수준은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학원 관계자들도 “내년에도 어렵게 나올지 여부는 자신할 수 없다.그러나올해 경향으로 볼 때 어렵게 공부해 두는 것이 유리할 것같다”고 권유하고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 [大學고시반을가다] (3) 고시 메카 서울대

    서울대 물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金모씨(27)는 지난 1월 오랜만에 연구실을 벗어나 중앙도서관에 들렀다.자리를 잡고 영어 원서를 읽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전공서적을 읽고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었고,모두들 법전을 펼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고시열기는 서울대에서도 불타오르고 있다.金씨는 “놀랍기도 했지만 왠지가슴 한 구석이 쓸쓸했다”고 돌이켰다.인문대 교수들이 얼마전 학문이 설자리를 잃었다고 자성한 것도 이런 고시열풍과 무관하지만은 않다.고시반이없는 서울대는 도서관 전체가 ‘고시반’ 역할을 하고 있다.한 어문학과의지난해 졸업생 24명 가운데 취업자는 단 한명.학교측이 올해 졸업생 가운데2,789명을 표본조사한 결과 진학·입대를 뺀 순수 취업률은 21.3%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졸업생 5명 가운데 4명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미취업자의 상당수와 재학생들이 고시,특히 사법시험으로 몰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宋모씨(28·법학과졸)는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등의 1차시험을 앞둔 3월 초에는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80∼90%는 고시준비생들로 가득찼다”고 말했다. 사회학과 4학년 張모씨(26)는 “법대를 비롯해 인문·사회과학·사범대 등문과계열 학과 3·4학년 가운데 70%정도는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한다.7년째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노장파 고시생은 “취직했던 동기생들도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와 함께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고시열풍은 3∼4년 전부터 이공계열까지 불어닥쳐 이공계 학생들이 법대 강의실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胡文赫법대교수는 “수강생들의 4분의 1정도는법대 학생이 아니다.특히 이공계 학생들은 사법시험과 변리사 시험관련 과목을 주로 듣는다”고 말했다.법과대 강의 수강을 신청하려고 새벽부터 줄을서는 현상은 몇년째 계속되고 있다.법대 강의실은 넘쳐나는 학생들이 복도까지 메우고 있을 정도이다. 서울대생 또는 졸업생들은 사법시험을 비롯한 각종 고시를 휩쓸고 있다.유일하게 2위를 차지하는 것은 공인회계사(CPA)시험이었지만 요즘은 경영대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기업에 비해 전문성을 가지면서도 자유롭다는 점이 최대의 매력이다. 하지만 서울대생이 고시준비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도서관이 고시생들로 가득찬 듯한 현상은 주로 시험에 임박했을 때에나타나는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얘기다.인문대 관계자는 “순수학문에 전념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그들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라며 서울대생들 전체가고시생으로 비치는 데 불만을 표시한다. 장택동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9)

    반민특위 ‘검거 제1호’ 박흥식(朴興植)이 특위로 잡혀온 것은 1949년 1월8일 오후 4시30분.특위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 김용희(金容熙)와 서기관 박희상(朴喜祥)은 특경대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사장실을 급습하였다.당시 특위가 박흥식을 첫 검거대상자로 지목한 것은 그가 미국도피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특위 조사관 일행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할 당시 박흥식은 외무부 관계자들과 미국여행권(여권번호 00130호)관계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신분을 밝히고 동행을 요구하자 박흥식은 영국제 고급담배를 꺼내 조사관들에게 권하며 “정리할 서류가 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주시오”라며지연작전을 폈다.‘독안에 든 쥐’라고 판단한 조사관들이 이를 허락하자 박흥식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그새 비밀문을 통해 박흥식은 다른 방으로 가서는 모처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그의 구원요청은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양손에는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한 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1903∼1994)은 평남 용강군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부양을위해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 발을 내디뎠다.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불입자본금 10만원으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하였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하였다.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자본금 25만원인 이 회사에 그는 6만5,000원을 불입하였는데 이 돈은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은 5만원과 나머지 일부를 그가 부담한 것이었다.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돈을 최고 수 천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금융가에서 그는 최고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종로 네거리에서 공동경영하던 금은방·잡화상을 매수,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그의 모기업이 되었다.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사은경품판매,연쇄점 운영 등의 경영기법을 도입,승승장구하였다.이어 1936년에 설립한 화신연쇄점은 최고 번성기를 구가하던 37년경에는 전국에 연쇄점 수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 그는 총독부의 도움으로 식산은행에서 3,000만원을 대부받았는데 그로서는 자본과 신용만 중요할 뿐 자본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화신의 자본을 두고 ‘매판적 상업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자본의 성격과 함께 사업방식도 그렇다.화신백화점과 함께 화신연쇄점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영업소를 통해 일본상품을 다량 수입,국내에 살포함으로써 국내시장을 일제상품의 소비처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이 때문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은행대출과 관련,하등의 통제도 받지 않았었다. 한편 반민특위에 검거된 그는 제3조사부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검거된지 47일만인 3월22일 기소되었는데 검찰측 조사기록은 무려 6,000 페이지에 달했다.그의 기소장에 나타난 죄명은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위반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지목한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는 일제말기 비행기공장을만들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점과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인 1944년 2월 그는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제출하였다.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회사 설립허가를 받은 그는 그 해 10월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였다.그는 총독부의 힘을빌어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안양공장을 접수하였고 인근 토지를 몰수하여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다.비행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대가로 조선의 해산물·직물 등을 송출하였다. 공장의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징용자였다.44년 11월부터 총4회에 걸쳐 1,717명을 선발한 후 1개월간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군의 지도로 기본훈련을 시킨후 다시 일본 나고야(名古屋)나 만주로 보내 실습을 시킨 다음 안양공장이나만주비행기공장으로 보내 비행기 제조에 종사시켰다. 흔히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는 비행기를 만들려다 일제 패망으로 그만둔것으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실제로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행기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일제패망후 그는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았으나 이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고는 대부분 착복하였다. 한편 그의 친일은 각종 친일단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30년대 후반 그는조선총독부 주최 산업경제조사회와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일제의 시국대응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였다.또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였는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임전대책협의회 발족시 민규식(閔奎植)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각각 20만원씩을 기부하였으며 전시채권 가두판매에 나서기도 했다.징병제 찬양이나 학병 권유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군부 경찰 금융계 등 광범위한 권력층과 사귀면서 이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하였다고 실토한 바 있다. 바로 우가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이 최고의전성기를 누린 점은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무관치 않다.미나미(南次郞)총독과도 유착관계가 남달라 그가 조선총독에서 이임,귀국하자 ‘영원히 못잊을자부(慈父)’라는 담화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특위가 그를 ‘검거대상 1호’로 지목한 것은 그의 미국 도피음모 이외에도 그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기때문이었다.특위의 활동개시가 예견되자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장직상(張稷相) 등과만나 모종의 음모를 꾀하였다.그는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최란수(崔蘭洙)에게 수사비 명목으로 1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특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기소 1주일만인 3월 28일 반민특위의 첫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열렸다.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의 재판은 구속 103일만인 4월20일 그의 병보석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별재판부가 병보석으로 그를풀어주자 당시 특별검찰부 검찰관 9명은 전원 사표로 이에 맞섰고 사회·정당단체에서도 격렬한 성명으로 특별재판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26일 그는 ‘공민권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이유는 그가 군수공장을 경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비행기를 제작,일제에 지원하지는 않았고,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피동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특별재판부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일명 ‘6·6사건’)에 이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특위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제거된데다 6월29일 백범 김구선생의 피살로 친일파척결의 정신적 기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법적으로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다. 해방후 그는 사업재기를 노렸지만 80년 화신산업의 부도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부채청산을 위해 자신이 수십년간 살아오던 집까지 내놓았지만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어느새 새 임자가 나타나 그의 부(富)를 되살리려는듯 현재 빌딩공사가 한창이다. 정운현
  • [고시촌 산책]규칙적생활이 합격의 王道

    고시 공부를 할 때의 시간관리,즉 시(時)테크 전략은 뭘까.고시촌에는 ‘하루 세끼 챙겨 먹는 사람이 합격한다’는 이야기가 있다.어떤 비법보다 규칙적인 ‘칸트형’의 생활 자세가 합격의 왕도임을 강조한 말이다. 규칙적인 생활은 두가지 전쟁에서 동시에 이기는 ‘윈윈(win win)전략’을구사할 최상의 방법이다.고시공부의 필수 조건인 체력유지와 학습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공부 기간이 짧아지는 단기 합격 추세하에서 시테크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합격자들의 평균 공부기간은 행정·사법·외무 등 고시의 경우3∼4년,7급과 9급,공인회계사 같은 자격증시험 역시 최소 2년 정도이다. 시테크의 출발은 연간계획이다.기본기 다지기-심화 학습기-실전대비 정리기간으로 잡는다.시험 100일 전까지는 기본서 3회독,문제집 1회독 정도는 끝내야 한다.다음으로 자신의 책 읽는 속도나 스타일을 고려해 월별,주별,일별계획을 마련한다.‘1주일에 책 1권 숙독’을 목표로 하거나 하루를 오전,오후,저녁으로 나눠 공부 스케줄을 짜는 것이좋다. 장기간 레이스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1주일에 하루 정도를 재충전의 시간으로 남겨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체력에서 열세인 여성이나 노장파는 3일 단위로 끊어서 반나절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하루 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고시전선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들의 만용일 뿐이다. 일단 고시공부에 들어가면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저녁식사 후의 느긋한 휴식과,여유있는 잠자리는 합격후로 미뤄야 한다.때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술 한잔을 마시고 싶은 ‘사치스런’ 유혹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에 고시전선에 뛰어들었다면,고시촌의 ‘칸트’가 되도록 하자. 그것이 합격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吳善姬 유망고시길라잡이 대표]
  • 국민회의 중진들 역할 분담

    중진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의 진용을 재정비하려는 국민회의의 움직임이 분주하다.權魯甲 고문의 당복귀에 이어 韓光玉 부총재의 원내 진입이 이뤄질경우 이같은 움직임은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중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개혁의 견인차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게 당 핵심부의 구상이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6일 귀국한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은 계속해서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개혁·소장파의원들도 趙대행을 ‘당 화합의 적임자’로 평가하고 있다.따라서 權고문의 당 복귀로 趙대행의 위상 변화를 우려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權고문은 목소리를 낮추고 ‘당의 윤활유’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대야관계와 상도동측과의 관계 개선,소외된 영입파의원 추스르기 등 ‘국민화합’과 ‘당의 화합과 단결’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다.金相賢 고문도 특유의 마당발의 장기를 살려 당의 화합에 일조한다는 각오다. 당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金令培 부총재에게는 ‘정치개혁 완수’라는 책무가 주어졌다.임시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는 국회제도개혁,‘올 상반기 까지’로 시한이 연기된 선거제도·정당제도 개혁에 정열을 쏟을것으로 보인다.韓부총재는 자민련과의 내각제문제 등 정치현안의 ‘조율사’로서의 역할이 점쳐진다.당과 대북 민간 단체와의 유기적 관계,노사문제 등민감한 현안들에서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밖에 金槿泰·盧武鉉 부총재등 중진들도 개혁세력 결집과 국민화합,당의정체성 확립의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金부총재는 개혁세력 결집,집권여당으로서 위상정립,당의 정체성확립이라는 책무가,盧부총재에게는 세불리를절감하고 있는 영남지역에서 ‘국민화합’을 이루라는 특명이 주어진 상태다.鄭均桓 사무총장,韓和甲 원내총무의 콤비플레이도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중진들이 외각에서 힘을 보탬에 따라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토양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직개편 및 지도체제 정리문제가 조기에 불거질 경우 중진들의 역할 분담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일부의 우려를 씻고 당이 어떻게 힘을 모아나갈지 주목된다.
  • [제2공화국 張勉](1) 국토건설사업(上)

    1961년 2월27일 오후 2시.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앞 광장은 꽃샘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열기로 가득찼다.국토건설에 앞장설 이 땅의 젊은이 2,000여명이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갖는 자리였다.녹회색 모자와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도열한 주위를 가족·친지 그리고 ‘형들이 가는 길 우리도 따르리’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남녀 중고생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단상에 앉은 尹潽善대통령 張勉총리 등 3부요인도 기대와 흥분에 찬 모습들이었다.尹대통령이 “국토건설사업은 모든 산업건설의 기간이 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이 사업의 중심인물이 되리라고 크게 기대한다”고 치하한 데이어 張총리도 “이 사업에 여러분이 가진 젊은 의기와 예지를 송두리째 투입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굳게 믿는다”고 격려했다. 수료식을 마친 국토건설사업 요원들은 삽 한자루씩을 멘 채 서울시가를 행진했다.咸錫憲·張俊河 등 당대의 지성인들과 장면내각의 金永善재무장관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등 각료들이 대열을 이끌었고 국회의원도 여러명 가담했다.장면정부에 사사건건 트집을 일삼던 민주당과 신민당의 소장파 의원들이합세한 것은 이변이었다. 이날의 시가행진은 장면정부가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또 그 대열에 지식인들과 여야 정치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국토건설사업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쌀 한가마에 1만4,000∼1만7,000환(현시세 17만4,400원) 하던 시절에 장면정부는 61년 한해에만 400억환을 투입하고 연인원 4,5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국토개발 사업을 벌이겠다고 공표했다.‘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을 스스로 불러들였다’고 알려진 제2공화국의 장면정부,그 나약하고정쟁만 일삼았다는 정부가 정말 이처럼 원대한 포부를 가졌을까.계획을 세웠더라도 실제로 집행할 능력은 있었을까. 그러나 국토건설사업은 민주당이 추진한 경제정책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었다.1960년 4월혁명의 결과로 그해 8월 출범한 장면정부는 국정의 중점을 경제발전에 두었다.장면은 60년 8월27일 총리 취임후 민의원(民議院)에 나가취임인사 겸 시정연설을 하면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마지 않는다”고 말했다.그가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경제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경제발전 방안으로 두 가지 큰 틀을 구상했다.하나는 장기목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이고 다른 하나가 국내경기를 단시일에 활성화하는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토건설사업이 국민 앞에 실체를 드러낸 때는 60년 11월28일이었다.정부는 이날 ‘국토건설사업’이라 이름붙인 대규모 공공사업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그 규모는 단군이래 첫 국토종합개발답게 가히 ‘혁명적’이었다.소양강댐·춘천댐·남강댐 건설을 비롯해 발전소 및 도로 건설,농지개간,수자원개발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다목적인 계획이었다.장면정부는 60년 12월 경제4부장관회의를 열어 61년분 제1차 추가경정예산에 사업비 280억환을 계상하기로 결정했고 이어 61년 1월에는 국토개발특별회계법을 제정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6·25가 휴전으로 끝맺은 지 10년이 채 안돼 전쟁의 상흔이 국토 곳곳에 남았고,이승만정권 말기의 폭정(暴政)탓에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장면정부는 무슨 힘이 있어 이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을까. 그 무렵 국가재정은 절반 가까이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장면정부는 국토개발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함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기에 자신있게 청사진을 마련할 수 있었다.미국 정부가 국토건설사업을장면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꼽고 이를 적극 지원하였음은,대한매일이 이번에처음 공개하는 일련의 미 국무부 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면정부는 출범후 곧바로 국토건설사업 준비에 들어갔다.먼저 국토건설사업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책임자를 물색했다.장면정부가 지목한 적임자는‘사상계’ 사장인 장준하였다.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이자 반독재 민주투쟁의 상징인 그가 한때 국토개발에 앞장선 사실을 지금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4월혁명후 장준하는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필진을 주축으로 학계·언론계·문화계·경제계의 주요인사 30여명을 모아 ‘국제연구소’를 운영했다.‘국제연구’를 내걸었지만 새 시대에 걸맞은 국정운영을 연구하는 데 주력했다. 이렇다 할 정책연구기관이 없던 시절이라 국제연구소는 정책의 산실로 떠올랐고,연구위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국토개발이었다.정책 수립에 골몰하던 장면정부가 장준하와 그를 뒷받침하는 국제연구소 멤버들에게‘구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사상계에서 일하다 장준하를 따라 국토건설사업에 참여한 朴敬洙씨(69·작가)는 “장면정부가 출범 직후인 60년 8월말 장준하선생에게 국토건설사업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고 기억했다.장준하는 거듭 사양하다가 결국 ‘국토개발은 시대적 의무’라는 명분에 져 수락하게 된다. 국토건설사업본부는 총리 직속이었지만 실제로는 관민이 함께 운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성격의 독립기구였다.본부장은 장면총리가 겸임했고 장준하는 수석부장으로서 본부장 대리 구실을하는 기획부장을 맡았다.또 사상계편집위원인 申應均과 李萬甲이 관리부장·조사연구부장으로,일제때 한강철교를 설계한 崔景烈이 기술부장으로 들어왔다.박경수씨는 간사로 임명됐다.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팀이 사업본부 지휘부를 형성함으로써 장면정부는국토개발에 필요한 두뇌와 함께 지식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그 기반 위에서자신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국무부문서에 나타난 ‘국토건설’ 펑가 ‘제2공화국과 張勉’연재에 정치학 박사 전상숙 씨(이화여대 강사)가 동참합니다.田박사는 지난 97년 8월부터 1년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1960∼63년에작성된 미 국무부 한국관련 문서 1만여점을 조사·연구했습니다.그 축적을토대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 사료를 통해 당시 미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이에 따른 대한(對韓)정책은 무엇이었는지를깊이 있게 분석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장면정부가 물려받은 경제상태는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빈약한 자원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대량파괴,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방비,그리고 부패하고 허약한 관료집단이 주원인이었다.장면정부는 뉴딜정책과 같은공공사업을 통해 이같은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곧 1960년 11월발표된 ‘국토건설사업’이다. 장면정부는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고,미국도경제원조가 장면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나섰다.이같은 사실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소장한 미 국무부문서(RG59)중 여러건에서 확인된다. 매카나기 주한미대사가 61년 3월11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A)에는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평가가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장면정부하의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식량부족과춘궁기(보릿고개)·대졸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토건설사업이 큰 도움이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아울러 경제발전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머지않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시위를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이 때문에 미국은 장면정부의 시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이보다 열흘 앞선 보고서(B)에서는 매카나기와 한국 金永善재무장관의 대담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다.김장관은 국토건설사업이 시작됐음을 알린 뒤 미국이 이미 제공한 지원금 2,000만달러를 유용하게 사용할 것임을 약속했다.이어 경제개발을 위해서도 한·일간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수립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미국측도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빨리 이루어지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이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이뤄 일본이한국에 경제원조를 하도록 함으로써 동북아 안보이익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보여준 것이다.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지원이 변함 없음은 매카나기의 후임인 마셜그린 대리대사가 4월18일 장면총리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전문(C)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그린은 국토건설사업에 1,500만달러를 추가 원조하기로 결정했음을 통보하면서 지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도 명시하고 있다. 이같은 한·미간의 국토개발 노력은 그러나 5·16으로 중단돼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됐다.
  • [오늘의 눈] 日정가의 극단적 對北전략/황성기 도쿄특파원

    17일 일본 집권 자민당 ‘위기관리프로젝트팀’ 회의실.회의가 무르익어 북한 식량지원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한 소장파 의원은 “북한은 몇년간 굶어죽게 해도 좋다”면서 “굶어죽게하는 것은 극단적인 의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金正日체제를 “붕괴시키는 쪽이 (위기관리에) 빠른 게 아니냐”는 의견도 제시됐다. 같은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 관저.설연휴 일본을 방문한 자민련 朴泰俊총재가 金大中대통령 친서를 오부치 총리에게 전달했다.‘안정과평화를 위해 한·일 양국은 물론 한·미·일 3국간 상호협력이 더 요구된다’는 내용의 친서였다.오부치 총리는 “양국간 현안은 솔직히 의견을 나누면서 시간을 들여서라도 대응해 나가자”고 당부했다.안보에 관한 한 톱니가맞지 않는 듯한 일본 집권당과 정부를 상징하는 두 가지 상황이다. 일본은 지난해 북한 미사일이 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지자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데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언제라도 북한미사일이 일본 열도에 날아올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그러나 위기를푸는 열쇠를 냉전시대에서 찾으려는 것은 시대착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미사일발사 후 식량지원,수교교섭 중단 등 대북(對北) 제제조치를 취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최근 북한측과 접촉을 갖는 등 대화 물꼬를 트려 하고 있다.강경책으로는 위협을 해소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이런 대화 움직임은 불행히도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일부 강경론자들 때문이다.‘눈에는 눈,이에는 이’라는 사고방식의 강경자세는 북한을 기아에 허덕이게 하고 고립시켜 무릎을 꿇리겠다는 다분히 감정적 계산을 깔고 있다. 50여년간의 북한체제와 냉전구도는 위협에 위협으로 대응하면 위기를 증폭시킬 뿐임을 증명해왔다.북한에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해법이야말로 일본이 두려워하는 북한의 위협을 해소하고 한반도 안정을 보장하는 길임을 이들 정객(政客)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marry01@
  • ‘선량감 찾기 힘드네’-野 재·보선 인물난

    한나라당이 3월말부터 잇따를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의 후보 공천을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다.3월30일 서울 구로을 재선거와 경기 시흥 보궐선거,4월 이후 송파갑 재선거 등 3곳의 후보 적임자가 없어 고민이다. 구로을은 실리와 명분 사이의 괴리가 심하다.공천 신청자는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된 李信行전의원의 부인 趙恩姬씨와 李承哲 옛민주당 지구당위원장 등 2명이다.李전의원이 관리한 지구당과 지역 유지는 조직적인 득표력을 이유로 趙씨를 밀고 있다.그러나 비리사범인 李전의원에 쏠린 시선때문에 趙씨의 출마가 당의 선명성 이미지에 먹칠을 할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지도부는 沈在淪전대구고검장에게도 손길을 뻗쳤으나 본인이 고사했다.일본에 체류중인 李哲전의원도 물망에 올랐지만 본인은 감감소식이다. 시흥도 골칫거리다.당에서는 “인근 金富謙군포위원장이 출마해 준다면…”이라며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金위원장은 18일 “내년 16대 총선때 군포에서 승부수를 띄우겠다”며 “이번 보선은 피하고 싶다”고 난색을 표했다.자금난으로시달리는 마당에 승산없는 싸움에 뛰어들기가 마뜩찮은 표정이다. 인물난은 송파갑도 심하다.洪準杓의원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재선거 요건인‘잔여임기 1년’을 넘겨 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바라는 눈치다.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소장파 사이에는 원외 부총재 등 당내 중진의 ‘전진배치론’이제기되고 있다.姜昌成 崔秉烈부총재 등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정국의 분수령이 될 이번 재·보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 ‘떡값’판사 처리에 주목한다

    수원지법 文興洙부장판사의 사법개혁 촉구 의견서를 둘러싸고 전국 판사들의 찬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대전 李宗基변호사 수임비리사건에 관련된 ‘떡값’판사들에 대한 대법원 처리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검찰이 같은 사건 관련 검사들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沈在淪고검장의 항명파동과 일선검사들의 연판장파동 등 심한 몸살을 겪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李변호사로부터 떡값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판사 5명이 제출한 소명서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이번주부터 판사들을 소환,조사하게 된다.자체조사 결과 판사들의 비위혐의가 확인되면 법관징계위원회와 인사위원회에회부해서 징계처분하거나,대법원장 명의로 ‘경고’한 뒤 인사조치할 방침이라고 한다.판사들은 비위사실이 밝혀지더라도 파면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중징계를 받은 판사들은 스스로 법복을 벗는 게 관행이다.의정부 李順浩변호사 수임비리사건 때 판사 8명이 중징계를 받은 뒤 사표를 내고 물러난 바 있다.따라서 대법원은 이번 경우에도 혐의가 확인된 판사들이 스스로법복을 벗어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일부 판사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와주목된다.부산고법 배석판사 18명이 ‘대법원장께 드리는 글’에서 전별금등을 받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지만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이를받지 않을 것을 다짐한 뒤,추락한 사법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대법원장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더이상 문제삼지 말도록 주장하고 나왔다.하지만 비리혐의 판사들을 문제삼지 말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비리혐의 검사들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검찰의 조처와 형평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국민들의 법감정에도 배치되기 때문이다.건의문을 쓴 배석판사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국민들은 법관에 대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은‘떡값’판사들에 대해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것이대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다.만에 하나 자체조사 결과 혐의점을 확인할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흐지부지 처리하게 되면 사법부는 더이상 설자리가없다.그러므로 대법원은 이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하고 총체적 사법개혁에 나서기 바란다. 지금까지 법조개혁은 검찰을 중심으로 논의된 느낌인데,사법부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법관의 관료화와 폐쇄성을 극복하는 문제,인사제도 개선과 직급제 문제,법관 충원제도의 개선 등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국민에 대한 법률서비스를 넓히는 문제도 당연히 검토돼야 한다.
  • 상습도박 부유층 103명 적발

    상습 도박과 내기를 일삼아 온 부유층 주부와 조직폭력배 등 도박조직 6개파 103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부유층·사회지도층 주부사범에는 K그룹 사장의 전 부인 琴모씨,Y양말 사장의 딸 金모씨,영화배우 S씨의 전 부인 P씨,인기 구기종목 감독의 부인 C씨,P변호사의 부인 등이 포함돼 있다.억대의 내기골프를 친 프로골퍼 孫興洙씨(54·미국 체류중)는 수배됐다. 서울지검 강력부(朴英洙 부장검사)는 18일 부유층에게 상습적으로 도박장을 개설한 郭恩子씨(53·여·무직) 등 53명을 상습도박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인천도시가스 부사장 李鍾協씨(36) 등 30명을 불구속기소했다.또 프로골퍼 孫씨와 이리 구시장파 두목 金선태씨(41) 등 20명을 수배했다. 적발된 6개파는 郭씨가 주도한 부유층 주부도박 30명,조직폭력배 개입사범21명,속칭 ‘땅콩파’ 16명,사기도박 8명,골프도박 11명,승려도박 17명 등이다. 郭씨는 96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K그룹 사장의 전 부인(44·미국 체류)과 A회계법인 간부의 부인 林모씨(52·불구속) 등 부유층 주부들을 꾀어 거의 매일한차례에 50만∼1,500만원씩을 걸고 속칭 ‘싸리섰다’라는 노름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李씨 등은 96년부터 지난해까지 프로골퍼인 孫씨와 짜고 “부킹을 해주겠다”면서 자영업자·중소기업인 등을 끌어들인 뒤 1타에 20만∼60만원씩,9홀당 4명 기준으로 500만∼2,000만원의 돈을 걸고 도박을 했다.최고 1억원까지걸기도 했다. 구속된 方모씨(53·여) 등 사기도박꾼들은 IMF로 건설경기가 침체되자 중소 건축업자들에게 ‘호텔공사를 수주토록 도와주겠다’고 접근한 뒤 사기도박판을 벌여 W건설 대표 李모씨 등 15명으로부터 6개월 만에 1억3,700만원을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수배된 폭력배 金씨는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도박장을 개설하고 망을 보는‘문방’,자금을 빌려주는 ‘꽁지’,잔심부름하는 ‘박카스’,판돈을 계산하는 ‘딱지’ 등으로 부하들의 역할을 분담한 뒤 한판에 100만∼200만원씩 하는 속칭 ‘도리짓고 땡’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 타협론자 朴熺太총무 속앓이

    한나라당 朴熺太총무가 마음을 비웠다.朴총무는 6일 “신상문제를 숙고하겠다.실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털어놨다.‘안기부 사찰건(件)’만 마무리되면 총무직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여당의 단독 법안처리에 따른 일부 소장파의 ‘총무 인책론’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朴총무가 합리적 의회주의자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아무리 첨예한 여야간 정쟁(政爭)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여야가 수의 우세나 물리력을 앞세우며 상대를‘제압’하려 든다.거대 야당의 내부 알력도 만만찮다.급기야 안기부의 국회내 정치사찰 의혹으로 여야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자 타협론자인 朴총무는 부쩍 한숨이 잦아졌다. 朴총무는 지난 8월 임기 1년의 경선 총무로 뽑힌 뒤 李信行전의원 체포 당시 하루만 빼고 줄곧 국회 일정에 ‘갇혀’있었다.급박한 정치 상황에도 이럭저럭 고비를 넘긴 朴총무이지만 최근 갈수록 조여오는 대야(對野) 압박전술에는 고개를 내젓고 있다.특히 연이틀 본회의장에서여당에게 ‘선수’를뺏긴 朴총무는 “심중(心中)의 병을 누가 알리요”라며 푸념했다.당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李會昌총재와의 불화설이나 지도부의 우유부단한 전략에 대해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그러나 정작 말은 아끼고 있다.
  • 경제프리즘-‘親政 울타리’ 못넘은 재벌인사

    5대 재벌의 연말 사장단 인사가 한창이다.이달 들어 SK LG 삼성이 차례로 인사를 단행했고 현대와 대우도 곧 그룹 차원의 인사를 발표한다. 올해 인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관심을 모은다.‘재벌 대개혁’의 와중에 서 이뤄지는 만큼 구조조정 의지의 시험대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한결같이 구조조정의 지속적인 추진과 전문경영인 기용을 통한 세 대 교체에 이번 인사의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한다.그러나 결과는 당초 기대 에 훨씬 못미치는 것 같다. 혈연·지연·학연을 중심으로 한 오너 위주의 ‘로열 패밀리’중용의 관행 이 그대로 이어졌다.삼성의 경우,李健熙회장 고교 동문의 입지가 강화됐고 S K도 창업주 가족들이 일제히 한 단계씩 승진했다.총수의 ‘친정’(親政)체제 가 보다 강화된 셈이다. 또한 능력있는 신진 전문경영인들의 발탁은 물론,경영 실책에 따른 문책성 인사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대신 정권교체의 영향 탓인지 호남출신 인사 들이 대거 부상했다.규모 면에서도 평년에 크게 못 미쳤다.사장단 14명을 교 체한 삼성은 예년의절반 수준이고 현대도 소폭에 그칠 전망이다. 재벌해체를 적극 주장하는 한 소장파 경제학자는 최근 이런 말을 했다.“지 금같은 구조조정기에는 재벌총수에게 보다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월급사장’들은 본인들이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총수중심의 혁신적인 구조 조정을 이룬 뒤 재벌 해체의 수순을 밟아야 한다” 친정체제 강화로 요약되는 재벌 사장단 인사가 총수중심의 혁신적인 구조조 정이 목적인지,아니면 재벌왕국의 오너집중식 습성 때문인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金泰均 windsea@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98 바둑계 결산/이창호 ‘유아독주’ 신예·소장파 선전

    ◎조훈현 등 뒤늦은 분발 이창호의 독주,신예 및 소장기사의 선전,조훈현·유창혁의 뒤늦은 분발. 98년 한국 바둑계는 이렇게 요약된다. 지난 17일 열린 98 바둑문화상 선정식에서 바둑기자단과 관전평자들은 만장일치로 이창호 9단을 최우수기사로 선정했다. 이 9단은 동양증권배,후지쓰배를 차지한 것을 비롯,삼성화재배 결승에도 올라 세계대회 석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왕위전 등 국내 기전 7관왕에도 올라 4년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49승 15패에 76.5%의 승률로 승률도 가장 높았다. 상금수입은 6억6,699만원. 수훈상 수상자는 내지 못했다. 감투상은 보해컵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여류기사 황염 2단에게 돌아갔으며 47승16패를 기록한 안조영 5단이 신예기사상을 차지했다. 최다승은 54승1무20패를 올린 목진석 4단에게 돌아갔다. 이밖에 세계대회 3개 본선에 진출하고 서울신문사(현 대한매일)주최 패왕전 도전자로 나서 정상 일보직전에서 무릎을 꿇은 이성재 5단,안달훈 3단(40승13패),김명완 4단(42승15패),최철한 2단(41승15패) 등 소장및 저단진이 강세를 보였다. 반면 조훈현 9단은 지난 10월 이창호 9단으로 부터 국수전을 탈환,체면치레를 했으며 LG배와 동양증권배 준우승에 그친 유창혁 9단은 배달왕기전을 차지,무관에서 벗어났다.
  • 李 후보에 銃風 서면보고

    ◎“訪中전후 두차례”… 韓成基 피고인 첫 공판서 진술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韓成基 피고인(39·전 포스데이터 고문)이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중국 베이징에 가기 직전과 갔다온 직후 각각 한차례씩 한나라당 李會昌 대통령후보에게 이 사건 관련 사항을 서면으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韓피고인이 베이징에서 李후보의 동생인 會晟씨(52·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에게 두차례 전화를 건 물증도 확보됐다. 이같은 사실은 30일 오후 2시 서울지법 형사합의26부(재판장 金澤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의 첫공판에서 밝혀졌다. 재판은 韓피고인에 이어 吳靜恩(46·전 청와대 행정관)·張錫重(48·대호차이나 대표) 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직접신문의 순으로 진행됐다. 權寧海 피고인(전 안기부장)에 대한 신문은 權피고인의 건강 때문에 연기됐다. 韓피고인은 검찰의 직접신문에서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인 지난해 12월9일 ‘특단카드 협상정보 보고서’를 작성한 뒤 항공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덕천사거리에서 유세를 마친 李후보측 수행비서에게 건넸다”고 진술했다. 이어 “베이징에서 귀국한 직후인 12월15일 ‘존경하옵는 李후보님께’라는 편지를 써 서울 종로구 구기동 李후보의 자택앞에서 운전사에게 건네줬다”고 말했다. 韓피고인은 그러나 “직접 전달하지 않아 李후보가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받았는지 여부는 모른다”고 주장했다. 韓피고인의 출국전 보고서에는 ‘북한 통일선전부 고위 관계자를 만나 옥수수박사 金順權 교수 방북건을 이용,북한측에 모든 카드를 제시할 것이며 12월15일∼17일 사이에 행동을 개시토록 한다’는 내용이,편지에는 ‘북한 고위층이 황해도 출신인 李후보의 당선을 바라고 있으나 북한 고위층이 말한 내용을 서면에 모두 기재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검찰은 지난 21일 안기부로부터 넘겨받은 韓피고인의 컴퓨터 저장파일을 분석한 결과,이같은 보고서 내용 등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2차 공판은 오는 19일 오전 10시에 속개된다. ◎검찰 “李會晟씨 곧 재소환” 서울지검공안1부(洪景植 부장검사)는 30일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깊이 관련된 의혹을 사고 있는 李會晟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52)을 금명간 재소환,조사하기로 했다. ◎“사실무근” 한나라당 성명 具凡會 한나라당부대변인은 30일 성명을 내고 “韓씨의 진술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허무맹랑한 날조된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 日 자민당 대대적 세대교체 예고

    ◎소장파의원 목청 커져 파벌들 후계구도 서둘러/미야자와파­가토 前 관방 새달 회장직 인수/와타나베파­야마사키 등 32명 모레 분가/미쓰즈카파­모리간사장이 총수승계 넘봐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 집권 자민당내 제 2파벌인 미야자와파 회장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이 물러난다. 그는 26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중의원·9선) 전 관방장관에게 연말쯤 회장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시국회가 끝나는 내달 14일 이후 대장상직에서도 사퇴할 뜻을 비췄다. 미야자와 대장상이 후계구도를 서둘러 밝힌 것은 가토 의원을 따르는 젊은 의원들의 성화 때문. 당내 젊은 층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겨냥한 ‘새 깃발 꽂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내 파벌 간의 지각 변동도 예상된다. 의석 86석인 미야자와파를 인수받는 가토 의원은 ‘가토파’로 깃발을 바꿔달고 내년 총재선거에 출마할 예정. 파벌내 최대 정적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가 가토 후계구도에 반발하고 있다. 그도 20명 안팎의 의원을 끌고 독립할 가능성이 높다. ‘근대미래연구회’의 수장인 와타나베(渡邊)파의 야마사키 타쿠(山崎拓·중의원·9선)의원도 30일 야마사키파를 발족한다. 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와타나베파에서 야마사키파로 분가할 의원은 4∼5선 안팎의 소장파 32명가량. 야마사키 의원은 젊은 층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원로들의 반발로 회장진출이 번번히 무산되자 당권 도전을 위해 분가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와타나베파는 명예회장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파와 야마사키파로 분리된다. 의석 62석의 미쓰츠카(三塚)파도 모리 요시로(森喜郞·중의원·10선) 간사장이 회장 승계를 넘보고 뛰고 있다. 그러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92년 다케시타(竹下)파를 물려받았다. 의석 91석으로 자민당내 최대인 오부치파 회장이 된 뒤 비교적 안정적으로 파벌을 이끌고 있다.
  • ‘한국의 지성’ 서울대 교수:6·끝(공직 탐험)

    ◎“박봉·열악한 연구환경 개선” 한목소리/봉급은 국립대중 최하위/강의외 행정잡무 많아/일부 교수 PC도 지급안돼 사립 여대에서 서울대로 옮긴 朴모 교수.경쟁끝에 선망의 서울대에 입성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봉급이 이전 학교의 70%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서울대 재직 30년째인 李모 교수는 모임에 가서 돈 얘기만 나오면 자리를 피한다.돈에 관한 한 그는 평생 마이너스 인생을 살아왔다.동료교수들끼리 ‘허울좋은 잡놈’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래저래 서울대 교수들도 불만은 많다. 이들은 먼저 박봉의 어려움을 든다. 서울대에 따르면,수당 연구보조비 성과급 등을 합한 연봉이 정교수는 4,991만원이다.부교수는 3,995만원,조교수는 3,421만원이다.서울대 교수들은 기성회비에서 나오는 보조비 등이 다른 국립대보다 적어 국립대 중에서도 봉급이 최하위라고 말한다.96년 10월 발간된 ‘서울대학교 50년사’에는 서울대 교수의 평균 연봉이 연세대보다 600만원에서 1,800만원까지 낮다고 밝히고 있다. 원로교수들은 돈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돈벌자고 학문하느냐”며 월급,처우개선 문제 등을 거론조차 않는다.그러나 외국대학 등에서 높은 연봉을 받다 온 소장파 교수들은 다르다.최근 경제학부 趙모교수(39)가 미국 인디애나대로부터 15만달러의 연봉을 제안받고 사직했다.임용된지 1년이 안된 상황이다.일부 교수들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만 높은 연봉에 따라 옮기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밖에서는 서울대 교수의 연구비 수주액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지적한다.교육부의 96년 대학연구비 수주현황에 따르면 서울대가 972억원,포항공대 360억원,연세대 309억원 등의 순이다.공과대학 일부 과 교수는 수십억원에 이르는 프로젝트를 수주하기도 한다.교육부 담당자는 “서울대교수의 연구비지원액과 수업시간수(9시간 미만),학생수 등 비경제적 요인도 포함하면 월급이 적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이에 서울대 교수들은 연구비의 경우 교수개인의 돈이 아니며,이도 몇개과에 한정돼 있음을 강조한다. 서울대 교수들의 단골 불만사항 중에는 열악한 연구환경이 포함된다. 사회대 K교수는 자신의 수첩을 뒤적이며 행정사무 일정을 나열했다.이번 학기만 해도 입시채점,시험감독,대학원 입시 면접,문제출제,무시험전형제도로 인한 면접,서류심사,제자들의 유학추천서,재외교포자녀 입시를 위한 면접 등을 합하면 한달이 없어진다.그는 “과 전임보조원 4명을 두어 성적처리 등 모든 업무를 하는 미국 교수들의 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에게도 필수인 PC가 올해 처음,그것도 일부 교수에게만 제공됐으며 학회가입비,출장비 등도 자기부담이다.교수 연구실에 주는 것은 책상 책장 탁자 하나씩.나머지 기물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에어컨,난로 등도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그래도 전기료 때문에 에어컨 등의 설치자체를 금지했던 몇년 전과 비교해 많이 나아진 것이란다.
  • 조계종 분규 약사/54년 비구·대처승 사찰 접수싸고 유혈충돌

    ◎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 발생/94년 서의현 원장 축출 개혁회의 출범 ·1938년­일제의 불교 왜색화 정책에 저항,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조선불교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를 건립 ·46년 12월­선학원 중심의 진보적인 승려 ‘불교혁신총동맹’ 결성,사찰령 폐지,주지전횡 타파,농민에게 사찰토지 무상분배 등 기치로 제1차 불교혁신운동 ·54년­李承晩 대통령 유시로 정화불사(태고종에서는 법난으로 규정)시작. 비구­대처 사찰 접수 둘러싸고 유혈극 ·62년­통합종단 출범으로 비구­대처의 극한적인 대립 주춤. ·66년­대처승 처리문제와 동국대 재단운영 등을 둘러싸고 청담 종정과 경산총무원장간 대립. ·67년­대처승 분종선언,한국불교 조계종(70년 한국불교 태고종 개명) ·73년­경산 총무원장,고암 서옹 양대 종정과 대립 격화. 총무원장의 구속과 종정 감금 사태 발생. ·78년­총무원장 중심제파 월하스님(현 종정) 총무원장 선출,개운사에 총무원 개설. ·80년­개운사측 조계사측과 법적 합의,월주스님 통합 총무원장 선출,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 발생. ·81년­불국사와 월정사에서 총무원측이 발령한 주지측과 전임 주지측간 난투극. ·83년­설악산 신흥사에서 주지 취임과정에서 살인사건 발생,비상종단운영위원회 출범. ·84년 6월­성철종정 사퇴,성철지지파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록원스님 총무원장 선출,종권 접수. 소장파 해인사 승려대회 불법 규정,범어사종무소에서 총무원 현판식. ·88년 4월­서의현 총무원장 총무원장 해임결의안 상정 시도한 밀운 봉은사 주지(현 봉선사 주지) 해임. 밀운스님측 신도 봉은사 점거. ·88년 12월­밀운측 비상종단운영위원회 구성,봉은사에 총무원 개원. 1년여에 걸친 분규 양측 합의로 종결. ·91년­종정추대를 둘러싸고 성철 종정유임파와 월산 불국사 조실 옹립파 해인사와 통도사에서 승려대회 개최. 월산옹립파 강남총무원 개설. ·94년 4월­서의현 총무원장 3선으로 범종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 개최, 서의현 원장 축출. 개혁회의 출범. ·94년 11월­월주 총무원장의 개혁종단 출범. ·97년 3월­해인사와 봉은사에서 주지문제로 마찰. ·98년 11월­송월주원장 3선 출마강행 분규 시작.
  • ‘한국의 지성’ 서울대 교수:3(공직 탐험)

    ◎1년에 논문 1편도 안쓰고 버티기 가능/논문써도 인센티브 없어/연구 의욕 꺾는 환경 큰 문제/학문 흐름 쫓아가기도 벅차 “경제학부의 한 교수님은 예전 강의노트를 계속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오늘은 정말 화가 났다.수학공식을 칠판에 쓴 뒤 ‘이해 되는 사람 손들어봐, 어이 자네 나와서 설명좀 하게’하고 본인은 경제신문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만으로 1시간을 채웠다” 서울대 한 학부생이 PC통신에 올려놓은 글이다. 서울대에도 ‘노는’ 교수는 많다.노트 한권,슬라이드 한장으로 수십년 버티는 교수,시험문제가 바뀐 적이 없는 교수 등의 명단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한다.또 대학원생이 쓴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슬그머니 갖다붙여 ‘업적’을 쌓는 교수도 있다. 논문은 교수 평가의 바로미터다.미국 과학인용목록(SCI)의 대학별 논문발표 순위를 보면 서울대는 96년 157위,97년 126위 등 100위 안에 좀처럼 들지 못한다.97년의 경우 1위인 하버드대의 논문발표수가 8,364편,2위 도쿄대가 5,536편,3위 워싱턴대가 4,769편인데 반해 서울대는 1,395편이다.세계 유수대학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전북대 徐모 교수는 “채용 당시는 우수한 인력이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서울대교수로서의 능력이 의문시된다”고 말했다.서울대 교수들도 이같은 현실을 인정한다.‘탈수기로 빨랫감을 쥐어짜듯’ 개인의 에너지를 100% 뽑아내는 미국 등의 교수에 비하면 ‘천국’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같은 빈약한 업적에 대해 소장파 교수들은 연구를 교수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학교 및 사회분위기와 그에 순응하는 교수의 자세를 꼽는다.비교적 논문발표가 많은 사회대의 尹모 교수는 “교수에 대한 평가와 인센티브가 제대로 부여되지 않는 상황에서 논문을 적게 쓰나,많이 쓰나 차이가 없다.일년에 논문 하나 안 써도 버틸 수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경제학부의 한 교수도 “교수가 신문에 칼럼쓰고,외부강연하고,잡문이나 쓰는 것으로 더 평가받는 현실에서 진득한 연구가 될 리가 없다”고 했다. 연구에 욕심많은 교수들을 울리는 비(非)학구적 환경도 문제다.각종 행정 업무처리 때문에 학기 중에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밤늦게 공부할라치면 학교측에 유숙계를 제출해야하는 형편이다.또 외국학회에 가기 위한 출장도 한 학기당 1주일로 제한돼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외국 유명저널에 실린 논문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의 얽히고 설킨 선후배관계도 연구발전의 저해요인이다.이에 대해 외교학과의 한 교수는 “선배의 권위로 모든 것을 억누르는 수직적인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래서 감히 ‘나는 다르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조교수를 거친 뒤 서울대에 부임한 李모교수(37)는 “서울에 온지 4년만에 하버드대 동료들을 만나보니 내가 학계정보,연구성과물 모든 면에서 밀리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세월이 흐를수록 더 할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 JP 정치권·언론 직접 챙긴다

    ◎내각제 언급 강행… 자민련 위상되찾기 시도/“권력구조 논의할때 아니다” 일부여론 일축 金鍾泌 총리는 19일 상오 국회에 갔다.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대독하기 위해서다.점심은 국회 앞 한 음식점에서 했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정책위 지도부를 초청했다.양당의 金元吉·車秀明 정책위의장과 3개 정책조정위원장들이 모두 참석했다.하루 일정의 절반을 국회에서 보낸 셈이다. 지난 15일에는 양당 원내총무단을 초청했다.韓和甲·具天書 총무와 부총무 등 15명이 모였다.金총리는 이날 具총무에게 ‘특혜’를 주었다.명예총재로서 접대비를 적잖이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의원들을 열심히 만나라는 주문과 같다.스스로도 정치권을 부지런히 챙기고 있다는 얘기다. 자민련의 최근 기류와 무관치 않다.자민련은 대변인을 바꿨다.李完九 대변인이 ‘입’이 됐다.언론보도 건수를 찾느라 무척 부산을 떤다.자민련이 국민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다시 가까이 당겨놓음으로써 위상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자민련은 20일 내각제 추진위를 발족한다.21일에는 당내 소장파 모임인 ‘비전 21’첫 세미나가 열린다.盧在鳳 전 총리가 초청연사다.내각제 소신을 갖고 있는 인사다.지향하는 방향이 한결같이 내각제다. 金총리는 최근 ‘강연정치’를 재개했다.내각제는 빼놓지 않는 메뉴다.한 당직자는 자제를 건의했다.권력구조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는 일부 여론을 의식해서 그랬다.하지만 金총리는 이를 일축하고 내각제 언급을 강행했다는 후문이다.한 측근은 “JP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고 전했다. 정치권과 언론을 부쩍 챙기기 시작한 JP.노련한 정치인으로서 구상이 있을 것이다.그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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