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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된 시기를 윤지충의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이전과 신유교난이 일어난 1801년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지도층의 신분이 확연히 달라진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진산사건 이전(1784∼1791)의 지도층 인물 12명 가운데 김범우(역관)·최창현(의원)·최필공(의원) 3명의 신분이 중인이라고 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장교 출신의 이존창도 중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 가운데 최창현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양반 중심의 천주교 신도층을 평민층까지 확산시켰으며,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예배처로 제공하였다. 이 12명은 대부분 1784년에 입교했으며, 이 가운데 김범우가 가장 이른 1786년에 순교하였다.(천주교 용어로는 순교자가 아니라 증거자이다. 그가 현장에서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광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신유교난 이전 10년간의 지도자 38명 가운데 21명이 중인으로 절반이 넘었으니, 사회를 바꿔보려던 그들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의 자형 이벽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영세받은 최초의 신자는 다산 정약용의 자형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다. 그는 손위 동서이자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한 이벽(李檗·1754∼1786)의 권유로 천주교도가 되었는데, 아버지 이동욱이 1783년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자 자제군관(개인 수행원)으로 북경에 따라갔다.40일 동안 머물며 남천주교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필담으로 교리를 익히고 프랑스인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신자가 되었다. 그는 1784년에 수십 종의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상본(像本) 등을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벽은 손아래 동서인 이승훈에게 세례받은 뒤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 수표교 옆으로 이사했으며,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중인층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천주교 교리를 전하였다. 당시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이므로 외국인 신부가 없어, 조선인 신자들끼리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를 익히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10명의 가신부에게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김범우(金範禹·1751∼1786)는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종6품 한학주부까지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여 정약용의 자형인 이벽과 가깝게 지내다가, 이벽이 1784년에 천주교 교리를 전하자 그의 권면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이 영세를 베풀기 시작하자, 김범우도 이벽의 집에서 그에게 영세를 받아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영세식이었는데, 이존창·최창현·최인길·지홍 등이 함께 받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자신의 아우 이우(履禹)와 현우(顯禹)까지 입교시켰다. 그의 집은 명례방(明禮坊) 장예원(掌隷院) 앞에 있었는데, 천주교 서적이 많이 있어 신자들이 자주 모여 미사를 드리거나 설교를 들었다. 양반 이벽의 집에는 하층민들이 드나들기 어려워, 중인 출신의 김범우가 수표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을 예배처로 제공했다고 한다.1784년부터 그의 집은 명례방공동체가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밀양에 유배되다 1785년 어느 봄날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다.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을사’는 1785년, 추조는 형조를 가리킨다. 서학(西學)에 대해 비교적 온건했던 정조 시대였으므로,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대부 자제들을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의 김범우와 최인길, 두 역관만 잡아 가두었다. 그러자 권일신이 그의 아들과 함께 형조에 찾아가, 자신도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양반 자제들을 처벌하기 어려워, 잘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대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김범우는 천주교를 저버리지 않았다. 판서가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다. 잘못된 점은 모른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결국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에 소장하였던 천주교 교리서들은 모두 형조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다. 성균관 학생 정숙은 자기 친구와 친척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완전히 절교하라.”고 통문을 보냈다.1785년 3월에 돌린 이 통문이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문서라고 한다. 달레 주교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김범우는 유배된 뒤에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다가, 고문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쯤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아들 인고는 밀양으로 이사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며, 두 아우는 신유박해(1801)에 순교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고 하지만, 밀양일 가능성이 높다.‘사학징의(邪學懲義)’에 “범우가 병오년에 사학(邪學) 사건으로 단양(丹陽)에 정배되었다.”고 했는데, 충청도라고 하지는 않았다. 밀양시에 단장면(丹場面)이 있으며, 그의 묘소가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 있고, 아들도 그곳으로 내려와 산 것을 보면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인 그의 묘는 1989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져,2005년 9월 14일에 유배 220주년 및 김범우(토마스) 묘역 준공미사가 1500명 신자가 모인 묘소 앞에서 베풀어졌다. ●김범우가 살던 동네에 명동성당 들어서 1886년에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나라 안을 여행할 권리와 더불어, 건물을 짓고 서울에 거주할 권리와 소유할 권리까지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푸아넬 신부가 주도하여 명례방에 대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의 가옥은 좁았기 때문에, 윤정현의 집을 비롯해 여러 채를 계속 구입해야 했다. 푸아넬 신부가 작성한 1887년 보고서에는 “우리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울 전에는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구입해 놓은 (명동의) 대지는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요한 기본 건물들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김정동교수의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에서 인용). 그러나 이곳은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가까워,“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가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 하여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고 착공을 지연시켰다.1892년 봄에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교회 터를 평평하게 닦아놓자, 뮈텔 주교가 머리돌에 축복하였다. 코스트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898년 5월29일에 푸아넬 신부가 명동성당을 준공하였다. 그 자리의 지명이 종현이어서 한때는 종현성당, 또는 뾰죽집이라고도 불렸는데, 곧바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순교한 지 100년 뒤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바로 그 동네에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김범우는 몰랐겠지만, 순교의 피가 100배 결실을 맺은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책/ 서울 에세이 - 파편화된 서울, 일그러진 근대화

    미국의 비판적 도시학자 존 로건과 하비 몰로치는 현대도시를 움직이는 힘을 돈과 권력의 연합체인 ‘성장기계(growth machine)’라고 지적했다.시청광장과 신세계광장을 잇는 서울의 소공로야말로 그 성장기계의 산물로 어정쩡한 도로가 된 대표적인 예다.20m의 좁은 길이면서도 강북과 강남을 잇는 대동맥의 길목이 됐고,그런 길목이면서도 을지로나 남대문로, 심지어 북창길에 건물의 얼굴을 빼앗기고 있다.이처럼 소공로가 엉거주춤하고 불편한 거리가 된 것은 격자형으로 짜여진 서울 도심의 다른 길들과는 달리 블록의 모서리와 모서리를 대각선으로 잇는 방사형으로 이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겪어온 근대화의 과정은 어떠한 형태로 서울의 곳곳에 자취를 남겼을까.우리가 극복해야 할 시대의 덫은 무엇이고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인가.‘서울 에세이’(강홍빈 지음,주명덕 사진,열화당 펴냄)는 서울의 ‘신주작대로(新朱雀大路)’라 할 만한 길들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그 해답을 찾는다. 저자(서울시립대 교수,전 서울시 행정1부시장)는 문화적·인문적·환경적시각을 도시관리에 접목시키는 데 진력해온 도시설계 전문가.그는 서울의 길을 종단하며 구간마다 펼쳐지는 도시풍경을 음미하고,그러한 풍경을 유지 또는 변화시키는 ‘구조화의 힘’과 그에 저항하는 ‘관성의 힘’을 살핀다.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현재는 저지된 과거이고 미래는 실현되지 않은 현재이다.”라고 했다.그렇다면 어떠한 과거가 저지되고 어떠한 과거가 용인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곧 현재를 아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도시공간을 시대적 연원을 달리하는 여러지층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혼합체로 간주한다. 저자에 따르면 서울의 거리에는 역사적 연원을 달리하는 세 지층이 존재한다.근대 이전 조선조가 남긴 지층과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화 속에서 형성된 지층,그리고 광복 뒤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이룩된 지층이다.세종로에는 이 세 지층이 다 겹쳐 있지만 태평로나 소공로는 그보다 덜하고,남산 이남의 반포로는 최근 지층만이 두드러져 보인다.오늘의 서울 거리는 먼저 있던 지층에 새 지층이 겹쳐지면서 이전 것을 선별적으로 지우고 대체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광복과 함께 일제에 의해 왜곡된 서울의 공간구조는 그대로 대물림됐다.식민통치의 거점은 군정과 한국정부가 물려받았고,소공동·명동·남대문에는 군정때 적산불하로 등장하기 시작한 대기업들이 자리잡았다.일본인 거주지는 월남민과 피난민의 주거지로 변했다.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 드라이브가 펼쳐지는 가운데 세종로는 산업근대화를 부추기는 ‘민족중흥’의 동원장으로 재단장됐다.특히 서울 600년,근대사 100년 동안 나라의 중심이었던 세종로의 변천사는 거듭된 과거부정의 역사였다.교보빌딩 자리가 조선시대 육조와 한성부,사헌부,장예원의 옛터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저자의 눈에 비친 근대화된 서울의 도시풍경은 파편화된 모자이크다.우리의 ‘압축적이고 외생적인’ 근대화가 이전 시대의 지층을 이어받아 진화시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청산,극복하지도 못한 채 여러시대의 지층들이 뒤섞여 있는 난맥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풍경이 처음부터 혼란스러웠던 것만은 아니다.그 한 예가 회현동(會賢洞)이다.조선시대 회현동은 이름 그대로 선비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다.경복궁까지 글읽는 소리가 들려 임금이 가끔 잠행을 하기도 했다는 동네다.도성 반대쪽의 북촌 가회동처럼 현직 세도가들이 아니라,‘원님 하나내지 못하지만 뗄 힘은 있는’ 재야 선비들이 많았던 곳이다.‘북촌에는 떡,남촌에는 술’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다.지금도 동네 어귀에 남아 있는 유서깊은 보호수와,아파트 단지 뒤 바위에 새겨진 정자의 이름 등에서 ‘남산골 샌님’들의 거주지 남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저자는 회현동을,미래를위한 도심속 휴경지(休耕地)로 규정한다. 저자는 서울기행을 통해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화 궤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일깨워준다.그것은 시민사회의 성숙화,상호소통적인 합리성의 회복,공공영역의 확장,생활세계의 존중,절차적 정의의 실현 등으로 요약된다.도시는 시민이 만든다.그래서 도시는 시민을닮는다.급조된 거대도시,‘초신성의 단계’에 이른 서울을 건강하고 풍요로운 미래형 도시로 일궈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1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명동성당 100돌/임영숙 논설위원(외언내언)

    명동성당이 올해로 100돌을 맞는다. 지난 1898년 5월29일 축성돼 교회로서의 기능을 시작한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그 역사만으로도 가톨릭의 한국전래와 뿌리 내리기가 설명된다. 명동은 원래 한국천주교가 출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가톨릭 신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이벽은 다시 김범우에게 세례를 준다.지금의 명동인 명예방 장예원 앞에 살았던 김범우는 자기집에서 신앙집회를 열었고 이승훈을 비롯,이벽·정약전·정약용 등 초기 신자들이 이곳에 모였다. 몇달후 이 집회는 형조에 의해 해산되고 김범우는 단양으로 귀양갔다가 죽지만 한국 천주교는 박해를 이겨내고 굳건한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한국 천주교는 나중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아 종현이라 불리던 명동언덕에 1892년 교회를 세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신부(한국명 고의선)가 당시 대한제국에 고용되어있던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 건물은 총건평 1천498㎡(약360평)에 길이 69m,너비 28m,지붕높이 23m,종탑높이 45m의 라틴십자가형신고딕 양식. 6년만에 준공식을 갖고 처음엔 종현성당으로 불렸으나 해방후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적 258호로 지정됐다. 명동성당 100돌이 뜻깊은 것은 그러나 교회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성지일뿐만 아니라 한국민주화의 성지로서 우리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어 왔다. 1904년 가톨릭청년들은 이곳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의하는 모임을 가졌고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은 벨기에 국왕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이곳에서 이재명 의사의 칼침을 맞았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물론 최근까지도 명동성당은 공권력도 침범하기를 삼갔던 성역으로 학생시위의 종착점이자 농성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등 재야인사들이 지난 76년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3·1시국선언을 발표한 곳도 명동성당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빛과 소금 역할을해온 명동성당의 100돌을 마음 깊이 축하한다.
  • 분묘내부 제문 첫 발견/영주시 이산면서 16세기 유물 대량출토

    ◎만사 등 원형 그대로 보존… 복식연구 가치도 커/문화재 지정 신청… 99년부터 일반에 공개키로 지난 3월 영주시에서 대량 출토,16세기 장의제도를 규명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 제문 등 유물이 문화재 지정신청과 일반공개를 앞두고 있어 관련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유물은 국도 5호선 편입부지인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마을앞 야산에서 조선 중종 21∼23년(1526∼1528년) 장예원 판결사를 지낸 김흠조 부부의 묘소를 이전하던 후손들에 의해 묘관내부에서 출토된 것.즉시 영주시에 기증된 이들 유물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제문과 만사 각 19점을 비롯,백자호 분청호 백자매병 유리구슬 장신구 명정 등 모두 20종 92점.깊이 2m70㎝ 지점의 무덤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외관위에 두께 15㎝의 회판과 30㎝ 정도의 숯을 깔고 매장돼 잘 보존된 상태였다. 영주시는 이들 유물을 전문가들에게 의뢰,과학적인 보존방법을 강구한 뒤 학계와 문화재 전문위원 등의 고증을 거쳐 문화재 지정을 정부에 신청하기로 했다.아울러 순흥역사문화단지내에 건립될 소수박물관에 전시,99년부터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출토유물을 살펴본 문화재 전문위원과 학계 전문가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과학적인 보존대책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학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관속 장지에 먹으로 쓴 제문과 만사,당시의 수의와 의류 등으로 4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또 출토된 제문은 당시의 형조판서 등 관직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연명으로 기록,보통의 제문이 각자가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의 제문을 쓴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는 “피장자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관상태가 좋은 제문과 만사가 발견돼 피장자와 당시 사림(사림)들의 학맥·교류관계,필적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윤용진 전 경북대 교수(고고인류학)도 “지난 91년 5월 경북 칠곡군 북삼면 인평리 야산 벽진 이씨 분묘에서 수습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선조 18년(1585년)에 사망한 피장자(신원이 밝혀지지 않음) 묘관에서 만장 12점과 수의와 의류 등 16점이 출토된 것이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묘관내부에서 제문과 만사가 같이 출토된 사례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제문과 만사의 경우 대부분 탈상시까지 빈소에 전시되거나 비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분묘에서 제문과 만사 특히 제문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16세기 전반기 조선 중종(1520년대)때의 복식이 대량출토 된 것도 복식사 연구에 소중한 고증자료라는 평가다. 김영숙 문화재 전문위원은 “옷감이 교직물(두가지 이상의 실로 섞어서 짬)을 사용,칠보무늬 등 문양이 특이하고 저고리가 전단후장(앞은 짧고 뒤는 긴 옷)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며 “절대 부족한 조선 전기의 복식연구를 위한 귀중한 고증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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