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장애아들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지원금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내정간섭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크로스핏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주거지역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53
  • ‘5.18 살아남은 자의 아픔’, 40년 만에 작품으로 고백한 김근태 화백

    ‘5.18 살아남은 자의 아픔’, 40년 만에 작품으로 고백한 김근태 화백

    오롯이 40년이 걸렸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조선대 미술학도의 신분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야만 했던 김근태(63)화백. 눈앞에 쓰러져있던 많은 시체들과 쌓여진 총들, 저항에 참여해 달라는 주위의 외침을 뒤로한 채, 도청을 떠난 순간부터 시작된 정신적 충격과 기억의 쓰라린 아픔은 40년의 긴 시간을 그와 함께 했다. “전일빌딩 옆에 제가 있었어요. 헬리콥터 나는 소리도 들었고 총소리도 들었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한 젊은 청년은 머리 쪽에 총을 맞은 거 같았어요. 피가 온전히 다 흘려서 하얗게 변해 있는 모습이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죠.” 기억을 도려내기 위해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4번의 극단적 선택,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죄책감으로 교단에서 떠나야만 했다. 방황하던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지적장애인들이었고 그들의 모습과 영혼을 30년간 화폭에 담아왔다. 이달 13일부터 내달 21일까지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 5관에서 5·18 민주화운동 이후 40년간 그가 직접 경험한 트라우마를 담은 작품을 화폭에 담아 선보인다. ‘오월, 별이 된 들꽃‘이란 이름으로. “40년 만에 여기 와서 보니 5월의 생생했던 모습이 떠올라요. 전두환이 지시를 내려서 죽은 영혼들을 태워 흔적을 없애려 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토우 천 개와 한지 천 개를 만들어서 광주의 아픔을 담았고, 한(恨)의 노래도 들을 수 있어요. 이곳에 마음껏 오셔서 그날의 현장을 느끼면서 아픔을 넘어 치유가 되는 그런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난 8일 전남 무안 옛 죽산분교 작업실에서 김근태 화백을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Q) 장애인만을 그린 지 30여 년, 왜 지적장애인만을 그리는지4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파 학교도 가지 못했고 늘 외롭게 지냈다. 누나와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한참 뛰어놀 나이에 다른 아이들과 달리 왜 죽는지 사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꼬마 철학자가 됐다. (Q) 장애인들을 그릴 때 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화백님께 5.18이란대학교 2학년 때 당시 23살 청년이었다.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옛 전남도청 정문을 지키는 사태수습 시민군이었다. 길거리에 아줌마의 배에서 터져 나온 피와 창자, 많은 시체들, 쌓여진 총들. 저항에 참여해 달라는 외침 등이 기억난다. 도청이 계엄군에 장악됐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의 애원에 도청 담을 넘었다. 죽음이란 최후의 시간을 앞두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 그 터질 듯한 공포로부터의 본능적인 탈출이었다. 이후 나만 살아남았다는 자괴감은 모든 걸 마비시켰다. 무시로 일어나는 일탈로 교단에서 퇴직하게 됐고 신혼 중에 4번의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다. 아내조차도 오랫동안 그 아픔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월로부터 살아남은 내 젊은 날의 일그러진 초상이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또한 내 인생의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지적장애인을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Q) 가장 낮은 자를 예술작품으로 담는 일이 5.18 정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는데단지 나 자신만을 생각했고 위했다면 5.18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돈을 생각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면 가장 낮은 자의 모델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인간의 본질로 살려고 했던 그런 정신 상태에서 기초했던 거 같다. (Q) 어떻게 눈과 청력을 잃게 됐는지이후 한국을 떠나 프랑스, 인도 등에서 방랑자처럼 살았다. 옥죄어 오는 맨 정신의 고통을 털어보려고 술에 의존한 채 살았다. 결국 음주운전을 하다 담벽을 덮쳐 한쪽 눈의 망막이 크게 다쳤고 눈의 시신경과 연결된 청력이 손상된 거 같다. (Q) 폐인처럼 지내던 삶 속에 지적장애인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는데광부가 금맥을 찾은 느낌이었다. 목포 앞바다 작은 섬 고하도 목포공생재활원에서 누워 대소변을 타인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손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지적장애인들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뒤틀린 자세로 모여 있는 그들의 모습은 오월 기억 속 주검들과 다를 바 없었고 내적 고통으로 헝클어진 내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됐다. 우연찮게 접하게 된 강렬했던 그 모습들은 나 자신의 피폐해진 현재의 삶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각하게 만들면서 트라우마의 구덩이로부터 벗어나 자아회복과 치유로 나아가는 전환의 계기가 됐다.(Q) UN본부에 전시됐던 100미터짜리 ‘들꽃처럼, 별들처럼’의 의미는지적장애인을 그린 작품들로 2012년 7월부터 3년여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100호 캔버스 77개를 이어 붙였다. 두 가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장애인이 오히려 인간의 순수 본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점과 그곳에 전시돼 있던 그림 속의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떠나는 소풍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 외에도 베를린 장벽전시회, 리우패럴림픽 기념 전시회 등 많은 곳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모든 과정들 또한 광주의 아픔에 대한 보이지 않는 치유과정 아니었나 생각한다. (Q) 장애인들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점차 상징성이 담긴 그림으로 변화되었는데상징과 암시가 더해지다면서 형상이 점차 생략되더니 최근에는 아예 비정형의 추상 화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주제나 주인공들은 그대로다. 외적 형상 위주에서 차츰 내면세계와 본질로 향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조형적 변화일 수 있지만, 시력과 청력의 감각장애에 따른 불가피한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양쪽 청력을 잃은 데다, 화가로서는 치명적이게도 나머지 한쪽 눈마저 시력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 하지만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세상의 언어로는 한계가 있는 지적장애아들과의 소통에서 현상 너머 그들 영혼과 우주자연의 존재들과의 영적 교감에 더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Q) 40년 만에 작품으로 다시 찾게 된 옛 전남도청,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이곳에서 전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5.18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아픔이 치유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지 70장을 샀다. 한지에 붉은 채색으로 그려 오월정신을 핏빛으로 담고 싶었다.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담은 한 작품 ‘오월빛’을 그렸다. 다시 옛 생각이 살아나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고 나서 더 이상 화폭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결국 5.18의 아픔을 그리는 대신 영혼을 위로하고 회복되는 예술작품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으로 토우 1천 인, 1천 인의 한지조형 작품, 지적장애인을 그린 4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기쁨으로 돌아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 전시는 내 역사에서 영원히 남을 거 같다. 눈과 귀가 안 좋아지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에 더 의지한 거 같다. 그로 인해 작품에 몰입하는 정신력은 더 강해졌고 지적장애인들의 마음을 더 공감할 수 있었다.(Q) 토우 1천 인은 어떤 분들인가5.18 민주화운동 참여자, 사상사, 행불자, 살아남는 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토우 제작 과정 중 떨어지고 상한 토우와 완성된 토우들이 아픔과 상처의 벽을 넘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군상은 슬픔을 넘어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한지로 만든 1천 인도 물론 5.18의 아픔을 담아낸 작품이다.(Q) 내면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가장 큰 원동력은 종교의 힘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해 큰 믿음을 얻게 됐다.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될 수 있었고 지혜와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적장애인을 그리면서 순수한 에너지를 받았고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전시를 하면서 도와주신 주위의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 칭찬 또한 큰 힘이 되었다.(Q) 지난해 장애어린이들의 화가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김근태미술상 공모전을 제정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이 있다면지난해 장애어린이들의 화가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김근태미술상 공모전을 제정했다. 자칫 김근태를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지인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있다. 발달장애 작가들 그림과 글을 엮어주는 책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올해 처음 제1호 책이 나왔다. 또한 그림에만 머물지 않고 뮤지컬, 영화로 가치미학을 더 확장하고 싶다. 더 큰 꿈은 세계 발달장애 작가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가칭 ‘미술페럴림픽’같은 국제 대회가 설립돼 발달장애 작가들의 꿈과 열정이 표현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길 소망한다.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형우 기자 sungho@seoul.co.kr 임승범(인턴)
  • ‘코피노’라 속여 필리핀에 장애아들 버린 한의사 부부

    ‘코피노’라 속여 필리핀에 장애아들 버린 한의사 부부

    정신장애가 있는 친아들을 ‘혼혈’이라고 속여 필리핀 현지에 버린 뒤 연락을 끊은 인면수심의 한의사 부부가 4년 만에 붙잡혔다. 이들은 이전에도 아들을 어린이집, 사찰 등에 버리고 1년 넘게 방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아이가 불교를 좋아해서”, “영어에 능통하라고” 각각 사찰과 필리핀에 보낸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러 차례 부모에게 버림받으면서 장애가 악화하고 한쪽 시력까지 잃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또 다시 버림받을 수 없다며 부모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부산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 윤경원)는 아동을 유기하고 방임해 아동복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한의사 A씨를 구속기소하고 아내 B씨를 불구속기소했다고 16일 밝혔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014년 11월 정신장애가 있는 친아들 C(당시 10살)군을 필리핀 현지 한인 선교사에게 맡겼다. A씨는 C군을 자신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인 ‘코피노’라고 속인 뒤 “먹고 살기 어려워 키우기 힘들다”며 양육비 3900만원을 주고 떠났다. A씨는 선교사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출국 전 미리 아이 이름을 바꾸고 아이가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여권까지 빼앗았다. A씨는 국내에 들어오자 전화번호를 바꾸는 등 치밀하게 범행했다.오랫동안 C군 부모와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한 선교사는 결국 청와대 국민신문고에 ‘필리핀에 버려진 한국 아이’라는 제목으로 사연을 올렸다. 이를 본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이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은 외교부 등과 함께 C 을 4년 만에 한국으로 데려왔다. 또 수소문 끝에 A씨 소재를 찾았다. 필리핀 마닐라지역 보육원 등에서 4년간 방치된 C군은 정신장애가 더욱 악화했고 왼쪽 눈은 실명되는 등 건강 상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A씨는 이에 앞서 2011년 경남 한 어린이집과 2012년 충북 한 사찰에 양육비 수백만원을 주고 C군을 맡긴 뒤 각각 1년 가량 방치하다가 어린이집과 사찰 측 항의를 받고서야 C 군을 집으로 데려온 사실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A씨가 C군을 두 차례 국내 유기했다가 실패하자 결국 해외에 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취학 연령이 된 C군이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해당 교육청도 C군 행방을 찾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 부부는 검찰 조사에서 “아이가 불교를 좋아해서 템플스테이를 보냈고, 영어에 능통하도록 필리핀에 유학을 보낸 것”이라며 “아이를 버리지 않았고 그동안 바쁘고 아파서 못 데리러 갔다”고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대 피해 아동 쉼터를 거쳐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C군은 “집에 가면 아빠가 또 다른 나라에 버릴 것”이라며 “아빠한테 제발 보내지 말라”고 가정 복귀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다. 검찰은 아동보호기관과 협력해 피해 아동에게 의료와 심리치료를 지원하기로 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고아·장애아들에 희망 남기고 떠난 ‘말리 언니’

    고아·장애아들에 희망 남기고 떠난 ‘말리 언니’

    고아와 장애아동을 위해 평생 헌신한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의 영결식이 21일 열렸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이날 경기 고양시 홀트 복지타운에서 지난 17일 84세로 별세한 홀트 이사장의 영결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홀트 이사장은 2012년 골수암 판정 이후 투병해 왔다. 홀트 이사장은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인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 부부의 딸이다. 홀트 부부는 1955년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부부는 6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한국인 고아 8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고, 이듬해 한국으로 와 홀트아동복지회를 세웠다. 홀트 이사장은 1935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화이어스틸에서 태어나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1956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60년 이상 한국에서 고아와 장애아동을 위해 일했다.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홀트 복지타운에서 300여명의 중증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을 직접 돌봤다. 독신이었지만 ‘고아와 장애아들의 어머니’, ‘미혼 부모들의 대모’, ‘말리 언니’로 불렸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엄마, 유치원이 무너져서 가슴 아팠어”… 사고 이후 원생들 악몽 꾸고 퇴행증상 늘어

    “엄마, 유치원이 무너져서 가슴 아팠어”… 사고 이후 원생들 악몽 꾸고 퇴행증상 늘어

    다세대주택 시공사 엉터리 안전 계측 유치원 위험 알려도 반년간 조치 없어 학부모 “조금 더 머물렀으면 큰일 날뻔…아이들 안전 더이상 천운에 맡길 수 없어” ‘누리반’의 장애아들 뿔뿔이 흩어지고 유치원 지원 여부도 안 알려줘 발품만 “유치원 인근 공사로 인해 건물 일부가 훼손돼 당분간 휴원합니다.” 김유나(35·가명)씨는 지난해 9월 7일 자정이 넘은 시간에 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메시지를 받고 포털사이트에서 유치원 이름을 검색하던 순간을 떠오르면 지금도 손이 떨려 온다. 포털사이트에 쏟아진 사진 속 서울 상도유치원의 연붉은 건물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잘려 나간 흙더미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유리창이 깨지고 균열이 생긴 채 왼쪽으로 기울어져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들 연우(7·가명)가 다섯살 때부터 다니던 곳이었다. 정혜원(36·가명)씨는 아침이 밝자마자 딸 다윤(7·가명)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이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는 소식에 밤새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쏟은 터였다. 당시 유치원 건물이 위험에 놓였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전혀 몰랐다. 그해 3월부터 유치원 바로 옆에서 다세대주택 신축공사가 시작됐고, 소음과 먼지 때문에 당분간 바깥 놀이가 어렵다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막은 충격적이었다. 다세대주택의 시공사는 공사 전 진행하는 안전 계측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흙막이 공사에 건설업 무등록업자가 참여하기도 했다. 위험을 우려한 유치원 측에서 전문가를 모셔다 현장점검을 벌이고, 교육지원청 등에 공문을 보내며 위험을 알렸지만 반년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그사이 공사장 흙막이가 조금씩 기울고 유치원 건물의 균열이 눈에 보일 정도로 곳곳에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유치원이 기울어지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유치원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다. 아들 유찬(5·가명)이를 상도유치원에 보내는 허주연(32·가명)씨는 그날을 떠올리자 목소리가 떨려 왔다. “아이가 조금만 더 늦게 유치원에 머물렀으면… 지금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유치원 바로 옆 상도초등학교의 배려로 6개 교실을 얻어 9월 10일부터 아이들이 생활할 수 있게 됐다. 7개 반이 6개 교실을 사용하게 되면서 ‘누리반’에서 생활하던 장애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먼저 배려받아야 할 장애아들이 가장 먼저 교실을 잃는 현실에 부모들은 가슴을 쳤다. 다니던 유치원을 옮기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단순한 일로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정신적 충격이 적지 않았다. 장난감과 정성껏 가꾼 무와 배추,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던 곳이 폐허가 된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악몽을 꾸거나 떼를 쓰고 엄마에게 집착하는 등 퇴행 증상이 늘었다. 사태를 수습하면서 고군분투했던 원장, 무너진 잔해를 뒤져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와야 했던 교사들의 트라우마도 심각했다. “엄마, 우리 유치원이 무너졌어.” 어느 날 유찬이는 조그만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내가…여기가 아팠어.” 주연씨는 아이에게 팔베개를 하고 함께 누웠다. “유찬아, 많이 힘들면 다른 유치원으로 가도 돼.” 덤덤했던 유찬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됐다. “아니, 나는 상도유치원 다닐 거야.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같이 지낼 거야.” 유치원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아이들을 그저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은 구청과 교육청을 찾아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국회를 찾아 사고가 반복되지 않게 관련 법을 강화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럴 때마다 ‘소통의 벽’을 실감했다고 부모들은 토로했다. “어느 곳에서도 먼저 나서 설명을 하지 않았어요. “기다려 달라”는 말만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허주연씨) “당장 몇 개월 뒤 유치원이 다시 문을 여는지, 다른 유치원에 지원해야 하는지도 아무도 확실히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엄마들이 갓난아기를 아기띠로 안고 이리저리 발로 뛰어야 했어요.”(정혜원씨) 상도유치원은 올해부터 인근 유치원 건물을 임대해 다시 문을 열고 신입 원아를 받았다. 유찬이는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갔고, 연우와 다윤이는 초등학생이 됐다. 아이들이 아픔을 딛고 한뼘 성장한 사이 관계당국들도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들을 내놓았다. 서울시는 민간 건축공사의 지하 안전영향평가와 굴토(땅파기) 심의 대상을 확대·강화하고, 부실한 공사로 인접 건축물에 피해를 준 건축 관계자도 처벌할 수 있도록 관련 조항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교육청은 학교 인근 공사장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이는 한편 안전에 위협을 받는 학교에 ‘현장안전담당관’을 파견하고 예산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동작구는 ‘안전재난담당관’을 신설해 지역 내 재난 컨트롤타워를 담당하도록 했다. 부모들은 “해법 마련을 위해 고심해 준 구청과 교육청 등에 감사하다”면서도 더이상의 ‘사후약방문’은 있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은 건 ‘천운’이었어요. 씨랜드 화재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나라가 더이상 아이들의 안전을 천운에 맡겨선 안 됩니다.”(김유나씨)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컴퓨터 게임 그만하라고 꾸짖는 엄마 살해...지적장애 아들 징역 7년 선고

    컴퓨터 게임을 그만하라고 꾸짖는 엄마를 때려 숨지게 한 지적장애아들이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부산지법 형사6부(최진곤 부장판사)는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A(21)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고 치료감호를 명령했다고 24일 밝혔다. A씨는 지난해 8월 16일 “컴퓨터 게임을 그만하라”는 엄마 꾸중을 듣고도 계속 게임을 하던 중 노트북을 빼앗고 효자손으로 때리려 하는 엄마를 나무 책꽂이 등으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지적장애 2급에 조현병을 앓고 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9명 중 7명은 유죄 의견을,2명은 A씨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의견을 냈다. 양형에 대해서는 배심원 4명이 징역 5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징역 8년과 징역 6년(각각 2명씩),징역 7년(1명) 순이었다. 재판부는 배심원 평결 결과를 고려해 A씨에게 징역 7년을 최종 선고했다. 재판부는 “ A씨가 지적장애와 조현병으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우발적인 범행을 저지른 점,범행을 인정하며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점,일부 가족이 선처를 원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장애아들 병든 아버지 살해혐의 무죄, 시신 훼손·유기 혐의는 징역 4년

    병든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내 버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지적장애 40대 남성에게 법원이 존손살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1부(부장 최성배)는 26일 검찰이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한 이모(41)씨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이씨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숨진 아버지 시신을 토막 내 버린 혐의(사체손괴·사체유기)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지적장애 3급인 이씨는 지난 2월 9일 경남 진주 시내 자신의 집에서 파킨슨병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81) 입안에 손을 밀어 넣고 목을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씨는 숨진 아버지 시신을 토막 낸 뒤 시내 쓰레기통과 사천 창선·삼천포 대교 아래 바다, 부산 태종대 앞바다에 버린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아버지 입안에 가득 찬 가래를 닦아내려고 물티슈와 손가락을 입안에 넣었고 목에 걸린 물티슈를 빼내려고 아버지 목을 10초 정도 누른 행위밖에 하지 않았다며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씨가 다른 가족 없이 9년째 병든 아버지를 혼자 간호하는데 부담을 느껴 고의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며 존속살해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은 이씨가 아버지가 숨진 뒤 시신을 훼손할 공구를 사들인 점과 119를 부르거나 병원으로 후송하지 않은 점 등을 존속살해 간접증거로 내세웠다. 검찰은 또 이씨가 아버지 사망 3주 전 “아버지 장례비로 쓰겠다”며 정기예금을 해약해 1400만원을 인출하고, 아버지 시신을 유기한 뒤 여행용 가방을 산 사실도 증거로 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이씨가 아버지를 죽일 만한 범행 동기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아픈 아버지를 오랫동안 간호하며 피로감을 느낀 것과 범행 후 시신 훼손용 공구를 사들인 점은 인정했지만, 이씨가 당시 병세가 상당히 나빴던 아버지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조치 때문에 우발적으로 숨지게 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시신을 유기한 행동도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실수로 아버지를 숨지게 해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다’고 일관되게 진술한 점, 지적장애 3급으로 상식 능력과 판단력이 부족한 점 등을 고려하면 존속살해를 뒷받침할 간접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기예금을 해약한 것 역시, 과거에도 예금을 만기 이전에 해약한 적이 있었고, 여행용 가방을 산 것은 장애인고용공단을 통해 인근 하동군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점을 종합해 이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는 점이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려 존속살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뒤늦게 공소장 변경 없이 이씨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재판부는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며 허용하지 않았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특수학교도 교육시설인데… 무릎 꿇고 허락받을 일인가요”

    “특수학교도 교육시설인데… 무릎 꿇고 허락받을 일인가요”

    “기피시설 인식만 심은 합의문 철회해야” 조희연 교육감 “소통 부족했다” 사과“특수학교는 교육시설입니다. 다만 학생들이 조금씩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다릅니다. 학교를 짓는 일이 주민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인가요?” 지난해 9월 강서구 지역주민들에게 무릎을 꿇고 특수학교 건립을 허용해 달라고 호소했던 장민희 강서장애인가족지원센터 팀장은 조희연 서울교육감과 강서구가 지역구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강서 특수학교 설립반대 비상대책위원회’가 발표한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합의문’에 대해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장애아 학부모인 장 팀장은 5일 서울신문과 만나 “그 일(무릎호소) 이후 강서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특수학교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해 주시고 힘을 주셨다”면서 “사회적으로 장애아동을 보는 시선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장 팀장은 이어 “하지만 이번 합의문으로 인해 특수학교가 한방병원 같은 지역 편의시설을 제공해야만 지을 수 있는 기피시설처럼 비춰지게 됐다”고 지적하며 “조 교육감이 특수학교 건립을 위해 노력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이번 합의는 안 하니만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날 발표된 합의문은 한방병원 유치를 원하는 특수학교 건립 반대 주민들의 입장을 반영해 서울교육청이 인근 학교 통폐합 부지에 한방병원이 건립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수학교 건립은 강서구의 서진학교처럼 기존 학교 부지를 활용할 경우 지역주민과의 합의가 법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장 팀장은 ”장애아이들은 겉보기에 비장애아와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아이들“이라면서 ”우리 사회가 선입견과 편견 없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장애아들을 봐 주셨으면 한다“고 거듭 호소했다. 장 팀장을 비롯해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와 서울특수학교학부모협의회,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합의문 철회를 주장했다. 기자회견 이후 조 교육감과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조 교육감은 “실무 과정에서 학부모님들과의 소통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사과했다. 조 교육감은 단체들과 소통해 2~3일 내에 합의문 등과 관련한 입장을 다시 밝힐 계획이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불혹의 장애아들 돌보던 뇌경색 부친 “가자, 같이”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불혹의 장애아들 돌보던 뇌경색 부친 “가자, 같이”

    ●발달장애 자식에게 둔기 든 애끊는 父情 그날 힘없이 무너져 내린 건 아들의 몸뚱이만이 아니었다. 허강원(73·가명)씨의 실낱같은 희망도 함께였다. 발달장애(지적장애 1급·다운증후군)로 불혹의 나이에 키가 150㎝에서 멈춰버린 큰 아들은 질뚝거렸지만 걸어는 다녔다. 아들이 혼자 걷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였다. 대소변을 혼자서 가리고, 밥이 있는 곳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돌봄의 한계치이기도 했다. 허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 먹자”고 큰아들을 불렀다. 큰아들은 기우뚱하더니 서지 못하고 엎드렸다. 식탁으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밤잠 못 이루며 끙끙댔던 고민들이 명쾌해졌다. ‘그래 같이 죽자’. 한씨는 2015년 4월 15일 집 안방에서 자던 큰아들(당시 41)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다. “지나고 보니 사는 게 그늘이 많았어. 안 해 본 사람은 몰라. 간병이라는 게 매스컴에 나오는 그런 것과는 많이 달라.” 유난히 태양이 뜨겁던 지난 7월 31일, 허씨를 서울 그의 집 앞에서 마주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흘렀지만, 세상과 등진 그의 삶이 달라진 건 크게 없어 보였다. “이젠 눈에 보이지 않잖아. 노력도 많이 했고…. 지나간 일이니까”라며 애써 태연했다. 긴 설득 끝에 그의 집 앞에서 지난 삶에 대해 들었다. 아내는 강남구의 한 빌딩에 청소일을 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결혼 후 따로 살고 있어 때마침 그는 혼자였다. 허씨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여지는 남겼다. 노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내려앉았다. “그래. 그때 예감했어.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 큰아들은 아내가 임신한 지 9개월째 되는 날 태어났다. 수술할 돈이 없어 산파에게 부탁했다. 어렵사리 아이는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왔지만,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산파는 도망갔고, 아내가 급한 맘에 아이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엉덩이를 때렸다. 기적처럼 큰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렵게 살아났지만 아이는 약했다. 갑자기 숨을 쉬지 않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다섯 살이 됐지만 서지 못했다. 다운증후군, 지적장애 1급이라고 했다. “요즘 눈으로 생각해 보면 장애를 둔 아이를 키우는 게 짜증 날 일도 아니잖아. 근데 사는 재미가 없었어.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지.” ●장애 아들 돌본 40여년, 살아도 산 게 아니었어허씨는 강원도 대관령에서 나고 자랐다. 25살 경기 동두천 내 미군부대에서 군생활을 했고, 전역하고 서울에 정착했다. 28살 아내와 혼인해 다음해 큰아들을 가졌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서울 중랑구 근처 면도칼 공장에서 일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가진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없이 살았지만 큰아들의 장애가 나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없어 수소문 끝에 인천 부평에 있는 학교에 보냈다. 그때만 해도 먹고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부모들이 발달장애 아동의 교육을 포기하던 때다. 10개월쯤 지나서였을까. 특수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에게 밥을 대접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야속했다. “나아지는 것 없다”는 말에 작은 희망조차 사라졌다. 없는 살림에 매달 쌀 한 가마니 값을 치러 가며 학교를 보냈지만,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 ‘발달장애는 질병과 달리 낫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머리는 알지만, 가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첫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첫째가 잘하는 건 집에서 텔레비전 보기였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텔레비전을 틀어 주면 온종일 봤다. 말은 대충 알아들었고, 간신히 걸어 똥오줌은 가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이가 흘린 김칫국물을 닦고, 국물이 묻은 옷을 벗기고, 발버둥 치는 몸을 씻기는 일은 40여년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큰아들을 돌보느라 나들이 한 번 제대로 가 본 적 없었다. 아이를 돌봐야 하니 일을 마치고 퇴근해도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큰아들이 어렸을 땐 집에 놀러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선 이웃도, 친구도 모두 사라졌다. “또래들이 태권도복 입고 태권도장 가는 모습을 보잖아요. 우리 아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찔찔찔 하는데, 사람 눈 뒤집히지. 행복할 수가 있나.” 우울증이 찾아왔다. 술만 마시면 눈물을 흘리며 비관했다. 남들한테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술도 담배도 끊었다. 이게 벌써 수십년 전이다. 언제나 단정하게 보이려고 했지만, 남들은 늘 추하게만 보는 것 같았다. 사실 큰아들 밥 차려 주고 거두는 건 힘들지 않았다. 그냥 큰아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공원에 가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얘기의 끝은 늘 아들, 딸, 며느리 얘기였다. 그럴 때마다 할 얘기가 없어서 소심해졌다. 5살 터울인 작은아들에게도 형은 굴레였다. 장애를 둔 형 때문에 파혼을 당하기도 했다. 부모가 죽고 없으면 형을 돌볼 수 있는 가족은 동생뿐이지 않냐며 상대편 부모가 반대했다. 부모의 마음은 미어졌다. “부모들 모임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거야.” 그는 인터뷰 도중 자주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었다. 돈을 뜻하는 손짓이었다. 결국 돌보는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아이를 센터에 보내는 것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허씨 내외는 경제적으로 늘 허덕였다. 맞벌이를 해 봐야 시원치 않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빌딩 청소일을 해 왔고, 허씨는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60세에 환경미화원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후 빌딩 경비 일도 했지만, 2교대 근무 탓에 큰아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금방 그만뒀다. “밥 먹다가 숟가락을 딱 떨어뜨렸어.” 그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허씨는 뇌출혈 선고를 받았다. 식사를 하다가 손에 힘이 없어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더니 뇌경색이 발견됐다. 이미 고혈압과 협심증, 류머티즘 관절염, 척추 디스크, 수면장애 등을 앓고 있었지만 뇌출혈은 느낌이 달랐다. 곧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큰아들은 누가 돌봐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잘못된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과 함께 죽는 게 모두를 위해 최선이 아닐까 하는 믿음도 생겼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걷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봤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팽팽하던 긴장의 사슬은 톡 끊어졌다. “아들을 망치로 내리쳤소. 규남이는 내가 데리고 갑니다. 정선희 당신을 만나 한평생 잘 지냈소. 규남이에겐 입이 열개여도 할 말이 없소이다.”(유서 전문) 2015년 4월 15일 새벽 6시쯤, 아내가 일을 나간 것을 확인하고 망치로 아들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회한이 몰아치기 전에 유서를 썼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수면제 수십알을 들이켰다. 정신을 잃기 전에 아파트 복도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중간쯤 갔을까. 허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렇게 질긴 목숨은 끝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남편을 발견했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허씨는 3일간 혼수상태를 오갔지만, 끝내 깨어났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다만 5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법원은 허씨가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을 수십년간 정성 들여 보살펴 온 점을 인정했다. 고령이고 지병이 있고, 남은 가족을 생각해 맏아들을 살해했다는 점 등도 참작했다. 그는 돈 때문에 큰아들을 마음껏 못 가르친 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많지 않지만 월 1만~2만원씩 발달장애 아동 단체에 기부금을 낸다. “내가 어려움을 겪어 봤으니까. 그런 애들 불쌍하잖아…. 집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이나마 못 하겠죠.”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 [포토인사이트] 머리 짧은 엄마들이 바라는 건…

    [포토인사이트] 머리 짧은 엄마들이 바라는 건…

    12일 오전 서울 종로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열린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도입을 촉구하는 결의대회에 참가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어머니들 중 머리가 짧은 분들이 유난히 많았다. 여름이라 시원하게 깎았다고 하기엔 길이가 거의 비슷해 이유를 물어보니 지난 4월 2일에 209명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삭발했다는 것이다. “100번이라도 더 깎을 수 있어요” 삭발할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 질문하자,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100번이라도 더 깎을 수 있단다.집회 참가자의 발언처럼 이분들이 80세가 되어서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 보살피면서 살기에는 너무도 힘든 인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엄마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장애아들은 어찌 될까…. 장애 발생 원인은 환경 및 사회적인 문제도 큰 만큼 장애아들이 기본적인 생활이라도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18.6.12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46세 장애아들 살해한 83세 노파…그 안타까운 사연

    지난달 31일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법원에서 현지의 관심을 모은 살인사건 재판의 선고가 내려졌다. 이날 살인사건으로 기소된 피고는 올해 83세 노파인 황씨. 놀랍게도 그녀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날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사건은 지난 5월 9일 벌어졌다. 당시 황씨는 46세 아들에게 60정의 수면제를 먹인 후 베개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그리고 다음날 황씨는 경찰서로 찾아가 자수했다. 법원이 황씨에게 선처를 베푼 이유는 안타까운 사연에 담겨있다.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황씨의 아들은 46년 전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정신적인 장애와 함께 자라서도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홀로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후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아들을 46년 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이 바로 어머니 황씨였다. 그러나 이제는 83세의 연로한 황씨가 언제까지 아들을 돌볼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는 셈. 황씨는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몸이 약해져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면서 "아들보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아들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털어놨다. 결국 황씨는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질 아들이 걱정돼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남은 가족과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황씨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아들을 '짐'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면서 "아들을 고통 속에 남겨놓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이 모든 것을 끝내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복지시설에 아들을 보내라는 말도 들었지만 나보다 더 아들을 잘 보살필 사람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재판관은 "부모를 포함해 어느누구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면서도 황씨의 처지를 고려해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의 선처를 내렸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이낙연 총리, ‘무릎 꿇은 엄마’ 언급하며 특수학교 설립 호소

    이낙연 총리, ‘무릎 꿇은 엄마’ 언급하며 특수학교 설립 호소

    이낙연 국무총리가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건립 주민토론회에서 장애아 학부모들이 무릎 꿇은 일을 언급하며 특수학교 건립 지지를 호소했다.이낙연 총리는 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한 장의 사진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부끄러움을 일깨웠다”면서 “장애아의 엄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는 사진”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낙연 총리는 “이 엄마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라면서 “그 장애가가 조금 가깝게 다닐 만한 학교를 지역 사회가 수용하지 못해서 그 아이와 엄마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또 한 번 얹어드렸다”고 말했다. 이어 “도대체 우리 사회의 그 무엇이 그 아이와 엄마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고 있느냐”면서 “장애아의 교육 받을 권리보다 내 집값이나 내 아이 주변을 중시하는 잘못된 이기심이 작동하지는 않았을까”라고 개탄했다. 이낙연 총리는 학교까지 1시간 이상 걸리는 학생의 비율이 일반 초중고교는 3.2%이지만, 특수 초중고교는 11.6%라는 통계도 언급하며 “장애아들이 더 먼 학교에 다녀야 하는 세상은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문들이 조사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특수학교가 들어선 곳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나 집값 변동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한다”면서 “내 아이를 장애아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것이 내 아이를 좋은 사회인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교육 이론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또 “오히려 내 아이가 장애아를 배려하며 함께 사는 경험을 갖는 것이 아이의 미래에 훨씬 더 좋다는 것이 세계 공통의 상식”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교육부를 포함한 관계부처들은 주민과 성심으로 소통해 특수학교를 확충해 가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또 공공기관과 민간기업·단체들이 장애인 고용을 늘려주길 바란다며 의무고용을 이행하지 않고 부담금으로 때우려는 행태를 비판했다. 특히 공공기관이 장애인 의무고용을 이행하지 못하면 그 기관장을 엄정하게 제재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장애아들 학대혐의 가장, 부인·딸과 함께 목숨 끊어

    아들을 학대한 혐의로 경찰수사 선상에 오른 40대 가장이 가족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2일 광주 북부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6시 10분쯤 광주 북구 오치동의 한 주택 방 안에서 A(49)씨와 아내(37), 딸(20)이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에는 질소가스통과 유서 등이 남아있었고, 창문과 출입문 등 바깥과 공기가 통하는 틈새가 접착테이프로 밀폐돼 있었다. 시신을 발견한 집주인은 월세가 3개월째 밀려 이날 A씨 가족을 만나러 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지역에 살았던 A씨는 지난해 12월 몸이 불편한 아들(17)을 학대한 혐의로 경찰에 고소당했다.그는 경찰수사가 시작되자 지인과 연락을 끊은 채 연고가 없는 광주로 주소를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A씨 아들은 학대받은 정황이 확인된 이후 충북의 보호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경찰은 A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하프타임] 이근호, 장애아에 1억원 기부 약속

    축구 국가대표 공격수 이근호(32·강원FC)가 지난 27일 강원 강릉시 강남축구공원에서 열린 ‘이근호 자선축구대회’에서 약정식을 열고 장애 어린이를 위해 푸르메재단에 1억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축구를 하면서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아이들에게 나누고자 결심했다. 전국의 장애아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제때 재활치료를 받아 꿈을 펼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월드피플+] 장애 딸 위해 380억 털어 테마파크 만든 아빠

    [월드피플+] 장애 딸 위해 380억 털어 테마파크 만든 아빠

    10여 년 전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아빠 고든 하트먼(53)은 당시 12세였던 딸 모건과 워터파크를 갔다가 평생 잊지 못할 가슴 아픈 경험을 하게 됐다. 여러 소녀들이 놀던 수영장 안으로 딸이 들어갔는데 곧바로 다른 아이들이 모두 물 밖으로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자폐와 인지장애가 있던 딸이 풀장으로 들어가자 장애우에 익숙치 않은 소녀들이 놀라 함께 물 속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최근 영국방송 BBC는 장애를 가진 딸을 위한 놀이공원과 워터파크를 건설한 한 아빠의 감동적인 사연을 전했다. 마치 영화와도 같은 아빠의 '놀이공원 프로젝트'는 10년 전인 2007년 시작됐다. 수영장에서 겪은 일에 큰 충격을 받은 아빠 고든과 엄마 매기는 이 일을 계기로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딸처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을 만들겠다는 것. 고든은 "미국 어느 곳에도 모건과 같은 장애 어린이들이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 놀 공간이 없음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부동산 업자였던 고든은 이후 자신의 사업체를 모두 팔고 2007년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장애 전문가들과 자원봉사자들과 힘을 합쳐 지난 2010년 샌안토니오에 세계 최초의 장애인을 위한 테마파크를 열었다. 딸의 이름을 딴 이 테마파크의 이름은 '모건 원더랜드'. 전재산인 3400만 달러(약 380억원)를 털어넣은 모건 원더랜드는 대회전 관람차, 미니 기차 등 기본적인 놀이기구는 모두 갖췄다. 특히 장애 어린이들도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여러 장치가 세심하게 배려됐다. 물론 놀이기구의 첫 승객은 이제는 20대 성인이 된 딸 모건이었다. 고든은 "우리 딸의 경우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어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라면서 "그러나 많은 장애아들은 여러 현실적인 벽에 부딪친다"고 말했다. 이에 모건 원더랜드의 장애인 입장료는 무료다. 여기에 고든은 전체 직원 3분의 1을 장애인으로 채용했다. 2010년 개장 이후 모건 원더랜드는 전세계 67개국에서 총 100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명소로 커나갔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한 해 적자만 100만 달러(약 11억원)에 달해 부족한 돈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모건 원더랜드 옆에 역시 세계 최초의 장애인을 위한 워터파크도 문을 열었다. 의사와 장애인 부모 등의 조언을 받아 건설된 이 워터파크 역시 미끄럼 방지와 방수 휠체어 등 장애인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녹아있다. 고든은 얼마 전 한 아빠가 다가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울음을 터뜨리며 했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이런 말 한 마디, 마음 한 조각이 그의 삶을 지탱시켜 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 아들은 지금껏 수영장에서 한 번도 논 적이 없었어요. 당신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월드피플+]두 다리 없는 9살 레슬링 선수의 무한도전

    [월드피플+]두 다리 없는 9살 레슬링 선수의 무한도전

    선천적으로 두 다리없이 태어난 소년이 레슬링선수로 활약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14일(현지시간) 미 ABC뉴스는 두 다리없이 종횡무진 메트 위를 누비는 9살 소년 이사야 버드의 사연을 전했다. 뉴욕 롱비치 출신의 이사야는 두 다리가 없어 평소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소년에게 '장애'라는 의미는 그저 사전 속에 나오는 단어일 뿐이다. 이사야는 놀랍게도 두 다리가 없어도 풋볼, 축구, 수영, 서핑을 한다. 특히 이시야의 주종목은 바로 레슬링. 이사야는 튼튼한 두 팔로 경기장으로 달려나가 성난 기세로 상대 선수를 바닥에 메다꽂는다. 이시야는 "장애라는 것은 나에게 변명이 되지 않는다"면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조금씩 실력이 나아진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 나이에 어른도 하기 힘든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사야지만 그 뒤에는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 부모와 코치가 있었다. 특히 5살 때부터 운동을 가르쳐 온 미구엘 로드리게스 코치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로드리게스는 "'다른 아이들이 할 수 있으면 너도 할 수 있다'고 이사야에게 가르쳤다"면서 "인생은 항상 공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곧 이사야는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스포츠 기술 뿐 아니라 건강한 정신 교육까지 받은 셈이다. 로드리게스는 "장애가 있더라도 즐기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먼훗날 이사야가 전세계를 다니면서 자신이 해왔던 일들을 연설해 다른 장애아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오른팔 없는 14세 포수 “애보트 좇아 메이저리그 입성했으면”

    오른팔 없는 14세 포수 “애보트 좇아 메이저리그 입성했으면”

    오른팔이 없는 미국 중학생 포수가 눈길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테네시주 코너스빌 중학 8학년에 재학 중인 루크 테리(14). 어릴적 박테리아 감염병 합병증을 앓아 세 차례 수술대 올라 생후 19개월 만에 오른팔을 제거한 그는 이 학교 야구부의 어엿한 포수로 활약하고 있다. 왼손으로 포수 미트를 끼고 공을 잡은 뒤 재빨리 미트를 던져버리고 다시 왼손으로 공을 잡아 투수에게 건네거나 주자를 잡기 위해 내야수들에게 건네는데 그 속도가 놀라울 따름이다. 한 손이나 한 팔로만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한 선수는 둘이나 있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없이 태어나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미국의 우승에 힘을 보탠 뒤 같은 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에 입단해 1993년 노히트노런까지 기록한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50), 어린 시절 트럭에 치여 오른팔을 잃은 피트 그레이(2002년 사망)가 1945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외야수로 활약했다. 테리 역시 대학에 가서도 야구를 하고 싶어 하고 애보트나 그레이처럼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어한다. 그는 타격에도 재능이 있어 팀의 3번 타자를 맡고 있다. 그의 바람은 팬들이 자신을 ‘특별한 포수’로 보지 않고 그저 ‘조금 다른’ 포수로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테리는 “(오른팔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팬들은 내게 ‘다른 이에게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그들은 내가 오래 이 길을 걸어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MLB 닷컴도 최근 애보트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이 테리와 같은 장애아들의 열정을 살려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어보기도 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덩크슛 꽂는 ‘왼팔 없는’ 美중학생 농구선수

    한 팔이 없는 중학생이 농구선수로 활약하며 덩크슛까지 터뜨린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2일(현지시간) 미 NBC뉴스는 아이오와주(州) 워싱턴에 사는 중학생 트래션 윌리스(14)의 믿기 힘든 도전기를 전했다. 키 190cm에 달하는 윌리스는 농구코트를 휘저으며 평균 15점을 넣을 정도로 촉망받는 농구선수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년은 다른 선수와는 달리 왼팔이 없는 농구선수다. 두 손을 사용하는 농구경기에서 한 팔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 윌리스는 희귀질환인 양막대 증후군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왼팔 일부가 없다. 양막절단이라고도 부르는 양막대 증후군은 양막의 조기파열로 인해 끈 모양의 섬유질이 태아의 사지를 감싸며 생기는데. 이 때문에 윌리스처럼 사지 중 일부가 절단돼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지체장애자라면 농구선수로 뛴다는 것 자체가 엄두도 나지 않을 일이지만 윌리스는 달랐다. 윌리스는 "태어날 때 부터 한 팔이 없었지만 이같은 장애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면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농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신체적 단점이지만 윌리스는 이를 노력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 팔로 멋지게 덩크슛을 하는 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미국 내에서 주목받는 소년이 됐다. 특히 농구실력 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어린 윌리스의 마음 가짐이다. 윌리스는 "나처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고 싶다"면서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영감을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윌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과 비슷한 장애아들에게 당부했다. "신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이유가 있다. 최선을 다하라."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장애아들 태우고 일하던 40대 화물차 운전기사 교통사고로 둘 다 숨져

    뇌병변 2급 장애를 앓는 8살 아들을 태우고 화물차를 몰던 40대 남성이 도로에 서 있던 25t 탑차를 들이받아 둘 다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부산 사상경찰서에 따르면 6일 오전 1시 49분쯤 부산 사상구 삼락동 낙동대로 한 모텔 앞 편도 4차로 도로에서 임모(47)씨가 몰던 1t 화물차량이 4차로에 정차해 있던 25t 탑차(운전자 최모·50)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임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함께 타고 있던 아들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전 2시 40분쯤 숨졌다. 임씨는 베트남 여성과 결혼했지만, 3년 전 부인이 가출하자 최근 뇌병변 2급인 아들을 화물차에 태우고 일을 하러 다니다 사고를 당했다. 25t 탑차 운전자 최씨는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물건을 운송할 공장이 문을 열지 않아 공장 인근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경찰은 임씨가 몰던 1t 화물차량이 급제동하거나 방향을 바꾸려 했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 전방 주시 태만으로 사고가 났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사고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부인이 가출한 뒤 아들을 친척집에 맡겨 놨다가 최근 장애인학교에 아들이 입학하자 데려와 같이 생활했는데 돌볼 사람이 없어 차에 태워 다니다 이번에 사고를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혼자 둘 수 없어서…장애아들 차태워 일터 다니다 함께 숨진 일용직 아빠

    혼자 둘 수 없어서…장애아들 차태워 일터 다니다 함께 숨진 일용직 아빠

    장애가 있는 8살 아들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차에 태워 일터를 다녔던 40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 사고로 아들도 함께 세상을 떠나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6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새벽 1시 49분쯤 부산 사상구 낙동대로의 한 모텔 앞에서 건설일용직 노동자인 임모(47)씨가 몰던 1t짜리 트럭이 정차해 있는 25t짜리 탑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아버지 임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들(8)이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차 안에서 어린이 보호장비(카시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임씨와 아들이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바람에 각각 운전대와 대시보드를 강하게 받아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밤길에 발생한 사고이긴 하지만 사고 현장 주변 조명이 밝아 불법 정차한 25t 탑차가 잘 보이는 편이었고, 주변 폐쇄회로(CC)TV에 찍힌 장면을 분석한 결과 임씨의 트럭이 사고 전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급하게 바꾸려 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 졸음 운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임씨는 9년 전 외국인 여성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아내는 3년 전 뇌병변 2급인 아들을 두고 가출해 연락이 두절됐다. 처음에는 여동생의 도움으로 아들을 돌봤지만 올 초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주변의 도움 없이 임씨 혼자 아들을 보살폈다. 임씨는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영세민 아파트에 살았고 임씨가 이날 운전한 차량도 한달 전 병으로 숨진 형에게 물려받아 사용하는 것이었다. 혼자 아들을 돌보면서 생계도 꾸려야 했던 임씨는 아들을 맡길 데가 없어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쩔 수 없이 임씨는 아들이 학교수업을 마치면 차에 태우고 다니며 공사현장을 다녔다. 고된 노동 중에도 틈틈이 아들의 말동무가 되어 아들을 지극하게 보살폈다는 것이 유족들의 전언이다. 임씨의 형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시 출퇴근하는 일반 직장은 아들이 아프거나 할 경우 갑자기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임씨가 일용직 일을 택했다”면서 “아들이 남들처럼 정상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하다고 말했고, 입버릇처럼 ‘아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월드피플+] ‘양손 없는’ 7세 소녀 ‘필기 대회’ 우승하다

    양쪽 손이 모두 없는 7세 소녀가 전 미국 필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큰 감동을 주고 있다.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ABC뉴스 등 현지 언론은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초등학교 그린비어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아나야 엘릭(7)의 사연을 전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인 아나야는 선천적으로 양손이 모두없이 태어난 장애 소녀다. 친구들과 다른 모습은 물론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두 손이 모두 없지만 아나야에게 이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의수를 사용하지 않고 팔 만으로 신발끈을 묶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의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것. 특히나 손 없이 펜을 들고 글씨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글씨를 쓰기 위해 아나야가 개발한 방법은 두 팔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피나는 연습을 통해 아나야는 놀랍게도 또박또박 글씨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전자'라 부르는 아나야의 무한도전은 이달 초 큰 결실을 맺었다. 올해로 25회 째를 맞는 전통있는 전미 글쓰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읽기 쉬운 필체를 씁시다'를 주제로 이 대회에서 아나야가 우승한 분야는 신체나 정신적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상 부문으로 다른 50명의 경쟁자를 제쳤다. 실제 공개된 시험지를 보면 양손 없는 소녀가 썼다고 보기에 믿기 힘들 정도로, 심사위원은 비장애 아이가 쓴 것과도 구별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담임교사인 조안 스톨레이커는 "아나야는 정말 똑똑하고 포기할 줄을 모르는 학생"이라면서 "양손 없는 아이가 비장애아들이 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라며 놀라워했다.   이번 수상에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 아나야의 부모였다. 모친인 비앙카 미들턴은 "출생 당시에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몰랐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면서 "지금의 아나야에게 '장애물'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