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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쿠데타 61시간만에 왜 실패했나

    ◎“공산회귀는 불용”… 국민이 등돌렸다/명분없는 거사에 군수뇌부 적전분열/경원동결등 서방의 강경대응도 큰 몫 전세계에 충격을 던진 소련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이유로는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강렬한 저항 ▲저항선봉장으로 나선 옐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 ▲군장악의 실패등을 들수 있으며 그외에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소련에 대한 서방세계의 강력한 압력도 들수 있다.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련국민들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쿠데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그것은 또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국민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3일간의 짧은 기간동안이긴 하지만 탱크로 무고한 시민을 깔아뭉개는 무자비한 무력탄압 앞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시위금지령과 통금령을 무시하고 20일 하룻동안에만 8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반쿠데타 시위를 벌이는 한편 육탄으로 탱크를 저지한 소련국민들의 용기는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과거 수차례에걸친 소련에서의 정변때마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소련국민들이 이처럼 용기있게 변한 것은 바로 고르바초프대통령의 개방정책이 소련국민들의 의식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결과라고 할수 있다.따라서 이번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것은 결국 쿠데타 주역들이 고르바초프의 신병은 체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국민들의 가슴속에 불어넣은 자유정신마저 가둬둘수는 없었던데 따른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지난 3일간의 쿠데타 진행과정을 지켜보면 이번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일부터 일으키고 보자』는 형태로 상황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이들은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 20일 체결될 예정이었던 신연방조약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겠다는 초조감에서 쿠데타 성패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군장악과 국민동향,지도부내의 결속등을 사전에 치밀하게 점검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사전준비가 미비된 상태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과거처럼 무관심으로 나타나지 않고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나자 비상위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의 절대적 동조세력으로 생각했던 공산당이 중앙위원회 성명을 통해 쿠데타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비상위에 결정적인 정신적 타격이 된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타격은 비상위내부의 적전분열로 나타났다. 쿠데타 발생 이틀이 안돼 비상위의 8인 멤버중 3명이 『건강상의 이유로』사임했다는 것이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도부내의 분열과 함께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것도 쿠데타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다.비상위는 당초 군부내에 냉전종식에 따른 군위상 축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일단 쿠데타가 일어나면 군 대다수가 이에 동조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군부가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평소 「국민의 군」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소련군은 『우리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수는 없다』는 쪽으로 급선회함으로써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이번 쿠데타에서 서방이 보인 대응도 쿠데타실패를 간접적으로 도운 한 원인이 됐다고 할수 있다.고르바초프의 실각소식이 전해지자 서방측은 한결같이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요구하며 서방의 경제지원을 갈구하는 소련에의 원조를 동결시켰다.서방세계는 또 반쿠데타 저항세력의 선봉에 선 옐친 러시아공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냄으로써 옐친으로 하여금 국민저항을 극대화할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조속한 개혁의 완결이란 점을 무시하고 오히려 개혁을 지연내지는 후퇴시키는 쪽으로 기치를 들고 시작됐다는 점에서 소련에서의 쿠데타는 처음부터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국민들의 진정한 바람 앞에선 무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준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할수 있다. ◎“3일천하” 쿠데타 일지/비상위 구성→불복선언→서방 경원동결→유혈충동→비상위 분열→병력 철수→고르비 귀환 소련의 강경보수파가 21일 소련역사상 처음 「월요정변」으로 기록될군사쿠데타를 야기한지 3일만에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해체됨으로써 이들의 꿈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모스크바정변 소식이 전해진것은 19일 상오4시.소련전역에 6개월시한의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언론과 출판물의 검열이 시작됐다.방송국들도 쿠데타군에 접수되어 방송이 통제됐다. 타스통신은 크리미아반도 휴양지에서 휴가중이던 고르바초프가 실각되었다고 전하면서 대통령직을 겐나디 야나예프부통령이 승계하고 8인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그러나 기세 좋게 몰아 붙이던 쿠데타세력들은 옐친의 시민 불복종운동촉구와 총파업선동으로 시작부터 예상치않던 장애물에 직면했다. 보수파들에 의해 야기된 쿠데타가 시련을 맞기 시작한것은 정변이 발생한지 8시간만인 19일 정오.옐친 러시아공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포고령을 무효라고 선언하며 반쿠데타 봉기를 부추기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미 모스크바시내에 진입했던 중무장 소련군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다. 부시 미대통령은 이날 휴가를 중단하고 긴급대책회의를 연뒤 기자회견을 갖고 하오5시 소련의 군사쿠데타를 강력히 비난했으며 대소원조를 보류할것임을 시사했다. 이튿날 쿠데타세력들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상오6시 일류신76 수송기 60대를 동원,모스크바로의 병력을 증강했으나 이에 맞서는 소련국민들의 시위는 세를 더해갔다. 그후 러시아공내에 주둔하고 있던 무장병력들은 러시아공 의사당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며 21일 새벽 급기야 유혈충돌로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음의 상황과는 달리 쿠데타세력이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주춤거리고 서방세계의 외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이날 최후의 「히든카드」를 내보였다. 군내 강경파인 모이셰프군참모총장이 전면에 나서고 그로모프중장(전아프가니스탄 주둔군사령관)과 바렌니코프 지상군총사령관이 실세로 급부상한 것이 그것이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듯 「최후의 항전」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으며 무력충돌도 불사하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뒤 10시간만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듯 강경입장을 누그러뜨리고 고르바초프와의 면담을 시도했다. 루키아노프 소연방 최고회의의장이 크림반도로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떠났으며 소련 국방부는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역에 배치됐던 병력들에 대해 철수명령을 내렸다.이어 모든 포고령이 무효화되고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 귀환길에 오름으로써 보수파들이 주연한 「쿠데타」드라마는 61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 안보환경 변화와 민군관계

    ◎“민주화 부응이 군 발전 지름길”/개방화시대 발맞춰 대민 신뢰 쌓아야/병영의 참모습 알려 불신요인 제거 중요/긴급 재난때 장비·인력 적극 지원 바람직 국방부는 16일 남북한유엔동시가입 등 국내외의 안보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안보환경변화와 민·군관계」라는 주제로 안보관련 세미나를 육군회관에서 개최했다.이날 세미나에서 연세대 서정우교수는 「민·군신뢰기반구축방안」이라는 제목으로,교육부 김진성장학관은 「민·군안보의지 고양방안」이라는 제목으로,그리고 통일연수원 윤병익교수는 「미래지향적 안보정책대안」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서정우교수는 『급변하는 국내외환경변화속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안보의 주역인 군의 신뢰증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군의 활동상과 참모습을 그대로 홍보하여 불신요소를 제거하고 군 본연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해다. 김진성장학관은 『통일여건조성을 위해 국방력과 경제력을 배양해야하며 이길만이 북한을 개혁·개방토록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윤병익교수는 『정부의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짙전에 따라 일부 국민사이에 감상적인 평화통일기피심리가 점증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의한 통일과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시대상황변하에 부응한 양보의식의 제고방안과 신축적인 정책개발이 요구된다』고 제시했다.주제논문을 요약한다. ◇서정우교수=민주사회에서의 군은 국민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기능도 수행할 수 없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다.국민이 군을 신뢰하면 강력한 군이되고 군이 강력하면 국가안전은 보장된다.이때문에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수준의 정도는 군의 발전과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척도가 된다.국민이 군에 대해 갖고있는 신뢰는 최근 상당히 향상되고 있으나 만족할만한 상태는 아니다. 군이 국민의 신뢰기반을 구축하기위해 수행해야할 자체관리의 영역을 몇가지 예시하면 ▲군의 정지적 중립 ▲군의전문화 ▲군의 민주화 ▲정훈교육의 강화 ▲대국민홍보조직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군은 자신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왔다.이때문에 군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이해수준,그리고 신뢰도가 낮은 상태다. 신뢰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예시하면 군은 국가의 민주화·개방화·공개화 추세에 적절히 순응해야 한다. 군은 언제나 사기가 충만해야하나 휴가장병과 초급장교들의 기강문제에는 유의해야한다. 국민들에게 군의 참모습을 알리기위해 매스미디어를 적극 활용,홍보를 강화해야한다. 긴급재난구조등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을 확대하고 민·군친선 체육대회 등을 열어 함께 어울려야 한다. 수재와 가뭄과 같은 재해를 당할경우 지역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군이 소유하고 있는 장비와 기술·인력은 사회에 환원,봉사해야한다. ◇김진성장학관=민·군의 상호이해를 돕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투기·탱크 등 무기와 군사시설을 어린이들에게 공개하고 중·고생들의 소풍·야영·집단수련장으로 부대를 개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초·중·고교와 일선부대가 자매결연을 맺고 자매부대를 친선방문하는 등의 행사는 군의고충과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군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경계심리를 불식하고 「우리군대」라는 의식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도록 군의 이미지개선에 민·군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군대에 입대한뒤 군 경험은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수행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개인의 삶에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청소년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윤병익교수=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군사력을 중심으로한 안보역량을 증대시켜야 할 요인과 통일분위기 공조에따라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상황으로 이를 조화시키는 차원에서 안보정책의 대안이 강구돼야 한다. 우선 「가상적」및 안보개념을 재정립해 북한과 중소양국을 냉전체제적 가상적으로 일축하는 안보정책은 통일지향적인 국민의식과 마찰을 가져올것이므로 지양돼야 할것이다. 미래지향적인 안보정책은 우리의 국가체제와 이익을 위협하는 대내외의 군사적,비군사적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모든 행동및 조치를 포함하는 「전방위안보개념」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둘째로 「전방위안보개념」에 입각,군사력을 증강하되 한편으로 남북대화의 진전과 더불어 군축가개념이 부각될것이므로 이들 요인을 조화시키기위해 국군의 정예화·첨단병기화과정이 추진돼야한다. 셋째는 「전방위안보」의 핵심적과업으로서 김일성 주체사상의 대남혁명전략상의 역할및 한계,주제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및 이에대응할 수있는 우리의 체제이념등에 관한 인식을 확립하는등 정신전력을 강화해야한다. 그러나 앞으로 가장 확실한 안보정책대안은 남북한 신뢰구축방안이며 민·군간 안보공감대 조성을위한 방안으로서는 상호 안보의식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홍보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군사정보가 비밀일수만도 없으며 오히려 국가안보와 군사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파해 국민의 안보의식과 자발적인 협조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세 학생 구하고 익사/김진수하사 영결식

    【속초=정호성기자】 익사위기에 있던 고교생 3명을 구출한뒤 파도에 휘말려 숨진 김진수하사(22)의 영결식이 2일 상오10시 동해안 육군 5790부대에서 베풀어졌다. 영결식장에는 유족및 소속부대 장병,고성·속초지방의 각급 기관장 등 3백여명이 석했다. 육군은 김하사의 유해를 국립묘지 육군묘역에 안장키로 했다.
  •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또 충돌/모두 1백80여명 숨져

    ◎EC,무장병력 추가파견 검토 【베오그라드 UPI AFP 연합】 민족분규로 진통을 겪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을 막기위한 EC(유럽공동체)의 평화중재노력에도 불구하고 29일 크로아티아공화국에서는 소수 세르비아인들이 한 마을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1명의 사망자와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등 사태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 한편 프란요 투즈만 크로아티아대통령은 31일 개각을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개각은 크로아티아의 보안군들이 확산일로에 있는 세르비아인들의 「폭동」을 진정시키지 못한데 자극받아 취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자르코 돔르얀의장은 자그레브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개각은 집권 크로아티아 민주연맹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미지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5∼6명의 각료가 교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앞서 유고 유력지인 보르바지는 지난 26일과 27일 크로아티아 중부의 바니자와 인근 코르둔 지역을 둘러싸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인들간에 벌어진 전투로 1백80명가량이 사망했으며 이들중 1백명은 크로아티아 경찰과 민병대라고 보도했다. 한편 유럽공동체(EC)와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은 29일 유고크로아티아공화국의 종족간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권총을 휴대한 일부 무장병력을 포함,최고 3백50명의 EC 옵서버를 추가로 파견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톱스타」의 결혼/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톱스타」김지미씨의 결혼소식이 조석간에 일제히 실렸다.네모반듯한 상자짜기로 실린 이 소식이,이상하게 신선감을 주었다.50대 여인의 4번째 결혼기사를 이렇게 반듯한 예우로 취급한 것도 의외롭고 「전성기」를 훨씬 지나간듯한 깊은 중년의 여배우에게 여전히 「톱스타」칭호를 쓰고 있는 표현도 성의있어 보여서 튀지를 않는다. 어느모로 보나 이제 초노에 들어서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이 한쌍의 결혼이,황량하디 황량한 사회면 한쪽에서 이렇게 조촐하고 격조있는 대접을 받은 것이 신선감을 준 것같다. 상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심장병전문의 의학박사다.세계적 심장병 박사가 톱클라스 여배우와 결혼하는 일은 외국서도 여러번 있었던 일이다.이런 전례들이 잠재의식에 투영되어,효성지극한 딸의 모습으로 주변에 나타난 맨얼굴의 여배우에게 감동하게 되었고 그래서 청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아무튼,그 의학박사는 기자들 앞에서 『…나이에 비해 아직도 젊고 예쁜 것에』 반했다는 말도 했다. 이 발표가 있기 며칠전 어느 공식모임에서 김지미씨를 본 일이 있다.그는 아직 아름다웠고 그리고 젊어보였다.명망있는 심장박사가 청혼을 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이었던 것 같다. 이날 김지미씨를 함께 본 몇명 지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화제가 진행되던 중이었었다.좌중의 O씨가 「과붓집」이라고 이름붙은 어느 대폿집 문앞에서 별난 것을 보았다고 얘기했기 때문이었다.백지에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써붙인 것이 『과부,대량확보!』였었다는 것이다. 대폿집 이름에는 「과부집」이 많다는 이야기끝에 O씨의 목격담이 나온 것이다.과부를 「대량확보」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며,그랬으니 어쩌란 말인가.좌중은 웃긴 웃으면서도 그 적나라한 표현투에 씁쓸한 뒷맛을 느끼고 있었다. 「과부」란 말은 본디 「소복」과 「수절」과 「청상」이라는 말이 수식을 해줘야 어감이 살아나는 말이다.그 신비한 금단의 분위기때문에 호시탐탐하는 「흑심」이 월장을 노리며 후원 담모퉁이를 배회한다.서릿발나는 은장도를 베개밑에 묻어놓고 잠안오는 밤을 전전반측하는 청상이나 그런 며느리가 애처러워 사랑마당에서 헛기침으로 밤이 깊은 줄을 모르는 시아버지가 좀처럼 곁을 주지않아 「흑심」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업어온 과부」의 사연이 심심찮게 있기도 한다. 이렇게 옛날의 정서가 묻어 있기 때문에 독특한 어감이 남아있는 말에 양생산 공업제품에처럼 「대량확보」라는 말을 붙여놓으니까 끔찍한 생각이 든다.이런 끔찍함을 우리는 눈만 뜨면 만난다.ㅅ씨는 「TV드라마」를 지적했다.딸이 어머니에게 하나같이 반발을 「찍찍」하게하는 것이 예사로워진 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리얼리티라나 뭐라나」를 살린다고 그렇게 하는 모양이지만 방송은 그러면 못쓴다는 것이었다.가정에서 여성의 말솜씨가 우아하고 교양있어야 천박하게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기회있는 대로 그걸 역설해야 한다고 ㅅ씨는 강력하게 주장했다.ㅈ씨는 말뿐만이 아니라 요즘 TV드라마에서는 남녀가 서로 따귀를 철썩철썩 갈겨대는데,이런 일들이 얼마나 우리를 살벌하게 오염시키는지 아느냐고 흥분한다. 그러자 ㄱ씨가 또다른 논리를 폈다.허구헌날 투쟁세력이 「까부수자!」「때려잡자!」를 외쳐대는 것도 폭언에 의한 가학행위이고 그것때문에 우리는 자학증후군같은 것에 감염된 셈이라는 것이다.그뿐인가.벗기기만 좋아하는 외설공연물,홍콩영화까지 가세한 폭력물,천박하고 타락한 갖가지 유해환경들이 모두 열거되었다. 마침 그런 분위기일때 그 모임의 초청대상중 한사람인 김지미씨가 들어왔었다.많은 유명인사와 젊은 연예인도 꽤 있었지만 그의 출현은 시선을 모았다.그러자 누군가가 『김지미씨도 과부 아닌가』하고 말했고 『맞지,과부지.아직 업혀갈만 한데…』하고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이런 입줄에 오르내릴 운명에 있는 것이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빚갚기인 셈이다.인기를 얻는데 상응하는 세금물기를 강요당한다. 게다가 「과부」까지도 송이버섯이나 더덕 취나물처럼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듯 인공재배할수 있다는듯이 「대량확보」를 호언하는 무지막지한 상혼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되어가도록 이상한 수요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우리사회다.이런 사회에서는 결혼경력이 여러차례인 유명여배우의사생활은 까딱하면 「스캔들」이 되고만다. 그후 며칠 안되어 이런김씨를 「업혀간 과부」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결혼발표로 신문에서 만난 것이다.여배우로 영화사업가로 당당하고 단단하게 성숙해가고 있는 김지미씨가 마음에 드는 인품의 명망높은 신사와 만나 노년의 반려자로 삼겠다고 마음먹게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그런 결심을 떳떳하게 피력하여 「추문의 입방아」가 되지 않게 하려고 처신한 것은 잘한 일이다. 처신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일수록 정당하고 떳떳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가십」의 소지를 막는 길일 것이다. 내용이 무엇이고 소재가 어떤 것이든 품격을 살려서 보여주는 노력이 우리에게서는 너무 멀어져가고 있다.방송에다가 그걸 바로잡는 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여배우의 다늦은 결혼도 격식을 살리면 매체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신선한 기사가 된다.사회분위기가 품격을 찾아가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같은때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효과도 클 것이다.
  • 중부유럽 배치 재래무기/그리스등 지중해국 이전/나토 소식통 밝혀

    【브뤼셀 로이터 연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중부유럽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선제공격 위협이 사라짐에 따라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된 재래식 군사장비들을 지중해 연안의 보다 가난한 동맹국들에 이양할 계획이라고 나토소식통들이 9일 밝혔다. 나토 소식통들은 지난해 있은 유럽배치재래무기감축협정(CFE) 조인으로 인한 나토군 재편 과정의 하나로 이뤄지게 된 이 계획이 그리스·터키등 지중해 연안국가의 방위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소식통들은 주로 미국과 독일이 기증한 탱크 2천5백대,무장병력수송용장갑차 1천대,대포 1백75문 등이 나토의 군사장비 이전계획에 포함돼 있다고 밝히고 이외에도 소규모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에도 추가적으로 군사장비들이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 「수서」사건 1심 판결의 의미와 전망

    ◎「비자금」 못밝혀 법정공방 계속될듯/일부 의원·공무원의 독직비리 인정/6명 집유 “너무 관대한 처분” 비판도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사건은 1심선고에서 관련 피고인 9명에게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한보그룹의 비자금규모 등이 밝혀지지 않아 앞으로도 이 사건을 둘러싼 법정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공판에서 구속기소된 의원과 공무원의 뇌물수수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장병조피고인이 돈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피고인 9명 가운데 6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함으로써 피고인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이 아니냐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일부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리라는 것은 검찰이 법정최저형을 구형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으나 뇌물수수액수가 적은 3∼4명선에 그칠 것으로 여겨졌을 뿐 6명씩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것으로는 예상치 못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국회의원들의 금품수수행위의 성격에 대해 명백한 뇌물수수로 규정,이 사건을 택지를 특별분양해 준다는 조건으로 의원과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은 독직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당초 이 사건은 수사과정에서도 정부고위관계자들의 외압설이 무성했었고 한보측의 수백억대 로비자금 살포설 등 갖가지 의혹들이 제기되었으나 검찰의 공소사실은 수사에서 명백히 밝혀진 범죄사실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실체적 진실발견을 위한 법원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기대를 모았었다.그러나 재판과정에서도 이를 위한 재판부의 노력은 미흡했다는 지적이고 보면 이 사건은 더욱 깊은 부분은 결국 밝혀내지 못한채 검찰수사결과로만 마무리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재판부는 그러나 심리과정에서 『정태수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은 없다』고 금품수수사실 자체를 부인해 파문을 일으켰던 장 전청와대비서관의 주장에 대해서는 『검찰에서 돈을 받은 사실을 조목조목 진술했고 정회장의 법정진술을 뒤집을 증거가 본인주장 외에는 없다』는 이유로 일축했다. 처음부터 이 사건에서 수뢰액수가 2억∼4억6천만원인 장 전비서관과 이원배·이태섭의원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도 예상했던대로 였으며 공갈죄가 적용된 김태식의원과 오용운·김동주의원도 집행유예가 선고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정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데는 수서사건을 주도했지만 뇌물공여자인데다 고령이고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있기 때문인 점 등도 고려됐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6명은 이날 풀려나 항소심에서는 불구속재판을 받게 됐으며 구속피고인의 항소심 선고기한은 4개월이므로 분리심리될 가능성도 높다. □수서사건관련 피고인 선고량 이 름 나이 죄 명 구형량 선고량 정태수 67 국토이용관리법 징 4 징 3 뇌물공여 배임증재 집유 5 이원배 59 특가법(뇌물수수) 징10 징 6 1억9천만원 1억9천만원 몰수 몰수 추 2억7천만원 추 2억7천만원 장병조 52 〃 징 10 징 6 추 2억6천만원 추 2억6천만원 이태섭 52 〃 징 10 징 5 추 2억원 추 2억원 오용운 64 〃 징 5 징 3,집유 5 추 3천만원징 추 3천만원 김동주 47 〃 징 5 징 3,집유 5 추 3천만원 추 3천만원 김태식 51 공 갈 징 4 징 2,집유 4 이규황 43 특가법(뇌물수수) 징 4 징 2년6월, 추 1천만원 집유 4 추 1천만원 고진석 38 배임수재 징 3 징 2,집유 4 추 2억원 추 2억원 *징=징역,추=추징금,집유=집행유예
  • “아태 국가간 호혜적 경제협력 다지자”(노 대통령 북미순방 여로)

    ◎“소와 수교해 이젠 KAL기 타도 안전”/노 대통령/“한국의 세계정세 유연 대응 특기할만”/멀로니 ◎…나티신 캐나다 총독내외가 노태우대통령내외를 위해 4일 저녁 총독관저에서 베푼 공식만찬에는 우리측의 공식수행원과 수행경제인,멀로니총리를 비롯한 캐나다 각계주요인사 1백여명이 참석. 이날 저녁7시50분(현지시간) 노대통령내외는 나티신총독내외,멀로니총리내외의 안내로 만찬장입구쪽으로 입장,역대 총독들의 초상화가 걸린 벽면을 배경으로 함께 기념촬영. 이어 노대통령내외와 나티신총독내외는 접견 라인에 서서 시종무관의 호명에 따라 만찬장에 입장하는 양측 참석인사들과 악수. 나티신총독은 먼저 만찬사를 통해 『한국이 지닌 활력은 곧 아시아태평양지역이 지닌 활력의 축소판』이라며 한·캐나다간의 긴밀한 협력필요성을 강조한뒤 『각하의 이번 방문이 너무 짧은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사말에 이어 건배를 제의. 답사를 위해 일어선 노대통령은 배포된 만찬답사를 하기에 앞서 영어로 『내 친구가 캐나다의 경우 9개월이 겨울이고 나머지 3개월은 봄 가을이라고 하던데 실제 와보니 사실과 크게 다른 말』이라고 조크하는등 두차례에 걸쳐 좌중의 웃음과 박수를 유도. 노대통령은 이어 우리말로 답사를 읽어내려 갔는데 『우정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한국속담이 있고 『좋은 우정은 제2의 친척이라는 속담도 있다』며 『우리 두나라 국민간의 우정은 리도강에 흐르는 물처럼 아름답고 영원할것』이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건배를 제의. ◎…노대통령과 멀로니 캐나다총리는 정상회담이 끝난직후인 4일 상오(한국시간 5일 0시45분)부터 의사당내 리딩룸에서 40여분간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회담결과를 설명. 정상회담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 15분정도 늦게 시작된 공동기자회견에는 캐나다측을 포함,외신기자 40여명과 우리측 수행기자 50여명,사진기자 등 1백50여명이 참석. 이날 기자회견은 멀로니총리에 이어 노대통령이 회담결과를 설명한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양측에서 각각 2명씩 모두 4명이 질문. 멀로니총리는 『오늘의 회담에서는 한 캐나다 양국의 협력증진에 관한 문제를 비롯,서방선진7개국(G7)정상회담에 관한 문제,무기문제와 우루과이협상에서 협력할 문제등을 논의했다』며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내용들을 대략적으로 설명. 노대통령은 『6·25 전쟁때 캐나다가 2만7천여명의 젊은이들을 파견,자유를 지켜 오늘날 한국이 경제성장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면서 『내가 멀로니총리를 반갑게 만나 아시아태평양의 번영을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게 된 것 자체가 감회가 깊은 일』이라고 피력. ◎…노대통령과 멀로니총리는 4일 환담중 전날 공항의전행사 때 의장병1명이 더위로 쓰러진 일과 북한의 김일성동상크기에 관해 농담을 나누며 폭소. 멀로니총리는 『나는 누군가 쓰러져 놀라면서도 제발 야당의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유감스럽게도 여군이었다』고 노대통령에게 농담. 이때 노대통령은 미국백악관 의전행사 때는 의장병이 4명이나 더위와 피로때문에 쓰러졌다고 소개하면서 『그러고보니 캐나다군인이 역시 미군보다 강하다는 것 아니냐』고 응수. 이어 멀로니총리는 평량의 김일성동상이 무려 75피트(22·5m)나 된다고 해서 동료의원들에게 『나는 그보다 작은 것이라도 동상하나 세워달라』고 했더니 『75㎝짜리 동상을 세우기도 어려울 것이다.말썽날 일 말라』는 반응이더라고 해 좌중엔 다시 웃음. ◎…노태우대통령은 4일 하오4시(한국시간 5일 상오5시) 캐나다 외무성 회의실에서 열린 한가경제인 간담회에 멀로니총리와 함께 참석,경제인들을 격려. 노대통령은 이날 두나라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아태경제협력각료회의(APEC)를 중심으로 지역국가간 호혜적 경제관계가 심화돼야 한다고 역설. 이에앞서 멀로니총리도 인사말에서 『캐나다시장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교역에 장애는 없다』면서 한국기업의 캐나다투자를 호소하고는 『두나라가 국가와 민족의 벽을 허물고 세계시장에 함께 진출하자』고 제안. 노대통령은 인사말 끝머리에 한소간 인적교류를 언급하는 가운데 『옛날에는 대한항공을 타면 불안하다 했지만 이제는 소련과도 수교했으니 걱정할 것없다』고 농담을 해 웃음을 자아냈는데 곧이어 자리를 뜨면서 간담회에 참석한 박성용금호그룹회장을 발견하고는 『한국에는 아시아나항공도 있다』고 부연,박수를 받기도. ◎…노대통령은 4일 하오5시(한국시간 5일 상오6시) 숙소인 총독관저에서 캐나다 야당인 자유당의 크레티엥당수를 접견하고 환담. 노대통령은 『한국과 캐나다는 6·25때 혈맹관계를 맺었다』면서 『앞으로 21세기 아태지역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해 동반자로서 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양국관계의 발전을 희망. 노대통령은 한국의 국내문제에도 언급,『민주화의 진전에 대해 비판도 많이 있지만 인내로서 꾸준히 국민의 자율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 크레티엥당수는 『야당 당수로서 각하를 뵙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각하가 민선 대통령으로 민주화에 성공하고 있는데 대해 축하드리며 앞으로 계속 민주화에 큰 업적을 남기시기 바란다』고 인사. ◎…대통령 부인 김옥숙여사는 4일 하오(한국시간 5일 상오) 나티신총독 부인이 주최한 오찬에 참석한뒤 멀로니총리 부인과 함께 국립미술관을 방문. 김여사는 톰슨관장의 안내로 미술관의 1·2층 전시실을 둘러본후 톰슨관장에게 「한국미술 5천년」과 「한국복식도감」의 영문책자를 전달.톰슨관장은 이에 「캐나다 미술걸작선집」을 선물.
  • 수서사건 3명 실형/서울지법

    ◎이원배·장병조씨 6년·이태섭씨 5년/정태수씨등 6명엔 집유선고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신민당의원 이원배피고인(59),민자당의원 이태섭피고인(52),전청와대비서관 장병조피고인(52)등 3명에게 징역5∼6년의 실형이 선고되고,한보그룹 회장 정태수피고인(68)등 나머지 6명은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서울형사지법 합의30부(재판장 이철환부장판사)는 5일 상오 열린 이 사건 선고공판에서 이원배·장병조피고인에게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죄(뇌물수수)를 적용,각각 징역6년씩을,이태섭피고인에게는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한보그룹회장 정태수피고인에게는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민자당의원 오용운피고인(64)과 김동주피고인(47)에게는 징역3년 집행유예5년을,신민당의원 김태식피고인(51)에게는 징역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전건설부국토계획국장 이규황피고인(43)에게는 징역2년6월에 집행유예4년을,연합주택조합간사 고진석피고인(38)에게는 징역2년에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와함께 이원배피고인에게 1억9천만원 몰수에 추징금 2억7천만원을,장피고인에게는 추징금 2억6천만원을 선고하는 등 관련 피고인 7명에게 뇌물액수만큼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오용운피고인 등 6명이 정피고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피고인들의 검찰에서의 자백진술서와 정피고인의 공판전 증인신문조서,피고인들과 정피고인과의 관계,금액,돈을 받은 시기 등을 종합해보면 이 돈은 택지특별공급처리의 직무와 관련된 정당치않은 이익이다』라고 밝혀 이 돈이 뇌물성임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또 『장피고인은 한보그룹회장인 정피고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모두 부인했으나 증거능력이 있는 검찰에서의 진술과 정피고인의 재판전 법정증인신문 등을 고려할 때 장피고인이 2억6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인정되며 반증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 1심공판 판결문

    피고인 장병조는 이 사건으로 대통령비서실을 사직할 때까지 근무하는 동안 정부로부터 녹조와 홍조 근정훈장을 수여받고 수많은 표창을 받는 등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으며,피고인 이원배는 서울 강서 갑구에서 선출된 신민주연합당(당시 평화민주당)소속 국회의원으로 그동안 의정활동 등을 통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다. 피고인 이태섭은 정무 제1장관과 과학기술처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제13대 총선에서는 서울 강남 을구에서 선출된 민주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수여받는 등 의정활동이나 행정부의 공직자로서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으며,피고인 오용운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철도청장과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한뒤 충북 청주 을구에서 선출된 민주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국회 건설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정부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는 등 의정활동이나 행정부의 공직자로서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다. 피고인 김동주는 경남 양산에서 선출된 민주자유당소속 국회의원으로 그 동안의의정활동을 통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으며,피고인 이규황은 재무부·건설부의 공무원으로 20년간 근무하면서 대통령 표창을 받는 등 그 동안의 공무원생활을 통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사실이 있다. 앞서 본 행정직 공무원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구금생활은 물론 그 직위를 떠나야 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국회의원들은 역시 구금생활은 물론 그 개인의 정치적 생명에 큰 손상을 입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점 등 그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으므로 형법 제53조,제55조 제1항 제3호에 의하여 각 작량감경을 한 형기범위내에서 피고인 장병조·이원배를 각 징역 6년에,피고인 이태섭을 징역 5년에 처한다. 다만 피고인 오용운,김동주,이규황에게는 앞서 본 바와 같은 정상이 있고,피고인 정태수는 69세의 고령인 현재까지 건설·철강·탄광 등 국가기간산업의 발전에 진력하여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고 각종 사회단체·체육단체 등에 관여하여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받는 등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과 이 사건 택지공급의백지화 결정으로 많은 피해를 당한 수서지구주택조합연합회로부터 피고인의 관대한 처벌을 바라는 진정이 있었다. 또 피고인 김태식은 전북 완주에서 선출된 신민주연합당(당시 평화민주당)소속 국회의원으로 그동안의 의정활동 등을 통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있고,피고인 고진석은 26개 직장주택조합총연합회의 간사로서 총연합회의 모든 업무를 실질적으로 처리하면서 그에 필요한 활동비 등에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사실과 피고인과의 관계에서 피해자들인 수서지구주택조합연합회에서 피고인의 그동안 조합을 위한 노력을 이해하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는 진정을 하였음이 기록상 나타나 있다. 따라서 앞서본 위 피고인들의 연령,신분,이 사건에 이르게 된 사정과 그동안의 구금생활과 이 사건으로 받은 정신적 고통등 여러 정상을 두루 참작하여 형법 제62조 제1항에 의하여 이판결 확정일로부터 피고인 오용운·김동주·정태수에 대하여는 각5년간,피고인 이규황·김태식·고진석에 대하여는 각 4년간에 위 각 형의 집행을 유예하고 압수된 주문기재 자기앞수표 1백90장은 피고인 이원배가 판시 범행에 의하여 수수한 뇌물이므로 형법 제134조 전반에 의하여 이를 몰수한다.
  • “각하의 방문은 양국 우정의 상징”(노 대통령 북미순방여로)

    ◎멀로니 총리/노 대통령,“「6.25」 참전한 형제국에 와 친근”○영어로 반갑게 인사 ◎…노태우대통령은 4일 상오10시(한국시간 4일 하오11시) 한·가정상회담을 위해 국회의사당 중앙건물 「평화의 탑」입구에 도착,맥두갈 캐나다 외무장관(여)의 영접을 받으며 3층에 있는 총리집무실로 이동. 노대통령이 층계를 올라 총리집무실에 이르자 문앞에 서서 기다리던 멀로니총리는 환한 웃음으로 반겼고 노대통령은 다가서며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하며 악수를 교환. 이어 양국정상은 집무실로 들어가 잠시 환담했는데 멀로니총리가 먼저 『캐나다에 오셔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말을 시작했고 이에 노대통령은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답례. 국회의사당내 총리집무실의 공간이 비좁은 관계로 양국취재진이 두차례로 나뉘어 촬영을 하느라 집무실에 먼저 들어섰던 캐나다 취재진이 제한된 시간관계로 방을 떠나게 되자 멀로니총리는 노대통령을 향해 『저 기자는 굉장히 집요한 사진기자이지만 시간관계로 오늘은 별 수가 없군요』라고 조크하며 취재진에게 미안함을 표시. 그러자 노대통령은 『어느나라 정치지도자도 언론,특히 사진기자들에게 맥을 못추죠』라고 수긍. 그사이 두번재 취재진이 들어서자 멀로니총리는 『각하의 캐나다방문은 양국의 모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고 노대통령은 『캐나다는 자유를 지키는 전쟁(한국전)에 참전해 주었고 88년에는 올림픽형제로서 참가해 한국국민 모두가 캐나다에 대해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설명. 멀로니총리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이끌어 온 노대통령의 명성이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대해 경의를 표하며 각하의 방문을 캐나다 국민과 함께 감사히 생각한다』고 찬사의 뜻을 밝힌뒤 본격적인 단독회담을 시작. ◎…단독정상회담을 끝낸 노대통령과 멀로니총리는 루커스 외무부 의전장의 안내로 확대회담장인 국무회의실에 입장,미리 대기하고 있던 우리측 공식수행원등 양측회담 참석자들과 테이블을 돌아가며 인사를 교환한뒤 곧바로 회담에 돌입. 단독과 확대회담을 모두 마친 양국정상은 의사당내 2층리딩룸에 마련된 공동기자회견장에서 회담내용을 각각 양국기자들에게 발표. 멀로니총리의 발표에 이어 노대통령이 발표를 했고 이어 양국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으며 회견을 진행. ○전쟁기념비에 헌화 ◎…노태우대통령은 캐나다 방문 이틀째인 4일 상오9시30분(한국시간 4일 하오10시30분)오타와시 중심가의 내셔널 메모리얼 광장에 위치한 전쟁기념비를찾아 헌화하고 참배. 공식수행원을 대동하고 전쟁기념비에 도착한 노대통령은 캐나다정부 의전관계자의 안내로 기념비앞에 마련된 단상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붉은 상의에 검정바지,검정털모자 차림의 캐나다 의장병의 경례를 받은뒤 기념비에 헌화. 이어 노대통령은 한국전 기념비 앞쪽에 도열해 있던 25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 녹색의 예비군복에 여러 전쟁훈장들을 가슴에 단 참전용사들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노대통령을 반겼으며 이중 로이 리드 캐나다 한국 참전용사회 수석부회장은 『자유를 위해 싸웠던 한국의 노대통령이 이곳에 와 한국전에서 희생된 5백16명의용사들을 위해 묵념하는 것을보니 감회가 깊으며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피력. ◎…노태우대통령내외는 3일 하오4시30분(한국시간 5일 새벽5시30분) 오타와 국제공항에 도착,3박4일간의 캐나다 국빈방문을 시작. 노대통령이 탑승한 대한항공 특별기가 국제공항 우측편의 공군기지에 멈춘뒤 루카스 의전장과 박건우 주캐나다대사가 기내에서 노대통령내외를 영접,트랩을 내려와 나티신총독과 멀로니총리내외에게 소개. 노대통령은 이어 사열대에 등단,전통근위병 예복차림의 의장병들로부터 경례를 받았는데 이 사이 군악대의 애국가 연주와 함께 예포가 발사돼 장중한 환영식 분위기를 연출. 노대통령은 의장대장 안내로 사열대에서 내려와 두줄로 늘어선 의장병을 사열하고 다시 등단했고 이때 군악대가 캐나다국가를 연주. 노대통령은 방명록에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라고 서명하고 나티신총독의 환영사를 경청. 나티신총독은 영어와 불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각하의 첫 캐나다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하고 『캐나다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은지난 1백년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상기. ◎…노대통령은 나티신총독을 예방한데 이어 3일 하오 7시(현지시간) 오타와시내 웨스틴호텔에서 열린 교민초청 리셉션에 참석,5백여명의 교민을 격려. 노대통령이 여당이 압승을 거둔 지난 6월의 시도의회의원 선거결과를 얘기하면서 『그동안 대통령이 너무 무르다.너무 참는다… 그런 욕도 많이 먹었는데 참았더니 의석이 그렇게 많이 나오데요』라고 즉석에서 조크하자 참석교민들은 일제히 우렁찬 박수. ○의회직원 탁아소 방문 ◎…노태우대통령이 멀로니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부인 김옥숙여사는 의회가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는 탁아소를 방문. 김여사는 루크만 탁아소장의 안내로 보모들의 보호아래 뜰에서 뛰어놀거나 그림공부를 하는 어린이들을 돌아봤다.
  • 오늘 「수서」 선고공판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사건과 관련,구속기소된 전 청와대 비서관 장병조피고인(53)·한보그룹회장 정태수피고인(68)·신민당의원 이원배피고인(59)등 관련피고인 9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5일 상오10시 서울 형사지법 합의30부(재판장 이철환 부장판사)심리로 대법정에서 열린다.
  • 연방군,바리케이드 뚫고 수도외곽 포진/유고 내전사태 이모저모

    ◎슬로베니아 주민들 도로에 지뢰매설/영내 연방군 기지에 단전·단수조치도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일방적 이탈을 선언한 슬로베니아공화국의 수십만 시민들은 긴급파견된 연방 병력의 강도높은 무력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6일 수도 류블랴나에서 1천년 만에 처음 맞은 독립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시 중심가 「해방광장」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밀란 쿠칸 공화국대통령은 『마침내 꿈이 실현됐다』고 말문을 연후 『우리나라는 민주·자주 노선하에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수부대 곧 투입” ○…슬로베니아공화국의 3개 지역에 배치됐던 유고연방군이 수도 류블랴나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슬로베니아인들은 수도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기 위해 버스·트럭과 소방차·불도저 등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쳤으나 연방군 탱크와 장갑차들은 이를 깔아뭉개면서 진군을 계속해 곳곳에 부서진 차량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슬로베니아정부는 연방군이 수도내로 진격해 올 경우 접근도로에 지뢰를 매설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일부 시민들은 이미 지뢰매설 작업에 착수. ○…슬로베니아 당국은 27일 공화국내의 브르니카에 있는 연방군기지에 대한 전기 및 수도와 음식물 공급을 중단. ○3개공항 완전폐쇄 ○…유고연방 당국은 26만 슬로베니아공내 3개 공항을 폐쇄시킨 데 이어 27일에는 류블랴나 외곽의 브르니크공항 주변까지 장갑차와 무장병력을 진격시키는 등 공항장악을 기도. 루파르 공항경찰사령관은 10여 대의 탱크가 공항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나 더 이상의 접근은 시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브르니크 공항경찰은 연방군이 공항을 장악한 뒤 수송기를 이용해 군병력을 이동시킬 것을 우려,공항 활주로에 불도저 등을 세워놓는 한편 공항건물에 대한 경계를 계속. 페테를 슬로베니아공 총리는 『연방군 공수부대가 수시간내에 브르니크공항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유고연방군은 27일 철도와 도로 등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여러 곳의 국경지역을 봉쇄했고 헝가리 국경의 2개 검문소도 폐쇄했으며 이탈리아와의 국경은 봉쇄되지는 않았지만 유고연방군 탱크가 잔뜩 진주해 있다고. ○…슬로베니아 경찰과 방위군들은 관공서 건물과 중앙우체국·철도역·방송사 등 연방군이 진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류블랴나시내 곳곳의 전략요충지에 배치돼 경계활동을 펴고 있다. ○…유고연방군은 슬로베니아공 상공에 군용기를 저공비행시켜 군의 행동이 슬로베니아인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고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며 슬로베니아인들의 진정을 호소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대량 살포. ○…슬로베니아와 함께 일방적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공화국에서도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간의 유혈충돌이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몇몇 세르비아인 거점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내부 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유고통신 탄유그가 이날 전했다. ○…통일유고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유고연방군은 올 들어 발생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 간의 유혈충돌 이후 크로아티아공화국의 여러 지역에 배치,치안유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두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함에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연방군과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두 공화국의 군병력간에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연방군이 이들 두 공화국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으나 그같은 점령상태가 오래 갈 수는 없으며 크로아티아 출신 병사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발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이는 오히려 민족분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연방군이 육군 16만5천명,공군 3만5천명 등 총병력 21만5천명에 소련제 T­72탱크와 성능이 비슷한 M­84탱크 등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돼 있는 데 비해 크로아티아공화국과 슬로베니아공화국은 각각 민병대 수준의 병력 3만5천명과 6만8천명을 보유,병력규모 및 화력면에서도 연방군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연방군은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포한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공화국이 각각 자체 보유하고 있는 군병력의 어떠한 저항도 분쇄할 화력을 갖고 있다고 서방 및 유고 군사전문가들이26일 말했다. 이들 전문가들은 그러나 유고연방군이 이들 두 공화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할 경우 연방군이 와해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좌경 지하조직 「자주대오」 적발/사병·대학생등 10명 구속

    ◎“군내부에 주체사상 전파” 기무사 군국기무사령부는 27일 충북 청주대 지하이념조직인 「자주대오」사건과 관련,육군 모 부대 소속 송재봉 이병(23) 등 현역사병 및 방위병 9명을 검거,이 가운데 송 이병 등 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구성 등)혐의로 구속하고 나머지 4명을 훈방했다고 발표했다. 기무사에 따르면 송 이병 등은 청주대에 재학중이던 88년 9월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한 남한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자주대오」라는 교내지하단체를 조직,50여 회에 걸쳐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해왔으며 군 입대 후에는 동료장병들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등 이른바 「군사투쟁」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기무사는 지난 11일 치안본부와 합동으로 「자주대오」에 대한 수사에 착수,현역군인 9명 외에 민간인 8명도 검거했으며 민간인 유정원씨(25·여·청주대 사회학과 4년) 등 5명은 경찰에 의해 구속되고 1명은 불구속,나머지 2명은 훈방됐다고 밝혔다.
  • 6·25 합동위령제

    6·25 동란 41주년을 맞아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민간인 2백40여 만 명의 명복을 비는 합동위령제가 25일 하오 육군 승진부대 호국 금강사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서의현 스님과 소준열 재향군인회장·참전 16개국 대표단·군장병·신도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관행적 비리」에 메스/「수서사건」 검찰구형의 의미

    ◎「외압의혹」등 새 사실은 끝내 안 드러나/거의 법정최저형… 일부는 집유 가능성 「수서사건」 관련 피고인 9명에게 10년부터 3년까지의 징역형이 구형됨에 따라 이 사건은 이제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지게 됐다. 그러나 24일 검찰의 구형량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법정최저형으로 중형은 아니어서 뇌물수수액수가 1천만∼3천만원으로 비교적 적은 오용운·김동주 의원 등과 이규황 전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등에게는 상소심까지 감안할 때 집행유예 정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은 뇌물수수액수가 5천만원 이상일 때 징역 10년 이상,1천만원 이상이면 징역 5년 이상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2억∼4억6천만원을 받은 이원배 의원 등 3명 모두 징역 10년,1천만∼3천만원씩 받은 오 피고인 등 3명에게도 징역 5년의 최저형이 구형된 것이다. 피고인들의 구형량은 법정최저형이고 재판부가 법정형을 절반까지 깎을 수 있는 「작량감경」 규정에 따라 이들에게는 징역 2년부터 5년까지가 선고될 수도 있고 집행유예도 가능하다.기소된 뒤 3개월 20일 만에 결심공판이 끝난 「수서사건」은 현직 국회의원과 고위공무원들이 재벌그룹의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독직사건으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재판과정에서도 피고인들의 진술번복과 무죄주장 등으로 진통이 거듭됐었다. 2억6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청와대비서관 장병조 피고인은 『돈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뇌물수수사실 자체를 부인했으며 이원배 피고인 등 뇌물수수혐의가 적용된 국회의원 4명은 모두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피고인으로부터 받은 돈이 『택지특별분양에 힘을 써주는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정치자금조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정치적인 속죄양』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었다. 검찰은 그러나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검찰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확보된 증거와 검사 앞에서의 진술내용,돈을 주고받을 때의 정황으로 미루어 뇌물수수 및 공여죄가 적용된다는 데 확신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재판부도 죄목을 바꾸지 않고 중형을 선고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장병조 피고인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데 대해 검찰은 장 피고인이 검찰에서 3차례에 걸쳐 범행을 상세히 자백했고 구속된 직후 면회온 가족들에게 『모두 자백하고 나니까 홀가분한 마음』이라고 말한 점,받은 뇌물을 처남인 지 모씨에게 주어 사업자금으로 쓰도록 했다고 진술한 점 등으로 미뤄 뇌물수수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또 이 의원 등이 받은 돈은 정치자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 의원이 지난해 6월 주택조합장들에게 당시 평민당 총재와의 면담을 주선해주었고 10월말에는 주택조합의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주었으며 11월에는 정 회장을 만나 『청원을 잘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걱정 말라』고 안심까지 시키며 돈을 받은 사실 등으로 미뤄 결코 정치자금이 아닌 뇌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검찰이 비록 법정최저형을 구형했지만 국정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과 공무원으로서 신분을 망각하고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이들의 행위에 대해 엄벌의지를 갖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날 논고문에서 검찰은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자아내게 해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고 국민들에게 실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고 지적,『피고인들에게 엄벌을 내림으로써 공직자의 부정을 추방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어느 정도라도 밝혀질 것으로 여겨졌던 보다 고위층에 있는 인사의 개입 및 외압에 대한 의혹과 검찰수사에서 밝히지 못한 「새로운 사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 6·25와 노병·모범 용사들(사설)

    또다시 맞은 6·25. 그때 아기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이제는 40의 장년이 된다. 지금처럼 눈부시게 변하는 시대의 40년은 길고 긴 세월이다. 그러므로 「6·25」는 우리에게 화석이 되어버린 역사일만큼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6·25가 아물어버린 상처로 보는 사람은 아직도 많지 않다. 약간 아문 정도로 보거나(42%) 전혀 아물지 않은 것으로 보는 사람(25%)까지 합하면 이 동족전쟁의 상처를 직접 간접으로,상처로 느끼는 것은 우리 국민의 대다수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남침을 당하여 낙동강을 피로 물들이고서야 기사회생한 이 전쟁을 「북침」이라고 날조하고 싶어하는 시나리오에 동조하려는 상당수의 젊은이가 있기도 하다. 더러는 그런 논리가 진보적이고 새로운 것이어서 매력있는 것이기라도 하다는 듯 흥미본위의 이론을 추구하는 지식인 학자도 있다. 북측의 「남침」을 도와준 주변국 당사자들이 스스로 역사자료를 공개하며 회고록도 쓰고 고백도 하고 증언도 하면서 남침을 입증하는 데 의연하게 북침논리를 「주체사상」의 논리와 함께 신성불가침한 경전처럼 받드는 세력들이 우리 사회 속에 뿌리 내리고 성장해온 것은 애석하고 통탄스런 일이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에 계속 안보의 불안한 그늘이 지는 일도 애석하지만,비뚤어진 지식에 오염되어 바람들어버린 나무처럼 상한 「재목」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더욱 속상하고 가슴아프다. 23일에는 재향군인회가 벌인 평화통일대회가 있었다. 6·25참전용사 상이군경 전몰군경유족 우방국 참전용사 등이 참가하여 거리를 메우는 행진을 했다. 참전자들이 직접 증언하는 전쟁의 진상이 이 행진만으로도 역연했다. 우방국 참전용사는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전사한 유엔군을 위한 묘지도 우리땅에는 있다. 「걸프전」에서도 그랬듯이 평화를 침범하는 전쟁에만 유엔군은 참전한다. 「노병」도 거의 사라져 얼마남지 않은 그들이,그들이 지켜준 보람으로 번영하고 있는 한국을 대견해하며 행진하는 모습은 숭고했다. 이런 것 모두를 보면서도 여전히 「북침」 타령을 하는 지각없는 소수에 대해서는 그들의 병 깊음을 한탄할 뿐 이제 탓할 거리도 못되는 성싶다. 참전 노병들의 행진을 보며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땅을 우리의 조국으로 살아남게 해준 장병들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북쪽을 고향으로 둔 한국인은,지금 그들이 「신음하는 북한인」이 아닌 것만으로도 삶의 큰 위로가 된다. 그것이 모두 장병들의 수호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이 땅에서 국군으로 산다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직접 군인이든 그 가족이든 의무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나라를 지키며 살아왔고 살아간다. 국군모범용사를 초청하여 우리는 그 뜻을 전하기도 한다. 6·25를 맞아 우리가 할 수 있는 따뜻하고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체 중에서 가장 수고하면서도 비바람치는 한데 내앉혀 놓은 지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위로를 보내며 마침내 유엔회원국이 될 만큼 능력있고 성숙한 나라가 된 우리 자신의 노고에 긍지를 함께한다.
  • 「수서」 관련의원 10∼4년 구형/대검,추징금 병과

    ◎정태수씨 4년·장병조씨 10년/이원배·이태섭 의원 10년/김동주·오용운 의원 5년/김태식 의원·이규황씨 4년 대검 중앙수사부 4과 정홍원 부장검사는 24일 수서지구택지 특별분양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이원배 피고인과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 이태섭 피고인 등 국회의원 5명과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피고인,전 청와대비서관 장병조 피고인 등 9명에게 징역 10년부터 3년까지와 함께 추징금 2억7천만원부터 2억원까지를 구형했다. 이원배 피고인이 정태수 피고인으로부터 받아 갖고 있다가 압수된 1억9천만원은 몰수됐다. 이 피고인 등 국회의원 4명에게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김태식 피고인에게는 공갈,한보그룹 회장 정 피고인에게는 뇌물공여 및 배임증재·국토이용관리법 위반죄가 각각 적용됐다. 서울형사지법 합의30부(재판장 이철환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이번 사건은 공직자를 뇌물로 매수,기업이익을 추구하려고 한 기업가의 부도덕한 기업윤리와 집단민원을 구실로 무리하게 목적을 달성하려 한 주택조합원들의 집단이기주의,이에 영합한 공직자의 부패의식이 결합돼 저질러진 범죄』라고 지적,『피고인들에게 엄벌을 내려 공직자의 부정을 추방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논고했다. ◎고진석 피고는 3년 피고인별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이원배(59)=징역 10년·추징금 2억7천만원·몰수 1억9천만원 ▲이태섭(52)=징역 10년·추징금 2억원 ▲장병조(53)=징역 10년·추징금 2억6천만원 ▲오용운(65·전 국회 건설위원장·민자)=징역 5년·추징금 3천만원 ▲김동주(47·민자당 의원)=징역 5년·추징금 3천만원 ▲김태식(52)=징역 4년 ▲정태수(68)=징역 4년 ▲이규황(44·전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징역 4년·추징금 1천만원 ▲고진석(38·연합주택조합 간사)=징역 3년·추징금 2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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