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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재훈(디엔에프 이사)씨 모친상 민성기(한국은행 감사실 부실장)씨 장모상 24일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발인 26일 (02)3779-1773 ●홍성주(대구 수성구 부구청장)씨 장인상 25일 대구 드림병원, 발인 27일 오전 7시 30분 (053)475-4444 ●김지운(부산아이파크 프로축구단 코치)씨 모친상 24일 울산 울산영락원, 발인 26일 오전 7시 (052)272-1111 ●엄철호(전북일보 익산본부장)씨 장모상 25일 전주 온고을장례식장, 발인 27일 오전 8시 (063)211-5000
  • [부고]

    ●송종욱(전 대한무공수훈자회 대전시지부장)씨 별세 연순(전 대전일보 부국장) 창순(KEB하나은행 차장)씨 부친상 24일 근로복지공단대전병원, 발인 26일 오전 9시 (042)628-4440 ●고계연(서울경제 편집부 차장) 교연(양양군청) 태연(희성전자 베트남법인장) 기연(산림청 고위공무원) 봉연(성산성당 주임신부)씨 모친상 24일 양양장례문화원 장례미사(양양성당) 26일 오전 10시 010-3380-1986 ●조성욱(한국투자증권 정자PB센터장)씨 모친상 23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26일 오전 8시 30분 (031)787-1500 ●박지원(청주시 청원구청 환경지도팀장)씨 모친상 23일 청주의료원 장례식장, 발인 25일 오전 9시 (043)279-0144
  • “종철이 죽음 헛되지 않도록 남영동 대공분실 원형 복구해야”

    “종철이 죽음 헛되지 않도록 남영동 대공분실 원형 복구해야”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묻힐 뻔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어이없는 설명에도 대꾸할 수 없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그렇게 의문사로 남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전적으로 우연들이 만들어 낸 힘 때문이었다. 만약 1987년 1월 당시 최환 부장검사가 경찰의 은폐 조작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일부 언론이 서슬 퍼런 5공화국의 보도지침 검열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열사의 친형이자 현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청년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부(61)씨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그는 “하나의 우연이 또 하나의 우연과 연결되고 결국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면서 “역사의 엄중한 무게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동생과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늘도 새벽을 깨우는 박씨를 지난 19일 서울 용산의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지난해 문무일 검찰총장이 세 차례에 걸쳐 부친을 찾았다. 검찰은 무슨 잘못을 했나. “대다수 국민들은 검찰이 당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검찰도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에 깊이 관여한 점을 밝히고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10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수사 검사(박상옥 대법관)를 포함해 수사 라인에 있던 검사 3명 모두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한 적 없다. 물론 검찰이든 경찰이든 자기 허물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겠지.” -문 총장 방문은 어떻게 이뤄졌나. “지난해 초에 종철이 고등학교 친구(김기동 부산지검장)한테 연락이 왔다. 총장이 아버지(고 박정기씨)를 찾아뵙고 싶다고. 그때는 아버지께서 의식이 또렷하셨을 때였다. 아버지께서도 반대하시지 않아 만남이 성사됐다. 2월 3일 오후 3시. 정확히 날짜도 기억한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함께 와서 아버지께 사과를 했다.” -부친이 뭐라 하셨나. “아버지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사과를 받아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보다 어제가 더 좋았을걸 그랬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 왜 조금 더 일찍 오지 않았느냐는 의미 아닐까. 그 말씀을 하시는데 울컥하더라. 당시 병상을 둘러 서 있던 저와 아내, 여동생 모두 뒤돌아서서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총장의 사과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나. “총장이 종철이와 아버지의 삶을 다룬 책 ‘유월의 아버지’를 읽고 왔다고 들었다. 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고. 형식적으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공식 방문을 했고,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 또 한 번 찾아왔다.”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삶은 어땠나. “종철이가 3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했다면 아버지는 30년을 했다. 외롭고 힘든 일도 많았을 거다. 어떤 날은 경찰 방패에 맞아 피멍이 들어 밤새 끙끙 앓으시다가도 새벽같이 일어나 유가협 사무실에 청소하러 가셨다. 제 아버지이지만 참 큰 어른이셨다.” -아버지가 동생을 떠나보내며 하신 말씀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가 지금도 회자된다. “왜 할 말이 없었겠나. 아들이 죄 없이 죽은 게 힘없고 못난 아비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거지. 아버지는 1987년 11월 30일부터 거의 30년 동안 일기를 써내려갔다. 이 일기를 기록물로 남겨 놓는 작업도 하려고 한다.” 1994년 4월 26일 고인의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 간 그것 할 거야!’ 3년 뒤인 1997년 5월 8일 일기장에는 아들을 떠나보냈을 때의 심정을 10년 만에 글로 담았다. ‘처절한 심정으로 이 넓고 큰 지구에서/ 나 혼자 변을 당하는 외로움/ 사지가 마비되는 고독감/ 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마음이 바로 이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조의를 표했다. 어떤 인연이 있나. “종철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나흘 만인가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을 위로해 줬다. 이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셨다. 그런데 두 분 다 대통령이 되면서 예전같이 자주 만날 기회는 없어지더라(웃음).” -동생이 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이 드디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생전에 이뤄내지 못한 것이 아직도 가슴 아프다. 1999년 아버지가 유가협 회원들과 고령의 몸을 이끌고 국회 앞에서 422일간 천막농성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의 희생자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보상심의위원회, 과거사위원회 등이 꾸려졌다. 그때 남영동 분실을 넘겨받았어야 했는데 사회운동권 단체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 기회를 한번 놓치니 20년이 흘러 버렸다.”-분실을 경찰이 관리하면서 원형이 훼손됐다고 하던데. “원형 보존과 복구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이곳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도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다.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와 인권은 후대에 물려줄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2022년 개관(민주인권기념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의문사 가족들과 연대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은 세상에 안 알려진 제2의 박종철 열사를 기리기 위함인가. “문영수, 김두황, 한영현, 기혁, 한희철, 허원근, 우종원, 신호수, 김성수, 최우혁, 안치웅, 김용권….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너무 많다. 1988년 행방불명돼 시신도 못 찾은 안치웅의 경우, 행여 돌아올까 문도 못 잠그고 지내다 23년이 지나서야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목숨 바친 수많은 열사들, 그들의 뒤를 이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수십년을 헌신한 유가족들, 그들이 국가유공자가 아니면 누가 유공자이겠나.”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할 때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들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 언제나 약자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거다. 너무 늦어 많은 분들이 한 많은 가슴을 부여안고 돌아가시는 현실이 안타깝다. 의문사는 누구든지 당할 수 있다. 불행한 과거가 다시 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박씨는 인터뷰를 마칠 즈음,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됐을 때 위원회 명칭이 거북했다고 털어놨다. 피해자들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화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처럼 꼭 필요한 말도 없다고 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길도 화해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세상에 안 알려진 종철이가 너무 많다…의문사 가족에도 관심을”

    “세상에 안 알려진 종철이가 너무 많다…의문사 가족에도 관심을”

    묻힐 뻔한 죽음, 지금 생각해도 아찔…역사적 우연 연결되며 민주항쟁 이어져아버지 병상에서 문무일 검찰총장 만나 “오늘보다 어제 왔으면 더 좋았을걸…”아버지, 30년간 힘든 싸움 일기에 남겨…의문사 유가족에 손만 내밀어도 위로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묻힐 뻔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어이없는 설명에도 대꾸할 수 없는 게 그 당시 분위기였다. 그렇게 의문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전적으로 우연들이 만들어 낸 힘 때문이었다. 만약에 1987년 1월 당시 최환 부장검사가 경찰의 은폐 조작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일부 언론이 서슬 퍼런 5공화국의 보도지침 검열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열사의 친형이자 현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청년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부(61)씨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그는 “하나의 우연이 또 하나의 우연과 연결되고 결국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면서 “역사의 엄중한 무게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동생과 아버지를 떠나 보낸 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늘도 새벽을 깨우는 박씨를 지난 19일 서울 용산의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우리 사회 민주화를 앞당긴 1987년은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든 한 해였을 것 같다. “그해 4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고 박정기씨)는 6월 정년퇴직이 예정돼 있었고. 그런데 갑작스런 동생의 사망 소식에 우리 가족은 몹시도 힘들었다. 아버지는 기관으로부터 회유와 압박에 시달렸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버지가 많이 흔들리시는 것 같아 자주 부산에 내려갔다. 조금만 버텨보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후로 부모님과 여동생은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가족들과 달리 회사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아들을 키워야 했으니까. 2001년 아버지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사람 뽑는다고 슬쩍 권유를 하시더라. 그때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래도 마음은 늘 사회운동단체에 닿아 있었다. 틈나는 대로 연대 활동도 했고. 그러다 2010년 퇴직하고 난 뒤 아버지 활동도 뜸해지면서 바통을 이어받은 거지.” -지난해 문무일 검찰총장이 세 차례에 걸쳐 부친을 찾았다. 검찰은 무슨 잘못을 했나. “대다수 국민들은 검찰이 당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검찰도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에 깊이 관여한 점을 밝히고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10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수사 검사(박상옥 현 대법관)를 포함해 수사 라인에 있던 검사 3명 모두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한 적 없다. 물론 검찰이든 경찰이든 자기 허물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겠지.” 지난해 10월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한 검찰이 정권 안정이라는 정치적 고려를 우선해 치안본부에 사건을 축소·조작할 기회를 줬고, 치안본부 간부들의 범인 도피 행위를 의도적으로 방조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당시 검찰의 수사를 ‘졸속 수사’, ‘늦장 수사’, ‘부실 수사’였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문 총장 방문은 어떻게 이뤄졌나. “지난해 초에 종철이 고등학교 친구(김기동 현 부산지검장)한테 연락이 왔다. 총장이 아버지를 찾아뵙고 싶다고. 그때는 아버지께서 의식이 또렷하셨을 때였다. 아버지께서도 반대하시지 않아 만남이 성사됐다. 2월 3일 오후 3시. 정확히 날짜도 기억한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함께 와서 아버지께 사과를 했다.” -부친이 뭐라 하셨나. “아버지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사과를 받아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보다 어제가 더 좋을 걸 그랬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 왜 조금 더 일찍 오지 않았느냐는 의미 아닐까. 그 말씀을 하시는데 울컥하더라. 당시 병상을 둘러 서 있던 저와 아내, 여동생 모두 뒤돌아서서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총장의 사과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나. “총장이 종철이와 아버지의 삶을 다룬 책 ‘유월의 아버지’를 읽고 왔다고 들었다. 그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고. 형식적으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공식 방문을 했고,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 또 한 번 찾아 왔다.”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삶은 어땠나. “종철이가 3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했다면 아버지는 30년을 했다. 외롭고 힘든 일도 많았을 거다. 어떤 날은 경찰 방패에 맞아 피멍이 들어 밤새 끙끙 앓으시다가도 새벽같이 일어나 유가협 사무실에 청소하러 가셨다. 제 아버지이지만 참 큰 어른이셨다.” -아버지가 동생을 떠나보내며 하신 말씀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가 지금도 회자된다. “왜 할 말이 없었겠나. 아들이 죄 없이 죽은 게 힘없고 못난 아비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거지. 아버지는 1987년 11월 30일부터 거의 30년 동안 일기를 써내려갔다. 이 일기를 기록물로 남겨놓는 작업도 하려고 한다.” 1994년 4월 26일 고인의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 간 그것 할 거야!’. 3년 뒤인 1997년 5월 8일 일기장에는 아들을 떠나보냈을 때의 심정을 10년 만에 글로 담았다. ‘처절한 심정으로 이 넓고 큰 지구에서/ 나 혼자 변을 당하는 외로움/ 사지가 마비되는 고독감/ 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마음이 바로 이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조의를 표했다. 어떤 인연이 있나. “종철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나흘 만인가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을 위로해 줬다. 이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셨다. 그런데 두 분 다 대통령이 되면서 예전같이 자주 만날 기회는 없어지더라(웃음).”-동생이 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이 드디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생전에 이뤄내지 못한 것이 아직도 가슴 아프다. 1999년 아버지가 유가협 회원들과 고령의 몸을 이끌고 국회 앞에서 422일간 천막농성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의 희생자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보상심의위원회, 과거사위원회 등이 꾸려졌다. 그때 남영동 분실을 넘겨받았어야 했는데 사회운동권 단체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 기회를 한 번 놓치니 20년이 흘러 버렸다.” -분실을 경찰이 관리하면서 원형이 훼손됐다고 하던데. “원형 보존과 복구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역사 왜곡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나아가 이곳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도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다.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대에 물려줄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2022년 개관(민주인권기념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의문사 가족과의 연대 활동도 많이 한다고 들었다. “문영수, 김두황, 한영현, 기혁, 한희철, 허원근, 우종원, 신호수, 김성수, 최우혁, 안치웅, 김용권…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너무 많다. 1988년 행방불명돼 시신도 못찾은 안치웅의 경우, 행여 돌아올까 문도 못 잠그고 지내다 23년이 지나서야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목숨 바친 수 많은 열사들, 그들의 뒤를 이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수 십년을 헌신한 유가족들, 그들이 국가유공자가 아니면 누가 유공자이겠나.”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할 때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들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 언제나 약자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거다. 너무 늦어 많은 분들이 한 많은 가슴을 부여 안고 돌아가시는 현실이 안타깝다. 의문사는 누구든지 당할 수 있다. 불행한 과거가 다시 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박씨는 인터뷰를 마칠 즈음,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됐을 때 위원회 명칭이 거북했다고 털어놨다. 피해자들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화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처럼 꼭 필요한 말도 없다고 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길도 화해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현대제철 당진공장 사망 근로자 장례식, 가족들 오열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외주업체 근로자 이모(50)씨의 장례식이 지난 23일 충남 당진종합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은 외주업체와 이씨의 유족이 합의하면서 열렸고, 유족 뜻에 따라 조촐하게 진행됐다. 이날 오전 6시 30분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발인을 마친 이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홍성추모공원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당초 예정됐던 송악읍 한진리 이씨 숙소 앞 노제는 취소됐다. 이씨의 노부모와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돼 단꿈을 꾸던 아내는 운구 차량이 장례식장을 떠날 때까지 오열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장례식에는 당진이 선거구인 더불어민주당 어기구 의원, 박종성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장, 김명훈 외주업체 광양 사장 등 임직원 30여명이 나와 지켜봤다. 이씨의 시신은 화장 후 고향인 경북 영천 서라벌공원 묘지에 안치됐다. 이씨는 지난 20일 오후 5시 20분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작업을 하다 공구를 가지러 갔다가 컨베이어벨트 끼어 목숨을 잃었다. 당진경찰서는 사고 당시 이씨와 함께 일했던 근로자, 외주업체 사장을 비롯한 공장 관계자 등 10여명을 불러 조사했다.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초점을 맞춰 공장의 서류 등을 압수해 안전관리 준수 등 작업과정 전반을 살펴보고 있으나 사고 현장 폐쇄회로(CC)TV 미설치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 원인과 회사의 안전조치 위반 여부에 중점을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과 고용노동부는 지난 21일 현장 감식에 이어 이번 주 사고현장에서 상황 재현을 통해 이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지게 된 경위를 조사할 예정이다. 당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은수미 성남시장, 21일 애국지사 김우전 선생 빈소 조문

    은수미 경기 성남시장은 21일 오후 서울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애국지사 김우전 선생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은 시장은 “지난 1월 선생님을 예방했때 3월 생신 때 다시 찾아뵙기로 약속했는데 갑작스런 별세에 비통한 마음이다”며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은 시장은 “역사의 가슴 아픈 비극에 더 큰 생채기를 내는 지금 선생님의 의식과 신념이 더 그립다”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님의 삶을 잊지 않겠다”고 전했다. 광복군 출신인 김우전 선생은 지난 20일 오전 8시 12분 별세했다. 선생은 1944년 5월 광복군에 합류해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1945년 김구 주석의 기요(기밀) 비서로 발탁됐고,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의 개인 비서로 일했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 때도 김구 선생을 수행했다. 선생은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03년 제15대 광복회장을 역임했으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고문을 지냈다. 이 밖에도 성남에 정착해 거주했던 선생은 성남 출신 독립운동가인 남상목 의병장 기념사업회 회장, 성남 항일 의병 기념탑 건립, 독립운동 특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대법원 판결 기다리다…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 심선애 할머니 별세

    대법원 판결 기다리다…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 심선애 할머니 별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로 강제 징용됐던 피해 당사자 심선애(88) 할머니가 별세했다. 22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따르면 심선애 할머니는 전날 오후 6시 20분쯤 눈을 감았다. 빈소는 광주 기독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23일이다. 심선애 할머니는 광주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4년 5월쯤 미쓰비시로 강제 징용됐다. 이후 심선애 할머니는 2014년 다른 피해자 3명과 함께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국내 2차 손해배상 소송에 참여했다. 이 사건 심리를 맡았던 1·2심 재판부는 심선애 할머니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이 상고해 대법원 확정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이 재판의 쟁점은 일본 기업들의 개인 상대 배상 책임 여부와 피해자들의 청구권 시효 소멸 여부 등이다. 2심 재판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양국 간 피해 배상과 보상이 이뤄졌어도 개인 간의 청구권과 책임은 살아 있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청구권 시효에 대해서도 “권리 행사에 사실상 장애가 있었으며, 그 장애가 해소된 시점은 2018년 10월 30일 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도록 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날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소녀들을 강제 동원한 미쓰비시, 후지코시와 남성들을 강제 징용한 신일본제철 등을 상대로 한 14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석호필·매켄지… 독립운동 도왔던 외국인 5명 재조명

    캐나다 수의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우리 땅을 밟았다. 한국어를 공부해 선교사 자격을 얻은 그는 ‘바위같이 굳은 의지와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로 ‘석호필’이란 한국명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사진에 담아 기록했으며,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등 충격적인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1970년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00년 전 독립을 위해 힘든 싸움을 했던 우리 선조들 옆엔 국적을 떠나 폭력에 항거하고 진실을 마주했던 외국인들도 있었다. 서울시는 23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시청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특별전을 연다고 밝혔다. 서울시와 주한캐나다대사관 주최, ㈔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키아츠(KIATS·한국고등신학연구원) 주관이다. 전시에는 스코필드 박사 외에도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한 프레드릭 매켄지(1869~1931), 병원·학교·교회 등을 설립하며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 중국에서 독립만세운동 사상자 치료와 희생자 장례식을 개최한 스탠리 마틴(1890~1941), 명신여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쓴 아치발드 바커(?~1927) 등 캐나다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관련 일러스트, 글, 영상 등 50여점이 공개된다.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사진도 만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민족의 의지를 세계에 알린 데다 의료·교육 발전을 이끌며 헌신한 분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장례식 없이 화장만으로 이승 고별하는 패션 제왕 라거펠트

    장례식 없이 화장만으로 이승 고별하는 패션 제왕 라거펠트

    ‘패션의 제왕’ 카를 라거펠트가 장례식 없이 화장만으로 이승과 작별을 고한다. 지난 19일 85세로 타계한 라거펠트의 패션브랜드 ‘카를 라거펠트’ 대변인은 20일(현지시간) AFP통신에 ”장례절차는 유지에 따른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라거펠트는 평소 “그냥 사라져버리고 싶다. 사람들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건 질색”이라고 말해왔다. 2015년 공영 프랑스TV 인터뷰에서도 그는 “매장은 끔찍하다. 그냥 숲속의 야생 동물들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 무덤에 남아 사람들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질색”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오랜 동성 연인으로 1989년 숨진 프랑스 ‘사교계의 명사’ 자크 드 바셰르와 자신의 골분을 섞어서 뿌려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바셰르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골분(骨粉) 절반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또 성대한 장례식도 원하지 않는다며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가족들이 유언을 두고 싸움박질하는 걸 보면 장례식이 소극(笑劇)처럼 느껴진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부고]

    ●최옥자(세종대학교 설립자)씨 별세 주장건(대양문화재단 이사장) 경란(세종대 명예교수)경은(전 한국여성크리스천클럽 회장) 명건(세종연구원 이사장)씨 모친상 20일 삼성서울병원, 영결예배 22일 오전 7시 애지헌교회, 발인 22일 오전 8시 (02)3410-6917 ●주창돈(코리아트래블즈 대표이사) 점돈(주공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씨 모친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2일 오전 7시 (02)-3410-6906 ●이기성(SBS 보도본부 부국장)씨 부인상 2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22일 오전 7시 (02)2227-7556 ●이용균(대전시 자영업협력관)씨 모친상 홍미애(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장)씨 시모상 19일 대전 을지대병원, 발인 21일 낮 12시 (042)611-3980 ●양시진(솔트인다이아몬드 대표이사) 양석환(동남종합건설) 문정업(대신경제연구소 대표이사)씨 장모상 20일 제주 한림정낭장례식장, 발인 23일 오전 7시 (064)796-9644
  •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광복군 출신으로 광복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우전(金祐銓) 선생이 20일 오전 8시 12분쯤 별세했다. 98세.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 학생 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해 활동했다.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되자 부대를 탈출해 그해 5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어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한 뒤 곧바로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미국 제14항공단에 연합군 연락장교로 파견됐다.1945년 3월 한미공동작전계획(OSS 훈련)에 따라 미군 OSS(국방부 전략지원사령부) 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암호문을 제작하고,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같은 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기요 비서(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비서)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선생은 1992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과 2015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2003년 광복회장을 각각 맡았다. 그는 2003년 2월 광복회장 취임 이후 2004년 4월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월급 전액과 본인의 독립유공자 연금을 합친 돈 5000만원을 독립유공자 손·자녀 지원용 장학금으로 쾌척해 훈훈한 감동을 줬다.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에 대한 역사인식의 부족과 왜곡’,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공동작전에 관한 연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에 관한 역사 재조명, ‘한국광복군의 OSS 특공작전’ 등 다수의 논문과 ‘김구통일론’,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발인은 22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빈소는 서울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이다. (02)2225-1004.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부고]

    ●신재우(연합뉴스 IT의료과학부 기자) 미진(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씨 부친상 19일 부산 인창병원, 발인 21일 (051)464-5858 ●강원구(경동도시가스 전무)씨 모친상 19일 삼천포 시민장례식장, 발인 21일 오전 10시 (055)834-1051 ●유철수(고려대 명예교수)씨 부인상 승주(미국 유타대 교수)씨 모친상 18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스타크스 퓨너럴 팔러, 장례식 23일 오후 4시 ●염봉선(서울 서대문구청 도시재정비과장)씨 모친상 19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21일 (02)2227-7590
  • ‘동전 맞고 숨진 택시기사’ 아들 “가해자 ‘배틀그라운드 할 사람’ 찾더라”

    ‘동전 맞고 숨진 택시기사’ 아들 “가해자 ‘배틀그라운드 할 사람’ 찾더라”

    승객이 던진 동전을 맞은 뒤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숨진 택시기사 A(70)씨의 아들이 “동전을 던진 승객이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도 않고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면서 분노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지난해 12월 8일. A씨는 이날 새벽 3시쯤 인천 남동구 구월동의 한 지하주차장에 승객 B씨를 내려주던 중 말다툼에 휘말렸다. A씨 유가족이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B씨가 목적지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자 묻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시작됐다. B씨는 택시기사 A씨의 말투를 지적하며 화를 냈고 욕설을 퍼부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B씨는 요금 4200원을 동전으로 가져와 A씨를 향해 던졌다. 약 5분 뒤 A씨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A씨 아들은 “아버지 장례식에 승객 B(30)씨의 가족이 찾아왔지만, 경황이 없어서 연락처만 받고 되돌려보냈다. 장례를 마친 뒤 전화했더니 받지 않았다”면서 “B씨가 파렴치한 행위를 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과 한 마디 없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B씨의 소셜미디어를 살펴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닷새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게임 ‘배틀 그라운드’를 같이 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더라”면서 ‘우리 가족은 B씨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아무 일 없는 듯 생활하는 게 화가 났다“고 전했다. A씨의 사연은 지난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영상과 함께 올라오면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청원글 글쓴이는 자신이 A씨 며느리라고 밝히면서 “억울한 마음으로 아버님을 보내드릴 수 없고, 이후 또 다른 저희 아버님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고민 끝에 늦게나마 청원의 글을 쓰게 됐다”고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A씨를 부검한 결과 A씨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B씨를 폭행치사 혐의로 긴급체포했다가 주변 CCTV 영상을 분석한 뒤 말다툼과 동전을 던진 행위 외에 다른 정황은 포착되지 않아 B씨를 석방했다.전날 인천지방검찰청에 B씨를 엄벌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한 A씨 아들은 “B씨는 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5~10분간 아버지를 방치했다. B씨가 상식적으로 행동했다면 곧바로 경찰이나 119에 신고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 “그런데 B씨의 혐의는 폭행치사에서 폭행으로 오히려 가벼워졌다. 우리 가족은 이 부분을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추가 조사를 벌여 B씨를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A씨 아들은 “생계를 팽개치더라도 또 다시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 사건을 계속 알릴 것”이라면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부고]

    ●서재원(차의과학대 부총장)영원(법무법인 태평양 전문위원)길원(아리바 DNC 대표)경원(상명대부속여고 교사)형원(삼성전자 부장)씨 모친상 이윤휘(서울정밀 대표)씨 장모상 19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8시 (02)2227-7550 ●곽노훈(전 지방자치인재개발원장)씨 별세 곽재덕씨 부친상 18일 서울 은평장례예식장, 발인 20일 오전 8시 (02)351-4444 ●김원기(전 대천읍장)씨 별세 김기철·기라(미술가)배순·효순·기선씨 부친상 조상인(서울경제신문 차장)씨 시부상 18일 대전 건양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7시 (042)600-6660 ●김연택(안산도시개발 본부장)씨 별세 17일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8시 (031)411-4441 ●이자우(청주시청 노인장애인과 노인정책팀장)씨 시모상 17일 충북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7시 (043)269-6969 ●박동현(메지온 회장)씨 모친상 17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20일 (02)560-8000 ●진주행·민옥·정화씨 부친상 김현순·김재중·박관우(BBS 불교방송 보도국 선임기자)씨 장인상 18일 일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10시 (031)900-0444
  • [부고]

    ●이명호(전 한국여자농구연맹 사무국장)씨 별세 16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18일 13시 20분 (02)3010-2000 ●손정배(문화일보 부국장 겸 편집부장)씨 부친상 16일 순천향대 구미병원 장례식장, 발인 18일 오전 9시 (054)464-4444 ●한제욱(전 전북일보 이사)씨 부친상 17일 전주뉴타운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8시 010-3659-2546 ●임인석(중앙대병원 소아과 교수)이석(임이석테마피부과 원장)씨 부친상 문남주(중앙대 안과 교수)씨 시부상 17일 중앙대병원, 발인 19일 오전 8시 (02)860-3501 ●윤병우(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임상강사)채영(비바리퍼블리카㈜ 변호사)씨 부친상 최유진(연세대 객원교수)씨 시부상 17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8시 30분 (02)3010-2293 ●이호섭(전 KBS2라디오 희망가요 진행자)·창용·진섭·상섭·연희·은희씨 부친상 김윤수·성영철씨 장인상 신경숙·권민혜·김순남씨 시부상 17일 오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5시 (02)3010-2263 ●서흥석(전 전북도의원)씨 별세 서하석(전 군산대교수)씨 형님상 서은희·은정씨 부친상 황인욱(수원지방법원 등기관)전영만(메가플렉슨 상무)씨 장인상 17일 전주 뉴타운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9시 010-5703-5797 ●김영진(연합뉴스 대전업무팀장)씨 모친상 17일 부산 한중프라임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9시 30분 (051)305-4000.
  • [부고]전종휘(한겨레신문 사회정책팀 데스크)씨 장인상

    ▲류지웅 씨 별세, 최화월 씨 남편상, 류미선(주부)·홍선(주부)·보선(주부)·훈선(사업)·유선(대전세종연구원 연구위원)·창선(이안플러스 대표)씨 부친상, 최형재(아산정밀 대표)·최병성(율촌화학 필름공장 설비관리팀 차장)·전종휘(한겨레신문 사회정책팀 데스크)씨 장인상=17일 오전 9시2분, 충남 부여군 부여읍 건양대 부여병원 장례식장 특2-2호실, 발인 19일 오전 10시 041-837-4441
  • ‘41년 간장 외길’ 오경환 샘표 부사장 별세

    ‘41년 간장 외길’ 오경환 샘표 부사장 별세

    간장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간장공장 공장장’ 오경환 샘표식품 부사장이 13일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8년 샘표에 입사한 오 부사장은 41년 간장 외길만 걸었다. 2001년부터는 공장장을 맡아 18년 동안 간장 생산을 책임졌다. 지난해 12월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2001년 전통 한식간장인 조선간장 양산에 성공한 것은 오 부사장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밀을 섞는 양조간장과 달리 조선간장은 콩으로만 만들기 때문에 제조 공정이 까다롭다. 우리 간장 알리기에 앞장선 고인에게 ‘간장계의 문익점’이라는 별명을 안긴 일화는 유명하다. 고인은 1986년 일본 유명 간장제조업체인 ‘야마사’의 제국실(메주 띄우는 방)을 견학했다. 삶은 콩을 분해하는 곰팡이는 간장 맛을 좌우하는 ‘영업기밀’이다. 최대한 숨을 크게 마셔 콧속에 곰팡이 씨앗인 포자를 모은 오 부사장은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신줏단지 모시듯 코 푼 휴지를 들고 귀국한 그는 분석을 통해 야마사 메주 곰팡이의 비밀을 풀었다. 오 부사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만든 간장을 온 국민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일이 참 중요하구나,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빈소는 경기 이천 효자원 장례식장 207·208호, 발인은 16일 오전 6시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부고]

    ●박영주(전 유한화학 사장)씨 별세 승준(현대상선 구주영업팀장)승호(삼성SDS 수석 컨설턴트)씨 부친상 1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6일 오전 6시 (02)3410-6902 ●권준학(NH농협은행 경기영업본부장)씨 모친상 14일 평택시 오성면 농협연합장례식장, 발인 16일 오전 8시(031)684-6444 ●박정태(국민일보 편집국 편집위원)씨 모친상 김호일(루미테크 대표)씨 장모상 13일 서울대병원, 발인 16일 오전 9시 (02)2072-2027
  •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노동 인권·민주화 등 현대사 질곡 관통 ‘세상 속 교회’ 기치로 민주적 가치 실현 분열된 사회, 자비·사랑으로 포용 실천 선종 후 ‘바보 정신’ 재단 통해 유지 이어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야 4당이 문제 발언을 한 의원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역사전쟁으로까지 치닫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과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정치적 입장을 앞세운 발언이라지만 민주화운동 폄훼와 왜곡은 많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5·18 민주화운동을 놓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어디 5·18 민주화운동뿐인가. 김 추기경은 생전 약자 편에 선 채 불의에 강하게 맞선 쓴소리와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일부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많은 이들은 김 추기경을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16일은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 10주기가 되는 날. 그날을 중심으로 추기경의 사랑과 배려 정신을 되새겨 실천으로 옮기자는 행사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추모 미사(16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추모 사진전(23일까지 명동성당 지하 1898광장), 유품 전시회(16일~6월 20일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기념 음악회(18일 오후 8시 명동성당),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 토크콘서트(17일 오후 5시 명동대성당 꼬스트홀)…. 그런데 이어지는 그 추모의 몸짓들이 요란하지 않다. 천주교의 최대 지도자, 시대의 사표, 민족의 양심…. 그 막중한 수식어들만 보더라도 성대한 행사가 있을 법한데 영 딴판이다. 그 조용하고 잔잔한 추모 열기를 놓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들은 귀띔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삶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여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무려 8배 넘게 교세가 불어났다. 그 종교적 위업에서 비롯된 존경과 추모만일까. 김 추기경의 어록을 다시 뒤져 보았다. “교회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한다”(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살았지만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 소견)김 추기경은 그랬다.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기꺼이 서야 한다고 믿었다. 단순히 종교지도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 시민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으며 각 개인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의 족적은 너무 혁혁하다. 경제성장이 지상의 과제였던 1960, 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김 추기경이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진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유사한 노동 탄압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더 적극적인 사목을 펼쳐야 한다.’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던 무렵 추기경은 스스로 빈민들의 삶의 현장을 수시로 방문했다.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빈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28일 도시빈민사목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지금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바로 그 추기경의 의지를 담아 탄생한 단체다. 그렇게 현대 한국 천주교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신독재,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외면하지 않고 한가운데서 뚫고 나갔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명당성당에 들어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던진 말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그런가 하면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에선 이렇게 소리쳤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또 1972년 10월 유신 개헌 소식을 로마에서 접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랬던 추기경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기도를 남겼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서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면서 ‘밥이 되고 싶다’고 외쳤던 김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는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웃었던 추기경의 유지와 정신을 이은 사랑과 봉사의 물결은 추기경 선종 이후 도도히 흐르고 있다. 박신언 몬시뇰이 설립을 건의해 김 추기경이 사재를 털어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와 김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이어받아 2010년 설립된 (재)바보의나눔은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옹기장학회는 통일 이후 북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제 양성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현재 북한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둔 신학생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 놓고 있다. (재)바보의나눔은 종교와 지역, 계층을 초월해 국내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형편이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 돌봄이 필요한 노인, 편견에 휘청이는 장애인과 다문화가정 등을 돕고 있다.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한편 신자와 국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지도자.’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이다. 물신주의 팽배와 경쟁 심화, 고통을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 어두운 모습 탓에 김 추기경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 추기경의 마지막 유언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경기도 등록 반려동물 35만마리…반려동물산업 지원 확대 필요

    경기도 등록 반려동물 35만마리…반려동물산업 지원 확대 필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 수가 증가하면서 경기도내 반려동물서비스업 관련 업체와 종사자, 매출액도 함께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도내 반려동물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제품·디자인 개발’, ‘판로마케팅’, ‘전문인력 양성’, ‘산업기반 조성’ 등에 지원 확대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와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 14일 발표한 ‘경기도 반려동물 산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도내 반려동물 양육비율은 29.1%이며, 이를 바탕으로 추정한 반려동물 양육 가구수는 150만 가구이다. 2014년 반려동물 등록제가 시행된 이후 2017년까지 전국에서 118만 마리가 등록됐는데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35만 마리(29.6%)가 등록됐다. 반려동물이 증가하면서 도내 반려동물서비스업 시장도 지속해서 커졌다. 2012년 181곳에 그쳤던 반려동물 서비스업체 수는 2016년 419곳으로 2.1배, 종사자 수는 309명에서 788명으로 2.5배, 매출액은 68억 8500만원에서 244억100만원으로 3.1배가 각각 증가했다. 반려동물서비스업은 분양, 동물병원, 펫 카페, 미용실, 금융, 장례식장, 펫 용품 전시, 인터넷쇼핑몰, 펫 TV 등을 말한다. 업체들은 업종 내 경쟁 심화(37.1%)와 마케팅·홍보 어려움(19.9%), 고객의 요구 다양화(11.8%) 등의 이유로 사업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했다. 반려동물 양육 가구의 51.6%는 월평균 반려동물 관리비용으로 10만원 미만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11만∼20만원 33.8%, 21만∼30만원 9.1%, 31만∼40만원 5.3% 등 순이었다. 관리비용으로는 사료·간식(53.3%)에 가장 많이 지출하고, 다음으로 병원(39.6%), 미용(4.0%), 애견용품(2.9%) 등으로 나타났다. 반려동물용품 구매 시 가격(26.2%), 디자인(5.6%), 제조회사(4.0%)보다는 성능·기능(61.8%)을 가장 많이 고려했다. 반려동물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정부 지원 확대(78.4점)와 제도적 문제 해결(77.1점), 공용연구 장비 시설 확대(70.3점)를 꼽았다. 경기도는 올해 수립 예정인 ‘경기도형 반려동물 산업 육성을 위한 1차 기본계획’의 기초 연구자료로 이번 실태조사결과를 활용할 계획이다.이번 실태조사는 경기도 소재 반려동물 양육 가구 450가구, 반려동물 제조기업 205곳과 서비스기업 321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신뢰도는 95%(±10.27%p) 수준이다. 한편 도와 경과원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경기도형 반려동물 산업 육성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에 착수할 방침이다. 경기도는 지난 2016년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경기도 반려동물산업 육성 조례’를 제정하는 등 반려동물 산업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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