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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한번 일 맡기면 끝까지 신뢰 ‘믿음의 경영’ 국내 첫 연봉제 도입·대단위 팀제 시행도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1932년 서울에서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자원입대해 해군에서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1960년 4월 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그룹 회장의 장남이었지만 고인의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고 한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고인은 한 번 일을 맡기면 끝까지 신뢰를 보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 주는 ‘큰 어른’이었다”고 말한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국내 기업에선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 휴무 제도를 시행했다. 박 명예회장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고인은 암 투병 중이던 아내의 병실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병구완을 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씨,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씨 등 2남 1녀를 뒀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다.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평생 의료계 몸담은 삼성家 맏사위… 조운해 별세

    평생 의료계 몸담은 삼성家 맏사위… 조운해 별세

    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맏사위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이 지난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한솔그룹 측이 4일 밝혔다. 94세. 고인은 지난 1월 30일 별세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이다. 와병 중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매형이자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부친인 고인은 대구금융조합연합회장을 지낸 조범석씨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북대 의대(옛 대구의전)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원에서 소아과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병원 근무를 시작으로 의료계에 종사했다. 1948년 11월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소개로 이 고문과 결혼해 삼성가의 맏사위가 됐으나 한평생 의료계에서만 활동했다. 결혼 후 고려병원 원장과 이사장을 지냈고, 병원협회장과 아시아병원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 의료계 발전에 헌신했다. 슬하에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과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옥형·조자형씨 등 3남 2녀를 뒀다.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6일 오전이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아이템’ 주지훈, 최악의 상황..향후 전개에 미칠 파장은?

    ‘아이템’ 주지훈, 최악의 상황..향후 전개에 미칠 파장은?

    ‘아이템’ 주지훈은 신린아의 죽음 후에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앞으로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MBC 월화미니시리즈 ‘아이템’(극본 정이도, 연출 김성욱)의 지난 방송에서는 소시오패스 조세황(김강우)이 아이템 사진첩을 이용해 강곤(주지훈)의 조카 다인(신린아)의 목숨을 끊었다. 그 과정에서 강곤은 조세황이 고대수(이정현)와 다인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범인이며 사진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눈앞에서 다인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인의 주검을 확인하고 오열한 강곤은 당장이라도 조세황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의 계략으로 인해 유철조(정인겸) 살인 용의자로 몰린 상황. 앞서 공개된 예고 영상(https://tv.naver.com/v/5516671)에서 “그놈 때문이에요 비켜요”라며 병실을 박차고 나가려던 그를 신소영(진세연)이 “검사님 지금 살인 용의자로 감시받고 있는 중이에요”라며 막아선 이유다. 게다가 강곤을 절망케 하는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연유인지 장례식장 앞에 기자들까지 모여든 것.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다인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템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이에 오늘(4일) 밤 방송을 앞두고 공개된 스틸 컷에는 강곤의 절망 3단 변화가 담겨 있다. 지칠 대로 지친 강곤은 황망한 표정으로 슬픔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떨궜다. 급기야 바닥에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모습까지 그려지며 모든 것을 잃은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증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 강곤에게는 다인을 살릴 수 있는 딱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다. 바로 방학재(김민교)와 조세황이 언급했던 특별한 물건들을 다 모으면 갈 수 있고,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는 소원의 방이다. “다인아 삼촌 이렇게 무너지지 않을게 그러니까 지켜봐”라며 의지를 다진 강곤의 선택은 조세황이 만든 판을 어떻게 흔들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이템’ 오늘(4일) 밤 10시 MBC 방송.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룰라 “누가 진짜 도적이냐” 손자 장례식서 오열

    룰라 “누가 진짜 도적이냐” 손자 장례식서 오열

    “브라질에서 누가 진짜 도적인지 입증될 것이다. 나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람들은 자신들 손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4) 전 브라질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상파울루주 상 베르나르두 두 캄푸 공원묘지에서 열린 손자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둘러싼 부패 혐의를 부인하자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룰라 전 대통령은 이날 수감 중이던 남부 쿠리치바 연방경찰 특별 교도소에서 잠시 나와 7세 손자 아르투르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르투르는 지난 1일 상파울루시 인근 병원에 입원해 수막염 치료를 받았으나 5시간 만에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질 연방법원은 변호인단 요청을 받아들여 일시적인 석방을 허용했으며, 룰라 전 대통령은 중무장한 연방경찰 요원들의 감시 속에 2시간가량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서 재수감됐다. 목격자들은 “룰라 전 대통령이 장례식 내내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무죄를 밝히고 나서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손자를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룰라 전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 장면을 지켜보던 지지자들은 “룰라는 브라질 민중의 전사”라고 외치며 ‘룰라’를 연호하는 등 그에 대한 애정을 거듭 확인했다. 지난 1월에는 룰라 전 대통령의 형이 사망했으나 연방법원의 일시 석방 결정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뇌물 수수와 돈세탁 등 혐의로 2017년 7월 1심 재판에서 9년 6개월, 지난해 1월 2심 재판에서 12년 1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4월 7일부터 쿠리치바 연방경찰 특별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다. 이어 지난달 6일에는 쿠리치바 1심 연방법원 판사가 룰라 전 대통령에게 부패와 돈세탁 등 혐의를 적용해 징역 12년 11개월을 선고했다. 부패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룰라 전 대통령은 여전히 ‘좌파 아이콘’으로 불릴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좌파 노동자당(PT)은 룰라 전 대통령이 불구속 상태에서 연방대법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부인과 사별 한달만에”…‘삼성家 맏사위’ 조운해 前이사장 별세

    “부인과 사별 한달만에”…‘삼성家 맏사위’ 조운해 前이사장 별세

    재벌가 맏사위였지만 평생 의료계만 활동삼성그룹 창립자 고(故) 이병철 회장의 맏사위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이 지난 1일 오후 2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한솔그룹 측이 4일 밝혔다. 94세. 고인은 지난 1월 30일 별세한 고(故)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이다. 부인과 사별한 지 한달여만에 타계한 것이다. 고인의 재벌가의 맏사위였지만 한평생 의료인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와병 중인 삼성 이병철 회장의 매형이자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고모부이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부친인 고인은 대구금융조합연합회장을 지낸 조범석씨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영남 명문가’로 통하는 한양 조씨 집안으로, 시인 조지훈(본명 조동탁) 선생과도 같은 가문이다. 경북대 의대(옛 대구의전)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대학원에서 소아과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병원 근무를 시작으로 의료계에 종사했다. 1948년 11월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소개로 이 고문과 결혼해 삼성가의 맏사위가 됐다. 고인의 경북중 1년 선배인 박 전 의장은 이건희 회장의 모친인 고 박두을 여사의 조카다. 고인은 삼성가의 맏사위가 됐으나 한평생 의료계에서만 활동했다. 결혼 후 고려병원 원장과 이사장을 지냈고, 병원협회장과 아시아병원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 의료계 발전에 헌신했다. 모교인 경북대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 경북대 총동창회장과 의과대 총동창회장을 맡았고, 은퇴 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효석(曉石) 장학회’를 설립해 대학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펼쳤다. 슬하에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과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옥형·조자형씨 등 3남 2녀를 뒀다.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6일 오전 8시30분이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부고]

    ●장영한(YTN 대전지국 부장) 경애(청주 상당초 교사) 영진(충북도청 유기농팀장)씨 모친상 3일 청주성모병원, 발인 5일 오전 (043)210-5444 ●양원(연합뉴스 전 부산지사장)씨 모친상 2일 부산 수영구 남천장례식장 ,발인 5일 오전 7시 (051)626-4004
  • 94세, 기다리고 기다렸지만…끝내 못 들은 일본의 사과

    94세, 기다리고 기다렸지만…끝내 못 들은 일본의 사과

    60여년 中생활에도 조선 국적 지켜와 2004년 국적 회복했지만 폐암 투병 위안부 피해 생존자 22명밖에 안 남아광주·전남에 유일하게 생존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가 3·1절 100주년 하루 뒤 세상을 떠났다. 94세. 3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 따르면 곽 할머니는 전날 오전 9시 별세했다. 지난 1월 28일 김복동 할머니와 이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3일 만이다.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곽 할머니의 빈소는 전주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장지는 천안 망향의동산에 마련된다. 곽 할머니는 1925년 전남 담양에서 2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만 19세 때인 1944년 봄, 동네 여성 5명과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다가 일본 순사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중국으로 끌려간 곽 할머니는 1년 반 동안 일본군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세 차례씩 방에 있는지 검사를 받아야 해 도망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풀려난 곽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구걸하는 삶을 살다가 중국 안후이성 숙주에 정착했다. 60여년을 중국에서 살면서도 조선 국적을 바꾸지 않는 등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이후 한 방송사의 공익예능프로그램과 한국정신대연구소의 도움으로 2004년 국적을 회복하고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곽 할머니는 2015년 12월 폐암 4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병환이 더 진전되지 않아 3년이 넘는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봉침 목사’로 알려진 한모 목사가 곽 할머니의 수양딸이 된 것을 두고 시민단체가 “곽 할머니를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석연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김종하 전 대한체육회장 별세

    김종하 전 대한체육회장 별세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제29대 대한체육회장을 지내며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에 기여를 한 김종하 전 회장이 3일 별세했다. 85세. 1934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고인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73년 대한핸드볼협회 부회장을 맡아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1981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임된 고인은 1985년 제28대 대한체육회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후임으로 체육회장에 취임해 1989년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직했다. 1985년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고인은 그 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수석부회장, 세계핸드볼연맹 이사, KOC 명예회장과 고문 등을 역임했다. 그는 모교인 양정고와 육사의 핸드볼 선수로 활약한 경기인 출신으로 협회장을 맡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 금메달과 남자 은메달로 이끄는 등 한국 핸드볼의 ‘대부’ 역할을 했다. 김 전 회장은 체육훈장 청룡장과 맹호장을 받았고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효진씨와 2남 2녀(난주·난영·유석·범석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5일 오전 7시이다. (02)3410-3151~3.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 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을 모두 해임했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들은 모두 해임됐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94세 나이로 별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94세 나이로 별세

    일제 강점기 때 위안부 강제동원이라는 전시 성폭력 범죄를 자행한 사실을 일본 정부가 여전히 부인하는 가운데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만 19살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곽예남 할머니가 2일 별세했다. 94세. 고인의 빈소는 전주병원 장례식장 VIP실 별관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오는 4일 오전 9시. 192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봄에 뒷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같은 동네 여성들과 함께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고인은 1년 반 동안 끔찍한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일본의 패전으로 고인은 풀려났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60여년 동안 중국에서 살았다. 중국에 살면서도 국적은 바꾸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당시 MBC 프로그램 ‘느낌표’와 한국정신대연구소의 도움으로 고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안타깝게도 고인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하지만 2015년 12월 폐암 4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이 넘도록 병환이 더 진전되지 않았던 고인은 결국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를 받지 못하고 이날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월 28일 고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3일 만이다. 곽 할머니의 별세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2명만 남았다. 정의기억연대는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부고를 전하면서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면서도 고국의 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힘든 생을 어렵게 버텨내셨지만, 결국 일본 정부의 사죄 한 마디 받지 못했다”면서 “(곽 할머니는) 힘든 삶이었으나 온 힘을 다해서 살아내셨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부고]

    ●홍정길(의정부시 총무과장)씨 부친상 27일 의정부 보람장례식장, 발인 3월 1일 낮 12시 (031)851-4444 ●이성희(캠코 노사협력실장) 장희(대한당구연맹 국가대표팀 감독) 어진(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과장)씨 모친상 이민희(메트로신문 기자)씨 장모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3월 2일 오전 11시 (02)3010-2000 ●이선의(SBS 정책팀 부국장)씨 모친상 28일 일산백병원, 발인 3월 2일 오전 6시 40분 010-4789-0557
  • 틀을 깬 패션계 훌리건

    틀을 깬 패션계 훌리건

    알렉산더 맥퀸/앤드루 윌슨 지음/성소희 옮김/을유문화사/608쪽/2만 5000원2010년 9월 20일 아침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 패션계의 거장 알렉산더 맥퀸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1500명의 인파. 당시의 현장을 영국 작가 겸 저널리스트 앤드루 윌슨은 이렇게 기록한다. “각양각색의 추모객만큼이나 추도사도 다양했다. 특히 가족들은 맥퀸이 무슨 일을 이루었는지를 모르는 듯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영국 패션계의 아이콘 알렉산더 맥퀸. 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자택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앤드루 윌슨이 맥퀸의 영광 이면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평전이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 얻은 증언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맥퀸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택시 운전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맥퀸. 초등학생 때부터 디자이너로 살겠다는 목표를 세운 그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의 유명 양복점 앤더슨 & 셰퍼드에서 견습생으로 패션계에 입문했다. 27세에 프랑스 브랜드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고 2001년 구찌그룹이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지분 51%를 인수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치기 시작했다. 푸마, 샘소나이트, 시바스리갈 등 다양한 브랜드와 디자인 협업을 진행했고 30세가 될 때까지 그의 브랜드는 무려 세계 25개 도시에 진출했다.“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패션디자이너. 너무도 다양한 방식으로 패션을 재창조했던 감수성 풍부한 선지자를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맥퀸 사후 평론가가 남긴 말은 그의 생을 잘 표현한 수사로 다가온다. 실제로 그는 기존 형태에 매이지 않는 파격으로 충격을 안겨 줬다. ‘패션계의 훌리건’, ‘패션계의 악동’ 별명은 그 맥퀸을 바라본 시선의 압축이다. 작품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았던 맥퀸. 그의 패션은 그야말로 자유분방하다. 그러면서도 빼놓지 않은 메시지는 인간의 존엄성이었다고 한다. 그 불변의 메시지는 어릴 적 누나에게 폭행을 일삼고 자신에게도 성폭행을 저지른 매형의 트라우마에서 생겨난 것으로 관측된다. 실제로 대학 졸업 작품은 그 첫 발현으로 평가된다. ‘희생자들을 좇는 살인마 잭’이라는 졸업 의상에서 맥퀸은 옷 안감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피 흘리듯 붉은 물을 들였다. 그를 스타 디자이너로 만든 ‘하이랜드 레이프’ 컬렉션(1994년)에선 모델들이 마치 성폭행을 당한 듯 찢긴 옷을 입고 등장한다.그로테스크속 낭만, 금기와 매혹, 삶과 죽음. 맥퀸이 패션을 통해 부단히 담아내고자 했던 이미지들이다. 특히 엉덩이의 골까지 보이는, 그 유명한 ‘범스터’ 팬츠는 반항아 맥퀸을 기억하게 만드는 대표적 아이템이다. 2001년 9·11테러로 패션계가 모두 작업을 중단했을 때도 정치적 상황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며 비난 속에 패션 쇼를 강행한 것도 회자된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어찌 보면 맥퀸의 성정과는 다소 동떨어진 듯하다. 가족들은 맥퀸이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사귐을 아주 불편하게 여겼다고 입을 모은다. 패션 쇼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는 내성적 인물. 그는 패션 쇼마다 자금 때문에 고민했고, 자금이 모이면 패션 쇼를 걱정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휘감겨 살았다. “이제 관두고 싶어. 롤러코스터를 멈춰. 내리고 싶어. 패션 시스템 전체가 나와 대적하는 느낌이야.” 죽기 전 마지막 컬렉션을 앞둔 맥퀸의 말이다. 자신의 작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 후원자이자 친구인 이사벨라 블로와 어머니의 잇따른 죽음, 그 이후 얻은 우울증과 마약 중독…. 많은 이들은 맥퀸의 죽음을 놓고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맥퀸이 오른팔 위에 새기고 살았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속 헬레나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헬레나는 사랑이 추악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겉모습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인식이 사랑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맥퀸도 똑같이 생각했다. 게다가 이 믿음은 맥퀸의 창조성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촛불 대신 횃불로… 3·1 만세는 밤에 외쳤다

    촛불 대신 횃불로… 3·1 만세는 밤에 외쳤다

    시위자 독립된 줄 알고 경찰에 으름장 인쇄술 낮아 독립선언서 배포 어려워 장터 아닌 대부분 야간 산상봉화시위 정형화된 교과서 너머의 역사 생생히우리가 배운 ‘역사’란 대개 특정 사건의 일부이거나, 특정 시선에 따라 편집된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사건의 주인공은 주로 사회를 이끌던 고위 관리들일 테고, 사건들은 대개 정치, 외교, 경제 등의 시선으로 잘 정리됐을 터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는 특정 사건이 ‘기승전결’에 따라 아주 부드럽게 흘러가고 마무리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러니 역사 공부가 재미없을 수밖에. 좀더 나은 점수를 받고자 사건 발생 연도와 배경, 그리고 결과와 의미를 달달 외웠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동안 알고 있던 역사와 굉장히 다른 역사의 면면을 마주하면 ‘어?´ 하고 놀라게 된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봇물 터지듯 관련 책이 쏟아진 가운데, 권보드래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신간 ‘3월 1일의 밤´이 유독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교과서는 3·1 만세운동이 왜 발생했는지, 우리는 어떤 저항을 했고, 일제는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알기 쉽게 알려준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죽은 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모두 기다렸다는 듯 한마음으로 태극기를 꺼내 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곧바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진행됐다고. 그러나 좀더 알아보면 고종은 별반 힘없는 왕에 불과했고, 민중은 그의 장례식을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극기가 정작 3·1 만세운동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터다. 최근 나오는 역사책이 이처럼 교과서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간 수준이라면, 권 교수의 신간은 교과서보다 두 단계 정도 더 들어갔다 할 수 있다. 예컨대 3·1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당시 민중의 사고방식은 어땠을까. 너도나도 벌이는 만세 시위에 대개는 조선이 당장 독립된 줄 알았다. 수백명이 집단으로 경찰서와 헌병분대를 찾아가 “조선은 독립했으니 일본은 물러서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일제의 고문에 “나는 돈 준다고 해서 만세를 불렀다”거나 “강압에 못 이겨 만세를 불렀다”고 한 이들은 풀려나고서 또다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시위문화 역시 익히 알던 모습과 다르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장소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대개 장터를 꼽지만, 촌락공동체에서는 산상 봉화시위가 주를 이뤘다. 특히 충청도에서의 시위는 거의 다 야간 봉화시위였다. 1919년 3월 31일 아산군에서만 50여곳에서 2500여명이 횃불을 올리고 야밤에 만세를 외쳤다. 밤을 새우고, 혹은 2~3일 연거푸 목이 터져라 산에서 만세시위를 하다 마을로 내려오는 사례가 많았다.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시위보다 더 재밌는 모습도 많았다. 경남 함양군 함양시장에서는 30세 농민 김한익이 장터 한가운데 소금 가마니를 쌓아 둔 곳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 평안북도 선천에서는 신성학교 교사 김지웅이 고무신장수가 끌고 온 수레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해 전국에 뿌리는 모습을 상상하겠지만, 사실 당시 등사기는 구하기도 어렵고 인쇄기술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의 감시도 심했다. 이 때문에 유생이었던 송준필은 서당의 마룻장을 뜯어내 통고문을 인쇄하기도 했다.신간은 이처럼 3·1 만세운동 전후 20년사의 세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엮어 냈다. 시간에 따른 일반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선언 ▲대표 ▲깃발 ▲만세 ▲침묵 ▲약육강식 ▲제1차 세계대전 ▲혁명 ▲시위문화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 ▲이중어 ▲낭만 ▲후일담 모두 16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저자는 10년 전 3·1 만세운동과 관련한 당시 신문조서를 읽다가 자신이 생각하던 역사와 다른 모습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다. 3·1 만세운동에 관해 좀더 알고 싶은 호기심에 저자는 방대한 각종 사료로 향했다. 그 10년 공부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례, 이를 분석하는 저자의 깊이는 어느 역사학자 못지않다. 특히 3·1 만세운동 당시 사상 흐름이라든가,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인 문학 관련 자료들에 관한 분석 등이 그렇다. 3·1 만세운동에 관해 교과서 수준의 정형화된 역사 너머가 궁금하다거나, 그저 그런 역사책에 갈증을 느꼈던 이들에게 권하고픈 책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부고]

    ●남종혁(KBS 보도본부 국제부 기자)씨 모친상 27일 대전 을지대학병원, 발인 3월 1일 오전 7시 30분 010-8930-5166 ●변상섭(전 대전일보 논설위원)씨 부친상 김순조(대전시 시보편집실 편집장)씨 시부상 27일 공주장례식장, 발인 3월 1일 오전 10시 (041)854-1122 ●박재욱(육군본부 제32대 정훈병과장)씨 별세 26일 서울삼성병원, 발인 3월 1일 오전 8시 (02)3410-3151~3 ●김형국(GS칼텍스 사장) 은희씨 모친상 이상헌씨 장모상 한주미씨 시모상 27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 3월 1일 오전 7시 30분 (02)3410-3151
  • [부고] 정해영 (NH투자증권 부평WM센터장)씨 부친상

    △ 정석진씨 별세, 정해영(NH투자증권 부평WM센터장)·정순용(KT mos 파트장)씨 부친상, 이성훈(두산 퓨얼셀 팀장)씨 장인상 = 26일, 충남 예산종합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 28일 오전 9시30분. 041-331-4444
  • [부고] 박경식(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 씨 부친상

    △ 박중철 씨 별세, 박경식(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 씨 부친상 =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 28일 오전 9시. 02-3410-3151
  • [부고] 오종광(경향신문 윤전국 차장)씨 장모상

    △ 박영순 씨 별세, 오종광(경향신문 윤전국 윤전1팀 차장대우) 씨 장모상 = 24일 오후 11시 15분,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 7호실, 발인 27일 오전 7시. 02-3779-1526
  • [부고] 엄철호(전북일보 익산본부장)씨 장모상

    △ 조복희씨 별세, 엄철호(전북일보 익산본부장)씨 장모상, 엄승현(전북일보 사회부 기자)씨 외조모상 = 25일 오전, 전주 온고을장례식장 301호, 발인 27일 오전 8시. 063-211-5000
  • 1970년대 빙속 스타 이영하, 담낭암으로 별세

    1970년대 빙속 스타 이영하, 담낭암으로 별세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1세대 스타였던 이영하 전 국가대표 감독이 25일 담낭암으로 타계했다. 63세. 고인의 둘째 아들 이현씨는 “아버지께서 오늘 오후 7시 20분에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1970년대 한국 빙상의 간판이었으며 1985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 신기록을 51차례나 경신할 정도로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경희고 3학년 때인 1976년 이탈리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남자 3000m와 5000m에서 우승하며 에릭 하이든을 종합 2위로 밀어냈다. 레이크플래시드동계올림픽 5관왕에 빛나며 당대 세계 최고로 군림하던 하이든을 제친 것은 빙속계의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는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올림픽 빙상에서 한국인 첫 메달을 일군 김윤만, 2000년대 빙상을 휩쓴 이규혁 등이 고인의 지도를 받았다. 빈소는 서울 강동구 경희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8일 오전 11시. (02)440-8800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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