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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질환 치료받던 20대 어머니/세자녀 강물에 던져 실종

    【부여=이천렬기자】 정신착란증 치료를 받아오던 20대 어머니가 자신의 세자녀를 강물에 빠뜨려 실종케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25일 부여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4일 하오 10시쯤 충남 부여군 저석리 금강변에서 민병숙씨(27·경기도 성남시 중구 성남동)가 둘째딸 김유리(4),셋째딸 하니양(3),아들 석환군(1)등 자녀 3명을 강물에 빠뜨려 모두 실종케 했다. 4자녀의 어머니인 민씨는 지난 2월부터 정신착란증을 앓아오다 지난 1일 국교에 재학중인 장녀를 제외한 세자녀와 남편 김태훈씨(31·노동)등과 함께 시가인 부여에 내려와 요양하던중 남편 김씨가 외출한 사이에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한편 경찰은 민씨의 진술에 따라 이날 인명구조반 잠수부 10여명과 경비정,어선등을 동원,둘째딸 유리양이 신었던 슬리퍼와 아들 석환군을 싸안았던 포대기등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수심이 2.5m에 이르고 강물이 흙탕물로 매우 혼탁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 “대물림 의원” 127명 무더기 당선/일 중의원선거 낙수

    ◎거물급 대부분 “합격”… 신인진출도 25% ○…이번 제40회 일본 중의원선거에서는 자민당이나 야당 모두 거물급 인물들이 대부분 재선돼 드라마적인 재미는 다소 적었다는 평. 자민당의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총리가 히로시마 지역구에서 수월하게 당선고지에 오른 것을 비롯해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우전자),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사키가케(선구)의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등 3신당의 당수들도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지었다.의석수가 크게 준 사회당의 야마하나 사다오(산화정부)위원장도 당선됐으나 다른 당의 우두머리들이 수위당선의 영예를 누린데 비해 야마하나위원장은 도쿄11구에서 2위 당선에 그쳤다. ○야마하나 2위 만족 고토다 마사하루(후등전정청)부총리와 자민당의 트로이카 중진인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전대장상,이시하라 신타로(석원신태낭)전운수상,고노 요헤이(하야양평)관방장관도 당선.그러나 10선의 쓰카모토 사부로(총본삼낭)전민사당위원장,9선의 후지나미 다카오(등파효생)전관방장관 등은 낙선했는데 이들은 리쿠르트수뢰 스캔달에 연루됐었다. ○…반면 똑 같이 스캔달 낙인이 찍혔던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전총리는 초반 열세를 뒤집고 시마네현 1구에서 수위 당선,8선의원이 됐다.또 록히드추문으로 큰 망신을 당했던 다나카 가쿠에이(전중영각)전총리의 집안에서는 장녀인 미키코(진기자)는 물론 그녀의 남편인 다나카 나오키(전중직기)씨가 나란히 당선,부부의원을 탄생시켰다. ○자민만 90명 포진 ○…한 집안이 대를 이어 의원직을 세습하다시피 하는 예가 일본에는 유달리 많은데 이번에도 1백50명의 세습후보 출마자 가운데 무려 1백27명이 무더기로 당선.특히 이 부문에서 87%의 당선율을 자랑하는 자민당에는 90명의 세습 의원이 포진하게 됐다.자민당 전 의원중 40% 가량이 세습의원인 셈인데 해산전에는 이 비율이 45%로 더 높았었다.이와관련,자민당의 이시하라 신타로(도쿄2구)와 노보테루(신황·도쿄4구)부자는 지난 90년 총선에 이어 이번에도 나란히 당선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여성의석 2개 늘어 ○…이번 선거에서는 신인이 1백34명이나당선,전 의석의 4분의 1이상을 차지했다.일본신당은 35명 당선자 전원이 신인.지난 총선에선 56명의 신인을 배출했던 사회당은 이번에는 5명에 그쳤다. 한편 여성은 70명이 출마,도이 다카코(토정다하자)전사회당위원장등 14명이 당선해 지난번보다 2명이 는 최대기록을 세웠으며 특히 자민당은 14년만에 여성중의원을 탄생시켰다.여성 당선자 중 3명이 TV 아나운서 출신인 점도 이채.
  • LA 창고에 방치된 한국독립운동사료/독립기념관에 영구 보존

    ◎구한말 태극기 등 포함 【로스앤젤레스=홍윤기특파원】 LA의 옛 국민회관 창고에 방치돼 있던 독립운동중요사료가 충남 천안시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영구보존하게 됐다. 흥사단미주위원회(위원장 송재승)는 21일 국민회관(1368 W.Jefferson B1)에서 독립운동사료 이전식을 갖고 독립운동관 독립운동사 수석연구원인 정재우박사에게 2백35건의 독립운동사료를 1차로 인계했다. 1937년 건립된 국민회관건물이 10여년전 미국장로교회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바람에 많은 독립운동사료들이 국민회관 뒤편 창고에 먼지가 쌓인채 버려져 왔었다. 이날 인계된 중요사료는 ▲신한민보 원본 43권(1907년 11월15일자 57호∼1966년 12월12일자 3006호) ▲국민회등록증 원본(1914년 4월 샌프란시스코 발행) ▲구한말 태극기 ▲인터타입 식자기를 포함한 인쇄기구등이다. 이날의 인계식은 고 안창호선생의 장녀인 수잔 안여사가 독립기념관측과 개별접촉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 6·11보선 투·개표하던날 이모저모

    ◎두곳이긴 민자 “낙담”/한곳이긴 민주 “환호”/믿었던 김명윤씨 패배에 침통/민자/최 후보 승리에 온통 축제무드/민주 11일 실시된 3개지역 보궐선거에서 민자·민주 양당은 최대 접전지역이었던 명주·양양에서 민주당의 최욱철후보가 민자당의 김명윤후보를 누르고 당선이 유력해지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현지는 물론 당사에 마련한 상황실에서 밤늦게까지 개표결과를 지켜보던 민자당 당직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낙담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반면 민주당 상황실에서는 계속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민자당 당직자들은 그러나 철원·화천에서 이용삼후보가,예천에서 번형식후보가 예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으로 자위했다. 이날 투표는 전날까지의 치열했던 득표전과는 달리 차분한 분위기속에 치러졌고 하오 늦게 시작된 개표작업도 별다른 사고없이 밤을 새워 진행됐다. ○삼페인으로 자축연 ▷명주·양양◁ ○…민주당 최욱철후보의 선거본부인 명주군 주문진읍 명주군 지구당사는 11일 밤 11시쯤 최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보도진들과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 양양지역 개표가 끝난 하오 11시 현재 민자당 김명윤후보가 우세지역인 이곳에서 최후보를 겨우 2백여표 밖에 앞지르지 못한 반면 최후보는 자신의 텃밭인 주문진읍의 한 투표구에서만 김후보를 4백여표나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후보측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일찍 다가온 승리를 축하하느라 분주. ▷철원·화천◁ ○…철원·화천보궐선거의 투표율이 지난 14대 총선때보다 13%포인트나 떨어진 66%로 나타나자 농촌지역의 바쁜일손이 선거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그러나 개표가 시작되어 하오7시40분쯤 철원 김화지역의 개표 결과 민자당 이용삼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앞서가자 이후보진영의 참관인들이 환성을 올리면서 열기가 고조. 한편 개표장분위기도 지난 4·23보궐선거이후 개표 업무종사자들이 개표업무에서 처음으로 계수기를 사용해 정확하고 신속한 집계를 보여줘 눈길을 끌기도. ▷예천◁ ○…이날 하오 11시30분쯤 개표가 50% 진행되면서 번후보가 안후보보다 2천여표가 앞서는등 꾸준히 표차를 벌여나가면서 당선이확실시되자 번후보측은 지구당 당사에서 당원 50여명과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며 자축연을 여는등 축제분위기. 지구당당사에는 선거운동원이 계속 몰려들었고 지지자들로부터 축하전화가 쇄도. ▷민자당◁ ○…당초 3개지역 완승을 자신했던 민자당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김명윤후보(명주·양양)의 패색이 짙어지자 아예 체념한듯 매우 침울한 분위기. 때문에 철원·화천의 이용삼후보와 예천의 번형식후보가 여유있는 표차로 승리를 확정지었음에도 여기에는 신경조차 쓸수 없는 무거운 표정들. 김종필대표는 이날 하오 11시16분쯤 황명수총장·김종호정책위의장등 고위당직자와 함께 상황실에 들러 개표상황을 보고받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표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명주·양양의 좋지 않은 소식에 별말없이 묵묵히 상황판만을 응시. 김대표는 진경탁조직국장에게 명주·양양의 개표율을 묻기도 했으나 다른 질문은 일체 하지않고 황총장과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은뒤 7분만에 상황실을 떠났다. ▷민주당◁ ○…명주·양양지역에서 최욱철후보가 승리하자 박수와 만세를 부르며 자축하는등 중앙당사는 온통 축제분위기 일색. 장녀의 결혼식준비로 당사를 떠났던 이기택대표도 최후보의 당선이 유력해진 밤 11시40분쯤 상황실에 나와 관계자들을 격려한뒤 직접 3개보선지역에 전화를 걸어 후보자들의 노고를 치하. 이대표는 『강원도에서 민자당 간부들이 이번 보선을 개혁에 대한 심판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겼다』면서 『선거란 열번 지다가도 한번 이기면 이렇게 좋은 것』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 검찰간부­정씨형제 커넥션

    ◎고교후배 통해 덕일씨 만난후 거액차용/이건개씨/동생이 정씨호텔 슬롯머신 취직/전재기씨/부인끼지 수차례 식사… 가정문제도 나눠/신건씨 고검장급 검찰간부들이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씨 뇌물을 받았거나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온 사실이 검찰자체조사결과 확인되고 있다.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은 27일 소환되는 대로 사법처리될것이 분명하고 집안끼리 교분을 쌓아온 신건전법무부차관과 전재기 전 법무연수원장도 위법이 밝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다.이들 세명은 26일 사표를 제출했다. 이씨는 이번 사건의 피의자이면서도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주인공.주객이 바뀌어 정씨의 동생 덕일씨로부터 되레 신문을 받게 됐다고 검찰관계자들은 동정한다.대검형사2부장으로 있던 88년 10월 『건물매입자금이 부족하니 돈을 빌려달라』고 해 3차례에 걸쳐 5억4천2백40만원을 받았다.빌려줄때 언제까지 갚겠다거나 이자를 주겠다는 말도 없었고 현재까지 한푼도 갚지 않았다. 그는 지난 86년 잘 아는 고교 후배를 통해 알게된 덕일씨를 선정,돈을 빌렸다.3차례 돈을 빌리면서 차용증과 보관증을 한번씩 써줬고 이씨는 덕일씨가 보는 앞에서 차용인이름을 조성일이라 쓰고 사인도 조씨의 가짜사인을 했다. 돈을 빌릴 당시 이씨는 이미 이 돈을 챙길 심산이었던 것 같다.덕일씨 역시 그의 위세에 눌려 한 번도 돈을 되돌려 달라고 재촉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돌려받을 생각조차 안했다는 것이다.검찰관계자들은 이씨가 직위를 이용,돈을 차용하는 형식으로 거액을 삼킨 것으로 보고 있다. 전전법무연수원장과 덕진씨와의 관계는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가 서울지검 특수부검사로 있던 70년대초 속리산관광호텔카지노사건으로 덕진씨를 구속한것이 인연이 돼 정씨를 알게됐다.그러나 형을 대리해 각계각층에 로비를 벌여온 덕일씨와는 모르는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불행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교만 졸업하고 빈둥빈둥 놀고 있던 동생이 화근이 됐다.82년 8월하순쯤 이 동생이 당시 슬롯머신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덕진씨를 찾아가 취직시켜줄 것을 요청했다.덕진씨는 구속됐을때 인간적으로 대해줬던 전씨의 동생임을 감안해 덕일씨에게 고용하도록 지시해 그해 9월7일 팔래스호텔 슬롯머신업소 지배인으로 취직시켜줬다.전씨가 정씨 형제에게 발목을 잡히게 된 계기였다.누가 보더라도 석연치 않은 대목임을 부인할 수 없다.형제간의 우애가 형을 궁지에 몰리게 했다.전씨도 동생의 「밥줄」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고 후회한다. 신전법무부차관은 영등포지청(현 남부지청)에 근무하던 70년대초 정보를 제공하는 등 수사상 도움을 주던 신용언씨를 통해 정덕진씨를 알았다.80년대초에 신씨가 장어구이집을 개업하면서 신씨부부와 정씨부부를 함께 초대해 부인끼리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로 발전,부인들은 그뒤 몇차례 만나 식사를 같이 하거나 차를 마시며 자식문제등 가정문제에 관한 대화도 나누곤 했다.지난해 신씨의 부인이 미국 시애틀에 있는 장녀의 집을 찾아갈때 정씨부인도 LA의 집에 가기위해 같은 비행기를 타고갔던 적이 있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보통사이가 아님을 짐작케한다.
  • 민주,철저수사 촉구

    민주당의 박지원대변인은 6일 노태우전대통령의 장녀 소영씨 부부에 대해 미법원이 불법 현금예치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것과 관련,성명을 내고 『예치된 20만달러가 어떤 경로로 반출되었는지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대물림의 꿈(외언내언)

    「나의 영혼은 신에게 바치며 나의 육신은 땅에 바치며 나의 유산은 내 혈연에 남기노라」 1594년 천재적 건축가 시인 화가인 미켈란젤로는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자신(영혼)을 3등분하여 세 자녀에게 맡기고 죽었다. 대체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어한다.거액의 재물을 남기기도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물려주기도 한다.또 도자기나 공예등 기술을 전승시켜 가업을 잇게 하기도 한다. 며칠전 이창호 시카고 총영사의 장녀가 제27회 외무고시에 합격,우리나라 외교사상 최초의 부녀외교관으로 탄생됐다. 이렇게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자녀는 「나도 아버지 처럼」「어머니 처럼」되고자 한다.아버지가 교수면 나도 교수,변호사이면 나도 변호사,특히 예능계열에선 2대·3대에 걸친 화가 음악가들이 얼마든지 있다.물론 누구나가 자녀들에게 자신의 일을 권고하거나 이끄는 것은 아니다.나는 딱딱한 과학자이니 오히려 내 딸은 예술가가 됐으면,내 직업은 골치 아프고 발전이 없으니 내 자식만큼은 다른 직업을 가져줬으면 하는 수도 있다.그러나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다면 내 아이도 나와같은 직업을 택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어릴때부터 부모의 독특한 기술를 지켜보면서 그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는 자녀가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가. 전남 보성의 옹기장이 이학수씨는 9대째 옹기를 굽고있고 유명한 보부상인 개성상회는 3대째.2대째이던 한창수씨는 「재산을 잃더라도 신용을 잃지말라」던 부친의 정신까지 이어받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것은 부모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를 자신의 평생직업으로 삼는데 망설임이 없을 때의 예이다. 딸들을 의사로 만들어 「의사일가」를 이루고 싶었던 함기선씨의 경우는 딸들에게 무리하게 의과지망을 강요,그 과정에서의 부모의 비양심을 물려받아 악순환의 되풀이나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완전한 교육을 자녀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유산」이라던 영국시인 토머스의 말이 새삼 김언처럼 들린다.
  • 체미 노소영씨 부부/외화 밀반출 조사/서울지검,고발따라

    서울지검 형사6부(김영진·부장검사)는 19일 노태우전대통령의 장녀 소영씨(32)와 사위 최태원씨(34·최종현선경그룹회장 장남)부부의 외화밀반출 혐의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섰다. 검찰은 지난 2월25일 최씨 부부의 외국환관리법위반 여부를 조사해 달라며 검찰에 고발장을 낸 김수영씨(47·서울 서대문구 미근동)를 이날 불러 조사했으며 미국에 체류중인 최씨 부부의 소재가 파악되는 대로 소환장을 보내 피고발인 조사도 벌일 방침이다.
  •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씨(이세기의 인물탐구:24)

    ◎타고난 미성·미모 겸비 “한국의 뮤즈”/독특한 음색·풍부한 성량 조화로 “청중매료”/완벽주의 추구… 온몸으로 최상의 무대 연출/서울대 시절 “음악계 샛별” 찬사 받아… 쪽진머리·한복 즐기고 눈부신 조명을 받고 무대에 선 백남옥의 모습을 보고 음악평론가 김원구씨는 「한국의 뮤즈 탄생」이라고 찬사를 보낸적이 있다. 한상우씨는 「진한 색감,표현의 다양함은 듣는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야만다」고 했고 한때 유한철씨는 백남옥의 메조소프라노에 현혹되어 「수십년만에 만나볼수 있는 목소리」로 요란하게 신문의 음악평을 장식하기도 했다. 넓은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거침없는 목소리는 과연 청중을 사로잡는데 추호의 빈틈도 없어보인다.더구나 목소리에 버금가는 출중한 미모는 어떤 무대에 세워도 결코 손색이 없는 조건을 이미 갖춘 예술가다. 그러나 성악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해도 그 소리가 미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이겠는가.그래서 타고난 미성과 미모를 겸비했기 때문에 백남옥은 그때마다 화제의 초점이 되는지도 모른다.아름다운 용모에 아름다운 목소리,그렇다면 백남옥은 어떤 사람인가. ○별난 성격의 소유자 그는 마음씨가 곱고 착하고 여리고 겸손하며 자신을 죽일줄 아는 전형적 동양여성의 특징은 지니고 있지 않는것 같다.그렇다고해서 거세고 드세게 만사에 나서기를 즐기는 적극적 성격이라고도 할수 없다.또는 이 모든것이 해당될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다시 말하면 일반의 상식선에선 쉽게 설명되어 지지않는 별나고도 별난축에 속한다. 우선 싫은것도 많고 꺼리는 것도 많다.이른바 원만하고 부드럽고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구석은 찾아볼수 없다.따라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편은 못된다.오히려 좀더 가까워지지 않는 묘한 긴장과 거리감을 준다.물론 그 자신도 자신의 그런 면을 십분 알고 있다.다만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다.그로서는 남을 불편하게 한적도 심적 폐를 끼치려는 의도도 없다.자신은 짐짓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믿는다.남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라곤 없다.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심 한복판을 갑자기 가로지르는 상쾌한 바람처럼 정신이 번쩍드는 기분이다. 또 꼼꼼하고 완벽하다.종이한장도 똑바로 놓여야만 안심하는 주의다.그래서 쉴새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정돈하고 챙긴다. 그의 집에 가보면 알수 있다.커튼에서 카펫,식탁보 하나에 이르기까지 봄이면 봄답게 엷은 핑크에 화사한 꽃문양,커튼이 꽃문양이면 바닥은 단색,식탁위에 놓이는 찻잔과 스푼하나에도 섬세하게 배려하는 취미다. 무대의상도 마찬가지다. 오페라나 교향악단 협연에서는 역할에 맞는 의상을 골라 입지만 그는 대부분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똑바로 가르마 탄 쪽진 머리에 비녀를 지르고 손가락엔 칠보쌍가락지,자신의 음반이 국제 레코드시장에 진열됐을때 자켓의 한복차림은 「한국의 백남옥」을 한눈에 알수있게 하리라고 말한다. 곧 지루해하고 곧 새로운 것을 원해서 아침에 입었던 옷을 하오 외출에선 반드시 바꿔 입는다.하나의 물건에 오래 집착하지 못한다.다만 한번 사귄 사람과는 평생을 간다. 연주를 앞둔 연습때도 소위 끈질긴 인내심을 읽을 수 있다.테이프에 녹음해서 조목조목 결점을 찾아 그 대목을 보충하고 스스로 완벽하다고 인정되지않으면 며칠 밤이고 파고든다.바로 이 완벽주의가 일상생활에서도 그를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노래의 가사도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시속에 담긴 시심을 꿰뚫어 시가 지닌 정감에 감동하고 도취돼야만 비로소 멜로디에 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시가 말하려는 테마는 물론 한구절 한구절에 녹아들 만큼 집착하여 쓴사람의 심중을 깊이 헤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77년 KBS에서 「노산 이은상 가곡의 밤」때 이은상작시 홍난파 작곡의 「사랑」에서 그때까지 막연히 이해했던 단어들을 노산에게 또박또박 점검한 적이 있다. ○성용도아 휘호받아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 마소」의 「부대마소」나 「애제 타지 말으시오」 「생□으로 있으시오」등 방언이나 고어를 사용했을 때의 효과는 어떤가고. 하도 정교하게 물으니 노산이 기특히 여겨 이 미인에게 「성용도아(모든것이 우아하고 단정하다)」라는 휘호를 남긴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백남옥은 까다롭고 별날거라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그는 청중들에게 한아름의 꽃다발을 정성스럽게 안겨주는 자세로 노래부른다.황폐하고 무미건조한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첨예해진 사람들의 감정을 맑고 청량하게 다스리는듯 폭풍우 후의 찬란한 햇살같은 감동을 누구에게나 고루 베풀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한사람의 예술가로서 좀더 진수의 경지를 지향하기 위해선 그가 걷고있는 모든 과정을 몇번이고 찬찬히 헤아리기를 잊지않는다.『결과는 두고 볼뿐』진정한 예술정신의 도정은 그 과정에 담긴 성실함의 무게일거라고 말하면서. 백남옥은 부친 백인엽장군과 정숙일여사의 2남2녀중 장녀.서울사대부국과 이화여중 3학년이 될때까지는 세단을 타고 경무대에 세배가고 무비카메라로 일상생활을 찍히는 소공녀로 성장했다.그러나 5·16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가 헤어지자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난생처음 가난과 비극적 환경을 체험했다. 대학4학년 때인 68년 어머니의 헌신적 뒷받침으로 학생신분으로선 감히 생각지도 못할 본격적독창회를 개최,명동 시공관무대에 데뷔했을때 맑고 따뜻한 그의 메조소프라노는 오페라와 예술가곡을 부를수 있는 재능이 두드러져 음악계는 이 신성에게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었다.그때 취재하러왔던 당시 대한일보기자 정준극씨가 그의 부군이다. ○독일 국립음대 유학 단돈 6만원으로 시작한 신혼생활,사글세방으로 10여차례나 전전하는 어려운 중에도 부군은 독일유학을 서둘러 주었다.여전히 각박한 유학생활이었으나 베를린 국립음대에서의 지도교수인 바리톤 H·브라우어 박사는 고음위주의 레퍼토리로 그의 음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다른 동양권 학생들은 테크닉이 앞선다.당신은 테크닉도 뛰어나지만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다음해 베를린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며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리히트 오디션에 참가,「리케르트 시에 의한 말러의 마지막 7개 가곡을 불러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다.그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고 그도 왠지 세계무대 장악이라는 별빛같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 어머니 타계소식이날아들었다.그에겐 청천벽력과도같은 충격이었다.가장 섬세한 사춘기에 어머니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했던 그로선 눈앞에 둔 성공이 허망하기만 했다.그때 귀국후 더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싶지않아 베를린 국립음대 오페라단 입단을 포기해버렸다. 오페라 출연등 연주제의를 받을때마다 그는 나에게 꼭맞는 무대인가를 여러모로 고려해본다.예를 들어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좋아하는 오페라이긴 하지만 기모노를 입을때 마다 강한 거부감이 생겨 서서히 그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또 83년 한 방송국이 주관한 8·15경축 음악회에서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자리」에 가슴이 파진 드레스를 입는 것이 송구스럽게 느껴져 그때부터 한복을 고집하게 되었다. 80년초 큰 병을 앓고난후 그는 예술과 인생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어떤 부분에서도 별로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그가 한 일은 늘 옳았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과 다 자란 딸(은진 서울대미대),하루종일 화초를 가꾸고 여전히 집안의 구석구석을 깔끔하고 예쁘게 꾸미면서 그런 생활이 음악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알고있다.그의 생활은 결국 그의 예술을 지켜주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를 필요로하고 그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겐 그가 지닌것만큼 주저없이 나누고 싶어한다.군민을 위로하는 군민음악회나 구민음악회,장애자를 위한 예술학교 기금모금 자선음악회등 크고 작은 음악회에 기꺼이 참여한다.다만 왼손이 한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여 화려한 그의 이면에 이런 면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작은 음악회라도 「이무대는 나의 첫무대」 「언제나 새로운 최상의 무대」여야 한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한다.풍부한 성량과 날이 갈수록 윤기를 더하는 투명한 목소리,온몸이 악기가 되어 자유자재로운 기교로 노래부르지만 그에게서의 예술은 단순한 재능과시나 화려한 영광을 위한 기교는 더이상 아니다. 「예술은 인간 가슴의 심연에 빛을 보내는 일」,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완벽추구와 긴장을 잃지않는 백남옥의 노래는 바로 그 청중의 가슴에 던지는 한줄기 빛처럼 따사롭게 흘러들고 있다. □연보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예고 졸업 ▲1969년 서울대 음대 졸업 ▲1973∼76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가곡과 오페라 전공) ▲1976∼78년 중앙대·서울예고 출강 ▲1979∼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이화녀중때 김학근,예고때 오현명,서울대 음대때 이정희,베를린국립음대 때 브라우어 교수 사사) ▲1964년 서울대 음대 주최 제15회 전국남녀학생음악경연대회 특상 입상 ▲1966년 제16회 동아음악콩쿠르 성악부 1위 입상 ▲1968년 제1회 독창회(명동 시공관) ▲1969년 오페라 「순교자」(국립오페라단) ▲70,71,72년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국립오페라단 김자경오페라단)〃 모차르트 오페라 「마적」(국립오페라단),비제 오페라 「카르멘」(김자경오페라) ▲1974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 오디션1차합격,베를린 국립오페라단 퐁키엘리 4막오페라 「라조콘다」 ▲1975년 독일유학시 베를린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말러가곡 솔리스트(리케르트시에 의한 말러 마지막 7개의 가곡으로 프랑스의 파리 툴르즈 바이안느 지방 순회연주) ▲1976년 동아일보·동아방송주최 귀국독창회(류관순기념관),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국립오페라단) ▲1977년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김자경오페라단) ▲1985년 음악의 소극장 운동을 위한 제1회음악회(현대극장 소극장) ▲1986년 독창회(호암아트홀) ▲1986년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호암아트홀) ▲1987년 오펜바흐 가곡 「호프만의 이야기」(김자경오페라단) ▲1989년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투테(여자는 다 그런것)」(김자경오페라단) ▲1990년 캐나다 토론토,미 워싱턴등지 독창회 ▲1991년 8·15경축음악회 미애틀랜타 휴스턴 시애틀 워싱턴등지 순회독창회 KBS교향악단,시향10여회협연,지방연주 20여회,KBS·MBC­TV 「봄맞이 가곡의 밤」「8·15경축음악축전」독일문화원 주최 「독일가곡의 밤」해마다 참가. 「백남옥 우리가곡 모음」(78년)「애창곡집」(79년)「우리가곡집」(86년)「매혹의 목소리 백남옥 우리가곡」CD출반(92년)이상 성음,「백남옥 우리가곡」LD출반(93년 삼성)외.
  • 민주 이기택대표 재산공개/“46억9천만원” 신고

    민주당의 이기택대표는 31일 46억9천만원규모의 재산을 당 재산공개대책위원회에 신고했다. 이대표가 공개한 재산내역은 이대표 명의의 ▲서울 북아현동 187의7 자택 (대지 1백95평 건평 1백47평) 9억9천만원 ▲서교동 476의19 상가 (대지 2백66평 건평 69평)26억4천만원 ▲부산 중앙동 보세창고 (84평) 11억원 ▲경북 영일군 임야 (1만1천평) 4천6백만원등의 부동산과 ▲뉴그랜저,프린스승용차와 부인 이경의여사 명의의 ▲스위스그랜드호텔 헬스클럽회원권 6백만원 ▲다이아몬드반지 (1캐럿) 6백만원 ▲예금 2천7백만원 ▲대원군 난초화 2점▲수석 20점 ▲화류2층장,장녀소유의 엑셀승용차등이다.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경매 리버사이드호텔 원소유주가 되산 꼴

    ◎인수 호성전자 김동숙씨는 전 사장 친누나/수천억대 부동산소유 어머니가 자금 지원 최근 리버사이드호텔을 전격 인수한 무명의 중소업체인 「호성전자」는 이 호텔의 원소유주인 박례준씨(74)로부터 인수자금 전액을 지원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호성전자 김동숙사장(52)과 리버사이드호텔의 전사장인 김동섭씨(45)의 어머니로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1천억원 상당의 인창상가를 운영하는 등 수천억원대의 부동산을 소유한 숨은 재력가이다.결국 지난해 4월 부도로 경매에 부쳐졌던 리버사이드호텔은 5차례의 유찰끝에 원소유주의 가족에게 팔린 셈이 됐다. 서울 구로구 독산동에 있는 호성전자는 자본금 5천만원,연간 매출액 10억원 정도의 소규모 업체로 지난 18일 경락이 결정됐을 때만 해도 인수금 3백15억원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는 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었다.그러나 이 회사의 김사장이 박씨의 장녀이고 김동섭사장과는 친남매 사이로 밝혀지면서 이같은 의문은 풀어졌다. 박씨는 지난 80년대 중반 전두환전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로부터인창상가를 전격 인수해 화제가 됐었다.그는 이번에 딸의 명의를 빌려 호텔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조만간 전면에 나서 다시 호텔업에 본격적으로 손댈 것으로 알려졌다.
  • 첼리스트 전봉초씨(이세기의 인물탐구:11)

    ◎절교의 기량… 무대연륜 50년의 “악장”/「첼로의 선봉」답게 작품특성 능란하게 표현/음악에 대한 사명감으로 모든 활동 적극적/국내초연작품 즐겨 연주… 청중에 싱싱한 감동 전달 바다밑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깊고깊은 암청색 선율,원로연주가 전봉초씨의 첼로언어는 날이 갈수록 그 깊은 맛을 더해 그가 켜는 베토벤은 명철의 사색처럼 심오하고 그윽하다. 작품이 지닌 특성과 표정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단순한 곡 해석만이 아닌 「낙장」의 대우로 존경받는 위치다. 무대에 선지 50년.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 시절 요미우리(독매신문)가 주최한 전일본 신인 선발연주회에 학교대표로 참가한 것을 첫무대로 그는 지금까지 독주회 20회,서울실내악회·실험악회·서울트리오와 그가 창단해서 이끌던 바크 합주단등 실내악연주 1백회이상,시향·KBS교향악단 협연 해외연주 등등 생생한 음악의 발자취가 산적해 있다. 돌아보면 스포트라이트에 점철된 세월,수천관중과 뜨거운 박수갈채와 꽃다발 속에서 슬픔이나 좌초없이 그는 순조로운 항로를 거쳤고 그래서 그의 인생과 예술은 탄탄한 금자탑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순조로운 예술항로 그는 음악의 연륜만큼이나 무대를 알고 청중을 안다. 악기를 얼싸안고 무대에 서는 순간 객석의 분위기로 심상을 꿰뚫어 청중의 정곡을 이미 움직인다. 그가 연주에 임하는 자세는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문학청년과도 같은 미세한 열기가 느껴진다.그러나 그 정열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닌 안으로 감춘 진주빛 화염,진지하고 결곡하게 테마의 핵심에 파고든다. 얼핏 보기엔 첼로라는 악기가 갖는 철학성을 내보인 듯 하지만 그의 언어는 얼마든지 풍성하여 불꽃같은 테크닉이 숨막히게 전개된다.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애틋한 애정이 전편에 넘쳐 그의 연주는 언제나 젊고 싱싱한 감동을 던져준다. 그는 또 첼로의 선봉답게 한국초연의 레퍼토리를 즐겨 선택한다. 61년 당시로선 획기적인 「현대음악의 밤」을 열어 힌데미트·드뷔시·베버 첼로소나타를 초연했고 65년엔 베토벤만을,그 다음엔 랄로와 생상스,10년전 독주회에서도 데르블로아「조곡2번」,바하 「아리오소」,포레 「비가」등 짧으나 까다로운 곡으로 「첼로만이 갖는 절교의 표현력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노래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바이올린 박민종,피아노 정진우,첼로 전봉초등 서울대교수들로 이루어진 서울트리오는 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초연곡을 정기연주하면서 한때는 하이페츠와 루빈스타인,피아티고르스키의 「백만불트리오」에 비유되는 황금기를 누렸고 조로가 심한 편인 음악계에 노익장 과시로 후배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는 어떤 시점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음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한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고 할 수 있다 . 87년 일본 교토회관 독주회이후 만5년만인 오는 4월29일(호암아트홀)음악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제21회 독주회를 앞둔 노대가의 심경은 요즘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43년 일본데뷔 이후 올해가 꼭 50년이 된다고 해서 후배·제자들이 마련해준 자리다. 그로서는 인생을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어쩌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그래서는 아니지만 이번 연주는 여러가지 점에서 뜻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 같다.그는 연주때마다 앓던 심한 열병이 이번에는 전처럼 행복한 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연주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갈고 닦은 음악인들의 종교의식」이며 그의 연주는 신에 대한 고백성사,청중은 그의 고백을 듣는 사제의 입장이고 그는 『솔직하고 진실하게 고통과 고뇌와 슬픔과 갈등을 샅샅이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이번 고백성사는 어느때보다 숙연하리라는 예감이다. ○중3때 첼로 첫 연주 전봉초씨는 평남 안주에서 커다란 잡화상을 하던 전리순씨와 이해원여사의 아들 4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집안은 풍족한 환경으로 그는 맹산 북창국민교시절 형(전화황씨)의 친구이던 김동진씨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숭실중 2학년때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프로에나가 마스네의 「타이즈의 명상곡」을 연주했고 3학년되던해 첼리스트 김태연씨의 첼로연주회에 갔다가 「첼로의 남성적인 깊은 소리」와 「혼의 선을 켜는 듯한 음색」에 빠져 첼로로 바꿨다.그당시 상황에선 음악을 마음껏 공부하기란 쉽지않았으나 일본화단의 거봉인 큰형 전화황씨의 도움과 격려로 그는 일본에 유학할 수 있었다. 유학시절은 찬란하고 화려했다.같은 유학생인 박민종 정희석 윤기선씨등과 한국인만의 4중주단을 조직,영친왕 저택에 드나들며 연주를 한적도 있고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NHK교향악단 전신인 일본교향악단 도쿄송죽관현악단 수석주자로 활약,스승인 오무라(대촌묘칠)교수의 도움으로 강제 학병징집을 피해 만주 신경교향악단으로 건너갔다가 해방후 월남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음악과 관련되지 않는 생활은 찾아볼 수 없다.지금도 1년 3백65일중 그는 2백일쯤은 음악회에 들른다.크고작은 음악회 모두는 그의 동료·후배·제자들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 빼놓지 않는다. 또 친구들을 좋아해서 여러모임을 가지고 있고 어떤자리에서나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예술원 회원중 술마시는 사람끼리의 수요회,또 첼리스트중 60세이상인 첼로동문회 OMC(Old Musician Club)등은 한달에 한번씩모이는 친목 모임들이다. 그는 검은 베레모에 벨트를 맨 더블보턴의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영국신사」지만 그래서 사교적이고 활동적이고 실천적이나 불의를 참지못하는 까다로운 성격탓에 「면도날」이란 별명을 듣고 있다. ○사교적·활동적 성품 79년 서울대음대학장시절 문교부가 예체능계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예능계 대학교수들이 개인레슨을 함으로써 부조리를 빚고 있는 점」을 지적,「개인레슨 엄단」을 발표하자 같은해 「음락세계」4월호에 「음악의 조기교육에는 실력있고 경험이 풍부한 대학교수가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예능계 대입공동관리제 실시에 앞서 문교부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를 조목조목 물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연주가이자 대학교수·음협이사장·예총회장을 두루 거쳤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첼로로 활약하는 1백여명의 직계제자,훌륭하게 키운 그의 3남2녀중 장남(성일씨)콘트라베이스 차남(성환씨)바리톤·효성여대교수,장녀(미영씨)피아니스트·교원대교수 차녀(소영씨)첼리스트,그리고 3남(시문씨)만이 공대졸업후 금성연구소에 근무하는등 안팎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인생을 승리한 것도 성취한 것도 아니며 때로 심한 비바람에 시달렸어도 음악의 열정 때문에 그것이 비바람인줄 짐작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기전 82년 낙단4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적도 있다. 『나이를 먹으니까 공수래 공수거,세상사 여부운,이른바 「모든 고통을 낫게하는 감미로운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오로지 첼로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싶다』고. 그리고 두주일전인 지난 12월,그는 사랑하는 장남을 그의 눈앞에서 여의었다.시카고에서 콘트라베이스로 활약하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한동안 망연자실,슬픔을 감추려할수록 그의 눈가에 통한이 서려 보는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인생이란 왔다가 가는 것.그가 나보다 먼저 갔을 뿐」 담담히 체념하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주체치 못하여 그의 억양에는 처연한 오열이 실려있다.한 아들의 아버지이기 전에 예술가의 의연함과 긍지로 이를 이겨내려 애쓰지만 그의 그런 허탈감은 부모로서의 아픔일수밖에 없다. 우리 음악사에서 첼로선봉으로 커다란 획을 긋는 노대가의 이번 연주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연주일수도 있다.이번 연주에서 그는 평생동안 사랑해마지 않던 베토벤의 다섯개의 첼로 소나타와 바흐 무반주의 첼로조곡,바르토크의 루마니아 포크댄스를 암보로 들려준다. 아들의 영혼을 가슴에 묻은 첼로의 선율은 좀더 짙은 암청색을 띤채 비감을 정제시킨 관조의 경지를 보일수도 있다.그리고 첼로와 피아노가 주고받는 대화는 부자간의 사연인양 그날의 객석에 장탄식으로 여울질지도 모른다. □연보 ▲1919년3월18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 ▲39년 평양 숭실중 졸업후 도일 ▲43년 일본 동경제국음락학교 졸업(Violin이인호,김동진,Cello김태연·대촌묘칠사사)재학중 일본교향락단 동경 송죽관현락단단원 ▲43∼45년 만주 신경교향락단단원(각부 수석진자로 구성된 현악4중주단 활동) ▲45년 지방순회연주중 북안에서 해방맞아 다음해 월남 ▲46년 고려교향락단 단원▲47년 서울교향락단 수석주자(서울실내악협회 창단 멤버) ▲48년 배재강단에서 제1회 첼로독주회이후 20회 ▲50∼53년 부산 피란지에서 실험락회 연주 20회 ▲52년 현제명씨 권유로 서울대 예술대 음락부 전임강사 ▲53년 서울트리오(첼로 전봉초 피아노 정진우 바이올린 박민종)창단 ▲54년 서울대 음대 학생담당 학장보 ▲58년 대한민국 문화사절단 일원으로 동남아 6개국 순회연주 ▲60년 제8차 IMC(국제음악회의)총회 한국대표로 파리UNESCO회의참석(동양에 있어서의 서양음악 주제발표) ▲65년 서울 바로크합주단창단(제21회정기연주후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에게 바통넘김) ▲67년 음악연주 25주년기념 KBS교향악단과 첼로협주곡 협연 ▲72년 서울대 4중주단 창단 ▲76∼79년 서울대 음대학장(재임시 동양음악연구소 창설) ▲79년 전봉초 교수 화갑기념 첼로오케스트라 연주회(국립극장대극장)지휘 ▲82년 낙단생활 40주년기념 전봉초첼로독주회 ▲84∼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 집행위원 ▲85∼88년 제13∼14대 한국음락협회 이사장 ▲85년 제21차IMC총회 한국대표(동독 드레스덴 기조연설) ▲87년 일본 교토 일한친선협회초청 첼로독주회(교토회관),제22차 IMC총회 한국대표(브라질) ▲88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예총)회장 ▲91년 사단법인 아세아청소년 교향악단 한국지부장 ▲현재:사단법인 코리안심포니 이사장,사단법인 국제음락애호가협회 한국본부이사장,재단법인 안익태기념사업회 재단이사장,전쟁기념 사업회이사장,예술원 회원,이복련여사와 3남2녀. 5월 문예상 본상,대한민국예술원상,금관문화훈장,국민훈장동백장 음락의 주변,농현50년 낙수
  • “가게로 생계꾸린 어머니에 감사”/여학생수석 장효정양

    ◎잠 하루 7시간… 과외 생각도 못해/“여검사 돼 사회정의 실현에 한몫” 『시험을 잘 쳤다는 생각은 했지만 수석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서울대 법학과를 지원,학력고사 3백38점을 얻어 여자전체수석을 차지한 부산해운대여고 장효정양(19·해운대구 우2동 1022의1)은 사업에 실패하고 5년전부터 신장병에 시달려온 아버지 장병관씨(45)와 조그만 가게로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 전명화씨(45)에게 큰 위안이 된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1남2녀 가운데 장녀로서 2학년때인 지난 91년 전국고교외국어경시대회 영어부문에 출전,여자수석과 함께 은상을 차지해 아버지 장씨를 청와대에 구경시켜주는 등 오래전부터 오늘의 영광을 예고해왔다. 해운대여고 3년동안 반장을 맡을 정도로 활달한 성격인데다 국민학교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석을 차지해 장학금으로 공부해온 수재. 시험이 끝난뒤 직접 채점해 보았을때 국어와 국민윤리에서 1점짜리 하나씩만 틀려 합격은 자신했지만 막상 예상점수가 그대로 나오고 여자수석까지 차지하니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고한다. 장양은 수석의 비결에 대해 『하루 7시간 정도 충분히 자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철저한 예습·복습으로 학교수업의 능률을 최대한 높였으며 과외수업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장양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위해 법학과를 지원했는데 앞으로 검사가 돼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한몫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버지 장씨는 『건강이 나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도 딸애가 너무 장한 일을 해내 더할나위 없이 기쁘다』면서 『딸애가 수석을 하도록 음양으로 도와주신 학교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서울역장 이건재씨(인터뷰)

    ◎명절엔 하루 50만승객 관리/“가족처럼 봉사” 매일아침 직원에 당부/태부족 역설비 고속철도 완공땐 해소 서울역장은 「철도의 꽃」이라고도 하고 전국 4백여명의 「역장중의 역장」이라고도 불리는 중책이다. 평소 서울역을 통해 상경·귀성하는 인파는 15만이 넘고 추석과 설등 특별수송기간에는 50만이 넘는다. 15만명의 승객중 10만명이 경부선승객이고 나머지 5만명이 호남·전라·장항선승객이다. 하루 매표액만 해도 3억원이 넘는 초대형 역이다. 이율재서울역장(58)은 지난 61년 순천지방철도청 곡성역역무원으로 철도청에 들어온 이후 31년만인 지난 3월2일 4만 철도인의 선망의 대상인 서울역장에 취임했다. 『철도역이란 그 기능상 24시간 깨어있는 곳입니다.수많은 승객과 화물을 밤낮없이 수송해야하는 운송전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푸른 철도제복과 두줄의 금테 정모가 잘 어울리는 동안의 이율재역장은 한반도동맥의 중심관문을 지킨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역에는 2분19초 간격으로 1개 열차가 출발·도착하고있습니다.수색역으로는 3분 간격으로 객·화차가 정비를 위해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역장이 현재 직접 관장하고 있는 철도직원들은 기관사·여객전무·매표원등 3백여명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울역에 상주하고 있는 서울열차사무소·검차사무소·전기 통신소·대한통운·홍익회·정부합동민원실·서울역 플라자업소등 1천여명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어 퇴근후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서울역은 1세기에 가까운 한국철도의 얼굴이자 정부의 얼굴이기도 합니다.아침마다 직원들에게 승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 최대의 봉사를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역장의 봉사정신은 한 마디로 모든 승객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손님처럼 접대하라는 것이다. 서울역을 통해 떠난 사람은 꼭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서 승객이 갈때나 올때나 똑같은 서비스를 해야된다는 것이다. 31년간 철도인 생활을 한 이역장은 학교교사인 부인의 내조덕분으로 1남2녀를 모두 남부럽지않게 교육시켜 사회에 배출했다. 장녀는 대한항공의 승무원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들은 광주고속의 직원으로,막내는 해운회사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가족이 모두 육상·항공·철도·해운등에 근무하는 교통가족을 이루고 산다.『현재 서울역의 선로와 매표구·광장등은 인구 1백만규모의 것으로 1천만이 넘는 서울시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킬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고속철도가 완공되어야 나아질 전망입니다』 이역장은 『3백65일 긴장속에서 살아야하는 철도인들은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철도인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며 후배들의 사명감을 강조했다.
  • 발레리나 김혜식씨(이세기의 인물탐구:9)

    ◎도약때 새의 비상 방불… “춤의 요정”/외지,“미감번득이는 탐미주의적 포즈” 격찬/세계적 명성 얻고도 자만하지 않는 노력형/포용력있는 성품… 「사치와 무관한 예수셰계」 추구 꽃잎처럼 여리고 가늘고 향기로운 느낌.한국이 낳은 세계적 발레리나 김혜식씨의 이미지다.곧고 균형잡힌 체격과 세련된 용모,예술가의 찬란한 경력과 연륜,세계적 명성에 비해 그의 어느 구석에서도 자랑과 오만,자부심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알프스 소녀같은 순백한 표정에 말씨도 미소도 웃을때의 눈매도 부드럽다.걸음걸이도 발레리나 특유의 티를 내지않는다. 그러나 목선과 어깨선 조용히 앉아있거나 책을 읽을때 주스를 따를 때도 그에게선 어쩔수 없이 일가를 이룬 한 발레리나로서의 기품이 엿보인다. 잔잔한 리듬이 밴 발동작과 우아한 스텝은 그가 국립발레단 시절 「레 실피드」에서 보여준 「공기의 정령」,또는 몸속에 쇼팽의 선율이 흐르는 듯한 물결같은 움직임이다. 일명 「백색발레」(aballetblanc)로 불리는 「레 실피드」에서의 아라베스크와 절정을 향한 앙트리샤는 그의 많은 묘기중에서도 눈부시게 뛰어난 테크닉으로 손꼽힌다.특히 그의 도약은 그림자무게만큼이나 가벼울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잘 새의 비상(비상)에 비유되곤 한다. 한발로 선채 한 다리와 한팔을 마음껏 뒤로 뻗치는 앙트리샤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신문과 댄스 전문지등에서 일찍이 「미감이 번뜩이는 탐미주의적 포즈」로 호평된바 있다. 외지 보도에서 그는 언제나 「혜식(Haeshik)」으로 불리고 한국의 임성남 사사를 밝히는등 최근의 「댄스 티처나우」지(92년 1월호)는 「서울에서 온 김혜식」특집기사속에서 「잠자는 미녀」의 「오로라」,또는 「봄의 요정」에서의 「요정(Fairy)」자체로 그의 춤을 표현하고 있다. ○임성남씨에 사사 그는 무대위에서 「사랑스럽고 감미롭고 고혹적」이다.그러나 이 글을 쓴 무용 평론가 레슬리 프라이드맨은 그의 무용가로서의 이면에는 「고집이 세고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대한 확고한 판단력과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완벽주의가 도사려 있다」고 밝힌다. 이대 무용과에서 같이 무용을 공부한 미스코리아 출신 오현주씨는 「예술가적 양심과 도덕성,세계적 수준의 발레 기교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동시에 갖추었으나 언제나 온순하고 겸손하고 관대하다」고 친구를 자랑한다. 그의 관대함과 포용력은 이번 국립발레단 새단장 내정때 이를 질투하고 항의하는 전화를 받고도 수화기를 든채로 코를 골고 잔 이야기가 잘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그의 국립발레단 새단장은 새삼스럽게 거론된 것은 아니다.3년전부터 해마다 동아무용콩쿠르 심사위원자격으로 서울에 올때마다 스승인 임성남씨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고 무용계에서도 양식있는 실력자의 출현을 당연히 환영하는 빛이었다. 「임성남씨가 은퇴하더라도 김혜식이 있으니 안심」이라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 깊이 외국무대에 뿌리를 내린 그로서는 거미줄같은 스케줄에 얽매여서 이를 뿌리치고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지난 16년간 교수로 몸담아온 프레스노대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농공학교수인 부군 김주익씨와의 섬세하고도 다각적인 의논끝에 「나를 키워준 고국에 대한 감사의 차원」에서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입장이었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김혜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아버지 김응순씨(70년 작고)는 고대출신으로 오랫동안 교통부 해운국장으로 재직,비교적 건강하고 구김살없는 환경에서 명랑하게 자란 편이다.집안에 무용을 하는 사람은 없다.다만 사촌언니이며 문단의 중진인 시인 김양식씨가 김혜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발레리나의 꿈」을 심어주었다. 성공회 유치원시절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여 이화여중때 일본에서 러시아발레를 전공하고 돌아온 임성남무용연구소에 입소,중학교 3학년때 「꽃의 왈츠」에서 군무로 명동 시공관 무대에 섰고 고3 되던해 「백조의 호수」에서 스승인 임성남씨의 파트너로 본격 무대에 데뷔,「발레 신데렐라」로 떠올라 무용계는 일찍이 김혜식 발레시대를 예고했다. 「타고난 재능보다 부족함을 메운다는 노력」을 신조로 하여 그는 밤낮없이 포즈연습에 매달렸고 하루가 멀다하고 토슈스를 해어뜨리는 딸의 춤을 그의 부친이 말없이 뒷바라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수정 온디누」를 보고 그때부터 막연히 마것 폰테인의 영국 로열발레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당시 미국대사관 공보관으로 와있던 미스터 핸더슨은 김혜식의 「백조의 호수」「레 실피드」에서의 연속회전인 푸에테에 반해 뉴욕시티발레·로열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 공연 필름을 구해주었고 새들러스 웰즈의 「불새」공연에서 눈이 핑핑 돌것같은 마것 폰테인의 현란한 선회를 마치 그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듯 지켜봤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드디어 그는 67년 5·16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갔고 런던의 로열발레스쿨에 입학,세계적 프린시펄인 줄리아 파론,일리아 워드 도널드 리튼을 차례로 사사,발레스쿨 수료후엔 에롤 에디슨에게서 알레그로 스텝의 보충레슨을 위해 1년간 수업을 연장했다. 그러나 시즌엎이어서 로열발레단 오디션을 놓치는 바람에 「잠자는 미녀」솔로로 니콜라스 베리오소프 감독에게 발탁되어 스위스 취리히발레단에 입단,이 사실은 국내에도 널리 보도되었었다.그는 아름다운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 머물면서 각국에서 모여든 재능있는 예술가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이상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 미국에 살고있던 동생이 그를 만나러 왔다가 「유명 발레리나의 춥고 가난한 생활」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하자 『예술은 사치스럽다든가 풍요로운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모든 동작이 정지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만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춤출 때외엔 화장을 하지 않는다.멋진 옷을 탐내지도 않는다.유럽 구석구석을 누비는 투어중에도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모든 발레리나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겨울에 입을 스웨터나 머플러를 뜨개질 하면서 공연 틈틈이 보았던 샛별같은 발레들을 머리속에 그리곤 한다.그중에서도 유럽공연을 가진 캐나다 레그랑 발레 캐나디안의 토슈스를 신지않은 「카르미나 브라나」는 퍽이나 인상적인 무대였다. 그는 이에 자극받아 취리히 발레단과의 3년계약을 끝내고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에 입단,오디션에서 2백명중 1명으로 뽑혀 처음엔 세미 솔로이스트,다시 솔로이스트로 올라서 모든 공연에서 「작은 코리안의 센스있는 작품해석,유연한 기량」등의 개인평과 함께 차츰 춤의 요정으로 변신해갔다. ○공연때마다 호평받아 「나이든 모습으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30세가 되던 72년,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있었던 록 발레 「토미(Tommy)」공연에 찾아온 김주익씨와 그해 12월20일 프레스노에서 결혼,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농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주익씨는 「무용하는 와이프를 원치않아」결혼과 함께 그곳 신문들은 「프린세스 차밍과의 결혼을 위해 토슈스를 포기한 발레리나」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었다.예상치못한 김혜식 발레 포기는 미국은 물론 한국무용계를 크게 놀라게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주부로 머물면서 뜨개질이나 하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발레 필름에 넋을 빼앗기는 아내를 발견한 김주익씨는 「그는 아내이기전에 한사람의 예술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더구나 「이 도시에 세계를 누빈 발레리나가 와있다」는 소문과 함께 결혼 3개월만에 프레스노 시립발레단이 「호두까기인형」「잠자는 미녀」공연에 초청,네 왕자와 더불어 추는 「로즈아다지오는 비길데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란 극찬등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초청발레리나겸 안무자로 활약하다 77년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로 초빙됐다. 자녀가 없는 이들은 푸들 스카티를 아들삼아 키우면서 친구처럼 남매처럼 오로지 세상에 두사람뿐인 것처럼 누구보다 다정한 부부다. 발레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부군도 언제부턴가 발레전문가를 능가하는 발레이론가가 되어 어떤 외조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혜식으로서는 그동안 큰 좌절이나 난관은 없었다.좌절과 난관이 있기 전에 철저한 연습으로 이를 대비했기 때문이다.슬픔이 있었다면 20년 가까이 친자식처럼 키워온 스카티를 지난해 모국방문기간 동안 잃은 일이다.스카티 얘기가 나오면 언제 어디서라도 『나를 닮아서 춤을 잘추었는데,바느질 스티치같은 부우레가 얼마나 귀여웠는데』하며 소녀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는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과 판단,완벽주의」가 도사려 오는 1월 단장취임에 앞서 지난 3주동안 발레단체의 대대적인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연스케줄이 짜져야만 2∼3시간씩 하던 연습을 하루 8시간으로 대폭 늘렸다.타성이 된 모든 잘못된 포즈나 폼은 연습을 통해서 고친다는 각오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김혜식 발레시대의 출범과 함께 그가 세계무대에서 호평받았던 젤롬로빈스의 「목신의 오후」,조지 발란신의 「알레그로 블리리안」그리고 토슈스 없는 「카르미나 브라나」를 국립극장 무대에서 보게될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은 그의 우상이었던 마것 폰테인의 이미지를 몸속에 간직한 꽃잎과도 깃털과도 같은,김혜식 특유의 미감이 번뜩이는 불멸의 예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연보 ▲1942년4월 서울출생 김응순씨와 백운정여사의 3남2녀중 셋째(장녀) ▲61년 이화녀고 졸업 ▲57∼64년 임성남 무용연구소 사사 ▲63년 제1회 동아무용콩쿠르 김상 수상 ▲64년 이대 체육대 무용과 졸업 ▲64∼66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66년 5·16장학금과 동아일보 장학금 받아 도영,영국 로열발레 스쿨 수학(RADDIPLOMA) ▲67∼69년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특별연수,스위스 취리히 발레단 차석 무용수 ▲69∼72년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 프리마발레리나및 솔로이스트 ▲73∼77년 미캘리포니아 피그가든 댄스아카데미 안무및 지도위원 ▲72∼92년12월 미캘리포니아 주립대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 ▲67년 이탈리아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참가 ▲68년 스위스 주네브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69년 캐나다 퀘백주립고교및 대학에서 발레교육과 테크닉을 위한 설기지도 ▲70년 미 자코브스 필로댄스 페스티벌 초청예술가 ▲71년 미 케네디센터 개관기념 공연 참가 ▲73∼74년 미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발레리나 「잠자는 미녀」「호두까기인형」공연·안무 ▲77∼92년12월 프레스노대 포타볼댄스 투톱을 위한 안무와 초청발레리나 ▲82·86년 포타볼댄스 투톱의 일본 대만등 순회공연 ▲83년 홍콩아카데미 아트센터 발레실기지도 ▲85∼89년 센트럴 캘리포니아 발레콩쿠르 심사위원 ▲87∼89년 미국대학 발레전공 장학생 선발 콩쿠르 심사위원 ▲90∼92년 동아일보 주최 동아무용 콩쿠르 심사위원 「백조의 호수」「로미오와 줄리엣」「잠자는 미녀」「코델리아」「호두까기인형」「프린스 이글」「연」「아이다」「파우스트」「토미」「파이어버드」「미스줄리」「카르미나 브라나」「더트립」「아루키(ARUKI)」「인터플레이」「알레그로 블리리안트」「세레모니」「레 실피드」「목신의 오후」「봄의 요정」등 수십편.
  • 화가 장우성씨(이세기의 인물탐구:8)

    ◎시·서·화 도양화삼절의 노인가/인위·조작없는 「무위사상」바탕,독창적 화풍/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 은은하게 표출/정많은 성품.부정엔 단호… 「친일논란」때 미술계풍토 비판도 대나무처럼 곧고 차가운 죽색청한과 물빛처럼 영롱하고 푸르른 수광징벽의 한벽원.이는 월전 장우성화백의 개인미술관 이름이다. 경복궁뒤 사간동 화랑가에서 삼청공원으로 이르는 초입에 위치한 한벽원은 서울 한복판(종로구 팔판동 35)이건만 인적없는 산간에 묻힌 선비의 서숙인양 적요속에 묵향이 감도는 분위기다. 눈부시게 흰 화강암건물과 「한벽원」이란 이름만으로도 주인의 기상과 풍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대나무·백매와 계수나무 사이사이로 진귀한 옛 석물·석등이 배치되고 뜰한가운데는 일중 김충현의 「한벽원용」,내부벽면은 12지신·광개토대왕 비문·석굴암 관음상에서 탁본해온 석고부조로 장식되어 미술관다운 품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바로 이곳이 월전의 모든 예술생애가 집약되고 또 앞으로 우리 한국전통미술의 올바른 맥을 보존·육성해나갈 본산이기도 하다. 아다시피 화단의 거봉인 월전은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의 삼절로 동양화 전영역에서 유창탁발의 화업을 이뤄낸 노대가다. 그의 작품은 공자가 그림을 두고 말한 「회사후소」,즉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는다는 후소정신과 인위와 조작이 없는 무위사싱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월전의 이런 선비기질은 그의 그림에서 보듯 한점의 허세나 과장이 없이 잔잔한 운율이 유운문처럼 번지고 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가 은은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가 즐겨 그리는 학과 백로,화훼와 산수는 모든 기교가 배제된 간결 산뜻한 선묘와 담백한 설채,특히 그만의 묵의 묘취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막힌 환희를 안겨준다. ○담백한 선조 일품 월광을 배경으로한 백매가지에는 방금 물오른 새싹을 틔울듯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고 흰 눈속을 헤쳐서 꺼낸듯한 꽃의 화관은 보석처럼 눈부신 진주빛을 발한다. 마치 신운이 움직이는듯한 절제의 필치로써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장인기질보다는 원로의 정신미를 정밀하게 누리고 펼치는 시기라 할수있다. 1912년 임자생.80의 나이에도 그에게는 「노인」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바르고 건강한 모습에 단정하고 깎듯한 움직임,사물을 꿰뚫는듯한 예지의 눈길은 『글씨나 그림등 예술은 가장 천진한것이 극치』라는 완당의 말대로 그 청정의 눈빛을 지니고 있다.그에게선 어떤 흐트러짐이나 허술한 곳도,만모의 기색도 찾아볼수 없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선 다감하고 정이 깊고 상대방을 포용한다.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추호의 용서나 양해가 없다.늘 옳은자의 편을 들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한다. 주말에는 골프,커피와 담배,두주불사의 애주가로 몇년전까지만해도 양주 한병을 비운 술실력이나 요즘은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순한 청주나 곡주를 즐긴다. 집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그러나 작업실이 있는 한벽원까지 아침 9시반에 출근해서 하오2시부터 작업대 앞에 선채로 3시간에서 4시간씩 작업에 몰두한다. 내년 가을 호암아트홀이 기획한 그의 화력 60년을 총정리하는 신작준비 때문이다.이는88년 일본 세이브미술관 초대 「한국·국화의 거장 장우성전」이후 5년만의 대작전시회여서 그는 모든 정열을 이곳에 쏟고있다. 그의 화적을 새삼 더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월전은 18세되던 해인 30년 스승인 이당의 낙청헌에 입문,초기에서 10여년은 사실적 시각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형태의 극세극채색의 치밀한 묘사에 밀착해왔다.그러다가 해방후 서울대미대에 재직하면서 스승의 회화권에서 벗어나 전통동양화인 수묵화에 정진하여 추상이 곁들여진 힘차고 분방한 용필로 활달한 화면을 추구해나갔다. ○18세때 이당에 사사 그는 경기도 여주의 전통적 유교가문에서 2남5녀중 다섯째,부친(장수영씨)의 나이 30세에 얻은 만득자여서 부모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월전」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한 아들을 위해 부친이 손수 지어내린 아호다. 할아버지에게 「동몽선습」「소학」「명심보감」과 「사서삼경」을 배우고 붓글씨를 공부하면서 그림을 시작,그림공부를 위해 상경할 무렵에는 평소 위당 정인보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부친의 배려로 위당댁에 드나들면서 조선역사를 익혔다. 이당문하에서 운보 김기창,현초 이유태와 나란히 수학한지 2년만인 32년 제11회 선전에서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를 그린 「해병소견」으로 화단에 등단,41년에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그리고 연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두차례 수상하고 44년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그린 「푸른 전복」은 열정적으로 부채춤을 추고난후 호흡을 가다듬는 무녀의 휴식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우리미술사를 말할때마다 거론되어지는 대표작중의 하나다. 범접하기 힘든 깨끗한 눈매며 전립의 영모,패영의 구슬은 이슬이 방울진듯,푸르른 구군복과 치마단까지 흘러내린 붉은 끈의 선과 색의 대비,공간을 여백으로 설정한 것등은 훗날 월전 문인화와도 일맥 상통한다. 싸늘한 겨울 날씨와 화면을 가득 채운 만월,한천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떼를 문인화의 무기교와 자연스럽게 절제된 묵선으로 관조한 조형어법은 「종교와도 같은 높은 이념이 함축」되어있다는 평이 뒤따르고 있다. 한치의 흔들림없이 지금도 여전히 화단의 정상을 지키는 월전으로서도 80성상을 돌아보면 흑색반점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44년 최고상을 받았을때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하여 「답사」한것을 스승과 의논없이 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이당의 미움을 받아 소원했던 일,서울대 미대교수시절 「교수자리」를 탐내는 후배의 이간으로 미대 창설동지이며 당시 학장이던 장발씨와의 긴 오해등,어지러운 세속에 휘말려야했던 곤혹과 환멸이 잊을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있다.물론 시간이 흘러 밝은 대낮처럼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곤 하지만 꼿꼿하게 앞만보고 살아온 그에겐 자존심에 먹칠당한 슬픈 추억의 장면장면들이다. 문인사대부의 학문과 역량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그의 그림속에 실린 아름다운 시구외에도 그는 「화맥인맥」등 신문에 자주 글을 발표한 미문으로도 유명하다. ○문장력도 뛰어나 그 한예로 83년봄 한 미술계간지가 다룬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란 특집기사로 인한 「친일 화가파동」때 그는 대단한 문장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해 4월21일자 모 두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발표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이 성명서는 잡지에 게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일제36년과 해방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며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의 식민지 잔재인양 매도하고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기사내용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설」임을 전제,「작고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과거 민족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채 「민족예술창조라는 허구에찬 궤변」으로 사회여론을 오도,「이 방약무인한 오만을 나무라기전에 그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으며 소위미술평론가의 자격은 어디에서 취득했고 누가 인정했던가 묻고싶다」는 실랄한 항변과 규탄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글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월전으로 이 사건은 화단의 경종이 되어 서로 자숙하고 침착하게 자기 성찰하는 기회로 마무리 되었다. 월전은 이처럼 깐깐하다.굳이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화단의 누」라는 차원에서 가차없이 솔선하고 나섰다.그의 작업실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하고 청결하여 난초의 홍자색은 싱그럽고 고고하기만 하다.호불호를 선명하게 가려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사불란하게 실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번 미술관도 88년 구상·계획하여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미대와 홍대미대의 제자·화우들을 주축으로 즉시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89년 미술관 착공,91년 3월개관 2주일전 부설 동양미술연구소 제1회 수강생 20명을 배출했다. 까다로운 성품과는 달리 각계각층과의 다양한 교분은 수화 김환기,영운 김용진,의재 허백련,소전 손재형과 친형제같은 우의를 다졌고 대한교육보험의 신용호회장과 황수영 유경채 이대원 김원용 특히 일중과의 우정은 난향과도 같다. 가족은 부인 유리정여사(73)와 1남3녀.장녀인 정란씨가 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그의 만년의 예술은 「붓가는대로 그린다」는 명경지수의 염과 자연에 돌아가 자유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구사하고 있다. 이제 월전화는 그의 생을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한 무르익은 화경에 접어들어 그 마지막 붓끝까지도 불후의 명작을 그리게 될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아산 현충사·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 영정,세종대왕 기념관 벽화 「집현전학사도」 낙성대봉안 강한찬장군·김경신장군·윤봉길의사·정포은선생·문익참선생·김종직선생·조식선생·정기용박사·유관순열사등 영정 제작.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1천호)」,고려대벽화 「군려도」크리스트상화(63빌딩)제작. □연보 ▲1912년6월 경기도 이주출생 ▲30년 이당 김은호 「낙청헌」입문 ▲32’ 제11회 선전 「해병소견」입선이후 계속 출품 ▲33’ 육교 한어학원 졸업 ▲41∼44’ 「푸른 전복」등 연4회 특선·추천작가 ▲46∼61’ 서울대 미대 교수 ▲49’ 로마 국제미전 「성모와 순교복자」3부작 출품(바티칸시 수장) ▲50’ 제1회 개인전(동화백화점 미술관) ▲63’ 도미,미국무성 화랑 개인전 ▲64’ 워싱턴 스퀘어 화랑주최 국제미술제 한국대표초대출품 ▲65’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 설립 ▲71’ 홍대 미대 교수 ▲75’ 유럽7개국 미술계시찰 ▲80’ 현대화랑서 도불 기념전 ▲〃 프랑스 정부초대 파리세루뉘시 미술관 개인전 「홍매」「석」등 프랑스문화성소장 ▲81’ 월전화집(지식산업사간) ▲82’ 독일 쾰른 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85’ 국립 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88’ 도쿄 아트포럼에서 「한국 국화의 거장 장우성전」개최 ▲〃 동산방화랑서 개인전 ▲92’ 오늘의 작가 11인전(진화랑)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역임 현 예술원회원 서울특별시 문화상·예술원상·5·16민주상 수상.
  • 사조직운용 「빅3」 수훈갑/「YS대통령만들기」 숨은 공로자들

    ◎민주산악회·「나사본」지휘 유세수행 지원/참모진/손여사 잠행유세·현철씨 여론조사 한몫/가족들 민자당의 김영삼총재가 각고끝에 대통령이 되기까지 많은 사람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지근거리에서 조언을 아끼지않은 이른바 「가신」그룹과 가족들의 혁혁한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대통령 당선이후」를 생각지 않고 오로지 「YS대통령 만들기」에 전력 투구했다. 김대통령당선자 가족은 부친 김홍조옹(82)을 비롯,부인 손명순여사(64)와 모두 출가한 장녀 혜영(39),차녀 혜경(37),장남 은철(36),차남 현철(33),3녀 혜숙(31)씨등 3남2녀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열심히 뛰었지만 그중에서도 손여사와 차남 현철씨,그리고 김옹의 역할이 한층 돋보인다는게 중론이다. 손여사는 이번 선거에서도 외부에 드러내지않고 김대통령당선자의 발길이 닿지않는 곳을 찾아다니는 「잠행유세」로 조용한 내조의 한몫을 톡톡히 했다. 손여사가 수도권의 중요성을 감안,선거종반전에 딸·며느리와 함께 이지역의 시장 곳곳을 방문,한 표를 호소한 것은 단적인 예에 속한다. 손여사는 밖에 나서기 보다는 안에서 조용히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현모양처형으로 유권자에게 지지를 부탁할때도 『잘 부탁합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게 고작이라는 것이다. 또 현철씨는 3당 통합이후 아버지의 청와대 입성에 발벗고 나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그는 당공식 기구와는 별도로 중앙사회문제연구소를 직할운영하며 김대통령당선자와 관련된 각종 여론조사를 취합,보고하는등 1급 참모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해냈다. 부친 김옹은 노령인 관계로 왕성한 활동은 하지 못하나 거주지인 마산에서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참모들의 설명이다.김옹은 특히 김대통령당선자가 창원·진주·마산등 경남지역유세를 할때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어김없이 참석해 김대통령당선자에게 「무언의 격려」를 보내곤 했다. 그밖의 자녀들도 지난 10월 체류중이던 미국에서 귀국,연고별로 지역을 분담해 최일선에서 맹활약했다.특히 장녀 혜영씨부부는 이번에 아예 영주귀국 해버렸다.그러나 이같은 가족들의 물밑활동도 야당시절부터 그림자처럼 김대통령당선자를 따라다닌 가신그룹의 공로에는 못미친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몇차례의 투옥을 감수하는등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가신그룹의 멤버로는 최형우·서석재·김덕용의원,이원종부대변인,홍인길총무보좌역,장학로민원보좌역,김기수보좌관등을 꼽을수 있다. YS대통령만들기 원내 「빅3」으로 통하는 최·서·김의원은 합당이후 경선 때까지 김대통령당선자에게 가해지는 온갖 역경을 물리쳐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며 이번 선거에서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각자 사조직을 총괄지휘하며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최의원은 「좌동영 우형우」로 불릴만큼 야당시절부터 고금동영의원과 함께 김대통령당선자의 오른팔역할을 담당한 측근중의 측근이다. 최의원은 특히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행동력이 트레이드마크로 이번에도 최대사조직인 민주산악회를 이끌며 김대통령당선자의 지지열기확산및 유세장분위기 고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최의원은 이같은 그의 비중때문에 아직도 상도동캠프2인자로 불린다.김대통령당선자의 지역구(부산서구)조직부장출신인 서의원은 「조직의 귀재」라는 별칭에 걸맞게 사조직및 자금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서의원은 이번선거전 민자당에 입당,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라는 또 다른 사조직을 진두지휘했으며 김대통령당선자의 취약지대인 불교계공략을 도맡았다.또 김의원은 오랜기간 김대통령당선자의 비서실장을 지내 심중읽기에 출중하다는 평이며 때문에 경선전까지 중요한 고빗길마다 고언을 서슴지않는등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핵심브레인이다.특히 김의원은 김대통령당선자가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사안을 스스로 잘 알아서 처리해 김대통령당선자의 행보를 한결 가볍게 한 공로가 크다.김대통령당선자와 인척관계인 홍보좌역은 자금관리를 맡아 역시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다. 또 이부대변인은 대언론홍보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김대통령당선자의 실질적인 「입」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장보좌역은 우직한 「뚝심」이 강점으로 김대통령당선자가 소위 어려웠던 시기인 지난83년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을때 혼자 집안의 크고작은 잡일을 다해낸 것은 물론 홍보좌역과 함께 외부민주인사들과의 연락책을 담당한바 있다.김보좌관은 10년이상 김대통령당선자의 수행비서를 하며 수족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들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경선이후 당의 공식 가신그룹에 합류한 오인환정치특보·이경재공보특보·박재윤경제특보 등도 훌륭한 참모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 박종웅총재보좌역,박영환대변인실 부국장,이성헌부국장 등 지난87년 대선부터 김대통령당선자를 「모신」소장그룹도 대세론확산의 숨은 공로자로 꼽을수 있다.
  • 안기부서 밝힌 베일속 북 공작원 정체

    ◎여간첩 이선실은 제주출신 이화선/94살 생모 제주에 거주/50년 월북뒤 66년 남파/남동생은 조총련 핵심요원 활동 지금까지 정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북한 최고위남파간첩 이선실(76·북한내서열22위)은 본명이 「이화선」으로 제주도 출신이며 생모 김경양씨(94),남동생부부 조카등 가족다수가 제주도등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1일 간첩 이는 1916년1월 제주도 남단 가파도(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552)에서 아버지 이재춘씨(일본 오사카에서 77년8월 사망)와 현재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에서 살고있는 어머니 김씨의 6남1녀중 장녀로 출생,고향에서 신유의숙(현 가파국교)을 4학년까지 다니다 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고 밝혔다.안기부는 이가 국내활동 당시 제주도 출신자로 행세했던 점에 착안,제주 출신 월북자를 대상으로 집중 내사한 결과 이가 가명으로 사용했던 「이선화」라는 이름의 앞뒤가 바뀐 「이화선」이라는 인물을 찾아내 행적을 추적한 끝에 동일인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이는 37년 부산에서 어부생활을 하던 국교동창 김태종씨(76)와 결혼,부산과 대마도를 오가며 생활하다 47년 남편 김씨가 대마도로 밀항한 뒤 혼자 떨어져 친구 집에 살면서 30대초반의 여자로부터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고 남로당에 입당,여맹원으로 활동했다고 안기부는 말했다. 이는 이후 은신처등을 제공하면서 접촉해오던 남파간첩이 경찰에 붙잡혀 수배를 받게 되자 50년4월 월북,노동당 경공업위원회과장,황해도 여맹간부등을 거친 뒤 63년 공작원 양성소인 「695정치대학」에서 전문적인 간첩교육을 받고 66년과 73년 두차례에 걸쳐 남파돼 대남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이가 합법신분을 얻기 위해 60년 북송된 재일교포 신순녀씨(74·전북 완주출신)로 위장,74년 일본에서 신순녀로 외국인등록을 하고 조총련모국방문단 일원으로 78년6월과 12월 79년9월등 모두 3차례 입국해 전북 전주시의 신씨 언니를 만나 동생으로 속여 근거지를 마련했으며 80년3월 영주귀국형식으로 재입국해 90년10월 입북할 때까지 10여년간 공작활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이의 첫째동생 이치효(70)는 「이창권」이라는 가명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시에 거주하는 조총련 핵심요원으로 그의 둘째 딸과 사위가 간첩혐의로 구속된 황인오등에게 일본 연락거점을 제공했다고 안기부는 덧붙였다. 한편 안기부는 이의 남편 김씨는 71년 북송을 신청,47년 자녀가 없어 입적 시킨 양녀를 데리고 북한에 갔으나 이는 신분상 차이 등으로 양녀만 받아들이고 김씨는 외면했다고 말했다.
  • 대권주자 5당후보의 신상명세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이종찬 박찬종 (민자) (민주) (국민) (새한국) (신정) 생년 1927년 1925년 1915년 1936년 1939년 월일 12월20일 1월6일 11월25일 4월29일 4월19일 본적 경남 거제군 전남 신안 강원 통천군 서울 종로 경남 김해 장목면 외포 군 하의면 송전면 아산 구 통인동 군 주촌면 리 1371 후광리 리 210 128(중 선지리 1 국 상해태 93 셍) 현주소 서울 동작구 서울 마포 서울 종로구 서울 종로 서울 서초 상도동 7의 구 동교동 청운동 55 구 신교동 구 방배동 6 178의 의 13 6의 22 12의 2 1 체격 168.5㎝ 171㎝ 175㎝ 168㎝ 172㎝ 64㎏ 75㎏ 77㎏ 68㎏ 66㎏ 혈액형 AB형 A형 O형 O형 B형 학력 장목소학교· 목포북국교 송전소학교 창신국교· 토성국교· 통영중·경남 ·목포공립 경기중고교 경남중·경 중고·서울대 상업학교· ·육사16 기고·서울 문리대 철학 경희대대학 기·서울대 대 경영대학 과 원·러시아 행정대학원 원 외교대학원 병역 학도의용대 해상방위대 · 육군소령예 해군해병대 편 대위 부모 부 김홍조 부 김운식 부 정봉식 부 이규학 부 박석동 (82) (작고) (작고) (작고) (작고) 모 박부연 모 장수금 모 한성실 모 조이진 모 정현수 (작고) (작고) (작고) (95) (78) 배우자 손명순 이희호 변중석 윤장순 정기호 (63) (69) (71) (55) (53) 자녀 장녀 혜영 장남 홍일 장남 몽필 장남 철우 장녀 은혜 (40) (44) (사망) (31) (28) 차녀 혜경 차남 홍업 차남 몽구 장녀 지원 차녀 주혜 (38) (42) (54) (29) (26) 장남 은철 삼남 홍걸 삼남 몽근 차녀 수진 장남 원곤 (36) (28) (50) (25) (24) 차남 현철 장녀 경희 (34) (48) 삼녀 혜숙 사남 몽우 (31) (사망) 오남 몽헌(44) 육남 몽준 (41) 칠남 몽윤 (37) 팔남 몽일 (33) 당심벌 곰돌이 토끼와 호랑이 말 종 거북이 승용차 뉴그랜저 포텐샤 쏘나타 임페리얼 프린스 취미 서예 꽃가꾸기· 독서 신문스크랩 독서 독서·국 악감상 운동 조깅·등 맨손체조 수영·골프 등산 태권도 초 산·수영 등 모두다 단 담배 72년부터 83년부터 금연 약간 80년부터 금연 금연 금연 주량 포도주 1 맥주 1병 종류불문 소주 1병 소주 1병 ∼2잔 약간씩 기호 칼국수·생 설렁탕·비 된장찌개 누룽지 설렁탕·칼 음식 선회 빔밥 국수 주요 ·9선의원 ·6선의원 ·전국경제 ·4선의원 ·5선의원 경력 제1야당원 ·민중당· 인연합회장 ·주영대사 ·한국공인 내총무5선 민주당대변·대한체육 관참사관 회계사회 ·민족협공 인 회장 ·주청기조 장 동의장 ·신민당대 ·현대그룹 실장 ·사법·행 ·신민당· 변인 명예회장 ·민정당총 정고시,공 통일민주당 ·평민당총 무·총장 인회계사합 총재 재 ·정무1장 격 ·민자당대 ·신민당총 관 표·총재 재 ·13대대 ·민주당대 통령후보 표 ·7,13 데 대통령 후보 저서 ·40대기 ·행동하는 ·시련은 ·개혁과 ·부끄러운 수론 양심으로 있어도 실 온건주의 이야기 ·나와 내 ·세계경제 패는 없다 ·민주여, ·광주에서 조국의 진 8강으로 자유주의여 양키까지 실 가는 길 ·오늘을 ·색시얻어 ·민주화 ·민족의 살며,내일 줄께 서울가 국의 길 새벽을 바 을 생각하 지마 라보며 등 며 대표적 다시뛰는 이번에는 경제대통령 새시대 새 세대교체 구호한국인 바꿔보자 정치 새 앞장서는 인물 김영삼 상징색 군청색 연두색 녹색 · 빨간색 종교 기독교 천주교 무 기독교 천주교 (장로) 존경하 는인물 김구 김구 부모님 김구 김구 간디 벤구리온 간디 링컨 좌우명 대도무문 행동하는 근면 일신우일 진실 양심 검소 신 친애 애창곡 선구자 이정표 가는 세월 선구자 해변의 여 목포의 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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