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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갑 한전 사장 재산 122억원… 文정부 ‘9위’

    김종갑 한전 사장 재산 122억원… 文정부 ‘9위’

    SK하이닉스와 한국지멘스 대표를 지낸 김종갑(67)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122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26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공직자 수시 재산등록사항에 따르면 지난 4월 취임한 김 사장은 본인과 배우자 재산을 합쳐 121억 9909만원을 신고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재산 공개 대상자 가운데 재산 상위 9위에 해당한다. 김 사장은 서울 삼성동과 송파동 소재 아파트 등 본인과 배우자 명의 건물 25억 4200만원과 예금 52억 6527만원, 셀트리온(700주)과 SK하이닉스(2000주) 주식 등 유가증권 25억 6745만원을 신고했다. 배우자 명의로 경기 파주시 월롱면 일대 토지(24건) 23억 1219만원도 보유하고 있었다. 장남과 차남, 성인이 된 손자 2명의 재산은 독립 생계를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행정고시 17회(1975년) 출신인 김 사장은 상공부 통상협력담당관과 특허청장, 산업자원부 제1차관을 지냈다. 공직을 떠난 뒤에는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와 한국지멘스 대표를 역임했다. 한편 이번 수시 재산공개에는 신규 17명과 승진 9명, 퇴직 60명 등 모두 96명의 재산내역이 공개됐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단 음식’ 즐기는 세계 최고령 日 할아버지, 113세 생일 맞았다

    ‘단 음식’ 즐기는 세계 최고령 日 할아버지, 113세 생일 맞았다

    영국 기네스 협회로부터 지난 4월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인정된 일본의 노나카 마사조(野中正造) 할아버지가 25일 113세 생일을 맞이했다. 26일 일본 홋카이도신문 등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홋카이도 아쇼로에 사는 노나카 할아버지는 25일 가족과 함께 113세 생일을 조촐하게 보냈다. 노나카 할아버지는 고령 탓에 현재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손녀 유코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아침 6~7시 기상해서 방에서 신문을 읽고 식사를 하는 등 항상 변치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노나카 할아버지는 평소 단 음식을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은 생일이므로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할아버지는 평소 TV로 스모와 프로 야구를 보는 것이 취미이며 매일 세끼를 거르지 않고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나카 할아버지는 1905년 아쇼로에서 태어나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일본 료칸 ‘노나카 온천’의 2대 경영자였으며, 현재는 장남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노리코(78), 손녀 3명과 함께 살고 있다. 이에 대해 며느리 노리코는 “자유롭게 지내고 참지 않는 것이 장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기존 기록은 스페인에 사는 프란시스코 누녜스 올리베라 할아버지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 비결로 하루 1잔 포도주를 꼽았던 올리베이라 할아버지는 지난 1월 30일 11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기네스 세계기록, 가족 제공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파주 DMZ 곳곳서 자연의 보물 또 ‘우수수’

    파주 DMZ 곳곳서 자연의 보물 또 ‘우수수’

    ‘DMZ 일원’의 끈질긴 생명력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급격한 도시화에도 불구하도 경기 파주 평화누리길 곳곳에서 각종 멸종위기 생물들이 대거 발견됐다. 경기도는 지난 3월부터 파주출판도시에서 장남교 까지 이어지는 파주평화누리길 4개 코스 67km에서 ‘2018 상반기 생태자원 조사활동’을 벌인 결과 희귀식물 22종과 특산식물 13종을 발견했다고 25일 밝혔다. 여기에는 국제자연보호연맹이 작성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적색목록에 포함된 10종도 포함됐다. 발견된 총 식물은 100과 327속 575종이다. 희귀식물에는 할매밀망 쥐방울덩굴 등이 있고, 특산식물 중에는 벌개미취 외대으아리 등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특히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일원에서 극상림인 서어나무 군락지와 멸종위기종 2급인 매화마름이 처음 발견됐다. 서어나무는 숲의 천이(遷移) 과정 중 극상의 단계에서 주로 관찰된다는 점에서 아직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새들의 천국 DMZ’라는 명성답게 다양한 조류도 발견됐다. 원앙 호사도오 재두루미 황조롱이 등 9종의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14목 34과 56속 79종 9781개체가 이번 조사에서 파악됐다. 멸종위기 1급인 흰꼬리수리 저어새, 멸종위기 2급인 큰기러기 재두루미 독수리 노랑부리저어새 붉은배새배 등의 생태도 포착됐다. 포유류는 평화누리길 곳곳에서 고라니 멧돼지는 물론, 멸종위기 2급인 삵의 서식지 등이 확인됐다. 최상위 포식자인 삵이 발견된 것은 평화누리길 생태계가 건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조사활동은 경기도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DMZ 일원 자연환경 생태조사 및 생태도감 제작 사업’의 일환이다. 도는 앞서 지난해 연천을 대상으로 조사 완료했다. 올해 하반기 파주 평화누리길 일원을 대상으로 생태자원 조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내년에는 김포·고양 일원에서 조사를 실시한 뒤 2020년까지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DMZ생태환경의 조화로운 발전과 평화적 활용방안 모색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임순택 DMZ정책담당관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조사활동에서도 평화누리길 생태자원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DMZ 및 평화누리길 일원의 생태적 가치를 발굴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광장’ 속으로 떠난 한국문학의 거장… “오직 글로 말한 예술가”

    ‘광장’ 속으로 떠난 한국문학의 거장… “오직 글로 말한 예술가”

    분단·현대사에 대해 깊이 고뇌해 온 삶 ‘회색인’부터 ‘화두’까지 작품에 오롯이 소설 ‘광장’ 205쇄 찍은 기념비적 작품남북한 체제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 ‘광장’으로 전후 한국 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연 소설가 최인훈이 별세했다. 네 달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작가는 23일 오전 10시 46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84세. 최 작가는 1934년(공식 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의 두만강변 국경 도시 회령에서 태어났다. 목재 상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해방과 더불어 원산으로 이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가족과 함께 원산항에서 해군 상륙함을 타고 월남했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6학기를 마쳤지만 전후 분단 현실에서 공부하는 데 갈등을 느껴 1956년 중퇴했다. 생전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고 말했던 작가는 지난해 서울대 법학과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최 작가는 1959년 군 복무 중 쓴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월간 ‘자유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 월간 ‘새벽’에 문제적인 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남한과 북한의 정치 현실에 모두 환멸을 느낀 주인공 이명준의 역정을 다룬 이 작품은 한국 현대문학사 최고의 고전으로 꼽힌다. 작품이 발표된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한 분단 현실 앞에서 작가는 낡지 않은 문제의식을 던진다. 2008년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 준 계기였기 때문에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최인훈 전집’을 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이광호 대표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께서 최인훈 작가를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하셨는데, 전후 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면서 “한국이 처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지닌 의미를 보편적이고 철학적이고 세계사적인 문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하게 해 준 작가”라고 말했다. 고인은 그간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파격적 서사 실험을 선보인 ‘서유기’, 20세기인의 운명을 조망한 ‘화두’, 실험적 패러디 기법으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남겼다. 동인문학상, 이산문학상, 박경리문학상, 서울시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등을 받았다. 이날 최 작가의 별세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다. 수많은 동료, 후배 문인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작가로서 영향력이 컸지만, 문학권력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다”며 “오직 글만 쓰고 문학으로만 말한 예술가”라고 말했다. 공지영 작가는 트위터에 “책갈피를 넘기며 생각들이 떡갈나무 이파리들처럼 펄럭이게 했던 선배님 고이 잠드소서. 남은 후배들이 통일의 문학을 할 수 있게 빌어주소서”라고 애도 메시지를 올렸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씨, 딸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이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진다. (02)2072-2091.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대법관과 민변 역할 다르다” 선 그은 김선수

    “대법관과 민변 역할 다르다” 선 그은 김선수

    재조(판검사) 경험이 없는 재야 출신으로 처음 대법관 후보에 오른 김선수(57·사법연수원 17기) 변호사가 2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이 뿌리를 두고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정치·이념 편향 논란에 선을 그으려는 의지로 풀이된다. 김 후보자는 이날 “대법관으로 사는 삶은 민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데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라며 “이런 배경에서 대법관 제청 직후 민변을 탈회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 민주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민변의 회원이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대법관의 역할과 민변 회원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민변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더라도 대법관은 현행 국보법을 전제로 판결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자유한국당은 민변 창립 회원이자 회장까지 역임한 그가 위헌 정당 해산심판 사건에서 통합진보당 측 변호인 단장으로 활동한 경력 등을 거론했다. 김도읍 의원은 “국론분열 사건마다 재판에 관여하거나 성명을 내면서 정치적 편향성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공격했다. 그러나 김 후보자는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아 왔다.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당에 후원금을 낸 적도 없다”며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사안들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 후보자는 특히 “변호사로서 인권단체 활동을 하며 가졌던 관점과 견해는 대법관 직무를 수행하면서 일정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하는 사회,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김 후보자가 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미리 밝힌 서울 서초동 아파트 다운계약서 작성이나 대치동 전세 이사 등을 놓고 도덕성을 꼬집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 후보자는 “장남이 고등학교 진학 때였는데 서초동에선 남녀공학으로 갈 가능성이 컸다”며 “남녀공학은 내신에서 남학생들이 못 따라가기 때문에 (남자 고교에 갈 가능성이 높은) 대치동 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 후보자를 사법농단 사태로 땅에 떨어진 사법부 신뢰를 회복시킬 적임자로 치켜세웠다. 금태섭 민주당 의원은 “법원이 심각한 위기”라며 “이럴 때일수록 계속 판사로 지내오신 분보다 법원 바깥에서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가진 분이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풀어보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돌연 뛰어든 日무역…아버지의 모험이 한국 가는 운명의 시작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돌연 뛰어든 日무역…아버지의 모험이 한국 가는 운명의 시작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6살이던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이 돌연 극동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세 아들에게도 일을 맡기는데, 이는 나중에 베델이 한국을 찾아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토머스 행콕은 15년 넘게 브리스톨의 맥주회사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다가 1886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본 무역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샐러리맨이 불혹(不惑)의 나이에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동업자 퍼시 알프레드 니콜(1848~1899)의 지원이 컸다. 19세기까지 ‘대영제국’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글로벌 무역 패권을 장악한 중심 국가였지만 상대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한국과 일본을 지금도 ‘극동’(Far East)이라고 부르듯 당시 영국인들에게 일본은 ‘세상의 끝’이었다. 당시 니콜은 이미 일본에서 골동품 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모은 때였다. 그는 영국과 거리가 멀어 경쟁자가 많지 않은 일본과의 무역을 ‘블루오션’(신성장 사업)으로 보고 사업을 키우고자 토머스 행콕에게 동업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토머스 행콕은 니콜과 함께 일본으로 가 효고현 고베에 ‘니콜 앤드 컴퍼니’라는 회사를 세워 일을 시작했다. 당시 고베는 일본이 외국인에게 사업을 허용한 거류 지역이었다. 2년간 일본에서 업무를 익힌 토머스 행콕은 1888년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 중심가에 ‘베델 앤드 니콜’을 세웠다. 니콜이 고베에서 ‘니콜 앤드 컴퍼니’를 통해 일본산 도자기 등을 보내면 토머스 행콕은 런던에서 ‘베델 앤드 니콜’을 통해 이를 되팔았다.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이들의 첫 번째 회사가 ‘니콜 앤드 베델’이 아닌 ‘니콜 앤드 컴퍼니’였다는 점이다. 회사 이름에 동업자인 토머스 행콕이 빠졌다는 것은 사업 초기 그의 기여도가 크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마도 니콜이 이 회사 설립 자금 대부분을 대고 토머스 행콕은 시쳇말로 ‘바지사장’ 역을 맡은 것 같다.그렇다면 ‘전주’(錢主)인 니콜은 왜 ‘사업 문외한’인 토머스 행콕과 손을 잡았을까. 두 사람의 동업은 추후 베델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신문은 베델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동서지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니콜의 후손을 통해 토머스 행콕의 아내 마사 제인 홀름(1848~?)과 니콜의 아내 세라 홀름(1953~1898)이 자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간 ‘P.A. 니콜’로만 알려졌던 그의 정확한 이름도 찾아냈다. 니콜은 동서인 토머스 행콕이 회계와 영업 일을 해 사업의 기본을 갖췄고 가족이어서 믿고 돈을 맡길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샀던 것 같다. 1909년 주한 영국총영사 아서 하이드 레이는 조선에서의 베델의 경력을 본국에 소개하기 위한 보고서에 니콜을 베델의 아저씨(uncle)라고 썼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표현을 후견인이나 보호자 정도로 생각했지만, 서울신문 취재로 이모부를 뜻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주로 사무실에서만 일하던 증조 할아버지(토머스 행콕)가 왜 갑자기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접고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뛰어들었는지 후손들도 늘 궁금하게 여겼다”며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동업 관계가 그러하듯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불화가 생겼다. 결국 토머스 행콕은 런던에 ‘베델 앤드 니콜’을 설립한 지 3년 만인 1891년 이 회사 이름에서 ‘니콜’을 지우고 ‘베델 앤드 컴퍼니’로 개명했다. 니콜 역시 토머스 행콕과의 교류를 끊고 고베에서 혼자 ‘니콜 앤드 컴퍼니’를 운영했다. 동업이 끝난 것이다. 이후 토머스 행콕은 5년간 혼자 사업을 하다가 1896년 극동 무역을 하는 세 회사와 통합해 ‘프리스트·마리안스·베델·모스 앤드 컴퍼니’라는 긴 이름의 회사를 새로 차렸다. 두 번째 동업이었다. 대외적으로 하나의 회사지만 영업은 기존 네 곳 대표가 독립적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를 묶어 구매력을 높이고 운송·물류비도 줄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 네 개의 무역상이 한데 모인 이 회사 역시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각자 이해관계가 부딪혀 ‘팀워크’가 깨졌다. 결국 이 회사는 통합 3년 만인 1899년 총회를 열어 기존 이사진을 교체했는데, 토머스 행콕도 이때 손을 뗐다. 두 번째 동업도 막을 내렸다. 이 회사는 지금도 ‘프리스트·마리안스 앤드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남동부 항구도시 켄트에 터를 잡고 영업 중이다.베델은 아버지 토머스 행콕이 런던에 ‘베델 앤드 니콜’을 만든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와 이모부(니콜)가 함께 시작한 무역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모자란 일손을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 베델은 16살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때였다. 서양인들이 우리보다 독립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혼자서 일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고베에 있던 ‘니콜 앤드 컴퍼니’에 들어가 이모부에게 실무를 배웠다.토머스 행콕은 1896년 네 무역상을 통합한 회사를 차린 뒤로 줄곧 일본 지점을 맡아 일했다. 하지만 1899년 이들과의 동업이 깨지자 자신의 일본 사업을 도울 새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는 장남 베델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와서 무역 일을 배운 지 10년이 넘어 자금과 능력은 충분했다. 아버지의 동업 실패가 베델에게 창업 기회를 준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해 동생 허버트(1875~1939)와 런던에 무역회사 ‘베델 브러더스’를 세웠다. 이때 토머스 행콕이 50살, 베델이 27살이었다. ‘베델 브러더스’는 베델 형제 무역 사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베델과 허버트는 일본에서 활동했고 런던 사무소는 주로 막내동생 아서 퍼시(1877~1947)가 지켰다. 세 아들이 협력해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본 토머스 행콕은 이들을 믿고 일선에서 물러나 부유한 은퇴 생활을 즐겼다. 이후 ‘베델 브러더스’는 처음 문을 연 런던 쇼디치 폴 스트리트 87·89번지에서 100년 가까이 영업하다가 1991년 영국 중부 리즈로 이전했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최근 경영이 어려워져 폐업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베델)의 유산이 이렇게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고 전했다. 베델 회사가 있던 건물은 지어진 지 100년이 넘어 ‘리스티드 빌딩’(등록문화재)에 올라 있다. 바로 옆 사무실인 91번지에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영국인 피터 설링스는 “(베델 브러더스가 있던) 쇼디치 지역은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젊은 시절 극단을 운영했던 곳이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에 베델과 같은 숨은 영웅의 이야기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감탄했다. 런던·브리스톨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백파의 자전적 육필수기 ‘삶과 운명’] “친자식처럼 키워준 송파스님께 수경학·지리학 배워”

    [백파의 자전적 육필수기 ‘삶과 운명’] “친자식처럼 키워준 송파스님께 수경학·지리학 배워”

    인생이란 삶의 집합체란 말이 있다. 삶이란 인생이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만나면 사람들은 이를 운명이라 부른다. 4차원적 인간이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삶이다. 그런 인생들의 삶과 운명이라는 희로애락과 함께하며 흥망성쇠를 이어온 사람이 있다. 동양 수경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백파 윤대현(84)이다. 그는 ‘백파 카운셀러 상담원’을 서울 종로와 충북 청주에 각각 두고 이를 오가며 ‘삶과 운명’을 나누고 있다. 백파의 자전적 육필수기 ‘삶과 운명’은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구술을 받아 정리했다. 그의 자전적 육필수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제가 살아온 80년 일생을 돌이켜 보고 회향(廻向)하는 마음으로 보탬도 뺌도 없이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버지 윤만갑과 어머니 조재현의 장남으로 1941년 12월 24일에 옛날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 18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주위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태어난 8·15 해방 직전 당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시동원체제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일제의 약탈과 수탈로 모든 국민이 모두가 먹고사는 것조차 어렵던 와중에 전염병을 포함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여파였는지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뒤를 잇듯 9일 만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그렇게 부모님을 여읜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삼촌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삼촌 집에서 1년 정도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방 직전의 혼란한 시기에 불안정한 생활을 연연하던 삼촌과 숙모도 어린 저를 더 이상 거둘 수 없게 되자 먼 친척의 도움으로 동네 인근의 옥정사라는 사찰에 계시던 어느 비구니 스님에게 전해져 그분이 저를 한동안 키워주셨답니다. 하지만 그분도 오래지 않아 돌아가시고 세 살 나이의 저는 주위 분의 도움으로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큰스님이셨던 송파 스님께서 받아주고 키워주셨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의 어려운 시절에는 스님들이 고아 같은 아이들을 많이 데려다 키워주시곤 하셨나 봅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보니 성철 큰스님의 일화 중에도 세 살짜리 아이를 데려다가 1년 이상 키우고 함께 생활한 일화도 있고요. 송파 스님은 저를 친자식처럼 정성을 다해 키워주셨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 불편함 없이 보살펴준 것은 물론, 동자승 생활을 하는 저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수경학과 지리학에 몰두하도록 집중적으로 공부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송파 스님도 제 나이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별이었습니다. 당시 스님 연세 104세였습니다. 송파 큰스님이 돌아가신 후 해인사 경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스님들이 저를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했고, 저는 도저히 마음을 의지할 곳 없는 몸이 되어 살얼음판을 걷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해인사에 머물 입장이 아니라고 고민하던 차에 돌아가신 송파 큰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당시 부산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님과 부산의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저에게 힘들면 부산으로 오라고 하시며 주소를 메모하여 주셨습니다. 당시 자동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던 저는 막상 부산에 가려 하니 막막하기도 하고, 더구나 돈도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도 부산에 사는 신도가 해인사에 오기라도 하면 그분께 부산에 가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얼마간 망설이며 부산에 갈 방법을 궁리하였습니다. 하루하루 편치 못한 마음과 많은 생각으로 해인사 생활을 하던 중에 어떤 연유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어느 스님이 저의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소 그 스님은 저를 모질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는 해인사에 더는 머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용기가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새벽 불전에 놓여 있는 시줏돈을 가지고 도망을 치게 되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전에 부산 신도로부터 들어서 기억한 대로 일단 합천면 소재지로 가서 부산행 버스를 타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버스를 타본 경험이 없었기에 버스는 신발을 벗고 타는 줄 알았고, 실제로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버스를 타려 했습니다. 저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본 버스 차장이 웃으면서 신발을 신고 타라고 하여 겸연쩍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급하게 새벽에 절을 빠져나온 저는 부산행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몰라서 가져온 돈 모두를 버스 차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차장은 조금 모자란다고 하였으나 고맙게도 부산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여 난생처음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스는 한국전쟁 때 사용하던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앞에 엔진이 튀어나온 차였는데, 제가 탄 부산행 버스는 아침 6시경에 출발하여 비포장도로로 부산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동자승으로 삭발 된 머리에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산에 첫발을 딛고 어떻게 할지 몰라 하던 중 지나가는 어느 분께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과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이 적어주신 주소 메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저를 보고 너무나 순진하다고 하시며 그 두 분께 자기가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산 범일동 주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저를 데리고 다방 같은 곳으로 들어갔는데 제 기억에는 당시 젊은 아가씨들이 많았고, 그 아가씨들 중에는 까까중이 왔다고 놀리면서 찐빵도 사주고 설탕물도 타주곤 했습니다. 저를 그곳으로 데려간 분이 다방에 설치된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려 교환원에게 어떤 번호를 연결해 달라고 하고 상대방과 한동안 대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저에게 다가와 “이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라. 곧 너를 데리러 올 거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어떤 키 큰 사람이 들어와 저에게 따라 오라고 하여 그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가재처럼 생긴 이상한 물체가 있었고, 저를 불러내온 분이 문을 열면서 타라고 하여 생전 처음 보는 가재 같은 그 물체 속으로 들어갔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한 물체는 승용차였는데, 그것이 움직일 때 사람과 집과 건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님 댁이었고, 강 회장 부인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를 잘 챙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강석진 회장과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께서 부산에 집을 마련해 주셔서 빠르게 안정된 생활을 찾게 되었습니다. 송파 스님이 알려주신 수경학을 이제는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당시 부산에서 ‘총각도사’라는 소문이 자자해질 정도로 열심히 사람들의 운세를 보았습니다. 당시에 어느 정도로 유명했냐 하면, 저를 만나려면 적어도 3~4일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대단한 역술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당시에는 정해진 감정료가 없었고 본인들 성의대로 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앉는 책상 위에는 조그마한 대바구니가 놓여 있었는데 하루를 상담하면 그 바구니에 돈이 한 가득씩 되었고, 각목으로 만들어진 밀가루 포대에 돈이 한 가득씩 채워지곤 했습니다. 돈이 그냥 종잇조각처럼 생각되어 매일같이 종이 쓰레기인 양 부대에 담아놓고 지내곤 했습니다. 절에서만 생활했던 저는 돈의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그 돈을 주체할 곳이 없었던 겁니다. 당시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께서 부산 남포동 미화당백화점 앞에 있던 2층집을 소개해 내 이름 석 자의 집을 처음 소유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수경학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부산 생활은 저에게 ‘총각 점술가’ 평판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곳이었습니다. 정리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글 싣는 순서 ① 해인사와의 인연 ② 동양 수경학의 창시 ③ 한국 근대화의 산증인이 되다 ④ 오해와 억울함으로 굴곡진 세월, 그 불편한 진실 ⑤ 평화, 봉사 그리고 나눔의 길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英항구도시 브리스톨서 유년 보내며 전문대 수준의 교육 받아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英항구도시 브리스톨서 유년 보내며 전문대 수준의 교육 받아

    1살 많은 누나와 두 명의 남동생과 자라 생가는 단독주택 두 채 붙인 ‘땅콩주택’ 지금도 英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형태 베델 할아버지는 바지선 운항하던 선주 어려서부터 일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아 사립학교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서 공부 지역 상인조합 ‘기술인력 양성’ 위해 운영 1904년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삶을 정리한 최초의 기록인 신보 1909년 5월 7·8일자 ‘배설공(公)의 약전(略傳)’ 기사와 베델 연구 1인자로 불리는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의 자료, 수전 제인 블랙(62)과 토머스 오언 베델(59) 등 베델 후손들의 증언, 서울신문 취재 결과 등을 모아 연대기순으로 소개한다.베델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남부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1873년에 출간된 ‘1872년 브리스톨 인명록’에는 그의 출생지가 ‘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로 돼 있다. 우리 식으로 읽으면 ‘호필드 지역 에저턴 거리에 있는 에저턴 빌라’다. 호필드는 브리스톨 중심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150년 전 주소를 지금 영국 행정구역에 맞춰 분석해 보니 ‘에저턴 로드’는 현재 비숍스톤에 편입됐고, ‘에저턴 빌라’는 주소명에서 빠져 있다. 서울신문은 베델 후손들의 조언을 토대로 브리스톨시 아카이브(기록보관소)를 찾아가 150년 가까운 주소 변경 과정을 추적해 그가 태어난 곳이 현재 ‘비숍스톤 에저턴 거리 54번지’임을 확인했다. 지금 주소로는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이다.1860년대 지어진 베델의 생가는 단독주택 두 채를 붙여서 지은 ‘세미디태치트 하우스’로, 우리로 따지면 ‘땅콩주택’에 해당한다. 한 집은 2층으로 돼 있고 방 세 개에 거실 두 개 정도를 갖췄다. 지금도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형태인데, 경제적으로 중산층 가족이 산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만난 한 마을 주민은 “(베델 생가를 포함한) 에저턴 거리의 주택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60년대에 빠르게 늘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말했다. 베델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베델은 브리스톨 인근 소도시 클리브덴에서 바지선(단거리를 다니는 화물 운반선)을 운항하던 선주였다. 그는 아들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이 8살 때인 1857년 사망했다. 토머스 행콕은 21살이던 1870년 영국 성공회 전도사인 존 홀름의 딸 마사 제인 홀름(1848~?)과 결혼했는데, 당시 그는 맥주회사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토머스 행콕은 브리스톨에 살면서 네 차례 주소지를 옮겼지만 비숍스톤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다니던 회사가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등에는 ‘베델이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 교수는 “19세기 유럽 내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감안할 때 그의 할아버지가 바지선 선주였다거나 외할아버지가 기독교 전도사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도 “할아버지(베델)는 일본 고베의 기독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고,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행콕은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뒀다. 첫째가 장녀 미니(1871~?), 둘째가 장남 어니스트 토머스(베델), 셋째가 차남 허버트(1875~1939), 넷째가 삼남 아서 퍼시(1877~1947)였다. ‘배설공의 약전’은 베델에게 두 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다고 했고, 지금도 국내 자료 상당수에는 베델이 ‘3남 2녀 가운데 장남’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토머스 행콕의 유언장이나 베델 후손의 증언을 살펴볼 때 그에게 여자 형제는 미니 한 명 뿐이었다. 토머스 행콕이 1870년 결혼 당시 작성한 신고서에는 그의 직업이 ‘회계원’으로 기재돼 있다. 2년 뒤 베델이 태어났을 때 제출한 출생신고서에는 ‘맥주회사 서기’로, 셋째 허버트가 태어났을 때는 ‘상업 서기’로, 넷째 아서 퍼시 때는 다시 ‘회계원’으로 쓰여 있다. 그가 맥주회사에서 금전 관련 업무를 도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1881년 영국에서 실시된 인구 센서스와 베델이 학교에 들어간 1885년 9월 작성된 생활기록부에는 토머스 행콕의 직업이 ‘맥주회사 지방순회 영업사원’으로 바뀌어 있다. 이때는 사무실에서 회계 일만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주변 지역을 돌며 펍(영국식 맥줏집)을 관리했던 것 같다. 약전에는 베델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마지못해 사업에 나섰다고 돼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배델의 할아버지인 토머스는 선박 소유주로 일종의 자본가였다. 최소한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 교수의 설명이다. 서울신문이 찾아낸 베델 생가를 보더라도 그가 어린 나이에 장사에 뛰어들어야 할 만큼 가정 형편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은 “19세기 영국에서 (베델처럼) 사립학교 교육을 받거나 사업차 일본에 건너갈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면서 “할아버지(베델)는 일본에 가서도 곳곳을 누비며 여행을 즐겼다고 들었다.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라고 전했다.베델은 시내 중심부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1856년 ‘브리스톨 무역·광산학교’로 문을 열었다. 이름이 말해 주듯 실업학교였다. 하지만 1885년 브리스톨 지역 상인들의 길드(동업조합)였던 ‘벤처상업협회’가 이 학교를 인수해 시설과 교육 과정을 고치고 교명도 바꿨다. 약전에는 베델이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옮긴 뒤 거기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영국에 사는 동안 브리스톨을 떠나지 않았다. 벤처상업협회는 브리스톨 지역 상인들을 대표하는 이익단체로, 1551년 영국왕 에드워드 6세에게 특허를 받아 법인 조직이 됐다. 영국은 17세기부터 글로벌 무역과 상업을 거머쥐며 ‘대영제국’으로 번영했는데, 벤처상업협회도 나날이 커지는 국력에 편승해 장사일로 큰 자본을 모았다. 이 길드는 유럽 각지 명문 대학들을 돌며 우수 시설과 커리큘럼을 벤치마킹한 뒤 브리스톨 시청 맞은편에 새 건물을 지었다. 당시 베델이 살던 지역에서 유일한 학교였다. 1885년 9월 신학기부터 신청사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베델은 이때 입학했다. 이 학교는 현장 기술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지금의 전문대학 수준의 교육을 제공했다. 시 교육위원회가 작성한 학업 성취도 평가 자료를 보면 베델은 1885~1886년 학기 시험에서 수학 등 세 과목을 통과한 것으로 나온다. 이 학교는 베델이 졸업한 지 6년 뒤인 1894년 ‘머천트 벤처러스 공업대학’으로 또 한 번 명칭을 바꿨다. 이후 브리스톨대학과 서잉글랜드대학, 시티오브브리스톨 칼리지 등으로 나뉘어졌다. 이 가운데 브리스톨대학은 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 최고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베델이 다녔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 건물은 지금도 브리스톨시 청사 옆에 남아있다. 지금은 내부를 리모델링해 주거 시설과 오피스텔 용도로 쓰이고 있다. 글 사진 런던·브리스톨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사설] 한진家 부정편입 뒷북 결론, 교육부도 책임 크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1998년 인하대에 부정 편입했을 뿐 아니라 학사 학위 취득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는 지난달 인하대를 두 차례 현장 조사해 이런 사실을 확인한 뒤 조 사장의 편입과 졸업 취소를 재단에 요구했다고 어제 발표했다. 또 인하대가 청소·경비 용역을 한진그룹 계열사에 몰아주는 등 회계 부정이 적발돼 조양호 학교법인 이사장에 대한 임원 자격도 취소하기로 했다. 교육부는 인하대에 기관경고를 통보하고, 교비를 부당 집행한 조 이사장과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은 검찰에 수사 의뢰한다. 인하대는 “이번 징계와 수사 의뢰는 과도한 조치”라며 “법적 대응을 검토하는 등 적극 소명해 나갈 계획”이라고 반발했다. 교육부의 이번 인하대 조사가 한진그룹 일가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지만 가장 공정해야 할 대학 입학과 관련된 의혹을 철저히 파헤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조 사장의 부정 편입 의혹은 이미 20년 전에 교육부가 조사했던 사안이다. 당시 교육부는 부정 편입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다만 행정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보고, 총장을 포함한 관련자 9명에 대한 징계를 학교 측에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교육부가 뒤늦게 동일 사안에 대해 정반대 결론을 내놓으니 어리둥절하다. 20년 전에 모종의 뒷거래나 봐주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교육부는 당시엔 인하대 자료만을 조사해 한계가 있었고, 이번에는 현장 조사를 통해 부정 편입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실 검증을 자인한 꼴이다. 게다가 인하대가 교육부의 징계 요구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뒤늦게 확인됐다. 관리감독에 태만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오너 일가의 잇단 갑질·불법 행태가 공공연히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 부처의 묵인 또는 방조, 부실한 대응 탓도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토부는 대한항공 계열사인 진에어와 아시아나항공이 외국 국적자를 등기이사로 불법 등재한 사실을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토부와 항공사 간 유착 의혹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중대 범법행위를 눈감아준 데 대한 책임도 반드시 물어야 한다.
  • [문화마당] 여름 돌보기/김소연 시인

    [문화마당] 여름 돌보기/김소연 시인

    옥수수 한 상자가 배달돼 왔다. 시골에서 옥수수 농사를 하는 지인이 해마다 이맘때면 보내주는 선물이다. 상자를 열어 빼곡하게 누운 옥수수들을 꺼내어 다듬으면서 번번이 나는 ‘아, 여름이로구나’ 한다. 옥수수 껍질을 약간 남겨둔 채로 옥수수 한 상자를 한나절을 들여 모두 쪄낸 다음 두세 개씩 나누어 냉동고에 넣어 두고 그때그때 꺼내 데워 먹는다. 냉동고가 옥수수로 그득해지면 여름 한철을 잘 먹고 지낼 것 같은 포만감에 미리 뿌듯해진다. 칼국수집에 들어가 칼국수가 아닌 콩국수를 찾고, 콩물을 한 병 사들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잦아지는 게 내겐 본격적인 여름이다. 그런 날은 우뭇가사리 가루로 묵을 쒀서 오이를 채썰어 넣고 콩물을 부어 저녁으로 먹는다. 수박을 쪼개 접시에 담아 책상에 앉는다.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한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누군가에겐 복숭아로, 누군가에겐 자두나 참외로 다가올 각자의 여름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에겐 팥빙수로, 누군가에겐 소매 없는 셔츠와 반바지와 샌들로, 누군가에겐 물놀이로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며칠 전에는 술자리에 앉아 있다가 바깥에 나가 길가에 쪼그려 앉았다. 야외에 죽치고 앉아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기에 참 좋은 밤이었다. 조금 있으면 논이 많은 우리 동네엔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댈 것이다. 엄마에게 여름은 오이와 열무로부터 시작된다. 오이지를 담그고, 열무김치를 담근다. 비빔밥에서부터 냉국까지, 수많은 변주 속에서 오이지와 열무가 엄마의 여름 밥상을 책임진다. 아삭아삭한 소리가 입안에서 울려 퍼지면, 엄마의 여름은 무더움의 시간이 아니라 시원함의 시간인 것만 같아진다. 여름에는 살림을 더 잘 돌보아야 한다. 빨래를 더 자주하게 되고 빨래는 더 더디 마르고 이불도 자주 빨아야 한다. 음식은 쉬이 상하고 욕실이며 주방을 더 정갈하게 유지하기 위해 집안일에 할애하는 시간도 더 많아진다. 습기도 다스려야 하고 벌레도 다스려야 한다. ‘아 덥다’ 하면서 늘어져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 일요일엔 집에서 부산하게 여름을 돌보며 하루를 보내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가 생각나서 다시 보았다. 옥수수만큼이나 고레에다의 몇몇 영화가 여름을 여름답게 상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한여름에 장남을 잃었던 가족이 기일을 함께 지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죽은 장남을 더 찬란하게 기억하고 있는 부모와 주눅이 든 차남의 새 식구들의 만남은 어딘지 껄끄럽다. 기일엔 ‘요시오’라는 사람이 해마다 찾아온다. 죽은 장남이 물에 빠진 이 사람을 구하려다 죽게 됐기 때문이다. 생명의 은인의 기일에 찾아온 요시오가 돌아간 다음 차남은 어머니에게 이제 저 사람을 그만 오게 하자고 말한다. 우리 만나는 걸 괴로워하는 것 같다면서.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래서 부르는 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우리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일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받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계속 오게 할 거야.” 무심한 듯 혼잣말인 듯 내뱉는 어머니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잔인함으로써 무더운 여름의 속살이 드러나는 듯한 순간이다. 어머니는 그런 눈빛으로 가족들이 모이는 그날에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다. 감자 샐러드를 만들고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옥수수튀김을 만들었다.
  •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 편에서… 마포구민 하늘처럼 섬길 것”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 편에서… 마포구민 하늘처럼 섬길 것”

    유동균 신임 서울 마포구청장은 5일 “행정이란 돈 없고, 힘없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해 주는 것”이라면서 “따뜻한 가슴으로 어려운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오른팔이 되겠다는 각오로 구민을 하늘처럼 섬기는 구정을 펼치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당선 소감은. -선거는 구도 싸움인 만큼 이번 6·13 지방선거는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인기와 지지도에 힘입어 당선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정책 방향에 보조를 잘 맞추면서도 동시에 마포구민이 만족하는 구정을 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마포와의 인연은. -14세 때 마포로 이사 온 뒤 40년 넘게 마포에 살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구의원(재선), 시의원으로 봉사하며 지내 왔다. 그러는 동안 전임자인 박홍섭(3선) 전 구청장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그분과 같은 철학을 공유하며 일했다. 구민이 물질적으로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면이 풍부해지도록 교육과 문화에 힘 쏟아야 한다고 보고 중앙도서관 및 청소년교육센터 건립에 함께했다. 경의선 걷고 싶은 거리와 석유비축기지 문화공원 조성도 시의원 재직 당시 용도변경, 예산투입 등에서 힘을 썼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마포, 교육과 문화가 풍부한 마포, 지역경제가 발전하는 도시로 마포를 가꿔 나가겠다. →주요 정책 방향은. -우선 마포구가 저출산 극복 해결의 선봉에 서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돌봐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장 산후조리원에 들어갈 때부터 지원해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산후 조리비(50만원) 지원은 물론 구립 산후조리원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주차장 특별회계로 500억원 정도의 예산이 있는데 주차장을 건립할 때 주차장은 지하로 넣고 지상에는 산후조리원을 만드는 구상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 예산도 끌어오겠다. 이 외에도 지역 경제 발전과 함께 대두되는 젠트리피케이션(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 내몰림 현상)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고 있다. 남북 화해 중심도시로 마포구를 발전시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상암동 장례식장 민원 해결은. -현재 건립 계획 단계인 상암동 장례식장은 상암동과의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고양시와의 사이에는 큰 도로가 나 있어 실제 생활 영향은 상암동으로 미치게 돼 있다. 행정 관할이 경기 고양시여서 허가권은 고양시에 있는 게 문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마포구 주민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만큼 주민들과 호흡을 맞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상암동 롯데몰 개발 해법은. -상업시설이 많이 들어와야 지역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성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업시설이 이뤄지는 행위가 마포구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상암동 롯데몰에서 발생하는 수입에 대한 세금이 마포구로 귀속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마포 지역 일자리 창출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주차 위반 딱지를 두고 찬반 논란이 있는데 -주차 단속을 두고 항상 민원이 있다. 해도, 안 해도 문제다. 다만 과도한 단속보다는 계도가 중요하다. 요식 업계에서는 점심 시간만큼은 융통성 있게 대처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저녁 식사 시간인 오후 5시에서 8시까지는 퇴근 시간과도 겹치기 때문에 원활한 교통 흐름을 고려할 때 단속이 불가피하다. →새 구청장이 온 만큼 인사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데. -인사가 만사다. 인사를 빨리 해야 일도 손에 잡힐 것이다. 공무원들이 정책을 개발하고 구민의 요구를 행정에 접목해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본 전제 중 하나가 구청 인사다. 오는 20일 전후로 실시할 계획이다. →구청 직원들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신임 구청장이지만 구의원, 시의원 때부터 구청 직원들을 지켜봐 왔다. 이번 사무관 승진 대상자 인사를 앞두고서는 서기관급 간부들과 함께 심사도 해 봤는데 보는 눈은 결국 다 비슷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인사와 관련해 이뤄져야 할 제도 개선이 있다면. -우선 서울시와 구청 간, 그리고 구청과 구청 간 인사 교류가 너무 적다. 공무원은 전문가이지만 한 구청에서만 일하면 시야가 좁아질 수도 있고, 부부 공무원이 한 구청에서 일하면 남편이 부인 근무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도 발생한다. 바람직하지 않다. 구청 공무원에 대한 활발한 인사 교류가 이뤄지도록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제안하겠다. →계획이 있다면. -30대 당시 마포구의원으로 일하면서 구청장이 돼 더 큰 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오늘까지 달려왔다. 지금은 신임 구청장이지만 재선을 목표로 삼고 일하겠다. 최선을 다해 구민들을 섬기고 마포를 발전시킬 것이다. 행정이란 결국 ‘주민에게 아부하는 것’, ‘주민 마음에 들 때까지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뜻한 가슴으로 약자를 돌보고 구민을 편하게 만드는 행정을 펴겠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부모, 형제,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데 저는 정청래 전 국회의원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고, 그게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시는 분들의 성원에 항상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마포구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저는 물론이고 구청 직원들도 항상 국내외 정세는 물론 세상이 변하는 데 대해 배우는 자세로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 만족스러운 대민 봉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함께 열심히 하겠다. →요구가 많으면 직원들이 힘들지 않겠나.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동안 편하게 일했다는 것이다. 마포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 주길 바란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유동균 구청장은소년 노동자 출신… 구·시의원 지내며 구민과 소통 탁월 유동균 서울 마포구청장은 소년 노동자 출신의 ‘흙수저’ 인생이었다. 전북 고창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4세 때 가족들과 함께 마포구 성산동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등으로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등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대신 뒤늦게 20~30대에 걸쳐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어 방송통신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어려움이 닥쳐도 노력한다면 반드시 이겨 낼 수 있다는 소신으로 살아왔다.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1987년 27세 때 평화민주당에 가입해 당원 활동을 시작했다. 주민 속을 파고들며 마포구의회 제2대(최연소), 6대 구의원도 지냈다. 지역에서 바닥부터 다지고 올라오면서 대민 봉사의 기본은 소통이라는 소신을 갖게 됐고, 이에 따라 이번 임기 공약 1호로 마포구민 소통 플랫폼인 ‘마포1번가’ 운영을 계획했으며, 실행을 위한 막바지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민선 6기 제9대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는 전임자인 박홍섭 전 구청장과 한 팀으로 보조를 맞추며 마포중앙도서관 건립, 경의선 걷고 싶은 거리 조성 등 굵직한 사업들을 함께 완성했다. 구청장 취임 뒤 첫 행보로 지역 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마포인재육성장학재단 기탁식에 참석했다. 이미 2015년부터 현재까지 장학금을 기탁해 왔는데 기부금을 매월 10만원에서 30만원으로 높인 것이다. 지금까지 장학금을 1000만원 넘게 기부하면서 재단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마포드림즈 멤버가 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멘토로는 정청래 전 국회의원을 꼽는다. 정 전 의원의 지역구 사무국장으로 8년간 일하면서 정치에 본격 입문했다. 어려운 사람들의 오른팔이 돼야 한다는 마음으로 항상 낮은 곳으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마포구청장 취임식 아닌 기부로 민선 7기 시작

    마포구청장 취임식 아닌 기부로 민선 7기 시작

    유동균 신임 서울 마포구청장은 2일 민선 7기 취임 첫 행보로 장학금 기부를 약정했다. 유 구청장은 이날 마포구청에서 지역 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마포인재육성장학재단 기탁식에 참석해 매달 30만원씩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했다. 유 구청장은 이미 2015년부터 현재까지 장학금을 기탁해 왔는데 이번 기탁식을 통해 기부금을 매월 10만원에서 30만원으로 높인 것이다. 지금까지 장학금을 1000만원 넘게 기부하면서 이 재단의 고액기부자 모임인 마포드림즈 맴버가 됐을 만큼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다. 유 구청장은 마포구의원과 서울시의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평소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자녀의 미래가 결정되는 교육 현실에 대한 우려를 자주 표명해 왔다. 본인 스스로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7남매 중 장남인 유 구청장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 등으로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등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시절을 보내며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방송통신대를 졸업했다. 현재는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고난이 닥치면 좌절하는 대신 극복해야 한다는 인생철학을 장학사업에 적용해 어려운 청소년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일에 열의를 쏟는다는 각오다. 앞서 유 구청장은 2010년 민선 6기 마포구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마포인재육성장학재단 설립에 참여했고 마포중앙도서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관련 조례와 예산을 통과시키는 일에 함께했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돼 있어야 하는 만큼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주민의 힘이 행정의 힘보다 강하다…소통하는 중랑시대 열 것”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주민의 힘이 행정의 힘보다 강하다…소통하는 중랑시대 열 것”

    류경기 신임 서울 중랑구청장은 지난달 29일 “16년 만에 (자유한국당 소속 구청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구청장으로) 바꿔 달라고 했는데 바꿔 주신 만큼 이제 당선의 영광과 기쁨의 시간은 가고 책임과 직무만 남아 있다”면서 “낮은 자세로 소통하고 가족같이 따뜻한 구청장이 돼 변화와 쇄신으로 성과를 만들어 주민의 삶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중랑구에서 16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와 변화·발전에 대한 중랑 주민의 열망이 합쳐진 결과다. 16년 만에 바뀌다 보니 주민들의 기대 수준이 높아 부담스럽지만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중랑은 지금까지 재정자립도가 최하위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과 소속 당이 달라 시의 지원을 거부한 전례가 있는데 이제는 중앙정부, 서울시, 구청, 국회(박홍근·서영교 의원)까지 네 박자가 고루 갖춰진 만큼 예산을 대대적으로 유치해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실제로 박원순 서울시장께서 선거 기간 중랑에 다섯 차례나 유세를 오셨고 당시 “(류 후보가) 당선만 된다면 서울시에서 (중랑구를) 팍팍 밀어드리겠다”고 공언을 했다. →강남 출마 요청도 받은 바 있는데. -민주당이 강남구청장 선거도 이겼으니 결과론적으로 강남에서 출마했어도 당선되지 않았겠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행정가는 할 일이 많을 때 보람도 크다. 중랑은 할 일이 많은 곳이고, 할 일이 많은 것은 공직자로서 복이라고 생각한다. 도전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곳인 만큼 테니스할 때 스매싱하는 기분으로 열과 성을 다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전력하겠다.→중랑 발전 구상은.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현장 행정을 중시한다. 중랑 주민들을 만나 보니 착하고 따뜻한 분들이지만 힘들 게 사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제는 주민 삶의 질과 생활 수준을 높여 중랑을 어디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경제와 교육이다. 중랑은 재정자립도가 25개 서울 구청 가운데 21위로 최하위 수준이고, 교육 만족도는 꼴찌다. 이에 따라 기업을 유치하고 상업시설을 만들어 업무 기능을 강화해 산업과 생산 토대를 구축하는 식으로 지역 경제를 살려야 한다. 또 현재 40억원 수준인 교육지원 경비를 두 배 수준인 80억원으로 증액하는 식으로 교육 지원도 대폭 강화해 중랑을 교육 도시로 만들어 가겠다. 방정환교육지원센터(가칭)를 설립해 진학뿐 아니라 취업, 부모 교육 등 학교 밖 교육 지원 프로그램도 구축하겠다. →중점 추진 과제는. -기업 유치와 일자리 창출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겠다. 이를 위해 당장 신내차량기지 이전을 추진해 5만 1400평 부지에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 이 경우 일자리 2만 3800개를 창출하고 연간 5조 9800억원의 생산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 2만 9000평 규모의 망우~상봉역 복합 개발로 철도와 버스를 통합한 환승 터미널을 조성하겠다. 그곳에 대규모 상업·문화 시설을 만들어 기업도 유치하고, 직주결합형 일자리 플러스 주택 3000가구도 공급하겠다. 역세권에 상업과 주거 기능이 생겨남에 따라 생산력이 커질 것이다. 또 면목패션봉제지원특구도 시 등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중랑패션지원센터를 건립해 중랑의 봉제 산업을 육성하겠다. 이런 식으로 기업과 일자리 창출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교육과 경제 이외의 다른 중점 정책 방향이 있다면. -중랑에 65세 이상 어르신이 6만명이고 등록장애인이 2만명이다. 어르신과 장애인 수가 서울 25개 구 가운데 상위권이다. 재정자립도가 떨어지니 결국 중앙정부와 시로부터 대폭으로 예산을 끌어와야 한다. 박 시장이 선거 때 공언했듯 시가 전폭적으로 도와주도록 계속 노력하겠다. 복지 분야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작지만 당장 도움이 되는 맞춤형 사업들을 현장에 맞게 전개하겠다. 사회적 기업, 장애인 일자리 만들기, 어르신 일자리 만들기 등 복지 분야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는 쪽으로 추진하겠다. →16년 만에 정권교체로 인사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데. -행정은 연속성이 있어야 비효율이 없는 만큼 안정성을 유지하겠다. 그동안 추진해 온 주요 업무와 기본 원칙은 유지돼야 한다. 다만 선거를 통해 표출해 주신 변화와 혁신에 대한 열망에도 부응해야 한다. 인사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한쪽 당(보수당) 소속 구청장이 16년간 집권한 결과로 나타난 인사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를 상당 부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정한 기준하에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인사를 하겠다. 특히 시와 구 간 교류를 통해 변화와 쇄신을 이루겠다. 중랑도 강남구처럼 교류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중랑구에서 서울시로 가려 하지 않는데 그런 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취임 이후 내용을 파악해 순차적으로 인사를 하겠다. →구정 운영에서는 어떤 변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협력과 협치가 시대정신이다. 지금까지 일방통행식으로 이뤄진 권위적인 구조를 평행적인 구조로 바꾸겠다. 시간이 걸리고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끊임없이 협력하는 게 길게 보면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일방적으로 속도감 있게 하는 것은 결국 껍데기만 좇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민의 힘이 행정의 힘보다 강하고 현명하다. →지난 선거에 대한 소회는. -박 시장이 유세를 다섯 차례나 와 주시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셨다. 또 중랑의 박홍근·서영교 국회의원은 물론 전현희(강남을), 기동민(성북을) 국회의원 등 먼 걸음해 주시며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무엇보다 중랑 주민 삶의 질을 확실히 높일 수 있는 구정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류경기 구청장은 서울 부시장 때 ‘따릉이’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기획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역대 최고의 서울 부시장 출신입니다!” 지난 6·13 지방선거 당시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부시장 간 대결로 관심을 모은 중랑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인 류경기 신임 서울 중랑구청장을 두고 박 시장은 이 같은 수사로 치켜세우며 지원 유세를 펼쳤다. 서울시에서 대변인, 행정국장, 기획조정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류 신임 구청장은 지난해 행정1부시장을 끝으로 시를 떠나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해 중랑구에서 16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류 구청장은 전남 담양 농촌 출신이다. 조부모, 부모, 그리고 자녀들이 함께 사는 3대 가정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자랐다. 어린 시절 축구와 태권도, 중·고등학교 시절 탁구, 대학 시절에는 테니스를 배우는 등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를 통해 강한 승부욕을 익혔다고 말할 만큼 운동에 능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약사 출신인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서울시 재직 당시 “화통한 성격으로 복잡한 문제를 잘 정리한다”는 얘기를 듣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선거에서도 자칫 민주당 성향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표가 갈릴 위기에 직면했지만 해당 인사를 만류해 류 구청장의 상임선거대책본부장으로 뛰게 만드는 등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시에서의 성과도 적지 않다. 1980년 시에서 처음으로 공공서비스에 대해 시민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시민평가제를 도입했으며, 행정부시장으로 근무하면서는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와 문재인 정부가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등의 사업을 기획해 실행하기도 했다. 특히 박 시장 첫 임기 때인 2013년에는 시장과 간부들이 구청을 직접 찾아가 숙원 사업을 해결해 주는 현장 시장실 프로그램을 시도해 시 예산 3800억원을 20개 자치구에 지원했다. 당시 서울시장과 소속 당이 다른 구청장이 있는 구청은 시장의 방문을 거부해 예산을 받지 못했는데 중랑이 그중 한 곳이다. “서울시와 유기적으로 소통·협력하며 주민을 섬기겠다”는 당선 소감을 내놓은 것도 이 같은 경력과 무관치 않다는 설명이다.
  • LG 구광모 체제로

    LG 구광모 체제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40) LG전자 상무가 그룹 지주회사인 ㈜LG의 대표이사에 올랐다. 지난달 20일 구본무 회장이 별세한 지 40일 만이다. 이로써 LG그룹의 ‘4세 경영’이 첫발을 내딛게 됐다. 10대 그룹 중 4세 총수는 처음이다. ㈜LG는 29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구 상무를 등기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의결한 데 이어 곧바로 이사회를 개최해 대표이사 회장 직함을 부여했다. 신임 구 회장은 창업주인 구인회 전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에 이어 4세 총수가 됐다.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자산 규모 123조원, 재계 4위인 LG그룹을 이끌게 됐다. 이날부터 ㈜LG는 현 대표이사인 하현회 부회장과 구 회장이 이끄는 각자 대표이사 체제다. ㈜LG는 이날 “선대 회장 때부터 구축한 지주회사 지배구조를 이어 갈 것”이라면서 “계열사들은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 경영 체제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상반기 모범 검사 선정 이유 “경찰 수사지휘 잘해서···”

    상반기 모범 검사 선정 이유 “경찰 수사지휘 잘해서···”

    대검찰청은 29일 김해중(44·사법연수원 35기) 청주지검 형사2부 검사와 김동희(43·34기) 서울남부지검 공안부 검사, 변준석(39·42기) 울산지검 형사2부 검사 등 3명을 2018년 상반기 모범 검사로 선정했다고 밝혔다.김해중 검사는 청주 장남천 뚝방에서 나체의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이른바 ‘청주 뚝방길 살인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유기적인 수사지휘를 통해 신속하게 범인을 검거하고 증거를 확보했다. 김동희 검사는 중국 선박의 불법조업을 해경이 단속하자 실시간으로 수사를 지휘했고, 중국인 6명을 구속기소 해 유죄 판결을 끌어냈다. 또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아동 폭행치사 사건에서는 철저한 통화내역 분석과 법의학 자문 등을 거쳐 범행을 부인하는 범인의 거짓 진술을 입증했다. 변준석 검사는 경매방해 사건에서 경찰의 수사결과에 국한하지 않고 재수사를 통해 추가 공범 3명을 밝혀냈으며 성공적으로 수사를 지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구광모, LG그룹 새 총수 등극···40대 총수 체제로

    구광모, LG그룹 새 총수 등극···40대 총수 체제로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29일 그룹 지주회사인 ㈜LG의 대표이사에 오르면서 사실상 ‘총수’로 등극한다. ㈜LG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구 상무를 등기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LG는 곧바로 이사회를 개최해 구 상무에게 대표이사 직함을 부여한다. 선친이 별세한 지 41일째 되는 날 ‘창업주’ 구인회 전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에 이어 사실상 그룹 총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구 상무는 원래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구 회장이 2004년 양자로 들이며 LG가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서울 경복초교, 영동고교를 거쳐 미국 로체스터 공대를 졸업한 구 상무는 2006년 LG전자 재경 부문에 대리로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잠시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그는 이후 LG전자 미국법인,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 홈어플라이언스(HA) 사업본부 등을 거쳐 올해부터는 LG전자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B2B사업본부의 정보디스플레이(ID)사업부장을 맡았다. 재계 일각에서는 구 상무가 지주사 대표이사에 오르는 것을 ‘신호탄’으로 그룹 내 사업 재편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특히 구본무 회장 와병 중에 사실상 그룹 경영을 총괄했던 구본준 부회장이 ‘장자 승계’의 전통에 따라 조카에게 길을 터주고 독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그룹 내 구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 그러나 당분간은 하현회 ㈜LG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등 전문경영인 대표이사들의 보좌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업 보는 눈 바꿔야 국가경제 산다] 착한 기업 ‘선행’ 빛나고 일류 기업 ‘상생’ 빛난다

    [기업 보는 눈 바꿔야 국가경제 산다] 착한 기업 ‘선행’ 빛나고 일류 기업 ‘상생’ 빛난다

    ‘갓뚜기’ DNA 물려준 오뚜기 대를 이어 선행은 계속된다한국에서 기업이 국민에게 존경받기는 참 어렵다. 각종 단체는 해마다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상을 준다. 하지만 탈세, 불공정거래, 정경유착, 노동착취, 골목상권 침해 등 기업의 잘못들을 수도 없이 목도한 국민들은 그런 활동과 수상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 리 없다. 그럼에도 기업은 혁신을 거듭하고 끊임없이 상생과 사회공헌 활동을 한다. 6회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기업의 활동에 관해 다룬다.‘갓(God)뚜기.’ 라면업계 2위 업체 정도로만 기억되던 오뚜기가 ‘신’을 의미하는 말을 합성한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2016년 창업자인 함태호 회장이 별세한 바로 뒤부터였다. ●심장병 어린이 4748명 새 생명 함 회장이 24년간 심장질환 어린이를 지원해 무려 4242명(2018년 5월 기준 4748명)이 새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함 회장에게 건강을 선물받은 아이들은 장례식장에 찾아와 통곡을 했고, 조문을 하지 못한 아이들의 추모 편지가 매일 수십 통씩 도착했다고 한다. 함 회장이 생전 선행을 남에게 알리지 않아 숨겨져 있던 미담들이 속속 드러났다. 고인이 1996년 사재를 출연해 세운 오뚜기재단에 숨지기 3일 전까지 1000억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한 사실도 알려졌다. 2015년엔 사회복지법인인 밀알복지재단에 3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했으며, 이 재단이 장애인 직업재활을 위해 설립한 굿윌스토어엔 2012년부터 오뚜기 선물세트의 조립과 가공을 맡겼다. ●장남 상속세 꼼수 안 부리고 납부 창업자의 장남 함영준 회장도 아버지의 철학을 이어받았다. 그는 당시 주가 기준으로 3500억원에 이르는 오뚜기 주식 46만 5543주를 물려받으며, 상속세 1500억원을 꼼수 없이 5년간 전액 납부하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올라온 올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오뚜기 직원 3062명 중 기간제 근로자는 고작 1.2%에 해당하는 37명뿐이다. ●정규직 비율 높아 靑 초청받아 오뚜기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협력업체들에도 최신 설비를 투자하고 물품값을 후하게 치르는 등 상생하는 자세로도 유명하다. 서민 식품인 라면 값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올리지 않은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대화에 함영준 회장이 초대를 받아 화제가 됐다. 오뚜기는 초청된 업체 중 유일한 중견기업이었다. 청와대는 당시 “오뚜기는 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기업 중 하나이며, 최근 미담 사례가 있어 특별 초청했다”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김치 담그고 연탄 나르는 만큼 대기업·中企 ‘파트너십’ 사회공헌 LG이노텍, 덕우전자와 인력·기술 협력 ‘수출 5000만불탑’ 일조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 사이의 상생 사례는 이른바 ‘김치 담그고, 연탄 나르는’ 방식의 사회공헌보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상당하다. 어쩌면 모든 기업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일 수 있다. 종종 정부에 등 떠밀려 실천한 일들일 수 있다. 스스로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 협력업체는 대기업의 기술을 이전받아 세계로 수출하는 경쟁력을 키웠다. 대기업은 비용을 절감하고 부품 공급의 효율도 높일 수 있었다. ●LG이노텍 동반성장위원장상 LG이노텍은 협력사인 덕우전자와 2014년부터 3년간 공공기관과 대기업이 함께 추진하는 ‘생산성 혁신 파트너십’에 참여했다. 2014년 생산성 혁신 파트너십의 장비 비가동률과 불량률 개선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다음해엔 품질 개선 위주로 혁신을 이어 나갔다. 2016년에 수출량이 늘어난 덕우전자는 수출입 안전관리 우수 공인업체(AEO) 인증을 받기 위해 파트너십의 수출 활성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AEO 인증은 무역 관련 법규와 안전 관리 수준 등을 인증받은 업체에 통관 간소화, 검사비용 축소 등 혜택을 주는 제도다. LG그룹은 협력사에 계열사 전문인력을 직접 파견해 기술을 이전하고 지원한다. LG이노텍도 이 기간 덕우전자에 직접 전문인력을 보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지난해 AEO 인증을 받은 덕우전자는 한국과 상호인증협정을 맺은 수입국에서 물품 검사 비율이 5분의1로 줄어드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덕우전자 측은 “통관이 빨라져 물류비용과 원자재 유통 시간이 줄어들어 수출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고 밝혔다. 3년에 걸친 파트너십 참여 결과 덕우전자는 비가동률과 용접 공정의 불량률을 각각 30%씩 개선했다. 2013년 457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14년 723억원, 2015년 878억원에 이르며 연평균 40% 이상 늘어났다. 2016년 수출액은 전년도 443억원에서 180억원 늘어난 620억원을 기록했다. LG이노텍은 “2015년엔 덕우전자와 함께 동반성장위원장상을 받았다”면서 “덕우전자는 그해 ‘수출 5000만불탑’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덕우전자는 지난해 코스탁에 상장됐으며 모바일에 이어 새 먹거리로 점찍은 자동차 전장 사업을 키우고 있다. LG이노텍·덕우전자와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에 공정거래협약을 맺도록 하고 이를 이행한 모범 사례를 선정해 연말에 소개하고 있다. ●삼성전자 펀드 조성, 협력사 지원 삼성전자는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 대금을 30일 이내 현금으로 지급하도록 장려하며 지급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 줬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5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삼성전자의 1차 협력사인 대덕전자는 이런 지원을 통해 모든 협력사들에 10일 이내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조건을 개선했다. 제과업체인 오리온은 포장재 잉크 제조업체인 성보잉크와 함께 인체에 무해한 에탄올 잉크 개발에 성공했다. 성보잉크는 그 덕에 올해 납품 규모를 전년도의 약 4배로 예상하고 있다. 오리온은 기존 대비 유해물질 배출량이 약 75% 줄어든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하게 됐다. ●현대기아차 특허기술 무상 제공 현대기아차는 부품 제조업체인 프라코에 특허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프라코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레이더 전파가 손실 없이 투과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반자율주행용 덮개 국산화에 성공했다. 프라코는 지난 2년간 약 60억원의 신규 매출이 발생했고, 2020년 매출 5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해당 부품으로 인해 제조 단가가 낮아져 반자율주행 기능을 하위 차급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게 됐다. 혜인정밀은 지난해 두산인프라코어의 협력사 맞춤형 육성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았다. 혜인정밀에는 3명의 두산인프라코어 전문 직원이 파견됐다. 직원들은 혜인정밀의 생산라인을 업무 연관성에 맞게 유기적으로 재배치하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업무 효율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고객 품질 불량률이 35%나 줄어들었다. 고객 납기 준수율도 99.2%로 증가했다. 가전제품용 부품 제조업체인 신신사는 LG전자의 기술을 이전받아 기존 공법으로는 생산하기 어려운 오븐 상단 프레임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매출이 2013년에 비해 약 37% 증가하고 고용도 약 28% 늘어났다. LG전자의 1차 협력업체인 신신사는 2차 협력업체인 남희정공을 지원해 프레스 설비 금형 교체 시간을 60% 이상 단축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량이 약 43% 늘어났고, 세탁기 신모델 출시에 따른 생산 물량 증가에 필요한 부품 공급도 제때 이뤄지게 됐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기업 보는 눈 바꿔야 국가경제 산다] 착한 기업 ‘선행’ 빛나고 일류 기업 ‘상생’ 빛난다

    [기업 보는 눈 바꿔야 국가경제 산다] 착한 기업 ‘선행’ 빛나고 일류 기업 ‘상생’ 빛난다

    한국에서 기업이 국민에게 존경받기는 참 어렵다. 각종 단체는 해마다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상을 준다. 하지만 탈세, 불공정거래, 정경유착, 노동착취, 골목상권 침해 등 기업의 잘못들을 수도 없이 목도한 국민들은 그런 활동과 수상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 리 없다. 그럼에도 기업은 혁신을 거듭하고 끊임없이 상생과 사회공헌 활동을 한다. 6회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기업의 활동에 관해 다룬다.■‘갓뚜기’ DNA 물려준 오뚜기 대를 이어 선행은 계속된다 ‘갓(God)뚜기.’ 라면업계 2위 업체 정도로만 기억되던 오뚜기가 ‘신’을 의미하는 말을 합성한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2016년 창업자인 함태호 회장이 별세한 바로 뒤부터였다. ●심장병 어린이 4242명 새 생명 함 회장이 24년간 심장질환 어린이를 지원해 무려 4242명이 새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함 회장에게 건강을 선물받은 아이들은 장례식장에 찾아와 통곡을 했고, 조문을 하지 못한 아이들의 추모 편지가 매일 수십 통씩 도착했다고 한다. 함 회장이 생전 선행을 남에게 알리지 않아 숨겨져 있던 미담들이 속속 드러났다. 고인이 1996년 사재를 출연해 세운 오뚜기재단에 숨지기 3일 전까지 1000억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한 사실도 알려졌다. 2015년엔 사회복지법인인 밀알복지재단에 3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했으며, 이 재단이 장애인 직업재활을 위해 설립한 굿윌스토어엔 2012년부터 오뚜기 선물세트의 조립과 가공을 맡겼다. ●장남 상속세 꼼수 안 부리고 납부 창업자의 장남 함영준 회장도 아버지의 철학을 이어받았다. 그는 당시 주가 기준으로 3500억원에 이르는 오뚜기 주식 46만 5543주를 물려받으며, 상속세 1500억원을 꼼수 없이 5년간 전액 납부하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올라온 올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오뚜기 직원 3062명 중 기간제 근로자는 고작 1.2%에 해당하는 37명뿐이다. ●정규직 비율 높아 靑 초청받아 오뚜기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협력업체들에도 최신 설비를 투자하고 물품값을 후하게 치르는 등 상생하는 자세로도 유명하다. 서민 식품인 라면 값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올리지 않은 것도 잘 알려져 있다.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대화에 함영준 회장이 초대를 받아 화제가 됐다. 오뚜기는 초청된 업체 중 유일한 중견기업이었다. 청와대는 당시 “오뚜기는 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기업 중 하나이며, 최근 미담 사례가 있어 특별 초청했다”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김치 담그고 연탄 나르는 만큼 대기업·中企 ‘파트너십’ 사회공헌 LG이노텍, 덕우전자와 인력·기술 협력 ‘수출 5000만불탑’ 일조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 사이의 상생 사례는 이른바 ‘김치 담그고, 연탄 나르는’ 방식의 사회공헌보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상당하다. 어쩌면 모든 기업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일 수 있다. 종종 정부에 등 떠밀려 실천한 일들일 수 있다. 스스로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 협력업체는 대기업의 기술을 이전받아 세계로 수출하는 경쟁력을 키웠다. 대기업은 비용을 절감하고 부품 공급의 효율도 높일 수 있었다. ●LG이노텍 동반성장위원장상 LG이노텍은 협력사인 덕우전자와 2014년부터 3년간 공공기관과 대기업이 함께 추진하는 ‘생산성 혁신 파트너십’에 참여했다. 2014년 생산성 혁신 파트너십의 장비 비가동률과 불량률 개선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다음해엔 품질 개선 위주로 혁신을 이어 나갔다. 2016년에 수출량이 늘어난 덕우전자는 수출입 안전관리 우수 공인업체(AEO) 인증을 받기 위해 파트너십의 수출 활성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AEO 인증은 무역 관련 법규와 안전 관리 수준 등을 인증받은 업체에 통관 간소화, 검사비용 축소 등 혜택을 주는 제도다. LG그룹은 협력사에 계열사 전문인력을 직접 파견해 기술을 이전하고 지원한다. LG이노텍도 이 기간 덕우전자에 직접 전문인력을 보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지난해 AEO 인증을 받은 덕우전자는 한국과 상호인증협정을 맺은 수입국에서 물품 검사 비율이 5분의1로 줄어드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덕우전자 측은 “통관이 빨라져 물류비용과 원자재 유통 시간이 줄어들어 수출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고 밝혔다. 3년에 걸친 파트너십 참여 결과 덕우전자는 비가동률과 용접 공정의 불량률을 각각 30%씩 개선했다. 2013년 457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14년 723억원, 2015년 878억원에 이르며 연평균 40% 이상 늘어났다. 2016년 수출액은 전년도 443억원에서 180억원 늘어난 620억원을 기록했다. LG이노텍은 “2015년엔 덕우전자와 함께 동반성장위원장상을 받았다”면서 “덕우전자는 그해 ‘수출 5000만불탑’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덕우전자는 지난해 코스탁에 상장됐으며 모바일에 이어 새 먹거리로 점찍은 자동차 전장 사업을 키우고 있다. LG이노텍·덕우전자와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에 공정거래협약을 맺도록 하고 이를 이행한 모범 사례를 선정해 연말에 소개하고 있다. ●삼성전자 펀드 조성, 협력사 지원 삼성전자는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 대금을 30일 이내 현금으로 지급하도록 장려하며 지급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 줬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5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삼성전자의 1차 협력사인 대덕전자는 이런 지원을 통해 모든 협력사들에 10일 이내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조건을 개선했다. 제과업체인 오리온은 포장재 잉크 제조업체인 성보잉크와 함께 인체에 무해한 에탄올 잉크 개발에 성공했다. 성보잉크는 그 덕에 올해 납품 규모를 전년도의 약 4배로 예상하고 있다. 오리온은 기존 대비 유해물질 배출량이 약 75% 줄어든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하게 됐다. ●현대기아차 특허기술 무상 제공 현대기아차는 부품 제조업체인 프라코에 특허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프라코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레이더 전파가 손실 없이 투과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반자율주행용 덮개 국산화에 성공했다. 프라코는 지난 2년간 약 60억원의 신규 매출이 발생했고, 2020년 매출 5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해당 부품으로 인해 제조 단가가 낮아져 반자율주행 기능을 하위 차급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게 됐다. 혜인정밀은 지난해 두산인프라코어의 협력사 맞춤형 육성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았다. 혜인정밀에는 3명의 두산인프라코어 전문 직원이 파견됐다. 직원들은 혜인정밀의 생산라인을 업무 연관성에 맞게 유기적으로 재배치하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업무 효율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고객 품질 불량률이 35%나 줄어들었다. 고객 납기 준수율도 99.2%로 증가했다. 가전제품용 부품 제조업체인 신신사는 LG전자의 기술을 이전받아 기존 공법으로는 생산하기 어려운 오븐 상단 프레임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매출이 2013년에 비해 약 37% 증가하고 고용도 약 28% 늘어났다. LG전자의 1차 협력업체인 신신사는 2차 협력업체인 남희정공을 지원해 프레스 설비 금형 교체 시간을 60% 이상 단축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량이 약 43% 늘어났고, 세탁기 신모델 출시에 따른 생산 물량 증가에 필요한 부품 공급도 제때 이뤄지게 됐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90대 할머니, 스무살 연하와 혼인신고 이유는?

    90대 할머니, 스무살 연하와 혼인신고 이유는?

    산업재해 연급 수급권자 사망 사흘전 혼인신고법원 “진정한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없어”산업재해 연금을 받는 70대 남성이 숨지기 사흘 전에 혼인신고를 한 90대 여성에게 법원이 “부부로 볼 수 없어 유족 수급권자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단독 심홍걸 판사는 이모(91)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미지급된 장해보상연금 차액 일시금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25일 밝혔다.1988년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슬하 7명의 자녀를 두고 있고, 장남의 나이가 71세(1947년생)다. 이씨는 사위 김모씨의 소개로 1948년생인 정모씨를 2013년에 소개받았다. 정씨는 2007년 부산의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낙하물에 부딪혀 부상을 입고 장해등급 2급 판정을 받아 장해보상연금을 받으며 생활해 왔다. 이씨는 정씨와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다가 사위 김씨와 그의 지인 권모씨의 권유로 2016년 8월 3일 정씨와 혼인신고를 했다. 구청에 정씨는 가지 않았고 김씨와 권씨가 증인을 섰다. 혼인신고를 한 지 사흘 만에 정씨는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정씨가 숨을 거두자 이씨는 그해 10월 근로복지공단에 장해보상연금 차액일시금을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 측은 “법률상 혼인신고는 인정되나 정씨가 혼인신고 시점에 인지력이 부족한 상태였음이 의무기록상 확인되고, 두 사람이 사회관념상 정상적인 부부로서 정신적·육체적 결합의 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연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씨는 이에 불복해 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이씨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정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간병활동을 도와주며 산재보험급여로 공동생활도 가능해 쌍방이 좋은 일이라 생각해 혼인신고를 마쳤고 법률상 배우자로서 수급권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도 이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 판사는 “당사자 일방에게만 참다운 부부관계의 설정을 바라는 효과가 있고 상대방에게는 그런 의사가 결여되었다면 비록 당사자 사이에 혼인신고가 이뤄져 법률상 부부 신분이 되어도 그 혼인은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것이어서 무효로 봐야한다”면서 “이씨의 의사와 관계 없이 산재보험급여를 받기 위해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씨에게 정씨를 소개한 권씨는 이전에도 정씨에게 송모(55)씨를 소개해 법률상 혼인관계를 맺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는 송씨와 2015년 1월 혼인신고를 했다가 2016년 7월 25일 이혼신고를 했다. 송씨는 정씨가 산재근로자로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권씨의 권유로 혼인신고를 했지만, 정씨와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한 번 정도 정씨를 간병한 뒤 권씨에게 간병비를 지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녀들의 반대 등으로 결국 이혼신고를 하게 됐고, 정씨는 권씨 등의 주선으로 송씨와 이혼신고를 한 지 9일 만에 곧바로 이씨와 또 다시 혼인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심 판사는 “정씨를 도와주던 권씨 등과 신뢰관계에 있는 이씨가 정씨와 혼인을 하면 법률상 배우자로서 산재보험급여를 수령할 수 있게 돼 권씨 등이 원고를 통해 여전히 급여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서 “결국 권씨 등은 산재보험급여를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씨와 정씨의 혼인을 주선했고, 이씨가 이에 응해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결론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경제 블로그] 동서 오너家 ‘이상한 공시’

    김석수 회장 주식 4만주 서울대 발전기금 증여 ‘조용한 사회 공헌’ 주목 동서가 내놓은 공시가 이상합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2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동서는 전날 김석수 회장이 서울대 발전기금에 주식 4만주를 증여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이날 종가(2만 6200원) 기준으로 10억 4800만원 상당의 주식입니다. 김 회장의 지분은 19.4%에서 19.36%로 낮아졌습니다. 동서 오너 일가의 주식 증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앞서 동서는 지난달 28일에도 김상헌 전 고문이 우리사주조합에 28만 7967주를, 지난달 29일에는 한희탁 외 59명에게 1만 2033주를 증여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지난달 29일 종가 2만 6200원 기준으로 78억 6000만원어치인 총 30만주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면서 김 전 고문의 지분율은 18.56%로 줄었습니다. 김 회장은 김재명 명예회장의 차남, 김 전 고문은 장남입니다. 김 전 고문은 지난해 3월에도 36만 6912주(약 93억 122만원)를 임직원 104명에게 증여했습니다. 2011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우리사주조합과 계열사 임직원에게 40만 9431주, 2012년엔 155만 8444주, 2013년에는 45만 2주를 각각 증여했습니다. 형이 솔선수범을 보이자 동생도 거드는 모양새입니다. 동서는 그러나 법적 의무에 따라 증여 ‘사실’만 공시했을 뿐 그 ‘배경’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습니다. ‘왜 숨길까’라는 궁금증은 다시 사회공헌 활동을 떠들썩하게 알리는 여느 재벌이나 대기업의 행태에 비추어 보면 다시 ‘왜 자랑하지 않을까’로 이어집니다. 동서는 김 전 고문이 2014년 3월 등기이사직을 사임한 뒤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고,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기존 등기이사들이 재선임되면서 적어도 2020년까지 이 체제가 유지됩니다. 물론 일각에선 김 전 고문의 장남인 김종희 전무가 회사로 복귀하고 지분율을 높이면서 김 전무 중심의 오너 운영 체제를 준비 중인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적어도 보유 주식을 자녀가 아닌 직원들과 사회에 나눠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재벌들도 본보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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