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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금 50억 꺼내며 “마스크 달라” 생떼… 주문량 못 맞추면 협박도

    현금 50억 꺼내며 “마스크 달라” 생떼… 주문량 못 맞추면 협박도

    원자재 업자가 “제품 절반 넘겨라” 갑질 생산 2배 늘려도 12배 된 주문량 못 맞춰 연일 2교대 24시간 가동… 기계 고장 잦아 中 보따리상 막무가내에 매일 경찰 출동 “지자체 보고 요구에 업무 지장” 지적도“‘원자재를 줄 테니 대신 완제품 마스크 절반은 나에게 넘기라’는 원자재 업자 요구까지 받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대전 유성구 탑립동 대덕테크노밸리 내 철제 건물 2층. 마스크 제조업체 ‘레스텍’ 공장에서 만난 박가원(32) 사장은 지난 8일 이같이 말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마스크 원자재 업자들이 국산 원자재를 싹쓸이한 뒤 원자재를 팔아서 남기고, 원자재 공급을 미끼로 완제품까지 납품받은 뒤 비싸게 되파는 식으로 이득을 이중으로 챙기려는 경우도 있다. 원자재 품귀 현상이 심해지니까 업자들까지 ‘갑질’을 해댄다”고 호소했다. ●“원자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박 사장이 운영하는 레스텍은 제약사 등에 주로 납품하는 주문자상품부착생산(OEM) 업체로 요즘 주요 생산 마스크는 황사방역용 마스크(KF94)이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후 기존 납품업체 주문량이 12배 늘었고 이에 생산량도 하루 10만개에서 20만개로 늘렸지만 주문을 못 따라간다고 했다. 예전에는 재고량이 30%에 달했지만 지금은 아예 없다. 주문이 다음달 말까지 밀렸지만 원자재는 이달 말이면 동이 난다. 박 사장은 “원래는 영업을 가장 신경 썼는데 지금은 원자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날 공장에선 마스크 제조기 7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거대한 롤휴지처럼 감긴 부직포롤이 부직포를 연달아 풀어내면 부직포를 4중으로 초음파 융착했다. 기계는 미세먼지를 거르는 정전기 부직포도 한 겹 넣고 잘라 폴리프로필렌 코팅 철사를 끼우는 작업을 자동 반복했다. 이어 마스크 양쪽에 나일론 이어밴드(귀고리)를 붙이고 똑같은 크기로 잘랐다. 완제품이 기계 밑 상자로 떨어져 꽉 차면 직원이 포장실로 옮겼다. 여직원들이 책상에 앉아 주문사의 브랜드가 새겨진 봉투에 포장하느라 손 놀릴 틈이 없다. 주말도 없다. 오후 6시면 끝나던 평일 작업은 이튿날 새벽 1~2시까지 2교대로 이어진다. 기존 정규직 30명 이외에 용역업체에서 임시직 25명을 더 받아 투입해도 일손이 부족하다. 하루 50통에 그치던 주문 전화는 300통이나 온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학교 동창과 선생님도 연락해 대뜸 “마스크 좀 보내 달라”고 요구한다고 박 사장은 전했다. 그는 “물건도 없지만 한 명에게 보내주면 다른 사람도 다 줘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중국산 원부자재 수입이 꽉 막히면서 마스크를 사려는 상인들은 필사적이다. 박 사장은 신종 코로나 사태가 터진 뒤 자동차 트렁크에 5만원짜리 현금 50억원을 싸 들고 와서 “납품가의 5~6배를 쳐주겠다”며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공장 앞에 얼굴도 모르는 상인들이 줄을 서는데 이 중에는 ‘다이궁’(중국 보따리상)도 섞여 있다고 했다. 출입문에 ‘외부인 출입금지’를 붙였지만 막무가내로 쳐들어온단다. 박 사장은 “아내도 안 나가 하루에 한 번은 경찰을 부를 지경”이라고 했다. 2012년 5월 충남 논산 비닐하우스 공장에서 시작해 3년 전 이곳으로 온 박 사장은 “코로나가 가면 얼마나 더 가겠느냐”면서 “정부에서 마스크 값이 치솟을 때만 단속을 들먹이지 말고 폭락할 때도 신경을 써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사람들 고통받는 현실에 기쁘지만은 않아” “어쩌다 기계 고장으로 주문량이 조금만 늦어도 협박문자가 날아오는 등 난리입니다.” 주말 저녁인 지난 7일 오후 6시. 경기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KF94 제조업체 메이앤 공장 내부 직원들은 퇴근도 없이 기계를 돌리고 있다. 눈은 붉게 충열됐고 부시시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공장의 최대 생산량은 약 4만개. 2교대로 24시간 쉼 없이 공장을 돌리다 보니 기계가 고장날 정도다. 이 업체 전성욱(36) 대표는 “지난 2일에도 기계 고장으로 반나절 생산을 못해 주문량을 못 맞췄더니 곧바로 협박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품귀 현상으로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얼떨결에 주문을 받다 보니 남들은 개당 700~800원, 많게는 1500원씩 납품계약을 맺는다고 하는데 우린 계속 250원, 350원에 계약했어요. 3월까지는 이미 주문이 꽉 찼어요.” 기계를 설치하면서 주문이 밀려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몇 장이나 팔릴까’ 했으나 공장 가동 후 지난 열흘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낯선 사람들이 무턱대고 찾아와 물건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폐쇄회로(CC)TV도 열 대 넘게 설치했다. 이번 신종 코로나 사태가 진정이 되어도 기대했던 것보다 수요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계도 한 대 더 주문했다. 인근 다른 마스크 공장 사장은 “물건이 잘 팔려 다행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편을 겪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기쁘다고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식약처에서 하루 걸러 찾아오고 파주시와 경기도도 ‘이것저것 써내라’며 보고를 요구하는 통에 일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파주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해리스 대사, 호르무즈파병 압박 등으로 ‘총독’ 비난받아역대 23명 대사 중 유일 직업군인 출신, 국민에게 낯설어결례 논란 전임 대사도 자유롭지 않아…현대사에 영향력미국대사 과거 막후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공공 외교관변화된 역할 조정 과정서 시행착오 겪으며 논란 불거져 ●한국민에게 낯선 미국대사, 해리스 “해리스 대사는 한국 총독처럼 행세하지 않느냐. 자기가 무슨 총독인 줄 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7일 공개된 재단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에 대해 이같이 언급했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 7일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이 그곳에(호르무즈해협)에 병력을 보내길 희망한다”며 정부에 파병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총독 행세’라고 비판한 것이다.해리스 대사가 16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같은 날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당정청은 일제히 반발했다. 다음 날 “의견 표명은 좋지만 우리가 대사가 한 말대로 따라 한다면 대사가 무슨 조선 총독인가”(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민주당 설훈 최고위원),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통일부 이상민 대변인),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청와대 관계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앞서 해리스 대사는 호르무즈해협 파병과 남북 협력 사업뿐만 아니라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과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표명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해 11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인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요구만 20번 정도 반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리스 대사는 같은 달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한국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안보 영역으로 확대한 데 대해 실망했다”며 종료 결정을 번복할 것을 압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우선 대사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해리스 대사는 첫 직업군인 출신 주한 미국대사다. 1949년 부임한 1대 존 무초 대사부터 해리스 대사까지 23명 대사 중 6명을 제외하면 모두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비외교관 출신 6명 중 해리스 대사를 제외하고는 외교를 전공한 교수이거나 한국과 인연이 깊은 목사, 외교에 익숙한 중앙정보부(CIA) 출신 요원, 국회와 국방부에서 외교를 담당한 정치인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외교적 수사보다 직설 화법에 익숙한 해리스 대사가 한국민에겐 ‘낯선 대사’라는 것이다.외교 소식통은 “한국어에 능숙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와 한국민과 스킨십을 즐겼던 마크 리퍼트 대사에 익숙했던 한국민에게 4성 장군으로 태평양사령관을 역임한 해리스 대사의 야전군 사령관 스타일이 낯설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주한 미국대사의 행보와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한미 관계 현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출하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 이 대통령의 반감을 샀다. 박정희 정권에 베트남 파병을 압박했던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카운터파트인 이동원 외무부 장관을 ‘패싱’하고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진보적인 노무현 정부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정부가 마찰을 빚던 당시 노무현 정부의 남북 화해협력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해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의 총독’이라는 논란은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 정부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한 미국대사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불거졌다는 해석이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마다 주·조연으로 등장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와 한국 정치에서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국가원수급 대우 받은 초대 미국대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주한 미국대사는 존 무초 대사다. 무초 대사는 1948년 8월 13일 주한 최고대표로 임명돼 사흘 후 부임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1일 한국을 정부로 승인하고 4월 7일 무초 최고대표를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1년 전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을 ‘장엄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4월 20일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는 이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삼부 요인이 모두 참석했고, 무초 대사는 중앙청에 육해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입장했다. 국가원수급 대우를 받은 무초 대사는 1950년 이 대통령과 6·25 전쟁 첫 2년을 함께 겪었다. 무초 대사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초 미국 의회에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전쟁 당일인 25일 워싱턴 국무부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들어갔다. 무초 대사는 피난가겠다는 이 대통령을 말렸지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알리지 않고 27일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이후 한국 정부를 따라 수원·대전·대구·부산으로 피난가던 도중 이 대통령을 자신의 차에 태워 피신시키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작전의 선봉장?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을 한 친미주의자였지만, 집권기에는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기간 휴전 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휴전을 원하던 미국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미국은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뿌리쳤고, 미국의 우려에도 독재의 길을 걸어가면서 양측의 갈등은 악화됐다. 미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미국대사들이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며 최전선에서 하야 계획을 수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당연히 미국대사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1955년 5월 취임한 3대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재한 미국인 상사에 세금을 물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충돌하자 이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반감을 느껴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에 대사 교체를 요청했고, 취임 다섯 달 만에 레이시 대사는 사임했다. 후임인 4대 월터 다울링 대사는 진보당 사건, 보안법 파동 등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을 두고 이 대통령과 부딪쳤다. 다울링 대사는 이승만 정권이 1958년 야당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 등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을 구형하자 정권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을 두 차례 만나 조봉암을 구명하려 했으나 조봉암은 1년 후 사형당한다. 1958년 12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일방 통과시키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1959년 12월 부임한 5대 월터 매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에 일조했다. 매카너기 대사는 1960년 4·19 혁명 당일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시위대에 우호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19일과 21일 경무대에 이 대통령을 찾아가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26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자 매카너기 대사는 “전국적으로 퍼진 정당한 국민의 불만 표시에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며 이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시사하는 성명을 냈다. 직후 경무대로 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의사를 전달 받았다. 경무대 앞에 있던 시위대는 매카너기 대사의 차가 경무대에서 나오자 그가 이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며 ‘매카너기 만세’, ‘미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박정희 인정하되 미국 요구 관철시킨 대사들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하에서 미국대사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돕기도 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이들을 견제하기도 했으며, 국익과 가치의 딜레마에서 이들의 독재를 방관하기도 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한 달여 후 취임한 6대 새뮤얼 버거 대사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을 사실상 인정하되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쿠데타 발발 당일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대리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전역하고 1963년 10월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2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기본조약 등을 체결했다.7대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미국이 수행하던 베트남전 참전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자 그 해 9월 베트남에 의무 요원과 태권도 교관을 파견했는데, 브라운 대사는 12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증파를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했고, 브라운 대사는 이듬해 3월 한국의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을 담은 ‘브라운 각서’를 전달했다. 브라운 각서와 월남 특수로 한국은 경제·군사적 성장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국군 장병의 피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비난도 제기됐다. ●유신 정권과 대립했던 대사들 1970년대 미국에 닉슨·포드·카터 정부가 차례로 들어서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 개정으로 독재의 길을 걸으며 양국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냉전 완화(데탕트)를 이유로 아시아에서의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자력 방위를 요구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8대 윌리엄 포터 대사는 1970년 박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6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박 대통령이 감축에 불만을 갖고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지원 요구를 거부하자 포터 대사는 “(박 대통령은) 엉클 샘(미국)의 큰 젖통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려 한다”며 독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등 동맹국이 미국을 벗겨 먹는다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셈이다.1971년 10월 취임한 9대 필립 하비브 대사는 ‘미국 당대의 가장 걸출한 전문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구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비브 대사는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이 야권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하자 조용하지만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지부장이자 후일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회고했다. 김대중은 납치 닷새 후 서울 자택에서 풀려났다. 후임 10대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사실을 알아채고 박정희 정권에 경고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무마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 정권의 견제자인가 방관자인가 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8년 7월 취임, 이듬해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을 겪은 인물이다. 1977년 출범한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외교 노선을 앞세우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고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함에 따라 한미 관계가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카터 대통령을 설득해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철회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국회에서 여당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를 동원해 야당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카터 정부는 항의의 뜻으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도 했다.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최소 방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과 그의 참모들을 만나 광주에서의 군사 작전을 항의하기도 했으나,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하루 전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백악관에 보고한 것으로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신군부의 진압작전을 묵인했다고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행동에 미국이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12대 리처드 워커 대사는 1981년 8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약 7년 5개월간 재임해 현재까지 최장수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1대 무초 대사부터 11대 글라이스틴 대사까지 모두 직업 외교관이었으나, 워커 대사는 학자로서 첫 비외교관 출신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하다. 워커 대사는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석방시키는 데 역할을 했지만, 김대중 석방 대가로 전두환 대통령의 조기 방미를 성사시켜 12·12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민주화 이행기의 CIA 출신 대사들 13대 제임스 릴리 대사와 14대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CIA 요원 출신으로, 1987년 6·10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목격했으며 민주화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방조 의혹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됐던 1980년대 말 부임했던 릴리 대사와 그레그 대사는 한국민의 거센 반감에 직면해야 했다. 릴리 대사는 반미 시위대로부터 수차례 인형 화형식을 당했으며, 그레그 대사는 시위대의 관저 침입을 겪기도 했다. 특히 릴리 대사의 후임으로 연이어 CIA 출신인 그레그 대사가 미국대사로 임명되자 야당과 언론은 ‘미국이 한국을 외교 대상이 아닌 정보·공작 대상으로 본다’며 반발하기도 했다.하지만 1987년 6·10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명동성당에 강제 진입해 학생들을 연행하려 하자 릴리 대사는 13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을 만나 “전 세계가 떠들썩해질 것”이라며 진입을 저지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검토하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시위를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요청해 받았다. 릴리 대사는 전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으나 청와대는 18일 거절 의사를 밝혔다. 릴리 대사는 결국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친서를 전달하고 “무력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레그 대사는 취임 약 4개월 후인 1990년 1월 광주를 찾아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책임을 묻는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취임 후 첫 외국 정상으로 초청한 것은 김대중을 사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레그 대사는 노태우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북방정책을 지지했으며 미군 전술핵무기의 한반도 철수를 추진하며 1992년 남북 한반도비핵화선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레그 대사는 1992년 남북화해를 위해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하도록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미 정부는 그레그 대사와 상의 없이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은 준선시상태를 선언했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그레그 대사는 2015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북핵 전문 외교관 전성시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되자 미국의 대한국 외교는 물론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북핵 문제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취임한 15대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목사 출신으로 직업 외교관은 아니었으나, 1947~1950년 서울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1959~1964년 연세대에서 신학을 가르친 ‘지한파’였다. 레이니 대사는 1994년 북한이 영변의 핵연료봉 추출을 강행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정밀 타격을 시행하려 하면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오르자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대북 특사로 방북해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으나,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하지만 북미는 9월 제네바합의를 타결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켰다.레이니 대사의 후임인 16대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17대 토머스 허버드 대사, 18대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모두 북핵 전문 외교관이다. 보즈워스 대사는 1995~1997년 제네바합의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는 역할을 맡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보즈워스 대사는 2001년 주한 미국대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2009~2011년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대북특별대표를 맡아 북미 협상을 총괄했다. 그는 미국 대북 협상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허버드 대사 역시 1994년 북미 제네바협상에 실무급으로 참여한 대북 협상 전문가다. 2001년 9월 취임한 허버드 대사는 이듬해 2차 북핵 위기를 맞게 된다. 아울러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 이듬해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2004년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시위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한미 동맹의 균열 우려가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는 데 임기를 보냈다.후임인 힐 대사는 2004년 9월 취임해 이듬해 2월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로 지명됐으며, 두 달 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취임하면서 대사직을 내려놓았다. 힐 대사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반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 대사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리코드 브레이커’ 대사들의 명과 암 19대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부터 23대 해리 해리스 대사까지 다섯 명의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 역사의 ‘신기록 보유자’들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직전에 주러시아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 중 역대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한국어 구사 대사, 성 김 대사는 최초의 한국계 대사였으며 마크 리퍼트 대사는 현재까지 최연소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해리스 대사도 최초의 직업군인 출신 대사 기록을 세웠다. 2005년 10월 취임한 버시바우 대사는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버시바우 대사는 부임 초기 북한의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를 거론하고 김정일 정권을 ‘범죄 정권’이라고 칭하며 대북 강경 기조를 보였고 당시 노무현 정부는 버시바우 대사에게 북한 비난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버시바우 대사는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실망스럽다”고 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빚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손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를 주장한 데 대해 “과학적 근거도 없이 불안을 야기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했으며, 민주당 측은 이를 공개하며 반발했다. 다만 버시바우 대사는 힐 대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을 상대로 한 공공 외교를 이어나갔다. 스티븐스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 국민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공공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사로 평가받는다. 스티븐스 대사는 미국 평화봉사단에 들어가 한국 복무를 자원, 1975~1977년 충남 예산군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78년 국무부에 입부한 후 1983~1989년 한국에 다시 와 서울 대사관과 부산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008년 10월 취임하자마자 33년 전 봉사한 예산중학교를 방문, “예산은 내가 외교관으로 필요한 자질을 배웠던 곳”이라며 한국 국민의 마음을 샀으며, 블로그도 개설해 글을 연재하며 ‘파워 블로거’로서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후임 성 김 대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6자회담 특별대표를 역임하다 그 해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김 대사는 2017년 주필리핀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듬해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과 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실무협상을 했다. ●‘같이 갑시다’ 한미 동맹 캐치프레이즈 만든 리퍼트 리퍼트 대사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보좌관을 지내다 2008년 오바마 정부 인수팀에 합류했다. 정부 출범 후 국방장관 수석보좌관,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2014년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이전 직업 외교관 출신 대사들이 ‘늘공’(늘 공무원)이었다면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참모로서 관직을 맡은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셈이었다.리퍼트 대사는 2015년 3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기종 씨에 의해 습격을 당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습격 소식이 전해지자 리퍼트 대사의 수술은 물론 한미 관계에 대한 우려의 여론이 높아졌다. 리퍼트 대사는 사건 당일 수술을 마치고 트위터에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귀합시다. 같이 갑시다!”라고 올리며 우려의 여론을 신속히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같이 갑시다’(Go together)는 한미 동맹의 캐치프레이즈가 돼 한미 동맹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인사말이나 건배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됐다. 리퍼트 대사는 대사 부임 전 한국과 인연이 별로 없었지만, 부임 후 빠르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익히며 한국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리퍼트 대사는 한국 부임 후 갖게 된 첫째 아들에게 ‘세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줬고, 딸에게도 ‘세희’라는 미들 네임을 붙였다. 야구팀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유명한 리퍼트 대사는 대사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 두산을 응원하면서 ‘야구 외교’를 선보이고 있다. ●막후 외교서 공공 외교로 대사의 역할 변화했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2월 주호주 미국대사로 지명됐다가 세 달 후 주한 미국대사로 재지명된 뒤 7월 취임했다. 전임 리퍼트 대사가 퇴임하고 1년 6개월여 만에 공석을 메운 터라 기대도 높았던 반면, 그가 대북·대중 강경파라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교차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6월 상원 외교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실제 협상에 진지한지 가늠하는 차원에서 주요 (한미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에 보조를 맞췄다. 해리스 대사가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우려를 표하고 문 대통령의 남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한미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개인의 신념이라기보다 트럼프 정부의 기조를 대변한 것이다. 해리스 대사뿐만 아니라 전임 대사들도 한국 정부와 이견이 있는 이슈에서 항상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버시바우 대사도 재임 기간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의 기조대로 ‘남북 경제협력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 해리스 대사처럼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대사도 2010년 한미의 핵심 현안이자 2000년대 한국 내 반미 정서의 주요인이었던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한국의)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기를 바라지만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며 비록 정제된 톤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그럼에도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분담협상 등 한미 관계의 현안에 대해 한국 정부를 전례 없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공교롭게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중에 해리스 대사가 부임하고, 그의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가 한국 정부에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며 해리스 대사에게는 ‘고압적인 미국 외교관’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한미 관계가 과도기를 겪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 모두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을 변화한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같은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고 한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한미 관계가 상호 호혜적 관계로 재조정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대국민 공공 외교를 통해 한미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변화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과거 미국대사의 한 마디에 한국 정부의 기조가 흔들렸던 경험을 겪었던 한국민은 미국대사의 발언을 정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간주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대사들도 한국과 미국이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던 역사와 한국민의 의심을 고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오해를 자초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1990년대 초반까지 주한 미국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냉전 이후 한국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로 변화했다”고 했다. 이어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대사 개인의 성향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한미 정부가 변화된 양자 관계 속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제된 톤으로 발표하는 데 서툰 모습을 보이는 탓도 있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이호준 시간여행] 오일장의 옛날 팥빙수

    [이호준 시간여행] 오일장의 옛날 팥빙수

    우연히 들른 곳에서 오일장을 만나는 날은 괜스레 기분이 좋다. 그날도 그랬다. 지나는 길에 몇 가지 물건을 살 일이 있어 작은 읍에 들렀는데 마침 장날이었다. 하지만 한여름의 오일장은 쓸쓸했다. 그러잖아도 손바닥만 한 장터인데 뙤약볕까지 내리쪼이다 보니 장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시들어 가는 채소를 앞에 놓고 앉은 촌로도, 생선 몇 마리 늘어놓은 어물전 사내도 장대처럼 쏟아지는 햇살이나 헤아릴 뿐이었다. 장이 그 모양이다 보니 나도 금세 무료해졌다. 한 가지 물건이 강렬하게 시선을 당기지 않았다면 무료하게 돌아서 나올 뻔했다. 군것질거리를 파는 간이 점포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란 기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빙수기였다. 스위치 한 번 누르면 순식간에 얼음을 분해하는 요즘의 자동 빙수기가 아니라 손으로 돌려서 얼음을 가는 그 둔탁한 기계. 빙수기를 본 순간 느닷없이 목이 칼칼해지더니 입안이 푸석푸석 마르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저절로 점포 쪽으로 향했다. 요즘이라고 팥빙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맛좋은 빙수가 쏟아지는 세상이지만,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달콤한 추억’의 정점에 있는 이름이 팥빙수다. 더군다나 에어컨·냉장고 같은 말을 책으로 배우던, 더위를 식힐 것이라고는 냉수·냉차·미숫가루·아이스케키가 전부였던 시골에서 팥빙수는 귀한 존재였다. 팥빙수의 그 황홀한 맛은 만들어지는 동안의 기다림과 비례해서 몸피를 키웠다. 기계에 큼직한 얼음을 올려놓고 손잡이를 돌리면 대팻밥처럼 스윽스윽 밀려나오는 결 고운 얼음. 그렇게 갈린 얼음은 꽃잎처럼 곱게 떨어졌다. 하얀 꽃들이 그릇에 소복이 쌓이는 순간 아이들은 눈구덩이에 오줌이라도 갈기고 난 듯 진저리를 치고는 했다. 그 얼음 꽃 위에 미숫가루와 팥을 올리고 연유를 뿌리고…. 쫄깃해 보이는 떡은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마지막으로 뿌리던 파란 물과 빨간 물, 그 달콤해 보이던 물들이 색소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훗날 알았다.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아주 오랜 추억과 마주친 감동은 깊고 길었다. 마치 몇십 년 전의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다.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앉아 얼음 덩어리가 팥빙수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한 장 한 장 눈에 새겼다. 기계에서 얼음 꽃이 피어나는 순간 가슴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꼴깍꼴깍 침을 삼키고 말았다. 이 땅에 팥빙수가 등장한 건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얼음에 단팥을 얹어 먹는 수준이었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과 함께 상륙한 연유가 섞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제과점의 인기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내용물이나 모양도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빙수가 등장하면서 생과일이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필수조건이 됐다. 팥이 첨가물 중 하나로 전락하면서 팥빙수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됐다. 녹차빙수, 와인빙수, 아이스크림빙수, 과일빙수….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다. 나 같은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저 화려한 군것질거리 중 하나일 뿐 아련한 추억 속의 그 팥빙수는 아니었다. 그런 참에 시골 장터에서 만난, 그 멋없어 보이는 팥빙수가 나를 끌어당긴 것이었다. 다 만들어진 팥빙수를 한 수저 입에 떠 넣는 순간, 아!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이 입속에서 송사리처럼 파닥거렸다. 고향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 누운 듯 가슴 속까지 시원해졌다. 정적만 떠도는 여름 장터에 중년 사내 하나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어느덧 맛보다는 추억을 먹는 나이가 됐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면서….
  • “대표가 노조위원장에 개통지연 부탁” VS “부탁한 일 없어 허위사실 법적 대응”

    “대표가 노조위원장에 개통지연 부탁” VS “부탁한 일 없어 허위사실 법적 대응”

    경기 김포도시철도 운영사인 ‘김포골드라인운영’ 대표가 노조위원장에게 철도개통이 지연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골드라인운영사 대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허위사실이라며 즉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지난 7일 김포시청 내부행정망에 철도과의 한 직원이 올린 글로 인해 김포지역에 파문이 일고 있다. 9일 김포시와 김포시청 내부행정망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지난 7월25일 골드라인운영 대표가 김포도시철도 개통이 지연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운영사 노조위원장에게 했다는 믿기지 않는 내용의 제보를 받았다. 시에서는 제보받은 내용을 3중으로 체크했고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 내용은 시 내부에도 보고됐고, 국회의원실 2곳에도 관련 사실이 전달됐다”고 덧붙였다. 철도과 직원은 “김포시와 서울교통공사가 맺은 김포도시철도 운영 및 유지관리 협약서에 따라 영업시운전 시작 전에 모든 시설물에 대한 관리권을 운영사에 부여했으나 운영사는 서류상 인수인계(도장날인-행정적인 절차)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량 유지관리 책임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2년 전부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운영사를 투입했지만, 운영사 대표는 개통 노력보다는 안전을 핑계로 자신들의 유지관리 비용 보전을 위해 운영사 노조에게 개통지연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참아야 할까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운영사 대표는 서울신문과 전화통화에서 “노조위원장에게 철도개통 지연을 부탁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발끈했다. 이어 “노조위원장이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허위사실로 밝혀졌지 않느냐. 김포총연합회 등으로부터 봉변당할 수도 있고 우리가 위협을 느낄 정도라서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허위사실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모기업인 교통공사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해 변호사와 협의한 뒤 법적대응에 나설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노조 관계자는 “대표이사가 지난 7월 22일 ‘떨림현상과 관련해 차륜 삭정과 차량 방향전환은 단기대책으로 근본적 원인 해소책은 아니다. 노조가 회사와 같은 방향을 취해줬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은 했지만 철도개통을 지연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구경와~ 은평 야시장

    구경와~ 은평 야시장

    서울 은평구가 도시농부의 결실을 맛볼 수 있는 ‘은평 꽃피는 장날’을 오는 20일 야시장으로 전환해 운영한다. 구는 20일 폭염을 피해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롯데몰 은평점 야외광장에서 시장을 연다고 10일 밝혔다. ‘은평 꽃피는 장날’은 은평구와 근교의 도시 농부가 직접 기른 제철 친환경 농산물, 직접 만든 수공예품 등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상품을 주민들이 만나볼 특별한 기회다. 이번 장터에서는 우리밀을 주제로 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판매 부스가 마련됐다. 역촌초등학교 동문밴드의 공연, 우리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운영 등 다채로운 볼거리, 즐길거리도 펼쳐진다. 구 관계자는 “롯데몰 은평점 앞에서 진행되는 ‘은평 꽃피는 장날’처럼 대형 점포와 지역 소상공인이 서로 상생하는 다양한 협력 사업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겠다”며 “이번 행사가 우리동네텃밭협동조합과 은평구사회적경제허브센터 등이 주관해 여는 자리인 만큼 관련 사업을 육성시켜 사회적 경제와 대안 경제가 지역사회에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지겠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뜨겁던 청춘의 발바닥을 위하여…부산 한국신발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뜨겁던 청춘의 발바닥을 위하여…부산 한국신발관

    # 고무신, 1920년대부터 우리 민족의 신발로 “고기잡이할 때는 그물이 되었다가 모래밭을 달릴 때는 자동차가 되고 허공을 내지를 때는 비행기가 되는 검정 고무신의 그 가변의 세계는 아직도 내겐 그리움의 세계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2014>고무신. 이제는 생활사 박물관이나 ‘엄마 아빠 어릴 적에는’과 같은 작은 간판 달고 동네 구청 옆 전시실 한 켠에서나 간간히 볼 뿐이다. 고양이 코 같이 뾰족하게 뛰어나온 새색시 코고무신, 넙데데한 큰아버지 진양고무신, 해거름 장날 간고등어와 함께 아버지의 손에 들려온 7문 반짜리 흰 고무신을 안고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하던 시간을 만나러 간다. 부산에 위치한 한국신발관이다. 우리나라의 신발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1900년대까지 양반들의 경우 당혜(唐鞋), 운혜(雲鞋)니 하여 가죽이나, 비단, 삼베 등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지만 평민들은 주로 짚신이나 미투리, 나막신을 등을 신고 다녔고 여염집 아이들은 맨발이나 감발이 태반이었다. 191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고무신이 고무화, 호모화(護謨靴)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1919년에는 경성 종로에 대륙고무공업소라는 최초의 고무신 공장이 생기고 1923년에는 수입 혹은 조선에서 생산된 고무신이 1100만 켤레나 될 정도로 고무신은 민족의 대표적인 신발이 된다. # 한국 신발의 메카 부산,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주문자생산방식)으로 부산의 경우 1926년에 도변(渡邊) 고무공장이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 신발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고무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하고 고무 원료의 특성상 빠른 시기에 제화(製靴)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대표 고무신을 만들던 신발 회사 6개가 부산에 몰려 있었고, 고무신을 만들던 기술을 기반으로 합성 피혁 신발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신발은 내수를 넘어 해외 수출 상품으로 효자로 등극하였다. 1962년 첫 신발을 수출한 이래 1971년에는 5000만 달러, 1975년에는 1억 90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1980년대부터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주문자생산방식)을 통하여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의 세계적 브랜드 신발을 생산하면서 1990년 신발 수출로만 43억 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신발 산업은 급성장한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방식의 신발 생산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부산의 신발 산업은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 부가가치 신발, 기능성 신발 시장을 목표로 하여 부산은 신발 산업의 부흥기를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신발 수출 규모는 총 4억 8500만 달러에 달하며 이중 절반 정도의 성과가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바로 이러한 한국 신발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부산 진구의 신발 박물관인 한국신발관이다. 이곳은 2018년 2월 26일 옛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옥을 리모델링하여 대지 2644.6㎡, 연면적 4141.4㎡,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로 건립한 곳이다. 현재 1, 2층에는 한국 신발 산업의 역사를 대형 DID(디지털정보디스플레이)와 키오스크 등 각종 멀티미디어 장비를 이용해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운동선수, 연예인, 영화 속 신발 등 특별한 신발도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끈다. 특히 4층부터는 신발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실습장 및 신발 업체들이 입주해 있을 뿐만 아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현장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실시 중이어서 신발에 관심이 있는 관람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신발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신발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만족감이 높을 듯하다. 전시규모가 크지는 않다. 2. 누구와 함께? - 부산 진구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면 부담없이. 3. 가는 방법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백양대로 227 - 지하철 2호선 개금역(2번출구)에서 도보 7분 - 버스 : 129-1, 138-1, 160, 167, 169, 169-1(한국신발관 정문 버스정류장) 4. 특징은? - 한국 신발의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구입할 수 있는 신발의 종류는 많지 않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영화 ‘1987’에서 배우들이 신던 신발, 신발의 역사관. 7. 관람시 주의사항은? - 찾아가기가 힘들다. 전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많은 기대를 하지는 말기를.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k-shoes.kr/kr/ 9. 부산 진구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어린이 대공원, 부산 서면 1번가, 삼광사, 전포카페거리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한국신발관은 작은 박물관이지만 신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전시관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나라 수출 효자 상품이었던 신발에 관한 뜨거운 시간이 기록된 곳.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동휘(대통령장,1995년) 선생이다. 2005년 3·1절에 몽양 여운형(대한민국장) 등 사회주의 계열 54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는 등 2007년까지 다수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받았다. 그중에 주세죽이 있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의 부인. 코뮤니스트. 당대의 ‘얼짱’.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여성해방운동가.” 주세죽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다. 주세죽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돼 왔다. 수년 전 손석춘 작가의 ‘코레예바의 눈물’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 이야기’를 통해 생애가 알려졌다. ‘코레예바의 눈물’은 손 작가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한 주세죽의 자필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주세죽은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1년생이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죽은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녔고 피아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주세죽도 참가했다가 붙잡혔다. 한 달 동안 입에 담기 어려운 모멸적인 성고문을 받고 출소했다. 풀려난 주세죽은 함흥 시내 병원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일본인 의사의 성추행에 또다시 진저리를 친 주세죽은 중국 상하이 유학을 결심했다. 그곳에는 한 살 아래 친구 허정숙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피아노를 공부하러 간 상하이에서 주세죽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 김단야 등은 주세죽이 오기 한 달 전인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다. 박헌영은 책임비서였고 주세죽도 고려공청에 가입해 기관지 ‘올타’를 편집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박헌영을 뒤따라 주세죽은 1922년 3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먼저 갔던 박헌영과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김단야는 귀국 정보를 알아낸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세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주세죽은 여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통했다. 박헌영의 친구인 소설가 심훈은 대리석으로 깎은 얼굴이라고 했다. 주세죽을 모델로 ‘동방의 애인’이라는 소설도 썼다. 주세죽, 허정숙, 김단야의 동거녀 고명자를 당시 언론은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남자 삼총사였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반봉건, 여성해방의 뜻으로 단발머리를 했다. 주세죽은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1924년 5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이었다. 고무공장, 비단공장, 정미소를 찾아다니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여성 항일운동단체 근우회에도 동참했다. 1925년 5월 조선공산당이 출범했다. 조선공산당을 추동할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창립했다. 박헌영이 고려공청 책임비서를 맡았고 주세죽은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우발적인 술자리 사고로 조직이 탄로 났다. 김단야만 피신했고 주세죽,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이 검거됐다. 주세죽은 증거 부족으로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순종의 국장일인 1926년 6월 10일,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보름 만에 풀려났다.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기획한 공청 중앙위원이었지만, 박헌영이 아니라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정신이상자가 됐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요양을 이유로 함흥으로 간 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탈출했다. 임신한 주세죽은 도착하자마자 딸 영(影)을 낳았다. 1928년이었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단야가 먼저 가 있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선담당관이었다. 주세죽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줬다. 고려의 여성이라는 뜻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두 사람은 1932년 초 딸을 국제유아원에 맡겨놓고 상하이로 갔다. 영에게 ‘비비안나’라는 다른 이름을 지었다. 상하이에서 주세죽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지원하고 기관지를 국내로 들여보냈다. 이듬해 7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그 사이 주세죽과 김단야는 도망쳤다. 김단야는 박헌영이 고문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주세죽을 연모한 김단야의 거짓말이었다. 그러고는 사랑을 고백했다. 둘은 1934년 1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박헌영이 죽었다고 믿은 주세죽은 김단야와 결혼했다. 1937년 소련은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씌워 김단야를 체포했다. 이성태란 사람의 모함이었다. 이듬해 2월 13일 석 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주세죽도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죄목이었다. 1938년 5월 주세죽은 유배지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다. 유배지 크질오르다는 사할린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이 강제이주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월북한 뒤 1946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주세죽은 프라우다지에 난 기사를 보고 박헌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시 18세이던 비비안나에게 아버지임을 알렸다. 박헌영은 주세죽이 유배된 사실을 알고 최대한의 배려를 요청했다. 주세죽은 그다음 날 거주 제한이 풀렸다. 박헌영은 비비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주세죽을 만날 의사는 없었다.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스탈린은 거부했다. 주세죽은 딸에게로 가다 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휴전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나이 52세 때였다.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3년 후 죽임을 당했다. 주세죽의 첫 남편은 미제 스파이, 두 번째 남편은 일제 스파이로 몰려 죽은 것이다.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내고 1991년 89세로 사망했다. 고명자는 일제의 고문으로 원치 않는 전향을 했다가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했고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1989년 소련 당국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사면했다. 1991년 박비비안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박헌영의 고향 충남 예산에서 가져간 흙을 주세죽의 묘비에 뿌려줬다. 비비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입니다.” 비비안나는 무용수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2013년 사망했다.우리 정부는 2007년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단야에게는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원근은 앞서 1993년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한 윤세주(독립장)와 진광화(애국장)도 건국훈장을 받았다. 님 웨일스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김산(장지락)에게도 200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빨갱이’에게 무슨 훈장이냐”는 우파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현실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념의 무덤에서 독립유공자를 파내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우리 같은 시골 노인들에겐 농협직원이 스마트뱅킹이라오”

    “우리 같은 시골 노인들에겐 농협직원이 스마트뱅킹이라오”

    “농협이 없어진다고? 은행이라곤 여기뿐인데 없어지면 큰일 나!” 강원 횡성군 횡성읍에 사는 김갓난(89·가명) 할머니는 지난달 13일 NH농협은행 횡성군지부에서 ‘횡성에 시중은행이 없는데 농협도 없어지면 어떤 점이 불편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집 앞에서 장애인 이동서비스 차량을 타고 농협에 온다. 이 차를 타면 10분가량 걸리지만 버스를 타면 2시간가량 돌고 돌아야 한다. 김 할머니는 “통장에 돈을 넣고 빼려고 가끔 농협에 오는데 직원들이 안내를 잘해 줘서 편해”라면서 “농협이 없어지면 돈 찾을 데가 없어서 안 돼”라고 고개를 저었다.●횡성·평창엔 농협 이외 시중은행 지점 0곳 한우로 유명한 횡성에는 농협 이외 시중은행 지점이 없다. 1989년 강원은행 지점이 문을 열었지만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조흥은행에 합병된 뒤 구조조정을 거쳐 2001년 5월 폐점했다. 횡성읍 안에는 조흥은행을 인수한 신한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2대만 있다. 이날 농협을 찾은 원성희(49)씨는 “20년 전에는 조흥은행이 주거래은행이었는데 지점이 없어져서 은행일을 보려면 하루를 잡고 원주까지 나가야 했다”면서 “불편해서 주거래은행을 농협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원씨는 주택담보대출은 물론 남편이 운영하는 중소기업에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정책자금을 활용한다. 원씨는 “지금은 대출받으러 다른 시군까지 멀리 안 나가도 되니까 편한데 농협도 없어지면 금융서비스를 받기가 너무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은행들이 횡성에 지점을 두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장사가 안 돼서다. 2017년 기준 횡성군 인구는 횡성읍과 8개 면을 합쳐 4만 3211명이다. 인구가 적고 주민 상당수가 노인이다. 읍내에 농협은행 횡성군지부가 있고 면 단위에 축협을 포함해 6개 지역농협이 있다. 지난해 동계올림픽이 열린 평창군도 마찬가지이다.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던 강원은행 지점이 문을 닫은 뒤로는 농협만 평창을 지키고 있다. 평창올림픽 공식 후원은행이었던 KEB하나은행이 지난해 대회 기간 동안 평창을 비롯해 강원도 안에 4개 출장소를 운영했지만 대회 종료 직후 철수했다.●농협 “수익 보다 취약계층 위한 사회적 책임” 농협은 지난해 말 기준 전국 1122개 농·축협에서 총 4710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강원의 횡성·평창·고성·양구·화천군 등 5곳을 포함한 전국 21개 시군구에는 농협은행이나 지역농협만 있다.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7일 “비용 대비 수익도 중요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금융 서비스를 누구나, 특히 어려우신 분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금융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 농협금융의 정체성”이라고 지점 유지 이유를 밝혔다. 노인이 많은 지역에서 은행의 대면 서비스는 더욱 중요하다. 젊은층에게 당연한 인터넷·스마트뱅킹이 노인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여서다. 읍내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농협은행 횡성군지부를 찾는다는 이분남(79·가명) 할머니는 “입출금이랑 세금을 내려고 자주 들러”라면서 “젊은 사람들은 안방에서 휴대전화로 다 한다는데 우리는 불편해서 못해. 우리한테는 농협 직원들이 스마트뱅킹이야”라고 말했다. 농협 직원들은 창구를 찾은 노인들의 스마트폰에 애플리케이션을 깔아 주고 스마트뱅킹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하지만 70대 이상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일단 스마트폰 화면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다. 또 통장에 들어오고 나간 돈이 숫자로 찍히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된다.●평창군지부 ‘노인 전담’ 유정녀 청경 인기 그래서 농협은행 횡성군지부와 평창군지부에는 노인 전담 직원이 있다. 횡성군지부에서 2년째 일하는 이소정 주임은 노인들 은행일을 다 봐주다시피 해서 얼굴 자체가 신용이다. 이 주임은 “ATM이나 공과금수납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창구에서 직접 도와드린다”면서 “매번 부탁만 하기 미안하다면서 장날에 꽈배기나 음료수 등 간식을 사서 손에 쥐여 주고 가는 어르신들도 있다. 제 일이어서 당연히 해드리는 건데 제가 더 미안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 주임은 지역 특산물을 파는 ‘신토불이’ 창구도 맡고 있는데 ‘이 주임 매상 올려 줘야지’라면서 일부러 농산물을 사 가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유정녀 청경은 평창군지부의 마스코트다. 7년째 평창군지부에서 노인들을 안내하고 있다. 문밖에서부터 유 청경과 눈을 맞추고 손짓으로 부르는 노인들도 많다. 유 청경은 “ATM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업무는 거의 다 해드리고 창구에서 일을 보시는 분들은 입출금액 등을 종이에 다 써드린 뒤 본인에게 성함만 쓰시라고 하고 창구에서 바로 처리해 드린다”고 말했다. 유 청경도 어르신들로부터 직접 빚은 만두나 농사지은 채소 등을 자주 받는다. 횡성과 평창에서는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은행도 농협뿐이다. 특히 농협은 저금리로 대출을 바꿔 주는 대환업무에 적극적이다. 주민들이 은행에서도 충분히 대출받을 수 있는데 금융정보에 취약하다 보니 TV광고만 보고 대부업체에 전화해 고금리로 대출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런 주민들에게는 바꿔드림론이나 햇살론, 새희망홀씨대출 등 저금리 대출로 바꿔 준다. 실제 지역농협이 모인 농협상호금융은 1960년대 농촌에 만연했던 고리사채를 없애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농협상호금융은 지난해 말 기준 총수신 315조원, 대출 228조원 규모로 성장했다.●농축산경영자금·귀농·귀촌자금 등도 빌려줘 농협은행은 지역농협과 연계해 농축산경영자금, 귀농·귀촌·창업자금 등 정책자금을 빌려준다. 기본적으로 농협은행이 관리하지만 지역농협에서도 대출받을 수 있도록 지역농협이 창구 역할을 한다. 박상용 농협중앙회 횡성군지부장은 “지역농협에서도 영농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고 중소기업 저리대출은 농협은행에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농협의 정책자금대출은 지난해 말 기준 잔액이 19조 4000억원이며 이 중 72.2%(14조원)를 지역농협에서 빌려줬다. 지난해 신규 대출 규모는 7조 1000억원으로 지역농협에서 60.6%(4조 3000억원)를 취급했다. 농협은 사랑방 역할도 한다. 횡성군지부의 김택종 과장은 “1일과 6일이 장날인데 장에 들렀다가 농협에 와서 가족사나 고민 등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시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평창군지부에서 근무할 때 특별한 선물도 받았다. 할아버지 한 분이 미국에 있는 자녀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데 구비서류 등을 하나도 몰라서 김 과장이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 며칠에 걸쳐 통화해 송금을 해 줬다. 김 과장은 “한 달쯤 뒤에 사무실로 국제소포가 왔는데 할아버지 자녀들이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미국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서 샀다며 넥타이를 보냈다”며 웃었다. 농협은 금융서비스만 하는 게 아니다. 농가 지원은 물론 지역 봉사활동과 복지사업으로 수익을 환원한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가 터지면 해당 지역 농협 직원들이 곧바로 방역 작업에 나서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역의 이색사업을 발굴해 농협중앙회의 지방자치단체 보조사업으로 승인을 받아 예산을 지원하기도 한다. 최두헌 농협중앙회 평창군지부장은 “지난해 중앙회 지원액 9700만원은 평창군지부 수익에서 매우 큰 비중”이라면서 “농협이 금융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목적은 농민과 지역민들을 돕는 사업에 쓰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농협 지점이 있다 보니 직원들의 애환도 있다. 서울과 멀리 떨어진 오지로 발령이 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신입사원도 더러 있다. 폼나는 은행원이 되려고 농협에 들어왔는데 시골에 가서 가족·친구도 못 만나고 퇴근 후에는 상사들과 같은 숙소에서 생활해야 해서다. 대표적인 오지가 울릉도다. 그래서 울릉군지부장 발령에는 불문율이 있다. 승진 인사에서 경북 지역으로 발령 받은 지부장 중 최연소자가 간다. 농협 관계자는 “경북 지역 지부장 승진자들이 인사가 난 뒤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다른 지부장들과 나이를 비교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면서 “농협은 울릉도를 비롯한 지방에서 지역인재를 채용해 지방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런 문제점도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창·횡성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머문 곳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유관순 열사는 일상이 독립운동이었다

    머문 곳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유관순 열사는 일상이 독립운동이었다

    3월 1일 교문 닫자 담 넘어 만세현장에 휴교령 땐 ‘고향서 운동’ 친구들과 결의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지역과 연락 거사 전날 밤엔 직접 봉화 올려 신호 공주형무소에서 함께 옥살이한 김현경 柳열사 수의 짓고 시신 수습·장례 치러판결문은 유관순 열사를 다 담지 못했다. 유관순이 판결문의 출발선이자 그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한 주동자로 구분짓긴 했지만 판결문 속 공소사실은 유관순의 일부일 뿐이었다. 유관순은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유관순은 친구 4명과 이화학당 뒷담을 넘어 종로로 향했다. 교장이 학교 문을 잠궜기 때문이다. 이어진 3월 5일 학생단 만세운동에도 학교 몰래 참여했다 경찰에 붙잡혔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의 요구로 겨우 빠져나왔다. 유관순은 멈추지 않았고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아예 고향에서 각자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친구들과 결의했다. 13일 충남 천안으로 돌아가던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 친구 이정수·김복희와 함께 기차 안에서도 “대한독립! 대한독립!”을 외쳤다. 기독교 감리교 신자였던 유관순은 3월 16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 조인원을 비롯해 지역 교인 20여명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설명했고 “우리 마을이 죽은듯이 가만히 있을 순 없다”며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했다.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한 뒤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지역에 연락기관을 두고 각 지역 감리교인과 유림들에게 만세운동 동참을 촉구했다. 연락원을 자처한 유관순은 아주머니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고 혼자 곳곳을 다니며 참여를 독려했다. 거사 전날인 3월 31일 밤 매봉산 봉화대에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횃불을 올린 것도 유관순이었다. 3월 중순 이후 충남 지역에서는 목천보통학교(14일), 입장 광명공립보통학교(20일)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비롯해 금광회사 광부 200명의 만세운동(28일), 천안 읍내 3000명 군중의 시가지 행진(29일), 입장면 주민 300여명의 만세운동(30일) 등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아우내 장터와 같은 날 공주 장터에서 공주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특히 유관순과 깊은 의미가 있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하기 전 유관순이 다녔던 공주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등은 독립선언서 1000장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의 ‘현석칠 외 17인’ 판결문에 등장하는 유준석(본명 유우석·당시 20세)은 유관순의 오빠로, 남매가 각각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돼 공주형무소에서 조우했다. 유우석은 형무소에서 유관순에게 부모가 아우내 장터에서 일제의 총검에 살해됐다는 비보를 접하고 오열했다. 영명학교 출신으로 당시 경천소학교 교사였던 김현경(22)은 유우석과 함께 공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자신도 칼에 머리를 맞아 다쳤지만 더 심하게 다친 유우석을 유치장에서 간호했고 유관순과는 공주형무소에서 함께 생활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에게 항소를 설득한 것도 김현경이었다고 한다. 김현경은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못해 이화학당 보육과로 편입했다. 2심 재판 뒤 이감된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끊임없이 만세를 불러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던 유관순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형무소 내 만세운동을 주도해 또다시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결국 유관순이 그해 9월 28일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자 김현경은 이화학당 교장과 목사 등과 함께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하고 손수 수의를 짓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충남 공주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월의 역사 인물로 유관순과 김현경을 선정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총검 찔린 유관순, 헌병 군중 발포 막으려 총 잡은 채 “대한독립”

    총검 찔린 유관순, 헌병 군중 발포 막으려 총 잡은 채 “대한독립”

    “피고인 유관순은 이화학당 생도인데 경성(서울)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각 곳을 열을 지어 걸으며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일 충남 천안군 갈전면 병천시장 개시(開市)를 이용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휴대하고 오후 1시쯤 시장으로 달려가 수천명의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쓰가하라의 판결문 앞부분에 담긴 공소사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병천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주도자 11명의 판결문은 당시 17세 학생이던 유관순으로 시작된다.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한 감리교 속장(기도회 관리인)이었던 조인원(당시 54세)과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인 유중무(44)도 유관순과 함께 11명 중 가장 높은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판결 이유의 첫 시작은 유관순부터다. 판결문은 만세운동을 ‘계획’한 유관순을 따로 떼 맨 앞에 설명한 뒤 나머지 피고인들을 참가자로 나열했다. 유관순이 당시 만세운동의 핵심 주동자라고 본 것이다.●1심 보안법 위반·소요죄로 이례적 5년형 받아 1심인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판결문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심에서 유관순과 유중무, 조인원은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5년이 선고된 것은 매우 중한 처벌이었다. 게다가 판결문의 공소사실은 크게 두 가지 뿐이었다. 아우내 장터 장날인 4월 1일 오후 1시 군중들과 만세운동을 했다는 것과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헌병주재소에 부축해 데려갔고, 제지하는 헌병들에게 항의하며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징역 5년이나 선고된 데는 유관순 등의 치열한 법정 투쟁을 일제 사법부가 법정 모독으로 받아들여 ‘괘씸죄’를 덧씌웠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심 재판 과정에서 유관순은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왜 죄가 되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나는 도둑을 몰아내려 했을 뿐이다. 당신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았는데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고 격렬하게 따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심 판결문 속에서도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와 1심 법정에서의 모습처럼 한결같았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주도자 11명의 2심 판결문에는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현장과 헌병주재소에서의 소요 상황을 짧지만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2심 공판시말서(공판조서)와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의 신문조서 등이 인용됐다. ●“50보 앞 만세 행렬에 헌병 발포… 19명 즉사” 장날 3000여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병천헌병주재소 헌병들이 막아섰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에서 “만세를 부른 장소와 헌병주재소는 약 50보 거리였다.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헌병이 와서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검을 찔러 즉사 19명, 중상자 30명이 발생했다. 나의 아버지도 그때 찔려 살해됐다”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면서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고 있을 때 나는 양쪽을 제지하기 위해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총을 잡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 이미 유관순도 헌병의 총검에 옆구리를 찔렸다. 이 상처는 제대로 치료되지 못해 형무소 생활 내내 유관순을 고통스럽게 했다고 전해진다. 눈 앞에서 아버지 유중권(56)과 어머니 이소제(44)가 일제의 총검에 스러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17세 유관순은 더욱 격하게 일제에 항거했다. ●부모님 일제에 희생… 숙부·오빠도 옥살이 유중무가 쓰러진 형을 둘러멨고 유관순, 만세운동을 함께한 주민 40여명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고 큰소리로 헌병들에게 항의했고 주재소 입구를 막고 있던 헌병보조원 맹성호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년 할 것 같으냐. 때려죽이겠다”고 화를 냈다. 유관순은 고야마 헌병소장을 붙잡아 흔들고, 주민들을 제지하지 못하도록 그의 가슴에도 매달렸다. 김용이는 헌병에게 돌을 던지고 손을 잡아당겼고, 보조원 정춘영에게 “조선인인데 무엇을 하느냐. 죽여버리겠다”며 주전자를 그의 가슴에 던졌다. 조인원의 아들 조병호는 헌병 주곡정의 뺨을 때렸고, 다른 주민들은 주재소원의 총과 탄약합을 빼앗고 소장을 죽이라고 소리쳤다.●“나라 되찾으려는데 왜 무기로 민족 죽이냐” 유관순은 앞서 1심 재판에선 “만세를 부른 뒤 주재소로 가서 보니 아버지의 시체가 있어 화가 난 나머지 ‘내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군 무기)를 사용해 민족을 죽이느냐’고 말했는데 헌병이 총을 겨누자 죽지 않으려고 갑자기 그 가슴에 매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2심 재판부는 유관순·유중무·조인원을 각각 징역 3년으로 감형했다. 유관순이 직접 그린 뒤 아우내 장터에서 휘둘렀던 태극기는 법원에 압수됐다. 함께 재판을 받은 11명 중 유관순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고등법원에 즉각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관순은 주변의 설득에도 끝내 상고하지 않았다. “삼천리 강산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어렸을 적 마이클 잭슨에게…” 두 남성 BBC 인터뷰 동영상

    “어렸을 적 마이클 잭슨에게…” 두 남성 BBC 인터뷰 동영상

    어렸을 적 마이클 잭슨에게 성적 유린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두 남성이 얼굴을 드러냈다. 웨이드 롭슨(36)과 제임스 세이프척(40)은 1일 오후 7시(한국시간) 영국 BBC 채널2와 뉴스 채널을 통해 방영하는 ‘빅토리아 더비셔’ 프로그램에 출연해 각각 일곱 살과 열 살 때부터 잭슨과 둘이만 있게 되면 이같은 짓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롭슨은 심지어 14살 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고 주장했다. 세이프척 역시 14살 무렵까지 성적 유린이 이어졌는데 둘 모두 “셀 수 없이” “수백번에 수백번 이상” 차마 옮기기도 어려운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둘은 다음주 영국에서 방영될 다큐멘터리 ‘네버랜드를 떠나며’를 통해서도 이미 같은 폭로를 했던 남성들이다.성폭행 위기를 모면한 뒤에는 더 이상 성적 유린을 당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은 롭슨은 잭슨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만졌다며 그 말 끝에는 ‘누구라도 우리가 지금 하는 짓을 보면 너나 나나 감옥에 가 남은 여생을 보내고 우리 삶은 끝장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라 그와 헤어지는 게 몹시 겁먹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어떻게든 신과 같고, 가장 좋은 친구로 여겨졌던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릴 수 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잭슨은 성관계를 해보지 않은 자신이야말로 많은 아이들 가운데 선택받은 유일한 친구라고 말했고 자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했다. <아래 동영상에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나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세이프척은 열살 때 잭슨으로부터 성행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적 유린이 시작됐다고 털어놓았다. 프렌치 키스부터 시작해 점점 더 강도 높은 쪽으로 나아갔는데 부모들마저 손아귀에 넣으면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신뢰를 구축하려면 하루밤에 되는 건 아니다”며 “그는 아버지와 나, 부모 사이에 끼어들어와 날 누구로부터도 고립되게 만들었다. 유린을 당할 때면 내 일정 부분이 죽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잭슨 유족들은 둘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반박했다. 형제들이었던 티토, 말론, 재키, 조카 타지는 삼촌의 행동에 기이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매우 순결”했으며 “그의 순진한 구석 때문에 명성이 추락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형제였던 말론은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 유산기금은 두 사람이 이전에 “법정 증언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며 “두 위증자들은 자신들의 말 외에는 어떤 독자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도,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결코 내놓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학생·주부·농부로 이어진 외침… 전국 곳곳서 “조선독립만세”

    학생·주부·농부로 이어진 외침… 전국 곳곳서 “조선독립만세”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에서 촉발된 불꽃은 민초(民草)들에게 옮겨붙으며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들어야만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은 독립선언서를 베껴 써 이웃에 뿌리고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민중의 판결문에는 일상에 뿌리내려진 독립운동이 그대로 남아 있다.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었다. 민족대표 33명을 비롯한 초기 주도자들이 2월 하순부터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조직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거대한 만세운동을 경험한 이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흩어져 독립운동의 ‘불씨’를 전파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박충서(당시 22세)는 3월 1일 오후 2~4시 수천명의 군중과 몰려다니며 만세를 부른 뒤 3월 5일 서울역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에도 참여했다. 김포 고향집으로 돌아가서는 이웃들과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마을 곳곳에 격문을 붙였다. 3월 19일 시장통에서는 수백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체포 당시 그의 가슴엔 태극기가 있었다. 고종 황제 국장을 보기 위해 2월 28일부터 3월 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공주 출신 이수욱(30)은 귀향하자마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날인 13일 오전 9시쯤 태극기 150개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 줬다. 이수욱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잇따라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심인 고등법원 재판에서 “조선민족이 열성으로 만세를 부른 것은 인정(人情)이 발발한 것으로 부끄러울 게 없는 행동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월 5일엔 순종의 고종 반우식(신주를 모셔오는 일) 행차를 보기 위해 경기 고양군 청량리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림들도 모였다. 유림 유준근(60)은 “유생이 젊은 학생들과 같이 만세를 부를 순 없다”며 동료 6명과 함께 순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했다. 순종의 가마에 접근해 상소문을 전달하려고 할 때 경찰에 체포됐다.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유림 대표로 참석했던 어대선(59)은 5일 청량리에서 군중에게 독립사상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유생 김백원(60) 등 7명은 3월 12일 서울 종로의 음식점 영흥관에서 만나 조선 13도의 대표자 명의로 “조선의 독립은 2000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는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 조선의 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애원서’를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낭독했다. 함경남도 함흥 청년들은 3월 3일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5~100원의 운동자금을 모았다. 학생들이 운동에 나서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청년들은 함흥고등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과 함흥 농업학교 기숙학생들에게도 계획을 알렸다. 이근재(27) 등 주도자들은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 3000부를 인쇄했고 태극기도 제작했다. 그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 판사 지토우는 “학생들을 선동해 지방의 치안을 방해한” 행위로 판결문에 기록했다.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은 학생 도상록(16)은 훗날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교수를 지내며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린 인물로 추정된다. 뚝섬 공립간이농학교 학생인 손흥복(16)·조병직(21)·김동건(17)은 학생 30명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주도해 1심에서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3월 중순 경북 영덕에서는 강우근(40) 등의 주도로 읍내 시장에서 예수교 교인 등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고, 강원 원주에선 이현순(41) 주도로 4월 면사무소와 뒷산에서 주민 40여명이 모여 독립을 염원했다. 만세 운동에는 나이와 직업, 계층, 종교가 따로 없었다. 김유인(28)은 4월 25일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장채극·이철 등이 풍선을 사들여 ‘조선독립만세’, ‘공화만세’라고 써서 서울 시내에 띄우려고 하자 100원을 주며 풍선을 사서 모으도록 한 혐의(보안법 위반)로 192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규모 군중시위는 줄어들었지만, 외침은 질기게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특히 종로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낙타산(현재의 대학로 낙산)이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학생 이병철(18)과 공수명(17)은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들과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이 열리는 1920년 7월 16일을 앞두고 “요즘 경성부내(서울 시내)는 조용하고 평온하여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하는 자가 없는데 다시 기세를 높이자”고 계획했다. 7월 15일 이들은 큰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그 위에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써 낙타산에서 가장 높은 소나무 꼭대기에 이틀간 매달았다. 조선총독부 순사 아베·사가는 신문 과정에서 “18척이나 되는, 낙타산 가장 높은 곳으로 군중이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태극기를 발견하고 즉시 내렸으나 일반(민중)이 태극기를 바라보고 다시 어떤 사건이 돌발하지 않을까 암담했다”고 말했다. 이병철·공수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김포 3·1만세운동-3 끝] 장날 택해 향교·보통학교·주재소 돌며 만세시위하고 15차례 시위중 6번이나 횃불시위

    [김포 3·1만세운동-3 끝] 장날 택해 향교·보통학교·주재소 돌며 만세시위하고 15차례 시위중 6번이나 횃불시위

    경기 김포에서 3·1만세운동은 횃불과 봉화를 이용해 시위를 전개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28일 김포문화재단 자료에 의하면 모두 15회 만세시위 중 6차례나 횃불시위가 전개됐는데 이는 김포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포에서 만세시위 연락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남산과 북악산 봉화로부터였다. 서울의 봉화를 발견하자마자 김포 마을별로 자기동네 뒷산 상봉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이 봉화의 오름을 신호로 각자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김포지역은 지리적으로 낮은 구릉지대와 대부분이 평야로 이뤄져 횃불시위가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보면 당시 3월25일 고촌면 만세시위에서 볼 수 있듯 밤중에 뒷산에서 횃불을 들고 시위 계획을 세운 것이나 월곶면의 정인교·윤종근·민창식이 28일 밤 함반산에서 주민과 횃불 만세시위를 전개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 조선총독에게 보낸 3월 30일자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1보) (고 제 9476호) 문서에 의하면 군내면과 촌면 외 2개 장소에서 횃불시위가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은 군중 집회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장날을 이용해 시위를 계획했다. 대부분 만세시위를 하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향교나 보통학교·주재소를 돌며 독립의 의지를 천명했다. 김포지역 3·1만세운동은 격렬한 시위형태를 보였다고 한다. 김포군지(1977)에 따르면 3월22일 월곶면 시위에서도 시위대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포위하고 백일환은 순사를 구타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면서기에게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강제하기도 했다. 김포 3·1만세운동은 평화적 시위와 더불어 주재소를 포위하고 순사를 폭행하는 폭력적 방법까지도 전개한 격렬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포에서 독립만세운동 발발일자에 대한 문서상 기록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일제의 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월곶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임용우의 아들 임명덕 필사본 자료다. 1919년 3월 23일자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일본대신에게 보낸 ‘전국 각지의 3월22일 시위운동현황’ 전보 문서와 김포경찰서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 두 종류가 있다. ‘전국 각지의 3월22일 시위운동현황’ 전보 문서에 따르면 김포군 군하리에서 400여명 시위가 있었으나 주모자를 체포하고 해산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의 또다른 문서는 1919년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전국소요사건을 기록한 ‘소요사건 경과개람표’ 자료다. 이 문서에는 소요사건을 일자별·지역별·참여인원별로 구분하고 김포에서 첫 만세시위를 3월22일 월곶면과 검단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임용우의 아들 임명덕이 기록한 필사본이다. 임명덕은 1919년 3월29일 월곶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임용우의 아들이다. 이 자료에서는 김포의 첫 만세시위를 1919년 3월3일로 기록하고 있다. 임명덕(1948)에 의하면, 3월1일 임용우가 천도교 지시로 3·1독립선언식에 참석한 후 3월3일 고향으로 돌아와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1978년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 권오수 교사가 조사한 ‘덕적도 3·1독립만세운동 진리조사’ 자료집에는 임용우의 3월3일 만세시위에 대해 3월29일의 만세시위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유로 당시 국장배관과 교조기일(3월10일) 예배차 각 지방 신도간부가 상경해 그들에게 독립거사의 내의를 밝히고 독립거사의 대표까지를 선정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임용우가 3월3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임용우가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3월3일 월곶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면 판결문에 사건내용이 나타나야 하는데 3월29일 월곶면 시위와 4월9일 덕적도 만세시위 사건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3월3일 기록은 일자를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본다. 이로써 김포지역에서 첫 만세시위는 검단면과 월곶면의 3월 22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올해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소감에 대해 광복회 경기도지부 강서보 김포시지회장은 “독립유공자들에게 사소한 것이나마 예우해준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면 좋겠다. 김포시에서 다른 지자체처럼 일제에 항거한 분들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달기’나 ‘명예 시민증 수여’ 같은 사업을 추진한다든지, 학생과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중국·러시아 광복운동 유적지를 탐방하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강 회장은 “국가유공자 예우법에 보면 단체 중 광복회 예우순서가 4번째로 돼 있는데 지역행사에서나마 홀대받지 않도록 자리배치에 신경써 예우해줬으면 더할나위없겠다”고 말했다. 한편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예술행사가 김포아트홀과 김포아트빌리지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전야제 행사로 28일 오후 4시 특별강연으로 ‘광복에서 통일로-우리가 만든 평화, 우리가 만날 평화’가 김포아트빌리지 세미나실에서 개최된다. 오후 7시 김포아트홀 공연장에서는 김포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인 3·22 군하장터, 3·23 오라니장터, 3·24 고촌신곡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박충서·임철모·이경덕을 주인공으로 창작 음악극 ‘오래된 내일’이 공연된다. 3월 1일 김포아트빌리지 한옥마을에서는 먹거리 장터가 조성되고 연희만담꾼과 자유발언대, 목판태극기 만들기, 청사초록 태극길 조성, 평화 그림판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오후 2시에는 한옥마을 주변에서 당시 김포시의 독립운동가로 분장한 배우들을 중심으로 100년 전 만세운동을 재현한다. 김포인들의 의기를 되새기기 위해 시민과 학생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경기 김포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돼 재판을 받은 인원은 고촌면 6명을 비롯해 양촌면 9명, 월곶면이 13명으로 모두 28명이다. 1919년 3월 23일자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에 의하면 월곶면 만세시위 상황에 대해 주모자 10명을 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판결문을 통해서 22일 성태영·이살눔·백일환·이병린·오복영 등 5명이 재판을 받은것으로 기록돼 있다. 체포된 10명 중 5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5명은 훈방처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포에 독립만세운동을 한 사람이 많은데 당시 관련 사진이나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이경덕(1886~1948·이살눔)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7월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박형규 목사 외 17명과 11개 교회가 참여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이살눔의 양아들 부인인 며느리가 생존해 있으나 석방이후 삶의 기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날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남편이 몰래 밤중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현재 묘소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전언이다. 임용우(1884~1919)는 당시 통진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27세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로 부임해 8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애국청년들을 길러냈다. 그해 2월하순쯤 천도교회의 연락을 받고 3월1일 상경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에 참가하고 3월3일 고향인 군하리 면사무소 앞에 면민들을 집합시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또 1919년 3월29일 최복석·윤영규 등과 함께 월곶면 갈산리·조강리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 갈산리에서 최복경이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고 오후 2시 군하리 향교와 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을 벌였다. 또 4월9일 자기가 재직하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해 모인 참관들과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됐다. 이해 5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순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박충서는 김포출신으로 3월23일 양곡리 장날을 이용해 박승각·박승만·안성환·전태순·오인환·정억만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3·1운동 파고다선언식에 참석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귀향했다. 그는 3월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박승각·박승만·전태순과 만나 양곡장날인 23일을 정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태극기와 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해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줘 동리에 배포하도록 했다. 23일 양곡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 앞에 나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장터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다. 9월4일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월곶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박용희와 당인표·조남선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 않았다. 박용희는 22일 만세를 주도한 후 길림성으로 망명해 한림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마련해 제공했다. 1933년 7월 일인살해 사건으로 소만교 국경으로 도피생활 중 해방돼 고향 월곶면 고양이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6·25전까지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당인표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망명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 조남선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망명했으며 4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국 각지의 3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시위 운동상황’ 보고서에 의하면 23일 양촌면 오라리장터 만세시위에서 60여명을 연행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60명 주모자 중 9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처리됐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지 (1955)에 의하면 김포 3·1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손혜원의 ‘끝장 기자회견’…거침없는 어록

    손혜원의 ‘끝장 기자회견’…거침없는 어록

    손혜원 의원이 23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명했다. 거침 없는 말투로 기자를 훈계하거나 악의적이라고 판단되는 기사를 보도한 매체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반박했다. 이날 손 의원은 전남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내 폐공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전칠기 박물관을 옮기려고 손 의원이 남편이 이사장인 문화재단 명의로 사들인 곳이다. 썩은 서까래가 보이는 건물 내부는 흙바닥이었다. 단출하게 의자와 탁자만 놓은 간담회장은 이 건물이 어딜 봐서 투기할 만한 곳이냐고 강조한 듯했다. 손 의원은 간담회장에 들어오며 취재진에게 건물이 어떠냐고 물었고 몇몇 기자가 “당장 무너질 것 같다”고 하자 “당연하죠. 얼마나 비어 있었는데…조심하세요. 여기서 여러분 사고 나는 거 제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손 의원은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연일 의혹을 해명하고 있음에도 별도의 기자간담회를 마련한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저는 상관 없는데 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취재를 당하고 있다”며 “오죽하면 나전칠기 관계자들…여기 조선일보 송 기자 안 오셨냐. 저한테 오시지 왜 그 사람들한테 가서 저한테 좋은 말 한 건 안 쓰고 나쁜 얘기들만 편집해서 실으시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 의원은 “(궁금증이) 끝장날 때까지 질문을 받겠다”며 “국민들이 보는 왜곡되고 악의적으로 편집된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생중계로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목포MBC 등 언론사 유튜브 계정을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 손 의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응수했다.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한 불쾌감도 감추지 않았다.조선일보 기자가 “지난해 11억원을 대출받아 그 중 7억 1000만원을 재단을 통해 부지 매입하는데 썼는데 나머지 대출금의 용처를 알려줄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손 의원은 “그거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첫 질문을 조선일보에서 하는 게 참 이해가 안 된다”며 “검찰 조사를 곧 받을테니 그때 곧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목포 부동산 매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SBS의 기자가 질문을 하자 “(이번 보도를 한) 탐사팀 소속이냐. 탐사팀은 왜 안 왔냐. 주변에만 있지 말고 저한테 오시라”라고 말했다. 해당 기자는 손 의원이 조카 명의로 일부 매입한 게스트하우스 ‘창성장’을 국회에서 언급하며 게스트하우스 지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해충돌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에 손 의원은 “그래서 (창성장이) (국가) 지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국회에서 언급하면 창성장이 장사가 잘 되느냐. 여러분이 기사 내줘서 장사 잘 되는 것”이라며 “6개월째 계속 적자였는데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국회의원 신분으로 지원 받은 것 없다. 융자받고 수리해서 운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손 의원은 이해충돌에 대한 질문이 여러 차례 이어지자 “이해충돌 지겨워죽겠다. 그만 받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또 다른 기자는 목포시 문화재 위원인 김지민 목포대 건축학부 교수와의 관계를 따져 물으며 목포에서 김 교수 행사에 4번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손 의원은 “거짓말이다. 4번 한 적 없다”고 말했다. 해당 기자가 구체적인 날짜를 읊기 시작하자 손 의원은 말 허리를 자르며 “그런 건 자료로 제출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목포를 살린다는 취지는 좋은데 왜 투명하게 하지 못했느냐는 기자의 추궁에 손 의원은 “제가 투명하지 못한 게 있습니까?”라고 되물으며 “내 일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투명하다”고 반박했다.차기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손 의원은 “정치는 대통령을 바꾸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며 “임기 끝까지 정책이나 입법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지 내 나이가 몇 인데 또 하겠는가. 안 한다”고 단언했다. 손 의원은 기자간담회를 마치면서 “제가 이야기하거나 너무 화가 나서 반발을 하는 과정에서 사납게 말을 하거나 여러분께 상처를 드렸다면 사과드린다”면서도 “잘 모르고 기사 쓰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 의원은 “투기와 차명 재산 의혹 보도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며 “이해 충돌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이해가 벌어지지 않았는지는 찾아보고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황사손’ 이원이 말하는 고종 승하 100주년“올해가 고종광무태황제 승하 100주년입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인 것을 알면서도 만세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고종 황제의 붕어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황사손으로서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21일 오전 6시30분쯤 일제에 의해 독살되셨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지만 해마다 이날 정오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에 가서 제향을 봉행합니다. 고종 황제가 당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나라를 잘 못 이끌었다는 오해를 아직도 받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이 잘 못된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21일 정오 고종 왕릉인 남양주서 ‘홍릉제향’ 봉행 그를 만나면 무엇부터 질문할까 고민했다. ‘군주국이 아닌 나라에서 황위 계승자 제1순위로서의 삶’을 먼저 물어볼까하다 ‘고종 사망 100주년의 소회’를 물었다. 황사손(皇嗣孫·(대한제국)황실의 적통을 잇는 후손) 이원(57·본명 이상협)은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만감이 교차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5대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총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도 겸하고 있다. 고종의 증손자인 이원 총재는 2005년 영친왕계의 이구 황태손이 타계한 이후 3년상을 치르고 그의 계자(系子)로 입양돼 황가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어땠나요. -> 고종이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역적 매국노들은 눈엣가시 같은 고종을 독살했든 겁니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서 한약·식혜·커피를 드시고 30여분만에 시해되셨습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황제는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고, 사후에 보니 혀와 치아가 타 없어지고,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으며,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살됐다는 확실한 증거 기록입니다. “고종, 21일 아침 6시 한약·커피·식혜 마시고 승하심한 경륜 후…혀·치아 타 없어져 독살 시해 증거고종 시해 이유…항일독립 망명정부 차단하려고”- 고종 승하에 백성들은 왜 ‘만세(萬歲)’라고 외쳤을까. -> 만세가 요즘이야 축하나 환호할 때 외치는 소리이지만, 그때만 해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경칭이었고, 죽음이란 단어를 꺼렸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수장이었던 황제가 억울하게 독살당하자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백성들이 공분을 일으킨 것입니다. 고종의 항일 투쟁의 뜻을 기리는 백성들이 인산일(因山日·왕과 왕가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앞서 자발적으로 모여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인산일에 맞추려다 국장날 소요는 예가 아니다고 미루고, 전날인 3월2일은 일요일이어서 하루 늦췄다고 합니다. 결국 1일로 날짜가 맞추진 것이 3·1독립만세운동입니다. - 고종의 독립운동 가운데 일반인이 잘 모를 법한 이야기는. ☞ 고종 황제는 1897년 황제국을 선포한 것도 지금보면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입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1894년 갑오개혁때 공식적인 국문 즉 ‘나랏글’로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된 겁니다. 한글을 이용한 잡지와 신문 발간도 적극 권장했지요.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도 출간도 가능했던 겁니다. 또 일본보다 2년 빠른 1884년 미국 에디슨전기회사와 협약해 창덕궁에 전기등소를 설치하고 종로에 전차를 도입했습니다. 종로를 아시아에서 가장 번쩍이며 화려한 명소로 탈바꿈시키셨던거죠. 친일역적 매국노들이 고종 황제를 철저히 암군(暗君·어리석고 아둔한 군주)으로 묘사했지만 최근 학자들에 의해 개명군주(開明君主)로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고종, 한글 공식 나랏글 선포…개명군주 역할 많아대한광복군정부 수장…항일 구국 독립운동 구심점- 대한광복군정부에 대해 설명하면. ☞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황위에서 강제로 퇴위되셨습니다만 1914년 이상설(1871~1917)을 중심으로 설립된 첫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수장이 되어 항일구국 운동을 지원하셨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다시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됩니다. 간접적인 독립활동에 한계를 느끼신 황제는 이상설과 이회영(1867~1932)의 계획 아래 중국에 망명해 항일구국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려 하셨습니다. 이런 망명 계획을 첩보로 입수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민병석·송병준·이완용·윤덕영·한상학이 고종의 망명을 차단하려고 암살을 한 겁니다. -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에서 황사손의 역할은. ☞ 가장 대표적인 직무는 종묘대제·사직대제·환구대제(대한제국 황실 선포 및 국태민안 기원 제사)·조경단대제(조선왕실 시조 즉 전주이씨 시조묘 제사) 그리고 연중 66회의 왕릉제향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연간 70번 거행되는 제사에서 왕과 왕비 신위에 술잔을 처음으로 올리는 제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왕실 초헌관은 조선시대 때부터 국왕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만 이구 황태손 저하를 이어 제가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그 유구한 역사·문화적인 유산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으며, 대한제국황실이 그 정통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공화국이 된 나라에서 황제 계승자라는 직위는 다른 분들에겐 사실 설명하도 이해를 잘 못하는, 그래서 외로운 면이 있습니다. “황사손 역할, 연중 70회 대제·제향 초헌관 맡아유구한 역사 계승…대한민국 정통성 뒷받침 자부”- 황실 최고령인 이해경씨 환국은. ☞ 제게는 고모님이 되시는 해경 황녀님은 1930년 태어나셨서 올해 구순이 됩니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왕자이신 의친왕(1877~1955)의 5녀입니다. 조선왕실 법도로 보면 의친왕의 공주가 되고, 대한제국 황실 법도로 보면 황녀가 됩니다.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학 사서로 조선의 기록을 많이 발굴해 내셨습니다. 1996년 정년퇴직하신 이후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계십니다. 뉴욕의 한인사회 주요 행사에 참석하시며 교민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들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황녀라는 호칭보다 ‘한국 공주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독립한 조국이 있는데 이역만리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더 늦기 전에 환국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환국시 친모이신 의친왕비가 생활하셨던 안동별궁이나 사동궁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황실의 상징성을 고려해 이구 황태손 저하와 영친왕비, 그리고 덕혜옹주께서 기거하셨던 창덕궁 낙선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황사손으로 보람을 느꼈던 일은. ☞ 2017년과 작년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 관계자들과 오하이오주에 사는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호러스 알렌 박사 후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소개되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계자들은 저를 ‘His Imperial Highness’(저하)로 경칭해 놀랐습니다. 또 알렌 박사의 고향에선 ‘한국의 황태자가 온다’는 소문에 알렌 박사의 증조카 며느리의 집에 동네사람들이 저를 만나려 몰려왔습니다. 그들도 저를 ‘Your Highness’로 높여 불러주었습니다. 한 이웃은 오찬 음식점까지 자신의 자녀들을 데려와 소개시켜주면서 “오늘 한국의 황태자를 알현하는 것은 저희 가족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서의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됐고 또한 큰 위로도 받았습니다. 황사손에 대한 마땅한 영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해외왕실교류수석위원이신 김영관 박사는 제1위 황위 계승자이니 영어로 ‘The Crown Prince His Imperial Highness’(황태자 저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현재 영어로는 그렇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알렌 후손들로부터 환수된 문화재는 서울시에 기증하였습니다. “황실 최고령 이해경 황녀, 늦기 전에 환국해야사직대제·환구대제·왕릉제향 유네스코 등록 추진”- 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은. ☞ 올해는 특히 국민을 섬기며 대한민국의 문화 융성에 이바지하려고 합니다.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즉, 민주공화정에서도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의 직계손이 제향에 초헌관으로 참여함으로서 그 뿌리와 원형이 인정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직대제와 환구대제 그리고 왕릉제향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올해도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뉴욕한인축제나 에딘버러축제에서 어가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이나 어가행렬은 단순한 제례의식의 절차를 뛰어 넘어 대한민국만이 보유한 역사·종교·문화 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우리의 역사문화 유산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 알렉 박사의 후손들을 올해 직접 방문해 작년에 환수하지 못한 나머지 유물 환수와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발굴할 계획입니다. 이런 여정을 영상으로 남길까합니다. 그는 황사손이라고 하지만 궁궐이 아니라 서울 성북동의 한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황사손이 되기 전에는 그도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상문고와 뉴욕공과대(NYIT)를 마치고 미국 케이블사 홈박스오피스(HBO)의 PD로 일하다 1990년 귀국했다. 금강기획을 거쳐 현대방송 PD, 현대홈쇼핑 디지털방송본부장으로 있다가 황사손으로 선정됐다.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미련이 많겠다’고 하자 그는 “하늘의 부름이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능숙한 꼬드김에 영상통화로 이어져“녹화됐다… 입금 안하면 유포” 겁박 중학생은 코묻은 돈까지 탈탈 털어내 ‘영상통화 스폰서’라며 여성 노리기도 “돈 없으면 몸으로 갚아” 성관계 압박 다정하고 달콤한 말을 건네던 그는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했다. 피해자들이 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면 더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끊임없이 돈을 갈취했고, 일부 여성에게 노예 부리듯 성폭행까지 일삼았다. 서울신문은 한국사이버보안협회가 여명 서울시의원에게 제출한 피해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범행 현장을 재연했다. 피해자들이 어떻게 범인에게 속았고, 어떤 협박을 당했는지 가감없이 공개해 추가 피해를 막으려는 취지다.●채팅 4시간 만에 80만원 뜯긴 24세 남성 군대를 갓 제대한 전승우(24·가명)씨가 카카오톡 아이디 ‘미향’과 처음 대화를 시작한 건 지난해 1월 4일 오후 9시 18분이다. 채팅 앱에서 알게 된 미향이 영상통화를 하자며 카톡 아이디를 건넸고, 전씨가 따로 말을 걸었다. 프로필 사진 속 미향은 한눈에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런데 이걸로 영통(영상통화) 어떻게 해요? ㅋㅋ”(전씨) “페이스톡 ㅋㅋㅋ 몰라?”(미향) “알아 ㅋㅋ 바로 건다.”(전씨) 9초, 8초, 10초. 전씨가 세 차례나 짧은 페이스톡을 걸었지만, 미향은 번번이 화면이 안 보인다고 했다. 미향은 “‘시크릿톡’ 있어? 이걸 깔면 보일 거야”라며 ‘Secre Talk.rar’란 압축파일을 건넸다. 용량 474.84kb의 작은 파일이었다. “깔았는데 아무것도 안 뜨는데? 서버 점검 중이래.”(전씨) “정말 점검 중이네…. 오늘 점검하나 봐.”(미향) 하지만 전씨가 파일을 내려받은 순간 휴대전화는 이미 해킹당했고, 문자메시지 내용과 지인 연락처가 모두 미향에게 넘어갔다. 미향이 건넨 파일은 휴대전화 정보를 탈취하는 악성 앱이었다. 미향은 “다시 한번 해볼까?”라며 먼저 영상통화를 제안했다. 9초간 페이스톡을 진행한 뒤 “보인다 ㅎㅎ”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민낯이라며 수줍어하는 척도 했다. 이어 서로 벗은 모습을 보여주자며 능숙하게 리드를 했다. 전씨의 상반신에 문신이 있는 걸 보자 “난 타투 있는 남자 좋아”라며 애교를 부렸다. 두 사람의 페이스톡은 오후 10시 10분까지 약 1시간가량 총 12차례 진행됐다. 짧게는 10초, 길게는 3분 22초간 이뤄졌다. 미향은 교묘하게 중간 중간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휴대전화를 고정해 전씨 얼굴과 은밀한 부위를 모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래야 자신도 흥분된다고 했다. “님 자위하는 동영상 녹화 끝났고요. 휴대전화 모든 지인 번호 해킹됐습니다. 80만원 보내고 깔끔하게 삭제하겠습니까. 아니면 동영상 유포 진행할까요. 바로 답장 안 하면 당장 유포합니다. 경찰에 신고해도 못 잡고 창피만 당하고 소문만 퍼질 겁니다. 생각 잘하세요.” 미향은 문자를 통해 본색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상황에 한동안 답을 못하던 전씨는 “합의하고 싶네요”라고 입력했다. 미향은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를 알려준 뒤 당장 전화하라고 했다. “10초 내로 전화 안 하면 유포합니다. 10, 9, 8….” 카운트다운을 하듯 몰아붙였다. 급해진 전씨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있다고 하자 1분 단위로 “빨리 구하라”고 재촉했다. 전씨는 미친듯이 전화를 돌려 지인들로부터 20만원을 빌렸다. 미향은 대포통장 계좌번호를 찍어준 뒤 당장 송금하고, 영수증을 사진으로 보내라고 했다. 제한 시간은 오후 11시. 딱 10분의 시간을 줬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미향의 재촉에 전씨는 넋이 완전히 나갔다. 급히 편의점 자동화기기(ATM)로 달려갔지만, 송금 방법을 몰라 허둥댈 정도였다. 미향은 “송금하는 방법도 몰라? 개OO. 유포해줄까”라며 더욱 거세게 나왔다. 20만원을 송금하자 나머지도 입금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60만원 빨리 구하세요. 30분…” “죄송합니다. 100통 넘게 전화했는데 다 (돈이) 없다고 합니다.” 전씨는 급기야 어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구했다. 미향은 또 다른 계좌번호를 줬다. 오전 1시 24분. 결국 전씨는 총 80만원을 보냈다. 미향과 카톡을 시작한 지 4시간 6분 만이었다.●‘노예’가 되어버린 15살 중학생 “그래서 얼마 있냐고. 대답 안 해?” “제발요. 지금 현금은 없어요. 체크카드에 1만 2000원 있어요.” 지난해 2월 몸캠피싱에 걸린 중학생 윤성진(15·가명)군은 모바일 메신저 라인에서 손이 닳도록 범인에게 빌었다. ‘김다은’이란 가명을 쓴 범인은 자신을 25살이라고 소개했고, 윤군은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김다은은 “영섹(영상을 통한 성관계) 할래?”라며 꼬드겼다. ‘심야톡.zip’란 파일을 보내 깔게 한 뒤 윤군 휴대전화를 해킹했다. “합의라는 건 빈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 편의점 가서 만원짜리 문상(문화상품권) 사.” 문화상품권은 구하기 쉬운 데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어 몸캠피싱범이 자주 이용하는 거래 수단이다. 그렇게 범인들은 ‘코 묻은 돈’까지 탈탈 털었다. 김다은은 이후에도 윤군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돈 없으니까 몸으로 때워”라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윤군에게 20대 여성으로 가장해 남성들이 많이 찾는 채팅 사이트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다. 닉네임은 ‘외로워’나 ‘놀아줘’를 쓰라고 했다. 또 ‘야하게 놀아요. 화끈한 밤 같이 보내요’ 등의 메시지를 건넨 뒤 남성들이 접근하면 김다은의 라인 아이디‘ekdms0322’를 알려주라고 했다. 윤군을 일종의 ‘노예’로 부리며 또 다른 피해자를 낚으려 한 것이다. “일단 오늘은 (채팅) 앱 많이 깔고 내일부터 시작해. 앱 하나하나 들어가서 사람 끌어.”(김다은) “예 무조건 다 할게요. 살려주세요.”(윤군) “기억해. 잠수하는 순간 유포한다 영상. 내가 말 걸면 바로 답하고. 알았어?”(김다은) “절대 잠수 안 해요. 제발요.”(윤군) 윤군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돕지 않으면 학교는 물론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군은 매일 4시간 동안(오후 8~12시) 온라인 호객 행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다은은 윤군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돈을 뜯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내에 10만원 모으고. 알았지. 말 잘 들으면 유포 안 할게.” “최대한 구할게요. 용돈 당겨서 바로 받을게요. 10만 모으면 지워주시나요.” ●재력 과시한 남성에게 짓밟힌 21세 여성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요. 영통은 서로 부담 없고 사생활도 지킬 수 있잖아요.” 양아정(21·여·가명)씨는 지난해 3월 페이스북 메신저로 ‘paris’란 가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paris는 자신과 정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하면 100만원씩 주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은 강남에 사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양씨가 “○○○에 산다”고 하자 그쪽에도 자기 가게가 있다고 했다. 양씨에게 계좌번호를 찍어달라고 해 당장 송금할 것처럼 연기했다. 양씨는 주저했다. “왜 저 같은 애랑 스폰을…. 예쁘고 몸매 좋은 애들 많은데.” “(영상통화 시) 성적인 거 위주로 시키겠네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영통하는 거 캡처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paris는 갖은 말로 양씨를 안심시켰다. “저는 얼굴, 몸매 안 보고 지금 할 분을 구하는 거라….” “유출 걱정하시는데 저도 다 보여드려요. 그냥 서로 즐기는 거에요.” 계속된 설득에 양씨가 경계심을 풀자 paris는 화질이 안 좋다며 카톡에서 대화하자고 했다. 대화 장소가 바뀌자 한층 적극적으로 나왔다. 양씨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난감해하자 얼굴을 보인 채 나체 사진을 찍도록 유도했다. “죄송합니다. 안 할래요. 아직 돈 보내신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돈이 너무 절실해 잠깐 잘못 생각했어요.” 양씨는 점점 심해지는 paris의 요구에 그만하자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paris는 “녹화 다 했으니 쇼부(협상) 치자”며 속내를 드러냈다. “지인이 보면 무슨 생각할까”라고 협박했다. “아정씨한텐 선택권이 없는 거 같은데. 1. 노예 2. 섹파(성관계 파트너) 3. 영통 셋 중 하나 고르세요. 빨리 말해요. 시간 없음.” 올가미는 단단했다. 벗어날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그가 제시한 것 중 2번을 선택했다. 1번을 고르면 무슨 짓을 시킬지 두려웠고, 3번은 또 녹화를 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paris는 협박 수위를 높였다. 집단 성관계를 하고 한 번에 끝내자고 했다. 양씨가 단호히 거절하자 자신과 10차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요구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paris는 양씨를 직접 만나는 게 불가능했다. 직업이 없이 친구집에 얹혀산다고 한 양씨에게 돈을 뜯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paris는 ‘아는 동생’을 양씨에게 보낼 테니 그와 성관계를 한 번 맺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아는 동생’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다른 조직원으로 추정된다. “오빠를 만나야 영상을 지울 수 있지 동생을 만나는 건 아무런 의미 없잖아요.” 양씨는 버티다 못해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왜 그러세요…. 만날게요. 날짜는 내일 연락드릴게요. (같이 사는) 친구가 (지금 집에) 와서요.”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능숙한 꼬드김에 영상통화로 이어져 “녹화됐다… 입금 안하면 유포” 겁박 중학생은 코묻은 돈까지 탈탈 털어내 ‘영상통화 스폰서’라며 여성 노리기도 “돈 없으면 몸으로 갚아” 성관계 압박 다정하고 달콤한 말을 건네던 그는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했다. 피해자들이 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면 더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끊임없이 돈을 갈취했고, 일부 여성에게 노예 부리듯 성폭행까지 일삼았다. 서울신문은 한국사이버보안협회가 여명 서울시의원에게 제출한 피해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범행 현장을 재연했다. 피해자들이 어떻게 범인에게 속았고, 어떤 협박을 당했는지 가감없이 공개해 추가 피해를 막으려는 취지다.●채팅 4시간 만에 80만원 뜯긴 24세 남성 군대를 갓 제대한 전승우(24·가명)씨가 카카오톡 아이디 ‘미향’과 처음 대화를 시작한 건 지난해 1월 4일 오후 9시 18분이다. 채팅 앱에서 알게 된 미향이 영상통화를 하자며 카톡 아이디를 건넸고, 전씨가 따로 말을 걸었다. 프로필 사진 속 미향은 한눈에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런데 이걸로 영통(영상통화) 어떻게 해요? ㅋㅋ”(전씨) “페이스톡 ㅋㅋㅋ 몰라?”(미향) “알아 ㅋㅋ 바로 건다.”(전씨) 9초, 8초, 10초. 전씨가 세 차례나 짧은 페이스톡을 걸었지만, 미향은 번번이 화면이 안 보인다고 했다. 미향은 “‘시크릿톡’ 있어? 이걸 깔면 보일 거야”라며 ‘Secre Talk.rar’란 압축파일을 건넸다. 용량 474.84kb의 작은 파일이었다. “깔았는데 아무것도 안 뜨는데? 서버 점검 중이래.”(전씨) “정말 점검 중이네…. 오늘 점검하나 봐.”(미향) 하지만 전씨가 파일을 내려받은 순간 휴대전화는 이미 해킹당했고, 문자메시지 내용과 지인 연락처가 모두 미향에게 넘어갔다. 미향이 건넨 파일은 휴대전화 정보를 탈취하는 악성 앱이었다. 미향은 “다시 한번 해볼까?”라며 먼저 영상통화를 제안했다. 9초간 페이스톡을 진행한 뒤 “보인다 ㅎㅎ”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민낯이라며 수줍어하는 척도 했다. 이어 서로 벗은 모습을 보여주자며 능숙하게 리드를 했다. 전씨의 상반신에 문신이 있는 걸 보자 “난 타투 있는 남자 좋아”라며 애교를 부렸다. 두 사람의 페이스톡은 오후 10시 10분까지 약 1시간가량 총 12차례 진행됐다. 짧게는 10초, 길게는 3분 22초간 이뤄졌다. 미향은 교묘하게 중간 중간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휴대전화를 고정해 전씨 얼굴과 은밀한 부위를 모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래야 자신도 흥분된다고 했다. “님 자위하는 동영상 녹화 끝났고요. 휴대전화 모든 지인 번호 해킹됐습니다. 80만원 보내고 깔끔하게 삭제하겠습니까. 아니면 동영상 유포 진행할까요. 바로 답장 안 하면 당장 유포합니다. 경찰에 신고해도 못 잡고 창피만 당하고 소문만 퍼질 겁니다. 생각 잘하세요.” 미향은 문자를 통해 본색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상황에 한동안 답을 못하던 전씨는 “합의하고 싶네요”라고 입력했다. 미향은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를 알려준 뒤 당장 전화하라고 했다. “10초 내로 전화 안 하면 유포합니다. 10, 9, 8….” 카운트다운을 하듯 몰아붙였다. 급해진 전씨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있다고 하자 1분 단위로 “빨리 구하라”고 재촉했다. 전씨는 미친듯이 전화를 돌려 지인들로부터 20만원을 빌렸다. 미향은 대포통장 계좌번호를 찍어준 뒤 당장 송금하고, 영수증을 사진으로 보내라고 했다. 제한 시간은 오후 11시. 딱 10분의 시간을 줬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미향의 재촉에 전씨는 넋이 완전히 나갔다. 급히 편의점 자동화기기(ATM)로 달려갔지만, 송금 방법을 몰라 허둥댈 정도였다. 미향은 “송금하는 방법도 몰라? 개OO. 유포해줄까”라며 더욱 거세게 나왔다. 20만원을 송금하자 나머지도 입금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60만원 빨리 구하세요. 30분…” “죄송합니다. 100통 넘게 전화했는데 다 (돈이) 없다고 합니다.” 전씨는 급기야 어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구했다. 미향은 또 다른 계좌번호를 줬다. 오전 1시 24분. 결국 전씨는 총 80만원을 보냈다. 미향과 카톡을 시작한 지 4시간 6분 만이었다.●‘노예’가 되어버린 15살 중학생 “그래서 얼마 있냐고. 대답 안 해?” “제발요. 지금 현금은 없어요. 체크카드에 1만 2000원 있어요.” 지난해 2월 몸캠피싱에 걸린 중학생 윤성진(15·가명)군은 모바일 메신저 라인에서 손이 닳도록 범인에게 빌었다. ‘김다은’이란 가명을 쓴 범인은 자신을 25살이라고 소개했고, 윤군은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김다은은 “영섹(영상을 통한 성관계) 할래?”라며 꼬드겼다. ‘심야톡.zip’란 파일을 보내 깔게 한 뒤 윤군 휴대전화를 해킹했다. “합의라는 건 빈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 편의점 가서 만원짜리 문상(문화상품권) 사.” 문화상품권은 구하기 쉬운 데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어 몸캠피싱범이 자주 이용하는 거래 수단이다. 그렇게 범인들은 ‘코 묻은 돈’까지 탈탈 털었다. 김다은은 이후에도 윤군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돈 없으니까 몸으로 때워”라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윤군에게 20대 여성으로 가장해 남성들이 많이 찾는 채팅 사이트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다. 닉네임은 ‘외로워’나 ‘놀아줘’를 쓰라고 했다. 또 ‘야하게 놀아요. 화끈한 밤 같이 보내요’ 등의 메시지를 건넨 뒤 남성들이 접근하면 김다은의 라인 아이디‘ekdms0322’를 알려주라고 했다. 윤군을 일종의 ‘노예’로 부리며 또 다른 피해자를 낚으려 한 것이다. “일단 오늘은 (채팅) 앱 많이 깔고 내일부터 시작해. 앱 하나하나 들어가서 사람 끌어.”(김다은) “예 무조건 다 할게요. 살려주세요.”(윤군) “기억해. 잠수하는 순간 유포한다 영상. 내가 말 걸면 바로 답하고. 알았어?”(김다은) “절대 잠수 안 해요. 제발요.”(윤군) 윤군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돕지 않으면 학교는 물론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군은 매일 4시간 동안(오후 8~12시) 온라인 호객 행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다은은 윤군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돈을 뜯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내에 10만원 모으고. 알았지. 말 잘 들으면 유포 안 할게.” “최대한 구할게요. 용돈 당겨서 바로 받을게요. 10만 모으면 지워주시나요.” ●재력 과시한 남성에게 짓밟힌 21세 여성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요. 영통은 서로 부담 없고 사생활도 지킬 수 있잖아요.” 양아정(21·여·가명)씨는 지난해 3월 페이스북 메신저로 ‘paris’란 가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paris는 자신과 정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하면 100만원씩 주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은 강남에 사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양씨가 “○○○에 산다”고 하자 그쪽에도 자기 가게가 있다고 했다. 양씨에게 계좌번호를 찍어달라고 해 당장 송금할 것처럼 연기했다. 양씨는 주저했다. “왜 저 같은 애랑 스폰을…. 예쁘고 몸매 좋은 애들 많은데.” “(영상통화 시) 성적인 거 위주로 시키겠네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영통하는 거 캡처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paris는 갖은 말로 양씨를 안심시켰다. “저는 얼굴, 몸매 안 보고 지금 할 분을 구하는 거라….” “유출 걱정하시는데 저도 다 보여드려요. 그냥 서로 즐기는 거에요.” 계속된 설득에 양씨가 경계심을 풀자 paris는 화질이 안 좋다며 카톡에서 대화하자고 했다. 대화 장소가 바뀌자 한층 적극적으로 나왔다. 양씨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난감해하자 얼굴을 보인 채 나체 사진을 찍도록 유도했다. “죄송합니다. 안 할래요. 아직 돈 보내신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돈이 너무 절실해 잠깐 잘못 생각했어요.” 양씨는 점점 심해지는 paris의 요구에 그만하자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paris는 “녹화 다 했으니 쇼부(협상) 치자”며 속내를 드러냈다. “지인이 보면 무슨 생각할까”라고 협박했다. “아정씨한텐 선택권이 없는 거 같은데. 1. 노예 2. 섹파(성관계 파트너) 3. 영통 셋 중 하나 고르세요. 빨리 말해요. 시간 없음.” 올가미는 단단했다. 벗어날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그가 제시한 것 중 2번을 선택했다. 1번을 고르면 무슨 짓을 시킬지 두려웠고, 3번은 또 녹화를 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paris는 협박 수위를 높였다. 집단 성관계를 하고 한 번에 끝내자고 했다. 양씨가 단호히 거절하자 자신과 10차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요구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paris는 양씨를 직접 만나는 게 불가능했다. 직업이 없이 친구집에 얹혀산다고 한 양씨에게 돈을 뜯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paris는 ‘아는 동생’을 양씨에게 보낼 테니 그와 성관계를 한 번 맺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아는 동생’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다른 조직원으로 추정된다. “오빠를 만나야 영상을 지울 수 있지 동생을 만나는 건 아무런 의미 없잖아요.” 양씨는 버티다 못해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왜 그러세요…. 만날게요. 날짜는 내일 연락드릴게요. (같이 사는) 친구가 (지금 집에) 와서요.”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미녀와의 짜릿한 채팅… 눈치 챘을 땐 나는 이미 노예였다

    능숙한 꼬드김에 영상통화로 이어져 “녹화됐다… 입금 안하면 유포” 겁박 중학생은 코묻은 돈까지 탈탈 털어내 ‘영상통화 스폰서’라며 여성 노리기도 “돈 없으면 몸으로 갚아” 성관계 압박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래서 남성은 피해자의 고통을 모른다. 아무리 근절을 외쳐도 절반뿐인 공허한 메아리가 되는 이유다. 그런데 피해자의 대부분이 남성인 디지털 성폭력이 있다. ‘몸캠피싱’이다. 서울신문이 만난 몸캠피싱 피해자들은 “죽는 게 낫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실제 2014년엔 몸캠피싱을 당한 남자 대학생이 투신 자살했다. 피해 남성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피해자의 입장이 된 남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몰카나 국산 야동이 왜 사라져야 하는지 남성들이 고민해 봤으면 한다. 다정하고 달콤한 말을 건내던 그는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했다. 피해자들이 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면 더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끊임없이 돈을 갈취했고, 일부 여성에게 노예 부리듯 성폭행까지 일삼았다. 서울신문은 한국사이버보안협회가 여명 서울시의원에게 제출한 피해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범행 현장을 재연했다. 피해자들이 어떻게 범인에게 속았고, 어떤 협박을 당했는지 가감없이 공개해 추가 피해를 막으려는 취지다.●채팅 4시간 만에 80만원 뜯긴 24세 남성 군대를 갓 제대한 전승우(24·가명)씨가 카카오톡 아이디 ‘미향’과 처음 대화를 시작한 건 지난해 1월 4일 오후 9시 18분이다. 채팅 앱에서 알게 된 미향이 영상통화를 하자며 카톡 아이디를 건넸고, 전씨가 따로 말을 걸었다. 프로필 사진 속 미향은 한눈에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런데 이걸로 영통(영상통화) 어떻게 해요? ㅋㅋ”(전씨) “페이스톡 ㅋㅋㅋ 몰라?”(미향) “알아 ㅋㅋ 바로 건다.”(전씨) 9초, 8초, 10초. 전씨가 세 차례나 짧은 페이스톡을 걸었지만, 미향은 번번이 화면이 안 보인다고 했다. 미향은 “‘시크릿톡’ 있어? 이걸 깔면 보일 거야”라며 ‘Secre Talk.rar’란 압축파일을 건넸다. 용량 474.84kb의 작은 파일이었다. “깔았는데 아무것도 안 뜨는데? 서버 점검 중이래.”(전씨) “정말 점검 중이네…. 오늘 점검하나 봐.”(미향) 하지만 전씨가 파일을 내려받은 순간 휴대전화는 이미 해킹당했고, 문자메시지 내용과 지인 연락처가 모두 미향에게 넘어갔다. 미향이 건넨 파일은 휴대전화 정보를 탈취하는 악성 앱이었다. 미향은 “다시 한번 해볼까?”라며 먼저 영상통화를 제안했다. 9초간 페이스톡을 진행한 뒤 “보인다 ㅎㅎ”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민낯이라며 수줍어하는 척도 했다. 이어 서로 벗은 모습을 보여주자며 능숙하게 리드를 했다. 전씨의 상반신에 문신이 있는 걸 보자 “난 타투 있는 남자 좋아”라며 애교를 부렸다. 두 사람의 페이스톡은 오후 10시 10분까지 약 1시간가량 총 12차례 진행됐다. 짧게는 10초, 길게는 3분 22초간 이뤄졌다. 미향은 교묘하게 중간 중간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휴대전화를 고정해 전씨 얼굴과 은밀한 부위를 모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래야 자신도 흥분된다고 했다. “님 자위하는 동영상 녹화 끝났고요. 휴대전화 모든 지인 번호 해킹됐습니다. 80만원 보내고 깔끔하게 삭제하겠습니까. 아니면 동영상 유포 진행할까요. 바로 답장 안 하면 당장 유포합니다. 경찰에 신고해도 못 잡고 창피만 당하고 소문만 퍼질 겁니다. 생각 잘하세요.” 미향은 문자를 통해 본색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상황에 한동안 답을 못하던 전씨는 “합의하고 싶네요”라고 입력했다. 미향은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를 알려준 뒤 당장 전화하라고 했다. “10초 내로 전화 안 하면 유포합니다. 10, 9, 8….” 카운트다운을 하듯 몰아붙였다. 급해진 전씨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있다고 하자 1분 단위로 “빨리 구하라”고 재촉했다. 전씨는 미친듯이 전화를 돌려 지인들로부터 20만원을 빌렸다. 미향은 대포통장 계좌번호를 찍어준 뒤 당장 송금하고, 영수증을 사진으로 보내라고 했다. 제한 시간은 오후 11시. 딱 10분의 시간을 줬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미향의 재촉에 전씨는 넋이 완전히 나갔다. 급히 편의점 자동화기기(ATM)로 달려갔지만, 송금 방법을 몰라 허둥댈 정도였다. 미향은 “송금하는 방법도 몰라? 개OO. 유포해줄까”라며 더욱 거세게 나왔다. 20만원을 송금하자 나머지도 입금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60만원 빨리 구하세요. 30분…” “죄송합니다. 100통 넘게 전화했는데 다 (돈이) 없다고 합니다.” 전씨는 급기야 어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구했다. 미향은 또 다른 계좌번호를 줬다. 오전 1시 24분. 결국 전씨는 총 80만원을 보냈다. 미향과 카톡을 시작한 지 4시간 6분 만이었다. ●‘노예’가 되어버린 15살 중학생 “그래서 얼마 있냐고. 대답 안 해?” “제발요. 지금 현금은 없어요. 체크카드에 1만 2000원 있어요.” 지난해 2월 몸캠피싱에 걸린 중학생 윤성진(15·가명)군은 모바일 메신저 라인에서 손이 닳도록 범인에게 빌었다. ‘김다은’이란 가명을 쓴 범인은 자신을 25살이라고 소개했고, 윤군은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김다은은 “영섹(영상을 통한 성관계) 할래?”라며 꼬드겼다. ‘심야톡.zip’란 파일을 보내 깔게 한 뒤 윤군 휴대전화를 해킹했다. “합의라는 건 빈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 편의점 가서 만원짜리 문상(문화상품권) 사.” 문화상품권은 구하기 쉬운 데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어 몸캠피싱범이 자주 이용하는 거래 수단이다. 그렇게 범인들은 ‘코 묻은 돈’까지 탈탈 털었다. 김다은은 이후에도 윤군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돈 없으니까 몸으로 때워”라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윤군에게 20대 여성으로 가장해 남성들이 많이 찾는 채팅 사이트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다. 닉네임은 ‘외로워’나 ‘놀아줘’를 쓰라고 했다. 또 ‘야하게 놀아요. 화끈한 밤 같이 보내요’ 등의 메시지를 건넨 뒤 남성들이 접근하면 김다은의 라인 아이디‘ekdms0322’를 알려주라고 했다. 윤군을 일종의 ‘노예’로 부리며 또 다른 피해자를 낚으려 한 것이다. “일단 오늘은 (채팅) 앱 많이 깔고 내일부터 시작해. 앱 하나하나 들어가서 사람 끌어.”(김다은) “예 무조건 다 할게요. 살려주세요.”(윤군) “기억해. 잠수하는 순간 유포한다 영상. 내가 말 걸면 바로 답하고. 알았어?”(김다은) “절대 잠수 안 해요. 제발요.”(윤군) 윤군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돕지 않으면 학교는 물론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군은 매일 4시간 동안(오후 8~12시) 온라인 호객 행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다은은 윤군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돈을 뜯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내에 10만원 모으고. 알았지. 말 잘 들으면 유포 안 할게.” “최대한 구할게요. 용돈 당겨서 바로 받을게요. 10만 모으면 지워주시나요.” ●재력 과시한 남성에게 짓밟힌 21세 여성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요. 영통은 서로 부담 없고 사생활도 지킬 수 있잖아요.” 양아정(21·여·가명)씨는 지난해 3월 페이스북 메신저로 ‘paris’란 가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paris는 자신과 정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하면 100만원씩 주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은 강남에 사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양씨가 “○○○에 산다”고 하자 그쪽에도 자기 가게가 있다고 했다. 양씨에게 계좌번호를 찍어달라고 해 당장 송금할 것처럼 연기했다. 양씨는 주저했다. “왜 저 같은 애랑 스폰을…. 예쁘고 몸매 좋은 애들 많은데.” “(영상통화 시) 성적인 거 위주로 시키겠네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영통하는 거 캡처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paris는 갖은 말로 양씨를 안심시켰다. “저는 얼굴, 몸매 안 보고 지금 할 분을 구하는 거라….” “유출 걱정하시는데 저도 다 보여드려요. 그냥 서로 즐기는 거에요.” 계속된 설득에 양씨가 경계심을 풀자 paris는 화질이 안 좋다며 카톡에서 대화하자고 했다. 대화 장소가 바뀌자 한층 적극적으로 나왔다. 양씨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난감해하자 얼굴을 보인 채 나체 사진을 찍도록 유도했다. “죄송합니다. 안 할래요. 아직 돈 보내신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돈이 너무 절실해 잠깐 잘못 생각했어요.” 양씨는 점점 심해지는 paris의 요구에 그만하자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paris는 “녹화 다 했으니 쇼부(협상) 치자”며 속내를 드러냈다. “지인이 보면 무슨 생각할까”라고 협박했다. “아정씨한텐 선택권이 없는 거 같은데. 1. 노예 2. 섹파(성관계 파트너) 3. 영통 셋 중 하나 고르세요. 빨리 말해요. 시간 없음.” 올가미는 단단했다. 벗어날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그가 제시한 것 중 2번을 선택했다. 1번을 고르면 무슨 짓을 시킬지 두려웠고, 3번은 또 녹화를 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paris는 협박 수위를 높였다. 집단 성관계를 하고 한 번에 끝내자고 했다. 양씨가 단호히 거절하자 자신과 10차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요구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paris는 양씨를 직접 만나는 게 불가능했다. 직업이 없이 친구집에 얹혀산다고 한 양씨에게 돈을 뜯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paris는 ‘아는 동생’을 양씨에게 보낼 테니 그와 성관계를 한 번 맺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아는 동생’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다른 조직원으로 추정된다. “오빠를 만나야 영상을 지울 수 있지 동생을 만나는 건 아무런 의미 없잖아요.” 양씨는 버티다 못해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왜 그러세요…. 만날게요. 날짜는 내일 연락드릴게요. (같이 사는) 친구가 (지금 집에) 와서요.”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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