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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시 국제슬로시티 어워드 수상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북 전주시가 슬로시티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는 도시로 인정을 받았다. 전주시는 최근 프랑스 미헝드시에서 열린 ‘2018 국제슬로시티연맹 시장총회’에서 지역주민 마인드와 교육 부문 슬로시티 어워드를 수상했다고 24일 밝혔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해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세계 30개국 244여개 슬로시티 회원 도시를 대상으로 에너지·환경, 인프라, 도시 삶의 질, 사회적 연대 등 7개 부문에 대한 평가를 실시해 최우수도시를 선정한다. 전주시는 문화와 전통, 공동체를 계승하는 정책을 펼치고 사람과 환경 중심의 행정으로 슬로시티가 갖춰야 할 네트워크를 잘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슬로시티 정신을 일반 시민에게 확산하기 위해 개설한 ‘슬로시티 전주학교 오손도손’ 프로젝트도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슬로시티 시장군수협의회장을 맡은 김승수 전주시장은 이번 행사에 참석, 대표연설을 하고 전주시의 슬로시티 정책을 소개했다. 김 시장은 “전주는 세계 유일의 도심형 슬로시티로서 슬로시티를 상징하는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착실히 걸어가고 있다”면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철학을 바탕으로 슬로시티의 수도가 되기 위해 당당히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 시대를 마감하고, 오는 29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한다. 용산에 미군이 주둔한 지 73년, 미군사령부가 창설된 지 61년 만이다. 미군이 용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이다.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따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24군단이 일본군 무장해제와 행정권 장악을 위해 서울에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용산이다. 이후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을 제외되면서 한때 482명의 미 고문단만 남기도 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미군이 다시 투입된다. 1957년엔 미군사령부가 용산에 자리를 잡는다. 미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은 ‘한국민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한국과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에 따라 미국은 2003년 주한미군 재배치에 나섰고, 당시 한국에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전 시기와 규모를 놓고 한ㆍ미 양국 간 줄다리기를 하고, 개발 주체 문제로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갈등을 빚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미군 사령부 이전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안타까운 오욕의 땅이 용산이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처음 진을 친 것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이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퇴한 고니시 군이 지금의 원효로 4가에,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갈월동에 각각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했다고 한다. 지금은 배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태원(梨泰院)으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항복한 일본인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타인(利他人)으로, 왜군의 만행으로 태어난 2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청나라 군대가 청일전쟁 때까지 여기에 주둔한다. 1882년 흥선대원군의 청나라 압송도 이곳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때인 1904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은 용산 일대 땅 300만평을 강제 수용해 군기지화한다. 이렇게 보면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은 114년 만이다. 성공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전기가 마련된 시점에 114년 만에 온전하게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다. 그 자리에는 민족공원이 조성된단다. 새삼 용산을 다시 보게 된다.
  • 하단~녹산 경전철 조기 건설… ‘교통 오지’ 오명 벗는 부산 강서

    하단~녹산 경전철 조기 건설… ‘교통 오지’ 오명 벗는 부산 강서

    부산 강서구는 부산의 16개 구·군 가운데 기장군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이었지만, 최근 서부산권 개발에 힘입어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신도시 조성이 잇따르고 있어 앞으로도 유입인구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급격한 도시팽창과는 달리 대중교통 사정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해 불명예스럽게도 ‘교통오지’라는 낙인이 따라다닌다. 부산시가 이 오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대중교통망 확충에 팔을 걷어붙였다. 부산시는 21일 도시철도 ‘하단~녹산선’ 건설사업을 조기 추진하고 시내버스 신·증설에 필요한 시내버스 공영 차고지를 건립하는 등 강서지역 교통 인프라 개선을 적극 추진한다고 밝혔다. 도시철도 건설과 시내버스 노선 확충 등을 통해 강서구의 대중교통망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민불편을 없앤다는 게 부산시의 복안이다.서구 지역은 녹산·신호산업단지가 있고 최근 명지오션시티, 명지국제신도시, 신호지구, 에코시티 등 대규모 신도시개발 사업으로 인구 유입이 크게 늘고 있다. 부산시는 지난달 현재 강서구 주민 인구가 12만 3000명을 넘어섰으며, 앞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조성하는 명지신도시 2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유입인구는 2만 3000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신도시가 조성된 명지동은 주민 수가 5만 7000명을 넘어서면서 지난 1월 명지1동과 명지2동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늘어난 인구와 주거환경에 비해 대중교통은 걸음마 수준이다. 시내버스 노선이 적은 데다 배차 간격도 최대 30여분에 달하는 등 주민들의 교통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논산공단에 직장이 있는 김현호씨는 “대중교통이 불편해 교통 오지라는 불명예가 따라다닌다”며 “신도시가 속속 건설되는 만큼 대중교통 인프라가 하루빨리 완성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총연장 14.4㎞ 13개 정거장 설치 도시철도 하단~녹산선은 도시철도 1호선 하단역에서 명지를 지나 녹산공단까지 총연장 14.4㎞의 경량전철로 건설된다. 총 1조 477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며 국비와 시비 비율은 6대4이다. 하단~녹산선 건설 사업은 지난달 4일 기획재정부의 재정사업평가 자문회의에서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사업으로 최종 선정돼 사업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올해 말까지 예비타당성 조사가 완료되면 내년 기본계획과 설계를 거쳐 2021년 하반기 착공에 들어가 2025년 말 준공 개통할 예정이다. 부산시는 행정절차를 진행하고자 올해 기본계획 예산 20억원을 이미 반영해 놨다. 노선은 하단(1호선 하단역 )~을숙도~명지 청량사거리~명지지구~신호대교~삼성자동차녹산공단~경제자유구역청(총길이 14.4㎞ )이며 13개 정거장이 들어선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사상~하단선(6.9㎞)의 연장선이다. 이들 두 도시철도가 완전히 개통되면 사상역에서 경제자유구역청까지 노선이 이어진다. 부산시는 대규모 사업비가 투입되는 만큼 건설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고려해 을숙도~삼성자동차 녹산공단까지는 지상철(고가화)로 건립할 방침이다. 부산시 관계자는 “명지신도시구간 4.4㎞는 소음 등 고가구조물에 대한 주민 민원을 고려해 지하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시는 예비타당성 조사 때 명지구간 지하화 부분에 대해 경제성 등을 분석해 최종적으로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운행될 철도차량은 현재 도시철도 4호선 동래 미남역~안평리역 간을 운행하는 경전철 K-AGT 모델을 사용한다. 고무차륜으로 3량을 운행할 예정이다. 경전철이어서 무인시스템으로 운영되며 철제 대신 고무바퀴가 달려 밀폐된 공간에서도 소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부산시는 차량기지창이 명지와 녹산역 가운데 한 곳에다 설치하기로 하고 기본계획 설계 때 최종 위치를 선정할 예정이다. 부산시는 지난달 하단~녹산선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에 들어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6개월 앞당겨 올해 안으로 조사를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KDI 측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시는 조기 착공 방침에 따라 기본계획에 대한 용역 발주를 예비타당성 기간과 맞추기로 하고 올 하반기쯤 용역업체를 선정할 예정이다. 부산시는 행정 등의 절차가 완료되면 2021년 하반기 착공에 들어가 2025년 말 준공 및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는 도시철도 건설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고 있다.●5개 버스운송업체 300여대 확충 강서구 시내버스 공영차고지 조성사업과 노선 신증설 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부산시는 내년 말까지 강서구 화전동 일대 5만 140㎡ 부지에 시내버스 300대 수용 규모의 버스차고지를 새로 짓고 버스노선도 신증설한다. 화전동에 버스차고지가 신설되면 강서권과 시내지역을 운행하는 버스 노선이 신설돼 대중교통 불편이 크게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부산시 관계자는 “공영차고지가 조성되면 버스운송원가 절감으로 시의 재정부담이 줄어들고 효율적인 노선 및 배차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산시는 지난 3월 열린 시내버스 공영차고지 시설결정을 위한 도시 계획위원회 심의에서 강서구 화전동 시내버스 공영차고지 설치 안건이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현재 기본 및 실시설계를 위한 행정절차를 밟고 있다. 부산시는 올해 말까지 국토교통부로부터 개발제한구역관리계획 변경 승인을 받아 버스차고지 조성 공사에 들어가 내년 말 완공 예정이다. 사업비 130억원이 투입된다.강서 시내버스 공영차고지가 조성되면 5개의 버스운송업체에 300여대의 버스가 확충된다. 또 신항, 녹산, 미음, 지사 등 산업단지 지역을 연결하는 순환형 노선을 신설해 이용객들의 불편을 덜고, 강서(화전)차고지에서 하단~다대포 방면 노선, 강서차고지~하단~괴정~남포 방면 노선, 강서차고지~에코델타시티~감전~사상 방면 노선, 강서차고지~하단~주례~서면 방면 노선, 강서차고지~에코델타시티~강서구청~덕천 방면 노선이 신증설돼 도심지역까지 버스이용 편의가 획기적으로 개선된다.그동안 부산시는 이곳을 운행하는 3번, 168번, 1011번, 58번, 1005번 등 시내버스 노선 증설 및 증차를 꾸준히 추진해 왔으나 강서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합 차고지가 없어 효율적인 노선증설 및 증차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시는 공영 버스 차고지에는 천연압축가스(CNG) 및 전기충전소를 설치하고 버스 공동관리제를 운용할 방침이다. 또 기사들의 복지를 위해 샤워 식당, 휴게실 등도 조성한다. 버스들은 충전을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연료 충전소까지 빈 차로 갈 필요가 없어 연료가 절감되고 버스 공동관리제 시행으로 버스 원가절감의 효과도 올릴 수 있다. 부산시가 버스회사에 지원하는 보조금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버스 공용차고지가 조성되면 버스회사의 차고지 문제도 말끔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버스회사는 김해 등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부지 임대료 때문에 부산시 안에 차고지 확보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 김해 구산동, 진해 두동 지역 등에서 땅을 임대해 차고지로 사용하고 있다. 기존 주거지역에 들어선 차고지를 이전해 주택밀집 지역의 환경 악화 예방 및 민원 문제도 해결될 전망이다. 한기성 부산시 교통국장은 “강서 시내버스 공영차고지 및 도시철도 하단~녹산선이 준공되면 공단 근로자, 강서구 지역주민들의 대중교통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강서구 지역의 도시개발사업 추진에 발맞춰 서부산개발의 기폭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中 조선족 영웅 조남기 장군 별세

    中 조선족 영웅 조남기 장군 별세

    ‘조선족의 우상’으로 불리던 조남기 퇴역장군이 지난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별세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91세.중국군의 최고위 계급인 상장(上將·대장) 출신인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부총리급),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군수사령관 격)직을 역임하면서 조선족은 물론 55개 소수민족을 통틀어 중국 정계 및 군부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0년 14세의 나이에 독립투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백두산 기슭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다 1945년 12월 인민해방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6·25전쟁 당시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의 통역을 맡았고 이후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서 일하며 1960년대 지린성 옌볜군구 정치위원(사단장급)으로 승진했다. 문화대혁명 때 곤욕을 치렀으며 1987년 소수민족 최초로 총후근부장에 올랐고 1998년 정협 부주석에 선출된 뒤 2003년 은퇴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삼국시대 요충지… 고려초 ‘적성현’ 명칭

    1914년 연천에 흡수됐다가 1945년 현재의 파주로 이관 고려 초부터 적성현(적성군과 같은 행정단위)으로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경기 연천군에 흡수됐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다시 파주군에 편입됐다.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과 연천군 백학면, 장남면 일부, 양주시 남면 일대가 ‘적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양주시 남면은 양주시에서 남쪽이 아니라 서북쪽 지역이다. 그래도 남면이라는 지명을 쓰는 것은 조선시대 적성현 남면이었기 때문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삼국시대에 백제(또는 고구려라고도 함)의 난은별현이었으며 고구려에서는 낭비성, 신라에서는 칠중성이라 불러 삼국이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중성현으로 개칭, 내소군의 영현이 됐다. 고려 초에 적성현으로 개칭됐으며, 1018년(현종 9)에 장단의 속현이 됐다. 1062년(문종 16)에 개성부 관할이 됐다가 1106년(예종 1)에 감무를 둬 독립했다.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적성현이 돼 조선시대 동안 유지됐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이 돼 1895년에 한성부, 1896년 경기도에 속하게 됐다. 1906년 하북면을 마전군에 이관했으며, 1914년 적성군이 폐지됨에 따라 적성군 남면은 그대로, 동면·서면이 적성면으로 통합해 연천군에 병합됐다. 그러다 1945년 38선이 연천군 남부를 지남에 따라 적성면·남면이 파주군에 이관됐고, 1946년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됐다. 1996년 파주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적성면은 파주시에 속하게 됐다. 적성에는 경기 5악의 하나로 폭포, 계곡, 암벽 등을 고루 갖춘 산자수려한 감악산을 비롯해 유서 깊은 문화재(구석기 유적, 칠중성 등)와 볼거리(황포 돛배, 임진강 적벽 등), 즐길 거리, 먹거리가 풍부하다. 그중 해발 675m의 감악산은 한북 정맥의 한강봉과 지맥을 이루고 있고 개성의 송악산, 안양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에 속하는 명산으로서 정상에선 임진강과 개성의 송악산 등이 두루 눈에 들어온다. 당나라 장군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와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과 관련된 전설도 많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민선 7기 단체장에 듣는다] “6대 권역별 발전 전략 온 힘… ‘행복도시 서대문’ 완성할 것”

    [민선 7기 단체장에 듣는다] “6대 권역별 발전 전략 온 힘… ‘행복도시 서대문’ 완성할 것”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당선자는 19일 구청장실에서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앞으로 4년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내리 3번 구청장에 당선된 그는 “지난 8년 구정 경험과 열정으로 주민 삶의 질을 한층 더 높이는 것은 물론, 행복도시 서대문의 희망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민선 5~6기가 구정의 초석을 다지고 전국적인 모델이 되는 성장기였다면, 민선 7기는 완비된 시스템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완성기가 되도록 하겠다는 게 목표다. 다음은 문 구청장과의 일문일답.→선거 소회가 있다면. -시대적으로 이미 주민의 마음이 정해진 선거여서 심적인 불안함은 없었다. 다만 주민의 염원을 어떻게 담아갈 것인가 고민했다. 지방정부이긴 하지만 비전은 한반도 평화통일 시대를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우리의 도시 행정 경험을 나누는 시기가 곧 다가오는데 이것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경험, 환경에 대한 경험, 교통에 대한 경험 등 우리 단위에 맞는 도시 행정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선거를 치르면서 현장에서 느낀 점은. -공약과 관계없이 한 달간 선거 유세로 지역을 누비면서 보니까 마을버스 노선 문제는 구에서 주민이 원하는 수요를 파악해서 적합하게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시가 법적인 규정을 들어서 안 해주면 직접 마을버스를 공영제로 운영할 생각도 있다. 지역의 수요는 계속해서 바뀌는데 수요 조사가 제대로 안 이뤄지고 있다. 두 번째로 쓰레기 무단 투기에 대한 시스템을 강구하고 가혹할 정도의 과태료를 매기더라도 이번에 시민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보자는 생각을 했다. 또 현재는 도로포장을 큰길 중심으로 많이 하는데 정작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은 이면도로, 골목길이다. 이면도로에 대한 포장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5분만 걸으면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를 많이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디자인 벤치보다는 등받이가 있는 실용적인 벤치를 만들어 도심 자체가 쉼터가 될 수 있게 하고 싶다. →중점 추진 과제는 무엇인가. -홍제역세권 개발을 비롯한 4대 역세권 발전 전략을 6대 권역별 공간 전략으로 확대해 미래 도시 서대문을 조성하겠다. 장기적으로 홍제천 복원을 계획 중인 홍제권역은 우선 단절된 홍제천 산책로를 연결하고 홍제역에서 홍은사거리까지 지하 보행네트워크(언더그라운드 시티)를 조성해 서대문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겠다. 신촌, 연희권역은 청년문화 일번지로 삼고 북아현권역은 상업과 주거의 융합 지역으로 만들겠다. 서대문권역은 역사문화와 함께 먹거리·볼거리가 풍부한 지역으로, 가좌권역은 모래내시장 일대 뉴딜 도시재생으로 지역 구성원이 상생하는 곳, 북가좌권역은 주거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역별 특성에 맞는 공간 전략을 통해 도시 환경을 정비해 나가겠다. 대학이 많은 서대문구의 장점을 활용해 미래 인재에 투자하는 교육신도시 조성도 주요 추진 과제다. 권역별 청소년 문화센터 건립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융·복합 인재교육센터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재능과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또 문화가 특권이 아닌 기본권으로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문화도시 서대문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산·북한산 자락길과 홍제천을 연계하는 테마거리를 만들고 현저2-2지구에 민주의 전당을 유치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임시정부기념관과 함께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겠다. 아울러 4대 축제 브랜드화와 신촌 바람산 일대 문화벨트 조성도 추진하겠다. →현안 중 시급한 문제와 개선책은. -긴급한 것은 재개발, 재건축에 대한 조정이다. 실무적으로 신속하게 하자는 생각이다. 지금의 업무를 단계적으로만 보지 말고 5~10년에 해야 할 일을 1~2년 만에 해버리자는 것이다. 속도전을 과감하게 하기 위해서 규정상 어쩔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인가 절차에 대해 파격적으로 신속하게 하자는 것이다. 정비 사업자, 재벌 시공회사에 휘둘리는 주민을 대신해 업체 선정 등을 구청이 주도해 모델을 제시하고 주민이 의사 결정을 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재개발, 재건축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소통이 안 되고 분쟁이 문제였지 관의 인가 문제는 아니었다.→지방분권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추진해 나갈 생각인가. -헌법 개정은 안 됐지만, 지방분권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중앙정부가 실천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를테면 법인세, 소득세를 과감하게 지방세로 하는 등의 세원 조정이라든지 지방분권적 차원에서 중앙정부가 과감하게 해야 할 일들을 보여 줘야 한다. 중앙정부가 이를 추동해 나갈 수 있도록 지방분권 세력들이 계속 발언하고 의제를 던져야 한다. 대통령의 의지가 있어도 중앙정부 관료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분권이야말로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여러 지방정부로 분배함으로써 서로를 견제하고 또한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구청장이 되려 하는가. -3선에 이르렀지만 마음가짐은 주민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다. 주민을 섬기겠다는 처음의 자세와 다짐을 잊지 않겠다. 구정에 대한 주민의 관심과 참여는 서대문 지방정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민선 7기에도 주민과 함께하기 위한 소통의 통로를 활짝 열어 두겠다. 주민들이 ‘저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마음속 이야기를 해도 저 사람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주민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구청장이 되고 싶다. 앞으로도 사람 향기 가득한 ‘사람중심도시’, 주민과 함께 나누는 ‘희망서대문’을 만드는 데 주민이 늘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문석진 당선자는 주민 ‘세족식’으로 첫 출발 복지·섬김의 행정 펼치는 서대문구 ‘키다리 아저씨’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당선자는 2010년 민선 5기에 당선된 이후 6기 재선에 이어 지난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서대문구민의 선택을 받아 3선 구청장이 됐다. 전남 장흥 출신인 문 당선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세무회계사무소 대표로 일했으며 서울시의원이 된 뒤에도 전문성을 살려 재무경제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분과 자문위원, 국가청렴위원회 보상심의위원,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 감사, 세종문화회관 감사, 서울시 도시개발공사 이사, 경실련 예산감시위원 등을 역임했다. 180㎝의 큰 키로 인해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13년 서해문집에서 발간한 저서 ‘서대문 키다리아저씨의 행복동행’이라는 제목도 별명에서 기인했다. 그는 복지야말로 구청장으로서 주민 모두를 주인으로 섬기는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구정 철학을 피력하고 있다. 서민 복지로부터 시작해 교육 복지, 주거 복지, 환경 복지, 문화 복지라는 개념을 도입해 복지 중심의 구정을 위해 마을을 누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묵묵히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구청장이 되는 게 목표이기도 하다. 문 당선자는 매번 취임 때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주민을 모시겠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 주민의 발을 닦아 주는 ‘세족식’을 한다. 다음달 임기를 시작하면서도 세족식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지난해 서울시 구청장협의회장을 지냈으며 지방분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지방분권개헌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추미애 대표는 꽃을 좋아한다. 연꽃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추 대표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연꽃 두 송이를 따 품에 안는 태몽을 꾸고 그를 가졌다. 낳기도 전에 고이 기르고 싶어서 그림전람회에 걸린 화가 이름을 따 이름부터 지어 놓고 낳기를 기다리던 딸이었다. ‘아름답게(美) 사랑하며(愛)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추 대표는 이름 같은 인생을 살 수 없었다. 경쟁적인 약육강생의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살았다. 15대 초선 전후로 ‘추다르크’로 시작해 ‘추고집’, ‘독불장군’, ‘추설공주’라는 별명이 붙었다.그런 추 대표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동산에서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니 생경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6·13 압승에 등골이 서늘하게 두렵다”고 했지만, 지방선거 등에서 압승한 당 대표로서 추 대표는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당 대표실에는 축하 난 화분 세 개가 놓여 있다. 두 개는 문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해 10월 23일 추 대표 60세 생일 때 보낸 축하 난이다. 나머지 한 개는 6·13 지방선거 승리 직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보낸 난이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짧게 씌어 있었지만, 지역주의 타파에 승부를 걸었던 노 전 대통령의 유지가 보이는 듯했다. 추 대표는 지난 15일 권 여사에게 감사의 전화 통화를 했다. 권 여사는 “이렇게 좋은 날도 있네요. 대통령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추 대표도 수화기 너머 흐느꼈단다. 민주당 사람들에게 노무현은 아직 눈물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노무현을 표현한다.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린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저를 많이 아껴 주셨어요. 통일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제안하시기도 했어요”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추 대표는 지난 2004년 민주당 대표 시절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후 2박 3일 광주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를 삼보일배로 사죄했지만, 그해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추 대표를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후보 시절에 “차기에 추미애도 있고, 정동영도 있고”라고 발언했다가, 대선 투표 전날 정몽준 후보로부터 ‘팽’당하기도 했다. 추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완승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선전에 한껏 고무됐다. 민주당 출신으로는 처음인 정세용 구미시장의 당선뿐만 아니라 임대윤 대구시장 후보도 39.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등 분전한 덕분이다. ‘대구의 딸’ 추 대표로서는 뿌듯한 업적이다. “지역주의가 극심할 때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당보다는 지역주의에 함몰돼 투표하는 경향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지역주의가 이번 선거에서 해소됐다. 고향 분들이 드디어 마음을 여셨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1997년 대선부터 추 대표는 민주당 깃발을 들고 대구로 향했다. 당시 대구 인심은 민주당이 들어갈 틈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를 하면 돌을 맞는다’는 말이 떠돌 때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잔다르크가 프랑스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잉글랜드 100년 전쟁에 참여해 샤를 7세를 옹립한 것과 같이 대구에 나타나 선거유세를 벌였다. 그는 이때 지칠 줄 모르는 선거유세로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추 대표는 무려 20년을 넘어서야 결실을 본 셈이다. 민주당의 이번 압승을 지지율이 높은 문 대통령 효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문 대통령도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청와대 비서실 그리고 내각이 아주 잘해 준 덕분”이라며 선거를 치른 당사자인 여당은 쏙 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후 “오늘 회의는 청와대와 정부 직원들을 상대로 한 회의여서 문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서 긴급히 진화했다. 추 대표는 “대통령 효과가 컸던 게 사실”이라고 인정한 뒤 “특히 대통령이 현충일 행사에 국가 유공자 자녀의 키 높이에 맞춰서 아이를 격려해 주는 모습처럼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유권자 분들을 대해 이겼다”고 말했다.‘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정국’에서 여성계는 이재명 경기지사 당선자의 사생활 논란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한 추 대표를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에 추 대표는 “이 당선자는 당의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후보였다. 후보자격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일단 후보로 결정됐으면 도와야 하는 게 당 대표의 책무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 사견을 피력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민주평화당 등 야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협치는 개방돼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개헌과 같은) 국민에게 (대선) 공통 공약으로 내건 것마저도 야당들이 협조할 자세가 안 돼 있어서 개별 정당이 국민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추 대표는 당 대 당 통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정도 힘든데) 통합은 더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연정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민주평화당에 대해 그간의 태도를 반성해야 연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취지로 비쳐졌다. 추 대표는 지난 2년 동안 역대 어느 민주당 대표가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뤄 냈다. 우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설득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냈고, 지난해 대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른 보궐선거에서도 12개 지역구 중 11개 지역을 휩쓸었다. 2년간의 대표 임기를 완주한 거의 유일한 당대표다. 지난 2008년 이후 정세균,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김한길·안철수, 문재인, 김종인 등이 당 대표를 지냈지만 추 대표처럼 2년을 꽉 채운 대표는 없었다. 그만큼 체급이 커진 추 대표이다 보니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국무총리 기용설, 차기 대선 직행설, 법무부 장관 입각설 등 설만 난무한다. 이런 성공적인 당대표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사실 추 대표의 지난 2년간 대표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한때 ‘추미애 패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청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때도 있었다. 추 대표는 “당·청을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을 상당히 부풀린 측면이 있었다”면서 “진실이 아닌 이상 묵묵히 기다렸다. 여러 현안에 대해 당·청 간의 소통이 잘 된 편”이라고 자평했다. 오는 8월 25일 전당대회 이후의 계획을 묻자 “지난 23년간 정치를 하면서 개인 진로를 언론에 대놓고 말한 적 없다”면서 “내 진로는 전당대회를 치른 이후에 천천히 생각하겠다”며 지극히 무미건조한 답변만 돌아왔다. “저는 일생 입당원서라고는 한 번밖에 안 써 봤다”는 게 추 대표의 자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으로 들어간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 당적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 민주당이 새천년민주당을 거쳐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다가 나중에 합쳐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간판을 바꾸었지만, 추 대표는 언제나 민주당이었다. 그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뚝심이 ‘임기를 채운 당 대표’의 원천이 되지 않았나 싶다. “숨가빴던 지난 2년을 반추하며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싶다”는 추 대표는 연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보수세력의 앞날에 대한 견해는 어떨까. 추 대표는 “대선 이후 1년간 야당은 전혀 반성을 안 했다. 건강한 보수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민주주의를 왜 망쳤는지 아무런 반성 없이 1년을 소진했다. 이번 기회에 보수가 물갈이를 해야 한다. 중진들도 도망치듯 떠날 게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국민이 평화를 원하면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위장 평화쇼’라며 퇴행적인 모습만 보였다”며 일갈했다. 추 대표는 이어 “김무성 한국당 의원이 202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앞서 개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큰 만큼 책임지고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jrlee@seoul.co.kr
  • “속도내야” vs “신중해야”… 탈원전 1년 엇갈린 평가

    “속도내야” vs “신중해야”… 탈원전 1년 엇갈린 평가

    신재생에너지 보급은 두 배로 환경단체 “전환 속도 느리다” 업계 “전기요금 인상 부작용”정부가 ‘탈원전 선언’을 한 지 1년이 지났다. 원전 가동률은 50%대로 떨어진 반면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은 2배 이상 늘었다. 에너지 전환 정책을 보는 시선이 엇갈린다는 점에서 성과보다 숙제가 더 많은 상황이다. 18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탈원전의 상징적 조치는 고리 1호기 해체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다. 1978년 우리나라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는 지난해 6월 18일 가동을 중단했다.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를 방문해 “고리 1호기 영구정지는 탈원전으로 가는 첫걸음”이라며 “월성 1호기를 1년 안에 없애겠다”며 탈원전을 선언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한국수력원자력은 고리 1호기에 7515억원을 투입해 2031년 해체를 완료할 계획이다. 한수원은 또 지난 15일 이사회를 열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확정했다. 그러나 한수원 노조가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반발도 만만찮다. 신고리 5·6호기는 국내에서 건설되는 마지막 원전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신규 원전 6기에 대한 건설 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했기 때문이다. 신고리 5·6호기의 공정률은 34% 수준으로 당초 목표(39%)보다 늦어졌다.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해 7~10월 4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된 탓이다. 정부는 대신 원전에 대한 해외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2009년 수주에 성공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체코, 폴란드 등에 수출을 타진 중이다. 탈원전 1년에 대한 전문가 평가는 엇갈린다. 환경단체 등 탈원전을 지지하는 쪽은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은 “석탄 발전량이 2016년 대비 2017년에 23.6%나 증가했는데 값싼 전기요금을 붙들기 위해 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추고 있어 에너지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어도 에너지 전환 정책이 유지되도록 에너지 전환 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탈원전에 반대하는 원자력 업계는 전기요금 인상 등 부작용을 우려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당분간 전력가격은 오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직 탈원전 정책에 의한 효과가 나오기 이전”이라면서 “한전 등 에너지 관련 회사들이 적자를 보고 있는데 정부는 경청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탈원전 정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전기요금 인상 문제다. 정부는 여론을 의식해 2022년까지 전기요금이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찬반 양측이 어느 정도의 전기요금 인상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탈원전·에너지 전환 정책의 성공 요건’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들은 월평균 1만 5013원의 전기요금을 더 부담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세종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인민군과 거수경례한 트럼프, 미국내서 논란 확산

    인민군과 거수경례한 트럼프, 미국내서 논란 확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때 ‘적국’인 북한의 장성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뒤늦게 공개돼 미국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14일(현지시간)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42분짜리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영상 중 트럼프 대통령이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에 노 인민무력상과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노 인민무력상이 손을 잡는 대신 거수경례를 하자 자신도 뒤따라 경례를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거수경례로 화답할 때 거꾸로 노 인민무력상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악수를 하려는 동작을 취하는 바람에 어색한 ‘엇박자’를 연출하기도 했다. 노 인민무력상이 먼저 트럼프 대통령에게 경례한 사진은 회담 당일 백악관을 통해 곧바로 공개됐으나, 트럼프 대통령도 따라서 경례를 한 사실은 이날 조선중앙TV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영상이 공개되자 미국 민주당과 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부적절한 제스처’라는 비판이 쏟아져나왔다.크리스 밴 홀런(민주·메릴랜드)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북한은 우리 대통령을 선전 공작에 이용했다”면서 “트럼프가 (G7 정상회의가 열린)캐나다에서 우리의 동맹들에는 뻣뻣하게 굴면서 곧바로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을 칭찬하고 그의 장군들에게 경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역겹다”고 적었다. 브라이언 샤츠(민주·하와이) 상원의원도 트위터를 통해 “적군의 장군에게 경례하는 것이 큰일이 아니라고?”라고 반문했다. 미 육군 소장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폴 이턴은 성명을 내고 “우리 군의 최고사령관이 적의 군대에 경례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먼저 거수경례한 노 인민무력상에게 답례로 같이 경례한 것은 정중한 행동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보수 진영에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9년 아키히토 일본 국왕, 201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에게 각각 허리 굽혀 인사한 사례 등을 들어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의 활동가 잭 포소빅은 트위터에 오바마 전 대통령이 쿠바 군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사진 등을 올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경례를 간접 옹호했다. 백악관도 해명에 나섰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대변인은 “다른 나라의 군 장교가 경례할 때 화답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더불어 민주당 .. 부산 기초자치단체장도 석권

    더불어 민주당 .. 부산 기초자치단체장도 석권 6·13 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에 이어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다. 지난 2014년 선거에서는 부산지역 16개 구·군 가운데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14곳,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1곳,무소속 1곳 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파란색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민주당 이 압승했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14일 선거 개표 완료결과, 부산 기초자치단체장선거에서 13곳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는 등 압승했다. 한국당이 승리한곳은 수영구와 서구 등 2곳에 불과했다. 이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이 표심으로 분출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또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과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 분위기도 민주당이 압승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벨트로 관심이 쏠렸던 부산 강서구, 북구, 사상구에서는 모두 민주당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강서구는 민주당 노기태 현 구청장이 여유롭게 상대후보들을 제쳤으며, 북구에서는 역시 민주당 정명희 후보가 현 구청장인 한국당 황재관 후보를 누르고 각각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상구에서는 민주당 김대근 후보와 재선에 나선 한국당 송숙희 후보를 이겼다. 부산에서 가장 노인 인구가 많은 전형적인 보수층 지역인 동구에서도 이변이 일어났다.  민주당 최형욱 후보와 현 구청장인 한국당 박삼석 후보는 접전 끝에 최 후보가 당선의 기쁨을 맛보았다.  현직 구청장으로 당선이 무난할 것으로 점쳐 친 한국당 소속 금정구 원정희 후보와 동래구 전광우 후보도 민주당의 정미영 후보와 김우룡 후보에게 각각 자리를 내주며 고배를 마셨다. 기장군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오규석 현 군수가 삼선에 성공했다. 연제구의 경우 애초 부산시의회 의장 출신인 한국당 이해동 후보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공천에 불만을 갖고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한 주석수 후보와의 보수층 표가 흩어지면서 민주당의 이성문 후보가 승리했다.이밖에 해운대구 홍순헌 후보 사하구에 김태석 후보,중구 윤종서후보,부산진구 서은숙 후보도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역정가의 한 관계자는 “ 그동안 부산에서는 여당깃발만 꼽아도 당선됐지만 이번은 달랐다”며 “.부산시장에 이어 기초자치단체장선거에서도 민주당후보가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선거 쉬워졌다” 장제원 과거 발언 재조명

    “선거 쉬워졌다” 장제원 과거 발언 재조명

    “우리 사상구청장이 선거가 쉬워서 다행이지.” “거(거기)는 선거 끝났잖아?”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은 물론 부산 지역에서도 압승한 가운데 장제원 자유한국당 대변인의 “선거 쉽다”는 과거 발언이 화제다. 지난달 2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지방선거 필승 결의대회’에서 홍준표 대표는 “창원엔 빨갱이가 많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온 바 있다. 당시 ‘빨갱이’ 발언을 보도한 CBS 노컷뉴스가 공개했던 녹음파일에는 장제원 대변인의 발언도 담겨 있었다. 장제원 대변인은 “우리 (부산) 사상구청장이, 선거가 쉬워져서 다행이지”라고 말했고, 이에 홍준표 대표는 “거(거기)는 선거 끝났잖아?”라며 맞장구쳤다.그러나 정작 부산 기초단체장 선거 역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었다. 부산 16개 구 중 자유한국당이 승리한 곳은 서구와 수영구 단 2곳이었다. 장제원 대변인이 승리를 장담했던 사상구를 포함해 14개 구청장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했고, 무소속이 기장군 1곳에서 승리했다. 사상구청장은 김대근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52%(5만 8153표)를 득표하며 당선됐다. 송숙희 자유한국당 후보는 48%(5만 3727표)를 얻어 낙선했다. 두 후보의 표 차이는 4426표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산특사경, 비산먼지 배출 공사장 14곳 적발

    방진시설을 가동하지 않아 비산먼지를 배출한 대형 건설공사장 등이 무더기 적발됐다. 부산시 특별사법경찰과는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4월과 5월 대형 건설공사장과 건설폐기물처리업체 등을 대상으로 환경오염행위를 조사한 결과 모두 14개소를 적발했다고 11일 밝혔다. 부산 기장군 정관읍의 한 업체는 야적물질에 방진 덮개를 설치하지 않고 작업을 하다 적발됐으며 남구 대연동의 또 다른 업체는 방진막을 설치하지 않고 분사형 페인트칠을 하다가 단속에 걸렸다. 부산 북구 화명동과 강서구 명지동의 건설현장에서는 수송차량의 바퀴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은 채 공사를 강행하다 적발됐다. 비산먼지는 공사장 등에서 일정한 배출구를 거치지 않고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먼지로 봄철 미세먼지 농도를 높이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부산시는 일부 공사현장 등에서 손쉽게 작업을 하기 위해 비산먼지 억제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작업을 하는 등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임완배 특사경 과장은 “ 쾌적한 도시 환경 조성을 위해 대규모 비산먼지 발생 사업장뿐 아니라 소규모 공사장과 불법 도장업체 등으로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여성 감독이 상업영화? 기회의 확장이죠”

    “여성 감독이 상업영화? 기회의 확장이죠”

    내몰린 여성들 다룬 ‘미씽’ 이후 프랜차이즈 영화 맡아 다들 갸웃 “다양한 영화 한다는 믿음 중요…현실 뿌리 둔 웃음에 또다른 쾌감”‘어벤져스’, ‘쥬라기 월드’, ‘미션 임파서블’ 등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브랜드 파워를 이용해 시리즈로 기획되는 영화)는 늘 국내 극장가를 휩쓸지만 정작 우리 영화계에선 시리즈 영화 제작이 드물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장군의 아들’, ‘가문의 영광’, ‘조폭마누라’, ‘여고괴담’ 등의 시리즈 영화들이 명멸해 간 가운데 최근에는 지난 2월 3편을 내놓은 ‘조선명탐정’ 시리즈가 유일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개봉 당시 262만명의 관객을 모았던 ‘탐정: 더 비기닝’이 속편 ‘탐정: 리턴즈’를 선보여 프랜차이즈 영화로 입지를 굳힐지 관심을 모은다.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추리극에 능청스럽고 지질한 캐릭터에 완연히 녹아든 권상우와 성동일의 코미디 연기 호흡이 어우러진 ‘탐정’은 대중의 평균 취향에 맞춤한 상업영화다. 이 영화를 ‘미씽: 사라진 여자’를 연출한 이언희 감독이 맡아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깜짝 관람해 화제를 모은 ‘미씽: 사라진 여자’(2016)는 사회에서 내몰린 여성들을 품고 이해하려는 진중한 통찰과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이 감독의 전작 ‘…ing’(2003), ‘어깨 너머의 연인’(2007) 역시 투톱 여성 주연을 내세워 ‘관계’를 탐구한 작품들이다. 때문에 그의 전작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번 선택에 고개를 갸우뚱할 법하다. “저도 처음엔 제작사에서 제안을 받고 ‘저한테 왜 농담하시냐’,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 했어요(웃음). 1편이라는 분명한 비교 대상이 있는 상황이고 신인도 아니고 ‘미씽’도 많은 응원을 얻은 상황에서 속편을 한다는 건 본격적으로 비교되는 싸움에 뛰어드는 거잖아요. 하지만 목표가 생겼죠. 여성 감독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상업영화를 함으로써 여성 감독에게 붙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워지고 ‘이 감독은 다양한 영화를 할 수 있구나’란 믿음이 생기게 해야겠다고요.”오는 13일 개봉하는 ‘탐정: 리턴즈’는 1편에서 미제 사건을 해결한 콤비, 만화방 주인 강대만(권상우)과 광역수사대 형사 노태수(성동일)가 탐정 사무소를 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경찰 2계급 특진도 마다하고 사무소를 개업한 노태수, 만화방을 닫으며 아내에게 갖은 구박을 받는 강대만은 손님이 없어 고전한다. 그러다 우연히 맡게 된 사건은 파헤칠수록 몸집과 무게를 불리며 유쾌한 코미디에 중심을 잡아 준다. 이 감독은 “전작 ‘미씽’이 불편하고 갈수록 긴장해서 등이 의자에서 떨어져 앞으로 나가는 얘기라면, ‘탐정’은 점점 등을 의자에 기대며 보는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미씽’을 보고 제게 기대가 생기신 관객도 있겠지만 이번 영화는 정반대의 반향을 목표로 한 영화예요.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실체가 뭔지 스릴감에 치중하기보다는 현실에 뿌리를 댄 웃음과 고민에 주력하며 캐릭터와 한껏 친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려 했죠.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져스’가 나오면 관객들이 각각의 캐릭터에 다 친근함을 느끼고 그 안의 서사를 익혀 나가잖아요. 그와 마찬가지예요. ‘탐정’이라는 영화를 하나의 마을이라 보면 캐릭터와 친해질수록 속편이 나올 때마다 하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거죠.” 때문에 이 감독은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하고 감독의 철학을 드러내는 전작에서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탐정’ 세계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 “사람들이 함께 이해하고 울어 주고 공감해 주는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소진된 면이 있다면, 이번 영화는 관객들에게 거는 기대가 전혀 달라요. 관객들이 웃어 주고 즐거워해 주길 바라요. 2시간 동안 웃을 수 있다는 건 이야기 자체에 관객들이 끌려들어가는 거잖아요.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웃음의 최종 선택자는 관객이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다른 종류의 쾌감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어깨 너머의 연인’과 ‘미씽’ 사이 9년의 공백기가 눈에 띈다. 그는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여성 감독의 작품, 여성 주인공 영화가 아직도 극소수인 우리 영화계의 현실이 투영된 공백기인 셈이다. “기회가 주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죠. 전작들이 크게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요. 공백기 때의 시간이 너무 아쉽고 앞으로의 시간도 아쉬워요. 이번 영화를 선택한 것도 기회의 폭을 넓히고 싶어서였어요. 하고 싶은 걸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할 수 있었죠.”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강소기업 부산으로 이전 러시…올해 24개 기업 유치

    강소기업들의 부산 이전이 잇따르고 있다. 부산시는 8일 오후 시청 회의실에서 자동차 부품업체인 동신모텍, 부산어묵과 함께 투자양해각서 체결식을 한다고 7일 밝혔다.이번 투자양해각서 체결로 올해 상반기에만 모두 24개 기업을 유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투자양해각서에는 이들 회사가 공장을 부산으로 옮겨 지역경제 활성화와 좋은 일자리 창출에 이바지하고 부산시는 원활한 투자를 위해 행정·재정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담는다. 이번 협약식에는 김기영 부산시 경제부시장, 동신모텍의 임춘우 대표이사, 부산어묵의 이규생 대표이사, 관계기업 임직원 등이 참석한다. 동신모텍은 1995년 5월 회사를 설립해 경남 김해시에 본사와 공장을 비롯해 함안공장, 밀양공장, 진례공장, 진영공장과 부산테크노파크 선행기술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동신모텍은 이 가운데 전기자동차 배터리 팩을 생산하는 함안공장을 부산시 국제산업물류도시로 이전할 계획이다. 대지 1만㎡에 공장 면적 5000㎡로 250억원을 들여 신축한다.고용규모는 150명(이전 80명, 신규 70명)으로 지역 일자리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동신모텍의 전기차 배터리 팩 공장 이전으로 전기자동차 관련 기업들의 부산 이전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1974년 3월 어묵 제조업을 시작한 부산어묵은 경남 양산시 소주공단에 본사와 공장을 두고 있다. 어묵 제품만 350여 종 생산하고 있으며 기술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특허도 다량 보유한 어묵 전문제조회사이다. 부산어묵은 부산 기장군 오리일반산업단지에 대지 6300㎡,건축 면적 5000㎡ 규모의 공장을 짓기로 하고 모두 1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고용인원은 100명(이전 56명,신규 44명)에 달한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번 투자양해각서 체결로 올해 상반기에만 모두 24개 기업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이들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5·18 진압 책임자 등 현충원 묘 이장해야”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6일 대전현충원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 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현충원 정문 앞에서 촉구대회를 열고 “반민족 행위자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 등이 버젓이 현충원에 잠자고 있다”며 “이들의 묘를 즉각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성한 국립묘지에 민족반역자 김창룡이 웬 말이냐’ 등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어 장군1묘역 김창룡의 묘지로 가 파묘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창룡(1920~1956)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독립운동가를 대거 잡아들이고, 광복 후 반공투사로 변신해 용공 조작에 가담하며 육군 중장까지 됐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주도 의혹도 받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63명(서울 37·대전 26명)이 현충원에 묻혀 있다. 대전현충원에는 또 전두환 전 대통령 때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 등 5·18 진압군 관련자 여럿이 매장됐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더불어 민주당 오거돈 후보 ‘환경생태도시 부산’선언.. ‘친환경 행복부산’을 위한 5대 정책발표 .

    더불어 민주당 오거돈 후보 ‘환경생태도시 부산’선언.. ‘친환경 행복부산’을 위한 5대 정책발표 .

    더불어민주당 오거돈 부산시장 후보는 5일 세계환경의 날을 맞아 ‘친환경 행복부산’을 위한 5대 정책을 발표했다. 미세먼지 저감과 안전한 청정 수돗물 원수 확보, 재생에너지 이용률 향상, 낙동강 생태복원 사업 등이다. 오 후보는 “부산은 2017년 기준으로 7대 광역시 중 미세먼지 오염도가 가장 높다”며“ 미세먼지 농도의 30%를 줄여 미세먼지로 시민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부산의 미세먼지 원인의 46%는 선박배기가스라며, 미세먼지 저감을 통해 그린(green)항만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분산된 미세먼지 관련 업무를 통합 관리하는 ‘미세먼지 전담관리 특별 대책기구’를 시장 직속으로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깨끗하고 안전한 수돗물 원수를 확보하고자 ‘부경수자원공사(BK-WATER)’를 설립하고 물 관련 정부 연구기관 유치와 부산시 산하에 ‘물 산업지원센터’의 설립도 추진한다. 고리 1호기의 안전한 해체를 위해 부산시민이 참여하는 안전해체 로드맵을 수립하고 동남권에 원전해체연구소를 유치하는 등 탈 원전 시책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이용률을 20%로 높이고 낙동강 하구 및 하천 생태 복원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부산을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산업과학 중심도시로 전환,기장군에 신기술 개발 재생에너지 실증연구단지유치, 신재생에너지 추진 전담기구를 설치해 재생에너지 사용률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낙동강 하구 일대를 역사-생태-환경-문화로 연결해 난개발로 훼손된 낙동강하구의 건강성을 회복한다. 임기 내 낙동강하굿둑을 개방하고, 장기적으로 국가도시공원 조성 방안을 마련한다. 을숙도 쓰레기매립지의 하구습지 복원사업도 추진한다. 오 후보는 “개발에 초점을 맞춰온 부산시정을 생태계 보전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도시로 만들어 도시 안에 산과 바다, 강이 어우러져 자연이 숨 쉬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병자년인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전국 곳곳에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포위를 뚫고 남한산성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런 탓에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정 대신들의 무인(武人)들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하다. 인조실록은 ‘임금이 외로운 성에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다’고 적기도 했다.하지만 포위된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 왕의 격문이 닿기도 전에 군사는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충청도 군은 성남 분당의 동막천, 강원도 군은 하남시와 광주시 사이의 검단산, 경상도 군은 광주시 쌍령동까지 진출했지만 패퇴했을 뿐이다. 물론 전장(戰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만 하던 장수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산성에 피신해 갑론을박만 벌이던 대신들이 패전 책임을 일선에서 싸운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돌리는 것은 비겁하다.승리한 전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전라병사 김준룡은 1월 4일 20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은 다음날 청군 5000명을 격퇴한 데 이어 이튿날에도 화포를 동원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김준룡은 유격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적장 양고리(揚古利)를 사살했다. 당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이 칼을 들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가운데 필사의 의지를 보이자, 병사들이 모두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다.…어떤 오랑캐가 산꼭대기에 큰 깃발을 세운 뒤 갑옷 차림으로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자…공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병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치며 전투를 독려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와 그 좌우 몇 장수가 일시에 탄환을 맞았다.…죽은 장수는 선한(先汗)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였다.’ 백양고라가 곧 양고리다. ‘선한’이란 청태조 누르하치를 말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었다는 인물이다.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다. 누르하치가 ‘전장에서는 몸을 좀 사리라’고 했을 만큼 겁이 없었다는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미수가 적은 대로 김준룡 부대가 ‘오랑캐의 시신이 겹겹이 쌓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승리를 거두자 남한산성의 임금과 대신들은 처음에는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 부대는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수원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전공(戰攻)을 세운 김준룡이지만 이때의 철군을 이유로 훗날 파직된 것은 물론 유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 쪽 기록인 ‘청사고’(淸史稿)의 분위기는 다르다. 이날의 패전은 충격이었다. 양고리의 시신이 광교산에서 진지로 돌아오자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제사를 지내며 곡을 했고 임금의 의복을 내려 염하게 했다. 심양에서도 양고리의 상여가 조선에서 도착하자 태종이 교외까지 나가 맞이했고,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福陵)에 배장했다. 홍타이지는 이때도 직접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조총 탄환을 양고리에게 명중시킨 박의(朴義)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그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했으니 졸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벼슬은 평안도 직동의 종9품 권관(權管)에 머물렀다. 승진은커녕 변방으로 좌천된 꼴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고려의 김윤후는 몽골의 살례탑을 활로 쏴 죽여 대장군에 제수됐다. 그런데 박의는 직동 만호에 그쳤으니 사람들은 애통해한다’고 자신의 문집인 ‘영재집’에 적었다. 만호는 권관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이다. ‘직동 권관’의 착오일 것이다. 청나라에 항복했으니 청황제의 가까운 인척을 사살한 군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수는 있다. 김준룡의 승전을 재평가하는 논의는 정조시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1791년(정조 15) 사직 신기경이 ‘병자년 난리 때 김준룡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장려해야 한다’고 상소한 것이다. 화성 축조를 앞두고 수원 지역의 현안을 일일이 점검하는 자리였다. 정조는 이듬해 김준룡에게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정부의 차관급 벼슬인 찬성(贊成)도 추증했다. 오늘은 병자호란의 역사를 바탕으로 광교산으로 간다. 해발 582m의 광교산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과 고기동, 의왕시 일부에 걸쳐 있다. 호란 당시 김준룡 부대는 서남쪽 수원에서 광교산으로 접근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이 있는 동북쪽에서 몰려왔으니 광교산 전체가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시루봉 남쪽의 토끼재 아래 해발 400m 지점에는 김준룡 장군의 승전을 알리는 각자(刻字)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김준룡 장군 전승지와 전승비’라고 부르는데 자연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 將軍 戰勝地)라는 큰 글자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음각했다. ‘김준룡 장군 전승지’가 현대적인 글귀인 데다 ‘병자청란’이라는 표현도 익숙지 않다는 점에서 누군가 당초의 글자를 고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광교산 대첩’을 알리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는 ‘화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들은 좌의정 채제공이 새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번암 채제공은 정조 시대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당시 성역총리대신(城役總理大臣)을 맡고 있었다. 화성 건설의 총책임자다. 화성 축조를 전후해 김준룡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김준룡 전승지는 수원에서 광교유원지를 거치거나 용인에서 신봉도시개발지구를 지나 오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수원 쪽 광교산 들머리에는 창성사 터, 용인의 산자락에는 서봉사 터가 있다. 창성사 터와 서봉사 터에는 모두 고려시대 고승인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와 현오국사탑비가 각각 남아 있다. 지금 천희의 탑비는 화성 내부 방화수류정 옆으로 옮겨져 있다.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창성사는 신라 말 창건 이후 중창과 폐사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출토 유물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7세기 폐사 이후 18세기 후반 중창이 이루어졌다. 17세기 폐사는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 서봉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발굴조사에서도 병장기가 적지 않게 수습됐다. 그러니 두 절터는 전승비와 함께 ‘광교산 대첩’의 중요한 기념물이다.김준룡 장군의 무덤은 경기 시흥시 군자동에 있다. 그는 호란 이후 전라도병마절도사와 영남절도사를 지내고 1642년 세상을 떠난 뒤 고향인 양천 땅에 묻혔다. 지금의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1972년 도시화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서 소개한 허목의 전투 장면 묘사는 무덤 앞에 세워진 신도비 비문의 일부다. 양고리 유적이 경기 하남시에도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남한산성 북문이 가까운 법화사 터다. 양고리는 ‘법화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전사하자 청태종이 그의 고향 법화둔의 이름을 따 법화사라는 원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청나라 장수를 사살한 것에 한 가닥 위안을 삼고자 비극의 현장인 남한산성에 이런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지지” 독립운동 기념단체 성명서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지지” 독립운동 기념단체 성명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 등 독립운동 기념단체 관계자들은 31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남북 정상의 소통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성명에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유인태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장,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우재 매헌 윤봉길월진회장, 이종찬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조세현 순국선열유족회 감사, 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19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희망의 불씨를 살린 두 정상의 노력과 정성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면서 “한반도 비핵화로 가는 도정에 희망이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고 밝혔다. 이어 “북·미 양측은 6·12 정상회담에서 신의성실에 입각한 소통을 통해 대북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 방안에 합의해야 한다”면서 “쌍방의 요구를 균형 있게 해결하는 원만한 합의를 이뤄내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 대한민국의 힘으로, 겨레의 힘으로 칠십여년에 걸친 비극의 분단체제를 끝내고 평화와 화합의 기운이 만개한 한반도를 열어 나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0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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