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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5

    ◎「도끼만행」은 월남전뒤 “미 의지 시험용”/운명의 날 8·18… 4분만에 미군 2명 살해/참모회의중 일보… 스틸웰장군에 “귀환 급전”/북측 병사 30여명,「가지치기 현장」 포위… “의도적 도전” 내가 다시 한국에 근무하게 된것은 1976년 봄 소장으로 주한유엔군사령부의 참모장을 맡게 되면서였다.이 직책은 주한미군 참모장과 미8군 부사령관등을 겸하며 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수석대표도 맡았다.나는 대장이 된 스틸웰사령관과 다시 만나게 된것이 기뻤다. 7월1일 아내 메리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용산 유엔군사령부까지 가는 동안 놀랍게 발전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그러나 이도시의 불과 25마일 북방에 싸늘한 긴장이 감도는 DMZ(비무장지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한국은 평화롭다고만 할수 없었다. ○군 배치 공격형으로 그당시 판문점에는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은 군대의 현대화 및 증강에 박차를 가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부대배치를 방어형에서 공격형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었다.이 사실의 발견은 당시 정보활동의 개가로 평가되고 있다.베트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CIA나 DIA(미국방정보처)의 사진분석가들이 인도차이나에만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북한관련 정찰사진이나 위성사진들이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채 그대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남북한이 비슷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된 70년도의 평가를 아직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었다.미국은 그같은 정보판단하에 닉슨독트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갑자기 7사단을 철수시켰으며 북한은 72년부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왔다. 그러나 74년 민간 정보분석가들에 의해 북한이 엄청난 양의 철강과 콘크리트를 생산,불명확한 군사목적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해부터 북한의 군사적 능력과 의도에 관한 조사가 국가안전국 특수조사팀의 일원인 베트남참전 보병장교 출신 민간인 존 암스트롱에 의해 행해졌다. 14개월간의 연구끝에 그는 북한의 군사력이 70년의 평가보다 80%이상 증강됐고 대부분이 DMZ 부근에 전진배치돼 있음을 밝혀냈다. 이같은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엔군사령부는 76년말 김일성이 남침배치를 완료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이는 복잡한 국내문제와 외채압박등 경제난으로 전쟁도발은 어려울 것이라는 CIA보고와는 정반대 견해였다. 남침용 땅굴이 처음 발견된 것은 74년 11월로 그후 연달아 발견된 땅굴들은 북한의 침략의도를 보다 명백히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특히 내가 부임하기 수개월전부터 북한군은 한국군 순찰대에 사격을 가해오고 부비트랩을 설치하는등 DMZ에서의 도발을 한층 강화시켜오고 있었다.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에서도 북한경비병들의 도발 횟수가 늘고 있었다.우리정보기관들은 이를 지난 50년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침략을 위한 구실로 삼으려는 것으로 평가했다. ○“새 침략구실 노린듯” 북한군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잔악한 도발이 부임후 두달이 채못돼 8월18일 아침 판문점에서 발생했다.JSA에서 북쪽을 연결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까이에 높이12m 가량의 무성한 포플러가 있었는데 유엔군측 경비초소의 시야를 가려 가지를 칠 필요가 있었다.이날 북측에 사전통보를 하고 10명의 경비병과 도끼 사다리 톱등 작업도구를 든 5명의 작업단이 2.5t트럭을 타고 현장으로 들어갔다.아더 보니파스대위와 마크 바레트중위가 그들을 인솔했으며 한국군 김문환대위는 통역장교로 동행했다.적에 의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20명의 신속대응군이 JSA 바로 안쪽 제2경비초소 옆에 배치돼 있었다. 상오 10시30분 작업단은 두개의 사다리를 나무에 걸쳐놓고 작업을 시작했다.5분정도 지난후 북측트럭 한대가 오더니 장교2명과 사병9병이 내렸다. 인솔자 박철중위는 JSA에 오래 근무했으며 성질이 고약하기로 이름나 있었다.박철이 자꾸 작업을 간섭하더니 20분쯤 후에는 보니파스에게 작업중지를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은 계속됐다.이어 북측 경비병 10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왔으며 근처 경비초소에서 6명이 더와 모두 30여명의 북측병사들이 작업장일대를 포위한 형상이 되자 박은 가지 하나라도 더자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해 왔다. 보니파스가 작업계속의사를다시 명확히 하는 순간 박이 『죽여!』라고 외치며 보니파스를 세게 걷어차 수로로 쓰러뜨렸다.이것을 신호로 북측병사들은 주머니에서 쇠파이프와 곤봉등을 꺼냈으며 작업중이던 도끼도 빼앗아 주로 장교와 하사관을 공격했다.보니파스는 수로바닥에 쓰러진채 발길질과 쇠파이프를 피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그때 한 북측병사가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 찍자 그자리에서 바로 죽고 말았다.바레트중위는 공격을 피해 트럭쪽으로 뛰었으나 뒤따라온 6명의 북한병사들에 의해 역시 도끼와 쇠파이프등으로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졌다.신속대응군이 도착했을때는 북한군은 이미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달아난 후였다.정확히 4분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속 대응 군 힘못써 키티호크기지의 당직장교로부터 전화보고를 받은 것은 참모회의 중이었다.나는 우선 사령부 지하벙커에 있는 「월 룸」(전쟁지휘소)으로 갔다.그러나 사령관 스틸웰대장은 일본자위대의 초청으로 교토를 방문중이었고 부사령관 존 번 공군중장은 월례 연습비행을 위해 서해쪽으로 출격중이었다.리처드 스나이더주한미대사도 업무협의차 워싱턴에 가있었다.또 한미1군단사령관 존 쿠시맨중장은 의정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유엔군사령부의 최고 선임자였다. 몇분후 보다 상세한 보고가 올라왔다.보니파스대위와 바레트중위가 살해당했고 수명의 경비병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이것은 분명 우리가 예측하고 있던 공산당의 의도적 도발이 틀림없었다.나는 즉시 주한미공군사령관 돈 피트만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스틸웰장군 귀환을 위한 비행기 급파와 연습비행중인 번중장에게도 급거귀환 연락을 하도록 지시했다.그다음 의정부의 쿠시맨중장에게 판문점의 상황을 보고하고 전투준비태세를 위한 데프콘 등급을 의논했다. 데프콘은 가장 약한 상태인 5등급에서 1등급까지 있는데 한국에서는 보통때도 데프콘4 상태였다.그러나 이를 높이기 위해서는 명백한 군사적 움직임이 수반돼야하기 때문에 적의 공격적인 대응을 예상해야했다.마침 스틸웰장군과 통화가 되어 그문제를 상의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이번 사태에 대한우리의 대응은 보다 확고해야했다.분명히 북한측이 우리를 테스트하려 할것이기 때문이었다.또 그해는 선거의 해로 조지아주지사 지미 카터가 베트남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제리 포드대통령에게 강력히 도전하고 있었다. 북한은 포드가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 도박을 걸어온 것이었다.앞으로 48시간내에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도발에 대해 전쟁을 개시하느냐,그대로 주저앉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좋소』 마침내 사령관의 대답이 떨어졌다.『당신이 펜타곤과 한국군측 그리고 우방국에 상세히 상황을 설명하시오. 정전위원회를 내일 열도록 요청하고 모든 부대는 데프콘3에 대비,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부대원이 영내대기토록 하시오』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우리의 대응계획인 OPLAN 작성에 바쁠때 서울의 미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마침 이날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회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측대표 김정일이 이날 아침의 사건을 미군장교들의 인솔하에 저질러진 북한군에 대한 이유없는 공격이라고 설명하고 비동맹회의가 미국의 행위를 비난하는 동시에 유엔사령부의 해체와 한국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를 주장,쿠바의 열렬한 지지로 이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것이었다. 이날밤 김포공항에 도착한 스틸웰사령관에게 나는 세가지 대응책을 보고했다.
  • 안보환경 변화와 민군관계

    ◎“민주화 부응이 군 발전 지름길”/개방화시대 발맞춰 대민 신뢰 쌓아야/병영의 참모습 알려 불신요인 제거 중요/긴급 재난때 장비·인력 적극 지원 바람직 국방부는 16일 남북한유엔동시가입 등 국내외의 안보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안보환경변화와 민·군관계」라는 주제로 안보관련 세미나를 육군회관에서 개최했다.이날 세미나에서 연세대 서정우교수는 「민·군신뢰기반구축방안」이라는 제목으로,교육부 김진성장학관은 「민·군안보의지 고양방안」이라는 제목으로,그리고 통일연수원 윤병익교수는 「미래지향적 안보정책대안」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서정우교수는 『급변하는 국내외환경변화속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안보의 주역인 군의 신뢰증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군의 활동상과 참모습을 그대로 홍보하여 불신요소를 제거하고 군 본연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해다. 김진성장학관은 『통일여건조성을 위해 국방력과 경제력을 배양해야하며 이길만이 북한을 개혁·개방토록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윤병익교수는 『정부의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짙전에 따라 일부 국민사이에 감상적인 평화통일기피심리가 점증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의한 통일과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시대상황변하에 부응한 양보의식의 제고방안과 신축적인 정책개발이 요구된다』고 제시했다.주제논문을 요약한다. ◇서정우교수=민주사회에서의 군은 국민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기능도 수행할 수 없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다.국민이 군을 신뢰하면 강력한 군이되고 군이 강력하면 국가안전은 보장된다.이때문에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수준의 정도는 군의 발전과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척도가 된다.국민이 군에 대해 갖고있는 신뢰는 최근 상당히 향상되고 있으나 만족할만한 상태는 아니다. 군이 국민의 신뢰기반을 구축하기위해 수행해야할 자체관리의 영역을 몇가지 예시하면 ▲군의 정지적 중립 ▲군의전문화 ▲군의 민주화 ▲정훈교육의 강화 ▲대국민홍보조직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군은 자신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왔다.이때문에 군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이해수준,그리고 신뢰도가 낮은 상태다. 신뢰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예시하면 군은 국가의 민주화·개방화·공개화 추세에 적절히 순응해야 한다. 군은 언제나 사기가 충만해야하나 휴가장병과 초급장교들의 기강문제에는 유의해야한다. 국민들에게 군의 참모습을 알리기위해 매스미디어를 적극 활용,홍보를 강화해야한다. 긴급재난구조등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을 확대하고 민·군친선 체육대회 등을 열어 함께 어울려야 한다. 수재와 가뭄과 같은 재해를 당할경우 지역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군이 소유하고 있는 장비와 기술·인력은 사회에 환원,봉사해야한다. ◇김진성장학관=민·군의 상호이해를 돕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투기·탱크 등 무기와 군사시설을 어린이들에게 공개하고 중·고생들의 소풍·야영·집단수련장으로 부대를 개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초·중·고교와 일선부대가 자매결연을 맺고 자매부대를 친선방문하는 등의 행사는 군의고충과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군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경계심리를 불식하고 「우리군대」라는 의식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도록 군의 이미지개선에 민·군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군대에 입대한뒤 군 경험은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수행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개인의 삶에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청소년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윤병익교수=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군사력을 중심으로한 안보역량을 증대시켜야 할 요인과 통일분위기 공조에따라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상황으로 이를 조화시키는 차원에서 안보정책의 대안이 강구돼야 한다. 우선 「가상적」및 안보개념을 재정립해 북한과 중소양국을 냉전체제적 가상적으로 일축하는 안보정책은 통일지향적인 국민의식과 마찰을 가져올것이므로 지양돼야 할것이다. 미래지향적인 안보정책은 우리의 국가체제와 이익을 위협하는 대내외의 군사적,비군사적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모든 행동및 조치를 포함하는 「전방위안보개념」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둘째로 「전방위안보개념」에 입각,군사력을 증강하되 한편으로 남북대화의 진전과 더불어 군축가개념이 부각될것이므로 이들 요인을 조화시키기위해 국군의 정예화·첨단병기화과정이 추진돼야한다. 셋째는 「전방위안보」의 핵심적과업으로서 김일성 주체사상의 대남혁명전략상의 역할및 한계,주제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및 이에대응할 수있는 우리의 체제이념등에 관한 인식을 확립하는등 정신전력을 강화해야한다. 그러나 앞으로 가장 확실한 안보정책대안은 남북한 신뢰구축방안이며 민·군간 안보공감대 조성을위한 방안으로서는 상호 안보의식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홍보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군사정보가 비밀일수만도 없으며 오히려 국가안보와 군사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파해 국민의 안보의식과 자발적인 협조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평양특별시:2(새로 쓰는 북녘지리지:2)

    ◎“인민낙원” 선전… 곳곳 「외화내빈」 고층아파트/30층이상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어/만경대 이르는 거리는 노폭 1백m로 ▷도시개발과 시설◁ 이른바 「혁명의 수도」평양도심지는 지난 1989년에 열렸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전후해 그 면모를 일신했다.건물높이가 3백m나 되는 1백5층짜리 유경호텔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무렵. 북한은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에게 평양이 「노동자의 낙원」임을 과시하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을 몽땅 끌어다 고층아파트와 5·1경기장을 비롯한 대규모 체육시설 건설에 쏟아 부었다.그리고 세계 최고 최대의 기록을 움켜쥐겠다는 욕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공사현장으로 몰아붙였다. 착공때부터 그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됐던 유경호텔은 끝내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때까지 공사를 끝내지 못해 세계를 경악케 하려했던 당초의 북한야심이 물거품이 된 대표적인 케이스. 북한은 또한 대형건물 건설과 함께 평양시내에 광복·승리·천리마·통일·창광·영웅·봉화·비파 따위의 호전적 이름을 지닌 새로운 거리(노 또는 가에 해당)조성사업에도 극성을 떨었다. 광복거리는 팔골4거리(광복역앞)에서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까지 5.4㎞에 이르는 직선거리 구간.1986년이래 대규모 건설사업에 의해 7∼8m이던 노폭이 무려 1백m로 확장되었다.이 거리 일대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국제문화회관·영화관 등의 문화·위락시설과 12∼30층 규모의 고층아파트(약2만가구)로 꽉 메워져 있다. 창광거리는 평양역에서 보통문까지 이어지는데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대규모 사업으로 15∼39층짜리 고층아파트 30여동과 공공시설들이 세워졌다.거리의 좌우에는 북한정권의 심장인 조선로동당사와 김정일의 26호관저·당창건사적관·고려호텔·평양역전백화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이 거리는 특히 대형 식당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승리거리는 대동강변을 따라 대동교·옥류교·릉라다리까지의 구간으로 평양 시내 번화가의 하나.로동신문사가 있는 대동교로터리와 만수대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종로가 이 거리의 중심지이다.정무원청사와 김일성광장·제일백화점·유명한 냉면집 옥류관도 이 거리에 있다. 천리마거리는 보통문에서 평천구역 충성의 다리까지.1982년 이후 공사를 실시,길가의 옛 건물들을 철거하고 40여동의 고층건물(8∼30층)을 신축,조성한 거리이다. 청춘거리는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대비하여 건설된 「안골체육촌」에서부터 안골입체다리까지에 이르는 거리.1개의 주경기장과 9개의 크고작은 각종 경기장 및 부대시설들을 거느리고 있다. 특히 통일거리 일대에는 현재 5만가구를 입주시키기 위한 고층아파트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재난으로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또한 외모만 그럴싸한 고층아파트를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존 고층아파트가 그러하듯 대부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거나 설치되어 있어도 출퇴근 시간에만 가동하는 형편이며 아침 점심 저녁 2시간씩 하루 6시간 제한급수를 실시하고 있다.또한 50%의 아파트가 개별 무연탄 난방에 의존하고 있다. 이같은 사정은 심각한 에너지 부족에 기인한 것이다.북한은 전력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전국에 걸쳐 정기 정전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평양특별시의 경우 구역별로 전력소비가 많은 시간대인 아침 저녁으로 1주일에 평균 3∼4회 정전(1회 1시간30분)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등 반환 운동」「낮전등 안쓰기운동」등을 펴고 있다. ◎평양특별시 행정구역표 ▲중구역=경상동 경임동 창전동 서문1·2동 신암동 신양동 남문동 중성동 보통문동 해방산동 종로동 만수동 대동문동 유성동 외성동 연화1·2동 역전동 오탄동 교구동 동흥동 서창동 동성동 창광동 신서동 동안동 ▲평천구역=북성동 간성동 봉지동 정평동 평천1·2동 봉학동 해운동 봉남동 육교1·2동 새마을1·2동 안산1·2동 ▲보통강구역=보통강1·2동 세거리동 서장동 석암동 서재1·2동 낙원동 경흥동 붉은거리동 봉화동 운하동 신원동 대보동 대타령1·2동 ▲모단봉구역=평화동 칠성문동 북한동 서흥동 인흥1·2동 월향동 진흥동 항미동 전우동 비파1·2동 흥천동 전승동 개선동 민흥동 장현동 성북동 긴마을1·2동 내좌1·2동 ▲서성구역=장산동 상흥동 석봉동 장경1·2동 서산1·2동 상신동 서천동 와산동 중신1·2동 연못동 하신동 남교동 긴재동 ▲선교구역=남신1·2동 장충1·2동 율곡1·2동 대흥동 산업1·2동 영제동 강안1·2동 등매1∼3동 옷메동 선교1∼3동 무진1·2동 ▲동대원구역=삼마1·2동 대신동 문신1·2동 동대원1·2동 냉천1·2동 신흥1∼3동 동신1∼3동 율동 신리동 새살림동 ▲대동강구역=문수1·2동 북수1·2동 탑제1·2동 의암1·2동 동문1·2동 문흥1·2동 사곡1·2동 소용동 청류1∼3동 릉라1·2동 ▲사동구역=사동 미림동 남산동 휴암동 장천동 송신1∼3동 동창동 이현동 오류리 대원리 덕동리 두루1·2동 금탄리 칠불리 삼골동 송화동 ▲대성구역=대성동 안학동 삼신동 임흥동 고산동 청암리 용남동 미암동 미산1·2동 용북동 용흥1·2동 청호동 ▲만경대구역=만경대동 궁골1·2동 옷고개동 당상동 선내동 용봉동 팔골동 용산동 칠골동 오류동 대평동 금천동 원로리 봉수1·2동 망일리 축전동 광복동 ▲형제산구역=천남리 학산리 신간1∼3리 서포1∼3리 제산리 하당1·2동 형산리 신미리 중당동 상당리 석전리 대양리 ▲용성구역=청계동 용성1·2동 화성동 마산동 어은동 중이동 룡추1·2동 용궁동 용문동 임원동 ▲삼석구역=광덕리 삼성동 도덕리 원흥리 원신리 호남리 성문동 대천동 삼석리 노산동 문영동 장수원리 ▲승호구역=승호1·2동 앞새동 이천동 입석리 봉도리 괴음리 삼청리 화천동 만달리 독골동 금옥리 남강동 ▲역포구역=유현리 소신리 장진1·2동 역포동 양음리 석정리 대현동 추당동 무진리 소삼정리 능금동 서현리 세우물리 ▲낙랑구역=송남리 보성리 정백동 토성동 낙랑동 유소리 남사리 정오동 동산동 원암동 두단동 중단리 금대리 금지도리 용호리 현골리 긴골리 ▲순안구역=순안동 오산리 성주리 구서리 안흥리 택암리 산양리 상송리 상서리 용복리 오금리 재경리 천동리 역전동 신원동 대양리 신성동 동산리 ▲강남군=강남읍 고읍리 문암리 동정리 용곡리 신흥리 삼암리 용포리 신정리 고천리 당곡리 장교리 마정리 용교리 유포리 이산리 영진리 간천리 석호리 ▲강동군=강동읍 문흥리 향목리 동리 맥전리 봉화리 용흥리 명의리 송가(노동자구) 대(〃) 흑령(〃) 문화리 향단리 구보리 난산리 태음리 자양리 화강리 하(노동자구) 순창리 고비(노동자구) 삼등리 ▲상원군=상원읍 신하리 대동리 영천리 노동리 릉선리 대천리 금성리 흑우리 대흥리 번동리 전산리 용곡리 귀일리 사기리 장리 중리 신원리 장항리 수산리 식송리 은구리 ▲중화군=중화읍 관봉리 삼성리 금산리 장산리 채송리 마장리 용산리 어용리 명월리 삼흥리 충용리 진광리 건산리 백운리 동산리 물동리
  • 잼버리장 찾은 최고령 대원 윤문식옹

    ◎“일제치하서도 스카우트 정신 지켜”/조선척후단 창립단원… 남해지부 결성/「1일1선」 실천하며 독립운동도 참가 10일 세계잼버리 대회장을 찾은 한국최고령스카우트 윤문식옹(93·경남 남해군 남면 당황리)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청소년들의 구김살없는 얼굴과 훌륭한 시설을 둘러보며 지금으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난날 일제의 박해를 피해 스카우트활동을 하던 때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리라. 부인 황다이 할머니(77)와 아들내외,손자들과 함께 대회장에 도착한 윤옹은 대회장입구에서부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김석원 총재등 대회관계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윤옹은 『스카우트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고귀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작은 정성이라며 금일봉을 전달했다. 윤옹은 조선소년군과 함께 한국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조선소년척후단 창립단원. 기독교 신자였던 윤옹은 22년 경남 마산 문장교회 주최의 여름성경학교 강습회 참가중에 정인과목사로부터 『궁극적으로 조국독립에 기여하자는 것이 조선소년척후단 운동의 취지』라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됐다. 서울로 올라가 YMCA에서 상세한 취지와 목적·조직·활동방법등을 터득한 윤옹은 남해로 내려와 동지들을 규합,지도자 8명과 대원 26명등 34명으로 조선소년척후단 남해지부를 결성했다.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지만 막상 활동을 전개하려고 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재라고는 윤옹이 중앙본부에서 어렵사리 구해온 「소년척후교본」한권이 전부였다.복장도 평상시의 옷 그대로 제각각이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기에는 너무 벅찼다. 황다이 할머니는 며칠을 꼬박 길쌈에 매달려 베를 짜고 물감을 들인뒤 손수 바느질을 해 단원들의 옷과 모자를 만들어내야 했다. 다음에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는 일이 뒤따랐다. 동네 주민들이 모아준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밀사에게 전달하느라 수화(수화)까지 익혔고 때로는 일본경찰에 꼬리를 밟혀 몇달씩 산속에 숨어지내기도 했다. 남해지부의 특징은 단원 모두 10원씩의 비상금을 늘 지니고 있었다는 점. 당항교회 장로와 집사등 어른들이 논밭을 팔아 마련해 준 이 돈은 당시 시골은 물론 큰 도시에서도 아주 큰 액수로 끼니를 거르거나 병든 이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나누어 주는데 쓰여졌다. 윤옹은 손자뻘이 되는 이번 대회 참가대원들에게 『일일일선(일일일선)의 스카우트정신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 훗날 세계평화에 앞장서는 지도자로 성장해줄 것』을 당부했다.
  •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공산국 가서야 새삼 깨달았다”

    ◎“체험의 중국연수”… 단국대 최정식군의 “개안”/“개방진통”… 빵과 이념갈등 확인/빈곤의 평등속 실업 날로 심화/우리기업 진출에 자부심… 백두산선 분단에 비감 『이제 막 시장경제체제에 눈을 뜬 12억 중국인들의 저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며 이미 중국 곳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입간판이 눈에 띄는등 국력신장을 새삼 되새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부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하계대학생국외연수계획에 따라 최근 중국에 다녀온 단국대공대 기계공학과 학생회장 최정식군(25)은 「죽의 장막」에 대한 첫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최군은 학과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지난달 27일 단국대중국연수단(단장 한정련공대학장)일행 30여명과 함께 배편으로 인천을 떠나 지난 5일까지 9박10일동안 중국을 살피고 돌아왔다. 학과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교내시위에도 종종 참가해 왔다는 최군은 『공산권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수가 학생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만 같아 처음 연수제의를 받고 무척 망설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중국공산주의의실상을 체험해 본 결과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군은 특히 『연변대 경제학부 박승헌교수의 특강을 통해 중국경제의 변천사와 실상을 다소나마 깨우칠 수 있었다』면서 『중국이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개혁」밖에 없다고 강조한 박교수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개방은 이곳 저곳에서 목격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출퇴근할 때 북경시를 꽉 메운 8백50만대의 자전거와 1인당 3백30달러의 낮은 GNP.시민들의 허름한 옷차람,보잘것 없는 생필품등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경제의 낙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를 둘러본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에서 38선과 평양을 지나 백두산에 오를 경우 하루면 될텐데 인천∼위해∼북경∼연길을 경유해서 장백산(중국사람들은 백두산을 이처럼 부름)에 오르다 보니 통일에의 염원이 더욱 강력해지더군요』 최군은 이어 『공산주의는 만인이 평등하고 고루 잘 사는 줄로만 알았으나 이번 중국연수를 통해 그곳에도 빈부의 격차와 실업등 구조적인 사회문제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교포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등 공산권미수교국가와 소련,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등 과거 일당독재와 함께 사회주의를 맹신해 왔던 국가에 대한 연수를 계속 확대시켜 대학생들에게 현장교육의 기회를 늘려나갔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털어 놓았다.
  • “8일 피랍 프랑스인 곧 석방/3일내 미국인 인질 1명도”

    ◎회교단체·시리아군 장교 밝혀 【베이루트 AFP 연합】 베이루트에서 납치됐던 베이루트 주재 의료자선 단체소속직원인 프랑스인 제롬 레이로씨가 10일 하오(현지 시간)석방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베이루트의 시리아군 고위장교가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시리아군 고위장교는 이날 『우리는 프랑스인 피랍 사건의 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아마도 그가 오늘 석방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로들의 권리 옹호기구」는 8일 하오 영국인 인질 존 메카시 기자가 석방된뒤 8시간이 지난후 베이루트 번화가에서 파리에 본부를 두고있는 「세계의 의사」라는 단체 소속의 직원인 제롬 레이로씨를 납치했다고 밝히고 현재 억류중인 서방 인질들이또 석방될 경우,레이로씨를 살해하겠다고 다시 위협했다. 레바논과 시리아 보안군은 지난 8일 하오 「포로들의 권리 옹호기구」라는 단체에 납치된 레이로(26)씨의 소재 파악을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전개했다. 【베이루트 AFP 연합】 레바논의 혁명정의기구(RJO)라는 단체는 10일 앞으로 72시간내에 억류중인 미국인 인질 2명중 1명을 석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혁명 정의기구는 이날 한 서방 통신사에 미국인 인질 조셉 시시피오씨의 사진과함께 보내온 성명을 통해 『앞으로 72시간내에 1명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할 것』이라고 밝히고 『우리는 그를 인도받기 위해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의 대표 1명이 다마스쿠스를 방문할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3

    ◎해저 케이블 극비 절단… 중공군 큰 타격/“중국본토 공격” 맥아더의 도전 실패로/중공군까지 밀리자 소,돌연 휴전제의 내가 도쿄의 극동사령부를 경유,함흥에 도착한 것은 50년 11월30일이었다.각부대에 특공중대의 배치및 활용등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의 대공세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8군단 소속 2사단과 1기갑사단의 한 연대가 청천강을 따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고 있었다.이른바 군우리(편집자주:평안남도 개천)전투로 알려진 청천강변의 전투에서 2사단은 엄청나게 우세한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참패했으며 뿔뿔이 흩어진 병력들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죽거나 포로로 잡혔다.이 때문에 다른 8군병력에게도 중공군 조우와 관계없이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산동∼대련 통신끊겨 동부전선의 중공군 공세 역시 야만적인 것이었지만 10군단의 대응은 다소 달랐다.압록강을 향해 전진배치돼있던 7사단은 지형관계로 소규모부대 단위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10군단사령부는 함흥 교외의 옛 일본비행장 부근 눈덮인 벌판에 여러개의 텐트촌으로 형성돼 있었으며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인근의 어항인 흥남에서 철수토록 돼있었다.나는 한국에 있는 미군중에 중국의 전술에 대하여 잘아는 몇안되는 장교중의 하나였다.중공군은 미군이 보다 효율적으로 싸운다면 물리칠수 있을것 같았다.중공군은 한밤중에 소규모 단위로 이동하는데 이는 매복에 약하고 인해전술 공격은 위치선정이 잘된 포병의 공격에 취약했다. 나는 얼마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함흥을 떠나 몇시간 후에 서울에 도착해보니 서울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피란민들로 뒤덮여 있었다.서울은 불과 6개월만에 공산군에 의해 두번째 점령당하게 됐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반공시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란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후 6개월동안 노스캐롤라이나의 베닝기지에서 특공중대 훈련에 또다시 열중하고 있었다.한국전쟁은 상호 처절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워커 8군사령관은 서울북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서울은 51년1월4일 공산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채 매슈 리지웨이장군이 후임 8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다.유엔군의 전선은 서울남쪽에서 불과 60마일 떨어져 형성돼 있었다.유엔군은 1월말부터 다시 공세를 강화,3월달에 서울은 재탈환되었다. 그러나 이해 봄 더 큰 사태진전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것에서 발생했다.4월11일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원수를 극동군사령관직에서 갑작스레 해임한 것이다.그 후임에는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었으며 8군사령관으로는 제임스 밴 플리트장군이 맡게 됐다.맥아더장군의 해임은 불행하게도 필연적인 것이었다.사실 그의 임무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 시작됐을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당시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목표는 군사적 대립상태를 안정시키고 남한을 재건하는데 있었다.군인의 임무는 그가 신병이건 맥아더와 같은 노련한 5성장군이건 본국정부의 명령은 어리석다 생각되더라도 합법적인 것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은 그같은 명령을 묵살하고 의회와의 연계를 통해 지휘계통도 무시했던 것이다.그의 목표는 중공을 무찌르는 것이었고 그같은 목적 수행을 위해 그는 중국본토에의 공습과 지상공격을 요청했다.그는 또 압록강을 잇는 다리들과 남만주의 중국 비행장들을 모두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맥아더장군의 이같은 변칙적 작전주장은 그가 이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데 더 목적이 있는듯이 보였다.그는 결국 도박을 했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은 중공군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그들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몰아내고 있었으며 그렇게 되자 소련은 마침내 유엔에 휴전을 제의하게 됐다.이에따라 38선 근처의 도시인 개성에서 종전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게 됐다.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로 불려간 것은 51년 12월이었다. ○북 청년 게릴라 자원 나를 만난 빌 디퓨이대령과 리처드 스틸웰대령은 미국정부는 특히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는 중공군의 통신망을 교란시키는등 중국본토에서의 게릴라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정권에 압력을 넣기로 결정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들은 이 작전은 일본에 신설된 지역본부에서 맡게되며 수송기편대와 연안상륙정부대의 지원을 받게된다고 설명하면서 육군에서는 그같은 임무를 맡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간 것은 52년 새해였다.한국전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중공군 교란작전의 이름은 JACK(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이라고 명명됐고 서울에 새본부를 만들었으며 동래에 있는 벤 반더부르트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우리는 우선 북한 서부해안의 여러개 섬에 비밀 정보망을 구축했으며 원산 앞바다의 여도를 장악,전초기지로 삼았다.이같은 작전에는 중무장된 쾌속함이 동원됐다.우리의 주된 임무는 한국인 정보원들을 공중 또는 해안으로 침투시켜 군사정보를 빼내오는 일이었다.이 일에는 북한으로부터 피란온 많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자원하고 나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미 목표는 남한 재건 우리가 해낸 한국에서의 가장 큰 작전은 황해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중국본토산동반도와 만주 대연을 잇는 해군 케이블선을 절단한 것이었다.그 케이블선은 한국에 침공중인 중공군사령부와 북경을 연결하는 라인으로 중공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그후 중공군사령부의 북경과의 연락은 무선전화를 이용하게 됐는데 대부분이 우리 측에 도청됨으로써 휴전협상과정에서 우리측은 중공군의 정보에 대해서는 항상 앞설 수 있었다. 우리의 주된 해상공격은 주로 동해의 여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곳에서는 육상이나 해상침투는 물론 원산항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까지 체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후방교란과 함께 유엔군측의 전투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 “6공 탄생으로 군정종식/대정부 문민통제기능 회복”

    ◎최 공보,국제전략연 포럼서 밝혀 최창윤공보처장관은 6일 『노태우정부의 탄생으로 한국에서 정부에 대한 문민통제기능이 완전하고도 항구적으로 회복됐다』면서 『이로인해 4반세기에 걸친 군정이 종식되고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민권의 점증시대를 맞게 됐다』고 말했다. 최장관은 이날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동북아시아협회 포럼에서 「한국민주권력의 대두」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한국의 이같은 정치적 변화는 또다른 군사 쿠데타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게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장관은 이어 『오늘날 한국에서는 군장성이나 영관급 장교에 의해 정부가 전복될 것이란 가능성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고 부연했다. 최장관은 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내각제개헌문제와 관련,『어느 사회나 권력구조에 대한 논쟁은 있게 마련』이라면서 『한국에서도 그같은 논쟁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1

    ◎한국부문/북한병력,남침 6일전 38선 집결/“개전 임박” CIA보고 극동 사서 무시/6·25 터지자 백악관·의회·군 “책임 논쟁”/휴일 미 보병학교서 야구중계 보다 “전쟁발발” 뉴스 들어 한국에서의 「미군」은 누구인가­.주한미8군참모장을 역임한 존 싱글로브장군(69)이 펴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Duty)는 한국전쟁발발 및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77년 두번째 한국근무중 당시 지미 카터 미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하는등 소신을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싱글로브장군은 이 회고록에서 6·25는 미 CIA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서울신문은 이 회고록을 긴급입수하여 「미군」으로서 체험하고 느낀 주한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책임,그리고 공과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몇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비내리는 일요일 새벽,날이 채밝기도 전에 10만여명의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을 가로질러 침공을 개시했다.남한에서는 이들을 편성도 채 갖추지 못한 3개사단 정도가 맞서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1945년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쪽은 미군이,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소련은 탱크와 중화기를 지원하는등 북한 인민군의 무력증강에 많은 투자를 했다.1948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공식적으로 북한땅을 철수한 후에도 수천명의 군사고문단이 잔류,지속적인 군비증강을 꾀했으며 침공을 감행할 무렵에는 13만5천의 병력과 소련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를 참관한 유능한 장교단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군은 10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미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24군단 병력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은 1949년 5월이었으며 군사고문단과 병참요원등 5백여명만이 잔류하고 있었다.한국군에는 탱크는 없고 몇대의 대포만 있을 뿐이었으며 제대로자격을 갖춘 장교도 드물었다.더욱이 소규모 작전의 지휘권까지도 워싱턴에 있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와는 중계를 통한 무선통신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은 바로 첫날 새벽부터 현대전 사상 유래가 없는 패주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방어에 미군을 사용한다는 극동사령부의 임시계획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같이 38선 전역에 걸쳐서,또 다량의 우수한 최신 소련제 탱크의 공격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고작 북으로부터의 소규모 국경충돌이나 게릴라침투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을 안 것은 조지아주 베닝기지에서 였다.그 전날 보병학교에서 대대장교육을 수료한 뒤여서 그날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야구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국전쟁 소식이 스포트로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에서 여러해동안 정보업무를 맡아왔던 나로서는 우선 몹시 화가났으며 놀라움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그 다음에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봄철 내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철저한 준비와 위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의 높아져가는 긴장감을 분명히 CIA와 윌로그비소장 산하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CIA의 북한 정보망을 내가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의도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CIA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잘 훈련된 10여명의 젊은 한국인 정보원들을 북한에 투입했다.극동사령부의 맥아더원수와 윌로그비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 조기경고의 특수한 임무를 부여해 북한땅에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후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CIA는 마침내 서울에 지역본부를 설립했다.나는 그때 CIA의 중국담당 책임자였는데 서울본부는 아주 우수하고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해 중반부터 서울본부에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정보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상당부분 북한의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한 경고를 해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후에 CI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정보 임무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민간및 군사정보 책임자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50년 6월 엄청난 「정보실패」의 미스터리를 풀수 있었다. 그해 봄부터 김일성의 공산당정권은 한국에서의 선거를 비난하고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에 대한 악랄한 선동공세를 벌여왔다.그러는 가운데 소련지원을 받는 김의 군대는 침공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단계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북한에 있던 우리 정보원들은 이미 북한의 교통시설은 물론 정부기관이나 군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까지 몇몇 정보원들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오거나 38선을 실제로 넘어와서 서울에 있는 CIA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CIA 서울지역국 보고」라고 명명된 1950년 6월19일자로 된 한 중요한 정보보고를 보면 중장비 등을 수송하기 위한 38선 북측 도로의 확충,1945년이래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던 남측으로의 연결도로에 대한 일제 보수등 광범위한 병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더욱 불길한 징조는 북한의 민간 교통수단들이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에서 38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었다.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원할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CIA국장 로스코 힐렌쾨터 해군대장은 북한의 침공이 있기 전 닷새의 시간동안 이 평가서는 백악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등 트루먼대통령의 군사및 외교정책 핵심참모들에게 전달됐으리라고 확신했다.이 평가서의 요약본은 또한 전통을 통해 도쿄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장군과 윌로그비장군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군부및 민간의 핵심 정책입안자들은 남침 이전에 이미 북한의 침공의도에 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증거자료는 잘 훈련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연적인 의문점이 제기될수 있다.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 정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왜 어떤 작은 군사적 행위도 강력한 응징을 받을수 있다는 공식적인 주의를 북한에 주지 않았는가? 왜 적어도 미공군의 정찰기들이 북쪽의 뒤엉킨 산들로부터 단지 세개 뿐인 남쪽으로의 통로를 감시하지 않았는가? 당시 태평양지역에서 일했던 CIA 지역책임자들이 후에 나에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윌로그비소장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그해 봄 서울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분석평가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F6」정보,즉 「미숙한 정보원이 보낸 신빙성이 불투명한 정보」로 분류돼 거들떠보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작전은 맥아더사령관의 관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보책임장교는 그 보고들을 심각한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그러한 등급으로는 워싱턴에서 절대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 이들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힐렌쾨터 CIA국장 한사람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임무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무방비상태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개전 다음날인 26일부터 워싱턴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문제를 놓고 의회와 백악관,CIA와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간에 「정보수집실패」냐 「정보판단실수」냐의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 재기의 칼가는 후세인

    ◎쿠르드족 자치허용… 불만 무마 전력/국제적 입지 만회 노려 핵개발 강행 사담 후세인 그는 불사조인가. 쿠웨이트를 집어 심키려다 국제사회로부터 몰매를 맞아 빈사지경에 처했던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걸프전에서의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중동 맹주국지도자로서의 야심을 버리지 않고 와신상담,재기의 칼을 갈고 있다. 국내에서의 입지강화는 물론,국제적으로는 「핵무기보유」라는 카드로 서방세계를 또다시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군부내에서의 폭동을 염려,쿠데타 음모혐의로 군고위장교 18명을 처형하고 그자리에 사위·사촌 등을 기용해 자신의 군부내 입지를 강화했으며,정규군의 장비와 병력을 빼내 친위대라 할 수 있는 11개사단 규모의 「공화국 수비대」의 전력을 다시 강화시켰다. 국민들에게는 다당제,자유선거실시 등 민주화조치로써 「전쟁의 패배자」라는 이미지 탈피에 힘쓰고 있으며,반사담투쟁을 해온 쿠르드족들에게는 자치권을 허용하는 포용력을 보이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유엔의 경제봉쇄정책은 쿠웨이트 철수를 위한것이었으므로 이제는 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도적인 손길을 촉구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유엔과의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1천9백명에 달하는 쿠웨이트 인질을 잡고 있으며 쿠웨이트로부터 빼앗은 전투기들과 고대유물을 아직 돌려주지 않고 있다. 더욱이 걸프전쟁 이후에도 계속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약4만6천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서방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걸프전당시 3개의 대통령궁에 가해진 다국적군의 폭격에도 운좋게 살아남은 후세인은 유엔의 핵사찰요구를 2번씩이나 거절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자기주장을 펴고 있어 중동평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미,한미연합사 통제기능 보강

    ◎지상군사령관 한국이관 따라/참모장 중장급으로 보임키로/미2사는 태평양사령부서 직접 관장 미국은 한미연합사령부 지상군구성군사령관을 92년말까지 한국군장성이 맡을경우 미보병2사단의 지휘권은 미태평양사령부가 직접행사,한국군의 지휘를 피하게 할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또 한미연합사령부의 지휘기능을 보강하기위해 현재 소장인 참모장을 중장으로 격상시켜 92년중 해체될 한미야전사령부 지휘관을 임명할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측의 이같은 구상은 주한미군감군계획과 한국방어의 한국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한국군의 독주를 견제하고 한미연합사령관의 한미양국군에 대한 작전지휘통제권을 확고하게 행사하기 위한것으로 풀이된다. 한국군은 새로운 합동참모본부의 출범과 함께 국군의 육·해·공군의 연합작전능력을 높이기 위해 합동참모대책을 설립 각군의 준령급장교들의 연합작전능력을 높이기로 했다.
  • 이기백특파원 현지보고(통일이후의 독일:13)

    ◎통독위상 맞춰 국방력 증강 박차/「역내작전」개념 탈피,국제경찰역 자임/군장비 대폭 개선… 군사대국화 우려도 독일의 국방개념이 통일당시만해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NATO역내의 작전과 유엔평화군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범위로 극히 제한적이었으나 걸프전을 계기로 국제질서 유지담당이라는 범위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독일군은 NATO협약에 따라 병력은 37만명으로,작전은 NATO사령관의 지휘를 받도록되어 있지만 통일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걸프전을 계기로 전력의 강화와 작전범위의 확대가 추진되고 있어 인접국들은 독일이 군사강국이 되지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독일군은 정치적인 결정과 법적인 제도가 마련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자체적으로 이미 군사체계 재조정 및 전투력증강작업을 추진하고 있다.통일이 된뒤 정치가들이 국제사회에서 통일독일의 역할증대를 강조하고 있는 동안 국방관계자들은 정치적인 결정이 언제 나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국방장비 개선과 작전지역의 확대방법을 착실히 추진하고 있다.국방부감찰관인 벨렐스호프장군은 최근 내부보고를 통해 『이제 독일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은 사라졌지만 먼장래의 위협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국방조직의 개혁과 위협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국방부는 동구와해와 더불어 군사적인 위협이 사라진 이후 독일군이 국제적인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세계 어디든지 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임무를 맡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작전능력향상과 제도적인 보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국방관계자들은 그러나 전투력증강과 작전지역확대를 추가예산과 법개정없이 올해와 비슷한 92년 국방예산 5백25억마르크(총예산 4천2백25억마르크)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용히 추진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져 보인다. 육군의 경우 기존의 25만5천명의 병력중에서 NATO지역을 벗어나 작전을 할수 있도록 기동력이 탁월한 공수사단과 전술사단을 구성할 계획이다.이들 기동부대들은 전투헬기 및 전차파괴용헬기를 보유하며 이동시에도 주로 헬기를 이용,기동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특징이다.육군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레오팔드전차에다 걸프전때 그 성능의 우수성이 입증된 1백40㎜포를 장착할 계획이며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공정부대와 산악부대를 설치할 예정이다.이같은 계획은 걸프전때 수수방관만을 했던 육군이 앞으로 국제적인 분쟁지역에 출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동력과 우수한 장비가 중요하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해군은 지난 3월 자체적으로 2차세계대전이후 북해 일부해역에 국한되어 있던 작전지역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일본에서는 걸프전이 끝난 뒤 페만에 소해정을 파견하는 문제로 한참 시끄러울때 조용히 함정을 보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한스 요하킴만제독은 유엔의 결정에 따라 독일해군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는 원칙과 마찬가지로 독일함대는 앞으로 세계평화와 질서를 지키기위해 세계 어느 곳이든지 장기간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페만에 출동했던 한 장교는 『우리는 처음으로 NATO지역을 벗어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지역에서 소해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말했다. 독일해군의 작전해역제한 철폐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해군함정이 분쟁지역해역에 출동함으로써 군대가 상대방 영토를 침공하지도 않고 정치적인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데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출동해 장기간 머무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단시절과는 달리 통일독일의 국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군사력이 뒷받침 할수 있기 때문이다. 해군은 이같은 이유로 세계 어느 해역이라도 출동할 수 있는 프리기트함 16∼20척을 2005년까기 보유할 계획이며 독일의 북해에서 작전하는데 적합하도록 설계·건조중인 쾌속함들도 원양작전을 할수 있도록 크기를 늘릴 계획이다. 공군도 통일후 국제적인 작전수행을 목표로 체제를 정비하고 있다.공군은 NATO지역을 벗어난 작전에도 참여 한다는 방침아래 장거리 수송체제확립에 주력하고 있다.독일공군이 NATO회원국의 일원으로 협정에 따라 걸프전쟁기간중 이라크와의 국경근처인 터키의 공군기지로 18대의 알파전투기와 4대의 수송기를 이동시키면서 이동능력의 한계를 실감했다.공군은 작전반경을 확대하기위해서는 공중보급기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점에서 구동독의 인터푸르그사가 보유하고 있던 에어버스와 4대의 보잉707기를 공중급유기로 구조변경을 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후 기존의 국방체계와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바꾸기위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지도 않다.그러나 국방관계자들은 통일후 정치·경제·외교적으로 독일의 역활이 증대될 것이 분명한만큼 이에 상응하는 국방체계의 개조를 자체적으로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
  • 세계서 가장 긴 휴전… 분단의 벽 언제 헐릴까

    ◎되돌아 본 “판문점 38년”/“냉전의 상징”… 성과없는 회담만 4백60차례 3년1개월이나 계속됐던 6·25전쟁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전쟁의 포연이 멎은지 38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해도 세번이나 더 바뀔 세월이 흘렀어도 군사분계선을 사이로 남북2㎞씩의 비무장지대는 변함이 없다. 1953년 7월27일 상오10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육군대장을 대리한 해리슨중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을 대리한 남일대장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발효와 함께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휴전회담 회담장을 중심으로 8백m의 원을 그려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삼은것이 오늘의 판문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판문점은 세계 뉴스의 초점이되어 왔으며 한반도를 찾는 남북한 방문객의 관광명소가 됐다. 당초 휴전회담은 51년 7월10일 공산측의 통제구역인 개성에서 시작됐다. 공산측의 제의에따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정한 유엔군은 휴게소 건물이나 회의장건물이 모두 공산측의 장악아래 있어 통신이나 경비·왕래 등에 불편함이 많았고 심리적으로도 협상대표들이 압박을 받기도 했다. 51년 10월25일 유엔군측은 당시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판문점을 새로운 회담장소로 제의,공산측과 합의를 보아 옮겼다. 대형 군용천막 4개를 급속히 세우고 통신시설과 도로 등을 닦아 회담장을 설치했다. 2년여동안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천막대신 목조건물이 세워졌고 53년 7월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현재 판문점공공경비구역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유엔군측의 자유의집,평화의집,일직장교실,초소,막사등이 들어서고 공산측에도 판문각,통일각,경비본부초소,막사등과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등 10여채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리는 본회의장은 군대막사형인 단층의 콘크리트건물로 20여평밖에 되지 않는다. 군정위 본회담이 열릴때마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의 내외신기자1백여명과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등 중립국감시위원단장교들이 창문을 통해 회의진행을 지켜본다. 휴전이후 4백60여차례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이 열렸으나 합의한것은 아무것도 없이 수사학적인 언어의 전투가 계속되고있다. 유엔군측은 지난1월 군정위 수석대표를 미군장성에서 한국군장성으로 교체 임명 발표했으나 공산군측은 한국이 휴전협정에 조인한 당사국이 아니기때문에 대표권이 없다고 주장하며 군정위해체론까지 들고 나오고있다. 한국군의 장성이 군정위 수석대표에 임명된이후 본회담이 열리지 않고있다. 공산측은 『조선문제는 조선사람들끼리 풀어가자』면서도 한국군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있다. 우리 민족은 부끄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긴 휴전의 역사를 갖게됐다. 휴전협정조문속에는 「통일」에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어 이 불안정한 휴전체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 “실질 생활보장,양질의 전투력 확보”/하사관 처우개선의 배경

    ◎전역 막게 봉급 현실화… 국영기업의 90%선 인상/“계급 다단계화”… 하사 2년 복무땐 전원 중사 진급 국방부가 22일 마련한 하사관처우개선책은 육·해·공군·해병대의 근간인 하사관들이 낮은 봉급,근무여건의 열악,군내외의 낮은 인식 등으로 전역원을 내는 장기하사관들이 늘어나 이를 방지,양질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제6공화국이 들어선 88년부터 각 군에서는 하사관들의 전역희망률이 높아져 정상적인 군부대운영과 각군 특성에 맞는 고유전력 유지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해군과 공군의 경우 하사관들은 대부분 고된 함상근무와 야근을 자주해야 하는 무장·정비·통신·레이다기지 등에서 근무하는 기술하사관들로 전역 희망률은 50%가 넘고 있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부대장들은 말하고 있다. 하사관의 현인원은 65만 군전체병력의 12∼13%선인 8만여명 수준이다. 이중 지난해에 약11%가 전역했으며 올해에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국방부관계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공군의 일선부대에서는 일부기술하사관들이 민간항공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집단으로 전역원을 제출했다가 당국의 불허조치에 불복,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한 일도 있었다. 공군기술하사관들은 군대생활을 계속할 경우 비상대기,일직근무,잦은야근 등으로 근무가 힘든데다 봉급수준은 민간회사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고 또 잦은 인사명령으로 전국의 기지를 돌아다녀야해 자녀교육이나 주택마련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전역원을 내는 경우가 많다. 현재 4계급제도로 되어 있는 하사관의 계급은 하사 1호봉이 20만4천7백원,중사 1호봉은 24만5천2백원,이등상사 1호봉은 30만9천1백원,일등상사 1호봉은 45만7천4백원 등으로 도시근로자 생계비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일등상사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진급을 하는 경우에도 15년이 걸리며 주택을 마련하는 경우는 20∼30%밖에 되지 않는다. 국방부는 이번 개선책에서 일등상사위에 특무상사제도를 신설,5계급제도로 만들고 비무장지대와 함정근무·항공정비직종의 특수수당을 대폭 늘려 현 국영기업체의 70%수준인 보수를 90%로 향상하겠다고 밝혔다. 또 현재 하사 40세,중사 45세,이등상사 50세,일등상사 53세 등의 연령정년을 4∼6년씩 연장하고 하사 2년만에 전원이 중사로 진급할 수 있도록 진급관리제도를 개선키로 했다. 20%에 이르고 있는 주택보급률을 95년까지 60%로 향상시키기 위해 1만3천6백50가구의 관사를 건설하고 군인공제회의 주택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주택자금을 융자·알선하며 주택청약우대제도를 관계기관과 협의해 마련키로 했다. 또 과거에는 장교들에게만 실시하던 일반대학 위탁교육을 하사관들에게도 시행하며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만 지급하던 자녀학비보조를 대학까지 확대,실질적인 봉급인상효과를 갖도록 했다. 국방부는 또 「만년사병」이라는 하사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장교수준의 계급장 및 정복을 마련하고 계급대신 보직에다 「님」자를 붙이는 등 호칭을 개선키로 했다.또 주임상사의 활동비를 대폭 늘리고 지휘관과 같은 크기의 집무실을 마련해 주는 한편 국립묘지에 하사관묘역 신설을 검토중이다. 그러나 이같은 처우개선책만으로는 하사관전역률을 낮출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경제의 발전과 국제화·개방화·민주화에 따른 사회의 전문기술인력에 대한 수요증가로 기술하사관들의 전역률은 해마다 늘어날 전망이다. 안보적 상황이 우리와 다른 미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하사관들에게는 각종 혜택과 정책적인 배려를 해줌으로써 우수인력들이 투철한 사명감과 왕성한 사기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볼때 우리도 이제는 하사관들에게 일방적인 애국심만으로 근무를 해달라고 강요할 수 없는 시점에 온 것이다.
  • 주권회복·안보확립의 “양면포석”/용산미8군기지 이전의 의의와 파장

    ◎“기존 기지와 인접”… 전략가치등 고려/완전 이전까지 6년 소요… 예산확보 어려움 따를듯/“오산등 개발촉진… 경제활성화 기대” 용산기지가 1백10년만에 한국에 반환되어 주권과 영토를 되찾게됐다. 서울의 한 가운데인 용산구 용산동 용산기지는 임진왜란때인 1592년부터 1593년까지는 왜군의 병참기지로 최초로 외국군에의해 사용되다 1882년 임오군란땐 청군에,그리고 1904년 노일전쟁땐 일본군에 각각 점령돼 기지로 사용됐다.그후 1945년 9월 미군에 접수돼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주권이 미치지못하는 미군의 아성이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군사고문단 5백명만 남기고 철수한 50년 6월까지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이 지역을 2년간 사용한 일은 있으나 6·25전쟁때에는 북한군의 병참기지가 되었다가 서울을 수복한 이후 50년 9월부터 현재까지 만40여년간을 미군이 사용해 왔다. 용산기지는 한강에 근대적인 수리시설이 완비되기전까지만 해도 상습침수지역으로 한강의 여의도처럼 쓸모없는 모래땅이었으나 한강에 인도교가 놓이고 수리시설이 완비된뒤 서울의 인구가 1천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자 서울의 노른자위 땅이 되었다. ○“세계최대 공원 조성” 용산기지는 미8군사령부기지 92만3천여평을 비롯,골프장 9만여평,국방부및 구육군본부부지 9만1천여평,조달본부 4만2천여평등으로 전체대지면적이 1백14만6천여평이나 되어 우리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를 능가하는 세계적 수준의 공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 1백만평이 넘는 용산기지가 서울 중심부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 교통체증과 도시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있으며 주권국가의 수도권 심장부에 외국군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온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용산기지는 70년대 이후부터 수도 서울을 기형적으로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직선으로 뻗어야할 도로와 다리를 우회시켜야하고 주변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건축규제를 받아야 했으며 지하철 조차 이곳을 통과하지못해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1945년 9월8일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제24군단과 7함대의 해군·해병을 태운 42척의 함정이 인천항에 도착한 뒤 미군은 일본군사령부로 사용되던 용산의 군시설을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접수 사용,용산기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용산기지에는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붉은벽돌의 2층 건물에서부터 AFKN방송시설,지하의 통신시설,지난해 준공한 9층의 드래곤호텔,면세품점,미국인학교,각종 오락시설들이 있어 「용산시」혹은 「용산합중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한미군사령부 4만3천여명의 병력이 「더 유에스 용산 컴파운드」의 총 지휘를 받으며 완벽한 통신·지휘체제를 갖추고 있다.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의 중요부대는 동두천의 보병2사단과 오산의 제7공군이다.주한미군은 전국 1백개부대에 흩어져 있는 육군과 15개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등이 주력이며 미국방부문관과 해군및 해병대행정지도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한 미군은 서울·동두천·오산 이외에 의정부·평택·대구·군산·부산·진해 등지에 첨단기자재와 정보통신망,한국군의 수십개사단과맞먹는 화력을 유지하며 1백55마일 휴전선을 지키는 첨병으로 한국인들에게 든든한 보루가 되어왔다. ○국방정책 공개 추진 정부는 88년 제6공화국출범이후 도심군용시설교외이전계획과 휴전선부근의 민간인 통제선과 어로한계선을 대폭 완화해 시민생활에 불편이 없는 공개국방정책을 추진,육군본부와 공군본부를 이전한데 이어 미국정부와도 협의,용산기지 이전계획을 착실히 추진해 왔다. 미군기지는 그동안 계룡대부근의 대전·공주권과 미군시설이 있는 오산·평택등이 논의되어왔으나 오산·평택이 기존의 미군시설이 있으며 2사단이 있는 동두천과도 가까워 전략적·경제적·지리적여건을 감안,이번에 선택된 것같다. 미제7공군사령부가 있는 오산은 부근의 우리공군의 작전사령부와 인접해있으며 평택의 미육군23지원단도 계룡대의 육·공군본부와 서울의 합참과 중간거리에 있어 효과적인 작전을 펼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경기가 과열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 신기지를 건설하려면 1백만평에 이르는 부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울뿐 아니라 공사기간도 6∼7년이나 걸려 자금소요도 2∼3배나 늘어날것으로 예상되어 국가경제의 부담이 클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용산기지가 중부권 중심인 오산·평택지역으로 이전됨에따라 이전지역에 대한 도로·상하수도·전기등 사회간접시설에 방대한 투자로 인한 지역개발이 촉진되며 고급장교들의 가족이전·방문객·관광객의 증가로 지역경기가 크게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육군과 공군본부가 이전한 계룡대지역은 논산군 두마면이라는 한촌이었으나 대규모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부터 신흥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때 평택과 오산지역도 멀지않아 준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될것이라고 국방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준국제도시 전망도 주한미군은 1단계철수시한인 92년말까지 약3만6천여명으로 감축되며 앞으로 2단계,3단계로 나뉘어 감축하게되어 있어 용산기지가 이전되는 오는 97년까지는 대체로 현재규모에서 약 절반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1백만평이나 되는 용산기지이전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도쿄와 오사카의 기지를 옮기는데 10∼15년의 기간이 걸렸다. 용산기지를 6년안에 이전한다는 정부의 야심적인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기에는 예산확보와 주민반대·군사시설 설계과정을 통해 상당한 진통이 있을것으로 예상된다.
  • 말리,불발 쿠데타/내무장관등 체포

    【바마코(말리) 로이터 연합】 아프리카 말리에서 15일 쿠데타가 발생했으나 불발로 끝났으며 주모자 라미네 디아비라 내무장관(대위)은 체포됐다고 정부 소식통들이 말했다. 디아비라 대위는 지난 3월26일 독재자 무사 트라오레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낸 장교집단의 일원으로 임시정부의 내무장관으로 일해 왔다. 현재 말리 정부는 아마두 투레 중령을 정점으로 군인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인민구국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는데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다짐했었다.
  • 슬로베니아/EC평화안 수락/의회 압도적 찬성

    ◎이달말 연방과 협상 갖기로/크로아공선 산발적 교전 계속 【류블랴나 로이터 AP 연합】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베니아공화국 의회는 10일 유고의 내전 발발을 피하기 위해 공화국 독립을 3개월간 유보하고 이달말부터 연방정부와 협상을 시작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유럽공동체(EC)중재하에 마련된 평화안을 수락키로 압도적 표차로 의결했다. 슬로베니아공화국 의회는 지난7일 EC의 중재하에 유고연방지도자들과 크로아티아및 슬로베니아 공화국 지도자들간에 마련됐던 평화안의 수용 여부를 표결에 부쳐 찬성 1백89,반대 11,기권7표로 이 평화안을 받아들이기로 승인했다. 이에앞서 안테 마르코비치 총리의 유고 연방내각은 8일 이 평화안을 받아들였으며 프란요 투즈만 크로아티아대통령도 이를 수락했다. 앞서 슬로베니아공화국 의회 일부 의원들은 슬로베니아의 국경 검문소들의 통제권을 연방당국에 넘기도록한 이 평화안이 슬로베니아측의 독립 추진 과정에 너무나 큰 양보라고 지적,이를 비판했었다. 한편 크로아티아공화국 오시예크에서 당직근무중이던 한민병대장교는 이날 동료2명과 함께 베옐로 브르도 부근의 드라바강에서 보트를 타고 순찰하던중 기관총 사격을 받고 1명이 숨졌다고 말했고 세르비아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공내 슬라보니아 지방에서는 9일밤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했으며 슬라보니아 최대 도시인 오시예크시 주변 세르비아인 거주마을에서는 이날 밤 전력공급이 중단되는 등 크로아티아공과 세르비아공간의 내전위기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 억류 연방군 다수 석방

    【베오그라드 AFP 연합】 유고연방군이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슬로베니아공화국에서 「전투작전」을 개시하겠다고 위협한 뒤 7일 밤부터 8일 아침까지 슬로베니아공화국군에 의해 억류돼 있던 장교86명등 연방군 다수가 석방됐다고 유고 국방부가 8일 밝혔다.
  • 장기화되는 유고사태

    ◎“독립 지지 해달라” 각국에 호소 외교/연방병사,“이와 싸우는줄 알고 출동” ○…유고의 슬로베니아공화국에 진주했다가 공화국방위군에 포로로 잡혀있는 연방군병사들은 국경초소를 장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을 때 이탈리아의 공격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국경마을인 노바 고리카의 방위군부대에 억류되어 있는 약6백명의 연방군 포로들중 인터뷰를 한 몇몇 연방군 병사들은 유고가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한 병사는 『우리의 장교가 이탈리아의 공격 때문에 국경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언. ○…유고 연방군은 5일 슬로베니아공화국 병사들이 휴전합의를 어기고 밤중에 수차례 연방군을 공격해 2명의 연방군 병사가 부상했다고 밝혔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기지를 둔 연방군 제5지역군은 이날 성명을 통해 슬로베니아지역의 3개 부대가 공화국 방위군소속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성명은 이같은 공격은 슬로베니아공화국이 평화및 협상을원하지 않거나 몇몇 슬로베니아 병사들이 공화국의 통제권 밖에서 테러리스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고는 서방은행들이 물자수입의 자금원인 차관을 중단함에 따라 심각한 석유부족난에 처해 있다고. 석유거래자들에 따르면 서방의 어느 은행도 유고에 대한 신용보증을 해주지 않고 있으며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유고는 석유를 수입할 재정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외견상 송유관이나 항만의 석유관련 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유공장의 가동률은 지극히 저조하다는 것. ○…유고슬라비아 각 지역에서 징집돼온 연방군 소속 병사들은 슬로베니아에서 전투가 중단되기 시작한 이래 집단적으로 탈영하고 있으며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탈영병들이 4일 밝혔다. 슬로베니아 당국의 감독하에 있는 이들 탈영병은 마리보르에 위치한 5개 연방군병영의 한 군데에서는 전체 사병들 중 3분의 1인 1백50명이 부대를 이탈했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공 지도자들은 5일 그들의 독립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노력을 하고있다. 페델레총리가 EC 외무장관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로 향한 것을 비롯,부카르국회의장은 오스트리아를 방문중이며 연방간부회의 슬로베니아공 대표인 드르노브세크는 스위스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출국. ◎모두 1백29명 사망 ○…국제적십자사는 5일 유고연방군과 슬로베니아군과의 유혈충돌과정에서 연방군 36명,연방경찰 2명,슬로베니아민병대 66명,시민 15명,외국인 1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
  • 레바논 정부군/시돈장악 주장

    【베이루트·시돈 AP AFP UPI 연합】 레바논 정부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주요 거점이 있는 남부 레바논 시돈지역에 대한 통제권 강화를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탱크 등으로 무장한 정부군이 2일 이 지역을 공격,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난민촌으로 축출했다고 보안소식통들이 전했다. 이 소식통들은 또 이 전투에서 장교 2명을 포함,최소한 17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정부군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간의 격렬한 전투가 발생한 뒤 미셸 무르 레바논 국방장관은 베이루트의 라디오방송을 통해 성명을 발표,시돈지역에 대한 정부군의 배치가 「97%」 완료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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