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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거감시·경찰역할도 맡는다/「캄」서 일 자위대,무슨 활동

    ◎5개군사분야서 활동 영향력 클듯 일본군이 47년만에 다시 아시아대륙에 상륙한다.일본은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이 15일 제정됨에 따라 9월말이나 10월초 자위대 제1진을 캄보디아에 파견할 예정이다.폴포트파의 무장해제 거부로 인한 캄보디아 정세의 불안으로 자위대 파견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으나 늦어도 연내에는 파견될 전망이다. 일본은 이에앞서 자위대 조사단을 이달내 캄보디아에 파견한다.일본정부는 자위대 파견준비등 PKO업무를 총괄하기위해 내각에 PKO사무국을 설치한다.PKO사무국은 자위대가 해외에 파견된 후에는 「국제평화협력본부」로 확대·개편될 예정이다. 일본정부는 아직 어느 부문에 자위대를 파견할 것인가는 최종 결정하지 않았지만 자위대 파견은 유엔평화유지군(PKF)의 후방지원업무로 제한된다.PKO법은 자위대의 PKF본대 참여를 동결하고 있다.일본정부는 군사부문으로 공병(시설)·수송·정전감시단외에 의료·통신분야에 자위대 파견을 검토하고 있다. 캄보디아가 일본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분야는 공병과 수송,캄보디아의 도로와 다리등은 오랜 내전으로 크게 파손되어 보수가 시급하다.도로사정이 악화되어 우기에는 자동차속도가 시속 10㎞이하로 떨어지고 다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은 도로와 다리의 정비및 건설,헬기 착륙장과 난민시설 건설등을 위해 육상자위대 공병대의 파견을 검토하고 있다.공병대는 대·중형 불도저·자재 운반차등 각종 중장비를 갖추게 된다. 일본은 각종 수송을 위해 육상자위대의 UH1H 헬기의 파견도 검토하고 있다.도로사정의 악화와 많은 지뢰부설로 육상수송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때문에 캄보디아는 자위대의 헬기 파견을 희망하고 있다. 일본은 또 휴전상황을 감시하는 정전감시단에 자위대 장교를 개인 자격으로 파견할 방침이다.정전감시단은 비무장 군인 수명이 한팀이 되어 운영된다. 일본은 군사분야뿐만아니라 비군사분야인 문민경찰,선거감시단등에도 일본인들을 파견한다.문민경찰은 약 4만명의 캄보디아경찰을 감독하는 것이 주요 임무로 3천6백여명이 필요하다.유엔은 각국에 75명의 문민경찰 파견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지만 5월말 현재 캄보디아에 파견된 문민경찰은 13개국으로 부터 4백30명. 일본도 문민경찰 파견을 위한 인원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더욱이 영어나 불어를 할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문민경찰에 어느정도 파견할수 있을지 의문이다.일본은 그러나 선거감시단에는 총 1천4백명의 10%인 1백40명을 파견할 예정이다. 일본은 자위대 파견을 위해 새로 부대를 편성하지 않고 현재 편성된 부대중에서 특정부대를 선발,그대로 파견하고 일정기간후 교대시킬 예정이다. 일본은 PKO법 규정에 따라 PKF 본대에는 자위대를 파견하지 않는다.그러나 이같은 것은 임시 조치에 불과하다.일본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야당의 강력한 요청으로 PKF 본대 참가를 동결시켰다.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 야망은 멀지않아 PKO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을 만들어 자위대를 PKF본대까지 참가시킬 가능성이 높다.군사대국화를 향한 일본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 패전굴레 탈피 「대일본 영광」재현 시도/PKO법안 강행처리의 저변

    ◎국민적 욕구 업고 「정치열강」진입행보/“파병앞서 「정신대」등 「전후처리」 해결을/거대경제력 바탕,유엔등서 신질서주도꾀해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합법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안이 9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PKO법안이 앞으로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면 법으로 확정되며 자위대의 해외파병에는 걸림돌이 없게 된다.일본이 이 시점에서 PKO법안을 제정하는 저의와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인가.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김태지본부대사와 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김태우박사와의 대담을 통해 일본의 해외파병에 따른 문제점 등을 진단해본다. □대담 김태지대사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김태우박사 국방연 선임연구원 ▲김태지대사=일본은 경제력이 강해짐에 따라 정치·외교적인 분야에서도 영역을 확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봅니다.이런 가운데 냉전종식과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과정에서 압도적 위치에 있었던 미국의 힘이 저하됐고 일본이 그 공백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국제적 여론이 조성됐습니다.특히 권능이 강화된 유엔이 지역분쟁의 사전예방과 사태수습에 발벗고 나서는 이때 유엔결정을 바탕으로 한 평화유지활동참여가 가장 적절하다고 일본은 판단한 것같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유엔의 명분을 빌려 캄보디아사태등 아시아지역 분쟁문제에서부터 정치·외교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그러나 일본은 국내의 반대여론을 어떻게 무마시키느냐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외교적 역할을 위해 집권자민당이 지난해 제출한 PKO법안이 수정되는 진통을 겪은데서 잘 나타납니다. ▲김태우박사=일본이 전후 47년만에 해외파병을 합법화한 것은 경제대국·과학기술대국에서 정치·군사대국으로 변모하려는 전환점이며 국가적인 기회로 보입니다. 일본의 해외파병은 미국이라는 승전국이 씌워준 평화헌법이라는 족쇄와 굴레를 벗어나 전후 청산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창문이 열릴 때 나갈 기회를 포착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본은 이 기회를 오랫동안기다려왔으며 사회분위기를 성숙시켜왔습니다. 일본의 국민적인 욕구가 분출되는 계기이며 패전국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대사=일본평화헌법 9조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발동으로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행사는 국제분쟁해결수단으로서도 영구히 포기한다.이 목적을 위해 육·해·공군및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이에따라 일본은 패전후 상당기간 해외파병은 엄두도 못낼 정도로 자위대 행동에 제약을 가했습니다.그러나 최근들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 격상과 함께 「국제분쟁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력을 사용할수도 있다」는 적극적인 해석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김박사=일본의 해외파병은 1947년 제정된 평화헌법에 정면으로 상충됩니다.평화헌법 제9조는 전쟁포기,전력불보유,교전권부인등을 명시하고 있으며 주권국의 자위권은 인정하고 있으나 해외파병은 무슨 명분으로도 불가능합니다.1954년 일본국회는 해외출병을 포기하는 각서를 채택,세계 각국에 천명하기도 했습니다.PKO법안의 통과로 평화헌법은 개헌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현재 자위대 병력 20여만은 대부분 장교와 하사관등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순식간에 증강시킬 수 있습니다.자위대의 장비와 예산규모는 일본이 세계3위의 군사강대국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헌법의 해석은 자국민이 하는 것이지만 일본은 이미 평화헌법정신을 위배해서 군사력을 증강해 오고 있습니다. ▲김대사=일본은 패전이후 미국의 안보그늘아래 경제성장에만 주력해왔고 바로 이것이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가능케한 절대적인 요인이었습니다.하지만 패전이후 일본이 국제적 「봉」이 아니라 힘에 알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폭넓게 확산됐습니다.전쟁경험세대들은 일본의 옛 영광을 찾자는 쪽보다 평화헌법에 만족하고 있습니다.PKO법안은 경제력의 급상승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군사대국화를 목표로 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특히 유엔결의에 의한 평화유지활동이 비군사적 분야에만 한정된다면 괜찮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어 야당의 반대도 명분론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일본이 과연 지금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나설지는 동북아의 지역정세와 미국의 대일군사력인식 등을 종합적인 판단근거로 삼을 것으로 봅니다. ▲김박사=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예를 들더라도 군사적인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힘을 발휘하지 않고 사장시킨 경우는 없습니다.스페인과 영국의 해군력,프러시아와 프랑스의 육군력,최근에는 게르만민족의 과학기술력이 세계지배를 꿈꾸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사용됐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경제적인 발전으로 온 국민이 윤택한 생활을 해왔습니다.과학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달했습니다.미국의 첨단무기도 일본의 과학기술을 응용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를 이끌고 있는 보수 엘리트 집단은 과거 일본의 영광을 되찾자는 신념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일본의 정치·경제·사회전체는 전후 47년간 우익화·국수주의화·군사대국화 길을 걸어왔습니다.패전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일본주의↔소일본주의,민족주의↔국제주의,군사대국주의↔경제대국주의의 논쟁을 거쳐왔으나 일본의 자세는 언제나 「우향우」였습니다. ▲김대사=군사대국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문제가 있습니다.일본이 군사력에 치중하더라도 세계적인 군사대국이 아니라 지역적 강국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나치게 「군사대국」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또한 미국과의 안보관계변화및 일본이 위치한 지역의 안보정세가 커다란 가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PKO법안이 통과된 마당에 일본은 이제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진정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전체로부터 깊은 신뢰감을 얻을수 있습니다. ▲김박사=일본의 군사대국화는 4단계로 추진되어 왔습니다.1단계는 전후부터 60년대말까지 안보무임승차시기,2단계는 70년부터 80년대말까지 방위영역신장기,3단계는 90년부터 전후청산기,4단계는 90년대 후반의 미일안보동맹변화에 따른 다극화단계등입니다. 일본은 앞으로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역할을 증대시킬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해외에 파병하기전에 교과서문제,정신대,재일동포처우개선,사할린동포송환 등 주변국들에 대한 도덕성을 우선 회복해야합니다. 또 국내의 민족주의적인 요소와 해외의 국제주의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주변국의 의혹을 불식시켜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국제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자역할을 하면서 과학기술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영장 꼭 감춰야 하나/윤두현 사회1부기자(오늘의 눈)

    서울지법동부지원(지원장 박준서·52)이 8일 하오부터 기자들의 구속영장 열람을 일체 금지시켰다. 영장내용을 공개하면 무죄로 추정돼야 할 형사피의자의 권리가 침해되고 때로는 무책임한 보도로 명예훼손등의 시비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같은 조치의 법적 근거로는 형법의 피의사실공표죄와 함께 영장교부 청구권을 피고인과 검사 변호인등 소송관계인에게만 허용하고 있는 형사소송법규정을 들고 있다. 그야말로 피의자의 인권을 천금같이 중시하고 법정신에도 합당한 조치로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국민의 알 권리」와 그에 바탕을 둔 「언론자유」란 측면이다. 독재국가라면 몰라도 민주국가에선 언론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언론의 자유는 보도의 자유와 취재의 자유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취재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는 보도의 자유를 짓밟는 일과 마찬가지로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눈을 가려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헌법과 법률에도 이같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에 대한 정보청구권까지 명시하고 있다. 나아가 인권과 명예에 관련된 사안이라 하더라도 공익을 위해 공개했을 때는 처벌하지 않도록 돼있다. 또 언론은 언론 나름대로의 책임의식을 갖고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언론에 침해당한 사익에 대해서는 법적·제도적 구제방법이 충분히 마련돼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책임감을 망각하고 선정주의에 눈이 어두워 빗나가는 사이비 언론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기자들이 수사나 재판관계 서류를 쉽게 볼 수 있는 나라가 그리 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법원이나 수사기관 스스로도 허용했던 오랜 관행이고 어찌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클수도 있다. 문제는 운영의 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론자유를 신장시키는 장점은 살리면서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방법은 어떨까. 공익에 반하는 사이비언론에 대한 추상같은제재와 함께 책임있는 언론에 대한 전폭적인 협조야말로 민주사회를 보다 굳건히 하는 방도라고 여겨진다.
  • 태 쿠데타날땐 파업/군출신간부 퇴진을/국영기업노조 회견

    【방콕 AP 연합】 태국내 26개 국영기업체소속 노동자협회 대표들은 6일 앞으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 즉각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최근 민주화시위의 유혈진압에 관련된 고위급 군장교들에 대해 국영기업체 간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국영기업 노동자협회의 한 산하기구 간부인 퐁삭 플렝셍씨는 이날 노동자 대표들과 유력한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연합의 지도자들과 가진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자신들은 완전한 민주주의 실시와 함께 최근 민주화시위의 유혈진압 책임자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 서해안고속도/인천∼안산 조기완공/건설부

    ◎28㎞… 2년 앞당겨 내년말 개통 서해안고속도로의 인천∼안산 28㎞ 구간이 당초 예정보다 2년 앞당겨 오는 93년말에 개통된다. 5일 건설부에 따르면 서해안고속도로 1단계 공사구간인 인천∼안산 28㎞,안산∼안중 42㎞,안중∼당진 19㎞,서천∼군산 23㎞,무안∼목포 23㎞등 5개 구간 1백35㎞에 대해 사업비 1조6천86억원을 투입,오는 96년 완공할 계획이다. 건설부는 이중 수도권지역의 교통체증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인천∼안산 구간에 올해 모두 1천7백38억원을 집중 투입,당초 계획보다 2년 앞당겨 오는 93년말에 개통시키기로 했다. 또 아산국가공단및 아산항 개발에 따른 물동량 수송을 위해 안산∼안중구간은 올해 4백억원을 들여 실시설계를 끝내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이와함께 안중∼당진의 아산만 횡단구간에는 총연장 7천3백10m,교폭 31.4m,높이 60m로 국내에서 가장 긴 사장교를 오는 96년까지 건립할 예정이다. 이날 현재 인천∼안산 구간은 41%의 공사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나머지 4개 구간은 설계사업이 끝나는 대로내년중 모두 착공한다.
  • “나치보물 찾아라” 독일이 술렁/히틀러지시로 약탈한 진귀예술품들

    ◎바이마르시 마르크스광장에 숨긴듯/땅파기 착수… 제정러시아 「호박의 방」에 관심 집중 통일독일의 한 도시 바이마르에는 현재 「보물찾기」가 한창이다. 90년 독일 통일이후 구동독을 넘나들며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비밀중의 하나로서 행방이 묘연했던 나치의 보물들을 찾아 나섰던 많은 역사가와 연구자들이 바이마르시 어딘가에 나치가 약탈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고 결론을 내린 때문이라고 최근 발행된 뉴욕타임스와 헤럴드트리뷴은 전한다. 나치가 2차 대전중 에리히 코흐라는 고위장교를 중심으로 중부유럽 일대에서 진귀한 예술작품들을 약탈·수집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연구자들은 나치에 의해 약탈·수집되어 2차 대전당시 발트해 연안의 항구였던 칼리닌그라드에서 선적되어 바이마르로 향했던 예술품들이 바이마르의 카를마르크스광장 지하벙커 속에 감춰져 있다고 주장한다. 나치가 숨겨놓은 보물 찾기와 관련하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바로크와 로코코양식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호박의 방」(AmberChamber)의 행방이다.이「호박의 방」도 당시 바이마르로 향했던 예술품 중에 끼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호박의 방」은 보석의 일종인 호박으로 온통 치장된 실물크기의 방으로서 1701년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1세가 러시아와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러시아 황실에 준 선물.1755년 성페테르부르크 외곽의 캐서린궁에 설치되었던 이 방은 1941년 나치에게 점령당했을 때 히틀러의 명에 따라 독일로 옮겨졌다.약탈된 「호박의 방」의 행방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독일방문시에도 언급,새롭게 관심을 사기도 했었다. 약탈된 예술품들의 행방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한스 스타델만씨는 나치시대에 지어진 카를마르크스광장 옆의 두 건물 지하가 콘크리트로 봉인된 1백개 정도의 「보물창고」로 접근하는 통로라고 말한다.당시 약탈한 보물들을 보관할 벙커를 지었던 포로들은 비밀을 위해 모두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편 외부에서의 열렬한 관심과는 달리 바이마르 주정부의 발굴작업은 순조롭지만은 않다.신나치즘에 동조하는 일부사람들이 과거를 되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과 함께 자신들의 범죄사실을 담은 나치의 문서가 발견될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의 존재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주정부는 카를마르크스광장 주변건물 지하벽을 뚫는 시험을 가졌다.물론 아직은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 「보훈의 달」의미 되새기는 「호국 할머니」오금손여사(이사람)

    ◎「반공강연」 22년간 4천61차례/독립군 유복녀… 「군번없는 간호장교」로 6·25 참전/“「무조건 통일」 주장하는 젊은이들 안타까워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우리들입니다.더욱이 북한의 집요한 남침위협속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참혹상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독립군 유복녀로 태어나 광복군생활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오금손여사(62·대전시 중구 산성동 우성아파트 107동 910호)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거리낌 없이 나부끼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무조건 「통일」「통일」하는데 저들을 잘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다.하기야 국민의 70%가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북한공산당의 잔학상이나 기만성을 알 리가 없겠죠』 그래서 그런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아침 일찍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 집을 나서는 오여사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게만 보인다.오여사가 젊은 가슴을 향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3월 대한상이군경회로부터 호국의식계도 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오여사는 호국강연을 그때부터 22년동안 모두 4천61회나 했다. 『저는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유복녀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오흥삼)는 제가 태어나던 해 왜놈들에게 체포돼 행방불명 되셨고 어머니(이봉녀)는 저를 낳은지 1주일만에 왜경들에게 끌려간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저는 14살때까지 중국군 장군의 수양딸로 자라다 15살때인 1944년3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덕씨를 따라 독립군본부에 들어가 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오여사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그러나 서울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던가 봅니다.당시 청진동에서 순천병원을 개업한 양근섭씨가 오갈데 없는 저를 양녀로 삼아 1년후에 개성간호전문학교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스무살이 되던 1949년3월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오여사는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안가서 하늘과 땅이 통곡한 6·25가 터졌다. 『그때 저를 비롯해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24명이 모두 간호장교(소위)로 자원입대했습니다.군번은 없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팔뚝에 배치부대이름인 「백골부대」란 문신을 새겼습니다』 야전병원엔 연일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의약품이라곤 다이아진과 압박대 뿐이었다. 휴전무렵 금화지구전투에서 오여사와 친구 한명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인민군부대에는 1백50여명의 양민들이 불잡혀 있었다.인민군들은 한 여학교 교사를 국방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면도칼로 가죽을 벗겨 살해했다.오여사의 친구는 국방군의 위치를 대지 않는다고 젖무덤을 도려내 살해했다.붙잡힌 양민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갔다.오여사도 손톱과 발톱 이빨을 모두 뽑혔다. 오여사는 54년봄에 서울로 왔다.냉차장사·화장품장사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돈이 조금 모이길래 윤락여성과 탈선청소년들의 선도일에도 간여했다. 오여사는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 82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내려갔다.그곳에 「독립군 정양원」을 건립,상이군경과 독립유공자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90년 11월 호국영령들이 묻힌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온 오여사는 지난해 7월엔 중국을 방문,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3개월간 호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거의 매일 강연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영령들이어 고이 잠드소서』 호국강연을 하기위해 발길을 돌리는 오여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정전위 외면한 북의 속셈/김원홍 사회2부차장(오늘의 눈)

    29일 상오11시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장에는 유엔군측 수석대표 황원탁소장이 대표단과 함께 공산군측 대표단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5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회담장주변에는 1년3개월만에 열릴 군정위 본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1백여명의 유엔군측 보도진들이 모여 있었으나 공산군측 대표단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스러운 표정들이었다. 53년 7월 27일 휴전이후 4백59차례가 열렸던 군정위의 기능이 정지되고 대화와 교류 협력에서 다시 냉전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군정위 본회담은 휴전협정위반사항을 토의하기 위해 유엔군측이나 공산군측이 판문점 일직장교단을 통해 회담개최를 제의하면 제의를 받은쪽이 회담날짜를 수정제의함에 따라 개최되어 왔다.그러나 휴전이후 처음으로 공산군측은 이번 유엔군측의 회담제의를 철저히 묵살,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엔군관계자들은 공산군측이 지난해 3월25일 임명한 군정위의 유엔군측 수석대표 황원탁소장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본회담의 안건이 북한의 무장침투조 남파사건이기 때문에 회담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으나 정작 회의가 열리지 않자 착잡한 표정이었다.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펴면서 속으로는 무력적화통일야욕을 버리지 않는 공산군측과 앞으로 어떻게 정전협정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듯 대표단들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판문점 자유의 집 기자회견장에는 지난 22일 중부전선의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가 국군수색대에 의해 사살된 북한의 무장침투조가 소지했던 M16소총과 권총·수류탄 등이 전시되어 휴전협정위반의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황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인도적인 처사로 북한침투자 3명의 시체를 가족들에게 넘겨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에는 순백의 아카시아 꽃이 주렁주렁 늘어져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무장침투는 평화와 신록을 모독하는 도발행위로 밖에는 납득할 수 없었다.
  • PKO 법안 새달초 국회통과 의미

    ◎일,패전 47년만에 “아시아 재상륙” 발진/선발부대 7백명 「캄」파병 준비 완료/「국제공헌」 명분,군사대국 꿈 노골화/「전수방위」개념 이미 탈피… 주변국 안보에 큰 위협 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야망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자위대의 해외파견을 제도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안이 다음달 내에 국회를 통과,자위대의 해외파병길이 열릴 전망이다. 집권 자민당은 오는 6월1일 PKO법안의 재수정안을 참의원에 상정,6월초에 통과시킬 방침이다.재수정안은 참의원을 통과될 경우 중의원으로 넘겨진다.중의원은 자민당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PKO법안의 통과는 확실하다. ○사회당선 “결과저지” 미야자와(궁택)총리는 28일 야당인 공명·민사당 당수와의 회담에서 PKO법안을 이번 회기말(6월21일)까지 통과시킨다는데 합의했다.물론 아직도 PKO법안성립의 불투명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최대 야당인 사회당은 「물리적 힘」을 이용해서라도 PKO법안의 국회통과를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공산당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평론가들은 PKO법안이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전망한다.자민당은 이번 국회통과를 위해 공명당과 민사당의 수정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공명당은 자위대의 평화유지군(PKF)본대 참가의 동결을 주장하고 민사당은 국회의 사전승인을 요구했었다.자민당의 야당요구수용으로 PKO법안의 골격은 ▲국회의 사전승인을 법안에 명기하고 ▲PKF참가 범위를 후방지원업무에 한정하며 ▲3년후 법안을 재조정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아직도 지휘권문제,자위대의 신분처리등의 문제가 남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에 자위대의 캄보디아파견에 대비,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자위대는 20여명의 영관급 장교를 캄보디아파견대로 인사발령을 냈으며 7백명 이상의 선발부대를 편성했다.자위대는 또 캄보디아현지상황에 대한 정보수집과 수송등 제반문제들을 검토,「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영관급 20여명 발령 PKO법안이 성립될 경우 빠르면 9월쯤 자위대가 캄보디아에 파견될 것으로 보인다.자위대의 캄보디아 파견은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일장기의 아시아 재상륙을 의미한다.일본군은 47년만에 유엔평화유지군의 깃발을 달고 아시아에 다시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위대의 국제공헌을 강조하고 있다.일본의 이같은 움직임은 걸프전을 계기로 강화되었다.일본은 걸프전을 위해 1백30억달러의 거액을 지원했으나 인적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은 이같은 국제적 비판을 군사적 해외진출의 명분으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일본은 마치 국제적 요구에 의해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하는 것처럼 말한다.그러나 일본은 언젠가는 군사적 해외진출을 하여야 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일본은 지금까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며 경제발전에만 전념해 왔다.경제로 세계를 제패한 일본은 이제 정치군사대국화를 지향하고 있다.단순히 경제대국으로만 남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위대가 캄보디아에 파견된다고 해서 일본이 당장에 군사대국화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그러나 자위대의 해외파견은 일본의 군사전략이 전수방위개념에서 세계전략차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이데올로기시대가 막을 내리고 경제가 중시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서 경제대국 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더욱이 미국은 경제악화와 국제환경의 변화 등으로 미군의 아시아주둔을 감축하고 있다.많은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이 떠난 아시아의 힘의 공백을 일본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가공할 군사잠재력 일본은 이제 최첨단 무기로 재무장한 「지역군사대국」이다.일본은 핵무기와 최첨단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가공할 군사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더욱이 아시아에는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도 없다.일본은 자위대를 통한 「국제평화」를 강조하지만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아시아안보의 중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 학군출신 현역 대위 3명/전역거부 취소 청구소

    ◎“인력부족 신청거부는 부당” 주장 육군68사단 소속 최문규대위(29)등 학군(ROTC)25기출신 현역대위 3명은 28일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서울고법에 전역거부처분취소 청구소송을 냈다. 장기복무지원자인 최대위등은 소장에서 『장기복무장교의 복무기간을 10년으로 하고 5년차에 1회에 한해 전역을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군인사법 제7조에 따라 임관 5년째인 92년 6월부로 학군동기 98명과 함께 전역희망서를 제출했으나 육군이 장교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청을 거부했다』면서 『이는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지난해 6월 1년선배인 학군 24기들은 전역지원자 38명이 모두 제대했고 학군과 동기격인 육사 43기 43명의 전역도 허락됐는데 우리에게만 전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국방부측은 이에 대해 『군인사법 제7조는 전역을 허가해 줄수 있다는 규정이지 반드시 제대시켜야 한다는 의무조항은 아니다』라고 해석을 달리 했다.
  • “내고향 부모 돕듯” 장병들 모심기

    ◎육군 태풍부대의 농촌일손돕기 현장에 가다/모판 운반·이앙기 운전에 쉴틈없이/논두렁선 경운기등 농기계도 수리/지난 15일부터 3,837가구 3,665㏊ 심어줘 5천평 밖에 안되는 산골짜기 논에는 러닝셔츠차림에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인 장병들이 모내기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물이 가득찬 논바닥을 이리저리 오가며 모판을 나르는 사병이 있는가 하면 능숙한 솜씨로 이앙기를 운전하는 사병도 있다.이앙기가 지나간 뒤에는 모가 자로 잰듯 정연하게 심어진다. 논두렁옆 비닐하우스앞에서는 정비대 장병들이 농민들의 고장난 경운기와 콤바인등 농기구를 수리하느라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온 몸은 기름투성이지만 농민들을 돕는다는 생각에 피곤한 것도 잊는다. 이곳은 육군태풍부대 장병들이 모내기철을 맞아 대민지원을 하고 있는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 현장. 『요즈음 우리 농촌에선 일손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요.새참까지 세끼를 대고 하루 3만원을 준다고 해도 도대체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요』이마을 이일한씨(34)는 이렇게일손구하기가 어려운때 장병들이 자진해 모내기를 도와주니 그 고마움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휴전선 부근인 어유지리마을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도시에 나가고 60세가 넘은 노인과 어린이들만 남아 모내기철만 되면 서울에 나가 일손을 구해와야 하고 그렇지 못한 농가는 모내기를 포기해야 한다.이런 어려움을 알고 육군태풍부대장병들은 지난 15일부터 동두천시와 파주·장단·연천군 3천8백37가구 농가 3천6백65◎의 논에 연인원 1만5천8백92명을 동원,모내기지원과 농기계수리를 해주고 있다. 장병들은 모내기지원과 농기계수리를 끝낸 뒤에는 마을길청소까지 해주어 민·군관계개선과 대군신뢰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집 논을 맨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모를 심고 있습니다』 두손이 흙투성이가 된 고범식상병(23)은 모 한포기 한포기 심을 때마다 새삼 쌀 한톨의 귀중함을 실감한다고 했다. 태풍부대장 이재관소장은 『장병들이 농촌일손돕기를 통해 근로정신과 애향심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절약과 노인공경 등 충효사상까지 체득할 수 있어 좋은 현장교육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병들은 민폐를 끼치지 않기위해 식사는 반드시 부대식사를 하고 있으며 밥알 하나도 버리지 않는 알뜰한 생활을 하고 있다. 어유지리 이장 강민호씨(37)는 『우리마을에는 장병들이 모내기지원을 해주어 이달말이면 적성면 20개리 중에서 제일 먼저 모내기가 끝날 전망』이라고 말했다. 부대장병들은 지난 3월과 4월에는 부대장비인 20여대의 굴삭기와 10여대의 페이로더,40여대의 덤프트럭을 동원해 상습수해지역 도로와 제방복구공사를 해주기도 했다. 군의관은 노약자와 극빈자·어린이들에게 무료 대민진료를 실시,민·군 일체감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체육복을 무릎까지 걷어올린 박진한병장은 『상오 9시부터 하오5시까지 산골짜기 논에 모를 심다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듯 아프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며 『제대하면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더욱 열심히 일할 각오』라고 말했다. 모내기가 끝나자 논주인 이씨와 이장 강씨가 막걸리와 특식을 내놓자 장병들은 『근무중』이라며 정중히 거절하고 부대 목욕탕으로 향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22만2천여명의 병력을 농번기 일손돕기에 투입했으나 올해는 30만명이상의 장병이 농촌대민지원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수비크 미 군수품/일 열도로 몰려든다(특파원코너)

    ◎함정 수리부품·탄약 보금선 속속 도착/구축함·헬기 항모도 올여름 이동배치/“사세보항의 양육함 기지화” 분석 일본 요코스카(횡수하)항의 미군기지.지난달부터 대량의 화물과 컨테이너가 쌓이고 있다.미군이 올해 철수하는 필리핀 수비크만 기지로부터 이동되고 있는 군보급품들이다. 컨테이너 속에는 함정수리용 부품 및 헬멧·수건등 일용잡화들이 들어있다.지난 4월 하순에는 탄약보급선이 일본의 또다른 미군기지인 사세보(좌세보)항을 거쳐 요코스카기지에 도착,수비크만기지로부터 탄약을 운반했다. 일본의 미군기지에는 이같이 수비크만기지로부터 탄약등 군보급물자가 속속 도착하고 있다.보급품 뿐만 아니라 구축함등 함정들도 이동배치될 예정이다.미군의 수비크만기지 철수와 함께 바뀌고 있는 미 태평양전략에서 일본의 미군기지들이 「증강」되고 있다. 미해군 요코스카보급창은 보급품 이송을 위해 미해병대원과 일본인 종업원으로 구성된 특별반을 편성,운영하고 있다.보급창 관리장교는 『앞으로 수개월간 수비크만기지로부터 많은 물자가반입된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수비크만을 4월19일 출발한 함정수리용 도크가 요코스카항에 도착했다.미군당국은 1만7천2백t급의 함정수리용 도크는 요코스카항에서 2∼3개월 머무는 동안 수리를 받고 태평양지역의 다른 기지로 옮겨진다고 말했다. 요코스카기지에는 올여름 토마호크미사일의 탑재가 가능한 구축함(8천40t) 1척이 새로 배치된다.이 구축함이 배치되면 요코스카항을 모항으로 하는 미군함정은 11척으로 늘어난다. 사세보기지에도 3만9천3백t급의 강습양육함(통칭 헬리콥터항모)가 올 여름 배치될 예정이다.강습양육함은 지역분쟁과 제3세계 게릴라에 대한 대응을 주요 임무로 하는 상륙부대의 사령함.이 함정에는 해리어전투기등 30여대의 항공기 탑재가 가능하다. 군사전문가들은 2척의 함정 추가배치로 요코스카기지는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를 중심으로 한 해양타격전투부대로,사세보기지는 해병대를 적진에 상륙시키는 양육함부대의 출격기지로서의 성격이 보다 선명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 미군기지에는 장비 뿐만 아니라 군병력도 이동 배치된다.일본주둔 미군 당국자는 내년중에 수비크만기지로부터 2백88명의 군인과 37명의 군속이 일본 기지로 이동하며 이들중 절반 가량은 요코스카기지에 배속된다고 밝혔다. 수비크만기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그러나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략적 역할이 상실되었다고 일본의 한 군사전문가가 지적했다.수비크만기지에 있는 미군병력과 장비들은 괌·일본·싱가포르·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등 여러지역으로 분산 배치되며 일부는 본국으로 철수할 예정이다. 미국은 국내경제의 악화와 냉전종식이후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미군의 아시아 주둔을 점차 줄이고 있다.그러나 수비크만기지의 장비와 병력이 일본으로 이동되며 일본주둔 미군기지의 기능은 강화되고 있다. 요코스카 기지의 한 미군장교는 『미 제7함대를 수년간 지원할 임무가 부여됐다』고 밝혔다.수비크만기지 기능의 일부가 장기적으로 이동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일본 국내에서는 그러나 요코스카등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기능강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적지않다.
  • 「자유화 금리」 하향 안정세

    ◎1단계 조치 6개월째… “상승 우려” 불식/콜·회사채 3.3­2%씩 하락/「자금가수요」·「꺽기」도 줄어/2·3단계 후속조치 토대 마련 지난해 11월21일 당좌대출·상업어음할인등을 대상으로 시행된 1단계 금리자유화조치이후 6개월동안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시장실세금리와 1·2금융권의 자유화된 금리가 모두 하향안정세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국내 금융시장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돼온 금융기관의 「꺾기」와 기업의 자금가수요등 시장교란 요인들이 1단계 금리자유화이후 현저하게 줄어들어 2,3단계의 본격적인 금리자유화를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1일 재무부와 한은에 따르면 주요시장실세금리 가운데 콜금리는 1단계 자유화가 시행된 지난해 11월 18.2%에서 20일 현재 연14.9%로 3.3%포인트 하락했으며,통화채유통수익률은 17.8%에서 16.5%로 1.3%포인트,회사채유통수익률은 19.3%에서 17.3%로 2%포인트씩 각각 떨어져 1단계 자유화이후 6개월간에 주요시장실세금리가 하향안정세를 보였다. 1단계 금리자유화 당시 제도금융권의일부 여·수신금리가 상향조정됨에 따라 그만큼 시장실세금리의 상승을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었다. 콜금리는 1년전인 91년5월과 비교하면 4.4%포인트,통화채유통수익률은 1년전보다 1.3%포인트,회사채유통수익률은 1년전보다 1.4%포인트가 각각 떨어진 것이다. 1단계 자유화금리가운데 당좌대출금리(잔액기준 가중평균)는 자유화직후 13.9%에서 지난 15일 현재 13.7%로 0.2%포인트 하락했으며 상업어음할인금리는 자유화직후 13.1%에서 13.6%로 0.5%포인트 올랐다. 금융당국은 각종 금리가 이처럼 하향안정화 추세를 지속함에 따라 본격적인 금리자유화를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고 보고 2단계금리자유화를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중이다. 2단계 금리자유화는 1,2금융권의 모든 여신금리와 2년이상인 장기수신금리를 대상으로 시행되며 올 하반기에서 93년 사이에 시행할 계획이다.
  • 서울대,「총장직선제」 전면 재검토

    ◎「단대이기주의」등 부작용… 규정개정 추진/대통령이 후보지명… 교원동의제등 4안 논의/「학장직선」도 회의적… 다른 대학에 영향 클듯 서울대는 16일 현행 총 학장교수직선제가 갖가지 부작용을 안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총학장선출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작업에 나섰다. 서울대는 이를 위해 사회대 부설 「인구 및 발전연구소」에 「서울대 운영전반에 관한 교수의견조사연구」를 의뢰,이달말쯤 그 결과가 나오는대로 총장선출관련 규정등을 고쳐나갈 방침이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총장선출방식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1인 또는 복수의 총장후보를 전체교수들이 투표로 동의하는 교수동의제 ▲미국의 일부대학과 같이 총장선출위원을 선정해 이들이 구성한 「밀실위원회」에서 총장을 뽑는 간접선출방식 ▲유럽이 채택하고 있는 명예총장제를 도입,총장을 복수로 두는 방식등이다. 이와 함께 현행교수직선제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인연기명식이 아닌 단기명종다수투표방식으로 바꾸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단과대 학장에 대해서는 총장의지명을 소속단과대 교수들이 인준하는 방법이나 총장임명제로 바꿀 예정이다.이처럼 총학장 직선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있는 것은 지난해 7월 첫 직선총장을 선출한 뒤 선거관리를 맡았던 「서울대 총장후보 선정위원회」(위원장 이일해교수)가 『앞으로 총학장선출방식을 재검토해 달라』고 신임 김종운총장에게 건의한데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총학장선출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교수들은 지난해 첫 총장선거가 공정하고 별 잡음이 없이 끝났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직선제란 경쟁제도이기 때문에 총장선출과정에서 단과대중심의 집단이기주의와 출신학교 중심의 학연주의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직선제가 계속될 경우 교수수가 적은 단과대들의 불만이 쌓이는등 자칫 파벌주의가 만연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편 전국 24개 국공립대학들은 지난해부터 모두 총학장직선제를 채택,운영하고 있어 서울대의 제도개선결과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LA흑인폭동의 저변과 향후대책/긴급좌담

    ◎엄청난 한인피해… 후유증 오래갈듯/「코리아타운」 희생은 흑백갈등서 비화/배타적 민족성 극복… 「문화간극」 좁혀야 ▷참석자◁ 박종상 장태한 김양일 로스앤젤레스의 이번 흑인폭동은 우리 한인교포들이 주공격대상이 되고 또 실제 피해규모도 엄청나 사태진정 이후에도 큰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폭동4일째인 2일 로스앤젤레스 현지에서 박종상총영사,장태한 캘폴리 포모나대교수(인종문제 전공),김양일 미주한인식품상총연합회 회장 3인의 현지좌담을 마련,이번 사태의 배경과 한인피해의 원인,향후대책및 교훈등에 대해 진단해 보았다. ▲박총영사=우선 이번 로스앤젤레스사태는 로드니 킹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흑인과 스페인계가 부화뇌동한 폭동으로 이해된다.이번에 한인업소가 집중적인 피해를 봤지만 주표적은 아닌 것 같다.오히려 흑백간 인종갈등에서 비롯됐음에도 한인이 희생양이 되도록 유도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장교수=사실 인종문제연구자로서 이같은 인종폭동 발생을 예상은 했었다.그러나 여름쯤에나 오리라 예상했던 결과가 보다 빨리 왔다.이번 사건의 발생배경으로는 높은 실업률로 인한 빈곤이 흑인사회를 짓누르고 흑백간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누적된 흑인의 불만이 분출된 것으로 지적할 수 있다.80년대 들어 레이건행정부와 부시행정부가 국내정책에 복지프로그램을 줄이고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함으로써 가난한 흑인사회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고도의 「계산된 범죄」 ▲김회장=이번 흑인폭동은 놀라울 정도로 한인업소만 정확히 골라 피해를 주었다.흑인들은 한인에게는 철저한 파괴와 방화라는 치명타를 입히면서도 보다 지탄의 대상이 되는 약탈은 스페인계들이 저지르도록 하는 고차원적인 술책을 쓰고있다.이는 한인들을 몰아내고 흑인들의 경제권 형성을 꾀하면서도 책임을 타인종에게 떠넘기는 고도로 계산된 범죄행위다. ▲박총영사=한인사회의 피해가 컸던 것은 우선은 폭동을 제어할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시와 경찰당국에적극적으로 피해방지요청을 했지만 경찰력이 너무 부족했다.그러나 무엇보다 그동안 한인사회가 선거전이나 어떤 사태발발시 목소리가 미약,행정력을 동원할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장교수=흑인들은 본래 아시아인종뿐아니라 백인등 타민족 증오감이 과거 노예생활을 통해 몸에 배어있다.이러한 정서를 갖고있는 흑인사회에 80년대초부터 한인들이 진출,세를 급격히 확장하고 특히 86년부터 붐이 일고있는 스와프밋(신종 저가소매점)이 대부분 한인들 손에 들어감으로써 흑인의 대한인 적대감이 증폭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국의 이번사태 대처태도를 보면 경찰력투입을 일부러 안한 인상이 짙다. ○학력우월감등 작용 ▲김회장=한인들이 미국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성을 고치고 언어장애·문화적 차이등을 극복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여기에는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데서 오는 학력우월감이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박총영사=문제는 어떻게 이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효과적인 향후대책을 마련하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을 키워야겠다.우리가 이곳에서 탄탄한 발판을 굳힐 때까지는 약자의 입장이다.타민족과 대결대신에 서로 화합하고 소속된 지역사회에 공헌을 하면서 선량한 민족의 이미지를 남김으로써 기반을 다져나가자. ▲장교수=이번 사건이 매듭되면 시장·시경국장등 행정책임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집회·선거등을 통해 강력한 압력을 가함과 함께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피해복구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육성자금(SBA)융자를 적극활용하고 한국계은행에 저이자 특별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원받는 방안,본국국민들의 의연금유도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파트너십 강화 필요 ▲김회장=결론적으로 흑인·스페인계를 욕하기 전에 냉정해야 한다.흑인지역 탈출이 능사는 아니다.이번 기회에 차원높게 뭉쳐야 한다.개인플레이에 의한 재산축적방식 대신에 단체가 돼서 주식회사나 파트너십형태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피해의식에서 빨리 벗어나 같이 잘사는 자세로 임하면 피해복구 역시 낙관할 수 있다. 보다중요한 앞으로의 문제는 한·흑문제보다 더 심각한 한·스페인계문제다.라틴출신 스페인계는 현재 LA통합교육구학생의 약60%를 점하는 다수민족으로 급신장하고 있다.이들이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사회적 파워가 막강해질 것이며 인구·영어구사력 등 모든 면에서 한인들을 능가할 것이다.어쩌면 이들에게 우리가게를 하나둘 넘겨줘야 할때가 곧 올지도 모른다.이들은 흑인들과는 달리 자생력도 강하고 끈질겨 한인들에게 곧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보다 멀리 보고 이번 사태에서 많은 교훈을 얻자.
  • 아주 시에라리온 대통령 해외 도주/쿠데타군 전권장악

    【아비장 AFP 로이터 연합】 아프리카 서부의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조셉 모모 대통령이 기니로 도주했으며 5명의 장교들이 이끄는 국가임시집권평의회(NPRC)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쿠데타군에 가담한 한 야전군 지휘관이 30일 발표했다. 믿을만한 소식통들은 모모 대통령이 이날 헬리콥터편으로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 도착했다고 전했다.시에라리온군부는 1일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NPRC의 대변인 발렌틴 스트라세르 대위는 한 사설 라디오방송을 통해 쿠데타 지도자들이 군대와 경찰의 완전한 협력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NPRC는 야간통행금지령을 선포했으며 위반자는 즉결처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사노맹」의 전위… 폭력혁명 주창/「사노맹」의 정체와 검거 파장

    ◎파출소 화염병습격등 최근 「투쟁」 이끌어/「전대협」보다 과격… 극렬운동권 쇠퇴 전망 경찰이 1일「남한사회주의학생동맹」(사학맹)핵심 간부들을 무더기로 타진함으로써 건국이후 최대의 좌경지하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로맹)의 학생전위조직 또한 「사노맹」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와해되게 됐다. 지난달 29일 백태웅씨(28)등 「사로맹」핵심간부들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일망타진된데 이어 이들의 전위조직마저 뿌리뽑힘으로써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해온 극렬운동권세력에 일대 타격이 가해졌다고 할 수 있다. 경찰관계자는 『대학운동권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전민학련」쪽의 핵심간부들이 검거돼 앞으로는 「전대협」만으로 지하활동의 명맥을 이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할 정도로 이들의 조직은 막강했었다. 「사학맹」은 지난 83년 학생운동권그룹이 「시민민주주의혁명」(CDR)「민족민주주의혁명」(NDR)「민주민주주의혁명」(PDR)등 3개 그룹으로 나뉘어져 이른바 「CNP논쟁」을 벌인뒤 신형록씨등이 운동권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NDR정치노선에 입각,90년10월 결성한 「전민학련」이 모체가 되고 있다. 「사노맹」중앙지도부로부터 이념과 행동에 관한 학습을 받아 광명 등 4곳의 비밀아지트에 정치국등 집행기관을 두고 매주 화·수요일 정기적으로 조직원에게 사상학습을 시키는 한편 「서울지역 민주주의학생연맹」(서민학련)등 11개지역별조직과 서울대·동국대등 전국 50개대학에 대학별조직을 결성,핵심조직원만 2천5백∼3천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조직의 보안을 위해 모든 조직에 위장명칭을 붙였다.「조직국」산하에 두고 있는 전문대학지도부는 「한샘학원」이었고 각종집회에서 꽹과리등을 두드리는 선전부는 「한진」이었으며 「서민학련」은 「미림」,「부산지역 민주주의학생연맹」은 「부국생명」등 11개지역별 조직을 모두 「하나기획」「정남산업」등 기업명칭등으로 위장했다. 전국 50개 대학에 조직망을 뻗쳐 그동안 길음파출소(91년1월),답십리파출소(91년2월) 등의 화염병 투척과 지난해 5월 강경대군사망사건 관련 집회와 지난달의 강군 추모장 집회를 주도했다. 또 지난 3·24총선과 다가올 대선투쟁에 대비,2천만원을 각 대학 조직원으로부터 모금해 「사노맹」 자금으로 제공했으며 지난 총선때엔 「민정추」소속의 김철수(성동갑) 안기석후보(안양을)등 9명의 지원활동과 반민자당 투쟁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사노맹」과 연계,89년까지 노동자 중심의 지하당을 결성하려 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자 오는 94년까지로 결성시기를 늦춰 이른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 최대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북한정권과의 「연공통일」을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노동자당」건설을 위해서는 대학생 외에 「완전한 노동자혁명가」의 양성이 절실하다고 보고 「프락션지도부」 밑에 「고운」(고등학생운동지도부)까지 두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대학진학차단 및 노동자직업혁명가 양성을 위한 「고운」은 서울지역 고등학교는 물론 경기도 수원·광주·전남지역 등의 40여개 고등학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 경찰은 밝혔다. 더욱이 이들은 하급장교·하사관들이 앞장서지 않고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군사론에 입각,이번에 검거된 현역조직원들을 군내부에 침투시켜 군의 내부분열과 권력의 약화를 노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 군의사관후보 임관식

    군의 및 치의 사관후보생 제22기 수료및 임관식이 25일 상오 국군 군의학교 연병장에서 최세창 국방부장관과 2군사령관,각 대학병원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임관한 군의·치의장교는 박사·전문의·일반의 등의 경력과 학력에 따라 중위 및 대위로 임관됐으며 이들은 현역과 무의촌지역 진료를 담당하는 예비역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영예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국방장관상 이범석대위(연세대) ▲육군참모총장상 김인겸대위(경북대) ▲해군참모총장상 나용길대위(충남대) ▲공군참모총장상 위선복대위(전남대) ▲국군의무사령관상 남석진대위(서울대)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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