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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점은행」·「최소 전공인정 학점제」 도입(교육개혁/주요내용)

    ◎2∼4년제 「신대학」 설립… 실무 「재택교육」/97년부터 대학정원·학사 운영 등 자율화/초중고 필수과목 줄이고 선택과목 확대/수학능력 확인되면 5세 국교취학 가능 ▷열린교육 평생교육◁ ▲학점은행제 도입=언제 어디서나 개인이 객관적으로 평가·인정된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학점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고 이것이 누적돼 일정 기준을 충족시키면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새로 설치할 「교육과정평가원」(가칭)에서 관장한다. ▲시간제 학생등록=학생이 필요에 따라 시간제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해 직장과 학교,교육기관을 연결시키고 이를 위해 학점당 등록제,정원의 자율적 운영,졸업연한 연장 등을 함께 추진한다. ▲최소전공인정 학점제 도입=대학의 학과간 벽을 낮추어 학생이 어느 학과에 속하든 원하는 전공을 여러개 공부할 수 있도록 전공인정 학점을 총 이수학점의 4분의 1부터 6분의 1수준으로 크게 낮춘다. ▲신대학의 시범운영=새로운 형태의 2∼4년제 생업기술고등교육 기관인 신대학의 개념을 도입,학점은행제를통해 재택교육과 직장에서의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신대학은 중앙에 본부를 두고 공단이나 기업체등 지역별 학습센터를 설치,첨단 정보통신매체를 활용한 원격교육과 현장실습에 의해 현장중심적 교육을 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의 대학이다.하반기에 추진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가 멀티미디어 교육지원센터 설립=학교교육,사회교육,직업·기술교육이 정보공학적으로 연계돼 있는 열린교육체제를 종합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가 멀티미디어 교육지원센터」를 설치한다.이 센터는 정부출연기관으로 활용 가능한 모든 멀티미디어 학습자료를 개발하고 상호 연계시켜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학습자료를 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교육정보화추진위원회 구성=국가 멀티미디어 교육지원센터의 설립 준비를 위한 대통령 직속의 자문기구로 한시적으로 운영한다. ▷유능한 교원 육성방안◁ ▲교원양성기관 교육과정 개편=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고 교수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학교 현장과 연계된 교원양성 교육과정으로 개편한다.또 중등학교의 소규모추세와 국민학교 교과전담제 확대에 대비해 복수전공제를 적극 권장한다. ▲교원임용제도의 개선=신규 교원임용제도는 현장교육 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개선한다.「국·공립학교 교원임용고사」를 개선해 객관식 위주의 시험을 지양하고 주관식 위주로 전환한다.또 사립학교의 신규교사 임용은 공개전형으로 선발,임용한다. ▲일의 양과 어려움에 따른 차등 보수=초·중등교사의 주당 책임수업시수를 설정하고 책임수업시수 이상의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학급담임을 맡은 교사 등에 대해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고 인사에도 반영하는 등 교원 보수체계를 합리적으로 개편한다. ▲특별연구교사제 도입=연구실적이 좋고 잘 가르치는 교원을 특별연구교사로 선정,일정기간 동안 국내·외 연수기회를 부여하거나 현장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지원한다. ▲자율 출퇴근 시간제=교사의 학생생활지도,수업 등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고 교사로서의 의무(근무시간 수업 학생지도 교무회의 등)를 다하는 범위 안에서 자율 출·퇴근제를 시·도교육감이 지역실정에따라 시범 실시한다. ▷대학 다양화·특성화◁ ▲단설 전문대학원 설치=현장중심의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세계화·정보화 관련 전문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 학부가 없는 별도의 단설 전문대학원을 설치할 수 있게 한다. ▲대학설립 준칙주의로 전환=획일적인 학교설립 기준을 지양하고 학교의 설립목적과 학교의 특성에 따라 시설·설비,교원 및 적정재정규모 등 학교설립기준을 다양하게 정해 일정기준을 충족하면 학교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다.정부는 학교로 하여금 「학교헌장」을 자율적으로 제정·제출하도록 하고 「학교헌장」의 이행여부를 대학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이같은 준칙주의에 의한 새로운 법정기준이 제정되면 기존의 고등교육기관은 일정기한내(3∼5년이내)에 새로운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전문대학·개방대학·4년제대학 등 각 고등교육기관은 자유롭게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예:○○전문대학→○○대학).96학년도부터,비수도권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한다. ▲대학정원 및 학사운영의 자율화=97학년도부터,비수도권 지역부터 대학정원을 점진적으로 자율화 하고 학사운영을 대학자율에 맡긴다.학위의 공신력 및 국제적 통용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준칙주의에 의하여 신설되는 대학에 대해서는 학위인정제를 도입한다. ▲대학평가 및 재정지원 연계 강화=개별대학별로 해마다 자체 평가를 하도록 하고 3∼4년 마다 대학연구 및 인재양성에 대한 종합평가와 1∼2년 주기로 교육수요자의 대학만족도 조사 및 대학의 특성화된 영역에 대한 분야별 평가를 정부,대학교육협의회,산업체,학생,학부모 등 해당 대학 밖의 기관에서 한다. ▲고등교육기관 해외진출지원=미국 LA,일본 오사카 등 해외교민 밀집지역에 우리나라 대학의 분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인성·창의성 높이기◁ ▲교육과정 개선=학생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초·중등학교의 필수과목수를 줄이고 그 수준을 낮춰 조정하는 한편 선택과목수를 늘리고 이에 대한 심화학습이 가능하도록 교육과정을 개선한다.이를 위해 「교육과정특별위원회」를 교육개혁위원회 안에 구성,올해말까지 교육과정 기본골격을 마련한다. ▲교육과정 운영의 다양화=고등학교의 공통필수 교과목수를 줄이고 그 수준을 현행 고교 1학년 수준으로 낮춘다.1학년 과정은 공통필수 과목 위주로 편성·운영하고 2학년부터는 학생의 진로선택과 학습능력에 따라 원하는 과목과 수준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과정을 강화한다.이를 위해 진로 및 교과상담교사,순회교사,시간제교사,산학겸임교사,복수전공교사 등의 제도를 활성화하고 이동식 수업을 도입한다. ▲특수교육과 영재교육의 강화=장애학생들이 장애의 종류와 정도에 적합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특수학교의 설립을 확대한다.일반 초·중등학교도 특수교육 프로그램의 운영을 강화한다.분야별 영재를 판별할 수 있는 과학적인 도구를 개발,적용해 영재를 조기에 발견하도록 하고 영재가 영재로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정규학교 안의 영재교육과 영재교육기관을 통한 영재교육을 활성화 하며 연구소 또는 대학에 「영재교육센터」를 설치,운영한다. ▲외국어교육의 강화=외국어 교수·학습을 문법 중심에서 회화중심으로 바꾸고 학교에서의 평가와 수능시험에서 회화능력 평가비중을 높인다.첨단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방법을 도입하고 「교실영어」의 활성화를 위해 영어시간에는 영어교사가 가급적 영어만 사용하도록 권장한다.외국인 교사를 적극 활용하고 외국어교사의 외국어능력 향상을 위한 국·내외 연수기회를 확대한다. 97학년도부터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의 선택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도록 순회교사제를 확대한다. ▲청소년 수련활동과 봉사활동 강화=야영장이나 수련원 시설을 확충시켜 청소년의 단체수련활동을 활성화 하고 협동적 문제해결을 통한 다양한 실천학습 경험을 제공한다.특히 개인 또는 단체 수련활동과 학내·외 자원봉사활동의 내용과 참가시간을 「종합생활기록부」에 기재,관리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상급학교 진학시 반영하도록 한다. ▷초중고 학교공동체◁ ▲「학교운영위원회」설치=국·공립 초·중등학교에 교사를 포함한 교원 학부모 지역인사 동문대표 교육전문가 등으로 예산 및 결산,선택교과 및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학교헌장·규칙 을 제정하는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운영한다.사립학교에는 위원회의 설치를 권장하되 기능은 학교운영 전반에 관한 자문에 국한하도록 한다. ▲학교장 초빙제 및 교사 초빙제 시범 실시=일부학교에 한하여 학부모 등이 원하는 교장을 초빙할 수 있도록 한다.후보자는 관할교육청이 공개모집하며 「학교운영위원회」는 후보자 중 적임자 2명을 선정,임명권자에게 임용을 제청한다.초빙된 교장은 연임제한을 받지 않는다.또 학교장초빙제에 의해 임명된 학교장은 같은 방법으로 정원의 20% 범위 안에서 학교별 프로그램운영에 적합한 교사를 초빙할 수 있다. ▲국민학교 입학연령 탄력운영=만 6살이 되지 않으면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돼 있는 규정을 바꿔 만 5살 어린이도 학부모가 원하고 소정의 신체검사와 능력검사 결과 수학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면 학교의 수용능력 범위 안에서 취학이 가능하도록 한다. ▷교육 공급자 지원책◁ ▲규제완화위원회 설치·운영=학교설립·운영,교육과정운영,학생선발 등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해학부모 교원 학교설치·경영자 등 교육관계자의 창의적인 노력과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 교육의 질이 향상되도록 하기 위해 규제완화위원회를 교육부에 설치한다. ▲교육과정평가원(가칭) 설치·운영=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교육기관의 책무성을 높이며 공신력 높은 다양한 평가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도록 「교육과정평가원」을 설치한다.다른 기관의 대학평가 업무지원,학점은행제의 운영과 이에 따른 학위검정 및 수여,학위인정기준 설정 등에 관한 업무를 본다. ▷교육재정 확보 방안◁ 98년까지 교육재정을 GNP 대비 5% 수준으로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세부방안은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재정경제원·내무부·교육부·건설교통부 차관등 관계부처 차관급 회의에서 수립해 올 9월까지 대통령에게 보고,확정하며 96년도 예산부터 반영한다.관계부처는 96년 교육부 예산액을 포함한 연차별 재원조달계획,국가·지방자치단체의 부담방안 등을 논의 결정한다.그러나 국·공립학교의 입학금 및 수업료 등은 정부부담이 아니므로 GNP 5% 교육재정 개념에서제외한다.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중국의 남침지원(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6)

    ◎모택동 “2개 조선인 사단 파병”약속/모­김일성 친서받고 탄약·식량지원 승낙/장교 200명 훈련… 전투력 증강 주문/“장기전은 불리”… 일 개입 대비 당부 김일로부터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받은 모택동은 먼저 조선인 사단의 전출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3개 사단중 2개는 현재 목단과 장춘에 주둔하고 있고 1개는 공격작전에 참가중이다.따라서 앞의 2개 사단은 언제든지 조선정부에 돌려줄 수 있다.하지만 나머지 1개는 전투가 끝나야 하기 때문에 1개월 전에는 곤란하다』며 흔쾌히 전출을 승낙했다.이와함께 모는 이 조선사단들이 정규군이 아니라서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전투력이 약하다면서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훈련된 장교를 배속시켜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중국군 보낼수도 김일은 또한 조선인 사단이 일본군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중국이 탄약을 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모택동은 『중국에서도 그런 탄약을 생산한다.얼마든지 주겠다』고 답했다.남침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모택동은『군사작전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게 됐다.김일성은 이 점을 감안해 신중하게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고 주문했다.모택동은 이와함께 일본의 개입에 우려를 표시했다.『전쟁은 신속히 끝날 수도 있고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장기전은 귀측에 불리하다.왜냐하면 그럴 경우 일본이 전쟁에 개입해 남조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지근에 소련이 있고 만주에는 우리가 있다.필요하면 귀측을 위해 중국군을 보낼 수 있다.우리는 모두 검다.미국 사람에게는 구별도 잘 안된다』 모택동은 이렇게 적극적인 지원의사를 밝히는 한편 가까운 시일내에 남침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덧붙였다.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국제정세가 좋지 않다.중국공산당은 장개석군과 싸우기에 바빠서 북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다.그러니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중국이 공산당 기치아래 통일될 때까지 남침을 기다려달라』 ○“개전 보류”요구 이와함께 모택동은 김일성의 북경방문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물었다.모는 또한 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차이나 등지의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아시아제국 코민포름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김일에게 말했다.하지만 아직 코민포름 출범은 시기상조라고 모는 말했다.중국내전이 진행중이고 조선에 긴장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코민포름 창설이 자칫 군사동맹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5월 17일 모택동은 소련대표단에게 김일의 중국방문에 대해 브리핑했다.당시 북경주재 소련대표부의 코발료프대사는 5월 18일 스탈린앞으로 모의 브리핑내용을 보고했다.다음은 코발료프가 보고한 모택동의 발언내용.『북조선에 장교와 무기지원을 약속했음.만주에 1백50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는데 이들로 2개 사단(사단병력은 1만명)이 구성돼 있다.이중 1개 사단은 전투경험이 있음.만주에서 국민당과 적극적인 전투를 벌였음.이들 2개사단은 북조선의 요청만 있으면 즉각 투입가능함.북조선이 투입요청을 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훈련시키고 모든 보급품을 계속 제공하겠음.이외에도 우리는 장교 2백명을 훈련시키고 있음.1개월이내에 이들은 조선에 보낼 예정임.만약 남북조선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앞서 언급한 조선인 사단에 대한 식량·무기지원은 물론 모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 북조선동지들은 조만간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할 것으로 믿고 있음.하지만 대신 일본군이 들어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음.일본군의 도움을 얻어 남조선이 북침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남조선이 침공해올 경우 대응공격을 하되 남조선군에 일본군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주의깊게 살피라고 했음.만약 일본군이 들어있고 적의 전투력이 우세할 경우 영토일부를 내주더라도 귀측의 전투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했음.그래야 상황이 좋아질 때 적을 격퇴시킬 수 있기 때문임. 우리는 또한 이런 후퇴시에 대비해 당·군·인민들을 이념적으로 교육시킬 것을 북조선측에 권고했음.그런 후퇴가 민주조선의 완전한 패배가 아니라 일시 전략적인 후퇴라는 점을 주지시키라고 했음.설사 미군이 철수하고 일본군이 대신 들어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동지들이 너무 서둘러 남침을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음.왜냐하면 맥아더장군이 신속하게 일본군 병력과 무기를 남조선에 들여보낼 수 있기 때문임.반면 우리는 주력병력 대부분이 양자강 너머에 가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을 북조선에 해줄 수 없음. 따라서 남침은 1950년초,국제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려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생각임.그 때는 일본군이 침공해와도 중국군 엘리트부대를 보내 일군을 격퇴시킬 수 있음』 ○소련과 긴밀협조 이같이 말한 뒤 모택동은 『이 모든 조치는 모스크바와 협의하에 취해 나가겠다』고 코발료프 대사에게 약속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직후인 49년 4월,5월.모택동과 김일성 두사람 사이에는 이미 남침시 병력지원에 대한 깊숙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50년 4월 김일성의 모스크바방문에서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점을 상기한다면 모­김 두사람간 남침에 대한 교감은 이보다 무려 1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전쟁의 해인 50년 1월 1일.날이 밝자마자 스탈린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 1통을 보냈다.『임표가 모택동앞으로 다음과 같은전문을 보냈다.중국인민해방군 안에 1만6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있는데 순수 조선인 부대도 있다.순수 조선인부대는 4개 대대,27개 중대,9개 소대임.중국군내에 3개의 조선인 지휘부가 있으며 그중 2명은 사단장급이고 5명은 여단장,대대장급 87명이다.중대장 5백78명,소대장1천4백명,분대장 1천9백명이다. 중국군이 중국남부로 이동했을 때 조선인 병력사이에서 조국으로 돌려보내달라며 소요가 있었다고 함.임표는 내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조선인 병력을 1개 사단 혹은 4∼5개 여단으로 묶어서 모두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임표의 건의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들어볼 것』 그러나 김일성은 평양주재 중국무역대표부를 통해 보낸 중국정부의 서신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알고 1월 9일 슈티코프 대사를 불렀다.다음은 슈티코프 대사가 1월 11일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김일성은 중국정부가 내전이 끝나가고 있어 중국군내 조선군 부대를 해산시키고 북조선이 원하면 모두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했음.김일성은 이들을 모두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음.김일성은 ⑴이들로 1개 지상군 사단,2개 지상군 연대,그리고 1개 모터사이클 연대,기계화 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함.⑵김일성은 이 조선인 병력을 50년 4월까지 중국영토에 두고 싶다고 했음.북조선에 이들을 배치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함』 ○회담의제 “통일”로 중국군내 조선인 부대를 놓고 북한·중국간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그런데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전에 모택동에게도 면담신청을 해놓았다.김일성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4월 10일 이그나티예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대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크렘린으로 보냈다.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에 관한 건이었다.『북경주재 이주연 북한대사가 3월말 모택동을 만났음.이주연대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이 면담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문제가 협의됐음.모택동은 회담개최를 받아들이고 회담시기를 금년 4월말이나 5월초로 제의했음.모택동은 회담의제를 조선통일로 못박았음.그리고 김일성이 통일에 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비밀방문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공식방문으로 하라고 말했음.이주연대사는 회담시기나 회담의제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현재 병치료중이라는 핑계로 구체적인 답을 피했음.(편집자 주: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중국지도자들에게도 모스크바방문을 비밀로 했음)』 김일성이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뒤인 5월 3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김과의 회담사실을 통보했다.『조선동지들이 최근 우리를 방문했음.회담결과에 대해서는 조만간 알려주겠음』북경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보낸 짤막한 전문통지문이었다.그리고 나서 10일이나 지난 5월 14일 스탈린은 회담결과를 모택동에게 통보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남침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그의 능란한 처세술을 읽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그는 두 사람간의 코뮤니케이션을 가능한한 차단시켜 때로는 서로 경쟁시키고 때로는 협력시키며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간 것이다.반대로 스탈린­모택동 두사람의 이러한관계는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김일성으로부터 뺏어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 북 제의 「미·북 장성회담」/유엔사,거부 통보

    주한유엔군사령부는 25일 북한측에게 『유엔사는 북한과의 장성급 회담에 관심이 있으나 북·미단독회담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유엔측은 이날 낮 판문점에서 북한측과 군사정전위 일직장교회담을 갖고 『지난 19일 미군 스미스소장과 한국군장군·영국과 호주대표등 군정위 대표 4명과 북한 이찬복중장이 군정위 회담장에서 만나자고 제의한 유엔사의 입장은 변동이 없다』면서 이같이 통보했다고 밝혔다.
  • 미,한반도 대상 모의 「컴퓨터전」/「대초원의 전사」워게임 한창

    ◎북 기습남침 대비… “인명피해 최소화”/지도부서 위성통해 전황파악·지휘 미국이 한반도를 가상전쟁지역으로 설정,21세기형 컴퓨터 전쟁연습에 한창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은 「대초원의 전사」로 명명된 이 워 게임 모델을 통해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응해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미래형 전쟁지휘체계를 개발중이다. 이 워 게임은 단위부대와 전쟁지도부가 모든 전쟁상황을 위성이나 조기경보통제기(AWACS)등을 통해 동시에 지켜볼 수 있도록 돼있다.또 전쟁지휘부가 화면을 보면서 일선부대나 포대·항공기·전함등에 즉시 임무를 부여,공격력을 집중하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다음은 미국 캔자스주의 포트 리븐워드기지에서 지난주부터 진행중인 「대초원의 전사 워게임」을 보도한 캔자스 시티 스타지의 현장보도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가상의 상황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증대되면서 북한군이 국경선에서 기습공격에 나섰다.서울은 곧 포위상태에 들어갔으며 주한미군 병력은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고 있다.이때 최첨단 통신및 무기체계를 갖춘 특수이동타격대가 동원되면서 모의전쟁이 시작된다.이 타격대는 21세기 전쟁이 어떤식으로 전개될지를 보여주게 된다. 유럽주둔 미군사령관 윌리엄 크라우치대장은 이와 관련,『이번 가상전은 앞으로 20∼30년 또는 그 이후 시점을 대비해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기술·무기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의전을 위해 기지에 상주하는 1천3백명 전원이 지난주부터 매일 12시간씩 컴퓨터앞에 매달려 있으며 독일 그라펜보르에서부터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지의 전산망이 서로 접속돼 있다. 이번 작전에서는 북한을 오렌지랜드로,한국은 블루랜드로 명명하고 있다. 이 가상작전에는 한국장교와 프랑스·영국장교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번 가상작전에서는 「피닉스」라고 불리는 컴퓨터시스템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 컴퓨터 시스템은 첩보위성·정찰기 등으로부터 얻은 각종 전술자료를 사단·연대·대대와 심지어 일선중대까지 직접 공급해 준다.이같은 정보전달체제는 지금은 실현불가능하지만 2010년이면 실전사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 컴퓨터 시스템이 완료되면 특정 사단의 모든 야포를 단일목표물에 발사하는데 현재 40∼50분이 소요되던 것이 10분으로 단축된다. 특수이동타격대의 가상병력구성은 아직은 실험단계이다.이 타격대는 보통의 사단보다 약 3분의1 큰 규모이며 몇개의 여단으로 구성된다.그러나 현재의 여단과 달리 스스로 중화기부대와 정찰,항공,포대및 방공부대를 포함하고 있다.이 타격대는 오는 2010년 미육군이 갖출 것으로 예상되는 정밀유도 사정거리 2백80㎞의 다탄두로켓과 같은 무기들을 구비하고 있다.이 무기는 한꺼번에 탱크 6대를 거의 실수없이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부대들은 미군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전쟁의 속도를 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금까지 보지 못한 작전을 펼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미 제의 장성급 접촉/북,“추후통보” 연락/23일 접촉 무산

    북한은 주한 유엔군사령부가 장성급 접촉을 제의한 것과 관련,22일 이 제안에 대해 추후 통보하겠다고 연락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사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하오 유엔사측과 북한측간의 소령급 일직 장교접촉에서 북한측은 『유엔사측의 장성급 접촉제안에 대해 응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며 대답할 준비가 되면 추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당초 23일에 제안한 장성급 접촉은 일단 무산됐다.
  • 유엔사/「정전위 장성급접촉」 대북 제의

    ◎북에 서한/한미정성포함… 내일 판문점서 만나자/미에 장성대화 제의했던 북에 역제의 국방부는 주한 유엔군사령부가 미군 및 한국군 장성을 포함한 군사정전위 대표 4명이 참석하는 장성급 접촉을 오는 23일 갖자고 북한측에 제의했다고 밝혔다. 국방부의 고위관계자는 21일 『지난19일 판문점 일직장교 접촉을 통해 북한 이찬복 중장 앞으로 보내는 주한유엔군사령부 스미스소장 명의의 서한을 전달,「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장성급 접촉을 23일 갖자」고 제안했다』고 밝히고 『이번 장성급 접촉에 있어 유엔사측 대표단은 군사정전위 수석대표인 황원탁 소장을 제외한 한국·미국·영국 및 여타 참전국 대표 1인 등 4명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북한측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와 관련,『북한의 잇단 정전협정 위반으로 휴전선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때 북한과의 접촉 채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면서 『따라서 중간 레벨 이하의 정전위 대표간 접촉 채널을 가동하는 방안을 미국측과 협의해추진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미국과 정치·군사협상을 노리고 지난 3월 미국과의 장성급 접촉을 제안한바 있는 북한이 정전위 틀안에서 접촉하자는 우리와 미국의 이러한 수정제의를 수락할 지는 미지수』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방부 관계자는 게리 럭 주한유엔군사령관이 지난 12일 이양호 국방부장관 앞으로 서신을 보내 『군사정전위 틀안에서 미국­북한 간 장성급 접촉을 추진하겠다』면서 우리의 견해를 물어왔었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이장관은 「정전위 틀안에서의 대북 접촉」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 ▲대표단 구성은 한국군 장성을 포함,4명으로 하고 ▲회의장소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상의 정전위 회의실로 하며 ▲회의 의제는 비무장지대관리 등 정전협정 관련 사항으로 국한돼야 하며 ▲실제 회담은 유엔사측 제의에 대한 북한측의 명시적 동의를 받은 뒤에 이뤄져야 한다는 4가지 원칙을 담은 답신을 럭 사령관에게 보낸것으로 확인됐다. 럭 사령관은 17일 이 장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한국군 장성을 포함한 4명의 군사정전위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한국측 입장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주한유엔군사령부도 21일 성명을 발표,『우리는 군정위 체제를 와해시키려는 북한측의 일방적인 행위에 맞서 최근 수개월간 정전협정의 유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한국정부측과 협의해왔다』면서 『북한측과의 장성급 접촉이 긍정적 조치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 크렘린의 남침 결단(모스크바 새증언:4)

    ◎스탈린­모택동 비밀회동… “북 남침 지원키로”/김일성,중 공산화에 고무… “개전”고집/스탈린,“전쟁나면 북 지원”전문 보내/소,북 3개 정예사단 창설·「무기구입 차관」제공 약속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최초로 남침허용을 요청한 49년 3월부터 이듬해 1월 만찬장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0개월여 동안 적어도 표면적으로 스탈린은 전쟁 개시를 원치 않았다.49년 9월 툰킨 대사대리가 김일성의 옹진반도 점령계획을 보고한 것을 시발로 평양의 소련대사관과 모스크바 사이에 오간 전문들은 김일성이 남침 개시를 요청하고 스탈린이 이를 말리는 식으로 계속됐다.49년 10월30일부터 수일간 스탈린과 슈티코프대사간에 오간 전문들을 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기도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읽을 수 있다. ○“전쟁기도 못 마땅” 스탈린은 9월24일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바 있다.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그후에도 김일성이 옹진반도점령,해방구건설 등에 미련을 못버린다는 사실을 계속 보고했다.이 일을 두고 스탈린은슈티코프 대사를 크게 질책하기에 이른다.『10월30일.슈티코프 대사에게 엄중경고함.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조선에 대해 국지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대사의 행동은 적절치 못함.그런 도발은 우리의 이익에 매우 위험하고 적으로 하여금 대규모 전쟁을 시작할 빌미를 주는 것임.대사의 행동은 전적으로 무책임한 것임』 크게 놀란 슈티코프 대사는 이튿날 곧바로 해명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띄웠다.『본인은 북조선 내무성에 파견된 우리 고문관 보두아긴 대령을 통해 북조선이 38도선을 침범치 못하도록 엄중 감시하라고 지시했음.본인은 북조선당국에게 남조선을 무력침공하라는 충고를 결코 한 바 없음』 스탈린은 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11월20일 당중앙위 명의로 재차 경고전문을 슈티코프에게 보냈다.『귀하가 제출한 해명은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움.이는 바로 모스크바가 내리는 지시사항을 귀하가 이행치 않는다는 증거임.38도선에서 어떤 긴장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대신 귀하는 이 문제를 놓고 토의를 벌였음』 호된 질책을 당한슈티코프 대사는 이후 김일성의 남침계획 관련 보고를 중단했다.대신 남한의 북침기도에 관한 보고만 수차 스탈린 앞으로 더 보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이러한 초기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의사에 동조하게된 것은 언제,무슨 계기가 발단이 된 것일까.그것은 바로 중국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한 것이다.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가장 크게 고무된 사람은 바로 김일성이었다.김일성이 만찬장사건을 일으킨 것도 사실은 모택동의 승리에서 얻은 용기의 일단을 보인 것이었다.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을 해방시켰으니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김일성은 생각했던 것이다.더구나 모택동은 중국내전만 끝나면 북조선을 도울 수 있다는 언질을 여러차례 김에게 했었다.1950년 1월30일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답신이 스탈린으로부터 떨어졌다.모스크바에서 면담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소 차관 전용 허용 이날 스탈린은 전쟁불가를 고수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다음의 전문을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보냈다.『…김일성 동지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함.그러나 그가 지금남조선과 관련해 도모하려는 중대사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이해해야 함.무엇보다 큰 위험부담이 없는 쪽으로 일을 꾸며야 함.그가 이 문제와 관련,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항상 그를 만나 이야기할 준비가 돼있음.이런 나의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그를 도울 준비가 돼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에 구체적인 남침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 전문이 되는 셈이다.그러나 마치 면담허락의 조건인 양 스탈린은 이 전문에서 매년 최소한 2만5천t의 납을 소련에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며 『김일성이 이 요구를 거절하지 말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슈티코프 대사는 전문을 접수한 바로 그날 김일성을 만났다.이날 면담내용은 이튿날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에 상세히 기록됐다.『50년 1월31일.각하의 지시에 다라 김일성 동지를 만났음.김일성은 내가 전달한 내용을 매우 만족스럽게 받아들였음.동지께서 그를 만나겠다고 한 사실과 이 문제(남조선 해방문제)와 관련,그를 지원해 주겠다고 한 사실에 그는 매우 큰 감명을 받았음.김은 스탈린동지의 진의를 한번 더 확인하고 싶어 스탈린동지께서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자기를 만나자고 한 게 분명하냐고 재차 물었음.본인은 이 전문내용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고 확인해주었음.김은 자기는 언제든지 스탈린동지를 만날 준비가 돼있다고 덧붙였음』 이와함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소련이 요청한 납을 10∼15일 이내에 약속대로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전문을 보낼 바로 그 시점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은 모택동과 만나고 있었다.김일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때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은 북한의 남침시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그렇게도 전쟁을 애원했던 사람은 김일성이었지만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함과 함께 북한의 남침문제에 대해서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이 이니셔티브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2월2일 스탈린은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다음 사항을 김일성 동지에게 주지시킬 것.그가 나에게 의논하고자 하는 문제는 현시점에서 완벽한 보안이 유지돼야 함.북조선의 다른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지도자들도 알아서는 안됨.이는 적에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임.…중략…지금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는 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조선의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를 도울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논의했음』 이틀 뒤 김일성이 먼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자고 요청했다.그리고는 즉각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했다.(대통령문서소보관.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50년 2월4일.김일성은 전군을 1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기 위해 추가 지상군사단을 편성하고 싶다며 본인의 의견을 물었음.본인은 이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답하고 우선 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이 있느냐고 물었음.아울러 이에 대해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소련정부가 51년도 분으로 주기로 한 차관을 50년도에 쓸 수 있도록 자기가 직접 스탈린 동지에게 요청토록 해달라고 했음.그는 이 차관으로 3개 지상군사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고 싶어했음.본인은 이 요청을 본국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답했음』 스탈린은 2월9일자 전문을 통해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답했다.그는 이 3개사단을 엘리트장교,현대식 장비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라는 별도주문까지 덧붙여 보냈다.다음은 전문내용.『김일성을 만나 3개사단 창설을 추진하라고 이를 것.이 사단들은 경험있는 장교들과 훈련 잘된 사병,현대무기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어야한다는 점을 그에게 유념시킬 것.51년도분으로 책정된 차관을 50년도로 전용시켜 3개사단 창설에 필요한 무기구입에 쓰도록 승인한다는 것도 알릴 것』 ○「무력남침」못 박자 바로 이튿날 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 사실을 통보하고 곧바로 같은날 스탈린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다.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이 이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원조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몇번이나 되풀이 했다』고 보고했다.이후 김일성은 모스크바 방문준비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방문절차와 관련,모스크바와 평양간 수차례 전문이 오갔다.3월20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 방문날짜를 4월초로 잡고 박헌영을 대동하고 싶다고 말했다.아울러 이번 방문을 1946년도와 마찬가지로 비공식(비밀) 방문으로 하고 싶다고 주문했다.방문준비는 모두 마쳤으며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음의 사항을 논의하고 싶다며 회담의제를 내놓았다. 김일성이 제의한 이 의제는 3월21일자 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①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에 관해 ②북조선의 경제발전에 관해 ③가능하다면 당사업에 관해. 3월23일 슈티코프 대사는 이 의제를 더 상세히 정리해 다시 모스크바로 보냈다.①통일방안 ②경제문제 ③중·조선관계 ④아시아공산당,노동당의 협력문제 등으로 세분한 이 전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①항의 통일문제이다.그런데 3월1일자 보고전문에서 「남북조선통일 방안과 방법」으로 기술됐던 이 항목이 이틀 뒤의 이 전문에서 『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의도는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데 있음』이라는 쪽으로 바뀌어졌다.통일방안을 아예 「무력남침」으로 못박자고 김일성이 요청한 결과였다.
  • 남침야욕 노골화(6·25 내막/모스크바 새증언:2)

    ◎김일성,“개막 두달내 남한점령” 장담/49년9월 소 공사에 남침구상 처음 표명/“전쟁 허락해 달라” 집요하게 스탈린 설득/“국지전·전면전” 선택권은 크렘린에 맡겨/평양,빨치산 지휘자 8백명 남파… 게릴라전 지도 김일성의 구체적인 남침구상이 최초로 문서로 드러난 것은 1949년 9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툰킨공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극비보고전문이다.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대통령문서보관소) ○스탈린 관심 표명 김일성이 밝힌 이 최초의 구체적 남침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일단 관심을 표명했다.그리고는 9월 11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한반도정세에 관해 다음의 항목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⑴남조선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규모·무기·전투능력등. ⑵남조선내 빨치산운동상황.개전시 그들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지. ⑶)북조선이 전쟁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인민들이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⑷남침시 미군이 취할 입장 ⑸북조선의 군사력·무기·전투능력.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툰킨공사는 곧바로 12∼13일 양일간 김일성·박헌영을 면담했다.재미있는 것은 툰킨공사와의 면담에서김일성의 태도는 이전의 남조선의 군사적 위협에서 대남 무력침공이 성공할 수 있다는 쪽으로 급변했다는 것이다.다음은 9월14일 툰킨공사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김과의 면담내용. 『⑴남조선군은 장교들의 훈련수준이 아주 낮다고 함.김일성은 38도선에서 벌어진 몇차례 교전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평가했음.김은 현재 남조선군 거의 모든 부대에 북한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했음.그러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실제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음. ⑵김일성·박헌영은 현재 남조선에 1천5백∼2천명의 빨치산이 활동중이라고 했음.김은 그러나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했음.남한출신인 박헌영은 김과 다소 다른 견해를 밝혔음.그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음. ⑶북한이 선제공격을 시작할 경우 남한국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말했음.김은 금년 봄 모택동이 북조선대표 김일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지금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중국내전이 고비를 넘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음』 그러나 바로 이튿날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전날과 달리 북조선이 군사작전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국민들도 이를 환영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불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를 통역으로 나온 허가이(편집자주:재소한인으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비서)의 영향탓이라고 분석했다.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김일성은 다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따라서 전면전 대신 옹진반도와 반도동쪽의 개성까지 남한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작전이 좋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일성은 북조선군이 남조선군과 비교해 강점으로는 탱크·박격포·비행기등 기술적인 면과 훈련·사기등에서 앞서고 약점으로는 조종사의 숫자 및 훈련부족·군함부족·탄약부족·대구경총의 전투태세 미흡등을 들었다.김일성은 먼저 옹진반도를 공격,그곳에 주둔중인 남한군 2개연대를 궤멸시키고 반도를 점령한 뒤 동쪽의 남조선영토 일부를 점령하면 일단 공격을 중단하고 상황을 살피겠다고 했다.남한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계속 남진하되 그렇지 않으면 옹진반도를 확고히 해 방어선을 3분의1 정도 줄이겠다는 계산이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밝히면서도 스탈린의 의중을 알기 위해 끝까지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았다.물론 남침의사를 내비친 것은 스탈린이 원칙적으로 이에 동의할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남한 군사력에 대한 평가,국지전을 할지 전면전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입장이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스탈린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툰킨공사는 이 보고전문 말미에 김일성·박헌영과는 다른 견해를 덧붙이며 전쟁개시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력통일밖에 없다 『김일성이 제의하는 국지전은 필히 남북한간 내전으로 발전될 것임.현재 남북한 지도부내 내전 지지자는 극소수임.현단계에서 북조선이 내전을 시작하는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야 함.본인은 현명치 못한 판단으로 생각함.북조선군은 남쪽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신속한 작전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못함.빨치산과 남조선인민들의 도움을 가정하더라도 신속한 성공을 기대하기 힘듦.내전으로 확대되면 정치·군사 양면에서 북조선에 불리함.첫째로 전쟁확대는 미국에 이승만정부를 지원할 명분을 줌.미국은 중국에서 패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남조선문제에 개입하려 함.또한 전쟁피해가 커지면서 남조선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 측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것임』 그는 이 전문과 함께 남북한의 정치경제·군사 관련장문의 보고서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진 당시상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용치 않기로 한다.다만 한가지 툰킨공사가 이 별도보고서에서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갖고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그는 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 가능성은 없어졌고 무력에 의한 통일의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도 툰킨공사는 남침시 미군개입과 반소선전에 악용될 가능성등을 들어 전쟁개시에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그는 전쟁보다 남조선내 빨치산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는게 보다 현명하다는 견해를덧붙였다. 이같은 보고를 접한 크렘린은 9월24일 당중앙위 정치국 이름으로 북조선의 남침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북한지도부에 전달케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정치국결정.회의록 N191).이 결정에서 크렘린은 군사적으로 인민군이 장기적인 작전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어 지금 작전을 시작하면 적을 패배시킬 수도 없을 뿐아니라 북조선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고 못박았다.이 결정은 「조선인민들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의 견해에는 동의한다.그러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무엇보다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을 강화하고 대규모 반정부 기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옹진반도 점령작전에 대해서도 소련지도부는 『이는 남조선과의 전면전 초기단계로서 시작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빨치산운동 강화를 1차 면담에 이어 두번째로 김일성의 개전허가요구를 거절한 것이지만 스탈린의 이 결정은 좀더 확실한 승리를 위한 작전지시문 같은 느낌을 준다.아울러 김일성과 스탈린 두사람간 전쟁개시에대한 공감대는 이 무렵을 전후해 확고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0월4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들고 김일성·박헌영을 다시 만났다.그리고는 바로 그날 저녁 스탈린앞으로 다음과같이 이 면담결과를 보고했다.『김일성과 박헌영은 우리의 통보를 냉담하게 받아들였음.김일성은 「좋다」는 한마디만 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논리가 옳다고 수긍한 뒤 남조선에서 빨치산운동이 확산되기를 기다리는게 좋다고 동의했음.현재 남조선에서는 북조선에서 파견한 8백명이 빨치산운동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음』 소련의 이같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굽히지 않았다.이듬해인 50년 1월17일 평양에서는 박헌영외상이 주최한 한 만찬이 열렸다.1월10일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한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이 만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취한 김일성은 소련·중국 대표들을 붙들고 자신의 남침의지를 다시한번 강하게 나타냈다.이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을 한 것이다.
  • 김일성의 남침 책략(모스크바 새 정언:1)

    ◎6·25내막/서울신문 발굴 소문서속 비사/김일성,“해안방어 취약… 소서 지원해달라”/스탈린/“북 해군 창설·전투기 제공 약속”/김일성/“남한군 6만명… 우리가 더 강해”/49년3월5일 대화록/김일성/“전국토 해방 절호의 기회왔다”/스탈린/“미군 남아있어 때를 기다려야”/49년3월7일 대화록/러 국립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 서울신문사는 6·25 반발 45주년,해방 50주년의 해를 맞아 현대사 재조명작업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보관중인 미공개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 9백50여건 3천여페이지를 독점 입수했다.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이 그동안의 노력끝에 러시아의 외무부 문서국을 비롯,대통령 문서국·옛소련공산당 중앙위 문서국·국방부 문서국 등에서 입수한 이들 문서들을 앞으로 20여회에 걸친 시리즈로 독자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전쟁의 준비로부터 전개과정,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의혹과 논쟁들이 말끔히 정리되길 기대한다.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이 6·25를 공동기획하고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밝혀진 문서들을 통해 이제는 뒤집을 수 없는 사실로 굳어져 있다.그러면 이 3인중 전쟁에 가장 먼저 뜻을 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쯤인가.러시아측 문서에 따르면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48년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그리고 49년말까지 적어도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의사를 갖지 않았다.스탈린은 오히려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크게 우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마치 2차 세계대전 전 독일에 대해 품었던 것같이 스탈린은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피하기 위해 급급했고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에 매우 집착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 당시 크렘린의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문서.(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 전문번호 N121973.편집자주=제8국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해외공관과의 비밀통신을 취급하는 부서)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중인 이 비밀전문은 47년 5월 12일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표부에 파견된 메레슈코프프장군과 슈티코프장군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긴급요청서였다. 『스탈린동지께.46년 7월 26일 전문번호 N15327로 보낸 우리정부의 결정에 의거,46년 12월 16일 우리는 82명의 소련전문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음.이 전문가 파견은 북한에서 산업시설복구와 철도건설작업을 돕기 위한 것임.그러나 지금까지 단 1명의 전문가도 북한에 도착하지 않았음.…중략… 소련을 비롯한 기타 외국전문가들의 도움없이 북한의 산업,철도체계는 가동되지 못함.북한의 붕괴를 막고 또한 남한에서 향후 우리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소련 엔지니어,기술자의 파견이 절대 필요함. ○소전문가 보내라 만약 남북한이 통일돼 임시정부가 구성되기 전까지 소련전문가들이 도착하지 않을 경우 필히 미국 기술자들이 일하러 올 것임.그러면 우리보다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임』 이 전문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보고서 위에다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휘갈겨썼다.『소련전문가 5∼8명을 보내줄 것.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독려케 하라.우리가 조선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됨』 북한과 소련관계가 이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48년 2월 인민군 창건,그리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이듬해인 49년 1월 17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났다.슈티코프는 이날의 면담내용을 즉각 본부에 보고했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 보관)『김일성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소련과의 우호협력협정 체결을 다시 희망했음.이에 대해 본인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하에서 그런 조약체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음.남한의 반동세력들이 한반도 분단고착화의 기회로 이용하고 미소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수도 있음.이 문제로 김일성과 박헌영은 다소 당혹해 했음.김일성은 강경치는 않지만 조약체결을 고집했고 만약 조약체결이 안되면 소련의 비밀원조협정이라도 맺자고 요구했음.본인의 추가설득을 듣고서 김일성은 일단 지금 우호협력조약체결은 적절치 않다는데 동의했음』 그러나 이 전문보고가 있은 불과 1주일 뒤인 1월27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다시 보냈다.『북조선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남한 군부대들이 38선 가까이 이동하고 있고 주 작전방향을 따라 병력이 집중배치되고 있음.남한에 파견됐던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남한에서는 북침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고 함.남한장교들은 남한이 먼저 공격을 시작해 이니셔티브를 잡자고 말한다고 함.이에 따라 북조선당국은 38선의 수비를 강화하고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필요한 방안을 취하고 있음. 결론=본인은 현단계에서 남한이 공격해올 가능성은 낮다고 봄.국내외 여건이 이같은 공격을 불허함.이들이 병력을 38선을 따라 이동해 주방향에 집결시켰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음.남한은 북쪽의 서울공격을 항상 예상했기 때문에 서울방어를 위해 이같은 병력이동을 했을 수 있음.최근 남한은 북한에 테러부대 파견을 증대시키고 있음.총 80명의 테러범들이 체포됐음.개성에서는 14명이 체포됐는데 이들은 폭약 5통,액체폭발물 6병,휘발유 1통을 소지하고 있었음.이들은 창고,학교를 불태우고 지방지도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왔음』 ○북침 가능성 낮다 2월에 접어들면서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보내는 남측의 도발보고 건수는 점차 그 횟수가 잦아졌다.2월3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본부의 몰로토프 외상 앞으로 보냈다. 『38도선 상황이 매우 소란함.남한 군경이 매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의 경찰경비초소를 공격함.현재 북한은 경찰 2개 여단으로 38도선을 경비하고 있음.이 여단의 무장은 일본군의 소총뿐임.소총 1정당 탄알은 3∼10발씩뿐임.자동소총은 없음.북한경찰은 남한경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후퇴하거나 탄약이 떨어져 포로로 잡히기도 함. 소련정부의 결정으로 이들 2개여단 병력에게 소련제 무기가 지급되기로 돼있음.소련국방부 명령에 따라 이들 무기들은 해안군사지구에 공급되기로 돼있음.그러나 본인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기공급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있음.…중략… 그러나 소련정부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북조선은 소총사단 1개,여단 1개를 창설했는데 무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긴급히 이 사태에 손을 써줄 것을 요청함』 ○무기지원 등 요구 슈티코프대사는 하루 뒤인 2월 4일에도 본부에 전문을보내 남한의 대규모 도발을 보고했다.그는 이 공격을 통해 남한군은 38도선 북쪽 2백∼3백m에 위치한 고지 한곳을 점령했고 그옆 38도선 바로 남쪽에 남한군 1개 대대가 배치됐다고 보고했다. 49년 3월 5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극비 방문했다.그는 스탈린과의 면담에서도 38도선의 긴장문제를 제기했다.이날 북조선대표단이 스탈린과 나눈 대화내용은 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김=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북조선에 대한 반동세력의 도발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습니다.우리도 육군은 있지만 해안방어가 거의 전무합니다.이 점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스탈린=미군은 남조선에 몇명이 주둔하고 있습니까. 김=최고 2만명쯤 됩니다. 스탈린=남조선은 군대가 있습니까. 김=있습니다.약 6만명입니다. 스탈린=이 숫자는 경찰을 포함한 것입니까. 김=아닙니다.정규군 숫자입니다. 스탈린=그들이 두렵습니까. 김=그렇지 않습니다.하지만 해군을 갖고 싶습니다. 스탈린=누구 군대가 더 강합니까.당신군인가 아니면 그들인가요. 박헌영=우리 군대가 더 강합니다. 스탈린=해군창설을 지원하겠습니다.군용기도 주겠습니다.남조선군 내부에 당신 사람들이 침투해 있습니까. 박=있습니다.하지만 모두 하위계급들이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스탈린=잘한 일입니다.지금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남조선도 북에 첩자를 보냈을 것입니다.그러니 정신차려야 합니다.요즘 38도선 사정은 어떤가요.남조선군이 침범해 많은 초소들을 뺏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김=강원도지역 38선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우리 경찰은 무장이 부실해서 나중에 정규군을 투입해 남조선군을 격퇴했습니다. 스탈린=쫓아냈나요,그들 스스로 물러났나요. 김=우리가 그들을 패배시켰고 그런 다음 그들이 물러났습니다. 스탈린=38도선은 평화로워야 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은 김일성이 인민군창건 뒤 내부적으로 군비증강에 가장 힘을 쏟을 시점이었다.그는 어떻게 하든 남한의 도발위험이 높다는 점을 강조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지원을 하나라도더 받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주목할 것은 이날 대화에서 김일성,스탈린 두사람 모두 남침문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 7일 두번째 크렘린회담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정식으로 남침승인을 요청했다.모스크바 방문의 진짜 목적을 털어놓은 것이다. ○남침 허가해 달라 힘들게 꺼낸 김일성의 남침허가 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된 49년 3월 7일 스탈린과 북한대표단간의 대화록은 그러나 스탈린 역시 당장의 남침은 불가하지만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완곡한 시사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스탈린동지.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남조선의 반동세력들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들은 자신들이 북침을 하기에 충분한 힘을 확보할 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합니다.이제 우리가 공세를 취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우리의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탈린=남침은 불가합니다.첫째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치 못하고 있습니다.수적으로도 열세이고,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할 것입니다.셋째 소련과 미국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함을 기억해야 합니다.이를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김=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통일의 기회는 없다는 말인가요.남조선 인민들은 하루빨리 통일을 해 반동정부와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스탈린=적들이 만약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오.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깁니다.그때는 모든 사람이 동지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원할 것이오』 이렇게 최초의 남침 의도 표명은 결실이 없었다.49년 4월에 접어들면서 크렘린은 남한의 정세변화에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 했다.4월 17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군사고문단 요청 『본인이 얻은 정보에따르면 5월중 남조선주둔 미군이 일본내 가장 가까운 섬으로 철수할 계획임.철수목적은 남조선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임.미군철수에 맞춰 유엔감시위원단도 남조선을 떠날 것임. 4·5월중 남조선은 38도선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킬 것이 틀림 없음.6월 불시에 북침공격을 감행하고 8월까지 북조선군을 완전 궤멸시킬 목적임.이 정보의 사실여부를 긴급히 확인해 보고하기 바람』(대통령문서보관소) 사흘 뒤인 4월 20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지시사항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문을 스탈린앞으로 보냈다. 『북조선인민군의 전투태세는 매우 미흡함. 1,훈련받은 비행사는 8명 뿐임.훈련기인 U­2기 부족과 항공연료 부족으로 추가훈련을 하지 못하는 실정임. 2,소련군사고문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음.고문단장 스미르노프는 군사지식이 매우 부족하고 또한 태도가 거칠어 북조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함. 3,무기·탄약생산을 지원한다는 소련정부의 결정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 4,지금까지 해안방위군이 창설되지 않았음』 이어서 5월 2일 슈티코프대사는 미군철수 동향,남한군의 전투태세 등을 보고하라는 4월 17일자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상세한 답변전문을 보냈다. 『…우리의 첩자가 보내온 정보와 서울의 라디오방송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남조선 주둔 미군의 철수에 관해 협상하고 있음.…중략…남조선의 북침계획과 관련,남조선당국은 국방군 규모를 계속 증강시키고 있음.국방군은 1949년 1월1일 5만3천6백명에서 3월말 현재 7만명으로 늘었음.특히 기술,특수병력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 이들은 2∼4배까지 늘었음.군내부의 불순사병,장교를 숙청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음.미국은 남조선에 많은 양의 각종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고 있음.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이런 북침관련 보고는 상당기간 계속 됐다.흥미있는 것은 같은 시기 남한측 군책임자들이 우리정부에 올린 보고서들은 북한측의 우려 할만한 동향에 관해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8월 13일 스탈린은 남북한간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한 소련군의 행동지침을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은 절대 이 전쟁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대전제로 한 하달문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우리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임』 모스크바와 평양 사이에 북침가능성을 놓고 이렇게 숨막히는 전문이 오가는 가운데 49년 9월에 접어들며 김일성은 또 다시 남침의사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수개월에 걸친 내부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이었다.
  • “각료가 그런 말을…” 즉각 문책/김숙희 교육장관 전격해임 배경

    ◎“국가 정통성 관련 묵과못할 발언”/“변명 설득력 없다” 파문 조기진화 김숙희 교육부장관의 전격 해임은 「돌발사건」이다.김장관이 교육을 책임진 각료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언을 했고 그에 대해 바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항의전화 빗발쳐 김영삼 대통령은 12일 아침 김장관의 발언 내용을 보고 받고 「진노」했다고 윤여전 청와대공보수석이 전했다.때문에 해임 발표문에 『대통령이 진노했다』는 표현을 넣는 것까지 검토했다는 후문이다.결국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발표가 됐지만 김대통령은 근래 보기 드물게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 장관은 지난 10일 하오 국방부 산하 교육기관인 국방대학원에서 특별강연을 하면서 『6·25는 동족상잔의 분쟁이었고 월남전은 용병으로 참여했으므로 올바른 전쟁의 명분을 갖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강생은 국방대학원 안보및 석사과정 학생 2백여명으로 주로 영관급 장교와 고위 공무원. 강의가 끝난 뒤 수강생중 대령 두명을 비롯,몇몇이 김장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이어 김장관의 발언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 등에는 재향군인회,파월용사회를 비롯한 단체에서는 물론 일반 국민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김 장관은 『장관이 아니라 개인 자격의 발언』『월남 파병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해명했지만 때는 늦었다. 청와대는 김장관의 강연 녹음테이프를 입수,분석한 결과 김장관의 변명이 이유 없다고 결론지었다.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해임함으로써 파문을 조기에 매듭짓기로 방침을 정했다. 윤 공보수석은 『김장관의 발언 내용을 보면 각료가 아니고 일반인이 한 얘기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라고 청와대의 분위기를 설명했다.김장관의 발언이 알려지자 민자당에서도 인책론이 나왔다. ○민자서도 문책론 일각에서는 김 장관의 해임이 6월 지방선거에서 「보수적 중산층 표」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김 장관의 발언은 선거 이전에 국가의 기본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했다.새정부들어 진정 나라를 위해 애쓴 인사들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는 방안들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김 장관의 행동은 이런 노력에 역행하는 것으로 조속한 대응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말 이홍구총리 내각이 들어선 뒤 각료 해임은 김덕 전통일부총리에 이어 두번째다.후임은 15일 이 총리 귀국후 임명된다.분위기 일신만을 위한 잦은 개각은 피하겠지만 명백한 잘못은 즉각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김숙희 전장관 문제발언 내용/“6·25는 명분없는 동족간의 분쟁/한국군,월남전에 용병으로 참전” ◇김 장관 강연=이화여대 교수 시절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군대가 학교정문을 막아 실습실에 들어가지 못할 때 「내가 적이 아닌데 왜 이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국방이 전제돼야 하며 역사를 전시와 평시로 구분해 볼 때 군의 존재이유는 전쟁시기에 외환을 막기 위한 데 있다.평화시기에 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국가간 무력분쟁이나 발생가능한 전쟁에 대비하며 명분 있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한국군은 두번 전쟁을 치렀는데 하나는 6·25로 명분없는 동족간 분쟁이었으며 다른 것은 월남전이다.월남전은 용병으로 참여했으므로 올바른 전쟁의 명분을 갖지 못했다. ◇학생 질문과 김장관 답변 ­(박모 육군대령)대형사고가 군사문화 때문이라고 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단어사용에 신중을 기해달라. ▲일제시대 영향이라고 했다. ­(조모 육군대령)6·25는 명분없는 동족상쟁,월남전은 용병이라했는데 참담한 심정이다.그런 말씀은 안했으면 좋겠다. ▲충고를 받아들이겠다.
  • 김숙희씨의 미숙한 역사관/이태동 서강대 문과대학장(기고)

    요즘 우리정부의 몇몇 장관들은 선진국 장관들보다 수명이 너무나 짧은 경향이 없지 않다.그래서 국민들 사이에는 대통령이 능력있고 귀중한 사람들을 잠시 기용했다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소모품으로 만들지 않는가 하는 피상적인 의구심을 가지는 소리가 없지 않다.그러나 또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가정과 현실은 언제나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즉 그들은 막중한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물러나야 사회의 기강이 잡히고 질서가 유지될 것이란 것을 생각하면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고위공직자들의 수명이 긴 것은 그들이 맡은 일에 최고의 전문가일 뿐만아니라 그들이 맡은 일을 치밀한 계획과 비전으로 그만큼 탁월하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상황에 있는 우리의 현실은 선진국의 안정된 상황과는 달리 불안하고 과도기적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책임과 전문성은 그들보다 훨씬 더 크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정부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김숙희 장관의 국방대학원에서 행한 연설은 지극히 미숙하고 무책임하다.우선 교육정책방향을 얘기하러 국방대학원에 간 교육부장관이 왜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군의 명예와 가치관이 관련된 역사문제를 균형을 잃은 편견된 시각으로 보는 자세를 나타내었어야만 했을까.확고한 공직자로서의 신념보다는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위한 순간적인 착각때문일까.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가 있겠지만 『6·25는 명분약한 동주상잔』이라고 김숙희장관이 발언한 것은 6·25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듣기에는 그럴듯할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것의 속뜻을 삭여서 생각하면 적지 않게 모순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명분이 없다면 공산 천하가 되었어도 무방하다는 말인가.만일 6·25당시 조국수호를 위해 우리의 아버지와 형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또 그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병영생활을 하며 각고의 인내속에서 귀중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김숙희씨도장관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6·25전쟁은 미·소의 대리전적인 인상도 없지 않지만 결코 우리는 외국의 이해를 위해서만 싸우지 않았다. 월남전의 파병문제에 대한 김장관의 강연도 얼핏보아 진보적인 것으로만 들릴지 모른다.그러나 월남파병에 대한 김장관의 발언 역시 균형된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다.물론 월남전 당시 경제적인 문제로 참전한 병사도 없지 않다.그러나 그 당시 국제정세 및 한·미관계로 보아 월남파병은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강재구 소령의 희생적인 죽음을 보고 조국을 위해 월남으로 달려가 산화한 젊은 장교들은 결코 돈만을 위해서 팔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사람도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는데 일국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이 자신의 전문분야도 아닌 역사관을 피력하면서 균형을 잃은 시각을 보여 물의를 일으킨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김숙희장관은 그와 같은 진보적인 발언으로 민족주의자적인 마스크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젊은 학생들의 의식을 잘못 바꿔놓을 위험성도 결코 없지 않다.김숙희장관이 어린이 영어교육을 졸속으로 실시하겠다는 성급함을 보이면서도 불행한 현대사를 편견된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딘가 모순되고 걸맞지 않는 느낌이 없지 않다.
  • 금값 오렌지(외언내언)

    1905년 5월27∼28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대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 전원이 전멸했다.이해 3월 만주 봉천회전에서 32만대군을 가지고 25만 일본군에 격퇴당한 제정러시아가 육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발트해의 정예해군까지 회항시킨 대접전이었다. 패인은 그해 1월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군대반란과 농민폭동등 국내사정과 여러 요인으로 분석됐지만 서구 식품학계에서는 비타민C(VC)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을 첫째요인으로 꼽는다. 당시 만주지역에 풍부한 콩을 싹티워 먹이기만 했어도 러·일전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VC는 동물성식품과 곡류에는 거의 들어 있지 않다.껍질째 먹는 콩에 많이 함유돼 있고 특히 콩이 발아할 때 그 함량이 더욱 증가된다.우리 녹두나물·콩나물이 VC의 보고로 입증되어 미국이나 서구에서 샐러드로 생식된 지도 한참된다. 그렇지만 VC 주공급원은 과일이다.그중에서도 귤나무속(촉)에 드는 오렌지류는 이 성분함량이 가장 높은 것으로 분석돼 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선원 식사에 오렌지류를 의무적으로 급식해왔다. 1710년 한 선상장교의 실험결과에 따른 조치다.항해중 하루 2개 오렌지를 준 집단은 괴혈병이 없었던 데 비해 제외된 팀은 괴혈병을 계속 나타냈다는 것이다.영국뿐 아니라 서구제국이 요즘도 옛식민지이던 곳에 현지농장개척,계약재배 등으로 오렌지를 비롯한 과일공급원 확보에 힘쓰고 있고 필수과일에는 관세를 물리지 않는 정책으로 국민이 과일을 풍족하게 먹을수 있게 하고 있다. 우리는 국산 과일도 비싸지만 모처럼 수입개방한 오렌지마저 금값이다.1개 평균 2백g되는 작은 것도 슈퍼나 시장에서 1천∼1천3백원씩 한다.원산지 1개값은 1백원꼴이라는데 10배 넘는 폭리는 무엇 때문인지.누구를 위해,왜 수입하는지 모를 일이다.
  • ROTC 「복무연장」 유보/국방부/올 체력검정 불참자 구제방침

    국방부는 11일 학군사관후보생(ROTC)출신 장교의 복무기간을 현행 28개월에서 3년으로 8개월 연장,올해 ROTC지원자부터 적용키로 한 당초결정을 전면유보한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또 최근 실시된 올해 ROTC지원자 체력검정에 복무기간연장을 이유로 불참한 지원자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체력검정을 치를 수 있도록 구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국방부의 이같은 결정은 전날 ROTC장교의 복무기간연장조치를 재검토하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날 송천영 민자당제1정조위원장과 손병익 국방차관보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방 당정회의에서 ROTC장교 복무기간 연장조치의 시행을 당분간 유보키로 한 데 따른 것이다. 당정은 그러나 지난해말 정기국회 때 관계법률이 통과돼 복무기간 연장방침을 백지화하기는 어렵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앞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ROTC복무기간연장문제를 재검토키로 했다.
  • 약담배/“손쉬운 돈벌이”마약밀매 성행(두만강 7백리:11)

    ◎개방물결 타고 폭력배·유흥가 급속 확산/3년간 8개 조직 검거… 생아편 48㎏ 압수/한땐 아편 피워야 돈 있는 지주·호족 행세 연변의 조선족 신문 「연변일보」는 최근 연길시 공안국이 「명령 50호」라는 마약추방작전을 폈다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이 작전에서 장사꾼으로 가장한 공안원들이 헤로인 밀매자 박창호(31)등 남녀일당 4명을 체포했다는 것이다.그리고 공안당국에서는 3년동안 마약밀매 8개조직을 까부수고 생아편 48㎏과 헤로인 7백30g을 몰수 했다는 마약단속 통계숫자를 덧붙였다. 이 기사를 읽고 한동안 들어보지 못한 마약이라니,하는 의심을 품었다.그런데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에 머무르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실감나는 마약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일보,대서특필 그 내용인즉 숭선진 양점직원인 한명학이란 사람이 길림성 성도가 있는 장춘에서 헤로인을 팔다가 붙잡혔는데 용케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그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나 나머지 일당은 중형이 떨어졌다는 풍문도 곁들여 여럿이서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열길 물속은알아도 한길 사람속 모른다더니….명학이 그 사람 얼마나 마음이 고왔니.다가 개도 안 먹는 돈이 죄지비.구차하게 살다보면 돈에 흑심 아니 생길 사람 있겠슴둥.어찌 됐거나 사람하나 버린거제』 화제는 꼬리를 물었다.고래적 옛날 일들까지도 묻어나와 화제에 올랐다.중화민국시대에 두만강 연안지구에는 흔히 약담배로 말하는 아편재배가 성행했다는 것이다.당시 아편시장은 무한정 넓었고 호족이나 지주 등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은 아편을 태워야 행세를 할 정도였다.화룡시 남평진 용연촌의 현송원(67)노인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편농사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옛날부터 양귀비 재배 『용연에서 밭뙈기를 부치는 사람치고 약담배 안심는 사람은 병신이었디요.정보당 30냥이나 50냥씩 현물세를 내고 약담배를 재배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해도 너무 했디.어느 핸가에는 삼도구(지금의 화룡)에서 중국사람이 현물세 받으러 온걸 최승권 툰장 충동질로 마을 사람들이 때려죽였디 않았갔시요.그래서리 순관들이 나와 조사를 합데다.툰장하고 사람이 좀 모자란 오삼학이 붙잡혀 갔는데 나중에 오삼학이 죄를 몽땅 뒤집어 썼디요.툰장 말이 내가 나가서 빼줄테니 네가 했다고 거짓으로 불게 한겁네다.툰장 최승권은 불쌍하게 죽은 오삼학이 명까지 합쳐 지지리도 오래 살다 갔디요』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약담배는 금물이 되었다.간혹 깊은 산속에 양귀비가 피었지만 일단 발각되면 수갑 차고 감옥 밥깨나 축내야 했다.하지만 일제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항일유격근거지에서는 대량으로 양귀비를 심었다.약담배를 팔아 무기와 양식을 마련하기도 했고 막부득이한 경우 자살용으로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다.그리고 만주사변후 흩어져 산속에 들어가 구국군으로 행세하거나 토비로 된 원동북군 잔여부대의 장교들은 태반이 약담배쟁이들이었다.그들과 손잡고 싸우는데도 약담배가 기운을 냈다.19 36년 초 연변의 항일 근거지가 일제의 토벌로 해체되고 부대가 장백현 쪽으로 전이하면서 아편생산기지가 결딴나다시피 되었다.그때부터 연변의 약담배 수요는 밀수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만큼 약담배 값도 천장 높은 줄 모르고 껑충 뛰어 올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약담배 재배는 오래 계속되었다.1952년에 일어난 실화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숭선진 고성리촌 마준영(70)노인의 회고담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마약이 곧 돈이라는 집념은 사람들을 돌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돈에 환장을 하면 못하는 짓이 없소.그게 52년도 봄이었나 기래요.기차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경찰들이 짐수색을 합데.내 맞은 쪽에 한 삼십대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앉았는데 경찰이 오더니 다짜고짜 아이를 보자고 합데다.아마 누가 미리 고자질을 했는디….단통 아낙의 얼굴 색이 까맣게 죽더구만.아이 머리에 씌운 모자를 벗기고 멜빵 통바지를 벗기니까 뱃가죽을 실로 기워 맨 것이 보였다.경찰이 칼로 실을 끊고 아이의 뱃속에서 아편 덩어리를 꺼냈지 뭡네까.아이를 죽여서 아편을 나르는 주머니로 쓴 셈이디요.기차가 조양천역에 멎자 경찰들이 계집을 수갑 채워 끌고 갑데다.그 계집 요절 났을 겁네다』 ○아이시신에도 숨겨 이국록(63)씨는 지난 19 52년 아편장사 심부름을 했는데 성공은 커녕 아편을 뭉터기로 날렸다.가방에 큰 덩어리로 3개나 되는 아편을 넣고 용정에서 기차를 탔다.기차가 한창 속력을 낼 즈음 공안원들이 찻간 양쪽에서 검색을 하면서 조여왔다.겁이 덜컹나서 아편을 얼른 꺼내 보자기에 둘둘말아 의자 밑에 밀어 넣었다.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 몸만 빠져나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다. 마약 밀매는 일종의 목숨을 건 도박이다.그런만큼 모험을 않고는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화룡시 숭선진 옥석촌의 김석권은 아편장사에 문리가 튼 사람이었다.사람이 체대도 크고 담량도 있어 언제나 단신으로 장사를 했다.곁다리가 없으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 액수도 컸다.주머니를 해 단 헝겊에 손바닥만한 아편 네 덩어리를 넣고 탄띠처럼 배허벅에 두르고 간편한 몸으로 길을 떠났다.조양천에서 하룻밤 자고 장춘행 기차를 타려고 어슬녘에 기차역으로 가던 그는 등뒤로 칼을 맞고 모험으로 충만된 인생을 종말 지었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살인자는 칼손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위험천만한 밀수의 노고를덜었던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질서를 회복한 이후 마약에 대해 강력한 근절책을 쓰자 마약은 한동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요근래 몇년 사이에 연변의 주먹들과 가라오케 여급들 사이에 마약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고 보면 약담배를 피우기나 한 것처럼 머리가 멍멍해진다.
  • ROTC복무연장의 문제점(사설)

    학군사관(ROTC)출신 장교의 복무기간 연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국방부가 복무기간을 현행 28개월에서 36개월로 연장한다고 발표한 뒤 대학 2학년생을 대상으로 모집한 지원자 1만1천여명중 5천여명이 지난 2일 실시한 체력검정에 불참하는 등 지원포기가 속출,초급장교의 수급차질마저 우려된다. 육군은 매년 ROTC출신 장교 3천9백여명을 소위로 임관,전체 초급장교의 53%를 ROTC 출신자들로 충당해 왔다.복무기간 연장에 따른 지원기피 사태가 확대될 경우 우수한 인재확보는 커녕 절대수요 인력의 확보조차 어려워질 것이다.이렇게되면 우리 군의 최대 과제인 국방의 세계화·전문화·과학화·정예화라는 목표는 커다란 걸림돌에 걸리게 된다. ROTC제도는 다양한 전공학문 분야를 자비부담으로 수련한 일반대학 졸업자들을 초급장교로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되어 온 만큼 국고부담으로 양성한 타 양성과정 출신자들과 차별적으로 복무기간의 단축 혜택이 주어져 왔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방부는 복무기간 연장 이유로 타 출신장교와의 형평 유지,초급장교의 지휘능력 향상,녹음기인 6월의 대량 전역·보충에 따른 전투력의 공백 보완을 들었다. 그러나 제도의 개선은 충분한 여론 수렴과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검증되어야 함에도 이해당사자의 공감대와 방법의 합당성 검증이 결여돼 밀실행정 또는 졸속행정의 소산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설사 공론화과정을 거쳐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났다 해도 연차적인 확대실시라든지 일정한 유예기간후 실시등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것은 타의가 있거나 무책임한 결정이라 하겠다. 집권당인 민자당조차 국방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복무기간 연장을 발표한 것은 잘못이라며 당정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한 것은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한 것이라 하겠다.복무기간의 연장은 재검토 돼야 하며 그 전제는 우수한 초급장교의 확보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ROTC 복무연장 내년도 신청자부터”민자

    민자당은 6일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학군사관후보생(ROTC)출신장교의 복무기간 연장문제와 관련,금명간 당정협의를 갖고 내년도 신청자부터 이를 적용하도록 촉구하기로 했다. 이승윤 정책위의장은 이날 고위당직자회의에서 『국방부가 아무런 사전예고도 없이 복무기간을 2년4개월에서 3년으로 연장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 ROTC 군복무 연장 관련 철회대책위 구성키로/예비역회장단 회의

    학군사관후보생(ROTC) 예비역중앙회(회장 허진규)는 국방부의 ROTC장교 군복무기간 연장결정과 관련,4일 하오 국방부안 육군회관에서 확대회장단회의를 갖고 국방부의 연장결정을 철회시키기 위해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키로 결정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회의에서 『국방부의 결정은 ROTC의 특성과 기본취지에 어긋나는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처사』라고 지적하고 『산술적으로 근무기간을 다른 장교와 단순비교해 복무기간을 8개월 연장,획일화한 것은 자칫 「저 자질 평준화」의 사태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앞으로 국방부 결정의 철회를 위해 대내외적인 활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청와대·국회 등에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전달키로 했다.이날 회의에는 각 기수별·학교별·지역별 회장단 등 1백여명이 참석했다.
  • 영국/외국에선:3(지방자치 총점검:3)

    ◎일류기업 지향하는 영 지방정부/상장은 상징적… 전문경영인이 행정 총괄/재정 의존율 60∼70%… 중앙서 철저한 통제/중앙부처에 지방주요간부 임명·조례제정 동의권 영국의 지방정부는 「일류기업」을 지향한다. 경쟁과 능률이라는 기업식 개념을 도입해 지역의 비약적인 발전을 꾀하는 곳이 바로 영국이다.우리의 지방단체장에 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최고책임자는 수석집행관이다.시장이 있기는 하지만 유명무실하다.행정권이 없고 책임도 갖지 않는다. ○경쟁과 효율을 중시 시장은 외부 또는 외국의 손님이 왔을 때 지역주민을 대표해 접견하는 정도의 역할이 거의 전부다.때문에 지역사회의 대표라는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고 다수당의 의회 의원들이 1년을 임기로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시장을 맡는다. 지방의회의 지휘를 받아 행정을 총괄감독하고 운영하는 수석집행관은 이런 지역사회의 「얼굴」 시장밑에서 실질적으로 자치단체의 살림을 맡은 전문경영인이다.시청의 각국 국장보다 높은 정도의 자리지만 수석집행관의 능력에 따라 지역발전여부가결정된다. 영국지방자치전문가들은 『영국 지방자치제의 특성은 지방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수석집행관제에 있다』며 『수석집행관이 효율성을 바탕으로한 기업식운영이 지역사회 발전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스카우트경쟁 치열 런던 북쪽의 셰필드시가 지난 91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한 것도 수석집행관제와 무관치 않다.영국의 철강도시인 셰필드는 유니버스아드대회를 유치해 문화와 스포츠의 도시로 탈바꿈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사양길의 철강도시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씻고 새로운 발전을 하는데는 국가차원의 많은 지원이 뒤따랐지만 지방정부의 유치노력도 큰몫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방정부 전문경영인인 수석집행관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지역에만 81명에 이른다.지방자치전문가는 『수석집행관은 공무원에서 발탁되기도 하지만 경영능력이 뛰어난 일반기업의 우수한 전문경영인들을 대상으로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하다』고 말했다. ○공무원사회의 혁명 개인별로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높은 연봉을 받고 있으며 일부는 존 메이저 총리보다도 연봉이 많은 경우도 있다.총리의 연봉이 우리돈으로 약 1억원인 8만파운드인 점을 감안하면 고연봉의 수석집행관은 한달에 1천만원대에 육박하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셈이 된다.연봉 3만4천파운드를 받는 하원의원에 비하면 2배가 넘는다. 지방자치단체들은 또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지방공무원 감원이나 우수공무원을 뽑기 위한 「인턴사원제」의 도입등 일반기업에서나 가능한 조치들을 시행한다.런던시내의 웨스트민스터구는 쓰레기수거·도로청소·공원관리등의 업무를 민영화해 7백명의 직원이 감원됐고 셰필드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무원들은 영국 지방자치제의 이같은 변화에 대해 『편안하고 신분이 안정돼 있던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고 털어놓으면서 「공무원사회의 혁명」으로까지 비유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개혁은 「영국병」 치유에 나선 마거릿 대처총리의 처방조치에서 비롯된다.대처총리의 조치이전만 해도 지방정부의 역할은 상당했다.런던시는 노동당의 켄 리빙스톤이 장악하고 있을 때인 지난 84년 그들 스스로 남 요크셔지방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부를 정도였다. ○지방재정규모 제한 또 86년 지방정부가 자의적인 선거구획정(게리멘더링)을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구지역에서 보수당은 공공건물에 입주해 있던 친노농당 성향의 저소득층을 내쫓고 친보수당의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오히려 더 싼값으로 주택을 공급한 선거구 획정이었다. 영국문제전문가인 파리3대학의 장 클로드 세르장교수는 『대처여사의 개혁조치는 지방재정 능력 및 기능제한에 있다』고 지적했다.대처여사는 지난 84년 세법을 고쳐 지방정부가 거둬들이는 지방세의 상한선을 낮추고 청소·공공시설물 유지 등의 업무를 민간에 외뢰하도록 했다. 이를테면 지방정부 무력화작업인 셈이다.대신 대처여사는 76년에 50%였던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재정지원규모를 늘려 지금은 60∼70%에 이르고 있다.또 85년 지방정부법을 개정,런던시의회를 없애고 런던시를 인구 4천여명이 사는 런던시와 32개의 바로우(구에 해당)로 이뤄지는 런던으로 분리했다. 지방의회는 중앙정부에 대한 재정의존도만큼 철저히 통제를 받는다.지방정부를 관할하는 중앙정부 부처는 엉뚱하게도 환경부다. ○예산감축 명령 가능 환경부는 예산 배분권을 갖는 동시에 지방의회의 조례제정에 대한 동의권을 갖고 지방정부의 활동을 통제한다.또 지방정부의 예산이 중앙정부가 정한 표준지출규모를 초과할 경우 예산감축을 명령할 수도 있다. 일반중앙부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간부임명에도 동의권을 갖고 있으며 고등법원은 지방의원의 직권남용은 물론 직무태만에도 영장을 발부할 수 있는 사법적인 통제도 한다.때문에 지방자치전문가는 『영국의 정치는 지방자치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꼽히는 의회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방의회는 여전히 중앙정치무대 진출을 위한 중요한 발판역할을 하고 있다.금세기 최연소 총리를 기록한 존 메이저총리도 25살 때 은행원을 하면서 노동당 우세지역인 람베트지방에서 지방의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총리의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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