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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軍과 문민통제/노주석 논설위원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맥아더(1880~1964) 원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전설적 군인이자 당대 누구 못지않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정치감각은 좀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초기 3개월 동안 태평양사령부에서 나온 언론성명서 142건 중 109건이 맥아더 장군의 이름으로 공식발표됐다. 다른 장교의 이름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모든 공문서 표지에 ‘맥아더사령부’라는 겉표지를 따로 붙였다. 이 시기 사령부는 공식 명칭 대신 맥아더사령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병력감축 문제를 놓고 맥아더와 갈등을 빚던 트루먼 행정부는 1945년 9월과 10월 두 차례 맥아더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요청’이라는 격식을 갖췄지만 사실상 군통수권자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최고 연장자이며 선임 장교인 맥아더는 불응했다. 맥아더는 너무 바쁘고 위험하기 때문에 도쿄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를 대 트루먼을 격앙시켰다. 야심만만하던 맥아더는 자신이 워싱턴과 링컨 대통령에 필적하는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그저 그런’ 대통령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이 사안의 중요성과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역사상 본국으로 소환하려는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한 첫 번째 군인이 될 거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할 작정이야.”라고 보좌관에게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미국의 타이완 정책을 놓고 정부와 장군 간 불협화음이 계속됐지만, 맥아더의 대중적 인기가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51년 4월11일 마침내 트루먼은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관한 함구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한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했다. 트루먼은 탄핵위기를 맞았고,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미국에는 헌정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의회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Civil Control )’ 원칙을 수호했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민정당국의 군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됐다고 미국 국민이 비난할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서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아프간 정책을 비판한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을 소환해 전격 경질했다. 맥아더 이후 60년 만의 항명장군 파동이지만 미국의 문민통제 원칙에는 흔들림이 없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지난 25일 MBC ‘섹션TV 연예통신’ 방송이 결방됐다. 매주 금요일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MBC 연예정보프로그램 ‘섹션TV 연예통신’은 MBC 현대사 연속기획 6.25특집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로 대체 편성됐다.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는 MBC에서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현대사 특집극.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코레 아일라’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나서는 터키군 장교의 감동적인 과정이 방송돼 호평을 받았다. 사진 = MBC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 민족 질곡의 역사와 전쟁의 참상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각 방송사마다 기념일 특집 준비에 열심이다. MBC는 이날 오후 1시40분 현대사 특집극 ‘노근리는 살아 있다’ 1부와 2부를 연속 방송한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5일부터 닷새간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양민 살상 사건이다. 제작진은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피해 생존자들의 지난했던 삶, 어려웠던 진상규명 운동 과정을 조명한다. 오후 9시55분에는 ‘코레 아일라(Ayla)’를 마련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 고아인 다섯 살 한국 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려진다.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 가지고 소녀를 찾아나서는 외국 군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SBS는 오후 8시40분 ‘소련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그 이송설의 진실’을 방송한다. 제작진은 6개월에 걸친 취재를 통해 국군 포로 2만여명이 소련에 이송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국군 포로 이송 지역으로 지목된 현장을 취재하고, 같은 시기 강제 노동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북한 정치범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군포로의 행적을 추적한다. 아리랑TV의 아리랑 투데이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특집 방송을 준비했다. 오전 7시 1부에서는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이란 주제로 ‘민·관·군 한마음 625㎞ 이어달리기 행사’를 소개한다. 이 행사 3만여명의 참가자들은 호국영령 추모행사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풍선 625개를 날리고 DMZ 박물관에서 참전용사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 오전 11시에 방송되는 2부 ‘한국전쟁 또 하나의 얼굴, 소년 학도병’에서는 학도병들의 활약상이 전시돼 있는 경북 포항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그들의 희생을 되새긴다. tvN은 특집 다큐멘터리 ‘625인의 6·25’를 오전 11시에 방송한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와 실향민, 유엔 참전 군인들을 직접 만나 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과 분단의 아픔 등을 전할 예정이다. 딱딱한 다큐멘터리보다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느끼고 싶다면 채널 CGV를 참고하면 좋겠다. CGV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영화들을 방영한다. 오후 3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시작으로 오후 5시30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볼 수 있다. 오후 9시에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밤 12시30분에는 나이지리아 내전을 소재로 한 ‘태양의 눈물’이 준비돼 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전후 세대들에게 한국전쟁은 낡은 흑백사진이다. 호화찬란하지도, 역동적이지도, 극적 반전도 없는 재미없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얘기들이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쟁쟁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 출판되기 전의 얘기다.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이 책에 대해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정의했다. 부연한다면 미국인의 눈으로 본 걸작 한국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흥미가 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을 확실하게 불식시켜 준다. 방대한 문헌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을 정공법으로 조명하면서도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책은 200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며,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됐다. 4만 8000원이라는 가격보다 1082쪽이라는 분량 때문에 지레 질릴 수도 있다. 잠깐의 망설임만 극복하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와 작전묘사는 숨이 막힐 듯 생생하고, 전쟁의 막후에서 벌어지는 정치인, 고급 군인들의 권력투쟁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60년 전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된 국제정세가 60년이 지난 지금과 판박이라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실감 난다. 학자들은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다. 흥미 위주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막강 화력의 미군이 중국 해방군에게 처절하게 패했을 뿐 아니라, 참전자들의 인간 스토리가 별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핼버스탬은 이 책의 출판을 30년 동안 구상했고, 10년 동안 집필했다. 참전용사들을 찾아 미국 구석구석을 뒤졌다. 책의 진가는 인터뷰 대상자 목록에서 나타난다. 그가 인터뷰했다고 이름을 밝힌 사람은 모두 130명이다. 이 중에는 알렉산더 헤이그 전 국무장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명예교수 등 유명인사도 있다. 대부분은 최전선에서 싸운 초급 장교이거나 사병들이었다. 저자는 후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의 변두리에 사는 폴 맥기를 특별히 소개했다. 그는 지평리 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다. 저자는 “맥기는 55년 동안 내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 “일반대중이 얼마나 고귀한 이야깃거리를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는지 알았고, 그들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공산 지도자는 물론 옛 소련 적군 소령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행적,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책은 중국군과의 첫 교전으로 시작해 미국의 참전 배경으로 옮겨간다. 세계 최강의 부대 미군이 중국군에 얼마나, 어떻게 호되게 당했는지 낱낱이 알려준다. 미국인답게 워싱턴 내부 정가와 군부의 이야기가 압권이다. 한국전에서 동고동락한 맥아더, 리지웨이, 알몬드 등 세 장군의 애증 관계가 저자 특유의 저널리즘적인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갈등과 알력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알려진 맥아더의 야망에 대한 분석은 새롭다. 족보까지 파헤치면서 맥아더의 허상을 밝혔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한반도에는 100년 만에 닥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책제목은 하복차림으로 투입된 미군들이 중국군이나 인민군보다 ‘동장군’ 때문에 고생했다는 데서 따왔다. 50년 동안 21권의 저서를 남긴 핼버스탬은 베트남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 ‘최고의 인재’는 베트남전쟁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한 권이다.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는 유작이다. 저자는 2007년 봄 마지막 퇴고작업을 마무리한 닷새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식축구에 관한 새로운 책을 준비하려고 캘리포니아로 가던 길이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싱가포르 랜드마크 한국이 짓다

    싱가포르 랜드마크 한국이 짓다

     “파리의 에펠탑처럼 싱가포르의 랜드마크가 될 건축물 공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23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MBS) 호텔의 개장식에서 쌍용건설의 김석준 회장은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참석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공사’로 불린 MBS 호텔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것에 대해 놀라는 눈치였다.  발주처인 미국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의 셀던 아델슨 회장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디자인의 랜드마크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설계자인 모셰 샤프디도 “단 27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공사를 수행한 쌍용건설에 경의를 표한다.”고 치켜세웠다.  김 회장은 “공사를 한 2년 동안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거의 없다.”면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고급건축물 시공에 관해서는 확실한 보증서를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MBS는 싱가포르가 국가의 새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는 ‘MICE(Meetings, Incentives·Conventions·Exhibitions) 산업’(회의·전시·컨벤션산업)의 중심지가 될 곳으로 싱가포르 역사상 처음으로 카지노장을 열어 대내외적인 주목을 받았다. 전체 면적이 58만 1400㎡로 호텔·카지노·컨벤션센터·박물관·공연장 등이 들어서는 복합 리조트다.  개장식에 퀙릉벵 홍릉그룹 회장 등 유력인사가 참석했고 초청된 국내외 기자단만 1100여명에 달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전날 행사장을 찾아 호텔 등을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MBS 호텔은 55층짜리 총 3개동(객실 2560개)으로 카드 2장을 맞대어 세워 놓은 듯한 독특한 건축 설계로 공사 시작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공사 초기 단계서부터 건물의 두 축이 만나는 23층까지 무너지지 않고 지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쌍용건설은 사장교를 지을 때 사용하는 ‘포스트-텐션 공법’을 건축물에 처음으로 도입해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현장소장인 쌍용건설 안국진 상무는 “전 세계 14개 업체가 공사 입찰에 참여했지만 시공방법을 제시한 곳은 쌍용건설뿐이었다.”면서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조차도 현장을 보고는 ‘진짜로 만들 줄 몰랐다.’고 감탄했다.(웃음)”고 말했다.  이 호텔은 지금도 무게를 견디기 위해 150㎜ 안팎으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태풍이나 강풍에 대비해 최대 20㎝ 정도 움직일 수 있고 진도 4의 지진을 견디도록 설계됐다.  특히 호텔 위에 얹혀진 배 모양의 스카이파크는 명물이다. 면적이 축구장 2개 크기(1만 2408㎡), 무게가 쏘나타 4만 3000대(6만t)와 비슷한 규모인 이곳에는 수영장 3개,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다.  쌍용건설은 지난해 해외 매출에서 싱가포르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이를 만큼 싱가포르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쌍용건설 관계자는 “30년간 총 36건 5조 1000억원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면서 “최근 W호텔을 수주하는 등 고급건축물 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장교 되어 고국 하늘 지킬래요”

    “장교 되어 고국 하늘 지킬래요”

    심장이 아픈 어린 아들을 위해 아파치헬기 조종사가 되었다던 김창중(40·미국명 매튜 김) 준위<서울신문 2009년 3월6일자 29면>가 또 한번의 도전에 성공했다. 김 준위는 지난달 중순 한국군 장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미군 장교후보생학교(OCS)학생으로 선발됐다. ●아들 위해 아파치헬기 조종사로 김 준위는 8월부터 11월까지 이뤄지는 OCS교육이 끝나면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미군의 경우 병사에서 준위, 준위에서 소위로 임명될 때까지 선발 과정이 엄격해 OCS 선발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김 준위는 설명했다. 특히 전투경험과 전장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군은 병과 준사관으로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해 지속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 준위의 선발은 더욱 눈에 띈다. 김 준위는 “OCS 선발은 미군으로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면서 “8월부터 11월까지 예정된 교육이 끝난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와 근무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준위는 1991년 우리 군의 육군 소위(3사 28기)로 임관한 후 항공장교로 전과했다. 1997년까지 코브라, 500MD, UH-1H 기종의 헬기를 조종했다. 그해 8월 대위로 전역한 후 민간항공조종사의 꿈을 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2005년 1월 영주권이 나오자 김 준위는 미군에 병사로 입대했다. ●세차례 수술로 아들 심장병 거의 완치 유학 첫 해에 태어난 아들 선우(12·케빈)의 심장병을 고치기 위한 결단이였다. 그는 미군 상병으로 근무하다 2006년 7월 한국군 장교 경력과 근무성적 등을 인정받아 상병에서 준위로 신분이 바뀌었다. 선우도 그동안 세 차례 수술로 심장병이 거의 완치됐다. 그는 2008년 9월 주한미군 아파치 헬기 조종사로 고국 땅을 밟았다. 당시 미군 중 한국계 아파치 헬기 조종사는 김 준위가 네 번째였다. 교육생으로 입소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계속 근무하게 될 김 준위는 “이번에 선발된 동기생들 중 저보다 18살이나 어린 친구도 있더라구요. 체력적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면서 “교육일정과 장교로 근무하게 될 미래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다. 전쟁을 도발한 공산진영의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과 맞선 자유진영의 대표주자였다.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5성 장군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끝까지 함께 가지 못했다. 정책결정자 트루먼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맥아더의 최후는 참담했다. 연합군이 중국군에 쫓겨 38선 이남으로 후퇴한 1951년 4월11일 트루먼으로부터 연합군 사령관직 등 모든 직위에 대한 해임통보를 받았다. 상원청문회장에 선 ‘전설적 장군’은 문민통제에 대한 불복종과 오판은 물론 거짓말까지 줄줄이 드러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 의회는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를 참작, 청문회 공식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도쿄에 머문 맥아더 전세 파악못해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대통령의 그늘에서 인기 없는 상원의원과 부통령직을 지낸 트루먼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는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스탈린과 함께 냉전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았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뤄진 트루먼 대통령의 확신에 찬 해군 및 공군 출동명령과 엿새 만의 지상군 참전결정이 없었다면 낙동강전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의 역공, 서울수복과 압록강 국경까지의 북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은 재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치적 앙숙인 맥아더를 사장시킨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매도당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도 전쟁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대통령이었다. 맥아더 해임 당시 트루먼은 패배자였지만, 후일 승리자로 기록됐다.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군사자문기구인 합동참모본부가 만장일치로 승인한 ‘군사적 결정’이란 점이 작용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은 트루먼의 참전결정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분수령이었다. 보급라인이 길어진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해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전쟁역사상 육군의 공급선을 차단하면 열에 아홉은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큰소리쳤다. 사실이었다. 맥아더 일대기에는 “그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15일 하루였다.”고 적혀 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거대한 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확률은 맥아더 자신의 언급이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맥아더는 “이 작전이 도박이라면 후에 1달러로 변해 나오게 되는 5센트를 항아리에 던져 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가 남한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한반도를 민주국가로 통일시키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유일한 미국 장군이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수호자’로 숭배를 받았다. 한국의 통일이 바람직하다고 천명한 1950년 10월의 유엔결의가 맥아더의 호승심(好勝心)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의 행정부 및 군 수뇌부는 중국과 옛 소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했고,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다. 한국전쟁이 세계 제3차대전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제한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수단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했다. 맥아더의 거침없는 북진이 못마땅했지만, 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쟁의 신’으로 격상된 맥아더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정부의 개입 경고를 무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도 엄포라며 한 귀로 흘렸다. 오히려 원폭투하 발언과 압록강 교량 폭격으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중국 지도부를 자극했다. 오만에 빠진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1951년 전시중 해임통보 받아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제10장 맥아더의 해임’ 편을 보면 미국 대통령과 내각,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군사정책에 관련된 정책수립 및 자문기구를 맡는 합참과 맥아더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합참요원은 예외 없이 맥아더 장군보다 후임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육사 12년 선배인 맥아더 준장 아래서 소령으로 근무했다. 콜린스 육참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이었을 때 초급장교였다.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사관생도에 불과했다.”고 기술했다. 또 “군사조직이 이러한 인적관계로 구성됨에 따라 그 영향이 의사전달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서신에서는 합참에 대한 암시적인 훈계 또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발견됐다. 역으로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결정적인 방법으로 명령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들이 기안한 지침서는 선임자에게 실례나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공손한 말로 표현됐다.”고 적었다. 맥아더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1보를 보고받은 트루먼과 맥아더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도쿄의 극동사령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무관심하면서도 초연했다. 함께 있던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걱정하자 맥아더는 “단순한 정찰병력이며 등 뒤에 한 손을 묶은 채로도 처리할 수 있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26일에도 천하태평이었다. 오히려 덜레스가 “무초 미 대사가 서울을 탈출했다.”는 급보를 전하자 그때야 알아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1945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맥아더에게 한국은 관심 밖의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거듭되는 보고를 무시했으며, “남한문제는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전부였다. 맥아더의 보좌관 바워즈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을 꺼렸으며, 한국문제는 국무부 소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러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곤 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나 북진공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까지 거침없이 북진하면서 “중공군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장담과 달리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뒤로 밀리자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 대표들은 맥아더가 한국의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사령관이 자리를 지키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맥아더가 파면된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종전 후 40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싸워야 했는지 도쿄의 사령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그런 상황을 만든 총사령관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트루먼의 대처는 단호하고 빨랐다. 미국은 결코 ‘한반도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판단을 비웃듯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5시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했다. 유엔 안보리도 한국에서의 무력사용을 의결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1950년 6월25일자로 트루먼과 맥아더의 삶이 함께 엮였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제하지 못해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장군은 대통령직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라고 분석했다. 또 “트루먼은 우연히 대통령이 되었지만,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고 썼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아서 맥아더 장군의 아들이었다. 웨스트포인트 4년 동안 역대 최고 학점을 기록했고 미군 역사상 모든 최연소기록을 갈아치웠다. 1918년 처음 별을 단 이래 최연소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장, 소장, 대장, 원수에 올랐다. 1944년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떼어 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트루먼은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었다. 함정을 파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저격당한 지 90년이 지난 뒤에야 훌륭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은 링컨을 거울로 여겼다. 트루먼은 사적인 자리에서 “문제는 그가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라고 맥아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인생은 쇼, 세상은 무대’라고 생각하는 맥아더가 보기에 트루먼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경쟁자였다. 워싱턴에 있는 반대세력의 수장이었다.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군 경력은 주 방위군 대위 계급장이 전부인 ‘미주리 촌놈’에 불과했다. 자신을 파면한 트루먼을 탄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봤다. 그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명의 일본인이 성조기를 흔들며 울었고, 뉴욕에 도착해 행진을 벌였을 때 700만명의 인파가 열광하면서 장군의 귀향을 슬퍼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전쟁의 순교자로 여겼다. 맥아더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헌정위기를 불러왔다.’고 기술될 정도로 혼란상을 가져왔다. 상원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던’ 장군의 진면목은 매일 3000만명이 지켜보는 TV중계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일흔 살 대원수의 진실은 미리 준비한 연설과 달리 사흘 내내 계속된 청문회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그는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10월17일 웨이크섬 회담에서 맥아더 장군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두 번씩이나 본국소환에 불응하는 기록을 세운 전무후무한 장군이기도 했다. ●군사작전 실행후 추후 보고 합참은 맥아더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4월8일 전원회의에서 참모들은 ‘예외 없이 맥아더 해임’에 찬성했다.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열거한 맥아더 해임의 주요 이유는 타이완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의 불화였다. 맥아더는 중립을 추구하는 트루먼 정부의 타이완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중국의 개입에 대한 오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 후 추후 보고형식으로 승인받았다. 이 밖에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 훈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했다. 맥아더가 3월24일 중국본토로의 확전을 언급하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더는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해임을 결심했다고 미국 합참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박경규 병무청 사회복무국장에게 들어보니

    박경규 병무청 사회복무국장에게 들어보니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아야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박경규(55) 병무청 사회복무국장은 직제상 5만 3000여명의 공익근무요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공익요원의 최고 책임자다. 육군의 1개 사단 병력이 1만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4~ 5개 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박 국장은 권한보다 근심이 더 많다. 사회 각 분야에서 공익요원을 원하는 곳이 많지만 공급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제한되는 요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많은 공익요원들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인 탓에 관리가 더욱 어렵다. 그는 “7000여개의 기관에서 공익요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원하는 곳에 만족할 만큼 충분히 요원을 배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한 해 2만명이 넘는 공익요원이 소집되지만 관련 법상 공익요원은 편도 8㎞ 이내, 왕복 3시간 미만 거리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기관에 배치하도록 정해져 있는 까닭이다. 이에 따라 도시에서 떨어진 사회복지시설에는 공익요원을 원해도 제대로 배정할 수 없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출퇴근이 필요없는 숙소 등 합숙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예산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이어 “낮에 출근했다가 오후 6시가 되면 퇴근하는 공무원과 같은 생활을 하는 공익요원의 복무관리를 위해 어려움이 많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특히 “공익요원들에 대한 총괄책임은 병무청이 담당하고 있지만 실제 복무지도관은 67명에 불과해 현실적으로 업무과중이 심하다.”면서 “7000여개의 기관이 1차적으로 공익요원의 복무생활에 대한 관리를 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병무청에 소속된 복무지도관의 정원을 늘리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비역 장교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박 국장은 “현재 67명의 복무지도관 중 일부가 예비역 간부들로, 공익요원 관리에 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면서 예비역 간부를 활용하는 방안을 시사했다. 군에서 병사들의 병영생활을 관리감독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되고 있는 데다 취업난으로 고민하고 있는 전역 간부들을 끌어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NTN포토] ‘엘리트 장교’ 윤계상, ‘선글라스 잘어울리죠?’

    [NTN포토] ‘엘리트 장교’ 윤계상, ‘선글라스 잘어울리죠?’

    [서울신문NTN 현성준 기자] 22일 오후 2시 서울 신사동 CGV압구정에서 MBC 드라마 ‘로드넘버원’ (연출 이장수 김진민, 극본 한지훈) 시사회에 참석한 윤계상이 취재진들에게 인서를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북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통로인 1번 국도를 의미하는 ‘로드넘버원’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휴먼멜로 드라마다. 현성준 기자 gu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故 쇼 대위 유가족 해사 방문

    해군사관학교는 6·25 전쟁에 해군장교로 자원입대했다가 전사한 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유가족이 고인이 한때 근무했던 해군사관학교를 21일 방문했다고 밝혔다.<서울신문 6월17일자 28면> 쇼 대위는 6·25 전쟁 전인 1947년 미 군정청 소속으로 한국에 와 해군사관학교 함정 운용술 교관으로 1년간 근무하며 초창기 해군발전에 기여했다. 해사를 방문한 일행은 쇼 대위의 손자인 윌리엄 캐머런 쇼와 조카 등 유가족 3명과 6·25 참전용사인 해서스 로드리퀴즈 등 모두 5명이다. 이들은 해사 교정과 박물관, 거북선 등을 둘러보았다. 유가족은 22일 서울 은평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고인의 동상 제막식 참석을 비롯해 6·25 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은평 평화공원은 은평구가 쇼 대위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511억여원을 들여 조성했다. 진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로드원’ 소지섭-김하늘, 전투키스로 삼각멜로 포문

    ‘로드원’ 소지섭-김하늘, 전투키스로 삼각멜로 포문

    MBC 새 수목드라마 ‘로드 넘버 원’을 통해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추는 배우 소지섭과 김하늘이 격정적인 전투키스로 화제를 낳았다.소지섭과 김하늘은 오는 23일 전파를 타는 ‘로드 넘버 원’ 1회분 예고편에서 극중 국군장교 이장우와 연인 김수연이 고향인 영촌면 다리 위에서 뜨거운 이별의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을 선보였다.이번 키스신은 극중 장우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의사의 꿈을 포기하려는 수연을 위해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후 작별인사를 전하고 길을 떠나려다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으로 헤어짐을 앞둔 연인의 애절한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이후 ‘로드 넘버 원’은 장우의 전사통지를 받은 수연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국군장교 신태호(윤계상 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장우의 생환으로 엇갈리는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담아낼 예정이다.한편 ‘로드 넘버 원’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휴먼멜로 드라마로 23일 밤 9시 55분 첫 방영 예정이다.사진 = MBC서울신문NTN 장기영 기자 reporterja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윤계상 “내 연기력, 언제까지 재발견?”

    윤계상 “내 연기력, 언제까지 재발견?”

    그룹 지오디(god) 출신의 배우 윤계상이 자신의 연기력 평가에 대해 입을 열었다.윤계상은 지난 1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홍지동 상명아트센터 계당홀에서 열린 MBC 새 수목드라마 ‘로드 넘버 원’ 제작발표회에서 예고영상 상영 이후 “윤계상의 재발견이다”라는 말이 나오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그는 “윤계상의 재발견이다”라는 의견에 대한 생각을 묻자 “언제까지 ‘재발견’인지 모르겠다. 작품을 할 때마다 ‘재발견’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듣고 있다”고 말해 제작발표회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이어 윤계상은 “지금까지 출연한 드라마는 트랜디 드라마여서 가수였을 때의 이미지에서 탈피되지 않은 그 연장선상의 캐릭터를 맡았다. 근데 이번 작품에선 굉장히 남자답고 여러가지 심적인 고통을 겪는 캐릭터를 맡았다. 이런 게 처음이라 보면서 많은 분들이 ‘눈빛이 달라졌다’ ‘남자다워졌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한편 윤계상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장교인 신태호 역을 맡은 ‘로드 넘버 원’은 오는 23일 밤 9시 55분 첫 방영 예정이다.사진 =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美 정전회담 당시 한반도 非무장화 검토”

    한국전쟁 당시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한반도에서의 전면철수에 대비해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들을 제주, 혹은 해외로 대피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정전협정 개시 직후 미 육군참모부는 한반도 전역을 비무장화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 전시회를 통해 공개한다고 17일 밝혔다. 중앙도서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는 1951년 한국 정부 피란 계획을 수립하면서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疏開)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명을 선정해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을 검토했다. ‘제한 소개’의 경우 1순위는 대통령과 내각,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 고위 경찰 등 정부 주요 인사와 가족 4000명, 2순위 한국군 고위 장교·기술 요원과 가족 3000명, 3순위 종교계·교육계 등 비정부기관 요인과 가족 1만명이었다. 한반도 전역을 비무장화하는 방안도 신중하게 검토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개성에서 정전협정 첫 예비회담이 열린 직후인 1953년 7월23일, 미 육군 참모부가 작성한 ‘한국의 비무장화(Demilitarization of Korea)’란 제목의 비밀 보고서는 ‘남북한의 군비 경쟁은 한반도 평화 정착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음. 유엔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경우, 남북한 군사 대치 상황이 재현되면서 한국전 발발 당시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고, 한반도 및 세계 평화와 안정에 커다란 위협 요소가 될 것임’이라며 한반도 전역의 비무장화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브래들리 당시 미 합참의장이 정전 협정 2개월 전인 1953년 5월19일, 미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한국에서의 행동 방향’이란 제목의 1급 비밀 비망록 등 흥미로운 자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중앙도서관은 22일~새달 27일 관내 디지털도서관 대회의실에서 ‘NARA 기록으로 보는 6·25’ 전시회를 연다. 중앙도서관이 수집한 총 120여만쪽의 한국 관련 기록 중 선별한 기록물이 전시된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NTN포토] 소지섭, 장교의 카리스마

    [NTN포토] 소지섭, 장교의 카리스마

    [서울신문NTN 이대선 기자] 18일 오후 서울 홍지동 상명아트센터 계당홀에서 MBC 드라마 ‘로드넘버원’(연출 이장수·김진민, 극본 한지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소지섭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북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통로인 1번 국도를 의미하는 ‘로드넘버원’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휴먼멜로 드라마다. 이대선 기자 daesunlee@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NTN포토] 소지섭, 카스스마 넘치는 장교 역할 맡았어요

    [NTN포토] 소지섭, 카스스마 넘치는 장교 역할 맡았어요

    부 [서울신문NTN 이대선 기자] 18일 오후 서울 홍지동 상명아트센터 계당홀에서 MBC 드라마 ‘로드넘버원’(연출 이장수·김진민, 극본 한지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소지섭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북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통로인 1번 국도를 의미하는 ‘로드넘버원’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휴먼멜로 드라마다. 이대선 기자 daesunlee@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시·도지사 당선자에게 듣는다 (16)끝]우근민 제주지사

    [시·도지사 당선자에게 듣는다 (16)끝]우근민 제주지사

    우근민 제주도지사 당선자는 그동안 관선, 민선 등 모두 4차례나 제주도지사를 지냈다. 다음달 취임하면 다섯번째 제주도정을 이끌게 돼 제주의 구석구석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로 꼽힌다. 우 당선자는 16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번이 마지막 봉사며 다음에는 출마하지 않는다.”며 “4년 동안 오직 도민만 바라보고 제주도정을 이끌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선거 이후 해군이 해군기지 공사 강행 의지를 밝혀 또 갈등이 우려된다. -해군기지 건설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해군기지 갈등을 풀지 않으면 제주 사회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도민 사회의 중론이다. 강정마을 주민, 제주도민, 국방부(해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윈윈’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해군기지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차분하게 다시 한번 상대방의 입장에 귀를 기울일 때다.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해군이 공사 강행만을 강조한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결 방안을 바라는 도민 여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취임하면 곧바로 국방부장관, 해군 참모총장 등을 만나 논의를 해 나가겠다. →핵심공약인 기초단체 부활에 도민들의 관심이 높다. -2006년 기초단체 폐지 이후 읍·면지역의 목소리가 도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도지사에게 모든 게 집중돼 부작용도 있었던 게 사실 아닌가. 기초단체 부활은 지방자치법상 기초단체와 달리 법인격이 없고 기초자치단체의 장은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지만 기초 지방의회는 두지 않는 방안이다. 대신 제주도의회에 지역상임위원회를 두어 실제로 기초 지방의회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제주특별법을 개정하면 얼마든지 실현이 가능하다. 앞으로 전문가 등으로 연구팀을 구성해 추진해 나가겠다. →현 제주도정이 핵심적으로 추진한 영리병원과 관광객 전용 카지노 도입에 대한 견해는. -영리병원 도입은 시기상조다. 공공의료시설 확충이 더 시급하다. 의료기관이나 시설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고통 받는 사례가 많지 않은가. 도민이 의료 서비스에 대해 만족할 때 가서 검토해도 늦지 않다. 관광객 전용 카지노 도입은 재원 확보 측면에서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민이 공감하지 않으면 꼭 할 필요가 없다. →관광 등 제주가 먹고 사는 경제문제는 어떻게 풀어가나. -수출 1조원을 달성하기 위해 ‘수출진흥 4개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제주공항과 서귀포항 인근에 ‘자유무역지구’를 조성하겠다. 자유무역지구에서 생산과 가공, 포장, 디자인, 유통 및 통관 절차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도록 할 생각이다. 수출과 마케팅 업무를 전담할 ‘통상마케팅본부’와 도지사 직속의 ‘수출진흥회의’를 설치할 계획이다. 외국인 관광객 연간 200만명 유치를 위해 국내외 항공 노선을 확대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관광상품을 개발하겠다. 승마와 요트, 골프, 낚시, 패러글라이딩을 5대 핵심 레저스포츠로 선정해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 →도민들은 언제든지 도민들과 소통하는 도지사를 원하고 있다. 방안이 있나. -도민의 소리를 많이 듣겠다. 인수위원회 내에 “도민의 소리를 듣는 ‘도민 제안실’을 마련,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소외된 지역주민들과 민생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제한 없는 소통을 통해 도민 대통합에 나서겠다. 접수된 사안에 대해선 정책에 반영할 것은 적극 반영하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대책을 마련해 나가겠다. 도민들의 적극인 관심을 당부 드린다. →산북(제주시)에 비해 산남(서귀포)이 소외되고 있다는 불만이 높다. -감귤식품산업 클러스터를 서귀포·남원지역에 조성하겠다. 이곳에서 감귤을 활용한 식품·바이오산업을 일으키겠다. 세계적인 국내외 식품기업과 연구소를 끌어들이겠다. 서귀포항 인근에 조성할 자유무역지구 안에서 생산과 가공, 포장, 디자인, 유통, 수출국 통관절차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도록 하겠다. 산남지역을 아열대 과수농업 전진기지로 만들고, 서귀포의료원의 공공의료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 →선거 이후 공직사회가 불안해하고 있다. 대책은. -선거 때 공무원들이 이랬다 저랬다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나는 일로 승부하겠다는 공무원은 편을 가르지 않았다. 떳떳하게 자신있게 일로 승부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러나 공무원의 특정후보 줄대기는 이제 제주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구태다. 일하는 조직을 만드는게 우선이다. 글 사진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우근민 당선자는 뛰어난 친화력으로 도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이끌어 냈고, 유연하고 모나지 않은 행정능력으로 그동안 관선, 민선 4차례에 걸쳐 도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해녀의 아들로 제주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서민들의 삶을 잘 알고 있다. 제주의 인문계 고교에 수석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실업계에 진학,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입대, 군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73년 육군 소령으로 근무 중 상관인 심흥선 장군이 총무처장관으로 발탁되자 비서관으로 공직과 인연을 맺었다. 총무처 차관, 남해화학 사장,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등산을 좋아하며 주량은 소주 1병 정도로 제주산 소주만을 고집하고 폭탄주도 마다 않는다. 간호장교 출신인 부인 박승련씨와 2남을 두었다.
  • 로드넘버원’ 윤계상, 짐승남 부럽잖은 자연복근 화제

    로드넘버원’ 윤계상, 짐승남 부럽잖은 자연복근 화제

    윤계상이 탄탄한 상반신을 공개했다. MBC 수목드라마 ‘로드 넘버 원’(극본 한지훈·연출 이장수 김진민) 제작사는 17일 상반신을 노출한 윤계상의 모습이 담긴 스틸 사진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극중 엘리트 장교 태호(윤계상 분)가 대민 지원을 나와 모내기를 도운 뒤 기마전을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윤계상은 탄탄하고도 날렵한 몸매와 햇빛에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과장된 식스팩이나 복근이 아닌, 자연스러우면서도 오랫동안 잘 가꾼 근육이 극의 설정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 이는 남성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윤계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윤계상 상반신은 엄마미소를 짓게 하네요.”, “윤계상 멋지다. 기대할께요.”, “적당한 근육이 더 멋져 보여요.”, “빨리 방송했으면 좋겠어요.” 등 공개된 그의 모습에 반가움을 표했다. 윤계상은 ‘로드 넘버 원’에서 첫눈에 반한 수연(김하늘 분)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로맨티스트의 면모와 함께 수연의 오랜 연인인 장우(소지섭 분)의 등장으로 인한 질투심과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며 강렬한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오는 23일 첫 방송. 사진 = 로고스필름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지금 대전청사에선…] 관세청 후임 차장 누구 ‘술렁’

    관세청이 후임 차장 임명을 앞두고 관심을 끌고 있다. 산림청의 운전원 공모에는 110여명이 몰려 공직에 대한 높은 선호도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임명 앞두고 관심 후임 관세청 차장에 이대복(56·행정고시 23회) 인천공항세관장과 김철수(54·행시 25회) 부산세관장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내부 신망이 두텁고 존경받는 간부들로 환영하는 분위기이나, 시기적으로 아쉽다는 지적이다. 손병조(54·행시 23회) 차장이 2년 넘게 장수하면서 행시 동기와 후배들의 처신이 어려운 상황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손차장이 사무관부터 관세청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로 차장 재임기간 2년을 넘기며 분란을 유발시킨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현재 관세청에는 안웅린 관세국경관리연수원장이 행시 22회, 이대복 세관장과 우종안 서울세관장이 23회, 김도열 인천세관장이 24회다. 차장 인선 후 후폭풍도 예상되고 있다. 고참 국장들이 본부 세관장으로 배치된 인사 구도에도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한 관계자는 “차장 임기가 정해진 것은 없지만 1년 후 용퇴하는 모습이 사라졌다.”면서 “결국 조직이 부담을 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운전원 1명 모집에 113명 몰려 산림청이 지난 1~4일까지 기능직(10급) 운전원 1명을 공모한 결과 113명이 응시하자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대다수가 대학 졸업자고 연령대도 20~50세로 광범위했다. 특히 석사 학위자와 연구원·장교 출신에 특수면허 소지자 등도 응시했다. 산림청은 1차 서류전형에서 운전경력과 음주·사고·벌점·자기소개서 등 5개 항목을 평가해 85점 이상을 얻은 11명을 최종 후보로 선발, 면접을 실시할 계획이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 [이기웅 응칠교 편지] 어머니를 그리며

    [이기웅 응칠교 편지] 어머니를 그리며

    어머니의 기일(忌日)을 헤아리다가, 돌아가신 지가 두 해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이젠 멀고 먼 역사 속으로 편입돼 버리신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내 일부이셨던 그분의 존재가 그리도 먼 곳에 가 계시다니! 그러나 나의 놀람은, 인생이란 오늘의 현재에 안주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끔 안중근님과 그분의 어머니 조마리아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자주 조마리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을 이 세상에 남긴 채 조국을 향한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던진 안응칠이라고 하는 안중근의 순국(殉國) 장면을 평범한 인간의 감정으로 이해하기란 매우 힘듭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누는 안 의사 모자의 대화와 교감은 참으로 비장합니다.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전합니다. “너는 큰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의(義)를 세웠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 사형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제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 감옥에서 도마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올려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자는 어머니께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드리지 못한 죄 용서하소서.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이 불초자를 가여이 여기지 마시옵고, 후일 영원(靈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며 또 기도하옵니다.” ‘영원의 천당’이란 심령이 은거하는 곳 또는 세속과 멀리 떨어진 은자의 집을 말합니다. 거친 현실을 떠나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보낼 이상향을 꿈꾸는, 자식된 애틋한 정이 읽힙니다. 2000년 전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성모와 사별(死別)하는 장면 또한 애틋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모자의 정을 거론하는 일은, 종교의 틀에서 보면 온당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대속(代贖)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고난 받고 십자가 형틀 위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는 현장에서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조마리아의 심경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주제를 어깨에 멘 채 어머니 앞에서 장엄하게 숨을 거두는 장면은, 대속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지난 6월6일 현충일이었습니다. 나는 예년처럼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나의 종형(從兄) 이기택(李起澤) 육군대위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분은 1950년 8월22일,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대구 근처 효령(孝令)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이 마음씨 좋은 형은 어린 나를 업어주고 손잡아 데리고 놀아준 정겨운 어른이었지요.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선을 향해 고향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나는 열 살이었습니다. 6·25가 터진 지 두 달 만에 전사 통보가 선교장 그의 어머니 앞으로 날아왔답니다. 우리들은 가끔 그를 그리워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향한 애틋한 한을 안고 평생을 한숨으로 사셨습니다. 직계 자손이 없는 이 외로운 장교의 혼을 위해 분향하고 잔을 올렸습니다. 잔을 올리면서 그분과 그분의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형과 함께 내겐 인자한 할머니 같았던 백모님이 그리웠습니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예수와 안응칠과 이기택, 이 세 아들들은 공교롭게도 서른을 갓 넘긴 청년들이었습니다. 천안함에서 숨진 젊은이뿐 아니라, 젊은 자식을 보내고 남은 목숨을 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결국엔 모두들 영원의 집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어머니란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됩니다. 전부입니다. 어머니는 큰 보자기가 되어 세상의 온갖 불행과 비극을 감쌉니다. 나라의 온갖 어려움도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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