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잡념
    2026-06-26
    검색기록 지우기
  • 총성
    2026-06-26
    검색기록 지우기
  • 사회
    2026-06-26
    검색기록 지우기
  • 소모
    2026-06-2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10
  • [마니아] 댄스동아리 ‘댄사모’

    [마니아] 댄스동아리 ‘댄사모’

    “인간사에 흔하지만 오해받지 않으려고 숨기다 화(禍)를 부릅니다.” 지난 23일 오후 5시 지하철 7호선 청담역 인근의 한 주유소 2층에 자리한 댄스스쿨.‘댄사모’ 회원 전영춘(62·자영업·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이런 말로 운을 뗐다. 그는 “오해받을까 두려워 몰래 댄스를 배우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인식이 달라지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전씨 자신도 부인이 먼저 발을 들여놓은 다음인 2년 전부터 함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는 데 뭔가 좋은 취미활동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처음엔 문화센터에서 익히다 한계를 느낀 뒤였다. 그는 “춤이 목적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곳에서 불순한(?) 의도로 한 만남을 전제로 떠올려지는 게 옛 무도장”이라면서 “공개적으로 밝은 곳에서, 밝은 마음으로 모여 춤추는 모임이 댄사모”라고 했다. 두 며느리에게도 추천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제대로라면 춤이라는 것도 사교에 뜻이 있는 것이지만 빗나간 문화가 댄스도, ‘뽕짝’(트로트 음악)도 버려놨다.”고 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댄사모’ 여상헌(55) 회장 역시 부부 마니아다.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일하다 퇴직한 뒤 2000년 6월 10명을 모아 창립했다. 부인(52)은 현직 중학교 교사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먼저 힘이 빠지는 신체부위가 바로 다리입니다. 운동에는 종종 무리가 따르는 데다 돈도 어지간히 들여야 하고 싫증나기도 쉽지만 댄스는 전혀 다릅니다.” 음악을 취미로 삼다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1984년부터 댄스에 맛들인 여 회장은 “표정이 밝아지기 때문에 정신적 건강은 물론 척추를 곧추세우는 동작이 위주여서 신체적인 건강관리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여 회장은 “이성을 상대로 하는 만큼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 예의로 시작해 예의로 끝난다.”면서 “아직도 사교춤으로 문제되는 경우는 잘못 배운 탓”이라고 못박았다. 그 반대인 실례도 들었다. 배우자와 불화로 불륜까지 갈 뻔한 회원이 댄스스포츠에 맛들이면서 화목을 되찾거나, 노름으로 수렁에 빠졌다가 벗어났다는 고백은 회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알게 된 일들이다. 춤추다 보면 잡념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서다. 성(性)적으로든, 취미로든 일종의 대리만족이 따른다는 것이다. 다른 운동처럼 마스터한 뒤에는 싫증나지만 그런 부작용도 덜하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텝과 호흡을 맞춰가는 사이에 저마다 다른 동작이 개발되고 절로 흥미가 새로워진단다. 회원은 현재 2600여명에 이른다.30대에서 6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하지만 댄스를 즐기러 자주 모이는 회원은 40∼50대로,650여명 된다. 최근 들어 각급 학교마다 특기·적성교육 프로그램에 스포츠댄스 등이 엄청 늘어나는 등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교사, 의사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짝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회원들의 성비를 최대한 맞추는 것도 특이하다. 가입절차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재작년 코리아오픈 경연대회에서 포메이션(5개 커플씩 무대에 올라 겨루는 단체경기) 부문에서 우승한 뒤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모아 한때 5000여명까지 회원이 불었지만, 엄격한 심사로 추려내는 작업을 거쳤다.”고 전씨는 알려줬다. ‘댄사모’는 수준에 따라 초·중·상급·A급으로 나눠 강습을 한다. 매주 목요일엔 100여명이 간단한 음식을 장만해와 장르를 따지지 않고 한데 어울려 춤추며 화합을 다지는 ‘포트락(Potluck) 파티’도 갖는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아는만큼 중계한다” 강재형 아나운서

    “아는만큼 중계한다” 강재형 아나운서

    어떠한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흔히 ‘쟁이’라 부른다.또 어떤 것을 소중히 지키는 사람을 ‘지기’라 칭한다.강재형(42)아나운서는 이 ‘쟁이’와 ‘지기’라는 말에 딱들어 맞는 방송인이다. #직접 참여하는 ‘인간적인’ 스포츠 중계 강 아나운서는 MBC ESPN 채널을 통해 수년째 마라톤,F1 자동차경주,골프,사이클 등을 중계해 오면서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로서 그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했다.제3자가 아닌 선수 입장에서 생생하게 전달하는,박학다식한 지식이 뒷받침된 그의 중계는 다른 아나운서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그같은 ‘강재형식 중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그는 한마디로 “직접 해봐야 제대로 된,‘인간적인’중계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그는 지난 87년 MBC 입사후 얼마되지 않아 야구 중계를 맡은 뒤 무작정 직장인 야구를 시작했다.“직접 야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해보니 야수가 왜 알을 까게 되는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됐죠.”지난해에는 ‘F1 자동차 경주’중계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용인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00년부터는 각종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등 마라톤에 심취해 있다.그는 오는 10일 오전 9시 MBC ESPN 주최로 서울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서 열리는 ‘제3회 MBC 한강마라톤 대회’ 하프코스에 이재용 아나운서 등 동료들과 함께 도전한다. ‘심장병 환자 1m1원 후원하기’ 행사에도 참여한다.다른 업무차 해외 출장을 갈때도 조깅화를 싸갈 정도로 ‘오래 달리기 마니아’가 됐다는 그는 “직접 달려보니 35㎞ 지점이 왜 ‘마의 지점’이며,선수들이 왜 스퍼트를 하고 또 뒤처질 수밖에 없는지 생생하게 중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라톤의 매력이 뭐냐?”는 질문에는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가장 ‘인간적인’스포츠죠.그저 운동화 한족이면 따로 준비할 것도 없고요.잡념도 없어지지만,무엇보다도 달리다 보면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매일 출퇴근 때 만나지만 무심코 지나치는 한강 다리와 도로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강조한다. 올해 안에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겠다는 그는 곧 초경량 항공기와 테니스도 배울 계획이란다. 물론 보다 생생한 스포츠 중계에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에서다. #‘우리말 지기’의 ‘클래식’예찬 7년째 매일 오후 5시30분에 방송되는 1분짜리 프로그램 MBC ‘우리말 나들이’를 진행중인 강 아나운서는 사내에 ‘우리말 대학’을 설립하는 등 소문난 ‘우리말 지기’이다.‘우리말 나들이’는 처음에는 사내용 유인물로 제작됐지만,강 아나운서가 아이디어는 물론 기획·편집·제작까지 도맡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정규 프로그램으로 키웠다.외래어와 일본식 조어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틀릴 수 있는 우리말을 쉽고 재미있게 바로잡아 주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얻고 있다.강 아나운서의 그같은 우리말 사랑은 본인 스스로 평하는 ‘클래식’,‘내추럴’성향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소문난 자동차 애호가이기도 하다.하지만 고급 스포츠카나 럭셔리카와는 거리가 멀다.그는 현재 단종된 모델인 두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87년식 기아 ‘프라이드’와 3년전 중고로 구입한 74년식 폴크스바겐 구형 ‘비틀’.‘비틀’은 애호가로서의 소장용이라고 치지만,주행거리 34만 4000㎞의 ‘프라이드’를 고집스럽게 타는 이유는 뭘까.“우리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도 마찬가지예요.주위 시선 의식하지 않고 그냥 내가 보기에 편하고 자연스러우면 되는 거 아니에요?아직도 멀쩡한데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글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신비로운 눈망울- 김효진

    신비로운 눈망울- 김효진

    배우 김효진(20)을 처음 본 것은 지난 2000년으로 기억된다.서울 한남동 모 의류업체 화보 촬영 현장에서였다.당시 갓 데뷔해 신세대 CF스타로 주목받고 있던 그녀는 한마디로 설익은 과일과 같았다.속 맛과는 상관없이 풋풋함 자체가 매력이었다.그후 4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늘씬한 몸매와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톡톡튀는 생기발랄함은 여전했지만,어느덧 배우로서의 성숙한 몸태와 분위기가 깊이 배어있었다.나이를 의심케 하는 신중하고도 똑부러지는 말투에서는 또래 배우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지난달 28일 첫 전파를 탄 SBS 새 주말드라마 ‘매직’의 여주인공 ‘단영’역을 통해 3년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데뷔후 첫 주연.입양아 출신이지만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같은 발랄한 면과,엇갈린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실제 제 모습·성격과 비슷해 연기하기 편해요.자기 표현 확실하고 굉장히 낙천적이고…조금 변덕은 심하지만요.(웃음)” 그녀는 얼마전까지 ‘천년호’‘누구나 비밀은 있다’ 등 스크린 활동에 주력했다.‘누구나‘를 통해서는 그동안의 소녀 이미지를 벗고 성인 연기에 발을 들여놓았다.“이미지 변신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어요.시나리오가 맘에 들었을 뿐이죠.이번 ‘매직’은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이라 끌렸지만,그동안 못해본 멜로 연기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어요.또래들끼리 연기해보고도 싶었고요.” 지난 99년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연예계에 발을 들인 뒤 잡지·CF 모델,배우,MC 등 종횡무진 활약을 했다.그러다 지난 2001년 드라마 ‘우리집’을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고비였어요.너무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하다 보니 제 자신이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요.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죠.그 상태로라면 연기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이후 그녀는 한양대 연극영화과(02학번)에 입학했고,학교생활에만 충실했다.(지금도 모든 촬영 스케줄을 학교 강의가 없는 날 위주로 짜고 있다.)당시는 김민희 등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또래 배우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던 시기.“혼자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온갖 루머가 나돌고 ‘이제 김효진은 끝’이라는 평가도 나왔지만,적어도 1년 이상은 아무생각없이 공부만 해야 겠다고 생각했죠.”처음엔 인터뷰를 전제로 한 상투적인 답변으로 들렸지만,이어지는 말을 통해 솔직함이 느껴졌다.“항상 긍정적이고 밝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 되려고 해요.연기측면에서도 겉 치장이 아닌 ‘속을 꾸미는’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죠.배우는 얼굴을 통해 그 내면이 얼마나 꽉찼는지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연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연기를 말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지만,이젠 어린애처럼 예뻐보이기에만 신경쓰지 않게 됐어요.다행이죠.쓸데없는 잡념 한가지를 버리니 연기에 몰입이 잘 되더라고요.긴 대사 처리할때 아직도 호흡이 고르지 못한 것은 계속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에요.” 그녀에겐 부모님이 가장 무서운 시청자란다.“제 연기를 제일 냉정하게 평가해주시는 분들이에요.손짓,표정,심지어 걸음걸이 하나까지 모두 조언해 주세요.다만 늘 ‘짠’ 점수를 주는 게 불만이죠.(웃음)” “인간의 내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꼭 한번 정통 사극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한다.10년쯤 뒤엔 이름 석자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는 배우로 성장해 있을까.“한 가지 색깔로 덧칠되고 싶지는 않아요.주어진 역할 연기를 100% 소화해내는,‘연기 잘하는’배우로 크고 싶어요.”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시시콜콜한 질문을 통해 김효진의 또 다른 매력을 알아봤다. 가장 소중히 간직하는 것 -어릴적부터 찍어 온 가족과 친구들 사진.그리고 일기장 20여권.지금도 촬영 현장에서 틈 날 때마다 캠코더와 사진기를 들고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촬영하며 추억을 남긴다. 첫사랑 -초등학교 5학년때 외국에서 전학왔던 남학생.숫기가 없어 중3때까지 그저 바라만 봤다. 타임머신 타고 초등학교시절로 돌아간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남자친구도 많이 사귀고 싶다. 매력적인 이성상 -말이 통하는 남자 가족관계 -부모님과 남동생 얼굴 중 맘에 안드는 부분 -지금은 없다.한때 외꺼풀 눈과 (얼굴이 화면에 붓게 나와)볼 등을 손보려 했지만,지금은 성형 수술 안한게 천만 다행이다.개성있지 않나?(웃음) 취미 -집에서 틈 나는대로 신문 스크랩하는게 낙이다.2년전부터 나와 관련된 기사는 물론 주로 사회·문화(여행·연예)·인물 기사를 스크랩해 반복해서 읽는다.컴퓨터는 잘 안한다. 노래방 18번 -마이클잭슨의 ‘You are not alone’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김태정 글

    새로운 감성의 작가를 만날 때는 언제나 설레게 된다.더구나 틀 지어지지 않은 상상력으로 무장한 독특한 작품을 들고 세상에 나올 경우는 특히 더 하다. 김태정(41)의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사 펴냄)을 읽다보면 시인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진다.등단 후 13년 동안 들인 공이 절실하게 읽히는,고른 수준의 작품들이 우선 궁금하고 그 속에 스민 ‘무공해 삶’ 또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시집 속 여백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김태정의 의식을 따라가면 최근까지도 “286컴퓨터를 사용했다.”는 이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의 삶이 어렴풋이 느껴진다.그 윤곽을 더듬는 과정은 자본에 오염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만가지 잡념들이 콩 튀듯 팥 튀듯”(‘별밭에서 헤매다’)하는 시인의 머리 속에는 가파른 현대사와 개인사가 공존한다.386세대인 시인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낮엔 공장을 다녔고 밤엔 야간대학을 다닌 모양이다.남들이 책에서 발견한 세상의 모순이 시인에겐 생활이었으니 한때 변혁의 꿈을 꾼 것은 당연하다. 이후 세상이 바뀌면서 남들이 앞다퉈 화해를 모색할 때 시인은 그게 힘들었나보다.“그 ‘적당히’가 적당히 안되는 불온한 시인이여”(‘샤프로 쓰는 시’)라거나 “곧을 태 곧을 정,까짓거 대나무처럼 살면 될 거 아닌가 뜻도 모르는 채 내 이름 석자에 온 생을 맡겼습니다.”(‘봄산’)라고 슬쩍 들려준다. 당연히 이런 ‘날 것의 자존심’은 변신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상처를 입는 법.시인은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그려보이지는 않지만 시집 곳곳에 “삭이지 못할/시퍼런 상처”의 흔적을 보여준다.오죽하면 만만치 않은 삶의 고독과 상처를 겨울산에 나누려고 할까?(‘겨울산’) 그러나 “길들여진 걸음으로는/차마 한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게 체질인 시인은 “곧고 곧아라 삶도 사랑도,내 이름대로만 살면 될 거 아닌가 겁도 없이”(‘봄산’)라고 다짐한다.그래서 봉지쌀을 먹고 실밥을 따는 노동의 세월을 거치고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가 될 글”(‘궁핍이 나로 하여’)을 쓰는 빈곤 속에서도 마음은 더 풍요로운 삶을 이어간다. 세월에 단련된 시인의 노래는 자신에게만 엄격하지 타인에게는 너그럽다.야간대학 동창생 엄고만의 삶을 따스하게 바라보거나 “늦게 나온 별처럼 깜빡깜빡/고단한 두 눈이 졸음으로 이울고”있는 노동자가 “거친 손으로 달구어진 아이롱”에서 “순결하게 달아오른 별”을 본다(‘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 이런 작품세계를 일컬어 시인 정우영은 장문의 해설과 함께 ‘민중서정시’라 이름붙인다.또 시인 노향림은 “풍자와 은유를 적절히 교접시킨 그의 시는 아무리 긴 시라도 짧은 듯 끝까지 놓지 않고 읽게 만든다.”고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시는 소설보다 몸이 작아서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는 한 평론가의 말은 김태정을 염두에 둔 듯하다.이윤 창출이란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자본주의 체체 안에 살면서 그 마저 부인하려는,이 아나키스트와도 같은 시인의 염결성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보물 400호 선암사 승선교 복원

    300년 가까이 된 전남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보물 400호)가 12일 해체 복원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치(활) 모양의 승선교는 기초 자연암반 균열로 붕괴위험이 있어 2002년 11월 문화재청과 순천시가 4억 7000여만원을 들여 기초 암반을 화강석으로 보완하고 홍예석 147개 가운데 깨지거나 강도가 약한 32개를 새로 교체해 이달말 복원이 마무리된다. 둥그런 형태의 홍예석은 계곡물이 지나는 곳으로 길이 8.76m,최대 높이 6.34m,너비 3.62m다. 홍예석은 직육면체로 밑면이 좁고 윗면이 넓은 쐐기형으로 깎인 돌이다.한개 길이는 0.6∼1m인데 밑변의 폭과 높이가 30∼36㎝,60∼70㎝ 등으로 다양하다.복원에 쓰인 돌은 원래 재질과 흡사한 화강암으로 전북 익산의 함열면에서 가져왔다. 선암사 정문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승선교는 다리 양측 밑부분이 세월의 무게를 못이겨 차츰 내려 앉으면서 반원 형태가 뒤틀려 1년 8개월 만에 복원됐다. 승선교는 조선 숙종 39년(1713년) 이 사찰 스님인 호암화상이 6년 동안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선암사 종무소 관계자는 “선암사는 사찰의 터 기운이 세서 다른 절에 있는 사천왕상이 없고,승선교를 건너기만 해도 세속의 잡념과 묵은 때를 털어버린다는 속설이 있다.”고 말했다. 순천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우리 꽃 따라 30년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장

    설악산 한계령 고갯마루,오전 11시.따뜻한 아침 햇살에 데워진 용담꽃이 천천히 봉오리를 연다.그러자,붓끝처럼 뾰족이 말린 자주색 꽃봉오리 안에서 커다란 호박벌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용담꽃이 매일 오후 2시쯤 꽃잎을 닫고 다음날 오전 11시쯤 봉오리를 여는 생태를 이용한 ‘얌체투숙객’이다. 그러나 용담꽃에 이보다 더 고마운 손님은 없단다.김태정(金泰正·62) 한국야생화연구소장은 “용담꽃은 수술과 암술이 길쭉한 몸통 안쪽 깊이 있어서 ‘밤손님’인 호박벌이 꽃가루를 다른 꽃으로 전해주지 않으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면서 “나 역시 그 호박벌처럼 우리 들꽃과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로 살고 싶다.”며 웃었다. ●목숨살린 이름모를 열매 찾으려 시작 그는 ‘국졸’이면서 ‘박사’다.‘걸어다니는 식물도감’ 김태정 소장은 학계에서도 “현장답사 경험만 놓고 보면 어떤 학자도 따르지 못한다.”고 한수 접어주는 인물.1971년부터 우리 들꽃을 카메라에 담고자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으니 벌써 30년이 넘는다.남녘끝 한라산에서 태백산 설악산 거문도 독도 백령도까지 휴전선 남쪽 땅은 밟아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단다.정부나 언론사가 민통선이나 휴전선,백두산 등지를 현장답사할 때면 으레 그에게 참가 요청 또는 문의가 들어온다. ‘한국의 자원식물’(전5권) 등 그동안 쓴 관련 서적이 60여권이고,찍은 사진도 100만컷을 넘는다.그 필름을 연결한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3번은 왕복할 양이다.이 사진자료들은 학계에서 식물도감 등을 만들 때 고스란히 사용되는 귀중한 자료다.지난 84년에는 LA국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관련책 60여권·찍은 사진 100만컷 김 소장과 우리 들꽃과의 인연은 18세 때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6세 때부터 앓던 간염이 악화해 당시 김 소장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서울 큰 병원에서도 고개를 내저을 때,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것은 미심쩍은 민간처방이다.한동네 할아버지가 전해준 이름모를 열매를 복용하자 병은 일주일 만에 나았다.완치의 기쁨도 기쁨이었지만,그 힘든 병을 조그만 열매 하나가 간단히 고쳤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김 소장은 이후 롯데 ‘고구마깡’ CM송 등 CM송 작곡가로 활동하면서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결국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우리 들꽃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열매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그러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에 꿋꿋하게 핀 소담스러운 들꽃들을 보다가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웃음)” ●야생화 찍느라 왼쪽눈 머는 것도 몰라 작고한 송주택 전 전북대 농대 식물분류학 교수를 스승으로 모신 김 소장은 밤에는 개인강의를 듣고,낮에는 산속을 누비고 다녔다.“스스로 좋아서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적어도 3대의 카메라에 필름 100여통,침구·취사도구 등 30㎏에 이르는 장비를 짊어지고 길도 없는 들과 산을 며칠씩 헤매고 다녔다.“한창때는 일주일에 네댓새를 현장에서 살았습니다.3월부터 10월까지는 주로 산에,나머지 겨울철 4개월 동안은 남녘 섬에 가지요.” 암벽에 핀 꽃을 찍으려다 추락해 다리를 다쳐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외롭고 힘든 일이다.“그래도 이산 가면 더 좋은 꽃이 있고 저산 가면 더더욱 좋은 꽃이 반기는데 어쩝니까.집에 하도 안 들어가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 얼굴도 생경해졌지요.그래도 별 수 없어요.속된 말로 마누라 도망가는 것 무서우면 이짓 못합니다.(웃음)” 김 소장이 우리 산들을 돌아다니며 찍은 필름 가운데 지금 남은 것만 100만여컷.하루에 평균 1000컷은 찍었단다.“나중에는 종로세무서에서 ‘무슨 필름을 이렇게 많이 쓰느냐.탈세수법 아니냐.’며 조사나온 적도 있지요.” 필름값뿐만 아니라 20대도 넘게 부서뜨린 촬영용 카메라,여행경비 등으로 빚도 많이 졌다.“지금껏 쓴 돈을 합하면 집 두세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겁니다.80년대 후반에 인세 등으로 생활이 조금 피기 전까지는 빚쟁이 피해 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지요.” 그러나 현장에 나가 꽃만 보면 모든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산에 가면 잡념이 사라집니다.그럴 틈이 없어요.대부분의 꽃 촬영은 아침 한때 승부입니다.그 시간에는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합니다.다른 사람들도 ‘저이와 같이 현장 나가면 점심은 당연히 굶고 빨치산처럼 산만 타야 한다.’고 꺼리더군요.” 김 소장은 촬영에 너무 열중하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종합학술조사단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직사광선 속에서 모자도 안 쓰고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땀이 너무 많이 눈에 흘러들었나 봅니다.현재 왼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그래도 카메라는 오른쪽 눈으로 찍으니 별 상관없잖아요?” ●미친듯 산속 누비고 다녀 ‘빨치산’ 호칭 그에게는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있다.제 일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할 텐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것.의욕적으로 덤비던 사람도 김 소장과 함께 3일만 현장 생활을 겪고 나면 도망가기 일쑤란다.“들꽃도 생명인지라 시시각각 변해요.내 뒤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찍어서 남겨야 하는데….”우리 식물이,번식력도 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외국산에 밀려 점차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모두들 조금만 더 우리꽃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굳이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제발 꺾거나 밟지는 마세요.꽃이 꽃으로 피는 이유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렇게 하지 못할 텐데….어떻게든 자손을 이으려고 그렇게 고생하는,우리와 같은 생명체입니다.” 김 소장은 오는 18일부터 7월 중순까지 전국 초·중·고 교사들이 주로 참여하는 300명 규모의 ‘우리들꽃사랑 가족교실’을 준비중이다. “애정을 가지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지요.이름부터 알고 어떤 꽃인지를 알고….그것을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 제 일입니다.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한 이 중매쟁이 노릇을 계속할 겁니다.” 글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약력 1942년 충남 부여 출생 55년 부여 양화초등학교 졸업 71년 한국야생화연구소 설립 84년 LA국제대학 명예박사 85년 제10회 서울시발전상 은상(서울시) 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88년 서해 외연열도 자연실태 학술조사단 참가 89년 영광 안마군도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90년 스포츠서울 백두산 야생화 학술탐사단 단장 90∼91년 서울신문·스포츠서울 국토종단 야생화 대탐사단장 91년 제9회 과학기술도서상 저술부문 수상(과기처장관·출판문화협),제19회 세계환경의날 환경보존 유공포상(국무총리상-환경처) 97년 제37회 한국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한국일보),MBC 대학생 백두산 자연생태 탐사단장 2000년 환경보전 표창(환경부장관),환경부 환경홍보사절 위촉 01년 KBS 북한지역 백두고원 탐사단 ˝
  • 수묵화 동호인 모임 ‘초연회’/스르르 먹물 번지듯 잡념도 사라지죠

    수묵화(水墨畵).다른 색깔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먹으로만 진함과 묽음,비움과 채움이라는 단순한 대조 속에 얼마나 많은 인간 상념을 담아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영(靈)과 육(肉)의 존재인 인간이 육의 속박을 벗어나 영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바로 그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만큼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오묘한 먹빛에 마음의 평정 찾아 지난 23일 세종문화회관 뒤 서울 종로구 당주동 세종아파트 306호.30여평의 아파트는 수묵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모임인 ‘초연회(草緣會)’ 회원 9명이 한데 모여 팔중(八中) 김문식 화백의 지도로 자신들이 완성한 작품을 내놓고 품평회를 열고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온 정열을 쏟아 빚어낸 작품인 만큼 평가자들의 코멘트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깊게 가슴에 새기며 마치 초등학교 사생대회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처럼 맑고 영롱한 ‘동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마음의 걱정과 우울함을 다스릴 때는 수묵화를 그리며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요.문득 옛것이 그리워질 때나 나도 모르게 마음의 일탈(逸脫)을 꿈꿀 때 수묵화를 그리는 일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조금 배운 뒤 잊고 지내다가 지난 3월 문득 옛날이 그리워 다시 수묵화를 그리게 된 장현순(32·여·고려대 강사)씨는 “수묵화를 그리는 동안 잡념을 떨치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며 “특히 검은색 한가지로 농도가 진하고 옅어짐의 정도에 따라 6가지 색깔을 내는 오묘함도 맛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옆에 있던 박창구(49·화물공제조합 과장)씨는 “보통 때는 무심하게 지나치던 사물도 수묵화로 그릴 때면 또다른 느낌을 받기 때문에 다른 일반 취미보다 싫증이 덜 난다.”며 “차근차근 변화하는 사물을 천착하다 보면 인내심을 키우게 되므로 현대인의 인격수양에 큰 도움이 된다.”고 거들었다. ●스케치 여행 다니며 건강도 좋아지고 현재 수묵화 그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5만명 안팎으로 추산된다.이들은 동호회·대학교 동아리·인터넷 동호회 등을 통해 주로 활동하고있다.대표적인 동호회 중 하나가 초연회.지난 1990년 결성된 초연회의 회원은 200여명.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많았거나 그림 그리기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수묵화도 창작 작업입니다.창작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지방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 지방의 맑은 공기를 쐬는 기회가 많은 덕택에 나이든 분들에게는 건강증진 효과도 있죠.” 수묵화라는 취미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음주나 잡기에 빠졌을 것이라는 허철균(57·한성인쇄소 대표)씨는 “수묵화가 정신을 다잡아줄 뿐 아니라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해주죠,돈마저 적게 드니 일석삼조”라고 강조한다. 그림에 관심이 많아 1987년 수묵화에 입문한 안혜민(47·금융업)씨는 “수묵화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짧은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기보다 수묵화를 그리거나 서울 인사동의 전시회를 가는 등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게 됐다.”며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자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데다,여러 방면에 관심을 가져 교양이 풍부해지는 부수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수묵화를 즐기는 이유는 정신건강 및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는 점 외에도 전통문화를 살리거나 복잡한 현대생활 속에서 자연을 ‘완상(玩賞)’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먹고 사는 데 바빠 늦깎이로 시작했지만 수묵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세상사를 잊고 몰입한다는 이춘택(54·서울지하철공사 부역장)씨는 “개인적으로는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이 수묵화는 물론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점이 너무 안타깝다.”고 지적한다. ●제대로 그리려면 3~5년 배워야 미술을 너무 좋아해 교대를 졸업한 뒤 다시 미술교육과로 편입·졸업한 ‘수묵화 마니아’ 김현순(56·서울 도봉구 창일초등학교 교사)씨는 “수묵화는 집안이나 도심 속에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특히 나이가 든 분들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고,공허한 마음을 채워준다.”고 털어놓는다. “묘사 위주인 서양화에 비해 수묵화는 사실 좀 어려운 편입니다.제대로 된 작품을 창작해 내려면 3∼5년 정도 배워야 하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수묵화를 익혔다는 윤민진(22·여·경희대대학원)씨는 “수묵화를 그리는 수준이 높아진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즐겁다.”며 “너무 빠르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평정을 찾아주는 취미로서는 수묵화가 단연 최고”라고 내세웠다. 글 김규환기자 khkim@ 사진 안주영기자 jya@ ■수묵화 배우고 싶다면 예부터 문인과 선비들이 즐겨 그린 수묵화는 채색을 쓰지 않고 먹만으로 그리는 동양화 고유의 회화 양식 중 하나.현란한 채색을 피하고 먹의 명암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정신성(精神性)을 구현,문인화의 대종(大宗)을 차지하고 있다. 수묵화의 기법은 발묵(潑墨)·파묵(破墨)·농묵(濃墨)·담묵(淡墨) 등으로 나눠진다.발묵은 종이 위에 먹이 번져 퍼지는 효과를 얻고,파묵은 담묵으로 윤곽을 1차적으로 칠하고 그 뒤에 조금씩 농묵으로 덮어씌운 듯이 그려나가는 기법이다. 농묵은 먹을 진하게 갈아서 그리는 것이고,담묵은 물기와 먹이 번져 어울리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해 얻을수 있는 기법.따라서 농묵과 담묵은 물기를 따라 삼투압 현상을 일으켜 번져가는 변화를 이용하는 셈이다.먹을 농·담으로 순차적으로 쌓아가듯이 그리는 적묵법(積墨法)도 있다. 수묵화를 배우는 과정은 선을 그리는 연습을 시작으로 사군자 그리기→화조(새 그리기)→석법(바위 그리기)→수지법(나무 그리기) 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기초과정이다.걸리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된다.기초를 익힌 다음 사생(스케치) 연습→기초 수묵화 그리기→계절별 수묵화 그리기 과정을 마치면 근사한 수묵화를 그려낼 수 있다.그 기간은 3∼5년이 소요된다. 수묵화를 배우려면 시·도·구 문화센터나 백화점 문화센터 등을 찾거나 개인 교습을 받아야 한다.강의료는 시·도·구 문화센터(3개월)가 5만원 이하로 가장 저렴하다.백화점 문화센터는 8만∼10만원이며,개인교습(1개월)은 10만∼20만원을 받는다. 김규환기자
  • [발언대] 준비없는 산행이 사고 부른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산악회나 계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산행 계획을 세운 분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산행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든 체력의 한계를 자율적으로 측정하는 기회가 되면서,또 형형색색의 심산유곡을 맘껏 즐기는 가운데 잡념을 잊게 만드는 특효약이다.그런데 유념할 것은 준비 없이 급히 떠난 산행은 엄청난 안전사고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설악산의 대청봉·오색 등지에서 발생한 산악사고 때문에 강원도 속초소방서가 119구조 신고를 받고 출동한 사례 중 81%는 10월에서 11월10일까지 한달 열흘 사이에 일어났다.이로 인해 3명이 숨지고 12명이 중상을 입는 등 모두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사고 원인은 주로 체력 소모에 따른 탈진과 추락·조난 등이었다. 단풍이 더욱 짙어지면 등산객이 급증할 텐데,구조 업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걱정이 앞서기에 산행시 행동요령·준비물·사고 대처방법에 대하여 알려드리려 한다.산행을 할 때는 ▲기상예보에서 폭우·폭풍·폭설 등 악천후가 예상되면 산행 자체를 자제해야 하며▲등산 코스는 동행자 체력의 최소한도 내에서 정하고 ▲체력이 약한 회원은 행렬 중간에 두며 ▲앞뒤에서 무전기로 연락,속도를 조절해 낙오자를 예방해야 하고 ▲등산화 등 몇가지 장구는 꼭 갖추어야 한다.아울러 신분증·라디오·플래시·비상식량·응급약품도 필히 휴대해야 한다. 만약 산행 중 부상자가 생기면 반드시 119신고를 해야 한다.부상 정도가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환자라면 119 구조헬기를 동원해서라도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다만 부상 정도가 경미하면 더 위급한 환자의 구조를 위해 신고를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이건원 강원 속초소방서 방호구조과장
  • 와당은 ‘시대의 문화’ 깃든 예술품/ 세계최고 ‘와전 컬렉션’ 꿈꾸는 유창종 변호사

    우리 조상들은 처마 끝에 예술품을 장식하고 살았다.그러나 후손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고,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그런 무지몽매를 일깨운 사람이 유창종(58) 변호사다. ●기와등 1800여점 중앙박물관 기증 그는 지난해 12월 서울지검장 시절,국립중앙박물관에 25년 넘게 모아온 1873점의 와(瓦·기와) 전(塼·벽돌)을 기증했다.고구려·백제·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와전 1100여점,기원전 4세기 전후 전국시대에서 진(秦)·한(漢)을 거쳐 명(明)·청(淸)나라까지 중국 와전 700여점,일본 와전 60여점,태국과 베트남의 와전 10여점이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문화재에 값을 매길 수는 없지만 억지로라도 매긴다면 최소한 20억원 이상이 될 것으로 평가했다. 중앙박물관은 귀한 뜻을 기려 그중 600여점을 선별,지난해 12월24일부터 올 2월16일까지 ‘유창종 기증 기와·전돌’ 전을 열었다.전실을 찾은 사람들은 와전 중에서도 지붕 처마 끝 수키와와 암키와에 달려 있는 와당(瓦當),우리말로 막새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았다. 홍익대 미대 교수들조차와당의 문양을 보고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충격을 받았다.”고 했다.입소문이 돌면서 관람객들이 몰려 자원봉사자들은 신이 났고,공무원 신분이어서 주말에만 전실을 찾은 유 변호사는 사인 공세를 받았다. ‘와당 선생’,‘유 도사’ 등의 별명을 갖고 있는 유 변호사를 지난 주말 서울 중구 순화동 법무법인 세종에서 만났다.그는 변호사로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그러나 기와 이야기를 건네자,이제 한국미술사와 고고학을 공부하려면 입문 과정으로 반드시 와당을 공부해야 한다고 열변을 쏟았다. “와당의 아름다움과 미술사적 의미를 모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와당은 그 시대·지역의 건축 및 불교 문화,문화의 이동경로,예술적 특성과 미의식 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예품입니다.당시 종교,철학,사상,권력체제까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이를테면 발해의 와당은 모두 공통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이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유지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아울러 발해 와당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어요.발해는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요.” ●1978년 충주 근무때부터 수집 나서 기와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충주지청 검사 시절.당시 충주 중원탑평리칠층석탑 부근에서 와당 파편 몇 점을 수습한 것이 계기였다.대학 때부터 미술사와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와당 수집에 나선다.지금은 값이 폭등했지만,당시만 해도 값이 헐한 데다 수량도 적지 않아 공무원 월급으로도 수집이 어렵지 않았다. 79년엔 그의 문화재 답사 모임이 중원고구려비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고,그가 초대 회장을 맡았던 ‘예성동호회’는 84년에 대한매일의 전신인 서울신문이 제정한 제4회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일본인 의사 이우치(井內)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와당 1082점을 기증하자 와당 수집에 더 몰두했다.그는 이우치 와전실을 둘러볼 때마다 부끄러움과 감사하는 마음,소박한 애국심 등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고 한다.이런 감정은 나중에 기증 결심으로 이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와당 파편을 수집한 다음해인 79년 완전한 6엽 연화문 와당을 구했을 때와,2002년 12월 국내엔 유물이 전무한 발해의 와당을 구입했을 때다.2005년에 개관하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자신이 기증한 와당들을 중심으로 발해 전시실을 연다는 계획이다. 기증을 결심한 뒤에는 시대별 또는 지역적으로 귀중한 것이지만 값이 비싸 구하지 못했던 와전들이 마음에 걸렸다.그래서 부인 금기숙(52·홍익대 섬유아트부 교수)씨와 의논해 적금을 해약하고 주식까지 처분해 빠진 와전을 보완했다. 그의 행복관은 어떤 것일까.“인생을 깊이 있고 풍성하게 느끼는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고,더 많이 깨우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법률가들은 자만심과 논리에만 빠져 우물안 개구리처럼 옹색하기 쉽지요.논리적이면서도 예술가처럼 감성적이어야 인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가의 와전 사느라 적금도 해약 그는 86년부터 단소를 불기 시작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대검 중앙수사부장 시절,직원들은 아침마다 그의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영산회상곡 등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단소를 불면 잡념이 사라져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고 저절로 단전호흡이 돼 건강해진다. 그는 서울지검장으로 재직하던 중 중수부장 시절에 ‘이용호 게이트’를 부실하게 수사했다는 이유로 좌천된 뒤 지난 4월에 31년의 공직생활을 마쳤지만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는 몇 안되는 선배다.그는 당시 바르고 당당하게 수사했으며 그것은 후배 검사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러면서 후배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검찰권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요.검찰권 행사의 금도를 넘어서면 안됩니다.휘두를 수 있을 만큼 휘둘러 모든 것을 까발린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검찰권 존재의 의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요즘도 골프를 치지 않는 대신 주말마다 절터를 답사하고 인사동 등 고미술가를 순례한다.한 주만 거르면 가게 주인들이 “지난주에는 왜 나오지 않으셨느냐.”고 물을 정도다.기증 후에 모은 와·전만 200점에 가깝다.계속해서 와전을 모으는 것은 용산 중앙박물관에 들어설 ‘유창종 와·전실’을 세계 최고의와전 컬렉션으로 꾸미기 위한 것이다.딸 영지(28),아들 영상(26)씨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 대를 이어 와전을 수집해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황진선기자 jshwang@
  • 이사람 / 한국 라면의 산증인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한국 라면의 산증인’ 전중윤(全仲潤·83) 삼양식품 회장.라면 하나로 1960년대 보릿고개를 해소하는 데 일조(一助)한 ‘그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생산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작지만 단단한 체구였다.적어도 20년은 젊게 보이는,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특별한 건강비결은 없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틈만 나면 뛰거나 걷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낮잠을 즐기고 주말이면 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을 찾아 맑은 공기를 마시는 습관도 건강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한때 즐기던 골프는 1998년 회사가 화의를 신청하면서 그만뒀다. “1961년 회사를 설립해 승승장구했지요.그런데 1989년 우리 회사를 포함한 5개 식품업체들이 라면에 비식용 우지(牛脂)를 넣었다고 검찰이 발표했어요.이 무슨 날벼락입니까.나중에 대법원이 무죄라고 판결했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았어요.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경영난이 심화돼 화의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최근 영업이익이 몇년째 흑자를 보이고 있어 2,3년이 지나면 화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주거래은행인 신한은행 등 채권단이 지난달 채무액 2300억원 중 보증채무 400억원을 출자전환해 줬습니다.담보채무의 금리는 연 10%에서 7%로,무담보채무는 7%에서 4%로 각각 낮춰줬어요.큰 혜택이지요.” 전 회장은 시간 날 때마다 직원들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직과 신용을 가장 앞세워라.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먼 미래를 내다보고 생각하라.그래야만 우리가 일구어놓은 기업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대대손손 번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30여년 동안 그를 지켜본 정호권(鄭鎬權·전 건국대총장) 박사는 “전 회장은 아마 기업인보다 교수를 했으면 더 잘 했을 것”이라면서 “항상 책을 읽고 확고한 철학도 가지고 있는 데다 바른 정신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고 평했다. 그래서일까.전 회장은 한달에 50만박스씩 팔려 회사의 주력상품으로 40년째 자리를차지하고 있는 삼양라면의 맛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라면시장의 70%를 매운 라면이 차지하고 있지만,삼양라면의 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요즘 입맛으로 치면 맨송맨송할 수 있겠지만,“맵게 먹어 건강에 좋을 게 없다.”는 전 회장의 지론 때문이다.다만 품질만 업그레이드할 뿐이다.전 회장은 “우리나라에 암환자가 많은 것은 맵고 짜게 먹는 탓”이라면서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더라도 처음 내놓은 삼양라면의 맛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먹거리 철학은 경영권을 넘겨준 아들 인장(40)씨에게로 이어졌다. 인장씨는 1999년 처음으로 매운 맛의 수타면을 내놓았다.회사를 살리기 위한 비상대책이었다.그럼에도 무작정 맵게는 하지 않았다.수프를 분말· 플레이크·고추양념 등 세 가지로 만들었다.소비자가 기호에 따라 매운 맛을 조절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다른 회사 제품은 매운맛과 야채 등 두 가지 수프로만 돼 있다.세 개의 수프는 먹거리의 철학을 지키면서도 시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고심의 결과라고 주변에서는 풀이한다.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매운 라면은 내놓지 않을 작정이다. 그가 ‘우지 파동’을 겪은 것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었다.“(그때를 회고하며 지금도 화가 나는 듯) 난생 처음 듣는 공업용 우지라니,말이나 됩니까.검찰 발표가 무책임했죠. 결국 3개월간 회사 문을 닫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라면을 전량 회수해 사료로 처분했습니다.” 이때 가슴을 차지한 한(恨)을 다스리기 위해 독서에 매달렸다.전 회장이 소장한 책은 무려 9000여권.관심 분야는 식품회사 창업자 답게 주로 식품과 건강 서적이다.요즘은 역사와 철학,불교 책을 읽는다.끊임없이 독서한 덕분에 불교 입문서인 ‘대승불교경전(大乘佛敎經典)’과 교육 방법론인 ‘인격과 교육’ 등의 책을 펴냈다. 정박사는 “전 회장은 특히 불교와 유교 등 동양문화에 철학적 깊이를 두고 있다.”면서 “‘자기가 정당하면 반드시 바로 선다.하지만 한번 잘못하면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후손들에게 해가 미친다.’는 말을 외우고 다닐 정도”라고 전한다. 슬쩍 화제를 정치 등 다른 사안으로 옮기려 하자 전 회장은 손사래를 친다.우지파동에 워낙 ‘덴’ 탓인지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면서 “정치나 사회 얘기를 하다 보면 잡념이 생겨 회사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라면을 만들 때 안전한 천연 원료만을 고집한다.“다른 업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식품업계가 돈벌이에 급급하면 안됩니다.자칫 안전성이 떨어지고 영양이 부실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식품은 절대 안전해야 합니다.인간은 120살까지 살 수 있습니다.사람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식품이 75%를 기여하는 만큼 건강식품을 만들기 위해 안전성이 검증되고 영양이 많은 성분을 추가해 나갈 계획입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라면산업의 낙관적 전망에서 비롯된다.라면 시장은 해마다 4∼5%씩 꾸준히 신장하고 있고,세계 120여개국에서 소비되고 있다.하지만 경영이 정상화되더라도 결코 사업의 외연(外延) 확장에 치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재무구조 건전화와 윤리경영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라면의 인기는 21세기에도 계속됩니다.가격이싸고,빨리 조리할 수 있으며,맛도 있고,영양을 갖춘 식품이기 때문이죠.특히 시장개방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라면만큼은 수입품이 발을 못 붙일 것입니다.” ‘인생백회 천세우(人生百懷 千歲憂)’ 그의 좌우명이다.사람은 백년을 살지만 천년 후를 생각하자는 뜻이다.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가 찾아낸 이 좌우명은 인간과 기업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김규환기자 khkim@ ■‘삼양라면' 발자취 ‘제2의 쌀’로 불리던 삼양라면의 탄생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대문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전 회장이 식량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제일생명 사장직을 포기하고 나와 삼양식품을 설립하면서 비롯됐다. 하지만 라면을 생산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계속됐다.1년여 동안 하월곡동 창고에서 숙식을 하며 개발에 착수,우리 입맛에 맞는 라면을 개발했으나 곧바로 생산에 들어가지는 못했다.일본에서 라면기계를 들여올 만한 자금이 없어 생산라인을 갖추지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1800만달러에 불과할 때였죠.라면기계구입비 6만달러가 어디 있겠습니까.그래서 주무부서인 상공부를 찾아가 설득했습니다.5개월에 걸친 끈질긴 설득작전이 주효해 5만달러를 지원받았죠.” 전 회장은 5만달러중 2만 7000달러로 일본 명성식품으로부터 라면기계 2대를 구입하고 로열티 지불없이 선진 제조기술까지 전수받았다. 지한파(知韓派)인 당시 명성식품 사장이 국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그를 ‘예쁘게’ 봐준 덕택이다. 특히 당시로는 거액인 나머지 2만 3000달러를 국가에 반환함으로써 정부의 신뢰감도 얻었다.63년 9월15일 마침내 ‘삼양라면’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첫발을 내디딘 삼양라면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광고매체가 발달돼 있지 않아 제대로 홍보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무료 시식회였는데 대성공이었다. 서울역·남대문시장에 설치한 즉석 라면 요리대의 쫄깃쫄깃한 면발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극장가등에서 무료로 나눠주면서 라면은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때마침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져 라면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라면 개발 초기 2년 동안 무려 1억원의 적자를 낸 삼양식품은 3년째 들어 흑자로 돌아섰다.63년 2900만원에 불과하던 매출액은 65년 2억 3900만원,67년 10억 1400만원,71년 100억원대를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삼양식품은 89년 우지파동이라는 직격탄을 맞아 30년 가까이 쌓아온 명성이 뿌리째 흔들렸다. 4000여명이던 종업원들 가운데 1000여명이 떠나갔고,65%를 웃돌던 시장 점유율도 6%대로 곤두박질쳤다. ‘화불단행(禍不單行·화는 잇따라 온다)’이라고 했던가.우지파동으로 위기를 겪는 와중에 97년 외환위기라는 악재가 겹치자 결국 98년 1월 화의를 신청했다. 이후 서울 종로 본사 부지 등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하고 강원레저 등 계열사 매각과 함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했다. 이러한 자구책과 ‘수타면’ 등 신제품 개발에 힘입어 시장 점유율이 20%대로 올라갔다. 지난해에는 2500억원대의 매출과 200억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창출했다. 전중윤 회장은 ●1919년 8월 강원도 철원 출생 ●57년 동방생명보험 부회장 ●61년 제일생명보험 사장 ●61년∼현재 삼양식품 회장 ●67년 경희대 경영행정대학원 졸업 ●76년 연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2년∼현재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 [2003 여성문화](3) 직장 떠나 집으로....그러나 아이 키우며 ‘일’로도 성공 꿈꾼다

    흔히 여성의 직장생활을 ‘자아실현’이라 말한다.‘자아실현’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 해야할 일이지만 여성에게 사용될 때에는 때때로 몰이해와 비아냥이 묻어난다.“저 자아실현하자고,아이는 내 팽개쳐 두고…”.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은 ‘독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기저귀만 떼면…’‘어린이 집만 가면…’육아로부터 한 숨 돌릴 것이라고 믿으면서 꿋꿋이 어려움을 이겨냈던 여성들은 오히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직장을 떠나기도 한다.“직장가진 엄마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직장을 떠나는 여성들,집으로 돌아가는 여성들.직장을 떠나도 일에 대한 열정만은 숨길 수가 없다.그래서 비정규직이거나,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일’이 뭐길래.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다가 결국 15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는 강은영(39·서울 강남구 역삼동)씨는 ‘이젠,아줌마로서의 생활도 괜찮다.’고 말했다.그러나 지난 1년간,“선·후배들은 어려워도 견디고,이겨나가는 직장을 나만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해 패배감을 느꼈다.아이들을 핑계삼아도 나는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생각에 몸은 편해졌어도 마음이 한동안 편치 않았다.”고 한다. 이젠 그 스트레스에 짓눌리던 직장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얼마전부터 그는 일을 찾고 있다.“꼭 돈을 벌어야 할 절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일’은 하고 싶다.정규직으로 하루종일 직장에 묶여 있는 것은 싫지만 평생 이렇게 ‘빈둥빈둥’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출신의 추은희(32·서울 송파구 풍납동)씨는 아직도 병원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던 5살난 아이가 며칠간의 밤샘 간호 끝에 정신이 돌아오던 순간을 생각하면….”임신중에도 3교대 밤근무를 했고,한달에 9번이나 밤샘근무를 해야 하는 간호사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성취감을 주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추씨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직장을 떠났다.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행복하지만 41개월된 아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언제든 일터로 돌아갈 생각이다.더욱이 신경외과 의사인 남편과는 ‘병원용어’로 대화를 많이 하는데 “이렇게 있다가는 5년후쯤엔 남편과 대화도 나눌 수 없을만큼 ‘병원용어’를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나,고민된다.” ●일은 좋지만 묶이는 것은 싫다 직장여성은 직장생활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편안하게 사는 또다른 삶’을 꿈꾼다.절대빈곤층이 아닌 여성들의 경우 그 꿈은 더욱 많은 갈등으로 연결된다.오죽하면 한 직장여성은 “차라리,차라리 내가 반드시 돈을 벌어야만 할 상황이라면 잡념없이 일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을까. 구하기 어렵다는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성들.물론 그들도 쉽게 직장을 떠난 것은 아니다.남성들이 일의 가치를 삶의 첫번째 자리에 올려놓고 승부하듯 여성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기때문이다.더욱이 30∼40대 직장여성에게 직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일하는 것은 당연하고,대학교육으로 키운 능력을 사장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의미까지 이미 학습됐다.더욱이 이 ‘험난한 정글’에서 살아남은 터,지난 날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투사처럼’살아온 이들도 결정적으로 약해지는 때가 있다.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순간,일과 자아실현,사회적 책무는 모두 사라지고 만다.어머니로서의 임무를 소홀했다는 자책,그것은 일순간 모든 것의 의미를 퇴색시키게 마련이다. 대우공채 2기로 입사, 수출파트에서 일했던 김은희(39·서울 동작구 사당5동)씨는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유산위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직장을 떠났다.경력 8년 만에 직장생활을 접었다.“유난히 일을 좋아했고,강박적으로 일에 매진했다.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결혼했고,임신·유산의 위험 등 걷잡을 수 없도록 내몰리면서 사표를 냈다.인정받았던 직장인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고,갈 곳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버려진듯 한동안 우울했다.” 현재 9살·7살난 두 아이의 어머니로 집안일에도 전문가가 됐다는 그는 3년간 전업주부 생활을 했지만,그후 6년은 아르바이트와 재택근무 등 꾸준히 일을 해왔다.현재는 사당2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아이들의 ‘발표력 교실’을 기획,운영해 오고 있다. “일은 얼마든지 있지만 저녁 때 아이들만 놔두고 나가는 것이 싫어서 일을 늘리지 않는다.내 모든 스케줄은 오후 4시30분이면 끝난다.”김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친정어머니로 인해 남의 손에서 자라 자신의 아이에게만은 ‘엄마의 부재’를 경험하게 하고싶지 않았다.그러나 그도 ‘일’의 중요성만은 잊지 않았다.“수입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한 일할 것이다.아마 이렇게 일하지 않았더라면 즐겁게 집안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입주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를 키웠다는 박경아(39·서울 송파구 가락동)씨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던 4년전,전업주부가 됐다.“바빴기때문에 아이의 알림장도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다.수행평가제 도입 등 달라진 교육현실은 취업모의 아이들에겐 상대적으로 불리했다.”직장을 그만두면서 둘째를 낳았다는 박 씨는 “큰애의 학습습관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고,큰애 때는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부모로서의 행복감에도 흠뻑 젖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씨의 행복에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풀 타임으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부동산에서 쏠쏠한 재미를 봤다 한다.“새로운 경제상황에서 돈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다.바쁘지않으니 신문을 샅샅이 훑어보고 세상돌아가는 것을 읽고 변화에 부응하는 경제 마인드를 갖게 되면서 솔직히 직장생활하는 것보다 수입이 낫다.” 남편의 반대에 부딪혀 전업주부가 돼야만 했다는 유준희(35·경기 구리시 토평동)씨는 아이에게 영어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새로운 관심분야를 키워 영어교육전문가가 됐다.오후에 한 두시간 영어를 가르치고,주말에는 유명영어학원의 교재를 집필했다.유씨는 “아이들에게 이유식도 열심히 해먹였고,놀이터에서 노는 게 아직도 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또 집안도 반들반들 윤기 내며 살아왔다.그러나 평생 자상한 엄마가 되느냐,성공한 여성이 되느냐는 문제는 아직도 내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9시부터 시작되는 정규직은 싫다는 그는 ‘가정을포기하고’ 직장을 갖고 싶지는 않지만 일에는 더욱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7살·3살난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적극적으로 일하려고 지금도 남편을 설득하고 있어요.” ●비정규직,아이 돌보며 일하기엔 좋다? 여성들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떠나는 전형적인 ‘M자 곡선’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흔한 일이다.후진국형으로 불리는 여성들의 고용은 사회·국가적인 지원으로 달라져야 할 ‘과제’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살림에 파묻혔다가 일하고 싶어 둘러보니 ‘허드렛일’밖에 할 게 없더라고 여성들은 푸념한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40대 전업주부들에겐 또다른 회의를 가져다 준다. 이 직접 키우면서 일하느라 정규직을 갖지 못했다는 서미경(39)씨는 “안정된 일에 진입하지 못한 채 나는 늘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면서 “아이 내 손으로 키우면서 행복했지만,내 일을 생각하면 씁쓸하다.비애감마저 느껴진다.”고 말했다.몰입해서 경력을 쌓지않아 일을 늘 해왔음에도 ‘언제나 제 자리’라는 그는 영어와 일어 번역을 할정도이고,남편직장관계로 3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호텔전문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직장을 가질 수는 없었다.“여성들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처음부터 가정에 안주한다면 언제나 주변부로 밀리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 박의경 연구교수는 “우리 사회처럼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곳도 없다.그러나 여기에 또한 남성중심적 사회의 비수가 숨어 있다.모성에 대한 강조에는 여성을 사적 영역에 제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지적한다.어머니를 말할 때 따라붙는 ‘숭고한 희생’이란,‘어머니는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자,‘어머니가 자기 것을 챙기면 어머니가 아니기에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라 지적했다. ●직장여성,독한 여자라고? 교보증권 홍보팀장 추은영(36)씨는 쌍둥이 아들들을 대전의 친정 어머니에게 맡겨 키우고 있다.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일도 가슴아프고,친정 어머니를 힘들 게 하는 것도 죄송하지만 정작 가장 괴로운 것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아이를 떼놓고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말이다.“그런 말 들을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독하다’고 말하기도 한다.악의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정말 내가 독한가 잘못하는 것일까’하는 회의에 빠져든다.추 팀장은 “왜 똑같이 하는 직장생활도 남성이 하면 가족부양,여성이 하면 자아실현이 되느냐.”고 물었다. 법과 제도적으로는 남녀평등이 이뤄졌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가부장적인 직장문화,육아와 가사책임은 여성의 몫이란 인식은 일하는 여성들을 지치게 한다.‘의무’만 있을 뿐,‘권리’는 없는 존재인 자신에 대해 측은함이 느껴지고 우울해진다는 여성도 있다. 한 여성공무원은 “내 몸도 돌보지 못하고,내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살아 간다.그러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만성피로에 지친 몸은 골병이 들었다.”고 말했다.더욱이 경제적인 측면은 쏙 빠지고 비하되는 여성의 직장생활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맞벌이 안하면 집 한채 마련하기 어려운 세상 아니냐.” 여성들은 ‘일’을원한다.때로 육아를 위해 ‘일’을 떠나도,어떤 형태로든 일로 돌아온다.더이상 모성애냐,자아실현이냐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허남주 기자 hhj@
  • 동호회 엿보기 / 國弓

    ●국궁 마니아 전국 2만여명 “관중(貫中·과녁을 정확하게 맞힘)이오.” 지난 10일 오전 7시쯤 서울 성북구 정릉 사적지내 백운정(白雲亭) 국궁장.우리 전통의 활(국궁)쏘기 동호인 모임인 백운정의 한 사원(射員)이 힘차게 시위를 당겨 쏜 화살이 145m 앞의 과녁에 정확하게 꽂히자,같이 활을 쏘던 7명의 사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스트레스를 잊어버리고 상쾌한 아침을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활을 쏘아 관중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죠.” 70살을 넘긴 나이에 국궁에 입문했다는 백운정 사두(射頭·회장격)인 윤기야(80·(주)한독자동기 감사)씨는 “아침 일찍 산에 올라 활을 쏘다 보면 자연스레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도 상쾌해진다.”며 “마음이 상쾌하고 건강도 챙기니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활짝 웃는다. 어머니의 권유로 3년째 활쏘기를 하고 있는 서용원(27·서울대 물리학과 재학)씨는 “운동효과가 뛰어나다는 점 외에도,실제로는 생각보다 잘 못맞히니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돼 또다시 도전할 목표가 생긴다는 것이 매력”이라며 “국궁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성취감까지 맛보는 부수효과도 있다.”고 말한다. ●20대부터 80대까지 즐겨 현재 국궁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2만여명.대부분 집과 가까운 국궁장에서 운영되는 동호회를 통해 활쏘기를 즐기고 있다.대표적 국궁 동호회 가운데 하나인 서울 성북구 정릉 백운정의 회원은 30여명.연령은 20대부터 80대까지.직업은 대학생·대학교수·병원장·회사원·부동산업자·자영업자 등으로 다양하다. “활쏘기는 전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시위를 당길 때 허벅지에 힘을 주면 항문이 꽉 조여집니다.저절로 단전호흡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얘기죠.하지만 손으로만 활을 쏘면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지 않고,하체가 고정되지 않으면 화살은 힘이 빠져 과녁까지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백병원 정형외과 의사 출신의 서광윤(82·국립재활원 자문위원)씨는 “국궁을 처음 시작하면 목·어깨 등에 뻐근한 느낌이 오는데,이는 바로 국궁이 운동효과가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대표적 사례”라며 “활을 잡는 날부터 소화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장수남(74·여)씨도 “지금까지 아픈 데가 없고 잠을 잘 자며,잘 먹고 잘 지내는 것은 무엇보다 매일 아침 국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이 덕분에 활터에는 80살 넘은 노인들이 수두룩하다.”고 거든다. ●단전호흡·전신운동 효과 지난 80년대 후반에 국궁에 빠져든 이장재(69·회사원)씨는 “활을 잘 쏘려면 잡념을 없애야 하므로,정신 집중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며 “직선으로 날아가는 양궁과는 달리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을 맞힌다는 것이 국궁의 매력”이라고 전한다. 30년째 국궁을 즐기는 김영식(59·부동산 대표)씨는 “활을 쏘다 보면 관중을 하는 것보다 맞히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으므로,활을 쏜다는 것은 하나의 훈련과정”이라며 “국궁은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관중도 많이 할 수 있는 만큼 국궁을 하면서 자연스레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마음가짐도 배울 수 있어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국궁은 관중을 하기보다 예절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활을 쏘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궁도라고 하지 않죠.물론 지금은 양궁과 구별하기 위해 국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국궁의 원래 명칭은 궁도입니다.이는 바로 예를 지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17살 때부터 30년 넘게 활을 잡고 있는 박창남(49·건축 설비업체 대표)씨의 말이다. 글 김규환기자 khkim@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국궁이란 ●화살로 145m 앞 과녁맞히기 국궁은 활로 화살을 쏘아 145m 앞에 있는 과녁을 맞히는 경기이다.정식 명칭은 ‘궁도(弓道)’.서양의 양궁(洋弓)과 구분하기 위해 국궁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굳어졌다.공기가 좋은 산속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국궁장은 입회비와 3만∼5만원의 월회비를 받고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준다.초보자는 3개월 정도 활 시위를 당기는 방법과 자세,호흡 등 국궁의 기본자세를 배운다.1개월이 지나면 사대에서 활을 쏠 수 있다.강습기간중 활과 화살 등 장비를 무료로 빌려준다.활의 가격은 25만∼30만원,화살은 개당 7000원.장비를 모두 갖추려면 40만∼50만원이 든다. 국궁은 양궁과 비슷하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우선 활에 화살을 거는 위치가 다르다.국궁은 오른쪽에,양궁은 활의 왼쪽에 건다.점수 계산법 역시 다르다.국궁은 과녁의 어디를 맞히더라도 점수를 얻는데 비해,양궁은 표적판 색깔에 따라 점수가 다르다. ●양궁보다 멀리 날지만 정확도는 떨어져 사거리면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국궁은 대나무와 물소뿔,쇠심줄 등을 재질로 사용해 탄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양궁보다 훨씬 멀리 날아간다.국궁의 최대 사거리는 400∼500m인데 비해 양궁은 그에 훨씬 못미친다.국궁은 과녁까지의 거리가 145m이지만,양궁은 30∼90m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정확도는 양궁에 뒤진다.국궁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데 비해 양궁은 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한 번 활을 잡으면 한 순(巡)에 5대씩 열순을 쏘는 것이 기본이다.국궁장은 서울에 10개 등 전국적으로 320여개가 있다. 김규환기자
  • 창호 틈새로 녹차향 솔솔/ 전주 한옥마을 전통생활체험

    7:00 포근한 솜이불 걷고 아침맞이 갑자기 환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살짝 벌어진 문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다.이 얼마만인가.아침 일찍 따끈한 햇살 기운에 잠을 깨본 것이. 모처럼 전통 한옥에서의 아침 기상은 상쾌하고 여유롭다.보송보송한 솜이불을 걷고 창호지를 바른 여닫이 창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니 봄을 가득 담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이곳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한옥마을에 자리잡은 한옥생활체험관.700여채의 한옥이 모여 있는 마을의 특성을 살려 관광객들이 전통 생활양식을 경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공간이다. 7:30 대청마루위 가부좌 명상 30분 체험관에서의 하루는 조반(朝飯)을 먹기 앞서 대청에서 명상으로 시작된다. 원래 명상의 기본자세는 양쪽 발을 각각 반대편 허벅지 위로 올리는 결가부좌다.그러나 일반인들이 따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곳에선 한 쪽 발만 올리는 반가부좌로 대체했다. 반가부좌 상태에서 허리를 곧게 편 다음 눈을 살짝 내리깔면 일단 기본자세 완성.여기에 양 손바닥을 살며시 포개 배꼽 밑단전에 대고 호흡을 시작한다.숨은 입을 다문 채 코로,들숨과 날숨 모두 70% 정도로만 쉰다. “눈을 감지 마세요.오히려 졸리고 잡념만 생깁니다.” 강사인 전주전통술박물관 관장 김창덕(38)씨의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다.그는 집중을 돕기 위해 놋그릇을 나무막대기로 천천히 치면서 숫자를 세라고 한다.밥주발에서 나는 소리가 참으로 청아하기도 하다. 30분간의 명상은 ‘퉁첸’이라는 티베트 목관악기의 맑은 연주 속에 마무리된다. 8:30 5첩 조식반상 “꿀맛이네” 명상후 조반은 5첩 반상.전통적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아침밥상이다.고사리,호박나물 등 숙채와 생채,생선 구이와 장아찌,마른 반찬 등 5가지 반찬에 밥과 국,장류 등을 놓는다. 명상 때문인지,아니면 아침 메뉴가 단촐하면서도 깔끔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밥숫가락이 가볍다.특히 노르스름하게 구워져 살이 뚝뚝 떼어지는 굴비,약간 싱거운 듯하면서도 씹을수록 단맛을 내는 애호박과 숙주나물이 입에 맞는다. 10:00 덖은 첫물차 혀끝이 훈훈 식사 후엔 차 마시기 순서다.차는 이른봄 손으로 직접 잎을 따낸 첫물차,즉 작설(雀舌)차가 제격.작설차는 이름 그대로 참새 혓바닥처럼 생겼다.작설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쪄서 말리는 일본식 녹차와 달리 가마솥에 불을 때면서 찻잎을 문질러서,즉 덖어서 만든다.차를 제대로 덖으려면 불 때는 작업만 3년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차 만드는 일은 어렵고 민감하다. 반면 마시는 법은 단순하다.물을 끓여 알맞게 식혀 찻잎과 함께 찻주전자에 부은 다음 찻잔에 따라 마시면 되기 때문.단 찻주전자에서 처음 따른 것보다는 나중에 따른 것이 제대로 우러나 맛이 좋다.그래서 여러 사람이 마실 때는 한번에 찻잔을 가득 채우지 않고 돌아가며 수차례에 나누어 차를 따라 마셔야 ‘공평’하게 차맛을 즐길 수 있다. ‘다도’(茶道)라고 복잡한 격식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대부분 일본식으로 차를 마시는 법이라는 것이 전통차 애호가들의 지적이다. 14:00 전통명주 모은 술박물관 구경 한옥생활체험관 앞엔 전주전통술박물관이 있다.이곳에선 이강주나 송화백일주 등 전주의 명주를 비롯한 우리의 전통주들과,술을 만드는 도구,담는 그릇과 잔 등 술에 관에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시음도 가능하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계영배’(戒盈杯)란 술잔.술을 3분의2 이상 따르면 술이 밑으로 모두 새어나가도록 독특하게 만들었다.가득차 넘치게 되면 건강도 해치고 남에게 실수도 하므로 경계하도록 고안한 잔이다.과도한 음주를 경계하고 모자람의 미덕을 강조한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완산구 교동 전통문화센터에서는 전통 다례와 풍물,혼례,음식 등을 체험하는 코너를 진행한다.그 가운데 전주비빔밥 만들기,민요와 우리 가락을 배우는 풍물체험,공연 관람이 인기상품.특히 센터 전속 풍물단과 전북도립국악원이 펼치는 사물놀이와 창작 타악 연주,판소리,살풀이춤 등은 전주가 자랑하는 상설 ‘전통예술여행’ 상품(관람료 5000원)이다. 글·사진 전주 임창용기자 sdargon@ 그래픽 강미란기자 mrkang@ ■식후경 전주비빔밥(사진)과 콩나물국밥은 전주 음식의 대명사.비빔밥은 덕진공원 옆 ‘고궁’(063-251-3211)의 음식이 유명하다.돌솥비빔밥도 팔지만 전주비빔밥의 진수는 놋쇠그릇에 담는 비빔밥에서 맛볼 수 있다. 뜨거운 밥을 담아 무채,시금치,버섯,오이 등의 나물과 배,밤,잣,쇠고기 육회무침,계란 등을 넣고 비빈다.비빌 때 숫가락은 절대 금물.젓가락을 사용해야 밥알이 뭉개지지 않는다.비빔밥용 밥은 사골을 우려낸 뒤 기름을 뺀 국물로 짓는다.9000원. 콩나물국밥은 동문사거리 인근의 ‘왱이콩나물국밥집’(063-287-6979)이 맛있다.멸치 맛국물과 물을 반씩 섞어 계약재배한 무공해 콩나물,묵은 김치,약간의 해물 등을 넣고 끓여낸다. 입맛을 돋우기 위해 날계란을 두개 깨서 국그릇 옆 작은 그릇에 따로 담아준다.여기에 콩나물 국물 몇 숫갈을 떠 넣고 구운 김을 부수어 뿌린 뒤 숫가락으로 저은 다음 마시는데,약간 고소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난다.3500원. 저녁 때는 한옥마을 인근의 막걸리집 ‘한울’(063-287-2787)에 한번 가보자.허름하면서도 푸짐한 인심이 예전의 시골 선술집 그대로다.막걸리(한통 3000원)를 시키면 김치와 각종 나물,찌개 등 안주를 공짜로 무한정 서비스한다. ■가이드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에서 빠져 26번 도로를 타야 한다.남동쪽으로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시청을 지나면 풍남동 리베라호텔이 나오고,그 뒤편에 한옥생활체험관 및 전주전통술박물관이 있다.고속버스는 서울에서 전주까지 10분 간격으로,기차는 1일 18회 운행된다. ●숙박 및 체험 프로그램 전통한옥생활체험관은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 있다.이중 안채 및 사랑채의 2인용 방은 아침 조식(5첩반상) 포함 5만원,특실인 선비방·규수방은 10만원이다.화장실이 따로 달린 3인용 사랑채 별실은 8만원이다.주말엔 요금이 10% 가산된다.단체손님에겐 사랑채나 안채 전체를 대관해준다.문의 한옥생활체험관(063-287-6300),전주전통문화센터(063-280-7000),전주전통술박물관(063-287-6305). ●인근 가볼 만한 곳 팬아시아 페이퍼코리아(전 한솔제지)가 운영하고 있는 덕진구 팔복동 팬아시아종이박물관에 들러보자.파피루스,점토판 등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다양한 기록재료 샘플과 기록물,종이 발명 이후의 기록재료 발전 과정을 연대순으로 전시해 놓았다.전통 한지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관람 및 한지 만들기 체험 모두 무료.(063)810-2103.한옥마을에서 남원 방향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유황온천 ‘죽림쿠어하우스’도 가볼 만하다.비누칠을 하지 않아도 온몸을 미끄럽게 하는 알칼리성 유황온천수를 자랑한다.최근 개보수를 통해 온천탕과 사우나 시설,찜질방 등을 새롭게 꾸몄다.(063)232-8832.
  • 이사람/ 사재 털어 통영에 미술관 짓는 전혁림 화백

    “(미술관을)짓는 것이 안짓는 것보다는 나아야 될낀데….” 전혁림(88)화백은 경남 통영시 봉평동 자택의 방바닥에 화지를 펴고 앉아 어렵사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얼마 전 사고로 왼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깁스를 한 데다,후유증도 심한 듯 부스스한 얼굴에는 때때로 고통의 흔적이 스쳐갔다. 두 평 남짓이나 될까.한쪽에 침대가 있는 자투리 작은 방의 공간은 옹색하기만 했다.그래도 “누워 계시기가 쉬울 것”이라는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은 터라,그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3층 건물 2채… 새달 문 열 예정 전 화백은 지난해 7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덕수궁 미술관에서 연 전시회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건강했다.그는 당시 “나이 들어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고 보람있는 일인지….”라며 감회에 젖었는데,그 말의 뜻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전 화백은 기자가 “미술관 짓는 것을 보러왔다가 인사나 드리려고 들렀다.”고 하자 “먼 길에 우째왔느냐.”며 붓을 잡은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반가워했다. 전 화백은 자택 바로 옆에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짓고 있다.‘전혁림미술관’.화업을 잇고 있는 아들 영근(47)씨가 진두지휘하고 있는 건립작업은 마무리 단계다.이달 안에 건물을 완공해 다음달 중에 문을 연다는 계획이다. 전 화백은 “존재할 가치가 있고,내용도 충실해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동의를 구하고는 “너절한 미술관이 되어 사람들이 보러오지도 않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피력했다.한편으로는 “미술관을 짓는다면 좀 독특해야 한다.”면서 “건물과 양식이 모두 특이해 ‘재미가 있는 좋은 예술’이 될 것 같다.”고 기대를 내비쳤다. ●작품담은 타일 1만 5000장으로 장식 미술관은 중심가에서 충무교를 건넌 뒤 용화사가 있는 미륵산으로 오르는 길 골목에 자리잡았다.3층짜리 건물 2채로 이루어진 미술관은 연면적이 180여평.본관에는 전 화백의 유화와 판화,도자기,오브제,색채조각 등 300여점의 작품을 상설전시하고,부속건물에는 작업실을 만든다.가족들은 작업실에 전 화백의 체취를남겨 영구보존한다는 계획이다. 미술관은 통영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본관 3층을 시낭송회나 실내악연주회가 가능한 문화사랑방으로 꾸미기로 했다. 아울러 개인 기념관에 머물지 않고 기획전과 초대전을 여는 본격 미술관으로 운영한다는 구상이다.현재 통영에는 지역 미술가들이 작품을 사고파는 화랑은 물론 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마저 전무한 실정이다. 전 화백이 ‘특이한 미술관’이라고 한 이유 중 하나는 미술관 외벽을 자신의 작품을 담은 타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호수’와 ‘태양’ 등 전 화백과 아들 영근씨의 작품 등 11가지 종류의 타일 1만 5000천장으로 감싼다.3층 외벽을 장식할 초대형 타일벽화 ‘창’은 미술관의 상징이 될 것 같다.가로 10m,세로 3m 크기로 전 화백의 작품을 구성했다. 미술관 운영은 영근씨에게 맡겼다.영근씨는 “한 작가의 예술을 집약해놓은 것만으로는 미술관이 왜 있어야 하는지,시민들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면서 “미술을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는‘전혁림’이라는 목표를 세워주는 한편 가능성있는 작가를 발굴하고,문화예술행사를 주도하는 공간으로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그것이 전 화백의 뜻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잊으려 작업” 일각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와 맞물려 전혁림 미술관이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그러나 영근씨는 “음악제도 그렇고,고 유치환 시인의 청마 문학관도 그렇고 관이 주도하는 행사에서 지역 작가들은 오히려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행사가 크고 좋다고 해서 정신적 부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에둘러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최근 전 화백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고 한다.“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유일한 잡념이라고,그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작업을 한다고….”오늘 붓을 다시 잡은 것도 이 때문일까.전 화백은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미술관 문을 여는 날,꼭 다시 보자.”고 몇번이고 당부했다. 글·사진 통영 서동철기자 dcsuh@ ◆전혁림은 누구 전혁림은 191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화단의 원로다.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혁림 그림의 모티프는 ‘고향’.오랜 세월 통영에 머물며 수려한 자연풍광을 ‘초자연주의적인’ 수법으로 그려왔다.전혁림의 그림을 규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색채다.남도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사물의 색을 느껴온 만큼 그의 색채감각은 더없이 예민하다.‘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의 그림은 푸른 색과 그밖의 다른 원색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전혁림의 예술세계는 평면회화에 머물지 않는다.도자,목조,입체 등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실험정신을 보여줘 ‘열린 의식의 예술가’란 평을 듣는다.1948년 시인 유치환·김춘수·김상옥,음악가 윤이상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해 활동해온 통영문화의 파수꾼이다. 김종면기자 jmkim@
  • 폭풍의 한가운데/‘준비된 영웅’ 처칠의 젊은날

    나는 여러분께 피와 수고,눈물,그리고 땀밖에 달리 드릴 것이 없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영국을 구해낼 사명을 안고 총리직에 오른 윈스턴 처칠(1874∼1965)이 의회에서 한 이 연설은 역사에 길이 남는 명연설이 됐다.프랑스가 붕괴에 직면하자 그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V’사인으로 영국의 결전을 독려했으며,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협력을 강화했고,철저한 반공주의자임에도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자유진영의 승리를 위해 노력을 다했다.처칠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연합국의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으로 기억된다.그러나 정치가·군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노벨문학상수상자·화가로서도 처칠은 이름을 남겼다. ‘폭풍의 한가운데’(윈스턴 S 처칠 지음,조원영 옮김,아침이슬 펴냄)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정신으로 한 시대를 활보한 ‘거인’의 풍모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수상록이다.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 되기 전에 쓴 23편의 글들을 모은 이 책은 1932년 영국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명문 말버러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 옥스포드셔 블렌엄 궁에서 태어난 처칠은 아일랜드 총독이던 할아버지를 따라 더블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그 뒤 잉글랜드의 해로학교를 거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쿠바·인도 등지에서 복무했으며 종군기자로도 활약했다.이처럼 유서깊은 명문가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의 결점을 하나씩 고쳐나간 젊은 시절의 노력이 없었다면 처칠은 훗날 위대한 영국인으로 추앙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처칠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역사·철학서를 탐독하며 격조 높은 연설 어법을 익혔다.말할 때 혀가 꼬부라지는 경향이 있어 말 수가 적었지만 그 결점을 고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고,즉석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러 연설 전에 원고를 미리 써서 암기했다.그의 훌륭한 연설들은 모두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처칠은 지도력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기지를 발휘하는 재치와 유머로도 유명하다.처칠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위가 2차대전 때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누구냐고물으니까 “그야 당연히 무솔리니지.그자는 사위에게 총을 쏠 정도로 배짱이 있었던 사람이니까.”라고 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책의 첫 번째 글인 ‘너무나도 소중한 삶의 순간들’은 굴곡 많은 자신의 삶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서장의 의미를 갖는다.처칠은 지나간 순간들을 회상하며 ‘내가 다시 산다면 선택은 달랐을 것인가.’란 질문을 거듭 던진다.남아프리카 전쟁 당시 우연히 루이스 보타(훗날 남아프리카 초대 총리가 돼 영국인과 보어인의 화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와 적으로 맞닥뜨렸던 일,해군장관으로 일할 때 소신을 갖고 추진했지만 실패로 끝난 갈리폴리 전투,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건 등을 예로 들며 다시 그런 상황이 닥쳐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밝힌다. ‘잊을 수 없는 만남’이란 글에선 일생을 충실한 토리당원으로 살았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을 비롯해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 정치인 버크 코크란,구식 재무관료의 전형인 프랜시스 모왓 경 등 여러 정치인과 행정관료들과의 만남을 얘기한다.거창한 결의나 의지,훌륭한 사람들의 가르침보다는 우연이나 스쳐지나간 사소한 사건들이 인간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삶의 불가사의’를 언급해 눈길을 끈다. 그림 그리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처칠은 이 책에서 정신을 맑게 해줄 취미 하나쯤은 가지라고 권고한다.모든 욕망과 잡념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붓 한 자루 들고 선 처칠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생활인의 기쁨을 확인할 수 있다.“나는 색깔에 대해 편견이 심한 사람이다.밝고 현란한 색을 보면 마음이 설레지만 어두운 갈색은 정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양하고 싶은 색이다.나는 천국에 가면 첫 번째 백만 년의 대부분은 그림만 그리면서 보낼 작정이다.” 취미생활에 대해 처칠은 이렇게 말한다.“마흔이 넘어서까지 여가시간을 골프나 브리지게임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빈둥거린다는 것은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셰익스피어·엘리자베스 1세·뉴턴 등 쟁쟁한 역사 인물들을 제치고 지난해 BBC방송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자리에 오른 처칠.그의 젊은날의 기록은 자전적 회고와 철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한 편의 인생교과서다.처칠은 1953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다. 1만 3900원. 김종면기자 jmkim@
  • CEO/ CEO들 스트레스 확~ 푼다

    ‘피를 말리는 결단의 순간,치열한 생존경쟁과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과다한 업무에 따른 수면부족,회사업무로 인한 가족내 소외…’ 최고경영자(CEO)들은 이처럼 매순간 스트레스를 받으며 격무에 시달린다.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를 의식하며 살기에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바라보는 눈들이 너무 많다. 요즘처럼 경제불안 심리가 팽배한 시기에 있어 CEO들의 처지는 ‘바늘 방석에 앉아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하며 스트레스를 방치하면 견뎌낼 수 없다.이 때문에 CEO들은 그들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갖고 고단한 육체와 정신에 윤활유를 치곤 한다. ◆남대문시장에서 활력소를 찾는다 삼성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 네트워크 한용외(韓龍外)사장은 마음과 일상이 답답할 때 어김없이 서울 남대문시장을 찾는다.재래시장 상인 특유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다잡는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LG텔레콤 남용(南鏞)사장은 쉬는 시간에 틈을 내 무협지를 읽는다.또 바둑TV를 보며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한다. 금호건설 신훈(申勳)사장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한돌이 채 안된 ‘외손녀 돌보기’다.해맑은 손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게 그의 얘기다. 롯데 신격호(辛格浩)회장은 정원 가꾸기에 푹 빠져 있다.일본 도쿄의 자택정원은 물론 시골에서 나뭇가지를 치며 생각을 정리한다. ◆음악에 몸을 맡긴다 SK텔레콤 표문수(表文洙)사장은 호방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보스형’이라는 주변 평가와 달리 클래식이나 재즈음악을 들으며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교 때부터 시작한 취미다.결정을 해야하는 중요 사안이 있는 날 밤이면 클래식 음악에 포도주를 곁들이며 결정을 하는 스타일이다. 현대백화점 이병규(李丙圭)사장은 노래를 부른다.빠른 댄스곡도 소화할 만큼 한 곡조 뽑는 데 자신이 있다. ◆달리고 또 달린다 현대중공업 민계식(閔季植)사장은 아예 마라톤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42.195㎞ 완주 경력이 50여차례나 된다.지금도 틈 나는대로 공장 주변을 달리고 또 달린다.민사장은 대학시절 서울 수복기념 마라톤 대회에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선수와 함께 뛰어 7위를 기록한 경력을 갖고 있다. KTF 이경준(李敬俊)사장은 매일 아침 7시쯤 회사에 출근해 러닝머신을 한뒤 한결 가벼워진 머리와 가슴으로 업무를 시작한다.그는 “달리는 동안에는 아무런 잡념이 없어 좋다.”고 말한다. 한화그룹 김승연(金升淵)회장도 달리기로 스트레스를 푼다.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몇시간씩 달리면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열치열,‘일에는 일로’ SK 손길승(孫吉丞)회장은 ‘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힘든 일을 해냈을 때의 짜릿함은 무엇에 견줄 수 없다고 말한다. 효성 조석래(趙錫來)회장은 따로 휴가를 가지않는 전형적인 ‘워커홀릭’.다만 독서를 너무 좋아해 해외출장을 갈 때면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과학·경영 서적은 물론 세계 경제 석학들의 책들을 구입해 틈틈이 읽는다. ◆산처럼 쌓인 스트레스에는 등산이 최고 현대건설 심현영(沈鉉榮)사장은 격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등산으로 푼다.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인들과 함께 서울 근교의 청계산과 우면산을찾는다. 신세계 구학서(具學書)사장도 주말 등산으로 한주의 피로를 씻어낸다.산을 타면서 마시는 공기로 정신을 맑게 하고 땀을 빼면서 몸을 가다듬는다. ◆스포츠 만한 것이 없다 한솔그룹 조동길(趙東吉)회장은 테니스를 즐긴다.테니스 실력이 프로급이어서 사내 테니스 동호회 대회에서 우승을 넘볼 정도다.구본무(具本茂) LG 회장은 주말에 곤지암CC에서 지인들과 골프를 하며 체력강화 및 스트레스 해소를 동시에 해결한다. ‘만능 스포츠맨’인 최태원(崔泰源) SK㈜ 회장은 사내 휘트니스 센터에서 강도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땀 흘리는 것을 즐긴다.수영을 자주하고 지인들과 어울려 테니스도 친다. 동원F&B 박인구(朴仁求)사장은 매주 토요일 사내 축구동호회에 빠짐없이 참석,직원들과 축구를 즐긴다.포지션은 국가대표 최태욱과 같은 오른쪽 윙백.어린 시절부터 축구실력이 출중해 주전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56세인 지금도 전후반 90분을 소화하며 젊은 직원들을 독려한다. ◆영화보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KT 이용경(李容璟)사장은 영화광.차량에 설치된 휴대용 DVD로 영화감상을 한다.예전에는 영화관을 찾았지만 요즘에는 바쁜 일정 탓에 이동중에 영화를 본다.안보는 영화가 거의 없을 정도다.최근 감상한 영화는 ‘오아시스’와‘존Q’.정통 액션물이나 오리지널 멜로물을 두루 좋아한다. 삼성 이건희(李健熙)회장도 집에서 비디오를 보며 머리를 식힌다.중국 무술영화를 빼고는 각종 장르의 영화를 즐긴다. 산업팀 종합 golders@
  • 올해의 작가 전혁림 “민족혼 깃든 예술만이 세계성 획득”

    “처음엔 마라토너,그 다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화가가 됐습니다.후회는 없어요.다시 태어나도 그림쟁이가 됐을 것 같은 숙명을 느낍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오늘의 작가 2002’에 선정돼 20일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9월22일까지 초대전을 열고있는‘한국적 추상화의 시조’전혁림(87)씨의 고백이다. 나이보다 젊은 손가락과 손톱에는 막 그림을 그리다 나온 듯 푸른 물감 때가 묻어있다.하얗게 센 머리 아래 꼬장꼬장한 눈빛이,미수를 앞둔 나이에도 500호 그림을 턱턱 그려내는 강인함을 증명한다. 화가로서의 시작은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한 5년 뒤인 23살때(1938년) 부산미술전에 ‘신화적 해변’을 출품하면서부터.당시 흔하던 야수파와 인상파,극사실주의 경향과 달리 초현실적인 비구상 작품을 내놓았다.1948년에는 통영출신 시인 유치환와 김춘수 김상옥,음악가 윤이상과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해 활동하기도 했다.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늪’으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지만,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외면당했다.민화와 불교화인 탱화,단청,자수로부터 영향을 받은 추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의 진가를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그러나 추상화된 바다,군조,정물들은 “색채가 없는 세상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철학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내 그림은 ‘그림도 아니다.’라고들 했지요.인사동에서는 팔지 못하겠다고 전시를 거부했고.난 그 사람들 욕하지 않아요.찬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 물맛이 다르듯,취향의 차이였다고 봅니다.당시 민족적 색채와 정서가 살아있는 국적있는 예술만이 세계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70년대 후반을 거쳐 80년대 들어서야 화상들은 그의 그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한국적 모더니스트’,‘한국 색채추상의 대가’라는 별칭이 붙던 시기다.그림이 투기의 대상이 되던 시기엔 호당 300만원대로 작품 값이 훌쩍 뛰어올랐다.1996년에는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친구인 김춘수 시인은 그를 ‘영원한 과정의 예술가’로 칭한다.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유일한잡념입니다.그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작업을 합니다.” 덕수궁미술관(02-779-6641)에서 초기작(1953년 이후)을 중심으로 70여점을 전시하고,같은 기간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031-213-8223)에서는 근작 위주의 50여점을 보여준다. 문소영기자 symun@
  • [임영숙 칼럼] 템플스테이에 초대합니다

    새벽 3시에 이토록 평화롭게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니…. 새벽 1∼2시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드문 체험을 했다.도량석을 도는 스님의 부드러운 목탁소리,처마끝에서 울리는 맑은 풍경소리,태풍 라마순이 잦아들면서 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산사에서 맞는 초여름 신새벽은 참으로 평화로웠다.그리고 묵언.아침 예불 시간까지는 말을 할 수 없다.예불이 끝난후 서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할때는 사위가 절대 정적에 휩싸인 듯했다.갑자기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하게 들려왔고 그제서야 “새들보다 먼저 깨어났구나.”하며 스스로에게 감탄한다. 월드컵 기간동안 외국인들을 위한 사찰체험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템플스테이(Temple Stay)에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한국방문기획단과 조계종이 지난 주말 여기자클럽을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로 초대한 것이다.취재는 많이 해도 직접 체험할 기회는 갖기 힘든 기자들은,월드컵 열기 속에 단 하루도 숨 돌릴틈 없었던 취재와 격무의 6월을 보내고 “초여름 산사의 고즈넉함을 느껴보자.”는 기대속에 출발했다.그러나 템플스테이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저녁 9시 취침에 새벽 3시 기상,세찬 빗줄기 때문에 도량청소 울력이나 탑돌이가 생략됐음에도 단 1분도 잡념이 끼어들 수 없는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24시간의 산사체험이 끝났을 때 일행은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월드컵 기간 예상되는 숙박난을 해소하고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관광상품으로 개발된 템플스테이는 지난 5월22일부터 6월30일까지 전국 33개 전통사찰에서 운영됐고 참가 외국인은 모두 900여명이었다.그 가운데는 20개국 주한 외교사절과 그 가족들도 있었고 영국 블레어 총리 공보수석보좌관,프랑스 문인협회 회원들,독일 재즈그룹 살타첼로도 있었다. 그들에게 템플스테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너무나 멋진 체험”이었다.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수행의 한 과정으로 하는 발우 공양,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가의 전통에 따른 울력,고요한 사유로 해탈의 길을 찾는 참선 수행,스스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처럼 살고자 하는다짐의 표현인 연등 만들기,수행과 기도의 한 방법인 탑돌이,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마음으로 경전을 옮겨 적는 사경 등을 해보고 그들은 “진짜 한국을 맛 보았다.”고 말했다.미국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한 교수는 “나는 길을 잃기 위해서 여기 왔다.”면서 삭발을 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이 외국인들의 감탄 대상으로만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월드컵기간동안의 한시적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상설체제로 운영되고 내국인에게도 개방해야 한다.조계종과 정부 당국도 그런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확정된 바는 없다.기존의 사찰수련회와의 접목도 고려해 볼 만하다. 지금까지 언론은 템플스테이 참가 외국인이 예상보다 적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하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숙박난 해소 차원보다는 한국전통문화 체험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다이내믹한 열정의 ‘붉은악마’와 자기 속으로 깊이 침잠해 볼 수 있는 템플스테이의 절묘한 조화속에 한국 문화의 진정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럽 관광길에 찾는 대부분의 문화유적들이 기독교와 관련된 것들이듯이 한국 문화재의 65%이상이 불교 문화재다.무심코 사용하는 우리 말 가운데도 불교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이판사판’‘야단법석’‘무진장’등이 그 일부다.“독서 삼매에 빠진다”할 때의 삼매도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에서 비롯된 것이다.한국인이라면 자신의 종교에 상관없이 한국문화의 뿌리인 불교를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나와 이웃과 자연은 하나라는 연기사상에 입각한 한국의 사찰은 자연과의 철저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따라서 사찰 체험은 단순히 불교사원을 방문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한국의 문화,한국의 자연을 느끼고 배우는 길이다.주5일 근무제가 시작됐지만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훈련과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템플스테이가 유용한 기회가 될 듯싶다. 임영숙 ysi@
  • [고시촌 산책] 기본서 정독이 ‘합격 王道’

    이때쯤이면 사법시험에 새로 입문하거나 재도전을 위한도약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많아진다.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세 몇가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입문자이건 재도전자이건 모든 해법은 기본서에서 찾아야 한다.1년을 단계별로 계획해 기본서를 정독과 속독으로반복·정리해야 하고 문제를 풀거나 최종정리를 할 때도시험직전까지 기본서를 붙잡고 있는 것은 필수다. 그래야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실력을 쌓아 나갈 수 있다.객관식 문제집,모의고사 문제,요약집 등은 기본서내용을응용해 실력을 보완해 주는 역할일뿐이다. 기본서 선정은 합격기나 수험가에서 추천하고 본인에게맞는 교재이면 어느 책을 기본서로 삼든지 무리가 없다.대신 중간에 기본서를 무리하게 바꾸는 것은 위험하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도록 하자.독학은 공부방법이나 알고 있는 지식에 있어서 편향되기 쉽다.또 과목별로 균형있게 안배하여 공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3∼5명을 한 팀으로 격려하고 경쟁하면서 슬럼프 없이 공부한다면 시행착오를 줄여서 조기에 합격할 수 있는 큰 역할을하게 될 것이다. 수험가의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는 자세도 중요하다.대학고시반이나 지방고시원은 별론으로 하고,신림동 수험가는 십여년에 걸쳐 수험생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 각종 부작용과 미흡함이 있긴 하지만수험생들에게 안정된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아직은 대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의 순기능을 단기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빨리 떠나야겠다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특히 학원강의는일단 등록했으면 성실하게 예습·복습하면서 수강하고,의문사항이 있으면 망설임없이 즉시 강사나 동료에게 질문,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거나 욕심내지는 말자.과도한 욕심 때문에 너무 단기간에 합격하겠다고 덤빈다든지,방만하게 학습자료를 늘려 놓고 정리도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주위의 소문이나 의견에 지나치게 좌우되지 말고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가짐을 항상 유지하도록 하자. 하루에 자기가 확보 가능한 총시간과 시간당 학습할 수있는 분량을 감안해 짜임새 있는 계획표를 만들고,약간 미흡해도 일정에 따라 공부하도록 하자.미흡한 부분은 다음에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자연스럽게적당한 긴장감과 집중력이 생겨 스트레스나 잡념 없이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일 치러진 사시 1차 시험을 분석해 볼때 앞으로의시험은 해마다 난이도와 문제형태가 조금씩은 달라지겠지만 기본이론과 판례의 내용,논리전개를 묻는 지문이 긴 문제가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다. 신경향 문제 역시 이러한 여러 내용들을 다양한 형태로 물어보는 정도가 될 것이므로 기본서 위주로 착실하게 공부하고 정리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한경훈 한국법학원 기획실장
  • [괴짜 인생 별난 세상] ‘고희 부도옹’ 이희재씨

    “이번 여름에는 평양의 대동강과 중국의 양쯔강을 정복하겠습니다.” 수영으로 국내외의 이름난 강과 해협 횡단에 도전하는 별난 인생이 있다.그것도 장애의 몸에 고희(古稀)의 나이여서 주위의 관심을 더한다. 주인공은 이희재(李熙在·70·서울 성동구 성수1가1동)할아버지.지난 겨우내 올림픽공원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했다.올 여름 ‘대동강과 양쯔강(揚子江)정복’이라는 인생의새 목표가 섰기 때문이다. 훈련량은 젊은 수영선수를 뺨칠 정도다.오전에는 ‘몸 만들기’에 주력하고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무려 3∼4시간씩물살을 가른다.하루 5∼6㎞를 헤엄치는 셈이어서 젊은이들을 무색케 하고 있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허리를 다친 후 평생을 불편함속에서 살아온 5급 척추장애인(곱사등이)임을 감안하면 ‘슈퍼맨’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키 155㎝,몸무게 55㎏의 왜소한 체구를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도전을 ‘무모한 과욕’으로여긴다. 이같은 반응은 그의 수영 실력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그는 한때 자유형 200m와 평형 50·100m의 아마추어기록 보유자였다.또 지난해 여름(8월12일)에는 한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젊은이도 버거운 잠실 선착장∼동작대교간 11.3㎞를 고희를 목전에 둔 이희재 할아버지가 건넌것. 이후 자신감을 얻은 이씨는 대동강과 양쯔강 횡단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올해 만 70세 생일을 대동강 변에서맞고 싶어서다.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현재 스폰서를 찾아 백방으로 뛰고 있다.북한에서의 행사 진행 문제와 3억원 가량소요되는 경비 뒷받침 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씨의 수영을 지도하고 있는 박문화(朴文和·48)씨는 “한 방송국과 도버해협 횡단 방영을 기획했으나 IMF로 취소된 적이 있다.”며 “대동강이나 양쯔강 횡단 계획도 조만간 구체화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수영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행복’ 그 자체다.14년 전 수영을처음 시작했을 때 초심도 그저 수영이 좋아서 였다. “물 속에서 헤엄칠 때면 잡념이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솟아 행복하기만 하다.”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성격 또한 밝아 수영장의 모든 사람들과 나이를 초월해친구가 된다.자연히 젊은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젊은 오빠’로 통하게 됐다. 이렇다 보니 5살 아래인 아내 최용분(崔龍分·65)할머니는 “나보다 젊어 보여 좋겠다.”며 빈정거리지만 속내는남편이 자랑스럽다. 이씨는 “또래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고리타분함을느낀다.”면서 경로당이나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보다는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수영장이 더욱 좋다고 한다. 70세에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며 물살 헤치기에 여념없는이희재 할아버지의 삶이 별스러워 보이기보다는 너무 행복해 보인다. 이동구기자 yidonggu@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