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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이요, 지리에서 뻗어오른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주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무학 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야 궁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선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악과 관악산이 불의 산이고, 목멱산(木覓山)에는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불이 나면 도시가 재앙에 빠진다고 예언했다.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5대를 잇기 전에 왕위찬탈의 비극이 생기고 200년 안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사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태조 당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개국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초토화됐다. 조선의 정궁(正宮)은 불탄 경복궁 대신 도읍 중앙에 입지한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 두 마리가 광화문 앞을 지켰다. 도시가 서쪽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운종가(종로)이다.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현재 지도로 보면 세종로 끝자락 비각에서 코스를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결론적으로 1막의 승자는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주축(主軸)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제2막】 일제… 총독부~시청~조선신궁 일직선 ‘大日本天’ 대못질 일제는 조선의 축선을 파괴하고 개조했다.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정기 말살정책이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5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을 파헤쳤다. 서울의 지명을 경성으로 바꾸더니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서울은 더는 도읍이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지방도시가 됐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세종로에서 육조거리를 지워버리고 황토마루(누루재)도 뭉개버린 그들은 새로운 축선을 고안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태평통)를 만들었다. 큰 길을 내면서 경운궁 담장을 텄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멋대로 바꿨다. 종묘와 창덕궁을 분리하고,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오락시설화했다. 남산에 조선 신궁을 만들면서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버렸다. 국사당은 태조와 무학 대사, 최영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총독부 신축은 축선 말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7만여평의 부지에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서울의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고자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때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중문 22개, 당 45개 등이 헐려 음식점, 별장 건물로 팔려나갔다. 겨우 철거 신세를 면한 광화문은 1927년 불길한 피난길에 올랐다. 경회루 등 전각 몇 채만 덩그러니 남은 당시 경복궁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축선에서 5.6도 각도를 튼 자리에 390칸짜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로 지었다. 일제가 축선을 튼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뿐더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상과제로 삼은 그들의 치밀한 민족정기 말살 시나리오를 간과한 어설픈 학설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신영지’(新營誌)에 “경복궁의 중심선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총독부를 광화문 중심선과 맞추면 중심선과 어긋나 위용을 살리지 못한다. 태평통의 도로 중심선으로 새 청사의 중심을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총독부~경성부청(서울시청)~남산 조선 신궁으로 쭉 뻗은 ‘일본의 새 축선’을 서울의 중심에 새기는 것이었다. 축선상에 있던 신축건물인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에 경성부청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40년 경성시가지 지도를 보면 총독관저(청와대)의 대(大)→총독부의 일(日)→경성부청의 본(本)→조선 신궁의 천(天)이 일직선상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4개의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문자모양으로 건축됐다. 이름하여 ‘대일본천’(大日本天)이라는 일본 축선의 완성이다. 【제3막】 광복 이후… 총독부 헐고 경복궁 복원해 역사 바로잡아 ‘서울의 축선=일본의 하늘’이라는 일제의 오싹한 음모는 청산되지 않았다. 개념 없는 위정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기와 맥을 끊고자 지은 총독부 청사에서 제헌 의회와 정부수립 기념식 그리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1939년 지어진 경복궁 후원 총독관저는 미 군정장관 관저, 경무대, 청와대로 대이어 사용됐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둥지를 튼 탓인지 54년 만인 1993년에야 헐렸다. 총독부는 1995년 헐리기 전까지 미 군정청, 정부 중앙청사로 이름을 바꿔 가며 권부로 군림했다. 1952년 서울도시재건계획이 수립됐지만, 우리의 축선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일제가 왜곡시킨 축을 확장·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뼈아팠다. 한국전쟁통에 훼손돼 석대만 남아 있던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다면서 1969년 아무 생각 없이 옛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일제가 5.6도 틀어놓은 방향,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10.9m, 북쪽으로 14.5m 북쪽으로 물러난 이른바 ‘일본의 축’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총독부를 철거하거나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을 원상회복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일제의 기를 누를 수 있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충무공 동상을 남산 신궁 터를 노려보는 자세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축선 복원은 1990년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5년 뒤 총독부가 철거되면서 닻을 올렸다. 총독부가 일본 축선상에 식재한 은행나무를 양옆으로 도려내고서 중앙분리대 자리에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에 두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2010년 8월이었다. 두 번이나 불타고 두 번이나 엉뚱한 자리에 놓였던 비운의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비틀린 축선의 출발점을 바로잡는 데 8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축선의 종착지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홀랑 불탔다. 축선 복원을 차일피일 미룬 우리의 업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숭례문은 지난 5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912년 일제의 황토마루 제거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축선전쟁 제3막도 끝이 났다. 세종로 축선복원이라는 고단한 여정도 10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식민잔재의 핵을 걷어내는 데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joo@seoul.co.kr ■축선이란 한 국가, 도시의 주축을 이루는 도로 혹은 건물. 우리나라의 축선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산이다.
  • [열린세상] 창작 뮤지컬로 새로운 한류 붐을/유재웅 을지대 홍보디자인학과 교수

    [열린세상] 창작 뮤지컬로 새로운 한류 붐을/유재웅 을지대 홍보디자인학과 교수

    뮤지컬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 세계적인 유명 뮤지컬은 무대에 올릴 때마다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가수들의 공연장에 가 보면 뮤지컬이 한 코너를 장식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지 연극영화나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미래 직업을 물으면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다는 이야기이다. 뮤지컬이 새로운 대중문화 예술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뮤지컬의 현주소는 어떨까. 진솔한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한 달 전 휴일 오후, 서울 천호동에 있는 어느 허름한 건물의 지하 연습실. 20여명의 뮤지컬 배우들이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 하고 있었다. 연출자에게 배우를 어떻게 뽑는지 물었다. “오디션이죠. 공연을 할 때 다시 오디션으로 엄선하고요.” 뮤지컬 배우는 가창력뿐만 아니라 연기와 댄스라는 3박자를 모두 갖춰야 한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수십 대,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열흘 전 홍대 앞. 젊은 뮤지컬 기획자, 연출자들과 국내 뮤지컬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어갔다. “수입 뮤지컬이 국내 뮤지컬계를 압도하고 있다. 많은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제는 창작 뮤지컬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토로가 뒤따랐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1995년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을 때 반응이 썩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첫 공연 당시 출연배우들에게 급여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호평을 받고 난 다음에서야 국내 공연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우리 것을 낮춰보는 문화사대주의나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는 데 우리 국민의식보다 열악한 현실 여건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공연을 위한 투자 유치가 정말 어렵다. 투자자들은 단기간에 이윤을 뽑아내려고 한다. 뮤지컬은 그러나 투자금 회수에 적어도 3년 정도 걸린다. 뮤지컬은 특성상 초기투자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 공연장은 장기 대관이 불가능한 구조다. 대부분 한 달 정도다. 장기 공연을 할 수 있어야 투자비용 회수가 가능한데 단기 공연으로는 원천적으로 적자가 불가피하다. 투자자들은 무대에 올리는 것을 보아가며 투자한다고 하고, 기획연출자들은 투자금을 모아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화융성’을 주요 국정 지표로 제시했다. 문화는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 불가결하지만 국가 산업 경제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분야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은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장르도 영상물에서 가수들의 공연 등으로 확대되었고, 지역도 동남아를 넘어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뮤지컬도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미약한 싹일지 모르지만 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뮤지컬에 매료되어 자신의 열정을 불사르는 젊은 예술인 층이 두꺼워진다면 머지않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우리 뮤지컬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예술인이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좌절하지 않고 창의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정부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국가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정부가 챙겨야 할 어려운 문화 예술 분야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 국민적 관심이 늘어나고 있고, 정부가 조금만 힘을 북돋아 주면 세계화될 수 있는 예술 장르라면 국가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강국이 되려면 양질의 제품을 값싸게 파는 전략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세계수준의 문화강국이라는 것을 세계인들이 느낄 때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상품경쟁력, 국가경쟁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 공개입찰했더니 2억 예산 ‘뚝’

    중구 청소행정과와 재무과 직원들이 창의행정으로 두둑한 성과금을 받았다. 중구는 두 부서를 ‘2012 회계연도 예산성과금 지급대상’으로 선정, 각각 450만원과 250만원을 지급했다. 예산성과금 제도는 적극적인 행정으로 구 예산을 절약했거나 세입을 증대한 사업에 시상하는 것이다. 청소행정과는 재활용선별장 위탁을 수의계약에서 공개경쟁입찰로 전환하고 분리 위탁하던 잔재물 처리도 일괄 위탁으로 변경했다. 그 결과 단가를 낮추고 위탁업체를 2개에서 1개로 줄여 2억여원의 예산을 절감했다. 재무과는 한국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서소문공원 지하주차장 부지 변상금 부과 처분 취소 소송 2심에서 승소해 15억원이 넘는 예산을 돌려받았다. 이 밖에 도시디자인과(관광특구지역 간판개선 국비 확보), 가로환경과(국공유재산 무단 사용에 대한 변상금 신규 부과), 도로시설과(준용도로 공고와 도로구역설정 고시에 따른 세입 증대) 등도 격려금을 받았다. 박기석 기획예산과장은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격언처럼 직원들의 작은 노력이 주민의 혈세를 아끼는 원동력”이라면서 “앞으로도 적극적인 포상과 더불어 직원들의 창의행정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그날 밤이 어떤지는 김대중 자서전에 나와 있다. “…청와대에 밤이 왔다. 나를 그토록 핍박했던 역대 집권자들이 머무르던 곳. 깊이 생각했다. 그들은 과연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내는 방이 너무 넓어서 놀라는 눈치였다. 그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70대의 우리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2월 25일, 정권교체의 새 역사를 쓴 날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청와대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적었다. 멀리 박정희가 있었고, 전두환·노태우가 있었고, 바로 그제 자신의 영원한 맞수 김영삼이 밤새 뒤척였을 그 침실에서, 김대중은 헤쳐온 날들과 헤쳐갈 날들이 뒤엉킨 군무(群舞)에 그만 잠을 잃었다. 한 달 뒤면 ‘김대중을 그토록 핍박했던 집권자’의 딸이, 어린 시절 격동의 18년을 보냈고, 끝내 부모를 모두 빼앗아간 청와대에 들어선다. 아버지가 비운을 맞았던 만 61세의 나이로, 33년 4개월 전까지 아버지가 있었던 침소로 들어선다. 어떠할까. 질곡의 정치사와 개인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품은 그가 2013년 2월 25일 밤 홀로 대면할 상념은 무엇일까. 누구에게 견줘야 어림할 수 있을까. ‘잘살아보세….’ 그 밤 박근혜를 짓누를 상념의 무게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 끝자락에 움켜쥘 단어는 아마도 이 유업(遺業)일 것이다. 제 식대로밖에 모르는 북한과, 결이 거친 대외경제와, 숨이 가쁜 민생과, 이젠 DNA로 유전되는 것만 같은 지역과 이념의 강파른 대치를 풀고, 묶고, 바로 세우겠노라 다짐하며 신발끈을 동여맬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김영삼은 ‘개핵’(개혁)을 외치며 내달렸고, ‘선상님’ 김대중은 만기친람(萬機親覽)이 뭔지를 몸소 내보였다. 노무현은 정체 모를 ‘그들’과 내내 싸웠고, 이명박은 전봇대 숫자까지 챙겼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청와대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가을, 겨울이 됐다. 자식 문제로, 측근 비리로, 실정으로 몇 번씩들 머리를 숙였다. 1년도 못 돼 노무현 비서실의 민정수석 문재인은 이빨이 10개나 빠졌고, 이명박 청와대의 ‘얼리버드’들은 새벽 5시면 집을 나서야 했지만, 청와대의 5년차는 늘 한숨으로 채워졌다. 독주(獨奏)의 끝은 항상 그랬다. ‘선거의 여왕’이 성공한 대통령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성취는 그 자체로 독배(毒杯)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 작아지고 하명을 기다리며 시립(侍立)하게 만드는 박근혜이고 보면 전임 누구보다 많은 독배에 둘러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벌써 그런 징후들이 감지된다. 정부 조직개편안의 밀실 탄생이 그 증좌의 하나다. 잡음을 막겠다며 밀실을 택했고, 공론은 없이 통보만 있었다. ‘나를 따르라’ 식의 박정희형 리더십이 어른댄다. 윤창중 대변인을 낳은 ‘나홀로 인사’와, 완장을 찬 그가 ‘나만 기자다’라고 외치며 인수위와 기자실 사이의 쪽길을 홀로 내달리는 과유불급의 행태도 박근혜의 앞날을 걱정케 한다. 5·16 쿠데타 이후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결과가 과정을 지배하는 역사를 헤쳐왔다. “나처럼 불행한 군인은 다시 없어야 한다”고 박정희는 말했지만, 그가 이룬 고도성장은 목적과 결과가 수단과 과정을 지배하는 가치 왜곡을 초래했다. 갖은 양태의 선거 부정을 저지른 통합진보당의 이정희가 고개 빳빳이 들고 “박근혜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멀리 보면 이런 결과지상주의의 잔재다.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는 5년이 돼야 한다. 그 어떤 목적도 수단을 지배할 수 없다는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독선과 독주의 리더십으로 새드엔딩을 자초한 대한민국 권력의 불행한 역사를 끊는 5년이 돼야 한다. 남은 한 달 인수위 과정이 이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다. 2월 25일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 반세기 이 나라에 환희와 눈물을 안겨준 박정희와 마주선다. 제의(祭儀)의 밤이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홀로 설 시간이다. 부친이 이루지 못한 화해와 포용의 새 날을 여는 아침을 맞기 바란다. jade@seoul.co.kr
  • 어릴적 당신의 친구 ‘그림동화’ 그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릴적 당신의 친구 ‘그림동화’ 그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림형제 동화를 고스란히 모아뒀는데 제목은 ‘그림형제 민담집’(그림 형제 지음, 김경연 옮김, 현암사 펴냄)이다. 그림형제 동화의 원제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Kinder und Haus Mrchen). ‘메르헨’(Mrchen)의 원뜻은 동화가 아니라 ‘짧은 이야기’ 정도다. 아이와 가정에 어울리는 짧은 이야기집이란 뜻이다. 13년간 수집한 뒤 1812년 첫 권을 냈고, 7번에 걸친 수정보완작업 끝에 1857년 최종판을 내놨다. 엄격한 학자풍의 형 야콥에게서 문학가적 기질이 있는 동생 빌헬름으로 작업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판갈이할 때마다 더 문학적으로 가다듬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우리가 어렸을 적 접한 그림형제 동화도 이 최종판이다. 이 책의 유명세는 너무 대단해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백설공주’, ‘빨간모자’, ‘헨젤과 그레텔’, ‘라푼첼’, ‘개구리 왕자’ 같은 얘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좋다. 이 책도 최종판의 번역본이다. 출판사 측은 “완역이 있긴 했는데 어린이용으로 각색되거나 중역된 경우여서 온전한 독일어판 완역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여기에다 최종판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빠진 41개 이야기도 부록으로 실어뒀고, 판본에 따라 어떤 이야기가 빠지고 들어갔는지도 정리해뒀다. 책 앞에 실린 자료사진에는 그림형제의 채록작업 상대였던 이야기꾼 할머니 도로테아 피만의 얼굴도 실려있다. 1812년 첫 선을 보인 그림형제 민담 탄생 200주년을 위한 생일상이다. 역시 잔혹한 서술이 눈에 띈다. ‘백설공주’에서 사냥꾼에게 공주 살해를 의뢰한 왕비가 공주의 죽음을 확인하는 방식은 공주 허파와 간을 끓여서 먹는 것이다. 불쌍한 공주를 놓아준 사냥꾼은 공주를 죽였다고 거짓말한 뒤 왕비에게 그 증거로 멧돼지의 허파와 간을 공주의 것이라며 건네줬다. ‘재투성이 아셴푸텔’(신데렐라)에서 심술궂은 의붓누이 둘은 황금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엄지발가락과 뒤꿈치를 잘라내더니, 나중에는 아셴푸텔을 돕던 하얀 새들의 공격으로 양쪽 눈이 다 뽑힌다. 유명한 얘기만 예로 들어서 그렇지 다른 얘기들에 더한 경우도 많다. 최종판에서 빠진 41편의 이야기를 보면서 채록 의도가 뭘까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다. 독일어, 독일신화 연구자였던 그림형제에게 민담 채록 작업 역시 독일 민족주의를 위한 것이었다. 수백년 이어온 독일 민족 고유의 그 무엇을 담아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채록 작업을 진행하던 중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얘기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그땐 그 얘기를 제외시켰다. 가령 영화 ‘슈렉’ 덕분에 슈퍼스타로 떠오른 ‘장화신은 고양이’도 최종판에 빠진 41편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더빙을 맡겨 조로처럼 스페인 냄새를 짙게 풍겼다면, 민담집에서는 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빠졌다. 지금도 이 이야기는 프랑스 아동문학가 샤를 페로의 작품으로 내려온다. 마지막으로 잔재미 하나. 옛 동화책이라면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판화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는 1857년 최종판 그림을 고스란히 옮겨다 놨을 뿐 아니라, 한국 작가가 만든 비슷한 느낌의 그림 20컷을 추가해뒀다. 그래서 책을 펴들면 어린 시절 기억이 제법 난다. 같이 읽은 뒤 아빠 혹은 엄마가 어릴 적엔 어떻게 읽었는지 얘기 나눠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4만 5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뮤지컬 리뷰] 브루클린

    [뮤지컬 리뷰] 브루클린

    잔재미로 잽을 툭툭툭 날리고, 노래 잘하는 배우들이 기량을 펼친다. 갑자기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 모드’가 튀어 나와 다소 당혹스럽기도 하다. 억지로 눈물 콧물 뽑아내지 않고, 가뿐히 털고 일어나 활기를 되찾아 극을 마무리한다.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브루클린’의 흐름을 짧게 설명하면 이정도쯤 된다. 110분 동안 이어지는 공연에 재미 요소들을 참 촘촘하게도 박아넣어 지루할 틈이 없다. 원작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2004년에 첫선을 보인 동명 뮤지컬로, 작곡가 마크 셴펠드의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실제 이야기는 이렇다. 1982년 마크는 뉴햄프셔에서 재능있는 여가수 배리 맥퍼슨과 음악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채 배리와 연락이 끊겼다. 거듭된 실패와 이혼이 겹친 마크는 브루클린까지 흘러가 거리공연과 노숙을 전전했다. 매사추세츠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던 배리가 파티에 참석하고자 찾은 브루클린에서 둘은 재회하고, 다시 음악적 파트너가 됐다. 이 이야기를 각색했다.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온 프랑스 파리 출신의 소녀 ‘브루클린’이 우연히 인기가수가 되고 도전과 시샘을 받으면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아버지를 찾고 모두 행복해졌다는 ‘동화’로 만들었다. 한국 공연에서도 이런 틀거리는 같다.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하는” 거리 가수 은미, 영미, 주광, 형균, 정화가 들려 주는 브루클린의 이야기다. 거리 가수의 ‘신분’은 한국식이지만, 배경은 브루클린이다. 왜? 그 이유를 친절하게도 주인공들이 직접 설명한다. 손뼉을 치면서 맞아 우리가 쫌 그렇지 할 만하다. “사람들은 창작극보다는 라이센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미국 얘기를 좋아하지. 한국 사람들이 주인공인 얘기는 촌스러워 하지만 미국인들이 나오는 얘기는 좀 이상해도 다들 좋아한다고!”(주광) 주광의 설명대로 이야기는 섬세함이 다소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장점이 더 많다. 펑크, 팝,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가창력 훌륭한 배우들이 제대로 소화해냈다. 마크와 배리가 작곡한 음악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 파라다이스의 ‘수퍼러버’, 거리 악사의 ‘매직맨’ 등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흥얼거리게 될 정도다. 2013년 2월 24일까지. 4만~6만원. 1588-5212.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SURFING HAWAII 인간의 온도 하와이

    SURFING HAWAII 인간의 온도 하와이

    그 섬에서는 중력을 느낄 수 없었다. 편서풍에 실려 어디든 날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 위를 걷는 것쯤은 손쉬워 보였다. 그것이 하와이 서핑에 도전한 변이다. 그 바람을 살 수 있다면 애스톤 와이키키 리조트 23층 21호. 19시간의 시차는 하와이의 밤에서 한국의 늦은 오후 사이를 운항하는 모호한 타임머신에서 몇 번 멀미를 하고 나서야 적응한 것이었다. 습관처럼 발코니로 향했다. 거기 놓인 1인용 플라스틱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하는 일은 항상 뻔했다. 한 5분 동안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다가 조금 지겨워지면 저 멀리 활처럼 휘어 있는 와이키키 해변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둠 속을 달려오는 거품만 보이지만 일단 눈이 적응하고 나면 아직도 바다를 애무하는 섹시한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이번에는 청각이 슬슬 깨어나서 해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을 감지하고, 후각은 비린내 없는 바다냄새를 분석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은 촉각이다. 이 섬의 공기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쾌적하지 않느냐 볼멘소리. 이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하와이에서 치렀던 밤의 의식이었다. 바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바람 때문인 것 같았다. 파도가 높은 것도, 하늘이 맑은 것도, 별이 빛나는 것도, 무지개가 뜨는 것도, 내가 이곳에 다시 온 것도. 밤마다 와이키키를 내려다보며 내가 생각한 부질없는 소망은 ‘이 바람을 살 수 있다면’이었다. 그 바람으로 나는 매일 매일 서울의 매연을 날려 보내고, 예쁜 구름들을 뭉치고, 그 사이에 무지개를 띄우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는 상상을 했었다. 1 해안 가까이 방파제를 쌓아서 천연의 수영장을 만든 와이키키 해변 2 서퍼들에게는 밀려오는 파도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 있다 3 스탠드 업 패들링을 하는 청년의 등에는 작은 봇짐과 운동화가 매달려 있었다. 항상 붐비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바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 바다를 걷지 않는다면 낮이 되어 관광객으로 붐비는 와이키키 해안 도로를 걷다 보면 라스베이거스가 생각나곤 했다. 바닷가에 늘어선 대형 호텔이 커다란 장막을 치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크고 작은 쇼핑점들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 때문인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수많은 삼정들이 블록마다 꽉꽉 들어차 있다. 단, 카지노의 바다 대신 진짜 바다가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하는 방법이 다양하듯, 와이키키 지역을 여행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여행자들이 처음 하는 일은 대부분 짐을 풀자마자 와이키키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칼라카우아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일이다. 양복 입은 사람들과 비키니 입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흘러가는 그 길의 양쪽에는 호텔과 쇼핑센터, 레스토랑들이 가득하다. 유명한 오믈렛 레스토랑 ‘에그 포 낫싱’과 ‘치즈케이크 팩토리’도 그 대로변에 있다. 소란을 조금 벗어나고 싶다면 두 번째 방법, 모래사장을 걷는 방법이 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와이키키의 바다 위에는 교통정리가 필요할 만큼 많은 서퍼들이 하루 종일 정체를 이루고 모래사장도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처음 시도해 본 세 번째 방법은 물속으로 산책하는 일이었다. 바닷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바라본 세상의 풍경과 감각은 낯설다고 느껴질 만큼 새로웠다. 허리춤을 간질이는 파도, 발을 부드럽게 핥아 주는 고운 모래, 멀리서 들려오는 ‘쏴아’ 물거품 소리와 별안간 나타나 떼를 지어 지나가는 물고기떼들. 그런 감각들로 충만한 채 수킬로미터씩 이어졌던 와이키키의 바다속길 산책은 내게 신항로 개척보다 의미 있는 루트 개척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까지 고수하던 ‘구경꾼’의 자세를 버리고 파도와 맞서 보기로, 서핑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interview KITV 뉴스앵커 케니 최 Kenny Choi “서핑은 조깅이다” 낯선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은 원탁. 어색하게 밥먹기에만 열중하게 되기가 쉬운 그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중계하기 시작한 것은 케니였다. 질문을 던지고 주제를 이어가면서도 좌중을 고루 배려하는 세련된 매너는 ‘앵커’라는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하와이 지역방송사의 메인 뉴스 앵커이자 한인 2세라는 사실에 어디를 가도 집중을 받는 케니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은 그의 입에서 ‘매일 아침마다 서핑을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였다. 누군가가 매일 조깅처럼 즐기는 서핑이 내게는 태어나서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스포츠였다는 사실이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토요일 아침, 듀크 카하나모크Duke Kahanamoku동상 앞에서였다. 며칠 전 보았던 정장의 앵커맨은 온데간데없고 맨발에 검은 티셔츠와 헐렁한 반바지, 서핑 보드를 옆구리에 낀 청년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뉴욕에서 왔다고 들었다. 서핑 때문에 하와이로 온 것인가? 하하. 그렇지는 않다. 2년 전에 메인 뉴스 앵커로 발탁되면서 이주했으니 직장 때문이다. 코네티컷 출신이지만 대학을 UCLA로 가면서 서핑을 종종 즐겼다가 하와이에 오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원래 나는 스포츠 리포터로 시작해서 스포츠 앵커로 일했을 만큼 스포츠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었다. 지금은 9시 뉴스의 앵커라서 매일 2시부터 11시까지 일하니까 오전에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서핑이 가장 좋다. 와이프도 지금 저 앞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일상인으로 산다는 것은 좀 다를 것도 같은데. 하와이에 와서 놀란 점은 사람들이 일을 매우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와이 사람들은 유유자적 즐기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뉴욕에서 스포츠나이트 쇼, 스포츠 네트워크 뉴욕, 폭스 등의 스포츠 뉴스 앵커를 하면서 치열하게 살다가 하와이에 와서 ‘릴렉스’하는 법을 좀 배운 것 같다. 유전적으로 ‘알로하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만큼 친절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서핑의 매력은 무엇인가?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공기 속을 나는 느낌, 바다와 연결된 느낌이 든다.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처음 서핑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한번 해보고 나서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최소한 2~3번은 계속 도전해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래야만 서핑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남성 서퍼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서핑은 남성적인 스포츠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많기는 한데 그렇다고 남자의 스포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이제 서핑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장소를 추천해 달라. 이런. 서퍼들 사이에서 불문율은 장소를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여러 해변을 찾아가서 서핑을 해 보면서 나만의 비밀장소를 찾는 것도 서핑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여기 와이키키는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좀더 동쪽의 한적한 해변을 찾는 편인데 며칠 전에 그곳에서 좋은 파도를 만나서 아주 기뻤다. 어딘지는 말할 수 없지만.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케니 최는 하와이 KITV의 밤 10시 뉴스 앵커를 맡고 있다. 내년이면 한인 이민 110주년을 맞이하는 하와이에서는 이미 유명인이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뉴스를 보고 싶다면 미국 예일대와 한국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부모님들처럼 KITV 사이트(www.kitv.com)를 열면 된다. ■Chun’s Reef 서핑 체험기 바람 반, 물 반의 자유 이틀 후 이른 아침, 눈을 뜨자 팔이 잘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뻐근했다. 어제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커튼을 젖히고 발코니로 나가서 점점 밝아지는 바다를 향해 심호흡을 했다. 새벽 6시에도 이미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제와 다름없는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파도들’이라고 불렀던 그 물결들이 하나하나 달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번에 나도 타 볼 수 있을 것 같은 파도, 그렇지 않은 파도, 너무 낮아서 그냥 흘려 보내야 하는 파도, 무섭지만 황홀하게 힘이 넘치는 파도 등등. 나는 각각의 파도를 구분해 내고 있었다. 그저 하나의 레포츠 경험으로 생각했던 서핑이 앞으로의 내 삶에서 파도를 향한 태도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은 소름끼치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시계를 돌려 전날 오전, 오아후 섬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서핑 버스 안의 나는 심각하게 망설이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취소해도 된다는 여행사의 안내가 있기도 했고, 15여 명 정도의 여행자 중에서도 서핑 레슨을 받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서핑을 배우게 될 장소의 이름이 Chun’s Reef가 아니었다면, 내 이름의 영문 스펠링이 Chun이 아니었다면 예약을 취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같다는 우연의 일치에 운명이라는 망상을 덧댄 끝에 나는 일행의 응원을 받으며 홀로 버스에서 내렸다. 올 겨울 서핑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3월부터 이곳에 와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캘리포니아 출신 프로 서퍼 제이크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피부와 보드의 마찰을 줄여 준다는 서핑티셔츠를 입고 나니 준비는 끝이라고 했다. 낡은 트럭에서 보드를 하나 꺼낸 그는 말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나무’요. 나무만 바라보면 됩니다.” 물론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다른 수강생이 없어서 개인 교습이 되어 버린 레슨은 빠르게 진행됐다. 보드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가 파도가 오는 타이밍에 맞춰 제이크가 보드를 빠르게 밀어 주면 그 순간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서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절대로 손으로 보드를 붙잡지 말아야 한다거나(그러면 보드의 균형이 깨진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스키나 보드를 타는 요령과 비슷하다) 것보다 가장 중요한 요령은 아래를 쳐다보지 않는 것, 즉 해안의 ‘나무’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은 수없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순간이나마 완벽한 자세를 유지했다는 제이크의 과장된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순간은 두 시간 동안 다 합쳐 30초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다음 파도가 넘어오듯이 서핑은 그런 것이었다. 파도가 좋다 싶어도 너무 늦게 일어서면 꽝이고, 제때 일어났다 싶으면 다리 위치가 틀렸고, 다리 위치가 맞았다 싶으면 상체가 기울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는 내게 제이크가 말했다. “서핑의 재미는 수없이 작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것이랍니다.” 서핑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제이크는 수영을 못해도 서핑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발이 닿지 않는 물이 두려운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를 내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큰 파도야 타 본 적이 없지만 서핑의 리스크는 파도에 휩쓸려 바위나 산호에 부딪치게 되는 일이다. 발밑이 온통 날카로운 산호라서 그 위에 발을 딛었다가는 ‘나처럼’ 살을 베이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체력고갈로 지쳐 버린 나는 제이크의 사진 한 장을 찍을 생각조차 못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상처가 다 아문 지금까지도 서핑의 여운은 길게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극복하지 못한 채 남기고 돌아온 ‘수없이 많고, 작은 장애물’들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고 물속으로 계속 곤두박질치게 했던 바다에 대한 앙심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리움이었다. 하와이의 바람을 내 소유로 만든 것 같았던 그 30초. 바람 반, 물 반으로 만들어진 파도를 밟고 섰던 그 기적적인 순간으로 자꾸만, 자꾸만 다시 돌아가고 싶다. 1 11월이면 큰 바람이 불어오는 오아후 북쪽 해안가. 반자이 파이프라인의 굵고 튼튼한 파도는 도전의 대상이다 2 환경단체 NGO들의 보살핌으로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와이안 그린 터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만날 확률이 높은 편이다 3 해변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비치들이 이웃하고 있는 노스 쇼어에서 자전거는 가장 유용한 이동 수단이었다 4 울창한 원시림이 가득한 와이메아 계곡은 해변 못지않은 비경이다 Oahu North Shore ‘첫 서핑’을 위한 그곳 해변에도 셀러브리티가 있다면 오아후 노스 쇼어는 명예의 전당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핑과 스노클링 명소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와이메아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와 만나는 와이메아 베이Waimea Bay, 파도가 높기로 유명한 반자이 파이프라인, 최고의 해안 다이빙 장소이자 천연 수족관으로 꼽히는 더 코브The Cove, 하와이 그린 바다거북이 살고 있는 터틀 비치, 눈부신 모래사장이 펼쳐진 선셋 비치Sunset Beach까지,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전거를 빌렸다. 하지만 노스 쇼어의 자전거 대여점에 도착했을 때 살짝 당황했던 이유는 고물상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낡은 자전거들이 때문이었다. 다 고만고만한 녀석들 중에서 크기가 작은 것을 잡아타고 도로를 50m쯤 달렸을 때 두 번째 당황의 순간이 찾아왔다. 기어가 없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브레이크가 없다니! 혹시나 하고 페달에 힘을 줘 보니 페달 브레이크 방식이었다. 익숙지 않은 자전거에 잔뜩 겁을 먹고 돌아가서 핸드 브레이크 자전거를 찾았지만 주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없다고 대답하며 한마디를 보탰다. ‘우린 어려서부터 그런 자전거를 타고 자랐는 걸. 브레이크 잡을 때 발의 위치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다리가 일직선이 되면 버티기가 어려우니까.’ 그리하여 노스 쇼어 여행은 시속 10km 이하였다. 브레이크 때문만은 아니고 1~2km 간격으로 이웃하고 있는 해변들이 하나같이 절경이라 자주 멈춰 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노스 쇼어 파도의 명성은 이미 버스가 반자이 파이프라인Banzai Pipeline에 잠시 멈춰 섰을 때 확인한 터였다. 오죽 파도가 높고 단단하게 휘어지면 이름부터 파이프라인이겠는가. 게다가 그 파도가 가장 높아지기 시작하는 시즌은 큰 바람이 찾아오는 11월부터다. 두 시간은 이 매혹적인 해변에 들러 사진만 찍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막상 하와이 그린 거북이를 만났을 때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는데, 그때의 심정은 경주에서 지고 있는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해변을 독서실 삼아 일광욕과 독서를 겸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도 ‘루저’의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레이바 타운Haleiwa Town의 그 유명한 빙수를 버스가 떠나기 전에 가까스로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탕수수 농장이 흥했던 시절의 가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할레이바는 이제 서퍼들이 주둔하는 마을이다. 더위와 갈증을 한번에 날려 버리는 빙수가 유명해진 것도,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단백질을 공급하는 새우라이스 트럭이 유명해진 것도 서퍼들과 관련이 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트래블프레스 02-2264-8494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노스 쇼어 서핑 버스 해변과 서핑으로 유명한 오아후 북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원데이 투어 프로그램이다. 오전 오후의 자유 시간 동안 해변을 옮겨가면서 폭포 수영, 스노클링, 자전거 타기, 서핑, 바디보드, 카약, 스탠드 업 패들링, 서핑 등 1~2가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필요한 장비와 왕복 교통편을 제공하며 식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해변뿐 아니라 할레이바 마을, 와이메아 폭포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바다거북이도 구경할 수 있다. 와이키키에서 노스 쇼어까지는 전용차량으로 50분 정도 소요되며 서핑, 카약 등의 레슨에는 추가 요금이 붙는다. 투어시간 오전 8시~오후 5시 비용 76달러(액티비티 1가지 기준), 89달러(액티비티 2가지 기준), 2시간 서핑 교습 145달러(호텔 픽업 및 왕복 교통, 장비 대여 포함, 세금 별도) 문의 (808)226-7299 www.northshoresurfbus.com ▶Travel to Hawaii Hawaii 사랑을 부르는 섬, 하와이 하와이는 177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1959년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제도는 오아후, 마우이, 하와이(빅 아일랜드), 카우아이, 몰로카이, 라나이, 니하우, 카홀라웨 등 8개의 큰 섬과 13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개인 소유와 군항기지로 이용되는 니하우와 카홀라웨를 제외한 6개의 큰 섬에 관광객이 들어간다. 이중 하와이의 주도인 오아후섬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관광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8개 섬 중 규모로는 3번째 해당하지만 전체 주민의 78% 정도가 이 오아후섬에 거주하고 있다. 항공 찬스는 하루 4번! 최근 2년 사이에 인천-호놀룰루 사이에 신규 취항과 증편 등이 활발했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오후 8시 인천 출발)과 하와이안항공(오후 10시 인천 출발)이 매일 취항하고 있으며 대한항공은 매일 2편(오후 7시, 오후 9시10분 인천 출발)을 운항하고 있다. 비행시간은 하와이로 갈 때 8시간 40분이 소요되며 인천으로 돌아 올 때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비자 허가를 받으시오! 까다로웠던 미국 비자발급이 2008년 11월17일부터 전자여행허가제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로 변경됐다. 여행 전에 미리 ESTA 사이트(www.estausa.co.kr)를 통해 입국 허가를 신청한 뒤 서류를 프린트해 미국 입국시 제출하면 된다. 일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신청하는 것이 좋다. 수수료는 4만4,000원. 날씨 이토록 쾌적한 맑음 아열대에 속하는 하와이는 평균기온은 23.8도로 아주 쾌적하다. 하와이가 북위 19~22도의 열대권에 들면서도 이런 날씨를 유지하는 것은 여름에 동북무역풍이 불고 한류인 캘리포니아 해류가 섬을 지나기 때문. 겨울에는 무역풍 대신 남풍이 비를 몰고 오지만 한바탕 내리고 나면 금방 맑아져 다시 상쾌하다. surfing season 지금 하와이는 서핑 중 서핑이야 일년 내내 즐기는 스포츠지만 한겨울에 파도가 가장 높아지는 오아후의 북쪽, 노스 쇼어에는 전세계 최정상급의 서퍼들이 모여든다. 매년 11월12일부터 12월20일까지 펼쳐지는 밴스 트리플 크라운 서핑 대회는 리프 하와이안 프로, 밴스 월드컵 오브 서핑, 빌라봉 파이프 마스터스로 이어지는데, 이들 대회에 걸린 상금만 총 80여만 달러다. 하와이관광청 홈페이지 www.gohawaii.com 음료 얼음빙수 한 방! 달궈진 몸, 아직 식지 않은 열정을 살짝 식히기로는 얼음빙수shave ice만한 것이 없다. 단팥도, 떡도, 우유도 없이 그냥 얼음을 갈아 수북이 담고 그 위에 커피맛, 레몬맛, 메론맛 등등의 다양한 액체를 부었을 뿐인 심심한 빙수지만 할레이바타운에서는 최고의 간식이다. 언제 가도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팥빙수처럼 단팥을 넣은 메뉴도 있다. 재료와 크기에 따라 빙수 가격은 2.5~3.5달러 사이. 마츠모토 빙수집이 가장 유명하지만 90년 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멋진 아오키스Aokis도 용호상박이다. resort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 방문을 열면 커다란 통창으로 바다가 쏟아진다. 25개 층에 있는 644개 객실 중 열에 여덟은 환상적인 오션뷰를 누릴 수 있는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Aston Waikiki Beach Hotel. 호텔 로비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나가면 펄떡거리며 살아 숨쉬는 와이키키를 만나게 된다. 하와이의 5개 섬 중에 호놀룰루가 위치한 오아후에는 수많은 호텔과 리조트가 있지만 코앞에서 와이키키 해변을 즐길 수 있는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이 특별한 이유다. 1948년 태평양에서 난파된 프랑스인이 하와이 원주민과 결혼해 조그만 숙박업소로 출발한 애스톤은 현재 오아후에 9개, 마우이 9개, 카우아이 5개, 빅아일랜드 3개의 숙박시설을 보유한 하와이 최대 규모의 호텔 그룹으로 발전했다. 일반 호텔 스타일부터 부티크 스타일, 콘도미니엄, 빌라형까지 다양한 객실 타입을 갖췄다. 특유의 환대정신인 ‘알로하 스피릿Aloha Spirit’으로 무장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로 선정되기도 했다. 애스톤 와이키키 비치 호텔 역시 2010년 개보수를 마치고 재개장을 하면서 하와이를 찾는 많은 신혼부부를 위한 호텔로 손님에게 차별화된 허니문을 제공하고자 고심했다. 일례로 아기자기한 허니문을 위해 호텔은 작은 장치를 이용했다. 그중 하나가 소꿉놀이 같은 애스톤 라이프를 상징하는 물건인 ‘쿨러백’. 객실에 비치된 쿨러백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차곡차곡 담아 바닷가로, 야자수 밑으로, 해변의 벤치로 자리를 옮겨 야외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허니문에서 점잖게 멋을 부린 저녁식사는 필수! 호텔 내에는 하와이안 퀴진을 맛볼 수 있는 ‘틱스 그릴 앤 바Tik’s Grill and Bar’가 있어 멀리 가지 않아도 파인 다이닝이 가능하다. 식사를 하면서 즐기는 훌라쇼도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호텔에 묵는 손님 모두에게 제공되는 ‘알로하북Aloha book’도 애스톤에서만 제공받을 수 있는 잔재미 중 하나! 알로하북에는 쇼핑, 레스토랑, 투어어트랙션 등을 할인받을 수 있는 쿠폰이 모두 들어 있다. 수영장과 로비에서는 무료로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주소 2570 Kalakaua Avenue, Honolulu, HI 96815 문의 866-77-774-2924 www.astonhotels.co.kr(한국어) place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수천년 전 머나먼 섬에 사는 폴리네시안Polynesian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들은 수개월에 걸쳐 해와 달 그리고 별의 길을 읽으며 바다를 항해했다. 파도의 방향을 읽고, 새들의 비행을 관찰하며 망망대해를 건너온 그들이 바로 하와이안들의 조상들이다. 자고 나면 땅의 모양이 바뀌어 있는 화산섬에 정착해 ‘알로하 정신’을 가꾸어 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폴리네시안문화센터PCC, Polynesian Cultural Center에서는 7개의 폴리네시안 부족을 만날 수 있다. 피지, 타히티, 사모아, 하와이, 뉴질랜드(마오리), 파파누이(이스터섬), 통가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 준다. 방문객들이 잘 신경 쓰지 않는 사실 하나는 PCC가 몰몬교단이 운영하는 비영리단체라는 것. 수익의 대부분을 장학금 등 교육사업에 사용하고 있으며 입장료 외에 기부금도 받고 있다. ‘민속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주민들의 실제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에 PCC는 지금까지 3,300만명 이상이 방문한 하와이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하와이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루아우’ 뷔페식을 마치고 나면 느린 카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의 재담에 웃다 보면 어느덧 반대편 종착지에 도착하게 되고, 그때부터 각 부족 마을의 방문이 시작된다. 부족마다 매일 3~5회씩 공연이 반복되므로 시간표를 잘 짜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후 2시30분에 진행되는 카누 선상 쇼 관람을 위해 응달에 자리를 잡는 민첩함도 필요하다. 저녁에 펼쳐지는 쇼 <HA: Breath of Life>까지 관람할 예정이라면 입장료(49.95달러), 저녁 식사(35달러), 쇼(49.95달러)를 포함하는 패키지 티켓(성인 91.95달러부터, 소인 67.95달러)을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폴리네시안문화센터┃주소 55-370 Kamehameha Highway in Laie, Hawaii 96762 운영시간 매일 낮 12시~오후 6시(매주 일요일 휴무) 문의 800-367-7060 www.polynesia.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단일후보 ‘불패신화’ 깨졌다

    18대 대선은 단일 후보가 패배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이번 대선까지 총 8차례의 단일화 협상이 있었고 15대 대선의 ‘김대중-김종필(DJP)연합’과 16대 대선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등 2건이 승리했지만 이번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는 실패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공고한 지지율 벽을 넘지 못하면서 단일 후보 ‘불패의 신화’가 끊겼다. 패인은 매끄럽지 못했던 단일화의 과정에 있었다. DJP연합과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각각 내각제 및 공동정부 구성을 전제로 한 담판과 여론조사 방식으로 이뤄져 큰 잡음 없이 양측 후보 지지자의 결합이 가능했지만, ‘문재인-안철수’단일화는 사실상 안 전 후보의 일방적 양보로 이뤄졌다. 안 전 후보의 사퇴로 충격을 받은 안철수 지지자들은 한동안 문 후보 지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부동층으로 맴돌았다. 안 전 후보 사퇴 이전 10~15%였던 부동층은 20~25%로 두배 이상 늘었다. 무엇보다 지지자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컸다. 안 전 후보의 지지자인 한 20대 청년은 투신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는 박 당선자를 지지했다. 사퇴 이후에도 여전히 안 전 후보가 부각돼 문 후보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또 단일화에 전력을 쏟아붓느냐 ‘문재인 브랜드’를 내세우지 못해 “안철수 없이는 안 되는 후보”라는 오명도 감수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지난달 27일에는 실무진의 실수 때문에 메시지가 잘못 나갔다. 문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유세에서 준비된 유세문대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유신독재 잔재세력의 대표’라고 몰아붙였지만 이 때문에 한동안 ‘박정희 대 노무현’ 프레임이 부각되면서 현 정부 심판론에 불을 지피지 못했다. 문 후보 측 관계자는 “후보 뿐만 아니라 캠프 관계자 모두가 단일화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유세문을 꼼꼼히 검토하지 못했고, 유신독재 메시지가 나가는 순간 ‘아차’하고 바로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고 말했다. 안 전 후보의 뒤늦은 선거 지원도 패인이었다. 안 전 후보는 후보직을 사퇴한 뒤 칩거하다 지난 6일에서야 유세 지원에 나섰다. 안 전 후보의 지원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던 문 후보의 지지율이 빠르게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지만 선거판을 뒤집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현정기자 hjlee@seoul.co.kr
  • “與는 부자정당 野는 끼리끼리 정당… 누굴 믿어야 하나”

    “與는 부자정당 野는 끼리끼리 정당… 누굴 믿어야 하나”

    18대 대선이 20일도 채 남지 않았지만 수도권 민심은 아직 요동 직전의 ‘태풍의 눈’이었다. 수도권은 역대 대선에서 ‘바람’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바람을 탄 후보는 어김없이 청와대로 직행했다. 지역 기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유권자의 특성과 지역별로 가장 많은 유권자 수가 바람몰이의 요인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대선의 수도권 유권자 수는 2000만 7473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49.3%를 차지한다. 그러나 공식 선거운동 개시 나흘째인 30일까지 수도권 유권자 상당수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 사퇴의 여진으로 부동층 자체가 늘어난 데다 어느 정당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 무당파와 정치 무관심층도 상당수였다. 앞으로 남은 18일간 어느 후보가 이들을 사로잡느냐에 따라 대선의 향배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 민심의 풍향계인 경기 분당을 지역은 앞서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당선자의 소속 정당이 달랐던 곳이다. 이번에도 속마음을 드러내는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 출근 시간에 만난 직장인 이도현(36)씨는 “지금 같아선 투표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안 전 후보도 결국 현실 정치의 벽에 좌절된 것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이씨는 “새누리당은 아직도 웰빙정당이고 민주당도 ‘끼리끼리’ 정당 같다.”면서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경제민주화 같은 민생 공약도 결국은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중산층인 회사원 권재홍(42)씨는 “386세대는 민주화에 대한 부채 의식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과거 10년간 민주당이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과거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더 크다.”며 완곡히 야권 후보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박 후보가 지난 28일 방문했던 수원의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선 여야의 온기가 교차했다. 민생을 잘 보살필 수 있는 후보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상인 박금자(64·여)씨는 “그래도 박 후보가 서민 물가를 좀 더 보살피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옆에 있던 상인 이충수(61)씨도 “경제민주화는 별다른 거 없다. 서민들 허리 펴고 등 따뜻하게 살게 해 주면 된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트럭을 모는 김태호(56)씨는 “이명박 정부에서 서민 살림살이가 나아진 게 뭐가 있냐.”면서 “이번에 민주통합당으로 확 갈아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북부 역시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양시 행신동에 사는 주부 김정미(39)씨는 “중산층 아파트 단지인 이 동네 또래 엄마들은 대개 지지 후보도 정당도 없다.”면서 “여든 야든 보육, 부동산 등 민생 공약에서 큰 차이점이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누가 되든 크게 바뀔 거라는 기대감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의정부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진보신당 지지자 김정민(35·여)씨는 “주변에 안 전 후보 사퇴에 허탈해하는 동료들이 많다.”면서 “막판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 지지세가 여의치 않으면 투표장으로 향하겠지만 아직 혼란스럽다.”고 털어놨다. 인천에선 박 후보의 상승세도 조금씩 감지됐다. 부평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오경석(50)씨는 “문 후보가 아직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벗지 못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며 거리감을 내비쳤다. 반면 서울에서 만난 유권자 가운데는 ‘정권 교체’를 얘기하며 안 전 후보 사퇴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많았다. 퇴근길 구로 디지털단지역에서 마주친 회사원 최진철(48)씨는 “문 후보가 실패한 정권의 책임자라고 공격받지만 현 정권이 잘한 건 무엇이냐.”면서 “정권 교체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민영현(29·여)씨는 새누리당이 내세우는 여성 대통령론에 대해 “박 후보가 그동안 여성 정치인으로서 대표성을 나타냈는지 모르겠다.”며 회의감을 표시했다. 신촌에서 만난 대학생 이나은(23·여), 박정열(26)씨는 “안 전 후보의 문 후보 지지 선언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솔직히 정책 공약은 양쪽 후보 모두 비슷해서 잘 모르겠다. 반값 등록금, 청년 일자리 정책에서 좀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이는 후보를 찍으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분당·수원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선택 2012 D-20] 朴 “文이 집권하면 나라 두쪽” 文 “朴, 빵점정부 공동책임자”

    [선택 2012 D-20] 朴 “文이 집권하면 나라 두쪽” 文 “朴, 빵점정부 공동책임자”

    ■“무책임한 변화땐 국민 혼란 文 집권땐 국제사회 고아될 것” 文 직접 지칭 비판 강도 높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28일 이틀째 충남 지역에 머물며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향한 공세를 이어 갔다. 특히 문 후보 역시 이날 충청에서 유세를 펼치는 것을 의식한 듯 비판의 강도를 더 높였다. 지금까지 문 후보를 “야당 후보”라고 지칭했지만 이날은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라며 정면으로 부딪쳤다. 전날 ‘준비된 미래’ 대(對) ‘실패한 과거’ 구도를 내놨던 박 후보는 이날은 ‘책임 있는 변화’ 대 ‘무책임한 변화’로 문 후보를 공격했다. 박 후보는 오후 태안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 때마다 누구나 변화를 얘기하지만 무조건 바꾼다고 국민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서 “무책임한 변화는 오히려 국민을 더 혼란스럽고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책임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쇄신도 이뤄지고 발전도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새 시대의 첫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변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문 후보와 차별화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전날에 이어 “자신들의 코드에 맞게 나라를 뒤엎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고 참여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면서 “국민이 준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이제 와서 다시 정권을 달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천안에서는 참여정부를 “역대 최악의 양극화 정권”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또다시 민생과 상관없는 이념에 빠져 나라를 두 쪽으로 만들고 갈등과 분열만 증폭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 후보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일, 도박이 되지 않겠느냐.”, “문 후보와 그 세력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고아가 될 것”이라는 등 비판의 수위도 매우 높아졌다. 박 후보는 “저는 만사 제쳐 놓고 무엇보다 민생을 챙길 것이고 국민대통합으로 모두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하며 ‘준비된 후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박 후보는 이날 충남 홍성, 예산, 서산, 태안, 당진, 아산, 천안 등 7곳에서 유세를 펼치고 “충청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고 나라를 지켜 주었다.”면서 “실패한 과거 정권의 부활을 막아주시고 책임 있는 미래로 나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박 후보는 오후에는 경기 평택, 오산, 수원으로 이동해 지지를 호소했다. 29일에도 서울 서부권, 경기 김포, 인천 등에서 유세를 이어 가며 최대 부동층으로 꼽히는 수도권과 젊은 층을 집중 공략할 예정이다. 예산·태안·천안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朴의 새누리, 세종시법안 발목” ‘정권심판론’으로 친노프레임 극복 “과학벨트 예산 국고 지원” 약속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28일 ‘이명박 정부 빵점론’으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게 맹공을 퍼부으며 충청 민심에 호소했다. 새누리당의 ‘친노(친노무현) 프레임’ 대응 전략으로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박 후보에 대한 공격 포인트도 ‘유신 독재세력 잔재의 대표’에서 ‘MB정권 공동 책임자’로 바꿨다. 선거 구도가 자칫 ‘박정희 대(對) 노무현’ 구도에 갇힐 경우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를 지지했던 중도·무당파 층의 이탈이 가속화될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문 후보는 이날 대전역, 신탄진을 비롯해 세종·당진·아산·천안시를 돌며 ‘중원유세’를 펼쳤다. 대전역 앞에서 가진 유세에서 문 후보는 박 후보가 자신을 “실패한 정권의 핵심 실세”라고 비판한 것과 관련해 직접 입을 열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잘한 것 하나도 없는 빵점 정부”라고 전제한 뒤 “박 후보는 빵점 정부의 공동 책임자”라고 맞대응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 한계에 대해 저희도 성찰 많이 한다. 그러나 잘한 것도 많았다는 게 국민들의 평가다.”라면서 “참여정부 성적을 100점 만점에 짜게 줘서 70점 어떤가.”라고도 했다. 연설 서두에서 “참여정부가 못다 이룬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제가 나왔다.”고 밝힌 문 후보는 안철수 지지층을 겨냥해 “안 전 후보가 흘렸던 눈물을 결코 잊지 않겠다.”며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의 미안한 심경부터 드러냈다. 그러면서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거듭 밝힌 뒤 “결승에 나갈 후보를 후보 간 협상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겠다.”고 역설했다. 결선투표제 공약을 이번 대선의 핵심 화두로 삼아 개헌 논의를 선점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또 충청 지역민들의 숙원 사업인 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예산 전액을 국고로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세종시로 자리를 옮겨서도 문 후보는 박 후보에 대한 비판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그는 “박 후보가 세종시는 본인의 신념이자 소신이라고 주장했는데, 새누리당은 얼마 전 국회 행안위에서 세종시 특별법 개정안을 무산시켰다.”면서 “박 후보는 겉과 속이 다른 후보”라고 비판했다. 이어 “세종시 특별법을 원안대로 연내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면서 “세종시를 사실상의 행정수도로 발전시키겠다.”고 공약했다. 당 쇄신 차원에서 지난 18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이해찬 의원도 참석해 문 후보 지원 유세를 펼쳤다. 문 후보는 아산시 온양온천역 앞에서 가진 유세에서 충남 논산 출신인 안희정 충남지사를 비중 있는 정치인으로 띄웠다. 그는 “안 지사가 차세대 국가 지도자로 전국에서 기대를 받고 있다.”면서 “전국적 정치지도자로 커 갈 수 있도록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세종·아산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씨줄날줄] 신(新)백호주의/박정현 논설위원

    언제나 어린 소년 피터 팬이 사는, 모든 것이 있는 상상의 나라이자 호주 퀸즐랜드 북서부의 ‘상상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곳. ‘네버 네버 랜드’(Never Never Land)는 어디일까. 1788년 배를 타고 시드니 항에 도착한 유럽의 죄수들에게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유배의 땅, ‘네버 네버 랜드’는 바로 호주였던 것이다. 유럽의 죄수들이 원주민 애버리진을 말살하면서 호주는 백인의 역사를 열었다.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머나먼 땅으로 쫓아낸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영연방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의 유럽’이라고 불린다. 호주는 아시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851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호주 땅에는 중국인들이 몰려들었고 중국인 유입은 백인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백인들은 앵글로색슨 우월주의에 젖어 중국인을 견제했고, 지방정부 차원의 백인 우월주의는 1901년 호주 연방 결성과 함께 국가적 차원으로 확산됐다. 아시아인의 이민과 취업을 제한하는 백호주의(白濠主義)는 1973년까지 지속됐다. 백호주의 정책을 편 호주는 아이로니컬하게도 21세기 들어 아시아 때문에 먹고산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성공은 아시아 국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학·관광산업은 호주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는 3대 산업. 유학과 관광 분야에서 아시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국인 유학생 3만명, 워킹 홀리데이 체류자 3만명 등 모두 14만명의 한국인이 호주에 체류 중이다. 중국인 유학생도 많을 때는 20만명에 이르렀던 적도 있다. 백호주의를 폐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에서는 인종테러범죄가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다. 호주 브리즈번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며칠 전 또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올들어 3월 이후 네번째라고 한다.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무차별 테러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백인들은 “아시아의 개들”이라면서 폭행을 한다고 하니 신(新)백호주의라고 할까. 호주 직장인 72%가 직장 내 유색인종 차별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30%는 실제 인종차별을 직접 겪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호주를 찾는 아시아 관광객과 유학생은 2009년을 정점으로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국내 기업들도 호주 투자에서 백호주의를 우려할 정도라고 한다. 백호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 호주는 관광객과 유학생들이 꺼리는 ‘네버 네버’로 남을 것이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친가’ 부산으로 달려간 문재인 “안철수와 새 정치 꿈 이루겠다”

    ‘친가’ 부산으로 달려간 문재인 “안철수와 새 정치 꿈 이루겠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7일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서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진 첫 유세에서 “안철수 전 후보의 눈물을 결코 잊지 않겠다. 안 전 후보와 함께 새 정치의 꿈을 이뤄 내겠다.”고 밝혔다. 문 후보는 “이번 대선은 낡은 정치와 새 정치, 서민 후보와 귀족 후보,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과 국민과 소통하고 동행하는 대통령의 대결, 반칙·특권이 지배하는 사회와 사람이 먼저인 공정한 사회를 선택하는 선거”라고 규정했다. 이어 “안 전 후보가 새로운 정치를 말하면서 이루고자 한 목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평화로운 한반도”라면서 “5·16 군사 쿠데타, 유신독재 세력의 잔재를 대표하는 박근혜 후보가 독재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역사인식으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송수연기자 songsy@seoul.co.kr
  • [사설] 집 마당 자연장, 장묘문화 바꿀 계기되길

    내년 하반기부터 집 마당의 나무·화초·잔디 밑에도 망인(亡人)의 골분을 묻는 자연장이 허용된다고 한다. 보건복지부는 그제 ‘장사(葬事)시설 수급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자연장지 설치 지역을 주거·상업·공업지역까지 넓히는 쪽으로 관련 시행령을 고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화장률은 70%를 넘었지만 봉안시설이 크게 모자란다. 화장률이 해마다 높아지는 마당에 시설 부족을 해소하고 현재 3%에 불과한 자연장을 활성화하려면 이런 조치는 바람직해 보인다. 이를 계기로 고비용에다 번잡한 장묘문화도 확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장례문화는 최근 20~30년 사이에 많이 달라지긴 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20%에 불과했던 화장률은 지난해 71%로 높아졌다. 이제는 봉안시설이 화장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국에는 묘지가 2100만기에 이르고 묘지면적은 국토의 1%(998㎢)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해마다 7만여기씩 꾸준히 늘고 있다. 장례비용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10년 기준으로 매장의 경우 평균 1916만원, 화장은 1390만원이 들었다. 웬만한 사람은 장례 치르는 일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장례식장과 상조회 등은 유족에게 갖가지 명목으로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다. 연간 26만명이 사망하는데 장례시장 규모는 무려 4조~5조원에 이른다니 그 거품을 알 만하다. 황망한 유족들을 파고드는 상술 탓이 크겠지만 허례허식의 잔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장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국민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면 자연장은 31.2%, 납골당은 25.5%였다. 비용이 저렴하고 사후 관리에도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새 장사법이 시행되면 읍·면 지역은 자연장이 바로 가능하겠지만 도시지역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당장 아파트 단지 등은 주민들의 합의가 필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행정적으로 잘 뒷받침해서 자연스러운 확산을 유도하길 바란다. 도시 주민들도 장례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 자연장의 확대가 장례비용의 대폭 절감과 절차 간소화로 이어져 장묘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길 기대한다.
  • 아침조회, 극장서도 애국가 안부르는데…그라운드서만 국민의례?

    아침조회, 극장서도 애국가 안부르는데…그라운드서만 국민의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삼천리 화려 강산의/(중략)/대한사람 대한으로/길이 보전하세로/각각 자리에 앉는다/주저앉는다.’ 황지우 시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영화 상영 전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뉴스를 봤던 1980년대 군사정권의 극장 풍경을 묘사했다. 반공·국가주의가 한창이었던 시절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다. 극장의 애국가도, 애국 조회도 사라진 세상이지만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여전히 국민의례를 한다. 지난 1일 끝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가수 패티김, 소찬휘, 이적 등이 애국가를 불렀다. 금발의 외국인 선수도, 치킨과 맥주를 든 관중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위해 일제히 일어섰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쭉 그랬다. 문화체육관광부나 대한체육회에 관련 강제 규정은 없지만 야구는 물론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도 애국가로 경기를 시작한다. 체육계 일부에선 관행으로 이어져 온 ‘경기장 국민의례’에 대해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말한다. 정윤수 스포츠 문화 평론가는 “국민의례 자체가 국민 총화단결을 목표로 한 국가주의 시대의 잔재이므로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면 없어져야 한다.”면서 “오히려 팀별로 특색 있고 상징적인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재미도, 의미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희준 동아대 생활체육학과 교수도 “3S정책(전두환 정권 시절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려는 정책)에서 시작된 한국 프로스포츠는 별 고민 없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유지해 왔다.”면서 “한국시리즈처럼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부분적으로 허용하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만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경우 그라운드에서 국가를 부르면 극우파 취급을 받는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는 선수들이 ‘EPL 노래’에 맞춰 입장하고 팬들이 ‘블루 이즈 더 컬러’(첼시), ‘유 윌 네버 워크 얼론’(리버풀) 등 구단 응원곡을 자연스럽게 합창한다. 프로축구 K리그도 성남을 제외한 15개 구단이 애국가 대신 ‘서포터스 헌정가’나 자기 팀의 색깔을 표현하는 고유의 노래를 튼다. 우리나라는 미국 스포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민족, 다인종이 모인 데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전통적으로 스포츠를 통해 국가주의를 강조해 왔다. 프로야구(MLB), 프로풋볼(NFL), 프로농구(NBA) 등이 시작 전에 국가를 틀고 메이저리그는 9·11테러 사건 후 7회가 끝나면 ‘제2의 국가’인 ‘가드 블레스 아메리카’까지 부른다. 반대로 애국가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역 연고제가 완벽히 정착된 야구에서 ‘자기 팀’을 외치며 대립하던 팬들이 한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지역 갈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김기한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의 순기능에는 사회 통합 기능도 있다.”면서 “국민 정서상 큰 거부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굳이 국민의례를 없애야 할 당위성을 못 느끼겠다.”고 말했다. 한국프로농구연맹(KBL) 관계자도 “일상에서는 국민의례를 접하기 힘든데 코트에서 한국인이라는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다.”면서 “선수로선 경기에 임하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글로벌 시대] 글로벌 시대와 중앙아시아/이혜주 현대건설 해외영업본부 상무

    [글로벌 시대] 글로벌 시대와 중앙아시아/이혜주 현대건설 해외영업본부 상무

    글로벌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글로벌이라는 말에는 힘센 국가가 자국 내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지배력을 확장하려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글로벌이라는 말은 자유롭게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국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일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즈음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국가 간 거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이제 어떤 나라도 이웃나라와 교류·소통하지 않고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가 돼 가고 있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 눈을 떠가는 것이라고 한다. 국가 사이에 좋은 친교 관계를 유지하려면 스스로 좋은 친구감이 돼야 한다. 친교는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때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다. 중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서남아시아와 동남북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정유관인 블랙 로드가 지나고, 철로인 스틸 로드가 촘촘히 이어지는 곳이다. 중앙아시아 5개국 중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우리와 인연이 깊다. 1937년 겨울, 스탈린은 시베리아의 외국인을 일본인과 격리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벌판으로 이주시켰다. 우리 한국인들은 현지인의 도움과 배려로 황량한 벌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듬해 봄부터는 벌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립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현지인들은 지금도 한국인들이 보여준 생존 능력과 기술력, 그리고 근면함을 존경해 오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동북쪽에 있는 알타이산맥 부근은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에 거주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어, 몽골어 등을 포함하는 ‘알타이어족’이라는 명칭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알타이산맥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몸속 유전자는 북방 유목민족과 연결돼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국내에선 능력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던 이들도 일단 해외로 나가면 광활한 대지를 거침없이 달리듯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지 않는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는 과거 실크로드의 교착지로, 서남아시아와 중국 장안(長安)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실크로드는 우리와도 무관치 않다. 그 옛날 실크로드가 한반도 신라까지 이어졌음을 최근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는 한반도가 오랜 옛날부터 세계와 교류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감행한 서역(西域) 원정은 세계 전쟁사에 남을 만큼 유명하다. 중앙아시아 5개국의 수도는 지금 계획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지 21년이 된 이곳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제자립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거의 100년 동안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표기문자(공용어)로 사용했지만 이제는 자국어를 활용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조만간 언어 독립도 이뤄질 것 같다. 우리는 20세기 초에 식민지 생활을 겪어야만 했고,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아오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없애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의 과거사마저 뺏으려 하고 있고,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사(現在史)다. 오늘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가치 있는 내일이란 없다. 우리와 인연이 깊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진실한 마음으로 만나자. 우리와 다름을 인정하는 이해와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중앙아시아는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다양한 교류와 소통의 장이었던 만큼 머지않은 장래에 이들만의 의미 있는 삶의 양식을 전 인류에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에 대한 이해는 교류와 소통의 지름길이다. 강국으로 비상하고 있는 이웃 중국(한족)에 대한 우리의 미래 대처 전략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교류 강화를 고려해 볼 때다.
  • 칭다오靑島 가는 길

    칭다오靑島 가는 길

    칭다오靑島 가는 길 황해 너머 칭다오로 가려거든 이 경고문을 숙지하라. ‘여행 중 바다와 맥주를 조심하시오.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중독될 수 있습니다’ 글·사진 구명주 기자 취재협조 위동항운 www.weidong.com 032-770-8000 1 위동훼리를 이용하면 인천에서 칭다오와 웨이하이로 여행할 수 있다 2 페리에서 본 인천대교 3 페리는 바다를 떠다니는 일종의 호텔이다 4 배 여행의 진미는 바다 구경이다 황해는 깊고 푸르다 인천에서 칭다오까지 비행기로 1시간 30분, 배로 최소 16시간. 합리주의자라면 당연히 비행기를 택할 터. 하지만 바다의 위로를 받고 싶은 날이 있다. 주저리주저리 어떤 넋두리를 풀어놓지 않아도 바다는 항상 “괜찮다, 다 괜찮다”고 토닥여 줬다. 그래, 배를 타자. 인천에서 칭다오, 웨이하이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위동훼리의 배편을 택했다. 공식 일정은 4박5일이었지만 이중 이틀 밤은 배 안에서 보내야 했다. 약 3만톤에 달하는 육중한 페리는 올해 초 경험했던 크루즈의 크기와 맞먹었다. 떠나기 전 멀미를 걱정했건만 덩치 큰 페리의 품에 안기자 오히려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배가 인천항을 떠났다. “뒤로 젖힌 의자를 똑바로 하고 안전벨트를 꼭 매라”는 지시는 없었다. 오히려 페리는 자신의 구석구석을 탐하라고 종용했다. 페리는 깔끔하고 친근한 대형 게스트하우스였다. 익명의 승객이 함께 머무는 넉넉한 다인실부터 ‘바다 위 호텔’이라 불러도 좋을 로열석까지 다양한 객실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일상의 축제를 이 배에서도 한바탕 벌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짐을 선실에 간단히 풀고 편의점·면세점부터 영화관·노래방·대중 목욕탕까지 하나하나 구경했다. 세련된 시설은 아니었지만 긴 항해시간을 달래 주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목적지인 칭다오에 닿기도 전에 이미 여행의 반은 채운 느낌이었다. 중국 여행을 위해 배에 올랐건만 ‘굳이 중국을 가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배 여행의 진미는 바다 구경이다. 꽤 오랜 시간 객실 밖에 머물렀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건 술뿐만이 아니다. 바다에도 취할 수 있다. 저게 황해로구나. 지리적으로 황해는 한반도의 서쪽이니 편의상 ‘서해西海’로 불린다. 그러나 서해라는 말보다 ‘황해黃海’라는 이름이 더 정감 갔다. 황허黃河, 황하의 토사가 흘러드는 ‘누런 바다’가 바로 황해다. 태평양이나 대서양은 푸른 물빛을 자랑하고 오호츠크해는 푸른빛도 모자라 심지어 초록빛마저 뽐낸다는데 황해 너는 어찌 이름이 황해더냐.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허는 맑을 날이 없다 했다. 그러나 배 위에서 내려다본 황해는 누렇기는커녕 깊고 더없이 푸르렀다. 황해를 가로지른 배가 긴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멈춰섰다. 그곳엔 이름조차 푸른 섬, ‘칭다오靑島, 청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칭다오에서 2시간이면 닿는 웨이하이의 항구는 아름답다 2 제2해수욕장에선 웨딩촬영 중인 신혼부부들을 볼 수 있다 3 여유로운 칭다오 사람들 4 역동적인 도시 칭다오는 파닥파닥 움직이는 물고기를 닮았다 5 해수온천을 즐길 수 있는 리조트가 늘어나고 있다 바다가 키운 도시 칭다오 칭다오는 항구도시다. 항구도시의 정체성은 바다가 규정했다. 밀물과 썰물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과 물자가 한번에 밀려왔다가 또 빠져나갔다. 반복되는 이별과 만남에 이골이 난 항구도시는 이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민첩했다. 그래서 칭다오는 다양한 재료가 독특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퓨전 요리를 닮았다. 칭다오의 상징이 돼 버린 칭다오 맥주도 독일인이 칭다오에서 개발한 퓨전 술이다. 더구나 중국에서 바다라니. 평생 바다를 못 보고 눈 감는 중국인이 많다는데, 칭다오는 바다 없인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고장이었다. 관광지도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5·4광장은 이번 여행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광장에 서 있으니 다사다난했던 칭다오의 근현대사가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갔다. 고삐 풀린 제국주의의 기운이 아시아 도처에 퍼진 1919년 5월4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일어섰다. 광장의 새빨간 조형물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하고 있다. 당시 독일에 이어 일본의 지배에 시달렸던 칭다오는 지금, 파닥파닥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처럼 강한 기운을 뿜어낸다. 공원 앞 해수욕장에선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실제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요트 경기를 개최한 곳도 바로 칭다오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은 소어산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제1해수욕장과 빠다관八大關, 팔대관이 자리한 제2해수욕장이 손꼽혔다. 제1해수욕장부터 시작해 작정하고 몇날 며칠을 바다만 보며 걷고 싶었다.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제2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을 빼곡하게 메운 인파는 대부분 예비 신혼부부들이었다. 오로지 웨딩촬영을 위해 제주도까지 여행 오는 중국인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바로 그 웨딩촬영 현장을 직접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 사람도 결혼철이면 이곳까지 차를 몰고 와 웨딩촬영을 강행한다고 했다. 제2해수욕장의 몸값을 올린 데는 빠다관이 큰 몫을 했다. 한자를 풀어 보면 8개의 관문인 빠다관은 해수욕장을 끼고 형성된 일종의 별장촌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곳엔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덴마크 등 세계 도처의 건축가가 지은 고급주택이 늘어선지라 팔대관은 그 자체가 만국건축박람회장이라 할 만했다. 칭다오의 바다를 넘본 세력이 많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별장 중에서도 유독 위용을 자랑하는 곳은 화스러우花石樓, 화석루였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장개석가 타이완으로 도망치기 전 화스러우에 머물렀던 까닭에 이곳은 ‘장제스의 별장’으로도 불렸다. 해수욕장과 맞닿아 있는 통에 예비 신랑, 신부는 화스러우까지 침범해가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Interview 칭다오의 친구들 칭다오의 오랜 벗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인공은 바로 위동훼리와 칭다오 맥주다. ‘위동훼리’는 직접 자신의 매력을 설파했고, ‘칭다오 맥주’는 인기 비결과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 놓았다. ▶Interview 위동훼리 “안 타봤음 말을 하지 마세요” 올해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20주년이라네요.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지금 저는 인천에서 산둥성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웨이하이와 칭다오로 운항 중이에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해가 1992년입니다. 제가 웨이하이로 처음 갔을 때는 1990년이죠. 수교 2년 전부터 저는 웨이하이와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단 말이죠. 그때만 해도 저를 이용하던 손님의 대다수가 보따리 상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짐을 한가득 업은 상인이 북적북적한 배를 상상하지 마세요. 20대 청춘남녀부터 나이 지긋한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나를 애용해요. 선입견만큼 무서운 건 없습니다. 일단 나를 만나 보고 판단해 주세요. 요즘 광고만 봐도 알 수 있듯 대세는 “빠름 빠름 빠름”이죠. 당신은 너무 느린 거 아닌가요? 내 콘셉트지요. ‘느림의 미학’이란 말을 왜 잊고 삽니까. 배 여행은 느려서 즐겁고 느려서 아름다운 거요.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비행기처럼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지 않아요. 안전벨트 따윈 없어요.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술을 마시세요. 바다 바람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란 말입니다. 내게 안기면 당신의 가슴은 ‘뻥’ 시원하게 뚫릴 겁니다. 몸무게가 약 3만톤이라 들었는데 웬만한 크루즈만큼 덩치가 크네요? 그런데 왜 ‘페리’인가요? 크기가 크면 크루즈고, 크기가 작으면 페리라고요? 아닙니다. 쉽게 설명해 크루즈는 오로지 여행을 위해 태어난 아이지만 저 같은 페리는 특정 지역을 오가는 이동수단입니다. 저는 승객과 함께 화물도 싣습니다. 반면 크루즈는 유명한 항구도시를 돌면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관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거든요. 그렇다고 페리는 여행자를 위하지 않는다? 그건 비약입니다. 위동훼리에서도 선상 불꽃놀이와 레크리에이션이 열려요. 웨이하이 배에선 삼겹살, 꼬치 등이 어우러진 맥주파티도 즐길 수 있답니다. 배 안에서 심심하진 않나요? 위동훼리에는 면세점, 편의점, 대중 목욕탕, 영화관, 노래방, 식당,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도 좋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최고죠. 솔직히 배 여행의 가장 큰 자산은 ‘바다’입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온갖 걱정이 다 사라지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은 ‘잘 먹고 잘 자기’거든요. 페리 여행은 그 조건을 갖췄나요? 그게 바로 저의 관심사입니다. 여행객이 잘 먹고 잘 잘 수 있도록 하자. 저를 이용하면 호화스러운 뷔페는 아니지만 깔끔한 한식 뷔페를 즐길 수 있습니다. 뽀얀 쌀밥과 따뜻한 국 그리고 정갈한 밑반찬을 상상해 보세요. 선실은 여러 종류가 있어요. 가장 고급 선실은 로열 클래스Royal Class입니다. 트윈침대, 테이블, TV, 개인 욕실 등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웨이하이 배의 로열석엔 바다를 볼 수 있는 베란다도 있어요. 친구나 가족끼리 묵으면 좋은 다다미방도 있으니 입맛대로 고르세요.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Interview 칭다오 맥주 “나는 독일 혈통을 이어받았어요” 솔직히 저, 맥주보다 소주가 좋거든요? 그런데 칭다오에선 당신에게 푹 빠졌어요. 마음을 빼앗은 비결이 있다면? 자극적으로 ‘톡’ 쏘지도 싱겁게 ‘픽’ 하고 무너지지도 않는 완벽한 ‘밀고 당기기’? 당신의 부모는 독일인이죠? 나를 두고 누가 그러더이다. ‘서세동점의 잔재물’이라고. 틀린 얘긴 아니지요. 나도 내 출신을 숨기지 않아요. 1897년 독일은 칭다오를 청나라로부터 빼앗았고, 6년 뒤 1903년 중국 최초의 맥주 공장을 이곳에 세웠습니다. 나를 만들기 위한 설비며 재료며 모두 독일에서 가져왔고요. 나는 동양에서 재탄생한 독일 맥주라 해도 무관합니다. 독일은 ‘맥주 순수령’까지 제정하며 맥주의 질을 관리했다잖아요. 나도 바로 그 혈통을 이어받은 셈이지요. 목으로 스르륵 넘어가는 나란 녀석은 내가 봐도 최고죠.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와 함께 칭다오에서도 맥주축제가 열리는 거 다들 아시죠? 무슨 막장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당신의 출생은 왜 이리 복잡해요? 좀더 쉽게 이해할 방법은? 나의 슬픈 탄생기를 직접 보고 듣고 싶다면 칭다오 맥주 박물관으로 가야죠. 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A부터 Z까지 알 수 있습니다. 박물관이라 하여 지겹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입구부터 ‘빵’ 터지는 조형물이 기다립니다. 공장의 지붕 위로는 대형 맥주캔 모양의 설치물이 뭉툭한 뿔처럼 솟아올라 있고, 시원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석조물도 다름 아닌 맥주병이랍니다. 여기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아닌 마르지 않는 맥주가 흘러요. 노란 빛깔의 맥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수도꼭지 조형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날 겁니다. 관람이 끝나면 널따란 시음장소가 있습니다. 나를 마음껏 느껴 보세요. 당신과 제대로 데이트하고 싶다면 칭다오 어디서 만나면 좋죠? 우리 지금 만나, 당장 칭다오 맥주거리에서 만나! 아까 말한 칭다오 맥주 박물관 근처가 바로 맥주거리랍니다. ‘Qingdao Beer Street’라는 대형 비석을 발견한다면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겁니다. 길 곳곳에서 ‘맥주 한잔 어때’라는 유혹의 손길이 끊이지 않죠. 이곳의 아파트 벽면에는 맥주 모양으로 장식된 전선이 뒤엉켜 있고, 가게의 간판도 맥주 병뚜껑 모양이랍니다. 맨홀 뚜껑도 눈여겨보세요. 맥주 마시는 귀여운 동물이 그려져 있으니까요. 아! 청양구는 어떤가요. 한국인 입맛에 맞는 훠궈 전문점이 있죠. 중국식 샤부샤부인 ‘훠궈’ 국물이나 짭조름한 양꼬치 한 입과 나는 찰떡궁합이랍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박근혜, 뭘 사과했는지 알 수 없어”

    “박근혜, 뭘 사과했는지 알 수 없어”

    “대통령 당선을 위해 하는 불완전한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아버지인 최종길 교수를 잃은 최광준(47)씨는 지난 24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과거사 관련 사과를 “진정성 없는 사과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63)씨도 “지난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대체 뭘 사과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박 후보를 비판했다. 이들은 26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성당에서 유신잔재청산 민주행동과 역사정의 실천연대 주최로 열린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라는 대담회에 참석해 “과거사 청산의 필수 전제는 제대로 된 사과”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최씨의 아버지 고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는 1973년 10월 유신헌법 반대시위를 벌이다 잡혀간 법대생들의 구명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간첩죄로 수사를 받다 사흘 만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장씨는 “유신 체제에서 말 못할 피해를 겪은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면서 “이번 기회에 역사를 바로 세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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