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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으로 사회문제·모순 해결책 제시하고파”

    “연극으로 사회문제·모순 해결책 제시하고파”

    연극 ‘사천의 착한 여자’, ‘한여름 밤의 꿈’, ‘러브레터’ 등을 연출하고 설경구, 유오성 등 한국의 대표 배우들을 키운 연극계의 스승 최형인(65·여)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가 이달 말 정년 퇴임한다. 최 교수는 25일 “학생들이 눈에 밟혀 쉴 수가 없다”면서 “퇴임 이후에도 석좌교수로 매주 8시간씩 강의하고 작품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10~11월 선보일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극단 ‘해’와 공동으로 연극 ‘칠호랑 찌로’를 공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 노동에 매몰된 일상 속에서도 꿈과 욕망을 실현하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룰 계획이다. 최 교수는 “앞으로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학교폭력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통해 사회문제와 모순을 해결할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는 1990년 연출 데뷔작이자 국내 초연작인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착한 여자’를 꼽았다. 그는 “당시 브레히트의 연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객석을 무대 위로 올려 배우가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후배들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최 교수는 “연습이 끝난 뒤 잠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는 후배들이 기특하다”면서 “앞으로도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따스한 마음이 관객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프레스코 기법’ 재현 중견 서양화가 오원배 동국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프레스코 기법’ 재현 중견 서양화가 오원배 동국대 교수

    추억의 명화 ‘고통과 환희’는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려진 천장벽화 ‘천지창조’의 탄생과정을 다룬 내용이다. 찰톤 헤스톤이 주인공 미켈란젤로를 맡아 명연기를 펼친다. 율리어스 2세 교황의 요청으로 벽화를 그리게 된 미켈란젤로가 숱한 고통을 겪으며 완성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다. 미켈란젤로는 천장벽화를 그리기 위해 임시로 마련된 18m 높이의 설치대 위에서 웅크린 채 일을 하다 온몸에 종기가 생기기도 했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작업을 하다 물감 세례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은 4년에 걸쳐 완성된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벽화를 그릴 때 대부분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다.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축축하고 신선하다’는 뜻이다. 프레스코화는 신선하고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를 말한다.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고 물에 용해되지도 않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프레스코화는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미켈란젤로 외에도 라파엘로와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거장들이 주로 프레스코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유화가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고 20세기 들어와 멕시코의 리베라, 오로츠코 등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프레스코의 전통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중견 서양화가 오원배(61) 동국대 교수는 2007년 5월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때 다른 여러 그림과 함께 전통 프레스코 기법의 그림 4점을 내걸어 화단의 관심을 모았다. 국내 중견 화가가 프레스코 기법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일단 그랬다. 당시 정영목 서울대(미술사) 교수는 “전통적인 방식의 진짜 프레스코를 처음 선보였다”면서 “젖은 듯 스며든 야릇한 색감과 그 기법상의 성격은 오원배 특유의 형이상(形而上) 회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데 아주 적격”이라고 평가했다. 5년 뒤인 2012년 11월 오 교수는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법당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후불 벽화를 그려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보통 불화는 부처 주변에 보살들을 배치하는데, 오 교수는 부처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 등을 부처 가까이에 그려넣어 눈길을 끌었다. 이후 그는 프레스코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오는 10월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 아트싸이드에서 그동안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스코화 3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600년 전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대가들이 즐겨 그렸던 전통 프레스코 기법을 직접 재현해 일반인들에게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9일 동국대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작업과정에 대해 먼저 물었다. 방음벽을 만들 때 사용되는 흡음판을 들고 설명한다. “이 흡음판에 석회를 입히고 마르기 전에 스케치를 한 다음 색깔을 입히는 것이지요. 젖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야 화학작용이 잘 이루어지면서 흡착력이 좋고 오래도록 변색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마르기 전에 그리는 전통기법을 사용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마른 상태로 그리는 이른바 프레스코 세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여러 차례 보수된 것도 마른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프레스코 회화는 원래 크레타와 그리스 벽화, 폼페이 벽화 등에도 나타난다. 중세 초의 벽화에는 여러 가지 혼합 방법으로 사용되다가 14~15세기 이탈리아 대가들에 의해 프레스코화가 가장 활발해졌다. 또한 아시아 쪽에서는 11~12세기 인도 지방의 일부 벽화에서 프레스코 기법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미술사가들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장군총 등을 프레스코화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류 최초의 회화는 프레스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타미라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된 여러 벽화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석회암 동굴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린 것이 오랜 세월동안 마모되지 않고 전해지게 된 것이지요.” 오 교수가 프레스코화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2년 프랑스 유학 때였다. 그는 당시 파리시내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서 지냈다. 말이 호텔이지 꼭대기의 비둘기집처럼 작고 허름한 곳이다. 아는 사람도 없어 방안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창문을 열고 한참 밖을 바라봤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붕 굴뚝의 색깔이나 생김새가 각양각색이었다. 토기로 구운 것, 쇠로 만든 것, 구리로 만든 것 등 그 형태가 달랐다. 또한 같은 집이라도 방의 수만큼 굴뚝이 솟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부터 시간만 나면 창문을 열고 빨강, 파랑 등 각기 다른 색깔의 지붕과 굴뚝을 보면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보들레르의 플라네르(한가롭게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처럼 할 일 없이 파리시내 곳곳을 기웃거리며 스케치를 했다. 그러면서 프레스코를 꾸준히 익혔다. 1985년 유학길에서 돌아온 뒤 세 차례 더 파리에 갔을 때에도 계속 스케치를 하며 프레스코화를 틈틈이 그렸다. 그러다가 2007년 인사동 개인전 때 네 작품을 슬쩍 공개한 것이 처음이었다. 유학시절을 회고하던 그가 잠시 한 일화를 소개한다. “제가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학과대표(아틀리에 양켈)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루브르박물관 앞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의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 둘레에 출입을 금지하는 펜스를 쳐놓은 것을 보게 됐습니다. 하루는 학생 10여명과 야간에 급습(?)을 했지요. 그 펜스에다 낙서화를 그린 뒤 ‘야음을 틈타 프랑스 졸개들을 데리고 와서 한글로 그림을 그리다’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매표소로 가려면 펜스를 돌아가야 하는데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있었고 이를 보고 기분이 좋다는 한국 사람도 있었지요.” 유학시절 재불화가인 한묵 선생과의 인연도 잊지 못한다. 이에 대해 “1961년 홍익대 교수를 박차고 파리로 가서 신문배달, 페인트칠 등 궂은일을 하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오신 분”이라고 말한다. 힘든 유학생활을 어떻게 견디고 또 앞으로 어떤 작가정신으로 걸어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 형태의 짤막한 그림을 좋아해 흉내를 자주 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미술반에서 활동했다. 이때 화가인 미술선생을 만나면서 장차 화가를 꿈꾸게 된다. 크고 작은 규모의 미술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시간만 나면 월미도와 차이나타운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대학 진학 이후에는 주로 ‘인간’과 ‘소외’에 관심을 둔다. 1970년대에는 가면이나 탈을 쓴 인간의 이미지를 작품에 주로 담는다. 군대생활과 맞물려 통제된 사회, 언로가 막힌 시대상을 표현하고자 가면을 동원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짐승 혹은 중성화된 생명체(인체) 시리즈’를 선보인다. 이때는 그가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강단에 선 시기에 해당한다. 유학시절에는 세계적으로 뉴페인팅이 주도하던 시기로 아방가르디아, 신구상회화 등에서 힘을 얻어 거친 표현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1990년대에는 ‘암울한 도심 풍경과 배회하는 유령(인간) 시리즈’, 2000년대에 들어서는 화면이 양분되고 꽃이 등장하는 ‘이중적 풍경’ 시리즈 등으로 이어진다. “지난 시대의 미술은 인간 정신의 표현에 그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회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표현 가능한 모든 기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제게는 프레스코화입니다. 프레스코화는 전통적 회화 기법이지만 제작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죠. 또 시도가 각기 다른 작품을 한데 모아 전체적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는 프레스코화에 자신이 생겼다고 말한다. 파리 유학 시절에 아름다운 지붕을 보면서 시작된 프레스코화를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에게 프레스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까닭도 이 같은 지난한 작가적 연구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나라 프레스코화의 전망에 대해서는 “사찰이나 여러 조형물 등에 반영구적인 벽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에둘러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오원배 화가는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송도고등학교를 나와 동국대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했다. 1982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1985년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수료한 뒤 귀국했다. 1986년 동국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대학강단에 섰다. 그러면서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연구교수로 세 차례 다녀왔다. ‘이달의 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1989년), ‘올해의 젊은 작가전’(조선일보 미술관, 1993년) 등 13회의 개인전과 300회 넘는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동아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등에서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아시아프’ 총감독(2012년)을 역임했다. 주요 상훈으로는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 1등상(1984), 프랑스예술원 회화 3등상(1985), 조선일보 올해의 젊은 작가상(1993년), 이중섭미술상(1997년) 등이 있다. 파리국립미술학교, 프랑스 문화성, 일본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국내외 30여곳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현재 동국대 예술대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여든둘 화백의 늙지 않는 캔버스

    여든둘 화백의 늙지 않는 캔버스

    정적에 휩싸인 갤러리가 시끌벅적한 중년 여성들의 목소리로 들썩인다. 전시를 앞두고 그림을 사기 위해 미리 작품을 둘러보는 VIP 고객들 탓이다.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82) 화백이 5년 만에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의 풍경이다. 정상화를 비롯해 박서보(81), 이우환(78), 윤형근(1928~2007) 등 1920~1930년대생 작가들은 최근 국내외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1970년대 국내 미술계를 휩쓸었던 모노크롬계 단색화가 해외 경매와 아트페어에서 고가에 거래되면서부터다. 지난 22일 폐막한 스위스 아트바젤에선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의 작품이 상종가를 쳤다. 갤러리 관계자는 “웃돈을 얹어 주겠다는 컬렉터도 있지만 쉽사리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이 같은 미술시장의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가들은 담담하다. 25년간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벌이다 1992년 귀국해 경기 여주시 산북면에 터를 잡은 정상화는 “여든이 넘어서도 일할 수 있으니 좋다”며 말문을 열었다. 6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화가는 화폭을 붙들고 지난한 투쟁을 이어 오는 중이다. “캔버스 위에 고령토로 초벌을 한 다음 캔버스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가로세로로 접어 고령토를 들어내고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우는 작업을 합니다. 6~7차례 반복해 말리는데 연중 작업 가능한 시기가 제한돼 어떨 때는 1년에 한 작품만 하기도 하지요.” 작가가 ‘뜯어내기’와 ‘메우기’로 설명하는 작업은 마치 말없이 고려청자를 빚는 도공의 손길과 닮았다. “말 잘하는 사람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처음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림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디다. 자세히 보면 선도 있고 면도 있고 균열도 있어 변화무쌍한데 말입니다.” 게다가 작가는 단아한 색을 뽑아내기 위해 단색 표면 밑에 수많은 물감을 칠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걸 그리고 마음을 담는다”고 했다. 그는 “현대미술의 요체는 실험정신”이라며 “그래서 내가 아직 젊은가 보다”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작가는 돈과 별 인연이 없다. 1956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어두운 사회상을 담은 앵포르멜(추상회화의 흐름) 계열 회화와 전위예술에 심취하기도 했다. 서울예고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미술책에서 본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며 사표를 던지고 1967년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 한묵 등 작가들과 교류했다. 1970년대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는 트럭 보조원, 막일꾼, 인쇄소 교정 등 밑바닥을 전전했다. 처음 그림이 팔린 것은 55세 때다. 안료가게에서 재료를 사 와 페인트 붓으로 그린 단색화였다. “기분이 참 묘했다”고 말할 정도다. 30년 넘게 인고의 세월을 견딘 작가에겐 부양해야 할 부인과 1남 1녀, 그리고 예술적 버팀목이 돼 온 지음(知音)들이 있었다. 평소 그를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 꼽는 이우환도 그중 한 사람이다. 1일부터 30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이어지는 개인전에는 1970년대 이후부터 최근작까지 45점이 망라된다. “대학 시절 잡지 화보를 보며 서구 현대미술과 처음 조우했는데, 표지의 추상과 조형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는 고백처럼 작가는 ‘영원한 청년’인지도 모른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손현주 26일부터 영국 MOK스페이스서 ‘섬은 부표다’ 개인전

    손현주 26일부터 영국 MOK스페이스서 ‘섬은 부표다’ 개인전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사진가인 손현주(49)가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3일(현지시간)까지 영국 런던 박물관거리에 자리한 MOK스페이스에서 개인전 ‘섬은 부표다’(The island is a buoy)전을 연다. 20년간 신문기자로 일한 작가는 2010년 고향인 충남 태안군 안면도로 돌아가 작품활동에 매진해 왔다. 1년간 서울신문에 음식 칼럼(‘계절밥상’)을 연재하기도 했다. 작가는 ‘카메라를 멘 순례자’의 삶을 자처한 지난 4년여의 시간을 렌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한번에 보름씩 섬을 일주하며 섬의 맨살을 구석구석 기록해 스스로를 ‘순환 속의 오브제’로 만들었다. 그는 “이 섬에서 소우주인 인간은 부표라는 인위적인 섬을 띄웠다”면서 “부표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부표를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작가의 사진을 눈여겨본 런던의 한 큐레이터가 제안해 이뤄졌다.
  • 작품인 듯 자연인 듯… 프랑스 미술계, 한국 작가와 썸 타다

    작품인 듯 자연인 듯… 프랑스 미술계, 한국 작가와 썸 타다

    올여름 프랑스 미술계가 한국 작가들에게 유난히 집중하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추상예술의 대표 작가 이우환(78)이 파리 근교의 유서 깊은 베르사유 궁에서 17일부터 ‘이우환 베르사유’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갖고 있다. 베르사유궁에서는 몇 해 전부터 매년 여름 시즌에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선정해 전시회를 열고 있다. 미니멀하고 명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이우환은 이번 베르사유 궁 전시에서는 자연석과 철판을 이용한 ‘관계항’(Relatum) 연작을 선보인다. 미술관 내부에 설치된 커튼타워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앙드레 르노트르가 설계한 정원에 작품을 설치했다. 자연 그대로의 물질인 돌과 가공된 물질인 철판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통해 르노트르가 설계한 독창적인 디자인의 정원이 담고 있는 역사와 숱한 이야기들을 동양적 사유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우환 작가는 “돌은 자연을, 철판은 산업사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들 소재를 통해 문명을 얘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설치작품들은 베르사유 궁 건물 안에도 일부 전시되지만 대부분 궁전 앞 정원과 운하 주변 등 야외에 설치돼 있다. 연간 방문객 675만명에 이르는 베르사유 궁 미술관은 루이 14세 시절의 세계 예술 중심지로서 영화를 현대예술로 되살린다는 취지로 2008년 제프리 쿤스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유명 작가들을 차례로 초대해 왔다. 이우환은 아시아 작가로는 일본의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궁 박물관장은 “이우환의 작품은 조용하고 매혹적인 시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지금까지 실내 전시에는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으며 야외 설치 및 조각 작품 전시는 400만명이 관람했다. 이우환의 베르사유 전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계속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북서부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거주하며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각가 박은선(49)은 프랑스 서부 해안의 휴양도시 라볼에서 시 초청으로 야외 조각전을 갖는다. 박은선은 “라볼은 유럽 대륙뿐 아니라 바다 건너 영국인들도 즐겨 찾는 프랑스 서부 최고의 휴양지로 매년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한 명 선정해 여름 휴가기간 중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며 “지난해 룩셈부르크의 에스페랑주 시, 스위스 루가노 시에서 차례로 열린 야외 조각전이 좋은 평가를 받아 이번에 운 좋게 초청작가로 선정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리석 조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국립아카데미 출신의 박은선은 색깔이 다른 대리석 혹은 화강석을 판으로 만든 뒤 깨뜨려서 번갈아 붙이고 형태를 다듬는 방식으로 ‘무한증식’, ‘연결성’, ‘공유’ 등 연작을 발표해 왔다. 18일 개막행사를 시작으로 오는 9월까지 넉 달 동안 열리는 야외 조각전에서는 대리석과 화강석을 이용한 그의 대표작 중 대형 모뉴멘트 작품 8점을 시내와 해변 산책로, 공원 등에 전시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제주에 올레길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 동안 제주의 둘레만을 돌고 돌았던 당신에게 이제 제주의 속살을 밟아 보라고 말한다. 더 깊은 제주가 여기 있다.예술 따라 걷기 - 서귀포시 유토피아길추억 따라 걷기 - 제주시 두맹이 골목 자연 따라 걷기 -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예술 따라 걷기서귀포 70리 예술산책남인수의 노래 ‘서귀포 칠십리’를 아는 사람 혹은 서귀포 칠십리를 걸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서귀포 유토피아길을 걸어 본 사람은? 많다. 그러나 더 많아져야 한다.서귀포를 걸어야 하는 이유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입구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서귀포가 왜 칠십리인가?” 북쪽의 제주 시청부터 남쪽의 서귀포 시청간의 직선거리가 27.2km쯤 되는 걸 보니(70리는 약 27.5km이다), 그래서인가 했지만, 추측은 틀렸다. 1653년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칠십리길은 조선시대 새로 부임한 정의현 현감이 성읍의 현청을 출발해 서귀포구까지 초도순시를 나섰던 70리 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의 청사와 객사, 민가 등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관광 필수코스가 된 남제주군 표선면의 성읍민속마을이다. 그 옛날 현감이 걸었던 길이 칠십리건, 구십리건 민초들이야 무슨 상관이었을까 싶었는데, 또 틀렸다. 서귀포 사람들에게 서귀포칠십리는 단순한 거리 개념이 아니라 이상향과 피안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1938년에는 ‘서귀포칠십리’라는 곡(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 만들어져 서귀포가 제주를 너머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서귀포 뒤에는 서귀포칠십리축제, 서귀포칠십리 건강달리기대회, 서귀포칠십리 70경, 서귀포칠십리 감귤 등 칠십리가 꼭 따라붙는다. 아무튼 오늘 걸어야 할 길이 70리가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 서귀포 시내를 타원형으로 돌게 만드는 ‘유토피아 길’은 고작 4.7km의 워킹투어 코스다. 천혜의 자연포구와 섬, 기암들이 줄지어 선 해안절경으로 이뤄진 비경만을 쫓는 길이 아니다. 제주를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예술 풍경이 이 길에서는 더 중요한 테마다. 박물관을, 미술관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듯, 유토피아길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경고 하나. 하나하나 곱씹으며 걷다 보면 체감거리는 칠십리를 훌쩍 넘을 수도 있다.이중섭의 제주-추억유토피아길의 공식 추천 루트가 시작되는 곳은 이중섭 미술관이다. 사실 서귀포와 이중섭(1916~1956년)의 인연은 길지 않다. 1·4 후퇴 때 원산을 떠난 그의 가족이 부산을 거쳐 제주 서귀포에서 머문 시간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채 1년이 안 된다. 그러나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여러 작품이 제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주지 그리고 이중섭 공원과 거리까지 조성된 것에는 시의 노력과 미술계의 도움이 컸다. 2003년에 가나아트가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65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이중섭 전시관은 미술관으로 등록(2종)할 수 있었고, 2004년에 갤러리 현대가 ‘파란 게와 어린이’ 등 53점을 기증해 1종 미술관이 될 수 있었다. 서귀포시 중심에 위치한 이중섭 거리는 명소가 된지 오래다. 주말이면 지역 예술가들이 참가하는 목공, 도자기, 퀼트, 천연염색, 한지공예, 칠보공예, 민예품, 서화류 등을 판매하는 아트마켓(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이 열려서 더 북새통을 이룬다. 봄꽃이 만개한 이중섭 공원의 벤치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이중섭 조각상이 상대적으로 쓸쓸해 보일 정도였다. 사실 이중섭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가난하고 고독했다. 종이를 사기 어려워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은지화’ 탄생에 얽힌 그의 비화는 유명하다. 복원된 그의 서귀포 거주지는 꽤 커 보이는 초가집이지만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곳은 1평 남짓한 구석방이었다. 가난했지만 가족들이 함께였기에 그에게 서귀포는 가족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길 떠나는 가족’처럼 수레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상황이든, ‘게와 어린이’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든, 그의 작품 속 가족의 풍경은 항상 행복하다. 이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남덕)과 주고받은 애틋한 편지들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변시지의 제주-고독이중섭에 쏠린 관심에 비해 지난해 타계한 변시지(1926~2013년) 선생의 미술관 설립 계획이 무산 위기에 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외사촌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1987년에 설립해 시에 기증한 기당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일본에서 수학하고 서울로 돌아와 초창기에 정밀한 풍경화를 그렸던 변 화백의 화풍은 후학양성을 위해 1975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후 크게 달라졌다. 바닥 장판색에서 착안했다는 흙빛에 담긴 제주의 바다와 바람은 그에게 ‘폭풍의 화가’라는 별칭까지 선사했다. 초가, 소나무, 돛단배, 조랑말, 까마귀, 청년 등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작가의 심리상태가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그의 작품 2점이 살아있는 동양화가로는 최초로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전시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흥분했지만 멀리 워싱턴까지 갈 필요 없이 기당미술관에만 가도 그의 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기당미술관의 명예관장이기도 했다. 작품뿐 아니라 건물도 훌륭하다. ‘눌(땔나무 등을 쌓은 더미를 말하는 ‘가리’의 사투리)’에서 영감을 얻어 나선형으로 설계한 박물관은 자연채광이 잘 들어오고 숨은 정원까지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시 외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미술관 앞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전망도 최고인데 말이다. 그의 작품명이기도 한 ‘외로운 시간’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이왈종의 열정과 중도지난해 5월 서귀포에 문을 연 왈종미술관은 유포피아길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립이 아닌 사설미술관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왈종은 변시지와 더불어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유명하다. 전국적인 커피체인점인 드롭탑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의 그림이 새겨진 텀블러, 머그컵, 핸드폰케이스 등이 판매 중이기 때문. 민화풍의 그의 그림은 꽃과 자연을 화사하게 담고, 춘화적인 요소도 강하다. 들판에서 커플이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처럼 거침없이 묘사된 제주의 일상은 요새 ‘제주앓이’를 앓고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더 불타 오르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왈종(1945년~)이 제주를 선택했던 당시의 상황은 그리 밝지 않았다.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하다 그만두고 1990년 낙향했을 때 그의 소망은 남은 몇년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가족과 떨어진 고독한 생활을 20년 넘게 지탱해 준 것은 시와 그림이었다. 그런 그가 제주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태풍이 올 때를 꼽았단다. 변시지가 즐겨 그렸던 제주의 폭풍은 어쩌면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현재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주차장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다. 문화재보호지역이지만 미술관으로 겨우 허가를 받았다. 미술관 겸 그의 작업실, 주거지이지만 사실 그가 작품 300여 점을 기증해 설립한 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1층은 어린이 미술교육실, 2층에는 자신의 작품 90여 점은 전시했고, 3층은 그의 작업실, 옥상 황토방이 그의 잠자리다. 자신이 머물 공간이었기에 설계에만 2년이 걸릴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제주가 천국보다 좋다는 그는 여생을 제주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살 계획이란다. 현중화의 열정과 붓이왈종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글씨가 그림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왈종미술관에서 멀지 않다. 소암 현중화 선생(1907~1997년)의 서예 작품들을 전시한 소암기념관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즈음하여 2008년에 세워진 곳이다. 모든 서체에 능했던 현중화 선생은 ‘먹고 잠자고 쓰기’만 했다고 할 정도로 작품활동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특히 취중에 흘려 쓴 선생의 ‘취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하다. 서예를 전혀 몰라도, 한자를 잘 몰라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같은 서체의 같은 글자라도 쓸 때마다 모양이 다른 화첩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본에서 유학한 소암은 더 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49세에 귀국하여 여생 동안 서귀포를 떠나지 않았다. 기념관 옆에는 선생의 유택인 조범산방眺帆山房·돛단배가 바라보이는 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오른 경지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지만 무료 관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서예동호인들이 더 열광한다고 한다. 참고로 소암기념관 앞은 먼나무 가로수길이다. 제주와 보길도 등 남부의 저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먼나무는 가지가 꺾일 듯 흐드러지게 맺히는 붉은 열매로 여행자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가의 유토피아지금껏 대가들에게 헌정된 미술관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유토피아길의 진수는 길 위에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조각상, 설치 작품, 벽화들이 칠십리시공원과 서귀포시 이곳저곳에 자리잡고 있다. 2012년 진행된 마을미술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40여 점이나 되니 잠깐 한눈을 팔면 놓치고 지나칠 정도다. 조가비, 도자기, 유리, 테라코타, 아트타일, 유리자갈 등을 이용한 부조벽화 작품들은 조용한 포구마을을 야외 갤러리로 만들었다.유토피아길 덕분에 한때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서귀포 도심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중섭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인 옛 아카데미 극장도 현재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1960년대 건립된 아카데미극장은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방치된 상태였지만 조만간 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날 예정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예 서귀포행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대의 실험예술계를 이끌었던 퍼포먼스 예술가 김백기 선생도 2013년 서귀포에 자리를 잡았다. 2012년 마을미술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제주가 홍대처럼 될 것이라고 했던 어느 기자의 예언은 불과 2년 만에 (좋건, 나쁘건) 현실이 된 듯하다. 이효리 같은 슈퍼스타들도 제주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제주의 바다, 제주의 꽃, 제주의 오름과 산, 제주의 돌멩이까지, 제주의 모든 것이 예술가들에게는 영감과 위로의 대상인가 보다. 돈도 명예도 마다하고 이 작은 섬에 살기를 고집할 만큼. 특히 서귀포가 대한민국 예술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혹시 붓끝 모양을 닮았다는 섶섬의 기운 때문은 아닌지, 싱거운 생각마저 해 본다. 어떤 이유에서건 서귀포는 예술가들의 유토피아가 되고 있다.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호텔 섬오름 www.sumorum.com☞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찾아가기제주공항에서 600번 공항리무진탑승, 서귀포 경남호텔 하차. 이중섭거리에서 탐방 시작.문의 서귀포시 문화예술과 064-760-2481서귀포 유토피아길 | 서귀포 시내와 자구리해안로를 포함하는 총 4.7km의 워킹투어코스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이중섭 공원(출발)→이중섭미술관→이중섭거주지→동아리창작공원(아트하우스, 문화예술디자인시장)→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 자구리해안→소남머리→서복전시관→소암기념관 ▶프로그램 해설사와 함께하는 작가의 산책길 탐방 | 매주 토·일요일 오후 1시 출발,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 |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이중섭 문화의거리 일대 ▶통합입장권 이중섭 미술관, 기당미술관, 서복전시관, 소암기념관을 모두 입장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을 1,300원(총 600원 할인)에 판매 중이다.글·사진 손고은 기자 취재협조 제주관광공사 www.ijto.or.kr
  • [문화단신]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 개관전

    [문화단신]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 개관전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인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을 기리는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이 29일 개관전을 선보였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에 1851㎡ 규모로 개관전에선 작가의 대표작인 ‘자화상’, ‘식탁’, ‘동물가족’ 등 60점을 전시한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작가는 이중섭, 박수근 등과 함께 근·현대 화단에 발자취를 남겼다. 미술관은 전통 기와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개관준비위원장인 정영목 서울대 교수는 “전체 건물의 높이나 윤곽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오는 8월 31일까지. 1000~2000원. 개관식이 열리는 오는 6월 16일까지는 무료. (031)8082-4245.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염상섭 만나려면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염상섭 만나려면

    지난 1일 횡보 염상섭(1897~1963) 상이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에서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종로출입구 쪽으로 옮겨져 설치됐다. 김영중의 작품인 염상섭 상은 함께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 형태의 조각품으로 1996년 ‘문학의 해’에 문인들이 한국근대문학을 대표할 인물로 염상섭을 뽑은 것을 기념해 설치됐다. 처음 종로구 종묘광장 입구에 설치됐던 상은 2009년 종묘광장 정비사업 때문에 엉뚱하게 삼청공원으로 이전됐었다. 이후 염상섭 상에 걸맞은 장소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문화계와 시민사회는 광화문이라는 새 터전에 만족하는 눈치다. 지식인, 문인, 언론인으로서 그가 생전에 활동한 곳이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지금도 광화문 근처에 모여 있는 경향신문, 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며 작품활동을 폈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두 파산’, ‘만세전’ 등의 작품이 있고 ‘삼대’를 탈고한 뒤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화과’와 ‘백구’를 후속작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사물 유람(현시원 지음, 현실문화 펴냄) 새롭고 멋진 신상품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너무나 평범해서 관심 밖에 놓여 있는, 그러나 나름의 사연이 있는 사물들에 대한 단상. 거리의 신호등부터 휴일 을지로 상점가의 주인공 삼색 셔터, 스스로 부르르 떨게 만들어진 커피숍의 진동 알림벨, 낯설고도 귀여운 한강의 오리배, 언제나 그 자리에서 누군가 움직여 주길 기다리는 공원의 운동기구, 괴팍한 철근을 덮은 공사장의 가림막, 정치인의 홍보용 사진에 무료로 출연한 빗자루 등 동시대 인간사를 둘러싼 시각이미지를 살펴보고 뜯어본다. 현직 독립큐레이터인 저자의 독특한 안목을 따라가다 보면 내리는 결론, 세상에 쓸모 없는 사물은 없다. 246쪽. 1만 6500원. 작가의 붓(도널드 프리드먼 지음, 박미성·배은경 옮김, 아트북스 펴냄) 문학적 집필활동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간 작가-화가들에 대한 옴니버스 전기. 안데르센, 괴테, 예이츠, 귄터 그라스, 빅토르 위고 등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동서양 작가 100명이 남긴 아름다운 회화·드로잉·조각작품 200여점을 작가의 삶과 함께 소개한다. 변호사에서 소설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저자가 커트 보네거트, 톰 울프 등 저명한 작가와 한 미발표 인터뷰, 수십년간 연구해 온 예술분야의 지식을 접목해 완성했다. 펜과 붓, 글과 그림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예술적 감흥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문학과 예술의 근원 또한 같다는 점, 작가와 화가는 하얀종이 위에 짙은 자국을 만들고자 하는 본능을 공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36쪽. 3만 5000원. 행복에게 길을 묻다(최창일 지음, 푸른길 펴냄) ‘스스로 행복해지기’가 어느 때보다 큰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이즈음 중견 작가 최창일이 행복한 삶을 위한 단상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행복과 동행하는 방법에 대해 작가는 “최선을 다해 감사하고, 배려와 지혜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노자를 인용한다. ‘내 인생에 미안하게 살지 않는 기술’,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의 비결’, ‘성공을 위한 조건’ 등 4장으로 나뉘어진 책은 행복의 길라잡이가 돼 줄 잠언들로 가득하다. “…행복의 시작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삶에 닥친 고통을 이길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산골 작업실에서 자연을 화폭에 담는 최성환 화가의 서정적 그림들이 책 갈피갈피에 곁들여져 지혜가 스민 글맛을 더욱 빛내준다. 169쪽. 1만 2000원. 미디어와 민주주의(제임스 커런 지음, 이봉현 옮김, 한울 펴냄) 미국인 3분의2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국적을 모르고 교토의정서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진다. 반면 TV시리즈 ‘24’로 고문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섹스 앤드 더 시티’로써 여성 역할과 기대에 대한 토론을 촉진한다. 미국 저널리즘의 이상과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영국 언론학자인 저자는 미국 저널리즘의 성격과 역할 분석을 시작으로 미디어의 역사와 문화·기술, 영국·덴마크·핀란드와 비교, 주요 관심사의 변천 등을 훑으면서 민주주의와 관계 탐구를 이어간다. 저자가 평생 천착한 연구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424쪽. 4만 3000원.
  •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우리 전통 화법 중에 ‘낙화’(畵)라는 것이 있다. 화선지, 나무, 천, 가죽 등의 재료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글씨와 문양을 그려 넣는다. 붓이 아닌 인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화와 공예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서 일반인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낙화를 그리려면 고도의 수련과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따라서 끊임없는 장인정신으로 달궈진 예술 혼이 아니면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끊임없는 정진이 요구된다. 지난 13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25번 국도를 따라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가 누청삼거리 부근에 버섯 모양의 집 두 동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한 집은 ‘청목화랑’이고 다른 한 집은 ‘낙화 체험장’이다. 먼저 ‘청목화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8m 길이의 12폭 병풍 ‘낙화강산무진도’(畵江山無盡圖)가 떡하니 진열돼 있었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를 전통 낙화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정조, 순조 때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인 ‘강산무진도’는 조선 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대 걸작 중의 하나다. ‘어떻게 이런 대작을 인두로 다 그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몇 발자국 옮기자 종이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낙화산수도, 사군자, 연과 버들 등 여러 그림들이 앙증맞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합해서 모두 100여점이다. 김영조(64)씨는 국내 유일의 전통 낙화장인(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22세 때 낙화에 입문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전통 낙화의 맥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42년째 낙화 인생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일까. 그가 오는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해 한국 낙화의 전통미를 한껏 알릴 예정이다. 그토록 소망했던 우리의 전통 낙화가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하여 김씨는 어느 때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화랑 옆에 있는 작업실에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예술도시 아솔로에서 5월 한 달간 열립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조직위원회에서 초청하는 전문작가들만 참가한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낙화가 그들과 함께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애지중지 여기는 작품 7점을 엄선해 전시할 예정이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낙화 기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까지 시연할 예정이다. 그가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지난해 9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탈리아 작가와 에이전시들이 전시된 낙화와 대작을 시연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그를 초청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그려도 타지 않고, 특유의 원근법으로 살아 있는 산수화를 잘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낙화는 중국과 한국에만 있는데 특히 한국의 낙화를 더 알아줍니다. 예술성이 높아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번 아솔로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인 낙화 예술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겠습니다.” 낙화 전수자인 그의 딸 유진씨도 동행해 비엔날레 현장에서 함께 시연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낙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면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에 낙화와 관련해 1598년에 태어난 정부인 장씨를 언급하고 있어 문헌상으로는 400년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822년쯤 밀양 박씨 박창규가 임금님 앞에 가서 시연할 정도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장안 양반집에 낙화 그림이 한 점씩은 대부분 있었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김씨의 스승은 일제강점기 때 활발히 활동했던 운포 백학기와 설봉 최성수의 계보를 잇는 전원 전창진이다. 전원은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한국낙화연구소를 차려 낙화를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출판업으로 전향했다. 당시 전원의 제자가 여러 명 있었으나 김씨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다. 김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충북의 천도교 책임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정치에 관심이 많아 27세 때 부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을 졌다. 이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씨 가족은 서울 뚝섬 쪽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당시 서울시가 무허가촌에 살고 있는 시민을 강제로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장남인 김씨가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원래 김씨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곧바로 종이를 사다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를 도와 바느질도 곧잘 했다. 지금의 예능적 끼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중학교 때에는 동양화를 좋아해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런 김씨를 보고 미술 선생도 미술분야로 진로를 정해 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알아보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낙화연구생 모집’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됐다. 이게 뭘까. 그때만 해도 낙화라는 말이 생소했다. 그러나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내용에 곧바로 모집광고를 낸 종로에 있는 한국낙화연구소로 달려갔다. “그때 장교빌딩 5층에 학원(낙화연구소)이 있었지요. 30여명의 수강생들에게 낙화를 가르치는 전창진 선생님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마음이 금방 끌리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는 집이 성남이라 낙화연구소에서 기숙하며 열심히 배웠다. 스승이 그려준 낙화를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렸다. 낙화의 소재는 주로 동양화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사군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꽃과 새, 산수, 인물 등을 배워 나갔다. 잠 잘 시간을 줄여가며 낙화에 몰두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낙화연구소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30명이 넘던 수강생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아 있는 낙화연구소 수강생 5명과 함께 종로2가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합숙을 하며 낙화를 연습했다. 나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작과 판매를 하며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혼자 남게 된 그는 기념품을 제작해 전국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던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 100여점을 풀어놨는데 10여점이 팔렸다. 이어 속리산 입구에 기념품 상점을 열었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기념품을 팔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소망했던 일, 즉 자신의 공방을 열어 본격적으로 전통 낙화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가서 전통회화를 감상하고 연구를 했다. 회화와 도록에 나와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무에 낙()을 하는 기술과 종이에 낙을 하는 기술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두의 온도가 적당하고 손놀림이 빨라야 종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두의 열로 그림과 선의 음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반복된 노력 끝에 마음대로 종이에 낙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게 됐다. 그는 2007년부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10여 차례 수상을 하게 됐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김씨의 낙화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을 권했다. 결국 심사과정을 거쳐 2010년 10월에 지정됐다. 그동안 그린 낙화는 수천점에 이른다.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산수화와 마애불이 특히 인기가 높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을 국내외에 꾸준히 선보이고 후진 양성에 진력해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영조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낙화에 입문했다.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79년 청목화랑을 개원했다. 2010년에 충북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한국 낙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외 활동 이력으로는 일본 궁기현(宮岐縣) 낙화전(2003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워크숍 참가(2012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통공예작가 워크숍 참가(2013년) 등이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선(200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입선(200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2009년) 등이다.
  • 김기덕 감독 등 문화인 초청… 서울고법, 재판공개방청 진행

    서울고법 민사2부(부장 조해현)는 18일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오픈코트’(Open Court·재판공개방청)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영화감독 김기덕씨를 비롯해 소설가 김훈, 미술평론가 손철주, 화가 사석원, 드라마 작가 정영선씨 등 9명이 참석했다. 국가보안법 사건 등 민·형사 재판을 방청한 사석원씨는 “그림 활동에만 전념하다 보니 재판을 경험하기 어려웠는데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다”면서 “예술은 사회의 모든 현상이 투영돼 나가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번 방청도 앞으로의 작품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기덕씨는 “여러 재판을 방청해 봄으로써 다양한 삶이 녹아 있는 시추에이션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배우 최재환 전역… ‘조용히’ 육군 만기제대 “곧바로 작품활동 돌입’

    배우 최재환 전역… ‘조용히’ 육군 만기제대 “곧바로 작품활동 돌입’

    배우 최재환이 지난 12일 전역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14일 최재환의 소속사 등에 따르면 지난해 2월 13일 입대했던 최재환은 지난 12일 육군 현역병 복무를 마치고 만기 전역했다. 최재환은 당시에도 평범하게 입대하고 싶다며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전역도 가까운 지인들의 축하만 받으며 조용히 사회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복무 중에도 여러 작품의 출연을 요청받았던 최재환은 휴식 없이 곧바로 연기에 복귀해 작품활동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작품 출연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2년 영화 ‘미안합니다’로 데뷔한 최재환은 영화 ‘국가대표’, ‘비열한 거리’, ‘화려한 휴가’, ‘기담’과 드라마 ‘파스타’, ‘무사 백동수’, ‘식객’ 등 다양한 작품에서 개성있는 캐릭터를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지구촌 책세상] ‘이시다 테츠야 노트’

    [지구촌 책세상] ‘이시다 테츠야 노트’

    낡고 녹슬어 더 이상 못쓰게 된 의자가 있다. 한때 그 의자의 주인이었던 부장은 여전히 그 의자에 앉아 있다. 아니, 그 의자가 되었다. 부장 역시 낡고 녹슬어 더 이상 못쓰게 되어버렸다. ‘사용하지 않는 빌딩의 부장의 의자’라는 제목이 붙은, 일본 화가 이시다 테츠야의 1996년 작품이다.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 샐러리맨의 공허한 일상,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불안감 등 현대 일본인들의 초상을 기묘하고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낸 화가의 작품 아이디어 노트가 ‘이시다 테츠야 노트’라는 이름으로 최근 출간됐다. 그의 작품은 ‘로스제네(잃어버린 세대·일본 버블 붕괴 후 취업 빙하기였던 1994~2005년에 신규 졸업자가 돼 비정규직을 전전한 세대를 뜻함)의 초상화’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1990년대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이시다는 2005년 건널목 사고로 31세에 요절한다. 사고가 아닌 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작가 자신이 히키코모리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을 정도로 그는 ‘우울한 천재’의 전형이었다. 시즈오카현 야이즈시의 시의원을 지낸 아버지에게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1992년 무사시노대학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한다. 96년 졸업 후 취직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작품활동에만 전념했는데, 1997년 일본예술문화진흥회(JACA) 비주얼 아트전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99년과 2003년 개인전을 열었다. 도쿄올림픽의 로고와 포스터 디자인으로 유명한 전후 일본 그래픽 디자인계의 대부 가메쿠라 유사쿠가 그의 작품을 접한 뒤 “대체 뭘 먹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크리스티 등 국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이시다 테츠야 노트’에는 그의 사상적 기원이나 작품의 발상 등을 짐작해볼 수 있는 스케치들이 실려 있다. 대표작 ‘날 수 없는 사람(1996)’, ‘연료 보급 같은 식사(1996)’ 등을 비롯해 ‘타인의 자화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자적 분야를 개척한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단초가 된다. 이 책은 그의 작품처럼 무겁고 음울하고 깊게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인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고소영 둘째 임신…싱글맘 돕기 1억원 기부 이유있었네

    고소영 둘째 임신…싱글맘 돕기 1억원 기부 이유있었네

    톱스타 부부 장동건과 고소영이 둘째 아이를 갖게 됐따. 7일 스타뉴스는 고소영이 현재 임신 중으로 태교에 전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동건과 고소영은 최근 둘째 임신 소식에 기뻐하며 싱글맘을 돕는 데 기부하는 등 좋은 일에 앞장서고 있다. 장동건과 고소영은 지난 2010년 5월 결혼해 그해 10월 첫째 아이를 낳았다. 고소영은 첫째를 낳은 뒤 최근까지 미혼모, 싱글맘 등을 돕기 위해 1억원을 기부하는 등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최근 고소영은 싱글맘을 위한 다큐멘터리 출연도 결정한 바 있다. 고소영은 하정우와 출연을 논의했던 영화를 비롯해 작품활동을 잠시 뒤로 미룰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우는 남자’ 촬영에 들어가는 장동건은 영화 촬영으로 바쁜 가운데에도 고소영의 둘째 임신으로 행복해 하는 한편 미안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英 조각가 앤서니 카로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앤서니 카로가 24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89세. BBC방송에 따르면 녹슨 철판, 철골을 이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카로는 지난 6월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최근까지도 100세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하겠다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는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과 설치공간의 구분을 없애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5년 녹슨 철판을 쓴 작품 ‘툰드라’로 명성을 얻었고, 1987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조계종 포교대상 김애주·남상민

    불교여성개발원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이 시상하는 제25회 포교대상에서 김애주 전 원장과 남상민 부원장이 포교원장상을 받는다고 20일 밝혔다. 김애주 전 원장은 동국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사회포교에 앞장서왔고, 불교여성연구소를 설립해 불교와 여성학의 학문적 성과를 아우르는 리더십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상민 부원장은 한국예절문화원을 설립해 전통예법 전승과 현대생활 예절의 개발·보급에 기여해 왔으며, 불교 자수 분야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모태 미녀’ 김민정, “죽염으로 눈동자 씻는다” 충격

    ‘모태 미녀’ 김민정, “죽염으로 눈동자 씻는다” 충격

    맑고 큰 눈으로 유명한 배우 김민정이 자신만의 특별한 눈동자관리 방법을 소개했다. 16일 SBS 라디오 파워FM ‘공형진의 씨네타운’에 출연한 김민정은 “어쩌면 이렇게 눈동자가 맑은 것이냐. 따로 눈동자 관리도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에 가면 메이크업을 지우는 것처럼 일주일 2~3번 씩 눈동자를 죽염으로 헹군다”고 밝혔다. 김민정은 “사실 눈이 크니깐 다른 사람보다 먼지의 영향을 받는다”면서 “워낙 촬영 세트가 공기가 안 좋아서 그렇게 해준다. 요즘처럼 건조할 때 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했다. 1989년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민정은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가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모태 미녀’ 배우다. 오는 17일에는 김민정이 천정명과 함께 호흡을 맞춘 로맨스 코메디 영화 ‘밤의 여왕’이 개봉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고] 미술시장의 미래, 소장문화에 달려있다/표미선 한국화랑협회 회장

    [기고] 미술시장의 미래, 소장문화에 달려있다/표미선 한국화랑협회 회장

    세계 경기 침체와 함께 어려움에 빠져 있던 미술계가 요즘 들어 빠른 속도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평생 미술계에 몸담아 오며 미술품 시장의 등락을 경험했지만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얼어붙은 신생 컬렉터들의 구매심리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 점은 못내 아쉽다. 미술품 수집의 매력에 빠지기도 전에 사회 전반의 부정적 견해로 건전한 컬렉터들이 움츠러들어 미술 시장이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건전한 미술시장의 형성과 성장을 위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미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장하는 문화가 널리 확산되는 일이다. 구매자가 없으면 작가들의 작품활동 의욕도 저하될 수밖에 없다. 좋은 작가와 해외의 미술품을 국내에 소개, 유통시키는 갤러리 역시 다르지 않다. 컬렉터와 일반인의 미술품 수집·소장이 보편화될 때 더 다양하고 특색 있는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궁극적으로 미술시장의 성장을 가져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화랑의 수준과 한국 미술계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컬렉터 층을 개발해 시장 규모를 키우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예술 선진국이라 불리는 독일, 프랑스 등의 갤러리를 방문해 보면 대규모 전시부터 소규모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직접 그림을 보고 배우는 어린아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릴 때부터 좋은 작품을 스스로 판단하는 감각을 키우니 미술에 대한 안목과 관점이 자리 잡고 이는 자연스레 집에 걸어놓을 예술품을 구매하고 소장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작품을 사면서 경제적, 정서적으로 작가를 지원하는 후원자를 의미하는 페이트런도 자연스럽다. 반면 한국의 미술 문화는 어떤가. 미술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비교적 높아져 좋은 전시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에 걸맞게 수준 높은 예술을 향유하려는 관객들도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데 그칠 뿐, 직접 미술품을 구매해 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향유하는 문화는 비교적 정착되었으나 수집하고 소장하는 문화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술품 구입이 억대의 재산이나 엄청난 안목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꼭 비싼 작품이 아니더라도 본인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매해 집에 걸어두는 것은 마음에 드는 가구나 장식품으로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술품 소장에 관심은 있으나 그동안 갤러리의 문턱을 쉽사리 넘지 못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지난 3일부터 닷새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내 최대의 미술시장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8만여명의 관객이 찾았다. 아트페어는 국내외 갤러리들이 심혈을 기울여 엄선한 작품들이 전시되기 때문에 초보 구매자가 첫걸음을 떼기에 그만이다. 앞으로도 이런 아트페어에 국내외 많은 컬렉터들이 적극 참여한다면 작가와 화랑은 물론 한국 미술시장 전체가 활력을 얻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마음을 좀 더 열고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해 봄으로써 우리 모두 페이트런에 한 걸음 더 다가서 보는 것은 어떨까.
  • 곧 풀릴 ‘전두환 컬렉션’ 낙찰가는?

    곧 풀릴 ‘전두환 컬렉션’ 낙찰가는?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집행팀(팀장 김형준)은 1일 전 전 대통령 일가로부터 압류한 주요 미술품을 공개했다. 검찰에 따르면 전씨 일가의 컬렉션에는 이대원, 겸재 정선, 김환기, 현재 심사정, 천경자 등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검찰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로 구성된 ‘전두환 압류 재산 환수 태스크포스’는 조만간 압류된 미술품들을 공매 처분할 예정이다. 검찰은 압류한 미술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은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에 있던 고(故) 이대원 화백의 ‘농원’이라고 설명했다. 가로 200㎝, 세로 106㎝ 규모(120호 규격)의 나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당초 1억원 정도로 추정됐으나 감정 결과 이보다 높은 가격대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그림의 절반 크기의 1978년작 ‘농원’은 2억 9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도 전씨 일가의 컬렉션에 포함됐다. 김 화백은 국내 미술 시장에서 박수근, 이중섭 등과 함께 작품 거래 가격면에서 가장 높은 작가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미술 분야에서는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의 작품과 함께 현재 심사정의 진경 산수화와 호생관 최북의 풍류화 등이 눈에 띈다. 이 밖에도 1960~80년대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던 천경자 화백의 ‘여인’,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설악산 그림으로 유명한 김종학 화백의 ‘꽃’ 등 근현대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또 영국 출신 인기 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판화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중국 근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장샤오강의 판화 작품인 ‘혈연시리즈’, 프란시스 베이컨의 ‘무제’ 등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전씨 일가 컬렉션에 이름을 올렸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굿바이!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

    굿바이!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의 작가 최인호 씨가 별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암으로 투명 중이던 고인은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으나 25일 오후 68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가 가작으로 입선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신문에 대하소설 ‘유림’을 3년간 연재했던 고인은 2008년 침샘 암으로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창작열을 꺾지 않아 2011년에는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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