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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 거품 사라진다] “日선 하객 수 100명만 돼도 혀 내둘러… 한국 퀄리티 높지만 모든 예식이 비슷”

    [결혼 거품 사라진다] “日선 하객 수 100명만 돼도 혀 내둘러… 한국 퀄리티 높지만 모든 예식이 비슷”

    “한국의 결혼식은 퀄리티(질)가 높고 성대해서 놀라워요. 하지만 정해진 식순에 떠밀려 신랑과 신부가 하객들과 함께 유쾌하게 즐길 시간이 부족한 건 너무 아쉽습니다.” 일본에서 10년간 웨딩플래너로 활동해 온 후지타 게이코(38·여)는 한국과 일본 양국 결혼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하객 수를 꼽았다. 후지타는 지난해 12월 한국어 공부를 위해 유학 왔다. 후지타는 9개월간 한국에서 지내며 두 번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매번 그 규모에 압도됐다고 했다. 일본의 결혼식 하객은 60명 정도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100명만 넘어가도 혀를 내두른다. 후지타는 “일본에서도 5~6년 전부터 작은 결혼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며 “일본이 말하는 작은 결혼식은 하객 10~30명 내외인데 한국에서는 100명 이하만 돼도 작은 결혼식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부부가 주인공이 돼 화보처럼 포즈를 취하고 찍는 스튜디오 사진도 한국에선 당연한 절차로 여겨지지만 후지타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日은 접대 중요시해… 하객 수 60명이 일반적 결혼 비용에도 차이가 있다.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일본 도쿄의 예식장이나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데 드는 평균 비용은 한국 돈으로 4000만원 정도다. 절대적 수치는 얼핏 한국과 비슷해 보이지만 물가 등의 차이로 일본에서는 축의금이 보통 30만~50만원 수준이다. 사실상 일본의 결혼식 비용이 한국보다 훨씬 낮은 셈이다. 후지타는 이런 차이를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차에서 찾았다. “일본에서 결혼식은 초대한 하객들에게 접대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강하죠. 하객 수가 신랑 신부가 일일이 살펴볼 수 있는 수준에서 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절반이 스몰웨딩… 혼인신고만 하는 커플 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에 대한 고민은 두 나라 신랑 신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다. 한국에서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스몰 웨딩’이 일본에선 40~50%의 부부가 선택할 정도로 이미 대중화됐지만 이 또한 고급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 개성을 나타내는 형식일 뿐 비용 절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수 일본의 예비부부들은 결혼 소품을 직접 제작하고 저렴한 장소를 물색하는 등 비용을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요즘에는 불필요한 예식은 생략하고 혼인신고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체하는 커플도 늘고 있다. “일본이 한국 결혼문화의 대안이라거나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일본은 선택의 폭이 좀 더 넓다는 게 한국과 다른 점이죠. 저렴한 결혼이냐, 호화 결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대안이 존재해 각자의 기준에서 합리적인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시장이 마련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글 사진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결혼 거품 사라진다] (중) 웨딩의 경제학

    [결혼 거품 사라진다] (중) 웨딩의 경제학

    #1. “1인 기준 12만원인 양식 코스에 1인당 와인 한 잔을 더하면, 모두 합해 1억 3100만원입니다.” 2010년 장동건·고소영 부부가 결혼해 화제가 된 서울 중구의 S호텔. 6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D홀에서 결혼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호텔 결혼식을 여러 번 진행한 5년 경력의 웨딩플래너 김모(32·여)씨는 “재계 인물이나 고위층 인사들은 하객들이 곧 자산인 만큼 결혼식을 겸해 손님들을 모시는 자리로 호텔 결혼식을 선호한다”며 “국내 최고 수준의 만족도를 보장하기 때문에 신랑·신부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결혼식을 치를 수 있다”고 말했다. #2. 지난달 24일 이미 내년 6월까지 예약 신청이 마감된 서울시민청의 ‘작은 결혼식’은 70명 기준 320만원의 비용이 든다. 홀 대관료 6만 6000원에 1인당 식사는 9400원으로 저렴하다. 2013년 시작된 서울시 주관의 작은 결혼식이 갈수록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1년 전에 이미 예약이 꽉 차는 히트 웨딩 상품으로 떠올랐다. 국내 결혼 시장은 수백만원대의 저가 결혼식부터 억 단위의 결혼식까지 예비 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식장 비용과 별개로 이른바 ‘스드메’로 불리는 스튜디오 촬영, 웨딩 드레스, 웨딩 메이크업 패키지도 수백만원대에서 억대까지 세분화돼 있다. 청담동 유명 스튜디오 프로작가의 사진, 연예인들이 다니는 ‘청담동 숍’ 원장의 메이크업, 하이엔드 브랜드의 명품 웨딩드레스로 구성된 초호화 ‘스드메’는 8000만~1억원 선이다. 반면 웨딩박람회 등에 미끼 상품으로 이용되는 ‘99만원 스드메’ 등 초저가 상품은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내용물이 너무 부실해 100만원 중후반대의 상품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다”(웨딩플래너 A씨)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웨딩 업계에서는 경사를 앞둔 예비 부부와 부모의 마음을 볼모로 삼는 악덕 상술이 적지 않다. 특히 예식장 계약에 ‘꽃 장식’ 등을 필수 옵션으로 넣는 고질적인 ‘끼워 팔기’나 ‘스드메’ 패키지 내 각 품목의 가격을 공개하지 않는 것, 같은 예식장인데도 플래너와 업체에 따라 가격이 제각각인 점이 결혼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는 부분이다. 올 11월 결혼을 앞두고 330만원에 예식장과 스드메 패키지를 계약한 예비 신부 김효인(27)씨는 “스드메까지 합쳐 이 정도면 저렴하다는 얘기만 계속 했을 뿐 각 품목의 가격을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는다”며 “이곳의 필수옵션인 드레스가 맘에 들지 않아 돈을 추가로 들여 다른 곳에서 드레스를 하는 방식도 일반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거품 낀 결혼식’ 문화가 철옹성이 되는 건 결혼 자체를 당사자인 예비 부부만의 일이 아닌 가족과 가문의 의례로 중시하는 풍토 탓이다. 유계숙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중에서도 ‘혼’을 가장 중요한 의례로 여기는데, 이는 본인이 체감하고 경험하는 의례가 ‘혼’이 유일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현숙(상명대 교수) 한국가족관계학회장은 “한국 부모들은 자식 결혼까지 본인들의 역할로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며 “이렇게 값비싼 결혼식이 가능한 것도 결국 부모들이 결혼 비용 중 일정 부분을 지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준비 과정에서 불공정한 관행과 맞닥뜨려도 ‘좋은 일에 얼굴 붉히지 말자’며 그냥 넘어가는 관행 또한 웨딩 시장을 왜곡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일부 웨딩 업체는 이러한 예비 부부와 부모들의 심리를 파고든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혼 시장을 투명하게 만드는 행정 당국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투명한 가격 공개와 ‘끼워 팔기’ 행태를 근절시킬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성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웨딩 업체들이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세부 품목들의 원가를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며 “현재 미용실·음식점 등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옥외가격표시제’처럼 품목별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해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작은 결혼식’도 상품화된 결혼식 문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유 교수는 “여전히 결혼식이 우리 사회의 품앗이로 작용하기 때문에 일단은 내가 장(場)을 벌여야 그동안 지불했던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며 “이른바 ‘부조 문화’의 관행을 깨고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본인의 개성에 맞는 결혼식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독박(讀博) 육아일기](25) 아들 딸 구별 말자던 세상, 정말 달라졌을까

    [독박(讀博) 육아일기](25) 아들 딸 구별 말자던 세상, 정말 달라졌을까

    아기를 낳고 보니 내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아기를 가지면 무조건 일을 그만둬야 하는 회사가 여전히 널려 있고, 바깥일은 남자가, 육아와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것이 아직도 당연한 현실. “이제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듣고 배웠지만 직접 부딪혀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더디게 움직인다. ’자녀 성별’에 대한 것도 대표적인 예다. 아직도 육아 관련 커뮤니티에는 자녀 성별로 인한 스트레스와 갈등에 대한 내용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딸을 낳았다고 해서 시집에서 소박을 맞거나 아들을 낳아줄 다른 여자를 집에 들이거나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옛날에 비하면 세상은 정말로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뱃속 아기가 딸인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눈치를 봐야하는 것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들만 낳았다고 해서 혀를 차는 목소리까지 들어야한다는 거다. ●선호하는 자녀 성별 ‘딸 > 아들’ 현실은… 벌써 5년 전인 지난 2010년 보건사회연구원과 육아정책연구소가 2008년 태어난 신생아 2078명의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아버지들은 아내의 임신 중 태어나길 바랐던 자녀의 성별로 딸(37.4%)을 아들(28.6%)보다 더 많이 꼽았다. 어머니도 딸이길 바란 경우가 37.9%로 아들(31.3%)보다 높았다. 여아 100명당 남아수를 나타내는 출생성비도 1998년 110.2명에서 꾸준히 낮아져 2005년 107.8명, 지난해 105.3명으로 줄었다. 2012년에는 한 결혼정보회사가 남녀 회원 300명씩 총 600명에게 선호하는 자녀 성별을 묻자 남성의 69.7%(209명)가 딸을 선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도 51.7%(155명)가 딸을 선호했다. 아빠들이 ‘딸바보’가 되는 분위기가 녹여진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 ‘둘째’의 성별에서 조금 차이가 났다. 두 번째 자녀의 성별 역시 ‘상관없다(남성 23%, 여성 32.3%)’가 가장 많았지만, 그 다음은 아들이었고 특히 7.3%에 불과한 남성들이 아들을 꼽은 반면 여성은 두배가 넘는 16%가 아들을 택했다. 첫째가 딸이라면 둘째는 반드시 아들이어야 하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첫째가 딸이면… “아들 하나 더 낳아야겠네” 지난해 나는 딸을 낳았다. 딸을 안고 다니다 보면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첫째냐”고 물은 뒤 곧바로 “아들 하나 더 낳아야겠네”라고 말씀하신다. 아기가 돌도 안 지난 젖먹이일 때부터 모르는 할머니들에게 얼른 남동생을 낳아주라는 충고를 들었다. 부모에게 무조건 아들 하나는 있어야하는 분위기를 적잖게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옛날 분들이니 그러시겠지, 어차피 모르는 분들이니 그냥 넘기지만 한 두번도 아니고 가끔은 성가시다. 반면 첫째가 아들인 엄마들은 둘째 얘기는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본인이 딸을 키워보고 싶어서 둘째가 낳고 싶다고 했다. 우리 친정엄마는 딸 셋을 키우셨다. 막둥이를 낳은 20년 전부터 나이 오십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아들 낳으려다 늦둥이 낳았구만”하는 말을 듣는 것을 나는 보고 자랐다. 엄마는 너무나 익숙하게 항상 웃으며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맞받았다. 우연인지, 당시에 진짜로 유행이었는지 주변의 내 또래에는 늦둥이 남동생들이 많다. 딸 둘, 셋에 막내가 아들인 조합이다. 나와 막내동생이 10살 차이가 나는데 그런 친구들이 많았다. 유행처럼 아들 막둥이가 있던 때에 그 아들 하나를 갖지 못했으니 우리 엄마는 마치 아들을 낳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실패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우리 셋을 데리고 다닐 때마다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런 친정엄마는 내가 임신을 하자 “아들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본인이 못 키워본 성별에 대한 아쉬움때문이었다. 귀여운 남자 아이에게 작은 야구모자에 청자켓을 입히는 것이 자신의 로망이었다며, 손주를 통해 실현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자매들과 친구들, 온통 여자들 사이에서만 자랐으니 아들을 키워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별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의 오랜 바람이었다고 하니 그걸 내가 대신 이뤄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예쁜 딸이 태어나서 평생 친구로 함께할 수 있으니 그것도 좋았다. ●성별을 확인하던 날의 복잡한 감정 초음파로 성별을 확인한 결과, 딸이었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 아쉬움이 느껴졌다. 엄마의 소원을 못 들어주게 되어서였다. 그것말고는 엄마에게 미안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내 자식을 엄마를 위해 낳는 것도 아니지 않나. 엄마도 더 이상 나에게 그 로망을 꺼내들지 않았다. 내 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신다. 성별을 확인한 날에는 전화로 “아들이 아니라 서운하냐”고 묻자, 마치 본인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냐는 듯 “아니, 전혀”라고 답했다. 오히려 남편과 시부모님이 신경쓰였다. 20년 내내 낯선 사람들에게 ‘아들 타령’을 듣고 살았던 엄마가 안쓰럽고, 도대체 그게 뭐라고 저 난리들이냐고 속으로 화를 냈던 나였다. 아기를 갖기 전에는 주변에서 아들을 낳으라고 요구하는 시부모들 이야기에 “아직도 그런 시어머니가 있어?”라며 황당해했다. 그런데 딸을 갖게 되니 괜히 눈치가 보였다. 아들만 둘을 키우신 시어머니는 “내가 못 키워본 딸을 낳으라”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남편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성별을 확인하고 며칠 뒤 시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하는데 남편이 슬쩍 시어머니에게 가서 목소리를 낮추며 “서운하시죠?”라고 물었다. 시어머니가 서운하다고 대답하진 않았지만 괜히 고개가 숙여졌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남편은 “부모님이 어떤 성별을 선호하시는지 정말 몰라서 여쭤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게 왜 “기쁘시죠?”가 아니라 “서운하시죠?”였는지. 왜 그렇게 물었는지도 짐작과 이해가 가니까 더욱 서운함이 밀려왔다. 정작 시부모님은 지금껏 한 번도 내가 딸을 낳은 것에 대해 불만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시부모님의 속마음은 다르지 않을까 의심했고, 나홀로 육아에 지칠대로 지쳤을 때엔 가까이 사는 시부모님이 설마 아들이 아니라서 이렇게 신경을 안 써주시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한 두 번 했다. 아기의 성별은 남성의 Y염색체가 결정짓는다는 이론은 중학교 생물시간에 누구나 배우는 것인데 불편한 건 늘 여자, 엄마들 쪽이다. 아직도 많은 엄마들이 딸만 낳았다고 면전에서 구박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친정이나 시집에서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성별 문제를 말하며 스트레스를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것인지 알게 됐다. ●‘아들 낳기’가 과제인 집, 여전히 많다 임신을 하자마자부터 과제가 아들을 낳아야하는 집이 수두룩하고, 첫째가 딸이면 그 아기를 낳는 순간부터 자연스레 둘째를 ‘아들로’ 낳아야하는 숙제를 또 얹는다. 임신 초기에 고기를 잘 먹는지, 싫어하는지, 태몽에 어떤 동물이 나왔고 크기는 어땠는지, 배 모양은 어떻고 등등 모든 것을 관찰당하고 아들이냐 딸이냐 추측이 됐다. 그냥 흘려들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귀에 꽂힐 때는 모든 게 압박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아들은 그 가치가 온전히, 꽉 찬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는 반면 딸은 절반 정도, 반드시 아들로 ‘보충’을 해줘야하는 것 같다. 딸이 둘이면 뭔가 부족한 듯하고 아들이 둘이면 차고 넘치는 듯한 시선은 여전하다. 아들을 낳아야 비로소 며느리의 도리를 다한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분위기가 아주 멀리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생각이 없지만 만약에 둘째가 생긴다면 그 순간부터 최소 16주까지 아들이어야만 하는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단순히 내가 딸을 낳았으니 다음에는 새로운 성별인 아들을 낳아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 아들이어야만 하는 무언의 압박을 견뎌야한다. 그게 두려워서 더 이상 출산을 하고 싶지 않다는 엄마들도 있다. 둘째도 딸이라고 하자 “낳을 거냐”고 묻는가 하면 곧바로 셋째를 낳으면 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단다. 성별 문제는 이제 막 엄마가 된 우리 세대에서도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다. ‘아들 타령’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우리 가운데에서도 은근한 아들 타령이 존재한다는 데 깜짝 놀라곤 한다. 또 하나 새로운 점이라고 하면 ‘딸 타령’까지 더해졌다는 거다. ●젊은 엄마들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성별 타령’ 태아가 아들이 아니어서 눈물을 펑펑 쏟는 일, 몇 달 내내 딸이라고 확인 받은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 보며 아들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 묻는 일,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비법’을 쫓아다니는 일, 딸을 낳았다고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일들이 우리 세대에서도 아주 흔하다. 그것이 순수하게 남자 아기를 갖고 싶은 것보다는 누군가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한 경우인 게 아직 남아있다. 은연 중에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알 수 없는 우월감이나 자부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딸 가진 자격지심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대하기가 불편하다. 그 앞에서 애써 “딸이 더 좋다”며 맞서는 것도 유치하다. 아들이어서, 또 딸이어서 ‘더’ 좋고 말고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 세대가 이런 걸로 우리를 힘들게 했다고 투정하면서도 어느새 그 모습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의지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왜 이렇게 놓지 못하는 것일까. ●“아들만 낳은 것이 그렇게 불쌍한 일인가요” 새로운 갈등 상황도 빚어진다. 누군가 딸을 가졌다고 하면 일부러 더 크게 박수를 쳐주고 “딸이라 좋겠다”고 해주는 반면 아들을 연달아 둘 이상 낳으면 혀를 차는 일들이 벌어진다. 딸·아들 조합이면 ‘금메달’, 딸·딸 조합이면 ‘은메달’, 아들 둘 조합이면 ‘목메달’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아들이 딸보다 더 좋은 이유가 딱히 없듯이 딸이라 더 좋을 것도, 아들이라 아쉬울 것도 사실 없다. 모든 아들이 엄마를 힘들게 하고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딸이 살갑고 엄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남자 아이들이 키우는데 물리적인 힘이 더 들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들만 낳은 엄마를 안쓰럽게 봐줄 이유는 전혀 없다. 가끔 아들 형제만 가진 엄마들은 “제발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아들 낳았다고 해서 또래 엄마들로부터 대놓고 ‘쯧쯧’거리는 시선을 견뎌야하는 역차별까지 생긴 것이다. 물론 자녀의 성별은 아마도 모든 인류의 관심사일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만 이렇게 성별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성별을 선택하는 비법이 담긴 책이 출간됐다. 미국, 멕시코 등 일부 나라에서는 최근 성별을 선택해서 임신하는 시술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성별을 선택해 체외수정으로 아이를 가지는 의료행위가 이뤄지고 있다. 최소 1만 5000달러(약 17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불임클리닉에서는 5쌍 중 1쌍이 이런 선택임신을 한다. ●존재 만으로도 소중한 아이들…갈등 대물림 언제까지 하지만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녀가 한 두 명 혹은 세 명 있지만 다른 성별의 자녀를 갖기 원하는 부부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일부 부유층에서도 원정출산을 통해 이같은 선택임신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합법적인 의료행위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이용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정말 순수하게 ‘새로운 성별을 갖고 싶어서’였을지는 의문이다. 아들을 더 좋아하든 딸을 더 좋아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호도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남에게 강요를 하거나 그것이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심지어 요즘은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홉 달 동안 건강하게 무사히 아기를 품고 낳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우리 아이들을 두고, 너무나 소모적인 갈등이 대물림돼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이 기사의 관련기사(19)연예인 만삭화보, 그것은 꿈일 뿐… (20)엄마가 되어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21)아줌마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22)외식에 집착하는 외로운 아기엄마의 항변 (23)엄마의 책임감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 (24)깜깜한 초보엄마를 깨워줄 길잡이가 필요하다 ▶1회부터 18회까지는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허백윤 기자의 독박 육아일기 / ☞블로그
  • [나우! 지구촌] 일그러진 발의 역사…‘전족’을 아시나요?

    [나우! 지구촌] 일그러진 발의 역사…‘전족’을 아시나요?

    최근 영국 BBC가 중국에서 사라져 가는 ‘전족 여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예고편을 공개했다. 전족은 과거 중국 여성들의 ‘미의 상징’이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송나라 시기인 10세기에 처음 탄생한 이 전통은 19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여성들은 가능한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5세 정도부터 헝겊으로 발을 단단하게 동여맸다.여기에 구부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은 뒤 5년 동안 사이즈를 늘리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길이 10㎝ 안팎 정도밖에 발이 자라지 않는다. 후대에 들어서 ‘악습’으로 불릴 만큼 고통스러웠던 이 전통은 단순히 발의 변화만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발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수축되면서 흉측하게 변했고, 통증과 외형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세가 이어지면서 등도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1902년 전족의 악습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점차 여성들의 발도 해방을 맞았지만, 현재까지 고통스러운 전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소수 남아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여성은 올해 84세인 왕후이위안 할머니다. 윈난성에 사는 그녀는 1930년대에 전족을 가지게 됐다. 법으로 금지된 지 한참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는 작은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여겼다. 왕 할머니는 “꽉 묶은 발은 당시에도 매우 유행했고 모두가 그렇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됐다. 큰 발을 가진 여성들을 손가락질하며 ‘저 발 좀 봐’라고 말했다”라면서 “나 역시 처음에는 발을 묶지 않았는데, 이런 놀림을 받은 뒤 결국 전족 풍습을 따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5살인가 6살 때부터 발을 묶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이를 도와주셨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안하겠다고 소리도 치기도 했고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면서 “그 과정은 매우 괴로웠다. 많은 엄마들은 딸의 발 뼈를 반으로 부러뜨려서라도 딸들의 발을 전족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전족은 중국 여성의 상징성을 가지는 동시에 결혼을 위한 ‘사회적 도구’로 여겨졌다. 더 작은 발을 가질수록 더 매력적인 여성으로 평가됐기에 여성들은 고통과 장애, 그리고 불법행위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족을 행해야 했다. 왕 할머니는 “정부에서 사람들이 나와 전족 풍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지 감시했다. 만약에 그것이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 숨어 다녔다”고 말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족의 전통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현지시간으로 10일 저녁 9시 BBC2 채널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③하라호름 Karakorum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③하라호름 Karakorum

    ●하라호름 Karakorum Хархорум 웅장하고 소박한 역사의 흔적 게르 캠프는 하라호름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하라호름은 칭기스칸이 만들었다는 몽골 최초의 도시다. 하라호름을 관통하며 흐르는 오르혼강 유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번성기의 하라호름은 이슬람 사원, 가톨릭 성당, 교회, 사원 등의 다양한 종교시설과 궁전 등이 있는 국제적 도시였으나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현재는 에르덴 조 사원만이 남았다. 도시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소박한 건물들 사이에 에르덴 조 사원이 자리해 있었다. 100개의 보석이라는 뜻의 몽골 최초의 라마불교 사원은 이 사원을 둘러싼 108개의 스투파와 더불어 바깥에서 보아도 웅장하고 거대했다. 해발 1,400m의 고원에 이룩한 왕궁의 터에 자리 잡은 사원. 남아 있는 몇 채의 건물과 절들 사이로 느린 걸음의 스님들과 손을 곱게 모은 몽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잘 정돈되고 복원된 사원들을 마주하고 왼편에는 그저 빈 터만이 남아 있다. 바람을 따라 이동하고 또다시 떠나는 몽골 사람들의 삶처럼,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세워 둔 유적지 한 켠은 미처 시간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듯 허물어져 그 자리에 길게 자란 풀들만이 무성했다. 갈래 머리 소녀를 그리다 사원을 나와 밥을 먹고 돌아보니 동네에서 나름 가장 세련된 디자인으로 꾸민 ‘커피’와 ‘피자’, ‘치킨’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조용한 가게로 들어서니 주인과 아이들이 반겨 주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언제나 예쁘듯, 몽골에서 만난 아이들 또한 그랬다. 통통한 볼에 빨갛게 그을린 피부와 꾸밈없는 웃음은 여행자로 하여금 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몽골의 아이들과 할머니들에게 한국에서 준비해 온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내자, 할머니는 집으로 다급히 들어갔다. 5분 후 곱게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몽골 전통의상을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듯,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림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소중하게 손에 꼭 쥐고 인사를 건넸다. 하라호름에 남은 불교 지금은 불교 사원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 하라호름에는 국제도시의 명성답게 세계의 온갖 종교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몽골의 삶과 가장 닿아 있는 불교와 토템사상을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만이 남아 있다. ‘돌궐’이 아닌 튀르크족 튀르크족은 북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보통 돌궐족이라 표기하지만 중국에서 폄하하여 표기하였던 것이라 그들 표현인 ‘튀르크’로 표기하기로 한다. 튀르크족은 야만적인 북방오랑캐라며 그들을 낮추어 기록하였던 중국문헌의 내용들을 일축하면서, 국제적 도시이자 문명사회로서 기능하였던, 그들의 자존감을 표출하는 몇 기의 돌궐비문을 남겨 놓았다. 어떤 비석은 벽으로 둘러친 정방형 벌판에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듯 풀숲에 함께 방치되듯 덩그러니 놓여 있어 묘하게도 튀르크제국의 흥망성쇠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튀르크의 시조, 낭생설화 튀르크인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로 ‘낭생설화’라는 것이 있다. 먼 고대 튀르크인들은 주변의 공격을 받아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는다. 이 아이는 인간의 아이를 긍휼히 여긴 늑대에 의해 양육되는데, 훗날 이 아이가 늑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중 ‘아사나(늑대)’라는 이름을 지닌 막내아들의 후손들이 돌궐제국의 칸들을 배출시킨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이는 우리의 단군설화와도 같은 맥락으로 고대의 역사 및 토템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게르’라는 우주에 잠들다 소나기가 멈출 것 같지 않아 무작정 오늘 머물기로 한 아나르 게르 캠프로 향했다. 비를 맞으며 배낭을 메고 서둘러 들어선 게르 캠프 안은 놀라울 정도로 아늑했다. 양과 말을 기르기 위해 풀을 찾아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살기 위한 주거형태인 게르는 나무와 천, 펠트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의 게르에는 ‘우주가 둥글다’라는 몽골인의 인식이 담겨 있다는데 자연과 어우러지는 몇 가지 특징들에서 샤머니즘을 중시하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가운데 기둥을 두어 화로를 피우고 둥글게 거주 공간을 두고 있다. 흰색 천은 강렬한 햇빛을 막아 주어 시원하고, 화로에 불을 때면 가운데 지붕을 통해 연기만 빠져나가고 내부에는 온기만이 남게 된다. 크게 보면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천을 두른 형태의 게르는 쉽게 조립과 해체가 가능해서 유목생활에 걸맞게 이동 또한 간편하다. 이동 중에 유목민들의 게르를 방문했는데, 안에는 작은 불단이 놓여 있고 화로 위에서 말젖을 끓여 마유주를 만들고 있었다. 둥근 게르 안에는 침대와 테이블 몇 개가 놓인 중앙 주거공간이 있었고 또 다른 게르에서는 양고기를 말리는 동시에 감자와 쌀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한 켠에는 불을 때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도 있고 언제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유공간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날 머문 게르 캠프는 하라호름의 지역적 특색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옆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까워 보이지만 멀리 자리한 산 중턱에는 양을 기르는 어떤 유목민의 거처가 보였다. 산과 강 사이에는 오래된 배가 움직이지 않고 지난 기억을 담은 채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하루를 머물기로 한 1호 게르 안에는 세 개의 침대가 둥글게 둘러 놓여 있었고, 깨끗하게 세탁된 침대커버와 수건이 담요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게르를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에는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화로가 통해 있는 천장에서는 빛이 살며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침대를 하나씩 선택한 후에 가방을 내려놓고 제일 먼저 비에 젖은 스카프를 머리맡에 걸어두었다. 게르 또한 우리들의 또 다른 텐트이기에 알록달록한 가렌다도 걸어 놓았다. 하루만 머물 공간이지만 애정을 담아 정리하고 단장하는 시간으로 인해 더욱 아늑하고 편안해졌다. 초원 너머의 지평선 비가 내린 후 몽골의 하늘은 더욱 신비롭다. 해발고도가 1,600m에 이르는 고원국가인 몽골은 그만큼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아주 먼 초원의 끝이 가깝게 보이듯, 하늘의 구름과 별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린 탓일까. 이날 밤은 별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몸이 시릴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입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패딩점퍼를 꺼내 입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하고 11시가 되어서야 어스름이 깔린다.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시금 옷을 챙겨 입고 일출을 보러 나갔다. 5시쯤 뜰 거라고 생각한 해는 6시쯤에야 떠올랐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하늘이 가깝고 평야가 드리운 몽골에 와 있다면 꼭 일출을 느껴 보자. 두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둥근 해가 지평선을 넘어 선명하게 떠오른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감동적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할 때의 잠자리는 낯선 누군가의 공간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짐을 놓아 두고 잠만 자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평생이라는 긴 시간 중 특별한 어느 하루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이든 단 한 번의 추억이고 순간이다. 그러는 사이 예쁜 미소의 몽골 아가씨가 따뜻한 물과 차를 가져다주었다. 화로에 불을 때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몸을 녹이는 우리들의 공간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로웠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새 영화] ‘돼지 같은 여자’

    [새 영화] ‘돼지 같은 여자’

    과거의 풍요로움이 클수록 그 빈자리의 공허함 또한 크다. 은빛 번쩍거리며 펄떡펄떡 뛰는 바닷속 갈치는 더이상 주낙을 물지 않는다. 우리의 지저분함을 탓하지 않고 우직하게 먹고 살찌우며 새끼 낳는 돼지가 갈치의 자리를 대신하지만, 흥청거렸던 어촌 마을의 옛 영화를 되돌려놓기는 쉽지 않다. 어촌 처녀 재화(황정음)의 삶도 마을과 함께 부침을 겪었다. 갈치가 떠나버리자 고깃배를 타던 아버지는 폐인이 돼 아침저녁으로 술병을 옆에 끼고 지내고, 어머니는 마을의 다른 남정네와 눈이 맞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낼 뿐이다. 대신 재화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이 있다. 돼지를 잘 키워 번 돈으로 동생을 멋진 화가로 만들고 싶고 가족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싶다는 현실적인 꿈이다. 하지만 돼지가 새끼를 낳으며 꿈을 싹틔우는 날, 하필 아버지는 술주정 끝에 나무에 올랐다 떨어져 죽고 만다. 순박한 처녀 재화의 가슴 속에는 또 다른 꿈, 유일한 동네 총각 준섭(이종혁)에 대한 수줍은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갈치 풍어도 없는 마을에 그럴싸한 총각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고등학교 동창 유자(최여진), 미자(박진주) 역시 준섭에 대한 연심을 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얻고자 한다. 어떤 결론에 이르든, 사랑을 쟁취한 이가 누구든, 첫사랑을 믿을 수는 없다. 그 꿈조차 배반될지라도 삶은 쉽게 좌절되어서도 안 되고 좌절될 리도 없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될 따름이다. ‘행복한 장의사’(1999), ‘바람 피기 좋은 날’(2007) 등을 연출한 장문일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장 감독은 “언젠가 꼭 한 번 그려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영화를 소개했다. 그의 고향은 전남 신안이다. 동양화 회화를 전공하고 독립영화패 ‘장산곶매’ 연출부에서 활동했던 장 감독에게 시시각각 햇빛과 몸을 뒤섞으며 색깔이 변하는 남도의 바다는 고향이기 전에 리얼리스트이자 화가로서 자신의 담대한 미장센을 풀어 낼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을 테다. 영화는 쇠락해 가는 시골 마을이지만 꿈 많은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시작하지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감정을 그대로 좇다가 맞는 비극적 상황의 치정극으로 뒤바뀐다. 그럼에도 후반부에서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정언명령을 재확인시키며 잔잔한 페이소스를 건넨다.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은 재화의 결혼식이다. 삶의 무게감이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 그 안에서 순응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면서 지내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되니 가볍게 낄낄거리며 웃어넘길 수 없는 영화로 자리매김된다. 10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해외여행 | FIJI Bula, Vinaka! 안녕 고마워

    해외여행 | FIJI Bula, Vinaka! 안녕 고마워

    피지는 화려하다. 그리고 소박하다. 일곱 가지 색으로 물든 하늘을 뒤로하고 돌아섰을 때, 애잔한 피지의 이별노래 ‘이사레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 알았다. 나도 모르게 피지에 푸욱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피지를 다시 보다 피지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불라Bula·피지어로 ‘안녕’을 뜻하는 말’에 있었다. 리조트에서도 시장에서도 거리에서도 모든 시작은 ‘불라’였다.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나라, 산호초들의 고향, 피지. 피지가 특별한 이유는 여행자뿐만 아니라 피지 사람에게도 천국이기 때문이다. 피지는 2012년 캐나다 ‘레거 마케팅’의 조사 결과 행복체감지수 1위 국가로 꼽혔다. 무엇이 피지를 행복의 나라로 만든 것인지 궁금했는데, 피지에 가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연중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끈끈한 대가족 중심 사회, 깨끗한 물과 자연, 단단한 자존감 위에 세워진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삶의 철학. 그 모든 것들이 피지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피지의 크기는 제주도의 약 10배다. 총 33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100여 개 섬에만 사람이 산다. 비티 레부Viti Levu와 바누아 레부Vanua Levu가 가장 큰 섬이다. 비티 레부에는 피지의 수도인 수바와 난디국제공항이 자리해 있고, 북섬으로 불리는 바누아 레부엔 럭셔리 리조트들이 모여 있다. 섬들은 옹기종기 모여 군도를 이루고 있다. 여행자들은 마마누다 군도와 야사와 군도를 많이 찾는다. 비티 레부의 서쪽, 마마누다 군도는 섬 하나에 리조트 하나만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푸른 바다와 그림 같은 백사장이 마마누나 군도의 풍경을 대표한다. 비티 레부에서 경비행기로 40분 거리에 있는 야사와 군도는 영화 <블루라군>의 촬영지다.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은 산호초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지는 단순한 휴양지 그 이상의 매력을 갖고 있다. 푸른 바다 속에서 총천연색 물고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카약, 요트, 서핑, 제트스키, 패러세일링 등 갖가지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수온이 24~29도 정도로 따뜻해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람바사, 라키라키, 퍼시픽하버 등 다이버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다이빙포인트도 도처에 널려 있다. 골프를 빼면 섭섭하다. 피지의 하루 라운딩 비용은 약 3만원. 50만원이면 1년치 골프회원권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더 없이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저렴하게 라운딩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피지에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들도 많다. 그중 하나가 전 세계 네 곳에 존재하는 날짜변경선이다. 같은 자리에서 어제와 오늘을 왔다 갔다 하는 체험이 가능하다. 이 날짜변경선 덕에 피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나라’이기도 하다. 매년 1월1일 정동진을 찾는 이들에게 타베우니 여행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해양 액티비티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상어 먹이 주기도 피지에서 도전할 수 있다. 철망도 없이 바다 속에 들어가 상어 입에 먹이를 넣는 일은 사진으로만 봐도 아찔하다. 피지 여행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권,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마시는 ‘명품 생수’인 피지워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도 공기도 좋은 피지에서 피지워터를 마시며 여행을 마치고 나면 매끈해진 피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귀에 꽃을 꽂는다. 재미있는 건 꽃을 꽂은 위치에 따라 미혼인지 기혼인지 알 수 있단 점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왼쪽에, 결혼을 한 사람은 오른쪽에 꽃을 꽂는다. 이렇게 꽃을 꽂는 것을 피지어로 ‘테끼테끼’라고 부른다. 자, 이제 화려한 히비스커스 꽃 한 송이를 ‘테끼테끼’하고 본격적인 피지 탐험에 나서 보자. 아,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다. ‘피지타임FIJI Time’의 속도를 지키는 일이다. 피지 특유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반걸음 느린 속도로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행복이 슬그머니 당신 곁에 와 있을 것이다. ●천국을 즐기는 방법1 재래시장에서 발견한 피지 문화 생생한 피지 문화를 엿보기 위해 찾아간 곳은 피지 난디의 재래시장. 난디는 국제공항이 있어 여행자들에게 익숙하고 피지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지만, 시내에 나가 보면 이곳이 얼마나 소박한 곳인지 알게 된다. 이색 식재료 ‘카사바’와 ‘달로’ 시장은 자그마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식재료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카사바Cassava와 달로Dalo. 이 두 구근식물은 피지 사람들의 식탁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고 있다. 우리로 치면 쌀이나 마찬가지다. 달로는 큰 토란을 연상하면 된다. 피지언들은 달로로 탄수화물을 섭취하는데 주로 익혀서 먹는다. 섬유질이 많고 열량이 높은 편. 카사바는 큰 고구마를 생각하면 된다. 쪄 먹기도 하고 빻아서 다른 과일과 함께 요리해 먹기도 한다. 피지 바나나는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보다 통통하고 큰데, 날로 먹지 않고 구워 먹는다. 우리는 ‘카바’로 친구가 된다 시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각종 뿌리채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뭔가 했더니 ‘카바Cava’의 원료인 후추나무 뿌리다. 피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카바’다. 피지에서 카바를 함께 나눠 마시는 행위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을에서는 ‘카바 세리모니’를 준비한다. 카바 가루를 타노아Tanoa라는 그릇에 넣고 즙을 짠 후 빌로Bilo라는 코코넛 껍질로 만든 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넨다. 잔을 받은 사람은 손뼉을 두 번 치고 ‘불라!’를 외친 후 카바를 단숨에 마신다. 다 마신 후 손뼉을 세 번 친 다음 ‘비나카Vinaka·피지어로 ‘고맙습니다’라는 말!’라고 외치면 환영 의식이 마무리된다. 카바 세리모니는 피지 숙소 어디에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카바의 색은 연한 갈색이고, 맛은 쌉싸름하다. 많이 마시면 혀가 얼얼하고 취한 기분도 들지만 알코올 성분은 없다. 피지 국민의 49%는 인도사람 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또 하나는 수북이 쌓인 형형색색의 향신료. 마트에는 갖가지 인도 향이 진열돼 있고, 길거리에선 인도 음식점이 자주 눈에 띈다. 그뿐 아니다. 거리 곳곳에 화려한 힌두사원이 있고, 이곳저곳에서 인도 음악이 귀를 파고든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섬나라가 아닌 인도의 작은 도시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알고 보니 피지는 1874년 영국에 합병되었는데 그때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으로 많은 인도인들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갈 법도 했지만 인도 사람들은 사람 좋고 자연 좋은 피지에 눌러 앉았다. 그렇게 시작해 지금은 전체 피지 인구의 49%를 인도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니 피지에서 인도를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 것, 그리고 피지 인도인 중 상당수는 인도에 가 본 적조차 없다는 것도 알아둘 것. ●천국을 즐기는 방법 피지의 삼색 액티비티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낚시, 요트타기 등 피지의 바다에선 가지각색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꼭 바다가 아니어도 된다. 하늘에서도 강에서도 즐길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1분 사이 다시 태어난 기분 피지의 푸른 바다와 수백개 섬을 한품에 안는 방법,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기로 했다. 스카이다이빙을 위한 장비를 착용하고 경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그림 같은 피지의 하늘을 유유히 날았지만 심장은 콩닥콩닥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노련한 네덜란드 출신 인스트럭터가 있어 마음이 놓였다. 10여 분쯤 날았을까, 마침내 경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허공에 몸을 던져야 할 순간이 왔다. 하늘에서 뛰어내릴 땐 ‘바나나 모양 몸’을 꼭 기억해야 한다. 손은 위로 높이, 다리는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바짝 접어야 안정적인 낙하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늘 속으로 풍덩! 아, 자유낙하가 선사하는 이 짧고 강렬한 느낌을 세상의 어떤 액티비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사방으로 퍼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유낙하를 경험한 1분 사이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그 후 5분 동안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뛰어내리기 직전 인스트럭터가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조심할 것은 중독되는 것뿐이라는. www.skydivefiji.com.fj 내 머리 위의 이구아나 쿨라 에코파크는 피지의 독특한 동식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장소다. 입구에서는 띠 이구아나와 피지 보아뱀을 직접 만져 볼 수 있고, 이구아나를 머리나 어깨에 올린 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내부엔 거대한 숲이 조성돼 있는데, 구석구석에서 피지의 동식물을 발견할 수 있다. ‘쿨라’는 피지어로 ‘색깔’을 의미한다. 쿨라 에코파크에 서식하는 각양각색의 동식물을 보면 그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생태교육을 제공한다. 사라져가는 피지의 동식물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가족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장소다. www.fijiwild.com 피지의 젖줄 속으로 길이가 1,202km에 이르는 싱가토카강은 피지의 젖줄이나 마찬가지다. 피지 사람들은 싱가토카강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수많은 먹거리를 식탁에 올릴 수 있었다. 싱가토카 리버사파리는 피지의 자연과 역사를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보트를 타고 시원하게 강을 가르면서 강가에 살고 있는 원주민 마을을 방문하고, 피지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다. 마을투어 역시 카바 세리모니부터 시작한다. 피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집을 둘러보고 나면 피지 전통 음식으로 차려진 점심이 기다린다. 전통 음식을 맛본 후에는 피지 사람들과 어깨를 들썩이며 한바탕 노는 시간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찾아온 이별의 시간.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보냈다. www.sigatokariver.com ●천국을 즐기는 방법3 만인을 위한 피지 리조트 피지에서는 ‘리조트는 커플을 위한 곳’이란 편견은 버리자. 가수 박진영이 허니문을 다녀온 ‘라우쌀라 아일랜드 리조트Laucala Island Resort’처럼 하루 수천달러에 달하는 곳도 있고, 배낭 하나 매고 마음껏 섬을 즐길 수 있는 도미토리 숙소도 있으니까. 리꾸리꾸·나누쿠에서 ‘로맨틱 커플여행’ 퍼시픽 하버에 위치한 나누쿠리조트Nanuku Resort는 피지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친절한 스태프들이 있는 곳이다. 시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야자수를 보면서 샤워를 하거나 프라이빗풀에서 커플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곳에선 피지에서 키워낸 유기농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든다. 그 음식을 원하는 장소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스노클링, 쿠킹클래스, 요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무료로 제공돼 24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저녁에 열리는 피지 스태프들의 전통춤 공연 역시 놓치면 안 된다. nanuku.aubergeresorts.com 리꾸리꾸리조트Likuliku Lagoon Resort는 데나라우 항구에서 페리로 1시간 거리인 마마누다 군도 말롤로섬에 자리했다. ‘잔잔한 바다’라는 의미의 ‘리꾸리꾸’란 이름에서부터 로맨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방갈로 스타일 객실인 오버워터 부레는 바닥 일부가 유리로 되어 있어 산호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또 객실에서 바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사다리가 마련돼 있어 호젓한 바다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www.likulikulagoon.com ‘엄마도 아이도 행복한 섬’ 플랜테이션아일랜드 플랜테이션아일랜드 리조트Plantation Island Resort는 어디를 가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한마디로 어린이 천국. 산호 만들기, 대나무 공예 등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가 수십 가지나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선 피지언 매니저들에게 아이를 맡기고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피지언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돌보기로 유명하니 안심해도 된다. www.plantationisland.com ‘청춘을 위한 섬’ 비치콤버아일랜드 비치콤버아일랜드 리조트Beach Comber Island Resort엔 도미토리형 객실인 ‘그랜드 부레’가 있다. 뷔페 식사가 숙박료에 포함된, 합리적 요금의 객실이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리조트다 보니, 비치콤버의 화이트비치엔 언제나 비키니 차림으로 광합성을 하는 젊은이들이 즐비하다. 또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워터스키, 카누, 윈드서핑, 스쿠버다이빙 등 각종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이들로 분주하다. 밤마다 열리는 피지 전통쇼와 파티에서 신나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www.beachcomberfiji.com 에디터 고서령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 취재협조 피지정부관광청 www.HappyFIJI.travel ▶travel info FIJI Airline 대한항공이 인천-난디 직항을 주 3회(화·목·일요일) 운항한다. 비행 소요시간은 약 9시간 45분. 화·목·일요일에 인천에서 출발한다. 피지 국적항공사인 피지에어웨이즈는 홍콩-난디 노선을 주 2회 운항한다. 목요일과 토요일에 홍콩에서 출발. What to Drink 피지워터를 수시로 마시자. 피지워터는 500년 된 암반에서 올린 생수로, 물맛 좋기로 유명하다. 피지워터로 만든 피지 맥주도 잊지 말 것. 피지골드Fiji Gold와 피지비터Fiji Bitter가 인기 있는데, 피지비터가 좀 더 쌉쌀하다.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보누Vonu도 맛보자. What to Buy 천연 원료를 사용해 만든 화장품 ‘퓨어피지’가 가장 사랑받는 피지 여행 기념품이다. 미스트와 오일, 비누, 바디로션, 샤워젤, 슈가스크럽 등이 유명하다. 카바 세리모니에 사용하는 ‘타노아’와 ‘빌로’도 피지 문화를 보여 주는 재미있는 기념품.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갈치 대신 돼지?... 그들의 소박한 꿈은 이뤄질까

    갈치 대신 돼지?... 그들의 소박한 꿈은 이뤄질까

    과거의 풍요로움이 클수록 그 빈자리의 공허함 또한 크다. 은빛 번쩍거리며 펄떡펄떡 뛰는 바닷속 갈치는 더이상 주낙을 물지 않는다. 우리의 지저분함을 탓하지 않고 우직하게 먹고 살찌우며 새끼 낳는 돼지가 갈치의 자리를 대신하지만, 흥청거렸던 어촌 마을의 옛 영화를 되돌려놓기는 쉽지 않다. 어촌 처녀 재화(황정음)의 삶도 마을과 함께 부침을 겪었다. 갈치가 떠나버리자 고깃배를 타던 아버지는 폐인이 돼 아침저녁으로 술병을 옆에 끼고 지내고, 어머니는 마을의 다른 남정네와 눈이 맞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낼 뿐이다. 대신 재화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이 있다. 돼지를 잘 키워 번 돈으로 동생을 멋진 화가로 만들고 싶고 가족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싶다는 현실적인 꿈이다. 하지만 돼지가 새끼를 낳으며 꿈을 싹틔우는 날, 하필 아버지는 술주정 끝에 나무에 올랐다 떨어져 죽고 만다. 순박한 처녀 재화의 가슴 속에는 또 다른 꿈, 유일한 동네 총각 준섭(이종혁)에 대한 수줍은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갈치 풍어도 없는 마을에 그럴싸한 총각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고등학교 동창 유자(최여진), 미자(박진주) 역시 준섭에 대한 연심을 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얻고자 한다. 어떤 결론에 이르든, 사랑을 쟁취한 이가 누구든, 첫사랑을 믿을 수는 없다. 그 꿈조차 배반될지라도 삶은 쉽게 좌절되어서도 안 되고 좌절될 리도 없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될 따름이다. ‘행복한 장의사’(1999), ‘바람 피기 좋은 날’(2007) 등을 연출한 장문일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장 감독은 “언젠가 꼭 한 번 그려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영화를 소개했다. 그의 고향은 전남 신안이다. 동양화 회화를 전공하고 독립영화패 ‘장산곶매’ 연출부에서 활동했던 장 감독에게 시시각각 햇빛과 몸을 뒤섞으며 색깔이 변하는 남도의 바다는 고향이기 전에 리얼리스트이자 화가로서 자신의 담대한 미장센을 풀어 낼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을 테다. 영화는 쇠락해 가는 시골 마을이지만 꿈 많은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시작하지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감정을 그대로 좇다가 맞는 비극적 상황의 치정극으로 뒤바뀐다. 그럼에도 후반부에서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정언명령을 재확인시키며 잔잔한 페이소스를 건넨다.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은 재화의 결혼식이다. 삶의 무게감이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 그 안에서 순응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면서 지내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되니 가볍게 낄낄거리며 웃어넘길 수 없는 영화로 자리매김된다. 10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현대캐피탈 주장 문성민 “지난 시즌 성적 납득안돼 올해는 새 배구 보여주겠다”

    현대캐피탈 주장 문성민 “지난 시즌 성적 납득안돼 올해는 새 배구 보여주겠다”

    “올 시즌에는 빠른 배구, 새로운 스타일의 배구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전지훈련 중인 프로배구 V리그 현대캐피탈의 주장 문성민(29)은 8일 시즈오카 미시마의 도레이 체육관에서 “팀 분위기가 좋아졌고 경기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 주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전지훈련을 통해 일본 도레이와 연습 경기를 했는데 전체적으로 우리 팀의 플레이가 빨라졌다”며 “큰 공격을 때리는 횟수는 줄어들고 페인트나 연타를 이용한 공격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문성민에게도 앳된 신인 시절이 있었지만 어느덧 시간이 흘러 팀의 주장을 맡게 됐고 결혼을 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지만 대신 배구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또 외국인 거포와의 맞대결이 두렵지 않다.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일본 전지훈련 중인 현대캐피탈의 주장 문성민을 만나 전지훈련에 대한 평가와 올시즌 각오 등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일본배구와 붙어보니 우리팀 확실히 빨라졌다” →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데. -오랜만에 일본 와서 경기해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다.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다. 매년 일본에 전지훈련을 오니까, 일본 팀과는 자주 경기한다. → 최태웅 감독은 ‘연타’와 ‘스피드 배구’를 강조하면서 일본 배구를 예로 들었다. 실제로 붙어보니 어떤가. -확실히 우리 배구가 빨라졌다는 걸 느꼈다. 일본 배구는 전통적으로 빠르다. 예전에 일본 팀과 경기할 때는 너무 빨라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제, 오늘 토레이와의 경기에서는 금방 익숙해졌다. 평소에 빠른 배구를 연습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 달라진 것을 체감하는 모양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선수 모두가 팀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플레이가 빨라졌다. 큰 공격을 때리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대신 페인트나 연타를 이용한 공격이 많아졌다. → 지난 시즌 팀은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문성민 개인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는 팀이 먼저다. 개인적인 성적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시즌 팀 성적은 역대 최악이었다. 선수들 모두 거기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제는 더 내려갈 곳도 없으니 부담도 없다. 이번 시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배구를 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코트 안에서 선수들이 많이 웃더라. - 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어린 선수들이 선배 눈치를 보는 게 있었다. 감독님이 그런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하셨다. 요즘에는 후배들이 코트 안에서 말도 많이 하고, 코트 밖에서는 먼저 장난도 친다. 연습이 끝나면 같이 플레이스테이션(전자오락기)도 하고, 씨름도 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해졌다. 예전에는 지금보다는 엄격했다. ●레오, 산체스와 맞대결, 별로 신경 안쓴다 → 올 시즌부터 라이트로 뛴다. 레오, 산체스 등 걸출한 용병들과 싸워야 한다. - 별로 신경 안 쓴다. 다른 팀은 특정 선수의 공격 점유율이 높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배구는 팀원 모두가 공격할 수 있고, 또 득점할 수 있는 배구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되지 않는다. →주장이 됐고 결혼도 했다. 배구장 안팎에서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 내가 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아내가 많이 배려해준다. 주장은 처음 해 본다. 이렇게 힘든 자리인지 몰랐다. 감독님과 선수 사이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주장이라고 선수들에게 잔소리만 하기보다는 솔선수범하려고 노력한다. 후배들이 보고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제법 연륜이 쌓였다. 배구를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나. -어렸었다. 겁 없이 그냥 막 했다. 이제는 수술도 두 번이나 했고, 배구선수로서 적은 나이도 아니다. 이제 팀을 위한 플레이를 생각하게 된다. 세게 때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솔직히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몸이 안 따라준다. 지금 내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서 가려 한다. → 무릎은 괜찮은가. -좋지는 않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 나 말고도 아픈 선수는 많다. 모든 프로선수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말로 운동하기 싫은 날도 있을텐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심했다. 놀고 싶었다. 특히 방학에 더 그랬다. 다 쉬는데 학교에 나와 운동하기가 정말 싫었다. 이제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니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열심히 하면 주말에 쉴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낙이다. → 배구 안 할 땐 뭐하나. -쇼핑한다. 아내랑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한국 배구에서 눈에 띄는 후배는 누군가. - 워낙 유명한 선수들이 많으니, 굳이 내가 얘기 안 해도 다들 아실 것이다. 우리 팀에서는 (노)재욱이와 (이)승원이, 두 명의 세터가 중요하다. 한국에서 빠른 배구를 하는 첫 번째 주자라고 생각한다. 감독님이 주문하는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잘 한다면 많이 성장할 것이다. → 최 감독의 배구가 통할 거라 보나. -당연히 시행착오는 있을 것이다. 한 번에 잘 될 것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첫발을 내딛는 거다.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래도 빨리 성공했으면 좋겠다. →현대의 새 전술이 한국 배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용병한테 공을 띄우는 것도 하나의 전술이다.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팀의 색깔이 다른 거다. 우리는 우리의 색깔을 잡았으니 그렇게 가면 된다. 잘 될 거다. → 새 시즌의 목표는 무엇인가. -현대만의 배구를 보여 드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부상 없이 시즌을 마무리하고 싶다. ●”통증 달고 산다. 피로 풀리는 속도도 좀 늦어지고...” →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 예전에는 아프다는 걸 몰랐다. 이제는 통증을 달고 산다. 피로가 풀리는 속도도 느려졌다. → 대표팀 시절 최 감독과 룸메이트였다는데. -제가 대표팀 막내였을 때 감독님과 같은 방을 썼다. 하늘 같은 선배였다. 그때 배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주셨다. 선수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본 오니까 감독님과 라멘을 먹었던 게 생각난다. 하루 자유시간을 얻는 날 감독님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루에 라멘을 다섯 번이나 먹었다. 감독님과는 좋은 추억이 많다. → 최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서운 감독인가. -선수 시절 같았으면 말씀도 많이 하시고 이런저런 시지도 많이 하셨을 텐데, 지금은 참으시는 것 같다. 시즌이 시작되면 어떻게 변하실지 모르겠다. 우리 하기 나름이 아닐까 한다. ●”빠르고 새로운 스타일의 배구 보여 주겠다” →문성민 선수는 무서운 선배인가. -예전에는 많이 혼내는 편이었는데, 주장이 되고 나니 오히려 후배들 눈치를 보게 된다. 팀 분위기를 망치게 되지는 않을지 조심스럽다. 어린 선수들이 선배 눈치 안 보고 즐겁게 배구 했으면 좋겠다. 잔소리를 하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기본적인 것, 배구에 관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유롭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시즌 현대에 실망한 팬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지난 시즌에는 납득 할 수 없는 성적을 냈다. 올 시즌은 다를 것이다. 빠른 배구, 새로운 스타일의 배구를 하겠다. 우리의 배구를 즐기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 현대의 팬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미시마 강신 기자 xin@seoul.co.kr
  • [결혼 거품 사라진다] 가볍지만 특별한 결혼식

    [결혼 거품 사라진다] 가볍지만 특별한 결혼식

    지난 6월 9일 오후 3시 제주시 애월읍 곽지과물해변. 길이 350m, 너비 70m의 드넓은 백색 모래사장이 펼쳐진 이곳에서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3년 연애 끝에 이날 부부의 연을 맺은 주인공은 제주대 선후배 사이인 박소영(26·여)씨와 김영덕(29)씨. 두 사람은 이날 단 한 명의 하객도 초대하지 않고 단둘이서 혼인서약서를 주고받은 뒤 성혼선언문을 읽어 나갔다. 다이아몬드 반지 대신 서로의 모습을 하얀 도화지에 그려 선물했다. 한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이날의 모습을 기억하겠다는 뜻에서다. 우연히 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이 광경을 지켜봤다. 두 사람의 결혼 맹세를 보고 들은 증인은 10여명 남짓. 하지만 박씨 부부가 직접 초대한 하객들이 아니었다. 주례는 생략했다. 스튜디오 촬영 역시 해변에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결혼으로 ‘깨’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 ‘빚’이 쏟아진다는 이른바 ‘웨딩푸어’(결혼을 위해 빚을 지는 신혼부부)가 양산되는 현실에서 ‘탈(脫)거품 웨딩’이 새로운 결혼 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7일 서울신문이 인터뷰한 최근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두 예비부부 6쌍의 결혼비용은 평균 1027만 6000원으로, 모두 2000만원 미만이었다. 식장 대여료와 웨딩패키지(스튜디오 촬영+드레스 대여+메이크업), 예물·예단과 신혼여행, 혼수가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이는 결혼정보업체 듀오웨드가 올 2월 조사한 전국 평균 결혼 비용인 6963만원의 6분의1 수준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혼부부 10쌍 중 6쌍은 결혼 비용으로 매달 평균 70만원의 빚을 상환하고 있는 중이다. 박씨 가계부에 기록된 사진촬영, 드레스 대여, 메이크업과 결혼식 사회·주례의 총비용은 200만원. 하지만 박씨는 새로 생긴 업체의 무료 이벤트에 당첨돼 이마저도 아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날이 아니잖아요. 평생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만 확인하면 되죠” 두 사람의 확신은 양가 부모님마저 동의하게 만들었다. 오는 13일 결혼하는 오정환(29·가명·셰프)씨는 탈거품 웨딩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는 제주도의 한 펜션 앞마당에서 결혼한다. 오씨는 “특별하지만 가볍게 하고 싶다면서 왜 제주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웨딩업계에서 말하는 하우스웨딩이나 스몰웨딩은 또 하나의 호화결혼식이더라고요. 웬만한 웨딩홀보다 가격이 비싸 포기했어요”라고 했다.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펜션 결혼식 이후 제주에는 200만원 안팎의 비용으로 웨딩패키지와 예식 사회까지 제공하는 업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박씨와 오씨 모두 예단·예물·폐백 등 절차를 생략하고 별도로 혼수도 마련하지 않았다. 결혼 전 쓰던 가구와 식기를 그대로 쓴다. 이들처럼 20~40대 남녀 10명 중 9명(87.4%)은 거품 뺀 결혼식에 대해 ‘실용적이고 의미 있다’(결혼정보업체 듀오 1000명 대상 설문)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탈거품 웨딩을 하기까지 넘어야 할 인식의 장벽은 철옹성처럼 견고하다. 실용적으로 하는 결혼식도 예물·예단·폐백은 해야 한다는 부모세대와의 인식 차가 크다. 이를 반영하듯 젊은 남녀 10명 중 8명은 고착화된 결혼문화 탓에 가벼운 결혼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현실적 한계로 1번은 ‘가벼운’ 결혼식으로, 또 다른 1번은 ‘무거운’ 결혼식으로 두 번 치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달 제주도의 작은 교회에서 언약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마친 조은상(31·고려대 대학원생)씨는 같은 달 고려대 예식장에서 일가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한 번 더 식을 치렀다. 조씨는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일반적인 결혼식을 하되 둘만의 혼인서약은 따로 했다”고 설명했다. 대신 다른 데서 거품을 덜었다. 신부 김해린(32·고려대 대학원생)씨는 평균 비용 297만원에 이르는 웨딩패키지를 해외 직접구매와 중고품 매매 사이트인 ‘중고나라’에서 해결했다. 웨딩드레스는 물론 티아라 등 고가의 웨딩 액세서리도 중고로 구매해 쓴 후 되팔았다. 신혼여행지인 하와이에서도 3일 정도는 현지 학교의 기숙사 방을 저렴하게 빌렸다. 이제는 결혼 명소가 된 공공기관 식장은 만족도가 꽤 높아 인기몰이를 한다. 장성민(25·여)씨는 지난해부터 서초 국립중앙도서관에서의 결혼을 꿈꿨다. 장씨는 “단돈 6만원인 대관료도 장점이었지만 무엇보다 하객 수를 제한하고, 화환도 자제하는 원칙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결혼식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꿈꾸는 대로 예식 식순을 정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올 7월 서울 시민청에서 식을 올린 이연주(28·여)씨는 “남편과 첫 만남을 제 동생과 남편 친구가 직접 대본을 짜 재연했다”고 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세계서 가장 작은 남자’ 큰 족적 남기고 세상 떠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남자’가 세상에 누구보다 더 큰 '족적'을 남기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미국 ABC뉴스 등 외신은 네팔 출신의 찬드라 바라두르 단기(75)가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령 사모아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폐렴으로 사망한 단기는 지난 2012년 '54.6cm' 키로 기네스위원회가 인정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남자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그 이후 고향을 벗어나 비행기도 처음 타보고 세상을 구경하며 새로운 인생을 누렸지만 그 이전 고인의 인생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400km 떨어진 산골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단기는 작은 키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그의 다섯 형제들은 모두 정상적인 키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년 이상을 산 속 마을에만 살던 그의 사연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결국 새로운 삶을 얻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최근들어 병세가 악화돼 사모아까지 와서 치료를 받았으나 이번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측근은 "유가족의 오열 속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 면서 "우리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그를 사랑했고 찬드라 왕자라 불렀다” 며 추모했다. 기네스 위원회 측도 성명을 통해 "가장 특별했던 타이틀 보유자였던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 이라면서 “유가족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한편 과거 인터뷰에서 단기는 “한평생 산골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나의 이름이 세계인들이 보는 기네스북에 실리게 돼 너무나 기쁘다” 면서 “가족과 함께 여러 마을과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TV 하이라이트]

    ■별이 되어 빛나리(KBS2 오전 9시) 1960년대 아버지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 후 해방촌으로 흘러들어 온 조봉희가 거친 삶을 헤쳐나가며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이야기. 재균은 10년 전 자신과 좋아했다고 소문난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애숙을 찾아가고, 그 여인이 미순임을 알게 된다. 윤 회장은 재균을 찾아와 대영방직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다. ■슈츠 5(FOX 밤 8시 20분) 변호사 하비와 마이크가 펼치는 법정 드라마. 하비는 자신이 회사를 떠나면 회사에 대한 공격을 멈추겠다는 포스트먼의 말에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에이가드 박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으며 어머니의 외도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했던 때를 회상한다. 한편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비밀 때문에 자꾸만 문제가 생기자 마이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 주셨던 신부님을 찾아간다. ■두 번째 스무 살(tvN 밤 8시 30분) 작은 해프닝으로 시작된 38살 아줌마 하노라(최지우)가 펼치는 대학 캠퍼스 이야기. 현석(이상윤)은 통통 튀던 과거와 180도 달라진 노라의 모습에 왠지 모를 짜증이 나고,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노라는 우연히 현석이 게스트로 나온 라디오에서 ‘웰다잉’(아름다운 죽음의 마무리)에 대해 알게 된다. 방송을 통해 노라는 남은 날을 잘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데….
  • [독박(讀博) 육아일기] (24) 깜깜한 초보엄마를 깨워줄 길잡이가 필요하다

    [독박(讀博) 육아일기] (24) 깜깜한 초보엄마를 깨워줄 길잡이가 필요하다

    세 자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난 숙명이었는지, 지금까지 나의 삶은 주로 혼자 알아서 하는, 길잡이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같은 또래의 언니나 오빠가 없다 보니 뭔가를 배우고 따라할 존재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맏언니의 역할처럼 항상 내가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대학 입시에 취업, 결혼, 출산까지 또래들보다 반 박자 정도 빨랐다. 돌아보면 혼자 알아서 해낸 것 치고는 대체로 괜찮은 결과들이었다. 하지만 혼자 가는 길의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 앞이 항상 깜깜했다.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시행착오도 줄이고 보다 좋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엄마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품고 낳고 기르는 일이 내 인생 30년 만에 처음 해보는 일이었는데 거의 대부분을 혼자 ‘알아서’ 해야했다. 가까운 주변에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늘 정보에 매말랐다. 사실 온갖 육아 정보는 널리고 널렸다. 오히려 차고 넘쳤다. 너무 많아서 탈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너무 어려웠다. ●혼자 알아서 하는 삶…육아도 마찬가지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를 시작으로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까지 모든 것을 닥쳐야 알 수 있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임신·출산·육아 관련 백과사전을 샀지만, 생후 4~5주 태아부터 24개월까지 아이의 일반적인 특성이 한 권에 모여있다 보니 정작 그 때 그 때 필요한 정보는 한 두 쪽에서 끝이 났다. 막상 아기를 키울 때는 책을 펼칠 시간도 없을 뿐더러 잘 와닿지가 않았다. 육아가 책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 내 아이도 책에 있는 아기들과는 달랐다. 산후조리원 2주 동안이 거의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시간이었다. 그래봤자 하루 한 두번, 분유나 유아용품 업체 직원들이 홍보를 겸한 간단한 육아정보를 전해주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열심히 필기를 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체 직원들의 짧은 강의는 조리원에서 쓰기 시작한 로션을 집에 와서도 아기에게 바르고, 신생아실에서 먹던 분유를 계속 먹이게 되는 방식으로 엄마들에게 흡수됐다. 집으로 돌아오니 조리원에서 주워들은 정보도 새까맣게 지워졌다. 강아지도 한 마리 안 키워 본 내가 갑자기 핏덩이 같은 작은 사람 한 명을 안게 됐는데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아기들은 울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라고 책에서 읽었지만, 왜 우는지는 알아야할 것 아닌가. 젖을 먹어도 울고 쉬를 해도 울고. 잠도 안 자고 울었다. 작은 거실 쇼파에 둘이 앉아 하루종일을 그렇게 울면서 보냈다. 몇 주쯤 지나자 남편이 출근하기 위해 문 밖을 나서는 것마저 아쉬웠다. 또 둘만 남겨지는구나, 또 나 혼자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하는구나. 두려웠다. 육아에 대한 ‘무지(無知)’는 갈증과 막막함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원래부터 엄마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나의 한 순간 선택이 신생아에게 엄청난 영향을 줄까봐 걱정이 됐다. 아기가 조금씩 자라면서도 이 개월수에 이 정도 움직임이 맞는 것인지, 이유식을 왜 이렇게 안 먹는 것인지, 이렇게 안 먹어도 영양 상태에 지장이 없는지 늘 의문 투성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지만 초짜 엄마에게는 그런 대범함이 있을 리 없었다. ●아기에 대한 궁금증, 바로 해소할 수 있는 곳은 ‘카페’ 뿐 그럴 때 바로 물어볼 수 있던 곳이 육아 관련 카페였다. 질문을 올리지 않고도 검색만으로도 대충 필요한 정보를 얻기 충분했다. 가장 먼저 검색해 본 것은 ‘신생아 눈맞춤’이었던 것 같다. 언제 아기가 나를 바라봐주는지 제일 궁금했다. 그 다음 ‘모유수유’ 관련 각종 질문 및 고충들이 가장 많았고, 돌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안 먹는 아기, 이유식 잘 먹이는 방법’ 등을 숱하게 찾아봤다. 다른 엄마들의 경험담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궁금증과 고민을 다른 엄마들도 이미 경험했다는 자체 만으로도 무언가가 조금이나마 해소된 기분이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발간한 ‘영유아 부모의 육아정보 이용실태 및 활용지원 방안’ 보고서에도 영유아 부모들이 육아정보를 찾을 때 주로 이용하는 매체가 퍼스널 미디어(포털·온라인 커뮤니티·SNS)가 59%로 가장 많았다고 나와있다. 그 다음으로 지인(20%), 기관(16.4%), 매스미디어(4.6%) 순이다. 전문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특히 아기가 어릴수록 엄마도 외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의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들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퍼스널미디어를 통한 정보 습득은 점차 줄고, 지인과 기관을 통한 정보습득이 늘어난다고 한다. ●육아 전문가, 만나기도 힘들고 만나도 어려워 전문가에게 제대로 된 정답을 들을 수 있는 통로인 병원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제일 처음 생후 6일된 아기를 안고 소아청소년과 병원에 갔을 때 주사를 맞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와 무채색 얼굴로 너무나 무뚝뚝했던 의사 선생님에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신이 없어서 아기가 황달 증상이 조금 있었는데도 그걸 물어보지 못하고 나왔다. 뒤늦게 생각이 났지만 이미 진료실 문은 닫혔다. ‘괜찮겠지’라고 애써 마음을 달랬는데 2주쯤 뒤까지 아기가 샛노란 얼굴로 변했다. “의사한테 그거 하나 물어보지 못한 바보 엄마”라고 자책하는 일기를 매일 썼다. 그 뒤로는 소아과에 갈 일이 생기면 궁금한 것을 사소한 것이라도 꼭 메모해 간다. 극성맞고 유난스러운 엄마로 보일지라도 물어볼 수 있는 전문가가 의사 뿐인데, 의사를 만날 기회는 흔치 않으니 어떻게든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나와 아이와 맞는 병원을 찾는 데에도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 동네에도 유명한 소아과가 몇 군데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그런 곳은 몇 시간 전부터 대기를 걸어야하기도 했다. 정작 진료시간은 10분도 안 된다. 지난해 처음 영유아검진을 예약할 때 몇몇 병원은 무려 1년치까지 예약이 꽉 차있다고 했다. “도대체 저출산 국가라고 하더니 영유아검진 하나 예약하기가 이렇게 어렵냐”고 구시렁댔다. 어렵게 약속을 잡고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들을 만났지만, 어떤 곳은 과잉진료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곳은 너무 성의 없게 봐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4개월 아기가 콧물을 흘려 데려갔더니 대뜸 “눈 크기가 다르다”면서 “안면신경마비나 시신경마비일 수 있으니 크면 대학병원에나 가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의사가 있었는가 하면, 아기 피부가 벗겨져 물어보니 “몰라요”라고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답한 의사도 있었다. 아기 피부 문제로 대학병원까지 가게 됐지만 무조건 “아토피 기가 조금 있다”는 진단과 연고 처방으로 끝이 났다. 너무 겁을 줘도 또 너무 대충 말해줘도 엄마의 가슴은 항상 철렁했다. ●의사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초보맘 가슴은 ‘철렁’ 나도 직업 특성상 하루에도 100통 가까운 보도자료가 쏟아지다 보니 꼼꼼하게 읽지 못하고 어떤 때는 많은 것을 그대로 휴지통에 버리기도 한다. 아마 의사 선생님들도 비슷하겠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비슷한 감기 증세의 아이들이 몰려오겠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의사 선생님들의 단어 하나가 초보 엄마들의 마음에 얼마나 깊게 새겨지는지도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기가 잘 낫는 것도 중요했지만 기왕이면 내가 더 믿고 의존할 수 있는 병원을 정해놓고 다니고 싶었다. 동네 소아과를 5~6군데나 다녀봤다. 결국 마지막으로 정한 곳이 두 곳인데 한 곳은 주말을 포함한 매일 자정까지 진료를 보는 곳이라 복직 이후에 애용하게 됐다. 또 다른 곳을 ‘주치의’ 병원으로 정했는데, 담당 선생님 때문에 마음을 굳혔다. 특별히 진단을 잘 하거나 딱 들어맞는 약을 처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아기에 대해 걱정하고 조바심을 낼 때 항상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 걸로 아기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등의 말을 해주면서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고 조바심이 든다. 그럴 때 이런 말 한 마디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대신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 대기시간 최소 30분을 추가로 써야한다. 몇몇 소아과에만 항상 줄 지어 있는 대기 인원들을 보면, 아마 많은 엄마들의 사정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급할 때 찾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선배 엄마들이다. 심지어 임신부들이 자신의 배 사진을 찍어 올리며 “이 주수에 이 정도 배 크기가 맞는 거냐”고 묻기도 하고, 아기 엄마들이 아기의 변 사진을 올려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남의 아기 똥까지 엿봐야 할 때마다 짜증스럽기도 하고, 이런 사진들까지 올리는 게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오죽 마음이 급했으면 이렇게까지 할까 심정은 이해가 간다. “아기가 아픈데 지금 병원을 가야할까요, 말아야할까요?”라는 질문도 흔한데 역시 그 마음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다. 아기가 아픈 것 같아 병원에 갔다가 “뭐 이런 걸로 병원에 왔냐”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육아가 간절하다 꼭 의사가 아니더라도 전문가와 함께하는 육아가 간절했다. 휴직기간 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방송되는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빼놓지 않고 봤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교수와 박사가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볼 수 있는 전문가였다. 아기가 이유식을 심하게 먹지 않을 때에는 나도 출연 신청을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내 얼굴 팔리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아기의 상황을 짚어보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선배 엄마들의 경험담도 좋지만 내 아기와 나에 대한 전문적인 판단이 고비마다 필요했다. 그 갈증은 아직도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다. 복직을 한 뒤에야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우리동네 보육반장’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2013년에 시작된 것으로 25개 자치구에 총 132명의 보육반장이 활동한다고 한다. 구별로 4~8명의 보육반장이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육아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고민 해결이나 상담하는 역할도 한다. 30~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선배 엄마들이 활동한다. 아직 2년 남짓 밖에 안 됐고 엄마들이 보육반장에 대한 정보 자체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런 식의 육아 길잡이들이 좀 더 활성화되면 좋을 것 같다. 각 자치구에는 육아종합지원센터도 있다. 우리 동네의 경우 1만원의 회비를 내면 장난감을 대여하거나 놀이방에서 놀 수 있고, 문화센터와 같은 아기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개설돼 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항상 주변의 손길이 필요했다. 특히 초보 엄마에게는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비해 너무 아는 것도 없이 육아를 시작했다. 내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여러 번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이를 두고 겪는 시행착오는 겁이 난다. 누구나 육아 길잡이가 되어주고, 또 누구나 길잡이와 함께 육아를 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이 기사의 관련기사(18)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19)연예인 만삭화보, 그것은 꿈일 뿐…(20)엄마가 되어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21)아줌마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22)외식에 집착하는 외로운 아기엄마의 항변 (23)엄마의 책임감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 ▶1회부터 17회까지는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허백윤 기자의 독박 육아일기 / ☞블로그
  • “다운증후군 딸이 결혼합니다”…아빠의 감동 손편지

    “다운증후군 딸이 결혼합니다”…아빠의 감동 손편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25살 딸의 결혼식에 감동스러운 손편지와 성대한 결혼식을 선물한 아버지의 사연이 알려져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오하이오에 사는 폴 도어티(57)의 딸 질리언(25)은 10년 간 연애해 온 남자친구 리안과 지난 6월 야외 결혼식을 올렸다. 질리언과 리안은 모두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애정이 변치 않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드디어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던 날, 질리언의 아버지는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 안에는 그간 딸 질리언을 키우면서 흘렸던 눈물, 다운증후군이라는 이유로 딸이 반려자를 찾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던 마음 등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그는 편지에 “두 시간 후면 너(질리언)는 인생의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된단다. 다운증후군 여성으로 태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얼마나 드물고 흔치 않은 일인지 안다. 네가 그러한 것(편견)들을 잘 이겨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적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폴이 과거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딸 질리언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책에서 “나와 아내는 질리언의 지적 수준이 높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면서 “질리언이 12살 무렵일 때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폴은 결혼식 직전 편지를 썼고, 딸이 백색 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을 향해 걸어나가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후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질리언은 내게 감사하다고 말했고, 나는 질리언에게 ‘너는 언제나 나의 작은 소녀’라고 말해줬다”며 그날의 감동을 되새겼다. 노던켄터키대학교에서 일하는 질리언과 신랑 리안의 결혼식에는 160여 명의 하객이 참석해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박수를 보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6] 국수와 파스타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6] 국수와 파스타

    국수(면)만큼 거의 세계 전역에서 즐기는 음식도 흔치 않다. 국수의 모양이나 요리법, 곁들이는 고명은 지역의 특징에 맞게 변천했지만, 그 원형은 유라시아 문명 교류의 중요한 상징이다. ●국수, 기원전 5000년 중앙아시아 유목민 음식서 유래 면(麵)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전해진 밀가루를 이르는 말이다. 진나라 때 서역인이 ‘밀’이라고 부르는 말을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또 국수라는 말은 삶은 면을 물에 헹궈 건져 올린 것을 뜻하는 한자어다. 따라서 밀가루를 반죽해 물에 넣고 삶은 게 면이자 국수다. 국수는 기원전 5000~6000년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음식이었다. 반면 서양인은 기원전 3000년쯤부터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들의 주식인 고기에 부족한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위해서다. 국수가 빵보다 역사가 깊은 셈이다. 국수의 유래에 대해 많은 학설이 있지만, 국수가 유목민의 음식인 까닭은 우선 남방의 쌀과 달리 밀은 북방의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반죽한 밀가루를 굳이 수고스럽게 손바닥으로 비벼서 가는 국수 형태로 만든 것은 잠시 머문 정착촌에서 국수를 물에 삶을 때 되도록 빨리 익히기 위해서다. 가느다란 국수가 식감이 좋고 소화도 잘 됐을 것이다. 또 양고기나 마른 야채 등을 넣고 함께 끓여도 잘 어울린다. 다시 이동할 때에는 반죽한 국수만 잘 보관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숙성의 맛을 더할 수 있다. 국수는 기원전 1~2세기 후한 때 실크로드 상인에 의해 동쪽으로 전파된다. 국수는 진과 당을 거쳐 송나라 때 꽃을 피운다. 송의 수도 카이펑에서는 높은 성벽이 사라지고 개방된 국제도시답게 노점이 성행했다. 이 노점에서 국수에 국물을 붓고 고기 절편 등 고명을 얹어 먹었다. ●통일신라~고려초 한반도 유입... 밀가루 귀해 잔치때만 맛 봐 이 시기인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 한반도에도 국수가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 땅에선 밀가루가 귀한 식재료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때까지도 결혼식, 회갑연, 제례일 등 특별한 날에만 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는 요즘 결혼식장에서 잔치국수를 내놓고 또 일부 지역에선 제사상에 삶은 국수를 올리는 전통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국수 요리는 크게 냉면, 비빔국수, 국수장국(온면), 제물칼국수로 나뉜다. 이 4종에서 무려 60여 가지의 국수 음식이 탄생한다. 우리는 메밀이나 녹두 가루도 국수 재료로 썼다.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비빔국수와 냉면이 있다. 황해도 개성은 예부터 부유한 상인이 많이 살던 곳인 만큼 귀한 밀국수를 즐겼다. 지금 밀국수의 본고장은 옛 개성처럼 국제적 항만 도시인 부산이다. 6·25전쟁 이후 미군 원조로 받은 밀가루 덕분이다. 이어 한양에서는 각종 국수 음식이 다 있었지만 특히 전통식 온면을 으뜸으로 여겼다. 온면의 국수는 밀가루 외에도 메밀가루 등을 썼다. 경기도에선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한 칼국수를 먹었다. 온면은 삶은 국수를 먼저 그릇에 담은 뒤 맑은 형태의 육수를 부어 깔끔한 맛을 낸다. 반면 제물칼국수는 각종 식재료가 들어간 육수에 국수를 함께 넣고 푹 끓인다. 전라도와 경상도도 만들기 편한 칼국수를 즐겼는데 다만 서해 지역은 조개, 동해나 남해 지역은 멸치, 육수 등 지역 특산물로 맛을 더했다. 까다로운 선비의 고장이라는 안동의 건진국수는 일종의 칼국수이긴 한데, 이를 다시 온면 방식으로 국수를 건져 육수를 붓는 정성을 더 들였다. ●9세기 이슬람 시칠리아 지배하며 국수 유럽에 전파 동양에선 국물과 함께 먹는 국수 음식이 발달된 반면 서양에선 국물 없이 소스를 이용한 국수를 선호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게르만족, 바이킹족 등이 유럽에서 득세하는 동안 중동에선 신흥 이슬람 세력이 힘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도 손에 넣으며 현지 음식인 국수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굴복시킨 뒤 오래전부터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시칠리아마저 정복한다. 827년 이슬람군 1만명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해 200여년 동안 지배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배운 국수 요리를 처음 유럽 땅에 전파한다. 유럽 남부의 지중해 근처에는 흰 경질밀보다 노란 듀럼밀이 흔했다. 듀럼밀은 단단하고 거칠지만 접착력과 탄력성이 좋다. 우리가 아는 파스타의 노란색 국수 원료다. 스파게티는 300여종에 이른다는 파스타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이슬람인들은 듀럼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이게 이탈리아 본토인 나폴리 등을 거쳐 오늘날 세상에 퍼진 파스타가 된다. 토마토소스는 남미의 작물인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진 것이 16세기, 식재료가 된 게 19세기 중반인 만큼 나폴리 등에서 소스로 사용하다가 이탈리아계 미국 이주민이 늘면서 확산된 것이다. 그전엔 치즈 가루 등만 뿌려 맛을 냈다. ●흰 경질밀아닌 노란 듀럼밀 사용... 포크 사용문화로 면 길이 짧아져 그럼 왜 긴 가닥의 국수가 마카로니 등처럼 짧고 도톰한 모양의 파스타(쇼트 파스타)로 바뀐 것일까. 또 이슬람권에서는 왜 국수가 거의 사라졌을까. 국수를 먹는 방법의 차이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에서는 고대 시절부터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했다. 젓가락은 길고 미끌미끌한 국수 가닥 한 올까지 잘 잡을 수 있다. 반면 서양인은 포크를 쓴다. 우리 상식과 다르게 유럽 귀족이 지금과 같은 모양의 포크를 사용한 것은 베네치아 공국 이후였고, 백성은 대부분 손이나 작은 칼을 썼다. 그러니 가느다란 국수 가닥을 잡기에는 불편했다. 따라서 더 굵거나 또는 나사 모양으로 돌돌 감은 국수를 파스타의 재료로 사용했다. 아울러 이슬람인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 먹는 게 전통인데, 끈적끈적한 육즙을 묻혀 미끈거리는 국수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옛 이란 원주민은 국수를 이르는 말을 가느다란 ‘실’이라는 뜻과 함께 썼다. 음식은 언어처럼 더 나은 진화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음식의 원형을 찾는 노력을 하면 인류 문명의 긴 역사가 보일 것이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새 영화] ‘기적의 피아노’, 시각 장애 소녀 예은이, 피아노로 희망을 연주하다

    [새 영화] ‘기적의 피아노’, 시각 장애 소녀 예은이, 피아노로 희망을 연주하다

    눈물은 예상치 못한 데서 나왔다. 시각 장애 피아니스트 예은이가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어서 평생 앞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에도 애써 억눌렀던 감정은 아이가 자작곡으로 숨겨 왔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터지고 말았다. 누구보다 외롭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이는 오히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은이의 피아노는 기적 그 자체다. 예은이는 두 살 때 엄마가 주워다 준 전자오르간을 갖고 놀면서 음을 익혔다. 수년간 귀로 익힌 절대음감이 예은이의 유일한 무기다. 아이는 엄마가 부르는 노랫소리부터 베토벤이나 쇼팽 등 거장들의 음악을 악보 없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은이를 천재라고 불렀고 TV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갔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누구보다 훌륭한 실력을 가졌지만 앞을 못 본다는 핸디캡이 있는 예은이가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기적의 피아노’는 그렇게 절망에서 희망의 기적을 일궈 가는 예은이네 가족의 이야기다. 예은이 엄마 박정순씨는 장애인 봉사 활동을 하다가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장애인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살던 부부는 어느 날 자신들에게 맡겨진 예은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피아노 한번 배워 본 적 없는 엄마는 일찌감치 예은이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고 아이를 위한 감성 교육을 시켰다. 소나기가 올 때는 빗소리를 듣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손으로 바람을 느끼면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피아노로 표현하도록 했다. 예은이네가 가장 기뻤던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주성혜 교수에게 인정을 받고 피아노 선생님이 생겼을 때다. 예은이는 피아니스트 이진욱씨를 만나 ‘물 만난 고기’처럼 연주를 쏟아 낸다. 아이는 선생님과 주거니 받거니 연주를 이어 나간다.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 날 엄마는 풀 죽은 예은이에게 “키 작은 사람도 있고 큰 사람도 있고, 뚱뚱한 사람도 있고 날씬한 사람도 있듯이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사람은 다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예은이네가 세상의 비장애인들에게 전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예은이가 이웃집 친구 현지를 만나 천진난만하게 웃는 장면은 극장 안을 흐뭇한 미소로 물들인다. 그렇게 예은이는 두렵고 무서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있었다. KBS에서 ‘인간극장’을 연출했던 임성구 감독은 3년에 걸쳐 예은이의 성장기를 꼼꼼하게 담았다. ‘워낭소리’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그랬듯이 투박하지만 담백한 이야기가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두드린다. 기본적으로 휴먼 드라마이지만 음악영화이자 한국 교육에 대한 시사점도 담겼다. 내레이션은 한류스타 박유천이 재능기부 형태로 참여했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이 돼 부쩍 성장한 예은이의 꿈은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예은이의 소중한 꿈이 잘 커 나갈 수 있도록 세상이 답을 해 줄 차례다. 3일 개봉. 전체 관람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안구없는 천재피아니스트 예은이의 ‘기적의 피아노’

    안구없는 천재피아니스트 예은이의 ‘기적의 피아노’

    눈물은 예상치 못한 데서 나왔다. 시각 장애 피아니스트 예은이가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어서 평생 앞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에도 애써 억눌렀던 감정은, 아이가 자작곡으로 숨겨왔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터지고 말았다. 누구보다 외롭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이는 오히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은이의 피아노는 기적 그 자체다. 예은이는 두살때 엄마가 주워다 준 전자 올겐을 갖고 놀면서 음을 익혔다. 수년간 귀로 익힌 절대 음감이 예은이의 유일한 무기다. 아이는 엄마가 부르는 노래 소리부터 베토벤이나 쇼팽 등 거장들의 음악을 악보 없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은이를 천재라고 불렀고 TV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갔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누구보다 훌륭한 실력을 가졌지만 앞을 못본다는 핸디캡을 가진 예은이가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기적의 피아노’는 그렇게 절망에서 희망의 기적을 일구어가는 예은이네 가족의 이야기다. 예은이 엄마 박정순씨는 장애인 봉사 활동을 하다가 젊은 시절 교통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장애인 복지 시설을 운영하면서 살던 부부는 어느 날 자신들에게 맡겨진 예은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피아노 한번 배워본 적 없는 엄마는 일찌감치 예은이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고 아이를 위한 감성 교육을 시켰다. 소나기가 올때는 빗소리를 듣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손으로 바람을 느끼면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피아노로 표현하도록 했다. 예은이네가 가장 기뻤던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주성혜 교수에게 인정을 받고 피아노 선생님이 생겼을 때다. 예은이는 피아니스트 이진욱씨를 만나 ‘물만난 고기’처럼 연주를 쏟아낸다. 아이는 선생님과 주거니 받거니 연주를 이어나간다.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날 엄마는 풀 죽은 예은이에게 “키 작은 사람도 있고 큰 사람도 있고, 뚱뚱한 사람도 있고 날씬한 사람도 있듯이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사람은 다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예은이네가 세상의 비장애인들에게 전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예은이가 이웃집 친구 현지를 만나 천진난만하게 웃는 장면은 극장 안을 흐뭇한 미소로 물들인다. 그렇게 예은이는 두렵고 무서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있었다. KBS에서 ‘인간극장’을 연출했던 임성구 감독은 3년에 걸쳐 예은이의 성장기를 꼼꼼하게 담았다. ‘워낭소리’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그랬듯이 투박하지만 담백한 이야기가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두드린다. 기본적으로 휴먼 드라마이지만 음악영화이자 한국 교육에 대한 시사점도 담겼다. 내레이션은 한류스타 박유천이 재능 기부 형태로 참여했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이 돼 부쩍 성장한 예은이의 꿈은 연주할때 가장 행복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예은이의 소중한 꿈이 잘 커나갈 수 있도록 세상이 답을 해 줄 차례다. 3일 개봉. 전체 관람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새벽 4시부터 일과…명품 횡성한우·특급 참깨 多 챙긴다

    [자치단체장 25시] 새벽 4시부터 일과…명품 횡성한우·특급 참깨 多 챙긴다

    자치단체장들의 하루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새벽 등산에서 밤늦은 상갓집 문상으로 하루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쓴다.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고 수시로 현장을 찾는다. 마을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한다. 군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들이 형님·동생에, 어머니·아버지다. 애경사를 내 일처럼 챙기니 그렇다. 중앙부처와 국회도 문턱이 닳도록 다니고, 인연을 맺은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내 식구처럼 챙긴다. 예산 확보 때문이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 기업체 방문에도 공을 들인다. 투자 유치에 혈안이다. 관광객 유치도 큰일이다. 하루를 48시간처럼 쓰는 자치단체장의 24시간을 함께 돌아본다. “부지런한 군수님 때문에 군민들이 잠을 잘 수 없다.” 새벽에 만난 주민은 이런 농담을 던지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인구 4만 6000여명의 살림을 책임지는 한규호(64) 강원 횡성군수의 하루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지난 8월 28일 기자와 함께할 때도 그랬다. 아침 운동부터 식사까지 주민들과 함께 한다. 집에서 군청까지 5분 거리이기도 하고 가까운 곳을 다닐 때는 관용차 대신 가급적 걷는데 주민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어서다. 모두가 가족이고 친척 같다. 공식 일정은 실·과장들의 아침 일일보고다. 한 군수의 관심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횡성한우축제다. 그는 “횡성한우축제 기간 기업홍보관을 통해 지역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을 홍보하는 데 주력하라”고 지시했다. 축제 기간 지역 상품을 알려 실속 있는 축제로 만들자는 취지에서다. 아울러 행사 때 횡성청소년교향악단의 도움을 받을 것도 당부했다. 시시콜콜 챙기며 행사 준비에 철저한 모습이다. 하지만 참모들과의 회의에서는 영락없는 시골 이웃집 형님 같다. 이어지는 결재 시간, 집무실 앞 비서실이 붐빈다. 실장, 과장, 팀장들이 줄줄이 대기하다 결재를 받는다. 역시 횡성한우축제 추진 관련 결재가 주요 이슈다. 30분의 짧은 시간에 크고 작은 15건의 사안을 결재했다. 한 군수는 “가장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라면서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번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옷을 챙겨 입고 외출할 준비를 한다. 군수 참석을 요구하는 외부 행사가 시작된다. 안보정세보고회, 노인대학 개강식, 이장 가족 화합 행사, 소통 공감 릴레이 행사, 점심까지 지역 곳곳을 누빈다. 자리를 빛내고 주민들과 소통한다. 선출직 단체장이라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일정이기도 하다. 한 군수의 빡빡한 일정을 수행하려면 체력 단련이 필요하다는 진현옥 홍보담당은 “단체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혀를 내두른다. 이날 외부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횡성 농민들에게 희소식이 될 참깨수확기기 실증시험이었다. 횡성읍 정암2리 참깨 재배 농가에서 펼쳐진 행사에는 횡성농업기술센터와 재배 농민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이완규 횡성농업기술센터 소장은 “벼농사 위주에서 벗어나 수확이 많이 나는 품종인 참깨를 심고 기계화해 지역 고소득 작목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참깨 재배 농민 이송윤(72)씨는 “논을 메워 콩을 심다가 올해 처음 참깨를 심었다”고 말했다. 한 군수는 “재배에 손이 많이 가지만 수익이 많은 참깨를 지역 특산물로 가꾸고 지역 서원농협과 수매계약까지 맺어 안정된 판로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올해 횡성 지역의 참깨 재배 면적은 117㏊에 이른다. 한 군수는 직접 기계를 몰며 시연을 펼쳤다. 전문 육묘장, 참기름 공장까지 세워 지역 대표상품인 안흥찐빵, 횡성더덕에 이어 새로운 지역 특산품으로 만들 작정이다. 횡성한우축제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자 직접 한우 농가를 찾았다. 340마리의 횡성한우를 사육하는 조곡리 한보축산에서 기르는 한우를 살폈다. 밖은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지만 개방형 축사 실내는 26~27도로 시원하다.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려 지붕을 식혀 주고 대형 선풍기가 돌며 쾌적한 환경을 만든 덕분이다. 한상보(52) 농장주는 “출하를 앞둔 소들은 한 마리당 1000만원 안팎으로 국내 일반 소들보다 15~20% 더 비싸게 팔려 나간다”면서 “군청에 횡성한우 전문 부서까지 둬 품질을 관리하고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보한 덕”이라고 말했다. 횡성군은 2009년 자체적으로 ‘횡성한우 보호육성에 관한 기본조례’를 만들어 가짜 횡성한우를 원천 봉쇄했다. 2010년에는 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소고기 이력제에 품질인증제까지 더해 완벽하게 유통 투명성을 확보했다. 횡성한우 전문 사이트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횡성한우는 1500여 농가에서 4만 7000여 마리가 사육된다. 국내 축산물 브랜드 경진대회 4년 대통령상(2005·2007·2008·2013년), 3년 국가 명품인증(2009·2010·2014년)을 받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한우다. 한 군수는 “제2도약을 위해 생산, 가공, 유통, 관광 등 횡성한우 6차산업지구 조성에도 나선다”고 강조했다. 공근농공단지 내 기업체도 찾았다. 지역에 입주한 190여개 기업체 가운데 가장 모범인 ㈜서울에프엔비를 방문했다. 지역 일자리 창출에 대한 감사 방문이다. 횡성 지역에서 나는 우유를 모아 다양한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며 수익금 일부로 지역 게이트볼대회를 열어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군청으로 돌아오는 길에 횡성전통시장 상인들도 만났다. 시장에서 좌판을 연 시골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아프던 다리는 이제 좋아지셨느냐”, “몸이 성치 않은 할아버지는 잘 계시느냐”, “손자 결혼식은 잘 치르셨느냐”며 일일이 안부를 묻는다. 새 가게를 여는 황광열 횡성전통시장 조합장은 “내일 개업식에 꼭 오라”며 군수 옷깃을 잡아끈다. 한 군수는 이날 저녁 늦게까지 주민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글 사진 횡성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독박(讀博) 육아일기](23) 엄마의 책임감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

    [독박(讀博) 육아일기](23) 엄마의 책임감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

    며칠 전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수업’을 했다. 이번에는 마침 야간근무 기간인 남편이 오전에 퇴근을 하면서 함께 갈 수 있었다. 자기의 영역에 엄마와 아빠가 찾아와 함께 있으니 한껏 들떴는지 아이는 어린이집을 신나게 휘젓고 다녔다. 엄마 손을 끌고 여기저기 다니며 다른 아이들에게 마치 “우리 엄마, 아빠야”라고 소개를 해주는 것 같았다. 함께 체육활동을 하고 김밥을 만들었다. 부모가 된 지 600여 일. 아직도 이 말이 어색하기만 하다. 부모 참여수업에 참석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을 세 번째 받았지만 내가 가는 자리가 맞는지 괜히 쑥스럽기까지 하다. 회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나를 “OO엄마, OO맘”이라고 부르고 있고, 아이에게 “엄마가 해줄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지만 과연 내가 ‘부모’가 맞는지, 이 아이는 나의 ‘자녀’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전히 늘 고민하게 된다. 좋아하는 노래의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우린 어떤 의미였었나”라는 가삿말을 아이에 대입해 끊임없이 생각해 본다. ●처음 부모가 되었다고 느낀 순간들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다’고 느낀 순간은 출산하고 몇 시간 뒤였다. 신생아실에 있는 수유실에 내려가 아기를 처음 안아들었다. 네가 내 뱃속에서 나온 아기니? 곤히 눈을 감고 있는 아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살면서 그렇게 작고 어린 아기를 안아본 일도 없었을 뿐더러 내 뱃속에 이런 생명체가 있었다는 자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로서의 ‘책임감’은 그로부터 또 며칠 뒤, 산후조리원으로 옮겨서 처음 실감했다. 모유수유를 시도하는데 아기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태어난 뒤부터 계속해서 모유를 먹지 못한 것 같은데, 나의 미숙함으로 아기를 굶게 만드는 것 아닌가 자책했다. 그 이후 육아 기간 중 가장 신경쓴 것도 아이의 먹는 것이다. 13개월 동안 완모를 하고 6개월부터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돌 전부터 밥을 먹이면서 ‘삼시 세 끼’ 먹이는 것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상상 이상이었다. 할머니가 항상 밥 먹었는지를 먼저물으시며 그렇게 밥에 집착하시던 것이 조금 이해가 간다. 내가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이 아이의 건강에 곧바로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니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반면 남편이 ‘아빠가 됐다’고 느낀 것은 조금 달랐다. 남편은 아기가 태어난 지 사흘째 조리원에 가서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봤다. 너무 작은 아기가 혹시나 부서질까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이 역력했다. 2주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신생아 기저귀를 하루에 10개씩 갈아치우는 모습을 오롯이 보게 됐다. 그 때 처음으로 아빠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어깨에 와닿았다고 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기저귀를 갈아치우다니. 저 기저귀 값을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별로 생각지 못해본 부담감이다. 이렇게 우리는 부모가 되기 시작했다. 품에 안으면 작은 발이 아빠 배에 닿을락 말락했던 아기가 어느덧 아빠의 허벅지까지 발이 내려오도록 자랐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인지 능력이 급격히 발달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이 아이가 어떤 것을 배우고 자랄지, 어떤 사람이 될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그대로 따라하는 아기를 보며 덜컥 겁도 난다. 자투리 시간에 검색해 보는 것은 아이의 개월수에 맞는 놀잇감, 이맘 때 아이들에게 어떤 자극이 적절한가 등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책임감의 종류도 달라진다 남편은 부쩍 돈 이야기를 많이 꺼낸다. 둘의 기념일과 생일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어 요즘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집”이라고 답할 정도다. 어느 지역에 둥지를 트고 아이를 키우면 좋을지 열심히 궁리한다. 맞벌이다 보니 서로 회사생활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나의 걱정이 주로 눈 앞의 상황에 머물러 있고, 당장 앞가림을 잘해야한다는 데 있다면 남편은 나중에 아이가 대학갈 때까지 회사를 다니며 등록금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걱정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연애할 때는 오늘 뭘 먹을까,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했던 두 사람이다. 결혼준비를 할 때에는 둘이 살기에 적당하고 출퇴근하기 좋은 것이 신혼집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주말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제는 왕복 4시간 이상의 출퇴근 거리인 집에 살면서도 아기 봐주시는 이모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 이사를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집을 옮기게 되어도 역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놀이공간을 다니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소를 찾는다. 남편이 야간근무 기간인 덕분에 그저께 처음으로 단 둘이 외식을 했다. 19개월 만의 일이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둘이 동시에 “이거 OO이가 좋아하는 건데”라고 말했고, 한 시간 내내 아이 이야기만 했다. 아주 자그마하던 아이의 존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항상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하며 살다가 여기에 ‘어떤 부모가 될까’ 하는 고민을 얹었다. 언제까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는 당장 답을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아이가 하고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경험해 보며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많은 사랑을 받고 또 받은 것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그 길을 이끌어주고 지원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라고 다짐했다. 내가 일하는 엄마의 삶을 택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아이가 뭔가를 경험하고 싶을 때 몇 푼이라도 더 지원할 수 있고 나의 다양한 경험이 아이의 생각을 넓히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그러나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를 기르는 일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많은 부담감이 뒤따른다. 부모로서의 책임감과는 또 다른 문제다. 아이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바라보고 웃어주고, 그 웃음이 그 무엇보다 큰 행복감을 주지만 그것과 별개로 돈과 시간 같은 물질적인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꼭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이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주는 것부터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까지도 반드시 몇 푼이라도 필요하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일을 한다. 일을 하는 외의 시간에는 무조건 아이와 함께해야 하다 보니 ‘나’의 시간은 급격히 줄었다. ●부모도 자녀를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는 사회 성인이 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데도, 나이 서른을 넘긴 애엄마가 됐는데도 여전히 “아버지 뭐하시냐”는 질문이 따라붙는 사회다. 고위직 인사들이 성인이 된 자녀들의 취업을 부탁하는가 하면, 그것이 통한다고 여겨지는 사회다. “어디 사느냐”는 한 마디로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이 가늠되는 사회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아이를 길러야 한다. 나의 한 인간으로서의 수준이나 평가가 아버지의 직업과 또는 내가 자라온 동네에 따라 단숨에 평가되는 것 같아 이런 질문들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만약 내 아이가 자라서까지 그런 질문을 듣게 된다면, 부모의 ‘스펙’으로 인해 아이에 대한 평가가 영향을 받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다. 대학 공부까지 잘 시켜주신 부모님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말자며 둘만의 힘으로 결혼을 하고 살림을 시작한 것이 당연하면서도 뿌듯했지만, 살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출발선에서부터 한참 뒤쳐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 아이에게 똑같은 어려움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과 경험을 갖고 접한 지난 6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미숙 연구위원이 ‘보건·복지 Issue&Focus’에 개제한 ‘자녀가치 국제비교’ 연구 내용이 흥미롭다. 9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의미하는 ‘자녀가치’를 조사한 결과다. 5점 만점으로 각 항목의 점수가 ▲자녀는 기쁨(4.26점) ▲자녀는 부모의 자유를 제한(3.30점) ▲자녀는 재정적 부담(3.26점) ▲경제활동을 제한(3.25점) ▲자녀로 인해 사회적 지위가 상승(3.17점) ▲성인자녀는 노부모에 도움(3.54점) 등 6개 항목을 조사했다. (괄호 안은 한국의 ‘자녀가치’ 척도) 9개국의 전체 자녀가치 평균 점수는 3.29점. 우리나라는 3.17점으로 세 번째로 낮은 쪽에 속했다. 특이한 점은 자녀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도 높고 부정적인 가치도 높은 양면적인 특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은 점수로 나타난 것은 ‘부모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과 ‘재정적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김 연구위원은 “자녀는 정신적인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자녀양육은 경제적 부담이 되고 개인적 생활을 제한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비율이 팽배하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성인자녀가 노부모에 도움된다’는 척도가 비교적 낮게 나타난 것은 자녀에 대한 투자가 나중에 부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 본인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조사됐다. ●책임감은 당연하지만 외적인 부담감 줄어들기를 우리가 가장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은 퇴근 후 모여 놀다가 간지럼 한 번에 꺄르르 소리내며 웃는 아기를 볼 때다. 퇴근하면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 강아지처럼 쪼르르 뛰어나와 “엄마!”, “아빠!”하고 부르는 아이를 보면 하루종일 회사에서 쌓인 긴장감이 사르르 녹는다. 며칠 전에는 불편한 신발을 신고 아이와 시장에 다녀왔더니 발이 다 까졌다. “엄마 발 아파”라고 몇 번 중얼거렸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연고를 가져와 내 발에 대주었다. 순간 울컥함을 느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정말 아는 걸까. 발에 생긴 물집 뿐 아니라 마음의 모든 걸 치유해주는 몸짓으로 보였다. 누워있던 아기가 기어다니게 되고 다시 걷게 되고, “엄마” 소리만 겨우 내뱉던 아기가 엄마에게 과일을 건네주며 “먹어”라고 말하게 되면서 내가 엄마로서, 그리고 남편이 아빠로서 갖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욱 와닿는다.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 느끼는 것의 배 이상, 더 큰 무거움이 찾아올 것이다. 아이의 웃음을 무기삼아 어떤 어려움과 버거움에도 이겨낼 것이고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세상을 통해 느끼는 부담감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이라도 줄어들 수 있기를 바란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이 기사의 관련기사 (16)환상 속에’만’ 둘째가 있다 (17)엄마인 나의 육아를 존중받고 싶다 (18)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 (19)연예인 만삭화보, 그것은 꿈일 뿐… (20)엄마가 되어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21)아줌마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22)외식에 집착하는 외로운 아기엄마의 항변 ▶1회부터 15회까지는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허백윤 기자의 독박 육아일기
  • [연예 포스토리] (11) 금보라 ‘청순가련’ 대명사에서 ‘푼수 아줌마’가 되기까지

    [연예 포스토리] (11) 금보라 ‘청순가련’ 대명사에서 ‘푼수 아줌마’가 되기까지

    몇몇 연예인을 보면 ‘특정 작품에서 맡았던 역할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포스토리에서 살펴볼 연예인도 그렇습니다. 첫 영화를 통해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영화 속 자신이 맡았던 배역처럼 실제 삶에서도 끊임없이 소문에 시달렸던 배우를 소개합니다.   ● 금보라, 첫작품에서 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금보라는 1978년 영화진흥공사 신인배우 모집에서 뽑히며 연예계에 데뷔합니다. 실제 본명은 ‘손미자’인데요. 그녀는 1980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물보라’에서 섬 여인 순녀 역을 맡으며 본격 연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남편이 있는 한 섬 여인이 이웃 남자들의 갖가지 입방아에 오르면서 ‘부정한 여인’으로 몰리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금보라는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됩니다.   ● 미녀일수록 높은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금보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을 쳐다보게 됩니다. 크고 맑은 눈은 그녀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1982년 자신의 얼굴에서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한 군데도 없다”면서 “눈도 짝짝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역시 본인 얼굴이 예쁘니 미에 대한 기준도 높은가 봅니다.   ● 금보라, 문공부에 탄원서 제출한 사연 인형같이 생긴 외모 때문일까요. 금보라는 안 좋은 소문에 휘말린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1983년 그녀는 ‘비밀요정에 출입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구설수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요정에 출입하는 연예인 중 M양과 K양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는데요. 금보라는 한 방송국 관계자로부터 “K양이 금보라라는 얘기가 있어 방송 출연이 어렵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금보라는 “비밀요정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인지 조차 모른다”면서 “미혼 여성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모”라며 문화공보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 금보라, 방송국 연출자들과 사이가 껄끄러워진 사연 ‘비밀요정출입’ 사건 이후로도 금보라는 한 차례 더 안 좋은 일을 겪게 됩니다. 1984년 금보라는 방송국 관계자와 작은 마찰이 있었는데요. 사건의 발단은 그녀가 자신의 드라마 속 비중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KBS ‘신부교실’을 촬영하던 금보라는 “드라마의 대사나 출연 횟수 등에서 스타대우를 해달라”고 방송국 관계자에게 조심스레 불만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커지면서 연출자들과의 사이가 껄끄럽게 됐다고 하네요.   ● 금보라의 아버지도 배우? ‘연예 포스토리’ 10화에서는 견미리의 딸이자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이유비, 이다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지금도 부모와 자녀가 모두 연예인으로 활동을 하면 눈길을 끌게 마련인데요.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1985년 금보라는 탤런트 故김순철의 친딸이라는 소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전에 ‘미로’, ‘불꽃놀이’ 등의 드라마에 계속 함께 출연해 늘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순철은 금보라 아버지와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김순철은 걸핏하면 소문이 난무하는 연예계 풍토를 비판했습니다.   ● 여배우의 결혼, 그리고 7년 만의 복귀 여러 소문에 시달리다 금보라는 1989년 7월 한 증권사 대리와 화촉을 올립니다. 이후 그녀는 오랜 시간 방송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다 7년 만인 1993년,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변모하는 왕십리의 모습을 그린 드라마 KBS ‘왕십리’에 출연하는데요. 이 드라마에서 금보라는 일본 암흑가 중간 보스에 오른 뒤 귀향한 준태(천호진 분)의 첫사랑 상대로 등장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남자의 ‘첫사랑’ 역할을 하는 여배우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청순가련’ 대명사에서 ‘푼수 아줌마’로 지금의 20, 30대는 금보라를 낄 데 안 낄 데 모르는 ‘푼수 아줌마’로 많이들 생각하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십리’를 통해 본격 연예계에 복귀한 금보라는 이후 코믹한 연기를 많이 시도했습니다. 그녀는 “세월이 흐르면서 코믹한 역할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연기 폭이 넓어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그녀는 어땠냐구요? 80년대 금보라는 ‘청순가련형’의 대명사로 스스로 “나에게는 항상 청순가련형이란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것 같다. 이제는 이런 이미지에서 벗어나, 차가운 여인이나 매서운 성격의 인물을 묘사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미경 기자 btf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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