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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총기 사건 “테이저건으로 진압하려다…” 파출소장 사망

    화성 총기 사건 “테이저건으로 진압하려다…” 파출소장 사망

    화성 총기 사건, 테이저건 화성 총기 사건 “테이저건으로 진압하려다…” 파출소장 사망 경기 화성에서 형제간 불화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 노부부 등 4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시)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화성서부경찰서 남양파출소 소속 이강석 경감(소장)과 이모 순경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출입문을 열고 진입하려고 시도하자, 전모(75)씨가 사냥용 엽총을 발사해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때 이 경감이 전씨를 설득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재차 시도하다가 전씨가 쏜 총에 맞아 안쪽으로 쓰러져 숨졌다. 당시 이 경감은 방탄복을 착용하지 않았으며, 실탄이 든 권총이 아닌 테이저건을 들고 현장 진입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 함께 있던 이 순경은 ‘파출소장과 피의자가 서로 아는 사이같았다. 소장이 테이저건을 들고 피의자를 설득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 총에 맞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집 1층에는 이 경감을 포함, 전씨와 전씨의 형(86), 형수(84·여)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노부부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허리 등에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전씨의 동생은 이날 오전 8시 20분쯤 파출소를 방문해 “내일(28일)로 수렵기간이 끝나니 경찰서에 입고하겠다”며 사냥용 엽총(12구경 이탈리아제 엽총·Fabarm) 1정을 출고한 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전씨가 평소 술을 먹고 형을 찾아와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는 주변인 진술이 나왔다”면서 “이날 아침에도 형 부부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범행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경찰은 신고자와 유족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지난 25일 세종시에서는 강모(50)씨가 자신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여성의 가족 등에게 엽총을 쏴 3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재산 다툼 원인인 듯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재산 다툼 원인인 듯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남양파출소 총기 출고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재산 다툼 원인인 듯 경기 화성에서 형제간 불화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 노부부 등 4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이 집 1층에는 노부부 전모(86), 백모(84·여)씨와 전씨의 동생(75), 남양파출소장 이모 경감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신고자로 추정되는 전씨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이 경감이 테이저건을 들고 피의자와 대치하려다가 현장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전씨의 동생은 이날 오전 8시 20분쯤 남양파출소에서 사냥용 엽총 2정을 출고한 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부상당한 최초 신고자인 며느리가 “(용의자인) 작은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취한 상태로 집에 와서 돈을 달라고 했다”며 “오늘도 집을 찾아 와 아버님께 돈을 달라고 협박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평소 형제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인근 주민 진술로 미뤄, 형제간 불화로 사건이 빚어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용의자 목숨 끊어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용의자 목숨 끊어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화성 공기총 총기 난사 “파출소장·노부부 등 4명 사망” 용의자 목숨 끊어 경기 화성에서 형제간 불화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 노부부 등 4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이 집 1층에는 노부부 전모(86), 백모(84·여)씨와 전씨의 동생(75), 관할 파출소장 이모 경감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신고자로 추정되는 전씨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이 경감이 테이저건을 들고 피의자와 대치하려다가 현장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전씨의 동생은 이날 오전 8시 20분쯤 파출소에서 사냥용 엽총 2정을 출고한 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평소 형제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주변인 진술로 미뤄, 형제간 불화로 사건이 빚어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화성 총기 사고, 설득 시도한 파출소장까지.. 4명사망 ‘안타까워’

    화성 총기 사고, 설득 시도한 파출소장까지.. 4명사망 ‘안타까워’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시)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화성서부경찰서 남양파출소 소속 이강석 경감(소장)과 이모 순경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출입문을 열고 진입을 시도했고, 이에 전모(75)씨가 사냥용 엽총을 발사해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때 이 경감이 전씨를 설득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재차 시도하다가 전씨가 쏜 총에 맞아 안쪽으로 쓰러져 끝내 숨졌다. 화성 총기 사고로 이 경감을 포함, 전씨와 전씨의 형(86), 형수(84·여) 등 4명이 숨졌다. 노부부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허리 등에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YTN 뉴스캡처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화성 총기 사고, 처참했던 상황 ‘무슨 일 있었길래..’

    화성 총기 사고, 처참했던 상황 ‘무슨 일 있었길래..’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시)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화성서부경찰서 남양파출소 소속 이강석 경감(소장)과 이모 순경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출입문을 열고 진입을 시도했고, 이에 전모(75)씨가 사냥용 엽총을 발사해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때 이 경감이 전씨를 설득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재차 시도하다가 전씨가 쏜 총에 맞아 안쪽으로 쓰러져 끝내 숨졌다. 화성 총기 사고로 이 경감을 포함, 전씨와 전씨의 형(86), 형수(84·여) 등 4명이 숨졌다. 노부부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허리 등에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YTN 뉴스캡처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화성 총기 사고, 파출소장 설득 시도했지만 결국..

    화성 총기 사고, 파출소장 설득 시도했지만 결국..

    27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작은아버지가 (시)부모님을 총으로 쐈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화성서부경찰서 남양파출소 소속 이강석 경감(소장)과 이모 순경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출입문을 열고 진입을 시도했고, 이에 전모(75)씨가 사냥용 엽총을 발사해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때 이 경감이 전씨를 설득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재차 시도하다가 전씨가 쏜 총에 맞아 안쪽으로 쓰러져 끝내 숨졌다. 화성 총기 사고로 이 경감을 포함, 전씨와 전씨의 형(86), 형수(84·여) 등 4명이 숨졌다. 노부부의 며느리는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에서 허리 등에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피의자인 전씨의 동생은 범행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YTN 뉴스캡처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황순원 ‘카인의 후예’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황순원 ‘카인의 후예’

    104편의 시, 104편의 단편소설, 1편의 중편소설, 7편의 장편소설. 소설가라면 한번쯤 꿈꾸는 신문의 연재소설을 끝까지 고사했으며 문학지 외에는 글을 발표하지 않았던 작가 황순원이 16세에서 78세까지 쓴 작품의 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거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황순원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자신을 드러낸 ‘작가’였다. 그가 지금도 ‘작가 정신’의 표상이라고 존경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에서 단편소설로, 다시 장편소설로 문학적 탈바꿈을 시도한 그가 1953년에 발표한 ‘카인의 후예’는 그의 단편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빼어난 서정성에 잘 짜인 장편의 서사 구조를 결합시킨 두 번째 장편소설로 전후(戰後)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해방 후 북한 정권이 들어와 개혁 운동을 펼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평안남도 명문가에서 태어난 저자의 가족이 해방 후 월남을 결정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정치적 이념이 순박한 농촌 마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꼽힌다. 소설은 두 가지 축을 기점으로 전개된다. 먼저 상황을 전개시키는 것은 토지개혁으로 벌어진 마을 사람들의 변화 과정이다. 1946년 실제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당시 오랫동안 가족 공동체 같던 농촌 사회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관계가 오로지 땅을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로 양분된 것이다. 지주의 아들이자 지식인인 박훈, 그의 작은아버지인 용제 영감과 그의 아들 혁,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끝까지 애쓰는 윤 주사 등 ‘가진 자’들은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고 숙청의 대상이 된다. 그들에게 땅을 빌려 소작했던 칠성 아버지와 강 목수, 탄실 아버지 등은 땅의 공동 분배가 처음에는 지주의 것을 훔치는 것 같아 찜찜해했지만 점점 더 가지려는 욕심을 드러낸다. 과거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였던 그들은 나름의 끈끈한 인정이 오가곤 했다. 하지만 당손이 할아버지가 걱정한 것처럼 ‘다 된 세상’ ‘뒤숭숭한 세상’에서 공존의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서로를 경계하며 살게 된다. 또 다른 축은 역시 가장 인간적인, 그러나 이뤄지기 힘든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양심적이지만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지주 집안의 외아들이자 현재의 지주인 박훈과 그를 모성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감싸는 마름의 딸 오작녀 간의 사랑은 그 무엇도 끼어들지 못할 것 같이 순수한, 말 그대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지주와 마름의 딸이라는 신분의 벽이 놓여 있어 오작녀의 사랑이 순종적이고 희생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그 점이 그들에게 함께 고향을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와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하지만 주인공 박훈의 해결책이 사랑과 엇갈린다. 오작녀의 아버지이자 농민위원장이 돼 지주들에게 칼끝을 겨누는 도섭 영감을 죽여야 불행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훈의 행동은 어느 쪽도 명확한 결실을 맺지 못한다. 열린 결말 덕분에 사랑의 완성은 읽는 이의 몫이 되었다. 물론 이 두 축 사이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변신시키는 인물과 끝까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소신을 잃지 않는 인물이 현실감을 더해 준다. 소작농에게 엄격한 마름이었지만 변화를 감지하고 북한 정권에 협력하는 도섭 영감, 박훈과 함께 야학을 이끌었지만 그를 감시하는 민청위원장으로 돌변한 변흥수 등이 권력의 흐름을 좇는 인물이라면, 지주들의 숙청에 찬성하지 않고 타락해 가는 세상을 걱정하는 당손이 할아버지나 사랑하는 박훈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그와 부부 사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오작녀, 그리고 그녀를 감싸는 동생 삼득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인물들이다. 소설은 홍수처럼 마을 사람들의 삶을 덮친 사건과 지고지순한 사랑이 씨실과 날실처럼 잘 엮어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삶의 폭과 깊이를 보여 준다. 특히 토지개혁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여하게 되는 농민들의 태도 변화는 작은 부분까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세련됐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지주라는 권력이 왜 공산당으로 바뀌었는지는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아니다. 오늘을 먹고사는 것이 삶의 목표인 농민들에게 이념이나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아낙들은 숙청이 예고된 지주 집에 몰래 들어가 그릇 하나 치마폭에 숨겨 가져온다. 농부들은 자신을 선동하는 공산당원과 지주 집에 몰려갔을 때 삽과 괭이, 대패처럼 꼭 하나 있었으면 좋은 물건들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몰래 훔친다. 마을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박훈 할아버지의 송덕비를 도섭 영감이 깨뜨린 후 조각난 비석을 다듬잇돌이나 숫돌로 사용하려고 몰래 가져오기도 한다. 이들의 소박한 삶의 욕심을 뻔뻔스러운 변절이라고, 도덕적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의 이기심이라고 흉볼 수 있을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라 생각될 뿐이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비판도 있다. 역사적 사실은 있는데 역사의식이 없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특히 해방 후 상황을 작품에 반추해 놓고도 해결점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의 운명이나 개인적 비극에 국한한 점을 아쉬워한다. 박훈 같은 인물을 내세워 지주를 미화했다고 지적할 수 있고, 문제의 해결을 여성의 희생적 사랑에서 오는 구원에 둔다고 파악될 수도 있다. 박훈과 오작녀의 사랑을 동네에 전해 오는 ‘큰아기바윗골’ 전설과 연결한 점은 다소 작위적이고 신파적이긴 하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모습은 발표될 당시를 감안하면 그 어떤 작품보다 창조적이다. ‘부분은 언제나 전체를 대표한다’는 말처럼 황순원은 평안남도의 시골 마을인 양짓골 이야기를 통해 당시 딜레마에 빠진 북한 전체의 시대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비극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사실적으로 증언해 놓았다는 점은 이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를 높이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넘어선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내용 어디에도 카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왜 ‘카인의 후예’일까. 카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큰아들이다. 사람이 낳은 최초의 사람으로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다. 농부였던 카인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동생에 대한 질투와 욕심에 눈이 멀어 양치기였던 그를 죽이고 만다. 저자는 그 카인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싶다. 가진 자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카인이 되고, 못 가진 자들은 욕심과 이념으로 윤리를 저버리는 카인이 된다. 이런 카인은 지금 이 세상에도 많다. 어떠한 요직도 마다하고 평생 평교수로만 지내며 세상이 흔들어도 요지부동으로 집필에만 몰두한 황순원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카인의 후예였을지도 모른다. 신언수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재계 인맥 대해부(1부)신흥기업 대교] 3명의 공부방에서 출발… 자산 1兆대 국내 1위 교육기업으로

    [재계 인맥 대해부(1부)신흥기업 대교] 3명의 공부방에서 출발… 자산 1兆대 국내 1위 교육기업으로

    ‘교학상장’(敎學相長),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같이 성장한다는 의미의 이 사자성어는 강영중(65) 대교그룹 회장의 좌우명이다. 1975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서 3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자그마한 공부방이 30여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자산규모 1조 3783억원(지난해 말 기준, 해외법인 등 제외)의 국내 1위 교육기업으로 커졌다. 학창시절 ‘눈높이 수학’, ‘눈높이 영어’ 같은 학습지를 한번이라도 풀어보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학생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뤘던 게 그룹이 크게 된 전환점이었다. 경남 진주 출신의 강 회장은 건국대 농화학과에 입학해 ROTC(학군사관) 10기로 군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25세(1974년)이던 그때 아버지 강대웅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건설회사에 입사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사표를 내고 병간호에 매달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평범한 건설회사 샐러리맨으로 살지 않았겠느냐는 게 강 회장의 생각이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하는 것이 유일한 수입원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망으로 기력이 약해졌다. 둘째 남동생은 군복무 중이었고 셋째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은 아직 어린 학생이었다. 강 회장은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강 회장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작은아버지 강대희씨였다. 작은아버지 강씨는 네 자녀에게 일본에서 구몬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4명 모두 성적이 눈에 띄게 늘자 강 회장에게 구몬수학을 한국에 들여와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1975년 1월 21일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13㎡ 넓이의 작은 전셋방에서 대교의 시초인 ‘종암교실’이 문을 열었다. 첫 제자는 작은아버지 지인의 자녀인 초등학교 2학년 노승우, 4학년 노우정, 6학년 노승범 3남매였다. 나중에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가 된 노승범 교수는 대교그룹이 서울 동작구 보라매동 사옥 리노베이션(개보수) 때 설계를 맡기도 했다. 3남매의 실력이 늘자 입소문이 나서 회원 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1976년 일본 구몬수학과 연계해 한국공문수학연구회를 창립했다. 강 회장이 고등학생인 막내 강학중(57)씨와 과외교실 홍보 포스터를 하나하나 일일이 직접 물감으로 그리고 어머니가 풀을 쑤어준 것으로 주부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 미용실마다 붙이고 다녔다. 과외교실은 서울 시내 곳곳으로 퍼져 나가 20개 지역 교실이 만들어졌다. 4년 반 만에 회원은 4200명, 교사는 100여명, 관리직원은 7명이 됐다.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사무국을 확장 이전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더 펼칠 준비도 했다. 하지만 제동이 걸렸다.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가 ‘과외금지’를 발표했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강 회장으로서는 내리막길을 걷는 순간이었다. 그만두겠다는 회원이 속출했고 회원은 400명으로까지 줄었다. 자금난도 심각해졌다. 교육열이 유난히 높은 우리나라로서 어떻게든 공부를 더 시켜야 했기 때문에 불법과외가 성행했다. 이때 강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발상의 전환을 한다. 학생이 오게 하는 방식의 과외가 아니라 선생님이 직접 교재를 학생에게 가져다주는 방식을 도입했다. 학생들을 한곳에 모여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외가 아니었다. 강 회장 발상의 전환은 1983년 말 회원 수가 1만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위기는 또다시 찾아왔다. 공문수학이 잘나가자 이번에는 일본의 구몬수학이 ‘공문’ 대신 일본식 발음인 ‘구몬’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로열티 인상을 요구했다. 당시 강 회장은 학습지 업계 최초로 개발 중인 국어 교재에 일본식 이름을 붙여 ‘구몬 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기존 공문수학 브랜드를 포기하고 1986년 큰 교육을 지향한다는 의미인 대교(大敎)문화로 법인을 전환한다. 이어 1991년 상호를 대교로 변경했고 같은 해 7월 새로운 브랜드명을 ‘눈높이’로 하기로 했다. 당시 임원회의에서 대다수가 눈높이보다는 그룹명을 붙인 대교수학을 더 선호했다. 하지만 강 회장은 눈높이는 순수한 우리말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데다 그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눈높이로 할 것을 밀어붙였다. 눈높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1993년 6월 28일 눈높이 교육 100만명 회원 시대를 열었다. 2004년 2월 3일 교육기업으로서 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 회장이 항상 승승장구해온 것만은 아니다.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리고 난 뒤 엑스포 과학공원 운영권을 따 내 1994년 정식으로 개장했지만 4년 만에 1000억원의 손실을 내고 사업을 접기도 했다. 1996년에는 주간신문을 발행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경기가 불안해졌고 결국 폐간했다. 잇따른 경영 실패로 강 회장은 2000년 초 송자 명지학원 이사장(전 교육부 장관)을 회장으로 영입해 경영 전반을 맡겼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강 회장은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 세계배드민턴연맹 회장 등을 맡으며 스포츠 외교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강 회장은 2007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룹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룹을 성장시키기 위해 지난해 7월 창립 37주년을 맞아 기업 이미지(CI)를 바꿨다. 세계에서 가장 전문화된 전인교육기업, 상생발전을 이끄는 첨단의 그린혁신그룹이라는 ‘비전2020’을 선보이며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아버지의 별세, 과외금지 조치, 일본 구몬수학의 방해 등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왔던 강 회장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윤 일병 구타 사망 파문] 이 병장 “기독교 싫다” 교회 못 가게 막고… 간부와 성매매까지

    육군 28사단 윤모(21) 일병 폭행 사망사건을 통해 종교갈등과 가정 불화로 인한 불신, 문제가 터지면 무조건 사건을 은폐하려 하는 군 속성, 공적 위계질서보다 연줄 등 친분관계가 우선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병폐가 여실히 드러났다. 10일 군 수사기록에 따르면 가해자 가운데 주동자 격인 이모(26) 병장은 평소 기독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기독교 신자인 윤 일병이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병장은 군 당국에 “할머니가 기독교에 심취해 집안일을 소홀히 해 할아버지와 다툼이 잦았으며 목사인 작은아버지에게 몰래 돈을 주는 것을 보고 기독교가 싫었다”고 진술했다. 사적 감정으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 이 병장에 대해 군 내부에서 아무런 조처가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징병심리검사에서 공격성이 강했지만 현역 복무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됐다. 피해자 윤 일병은 선임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하는 동안 외부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지 못했다. 전화와 인터넷을 이용하는 ‘국방헬프콜’은 물론 부대 안에서 고충을 털어놓도록 설치된 ‘마음의 편지함’에 어떠한 글도 남기지 못했다. 윤 일병 폭행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윤 일병이 사망한 뒤 헌병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야 현장을 봤다고 실토해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입막음부터 하고자 하는 조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유일한 간부였던 유모(23) 하사가 가혹행위를 묵인한 데 이어 평소 구타를 부추긴 정황도 뿌리깊은 폭력성을 반영한다. 병사들의 진술에 따르면 유 하사는 3월 중순부터 “선임병들과 후임병 사이에서는 구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고 일부는 “윤 일병을 때리지 않으면 같이 폭행당할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유 하사는 이에 대해 “가르쳤는데도 안 되면 때려서라도 고쳐야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진술했다. 군의 위계질서 붕괴와 함께 폐쇄적인 군대 문화가 불법 성매매를 부추긴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 하사는 이 병장과 친밀한 관계를 드러냈고 이 병장이 자신보다 나이가 세 살 많다는 이유로 다른 병사들 앞에서 이 병장을 ‘형’이라고 부르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다. 특히 유 하사는 평소 친한 이 병장과 하모(22) 병장과 휴가날짜를 맞춰 지난 3월 21일 이 병장의 고향 인근인 경남 창원의 유흥업소에서 함께 불법 성매매에 가담했다. 하 병장은 “이 병장이 총각딱지를 떼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동의했다”고 밝혔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정황상 성매매 이후 이들이 친밀해져서 간부인 유 하사가 병사인 이 병장을 보고 ‘형’이라고 호칭했다”고 주장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윤 일병 구타 사망 파문] “死因은 언제나 개인의 부적응… 국가도 부대도 아들을 버렸다”

    [윤 일병 구타 사망 파문] “死因은 언제나 개인의 부적응… 국가도 부대도 아들을 버렸다”

    “무능한 부모라는 생각,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10년 동안 나를 짓눌렀습니다.” 강수종(69)씨는 12년 전 의경으로 복무 중이던 아들을 잃었다. 불과 스무 살이었다. 최근 선임들의 지속적인 가혹행위로 숨진 육군 28사단 윤모(21) 일병과 또래다. 강씨는 윤 일병의 사망 보도를 접하고 가장 먼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씨는 “국방의 의무란 이름으로 자식들을 데려가 놓고 막상 사망 사건이 터지면 책임을 회피하려는 당국의 태도가 12년 전과 똑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유가족과 군 인권센터의 노력이 없었다면 윤 일병의 죽음은 묻혔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부대 간부들의 관리 책임은 교묘하게 지운 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어떻게든 은폐, 축소하려는 사건수습 방식도 10여년 전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강씨의 아들 강신일 이경은 2002년 3월 의경으로 입대해 같은 해 5월 17일 서울경찰청 특수기동대 75중대에 배치됐다. 불과 8일 뒤 강 이경은 송파구 국립경찰병원 인근 아파트 25층에서 몸을 던져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강 이경은 전입 바로 다음날부터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선임대원들은 ‘목차려’(침상에서 목, 팔, 다리를 들고 ‘V’자 자세로 엉덩이로만 버티도록 하는 가혹행위)를 시켰고 “여자친구랑 어떤 자세로 자 봤느냐”는 등 성희롱을 일삼았다. 강 이경은 선임 대원들의 기수와 이름, 무전 암호를 외우지 못할 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선임대원들은 속이 메슥거리고 토할 때까지 밥을 퍼먹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강 이경 사건을 조사한 송파경찰서는 “부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투신, 자살했다”며 내사종결했다. 강씨는 2007년 대통령 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 중대 소속 간부들의 은폐 시도가 확인됐다. 간부들은 강 이경의 자살 직후 대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또 조사를 받을 때 ‘안 때렸다, 안 괴롭혔다, 정말 잘해줬다’는 말을 하도록 시켰다. 군의문사위는 “(송파경찰서는) 선임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고 신병 관리 책임을 소홀히 한 지휘관도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경찰은 아들의 나약한 성격을 지목하며 부대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쪽으로만 몰아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고 서승완(당시 22세) 일병은 2002년 2월 육군사관학교 근무지원단 보급근무대로 전입했지만 같은 해 5월 영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육사 헌병대와 육군본부는 서 일병이 “좌측 발목 아킬레스건염 및 허약 체질, 군 복무 부적응 등으로 자살했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 역시나 ‘부대 관리 소홀’은 빠져 있었다. 서 일병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한 선임들의 구타와 가혹행위를 밝혀낸 건 군 당국이 아닌 작은아버지 서모(57)씨였다. 그는 “헌병대에서는 승완이가 어렸을 적 자전거를 타다가 발뒤꿈치가 바퀴에 걸려 아킬레스건을 다친 일을 ‘지병’으로 몰고 갔다”면서 “입대 전까지 큰 불편이 없어 진료를 받은 적도 없는데 입대 후 ‘구보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을 꼬투리 삼아 지병으로 우울증이 심해 자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승완이의 죽음과 구타 간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가해자 및 부대 지휘관들에 대한 처벌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나마 서씨의 노력으로 군의문사위는 “간부들의 부적절한 부대 관리”를 사인에 추가했고 서 일병은 순직 처리됐다. “국가가 불렀다면 군 복무 중 다쳤든, 죽었든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개인 잘못으로 치부하기 일쑤죠. 자살하거나 구타로 숨진 병사들을 ‘부대 미적응’ 운운하며 모욕합니다. 징병검사에서는 현역 판정을 내려놓고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면 당사자 개인 탓으로 돌립니다. ‘자식이 못나서 군대에서 죽은 것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으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것이 군·경 의문사 유가족들입니다.” 서씨는 조카의 죽음과 윤 일병 사건이 ‘판박이’라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배우자 탐구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배우자 탐구

    “아내의 정장이나 속옷 사이즈를 아시나요?” “남편의 와이셔츠나 바지 사이즈를 아시나요?” 이 같은 질문을 부부에게 던지면 안다고 답하는 비율은 대개 아내가 남편보다 훨씬 높다. 성 역할 차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배우자에 대한 관심의 차이일 수도 있다. 부부치료 전문가 존 고트맨은 배우자를 더 잘 알고 배우자에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배우자의 인생과 관련된 정보를 머릿속에 그려 놓은 애정지도(love map)는 애정이 강할수록 정확하고 상세하다”면서 “정서적 지능으로 결합돼 서로의 개인생활에 관해서도 충분히 아는, 상세한 애정지도를 갖고 있는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부부”라고 말한다. 결혼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대개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답한다. 그러나 종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되도록 “사랑하기 위해서”가 돼야 한다고 송길원 하이 패밀리 대표는 말한다. 결혼 후에도 계속 사랑해서 배우자에게 관심이 가고, 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다. 결혼하면 우선 남녀의 특성을 파악할 뿐 아니라,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유형검사 등을 통해 배우자의 성격을 알아야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향형-외향형, 감각형-직관형, 사고형-감정형, 판단형-인식형 등 4가지 영역별 조합을 통해 16가지 성격유형이 나온다. 서로의 성격을 알면 가족여행을 앞두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성격의 사람이, 임박해야 준비하는 성격의 배우자를 비난하지 않고 타고난 성격 문제임을 이해해 다툼을 피할 수 있다. 서로의 성장 배경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묻고 들으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배우자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장 행복했던 일이 무엇인지, 반대로 괴로웠던 일이 무엇인지를 서로가 알아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필요가 있다. 가족끼리 대화를 자주 했는지, 아버지가 집안일과 아이 돌봄을 적극 분담했는지, 맏이나 막내로서 좋은 점이나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등 집안 분위기를 알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 개인의 특성 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배우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과 희망은 무엇인지, 현재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배우자의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등은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사항이다. 배우자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 동물, 색깔, 운동, 영화, 노래 등을 알고 있으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음식을 먹자거나, 싫어하는 영화를 보자거나, 상대방이 싫어하는 색깔의 선물을 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배우자의 사이즈를 몰라서 대충 적당한 옷을 선물로 샀는데 입어보니 맞지 않아서 바꿔야 한다면 기쁨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배우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자꾸 해주면 좋겠지만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자꾸 한다면 그 가정에는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노부부 황혼이혼 일화는 이해가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말해준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그중 하나를 예로 들면, 잉꼬부부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어느 날 황혼 이혼 재판정에 섰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할아버지 자신이다. 이혼을 청구한 아내에게 할아버지가 물으니 할머니는 남편이 평생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준 닭 날개를 먹는 일이 고역이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닭 날개를 먹고 싶은 것도 참으며 아내에게 주었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게 싫다면 왜 진작 싫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그는 억울해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뭘 좋아하느냐고 언제 물어본 적이 있느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정주환씨는 아내의 정장이나 속옷 사이즈를 안다. 그래서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고급스러운 브래지어 팬티 세트 등을 자신 있게 선물하기도 한다. 아내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노라면 그도 즐겁다. 그는 아내로부터 “당신 최고야”라는 말을 자주 듣고, 그럴 때마다 힘이 난다. 듣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기에 그렇게 알려준 결과다. 그의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해서 자주 해준다. 문자 메시지로도 사랑한다는 글과 함께 하트를 여러 개씩 날린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행복해 한다. 정씨는 출장 등 잠시 집을 떠날 일이 생기면 아내가 다소 지나칠 정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2남4녀 중 셋째인 아내가 어린 시절 딸이 없는 작은아버지 집에 수양딸로 보내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울며불며 싫다고 거절한 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이해가 갔다. 사람은 자신이 그날 한 일을 배우자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다음 날 되풀이하는 일을 훨씬 쉽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도대체 오늘 한 게 뭐가 있어”라는 식의 말로 배우자를 우울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자에게 하루 일과를 서로 물어보고 알려주면 좋다. 부부 사이에는 별것도 아닌 오해가 말다툼으로 이어져 결혼생활에 없어도 될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생기면 분명하게 설명해 달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상담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타고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이해해야 하며, 함께 노력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happyhome@seoul.co.kr
  • “28년전 아들 잃어버린 날, 내 인생시계도 멈췄다”

    “28년전 아들 잃어버린 날, 내 인생시계도 멈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 호(당시 3세)는 또래보다 말도 잘하고 똘똘한 아이였다. 아버지인 김기석(당시 29세)씨가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려고 하면 “아빠, 말로 해”라며 능청을 부릴 줄도 알았다. 1986년 11월 대전 작은아버지 댁에 갔던 아들은 이웃집에 놀러간다며 나선 뒤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그날 이후 김씨의 인생시계도 멈췄다. 아들의 사진과 인상착의가 담긴 전단지를 방방곡곡에 붙이는 등 수소문했지만 소용없었다. 김씨는 “세월호 침몰 사고로 자녀를 잃은 가족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면서도 내 처지가 한스러웠다”면서 “아들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도 좋으니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비통해했다. 아들을 잃은 뒤 아내와도 헤어졌다. 직장을 그만둔 채 아들을 찾으러 전국을 누비던 김씨는 1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 상태다. 아들 걱정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탓에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김씨는 “친구들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손자 사진을 보여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면서 “아들만 찾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매년 ‘세계 실종 아동의 날’인 5월 25일이 되면 아들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했다. 특히 그는 “아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함께 저수지에 갔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면서 “너무 어릴 때 잃어버린 탓에 해준 게 별로 없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씨는 국내에서 ‘실종 아동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2007년 이후 매년 실종 아동 예방 캠페인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김씨는 “장기 실종 아동에 대해 국민이 관심을 두고 제보도 많이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행사 때마다 아들의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에 참여했고, 지난해에는 자신과 아들 사진을 담아 실제 모습과 같은 크기로 제작한 등신대를 명동 한복판에 세워 놓기도 했다. 해마다 2만명이 넘는 아동들이 실종되고 있지만 실종수사 전문 인력이 부족한 데다 장기 실종자를 찾기 위한 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하다. 김씨는 “최근에는 유전자 검사, 지문 사전등록 등 실종자를 찾기 위한 여러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정작 장기 실종자에 대해서는 경찰이 대처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기실종자 전담수사팀을 꾸려 달라고 수없이 요구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실종수사 전문인력이 담당사건을 지속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실종 사건은 장기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전담팀을 만들고 관련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모임 회장은 “현재 경찰이 실종자 수색을, 보건복지부는 실종자 가족 지원 및 예방 사업을 하는 등으로 이원화돼 있다”면서 “체계적인 수사기법을 갖춘 민관 전문가로 이뤄진 ‘실종자 찾기 종합센터’와 같은 전담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강석호 국회의원, 조카는 알렉스…작은아버지는 신성일…국회의원 재산 6위에 오른 비결은?

    강석호 국회의원, 조카는 알렉스…작은아버지는 신성일…국회의원 재산 6위에 오른 비결은?

    ‘강석호 국회의원’ ‘알렉스’ 강용석이 가수 겸 배우 알렉스와 국회의원 강석호의 관계를 언급했다. 10일 JTBC ‘썰전’에는 ‘국회의원 재산 TOP10 공개’라는 주제로 방송이 진행됐다. 이날 ‘썰전’에서는 ‘2014 국회의원 재산 상위 10명’이 공개됐다. 이 중 강석호 의원은 163억 5042만 원으로 6위에 올랐다. 1위는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으로 2조 430억 4301원이다. 이에 MC 김구라가 강용석에게 “이분은 왜 이렇게 돈이 많냐”고 질문하자 강용석은 “이분이 배우 신성일씨 큰 형의 아들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강용석은 “신성일씨가 어렸을 때 육사생도였던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신성일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며 “이후 박태준씨가 포항제철을 시작하면서 신성일씨의 큰형(삼일그룹 강신우 회장)이 하던 운수사업을 도와줬다. 포항제철의 모든 운수 관련 업무를 이곳에서 독점하다시피 했다”라고 말하며 강석호 의원이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원인을 밝혔다. 강용석은 “강석호 의원의 조카가 알렉스다. 그래서 강석호 의원을 만나면 ‘작은 아버지는 신성일에 조카는 알렉스다’라고 말하곤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건망증이 부른 강남구청역 폭발물 소동

    지난 17일 서울 강남 일대를 공포와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지하철 분당선 강남구청역의 폭발물 오인 소동은 여행용 가방의 주인이 건망증 때문에 물건을 놓고 간 데서 비롯된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여행용 가방을 승강장에 두고 간 사람은 경기 광명에 거주하는 유모(65)씨로, 작은어머니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오다가 승강장에 내려둔 채 이를 잊고 간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유씨는 경기 용인에서 작은어머니로부터 작은아버지의 유품이 든 가방을 받아 분당선을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강남구청역에서 7호선을 갈아타려고 내렸는데 이때 가방을 잊고 승강장에 내려놓은 채 그대로 7호선으로 환승했다. 경찰은 오후 1시 45분쯤 유씨가 가방을 승강장에 내려놓는 모습을 폐쇄회로(CC)TV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유씨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건망증이 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임태순 선임기자의 5060 리포트] 기제사 어떻게 지내시나요

    [임태순 선임기자의 5060 리포트] 기제사 어떻게 지내시나요

    ‘제사가 계속될 것인가, 중단될 것인가, 변형될 것인가.’ 제례(祭禮) 문화가 어떻게 변모할까.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한데 모여 차례(茶禮)를 지내며 조상들의 덕을 기린다. 또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祭祀)를 지내며 돌아가신 분을 추모한다. 오랜 세월 가족의 구심점으로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져온 제례의식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횟수가 줄고 음식도 간소화되고 있지만 제사는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한 기성세대의 맏아들, 맏며느리들에겐 여전히 부담이다. 유교문화의 마지막 세대로서 부모세대의 눈높이를 맞춰야 하지만 한편으론 전통의식이 희박한 신세대 자식들에게 제사를 잇게 해야 하는 의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낀 세대’의 고민이다. 제사는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은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국가도 저절로 통치된다고 보고 효를 강조했다. 효는 제사를 통해 실천하고, 제사는 가정에서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장남 등 가부장이, 국가 차원에서는 왕이 집전하도록 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돼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보다 더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건전가정의례준칙에 따르면 기제사는 제주부터 2대조까지로 하되 매년 조상이 사망한 날 제주의 가정에서 지내게 돼 있다. 제수(祭需)는 평시의 간소한 반상(飯床)음식으로 부담 없게 차리도록 했다. 차례는 명절 아침에 맏손자의 가정에서 지낸다고 돼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3품 이상의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들만 부모, 조부모를 넘어 증조부모, 고조부모 등 4대 봉사를 하게 돼 있다. 그러나 좋은 집안이 되려는 심리가 작용, 일반인들도 4대 봉사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머니, 할머니 등 배우자까지 모시면 제사횟수가 8번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제사일자에 맞춰 많은 친척들이 모이기 어려워지면서 제사횟수는 자연스레 조정되고 있다. 바라봄사진관 나종민(51) 대표는 “종갓집이어서 어머니가 3대 봉사를 해왔으나 몇 년 전 하나로 합쳤다”면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제사음식도 간편해지고 있다. 종전에는 ‘붉은색 과실은 동쪽, 흰색은 서쪽에 둔다’는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예법을 따졌으나 최근에는 정성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사 음식은 형제들끼리 분담해 가져오고 제사상을 업체에 주문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경기 수원에 사는 이모(51·여)씨는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3년 전부터 제사상을 주문하고 있다”면서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이젠 시댁 식구들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 설의 경우 제사상 차림이 전년보다 10% 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퇴계 이황 종가는 지난달 문중운영위원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자정에서 저녁 6시로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퇴계 종가가 제사 문화의 롤 모델인 만큼 제사 현대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오는 7월 28일(음력 7월 2일) 퇴계의 권씨 부인 제사와 내년 퇴계 불천위 제사는 초저녁에 지내게 됐다. 불천위는 큰 공이 있거나 도덕성 및 학문이 높아 4대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제례문화의 간소화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고향, 문중 등 전통사회의 개념이 해체돼 친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면서 기제사에 모이기가 쉽지 않다. 5대조 이상 제사를 모시는 시제(時祭) 때 후손들에게 장학금이나 여비를 지급해 참석을 독려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가부장 중심의 유교문화가 퇴조기미를 보이면서 가정살림을 책임지는 여성의 영향력이 커지고 남아선호사상도 엷어지고 있다. 장묘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는 것도 제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최근에는 수목장이나 바다장까지 나올 정도다. 부모세대들도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후 화장을 당부하고 있다. 경기 고양에 사는 김모씨는 설을 쇠러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죽으면 화장해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납골당에 합사하고 봉분을 없애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퇴계의 16세손인 이근필(82) 종손도 ‘죽으면 납골당에 가겠다’는 뜻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 제사에 대한 장남이나 장손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집안 전통에 따라 여전히 예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경기 과천에 사는 이모(55)씨는 제사상을 차리는 아내에게 미안하다. 장손이어서 제사를 지내지만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작은아버지 등 집안 어른들이 제수가 잘못됐다는 등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씨는 “친척들의 눈이 있는데다 맏이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나까지는 감당하겠지만 아들에게 제사를 계승시킬 자신은 없다”면서 “미래의 며느리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려 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 사는 유모(57)씨는 딸만 둘이다. 그는 절에서 집안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동생 가족들로부터 은근한 압력을 받고 있다. 아들을 둔 제수씨가 자식대에 가서 제사가 넘어오지 않도록 정리해달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진흥팀 김미영 팀장은 “50~60대는 과도기적 세대이다 보니 제사 문화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친척 등을 의식해 과감하게 나서지 못한다”면서 “그러나 앞으로는 조상을 숭배하는 제례적 측면보다는 가족 간의 결속과 단합을 도모하는 기능이 강해져 기제사가 사라지고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반드시 장남이 제사를 모실 것이 아니라 기제사는 맏이가, 추석과 성묘는 동생이 담당하는 등 가족 간 대화를 통해 윤회봉사(輪回奉祀)를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16세기 학자 유희춘(柳希春)이 친필로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오늘은 큰 누님 댁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딸들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外孫)봉사도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제사를 합사해 합동추모제를 지내거나 시제를 10월 셋째 주 일요일 등으로 정례화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건사회연구원 정경희 저출산고령사회연구실장도 “제사가 조상의 덕을 기리는 것에서 가족 간의 만남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면서 “가족들끼리 의논해 기일을 2월 마지막 주 금요일로 정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들었다”고 말했다. 중앙대 비교민속학과 박환영 교수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려는 의식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제례문화는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형될 것”이라면서 “차례는 친척들이 참여하지만 기제사는 형제 등 직계 가족들 중심으로 치러지도록 이원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stslim@seoul.co.kr
  • ‘간송 전형필 가옥’ 문화공원 된다

    ‘간송 전형필 가옥’ 문화공원 된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간송 전형필 가옥’의 문화공원화를 위한 리모델링 공사가 25일 시작됐다. 도봉구는 전형필 가옥이 지난해 12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등록문화재가 되자 가옥을 리모델링 해 관광 명소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경비를 6억 7000만원으로 예상하고 시비 등을 확보했다. 구는 인근에 있는 전형필(1906~1962) 선생의 묘역과 연계해 문화공원을 꾸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간송미술문화재단 등과 협의하고 있다. 특히 가옥은 유품 등을 복제해 전시하는 간송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전통 공예와 전통 다도, 한옥을 체험하는 공간으로도 꾸려진다.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수호자로 유명하다. 종로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을 수탈 위기에 놓인 문화재를 사들이고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데 쏟아부었다. 국내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을 세워 수집한 문화재를 보관했는데 이곳이 바로 간송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과 보물 10점 외에도 공식 지정은 안 됐지만 국보급인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가옥은 전형필 선생의 집안에서 인근 농장 및 황해도 지역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도봉을 방문할 때 거처로 사용하려고 1900년에 지은 한옥이다. 전형필 선생도 농장을 관리하거나 양부였던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주 들렀다고 한다. 또 선생도 종로 자택에서 사망한 뒤 가옥 인근에 묘소가 마련됐다. 1970년대까지 관리인이 거주했으나 이후 사람이 살지 않아 훼손이 심한 상태다. 현재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20대부터 겨울 달동네에 12년째 ‘온기’… 연탄 배달부 장희남씨

    [김문이 만난사람] 20대부터 겨울 달동네에 12년째 ‘온기’… 연탄 배달부 장희남씨

    ‘연탄의 일생’이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시 한 구절이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러면서 시인 안도현은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언덕길을 오르는 것이라네’라고 읊었다. 그렇다. 연탄을 실은 트럭들은 어디론가 찾아가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가 돼 준다. 또 온몸을 불태운 연탄재는 눈 내려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마음 놓고 걸어갈 길을 만들어 주고는 생을 마감한다. 장희남(40)씨는 이러한 온기를 트럭에 싣고 연탄 배달을 하느라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요즘 연탄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달동네와 삶의 외진 곳에서 한 장의 연탄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밤낮없이 찾아간다. 20대 후반 나이 때부터 시작해 12년째 ‘온기 배달’을 하고 있다. 흔히 연탄 배달부라고 하면 50대 이후이거나 ‘실직한 아버지’의 몫으로 여기기 십상인데 어떻게 팔팔한 20대 나이 때부터 흔들림 없이 일을 해 왔을까. 지난 3일 오전 서울 강동구 길동의 한 길가에서 그를 만났다. 원래는 서울에서 하나뿐인 이문동 연탄공장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연탄을 실은 트럭이 길동 화훼단지에 배달을 나갔다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인터뷰 장소가 급히 변경됐다. 배터리 교체를 위해 작업을 하던 장씨와 잠시 인사를 나누면서 트럭이 자주 고장 나는지 물었다. “무거운 중량의 연탄을 싣다 보니 차가 자주 고장 납니다. 연탄 한장 무게가 3.5㎏입니다. 연탄을 한 차에 가득 실으면 보통 2000장 정도 되는데 무게가 7t 넘게 나갑니다. 하루에 여러 차례 실으니까 차에 무리가 많이 가죠. 또 연탄 배달을 하는 곳은 경사가 심한 달동네라든가 도로 포장이 잘 안 된 곳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종 부속이 금방 노후돼 고장이 자주 납니다.” 그래서 약간의 이상 신호만 있으면 바로바로 수리해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장씨는 말한다. 예를 들어 7t이 넘는 연탄을 적재한 트럭이 홍제동이나 상계동의 빙판길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멈춰 서 버리면 자칫 뒤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어 바짝 긴장을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올라간다고 했다. 작년에도 달동네 빙판 경사길을 올라가다가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가용 때문에 중간에 멈춰 선 아찔한 순간이 있었단다. 또 한 번은 차바퀴가 맨홀 뚜껑에 걸리면서 차체가 기울어져 2000장의 연탄이 길바닥에 쏟아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차바퀴를 빼내고 깨진 연탄재를 손과 삽으로 다 주워 담느라 하루 일을 고스란히 망쳤다. 연탄 배달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또 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연탄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나오는데요, 그걸 실을 때가 힘이 듭니다. 다른 연탄차들이 뒤에 계속 기다리고 있어서 최대한 빨리 실어야 하거든요. 한 차 싣는 데 보통 30~40분 걸립니다. 연탄을 4장씩 가슴으로 안아서 차에 싣는데 한 번도 허리를 펼 수가 없어 육체적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3~5트럭분(연탄 1만장 정도)을 실으니 허리가 멀쩡한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허리 디스크 진통 주사를 맞아 가며 일을 한다고 말한다. 또 영하의 추운 날씨에는 연탄이 얼음덩어리처럼 꽁꽁 얼어 버려 운반하는 데 고충이 더 많다는 것이다. “보통 연탄을 연탄집게로 한 손에 4장씩 집어서 고객님들 창고에 적재합니다. 연탄은 겨울 한철에 때는 거라서 보통 500~1000장씩 주문합니다. 그것도 연탄 창고가 차에서 가까우면 좋은데 도로 사정이 열악한 달동네가 많다 보니 계단을 수백번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눈이 펑펑 오는 날씨에도 온몸이 땀범벅이 됩니다. 마음속으로 달관의 자세를 유지해야 반복적으로 해낼 수 있지요.” 연탄 주문량은 지난해보다 다소 늘어나고 있는 추세란다. 그 이유에 대해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기름보일러에서 연탄보일러로 교체하는 가정도 많고, 또 영업 매장이나 사무실에서도 전기요금 부담으로 인해 온풍기를 연탄난로로 바꾸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고 나름대로 분석을 했다. 연탄 주문은 가정집, 식당, 회사, 공장, 화원 등으로 다양하며 지역별로는 도심과 외곽 지역, 농·산촌, 섬마을 등에서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가끔 ‘사랑의 연탄’을 주문하는 경우에는 신 나게 달려간단다. 그동안 연탄 배달을 하면서 생긴 인연이나 에피소드가 많겠다는 생각에 몇 가지 사례를 들려 달라고 했다. “고객 한분 한분이 인연이자 에피소드입니다. 전화로 어느 동네의 어떤 할아버지, 어떤 미용실 누나라고 하면 저는 금방 알아챕니다. 연탄 주문하시는 분들은 대문을 활짝 열고 배달을 맡기시는 거라서 서로의 신뢰로 치자면 다른 배달 업종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연탄은 새까만 물건이지만 단순한 연탄이 아닌 정을 배달한다고 생각합니다. 연탄 때는 분들 대부분이 어려운 서민층이지만 잘사는 사람들보다 인심이 훨씬 좋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서울 변두리 쪽방에서 혼자 기거하는 할머니가 고생한다며 새로 밥을 짓고 뜨끈한 된장국을 끓여 주던 모습은 매년 겨울이면 생각난다고 말한다. 또 자신의 밭에서 자란 배추로 직접 김장을 담갔다고 하면서 김치를 한 통 싸 주는 아주머니, 귀한 약초를 선물하면서 힘내라고 격려하는 할머니 등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12년 세월만큼이나 많다고 했다. 하지만 씁쓸한 경험도 있다. 연탄이 더럽다고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연탄가루 묻은 신발과 옷 때문에 냉대를 받기도 했다. 어떤 계기로 연탄 배달을 했을까. 솔직하고 털털하게 털어놓는다. “청소년기에는 방황을 많이 했고 학업은 등한시해서 대학은 못 갔어요. 20대 초반까지 어영부영 이런 일, 저런 일 기웃거리다가 20대 중반쯤 시설물 유지 보수 업종에서 일을 했습니다. 철없을 때라 얼마 벌지 못한 돈도 유흥비로 많이 썼죠.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29살 때부터 연탄 배달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원래 작은아버지가 연탄 배달업을 꾸준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아버지가 병에 걸렸다. 화물차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나서서 연탄 배달 일을 도왔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몸이 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장씨도 연탄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 뛰쳐나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작은아버지를 생각하고 연탄 일 하나라도 제대로 해 보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연탄 배달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고속도로 한편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지요. 꿈에 작은아버지가 나타나서 ‘희남이 너 연탄 일 잘 배워서 열심히 벌고 아껴 써라’고 말씀하시고는 사라지셨어요. 놀라 잠에서 깼는데 잠시 후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작은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라도 꾸준히 연탄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그의 하루 일과를 들여다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연탄공장으로 출근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순번을 기다리다가 트럭에 연탄을 싣고 미리 약속된 장소로 배달을 나간다. 도로 정체가 생기는 출근 시간 때를 피해야 한 곳이라도 더 배달을 할 수 있다. 배달을 마치면 다시 공장에 와서 연탄을 싣고 배달을 나간다. 식사는 제때 해 본 적이 없다. 퇴근은 밤 10~11시다. 입은 옷은 모두 연탄가루로 새까맣다. 집에 돌아와 목욕하고 늦은 식사를 하고 거래 장부를 정리하면 밤 12시가 된다. “연탄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입니다. 연탄을 늦게 배달하면 병약한 노인이 추위에 돌아가실 수도 있고, 영업을 못 하는 분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배달 약속은 최대한 목숨처럼 지켜야 합니다. 연탄 시즌에는 잠을 편히 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착실히 돈을 벌어 지난 8월에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부인에 대해서는 “생활력이 강하고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워 주는 사람이다. 바쁠 때면 연탄 배달까지 도와준다”며 웃었다. 연탄 배달 일을 하지 않는 여름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건물 외벽, 다리 등의 금이 간 곳, 옥상 같은 곳의 보수나 방수 공사 등을 한다. 그런데 요즘 건축 경기가 나빠 사정이 좋지 않다”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연탄 배달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돈도 벌고 마음속으로 느끼고 얻은 것도 많으니까요. 겨울철이 다가오면 힘든 일이 또 시작되는구나 하는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합니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이런 말을 하죠. ‘화투패를 들면 혈액 순환이 쫙 된다’고. 연탄집게로 연탄을 들면 생기가 돌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단종의 恨과 눈물을 목격하다

    단종의 恨과 눈물을 목격하다

    지금부터 꼬박 556년 전입니다. 만 열여섯 살 단종은 한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숙부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냅니다. 딱 이맘때, 그러니까 가마솥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 어린 임금은 길을 떠납니다. 유배지까지는 700리. 얼추 하루 100리 씩 강행군했다지요. 6일째 저녁 다다른 영월 초입에서 청령포까지는 또 100리.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킨 영월땅을 하루 만에 지난 단종은 7일째 되던 날 마침내 청령포에 닿습니다. 이처럼 지난했던 단종의 영월 여정을 모티브로 조성된 길이 ‘단종유배길’입니다. 길 곳곳에 스민 단종 애사가 가슴을 적시는 데다 영월의 관광지들 또한 굴비처럼 엮여 있어 한번쯤 돌아볼 만합니다. 먼저 단종(端宗·1441∼1457)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알고 가자. 그래야 영월 풍경이 좀 더 잘 보인다. 조선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은 애초부터 불행했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1441년 7월 24일, 조선왕조실록, 이하 음력) 12세 되던 1452년엔 아버지 문종마저 승하했다. 창졸간에 왕위에 올랐으나, 3년 뒤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1457년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신분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채 6월 22일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여기서부터의 기록이 문제다. 정사와 야사가 마구 뒤섞였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일각에서 회자되듯, 왕방연이 단종 호송을 담당했다는 대목은 없다. 단종의 죽음을 다루는 부분에선 확연히 사실관계가 엇갈린다. 실록은 1457년 10월 21일 “노산군이 자결했고,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믿는 백성은 없었다. 되레 세조 타살설이 훨씬 설득력을 얻었다. 장릉지(莊陵誌)의 경우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에 매장했다”고 적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장례를 치렀고 어떤 곳에 묘를 정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실록에 견줘 훨씬 정교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초’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여기에 숙종이 ‘결정타’를 날린다. 실록에 따르면 재임 25년째인 1699년 1월 2일, 숙종은 하직 인사 온 수령을 만난 자리에서 “단종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중략/단종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중략/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라며 단종이 교살(絞殺·목을 졸라 죽임)됐다고 보던 자신의 견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야사에서 전하는 역사를 기정사실화한 셈이다. 이를 지켜보던 좌의정 최석정이 “덮어두자”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숙종이 발설한 내용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단종유배길은 6월 22일 한양을 출발한 단종이 영월 관내에 들어온 26일 이후의 행적을 따라간다. 전체 길이는 43㎞. 통곡의 길(솔치고개~주천 10.5㎞)과 충절의 길(주천~배일치 마을 17㎞), 인륜의 길(배일치 마을~청령포 15.5㎞)등 3개 코스다. 김원식 문화관광해설사는 “저물녘 영월땅에 들어선 단종은 솔치고개에서 7.5㎞ 떨어진 역골(공순원)에서 묵은 뒤 이튿날 길을 재촉해 청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100리 가까운 35.5㎞를 하루에 걸은 셈이다. 이팔의 나이긴 하나 가마솥 같은 무더위에 험한 영월의 산길, 강길을 하루 만에 걷는 건 무리였을 터다. 그러니 그 길 곳곳에 얼마나 많은 단종의 땀과 눈물, 그리고 한숨이 배어있을지는 누구라도 쉬 짐작할 수 있다. 차로 단종유배길을 돌아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명소들이 88번 지방도에 인접해 있어 승용차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들머리인 솔치고개는 원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예서 단종이 목을 축인 샘물터 어음정(御飮亭)과 다리쉼을 했다는 주천쉼터 등을 지나면 군등치(君登峙)에 닿는다. 단종이 오르다 하도 힘이 들어 이름을 물으니 호송하던 관리가 “임금이 오르는 고개니 군등치”라 했다는 유래를 가진 고개다. 고갯마루에 서면 단종이 걸어왔던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한눈에 보인다.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 인근엔 방울재가 있다. 단종이 타고 가던 말에서 방울이 떨어졌다는 전설이 담긴 고개다. 한반도 지형 전망대는 반드시 들르시라. 단종유배길과 거리는 있지만 영월의 아이콘일 정도로 절경인 데다, 군등치 등 영월의 산자락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배일치(拜日峙)는 단종이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절을 했다는 고개다. 88번 지방도 배일치터널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야 한다. 이정표는 없다. 외지인이 찾기가 쉽지 않다. 걷는 길 못지않게 차도에도 이정표를 세웠으면 좋으련만 후세의 인심이 야박하기 짝이 없다. 사실 단종유배길에 대한 정보도 박약하기 그지 없다. 영월군청 홈페이지나 관광지도 등 어디에도 전체 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단종이 어떤 경로로 험한 영월땅을 지나왔는지 볼 수 있다면 어린 임금이 겪었던 고통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고갯마루에 세워둔 단종 조각상도 아쉽기는 마찬가지. 엎드려 절하는 형태의 조각상을 가까이서 보면 기골이 장대한 무장(武將)을 보는 듯하다. 단종의 당시 나이에 적합한 체구의 조각상을 세웠더라면 좀더 사실적이고 처연한 느낌이 더했지 싶다. 단종이 아내 정순왕후를 그리며 이름 지었다는 옥녀봉과 선돌 등을 지나면 마침내 청령포(명승 제50호)다. 휘휘 돌아가던 서강이 동강과 몸을 섞기 직전 만들어둔 몰돌이동이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다. 나머지 한쪽은 험준한 육육봉으로 막혔다. 유배지로 제격인 셈이다. 단종어소 입구의 소나무가 특이하다. 담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까지 가지를 뻗었다. 어린 임금 앞에 부복하는 듯한 모습이다. 솔숲엔 국내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는 관음송(30m)이 서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지켜보고(觀) 단종의 절규를 들었다(音)는 수령 600여년의 노송이다. 솔숲 뒤편은 단종이 아내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다. 돌아 나오는 길에 왕방연 시비도 잊지 말고 찾아야 한다. 청령포 맞은편 강변 언덕에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읊었다는 시구가 새겨져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발길 예놋다’ 단종유배길은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여정은 이제부터 절정이다. 청령포에 머물던 단종은 두 달 만에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긴다.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이어 작은아버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고,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진다. 물론 실록엔 신하들이 줄기차게 사사를 외쳤지만 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 관풍헌으로 사약을 가져온 이가 왕방연이다. 그가 사약을 내밀지 못하고 머뭇대자, 공명심에 눈 먼 공생이 활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숨을 끊는다. 단종의 주검은 청령포 앞 강물에 버려진다. 후환이 두려운 탓에 장례를 치르겠다며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며 시신을 수습한 이가 영월 호장(지금의 읍장) 엄흥도다. 그는 아들 광순과 함께 영월 인근 산기슭에 단종을 묻는다. 노루가 앉아 있다 인기척에 놀라 뛰쳐나갔다는 자리다. 초겨울 날씨지만 산을 오르는 그의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젖었을 터다. 늘어진 소년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고, 세조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시종 뒷덜미에 꽂히는 듯했을 테니 말이다. 그날 밤 엄흥도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난다. 단종의 무덤은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 박충원이 찾아냈고, 숙종 24년(1698)에 장릉(莊陵)으로 명명된다.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신림나들목을 나와 88번 지방도를 타고 주천을 지나 영월 방면으로 내처 가면 된다. 영월 읍내로 곧장 가려면 제천나들목에서 38번 국도를 타는 게 낫다. ■맛집:주천면 다하누(1577-5330)에선 한우를 싸게 맛볼 수 있다. 영월읍내에선 상동식당(033-374-4059) 막국수, 청산회관(033-374-3030) 곤드레밥, 장릉에서 1㎞쯤 떨어진 장릉보리밥집(033-374-3986) 등이 이름났다. 글 사진 영월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길섶에서] 뿌리의식/최광숙 논설위원

    휴가 때 고향에 다녀왔다. 사촌 결혼식 이후 2년여 만이다. 이제 고향에 머문 시간보다 서울에 산 시간이 1.5배나 길지만 여전히 서울은 타향일 뿐이라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다. 고향 땅을 밟으니 그간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맨 먼저 입맛이 알아챈다. 똑같은 옥수수이건만 고향 옥수수가 더 차지다. 내리 사흘 점심을 감자 옹심이와 감자 송편을 먹었는데도 돌아서면 또 먹고 싶다. 오랜만의 고향길이니 일가 친척들을 찾아 뵙는 것은 빠질 수 없는 일. 지난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되신 작은어머니를 모시고 점심 식사를 했다. 이모를 비롯해 외삼촌 등 외갓집 식구들과도 회포를 풀었다. 70~80대 노인들이지만 조카들과의 만남이 반갑고 좋으셨던지 저녁 식사자리가 급기야 2차 술자리로 이어져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철이 들었는지 친척들을 뵈면 나의 ‘뿌리’를 되새기게 된다. 그들의 얼굴과 삶 속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도 만나게 되고, 나아가 현재의 나도 새삼스레 만나게 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누가 소설을 일컬어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라 했는가. 박대석의 사연은 소설보다 처절하다. 그의 작은아버지 박동석은 1951년 7월 강원도 고성지구 전투에서 20세의 나이로 전사하여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아버지 박동방은 6·25전쟁에서 미7사단 31연대 기갑대대 소속으로 경기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1950년 10월에 명예제대한 후 평생 전상의 후유증을 안고 살다 2005년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때같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혹자는 전쟁 때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3년 전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천안함 46용사 중 막내뻘인 고(故) 박정훈 병장의 아버지가 바로 그, 박대석이다.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바다, 그가 해군에 복무할 당시 출동했던 그 백령도 바다에 아들과 함께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해군에 입대하라고 적극 권유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바다에 묻고 내 탓이라며 지금도 자책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에서 만도는 아들 진수를 만났다.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고, 아들은 한쪽 다리가 없지만 그 둘은 함께 살아가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박대석에게는 다시 돌아와 ‘아부지!’ 하고 불러줄 아들 정훈이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전쟁으로 야기된 혈육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천안함 폭침 3주기가 지나고 조국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잔인한 6월’이다. 천안함 46용사의 가족들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가족들이 그들의 장한 아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유족들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희생이 점차 국민들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안타까움도 그 못지않게 유족들을 슬프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박대석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박정훈 병장의 모교인 대광고등학교에서 ‘천안함 순국 추모비’를 건립해 추모비 제막식을 갖기로 했다. 조국을 수호하다 순국한 박정훈 병장과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고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의 보훈의식이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일제 강점하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피를 흘렸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서 우리의 젊은이들뿐 아니라 유엔 참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이들의 피흘림과 숭고한 희생 위에 지금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희생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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